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25 : 프리메이슨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1/12/08 11:19

http://blog.naver.com/miavenus/70126006255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25 : 프리메이슨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1/12/08

   

"18세기초 영국에 창설되고, 이후 세계에 퍼진 박애주의 단체로 단순히 메이슨(Mason)이라고도 한다. 비밀결사는 아니지만 입사식이 비공개이기 때문에 부외자에게는 전모가 파악되기 어렵다. 한편 세계시민적 박애, 자유, 평등의 실현을 지향하고, 정치적 전체주의, 배타주의, 광신을 물리쳤다. 회원은 서로 <형제>라고 부르며, 입사식에서도 성서에 서약하듯이 기본적으로는 그리스도교와 대립하지 않지만, 신을 <전세계의 지고의 건축사>라고 하듯이 이신론적(理神論的) 경향을 가진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631472

   

1717년에 영국에서 창설한 프리메이슨은 국유본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탄생한 오늘날의 시민단체이다. 1717년 이전까지 영국에서의 석공 조직은 존폐의 기로에 서 있을 정도로 위기였다. 허나, 이후 프리메이슨은 국유본의 후원하에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한다. 이는 영국과 스코틀랜드 병합을 강화하고 제국주의 토대를 안정화하려는 금융자본가와 영국 귀족의 이해, 동인도회사 = 국유본의 이해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1. 기원

   

"프리메이슨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설이 있는데, 솔로몬의 신전건설시대의 건축사 집단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도 있다. 이는 아마 입사식때 새로운 가입자가 체험하는 <히람전설>이라는 통과의례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프리메이슨의 전설에 의하면, 솔로몬의 신전건립의 동량 히람은 그 명성을 질투한 3명의 직인에게 습격당하여 마지막 사람에게 살해되었다. 3명의 암살자들은 히람의 사체를 흙에 묻고, 그 위에 아카시아의 작은 가지를 심었다. 히람의 직인들이 스승을 찾으러 나섰을 때, 이 아카시아가 표시가 되어서 사체를 발견했다. 입사식 때 새로운 가입자는 정규, 직각정규, 해머로 맞아서 히람의 3중의 죽음을 체험하고, 거기에서 <부패>를 거쳐서 아카시아 나무로서 재생한다는 상징극을 연기하였는데 이 연금술적 변용의 비의를 통해서 <히람 전설>과 일체화하는 것이다. 덧붙여서 히람의 <3중의 죽음>은 암살자인 3명의 직인이 각각 상징하는 물적세계, 심적세계, 영적세계로 된 세속적 세계에서 그가 죽음을 통해서 해방되고, 어둠(매장)을지나서 신적세계로 부활하기 위한 죽음이며, 따라서 오시리스나 예수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존재의 전면적 파멸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재생•변용을 고지한다>.

    

   

   

"히람 Hiram 

히) '히람' חירם, '히롬' חירום; '아히람'אחירם의 단축형 -"{나의}형제는 고귀하다"

1. 히람1세 - 두로의 왕(B.C. 986~935년)으로 다윗 및 솔로몬과 우호적인 동맹 관계에 있었다. 히람의 통치 기간에 두로는 페니카아(베니게) 연안에서 가장 유력한 도시로서 번성한 상업 중심지가 되었다. 히람은 광범위한 건축활동과 키프러스. 시칠리. 사르디니아 등과 같은 지중해의 섬들을 식민지화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또한 멜카르트(Melgart)와 아스다롯 신을 위한 새로운 신전들을 세우고, 멜카르트를 기념하는 새로운 순례 절기를 제정하였다.

   

구약에 의하면 히람의 이스라엘과의 첫 접촉은 예루살렘 정복 직후로 이때에 그는 다윗성의 건축을 위해 기능공들과 원자재를 공급하였다(삼하 5:11; 대상 14:1). 다윗에 대한 히람의 오랜 호의는 왕상 5:1에서 증명되고 있다.

   

이러한 우호적인 관계는 다윗을 계승한 솔로몬 시대에도 계속되었다. 히람은 성전 건축을 위해 각종 자재를 제공하였고, 그 대신에 솔로몬은 밀, 올리브 기름. 포도주 등을 공급하였다(왕상 5:11; 대하 2:10). 이러한 상업적인 동맹은 평화 조약에 의해 더욱 공고해졌으며(왕상 5:12). 페니키아의 공주와 솔로몬의 결혼으로 상징화되었던 것 같다(참조. 11:1). 20년 후에 솔로몬은 히람에게 갈릴리 지역의 성읍 20을 주었는데 이는 분명히 성전 건축을 위한 히람의 재정적 지원에 대한 답례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 내륙 지역에 대해 불만족하였고, 그 때문에 이곳의 이름을 가불 곧 '쓸모 없는 땅'이라고 불렀다(왕상 9:베~14). 그런데 이 성읍들은 빚을 갚을 때까지의 담보물이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왜냐하면 대하 8:2에서 솔로몬은 히람이 그에게 준 이 성읍들을 재건하고, 이스라엘 자손이 재정착하도록 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히람은 솔로몬과 연합하여 이스라엘의 항구에서 온게벨에 기지를 두고, 해상 무역을 활발히 하였다. 이때에 그가 페니키아의 숙련된 사공들을 보내어 항해와 선박 건조를 돕도록 했던 것 같다(왕상 9:26~28; 10:11,22).

   

히람의 죽음으로 그의 아들 바알에셀(Baal- eser)1세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역대하에서 그의 이름은 후람(1)으로 나오고 있다(예. 대하 2:3, 11~12; 8:2, 18; 9:10, 21).

