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18 : 빅터 로스차일드, 펜타곤 문서, 베트남, 케네디, 데이비드 록펠러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1/11/27 01:43

http://blog.naver.com/miavenus/70125101773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18 : 빅터 로스차일드, 펜타곤 문서, 케네디, 데이비드 록펠러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1/11/27

   

인드라 이야기는 전 세계에서 오직 인드라에게서만 들을 수 있다.

국유본과의 전쟁에서 운때가 맞지 않아 인드라 패배로 귀결하겠지만,

역사는 인드라를 반드시 기억할 것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백 년 뒤에 세상은 지금과 전혀 다른 세상일 것이다.

- 인드라 혁명 원년 2011년 11월 27일

   

히로세 다카시의 '제 1권력'이라고 있다.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었다. 책을 보내드릴 터이니 서평 부탁한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인드라는 이런 쪽발찌라시 한걸레 같은 책장사를 혐오한다. 그 출판사가 국유본 간첩 회사라고 단정짓지는 않겠다. 지금 인드라한테 많은 분들이 자신의 저서나 혹은 인드라가 읽어주었으면 하는 책들을 보내주셨는데, 어떤 건 인용하고, 어떤 건 인용하지 않고 있다. 허나, 인드라가 언젠가는 말할 것이다. 이런 조건 없는 책 선물은 받는다. 허나, 대가성이 있는 건 거부하겠다. 이를 전제하고, 다른 음모론 저자처럼 히로세 다카시도 국유본 첩자라고 인드라는 보고 있다. 잊지 마시라. 세상에 나온 음모론 책자는 대부분 국유본이 만든 것이라고. 짐 마스는? 그도 예외일까~! 뉴욕타임즈 칼럼니스트였거든~! 아무튼 관련 책을 읽어보았는데, 입문서로 괜찮은 편이다. 다만, 이 책은 의도를 지니고 있다. 이 책이 나올 80년대 중반은 빅터 로스차일드와 록펠러간의 아마겟돈 전쟁이 있었다. 이런 시기에 히로세 다카시가 로스차일드를 쑥 뺀 채 모건과 록펠러만 공격한 이유는 무엇일까~! 히로세 다카시, 이 씹색희는 로스차일드 간첩이었던 게다~ ㅋㅋㅋ 그러다가 빅터 로스차일드가 죽으니까 그제서야 자신의 오류를 인정한다는 쓸 데 없는 헛소리를 지껄이면서 붉은 방패란 책을 낸 게다. 하면, 왜 이때 쪽발이 색희들이 난리부르스였던 것일까. 쪽발이 색희들은 자신들을 오늘날 먹고 살게 해주신 분이 로스차일드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게다. 지금도 쪽발이 주류는 로스차일드 파이다. 즉, 노비네파이다. 해서, 노비네파 미쓰이 혹은 미쓰이스미모토 계열이 일본 중심이다. 지난 번 일본 전범 기업에서 왜 미쓰이가 빠진 것인지를 잘 생각해야 한다. 타격 대상은~! 그렇다. 뉴라이트파 미쯔비시인 게다. ㅋㅋㅋ. 일본이 흥한 건 오직 로스차일드 어르신이라고 생각했던 게다. 그런 로스차일드 가문이 록펠러 가문에게 밀리자 일본이 망하는 것 아니냐 싶어서 굉장히 불안해했던 것이다. 이때, 쪽바리 나라에서 졸라 음모론 책자들 많이 나왔다. 하고, 다른 음모론 책자와 달리 이 책 서평하는 언론사 잘 살펴야 한다. 인터넷에도 다른 음모론 책자는 멀리 하면서 이 책만 들입다 파는 병쉰색희들이 있는데, 이 병쉰색희들도 주의해서 보아야 한다. 하여간, 쪽발이 색희들, 특히 원자폭탄 반대 운동가 뭐 이런 쪽발이 색희들은 99% 이상 국유본 첩자라고 인드라는 보고 있다. 하고, 쪽바리 반전반핵 데모 따위에 참여하러 한국 병쉰색희들이 가는데, 이 색희들 국유본 간첩 교육받으러 간다고 인드라는 보고 있다 ㅎㅎㅎ.  하여간 이런 점을 감안하고, 쪽발이 색희 책을 읽을 필요가 있다. 단, 적의 책을 읽을 때는 긴장하고 읽어야 한다. 진실 78 : 거짓 22을 잘 섞어놓았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펜타곤 문서를 폭로한 대니얼 엘즈버그는 원조 골드만파~!

