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22 : 엔릴, 인드라, 단군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1/12/02 0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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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22 : 엔릴, 인드라, 단군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1/12/02
오늘은 인드라 생일이니 인드라에 관해 말해볼까 한다.
"인드라(산스크리트어: इन्द्र, इंद्र, indra,Śakra, 팔리어: Sakka)는 인다라(因陀羅)로 음역되기도 하는 인도 신화의 천신이다. 힌두교에서는 천국 또는 수미산에 거처하며 신들의 왕으로서, 날씨와 전쟁을 관장한다고 믿는다. 불경에서는 제석천, 제석천왕, 제석천존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베다교, 힌두교, 자이나교, 불교에 등장한다.[편집] 도리천
이 부분의 본문은 도리천입니다.
제석천은 원래 인도 신화의 인드라신의 한자어이다. 도리천의 천주인 제석천은 전체 우주의 행정을 총괄한다고 한다. 제석천은 석가모니가 성불한 뒤에 그의 수호신이 되었다. 도리천은 불교에서 말하는 육욕천(六欲天) 중의 두 번째 하늘로, 수미산(須彌山)의 정상에 위치하고 있다. 수미산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사방의 산봉우리에 천인(天人)들이 사는 각각 8개씩의 천성(天城)이 있으며, 중앙에는 제석천이 사는 선견성(善見城)이 있어 33천이라고 한다. 선견천이란 잘 보는 천이란 뜻이다. 석가모니의 어머니인 마야부인이 죽은 뒤 다시 태어난 곳이 바로 도리천이다. 수명은 1000세이고, 하루가 인간세상의 100년이라고 한다. 신라 선덕여왕이 자신이 죽으면 도리천에 묻어달라고 말했다.
<p style="LINE-HEIGHT: 2">[편집] 기원</p>
인드라는 미탄니의 신이었다.[1] 다른 인도-유럽 문화의 신들과 비교한다면 토르나 페룬과 같은 우뢰의 신, 또는 취하게 하는 음료의 신들과 견주어 질 것이다. 인드라라는 이름은 인도-이란 문명에서 두가지 모두를 뜻하는 의미로 쓰였다. 인드라의 이름 앞에는 브리트라(Vritra)를 물리친 자 또는 물길을 인도하는 자를 뜻하는 발라(Vala)와 같은 형용사가 붙는데, 이는 그리스 신화의 트립톨레모스나 디오니소스와 비견된다.
베다와 같은 힌두교의 경전들에서 인드라는 초기 인도-유럽의 종교에서 신들의 수장으로 그려지는 디에우스[2]의 지위를 갖는다(베다에서 디아우스 피타는 인드라의 아버지 신으로 그려진다. 이는 북유럽 신화의 토르가 오딘의 아들로 그려지는 것과 비교된다.).
리그베다
리그베다에서 인드라는 신들의 수장, 브리트라를 물리친 자, 소마를 마시는 자, 물길을 인도하는 자로 묘사된다. 리그베다에서 인드라는 가장 강한 자라는 뜻인 "사크라"로 불리기도 한다. 인드라의 무기는 벼락이며, 이것으로 아수라 중 가장 강한 브리트라를 죽였다. 인드라는 "아이라바타"라는 흰 코끼리를 타고 다닌다. 인드라의 아내는 인드라니이며 자식 신으로는 쿤티, 발리, 수르야 등이 있다."
1. 인드라 VS 브리트라
리그 베다에 의하면 인드라는 우주의 물을 모두 들이키고 산에 똬리를 틀고 있던 가뭄의 뱀인 브리트라를 죽였다.
브리트라 = 龍王 ヴリトラ (Vritra)
데바 신들의 천적인 용. 데바 신들의 적이 었던 다이티야 족(거인 족)이 매일 매일 신들에게 죽어나가는 자식들을 대신해 신들을 무찌를 힘을 기도하게 되자, 불속에서 브리트라가 소환 되었다. 거의 데바 신들을 멸망 까지 이르게 하지만, 인드라의 등장으로 결국 퇴치 되었다.
거인신, 용신, 뱀신을 물리친다? 예서, 뱀과의 대결은 중근동 신화에서 수메르 신화까지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닌릴(셈족의 이슈타르) 또는 닌후르사그(산의 귀부인)가 반려자이다. 수메르에서는 아누(하늘의 신)와 엔키(땅 또는 물의 신)에 버금가는 신으로, 하늘·바람·폭풍우 등을 지배하고 또한 인간의 운명도 다스린다. 후에 이 신은 우세한 입장이 되어 BC 2300년경에는 셈족(族)에 받아들여져 벨(왕)이라는 이름으로 숭배되었다. 신앙의 중심지는 니푸르시(市)로, 에 쿠르(산의 신전)에서 섬겨졌는데, 바빌로니아의 제1 왕조 무렵에 마르두크에 의해 그 지위가 대체되었다.
[출처] 엔릴 [Enlil ] | 네이버 백과사전
수메르 신화에 따르면, 엔릴은 새(봉)였으며, 엔키는 뱀(용)이었다. 엔키가 장남이어서 처음에는 지구의 신이었는데 서자였기 때문에 나중에는 엔릴이 지구의 신이 되었다. 이후 엔키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만, 분한 마음에 틈만 나면 엔릴을 씹었다고 전해진다. 해서, 엔릴이 홍수를 일으켰을 때, 가장 반대한 이가 엔키였다. 아울러 이 이야기는 아브라함의 이삭과 이스마엘, 이스마엘과 이삭의 이야기와 흡사하다.
