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29 : 프랑스 혁명과 위그노, 록펠러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1/12/18 01:55

http://blog.naver.com/miavenus/70126752590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29 : 프랑스 혁명과 위그노, 록펠러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1/12/18 

   

1. 프랑스 혁명과 위그노

2. 위그노란?

3. 칼뱅과 교회개혁사

4. 프랑수와 1세와 모나르코마키

5. 루이 14세와 낭트 칙령 폐기

6. 위그노와 록펠러

   

1. 프랑스 혁명과 위그노

   

프랑스는 오늘날 육천만 명 인구를 보유하고 있다. 헌데, 그 면적은 남한의 다섯 배요, 한반도의 두 배 이상이다. 남한 인구 기준으로 환산하면, 프랑스는 삼억 명 땅에 육천만 명이 사는 것이다.  이런 프랑스에 오늘날 프로테스탄트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은 80여만 명이며, 그중 40여만명이 위그노이다. 하면, 나머지는 가톨릭일까. 그렇지는 않다. 가톨릭이 인구의 51% 차지하니 나머지 인구 상당수는 무신론자이거나 이슬림교인 게다. 아무튼 오늘날 40여만에 불과한 위그노는 종교개혁운동이 한창이던 1598년에는 인구 2,000여만영에 125만명으로 프랑스 인구의 6%~10%를 차지하였다. 하면, 소수에 불과한 이들이 종교적으로나 정치경제적으로나 왜 중요한 것일까.

   

"루이 14세가 가톨릭을 프랑스의 국교로 삼기위하여 낭트 칙령을 폐기하자, 수많은 위그노들이 네덜란드, 영국, 프로이센 등지로 망명하였다. 일부는 미국 (현재의 뉴욕캐롤라이나지역)으로 건너가기도 했다. 상공업은 물론, 여러가지 기술을 지니었던 그들이 망명하자, 프랑스의 경제는 몰락하고 말았다. 이것이 후에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는 원인을 가져왔다."

http://ko.wikipedia.org/wiki/%EC%9C%84%EA%B7%B8%EB%85%B8

   

프랑스 혁명이라 할 때는 1789년 혁명, 1830년 7월 혁명, 1848년 2월 혁명을 이야기하거나, 여기에 1871년 파리콤뮌까지 넣기도 하지만, 보통은 1789년 혁명을 말한다. 해서, 다른 프랑스 혁명과 구분하기 위해 1789년 혁명을 프랑스 대혁명이라고 부른다.

   

프랑스 대혁명은 왜 일어났을까. 하나, 종교적으로 신구교간 갈등이 있었다. 둘, 정치적으로 입헌군주제 등 근대 정치적 요구가 비등하였다.  셋, 경제적으로 국가 재정 위기가 심화하였다.  예서, 위그노는 프랑스 대혁명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 직접적인 원인을 낳게 한 종교, 정치, 경제 면에서 모두 영향력을 미치는 세력이었다. 

   

   

2. 위그노란?

   

해서, 오늘은 위그노에 관하여 말하고자 한다.

   

"1)위그노의 어원 '위그노(Huguenot)'는 16C 프랑스의 칼뱅 파 교도에 대한 호칭이다. 위그노라는 말의 어원에 대한 정설은 없다. 여러 개의 어원이 제시되어 왔으나 그 중에 어원으로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는 것은 독일어 Eidgenossen이다. 이것은 '연합한 자' 혹은 '동맹한 자'를 뜻한다. 이처럼 위그노가 '동맹'을 의미하는 말에서 파생된 원인은 그것이 주로 제노바의 동맹시 프라이부르그와 베른을 중심으로 전파되어 그 인근 지역인 리옹과 노르망디 랑그독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프랑스의 옛 왕인 위그 까페(Hugh Carpet)의 '위그'에서 파생되었다는 설도 있다. 이는 기즈家 사람들이 경쟁자인 부르봉가 사람들을 조롱하기 위해 부르는 별명이다. 기즈 가문의 조상은 816년에 왕위에 오른 샤를마뉴이고 부르봉가의 조상은 988년에 왕이 된 위그 까페이기 때문에 왕위 계승의 정통성이 자기들 보다 떨어진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부르봉가 사람들을 위그 까페의 후손이라는 뜻으로 위그노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한편 huguenot 즉 중세에 사용된 아주 작은 화폐단위가 어원이라는 설이다. 이는 프랑스의 칼뱅 파 교도들을 위그노만큼 아무 가치가 없는 존재라고 비아냥거리기 위해 이 단어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위와 같이 위그노에 대한 어원은 통일되지 않고 있으며 어원으로 제시되는 말들의 의미가 상이하다. 그러나 위그노라고 불린 프랑스 개신교들은 위의 단어들이 내포하는 속성들을 가지고 있다. 당시 카톨릭교도들이 개신교들에게 나타낸 적대감 멸시 경멸 등의 의미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2) 위그노 종교개혁의 시작 위그노의 종교개혁운동은 16세기 초에 시작되어 16세기 중엽에 절정에 달한다. 그러나 프랑스의 종교적 개혁의 움직임은 이미 루터 이전부터 있었다. 특히 루터주의의 영향을 받은 파리 대학의 르페브르는 성서 원전을 연구하고 불어판 성서를 간행하였다. 또한 그는 루터의 영향을 받아 참된 종교적 구원은 개인의 신앙에 의해서만 획득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1508년 성경의 원전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논문을 썼고 불어 성서를 간행하기까지 했다. 프랑스에 전파된 루터주의는 귀족과 노동자들에게 확산되었다. 이렇듯 종교개혁이 일어날 사상적 토대는 상당히 일찍 형성되었지만 실제적인 위그노들의 개혁 운동이 시작된 것은 상대적으로 늦은 편이다. 16세기 초엽 르페브르와 같은 대 사상가의 존재와 인쇄술의 공헌으로 종교개혁의 사상은 루터의 독일과 거의 같은 때에 보급되었으나 본격적인 종교개혁 운동이 시작된 것은 독일이나 스위스에 비하여 20년이 늦다."

http://ask.nate.com/knote/view.html?num=559455

   

위그노는 프랑스 프로테스탄트, 혹은 신교도를 말한다.

   

하면, 위그노가 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며, 어떤 배경을 지니고 있을까.

   

하나, 역사적인 배경이다.