   

대니얼 엘즈버그하면 잘 모를 것이다. 허나, 워터게이트와 관련이 있는 인물이라고 하면 어엇? 할 것이다.

   

"시카고 출생. 하버드대학교를 졸업하고 케임브리지대학교에 유학, 게임이론을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랜드 연구소(RAND:Research and Development Corp.)·대통령 직속기관(Executive Office of the President)·국무성에서 정책연구를 하였다. 1965년부터 베트남 근무를 통하여 미국의 베트남정책에 비판적 자세가 되어 1971년 베트남전쟁 개입 과정에 관한 국방성의 비밀문서를 폭로함으로써 반전(反戰)을 여론에 호소하였다. 이후, 군축(軍縮)에 관한 연구에 종사하며, 평화운동에도 참가, 반핵(反核) 데모의 선두에 섰다가 체포되기도 하였다. 여러 평화단체로부터 상을 받았다. "

[출처] 대니얼 엘즈버그 [Daniel Ellsberg ] | 네이버 백과사전

   

http://en.wikipedia.org/wiki/Daniel_Ellsberg

   

이름에서 풍기듯 유태인 집안이되, 유대교에서 사이언스 종교로 바꾸어서 명색은 유태인이 아니다~! 본론으로 가자. 대니얼 엘즈버그가 폭로한 '펜타곤 문서'는 베트남 전쟁 이면을 폭로한 문서이다. 해서, 한국에서 베트남 전쟁에 대해 비밀을 말하기라도 하는 양 떠들어대는 기사들이나 글들 대부분은 사실 '펜타곤 문서'를 번역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단, 록펠러가 소련에 돈 대준 것 이런 이야기는 없다~! 엄청난 폭발력을 지녔기에 오늘날 뉴라이트 어산지 위키리크스와 비교를 곧잘 하는 것이다.  왜 엄청난 폭발력인가. 짜고 치는 고스톱이든, 아니든, 닉슨이 대니얼 엘즈버그가 다니던 정신과 병원을 도청하는 데서 워터게이트가 진행하였으니까.

   

하면, 대니얼 엘즈버그는 누구냐. 하버드 대학을 나오고 케임브리지 대학 유학했다. 1973년 이전까지 하버드 대학을 나왔다면, 친영국파라고 보면 된다. 여기에 로즈 장학생이면 무조건이다. 1973년 이전까지 미국은 영국의 식민지였으니까. 해서, 1973년 이전까지 미국 정치, 경제, 문화 모든 면에서 영국적인 것이 미국을 압도했다. 1973년에 빅터 로스차일드가 영국은 보통국가가 되었다라고 선언한 것을 잘 유념해야 한다. 국유본 귀족들이 대니얼 엘즈버그를 택한 건, 그가 유태인인 데다가 케임브리지 대학을 나왔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빅터 로스차일드잖아~! 잔인하게 복수하는 법이란 빅터 로스차일드와 같은 유태인, 같은 대학 출신이어야 효과가 만점이지 않겠는가. 아~ 이런 이야기는 대체 전 세계 인드라 말고 누구에게서 들을 수 있다는 말인가^^!

   

   

진도 나가자. 마이클 매클리어에 따르면, 대니얼 엘즈버그는 대학 때 헨리 키신저 제자였으며, FBI 국장 후버가 대니얼 엘즈버그 장인 친구였다. 랜드 연구소에서 근무했다. 헌데, 데니얼 엘즈버그가 골드만파 뉴욕타임즈에 문서를 전달하기 전에 먼저 전달한 이가 있으니 풀브라이트이다.