   

2. 성전의 장식을 위해 솔로몬에 의해 고용된 두로의 금속 세공인이다(왕상 7:13~14, 40, 45).

   

출처: 아가페성경사전"

   

솔로몬 시대 히람은 둘이다. 하나는 페니키아 왕이며, 다른 하나는 프리메이슨 시조인 성전 건축가 히람인데, 둘 다 페니키아인이다. 성전 건축과 같은 중요한 일을 페니키아인과 공유한다는 것은 다양한 추정을 가능하게 할 정도로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이는 국유본 백문백답에서 이미 논한 사안이니 넘어가기로 한다.

   

페니키아와의 동맹은 솔로몬이 처음이 아니며, 다윗 왕 때부터의 동맹을 승계한 것이다. 또한, 솔로몬의 왕비 이사벨은 페니키아인이다. 페니키아인은 당대 최고의 조선술과 건축술을 자랑하고 있어 이집트 등 여러 나라에 레바논산 최고급 목재와 함께 기술을 수출했다.  

   

"그 외에 중세의 십자군 기사단, 특히 템플기사단을 기원으로 하는 설이나, 드루이드교의 거석숭배로 거슬러 올라가는 설, 16~17세기의 헤르메스주의 결사를 전신으로 생각하는 견해 등이 있는데, 모두 후에 도입된 것이다. "

   

예서, 히람 전설 등은 모두 1717년 이후 급조한 것이다. 템플기사단에 관해서는 이미 말씀드린 바 있다. 히람 전설도 근대에 와서 삼위일체를 흉내낸 사이비 전설, 가짜 전설이다. 이유는 석공 길드라는 본연의 목적을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즉, 1717년 이후 가입하는 회원들은 대부분 석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717년 이후 가입하는 회원들 대부분은 신비주의적 낭만주의나 정치적 출세를 위해 가입하였기에 프리메이슨 간부들이나 회원들이 입회식 같은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입회식 말고는 프리메이슨다운 일이란 영혼의 1그램도 없었기에^^! 해서, 아무 일도 없잖아? 속았구나, 하고 탈퇴하는 사람들도 많았던 것이다.

   

2. 어설픈 신화, 프리메이슨

   

하면, 왜 히람의 전설을 강조해야만 했을까. 프리메이슨이 석공 조직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당대에 처한 상황 때문이다.

   

1717년 이전까지 영국 석공 조직은 큰 위기에 처한다. 이유는 1660년대에 일어난 런던대화재 때문이다.

   

"당시 찰스 2세는 불길이 번지는 방향에 폭약을 놔 집을 파괴해 불길을 막도록 했다. 마침 동풍도 잦아져 나흘 만에 화재가 진화됐다. 곧 방화범이 밝혀졌다. 방화범은 프랑스 출신의 로버트 허버트였다. 그는 유죄 판결을 받아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 화재는 로마 대화재, 도쿄 대화재와 함께 3대 대화재로 꼽혔다. 런던 대화재는 세인트폴 대성당을 포함해 런던의 80%를 파괴했으며 10만명의 이재민을 발생시켰다. 그러나 사망자는 단 9명뿐이었다.

   

그런데 이 사고 이후 런던은 전화위복을 맞이했다. 1년 전 페스트로 5만명 이상 사망했지만 화재 후 쥐가 모두 타 죽으면서 전염병이 감소한 것이다. 또 이를 교훈 삼아 벽돌 건물을 지어야 하는 조례가 만들어졌고 화재 보험이 생겼다.

   

또 시민들의 빠른 재건 요구로 인해 19세기 런던은 구식과 신식 건물이 뒤섞인 상태로 남겨졌다. 그러나 이는 현대역사가 뒤섞인 매력적인 도시로 인식되는 결과를 낳았다.

   

한편 1989년 1월 토마스 패리너 후손 기업 런던 베이커에서 제과점에서 일하던 하녀의 실수로 화재가 발생했다며 320년 지나 사과했다.

   

1666년 1월 프랑스에 패한 영국은 프랑스에 좋지 않은 감정으로 프랑스인인 로버트 허버트를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었다. 그러나 사과 발표에도 진범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런던을 뒤바꿔놓은 대화재의 범인은 과연 누구일까."

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1101021132561001

   

1666년 9월 2일부터 7일까지 5일 동안 일어난 런던대화재는 도시의 대부분을 태웠다. 공공기설, 89개 교회, 민간 가옥 1만 3200호가 불탔다. 허나, 인명피해는 8명. 이후, 도시 재건축은 목조건물을 금지하고 연와조·석조로 바꾸었다. 오늘날 런던에 가면 만나는 대부분의 건축물이 이 시기 재건한 것이다.

   

문제는 만일 이 대화재가 음모라면, 누구의 음모냐는 것이다. 당시에는 가톨릭 음모였다는 소문이 난무했다. 허나, 사실일까. 인드라는 만일 음모가 있다면 찰스 2세를 반대했던 세력이 만든 소문으로 본다. 흑사병과 런던대화재로 인해 왕정복고파 가톨릭 찰스 2세의 인기가 추락했다. 이는 신교 세력과 금융 자본에 유리한 것이다. 즉, 금융 자본과 신교 세력이 꾸민 흉계인 게다. 찰스 2세의 득이라고는 페스트 박멸 효과인데, 런던대화재 이후 페스트가 사라진 면이 있지만, 그럼에도 당시 쥐가 들끓던 런던 슬럼가는 불에 거의 타지 않았다는 점을 볼 때, 찰스 2세 음모론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아무튼 런던대화재 이후로 런던 시가지가 재건축되는데, 유일하게 재건축을 하지 못하는 건축물이 있었다. 그것이 교회였다. 이유는 왜일까.

