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유태자본 : 로스차일드, 미국 독립, 중앙은행 음모론, 루이지애나 매수금, 만들어진 영웅 앤드류 잭슨 국유본론 2012

2012/10/20 08:54

http://blog.naver.com/miavenus/70149490384

   

   

   

국제유태자본 : 로스차일드, 미국 독립, 중앙은행 음모론, 루이지애나 매수금, 만들어진 영웅 앤드류 잭슨

국제유태자본론 : 인드라 월드리포트 12/10/20 

 

1. 로스차일드가 미국 독립전쟁과 미국 중앙은행에 관련이 있다? 

   

인드라가 이 문제 역시 오 분안에 깨버립니다. 로스차일드 1세는 1790년대에 가서야 실전적 금융 공부하기 시작했고, 국제적 거래를 1800년대 초에야 심부름꾼 역 정도로 성사시킵니다. 로스차일드 2세인 네이선 로스차일드 역시 역시 이만 달러를 가지고 런던에 도착한 것이 1790년대 말입니다. 또한, 런던에 도착하자마자 시작한 것이 금융업이 아니라 의류업이었습니다. 1800년대를 넘어서야 은행을 설립하였습니다. 로스차일드 가문에게 날개를 달아준 사건은, 용병장사해서 유럽 최고 부자가 된 헤센 귀족이 나폴레옹 전쟁을 피해 망명을 간 사건입니다. 이때, 헤센 귀족이 로스차일드 1세를 믿고 재산관리인으로 임명한 것이 시작이었던 것입니다. 로스차일드 1세는 이 돈을 바탕으로 유럽 각지에 흩어진 자식들과 유기적인 망을 구축하여 돈을 불린 것입니다.

   

헌데, 미국 독립전쟁은? 그렇지요. 로스차일드 1세가 햇병아리일 때, 일어난 것입니다. 로스차일드 1세가 기획할 군번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해서, 그림자정부나 화폐전쟁 쓴 병쉰들 자동 아웃 되나요^^?

   

인드라는 이 당시 국유본 권력을 베어링 가문이 장악하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때, 장악 근거는 무엇입니까. 동인도회사 운영권인 것입니다. 베어링 가문은 당대 프리메이슨을 활용해서 로스차일드 이전 국유본을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는 1815년까지, 미영전쟁이 끝나는 때까지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2. 영란은행 역할에 대한 5분 토크

   

중앙은행 음모론이 많다보니 역사 이해없이 중앙은행이란 무조건 악이야, 이런 분들이 많습니다. 허나, 반대해도 알고 반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선 중앙은행이 민간은행이 맡는 게 말이 안 된다? 아니죠. 근대 은행이란 근래에 와서 공공화 국유화한 것이지, 시작이란 민간, 사유화에서 시작했습니다. 이후 민간 개인 몇몇이 감당하기에는 어렵다 해서 공공화한 것입니다. 중앙은행이란 민간은행이 진화한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지방은행, 민간은행이 돈을 마구 쩍어내니까 지방은행, 민간은행이 파산하고, 시장 자금이 보다 믿을 만한 곳으로 몰리니 중앙은행이 발생한 겁니다. 오늘날에도 미국 연준 국채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자금이 몰리잖아요? 이런 이치 모르겠나요?

   

중앙은행이란 영국에서 보듯 왕권 강화와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왕들 꿈이 뭔가요. 부국강병입니다. 해서, 군사력 키운답시고 상비군을 만들고, 기술 개발해서 빵빵하게 총도 만들고, 대포도 만들고, 배도 만들고 합니다. 헌데, 이 모든 건 돈이 필요하지요. 해서, 왕은 주거래은행에게 자금을 융통한 뒤 그에 걸맞는 이익을 주는 것입니다.

