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국유본은 다빈치 코드를 통해 성당기사단 음모론을 퍼트리나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1/12/03 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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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23:왜 국유본은 다빈치 코드를 통해 성당기사단 음모론을 퍼트리나

국제유태자본 인드라 월드리포트 11/12/03

   

1. 소설 '다빈치 코드'는 사실인양 꾸민 가짜

   

국유본이 적극 유포시킨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유럽인 사천만 명이 봤다 한다. 댄 브라운 소설 전략은 단순했다. 움베르코 에코의 '푸코의 진자'에서 묘사한 방식을 그대로 베낀 것이다.  소설 내에서 가짜 음모론 조직을 만들고 그것이 실재하는 양 그럴 듯하게 만드는 것이다. 중요한 건, 78%의 인민은 생활이 바빠 쪽발찌라시 한경오프엠과 같은 국유본 언론에서 이를 마구 떠들면 그대로 믿는 편이라는 것이다. 국유본은 이런 소설 전략으로 인민을 더더욱 노예화하고 있는 것이다.

   

http://blog.naver.com/ydiana/80027039263

   

쪽발찌라시 한경오프엠이나 다빈치 코드 같은 국유본 미디어에 많이 노출되다 보면 쪽발 병쉰스럽게 되는 좀비 현상이 발생한다. 특히 쪽발매국노 전교조 국유본 교사한테 세뇌당한 캐병쉰 색희들이면 더더욱~! 국유본이 노리는 효과이다. 

   

하면, 다빈치 코드에 나타는 시온수도원이니 뭐니는 뭘까. 한마디로 말하면, 가짜다.

   

http://blog.daum.net/ktyhbg/7274633

   

가짜이지만, 소설이라는 명목으로 슬쩍 피해가는 방식이다. 해서, 인드라도 바로 이 방식을 적용해서 혹시나 있을 국유본 공격에 대비하여 국유본론은 이론이자 소설입니다, 라고 하는 것이다 ㅋㅋㅋ.

   

하면, 성당기사단 사건은 무엇인가.

   

   

   

2. 성당 기사단 탄생

   

그간 유럽은 로마제국 멸망 이후 중앙아시아로부터 밀려드는 유목 민족에 쫓겨 이렇다할 공세 한 번 한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십자군 전쟁으로 대반격을 가한 셈이다. 이때, 1차 십자군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것은, 중세 온난기로 인해 농업 생산량이 급격하게 늘어나서 이전보다 경제력이 나아졌으며, 그간 유럽이 당하기만 했다는 복수심이 강렬했고,  무엇보다 십자군을 오합지졸로 보았던 중동 이슬람의 방심이 한 몫했다. 허나, 이후로는 십자군이 변변한 승리 따내기도 하늘의 별따기 만큼 어려웠다.

   

"보두앵 2세는 십자군 국가 에데사 백국의 백작(1100년-1118년) 이었고 1118년부터는 세 번째 예루살렘 왕국의 왕이 된 인물이다. 보두앵은 프랑스 레텔 백작 위그의 맏아들로 2명의 남동생과 2명의 여동생이 있었다. 아버지로부터 부르 성을 봉건영지로 받아 처음에는 부르의 보두앵으로 불렸다. 1096년 제1차 십자군이 발흥하자 사촌인 부용의 고드프루아볼로뉴의 보두앵과 함께 팔레스타인으로 갔다. 이들의 십자군 원정은 성공적이어서 예루살렘 점령에 성공하고 예루살렘 왕국을 세웠다. 1100년 볼로뉴의 보두앵이 보두앵 1세로 고드푸루아의 뒤를 이어 예루살렘 국왕이되자 보두앵 2세는 에데사 백국의 백작위를 받았다. 이듬해 그는 마라티아의 영주 가브리엘의 딸 모르피아와 결혼했다. 1104년 셀주크 투르크가 에데사 백국을 공격했는데 보두앵은 안티오키아 공국의 도움을 받았지만 하란 전투에서 패하여 셀주크의 포로가 되었다. 그 사이 보에몽의 조카인 탕크레드가 에데사 백국의 섭정이 되었다. 보두앵은 1108년 몸값을 치르고 풀려났지만 탕크레드는 에데사를 넘겨주길 거부했고 보두앵은 몇몇 이슬람 제후들과 연합하여 탕크레드와 싸워 결국 탕크레드를 축출했다. 그러나 1110년까지 유프라테스 강 동쪽의 영토 대부분은 모술의 이슬람 세력에게 빼앗겼다. 1118년 예루살렘의 보두앵 1세가 죽자 보두앵은 그의 뒤를 이어 예루살렘 왕국의 왕으로 가게 되었고 에데사는 조슬랭에게 넘어갔다. 그 무렵 팔레스타인에는 기독교인 순례자를 돕고 보호하기 위해 종교기사단이 생겨났는데 1113년 병원기사단, 1118년에는 성전 기사단이 창립되었다. 보두앵은 성전 기사단의 본부를 예루살렘의 솔로몬 성전 근처로 마련해 주었기 때문에 이 기사단의 이름이 성전 기사단이 되었다.

