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기사단, 로슬린 성당, 프리메이슨에 대한 세 가지 의문과 비판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1/12/06 02:02
http://blog.naver.com/miavenus/70125821082
매국노 쪽발이 뉴라이트 나꼼수 어준이는
대체 얼마나 처먹었길래
국유본 CIA 스탠퍼드 하수인으로 놀아나는 거냐?
정도껏 쳐먹어라, 씹색희야.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24 : 성전기사단, 로슬린 성당, 프리메이슨에 대한 세 가지 의문과 비판
국제유태자본론 : 인드라 월드리포트 11/12/06
1. 스코틀랜드 독립투쟁에 성전기사단 합류가 결정적이었다?
일단 배경으로 영화 '브레이브 하트'를 비디오로 한편 감상하시라~! 남의 나라 역사여서 정신이 없을 때, 영화 한 편을 보면 말끔하게 정리할 수 있으니까.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7162
여기서 잉글랜드 에드워드 1세가 1290년대 유태인 추방령을 내려 유태인 재산을 날로 먹은 바로 그 남자이다~! 이걸 보고 프랑스 라이벌 필립 4세 역시 유태인 추방령을 내려 유태인 재산을 착복한다~!
또 영화란 실제와 다른데, 영화에서는 주인공 왈레스(멜 깁슨)가 프랑스 왕비(소피 마르소)와 떡을 쳐서 잉글랜드 왕에게 복수한다, 뭐 이런 설정인데, 실은 에드워드 2세가 동성애자 성향이다 보니 외로움에 못 견딘 프랑스 왕비가 애인 만들어 떡을 쳤는데, 이걸 영화에서는 왈레스의 죽음이 너무 허무하니까 왈레스랑 엮어서 허구적으로 만든 것이다. 역사를 보면, 에드워드 3세는 성인이 되자 엄마의 애인을 내쫓고 스코틀랜드 정복에 적극적으로 나서니 영화 뻥이 좀 지나친 감이 있다 ㅎㅎㅎ
본론으로 가자. 성전기사단 음모론자들은 필립 4세의 박해를 피해서 1307년부터 성전기사단이 전유럽으로 퍼졌지만, 특히 스코틀랜드로 갔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무리가 없다. 허나, 로버트 브루스가 이끄는 스코틀랜드 독립투쟁에 성전기사단이 합류하여 승리에 기여했다?
이에 대한 정황이 없는 것이 아니다.
http://charger07.egloos.com/3749584
첫째, 로버트 브루스는 1307년 이전에 잉글랜드 군에게 대패하여 섬으로 대피한다. 허나, 1307년 이후 다시 스코틀랜드에 복귀하여 군을 재정비한다.
둘째, 로버트 브루스는 1306년에 성당에서 경쟁자를 살해한다. 이로 인해 가톨릭에서 성무집행 정지를 받는다. 파문은 아니다.
셋째, 로버트 브루스는 배녹번의 결전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다.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7162
이 음모론 가설에 대한 인드라 비판은 다음과 같다.
첫째, 기사단이란 명예에 살고 명예에 죽는 집단이다. 필립 4세와 성전기사단장 자끄 드 몰레이의 불화도 필립 4세가 성전기사단의 자존심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했을 것이다. 필립 4세는 성요한 기사단과 성전기사단의 합병을 요구했다. 이유는 이 시기 예루살렘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았던 요인이 크다. 허나, 속내는 두 기사단을 합병시켜 자신의 휘하에 두려한 어설픈 책략 때문이다. 허나, 이러한 책략은 자끄 드 몰레이가 즉각 거부한 데서 실패한다. 하면, 자끄 드 몰레이가 왜 거부했나? 바로 여기서 메로빙거 가문을 그리워했기 때문이니 하는 음모론이 나오는 것이다. (프랑스인에게 메로빙거 왕조가 특별한데, 이유는 영토가 프랑스는 물론 독일, 스위스 등까지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광개토대왕의 아련한 추억이랄까^^!)
