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과 프리메이슨 2 - 자코뱅 VS 푀양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1/12/14 01:24

http://blog.naver.com/miavenus/70126434902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27 : 프랑스 혁명과 프리메이슨 2 - 자코뱅 VS 푀양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1/12/14

   

일단 인물들이 많이 등장하니 프랑스혁명 인물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사이트를 참고하시라.

   

http://ko.wikipedia.org/wiki/%ED%94%84%EB%9E%91%EC%8A%A4_%ED%98%81%EB%AA%85_%EA%B4%80%EB%A0%A8_%EC%9D%B8%EB%AC%BC_%EB%AA%A9%EB%A1%9D

   

프랑스 혁명 운운하면 머리가 지끈거리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이때, 인드라가 추천하는 소설과 만화책이 있다.

   

먼저 만화책으로는 베르사이유의 장미가 있다. 여기서 마리 앙투와네트에 뻑가면 영화 '마리 앙투와네트'를 봐도 되는데, 추천하고 싶지는 않다. ㅋ. 예서, 지적 욕구에 몸부림치는 분들을 위해서는, 이들 만화책과 영화의 원작 격인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리 앙투와네트' 일독을 권한다.

   

http://ko.wikipedia.org/wiki/%EC%8A%88%ED%85%8C%ED%8C%90_%EC%B8%A0%EB%B0%94%EC%9D%B4%ED%81%AC

   

슈테판 츠바이크는 오스트리아 유대인 작가인데, 인드라가 전 세계 전기 작가 중 최고로 손꼽는 작가이다. (왜 인드라가 호평하는 인물이 나중에 알고 보면 80% 이상이 유대인인 것인지 ㅠㅠㅠ) 나중에 아내와 함께 자살했다. 프랑스 혁명을 보다 흥미롭게 읽고자 한다면, 슈테판 츠바이크의 다른 소설인 '발자크 평전'과 '어느 정치적 인간의 초상, 조제프 푸셰'를 권한다. 여러분은 슈테판 츠바이크를 통해서 프랑스 혁명을 보다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According to tradition, the first Masonic Lodge in France was founded in 1688 by a Royal Irish Regiment that followed the deposed King James II of England into exile. An English Lodge is also said to have been founded at Dunkirk in 1721. However, the first Lodge whose existence can be verified was organised by English merchants in Paris about 1725. By the time of the French Revolution, there were some 1250 Masonic Lodges in the country.[2] The Grand Orient de France was founded in 1733.[3]

[edit] French RevolutionThe Lodge Les Neuf Sœurs was a prominent lodge attached to the Grand Orient de France that was particularly influential in organising French support for the American Revolution and later in the intellectual ferment that preceded the French Revolution. Benjamin Franklin was a member of this Lodge when he was serving as liaison in Paris.

Some notable French revolutionaries were Freemasons, including Voltaire,[4] Marquis de Condorcet,[5] Mirabeau,[6] Georges Danton,[7] the Duke of Orléans,[8] and Hébert.[9]"

http://en.wikipedia.org/wiki/Grand_Orient_de_France

   

위키피디아에 의하면, 프랑스에서 검증이 가능한 최초 프리메이슨은 스코트랜드인 존 로가 재정총감을 맡았던 시대인 1725년에 영국 상인이 조직하였다. 후일 프랑스 대표 프리메이슨으로 부상한 그랑 오리앙(위대한 동방 : The Grand Orient) 은 1733년에 조직을 결성했다.

   

다만, 검증할 수 없는 전설에 따르면, 1688년 제임스 2세를 추종하는 왕립 아일랜드 연대가 프랑스로 망명한 뒤 프리메이슨 조직을 만들었다고 한다. 만일 사실이라면 놀라운 이야기다. 일반적으로 프리메이슨은 신교에 친화적인 반면 구교에 적대적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역시 전설에 의하면, 1721년에 Dunkirk에서 영국인 롯지가 등장했다는 것이다.

   

   

피에르 제르마에 의하면, 형제애, 자유, 관용의 기치를 내건 프리메이슨은, 17세기 후반에 최초로 영국에서 출현하였고, 1717년 영국에서 연맹을 결성하였고, 스페인(1728), 독일(1733), 포드투갈, 네덜란드(1735), 스위스(1740)으로 퍼져갔다고 한다. 또한, 프랑스에는 1720년대에 프리메이슨이 유입하였다고 한다. 이후 프랑스 프리메이슨은 발전을 거듭한 끝에 1755년에 이르러 프랑스 그랜드 롯지를 창설하기에 이르른다. 헌데, 1773년 단체 내 분열로 인해 <그랑 오리앙>이 탄생했다고 한다.

   

프리메이슨은 프랑스에 등장한 지 30년만인 1955년에 프랑스 대롯지를 건설하였으나, 1773년에 분열한다. 하면, 왜 분열하였을까?

   

"프리메이슨의 성격이 변화한 것은 프랑스에 그람토리암(Grand Orient, 대동사(大東社))이 1773년에 성립하고, 프랑스 혁명에 참가한 이후라고 한다. 영국 본국의 프리메이슨이 일반적으로 정치문제를 회합에서 화제로 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서, 그람토리암의 산하에 들어온 대륙계 프리메이슨은 오히려 적극적으로 사회개혁을 추진했다. 사실, 프랑스 혁명의 선언은 프리메이슨의 로지 내에서 기초되고, 기존의 권력을 폭력적으로 전복할 것을 지향한 계명결사도 독일의 로지 내에서 결성되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631472

   

오늘날 프랑스 프리메이슨을 대표하는 프랑스 롯지는 그랑 오리앙이다. 이들은 프리메이슨 박물관까지 1973년에 만들었다. 흥미롭지 않은가. 하필이면 1973년일까^^!