   

이베리아반도는 유럽과 아프리카와의 통로가 되어 있었고, 온갖 종족이 이 땅에 거주하였다. BC 3000년대 아프리카로부터 햄족계의 이베리아족이 이주하고, 이어서 BC 1000년 무렵부터 중부유럽 방면의 인도유럽계의 켈트족이 이주해 왔다. 하여, 이베리아반도 중부에서 두 민족의 피가 섞였고, 이것이 에스파냐 민족의 근간을 이루는 켈트 이베리아족이 되었다.

   

헌데, 이런 이베리아족과 켈트족의 이주보다 먼저 피레네산맥의 북방에 있던 종족은 바스크족이라는 학설까지 있는 것이 바스크족이다. 바스크족이 알타미라동굴의 벽화를 남긴 구석기시대인의 직계라고 보는 학설이 그것이다. 바스크족은 이베리아 반도와 프랑스 서남부에 걸쳐 있다.   http://ko.wikipedia.org/wiki/%EB%B0%94%EC%8A%A4%ED%81%AC 

   

또한, BC 1100년 무렵에는 페니키아인이 카디스에 상업기지를 건설하였고, BC 6세기에는 그리스인이 발렌시아 주변에 식민시를 세웠으며, 같은 무렵에 카르타고가 바르셀로나에서 카르타헤나에 걸쳐 식민시를 건설하였다. 카르타고는 또한 안달루시아지방으로부터 에스파냐 중부까지 침입하여 이 땅을 지배하였다. BC 3세기에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에 포에니전쟁이 일어나 패배한 카르타고는 로마인에 의해서 추방되고, 에스파냐의 지중해연안은 로마의 지배 아래 놓였다.

   

게르만족 이동에 쫓긴 켈트인이 프랑스 서남부와 이베리아 반도인 카탈루냐(아라곤), 바스크, 가스코뉴에  새롭게 정착했다.  뿐만 아니라 브르타뉴어도 켈트어인데, 브르타뉴는 본디 영국으로 건너간 켈트인이었는데, 게르만족에 쫓겨 섬에서 프랑스 브르타뉴로 온 켈트인이다. 심지어 바스크어도 켈트언어로 분류한다.  

   

다시 말해, 프랑스에서 위그노가 많이 사는 지역은 역사적으로 온갖 종족 전시장이었다는 점이다.

   

정리하면, 이 지역은 게르만적인 면, 로마적인 면과 함께 켈트, 바스크, 수메르/페니키아/카르타고에 이슬람적인 지배를 잠시 받기도 하여 그 영향까지 섞인 유럽의 가나안 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셈이다.

   

둘, 종교적인 배경이다.  

   

"알렉산드리아교회의 사제(司祭) 아리우스는, '성부·성자·성신(성령)의 세 위격(位格)은 대등하며, 오직 성부만이 영원하다. 성자는 모든 피조물과 같이 창조되었을 뿐, 신이되 피조물과 신의 중개역할을 하고, 신이 그에게 세상을 구원하도록 선택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의 은총을 입어 하느님의 양자로 선택받은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의 주장은 성자를 반신(半神)으로 전락시켰으며, 성자만이 인간과 하느님을 화해시킬 수 있다는 구속 개념을 훼손하였다고 반박하였다. 니케아 공의회(325)에서는 이같은 아리우스의 주장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배척하였으나, 그뒤 아리우스와 그 일파는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 접근하는 데 성공하여 콘스탄티우스 2세 아래서는 전 로마제국을 지배할 만큼 세력을 떨쳤다. 콘스탄티우스 2세 때 아리우스파는 '성자는 성부와 같지 않다'라고 과격한 입장을 선언하여 온건파를 자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엄격(嚴格) 아리우스파와 반(半)아리우스파의 분열이 일어난 데다 황제의 죽음(361)까지 겹치자 급속도로 몰락하였다. 제1회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는 니케아 신경(信經)을 재확인하고 아리우스파 문제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뒤로도 아리우스파는 제국의 북쪽 게르만인(人)들 사이에 널리 퍼져 게르만인의 민족적 종교라고도 할 만한 위치를 얻었다. "

[출처] 아리우스파 [派, Arianism ] | 네이버 백과사전

   

종교 개혁사

http://blog.naver.com/freemcmxcix/10123946925

   

게르만족은 아리우스파 기독교를 신봉한 편이었다. 헌데, 갈리아땅으로 온 게르만 족 중 하나인 살리 프랑크족의 왕 클로비스는 481년 교회와 프랑크족, 로마인들의 지지를 받으며 프랑크 왕국을 건설했다. 클로비스가 메로빙거 가문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가 세운 왕조를 메로빙거 왕조라고 한다. 496년, 그는 신하 약 400명과 함께 정통 아나타시우스파로 개종하여 과거의 로마 귀족과 로마 교회와 제휴했다.  클로비스가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원주민들과의 종교적 마찰이 줄어들었고, 로마 교황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클로비스가 개종한 이유는 갈리아 중복부 지역이 전략적 요충지여서 로마 문화가 융성하였고 이로 인해 로마화한 켈트족이 많이 살았기 때문에 이들 원주민과의 융합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프랑스 서남부의 서고트왕국, 동남부의 부르군트 왕국이 게르만족의 민족종교이다시피 한 아리우스파를 가톨릭으로 개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이유는 프랑스 남부 지역에서의 켈트족들이 로마화하지 않았던 데서 찾아야 할 듯싶다. 

   

카타리파가 중세에 융성한 것도 프랑스 남부 지역이다.  카타리파 또는 알비파는 12세기에서 13세기까지 프랑스 남부의 알비와 툴루즈를 중심으로 활동하다 가톨릭이 이단으로 정죄한 기독교 교파이다.

   

이러한 반 가톨릭적인 종교적 전통 때문인지 이 지역에서 독일 루터파 종교개혁운동에 적극적으로 호응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바로 이런 이유로 칼뱅파, 혹은 위그노파는 다른 교파에게 아리우스파라는 비난을 받곤 했는데, 칼뱅은 정작 아리우스파에 적대적이었다.

   

셋, 경제적인 배경이다.

   

위그노인은 은행가, 상인, 수공업자가 많았다. 이 시기 위그노인에 중산층 시민이 많은 이유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1. 프랑스 남부는 기원전부터 지중해 무역이 활발했던 지역이다. 2. 이베리아 반도는 13세기까지 이슬람이 지배하던 지역이다. 이 시기 유대교로 개종한 카르타고 후예들이 맹활약한다. 헌데, 1492년 당시 유럽에서 가장 선진적인 기술을 보유하였던 유태인을 에스파냐 종교재판소가 추방한다. 이 사건으로 유태인들이 해외로 이주하였다. 이들 중에는 로스차일드 가문처럼 독일로 이주한 이들도 있고, 네덜란드로 이주한 이들도 있는데, 일부는 신분을 속이고 프랑스로 이주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다른 지역은 몰라도 바스크 지역은 가능했다. 정치적 피신을 상호 받아주는 지역이었다. 유태인 몽테뉴가 이런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3. 칼뱅의 청부론, 부의 축적을 옹호한 교리가 중산층 환영을 받았다.