인드라 분석으로는 기사단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분석이다. 성전 기사단을 알기 위해서는 경쟁 기사단인 성요한 기사단과 튜튼 기사단 행보를 파악해야 한다.
http://ko.wikipedia.org/wiki/%EB%AA%B0%ED%83%80_%EA%B8%B0%EC%82%AC%EB%8B%A8
http://ko.wikipedia.org/wiki/%ED%8A%9C%ED%84%B4_%EA%B8%B0%EC%82%AC%EB%8B%A8
자끄 드 몰레이가 거부한 이유는 성기사단의 자존심인 게다. 성기사단은 성요한 기사단처럼 신에게만 복종하는 기사단이었으므로 왕의 수하로 간다는 것은 명분에 서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 통합에 관하여 성요한 기사단 반응이 특별히 없는 것으로 봐서 필립 4세의 요구란 성요한 기사단 밑으로 성전 기사단이 들어가란 이야기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해서, 자끄 드 몰레이가 화형을 당했다. 이때, 많은 이가 죽은 것은 아니다. 4명이 화형을 당했다고 한다. 하고, 전유럽적으로 100여명 가량이 죽었다고 한다. 전유럽에서 100여명 선이면 핵심 간부급 정도만 처벌한 것인 게다.
아무튼 기사단이 와해했다면, 개인적으로야 복수심이 있겠지만, 조직적이라면 반드시 재건 운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끄 드 몰레이 정신을 이어간다는 것은, 아무리 로버트 브루스가 성무집행 정지 상태여서 일시적으로 교황청과 대립관계일지라도 기껏해야 왕의 신분이므로 그 왕 밑으로 들어간다는 건 조직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성전기사단이 스코틀랜드 독립전쟁에서 조직적으로 참전하여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면, 이를 조건으로 로버트 브루스에게 기사단 재건에 필요한 독립적인 요구를 했어야 한다. 허나, 역사적 기록으로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다.
둘째, 로버트 브루스의 성무집행 정지가 이후 풀린다. 잉글랜드와의 전쟁에 집중하기 위해 스코틀랜드와 프랑스의 전통적인 동맹 관계를 복원시켰기 때문이다. 스코틀랜드와 프랑스는 1295년부터 300여년간 동맹관계였다. 로버트 브루스가 성전기사단과 관계를 맺었다면, 로버트 브루스가 프랑스 및 교황청과의 관계 복원에 나섰을 때, 성전 기사단에서 반발이 있었어야 했다. 없었다.
셋째, 배녹번 전투에서 승리한 요인은 결정적으로 로버트 브루스의 전략 때문이다.
성전 기사단이 개별적으로 합류한 것이 아니라 조직적으로 합류한 것이라면 독립적인 부대 형태여야 한다. 허나, 배녹번 전투 승리 요인은 무엇인가. 압도적인 잉글랜드 군에 맞써 싸운 브루스 전술은 게릴라 전술이었다. 치고 빠지기. 을지문덕 장군부터 시작해서 월맹군까지 전면전을 피하고 기습 공격 등을 위주로 했기에 거둔 승리였다. 하면, 성전 기사단 전투 특징이 무엇인가. 기도 한 번 외우고 '닥치고 공격'이 전투 수칙이 아니었던가.
정리하면,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에서 성전 기사단이 역할을 했다고 보지 않는다. 물론 성전 기사단 일부가 합류해서 전투를 했을 개연성이 높다. 허나, 이미 자신의 정체성을 버린 상황에서의 전투 참여였으리라 본다.
2. 로슬린 성당은 성전기사단 작품이다?
다빈치 코드 마지막 대목은 로슬린 성당이 차지한다. 해서, 다른 건 다 허구라고 해도 로슬린 성당 만큼은 신비롭지 않느냐 하고 프리메이슨 음모론자들이 반문할 것이다. 이에 대해 인드라는 싸늘하게 답한다.
http://www.jjang0u.com/Articles/jBoardMain.html?db=109&id=6965&pflag=v
모오든 사이비들은 가라.
