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 록펠러는 왜 소련을 지원해서 베트남 전쟁을 지속시켰나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1/11/26 04:21

http://blog.naver.com/miavenus/70125031670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17 : 록펠러는 왜 소련을 지원해서 베트남 전쟁을 지속시켰나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1/11/26

   

   

오늘날 세계 혁명의 중심은, 한반도 서울 인드라에게 있다.

   

인드라, 반드시 혁명을 해내고야 말 것이다.

   

전 세계 인민들이여!

   

떨쳐 일어나 인드라와 함께 세계 혁명을 즐기자~!

   

   

1. 인드라, 액땜하다

   

인드라가 오늘 또 다시 액땜을 했다. 신, 혹은 수호천사에게 고마움을 드린다. 결정적인 순간마다 인드라를 지켜주는 것 같다. 하마터면, 사람을 치일 뻔했다. 아줌마가 술에 취했는데, 하필이면 인드라 차량 조수석 옆에 쓰러졌던 것이다. 조수석 쪽이 벽쪽이라 인드라가 이를 인지하지 못하고 차를 직진으로 1미터 가량 후진시키는데, 목격자들이 갑자기 차를 세우라는 것이다. 인드라는 차를 정지를 시킨 뒤 무슨 일이냐고 하니 취객이 쓰러져 있다고 했다. 놀란 인드라는 뛰쳐 나와 살펴보는데, 불행 중 다행으로 차량이 취객을 치인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서 목격자들에게 혹 차량이 취객을 건들이지 않았느냐 하니 그건 아니라고 한다. 다만, 차 진행 방향을 보니 후진했다 핸들을 꺽은 뒤 전진할 때 취객을 칠까봐 정지시킨 것이라고 했다. 목격자는 여성 두 분이셨는데, 정말 고마웠다. 잔다르크요, 나이팅게일이 아니겠는가. 남의 일인데도 적극 나서주셨다. 증인이 필요하다 여기면 연락하라면서 연락처까지 남겨주셨다.  아줌마를 깨워서 일으키니 아줌마가 술에 취해서 왜 날 깨우냐, 너 누구냐 욕설을 한다. 해서, 마침 인근에 경찰이 있어서 경찰을 불렀는데, 이 경찰, 아니, 짭새 색희가 문제였다. 손이 안 아프냐는 식으로 유도 신문을 해서 아줌마가 손이 아프다는 발언을 이끌어낸다. 아줌마 손에 바퀴 자국이 있다나~! 이  짭새 색희, 무진장 웃기는 넘이다. 하여간 이런 짓거리해서 국물 좀 얻어먹으려고 하는 수작 같이 보였다. 보호자 전화해서 오라고 한다. 구급차도 오라고 했다. 헌데, 상황은 묘하게 흘러갔다. 구급차가 왔다. 구급차 대원이 보더니 이 정도면 뭐, 하더니 저희 그냥 갑니다, 하고 간다. 더 웃긴 건 아줌마다. 아줌마가 자기는 그만 집으로 가겠단다. 짭새가 가지 말라고 한다. 아줌마랑 짭새가 싸운다. 이 넘의 나라는, 이 넘의 정치는, 이 넘의 경찰은, 넌 누구냐, 씨발아, 하면서 왜 집에 가겠다는데 못 가게 하는 게야, 개색희야, 이러고 싸운다. 짭새가 말한다. 아줌마가 차에 깔렸잖아? 그러니까 아줌마가 내가? 나 차에 안 깔렸어? 짭새는 아줌마 다쳤다고 하고, 아줌마는 안 다쳤으니 집에 가겠다고 하고. 아줌마는 인드라더러 인드라에게 폐 끼치고 싶지 않아요. 우리 왜 이렇게 집에 못 가고 이래야 되나요? 그러는데, 짭새는 아줌마 술 취했어, 이 말만 반복하고. 해서, 인드라가 그럼 보호자가 올 때까지 기다립시다, 이렇게 이야기했다. 그러다가 아줌마 남편이 왔다.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니 남편도 대략 사정을 짐작한다. 그래도 모르는 일이다. 이만 원 가량을 택시비로 찔러준 뒤 연락처를 받았다. 다른 경찰이 왔다. 제대로 된 경찰들이다. 사정 이야기를 듣고 아줌마에게 묻는다. 차에 치이셨나요? 아줌마 말한다. 아니요? 네. 아줌마는 남편과 함께 택시를 타러 간다. 경찰이 말한다. 저희들이 왔고 현장 확인을 했기 때문에 인드라님은 이후 혹시라도 있을 뺑소니 혐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십분 뒤, 마지막으로 신고 접수한 보험사 직원이 왔다. 사정을 다 들은 뒤 보험사 직원 이야기는 이렇다. 아무리 술에 취했더라도 바퀴에 손이 깔리면 비명이든, 무엇이든 지르게 되어 있다. 더군다나 인드라 차량은 엄청 무거운 SUV 차량이다. 다만, 사정이 이렇더라도 나이롱뽕 신고 접수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렇더라도 안심하시라. 보험사에 맡기면 된다.