   

3. 칼뱅과 교회개혁사

   

http://blog.naver.com/gracepark69/80119986582

   

"프랑스 북부 피카르디 지방 누아용 출생. 아버지는 지방 귀족의 비서 ·경리 등으로 일한 소시민이었다. 1523~1528년 파리에서 신학을, 그 후 오를레앙 부르주의 대학에서는 법학을 공부했다. 1532년 세네카의 《관용에 대하여》의 주해(註解)를 발표하여 인문주의자로서의 학문적 재능을 인정받았다. 1533년 에라스뮈스와 루터를 인용한 이단적 강연의 초고를 썼다는 혐의를 받고, 은신해 지내면서 교회를 초기 사도시대의 순수한 모습으로 복귀시킬 것을 다짐하고 로마 가톨릭 교회와 결별했다. 그는 이른바 '돌연한 회심(回心)'에 의해 복음주의적(福音主義的), 즉 프로테스탄트주의의 입장을 명확히 했다. 1535년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의 이단에 대한 박해로 신변의 위험을 느낀 그는 스위스의 바젤로 피신하여, 그 곳에서 1536년 복음주의의 고전이 된 《그리스도교 강요(綱要: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를 저술하였다. 이것은 박해받고 있는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티즘에 대해 변호하고 그 신앙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무렵, 제네바종교개혁을 위해 함께 일할 것을 G.파렐에게서 요청받고 그의 종교개혁 운동에 참가하였다. 그런데 처음부터 신권정치(神權政治)에 기반을 둔 엄격한 개혁을 추진하려 했기 때문에 파렐과 함께 추방되어,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로 갔다. 그는 그곳에서 설교자(說敎者) ·신학교수로 있으면서 《로마서 주해》를 저술, 추기경 사드레와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는데, 3년 후에는 상황의 변화로 다시 제네바에 초빙되어 거기서 《교회규율》(1542)을 제정하고 교회제도를 정비하여, 세르베토스 등의 인문주의자들을 누르고 제네바의 일반 시민에게도 엄격한 신앙생활을 요구하여, 신정정치적 체제를 수립하였다. 제네바는 그 후 종교개혁파의 중심지로서 전 유럽에 영향을 끼쳤다." 

[출처] 장 칼뱅 | 네이버 백과사전

   

   

'프랑스 고백서' 또는 위그노도피장소의 이름을 따서 '라로셸신앙고백(Confessio de La Rochelle)'이라고도 한다. 기본구조는 칼뱅이 초안했고 1559년에 그의 제자들이 완전히 정리한 것이다. 여기에 서명한 사람은 왕비인 나바라의 요한나(Johanna von Navarra), 제독이던 드 콜리니(De Coligny)와 그리고 베자(Theodor Beza)였다. 이 고백서는 1556년에는 카를 9세의, 1571년에는 앙리 4세의 재가를 받았으며, 1559년에는 제네바의 성서출판사에서 인쇄되었고 교회법과 더불어 하나의 신앙고백서로 성장했다. 위험천만한 시대에 생겨났고 여러 번 피로 인(印)을 친, 40가지 조항으로 된 이 고백서는 사도신경의 구조에 따라 신학적인 문제는 물론 국가권력에 대한 문제를 다루었다. 특징은 예정론인간론그리스도론 사이에 위치하고 율법론이 그리스도론과 더불어 성화론(聖化論)과 교회론 사이에 위치한다. 네덜란드 고백서와 공통되는 점은 창조사역과 섭리사역을 통한 계시와 하느님의 말씀과 정경(正經)을 통한 계시 등 이중적인 하느님 계시를 강조한 점이다. 이런 점에서 이 고백서는 나중에 생겨난 고백서의 모범이 되었다. 이 고백서는 인간 이성은 영적인 어두움 때문에 신(神)을 인식하는 데 있어서 왜곡될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창조물을 통한 계시가 절대적이지 못함을 지적하고 있다.

[출처] 갈리아 신앙고백서 [信仰告白書, Confessio Gallicana ] | 네이버 백과사전

   

"2. 칼빈과 프랑스의 위그노 교회

   

프랑스의 개혁주의 교회는 유럽의 그 어느 국가에서보다 극심한 박해를 경험했고 이 과정에서 전 유럽에 칼빈의 신학과 교회의 이상을 확산시킨 신앙적 피난민들을 많이 배출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칼빈주의자들은 칼빈 자신이 그랬듯이 박해와 피난의 상황 가운데 그들이 추구한 성경적인 교회 개혁을 위한 신앙고백과 실천적 노력을 경주했다.

   

칼빈이 본격적으로 종교개혁 운동에 동참하기 이전부터 프랑스에서는 인문주의와 루터의 영향으로 종교개혁 신학을 지지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그러나 프랑스의 종교 개혁 운동이 구체적인 교회의 설립과 통일적인 운동으로 나타나는 데 있어서는 칼빈의 영향이 컸다. 칼빈은 그의 모국이었던 프랑스 교회의 개혁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지속적인 서신 교환을 통해 고난 당하는 고국의 개혁주의 교회들을 위로하고 격려했다. 칼빈이 제네바에서 지도력을 확립한 1555년 이후부터는 1559년 설립된 제네바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칼빈과 제네바에 있던 프랑스 피난민 교회는 고국의 개혁 교회를 세우고 지원하는 일에 박차를 가했다. 그 결과 괄목할만한 수의 개혁주의 교회들이 급속하고 설립되었다. 1556년 최초의 개혁주의 교회가 파리에 세워진 이후 불과 3년 뒤인 1559년 5월 25일에서 29일까지 파리에서 최초의 개혁파 교회 총회가 모였을 때 72개의 교회 대표들이 그 총회에 참석했다. 파리 총회에서는 제네바 교회를 모델로 삼아 갈리아 신앙고백(Gallican Confession)과 치리서를 채택하여 통일성 있고 신학 위에 기초한 교회의 연합을 기했다. 칼빈은 이 신앙고백의 초안을 작성했고 그의 제자인 앙토완느 드 라 로쉐 샹디외(Antoine de la Roche Chandieu, 1534-1591)가 이 초안을 수정해 최종본을 완성했다. 샹디외는 제네바에서 칼빈의 제작 된 이후 1556년경 파리에 창설된 개혁파 교회의 두 번째 목사였으며 파리를 중심으로 설립된 개혁주의 교회들의 조직화 되는데 결정적이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그는 1562년 종교 전쟁이 발발했을 때와 1572년 발생한 성 바돌로뮤 축일 대학살 때 11년 간 제네바와 로잔에서 피난민의 삶을 살아야 했는데 그의 이런 피난민의 삶은 프랑스의 칼빈주의자들이 경험했던 고난과 피난의 삶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박해의 상황 가운데 제정된 갈리아 신앙고백은 35개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서문에 프랑스의 "고난 받는 신자들"과 이 고백을 듣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헌정한다고 기록하였다.