   

풀브라이트는 누구인가.

   

"미주리주(州) 출생. 농업재벌의 아들로 태어나 아칸소대학교를 거쳐 로즈장학생으로 영국 옥스포드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였다. 귀국 후 모교에서 법학교수로 재직하면서 19391941년 그 대학의 총장을 지냈다. 1942년 초선 하원의원으로 정계에 들어가자마자 국제연합 창설의 모태가 된 국제평화유지기구의 창설을 제안하였으며, 1945년 상원에 진출하여 1974년까지 상원의원을 지냈다. 1959년 이후 15년간 상원 외교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미국의 대외정책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또한 미국정부가 가지고 있는 잉여농산물을 외국에 공매한 돈을 그 국가와 미국의 문화교류, 특히 교육교환계획에 충당할 수 있도록 제안한 '풀브라이트법(法)에 의거, '풀브라이트장학금'을 확립함으로써 학자·학생의 국제교류를 위한 풀브라이트 교류계획의 창시자로서도 유명하다. 한국에는 1960년 그 지부가 설치되었다. 풀브라이트장학금을 받고 유학한 전세계의 지식인들은 1995년 현재 120여 개국 10여 만 명이며, 한국에도 1,000여 명에 이른다. "

<div class="autosourcing-stub-saved"> <div>[출처] 풀브라이트 [James William Fulbright ] | 네이버 백과사전</div></div>

   

빌 클린턴과 록펠러, 월마트의 공통점은? 아칸소^^!

   

풀브라이트는 남부 미주리주 농업 재벌 아들이다. 이는 노예민주당 정통파라는 이야기다. 종교가 성공회나 국교회이면 더더욱 정통파! 풀브라이트가 로즈장학생이다? 초선 의원으로 들어가자마자 국제연합 창설 모태가 된 국제평화유지기구 창설을 제안했다? 1945년에서 1974년까지 상원의원이다?

   

풀브라이트의 정체성은? 원조 골드만파로 분류할 수 있는 것이다. 즉, 빅터 로스차일드와 국유본 귀족이 함께 할 때는 다같이 빅터 로스차일드파, 혹은 빌더버그파였지만, 빅터 로스차일드와 국유본 귀족이 갈등을 빚자 빅터 로스차일드와 국유본 귀족 사이에서 중립적으로 변모한 것이다.

   

자, 이때, 왜 대니얼 엘즈버그는 골드만파 뉴욕타임즈 폭로 전에 풀브라이트에 먼저 사본을 보냈나.

   

간단하다. 국유본 귀족 의중을 물어보기 위함이었던 게다. 풀브라이트가 사본을 받고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것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 대니얼 엘즈버그의 쿠테타를 묵인한다는 것이다. 해서, 대니얼 엘즈버그는 쿠테타에 나서는 뉴라이트 전두환 장군의 심정으로 뉴욕타임즈 기자에게 원고를 보냈던 것이다. 

   

이제부터 빅터 로스차일드에 대한 쿠테타, 혹은 혁명을 시작한다!!!

   

하면, 빅터 로스차일드에 대한 국유본 귀족 쿠테타가 이번이 처음이었나? 아니다.

   

1964년이다. 1963년과 1964년은 1947년, 1973년만큼이나 중요한 해이다.

   

가령 빅터 로스차일드는 1963년까지 북한 김일성에게 군사력을 키우지 말 것을 지시했다. 419때 남침하지 못한 걸 아쉬워했다는 건 애비가 아편을 팔던 쪽발이인 김일성의 구라다. 허나, 1964년부터 빅터 로스차일드는 북한 김일성에게 군사력을 키워도 된다는 승인을 한다. 이후, 김일성은 미친 듯이 군사력을 키웠는데, 이것이 오늘날 북한 경제 패망의 결정적인 원인이다. 물론 요즘은 국유본이 다시 북한 경제를 키우고 있지만. 가령 2007년 영국에 북한 광산기업이 상장되어서 엄청난 돈을 북한이 벌었는데, 이 돈으로 지금 평양 정권이 평안도에 돈 엄청 쓰고 있는 것이다. 아는 사람만 알겠지만. 헌데, 광산하면 로스차일드이다. 세계 광산업계는 로스차일드가 쥐고 있는데, 최근 드비어스 예를 보듯, 차츰 록펠러가 진입하고 있다. 아무튼, 인드라는 이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평양 인민이라도 배불러야 중산층 수준의 민주주의 의식을 갖추고 뽀그리나 현대 성형예술의 총아, 정은이한테 대들어서 평양 탱크쇼를 보여줄 수 있으니까.