http://ko.wikipedia.org/wiki/%EB%B3%B4%EB%91%90%EC%95%B5_2%EC%84%B8_(%EC%98%88%EB%A3%A8%EC%82%B4%EB%A0%98)

   

1차 십자군 전쟁에서 주요한 역할을 했던 이들이 프랑스 귀족들임을 알 수 있다. 하고, 이들이 예루살렘 왕이 된 것이다. 허나, 예루살렘 왕국을 지켜내자니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이때, 등장한 것이 프랑스 귀족 위그 드 파생이다. 

   

"위그 드 파앵은 1070년 프랑스 샹파뉴 지방에 있는 세느강을 거느린 트루아에서 10~15km여 떨어져 있는 팽(Payn)에서 귀족으로 태어났다. 청년시절인 1096년 제1차 십자군에 고드프루아 드 부용(Godfrey of Bouillon) 군대에서 종군하다 1100년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 후 샹파뉴 백작의 봉신(封臣)이었던 그는 주군을 따라, 다시 1104년부터 1114년까지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떠났고, 거기서 살기도 하였다.

   

성전기사단 조직

그러다 1118년 유럽에서 중동으로 새롭게 열린 뚫린 해로(海路)를 통해 몰려드는 유럽 성지 순례자들이 항구도시 자파(Jaffa)에서 라믈라(Ramla)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이르는 산간지대를 통과할 때 떼강도의 습격을 당하는 일이 종종 발생하자 샹파뉴 백작의 지지로 "그들의 힘이 닿는 한 순례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특별한 배려로 도로와 가도를 안전하게 지킨다."라는 목표아래 위그 드 파앵과 8명의 기사들은 성전 기사단을 창설하였다. 이들은 곧바로 활동을 개시하여, 곧 명성이 예루살렘의 왕 보두앵 2세의 귀까지 들리게 되었다. 이에 호응하여 보두앵 2세성전기사단의 거처로서 왕궁 옆 건물을 주어 사용하게 했는데, 이 건물은 예전에 솔로몬 왕이 건립한 예루살렘 성전이 있던 예루살렘의 성전산(聖殿山) 위에 있었다. 옛 성전 터 위에 세워졌고, 십자군은 그 성전을 솔로몬의 성전이라고 불렀기에 여기에서 이 단체의 명칭인 '성전기사단'이 생겨났다. 또, 이들은 예루살렘 총대주교인 고르문트(Gormund)를 만나 수도자의 전통적인 서약인 청빈, 금욕, 순종 외에 순례자 보호 항목을 곁들여 서약을 하였다."

http://ko.wikipedia.org/wiki/%EC%9C%84%EA%B7%B8_%EB%93%9C_%ED%8C%8C%EC%95%B5

   