프리메이슨 음모론자들은 말한다. 11세기까지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이 대세였다가 12세기에 갑자기 유럽에 고딕 건축 양식 붐이 인다. 이는 전적으로 성전 기사단에 속한 석공 때문이다.
"로마네스크 건축의 특색은 11세기 초엽까지 목조였던 바실리카식 설계로 된 네이브(nave:本堂)의 천장을 석조궁륭(石造穹窿:vault)으로 바꾼 점에 있다. 목조천장도 라인란트 등지에 남아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특수한 예에 불과하다. 석조궁륭을 일반적으로 사용하게 된 이유는 신(神)의 집으로서 불연성(不燃性)의 항구적인 건물이 바람직하였을 뿐 아니라 석재공간으로서의 통일성이 생기고 또 음향적인 효과를 높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 석조궁륭은 절단면이 원칙적으로 반원 아치이며, 로마네스크 건축에서는 창문이나 입구기둥 사이의 들보 사이나 처마 밑부분에도 이 반원 아치를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로마네스크 건축을 반원 아치의 집합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와 같은 아치의 만곡부(彎曲部)는 똑같은 석재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부채꼴의 절석(切石)으로 조립되어 있기 때문에, 각 절석의 압력관계는 상하가 아니고 경사의 방향으로 작용한다. 그러므로 반원궁륭의 기부(基部)에서는 바깥쪽으로 비스듬히 횡압력(橫壓力)이 작용한다. 궁륭이나 아치는 로마시대에 이미 나타났으나, 이 시대에는 강력한 시멘트가 사용되었기 때문에 로마네스크 건축에서 보는 긴밀한 역학적 배려가 요구되지는 않았다. 로마네스크 건축가들의 가장 큰 과제는 아치의 집합체인 궁륭과 그 중량을 비스듬히 하거나 수직으로 받는 측벽(側壁)과의 관계를 어떻게 처리하는가에 있었다. 가장 단순한 방법은 측벽을 두껍게 만들어서 양 압력을 버티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벽이 견고하려면 채광을 희생시키고 창문을 작게 만들어야만 가능했다. 그래서 경사진 횡압력의 방향을 되도록이면 낮춤으로써 또는 궁륭의 중량을 측벽의 일정한 부분에 집중하게 하고 그 부분을 또 하나의 부벽(副壁)으로 외부에서 보강함으로써 건축의 안전도를 높여 창문도 크게 마련하는 방법을 고안하였다. 즉, 횡압력의 방향 낮추기는 첨두궁륭(尖頭穹窿)의 설계로, 또 중량의 한 지점 집중은 교차궁륭(交差穹窿)의 구축으로 실현되었다."
기간:1150~1500년. 중세 유럽에서 로마네스크 양식에 이어서 나타난 건축예술양식으로서, 이 시대의 실내장식은 화려하고 밝은 색조에다 여러가지 색을 사용하는 마무리가 유행되기 시작했다. 생활수준이 향상됨에 따라 가구의 종류는 증가하고 그 제작 기술도 발전하였다. 가구에서는 실용으로서의 양식의 시작이라고도 할 수 있다. 14~15세기 후기에 걸쳐 발달, 영국과 프랑스의 그것이 대표적인 것으로 되어 있다. 오크재가 주요 재료. 장식 요소로서는 수직선을 강조하여 전면에 호화로운 조각을 한 것이 특색. 모티프는 아칸더스ㆍ자단ㆍ소용돌이 등. 가구 디자인은 고딕 건축의 형식에 따라 수직을 강조한 육중한 형태와 풍부한 조각이 표면에 이용된 점이 특색이다. 등받이가 높은 의자,지붕이 있는 의자, 장의자, 침대 등은 어느 것이나 소유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이탈리아인이 고오트족(goth族)의 예술을 야만적이라고 모욕하여 부른데서 유래됨. 넓은 뜻으로는 고딕풍의 미술 전반을 가리키는 말임. 정면에서 보아 좌우에 높은 첨탑(尖塔)이 있고 입구의 아아치형은 위끝이 뾰족하며 벽이 적은 반면에 문이 많고 위로 뻗는 수직선이 많음. 대표적인 건물은 노트르담사원(Notre Dame); 프랑스, 케른(Keln)의 대사원; 독일, 미라노사원; 이태리.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90589
간단히 반박하겠다.