   

"프리메이슨 박물관이 처음 세워진 것은 1889년이다. 당시 프랑스 프리메이슨의 중앙 본부였던 그랑 오리앙 드 프랑스(Grand Orient de France)가 박물관 설립을 주도했다. 프리메이슨은 영국에서 시작된 석공(石工)들의 조직이었다. 길드 조직으로 출발해 유럽 각지로 퍼졌고 지식인과 중산층이 많이 가입해 진보적인 성향을 띠고 있었다. 프랑스 혁명 등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직 이름인 프리메이슨은 '자유로운 석공(free mason)'이라는 뜻의 합성어다.

   

박물관은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직후 독일군에 의해 상당수 자료들이 파손되는 등 위기를 맞기도 했다. 또 전쟁이 끝난 뒤 승전국인 소련으로 많은 자료들이 유출됐다. 프리메이슨과 관련된 다양한 자료들을 보강한 뒤 박물관은 1973년 다시 문을 열었다. 2000년에는 소련에 유출됐던 박물관 소장 자료들을 다시 찾아오면서 전시품 숫자가 크게 늘어났다. 프리메이슨 박물관은 이 해에 프랑스의 공식 박물관으로 등록됐다.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647523

   

위키피디아에 의하면, 프리메이슨 인물로 볼테르, 미라보, 콘도르세, 오를레앙 공작이 나온다. 라파예트와 로베스피에르가 없다.

   

"The Lodge Les Neuf Sœurs was a prominent lodge attached to the Grand Orient de France that was particularly influential in organising French support for the American Revolution and later in the intellectual ferment that preceded the French Revolution. Benjamin Franklin was a member of this Lodge when he was serving as liaison in Paris.

Some notable French revolutionaries were Freemasons, including Voltaire,[4] Marquis de Condorcet,[5] Mirabeau,[6] Georges Danton,[7] the Duke of Orléans,[8] and Hébert.[9]"

   

반면, 프리메이슨 계열로 추정할 수 있으며, 황당무계한 언설로 인기를 끄는 그레이엄 핸콕에 따르면, 루소, 당통, 마라도 프리메이슨이라 주장한다.

   

프랑스아 퓌레에 의하면, 바이이, 탈레랑, 브리소, 라파예트, 콩도르세, 마라 등은 프리메이슨이었으나, 카미유 데물랭, 당통, 로베스피에르는 프리메이슨이 아니라 한다.

   

   

올리비에에 따르면, 생쥐스트 역시 프리메이슨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http://www.nomad21.com/bbs/uboard.asp?id=nomad_gisa&u=2&u_no=715

   

인드라 입장에서 이러한 프리메이슨 분류에는 각자의 정치적 입장이 있으리라 본다. 허나, 다양한 입장에도 불구하고 단 한 명에 대해서만큼은 프리메이슨이 아닐 것으로 보는 이가 있으니 로베스피에르이다.

   

   

   

   

   

프랑스 혁명하면 로베스피에르이다. 로베스피에르에 비한다면, 다른 이들은 조연급이다. 여기에 이의가 없다면, 다음과 같은 명제에 수긍할 것이다.

   

프리메이슨이 프랑스 혁명에 참여했지만, 프랑스 혁명의 주체가 아니었다.

   

헌데, 로베스피에르를 움직인 것은 루소이다. 혹자는 루소를 낭만주의의 시조로 본다.

   

http://blog.naver.com/theogeo/30027083739

   

   

루소를 낭만주의의 시조로 보는 것은, 루소가 디드로의 백과전서파와 친교했다가 결별했기 때문일 것이다. 해서, 볼테르의 계몽주의와 대립하는 루소의 낭만주의로 그림을 그린 것 같다. 허나, 이러한 구도가 의미있는 구도일까.

   

http://blog.naver.com/theogeo/30014025086

   

루소에게 낭만주의 딱지가 따라다니는 것은 루소 특유의 신비주의 때문인데, 그렇다면, 볼테르 역시 프리메이슨이었는데, 이 차이를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허나, 볼테르 등 사회사상사에 대해서는 나중에 말하기로 하고~!)

   

아무튼 인드라가 강조하는 것은, 루소적 신비주의는 감성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루소는 지성도 중요하지만, 감성도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견해를 지녔기에 중세 스콜라학파적인 백과전서파와 결별한 것이다. 하면, 바로 여기서 눈치챌 분도 있겠지만, 바로 이러한 루소적 신비주의 배경은 시토파 베르나르두스 사상과 맥락을 같이 한다는 것이다.

   

이는 이후 로베스피에르가 프랑스 혁명에서 지도적 지위에 오르는 데에 중요한 원동력이었음을 강조한다.

   

여기까지 전제하고, 본론 격인 자코뱅 VS 푀양 구도로 가자.

   

"출생. 렌의 고등법원 변호사를 거쳐 1789년 삼부회(三部會) 대의원이 되었다. 브르통클럽(후의 자코뱅클럽)을 창설하였으며, '8월 4일 밤'의 헌법제정 국민의회 의장이 되어 봉건제도 폐기에 관한 법령을 기초(起草)하였다. 그러나 1791년 루이16세가 바렌으로 탈출한 후에는 온건개혁파의 입장을 취하였다. 그리하여 투표권을 유산자에게 한정시켜야 한다는 입헌군주파에 합류하였으며, 6월 14일 노동자단결금지법인 '르샤플리에법'을 가결시켰다. 1792년 영국을 방문하였는데, 이것이 이적행위로 간주되어 귀국 후 체포되어 왕정유지 혐의로 처형되었다."