   

1964년에는 후르시초프가 실각하고, 통킹만 사건이 일어났다.

   

무엇보다 빅터 로스차일드가 1964년에 영국 정부로부터 간첩 혐의를 받고 심사를 받았다. 결과는 무죄였다. 허나, 이 사건 이후, 빅터 로스차일드는 영국 언론들로부터 잊혀질만하면 까였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빅터 로스차일드 케임브리지 친구들이 영국 정보부 등 주요 직책에 있다가 모두 소련으로 망명했다. 대표적인 인물은 조용한 전쟁이란 자서전까지 낸 킴 필비이다. 그럼에도 영국은 침묵했다. 왜? 로스차일드 가문이 만만한가? 로스차일드는 전후 이미지 복원을 위해 겉으로는 망한 척 꾸몄다. 이차 대전 때 히틀러 때문에 유럽에 투자한 돈을 다 잃었다. 또, 히틀러와의 전쟁에 가진 돈을 다 쏟아부어서 망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놓고서 오히려 빅터 로스차일드가 만든 것이 1954년 빌더버그였다. 겉으로 내세운 건 네덜란드 왕자였지만. ㅎㅎㅎ

   

헌데, 잘 참던 300인 위원회를 비롯한 국유본 귀족들이 왜 빅터 로스차일드에게 태클을 걸었나.

   

케네디 사건 때문이다. 1963년 11월 22일, 케네디가 암살을 당했다. 이것은 누가 한 일인가. 존 콜먼은 300인 위원회가 한 짓이라고 한다. 허나, 당대 MI5와 MI6을 장악한 이는 누구인가. 300인 위원회인가?

   

일단 MI5와 MI6을 알아야 한다. MI5는 미국 FBI이고, MI6은 CIA이다, 라고 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이때, 존 콜먼 주장대로 MI6이 케네디를 죽였다면, MI6 수장이 모를 리가 없다. 이때, MI6 수장이 누구인가. 딕 골드스미스 화이트이다.

   

"Sir Dick Goldsmith White, KCMG, KBE (20 December 1906 – 21 February 1993), was a British intelligence officer. He was Director-General (DG) of MI5 from 1953 to 1956, and Head of the Secret Intelligence Service (MI6) from 1956 to 1968.

   

White was born in Tonbridge, Kent and went to school at Bishop's Stortford College. He was athletic in his youth. He was described by Peter Wright as resembling David Niven: "the same perfect English manners, easy charm, and immaculate dress sense." He was, said Wright, "tall with lean, healthy features and a sharp eye".[1] Much as Wright liked White, he felt his move to MI6 was a mistake for both MI5 and MI6: "Just as his work [at MI5] was beginning, he was moved on a politician's whim to an organization he knew little about, and which was profoundly hostile to his arrival. He was never to be as successful there as he had been in MI5."[2] He was appointed Chief of the Secret Intelligence Service in 1956 in the wake of the "Crabb Affair", the exposure of which had damaged Soviet-British relations, and embarrassed MI6.[3]"

http://en.wikipedia.org/wiki/Dick_White

   

딕 골드스미스 화이트, 줄여서 딕 화이트는 빅터 로스차일드 사람이었다. 그런 까닭에 1953년부터 1956년까지 MI5에서 근무했다가 1956년부터 1968년까지 MI6을 책임진다. 이때, 딕 화이트를 유명하게 만든 사건이 무엇인가. 크랩 사건이다.