유럽에서 고딕 양식을 최초로 구상한 이는 베네틱트파의 쉬제르였다.
"2세기 초에 건축에 관심이 많았던 성직자들은 로마네스크 교회를 더 발전시키면 이런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성 디오니시오의 대수도원장 쉬제르(Abbot Suger)가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노르망디 지방의 실력 있는 장인들을 불러 모아 샤르트르(Chartres)에 공방을 차려 고딕건축의 닻을 올렸다. 이를 후원하는 파리 왕실의 재정적 제도적 행정적 지원을 이끌어냈다. 당시 샤르트르는 중세 플라톤주의의 본산으로 기독교 교리를 연구하는 산실이었다. 이런 종합적 기독교 운동을 통칭해서 샤르트르 스쿨이라 부른다."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4728
쉬제르가 건축공법을 따로 공부한 이가 아니다. 그럼에도 신학적 구상으로 고딕 양식을 초안 설계했던 것이다. 물론 그 초안을 바탕으로 건축 설계한 것은 석공들이었지만. 애니메이션으로 비유하면, 쉬제르가 시나리오를 쓰고 석공이 시나리오를 토대로 스토리보드를 작성하는 것이다. 예서, 스토리보드란 모뎀 장치인 게다. 아날로그 신호를 디지털로, 디지털 신호를 아날로그로 바꾸는 장치. 화가가 시를 떠올리며그림을 그린다고 할까. (에고~ 미안. 인드라가 애니메이션 시나리오 작가였기에 이런 비유를 써봤다~! 화가, 사진작가, 애니메이터들이 인드라 글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가 자신들의 작업에 영감을 많이 주기 때문이라고 했다. 학생 건축대상 받은 이도 그랬고, 아내인 애니메이터 나타샤도 그렇고, 반문화 잡지 같이 했던 사진작가도 그렇고. 하여간, 그림쟁이들이 글쟁이 인드라를 많이 좋아한다. 인드라 글만 읽으면 영감이 무럭무럭 떠오른다 했다.)
하면, 시토파 베르나르두스는 쉬제르에 동조했던가?
천만의 만만의 콩떡이다.
오히려 시토파 베르나르두스는 베네딕트파 고딕 양식에 격렬히 비판했다. 이유는 지나치게 화려하고 사치스럽다는 이유이다. 실제로 시토파는 베네딕트파에서 검소, 노동 윤리를 강조하여 분리한 분파였다.
그렇다면, 시토파 베르나르두스 건축 양식은 어떠한가.