[출처] 장 르샤플리에 | 네이버 백과사전

   

1789년 삼부회가 있기 전 베르사이유에서 브르따뉴 출신인 랑쥐네(Jean Denis, comte Lanjuinais, 1753-1832)와 르 샤플리에(Isaac Ren Guy Le Chapelier 1754-1794)는 자코뱅 클럽의 전신인 브르통 클럽(Club breton)을 만든다. 궁정과 의회가 파리로 이전한 뒤 재조직되었으며, 생트노레가(街) 자코뱅 수도원에 본부를 설치하면서 자코뱅당이 일반적인 명칭이 되었다. 원래의 명칭은 <헌우회 Socit des amis de la Constitution>이며, 92년 9월이 되어서야 <자유와 평등의 친구인 자코뱅 클럽>이라는 명칭을 갖게 되었다. 6월부터는 미라보 등 주요 혁명 인사들이 모두 참여하는 모임으로 나아간다. 1790년 8월 15일까지 프랑스 30개 도시 중 26개 도시에 91개 클럽이 등장한다. 1791년 상반기에는 클럽 수가 212개까지 증가한다.

   

http://blog.naver.com/braveattack?Redirect=Log&logNo=10045985734

   

일설에 따르면, 미라보는 1786년 자코뱅 파리대학(Jacobins College of Paris)을 세운다. 여기서, 브르통 클럽이 혁명 과정에서 재조직하면서 자코뱅 수도원에 본부를 설치한 것이 미라보 후작 영향력이 컸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시기 미라보는 혁명 세력에서 가장 인기가 있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예서, 왜 혁명 세력이 다른 이름을 놔두고 하필이면 자코뱅을 선호했는가, 모임 장소를 굳이 자코뱅에 할 필요가 있었는가 하는 것이 인드라 관심사이다.

   

이런 문제를 연구하는 이가 프랑스 혁명을 연구하는 이들 중에 있을 지 모르지만, 인터넷으로 검색했을 때는 인드라가 일단 독보적인 것 같다. 아무도 이런 문제에 관심이 없는 듯싶다.

   

왜 자코뱅인가.

   

자코뱅 수도원은 도미니크회가 세운 수도원이다.

   

"1216년 에스파냐 오스마 주교관구의 사제였던 도미니쿠스프랑스 프루유에

설립한 수도회로 정통 신앙을 옹호하고 학문과 청빈을 중시하며, 복음을 전파하는 활발한 선교활동을 목적으로 한다.

   

도미니크 수도회 이전의 수도회는 넓은 토지를 소유하며 농사와 학문에 종사했으나, 도미니크수도회는 특정한 성당에 소속하지 않고 곳곳을 편력하며 설교를 하였으며, 고정수입을 바라지 않고 헌물을 받아 의식을 해결하는 등 전혀 새로운 형태의 수도회였다. 이 설교수도회는 1216년 교황 호노리오 3세의 정식 인가를 받은 후 급속히 유럽 전역에 퍼졌으며, 프란체스코회(會)와 더불어 중세 유럽의 최성기를 형성하는 주요소가 되었다.

   

1221년 창설자 도미니쿠스가 죽자, 독일인 요르단이 2대 총회장이 되어 회칙 개정, 조직강화를 하고 사도적 교설(敎說)과 영혼구제, 이교도에 대한 전도에 힘썼다. 한편 복음 전파를 위해 신학의 학문적 중요성을 깨닫고 파리대학을 비롯한 쾰른·볼로냐·옥스퍼드 등의 명문대학에서 성서와 설교 및 신학·철학·교회법 등을 연구하여 학문적인 공헌을 하였다.

   

또한 많은 학자들을 배출하였는데, 그 중에서 알베르투스 마그누스(Arbertus Magnus),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1243년에 이 수도회에 들어가 철학적·신학적 가르침에 근거를 둔 확고한 정통주의 신학을 고수하며 스콜라철학을 완성하였다. 그외에도 신과의 직접적인 체험을 중시하며 이를 체계화하는 데 힘쓴 신비주의 신학자로 사보나롤라, 에크하르트, 타울러 등이 있다.

   

1887년에는 도미니크선교수녀회가 설립되어 선교와 더불어 교육사업과 다양한 자선사업을 하고 있다. 1995년 현재 82개국에 남자 수도회원 7,000여 명, 관상수녀회원 4,800여 명, 활동수녀회원 4만여 명, 재속회원 7만여 명에 이른다. 한국에는 도미니크수도회가 1990년에 진출하였고, 도미니크선교수녀회는 이보다 앞서 1983년 진출하였다."

[출처] 도미니크 수도회 [修道會, Dominican Order ] | 네이버 백과사전

   

당대 가톨릭은 왜 도미니크 수도회를 필요로 했나.

   

카타리파 때문이다.