   

헌데, 왕에게 돈을 줘도 되는지 고민인 겁니다. 아니, 왕이 요구하는데, 그 특권을 마다한다? 말이 되느냐? 하지만, 실제로 그랬습니다. 네덜란드에서 메리와 함께 온 윌리엄왕은 이전 왕과 똑같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 고민이란 자금 마련입니다. 하다 못해, 백성이 뭔가 잘 하면 상금을 내려야 하는데, 그 상금이 없으면 어찌 하겠습니까. 왕이 왕 노릇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왕은 돈이 부족하면 국채를 발행했습니다. 당대 이자율이란 캘빈주의에 따라 5% 이내 이자율로 제한되었습니다. 헌데, 이건 최소 사양이구요. 신용에 따라 가산금리가 붙는 건 예나 지금이나 같은 것입니다. 가령 영국이나 프랑스 똑같이 미국 독립전쟁 때문에 자금 융통을 했는데, 영국은 가산금리가 붙지 않은 이자를 물고, 프랑스는 가산금리가 배나 붙은 이자를 써서 프랑스 예산 압박을 받아서 프랑스 혁명 도화선이 되었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인 것입니다.

   

헌데, 국채를 발행하면 뭐하나요? 사는 사람이 없으면? 주식하고 이 점에서 같다 할 수 있습니다. 인드라가 쪽발철수 주식을 팔려고 하는데, 아무도 사는 사람이 없는 겁니다. 샀다가는 쪽발 아닌 쪽박찰 수 있으니까요. 하면, 인드라는 쪽발철수 주식을 팔기 위해서 팔 가격을 계속 낮출 수밖에 없는 겁니다. 국채에서는 금리를 높여야 하는 것이지요. 즉, 채권값을 낮추는 겁니다. 채권 금리를 높이면 채권값이 낮아지니 현금으로 만질 돈이 줄어드는 겁니다.

   

윌리엄왕이 14%까지던가 올렸음에도 민간은행에서 콜하는 애들이 없었습니다. 이때, 민간은행 정체란 뭔가요? 여러분은 아셔야 합니다. 민간은행이라 해서 어감이 좋네 하지만 사실 대부분 귀족을 등에 업은 은행들이었습니다. 은행 업무란 게 정치권력을 끼고 있지 않으면 곤란하기 때문입니다. 로스차일드 1세던가가 당당하게 말하지 않습니까. 부자 비결은 정경유착이라고^^!

   

헌데, 국채를 사주겠다는 사람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 사람이 페터슨인 겁니다. 페터슨을 배후에서 움직인 인물로는 후일 영국 재무부장관을 하는 챨스 몬테규였다고 합니다. 조건은 오늘날 은행에서 아파트담보대출을 받으면 은행에서 하는 것과 크게 차이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은행에서 대출받을 때, 은행직원이 가장 관심이 있는 것이 무엇인가요. 신용상태죠? 그 다음에 물어보는 것이 뭔가요? 혹 다른 대출을 받은 것이 있느냐는 질문이죠? 혹 후순위 대출로 밀리면 돈 못 받잖아요? 해서, 은행 입장에서 돈 떼먹히지 않으려면 다른 대출 상황도 다 관리해야 하는 것이죠.  

   

여기서 일반적 수준을 넘어서는 과도한 요구가 있기는 합니다. 은행 직원이 대출 상담할 때 고객에게 끼워팔기를 강요하는 적이 많았지요. 이 대출을 받고자하면 신용카드를 마련해야 하고, 일정한 계좌 잔고가 있어야 하고... 어, 기업이면 화재보험 어디에 들고 있나요^^? 연금보험은요?

   

신용상태가 매우 좋으면, 일반적 수준을 넘어서는 요구를 들어줄 필요가 없습니다. 허나, 네덜란드에서 막 도착한 윌리엄왕은 신용상태가 좋지 않았습니다. 하고, 은행가들은 스페인 왕에게 지원했다가 망한 푸거 가문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해서, 윌리엄왕에게 자금 융통해주기 보다 중앙은행 반대하는 유력한 영국 귀족한테 자금 융통해주는 게 이익이었던 것입니다. 해서, 제퍼슨도 사금고나 마찬가지인 버지니아주가 관리하는 민간은행을 위해 중앙은행을 반대했고, 앤드류 잭슨도 재선 슬로건 때문에 중앙은행 반대한 것일 뿐입니다. 고작 실천이라고는 대통령이 되어 주거래은행을 사금고라 여기는 지방은행으로 바꾸었던 것인데, 이런 조치로 1837년 공황을 불러일으켰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일반적 설명이 그렇습니다. 다만, 국유본론 설명이 조금 다를 뿐입니다.