"2011년 11월 6일부터 8일까지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이드 알아드하(Eid al-Adha) 축제가 한창이다. 이드 알아드하는 하나님(알라/여호와)이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 대신 양을 희생시킨 날을 기념하는 축제일이다. 유대교와 기독교에서는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치려고 했다고 말하지만, 이슬람교에서는 아브라함이 아들 이스마엘을 바치려고 했다고 말한다. 이 주장의 근거는 무엇일까?
성경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세기 22:2)
이슬람교는 '독자'라는 말에 주목한다. 이삭이 태어났을 때는 이미 형 이스마엘이 있었기 때문에 이삭은 '독자'가 될 수 없다. 따라서 '독자'는 이스마엘일 수 밖에 없고, 아브라함이 번제를 드릴려고 했던 아들은 이삭이 아니라 이스마엘이라는 것이다. 물론 기독교에서는 창세기 21장에 하갈과 이스마엘을 광야로 쫓아내는 내용이 들어있기 때문에, 번제를 드릴 당시에는 아들 이삭 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삭은 '독자'가 맞다는 것이다.
꾸란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아들의 나이가 그와 함께 일할 나이에 이르렀을 때 그가 말하길 내 아들아 너를 제단에 올리라는 명령을 내가 꿈에서 보았노라 너의 생각이 어떤지 알고 싶구나 라고 하니 아들이 말하길 아버지 당신께서 명령받은 대로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인내하는 종으로부터 원하신다면 당신께서 저를 발견할 것입니다 하였더라 그 둘이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는 그로 하여금 그의 이마를 숙이도록 했을 때 하나님은 그를 불러 아브라함아 그대는 이미 그 꿈을 이행하였노라 하나님은 이렇듯 선을 행하는 자들에게 보상을 내리리라 실로 이것은 분명한 하나의 시험이었나니 하나님은 훌륭한 희생으로 그를 대신하였노라"(꾸란 37:102-107)
"하나님은 그에게 의로운 자 중에 있을 한 예언자 이삭의 소식을 주어"(꾸란 37:112)
아브라함이 아들 이스마엘을 바치라는 명령에 순종하자 그 후에 하나님이 이삭을 상으로 주었다는 것이다.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이삭은 야곱의 아버지다. 야곱은 이스라엘과 유대 민족의 선조로 여겨진다. 마찬가지로 이슬람교에서 이스마엘은 아랍 민족의 선조로 여겨진다.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예언자 무하마드는 이스마엘의 자손이다. 새로 종교를 창시한 입장에서 선조의 신성함은 중요한 문제였다. 무하마드는 계시를 받았을 것이다. '아브라함이 바친 '독자'는 이삭이 아니라 이스마엘이다. 너희는 이스마엘의 자손이며,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자손이다.' 창세기에서도 하갈과 이스마엘은 광야로 쫓겨났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먹여살리고 그들에게서 한 민족이 이루어질 것을 약속했다."
http://owlpark.egloos.com/10802939
엔릴은 지구의 신이자 기후의 신이었다. 기후의 신이었기에 홍수를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이다.
셈족의 한 갈래로 유목민이었던 아카드인이 눈부신 활동을 시작한 것은 BC 2350년경, 즉 사르곤 대왕 때부터이다. 그는 수메르인의 도시국가들을 정복하여 메소포타미아 최초의 통일국가를 건설하였다. 아카드 왕국이 수립되면서 바빌로니아(남부 메소포타미아)의 북반부를 아카드, 남반부를 수메르라고 부르게 되었다.
수도는 아가데였으나, 그 소재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사르곤 대왕은 56년간의 치세(治世) 동안 남쪽은 페르시아만에서 북쪽은 지중해에 이르는 대제국을 형성하였는데, 궁병대(弓兵隊)를 중심으로 한 강력한 군대와 중앙집권적 정치제도로 국가의 기초를 다졌다.
그의 두 아들 시대에는 변경지방의 반란으로 고통을 받았지만, 제4대 왕 나람신은 반란을 진압하고 사르곤시대의 제국을 회복하여 '아카드의 신(神), 사계(四界)의 왕'이라 일컬으며 신격화되었다. 그러나 뒤에는 국운이 점점 기울다가 BC 2150년경 이란고원에서 침입해온 구티인(人)에 의해 멸망하였다. 아카드인의 언어는 셈어의 동방군(東方群)에 속한다. 그들은 수메르인에게서 배운 설형문자(楔形文字)로 아카드어를 점토판에 써서 남겼으며, 수메르 문명을 셈화하여 후대에 전달하는 역할을 하였다. 예술면에서는 양식화된 수메르 예술에 사르곤기(期)라 불리는 새로운 면을 열어 많은 걸작을 남겼다. 특히 수사에서 발견된 나람신왕의 전승비(戰勝碑)와 니네베의 출토품으로서 사르곤왕을 나타낸 듯한 청동제 두부상(頭部像)은 유명하다.
[출처] 아카드 [Akkad ] | 네이버 백과사전
헌데, 홍수시대 이후에 아카드 왕국이 엔릴을 대체하는 아다드를 내세운다.