   

돈이 문제가 아니다. 인드라가 고의가 아니지만 사람을 칠 뻔했다. 다행인 게다. 목격자 분들이 아니었으면, 인드라가 그 여성을 치일 뻔한 것이다. 하늘이 도왔다. 인드라가 살면서 몇 번이나 이런 구원을 받는 것 같다. 정말 죽을 각오로 자살 시도를 했는데 살아나거나, 정치적으로 매장당할 뻔한 때에도 살아남았다. 인드라가 잘 나서가 아니다. 못 난 인드라를 신이든, 수호천사든 하던 역할 계속하라고 하는 것 같다. 이번 시련은 인드라가 며칠간 인월리를 쓰지 않는 게으름을 묻는 듯하여 인월리를 쓰고자 한다. 사실 인드라가 인월리 안 쓰는 날이 편하다. 푹 쉬고, 푹 잔다. 허나, 인월리 쓰는 날은 하루에 3~4시간 밖에 못 잔다. 마음을 늘 행복하게 하려고 노력하긴 하지만, 때로는 매우 힘들다. 왜 인드라가 이런 고생을 사서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인드라한테 안 좋은 사건이 일어나는 것 같아서 참 그렇다. 열심히 사는 수밖에 없다.

   

인드라가 국유본론을 쓰는 것이 신의 뜻이다, 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인드라가 솔직하게 말하는데, 인드라가 국유본론을 쓰는 게 인드라 개인으로서는 엄청난 손실이다. 여러분들이 오해할 것 같은데, 인드라가 국유본론을 쓰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훨씬 경제적으로 이득이었을 것으로 확신한다. 인드라가 국유본론을 쓰면서부터 인드라 인생이 참 힘들다. 용한 점쟁이 왈, 인드라가 글을 쓰지 않으면 부자가 될 것이라고 했다. 허나, 글을 쓰면 쓸수록 부가 축나고 생명이 깍인다 했다. 인드라 소망은, 록펠러보다 딱 한 살 더 오래 사는 것이다.

   

2. 후르시초프는 왜 록펠러와 만나야 했던 것일까

   

부동산업자이자 고액 강연료로 악명이 높은 국유본 첩자, 노엄 촘스키는 국유본 좌익 일당과 함께 왜 올리버 스톤의 JFK를 공격해야만 했을까. 노엄 촘스키, 교수를 한 이력이 불투명한 만큼 국방부 프로젝트를 따낸 것 자체가 미스테리인 게다. 인드라가 보기에, 국유본 앵무새 시스템 하위 기계라고 본다. 하면, 노엄 촘스키라는 국유본 기계가 왜 JFK를 공격하라는 지시를 받은 것일까.

   

올리버 스톤 JFK는 케네디 음모론으로 유명한 짐 마스 저작을 원작으로 했기 때문이다. 하면, 짐 마스가 대체 무엇을 주장하길래 국유본 수첩왕자, 노엄 촘스키가 발끈했을까? 

   

 짐 마스의 다크 플랜을 잠깐 살펴 보자.

   

"1961년, 삼각위원회의 창립자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미국이 동유럽을 경제적으로 원조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대외관계>>에 기고했다. 데이비드 록펠러는 1964년에 모스크바를 방문, 그런 거래에 대해 찬성한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그해 9월 12일자 <<시카고 트리뷴>>에 따르면 "체이스맨해튼은행 사장인 데이비드 록펠러는 존슨 대통령을 만나 러시아 지도자 니키다 후루시초프와 면담한 내용을 보고했다. 두시 간에 걸친 만남에서 후루시초프는 '미국과 러시아의 교역을 늘려야 한다'면서 미국이 러시아에 대한 장기차관을 연장해 주길 바란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록펠러는 전했다."