   

"도시를 재건해야 했지만 런던만의 석공으로는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영국 전역에서 숙련공들이 모여 위대한 건축가 크리스토퍼 렌 Christopher Wren경 휘하에 결집했습니다. 그러나 건축붐은 일었지만 교회를 짓는 일은 거의 중단되었고 이로 인해 프리메이슨 지부도 침체 되었습니다. 남아있던 지부들도 의식과 상징을 거의 잃어버렸습니다. 연례행사가 중단되었고 런던의 지부도 4 곳이나 버려졌습니다. 1700년이 되자 영국 전체에 지부라고는 6개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프리메이슨 반대 운동도 일어났습니다. 1698년 런던에 유인물이 배포된 사건이 대표적인데 Mr. Winter라는 인물이 서명한 이 유인물은 '신심 깊은 모든 이들에게 프리메이슨이라 불리는 이들의 해악과 악마적 관행을 경고'했습니다. 그리고 '이들 악마적인 부류는 비밀리에 만나 자신의 믿음 외에는 모든 것에 반대하겠다는 맹세를 한다. 이들은 신에 댛나 두려움을 잊게 만드는 반그리스도이다'라고 썼습니다.

   

   

크리스토퍼 렌 경의 초상화

   

<영국 과학자, 건축가. 윌트셔의 이스트 노일 출생, 런던 교외 험프튼 코트에서 사망. 목사의 아들로서 어릴 때부터 과학적 재능을 나타내고, 수학자 발명가로서도 알려졌으며, 1657년엔 옥스퍼드 대학교 천문학 교수가 된다. 1662년 펜브르그, 카렛지 예배당을 설계하고, 건축에 열중하여 셸든 기념강당(1664~1669)를 건설하는 한편,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의 개축의원이 된다. 1666년 런던 대화재 후 즉시 바로크적 런던 재건도시계획을 제안하여 1669년 건설 총감이 되고, 세인트 폴 대성당(1675~1710) 50여 교구성당, 그리니치병원(1696~1789), 햄튼코트 궁전신관(1689~1694)등 매우 많은 건조물을 건조하였다. 17세기 후반 영국을 대표하는 건축가로서 간결 웅위한 고전주의를 기조로 이탈리아, 프랑스의 바로크적 경향을 자유로이 수입함과 동시에 구조 시공면에 독자의 발명 재능을 표지하여 후세 건축가에게 영국건축의 규범을 제시함으로써 추앙 받았다.>

   

결국 프리메이슨의 미래를 위협하는 상황을 맞아 런던의 네 개 지부 회원들은 영국 내 모든 지부를 총괄하는 총지부를 만들기로 결정했습니다. 1717년 2월(보통의 백과사전에 기록된 프리메이슨의 결성일입니다) 네 지부가 모두 모였습니다. 성 베드로 성당 근처 구스 앤 그리디론Goose and Gridiron술집에서 모이던 지부1, 파커스 레인의 크라운Crown술집에서 모이던 지부2, 코번트 가든의 애플트리Apple Tree술집에서 모이던 지부3, 웨스트민스터 채널 로우Channel Row의 러머 앤 그레이프스Rummer and Grapes술집에서 모이던 지부4가 그들이었습다. 규모가 가장 큰 것은 회원 수가 70명 가량인 지부 4였습니다. 1717년 6월24일(이날은 프리메이슨의 수호성인 중 하나인 세례자 성 요한의 날이기도 합니다)에 구스 앤 그리디론에 다시 모인 이들은 지부 3의 회원인 엔서니 세이어Anthony Sayer를 총지부장으로 선출합니다. 이후로 1722년 존 몬태규John Montagu공작이 선출되고 278년동안 총지부장 지위는 귀족이나 왕족이 독점합니다."

http://blog.naver.com/miavenus/memo/70126004044

   

일부 프리메이슨 해설서에는 런던대화재로 교회 설계도가 모두 잿더미가 되었기 때문으로 말한다. 허나, 그따위 비밀스런 설계도, 열쇠, 성배, 코드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인드라는 지금껏 프리메이슨 석공이 아니면 교회 건축물을 만들 수 없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또한, 크리스토퍼 렌이 프리메이슨이었다는 이야기도 들어본 바가 없다. 결국 이유는 엉뚱한 데에 있었다.

   

석공 길드의 쇠퇴.

   

런던대화재로 석공 수요는 엄청났다. 해서, 전국의 석공을 다 불러모은 것이다. 문제는 전국 석공을 다 불러모아도 런던 재건 사업을 제대로 추진할 수 있겠느냐는 점이다. 결국 무작정 상경하여 놀고 있는 사람들 천지였으므로 이들을 재건축 사업에 투입했을 것이다. 예서, 문제가 발생하는 셈이다.

   

석공 일이란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다. 교회 하나 건축하는 것이 반백 년 보통 걸린다. 석공인은 자신들 가치를 위해 극소수의 석공인으로 유지하였으며. 하루 노동 시간을 제한한 것이다. 헌데, 만일 석공 일을 개나 소나 할 수 있다면?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바로 이 대목을 중시해야 한다. 런던 재건축이 대부분 목재가 아닌 석재로 이루어진 공사였다. 뿐만 아니라 런던 대화재 이후로 런던 이외의 지역에서도 목재가 아닌 석재 건축이 보편화되어가기 시작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엄청난 숫자의 석공이 필요했다. 해서, 석공 숫자를 늘여야 했는데, 석공 조합으로서는 난색을 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숫자를 늘이면 석공 기득권이 약화한다.  이에 석공이냐, 자유인이냐 하고 부담을 느낀 석공 중에는 말 그대로 프리랜서가 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석공조합에서 하나둘 석공들이 프리 선언하며 탈퇴하니 존폐 위기에 내몰린 것이다.