람만이라고도 한다. 바람 ·폭풍 ·천둥 ·비 등을 관장하는 자연현상의 신으로, 태양신 샤마슈, 월신(月神) 등과 함께 널리 숭배되었다. 바람의 신 엔릴이 지상계(地上界)의 신이 되었을 때 그를 대신하여 뇌우(雷雨)의 지배권을 잡았다. 아다드는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성격을 지니는데, 즉 비바람으로 비옥(肥沃)을 초래하는 풍양신(豊穰神)으로서의 성격과, 폭풍우 ·천둥 ·홍수로 자연을 파괴하고 암흑과 죽음을 초래하는 신으로서의 성격도 갖고 있다. 또한 샤마슈와 함께 미래를 환기(喚起)하는 특권을 가진 탁선(託宣)의 신으로서도 숭배되었다. 천신(天神) 아누의 아들 또는 대지의 신 벨의 아들이라고 한다. 성수(聖獸)는 황소와 사자이고, 심벌은 사이프러스나무와 번갯불이다. 소의 등에 올라 앉아 한손에 번갯불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그 기원(起源)은 분명하지 않으나 근년에 북(北)시리아의 라스샴라에서 발굴된 점토판(粘土板) 문서로 아시아닉 어계(語系) 민족의 최고신임이 밝혀졌다.
[출처] 아다드 [Adad ] | 네이버 백과사전
본래는 서방 셈족의 폭풍ㆍ번개의 신으로, 그 신명(神名)도 천둥소리를 의미하는 것에서 유래한다. 시리아지방에서는 하다드(Hadad)라고 불렸는데, 보통은 아카드어권의 신으로 본다. 문서에서는 발음에 상관없이 1M이라고 쓰여져 있는데, 표준적인 아카드어 호칭은 아다드다. 단, 아모리(아무르)계의 사람들간에는 아두(Addu)라고도 했다. 이 신명은 이미 파라시대(기원전 3천년기 중엽)의 신명표에 나타나 있기 때문에 이 신은 상당히 오래전부터 남부 메소포타미아에서도 알려져 있었다고 생각되는데, 특히 그 제의는 아카드시대(기원전 2334~기원전 2154년경) 이후의 북부 메소포타미아에 널리 나타났다. 또한 시리아, 팔레스타인에서는 바알과 동일시되는 경우도 있었다. 『길가메시 서사시』의 제11서판에 기록되어 있는 홍수전설에서는 아다드가 슈라트 및 하니슈 일대의 종신을 거느린 폭풍우의 신으로서 등장한다. 아내 여신은 샬라(Shala), 그 심벌은 수소, 번개 등이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630186
아다드와 엔릴과의 차이는 무엇인가. 수메르에서 엔릴은 새(봉)였다. 반면, 아카드에서 아다드는 황소이다.
수메르에서는 달의 신, 난나르(신) 형상이 황소였다. 인드라 분석으로는, 대홍수 이전에는 엔릴이 기후의 신이었으나, 대홍수 영향 때문인지 바빌론 남단 수메르 지역에서는 달의 신, 난나르(신)가 기후의 신이 맡던 역할을 맡았고, 바빌론 북단 아카드 지역에서는 아다드가 기후의 신 역할을 맡은 것 같다.
대홍수 이전 엔릴은 대홍수 이후 인기를 잃는다. 이런 이유로 조로아스터교는 엔릴 = 인드라를 악마로 간주한 것이 아닌가 볼 수 있다. 이후, 엔릴을 대체할 신으로 아다드와 난나르가 떠오른 것이다. 예서, 지킬과 하이드 성격의 신, 정신분열적인 신, 아다드와 난나르가 이중적인 면모로 등장한다.
아다드는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성격을 지니는데, 즉 비바람으로 비옥(肥沃)을 초래하는 풍양신(豊穰神)으로서의 성격과, 폭풍우 ·천둥 ·홍수로 자연을 파괴하고 암흑과 죽음을 초래하는 신으로서의 성격도 갖고 있다.
헌데, 이러한 이중적인 신의 모습이 조로아스터교에 영향을 주어 조로아스터교 핵심 교리인 빛과 어둠의 신이 탄생한 것이 아닌가 싶다.
하면, 왜 황소일까.
이는 수메르 점토판에서 찾을 수 있다. 기원 전 2,500년경 수메르 점토판에는 소에서 우유를 짜내는 등의 기록이 나온다.
보통 황소 숭배하면 농경민이 숭배한 것으로 나오고, 이집트 이시스신 등 이집트 신화에서 기원을 찾는데, 이건 명백한 왜곡이다.
이유는 신지학회 블라바츠키 영향 때문이다. 신지학회를 비롯한 신비주의자, 뉴에이지의 꿈이 무엇이었나. 셈족 중심의 역사를 바꾸고 싶었던 것이다. 성경에 의하면, 신은 셈족에게 특권을 주었다. 헌데, 유럽인은 셈족이 아니다. 야벳족이다. 해서, 유럽인들은 셈족과 다른 기원을 찾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그때, 등장한 것이 마담 블라바츠키. 레무리아의 후예를 자처하니 여기에 자극을 받아 툴레회가 내세운 것이 아리안족. 하여간 이 대목은 나중에 자세히 말할 기회가 오면 말하겠다. 중요한 건, 블라바츠키 이후로 신비주의자들은 수메르 이전의 역사를 찾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즉, 수메르가 처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고, 지금껏 뻥만 치고, 아무런 고고학적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하여간, 유럽 중심 신비주의자들은 황소 신화를 지중해 신화, 이집트 신화, 농경민 신화로 가두려고 한다. 허나, 황소 신화는 어디까지나 유목민 신화이다.