"주로 로마네스크 시대에 융성하였다. 시토파수도회는 클뤼니파(派)나 베네딕투스(베네딕트)파의 화려한 활동에 반대하여 엄격하고 소박한 생활환경을 이상으로 삼았으며 그 건축에서도 장식성을 최소한도로 줄인 소박한 양식을 추구하였다. 높은 탑을 쌓는 대신 아케이드식(式)의 종추를 세웠으며, 내부공간도 좁고 전체의 구조도 단순하다. 그러나 소박하고 엄격한 포름과 벽화나 조각을 배제한 벽면의 돌의 배열 등은 부르고뉴 지방 특유의 형태미를 나타내었다. 이 양식은 클레르본의 수도원장이었던 베르나르투스(聖베르나르) 등의 지도로 전 유럽에 퍼져 중세기 중에 700개 가까운 수도원과 성당이 세워졌다. 베네딕투스파의 건축이 프랑스의 고딕 건축으로 발전한 데 비해, 시토파의 건축은 에스파냐와 이탈리아 고딕 건축의 기초가 되었다. 대표적인 건축물은 1147년 완성된 퐁트네의 수도원 성당으로, 회랑 ·집회실 ·침실 ·식당 등을 갖추고 횡단 반원통 볼트(궁륭)가 얹힌 라틴십자 플랜의 3랑식(廊式) 바실리카건축인데, 명층(明層)은 없고, 사각형의 제실(祭室)과 익랑(翼廊)에 4개의 교회가 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되고 전형적인 시토파건축이다. "
[출처] 시토파건축 [─派建築, Cistercian architecture ] | 네이버 백과사전
시토파 건축 양식이 이후 계속한 것이 아니다. 베르나르두스 생전에 주로 반영한 작품이 시토파 건축이었기 때문이다. 고딕 양식과 시토파 건축 양식, 아니, 정확히는 고딕 양식과 베르나르두스 양식 차이는 무엇인가.
고딕 양식은 바벨탑을 연상시킬 정도로 하늘 높이 치솟는 외양과 더불어 화려한 장식품과 스테인드글라스를 추구한다. 반면 베르나르두스는? 높은 탑을 쌓는 대신 아케이드식(式)의 종추를 세웠으며, 내부공간도 좁고 전체의 구조도 단순하다. 그러나 소박하고 엄격한 포름과 벽화나 조각을 배제한 벽면의 돌의 배열 등은 부르고뉴 지방 특유의 형태미를 나타내었다. (쉬발, 인드라가 아무 생각없이 유럽 배낭여행 두 달 가서 죽어라고 성당 건축물 구경한 것이 이토록 도움이 될 줄이야~!)
음모론자들은 말한다. 로슬린 성당은 일반 석공이 아니라 성전기사단 석공 출신들로만 구성해서 만든 것이라고 말이다. 또한, 성전 건축을 중시해서 교황마저도 성전기사단에 석공으로서 작품을 자유롭게 만들 특권을 부여했다고 강조하기까지 한다. 그런 석공들이 만든 것은 베르나르두스 식인 게다.
헌데, 베르나르두스 식과 베네딕트 고딕 식 중 로스린 성당은 과연 어느 쪽일까?
베르나르두스 식인가, 아니면 베네딕트 식인가.
베네딕트 식이었다. 전통적인 양식뿐만 아니라 중근동과 유럽 신화를 모두 모았다 할 정도로 화려하게 장식했기 때문이다. 누가 봐도 소박하다 할 수 없다.
이것만으로도 성전기사단 로슬린성당 음모론이 얼마나 허접한 것인지를 알 것이다. 그외에는 사소한 것이니 나중에 기회가 오면 더 엄중하게 비판할 것이다.
인드라가 보기에 로슬린 성당이란 국유본과 스코틀랜드 지역민 이해가 만난 관광상품에 지나지 않는다. 이따위 조작한 관광상품에 놀아난다는 것은 인간 품위를 떨어뜨리는 행위이므로 삼가해야 하겠지만, 어디 인간이 그런가. 유치한 것이 또한 인간이다. 명백히 허구인 드라마 촬영장소도 가는 판에 적당히 신비감 퍼붓는 관광상품을 놓칠 수가 있겠는가.
가서 보라~ 대신, 허접하게 감동하는 자신을 되돌아보라~! 니 인생이 혹 매국노 쪽발 노빠 인생이 아니었는지 반성하시라~!
3. 1717년 프리메이슨 규악을 기초한 제임스 앤더스는 유태인이다?
니 애비가 쪽발돼중, 쪽발놈현 쪽발이인 거냐? 인간답게 살아아 한다. 언제까지 개돼지 쪽발돼중, 쪽발놈현처럼 버러지 매국노 인생을 살 것이냐. 정신을 차려야 한다. 국유본 세뇌에서 벗어나야 한다. 니가 인간이면, 이제는 좀 깨달아야 한다.