   

   

   

http://blog.naver.com/zerocando/120129960858

   

그간 음모론이 간과한 이 당시 소련 상황을 잠시 살펴보자.

   

   

http://www.necrosant.net/zbxe/17969

   

당대 소련 후르시초프 고민은 무엇이었나.

   

하나, 국유본론에서는 소련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지닌 이를 서기장이 아니라 외무장관으로 본다.

   

이유는 국유본, 혹은 빅터 로스차일드와의 연락 관계 때문이다. 유태인 리트비노프, 몰로토프, 그로미코, 세바르나제 등. 이들 임기가 서기장 임기보다  더 길다.  이런 문제는,  전 세계에서 오직 인드라만 주장하는 것이니 여러분들이 심사숙고해야 한다. 특히, 인드라가 리트비노프에 중점을 두어 인월리를 전개했던 것이 특징인 게다. 스탈린에 이은 후루시초프 고민이 무엇이었나. 스탈린이나 후르시초프나 빅터 로스차일드에 충성하였으므로. 빅터 로스차일드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따르는 것이 후르시초프 권력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해서, 나온 것이 '평화공존론'이었다.

   

당대 빅터 로스차일드는, 로스차일드 가문 정보기관을 활성화시켜 이스라엘 모사드를 만들었고, 자신의 캠브리지 친구들을 모두 모스크바에 보내 KGB를 장악했으며, 영국의 식민지 미국 CIA에는 자신의 심복들을 파견했으며, 무엇보다 그 자신 빅터 로스차일드는 MI5에서 무소불위의 영향력을 발휘했고, 전후에는 MI6까지 자신의 영향력을 확산시켰다.

   

이때, 빅터 로스차일드의 세계 체제는 어떠한가. 최고위층에는 빅터 로스차일드 황제가 있다. 하고, 300인 그룹이 있었다. 허나, 로스차일드 가문은  300인 위원회를 약화시키기 위해 지속적으로 위원회 확대를 꾀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로마 정치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황제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로마 원로원 의원 숫자를 늘렸던 것이다. 로마 원로원 의원 숫자를 늘리면 그 의원들은 대체로 개혁 황제를 지지할 것이 아니겠는가. 오늘날 이는 공무원과 깊은 관련이 있다. 대통령이 등장하면 늘 이야기하는 것이 관료를 줄이겠다, 공무원 수를 줄이겠다는 것이다. 허나, 왜 늘어날까. 이는 관료를 장악하기 위해 대통령이 관료 숫자를 오히려 늘리기 때문이다. 그 아무리 부패 문제를 들어서 관료를 퇴장시키기에는 관료가 지닌 정보가 만만치 않으니 새로운 관료를 뽑아 견제하려는 것이다.

   

아무튼, 최고위층에는 빅터 로스차일드가 있고, 원탁회의가 있었다. 하고, 300인 위원회가 있었는데, 동인도회사에서 유래한 300인 위원회를 약화시키기 위해 로스차일드 가문은 영국 왕립국제문제연구소와 CFR을 1919년 파리평화회의 이후 만든 것이다. 잊지 마시라. 쪽수를 늘린다는 것은 권력 약화이다.

   

한국 국회의원이 문제가 많다 하여 국회의원 수를 현행보다 줄이자는 것은 그 어떤 명분에도 수구반동적이다. 반면, 국회의원 수를 늘이자는 것은 그 어떤 명분에도 희망이다. 해서, 인드라는 현행 국회의원 수를 299명에서 777명으로 늘이자고 제안한 바 있다.

   

하여간, 흥미롭게도 후르시초프는 1964년 록펠러 방문 이후 실각한다.

   

둘, 소련 경제는 소련 체제 해체로 갈 정도로 위기였다.

   

바쿠 유전 지역 로스차일드 기업에서 알바를 한 탓에 늘 국유본 간첩 혐의를 받았던 스탈린은 농업과 경공업을 도외시하고 중공업 우선 정책을 썼다. 이는 누가 봐도 전쟁 준비였다. 반면, 후르시초프는 우크라이나에서 농업 생산의 어려움을 생생하게 겪었던 것이다. 해서, 후르시초프는 농업 생산을 누구보다 중시했다. 허나, 이는 모택동도 동시에 느꼈던 대목이었다. 둘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외부 지원이 끊겼다는 것이다.