우유의 허와 실
소는 다른 가축들에 비해 가장 늦게 가축화하였다. 그만큼 소를 기르기가 어려웠다. 어려운 이유는 소가 많이 먹는 대형 동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소를 가축화해도 다른 동물들처럼 많이 키울 수 없었다.
하면, 소는 잡아먹기 위해 키웠을까. 잡아먹을 수는 있었으나, 그러기에는 그간 키운 보람이 없었다. 그보다는 소젖을 짜내는 방법을 생각해낸 것이다. 왜? 유목민에게는 먹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면, 양젖도 있는데, 왜 소젖인가. 소젖은 영양분이 풍부했다. 배고플 때, 소젖만 먹어도 되었다.
반면, 농경 민족 사이에서는 소란 힘이 세니 경작용이었다. 농경민족에게는 상대적으로 먹을 것이 다양하니 굳이 소젖을 먹을 이유가 없었다. 해서, 농경민은 채식 위주여서 창자가 긴 편인 반면, 유목민은 육식 위주여서 창자가 짧은 편이라는 것이다. 이런 대목에서 북방계/남방계를 따지는 기준 중 하나일 수 있는 것이다. 북방계야 유목민이니 우유 먹는데 큰 탈이 없는 편이다. 반면, 남방계야 농경민이니 우유를 먹으면 탈이 날 확율이 크다.
대홍수 이전에는 새의 신, 엔릴이었지만, 대홍수 이후에는 황소의 신, 난나르였다는 건, 수메르에서도 수메르 문화에 동화한 유목민이 권력을 장악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해서, 달의 신, 난나르가 조수 간만의 차 때문에 부각한 신인 만큼 보름달과 초승달이 함께 쓰인 것인데, 후대로 갈수록 초승달인 이유는 황소 뿔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기원 전 이천년 이전 흐름이다.
이후, 바빌론에서 맹위를 떨친 민족이 후르리인이다.
미탄니(Mitanni)는 오늘날의 쿠르디스탄 지역을 지배하였던 고대 부족이다. 미탄니 제국은 후르리인이 세운 가장 강력한 국가였다. 어떤 학자들은 미탄니는 쿠르드 언어의 근원이라고 생각한다. 몇몇 쿠르드 학자는 그들 씨족중의 하나인 같은 지역에 사는 마티니가 미탄니의 이름을 보존한 것으로 믿는다. 미탄니의 최선의 기록은 시리아 나가르 시에서 발견된다.
[편집] 인도 아리안 초대국
미탄니 왕국.
미탄니의 약간의 이름 또는 용어는 인도-아리안 초대국을 나타내며 인도아리아인 엘리트는 인도아리아인의 팽창의 과정에 스스로를 후르족에 편승시켰다. 히타이트와 미탄니의 조약에서 신 미트라, 바루나, 인드라, 나사티야(아쉬빈스)가 축원되었다. 키쿨리의 말조련 문헌은 아이카(에카), 테라(쓰리), 판자(판차,5), 사타(삽타,7) 나(나바,9) 바르타나(둥근)등과 같은 기술적인 용어를 포함한다. 다른 문헌은 바브루(갈색), 파리타(팔리타, 회색) 그리고 핀카라(핑갈라, 빨간)등의 단어를 포함한다. 그들의 주요 축제는 여름(비슈바) 축제이며 그것은 고대 세계의 대부분의 문명에서 일반적이다. 미탄니 전사들은 마리야라 불렸고 산스크리트어로 전사라는 뜻이다.
산스크리트 어로 슈타르나는 좋은 태양이며, 바라타르나는 위대한 태양, 파르샤타타르는 토끼를 지닌 지배자, 사우슈타타르는 좋은 지배자, 아르타마마는 가장 옳으심, 투슈라타는 10개의 당근을 지니심이라는 뜻이며, 마티바자는 기도자라는 뜻이다.
"수도는 와수카니로, 위치는 분명하지 않다. 왕 슈타르나 ·샤우슈샤타르 등과 신(神) 인드라 ·바루나 등의 이름으로 보아, 지배계층은 인도유럽어족(語族)이었음을 알 수 있다. 말 ·전차(戰車)를 가진 군대로서 오리엔트 강국이 되어, 전성기(BC 17∼BC 15세기) 세력범위는 소아시아 남동부 ·북시리아 ·티그리스 동부 등을 지배하였다. 그러나 히타이트 세력이 강대해지자, 이집트에 접근하여 제18왕조 파라오들과 정략결혼으로 우호관계를 맺어 대항하였다.
BC 14세기 히타이트의 왕 수필룰리우마스의 침입으로 수도가 함락되고, 서반부(西半部)는 히타이트령(領)이 되었다. 나머지 왕국령(하니갈바트로 개칭)도 히타이트의 조공국이 되었다. BC 14세기 후반 분열 상태에 빠지고, BC 1300년 무렵 히타이트의 침입과 아시리아의 배반으로 멸망하였다. 아마르나 문서에는 이집트 제18왕조 아멘호테프 4세(아크나톤)와 주고 받은 서간(書簡) '미탄니 서간'과, 미탄니 왕 마티와자와 히타이트 대왕 수필룰리우마스의 조약문(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외교문서) 등이 남아 있다." [출처] 미탄니 [Mitanni ] | 네이버 백과사전
기록에 따르면, 아리안족은 자신들을 후르리의 일족임을 자랑스럽게 말했다는 것이다.
성경을 해석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어느 한 쪽에서는 사해동포주의로 해석하지만, 다른 쪽에서는 엄밀한 구분을 요한다. 후자 입장에서 중요한 것이 아리안족이 셈족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혹은 셈족과의 혼혈이라는 것이다.