   

사설이 길었군요. 5분 넘었나요?

   

영국은 오래 전부터 조선처럼 안동 김씨 귀족 중심이고 왕이란 허수아비였습니다. 귀족이 왕을 허수아비로 만드는 건 두 가지만 꽉 잡으면 됩니다. 첫째는 중앙 상비군을 두지 않는 겁니다. 중앙 상비군이 없으면 귀족은 언제든 왕을 없앨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는 왕이 상비군을 두고 싶어도 예산 부족으로 쉽지 않다는 겁니다. 일시적으로 군대를 모을 수는 있어도 평시에 군대를 유지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해서, 왕 자금줄을 끊어 상비군을 최소화하는 것이 영국 귀족들이었던 것입니다.

   

헌데, 윌리엄왕이 자금 문제를 해소시킨다면 영국 귀족들로서는 재앙이 아니겠습니까. 재원만 해결해도 왕권을 엄청나게 강화할 수 있습니다.

   

영국 중앙은행이 비록 발권력을 독점하지 못한 반쪼가리일지라도 윌리엄왕에게는 반가운 영란은행이 출범하는 것입니다. 이자율이요? 6%였답니다. 당대 14%이니 6%이면 8%나 차이가 나니 손해죠? 허나, 손해인가요?

   

이는 손해일 수도, 이익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핵심은 단기가 아닌 장기인 것입니다. 영국 영란은행이 장기간 자금을 대출할 여력이 있다면 단 6%만 받아도 14% 이자받아 챙기는 은행보다 이익인 겁니다. 국왕 마케팅으로 인한 신용 강화는 유무형 이익을 낳기 마련이니까요.

   

해서, 아무나 하고 싶어도 중앙은행을 맡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돈 좀 벌겠다고 자금력이 부족한 아해들이 나섰다가는 쪽박찰 것이 분명한 게 중앙은행입니다. 감당할 수 있는 자만이 중앙은행을 맡아야 하는 겁니다. 특혜다, 독점이다 비판하기는 쉽습니다. 허나, 여전히 중앙은행 체제가 세계 모든 나라 체제라면 긍정적 이해가 필요하다 할 것입니다.

   

   

   

3. 흑인 강간범 제퍼슨에게 묻는다, 루이지애나 매수 자금은?

   

인터넷에서 보면, 재미있는 일이 꽤 있습니다. 가령 루이지애나 매매 사건이 있습니다. 헌데, 거래란 쌍방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까. 헌데, 인터넷 이론에서는 오직 루이지애나 매도 입장만 전하고 있습니다.

   

   

 네이버 백과사전을 볼까요?

   

"1803년 미국이 프랑스와 조약을 맺어 미시시피 강 서부 유역의 210만km²에 이르는 프랑스령 루이지애나 지역을 사들인 사건이다. 이 지역은 오늘날 전체 미국 영토의 23%에 해당하며, 아이오와(Iowa), 아칸소(Arkansas), 오클라호마(Oklahoma), 캔자스(Kansas), 콜로라도(Colorado), 사우스다코타(South Dakota), 텍사스(Texas), 뉴멕시코(New Mexico), 네브래스카(Nebraska), 노스다코타(North Dakota), 미주리(Missouri), 미네소타(Minnesota), 몬태나(Montana), 루이지애나(Louisiana), 와이오밍(Wyoming) 등 15개 주에 걸쳐 분포한다.