"그리스도와 솔로몬 성전의 가난한 기사들(라틴어: Pauperes commilitones Christi Templique Solomonici), 속칭 성전 기사단 또는 성전 수도회(프랑스어: Ordre du Temple 또는 Templiers)는 서방 교회 기사 수도회 가운데 가장 유명한 조직이다. 대략 중세의 두 세기 동안 존재하였으며, 1096년 제1차 십자군의 활약을 기초로 확보된 예루살렘으로의 성지 순례를 떠났던 많은 유럽인을 보호하기 위해서 설립되었다. 1129년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공식적으로 공인받게 되면서, 기사단은 유럽을 횡단하여 온 구호금을 통해 회원이 늘어나면서 세력이 빠르게 성장하였다. 성전 기사단원들은 그들만의 특징적인 복장인 붉은색 십자가가 표시된 하얀색 겉옷을 입었으며, 대부분 십자군 전쟁의 격전지에서 활동하였다. 기사단의 비(非) 전투원은 기독교 국가 전체에 걸쳐 큰 경제적 기반을 쌓아 올리는 데 일조하였다. 금융업에 필요한 많은 금융 기술을 새로 만들거나 개정하였고 유럽과 성지를 가로질러 많은 요새를 건설하였다. 성전 기사단의 성공은 십자군 운동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십자군이 결국 패배하여 성지를 도로 빼앗겼을 때, 성전 기사단을 위한 지원도 약해졌다. 성전 기사단의 비밀 입단식에 대한 루머가 만들어지면서 많은 사람들의 의심을 사게 되었으며, 기사단에 큰 빚을 진 프랑스의 필리프 4세교황 클레멘스 5세에게 압력을 넣기 시작했다. 1307년 프랑스 내 기사단원의 대부분이 체포당한 뒤, 거짓 자백을 받아내기 위한 고문을 받은 다음 화형에 처해졌다. 1312년 필리프 왕으로부터의 계속된 압력에 클레멘스 교황은 결국 굴복하여 기사단에 해산령을 내렸다. 유럽의 주요한 경제단체가 한순간에 사라지자 이후 많은 의견과 전설이 생겨났다."

http://ko.wikipedia.org/wiki/%EC%84%B1%EC%A0%84_%EA%B8%B0%EC%82%AC%EB%8B%A8 

   

보드앵 2세 입장에서 위그 드 파생이 이끄는 템플기사단이 등장한 것은 반가운 일인 게다. 더군다나 안면이 있는 귀족이니~!  

   

"600년 교황 그레고리오 1세의 명을 받아 아봇 프로브스가 예루살렘에 병에 걸렸거나 몸을 다친 성지 순례자들을 치료하기 위한 병원을 세웠다. 병원조직은 1005년 칼리프 알 하킴에 의해 병원과 부속 건물들이 파괴되었다. 1023년 이탈리아 아말피살레르노 출신의 상인들이 이집트 칼리프의 허가를 얻어 병원을 다시 세웠는데 그 병원은 세례자 요한의 묘지에 세워졌고 베네딕토회 수사들의 봉사로 성지 순례자들을 위해 구호 활동을 하였다. 이 구호단체는 십자군 원정 이후로 군사적인 색채가 더해졌다. 1099년 기독교 세력이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예루살렘 왕국이 세워지자 군사적인 기사단 조직으로 개편되었고, 무슬림들과의 전쟁을 통해 그 용맹성을 인정받고 성당 기사단과 함께 팔레스타인 지역의 중요한 기독교 종교기사단으로 발전하였다. 13세기 들어서 팔레스타인에서 이슬람의 세력이 강해지고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십자군 국가들이 붕괴되었다. 결국 1291년 마지막 기독교 세력의 근거지인 아크레가 무슬림들의 수중에 함락되자 기사단은 키프로스 왕국으로 피난했다. 성당기사단이나 튜튼 기사단 등 다른 가톨릭 종교 기사단이 유럽으로 후퇴한 반면 성 요한 기사단은 언제가는 다시 성지를 회복할 것을 결심하면서 성지 근처에 남기로 결정했다."

http://ko.wikipedia.org/wiki/%EB%AA%B0%ED%83%80_%EA%B8%B0%EC%82%AC%EB%8B%A8

   

성요한 기사단

http://cafe.naver.com/praetorians/51399

   

성요한(몰타)기사단, 튜튼기사단, 템플기사단은 서로 경쟁관계에 있었다. 해서, 기사단에서 이탈한 조직이 다른 기사단으로 합류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인드라 분석으로는, 성당 기사단 탄생에는 성요한 기사단이 영향을 주었으리라 본다. 보드앵 2세는 대의명분 때문에 성요한 기사단을 승인하였으나 속으로는 견제한 것이다. 기사단이 자기 휘하가 아니라면 불안하니까. 해서, 보드앵 2세, 샹파뉴 백작, 위그 드 파생 3인의 협의하에 성당기사단이 탄생한 것이다. 이처럼 뒤늦게 등장한 기사단이지만, 잘 아는 기사단인 만큼 보드앵2세가 기사단을 키워주기 위해 솔로몬 성전 터에 숙소를 마련해준 것이다.