이를 전제하고, 후르리인이 바빌론을 장악한 것은 기원 전 이천년에서 기원전 천오백년 사이이다. 이때, 후르리인 역시도 신화를 대체해야 했다. 왜? 신화 교체 작업 없이는 왕권에 대한 정당성이 없기 때문이다.
하여, 등장한 신이 인드라이다. 역시 천둥과 번개의 신, 기후의 신이다. 엔릴과 아다드, 난나르를 대체한 셈이다.
2. 신들의 신, 인드라
아리안족이 카스피해에 면한 이란 북부 지대에서 인도를 침략한 초기 시대, 리그베다 시절(기원전 2000년에서 기원전 800년)에 인드라는 신들의 신이었다. 리그베다 찬가의 1/4을 차지할 정도이다. 허나, 아리안족이 인도 깊숙이 동쪽으로 영역을 확장해가던 우파니사드 시대 혹은 십육대국 시대(기원전 1000년에서 기원전 500년)에 이르러서는 브라만, 비수뉴, 시바 3대 신이 최고신이어서 인드라는 최고신 자리를 내놓는다.
드라비다족을 노예화하기 위해 만든 카스트 제도가 후대에 갈수록 아리안족 내부에서도 서열화하여 단지 직분 차이에 불과했던 사제와 전사와 평민 직분이 신분 차이로 변모하여 사제 중심의 사회가 되었기에 전사의 신인 인드라 지위가 추락할 수밖에 없었다.
허나, 싯다르타 고타마 탄생 시기인 기원전 500년에서 400년 이후로는 다시 인드라가 부활을 한다. 이유는 싯다르타 고타마 신분이 왕자에서 볼 수 있듯 그 출신이 대부분 전사 출신인 아리안 왕족들이 사제 계급에 불만을 품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로마 가톨릭에 대항하는 유럽 왕가들이거나, 혹은 중국 춘추전국시대 제후국 군주들과 같은 신세였던 셈이다. 이때, 인드라는 제석천에서 보듯 새로운 종교를 보위하는 신으로 등장한다. 수미산 정상에서 살고 있다 한다.
3. 천개의 눈, 인드라
인드라는 네 개의 팔과 천 개의 눈을 지녔다.
이때, 왜 천 개의 눈인 것일까.
우선 눈에 관해서 말한다.
보통 눈하면 전시안, 호루스의 눈을 기원으로 삼는다.
http://blog.naver.com/tattoosoul?Redirect=Log&logNo=50123435858
이집트에서 이런 식으로 쓰인 건, 불완전한 십진법을 썼기 때문이다. 실제 계산에서는 이집트 계산법을 썼다.
헌데, 여기서 흥미로운 건, 부족한 건 달의 신이 채워준다는 것이다. 이는 수메르 측량법을 이집트가 응용 변형한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허나, 이것이 달의 신, 난나의 원형이었을까? 인드라 추정으로는 삼각대만이 난나의 원형으로 본다. 왜? 삼각대란 카메라 삼각대에서 보듯 안정, 균형을 의미한다. 이처럼 조수 간만의 차에서 달과 태양과 지구가 직각 삼각형일 때, 혹은 이시스의 삼각형, 피타고라스의 삼각형일 때, 밀물 썰물 차가 가장 적다.
하고, 수메르족이 육십진법을 쓴 것도 작도법에 의한 것이 확실한 것 같다. A를 중심으로 원을 그린 뒤 그 원 둘레 아무 지점 B을 중심으로 A와 B를 반지름으로 하는 원을 그린다. 이때, A를 중심으로 한 원과 만나는 지점이 있는데, 이 지점을 중심으로 해서 그리는 것을 반복하면, 기존 원을 6등분할 수 있다. 하고, 원의 전체 각이 360도이니 육등분한 원호 각이 60도이다.
하면, 왜 육십진법인가. 오늘날에도 육십진법은 남아 있다. 가령 한 시간은 60분이지 않나. 일분은 60초이다~! 왜 각도와 시간 사용에서는 십진법이 아니라 육십진법을 사용하나?
한마디로 말한다. 계산하기 쉽기 때문이다. 1/3하면 무한 소수 0.3333333....이다. 허나, 육십진법을 사용하면? 2, 3, 4, 5, 6의 최소공배수가 60이므로 60진법을 수메르족이 사용한 것이다.
60 나누기 2는 30이다. 60 나누기 3은 20이다. 60/4는 15이다. 60/5는 12이다. 60/6=10이다. 소수점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수로 딱딱 떨어진다. 똑똑한 수메르인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10진법보다 60진법이 보다 완벽한 체계로 생각하지 않았을까~!