   

http://en.wikipedia.org/wiki/Lionel_Crabb

   

http://blog.dreamwiz.com/esprit72/5335250

   

크랩 사건이란 1956년 후르시초프가 영국에 왔을 때 기뢰 전문 첩보원 크랩이 사라진 사건이다. 공식적으로는 죽은 것으로 되어 있지만, 소련에서 기뢰 전문 교관으로 일하는 크랩이 등장한 바 있다. 헌데, 이 사건 담당자였던 MI5 딕 골드스미스 화이트가 영전해서 MI6 수장이 된 것이다~!

   

크랩 사건에서 보듯 빅터 로스차일드 황제는 자기 대에 신세계 질서를 보고야 말겠다는 집념을 보였다. 해서, 이 시기 유럽 좌파는 유럽 연방에 대찬성이었다. 빅터 로스차일드 보스가 공산주의자이니까^^!

   

허나, 국유본 귀족은 불안감을 느꼈던 것이다. 빅터 로스차일드 피에는 분명 엔키, 프로메테우스, 스파르타쿠스, 카이사르,  한니발,  한무제, 알렉산더, 나폴레옹, 징기스칸, 이순신, 패튼, 박정희, 호치민의 피가 흐를 것이다.

   

영웅의 탄생. 그것은 국유본 귀족에게 늘 끔찍한 기억이었다. 영웅이 탄생하면 그간 벌레만도 못했던 하층민이 갑자기 들고 일어나 국유본 귀족들을 압살한다. 막아야 하는 것이다. 카르타고가 쑥대밭이 되었다. 신세계 질서는 좋지만, 어디까지나 기득권을 보장하는 속도를 유지해야 한다.

   

허나, 빅터 로스차일드의 힘은 강했다. 당시 빅터 로스차일드에 관한 이야기가 여러 곳에서 나온다. 허나, 이는 모두 빅터 로스차일드가 조율한 작품인 게다. 빅터 로스차일드가 영국 정보부에서 일할 때를 묘사한 쑹훙빙 화폐전쟁과 같은 것을 보면, 공통점이 있다. 빅터 로스차일드는 조직에 힘겹게 대항하는 고독한 전사다. 즉, 골리앗과 맞서는 다윗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가령 빅토리아 여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바람둥이 에드워드 왕은 황태자 시절부터 유태인과 지나치게 친한 것 아니냐고 비판을 받았다. 예서, 유태인이란 뻔하다. 로스차일드이다. 이때, 에드워드 황태자 답변은 쿨했다. "뭐, 어때?" 빅토리아 여왕이 로스차일드 가문  영지를 방문했을 때다. 로스차일드 딸이 화원 관리에 만전을 기했는데, 빅토리아 여왕이 망쳤나 보다. 로스차일드 딸이 화를 내자 빅토리아 여왕이 여왕인 신분을 망각(?)하고 사과했다. ㅎㅎㅎ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저자가 옥스퍼드 대학 나온 수학자 넘인데, 혹 여기에 자존심에 상처를 받아 쓴 것이 아닐까 의심할 정도~!

   

정리하자. 로스차일드 가문 비법이 뭐냐. 절대로 자신이 강하다는 것을 내비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자신은 늘 언제나 위기 속에 놓인 양, 한 물 간 것인양 위장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모건과의 관계다. 음모론자들이 알다시피 모건 가문이란 로스차일드의 미국 지부에 다름 아니다. 허나, 이에 대해서 소위 안티 음모론자들은 당장 달려 든다. 처음에는 로스차일드의 하수인이었던 건 인정하지만, 이후 모건 가문은 이미 20세기 초에 로스차일드 가문을 압도했다고 말이다. 그 예로 드는 것이 1902년 영국 정부가 보어전쟁 때문에 국채를 발행해야 했는데, 이때 모건의 태도가 논란인 게다. 이 시기 모건은 영국 정부에 대해 로스차일드보다 더 높은 할인율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발끈한 로스차일드 가문이 모건 가문을 신디케이트에서 축출하려다 실패했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보면, 로스차일드가 드디어 끝났나 할 것이다.