   

러시아 혁명 이후 록펠러 회사는 독점적으로 소련과 교역을 했다. 미국과 소련의 교역을 통해 소련 경제는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허나, 이런 정책이 스탈린 사후 끊긴 것이다. 해서, 등장한 것이 후르시초프의 평화공존론이었던 게다. 소련 체제 유지를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이 서방 자본이었기에. 즉, 로스차일드 자본이었기에.

   

그래도 얼마나 어렵나를 잘 느끼지 못할 것이다. 이때, 등장한 이가 독일 에르하르트 재무장관이다. 에르하르트는 빅터 로스차일드의 케인즈 학파와 달리 하이에크 자유주의 학파 경제 정책을 실시하여 독일 경제 부흥을 낳게 한 장본인이었다. 이때, 에르하르트 자유주의 정책에 반해 노조와 정치권이 일제히 총파업으로 맞섰지만, 에르하르트는 이겨내었다. 예서, 에르하르트가 세상을 바꿀 수 있으리라는 것은 순진한 생각. 그 뒷 배경을 짐작할 수 있는데, 이는 빅터 로스차일드에 대항한 최초의 국유본 귀족 반역 사례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케네디도 독일 방문한 직후 에르하르트 감세 정책에 감동했던 것이다.

   

하면, 에르하르트는 어떤 반역 정책을 내놓았나. 당대 소련 경제가 어렵다는 것을 간파한 에르하르트는 국유본에게 담대하게 제안했다. 서독이 소련 경제를 책임지겠으니 대신 독일 통일을 시켜달라고 제안한 것이다. 모두가 순진하다고 웃었다. 허나, 모두가 황당하다고 웃은 것이 아니다. 1961년, 브레진스키가 빌더버그에서  미국이 동유럽을 지원해야 한다고 했으니까.

   

셋, 후루시초프, 국유본 이익을 위해 물러나다

   

국유본은 국유본 이익을 위해서 연합군이던 소련을 적국으로 만들어야 했다. 소련을 적국으로 만들기 위한 방편 중 하나가 스탈린을 히틀러와 동격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 작업을 위해 국유본은 그간 국유본과 열심히 협력하던 스탈린을 제거하고 후르시초프를 옹립한 것이다. 해서, 후르시초프의 평화공존론까지 끌어낸 이후로 국유본은 냉정하게 후르시초프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던 것이다. 사냥개는 또 다른 사냥개를 위한 제물이므로.

   

무엇보다 당대 국유본 사업 핵심은 베트남 전쟁이었다. 이때, 권력 구도는 최고위급으로 빅터 로스차일드와 300인 위원회가 있었고, 하위 한편으로는 CFR과  모건, 록펠러, 케네디가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후르시초프, 모택동이 있었던 것이다. 후르시초프가 공산권 혁명사령부라면, 모택동은 아시아 혁명사령부인 게다.

   

헌데, 중소분쟁이 발생했다. 이념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핵심은 간단하다. 1958년 소련이 약속한 중국 원조 계획을 소련이 이행하지 않아서다. 도와주겠다고 한 넘이 침묵하면 아쉽잖아. 처음에는 중국이 조용히 소련에 항의했는데, 소련이 지속적으로 병쉰 색희들아, 나도 돈 없어, 제발, 재촉하지 마, 라고 싸인을 보내자 중국이 그럼 우리끼리 한다? 라고 소련에 대항한 것이 중소분쟁인 게다.

   

국유본은 이 문제를 풀어주어야 베트남 전쟁을 지속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했다. 일, 중소분쟁의 원인, 후르시초프를 죽여라. 이, 후르시초프가 막판에 미친 척하고 에르하르트 주장을 받아들일 수 있다. 미연에 방지하자. 삼,  중국을 새로운 변수로 받아들여 새로운 전쟁은 중동전쟁으로 집중한다.

   

3. 고 딘 디엠은 과연 부패했나?

   

베트남 전쟁을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죄다 고 딘 디엠이 부패정권이라고 나온다. 과연 그럴까. 의심이 든다. 고 딘 디엠은 어떤 인물인가.