   

"청정무구(淸淨無垢)를 의미하며, 물질을 악의 근원이라 해서 신과 대립시키는 이원론(二元論)과 육식 ·결혼생활, 재산의 사유 등을 부정하는 극단적인 금욕주의가 특징이다. 11세기 후반 불가리아보고밀파로부터 영향을 받은 소종파(小宗派)가 남유럽에 나타나, 특히 1140년부터 30년간에 걸쳐 그 교세가 급속히 신장하여 라인란트, 남북 프랑스, 북이탈리아에까지 퍼지는 등, 12세기 말까지 11주교구(主敎區)가 개설되었다. 로마 교회는 이를 이단으로 단정하고 여러 차례 개종토록 했으나 효과가 없자, 교황 이노켄티우스 3세는 11811229년 3차례에 걸쳐 십자군을 파견하여 이들을 토벌하였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이용당한 이 십자군은 그 잔혹성으로 후세에 오명을 남긴 결과가 되었다. 카타리파는 이때부터 붕괴되어 15세기 초 완전히 소멸되었다. "

[출처] 카타리파 [派, Cathari ] | 네이버 백과사전

   

카타리파란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등 이란 종교 유파에서 불교와 기독교를 혼합하여 아르메니아에서 유래한 종교 유파이다. 동양에서는 역사적으로 주원장의 명나라를 일으키는데 큰 역할을 했던 명교를 의미하고, 혹은 환타지 무협지에서는 마교를 말한다.

   

카타리파가 왜 문제였나. 교회 바깥에서 교회를 맹렬히 비판했기 때문이다. 교회는 악의 무리요, 자신들이 진정한 신의 사도이기에 교회는 자신들 교회로 대체해야 한다 주장했다. 옷 하나만 달랑 걸치고 심지어 신발도 신지 않고 둘셋이서 함께 다니면서 전도하는 것이 카타리파였다. 카타리파는 극단적인 이원론자들이었다. 물질적인 것은 악이요, 정신적인 것만을 선으로 보았다. 해서, 결혼, 사적 소유, 육식을 금한 공동체 생활을 강조했다. 

   

가톨릭 교회는 카타리파를 사탄의 무리로 몰아서 카타리파를 강간한 뒤 죽이거나 화형에 처한 뒤 재산을 모두 몰수했다.

   

허나, 카타리파를 통해 민심의 동요가 있는 것은 자명한 일. 가톨릭 교회는 당근책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해서, 나온 것이 도미니크회인 게다. 민심 수습용인 게다.

   

하면, 다른 수도회에 대해 도미니크회 특징은 무엇인가. 교리에 강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드라처럼 썰 푸는 데에 강점이 있다는 게다. ㅋㅋㅋ.  그런 까닭에 토마스 아퀴나스가 나왔고, 에크하르트가 나온 것이다.

   

특히, 에크하르트가 중요하다. 왜인가. 서양이든, 동양이든, 보통 시조로 불리는 이들 대부분은 신비주의자이다. 뉴튼도 마지막 연금술사로 불리지 않던가^^? 인드라 역시 신비주의자이고~!

   

인드라 블로그를 방문하는 이들 중, 혹은 인드라 번개에 참여하는 이들 중 대체적으로 20%는 영성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다~! 대표적인 분이 수반아님이다.

   

하면, 왜 에크하르트인가. 루터 때문이다.

   

http://blog.naver.com/luther1?Redirect=Log&logNo=10053959987

   

루터 사상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의인'이 아니라 '성화'이다. 이 대목에서 루터는 에크하르트에게 크게 의존한 것이다.

   

"셋째로 루터는 신비주의자들의 신학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는 특별히 요하네스 타울러(Johannes Tauler, 1300-1361)에게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 타울러는 1361년 사망 할 때까지 라인강가의 도시에서 복음을 전했던 도미니크 수도회의 수도승이며 신부였다. 당시 루터는 신비주의적인 합일과 금욕주의적인 생활에 매료되었다. 타울러의 사상은 그의 설교집에 잘 드러나 있다. 타울러는 하나님과의 신비적 연합을 위해서는 인간 자신의 어떤 역할이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의를 얻는 길은 자기 포기와 자기 멸절를 통해서 참된 복종을 통해서 가능하다.[1]) 자신의 모든 욕망, 의지, 세상의 모든 사물들과 자신에게서부터도 분리되어야 한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소멸 될 때에 하나님과의 결합이 현재화되는 것이다. 이러한 타울러의 가르침은 루터에게 크나큰 관심을 끌었다. 루터가 그의 신학을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 중세 신비주의가 실제로 어떤 중요성을 지니면서 영향을 주었는지는 명확하지는 않지만 아무튼 루터는 중세의 신비주의자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특별히 1516-18년에 이르기까지 그의 신학을 형성하던 중요한 시기에 루터는 독일의 신비 전통에 최고의 찬사를 표했다. 그의 친구 죠지 스팔라틴(Georg Spalatin)에게 보낸 편지에서 루터는 요하네스 타울러(Johannes Tauler)의 설교들은 "순수하고 확고부동한 신학"으로 그리고 복음서들과 밀접한 합의들을 보여 주고 있다고 기술하였다. 그가 1518년 95개 테제들에 관해서 변호를 할 때 스콜라 신학보다는 타울러에게서 훨씬 훌륭한 신학을 발견했노라고 고백하였다. 이러한 점을 고려한다면, 학자들이 엑크하르트와 타울러를 종교개혁의 진정한 선구자들로 간주하면서 독일의 신비 전통을 개신교 신학의 중세적 뿌리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 조금도 놀랄 일이 못된다. 루터가 중세 수도원주의나 고행을 통한 선행-의인화 신학을 공격할 때 그의 공격의 자원은 독일의 신비전통이었다."

 http://kin.naver.com/open100/detail.nhn?d1id=6&dirId=613&docId=465483&qb=66Oo7YSwIOyLoOu5hOyjvOydmA==&enc=utf8&section=kin&rank=2&search_sort=0&spq=0&pid=gXPllU5Y7bRssuMKnfRssc--432244&sid=TudzuXJo504AAEmMCW8

   

루터는 수도사였다. 그래서인지, 루터는 종교 개혁을 단지 교회 부패를 일소하는 데에만 두지 않았다. 당대 루터까지의 교회사를 철저하게 공부한 루터인 만큼 교황을 비롯한 목자들의 행태만을 비판한다 해서 달라지지 않은 역사를 배웠을 것이다. 그렇다면, 루터가 행하는 비판은 보다 근본적이어야 했다.