   

파리 총회 이후 프랑스의 개혁주의 교회는 더 급속도로 성장하여 1561년 라 로셀에서 총회가 모였을 때에는 이미 2000여 개가 넘는 교회들이 설립되었으며 칼빈주의적 신앙 고백을 따르는 회중의 수는 150만에서 200만을 헤아리고 있었다. 이런 급속한 위그노 교회의 성장은 많은 목회자들의 수급을 필요로 하였고 칼빈의 제네바 아카데미는 이 수요를 채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공식적인 신학 교육 기관이었다. 그러나 철저한 목회자 양성을 추구한 제네바 개혁자들의 성향과 아카데미의 영세성으로 인해 1567년까지 제네바가 프랑스에 제공할 수 있었던 목회자의 수는 120명 정도에 불과했다.

   

프랑스의 내의 개혁주의 교회들은 초기에는 주로 수공업자, 숙련공, 중산층 상인들을 중심으로 확대되어 갔으나 이후 교회가 급속도로 부흥하면서 많은 귀족들 역시 칼빈주의 사상에 동참했다. 발로아 왕조를 이어 프랑스의 왕조를 형성한 부르봉 가문과 프랑스 제독이었던 가르파르 드 콜리니(Gaspard de Coligny, 1519-1572)가 속해 있던 몽모겡시 가문의 여러 인물들도 칼빈주의를 따르는 위그노 교회에 합류하였다. 프란시스 1세 사망 이후 강력한 지도력을 행사하지 못한 앙리 2세와 프란시스 2세의 치세 가운데에서도 위그노 교회와 귀족들은 계속해서 로마 카톨릭 교회를 지지하는 귀족들로부터 불이익과 핍박을 당했다. 그들은 이런 상황을 극복하고자 1560년 암보아즈 음모 사건과 같이 폭력을 동원해 왕에 대한 카톨릭 귀족들의 영향력을 제거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칼빈은 그들과 다른 입장을 견지했다. 녹스나 불링거, 심지어 베자까지도 교회 개혁을 위한 정치적 변혁을 지지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칼빈 자신은 정치적 혁명을 통한 개혁 교회의 수립과 확장을 지속적으로 반대한 것이다. 그는 군사적 정치적 혁명보다는 고난을 감수하거나 신앙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라면 망명할 것을 장려했다.

   

프란시스 2세가 1560년 사망한 이후 프랑스 왕위를 계승한 어린 왕 샤를르 9세의 섭정을 담당했던 캐더린 드 메디치(Catherine de Medici, 1519-1589)는 1561년 파와시에서 종교 회의를 소집해 갈등 상황에 있는 로마 카톨릭파 귀족들과 위그노파 귀족들을 대화를 통해 화해시키려 해다. 그러나 결코 타협할 수 없는 종교적 신념의 차이를 가지고 있던 양측은 화해에 이르지 못했고 프와시 회의는 1562년의 관용령을 통해 위그노들의 신앙을 보호하는 정도에 성과만을 낳았다. 이런 관용 정책도 잠시였고 강력한 로마 카톨리파 귀족이었던 기즈 가문과 그 배후에 있는 스페인의 압력에 정치적 위협을 느낀 캐더린은 결국 로마 카톨릭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선회했다. 그 결과 1562년 3월 기즈 공작이 이끄는 토벌대가 바시에서 예배를 드리던 위그노 70여 명을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졌고 이 사건을 계기로 본격적인 프랑스의 종교전쟁이 시작되었다. 칼빈이 계속해서 폭력과 전쟁을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위그노파 귀족들은 무력으로 저항했다. 위그노와 카톨릭 세력 사이에서 30년간 8차례에 걸쳐 벌어진 프랑스의 종교 내전은 사실 종교적 신념의 차이 때문만 아니라 프란시스 1세 치하에서 세력을 키운 로렌 지역 출신의 기즈 가문과 이에 맞선 부르봉 가문 사이의 정치적 알력이 크게 작용하였다. 기즈 공작과 앙주의 앙리 - 이후 앙리 3세 - 의 음모로 벌어진 1572년의 성 바돌로뮤 축일 대학살은 콜리니와 그가 대표하던 위그노 귀족들의 세력이 무너지게 되는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1572년 8월 24일 발생한 성 바돌로뮤 축일 사건은 캐더린의 딸 마가렛 발로아와 위그노였던 안톤 부르봉의 아들 앙리 부르봉의 결혼식을 축하하려 모인 위그노파 귀족들 중 200 여명을 기즈 공작이 주동한 카톨릭 세력이 학살한 사건이다. 파리에서 벌어진 이 사건 이후 왕실의 방관 속에서 프랑스 전역에 걸쳐 위그노와 개신교도들을 향하 학살이 잫애되었고 이후 7000명에서 9000명의 위그노들이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건 후 프랑스의 정치적 지형은 크게 변화했고 위그노들은 정치적 영향력을 급속히 상실했다. 앙리 3세에 이어 왕위를 계승한 앙리 부르봉마저 격렬한 권력 투쟁의 과정에서 자신의 왕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 로마 카톨릭 신앙으로 다시 개종했다. 비록 위그노파 귀족들의 계속되는 투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관용책으로 발표된 낭트 칙령 이후 일정 기간 위그노들은 종교적 자유를 획득해 내기도 했지만 프랑스의 칼빈주의자들은 16세기 후반 이후 거의 대부분의 시기를 소수자로서 당하는 핍박 가운데 보내야 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개혁주의 교회는 핍박과 차별 가운데서도 남부 프랑스를 중심으로 신앙적 일관성을 지키고 전수하기 위해 자신들의 개혁주의적 신앙 고백에 기초한 교회의 설립 노력을 꾸준히 지속했다.

http://www.apologia.co.kr/lib/16950

   

   

   

http://jbjoon63.blog.me/30094352914

   

   

   

루터와 칼뱅의 16세기 종교개혁운동과 중세 교회개혁운동이 차이가 있다.