   

루이지애나는 원래 미시시피(Mississippi) 강 유역을 모두 포함하여, 북으로는 오대호(Great Lakes), 남으로는 맥시코만(Gulf of Mexico), 동서로는 애팔래치아(Appalachia) 산맥과 로키(Rocky) 산맥 사이의 넓은 지역을 가리키며, 오늘날 미국 남부 맥시코만 유역의 루이지애나 주는 프랑스령 루이지애나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1862년 프랑스의 탐험가인 라 살(la Salle, 1643~1687)이 이 지역을 탐험해 프랑스의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이 지역은 프랑스의 관할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러다 1763년 프랑스와 영국이 북아메리카를 무대로 벌인 프렌치 인디언 전쟁(French-Indian War)에서 프랑스가 패하면서 미시시피 강을 경계로 동쪽은 영국에, 서쪽은 스페인에 할양되었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동부 13개 주는 1776년 독립을 선언하였으며, 1783년에는 영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미시시피 강 동부 지역에 대한 주권을 인정받았다. 당시 미시시피 강은 내륙 개발과 교통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으므로, 신생 미국 정부는 1795년 스페인과 핀크니 조약(Pinckney's Treaty)을 체결하여 미시시피 강에서의 자유로운 항행과 그 하구에 위치한 뉴올리언스(New Orleans) 항구의 자유로운 이용 권리를 보장 받았다.

   

하지만 1800년 스페인은 프랑스와 산 일데폰소 비밀 조약(secret Treaty of San Ildefonso)을 체결해 미시시피 강 서부의 루이지애나 지역 지배권을 다시 프랑스에 넘겼다. 미국의 3대 대통령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1826)은 미시시피 강 교통과 물류의 중심이었던 뉴올리언스의 안정적인 이용을 보장받기 위해 프랑스와 교섭을 추진하였다. 그는 프랑스 주재 공사인 리빙스턴(Robert R. Livingston, 1746~1813)에게 훈령을 보내 뉴올리언스 지역을 매입하겠다는 뜻을 프랑스에 전했다. 그런데 당시 프랑스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나폴레옹(Napoléon Bonaparte, 1769~1821)은 영국이 캐나다에서 루이지애나를 침공해 올 경우 효과적으로 방위하기가 쉽지 않다는 판단 아래 국가 재정을 확충하고 신생국 미국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목적에서 오히려 프랑스령 루이지애나 전체 지역 매입을 미국에 제안하였다. 결국 리빙스턴과 특사로 파견된 먼로(James Monroe, 1758~1831)는 프랑스와 협상을 추진하여 1803년 4월 30일 프랑스와 루이지애나 지역 매입에 관한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으로 미국은 프랑스에 1,500만 달러 지불하였고 기존에 프랑스가 스페인으로부터 돌려받기로 한 모든 지역이 미국에 귀속되었다. 1,500만 달러 가운데 375만 달러는 프랑스 정부가 해당 지역 주민들에게 지불해야 할 채무를 미국 정부가 승계하는 형식으로 대체되었다.

   

조약 체결을 주도한 제퍼슨은 의회의 승인 과정에서 헌법과 연방정부의 권한 극소화라는 자신의 주장과 어긋난다는 점에서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 조약이 체결되어 미국은 당시 영토의 2배 이상 되는 면적을 새롭게 획득했으며, 서부 개척을 더욱 활발히 추진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또한 이 지역에서 프랑스가 물러나면서 신생국인 미국의 안정에도 도움이 되었다."

   

좋습니다. 나폴레옹 사정이야 중앙은행 만드느라고 애 많이 쓸 시기이니 일단 그렇다고 칩시다. 하면, 제퍼슨이 루이지애나를 매입할 자금은 어디에 있답니까? 

   

   

여러분이 루이지애나 땅이라니 오늘날 루이지애나주 정도로 보고 있을 수 있습니다. 아닙니다. 

 

   

 

   

 

제퍼슨이 사재를 털었나요? 죽을 때까지 흑인 노예나 강간하면서 돈을 쥐고 뒈졌을 노예아편농장주 제퍼슨이 사재를 털 일이 전혀 없습니다.  