   

http://ko.wikipedia.org/wiki/%EC%9D%91%EC%98%A4%EB%94%98%EC%A7%80%EC%97%A0

   

 고 딘 디엠을 한마디로 평가하면, 이승만과 유사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이전 왕조의 충신이었으면서도 바오다이와는 불화하였다. 바로 이 차이가 고 딘 디엠이 바오다이보다 훨씬 외교적 능력이 뛰어났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고 딘 디엠은 독실한 가톨릭 신도였다. 일설에는 신부가 되려고 할 정도여서 독신으로 지냈다는 것이다. 헌데, 이런 고 딘 디엠을 택한 이는 누구일까. 국유본이다. 미국이다. 그런 미국이 왜 고 딘 디엠을 내쳤을까.

   

결과적인 이야기일 수 있다. 당대 월남군이 당장 월맹군을 격파할 정도의 실력이었다. 고 딘 디엠은 솔로일 만큼 청렴했다. 전쟁이 조기 종료할 위험이 컸다. 고 딘 디엠 정권을 무너뜨려야 베트남 전쟁이 지속할 수 있었다. 

   

냉정하게 말해, 호치민과 고 딘 디엠 차이는 없다. 다만, 시대가 호치민을 선택한 것일 뿐.

   

4. 호치민은 과연 자주적인 인물인가?

   

대개의 베트남 전쟁을 이야기하는 이들은 북베트남을 목숨을 바쳐 지켜야할 민족주의 정권으로, 남베트남을 부패와 사대로 쩌들은 정권으로 말한다. 이것이 사실인가?

   

호치민과 고 딘 디엠 모두 지배층 인물로 태어났다. 허나, 차이가 있다면, 호치민은 공산당을 연줄로 잡았다는 차이이다. 호치민이 국제 사회에 모습을 드러낸 해는 1919년 파리강화회의였다. 이 때, 호치민은 국유본 관심 대상이 된다.

   

이후, 호치민은 충직한 모스크바 시녀였다. 모스크바에서 지령한대로 당을 꾸렸기 때문이다. 허나, 인도차이나 전쟁 때에 이르러 모스크바 발언권이 약화하는데, 이때 호치민을 지원한 세력이 다름 아닌 미국이었다. 호치민은 미국 OSS의 협조하에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프랑스를 이길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호치민이 남북 분단 협정에 조인하는데, 전쟁에서 승리한 호치민이 왜 굴욕적인 조약을 받아들였나 할 것인데, 이유는 간단하다. 국유본이 분단을 원했기에.

   

인드라는 호치민을 좋아한다. 그의 유교적 이력을 존중한다. 또한, 그의 유언을 존중한다. 그는, 그가 원한 대로 근대 러 레이였다.

   

허나, 호치민 영웅화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특히, 남한 주사파의 호치민 찬양에는 건대 항쟁으로 구속한 인민으로 말한다면 정신과적 치료가 필요하다고 강조하는 바이다.

   

국유본은 베트남 전쟁 중 기상천외한 작전을 펼쳤다.

   

한국전쟁 때 압록강 이북 중국 진지를 파괴할 수 없다는 지령은 약과다.

   

국유본은 베트남 전쟁 때 월맹군에게 수시로 미군 작전을 알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특정한 지역을 아예 폭격을 금지했었고, 북베트남군이 공세를 펼칠 수 있도록 미군 뿐만 아니라 연합군에게 각종 금제를 가했다.

   

이것뿐일까?

   

미국에서의 반전 운동이 또한 이 뻔한 전쟁 변수를 변동시켰다. 여기에 찌질이 노엄 촘스키가 있는 것이다. 흥행을 위하여~!

   

인드라는 강조하겠다.

   

미군은 1975년에 월남에서 철수했다. 이때, 소련 태도가 무엇인지 아는가? 굉장히 아쉬워했다는 것이다. 통일하지 않은 것이 낫다는 것이 기본적인 소련 태도였다. 왜? 전쟁을 지속해야 그만큼 소련에 국유본 물자가 지원하니 소련 정권이 안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시기 소련 정권이 역대 최고로 안정화한 시기였다. 베트남 전쟁 이후 소련 정권은 정권 유지에 혈안이 되었다.

   

5. 호치민의 토지 개혁 실패는 국유본을 당황시켰다

   

일반적으로 농민을 위한 토지 개혁 정책은 농민의 환영을 받기 마련이다. 허나, 호치민의 토지 개혁 정책은 오히려 농민의 반발을 일으켜서 농민 혁명을 일으켰다.