   

결국 석공 길드는 프리메이슨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석공의 기득권을 포기한 길드. 명색만 남은 석공 길드. 왜냐하면, 이제는 개나 소나 석공 일을 할 줄 알기에^^!

   

3. 길드에서 길드 사회주의로!

    

"단, 프리메이슨의 이름 그 자체가 <자유로운 석공(石工)>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중세 이후의 석공 길드에서 파생한 것이 거의 확실하며, 영국에서 1360년의 윈저 궁전 건조시에 왕명에 의해서 제후로부터 징용된 568명의 석공집단을 기원으로 하는 설이 유력하다. 원래 영국에서 석공은 오래전부터 교회나 국왕의 특권적 비호하에 있었으며, 여러 가지 세속적 의무가 면제되었다. 이 유력한 길드도 중세의 붕괴와 함께 대교회건축의 기회가 격감했기 때문에 본래의 직업적 석공 길드가 해체에 이르렀을 때, 대륙에서 도래한 장미십자단 같은 비밀결사가 재생의 이념을 접목한 것이 18세기 초의 프리메이슨 성립의 주된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어쨌든 "지상에 신의 집을 만드는" 교회건축가의 동직조합은 이 무렵 겨우 <보이지 않는 천상의 집>으로서의 정신의 건축물, 즉 프리메이슨의 구축으로의 탈피가 요구되었다."

   

길드는 중세의 산물이다. 11세기에 접어들면서 중세 유럽에는 중세 온난기가 찾아왔다. 그 이전까지 야만 상태에 머물렀던 중북부 유럽이 따뜻해지면서 북방 바이킹족이 모스크바, 영국은 물론 그린랜드(이 시기 그린랜드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와 북아메리카까지 항해할 정도로 활동 영역을 넓혔다. 해서, 그간 지중해 무역의 일부였던 이태리와 북해 무역의 바이킹족을 연결하는 로만틱 가도를 통해 육상 교역을 시작하는 원거리 상인들이 발생한다. 이들 원거리 상인들이 롬바르디아 상인이다. 또한, 원거리 상인들이 과거 로마 요새였던 데를 북해에 이르는 중간 거점으로 개발하니 요새에서 시장이 발생하고, 요새와 시장을 합치니 도시로 발전하는 것이다. 이 도시에서 수공업자들이 등장하니 한자 상인인 게다. 

   

왜 수공업자들이 상인이 되는가. 최초에는 대자본 상인 길드를 앞세워 롬바드리아(이태리 북부) 상인이 시장을 독식하였다. 물론 이는 교황의 권력을 배경으로 한다. 길드는 실제 목적이 거래의 이득을 취하는 것이지만, 명분상으로는 교회의 영광을 전도하는 것이었다. 

   

허나, 각 봉건 영주, 현지 상인, 현지 수공업자들이 상인길드의 독식에 반발하면서 이권 분배를 요구하여 롬바드 상인과 이들 세력이 타협점을 마련한다. 이때, 현지 상인, 현지 수공업자들이 롬바드 상인 길드를 본따 만든 것이 상인 길드요, 수공업자 길드이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현지 길드이다 보니 롬바드 길드와는 다른 길을 걸어간 셈이다. 

   

많은 이들이 오해하는데, 길드는 중세에 탄생한 것이므로 어디까지나 종교가 우선인 조직이었다. 다만, 이후 종교적인 취지가 퇴색하여 실리적인 면만 남은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수호 성인인 게다. 가톨릭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적이었지만, 자신들만의 특색을 살리기 위해 강조한 것이 수호 성인이다. 

   

해서, 같은 교인이라는 점에서 그들은 형제였던 것이다. 이것이 근대 이후에는 친구, 동지, 동무로 변모한 것이고~! 인터넷 시대에서는 이웃으로 통한다! 자주 교류하는 이웃 사촌이 부모형제나 남편아내, 애인보다 더 친하다^^?

   

"런던과 웨스트민스터에 있었던 4개의 로지(본래는 대건축 현장의 직인들의 <보청소옥>이라는 뜻)가 세이어의 음두로 <단결과 조화의 중심>인 하나의 대 로지로 대동단결한 것은 1717년 세례자 요한의 축일(6월 24일)이었다. 6년 후인 23년, 프로테스탄트 목사 앤더슨(James Anderson)에 의해서 <헌장>이 편찬되고, 프리메이슨 회원이 준수해야 할 도덕률인 <오래된 여러 의무>가 제정되었다. 덧붙여서 기본 단위의 로지를 상위의 대로지에 통합하는 조직 형태는 이후에도 변하지 않고, 현재도 세계 각국에 하나씩의 대 로지가 놓여져 하부의 지방적 로지를 통괄하고 있다. 로지의 내부 구성은, 당초는 사제, 직인, 스승의 3단계로 이루어지고, 각각이 멤버가 걷는 인식의 계제를 나타내고 있으며, 후에 <비밀의 스승>, <스콧치>, <장미십자기사> 등 다양한 위계가 도입되어서 위계제도가 건축학적으로 복잡화되어 가는데, 이는 발전 과정상, 외부로부터 다양한 고대 밀의나 비교(秘敎)사상이 도입된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길드는 도제 - 직인 - 장인(마이스터)로 구성한다. 장인은 그 직종에 있어서 최고의 기술자(마이스터)를 뜻하며 한두 명의 직인과 도제를 거느릴 수 있었고, 장인만이 길드에 가입할 수 있었으며, 제품을 시장에 판매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직인은 아직 장인 밑에서 기술을 연마하는 제자로서 자기 손으로 만든 제품을 길드에 제출하여 심사에 합격하면 장인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는데, 스승과 제자가 혈연지간이 아닌 경우 장인의 딸과 결혼하여 독립하는 직인이 많았다. 도제는 장인의 집에서 잡심부름을 7년 이상해야 직인으로서의 대우를 받았다.