   

   

하면, 미국 세수가 좋나요? 정반대였습니다. 인드라가 강조했지요. 국유본이 과거 카르타고 상인들 지혜를 존중해서 관리 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미국 독립을 강제했다고 말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아웃소싱인 겁니다. 해서, 미국은 독립 직후 난리가 났던 것입니다. 영국이 부담해야 할 자금을 미국 연방정부가 책임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헌데, 독립전쟁으로 각 주는 연방정부에 줄 세금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연방은 세금 부과해야 하니 관세를 높이고 위스키 술 같은 데에 세금을 물게 합니다. 인두세도 있군요. 이 모든 세금제도는 독립전쟁 이전보다 못했습니다.

   

이러자고 독립했나? 이에 대해 제퍼슨이 대통령 해먹기 위해서 말합니다. 독립전쟁 이전으로 돌아갑니다. 세금은 없습니다. 이리 말하니 대통령 안 시켜줄 수 없잖아요?

   

하면, 미국이 특별한 수입을 발견했나요? 없습니다. 오히려 루이지애나 구입처럼 예산을 쓸 것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에 제퍼슨이 했던 쥐랄이 뭡니까. 남부 수출이 잘 된다 싶은데, 영국이 해상권 장악하고 부족한 선원을 편법으로 모으자 수출입 금지 이런 정책한 것 아닙니까? 수출입 금지하면 관세 수입도 없지요. 무역 금지하니 시민 생활 어려워져서 시민에게 세금 달라고 하기 미안해지네요~!

   

이에 대해서 인터넷에는 일언반구도 없네요.

   

전임 대통령은 없는 세수를 마련하느라 빚을 많이 졌나 보네요. 허나, 토머스 제퍼슨은 청구서 하나 없을 만큼 깨끗했다고 합니다.

   

씨발, 과연 그런가요?

   

"헤임 샐로몬

 

1740년 폴란드의 리사(Lissa)에서 유대인 랍비의 아들로 태어났다. 폴란드 독립활동으로 인하여 폴란드를 탈출, 1772년 미국의 뉴욕으로 이주하여 금융업자로 성공했다. 이곳에서 비밀결사'자유의 아들(Sons of Liberty)'에 가입하였고 1776년 영국인에 의해 체포, 투옥되었다. 이때의 고초가 후에 일찍 사망하는 원인이 되었다. 이후 필라델피아로 이주하여 중개인과 상인으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또한 미국 내 프랑스 영사와 재정 대리인으로 활동하면서 미국과 프랑스의 관계 개선에 기여했다. 미국독립전쟁이 발발하자 재정 확충을 위하여 고군분투했다. 정부채권을 사들이고 어음을 보증해주는 등 개인적으로 미국 정부에 재정적 도움을 주었으며, 프랑스로부터 재정 지원을 얻는데도 힘썼다. 또한 토머스 제퍼슨(Tomas Jefferson), 제임스 매디슨(james Madison) 등과 같은 대륙회의 의원들에게 이자없이 자금을 빌려 주기도 했다. 그러나 정부에 빌려준 돈을 전혀 받지 못하고 그로 인해 말년을 가난하게 보내다 1785년 사망했다. 후에 정부를 상대로 자손들의 청구가 있었으나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는 필라델피아 최초로 유대교 예배당인 미크바 이스라엘을 설립했으며 비기독교인에 대한 차별을 해결하고자 노력했다. 1941년 시카고에 조지 워싱턴, 로버트 모리스, 샐로먼의 기념 동상이 세워졌다." 

 

그럼 그렇죠. 노예아편농장주 색희가 어딜 갑니까. 

 

인드라 의문을 풀어줄 분 있나요?  

 

아참, 루이지애나 구입 비용이 천오백만달러라고 하는데요. 원금만 그렇다는 겁니다. 이자는 별도죠. 