   

과연 그럴까^^! 직후, 로스차일드 가문은 원탁회의를 개최하여 러일전쟁과 1907년 금융 공황에서의 모건 가문의 역할을 지시했다~! 모건이 과연 독자적으로 1907년 금융 공황을 처리할 수 있었을까~!

   

이는 기초적인 로스차일드 트릭이다. 대외적으로 로스차일드 가문이 약세인 양 처신하면 어떻게 되나? 영국 정부는 보호무역주의적 관점에서 미국 모건 가문보다 영국 로스차일드 가문에 더 편향적이게 되기 마련이다. 또한, 러시아 정부는 로스차일드에서 독립하였다고 보아 모건 가문과 좋게 지내려 애쓸 것이다. 이것이 물론 러시아 정부의 착각으로 나타나 러일전쟁 대패로 귀결하였지만.

   

이런 로스차일드 가문 약자 전략, 역분식회계 전략은 이차대전 홀로코스트에서 정점을 이루었는데, 왜 1960년대에 로스차일드 가문은 갑자기 호주 우라늄 광산 개발로 재기했다고 광고했을까. 그만큼 빅터 로스차일드가 위기에 내몰렸다는 것이다. 1964년, 로스차일드 3대 남작 이 큰 치욕을 겪는다. 위선의 대가, 로스차일드 가문도 더 이상 버티기 힘들 만큼 위기로 내몰리자 호주 우라늄 광산 개발로 나, 아직 안 죽었어, 하고 나온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약한 척, 착한 척, 고상한 척을 하던 로스차일드 가문이 '알고 보면 내가 세계 주인'이라고 나서자 위기는 본격화한 것이다.

   

빅터 로스차일드는 베트남 전쟁 지속을 결정했다.

   

예서, 록펠러 역할에 궁금할 분들이 많을 것이다. 록펠러가 관여한 사건이 더 많지 않은가 하고 말이다. 카스트로와 체게바라에 의한 쿠바 쿠데타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하고 말이다. 또한, 인드라가 강조한 박정희 516 혁명도 배후에는 록펠러가 더 개입한 것이 아니냐 할 것이다.

   

이에 대해 명확하게 말한다. 한국 전쟁에서 인력을 동원한 건 중국이지만, 김일성을 택하고, 김일성더러 전쟁 준비하라고 지시하고, 날짜까지 택일한 것은 소련 스탈린이다. 하고, 소련 스탈린은 빅터 로스차일드 지령에 순응했다. 그처럼 박정희 516 혁명이나 체게바라 쿠바 쿠데타에 직접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이가 록펠러일지라도 최종 결정은 빅터 로스차일드가 한 것이다.

   

1964년 후르시초프를 만나러 가는 록펠러 입장을 생각해보자.

   

아일랜드 계 조지프 케네디, 혹은 조셉 케네디를 키운 건 록펠러였다.

   

"편집] 은행장

매사추세츠 주 보스턴아일랜드계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가 아일랜드에서 미국으로 이민왔을 때는 매우 가난했지만 차츰 기반을 다져 나가면서 그의 부친 패트릭 조지프 케네디는 성공한 사업가가 되었고, 매사추세츠 주의회 의원으로 재직하기도 했다. 조지프 패트릭은 이러한 집안에서 비교적 유복하게 성장했지만 당시 미국 사회에서 아일랜드계 로마 가톨릭 교회 신자가 갖는 한계[1]를 느끼고 이를 깨고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자 하는 야망을 갖게 되었다. 1912년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했으며, 그 다음 해 빌린 돈으로 파산 직전인 지방 은행을 사들여 20대 중반의 나이에 은행장이 되었다. 조지프는 자신이 사들인 은행을 다시 살림으로써 금융계의 주목을 받았으며, 1914년 보스턴 시장 존 프랜시스 피츠제럴드의 딸인 로즈 피츠제럴드와 결혼함으로써 정계에도 인맥을 쌓고자 했다. 1915년 장남 조지프 패트릭(조 주니어)가 태어났으며, 1917년 후에 대통령이 되는 차남 존이 태어났다.