   

처음에 중소 상인 길드 자격은 도시 안에 토지를 보유한 자에 한정되어 있었다. 이는 대자본 상인이 회원인 롬바드 길드를 견제할 목적하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나 롬바드 길드가 유럽 전 지역에 현지 지부를 세우면서 임차에서 소유로 바꾸는 전략을 취했다면 이 조항이 무력화했을 것이다. 다른 도전이 수공업자 길드였다. 판타지 소설에 등장하는 드워프처럼 초기 수공업자들은 맥주와 일 자체를 좋아하는 원시 공동체를 추구할 뿐, 도시 내에 토지가 없었다. 허나, 자신들이 만든 제품을 헐값에 사다가 시장에서 비싸게 내다 파는 상인들 행태에 분노를 느낀 수공업자들은 길드를 만들어서 상인 길드에 대항했던 것이다. 결국 상인들은 토지처럼 기술 역시 '자산'으로 인정한 것 같다. 이런 영향이 오늘날까지 남아 호주 같은 데로 이민갈 때, 호주 당국이 '자본'이 많거나 '기술'이 있는 이들을 우대하는 정책이 나온 것이다. 

   

국유본 태동 시기에는 영국 예를 보듯 길드란 자본주의 발전에 적대적인 봉건적 산물이었다. 허나, 국유본이 자유주의를 극단적으로 추구하는 과정에서 자유주의에 대한 회의와 반성을 낳았다. 이에 따라 독일 비스마르크의 사회보장 젇책이 탄생한 것이다. 헌데, 독일 비스마르크 사회보장 정책의 기초란 독일 길드 전통을 새롭게 응용한 것이다. 독일 비스마르크 사회보장 젇책은 국유본 내부에서 큰 논란을 낳아 페이비언 협회를 탄생하게 만든 배경이 되었다. 이후 이러한 관심은 이차대전 이후 길드 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로 발전한다.

   

"프리메이슨이 역사상 수행한 역할은 그다지 명확하지 않다. 영국에서 발생하자 그것은 곧바로 대륙으로 파급되어서, 30년대에는 특히 프랑스에서 세력을 확장했는데, 그 이신론적(理神論的) 경향은 곧바로 가톨릭 교회의 반발을 샀다. 38년 교황 클레멘스 12세는 프리메이슨에 가입하는 것을 <교회와 정당한 국가권력에 반하는 활동>으로 보고 파문선고의 교서를 발했다. 한편 프로테스탄트 목사의 입회자가 적지 않는 점에서 보아서, 프로테스탄트측의 평가는 그다지 부정적이 아니다. 가톨릭의 반발도 프리메이슨의 신조 그 자체라기 보다도 정치적 파급효과를 두려워한 것이다."

   

프리메이슨은 영국 내에서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통합에 도움을 주었다. 스코틀랜드 독립파에는 스튜어트 왕권파는 물론 신교 장로파 귀족도 있었기 때문이다. 가령 올리버 크롬웰은 스코틀랜드를 정복하면서 로슬린 성당을 마굿간으로 쓰기도 했다^^! 해서, 잉글랜드 신교 귀족에도 경계를 늦추지 않던 신교 장로파 귀족을 견제할 효과적인 수단이 프리메이슨이었던 것이다. 이 당시 프리메이슨으로 가입한 이들 대다수는 당대 권력에서 소외된 신학자 등의 지식인이거나 몰락 귀족들이었다. 국유본은 이들 프리메이슨 세력을 지원하여 장로파 귀족을 견제했던 것이다. 하여, 장로파 귀족들은 프리메이슨 장로파로 인해 스코틀랜드 독립파에서 중립화하였던 것이다. 왜? 프리메이슨 장로파는 민족 문제를 중시하는 편이 아닌 국제파이므로 명분상 앞서지 않겠나?

   

바로 이러한 프리메이슨의 국제파적 성격은 프리메이슨 혁명 수출로 이어졌다. 이는 이웃 나라인 프랑스로 향했던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당대 프랑스사를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엄청난 분량이므로 짧게 초간단 이야기한다.

   

프랑스에서는 필립 4세 이후부터 가톨릭 교회를 장악하려는 시도가 끊이지 않았다. 영국에서는 국교회로 성공하여 오늘날까지 국교회 수장이 영국 국왕이지만, 프랑스에서는 지속적으로 도전만 계속할 따름이었다. 

   

프랑수아 1세. 그는 르네상스형 개혁 군주였다.