   

"본격적인 종교개혁은 M.루터에 의해서 비롯되었으나 루터 이전에도 개혁의 선구자로 불리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민중 사이에서 성서적 신앙을 인도한 프랑스의 발도, 롤러드파(派)를 이끌던 영국의 위클리프, 위클리프의 사상을 이어받아 독립운동을 일으킨 보헤미아의 후스, 윤리적 쇄신을 시도하였다가 끝내 순교한 피렌체사보나롤라를 들 수 있다. 그러나 르네상스적 인문주의와 종교개혁과는 본질적으로 성격을 달리한다. 즉, 르네상스적 인문주의는 예술적이고 귀족적이어서 참으로 역사를 변혁할 힘을 갖지 못하였다. 이와는 달리 종교개혁운동은 깊이 민중의 마음을 포착하여 역사를 움직였다. 마찬가지로 근대의 서곡이라 할 르네상스와 종교개혁과는 그 출발점과 역사상 미친 영향면에서 볼 때 근본적으로 다르다."

[출처] 종교개혁 [宗敎改革, Reformation ] | 네이버 백과사전

   

16세기 종교개혁운동이 깊이 민중의 마음을 포착하여 역사를 움직인 연유는 무엇일까. 경제이다. 15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유럽 경제의 중심은 지중해 무역을 독점했던 이태리였다. 물론 중세 온난화와 십자군 원정 시기에 지중해와 북해를 내륙으로 잇는 프랑스 상파뉴 지역에서 교역이 활발하여 프랑스 미남왕이 한때 교황을 좌지우지할 때도 있었으나 중세온난화가 지나간 뒤에는 롬바드 지역이 재부상하여 유럽 경제의 핵이 된 것이다. 그 중심에 메디치 가문이 있고. 허나, 베네치아가 독점하면서 활로를 찾아 대서양 교역에 나섰던 이베리아 국가들이 대항해시대를 열면서 유럽 경제의 중심이 롬바르디아에서 이동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경제 중심이 움직이니 정치 권력이 변화하고, 변화한 정치 권력에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종교 변혁, 사상 혁신이 필수적인 것이다.

   

이를 루터적, 칼뱅적 언어를 인드라 고유의 패러디적 발언으로 말하자. 영적 사도(의인)와 영적 교회와 영적 정부를 총괄하는 하늘 나라는 중세에도 있었다.  허나, 중세에는 죄 많은 지상의 정부와 만나지 못했다.  문제는 죄 많은 지상의 정부이다. 루터는 지상의 권력을 움직인다는 발상에 대한 경계가 유난했다. 인간의 유한한 사고가 말썽을 부릴 것을 우려하여 거리를 두었다. 칼뱅 역시 유사했지만, 루터보다는 좀 더 과감했다. 정치적으로 억압을 받는다면 투쟁하기 보다 망명하라.

   

교회는 대표적으로 스코틀랜드 장로제처럼 민주적으로 운영해야 한다. 허나, 인간이 만든 결과에 회의하라. 인간이 만들었기에 온전할 수 없다. 인간의 무오류성이야말로 인간이 가장 경계해야 할 바벨탑적 교훈이다.  동시에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더라도 지상과 합일해야 한다. 완전하나 인간이 이해하기에는 인간이 여전히 야만인 수준과 다를 바 없기에 어렵다.  아무리 영웅 자질을 타고났더라도 시대가 원하지 않는다면 영웅이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 반면, 시대가 원하는 요구를 이해하더라도 신의 뜻이 아니라면 역시 영웅은 세상을 1그램도 변화시킬 수 없다.

   

이러한 정치종교사상을 전 세계적으로 가장 잘 설명한 신화가 단군 신화이다. 하늘 사람과 땅 사람이 만나 결혼하여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것이다. 세상은 하늘 사람만으로도 땅 사람만으로도 이룰 수 없다. 하늘과 땅 사람이 합심해야 세상을 만든다. 세상에 이런 정치종교사상은 수메르 신화와 비견할 만큼 흥미로운 신화임이 틀림없다.

   

   

4. 프랑수와 1세와 모나르코마키

   

"[편집] 관료정치 개혁

1539년, 프랑수아는 자신의 성에서 빌레르 코트레 칙령을 반포함으로써 왕국의 행정 언어를 라틴어 대신 프랑스어로 바꾸었다. 이 칙령은 필수적으로 성직자들에게 탄생, 결혼 그리고 죽음과 설립을 모든 교구의 호적 등기소에 등록하라고 요구하였다. 이것은 유럽에서 이용할 수 있는 친자 관계와 더불어 인구 유동 통계의 첫 번째 기록을 정착시켰다.

[편집] 종교

프랑수아의 통치 기간에 서유럽 기독교의 분열이 일어났다. 마르틴 루터로마 가톨릭교회의 타락과 방종을 비난하자 이 소식은 곧 프랑스를 포함한 많은 유럽 국가에 널리 퍼져 프로테스탄트 운동의 형성을 가져오게 하였다. 처음에는 그가 가장 사랑하는 누이 마르그리트 드 나바르의 영향 아래 프랑수아는 새로운 운동에 비교적 관대하였으며, 한층 더 깊이 생각한 후 많은 독일 제후들이 생각을 바꾸어 그의 적 카를 5세에 반대하면서 그것이 정치적으로 유용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개신교에 대한 프랑수아의 태도는 1534년 10월 17일 밤에 일어난 '벽보 사건' 후에 바뀌었다. 개신교도들은 파리 시내와 다른 주요 도시의 여러 장소에 미사를 부정하는 격문을 붙이고 다녔으며, 심지어 국왕의 침실문에까지 붙였다. 이 벽보를 작성한 사람은 개신교의 목사 앙트완느 마르코르트였다. 대다수 열렬한 가톨릭교도들은 벽보의 내용을 읽고 격분하였다. 프랑수아도 프로테스탄트 운동을 자신에 반대하는 음모로 보았으며, 프로테스탄티즘 신봉자들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개신교도들은 모두 투옥당하고 처형되었다. 어떤 지역에서는 마을 전체가 파괴되었다. 인쇄물은 검열을 받았으며 프로테스탄트를 이끈 칼뱅과 같은 이들은 강제로 국외추방을 당했다."

http://ko.wikipedia.org/wiki/%ED%94%84%EB%9E%91%EC%88%98%EC%95%84_1%EC%84%B8_(%ED%94%84%EB%9E%91%EC%8A%A4)

   

인드라가 보기에 프로수아 1세는 루이 14세의 롤모델이 아니었나 싶다.