   

문제는 성당기사단이 하는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를 음모론에서는 솔로몬 성전 터에서 성배 등 무엇인가를 열심히 찾고 있었다고 한다. 인드라는 개뻥이라 본다. 성요한 기사단이 정말 일을 많이 한 것 같다. 교회 공식 성기사단이니까. 반면, 성당기사단은 가톨릭 교회에서 정식으로 인정받지 않다 보니 아무래도 삼류 취급을 받은 것 같다.  

   

말하자면, 환타지 소설에 나오는 용병대를 생각하면 된다. 성요한 기사단은 특급 용병단이다. 반면, 성당기사단은 특별한 업적도 없고 정식 인가도 나지 않아 사실상 보드앵 2세 사설 용병대나 마찬가지인 게다.  이러니 당신이 순례자이거나 상인이라면 성당기사단에 의뢰를 하겠는가. 아니면, 성요한 기사단에 맡기겠는가.

   

당근, 성요한 기사단이다.

   

해서, 장사가 안 되어 머리를 쥐어뜯으며 솔로몬 성전터에서 오랜 기간 고심하던 위그 드 파앵이 발견한 것이 시토회 수도원이다.

   

"프랑스 동부의 황야 시토(Citeaux)에 베네딕도회 몰렘 수도원장 로베르(Robert de Molesme)가 원시 수도제에 대한 복귀를 염두에 두고 1098년에 창시한 혁신적인 수도회. 수도사 지원자가 감소해서 수도원의 세속화가 눈에 띠는 시세를 우려해서 창립자는 <베네딕도 회칙>의 엄격한 권장, 조의조식의 질박한 생활, 황지 개간작업 등에 의한 영성의 부흥을 지향했다. 로베르토 자신은 1년 후 베네딕도회로 되돌아 왔으나, 제3대 수도원장 하딩(Stephen Harding)시대(1109~33)에 규율과 조직의 면에서 기초가 굳혀지고, 특히 샨파니 귀족 베르나르와 그 일족 다수의 입회(1112) 이후 회세는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다. 1114년에 기초된 회칙 <카르타 카리타티스(Carta caritatis, 사랑의 헌장)>는 그리스도교적 애덕의 정신에 관철되고, 수도자의 이상을 올리는 동시에, 일반 신도에 대한 도덕적 지침도 되어서, 수도회 운영의 새로운 전거가 되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630056

   

시토회 수도원이 내건 명분은 '자발적 가난'이었다. 이러한 명분은 성당 기사단이 내건 취지와 상당 부분 일치하였다. 위그 드 파앵이 주목한 이는 베르나르두스이다.

   

 "1115년 클레르보에 하나의 자(子)수도원이 창설되었고 베르나르두스는 그곳의 대수도원장이 되었다. 그는 초대원장이 되어 개혁운동을 추진했고, 베네딕트 파로부터 완전히 독립했다. 개인적으로는 금욕의 실행에 전념했는데, 그것을 당시 샬롱의 주교인 유명한 샹포의 기욤이 때때로 질책했다. 베르나르두스는 오래지 않아 그의 수도사들의 영적 충고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충고자가 되었는데 그들은 충고를 받고 나서, 언제나 그곳을 감싸고 있는 듯한 엄숙함과 평화로운 영에 의해 감명을 받고 그곳을 떠나곤 하였다. 그의 설교들 또한 강력한 영향을 발휘하기 시작하였으며 이것은 예언자와 기적을 베푸는 사람으로서의 그의 명성에 의해 더욱 증가되었다. 새 수도회가 채택한 규정에 따라 클레르보는 다섯개의 주요 구(區)로 조직된 시트회 공동체의 한 구의 모(母)수도원이 되었다. 베르나르두스는 오래지 않아 전수도회에서 가장 영향력있고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

http://blog.naver.com/kalliope63/110032994274

   