   

http://ko.wikipedia.org/wiki/%ED%94%84%EB%9E%91%EC%88%98%EC%95%84_1%EC%84%B8_(%ED%94%84%EB%9E%91%EC%8A%A4)

   

그의 야심찬 계획은 유가에 맞선 법가 진시황제와 유사했다. 봉건 정치제도를 중앙집권 정치조직으로 바꾸기 위해 가톨릭 교회를 행정 조직화하려 했던 것이다. 허나, 이는 좌우 양쪽으로 반대파를 형성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우선 좌파에서는 위그노파가 등장했다. 루터 종교개혁은 프랑스에서도 화제였는데, 초기에는 루터 종교개혁에 대해 프랑수아 1세가 시토파 수도원 영향 때문인지 긍정적이고, 관용적이었다. 허나, 위그노파 중 일부가 로마 가톨릭은 물론 왕권으로부터도 독립하려는 과격파로 발전했던 것이다. 이는 가톨릭 교회를 국가 행정기구로 재편하는 데에 대한 반대가 배경으로 보인다. 다른 한편, 로마 가톨릭 권력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는 전통을 중시하는 가톨릭 동맹도 반대했던 것이다.

   

하여, 위그노와 프랑스 왕권과 로마 가톨릭 교회간의 대결은 이후 프랑스 왕권을 루이 체제와 오를레앙 체제로 분리시켜 부를 수 있을 만큼 분열로 나아간 것이다.

   

프랑스에서 오를레앙 공작이란, 한국으로 치면, 파리 - 서울, 오를레앙 - 경기(강화도)처럼 오를레앙이 프랑스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정학적 위치였기에 왕의 동생에게 내리는 작위였다. 허나, 바로 이런 이유로 오를레앙 공작이란 국왕을 한편으로 보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국왕을 견제하는 귀족 대표가 된 것이다. 

   

당대의 오를레앙 가문은 루이 15세, 16세에서 보듯 어린 왕이 집권한 시기에는 섭정을 했다. 그런 섭정 시기에 오를레앙 가문은 희대의 스코틀랜드 사기꾼, 경제학자 존 로를 영입한 것이다.  

   

"결투로 살인하고 암스테르담으로 도망쳐 은행경영에 대하여 공부하였다. 1710년 후 영국으로 돌아와 은행개혁안을 제출했으나 거부당했다. 그러나 그의 개혁안이 1716년 루이 15세로부터 받아들여져 프랑스 총은행(總銀行)과 서방회사(西方會社:루이지애나회사)의 설립 허가를 얻었다. 1717년 루이지애나회사를 서(西)인도회사로 발전시켜, 북아메리카 미시시피강(江) 유역의 광대한 프랑스령(領)의 개발을 기도하였다. 이와 같은 로의 재정체계는 프랑스에서 일대 붐을 일으켰다. 조폐권(造幣權)과 무역독점권을 둘러싸고 '로 체제'를 확립하였다. 1720년 재정총감(財政總監)이 되어 프랑스 재정의 중심인물이 되었으나, 지폐의 남발과 투기확대의 결과 경제공황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 때문에 사직하여 프랑스를 떠나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가난하게 죽었다." 

[출처] 존 로 [John Law ] | 네이버 백과사전

   

   

"국제유태자본과 북한의 화폐개혁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09/12/10

    

1. 국유본과 프리메이슨

2. 국유본론과 좌우파

3. 국유본과 북한의 화폐개혁

4. 국유본과 히스패닉, 그리고 북미연합

5. 국유본론의 경제전망과 계량적 근거들

6. 국유본 경제 동향에 의거한 호주달러 전망

7. 달러캐리 이후 닥칠 달러강세에 대한 대응책

8. 국유본과 이민주의 석유회사 인수

9. 국유본론의 주가전망과 인간지표

10. 두바이사태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

11. 사교육금지는 경제활성화에 기여하는가

12. 국유본과 이명박정부의 인구감소계획 엇박자를 어찌 보아야 하나?

13. 국유본의 한명숙 키우기 노림수는 무엇인가

14. 국유본론, 음모론, 엑스퀴지트콥스

15. 전략적 글쓰기에 관한 궁금증들

16. 노훼어, 혹은 검색력에 왕도는 있는가

17. 지식공부와 마음공부 병행하기"

http://blog.naver.com/miavenus/70075391693

   

오를레옹 가문이 존 로를 영입한 건, 위그노파나 다름없던 앙리 4세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프랑스왕 계보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6&dirId=613&docId=61764680&qb=7ZSE656R7IqkIOyZleqwgA==&enc=utf8&section=kin&rank=4&search_sort=0&spq=0&pid=gXsFkc5Y7tGsst6Pvl8ssc--211926&sid=OM3KqMYc104AADLGUR0AAAET

   

"위그노이자 나바라 국왕 시절부터 그를 보필한 쉴리 공작 막시밀리앙 드 베튄(Maximilien de Bethune, duc de Sully)을 전격적으로 재상으로 기용해 오랜 전쟁으로 파산 상태였던 프랑스의 재정을 크게 개선시켰을 뿐 아니라 전반적으로 프랑스 사회를 발전시켰다. 지나치게 과중했던 농민들의 세 부담을 줄이는 대신 귀족들의 세 부담을 늘리고, 위그노들이 대부분이었던 프랑스의 상공업자들이 다시 생활 터전으로 돌아가면서 직물 산업, 유리 공업 등이 다시 발전했다. 재무, 농업, 토지 관리에 있어서의 쉴리 공작의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고, 도로망, 삼림, 운하 건설과 캐나다 퀘백 주 개발 등이 그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앙리 4세의 유명한 말 "하느님께서 허락하신다면, 나는 왕국의 모든 국민들로 하여금 일요일이면 닭고기를 먹게 하겠다(Si Dieu me prête vie, je ferai qu'il n'y aura point de laboureur en mon royaume qui n'ait les moyens d'avoir le dimanche une poule dans son pot! )"는 현실이 되었다. 현대 프랑스에서 닭은 프랑스의 상징이기도 하다."