   

해서, 그 비판은 필연적으로 교황을 뛰어넘어야 했다. 교황에게 사도로서의 특권을 부여한 신을 부정해야 했다. 즉, 예수다. 예수를 넘어서 신과 직접 통한다. 이것이 '성화'이다. 중세라면 이단이라고 정죄할 대목이다.

   

허나, 루터는 정치적이기도 했다. 루터는 라틴 신비주의인 베르나르두스의 신과의 사랑을 매개체로 활용한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신과 통한다는 것이다. 이는, 베르나르두스 초기 시토파가 주장했던 성경을 통하여 신과 소통한다는 것이다.

   

참으로 놀랍다. 고전학파 스코틀랜드 유대인 아담 스미스는 프랑스 중농학파 케네에게서 '생산' 개념과 '자유무역' 개념을 차용해서 대박을 터트리더니 독일인 루터는 프랑스 시토파 베르나르두스의 '성경'과 '노동'과 '사랑'을 차용하여 왕대박 축포를 쏘아올린다. 이 모두가 감성적인 실천에 유난히 강한 켈트적 프랑스인의 전통에서 비롯하였으니 아이리쉬적 음악이 전 세계인의 심금을 울리는 이유와 같다고나 할까?

   

하면, 루터 사상은 프랑스에서 어떤 평가를 받았나. 호평이었다. 이유는 루터가 시토회 베르나르두스 사상을 존중했기 때문이다. 하긴, 예수회 로욜라도 시토회 수사의 글을 읽고 감명을 받았다고 했으니까.

   

아무튼 루터 이후로 헤겔이 등장하고, 문제의 일루미나티 바이샤우트가 등장한다.

   

http://repan.blog.me/50068804100

   

여기서 뻔한 레파토리가 나온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인드라주의, 인드라교는 인드라가 의도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인드라는 자유로운 이론가, 사상가, 실천가였을 뿐이다. 허나, 인드라 제자들이 인드라를 구속하고, 교리화했던 것이다. 우리는 인드라 제자, 혹은 추종자들이 말한 인드라를 넘어서 인드라를 입체적으로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드라주의에는 정작 인드라가 없다!!!

   

일면 타당성이 있는 분석이다. 왜냐하면, 인격신도 나약하게 보는 마당에 인간 역시 인격신을 닮아 나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해서, 인드라의 긍정성과 부정성을 모두 부정하는 방식을 택한다. 특히 부정의 부정이라는 변증법적 방식을 통하여 인드라가 찰나지간에 보았다는 신의 경지를 탐구하는 것이다.

   

허나, 이것은 과연 성공적인 방법일까? 아니다. 이는 영화 '염소를 노려보는 사람들'에서 케빈 스페이시처럼 단지 그 '기술'만을 가로채는 데에 있다. 허나, 오늘날 CIA 등에서 실험한 초능력 프로젝트 결과는 어떠한가. 초능력이란 있지만, 복사할 수 없다는 것으로 결론이 나지 않았던가. 다시 말해, 영화 '디스트릭트 나인'의 나이지리아 조폭처럼 초능력자 육신을 먹으면 초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자본주의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재생산되지 않는 가치(교환가치)란 무의미하다.

   

켈트적 프랑스인(아일랜드, 스코틀랜드인)은 이론적으로 무언가를 창출하는 데에는 부족한 면이 있다. 반면, 게르만적 영국인, 독일인은 '생각'할 수 있었다. 이 '생각'의 기원이 어디인가 궁금한 이들이 많았던 듯싶다. 해서, 그 기원을 인도로까지 나간 것 같다. 인도인이 수학을 잘 하니까.

   

아무튼 당대 프랑스에서 필로조프(프리메이슨 볼테르에 의해서 지식인으로 개념화했다 할 수 있는데, 이는 이후 인월리에서 자세하게 언급하겠다.)들 원천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영국이요, 다른 하나는 독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프리메이슨 바람이 영국에서부터 불어온다. 프리메이슨은 반합법이었다. 18세기에 거의 공개적으로 회원 요청이 있을 정도였다. 더군다나 프리메이슨 영국 유학파 볼테르 명성이라면 옥케이였다! 왜냐하면, 이 시기 프리메이슨 볼테르와 만남이 있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프랑스 살롱 사교계에서 이름을 날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프리메이슨 볼테르가 자신의 이름을 한번 인용했다면 그것은 그냥 끝장이었다. 잘 나가는 프랑스 귀족 귀부인들이 저마다 침대에서 부를 지경인 게다~!

   

여기에 은근 반발하는 그룹이 있었다. 그들은 누구인가. 영국적이면 모든 것이 좋다더냐. 바다 건너온 것이면 다 명품이더냐. 우리 것은 좋은 것이여~! 경제적으로는 중농학파 케네요, 정치적으로는 루이 14세파요, 신학적으로는 구관이 명관, 가톨릭이었다.

   

바로 이 지점을 가장 충족한 이가 미라보였던 것이다.