베르나르두스는 오늘날로 보면 조용기 목사였다. 베르나르두스 강연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오죽하면, 지역 실력자들이 베르나르두스 강연을 들으면 기쁘기는 한데, 베르나르두스 영향을 받아 자식들이 수도사가 되면 어쩌나 고민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 시기는 중세 온난기 시대여서 점차 수도사들이 인기를 잃어갈 때인데 시토회에서는 오히려 수도사 급증이 일어난 것이다. 나중에는 강연 때마다 믿거나 말거나 치유하는 영능을 발휘하기도 했다는 게다. 뿐만 아니라 베르나르두스가 한 예언대로 이루어지는 일이 많자 그의 영향력이 급신장한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멀리 예루살렘에서도 위그 드 파앵이 베르나르두스 명성을 익히 들었을 것이다. 해서, 위그 드 파앵이 한 일이란? 열심히 온리유 충성 서약 편지를 쓰는 것이었다. 베르나르두스가 처음부터 승낙하지는 않은 듯싶다. 해서, 위그 드 파앵은 모든 일을 다 제쳐 두고 오직 베르나르두스 설득하는 데에만 매달린 것 같다. 그럴수록 위그 드 파앵이 내건 조건은 파격적이었을 것이다. 성당기사단이 정식 기사단이 되면, 시토회 수도원이 명하는 일이면 지옥 끝까지도 달려갈 것이다 등등.

   

"성전기사단의 규칙

라틴 규칙(La Régle du Temple)으로 알려진 성전기사단의 행동규칙은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와 위그 드 파앵에 의하여 제정 되었다. 72가지의 규칙은 복장과 소유한 말의 수를 규정하고 있다. 먼저 기사들은 식사 때 침묵해야 하고, 고기는 일주일에 세번 이상 먹을 수 없고, 가족일찌라도 여성과는 신체적 접촉이 금지 되었다. 또한 성전기사단의 각 지부장은 말 4마리, 사목, 서기는 각각 말 세마리, 하사관은 두마리, 방패와 창을 나르는 종자는 말 한 마리로 규정되어 있다.

   

   

위그 드 파앵과 함께 라틴 규칙을 제정한 베르나르

   

   

성전기사들은 세 계급으로 나뉘어 있다. 귀족 출신 기사, 평민 출신 하사관과 서기로 나뉘어 있었다. 기사들은 기사 가문 출신이어야 하며 흰 망토를 입는다. 기사들은 1~2명의 종자와 함께 중무장 기병으로 무장하고, 종자들은 기사가 아닌 일종의 비정규직원이었다. 기사 밑에 평민출신 하사관이 있는데 이들은 말 한 마리에 경기병 무장을 하고, 기사단의 재산을 관리하며 잡다한 업무를 처리했다. 사제는 성전기사단의 세 번째 계급을 구성하는데 서품을 받은 사제들로서 기사단의 영적(靈的)인 임무를 수행한다. 성전기사단 입단식은 무거운 책임과 엄숙한 의식으로 거행 되었다. 이 중 외부인의 참관을 금지한 규정이 있었는데 이로 인해, 후에 자크 드 몰레가 재판에서 비밀입단식에 대해 중세 법관들의 의심을 받기도 하였다. 새로 입단하는 단원들은 그들의 모든 재산과 소유물을 기사단에 바치고, 가난, 고행, 신앙심, 복종을 맹서해야 한다. 대개는 종신 입단 하지만 한시적으로 입단하는 기사도 있었다. 배우자의 허락을 받은면 기혼자도 입단이 허가 되었지만 흰색 망토는 착용할 수 없었다. 이런 라틴 규칙은 처음에는 72가지 규칙이 20여 년 후에는 120여개의 항목이 더 추가되었는데, 전장에서 어떻게 성전기사들이 행동해야 하는가에 대한 내용부터 들어간다. 숙영, 행군, 전투 등에 있어 성전기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기병 돌격을 가할 때 어떻게 해야 효율적인가, 장군의 지휘기를 어떻게 따르는가까지 다루게 되면서, 수백 개의 조항으로 확대되었다. 템플 기사단은 전투에 임하면 절대 후퇴하지 않는다는 규칙이 있는데, 심지어는 기사단의 깃발이 빼앗기는 일이 발생했을 때도 (중세식으로 볼때 부대가 괴멸한 경우를 말한다) 도주나 해산하는 것이 아니라 근처에 있는 다른 기사단으로 달려가서 합류하여 전투에 계속 임하며, 전장에서 모든 아군의 깃발이 내려졌을때만 후퇴가 용인되었다. 이정도는 근대 기병 교범에 버금가는 내용이므로, 이런 타협하지 않는 전투의지와 규율은 중세 기사단 운용의 모범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외에도 기사들은 흰 망토에 붉은 십자가가 그려진 겉옷을 입고, 하사관들은 검은 바지에 앞뒤에 붉은 십자가가 그려진 갈색이나 검정색 망토를 입어야 했고, 성전기사들이 즐겨입었던 흰 망토는 1129년 트로이 공의회에서 지정 되었고, 붉은색 십자가는 1147년 제2차 십자군에 참가하면서 제정되었다. 그리고 중세시대 파리에서 개최되는 프랑스 성전기사단 회의에는교황 에우제니오 3세와 프랑스 왕 루이 7세도 참석했다. 규칙에 따라 성전기사들은 항상 흰색 망토를 착용했고, 흰색 망토를 착용하지 않고는 마시거나 먹는 것도 금지 되었다. 망토의 붉은색 십자가는 순교를 상징하고, 전투에서 죽음은 천국을 약속 받는 영광으로 여겨졌다. 기사들은 성전기사단의 기가 쓰러지기 전에는 항복할 수 없었다. 모든 기가 쓰러진 뒤에는 전장을 떠날 수 있었다. 확고한 원칙, 용기와 탁월한 훈련의 명성, 그리고 중무장은 성전 기사들을 중세의 가장 두려운 전투력으로 명성을 갖고 있었다."