http://ko.wikipedia.org/wiki/%EC%95%99%EB%A6%AC_4%EC%84%B8

   

앙리 4세는 낭트 칙령을 발표하여 사실상의 종교 자유를 선언하는데, 이는 상당수가 위그노파였던 금융 자본에게 큰 환영을 받는다. 헌데, 루이 14세(짐이 곧 국가다, 라는 건 마리 앙투아네트의 먹을 것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어요,처럼 프랑스 혁명파들이 꾸민 흉계일 가능성이 크다. 즉, 루이 14세가 그런 말한 적이 없다는 것이 현재까지 유력하다.)가 낭트 칙령을 폐기하자 금융 자본이 프랑스를 떠나 프랑스 경제는 순간적으로 엄청난 위기에 빠졌다. 해서, 오를레앙 가문이 존 로를 영입한 것은, 루이 14세 정치와는 다르게 영국과 같은 정치를 하겠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오를레앙 가문 야심도 있었다.   

   

아무튼 루이와 오를레앙의 대결은 프랑스 혁명을 지나 이후 왕정복고 시대까지 이어진다. 예서, 이야기 핵심은 오를레앙이다.

   

프랑스혁명과 프리메이슨 관련에서 오를레앙 공작 행적을 문제삼기 때문이다. 가령 프랑스 식량을 매점매석해서 프랑스에서 식량 문제를 일으켰다는 혐의이다. 이는 타당성이 있는 편이다. 국유본이 알파오메가 전략에 따라 오늘날 이명박 정권을 고립시켜 국유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한국 쌀값, 고기값, 채소야채값이 안정화함에도 국유본이 쌀값 등을 이상급등을 시켜서 시민을 불안하게 하는 것과 유사한 전략이다.  

   

http://ko.wikipedia.org/wiki/%ED%94%84%EB%A6%AC%EB%A9%94%EC%9D%B4%EC%8A%A8

   

다만, 이러한 오를레앙 가문의 행적은, 단지 프리메이슨 차원에서만 볼 수 없다. 오를레앙 개인적 야심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프랑스 혁명은 프리메이슨 차원에서 보기에는 다양한 세력들이 연계하고 있기에, 더 나아가 루이 16세 등 프랑스 왕들조차도 프리메이슨 회원이었다는 이야기가 나돌기에 좀 더 섬세한 분석을 해야 하는 것이다.

   

아무튼 이런 대목은 이후 프랑스 혁명 문제를 다룰 때에 본격적으로 말할 것이다. 

   

"사실 자유, 평등, 박애의 신조는 프랑스 대혁명의 슬로건에 애용될 정도로 진보적이었기 때문에, 18세기의 계몽주의 사조와 결부되기 쉬웠다. 하지만 정치적 이데올로기는 명확하지 않아서, 후에 이탈리아 통일이나 프랑스 제3공화정하의 반가톨릭운동에 일정한 역할을 수행하고, 프랑스 혁명 전야에도 온건한 공화주의를 고취시킨 한편, 혁명 말기에는 오히려 자코뱅당에게 박해받아서 단두대로 보내진 회원도 적지 않다. 그러나 항설 레벨에서는 프리메이슨의 가면을 쓴 유대인의 세계혁명=세계공화국 건설이라는 음모설이 떠돌고, 그로 인한 공포가 가끔 프리메이슨 박해를 초래했다. 20세기에 들어온 후에도, 나치스 독일정권하에서 1933년 이후 모든 로지가 해체된 것 외에, 러시아 및 그 위성국, 기타 독재정권국에서는 현재도 활동이 금지되어 있다.

   

결국, 내셔널리즘이나 배타주의에 적시되기 쉬운 프리메이슨이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최량의 토양을 제공한 것은 미국이었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 중 G. 워싱턴을 비롯해 J. 먼로, T. 루스벨트, F.H.S. 트루먼 등 은 프리메이슨 회원이었다고 하며 또한 1달러 지폐 피라미드나 그 위에 떠있는 눈의 그림은 프리메이슨의 교의를 반영하고 있다고 한다.