   

이러한 전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 문제에서는 1504년 재정 개혁과 1508년 세금 동결 및 세금 징수과정 개선 등 많은 노력을 기울여 프랑스 국내에서 큰 지지를 받아 1506년 투르에서 열린 삼부회에서 루이 12세는 '국민의 아버지'(프랑스어: Père Du Peuple)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http://ko.wikipedia.org/wiki/%ED%94%84%EB%9E%91%EC%8A%A4%EC%9D%98_%EB%A3%A8%EC%9D%B4_12%EC%84%B8

   

반면, 루이 12세와 앙리 4세가 오버랩하고^^!

   

역사에는 '만약에'가 없지만, 잠시 팩션화시켜 프랑수와 1세가 영국왕 헨리처럼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독립을 했다면 프랑스 역사는 물론 세계사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프랑수와 1세 누이 마르그리트 드 나바르도 위그노였던 만큼 카를 5세와 맞서 영국 국교회 방식으로 프랑스 국교회로 가는 것이다. 교회 수장은 프랑수와 1세가 되고. 스코틀랜드 피의 매리 여왕이 프랑스와 아무런 연고를 지니지 못할 수도 있고~! 물론 존 녹스의 장로교 투쟁이 있기에 역사가 달라지지 않았을 가능성도 크다. 스코틀랜드 장로교는 박해와 탄압 속에서 영국 국교도로부터도 멀어졌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도 처음부터 신교도가 많지 않았다. 엘리자베스 초반 집권기에는 가톨릭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허나, 후반으로 갈수록 신교도가 많아졌다는 것이다. 해서, 역사가들은 프랑스에서 신교가 뿌리내리지 못한 이유를 위그노파가 프랑스 남부에만 치중한 데서 찾기도 한다. 즉, 프랑스 수도인 파리를 장악했어야 했다고 한다. 이는 무슨 말인가. 프랑스 왕이 결심해야 할 문제였던 게다.

   

허나, 이 문제는 혁명적인 발상이다. 메로빙거 왕조 이후 왕조의 정통성을 가톨릭에 의존했던 만큼 영국 헨리왕처럼 왕 자신에게 절실한 문제가 아니라면, 다시 말해 순교를 각오하지 않는다면 어려운 일인 게다. 프랑수와 1세가 국교회를 선언하지 않고 가톨릭 교회를 행정기구화하는 정도에서 멈춘 것이 결국 프랑스 혁명에서 루이 16세 처형이 이루어진 배경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여, 위그노파에서 결국 모나르코마키가 나온 것이다. 화해할 수 없는 적대 노선.

   

"폭군방벌론자(暴君放伐論者)'라고도 한다. 유럽에서 16세기에 무력저항권론을 주창하여 군주에 대한 무력투쟁을 정당화한 프로테스탄트, 카톨릭 양방의 정치사상가의 총칭. '군주에게 도전하는 자들'이라는 의미의 그리스어에서 합성된 라틴어로 바클리(William Barclay)에 의한 비판을 위한 명명(命名)(『왕국ㆍ왕권론』 1600)이다. 즉 구교와 군주가 결합했을 때, 이 군주는 인민과의 계약을 위배한 폭군이므로, 방축살해(放逐殺害)하는 것도 정당하다는 이론이다. 무력 저항권론은 종교개혁에 이은 박해ㆍ전쟁 속에서 프로테스탄트가 형성하였다.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가 가장 체계적이며, 대표적인 저작은 오트만(Francois Hotman)의 『프랑코 갈리아』(1573), 베이즈(Théodore de Béze)의 『종속적 통치자의 권리』(1574), 듀플레시 모르네(Philippe du Plessis Mornay)의 『폭군에 대한 권리주장』(1579)이다. 그들은 신분제의회나 종속적 통치자(상급귀족이나 지방ㆍ도시의 대표)에 의해 인민ㆍ국가주권이 행사되는 제한군주정론을 전개하여 무력저항권을 변증하였다. 프랑스에서 프로테스탄트의 왕을 추대할 가능성이 발생하자 카톨릭도 교황지상주의 하에서 프로테스탄트의 이론을 도입한 무력저항권론을 형성하였다. 대표적 저작은 예수회 마리아나(Juan de Mariana)의 『군주ㆍ군주교육론』(1599)이다.

   

모나르코마키는 왕권신수설이나 보댕(Jean Bodin)의 주권론에 기초한 절대군주정론과 대결하고, 다음 세기의 로크(John Locke)에 영향을 미쳐 입헌주의의 선구가 된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727062

   

예서, 특히 중요한 것은 1579년에 등장한 위그노파의 '폭군에 대한 항변'이다. 이 작자 미상의 '폭군에 대한 항변'은 신교도들 사이에서 엄청난 반향을 낳았다. 왕 살해를 정당화했다. 왜 이러한 논의가 필요했을까. 앙리 2세의 죽음과 무관치 않은 듯싶다.

   

http://blog.daum.net/sirius2375/819

   

칼레의 시민으로 유명한 영국 식민지 칼레를 해방시킨 앙리 2세가 위그노 탄압을 강화하겠다고 선언한 직후 참가한 마상시합에서 눈에 찔려 결국 죽는다. 이 죽음을 둘러싸고 위그노 암살 음모론이 비등하면서 가톨릭 측에서 맹공격에 나서니 위그노 전쟁을 낳았으며, 앙리 3세와 앙리 4세가 가톨릭 자객에게 연달아 암살당하게 되었던 게다. 이러한 선상에서 왕의 암살이 사실이든,아니든 신학적 논란을 낳았을 것이다.

   

해서, 이는 영국에서도 출판하여 영국에서 찰스 1세를 처형하는데, 이론적 근거를 마련했다는 평가가 있을 만큼 베스트셀러가 되어 이후에도 몇 차례에 걸쳐 재출판되었다고 한다. 하여, 프랑스 혁명 당시 루이 16세에 대한 처형은 불가피했던 것이다. 부르봉 왕가에 대한 삼백 년간의 원한이 있었으니까. 헌데, 이를 성당기사단과 연관시키는 건 코웃음칠 만큼 어줍잖은 음모론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5. 루이 14세와 낭트 칙령 폐기

   

루이 14세는 1785년 낭트 칙령을 폐기한다. 이로 인해, 프랑스 위그노 인구 백여만 명 중 이십여만 명이 해외로 이주했다고 한다. 허나, 이는 과장된 숫자라고 본다.