게다가 계절이란 12달이다. 농사에 필요한 달력은 음력이지 양력이 아니다. ㅠㅠㅠ"
http://blog.naver.com/miavenus/70124157169
해서, 눈이란 것은 천문이요, 측량인 게다. 바빌론이나 이집트나 홍수 조절이 큰 문제였다. 하여, 이 시기에는 하늘을 살펴 조수간만의 차나 세차 운동 같은 것을 발견하는 것이 신의 의지를 읽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범신론적 창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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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0의 '푸루샤 숙타'(원시 찬가)는 범신론적이다. 원시의 인간 '푸루샤(Purusha)'는 천 개의 머리, 천 개의 눈, 천 개의 발을 가졌으며 신들이 푸루샤를 희생시켜 제사를 지냈을 때 거기서 말, 소, 산양, 양 등이 태어났고, 푸루샤의 마음에서는 달이, 눈에서는 태양이, 입에서 인드라와 아그니가, 숨결에서 바람이, 배꼽에서 공계(空界), 머리에서 천계(天界), 양 발에서 대지, 귀에서 방위(方位)가 생겼다고 한다. 이러한 찬가는 거인 해체 신화의 한 예이다."
http://ko.wikipedia.org/wiki/%EC%B0%BD%EC%A1%B0%EB%A1%A0
인도 범신론적 거인 해체 신화에서 마음에서 달, 눈에서 태양, 입에서 인드라가 나왔다 한다. 이는 인도 범신론적 신화가 수메르에서 기원을 두고 있으나 이집트 신화에 영향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마음에서 달은 수메르이다. 눈에서 태양은 이집트이다. 입에서 인드라가 나왔다, 여기서부터 인도인 게다.
인도를 침략한 아리안은 자신의 정체성을 인드라에 두었는데, 특히 입에 두었던 게다. 왜 입일까.
http://ko.wikipedia.org/wiki/%EC%95%84%EA%B7%B8%EB%8B%88
인드라 분석으로는, 아그니는 불의 신이다. 인드라는 비의 신이다. 거인족은 용이요, 뱀이다. 보통 서양의 용은 불을 내뿜는다. 이는 용의 부정적인 면만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용이 불을 내뿜는다는 것은 가뭄을 의미한다. 반면, 용이 비를 내보낸다는 것은 풍요의 의미이다. 비가 오면 농사가 잘 되니까. 다만, 지나치게 오면, 대홍수가 나니 문제인 게다.
헌데, 불과 비가 모두 입에서 나온다. 입이란 말이다. 거인족의 다른 부위에서는 부위마다 하나씩 대응하지만, 입만은 둘이다. 열변을 토하는 광경을 생각해보자. 열변인 만큼 주변을 뜨겁게 만든다. 다른 한 편, 침을 튀길 것이다. 이런 모습을 고대인이 보고 만든 상징이 아닐까. 여기서 더 이야기할 수 있지만, 굉장히 유치할 것 같아서 그만하겠다~!
마하바라타에는 인드라가 가진 천개의 눈의 유래를 이렇게 설명한다. 인드라는 많은 여성을 유혹했었는데, 그가 유혹한 여자 중에는 현자 고타마의 아내 아할리아도 있었다. 이에 격분한 고타마는 신들의 왕인 그에게 여성의 성기를 닮은 천개의 무늬를 새겼다. 그래서 인드라는 그것들이 다행히도 눈으로 변할때까지는 사-요니(Sa-yoni:여성의 성기를 가진 존재)로서 세상에 알려졌다.
하면 왜 천 개일까.
인드라 분석으로는, 인도 공작과 연관이 있다.
부계 사회로 이행한 후, 인간 사회에서는 짝짓기에서 미색을 자랑하는 역할을 암컷이 맡는다. 허나, 이것이 인간 사회 내내 일어난 일이었을까. 이런 의문에서 공작은 왜 자신의 날개를 활짝 펼치는가란 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다. 공작이 천 개의 눈을 뜨는 이유는 짝짓기 때문인데, 이 공작이 암컷이 아니라 수컷이며, 암컷을 유혹하기 위함인 게다.
이는 공작과 인간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일까. 인드라 생각은 다르다. 공작 판단에 동의한다. 지혜는 모계를 통해 전승한다. 미모는 부계를 통해 나타난다. 자식이 잘 생기길 원한다면, 잘 생긴 남자를 얻어야 한다. 허나, 그 자식이 지혜롭기를 바란다면, 지혜로운 여자를 얻어야 한다.
이런 까닭에 바람둥이 인드라 신화가 탄생한 것이 아니겠는가. 중동에서는 눈이란 천문을 헤아릴 줄 아는 지혜의 의미였다면, 인도에서는 눈이란 암컷을 유혹하는 제비 이미지였던 셈이다. 하여, 이 둘 의미가 융합하여 천 개의 눈이 탄생한 것이 아닌가 싶다.
천수천안관세음보살(千手千眼觀世音菩薩) 또는 천비(千臂)천안관음이라고도 한다. '천'은 무량 ·원만의 뜻이고, '천수'는 자비의 광대함을, '천안'은 지혜의 원만 ·자재함을 나타낸다. 천 개의 손바닥 하나하나에 눈이 있어, 모든 사람의 괴로움을 그 눈으로 보고, 그 손으로 구제하고자 하는 염원을 상징한다. 《삼국유사》에는 분황사(芬皇寺)의 천수관음에게 빌어 눈먼 아이가 눈을 뜨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천수관음은 관음신앙의 유포와 함께 민간에 깊이 스며들었다.
[출처] 천수관음 [千手觀音 ] | 네이버 백과사전
천수관음의 천 개의 눈은 인드라에게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닐까 싶다.
천 개의 눈, 인드라에서 질 들뢰즈 <천개의 고원> 제목이 유래한 것이 아닌가 보고 있다.
4. 제석천과 단군
"도리천의 왕으로 불교의 수호신.
범어로는 샤크로데반드라(S'akrodevandra)이며, 석제환인다라(釋提桓因陀羅)·석가제바인다라(釋迦提婆因陀羅)라고 쓰던 것을 줄여 제석천이라 하였다. 그가 머무르는 곳은 도리천(?利天)이다.