그대는 결정해야 한다.
남은 삶을 쪽발돼중, 쪽발놈현처럼 매국노 인생을 살 것인가, 아니면 한반도 평화와 통일, 사회복지와 경제발전을 위한 인간다운 삶을 살 것인가.
쪽발 뉴라이트 판사 색희들 때문에 고민이라고? 잘 생각해보렴. 쪽발찌라시 한걸레 기자 색희가 밤마다 전국 룸살롱을 뒤적일 수 있겠니? 없지? 최종원 같이 허접한 색희가 성노동자 여성 끼고 씹질을 하건 말건 모른다 이 말씀이다. 유일하게 아는 경로란? 그래, 국정원이다, CIA이다. 여기서 정보 찔러주지 않으면 한걸레가 알아도 절대 보도하지 않아. 밑에서 기자가 글을 써도 쪽발 한걸레 편집국에서 짜를 것이야. 그럼에도 기사화했지? 왜? 국유본 지시이니까.
잘 들어. 서초동 앞 룸살롱에서 술처먹는 씨발 색희들이 검찰만 있다고 착각하지 말자. 여기에는 낮에는 민주주의다, 뭐다 하는 하나회 같은 개씨발색희들, 한국을 좀 먹는 이완용만도 못한 개씨발 우라질법 판사넘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 이런 작업은 이미 프랑스에서 한 바 있지. 국유본이 감시하는데, 국유본이 판사더러 너 노숙자 될래? 시키는 대로 할래? 하는데 안 할 수가 없겠지? 심경은 이해한다. 허나, 그래도 넌, 복 받은 색희들이고, 이 나라 엘리트이면 엘리트답게 해야 할 몫이 있는 게야. 최소한 침묵해야 하는 게야. 개씨발 국유본 판사색희들아, 지하에 계신 순국선열님들이 무섭지 않느냐. 삼대에 걸쳐 니넘들 집안에 재수가 없어서 대가 끊기고, 니놈들 몸에는 온갖 질병이 난무해서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게 될 것이다. 인드라가 저주하겠다. 이 개씨발 색희들아.
사람이면 사람답게 살아야지, 짐승만도 못하게 사는 쪽발노빠만도 못한 판사 개씨발넘들아.
1717년 영국 프리메이슨은 대통합을 한다. 하면, 왜 이 시기 대통합을 해야만 했을까?
칠천만 한국인의 철천지 원쑤인 매국노 쪽발 노빠처럼 프리메이슨 음모론이 허구이면 성경은 그보다 열 배는 더 허구 주장 따위를 하는 국유본 하수인이자 캐병쉰색희인 프리메이슨 음모론자들은 말한다.
드디어 스코틀랜드에서 입지를 다지고 세계를 향해 한걸음을 내딘 것이라고.
좆까라, 쪽발돼중처럼 삼대에 걸쳐 쪽바리왕 궁둥이에 키스하다가 뒈질 역겨운 인생아!