   

가령 신교 측 입장에서는 위그노인 숫자를 늘이고 싶을 것이다. 해서, 여러 자료를 보았는데, 유태인보다는 뻥이 약했다. 대부분 2배 뻥튀기 정도 한다. 또한, 1572년 '성 바르톨로메오 학살' 과정에서 숨진 사람도 팔천여 명 정도로 보이는데, 17,000명 정도로 간다. 반면, 유태인은? 열 배 뻥튀기가 기본이다. 한 명 죽으면 열 명이 죽었다고 난리인 게 유태인이니까^^! 그래서일까. 어떤 자료는 유태인 식대로 희생자를  30,000, 100,000명까지 잡기도 한다^^!

   

루이 14세가 낭트 칙령을 폐기할 때 해외 이주를 금했다. 스페인 추방령으로 인해 에스파냐 경제가 흔들리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해서, 많은 수의 위그노인이 당시 해외로 이주했다고 보기 힘들다. 위그노인을 가장 많이 받았다는 영국도 이만 명 정도이다. 독일도 그 정도 된다고 할 때, 영국, 네덜란드, 독일, 스위스, 미국 등 아메리카, 남아공 정도로 보면, 아무리 많아야 십만 명 정도이다. 가령 남아공에는 200여명만 이주했다고 하니까. 그조차 남아공 백인의 1/6을 차지했다나~!

   

더군다나 해외 이주할 정도라면 대부분 중산층인 게다. 같은 위그노파여도 농민은 해외 이주할 엄두를 낼 수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프랑스에 남아 있던 위그노 농민이 1700년대 루이 14세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해서, 인드라가 정리한다면, 낭트 칙령 폐기로 해외로 이주한 위그노인이 20만명이라는 것이 아니라 프랑스 위그노파 탄압으로 그간 해외로 이주한 위그노파 인원이 이십만명 선이 아닌가 싶다. 이백 년간 이십만 명이면 적당하다 본다.

   

하면, 왜 루이 14세는 종교 다원주의 정책이라 할 수 있는 낭트 칙령을 폐기해야만 했을까.

   

이에 대해서는 뚜렷한 정설이 없는 것 같다.

   

하나, 용기병을 위그노파 지역에 투입한 뒤 사건 사고를 일으켜서 위그노파가 들고 일어나자 이를 빌미로 폐기했다는 가설. 여기에는  과정만 있을 뿐, 루이 14세가 폐기한 배경을 알 수 없다.

   

   

둘, 맹트농 후작 부인 연루설.

   

http://blog.daum.net/elara1020/8464454

   

현재까지 불확실하면서도 다른 가설이 신통치 않아 지지받고 있는 가설이다. 맹트농 가계는 신교도 가문인데, 맹트농 자신이 가톨릭이 될 만큼 열성적인 신도였다고 한다.

   

하면, 루이 14세는 왜 맹트농을 총애했던가. 1680년대에 이르르면 루이 14세가 총애하던 콜베르도 죽는다. 또한, 왕비도 죽었다.

   

http://blog.daum.net/elara1020/8464418

   

루이 14세가 맹트농을 총애한 것은 성적인 이유가 아니라 정신적인 이유였다. 루이 14세는 1680년대에 이르러 방탕했던 자신을 반성하고 경건한 삶을 살기 시작했는데, 그때 루이 14세가 가장 의존한 인물이 맹트농이었다. 해서, 종교적인 이유로 낭트칙령을 폐기했다고 볼 수 있다.

   

   

인드라가 보기에는, 루이 14세가 테레즈 왕비를 조강지처로 나름 아낀 듯싶다. 테레즈 왕비와 맹트농 공통점은 미모와는 거리가 있는 후덕한 몸집의 소유자다. 가끔 우리 주변에 매우 잘 생긴 남자랑 결혼하는 여자가 의외로 안 생긴 여자들이 좀 있는데, 이유는 간단하다. 잘 생긴 남자들이란 여자랑 수도 없이 엮이고 꼬였을 터이니 마음 착한 여성을 선호한다는 이치. 아무튼 루이 14세는 맹트농과 비밀결혼까지 했다. 왕비 테레즈를 연상시키는 것일까? 해서, 루이 14세 전반기를 마자랭, 중반기를 콜베르, 하반기를 맹트농이라 말할 수도 있는 셈이다.

   

셋, 루이 14세의 과대망상

   

루이 14세가 낭트 칙령을 폐기한 것은 루이 14세의 과대망상이 결정적인 것이지, 종교적 문제는 부차적인 문제였다는 것이 인드라 가설이다.

   

왜 과대망상인가.

   

이는 루이 14세에 대해 자세히 언급해야 하므로 나중에 따로 프랑스혁명과 루이 14세로 장을 할애할 것이다.

   

루이 14세는 세종대왕 만큼 숱한 여성들을 섭렵했던 엄청난 정력가요, 하루에 8시간은 반드시 정무를 볼 만큼 일 중독증 환자였다. 이런 루이 14세가 여성에게 정신적인 의존을 할 수 있지만, 그 여성에게 정무를 모두 맡길 만큼 바보가 아니었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루이 14세는 재정총감없이 스스로 모든 것을 하려고 했다. 리슐리외서부터 콜베르에 이르기까지 왕의 권력이 분산화되는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 루이 14세가 어린 시절 지방을 떠돌며 생활해야 했던 경험이 큰 역할을 한 셈이다.

   

바로 이 대목. 즉, 루이 14세가 그 모든 것이기 위해서는 그 모든 것이기 위한 정신적인 위로가 필요했고, 그 위로를 맹트농이 해주었을 뿐이다.

   

게다가 마자랭과 콜베르로 이어지는 천재적인 재정 관료들의 노력으로 프랑스는 당대 유럽 최강자로 떠올랐다. 허나, 루이 14세는 그 모든 업적을 자기 것으로 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전 시기는 섭정처럼 자신이 관련 업무를 잘 몰라 맡긴 것이고, 이제 자신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나선 셈이다.

   

하면, 그것이 왜 낭트 칙령 폐기인가.