   

정치진출

1920년대에는 증권계에 종사하며 많은 재산을 모았고, 영화사업과 부동산 투자로 재산을 더욱 불렸다. 1920년대 말, 미국의 대표적인 부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이와 함께 민주당에 많은 정치자금을 대며 정계에서도 영향력을 확대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과도 인연을 맺어 그의 행정부에서 1934년 신설된 증권 거래 위원회 초대 회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했으며, 1938년 ~ 1940년에는 주 영국 대사로 재직했다. 아일랜드계가 미국의 주영 대사로 재직하게 된 것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교육

이러한 활발한 활동과 많은 재산으로 그 자신이 직접 선출직 정치인에 도전할 수도 있었지만, 주가 조작이나 금주법 시대의 주류 밀매 등 투명하지 못한 재산 형성 과정과 복잡한 사생활이 문제가 될 것을 우려하여 그 꿈을 접었으며, 대신 자신의 아들들에게 그 야망을 이루도록 했다. 그의 4명의 아들은 엄격한 교육을 받았고 서로 경쟁심을 유발시키며 꿈을 키우도록 했다. 그는 고립주의자로 미국이 외국의 전쟁에 개입하는 것에 부정적인 입장이었으나, 아들들이 정치적으로 성공하려면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하여 장남 조와 차남 존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도록 했다. 그러나 가장 기대했던 장남 조가 전사하여, 그의 기대는 차남 존에게 모아졌다. 존은 전쟁이 끝난 후 1946년 불과 29세의 나이에 연방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 그의 막대한 자금 지원을 받으며 당선되었고, 이후 계속하여 그의 지원을 받아 정치인으로 승승장구하여 마침내 1960년 대통령에 당선되게 된다. 3남인 로버트1950년대에 그의 알선으로 상원의 위원회에서 일할 수 있었고, 존이 대통령이 된 후 법무부 장관이 되었다.

   

죽음

아일랜드계로 아들이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데 큰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로 자신의 꿈을 아들이 대신 이루는 모습을 지켜보았으나, 1961년 말, 뇌경색을 일으킨 후 건강이 크게 악화되었다. 1963년 존이 암살되었을 때에는 거동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쇠약해진 상태였다. 이후 자신이 직접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했으나, 차남 로버트는 유력 정치인으로 성장했으며, 막내 에드워드도 상원의원으로 활발한 정치활동을 했다. 1968년 로버트가 대통령 출마 선언을 하며 그의 또다른 아들이 다시 대통령에 도전했으나, 로버트도 암살당했고 그 다음해인 1969년 81세로 세상을 떠났다."

http://ko.wikipedia.org/wiki/%EC%A1%B0%EC%A7%80%ED%94%84_P._%EC%BC%80%EB%84%A4%EB%94%94

   

1930년대. 미국 상류층에서 아일랜드인이란 유태인, 이태리인과 더불어 흑인과 다를 바 없는 천민이었다. 해서, 대표적인 친영파 모건 가문은 유태인 출입금지를 내걸었던 것이다. 예서, 의문을 표하는 이들이 있다. 모건은 로스차일드 덕분에 큰 가문인데 어째서 유태인 출입 금지였을까.

   

바로 이것을 명쾌하게 설명하는 것이 인드라의 국제유태자본론이다. 전 세계 음모론과 이론 중 이 대목을 확실히 책임지는 이론이 인드라 이론 말고 누가 있나?

   

모건이 천대한 것은 동유럽 유태인, 즉 카자르 유태인이었던 게다. 동유럽 유태인, 카자르 유태인은 로스차일드 가문은 물론 맑스도 나름 경멸했다. 생각해보라. 당대 루즈벨트가 네덜란드계 카르타고 유태인인데, 유태인 일반 출입 금지가  말이 되나?

   

간단 정리한다.