불교의 세계관에 의하면 세계의 중앙에 수미산(須彌山)이 있는데 그 정상에 도리천이라는 하늘이 있다고 한다. 제석은 선견성(善見城)에 머무르면서 사천왕(四天王)과 주위의 32천왕(天王)을 통솔한다.
그는 불법을 옹호하며, 불법에 귀의하는 사람들을 보호할 뿐 아니라, 아수라(阿修羅)의 군대를 정벌하기도 한다. 그의 무기는 그물인데, 이것을 인다라망(因陀羅網)이라고 하여 세간의 얽히고 설킨 인과에 비유한다. 원래 인도의 신격 가운데 인드라(Indra)가 불교의 변화를 보인 한 예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그 이름이 단군신화에도 나타난다. 즉, 단군의 할아버지를 묘사할 때 석제환인(釋提桓因)이라고 표기하였다. 그리고 자장(慈藏)이 당나라에 유학하였을 때 중국 청량산(淸凉山)을 참배하였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제석천왕이 석공(石工)을 데리고 와서 조성한 문수상(文殊像)이라는 기록이 있다.
또, 선덕여왕이 죽기 전에 도리천에 묻어달라고 유언하였는데 뒤에 사천왕사(四天王寺)가 그 왕릉 밑에 건립되어 그 예언이 맞았다는 기사가 있다. 왜냐하면 사왕천(四王天)의 위가 도리천이기 때문에 여왕은 죽기 전에 묻힐 곳을 알았다는 것이다.
우리 나라의 제석신앙은 '하늘'에 대한 외경 심리와 결부된다. 불교가 도입되기 이전 막연하게 숭배의 사상이 되었던 하늘에 제석천이 있다는 불교신앙이 도입되면서 그 민간신앙은 이론의 근거를 갖게 된다.
따라서 고대 한국인들은 하늘의 주인과 제석천을 하나로 보았다. '한울님'에 관한 원초적 신앙은 유일 창조주를 부정하는 불교의 입장과 위배되었기 때문에 다만 민간신앙으로만 유포되었다. 제석천의 조상(彫像)은 석굴암의 석실에 조성되어 대범천(大梵天)과 나란히 모셔져 있다.
고려시대에는 태조가 919년(태조 2)에 송악으로 도읍을 옮기고 법왕사(法王寺) 내제석원(內帝釋院) 등 10대사찰을 건립하였다. 925년에도 외제석원(外帝釋院)을 건립하였으며, 928년에도 제석원을 설치하였다. 1032년(덕종 1) 외제석원에서 왕이 재를 베풀었고, 1060년(문종 14) 정월에는 천제석도량을 문덕전(文德殿)에서 베풀었다.
1085년(선종 2)에도 천제석도량을 문덕전에서 베풀었고, 1098년(숙종 3)에는 왕이 외제석원에 행차하여 재를 베풀었으며, 1099년 정월과 1101년 정월에 천제석도량을 문덕전에서 베풀었다.
이를 통하여 고려에서는 매년 정월에 제석도량을 베푼 것을 알 수 있다. 1107년(예종 2) 정월과 1110년 정월에도 제석도량을 문덕전에서 베풀었고, 1114년 4월에는 예종이 외제석원에 행차하여 공양하였으며, 1130년(인종 8) 정월에는 제석도량을 중화전(重華殿)에서 베풀었다.
1132년 2월에는 천제석도량을 명인전(明仁殿)에서 베풀었고 1148년(의종 2) 정월에는 제석도량을 문덕전에서 베풀었으며, 1176년(명종 6)에는 천제석도량을 명인전에서 베풀고, 1177년 3월에는 제석도량을 내전에서 베풀었으며, 1181년 3월에 제석도량을 명인전에서 베풀었다.
1203년(신종 6) 정월에는 제석도량을 수문전(修文殿)에서 베풀었고 1214년(강종 4) 정월에도 제석도량을 수문전에서 베풀었으며, 같은 해 3월에는 제석재를 행하였다.
1223년(고종 10)에 제석도량을 수문전에서 베풀었고, 1251년에는 천제석도량을 궐안에서 베풀었다. 이와 같이 고려시대에는 제석천에 대한 호국진병(護國鎭兵)의 신앙의식이 많이 행하여졌다.
석굴암 석굴 제석천
참고문헌
「三國遺事」
「高麗史」"
일본 제국주의 식민학자들은, 제석천이란 용어를 통해 단군이란 한반도에 불교가 도입한 이후에야 만들어진 신화라고 본다. 허나, 이것은 정말로 한심해서 가설이라고 부르기도 창피한 것이다.
가령 영국인이 최초로 역사에 나타난 것은,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 이후이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영국인이 영국에 거주하지 않았나? 있었다. 단지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았을 뿐이다.
삼국시대 왕국들이 불교를 국교로 한 이유는 토속 신앙을 대체하기 위함이다. 즉, 이전에는 단군 혹은 그 어떤 신으로 불렀던 것을, 불교 도입 이후에는 제석천으로 부른 것이다. 이를 두고서 제석천 이전에는 의미가 없다고 보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인가.
그렇다 해서, 인드라가 치우황제로부터 시작하는 한단고기 일파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한단고기 일파 주장은 국유본 주장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즉, 한빠를 비판하는 한까들도 국유본 논리를 받은 쪽발 논리이지만, 한단고기 일파 주장 역시 국유본 논리를 받은 친일 논리라고 본다. 해서, 인드라는 한단고기에 등장하는 치우황제를 본디 중국에서 살다가 한족에게 자리를 내준 몽족에서 찾는다.