   

   

   

이때, 위그 드 파생이 솔로몬 성전터라는 점을 많이 이야기했을 것이다. 이유는 베르나르두스가 교리주의 성향이기 보다는 신비주의적 성향이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베르나르두스는 마음을 움직였다. 하여, 트루와 종교회의를 개최한다. 트루와는 위그 드 파생이 태어난 데서 가까운 지역이었다. 예서, 이미 유럽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갖춘 베르나르두스는 적극적으로 성당기사단을 옹호한다. 하여, 1129년에 성당기사단은 정식 기사단으로 탄생한다. 게다가 면책 특권까지 받았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육로로 상인과 순례자를 보호하면서 길을 가다 보면, 영지를 지나치기 마련이다. 이때, 영주가 통과세 같은 것을 부과하는 것이다. 이때, 성당기사단이 면책특권을 내세워 '무관세'를 주장하면? 영주는 들어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엄청난 특혜인 것이다. 성당기사단없이 프랑스에서 예루살렘까지 가는데 드는 비용이 100인데, 성당기사단과 함께 가면 비용이 10으로 줄어든다면? 여기에 성당기사단이 이익을 40만 챙겨도 순례자나 상인은 여전히 절반 가격으로 예루살렘을 다녀오는 격이니 대박인 셈이다.

   

   

   

3. 성당기사단이 재벌이었다?

   

성당기사단이 부를 많이 축적했다니까 어설픈 음모론자들은 여기에 무슨 특별한 비밀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고, 무작정 교회를 까기 위해 이를 악용하는 사례가 많다. 인드라는 구교도나 신교도가 아니지만, 이런 어설픈 기독교 비판에는 엄중한 편이다. 이따위 허접한 비판을 하려거든, 니 애비가 쪽발이인가부터 스스로 검증하라, 병쉰 색희야, 이 쪽발 노빠 같은 매국노 색희들아, ㅋㅋㅋ

   

부를 축적한 건 성당기사단 뿐만 아니었다. 성당기사단은 물론 성요한기사단, 튜튼기사단 모두 부를 축적했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하나. 알고 비판해도 늦지 않다.

   

첫째, 이 당시 수도원이나 기사단으로 가입하면, 초대 교회 전통에 따라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이는 다른 말로 말하자면, 자신의 전재산을 수도원이나 기사단에 기부하고 회원이 된 것이다.

   

둘째, 이 당시 수도원이나 기사단이 내세우는 규약들이 대체로 금욕적이니 초기에는 수도원이나 기사단은 부가 저절로 축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들여온 돈을 소비해야 하는데 소비를 최대한 억제하고 저축하니 부가 늘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에, 저축한 걸 고스란히 재투자한다면, 부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셋째, 허나, 모든 기사단이나 수도원이 초기부터 부가 축적한 것이 아니다. 가령 성요한기사단도 초기에는 재정난에 빠지기도 했다. 교황청에서 나오는 지원액이 거의 없기에 자급자족해야 했기 때문이다. 해서, 수도원이든, 기사단이든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 신앙 조직과 별개인 경제 조직을 두었다. 가령 기사단인 경우는 실제 전투요원이 반이라면 나머지 반은 이들 전투요원 지원을 맡았는데, 전투요원 지원이라는 건 경제 조직을 의미한다.