   

아버지가 케네처럼 대표적인 중농학파였다. 정치적으로는 라파예트와 1789년 협회를 만들 정도였지만 속으로는 적대적이었는데, 이유는 라파예트와 달리 반영적 친대륙적 외교 노선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미라보는 오스트리아 황녀 마리 앙투와네트와 교류하는 것이다. 이것을 혁명파 입장에서 해석할 수 있지만, 프랑스 혁명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런 편협한 분석에서 벗어날 줄 알아야 한다. 무엇보다 미라보가 끌린 이유는 신학적인 이유였으리라 본다. 왜냐하면, 예나 지금이나 종교적 신념만큼 인간 행동을 결정짓는 것이 없었기에. 

   

해서, 미라보는 자코뱅에게 기울게 되는 것이다.

   

예서, 자코뱅이란 영국을 제외한 유럽 대륙이란 의미인 게다. 이는 오늘날 국유본이 영국과 유럽 대륙을 분리시키는 수법을 사용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스코틀랜드 독립까지 우려먹으면서 하는 일종의 트릭이다.

   

이에 반발한 세력이 있으니 푀양파인 게다.

   

"푀양클럽이라고도 한다. 파리의 튈르리 왕궁에 가까운 푀양수도원을 본부로 한 데서 푀양파로 불렸다. 자코뱅당(黨)을 탈퇴한 의원들이 부유한 시민, 지주 등과 연대하여 결성한 모임이다. 이들은 프랑스혁명 중인 1791년 6월 루이 16세가 도망간 뒤 앙투안 피에르 바르나브(Antoine Pierre Barnave), 아드리앵 뒤포르(Adrien Duport) 등 자코뱅당의 의원들이 주도한 왕의 교체를 촉구하는 청원서에 반대하여 자코뱅당을 탈퇴하였다.

   

왕정의 파괴와 개인재산의 몰수를 두려워했던 이들은 혁명을 반대했으며, 1791년 10월 입법의회가 성립하자 지롱드당에 대하여 우익(右翼)을 형성, 내각을 조직하고 상당한 세력으로 부상하여 활동하였다. 이들은 1791년의 헌법을 원칙으로 하여 입헌왕정을 견지하고 망명한 귀족에게 귀국할 것을 호소했으며, 협조외교(協助外交)를 제창하였다.

   

그러나 당내에 내분이 끊이지 않은 상태에서 1792년에 지롱드당이 정권을 장악함에 따라 혁명전쟁이 유발되었으며, 전후에 다시 내각을 조직했으나, 8월 10일의 왕정타도를 위한 시민봉기(8월 10일 사건)로 푀양파는 와해되었다. 

[출처] 푀양파 [派, Club of the Feuillants ] | 네이버 백과사전

   

예서, 푀양파는 왜 하필이면 푀양 수도원으로 근거지를 옮겼던 것일까. 푀양 수도원 정체가 궁금하다? ㅎㅎㅎ. 푀양 수도원은 시토파 시도원의 분파다. 푀양회는 원래 시토(Citeaux) 수도원에 속해 있었으나, 교황 식스투스 5세의 허락을 얻어 1586년 독립된 교단이 되었다.

   

예서, 특기할만한 것이 위그노 신교 성향의 앙리 4세를 암살한 자가 푀양파 수도사였다는 게다, 알려진 바로는, 푀양파는 당대 시토파에 비해 엄격한 규율을 지녔다 했다. 여기서 엄격한 규율이란 것은 프랑스 왕과의 관계가 우선이었을 것이다.

   

"파리에서 북쪽으로 35km 위치에 있는 르와요몽 수도원(L'Abbaye de Royaumont)은 유럽의 수많은 수도원ㆍ고성들 가운데 비교적 옛 모습을 잘 간직한 편에 속한다.

   

면적이 20가 넘는 이 곳은 옛 수도원 건물들은 물론이고 정원, 소운하, 동굴 등 구석구석을 잘 보존하고 정성스레 가꾼 덕분에 프랑스의 일급 문화관광 자원으로 꼽힌다.

   

그러나 르와요몽은 단순히 옛 모습을 보여주는 여느 수도원ㆍ고성과는 다른 데가 있다. 건물들과 주변의 자연을 통틀어 하나의 문화예술 센터처럼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연중무휴로 문을 여는데다 파리와 가깝다는 지리적 이점까지 작용해 늘 방문객이 넘치는 이곳은 특히 날씨가 좋은 요즘에는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넘쳐 입구가 잘 보이지 않을 지경이다.

   

1228년 생 루이(Saint Louis) 왕의 명에 의해 지어진 르와요몽 수도원은 시토(Citeaux)파 수도원으로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왕들이 예배를 보던 곳이다. 그래서 지금도 이곳은 '왕의 수도원(L'abbaye royale)'으로 불린다.

   

혁명 이후 트라바네 후작의 손에 넘어갔다가 방직공장으로 전락하는가 하면 제1차 세계대전 때에는 부상병들을 위한 병원이 되기도 했던 르와요몽이 서서히 예술의 향기를 피워올리기 시작한 것은 40여 년 전 한 예술애호가에 의해서였다. 물론 1936년 결성된 '문화로비(Foyer culturel)'라는 모임이 이곳에서 음악회를 열었던 것이 먼 배경이 돼주기는 했다.

   

이 수도원을 사들인 앙리 구앵과 이자벨 구앵 부부(Henry-Isabel Gouin)는 '메세나 부부'로 불릴 정도로 열성적인 음악 애호가이자 예술 후원자였다. 이들은 1964년 '인간 학문의 진보를 위한 르와요몽 재단(La Fondation Royaumont pour le progres des Sciences de l'Homme)'을 설립, 본격적인 메세나 활동에 들어갔다.