잉글랜드사랑 스코틀랜드사를 단 하루라도 읽은 이라면 이것이 얼마나 쪽바리스런 주장인 걸 알 것이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오랜 반목 끝에 1707년 양국 의회가 연합법에 의해 통합을 했다. 헌데, 이런 연합법이 통과한 배후는 누구인가. 명예혁명 이후인 게다. 명예혁명 이후 그간 스코틀랜드 독립투쟁의 후원자였던 네덜란드 상인들이 잉글랜드에 엄청난 투자를 한다. 또한, 영란은행이 등장하는데, 초대 은행장이 스코틀랜드인이다. 잉글랜드 왕도 스코트랜드 왕조인 스튜어트 왕조이니 만큼 연합법이 통과하지 않을 도리가 있겠는가. (예서, 잊지 마시라. 인터넷에서 국유본이 킹제임스 성경을 문제를 삼는 일이 있다. 인드라는 신교는 물론 구교와 무관하다. 유신론자라고 주장해도 아직까지 남들로부터 정신적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유물론자라는 낙인이 찍혀 있다. 헌데, 킹제임스 성경을 문제삼는 이들을 보니 국유본스럽다. 뭐냐면, 킹제임스가 성경에 한 역할은 거의 전무했다. 그저 승인했을 뿐이다. 킹제임스가 킹제임스 성경에 단 한자라도 개입하거나 한 것은 없다. 왜냐하면 킹제임스가 무식했기 때문이다. 단지, 허가했을 뿐이다. 그것이 킹제임스 성경이 프리메이슨 성경이라 하는 것이다. 웃기지도 않는다. 인드라는 신교도나 구교도가 아니다. 허나, 공감할 수 있을 것 같다. 왜냐? 인드라가 진보좌파할 때, 이런 경우를 수도 없이 겪었기 때문이다. 말도 안 되는 걸 대세론으로 밀어붙이는 경우를 허다하게 봤다. 국유본이 결심하면 당신들 두뇌도 개조할 수 있어.)
하여간, 문제는 무엇인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잇는 스튜어트 왕조 대가 끊긴 것이다.
"재커바이트의 반란은 1688년에서 1746년에 걸쳐 브리튼 제도에서 일어난 폭동이자 반란, 전쟁이었다. 반란은 제임스 2세의 복위를 목표로 하였으며, 그가 명예혁명에 의해 폐위되자 스튜어트 왕가 후계자의 복권을 시도했다. 재커바이트(영어 Jacobite)라는 이름은 제임스(영어 James)의 라틴식 이름인 야코부스(라틴어 Jacobus)에서 온 것이다. 여러 차례에 걸쳐 일어난 이 반란은 발생한 연도를 따 "15년의 재커바이트 반란"(1715년) "45년의 재커바이트 반란"(1745년)과 같이 불렸다.
개요
여러 차례에 걸쳐 일어난 재커바이트 반란의 동일한 목표는 스튜어트 왕가를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왕좌에 앉히는 것이었다.(1707년 이후에는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의 왕좌를 목표로 했다.) 이들은 명예혁명을 통해 집권한 메리2세와 네덜란드 출신인 그녀의 남편 오렌지공 제임스의 통치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들은 하노버 왕가가 성공적으로 영국의 왕좌를 양위받은 1714년 격렬한 반란을 일으켰다. 최후의 재커바이트 반란은 1745년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를 옹립하여 일어났으며 1746년 컬로든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반란은 완전히 진압되었다."
재커바이드 반란에서 보듯, 영국을 안정화시키기 위해서 국유본은 특단의 정책을 취하지 않을 수 없던 것이다.
그것이 쪽발 놈현이요, 안철수/박시장 프로젝트인 게다.
여러분은 아직도 눈치를 채지 못하는가. 쪽발찌라시 한경오프엠이 아무리 매국노질을 한다고한들 지지율 5% 이상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반면, 친일 조중동이 쪽발 돼중, 쪽발 놈현에 대하듯 안철수에 대해 노이즈 마케팅을 한다면 안철수 지지율은 폭등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핵심은 스코틀랜드 독립운동 핵심이라 여기는 세력에 프락치를 심어서 잉글랜드 - 스코트랜드 통합에 보탬이 되는 것. 제임스 앤더슨? 장로교 목사였다~!
이것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해서, 국유본이 이차적으로 수행한 것이 미국 독립이었던 것이다.
'국유본론백문백답'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프랑스혁명과 프리메이슨 1 - 신비주의 (0) | 2013.11.20 |
---|---|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25 : 프리메이슨 (0) | 2013.11.20 |
왜 국유본은 다빈치 코드를 통해 성당기사단 음모론을 퍼트리나 (0) | 2013.11.20 |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22 : 엔릴, 인드라, 단군 (0) | 2013.11.20 |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21 : 이란시위, 촛불시위, 월가시위 배후는 국유본이다 (0) | 2013.11.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