"먀오족의 역사를 거슬러 내려가 보면, 약 4000년 전 중국의 역사 이전의 시대에 한족이 중국에 들어오기 전 중국의 중부와 남부에는 본래 먀오족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한족이 중국에 들어오면서 최초로 먀오족과 접촉하면서 제1차 전쟁을 하였는데 이것이 한족의 영주인 황제와 먀오족의 수장인 치우와의 탁록지전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러서는 초국이 형성하기도 했는데, 일부는 한족화(숙묘)하고 일부는 서남방으로 이주(생묘)하여 지금의 먀오족의 선민이 되었다. 이 당시 남쪽으로 옮겨간 먀오족 집단은 귀주성이나 사천성 남부의 산악 지대를 중심으로 터전을 잡거나 산간계곡, 산간 저분지에 거주하였다.
수·당 시대에는 남북통일로 인해 중국 분열상태가 마치고 활발한 문화적 교류를 촉진함과 동시에 먀오족의 수도 늘어났으며 귀주를 중심으로 하여 운남 등지로 이주를 하였고 전국이 먀오족분포의 중심이 되었다.
원·명·청의 3대는 중국봉건사회 발전의 전성기였으며 이 시기에 먀오족은 정치와 경제적 요소의 촉진 아래 이주가 극히 빈번해졌으며 점차 호남, 호북, 귀주, 운남, 광서, 하북, 섬서성 등의 분포 구조를 형성함과 동시에 동남아 각국으로 유입되로 국제적 민족이 되었다. 유구한 역사를 지닌 먀오족은 문자가 존재는 했지만 정확한 기원은 전설이나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로 추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먀오족과 한족과는 오랜 역사 동안 투쟁의 역사 속에서 서로의 문화에 영향을 주었으며 특히 한족문화 형성에 먀오족이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http://ko.wikipedia.org/wiki/%EB%A8%80%EC%98%A4%EC%A1%B1
몽족이 중요한 이유가, 최초 벼농사, 최초 개 가축화와 같은 사건들 주역이 몽족, 혹은 먀오족이기 때문이다. 예서, 몽족과 소로리인, 혹은 한민족과의 연관성을 생각해보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5. 인드라 대 인드라
인드라는 구십년대에 아이디 작명을 고민했다. 무엇을 할까 신경을 쓰다 보니 너무 피곤하여 잠을 잤다. 잠을 자는 와중에 꿈을 꾸었다. 꿈에 깨거든, 영어사전을 아무렇게나 펼쳐라. 그때 첫 명사형을 발견하면 그것을 아이디로 삼아라.
이렇게 하여 얻은 아이디가 인드라이다. 인드라가 인드라 아이디를 쓰기 시작할 무렵에는 다들 인드라가 뭔지 몰랐다. 사실은 인드라도 인드라가 뭔지 몰랐다. 아이디를 삼고서야 이런 신이 있었네 했던 것이다.
인드라가 구십년대 중반 쭉 쓰다가 한때 인드라 아이디를 쓰지 않았다. 드라고로 바꾸었다. 이유는 역시 꿈이다.
알고 보니, 드라고는 아르헨티나 외무장관이었다. 꿈에서 말하기 전까지 인드라는 드라고에 대해 전혀 몰랐다.
1902년 영국 ·독일 ·이탈리아 3국이 채무국인 베네수엘라에 대하여 공동무력간섭을 꾀하자, 아르헨티나의 외무장관 L.드라고(1859∼1921)는 이 해 12월 29일 미국에 보낸 각서(覺書)에서 국가는 외국이 자국민에 지고 있는 계약상의 부채상환을 보증받기 위해 군사력을 사용할 권한을 갖고 있지 않으며, 그러한 군사력의 사용은 채무국에 대한 내정간섭이라고 주장하면서, 영 ·독 ·이 3국의 처사를 비난하였다. 이 드라고주의는 1907년 제2회 헤이그 세계평화회의에서 '계약상의 채무 회수를 위한 병력 사용의 제한에 관한 조약'으로 승인되었다.
[출처] 드라고주의 [─主義, Drago doctrine ] | 네이버 백과사전
인드라고는 인드라가 의식적으로 채택한 아이디다.
http://blog.yes24.com/blog/blogMain.aspx?blogid=aquamime&artSeqNo=3823803
이유는, 인디고 아이들을 규정하는 특징들 대부분을 인드라가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러다가 다시 인드라로 되돌아온 것은, '인디고 아이들'이란 것이 상업적으로 뭔가 이득을 내기 위한 국유본 쇼가 아닌가 싶어서였다. 하고, 그런 우려는 지금까지 해소되지 않고 있다.
ADHD 환자가 특별한 인간이라고?
아스퍼거 증후군 환자가 잘 나간다고?
정말?
신화는 없다. 인드라는 신화일 수 있다. 허나, 인드라가 ADHD이나 아스퍼거여서는 아닌 것 같다. 혹은 왼손잡이여서도 아닌 것 같다. 첫째 민은 아스퍼거 증세가 있고, 둘째 륜은 왼손잡이인데, 둘 다 평범하거든.
인디고 아이들이란 국유본이 만든 뉴에이지 떡밥에 지나지 않는다. 정말 이런 미세한 영역까지 국유본이 지배하는지를 그때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다시 세상에 맡긴다.
세상이 흘러가는 대로 인드라도 따라 흐른다.
마음을 열고, 자세를 낮추고, 세상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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