   

예서, 흥미로운 것은 시토회와 베르나르두스는 금욕적이면서도 경제적으로는 지닌 부를 활용하는 법에 긍정적이었다. 황무지 개척이 예다. 하여, 이들의 성공은 성당기사단에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해서, 성당기사단에서는 은행 업무까지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군사 조직으로서의 표면상의 모습에 가세하여 지녔던 기사단의 또 다른 모습은 금융기관으로서의 모습이었다. 본래 입회자들은 세속의 부귀영화를 모두 버리기 위해 개인의 사유재산을 수도회에 기증하였는데, 이 관습은 다른 수도회에서도 행해지고 있었다. 수도회의 활동 목적이 이교도와 싸우며 성지 순례자들을 호위하는 것이긴 하였지만 실제로 전선에서 싸우는 숫자는 회원의 절반에 지나지 않았다. 대부분의 회원들은 군사활동 그 자체보다는 그것을 지원하기 위한 병참과 경제적 기반의 구축에 매진하였다. 특히 눈여겨 볼 점은 성전 기사단이 순례자들의 예금증서를 작성하여 그들의 자산을 보관하는 서비스업을 실시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사업 모델의 구축하고 수많은 기부금을 모으면서 성전 기사단은 12세기에서 13세기에 걸쳐 막대한 자산을 소유하였으며, 그에 따라 유럽에서 중동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에 많은 토지를 보유하였다. 더불어 성당과 성채를 세우고 포도밭이나 농원을 만들었으며, 이윽고 기사단 소유의 함대까지 보유하여 최전성기에는 키프로스 섬 전체를 소유할 정도였다. 파리에 있던 성전 기사단의 지부는 프랑스 왕국의 비공식 재정경제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커졌으며, 이따금씩 프랑스 왕에게 재정적인 원조를 보태주었다."

   

얻어진 부를 즉각적인 소비를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이를 종잣돈으로 삼아 고스란히 재투자하는 것. 오늘날 유럽에서 자본주의가 만들어진 데에 관해 막스 베버 같은 기독교 윤리를 내세운 분석이나 아시아에서의 유교 윤리를 비교하는 것이 일리있는 것이 이 때문이다.

   

 4. 성당기사단의 쇠퇴

   

무엇보다 후원인이었던 베르나르두스의 죽음이다. 그는 말년에 신성력이 떨어진 자신을 매우 비관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죽음을 재촉한 것은 그가 기대한 대로 역사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성력 충만 베르나르두스의 죽음은 성당기사단에 적잖은 충격이었을 것이다. 허나, 베르나르두스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들어오는 수입이 더욱 늘어난다면 성당기사단 간부들은 무슨 생각을 할 것인가. 신성력보다는 돈의 힘 자체에 빠져들 것이다.

   

"성전 기사단은 1147년 제2차 십자군에 즈음하여 프랑스의 루이 7세를 도와 고군분투한 공로로 십자군 전쟁이 종료된 후 루이 7세로부터 파리 시 교회의 광대한 부지를 기증받았다. 이곳에 성전 기사단의 서구에서의 거점지가 세워지게 된다. 이 지부는 광대한 저택 주위에 높은 성채가 둘러싸인 형태를 하고 있었는데, 교황이나 다른 외국의 왕들이 프랑스를 방문할 때 임시 숙소 역할을 수행하거나 왕실의 보물이나 자금 보관 등까지 맡게 되었다. 1163년에는 교황 알렉산데르 3세가 선출되고 나서, 성전 기사단에 보답하는 형태로 회칙 Omne Datum Optium을 반포하여 수도회의 재산 보호와 주교로부터의 독립 등의 특권을 부여하였다.

   

성전 기사단의 기사단원들의 힘과 용맹스러움은 곧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1177년 몽기사르 전투에서 살라딘이 이끈 이슬람군을 상대로 승리한 소식은 곧 전 유럽에 널리 알려져, 이에 자극받은 프랑스의 필리프 2세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 모두 치열하게 싸웠으며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에서도 대(對)이슬람 전투에 종사하였다.

   

"성지의 상실

   

1187년하틴 전투.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빼앗기는 데 전환점이 되었다.

   

   

기사단이 경제적으로 부유해짐에 비례하여 중동의 정세는 1187년까지 악화일로를 가고 있었다. 당시 기사단의 총장 제라르 드 리드포르가 숙적 살라딘과의 수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패배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포로로 사로잡히는 치명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이는 적에게 투항할 바에는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는 기사도 정신에 먹칠을 한 셈이었다. 제라르는 나중에 풀려났지만, 다시 포로로 잡혀 참수당하였다.