각국에서의 활동사

프리메이슨의 성격이 변화한것은 프랑스에 그람토리암(Grand Orient, 대동사(大東社))이 1773년에 성립하고, 프랑스 혁명에 참가한 이후라고 한다. 영국 본국의 프리메이슨이 일반적으로 정치문제를 회합에서 화제로 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서, 그람토리암의 산하에 들어온 대륙계 프리메이슨은 오히려 적극적으로 사회개혁을 추진했다.사실,프랑스 혁명의 선언은 프리메이슨의 로지 내에서 기초되고, 기존의 권력을 폭력적으로 전복할 것을 지향한 계명결사도 독일의 로지 내에서 결성되었다. 또한 여성의 입회를 인정하는 등 민주적인 결사운영도 추진했다. 이 때문에 18세기 말에는 로빈슨(John Robison)이나 바루옐 (Barruel) 등이 프리메이슨을 음모집단이라는 논술을 펴고, 결국 1840년대에는 세계정복을 꿈꾸는 유대인의 비밀결사라는 <프리메이슨 유대인 음모설>을 낳았다.그 최대의 사례는 1905년에 세상에 나온 『시온 의정서』로, 이는 유대인 프리메이슨에 의한 세계정복의 초안이 제시된 위서(僞書)이다. 한편 초기의 나치스는 이 문서를 이용해서 반유대의식을 선동했다. 그러나 가장 정치적이었던 그람토리암에서조차 19세기에 들어오면 회원이 온건파로 이해하고 있으며, S. 볼리버 등과 결합한 라틴아메리카의 프리메이슨 등 을 제외하면 그 정치성격은 오히려 보수적 방향으로 바뀌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프리메이슨의 활동은 미국에서 현저했다. 미국에서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독립을 위해서 싸운워싱턴이나 B. 프랭클린, 또한 T. 제퍼슨 등 많은 지도자가 프리메이슨이었다. 한편 프랑스의 공화사상을 계승하는 합중국에서는 각 주가 독자적인 그랜드 로지를 만들고, 그 상위에 선 연합 그랜드 로지는 소유하지 않고 있다. 또한 영국식의 폐쇄적 틀에서 벗어나 공개적 결사로서 하고 있는 점이나, 새로운 의식의 설정을 인정하고 있는 점에도 특징이 있으며, 회원수400만 명을 넘는 아메리카계 메이슨을 형성하고 있다. 또한 흑인을 구성원으로 하는 니그로 프리메이슨(Negro Freemason)도 결성되어 있다.

   

한편, 라틴아메리카어에 유입된 그람토리암계의 프리메이슨은 그곳의 민족독립운동에 가담하여, 오늘날에도 정치적 영향력을 가진 거의 유일한 조직으로 되어 있다. 아시아로의 진출은 유럽열강의 식민지 경영과 함께 행하여지며, 인도, 중국으로는 영국계, 인도네시아, 자바에는 네덜란드계, 필리핀에는 아메리카계의 로지가 만들어졌다."

   

미국 독립, 프랑스 혁명, 아편전쟁, 페이비언협회, 일본 유신과 한반도 침략, 시온의정서와 같은 문제는 이후 인월리에서 보다 자세하게 다룰 것이다. 

   

정리한다.  

   

인드라가 현재까지 정리한 바로는, 국유본은 18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는 기간, 주요한 정치 도구로 프리메이슨을 활용하였다. 허나, 국유본의 새로운 주인으로 등극한 로스차일드는 기존 국유본 권력 힘을 약화시키고자 프리메이슨을 서서히 죽여갔다. 대표적인 예가 미국에서 반메이슨 운동이 일어났는데, 그 배후가 로스차일드이다.

   

오늘은 이 정도로 한다. 마지막으로 쪽발이 매국노 판사들이 왜 요즘 지랄을 하고, 국유본 언론이 쪽발이 매국노 판사 보도를 최우선으로 하는지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겠다. 

   

국유본은 영미처럼 한국도 국민참여재판을 추진하려고 한다. 이를 위해서 내놓는 방식이 바로 판사들의 정치적 발언을 강화시키는 것이다. 이것 모두 영미법대로 가려고 하는 국유본의 공작이다. 판사들더러 노숙자될래, 매국노가 되어 FTA 반대 발언할래? 강요해서 정치적 논란을 야기시키면, 이후 누가 판사 판결을 공정하게 보겠는가. 아무도 공정하게 보지 않을 것이다. 쪽발 매국노 무리에게는 무조건 무죄, 국유본과 맞싸우는 투사들에게는 무조건 유죄를 때릴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양상을 극단화시키면 국민 정서가 둘로 분열할 것이고, 예서, 그럼 판사들을 믿지 말고, 시민을 내세우자는 여론이 등장할 것이다. 해서, 자연스럽게 배심원제를 정착시키겠다는 것이다. 하면, 왜 국유본은 배심원제를 원하는가. 그것이 훨씬 비용을 절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애국심에 충만한 판사들이 여전히 다수다. 반면 우리하나파쇼법 연구회 쪽발매국 뉴라이트 FTA 반대 국유본 판사들은 소수다. 이들 국유본 판사만으로는 곤란하니 국유본이 배심원제를 강화시키려 하는 것이다. 로스쿨 제도도 국유본 역점 추진사업인 게다. 국유본은 궁극적으로 민족, 민중, 인류를 위해 일하는 의인을 만들어내는 국가 고시제도를 없애려하는 것이 목표인 게다. 

   

국민 여러분! 쪽발 매국노, 이완용만도 못한 국유본 판사들에게 한마디씩 합시다. 이 구족을 멸할 개씨발 색희들아. 니 쪽발이 애비 색희가 그렇게 가르치든? 이 사이코패스 개씨발색희들아.

   

하면, 이런 대목에서 여러분은 인드라가 왜 국유본 판사에게 감정적인가를 반문할 것이다. 국유본이 국유본 판사에게 힘을 실어줄 수 있는 것이지, 왜 그리 흥분하나~! 인드라여~? 하고 말이다. 이것이 인드라와 국유본의 게임인 게다.

   

국유본이여! 국유본이 원하는 만큼 놀아주겠다.

   

한반도 평화통일은 2012년에 가능한가? 쪽발 뽀그리 처형은 내년으로 미룰 셈인가?

   

국유본이여! 인드라에게 계획이 있다!

   

인드라를 지지하라!

   

혁명의 불꽃을 점화시키겠다.

   

조건은 쪽발놈현, 쪽발돼중, 쪽발뽀그리처럼, 영어 원어민 교육 찬성하는 개씨발색희들처럼, 한반도 평화와 통일, 경제발전과 사회복지에 방해가 되는 적들을 모두 쓸어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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