   

초기에는,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예술보다는 학문 중심이었다. 특히 언어학에 관심이 깊어서 변형생성문법의 창시자인 노엄 촘스키를 중심인물로 내세워 많은 활동을 펼쳤으며 여러 나라의 시(詩)를 다양한 언어로 번역하는 데 많은 지원을 제공했다.

   

최근에는 학문보다 예술, 특히 음악과 무용에 치중하고 있다. 예술가들의 창작, 공연, 실험, 연구를 지원하는 '프로페셔널리즘의 심화(深化)'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연수, 세미나, 레지던스 등 각종 프로그램이 연중 끊이지 않는다. 본관 안내 데스크에 쌓여 있는 각종 안내 쪽지와 소책자만 해도 족히 한 아름은 돼보였다.

   

그렇다고 일반대중에 소홀한 것은 결코 아니다. '정원으로 난 창문' '음악 시즌' 등 갖가지 프로그램으로 관객을 부르고 있으며 어린이들을 위한 특별 프로그램도 다채롭게 준비돼 있다. 이렇게 생산된 작품과 프로그램들은 수도원을 벗어나 프랑스 전역을 돌고 있으며 종종 외국에서도 소개된다. 글자 그대로 문화 발신지(發信地)가 되고 있는 것이디.

   

음악부문에서는 성악ㆍ현대음악ㆍ중세음악ㆍ즉흥음악 등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수도원 회랑 쪽에 붙은 테이야르 드 샤르댕 홀(Salle de Teihard de Chardin)에서는 신학자의 이름을 딴 방답게 종교음악 수업이 진행되고 있었고 회랑의 벽들에는 이곳에서 작업을 했던 세계 각국 음악가들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수도승들의 식당으로 쓰이던 방에서는 한동안 먼 곳에 옮겨가 있던 파이프 오르간을 다시 가져다 설치하고 있었다.

   

무용은 음악보다는 꽤 늦게 1995년 추가됐다. 수전 버지 무용단을 상주무용단으로 두고 있으며, 버지 여사의 지도 아래 매년 즉흥ㆍ구성ㆍ레퍼토리 워크숍이 열린다. 이 워크숍에는 한국의 젊은 무용가들도 참여한 바 있다.

   

23일 저녁에는 1주일간의 즉흥무용 워크숍을 마무리하는 미니공연이 있었다. 옛 수도원 화장실을 개조한 꼭대기 층에서 춤을 감상하는 것은 각별한 체험이었다(시토파 수도승들에게는 무조건 침묵해야 하며 무엇이든 다함께 해야 하는 계율이 있었는데 화장실 사용도 물론이었다. 그것도 같은 시간에 전원이 함께해야 했다. 이날 저녁 무용수들은 아주 기하학적이고 미니멀한 동작으로, 그러나 틈틈이 그들의 상상력을 변주로 삽입하는 방식으로, 수 백 년 전 수도승들의 침묵을 이어가고 있었다).

   

음악 무용 외에 여러 장르의 어울림, 특히 학문과 예술의 만남을 중시하는 것이 르와요몽재단의 독특한 발상이다. 언어와 이미지, 동작과 소리의 조화와 충돌을 통해 인간의 지성을 제고하고 인식의 지평을 넓힌다는 창립 이념을 충실히 지키고 있는 셈이다. 버지 여사 역시 무용 세미나에 즐겨 고고학자나 기호학자들을 초빙한다. 예술이란 기호로 뭔가를 표현하는 것이라는 그의 평소 생각과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르와요몽 재단의 재원은 다양하다. 부부가 남긴 유산 외에 수도원 유지ㆍ보수에 필요한 정부 보조금도 다소 받고 있고, 그밖에 다양한 민간 후원금을 확보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즉흥무용 공연이 끝난 뒤 만난 앙리 구앵 위원회(르와요몽 재단 후원기업들의 모임) 회장인 베르나르 투블랑(Bernard Toublanc) 씨는 "프랑스에는 메세나 활동이 워낙 다양하지만 르와요몽의 경우는 수도원이라는 공간의 역사적 의미를 살려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 동시에 순수 문화예술의 요람이 되고 있다는 점이 매우 독특하다"고 평가했다.

   

프랑스 주요 공연장들의 연합체인 센 나시오날의 한 지역 모임(L'Apostrophe Scene nationale de Cergy Pontoise et du Val d'Oise) 대표이기도 한 그는 "설립자의 이념에 감동받아 후원회를 맡고 있다"고 말했다.

   

또 앙리 구앵 위원회와는 별도로 26세 미만의 젊은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기업ㆍ개인들의 모임인 '르와요몽의 친구들 협회'에도 무려 525명이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현재 르와요몽은 프랑스 정부가 지정한 16개 '만남의 문화센터(Centre culturel de rencontre)' 가운데 하나이다. 이 센터는 고성이나 수도원 등 색다른 역사적 배경을 지닌 장소들 가운데 문화적 만남의 장이 되고 있는 곳들이다.

   

상근직원 60명, 연간예산 650만유로(2004년) 규모의 재단 업무를 총괄하는 프랑시스 마레샬(Francis Marechal)은 "프랑스의 문화력을 지탱해주는 요인은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르와요몽과 같은 진정한 메세나 정신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수도원 안쪽에는 재단 설립자 부부의 딸이 살고 있다. 70세가 좀 넘었는데 언젠가 세상을 떠나면 그의 거처도 재단으로 귀속된다고 한다. 그가 자신의 사후 그 공간을 '문화적으로 멋지게' 꾸밀 방도를 놓고 자주 재단측과 머리를 맞댄다고 하니 예술사랑도 대를 잇는 모양이다.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1285570

   

캐병쉰 국유본 간첩 색희, 노엄 촘스키 운운하면서 바퀴벌레 떡치는 소리를 해대지만, 메세나 운동을 후원하는 것은 록펠러이다. 이제 한국인이라면 이런 기초 정도는 마스터하고 사회 생활할 때도 되었다. 언제까지 쪽발 돼중, 쪽발 놈현이라는 국유본 장난질에 세뇌되어서 살아갈 것인가.