   

이 대목에서 아시아 토지 정책이 유럽 토지 정책보다 앞서 있는 정책인지를 강조해야 한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서구 일변도, 국유본 일방적인 지식만을 토대로 베트남 전쟁을 이해하고 있다. 여러분은 스스로 단 한 번이라도 세뇌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늘 서양은 진리이고, 동양은 미신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과연 그런가? 국유본 침략에 시달렸던 인도에서는 자본주의자와 공산주의자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호치민은 모스크바가 지령한 대로 토지 개혁을 단행했다. 허나, 농민 반란에 직먼했다. 왜인가.

   

이는 러 레이 왕조로 소급한다. 한무제 이래로 월남은 중국에 대항하는 농민 반란이 끊이질 않았다. 이때, 15세기 러 레이가 등장한다. 15세기 러 레이는 베트남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전투에서는 늘 패하나 끝내 전쟁에서는 이긴다. 이후 러 레이는 당대 주류 종교인 불교보다 유교를 바탕으로 한 국가를 내세우지만, 유교가 지배 종교로 작동하지는 않는다.

   

이때, 러 레이 왕조가 베트남 남부를 발견한 것이다. 이 시기, 베트남 남부를 보니 공전이 없었던 게다. 예서, 공전이란 무엇인가. 오늘날 사회보장책이라 할 수 있는 정책이다. 마을 소유인 이 공전에서 난 수익으로 각종 사회보장책을 실시하는 것이었다.

   

헌데, 베트남 남쪽에서 공전이 없다? 왜? 이 시기에 베트남 남쪽은 노동력 절대 부족이었다. 해서, 이 시기 베트남인들은 지주를 맘대로 선택할 지경이었다. 그뿐이랴. 땅을 소유하면 세금을 내야 하고, 군대에 가야 했다. 반면, 소작농이면 면제였다. 해서, 아무도 땅을 소유하지 않으려 했다.

   

헌데, 북 베트남에서 교과서에서 시키는 대로 지주는 무조건 반동이라는 도식으로 토지 개혁하니 결과는 어떠한가.

   

북 베트남에는 경주 최씨 부자처럼 착한 지주들이 많았다. 무엇보다 조만식 선생처럼 호치민 정권이 항프랑스, 항일 지주까지 반동으로 내모니 북 베트남에서 반란이 발생했다. 오늘날 역사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숨긴다. 왜? 국유본이니까. 친일 조중동이나 쪽발 한경오프엠이나 한통속이니까.

   

호치민의 토지 개혁은 베트남 실정을 고려햐지 않아 대실패였다. 반면, 고 딘 디엠의 토지 개혁은 현실을 반영한 토지 개혁이었다.

   

바로 여기서 문제인 게다. 베트남 전쟁은 지속해야 한다. 허나, 호치민 정권이 위태롭다. 반면, 고 딘 디엠 정권은 토지 개혁에서 승기를 잡았다. 남베트남 정권의 일방적 승리는 결코 국유본이 원한 그림이 아니다.

   

6. 베트남과 한국의 미래는 한월공화국

   

베트남인과 한국인은 안다. 우리가 지금껏 억압을 당해온 역사가 누구 때문인지를. 우리는 충분히 저항적이었다. 대 중국과 관련하여 역사에서 월남과 한반도인 이외에 중국 역사를 뒤흔들 역사를 지닌 족속은 몽골밖에 없다.

   

허나, 우리는 반도의 역사. 부존 자원도 별로 없다. 소련이 인도차이나에 관심을 둔 건 순전히 국유본 때문이듯, 이 지역에서 그 어떤 세력 확대를 원하지 않았다.

   

동시에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지정학적 지위를 정확히 알고 먼저 이야기하는 것도 그들이라고.

   

그들은 언제나 먼저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세상과 소통한다.

   

그때, 그들을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는 것은 자유이되, 그 자유의 대가는 혹독한 듯싶다.

   

인드라는 강조한다.

   

국유본이 말하는 것을 진정 심사숙고하라.

   

하고, 인드라 이야기를 정말 진지하게 들어라.

   

국유본과 인드라는 세상의 진리에 대해서 투쟁하고 있다.

   

여러분이 이 투쟁에서 낙오한다면, 길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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