   

미국에서 연방준비은행이 출범하였을 때, 초대 이사진 중에 유태인 루즈벨트 가문이 있었다. 루즈벨트가 대통령으로 당선한 이후 당대 미국 증권거래를 규제하기 위해 SEC이 만들어졌는데, 이 SEC 초대 위원장이 누구일까. 케네디의 아버지,  록펠러 소유의 베들레헴스틸의 중역이었던 조셉 케네디였다~!

   

다시 말해, 케네디의 애비, 조셉 케네디는 아일랜드 이주민이 알 스미스를 열렬히 옹호하였을 때, 정반대편에 서서 루즈벨트를 사주하여 아일랜드인을 탄압한 록펠러를 지지했던 것이다. 이런 공적을 인정받아 조셉 케네디는 아일랜드인으로는 이례적으로 영국 대사로 간다. 이때, 영국 대사란 다른 나라 대사와는 다르다. 왜? 이 당시 미국은 영국 식민지였으니까.

   

예서, 에피소드란 모건 가문이 영국에 기증한 건물을 유태인보다 천한 아일랜드 출신 조셉 케네디가 써서 모건 가문이 격분했다는 뉴스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거짓이다. 상인이란 명분에 혹하지 않는다. 실리를 위해서는 온갖 굴욕도 참는 것이 상인의 본분이다. 헌데, 모건 가문이 자신이 기증한 건물을 조셉 케네디가 썼다 해서 격분했다고~! ㅎㅎㅎ 역선전이다. 하면, 왜 이런 역선전을? 이는 국유본 귀족들 자존심을 바탕으로 해서 당대 국유본 귀족들을 위한 떡밥이었던 게다. 왜? 귀족은 명예를 중시하니까~!

   

역설적으로 바로 이런 이유로 엘리자베스 여왕은 - 당시에는 여왕이 아니었다 - 조셉 케네디 역량을 바로 보았던 것이다. 향후 록펠러는 조셉 케네디 가문에서 대통령을 만들 속셈이군, 하고 본 것이다.

   

이처럼 케네디 역시 국유본이 만든 대통령이다. 여기에 그 어떤 환상을 품어서는 안 된다.

   

쪽발이 색희들이 쪽발 놈현 책임을 김진표, 정동영, 안희정, 문재인, 김두관, 유시민 등 그때그때마다 책임을 돌리는데, 단호히 배격해야 한다. 이 개쪽발이 색희들아. 천벌을 받을 것이다. 쪽발 놈현이 얼마나 대한민국을 망쳤는가. 하고, 지금도 얼마나 망치고 있는가. 이 개색희들아. 씹색희들아. 지금까지의 죄과를 뉘우치고자 한다면 자결하라. 이 개넘의 색희들아. 매국노들아. 니놈들이 유언으로 쪽발 놈현이 대한민국 매국노로 나라를 망쳐서 죄송하다는 유언장을 남기고 죽어야 지하에 계신 김구 선생을 비롯한 애국선열이 비로소 마음을 풀 것이다. 그전까지 쪽발 놈현 개색희들에 대한 저주는 계속될 것이다. 이 갈아마셔도 시원찮을 매국노 씹색희들아.

   

오늘은 여기까지.

   

쪽발 놈현이나 쪽발 돼중과 같은 쪽발이 색희들이 대한민국을 망치는 꼴을 담담하게 지켜보아야 할 것입니다. 감정적인 대응은 자제해야 합니다. 진정한 혁명은 이 개색희들이 자기 세상 만난 듯 활개를 칠 때야 비로소 시작할 것입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당합시다. 허나, 진실을 똑바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 추신 : 엘즈버그나 풀브라이트 원조 골드만파로 바꿉니다. 맥락을 보면 골드만파인데, 왜 노비네파냐고 갸우뚱할 분들이 있을 터인데, 맞습니다. 골드만파라고 쓰려고 했는데, 이상하게 글을 쓸 때는 노비네파라고 썼네요. 인월리 글은 초안이어서 오타도 좀 있고, 크고 작은 실수들이 있습니다. 퍼갈 때는 말없이 퍼가시되, 24시간 이후에 퍼가주세요. 교정을 보아야 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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