   

시토파하면 성당기사단인데, 프랑스 왕과 유착? 웬 시츄에이션? 할 법도 하다. 허나, 역사 공부를 달리 하는가? 사건별로 보면 이해가 안 가지만, 이 사건들을 모아 역사적으로 살피는 것이 역사인 게다.

   

가령 인드라의 국제유태자본론은 그간 음모론이 사건 별로 말하는 것을 뛰어넘어 시대적으로, 역사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해서, 국유본이 마치 맑스를 대하듯 주의깊게 인드라를 대하고 있다는 것 정도를 파악해야 한다.

   

자, 진도 나가자.

   

시토파는 초기 베르나르두스 시대에는 정말 잘 나갔다. 베르나르두스가 성당기사단 이상으로 신성력도 있던 모양이다. 가는 곳마다 조용기적 이적을 일으키니 베르나르두스 인기는 교황을 뛰어넘을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베르나르두스는 교황을 탐내지 않았다. 수도원장에 머물렀다. 그것이 더욱 더 베르나르두스 인기를 배가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시토회 교리상 재산도 탐내지 않고, 교황을 할 수 있음에도 명예도 탐하지 않으니 베르나르두스 인기는 상상 초월이었다. 여기에 황무지를 일구어 유민들을 끌어들여 실업자 해소에 나서니 예수가 재림한 것이 아닌가 싶을 지경이었던 게다. 허나, 베르나르두스는 겸허했다. 그는 늘 예수의 밑에서 순종하는 태도로 임했다. 

   

허나, 나이를 먹어가면서 베르나르두스 신성력이 사라졌다. 베르나르두스는 조용히 절망하다 삶을 마친다. 이후 시토회는? 개판 오분 직전이 된다. 대표적인 예가 베르나르두스 생애에 지켜지던 베르나르두스 건축양식이 사라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처럼 12세기 말엽에 이르면, 시토회는 베르나르두스 바램과 달리 프랑스왕과 교황의 충실한 부대로 활약한다. 해서, 이후 프랑스왕들이 시토회 예배당에서 예배를 보았던 것이다.

   

헌데, 푀양파가 이러한 시토파에서 독립한 푀양 수도원에서 일을 도모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이겠는가.

   

적대적인 라파예트와 미라보를 함께 결속시킨 푀양파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외국 간섭에 대한 경계이다.

   

푀양파에 속한 각 인물들의 이해 관계는 다양했을 것이다. 허나, 중요한 건, 모두들 소탐대실을 동상이몽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혁명 직후 레닌처럼 독일 등 외국에 굴욕적으로 양보하는 선을 고려했을 것이다. 사실 이 정도가 영국의 입장이었다. 실제로 1795년 네덜란드 왕이 런던으로 망명하자 네덜란드 왕과 동인도회사를 통합시키지 않았던가. 또한, 혁명 직후, 영국이 프랑스에게 시종일관 내세운 조건이 해외 식민지 양도이기도 했다.  

   

예서, 사후에 규정한 지롱드당이니 하는 것은, 인드라가 볼 때, 큰 의미가 없다고 본다.

   

중요한 건, 왜 자코뱅당과 푀양당으로 나누었는가 하는 점이다.

   

하고, 프랑스 혁명 주체 세력에서 분화한 그룹이 왜 하필 푀양당을 자임하고 있는가이다.

   

혁명세력 중 일부가 자코뱅당에서 푀양당으로 움직인 이유는, 푀양당파가 프랑스를 프랑스 왕의 소유물이 아니라 인민의 나라로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푀양파는 그 이름에서 보듯 영국은 물론 유럽 대륙으로부터의 프랑스 독자성을 지키는 길이요, 프랑스 군주제 개혁의 산증인이었다.

   

해서, 푀양파를 넘어서기란 자코뱅파에선 힘든 일이었다.

   

허나, 그 일을 이루어내는데, 로베르피에르였던 것이다. 누구보다 프랑스적이며, 루소적인 인물이 자코뱅파의 대표가 되니 푀양파 위상이 크게 추락할 수밖에!!!

   

*****

   

아이고, 오늘은 술 취해서 여기까지. 요즘 며칠 감기를 앓아서요. 감기 조심하세요.

   

   

   

미라보 다리 / 기욤 아폴리네르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은 흐르고

우리의 사랑도 흐른다

마음속 깊이깊이 아로새길까

기쁨 앞엔 언제나 괴로움이 있음을

   

밤이여 오너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만 머문다

   

손에 손을 잡고 얼굴 마주하며

우리의 팔 밑 다리 아래로

영원의 눈길 지친 물살이

천천히 하염없이 흐른다

   

밤이여 오너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만 머문다

   

사랑이 흘러 세느 강물처럼

우리네 사랑도 흘러만 간다

어찌 삶이란 이다지도 지루하더냐

희망이란 또 왜 격렬하더냐

   

밤이여 오너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만 머문다

   

햇빛도 흐르고 달빛도 흐르고

오는 세월도 흘러만 가니

우리의 사랑은 가서는 오지 않고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만 흐른다

   

밤이여 오너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만 머문다

   

- 시집『알콜』(1912)

   

   

 http://youtu.be/uiNQehY2VZk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