   

이는 지난 프랑스 역사를 살펴야 하는데, 간단히 삼총사에 등장했던 리슐리외 추기경 이야기만 하면 된다. 리슐리외가 신교도를 탄압했던 것은 종교적인 이유가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였다. 국가 통합을 위한 것이었다. 실제로 리슐리외는 전쟁이나 외교에서는 종교가 없다고 할 만큼 유연했다. 해서, 잉글랜드와도 동맹을 맺는 등 실용적 노선을 보여주었다. 이는 리슐리외만이 예외가 아니다. 심지어 메디치 가문의 딸들이자 프랑스 왕비들도 종교에 관해 관용적 노선을 추구했던 것이다. 이러한 전통은 콜베르까지 이어져온 정책이다. 결국 루이 14세는 국론 통일, 국가 통일의 일환으로 낭트 칙령을 폐기한 것이다.

   

게다가 이웃 왕국 사정이 하나같이 좋지 않은 데 비해, 루이 14세는 교황청으로부터 가톨릭의 유일한 안전판이라 부를 수 있는 상황. 욕심을 내지 않으면 인간이 아닐 수 있다.

   

하여,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루이 14세는 바벨탑적 욕망으로 빛의 속도로 빨려들어가 결국 프랑스 대혁명의 도화선이 되고만 것이다. 콜베르가 살아 있을 때까지 루이 14는 신의 축복을 받은 듯싶었다. 실제로 여러 행운이 겹쳐 그리 믿는 백성들이 날로 늘어났고, 이것이 루이 14세가 세상 귀족 중에서 가장 다스리기 어렵다는 프랑스 귀족들을 복종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허나, 콜베르 사망 이후, 그 자신이 모든 것을 다 하기 시작했을 때, 프랑스 국운은 그때부터 쇠퇴하기 시작했다.

   

   

   

6. 위그노와 록펠러

   

위그노의 해외 이주는 세계사적인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영국으로 이주한 위그노는 야만국 영국에 엄청난 보물을 안겨다 주었다. 잠사 의류산업, 야채과일 가꾸는 법, 가구 제조술 등을 영국인에게 전수했다. 매뉴펙처  방식 등을 전하여 영국 산업혁명의 모체라고까지 말하기도 한다.

   

네덜란드로 이주한 위그노는 유태인과 함께 네덜란드 상권을 장악했다. 독일로 이주한 위그노는 독일 기계공업의 아버지가 되었다. 록펠러 가문은 위그노 탄압으로 프랑스에서 독일로 이주한 위그노 가문이었다.  이 당시 미국으로 간 위그노도 많았는데, 미국에서도 위그노는 강한 영향을 끼쳤다. 가령 미국 초기 재무장관 해밀튼 어머니가 위그노였다. 워렌 버핏 가문도 위그노이다. 루즈벨트의 외할아버지, 워렌 델라노는 300인 위원회 회원이며, 중국 광동성에서 러셀 공사 총책임자로 있으면서 마약 거래를 담당했다. 무엇보다 스위스로 이주한 위그노는 오늘날 스위스 시계공업(정밀기계)과 스위스 은행이 되었다.

   

루이14세는 자금을 빌리기 위해 낭트 칙령 폐기 이후 스위스로 이주한 위그노와 거래를 해야 했기에 비밀 엄수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스위스 은행의 고객 비밀주의가 시작한 것이다. 이것만 보더라도 루이 14세가 종교적인 이유로 낭트 칙령을 폐기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해서, 프랑스 혁명 당시 프랑스 혁명을 지지한 귀족이나 중산층이 있다면, 상당수는 위그노이거나 위그노에 심정적 동조인 자들이다. 스위스인 네케르가 재정총감이 된 것도 위그노의 위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상당수 입헌군주제파도 위그노와 연관이 깊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해, 프랑스 혁명 당시 우파라고 부르던 이들 상당수가 위그노와 직간접적인 관계였다.

   

이것이 위그노의 빛이라면 그림자는 없을까.

   

프랑스 해적이란 위그노 해적이었다. 위그노는 사략선을 가지고 있어 에스파냐 선박을 효과적으로 약탈할 수 있었다. 이들은 신의 이름으로 가톨릭 이교도 무리의 재산 약탈을 정당화했던 것이다. 위그노 해적이 어찌나 위력이 있던지 1685년 무렵까지 프랑스는 콜베르의 해상 무역 강화 정책으로 영국, 네덜란드 못지 않게 해상에서 위력을 떨칠 수 있었다. 허나, 낭트 칙령 폐기 이후 프랑스는 바다를 영국에 영원히 내어주어야 했다. 물론 영국이 해상 제해권을 완전 장악하는 시기는 1740년대이지만, 그 단초는 낭트 칙령 이후부터인 게다.

   

헌데, 이 시기 해상 무역 주수입원이란 노예 무역이었다. 서아프리카에서 흑인을 짐짝처럼 창고에 쑤셔박고 유럽이나 중동, 아메리카에 팔아먹었다.

   

밀무역의 선두주자이기도 했다. 국가로 돌아가야 할 세금을 중간에서 착복하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프랑스에서 세금을 대납해주고 고리의 이자를 뜯는다는가 하는 다기다양한 악랄한 방식으로 대부업을 하며, 국가 재정을 파탄시키는 데에 혁혁한 공을 세운다. 

   

특히 소금은 국가 산업이었는데, 각 영지마다의 관세가 다른 점을 이용해서 위그노 소금업자들이 폭리를 취했던 것이다. 해서, 프랑스 혁명 당시 영지간 관세를 철폐하자 자코뱅 혁명의 고향, 브르타뉴에서 오히려 반혁명이 일어났던 것이다. 관세 철폐하지 말라고~! 금주법 시대가 지속되기를 바라는 미국 마피아의 원조격이었던 게다.

   

정리하면, 지난 오백여년간 유태인과 위그노는 유대교와 프로테스탄트 관계처럼 사이가 좋았다. 유태인과 위그노 가문끼리 심심찮게 결합하는 예가 많았다. 허나, 어느 순간부터 둘의 관계가 어긋나기 시작한다.

   

1973년 빅터 로스차일드에서 데이비드 록펠러로의 국유본 권력 교체 이후인 게다.

   

국유본 뉴라이트파는 위그노를 중심으로 브레진스키, 요한 바오로 2세로 이어지는 폴란드 커넥션을 통해서 가톨릭을 중립화시켜 국유본 노비네파 유태계를 압박해왔다. 오백년간의 동맹 체제가 깨진 셈인가? 아니면, 이 역시 짜고 고스톱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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