1290년 아크레가 함락당하면서 유럽인들은 성지와 그 인근에 대한 발판을 잃고 말았다. 군사 활동이 없이는 존속할 필요가 없는 다른 기사단들이 자신들의 존망을 위해 새로운 목표를 찾아 떠난 가운데 특권과 재산을 지니고 있었던 성전 기사단에는 상대적으로 위기감이 없었지만, 이베리아 반도에서의 아랍인과의 소규모 전투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군사활동이 정지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성당기사단을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예루살렘 성지를 수호하는 것이다. 허나, 12세기 후반으로 갈수록 일이 어려웠다. 특히, 이슬람 진영에 알렉산더, 한니발, 카이사르, 징기스칸과 겨루어도 손색이 없는 영웅 살라딘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헌데, 성당기사단이 우연하게 운이 좋아 방심한 살라딘을 어쩌다 물리친 사건은 다시 한 번 성당기사단에게 신의 가호가 내리고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허나, 그 이후에는 행운보다는 불운의 연속이어서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기사단이 최후의 보루로 지켜내야 할 예루살렘 수성을 하지 못하니, 기사단 신뢰가 추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성당기사단의 재정 시스템은 문제가 없었다. 명분이 사라졌을 뿐이다. 이전까지는 신의 이름으로 성당기사단이 무엇을 하든 용인하는 분위기였다. 허나, 성당기사단이 참패하여 예루살렘에서 물러나니 성당기사단이 신의 분노를 샀다 하는 혐의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구약을 읽으면 나오는 사안이 아닌가. 다윗이든, 솔로몬이든, 늘 축복을 받는 것이 아닌 게다. 하고, 왕과 유태인이 축복받지 못하고 불운을 겪는 건, 왕이 신을 거역했기 때문인 게다. 그처럼 그간 기사단에게 면책특권을 주었던 만큼 기사단에 대한 비판이 점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예서, 공정왕, 혹은 미남왕 필립 4세가 등장한다.

   

http://blog.naver.com/rlagudtjq94/10041402754

   

필립 4세 왕이 엄청 무능하거나 한심한 왕으로 아는 음모론자들이 많다. 허나, 실제로는 매우 진취적인 프랑스 왕 중 하나였다. 집권 이후 프랑스를 끊임없이 개혁하고자 했다. 허나, 일을 치루자면 돈이 필요했다.

   

필립 4세는 키다리왕 에드워드 1세와 라이벌 의식이 있었던 듯싶다. 1290년, 유태상인에게 빚지고 있던 에드워드 1세가 롬바드 상인과 한자 상인들과 동맹하여 유태상인 추방령을 내려 부를 확보한다. 이에 힌트를 얻은 필립 4세는 똑같이 할 수는 없으니 내온 타켓이 성당기사단이었던 게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혐의야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었다.

   

재판 과정

http://blog.naver.com/donglm/50115395776

   

바포메트

http://blog.naver.com/jjangalla/60008563785

   

http://historia.tistory.com/2614

   

   

5. 자크 드 몰레이

   

http://blog.naver.com/jjangalla/60008563785

   

자크 드 몰레이가 중요한 이유는 그가 살아 있을 때보다 죽고난 이후이다. 자크 드 몰레이가 죽은 해에 필립 4세와 그 아이들, 교황이 함께 죽었다. 인드라는 일단 자크 드 몰레이가 죽은 시점을 인정하지만, 의혹이 있을 수 있다. 죽기 직전까지 간 자크 드 몰레이를 살려줄 필요가 무엇이 있을까. 잠잠하다가 7년 뒤에 다시 신문하고 처형했다는 것은, 저주를 퍼부었다는 것은 뭔가 후대의 조작이 있지 않나 싶은 것이다. 반전 드라마를 더 효과적으로 쓰고자 하는 무리수?

   

자크 드 몰레이가 이상야릇하게 죽었다는 소문이 전유럽에 퍼지는 까닭에 프리메이슨 등 음모론이 더욱 확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후대 어떤 세력이 자크 드 몰레이를 예수와 유사한 이미지를 만들어서 자신의 세 확장에 써먹을 수 있을 것이란 계산으로 역사를 조작했을 가능성을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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