 

 

   

4. 앤드류 잭슨 우상화가 지겹네요

   

음모론 책자에서 앤드류 잭슨을 긍정적으로 묘사하니 쪽발놈현이다 하는 병쉰들이 인터넷에 기승하네요. 무식한 넘들이죠. 그것이 자신 주군 쪽발놈현을 엿먹이는 것임을 모르는 것이죠.

   

앤드류 잭슨이 어떤 사람이냐면요. 인디언 학살 때 성인 남성 인디언만 죽인 게 아닙니다. 전쟁에서 성인 남성 인디언만 죽였다면 납득할 수 있습니다. 허나, 앤드류 잭슨은 인디언 토벌할 때, 여자가 씨를 늘린다는 생각에 특히 어린 여자일수록 다 죽였다고 합니다. 여자, 아이, 늙은이할 것없이 다 죽이라고 병사들에게 지시하고 실행한 겁니다. 업적을 위해서 코베기를 반드시한 건 놀랄 일도 아니죠.

   

이래도 잘 한 것이 있으니 닥치고 앤드류 잭슨 하겠지요?

   

쪽발놈현 병쉰색희가 뉴라이트라도 어찌 쥐와 같은 급이겠냐는 게 무식한 쪽발놈현 병쉰색희들 자학 논리가 아니겠습니까. 논리라고는 눈물 한 방울 흘려놓고 양심을 팔아제끼는 색희들이 쪽발놈현 매국노빠잖아요.

   

하나 하나 검증해보지요.

   

   

   

5. 앤드류 잭슨하면 전쟁 영웅입니다. 헌데, 그 신화가 조작?

   

   

네이버 백과사전 설명입니다.

   

"1812년 6월 18일, 미국이 영국에 선전 포고를 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1812년 6월 18일 미국이 영국에 선전 포고를 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은 처음에는 미국이 영국에서 5,000km나 떨어져 있어 소수의 영국군이 캐나다에 주둔해 있을 뿐이었고 당시 캐나다는 인구 50만 명 미만이었지만 미국은 당시 인구 700만 명에 달했기 때문에 미국이 수적으로 우세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연방파의 본거지 뉴잉글랜드 지방은 전쟁에 협조하지 않았고 미국 군함은 1812년 영국 프리깃함과 싸움을 벌인 끝에 '게리에르'호를 상대로 '콘스티튜션'호가 거둔 승리를 비롯해 3번의 주목할 만한 승리를 거두었으나 이 전쟁에서 나머지 3번의 승리는 영국에 돌아갔다.

이리 호(湖), 온타리오 호, 섐플레인 호의 지배권을 차지하기 위한 여러 차례의 작은 접전이 벌어졌다. 미국은 디트로이트 탈환을 비롯, 몇 번의 작전에서는 성공을 거두었으나 1814년까지도 영국은 미시간 호에 접근하는 통로를 그대로 지배하고 있었으며 새로이 미시시피 강 북쪽 유역을 점령했다.

1814년 나폴레옹이 몰락해 나폴레옹 전쟁이 종결되자 영국은 본격적으로 정예 부대 6,000명을 메릴랜드에 상륙시켰다. 영국의 육해군은 체서피크 만(灣) 해안을 황폐화시켰고 블레이던즈버그 전투에서 승리한 뒤, 미국의 요크(토론토) 작전에 대해 앙갚음 하기 위해 워싱턴 D.C.의 공공건물들을 불태웠다.

1814년 9월 14일 밤에는 메릴랜드의 맥헨리 요새도 영국군에게 처함하게 파괴되었으나. 그 과정에서 워싱턴 변호사 출신 프랜시스 스콧 키가 현재의 미국 국가를 작곡하기도 했다. 미국의 선박들이 영국 상선을 방해하자 미국군의 사기는 높아졌지만 영국의 해상통제권을 교란시키지도, 미국 해안 봉쇄를 풀지도 못했다.

별 성과 없던 전쟁은 1814년 12월 24일 벨기에 겐트에서 맺어진 겐트 조약의 조인과 함께 종결되었다. 그러나 미영 전쟁 중 가장 치열한 전투는 뉴올리언스 전투로 통신사정이 나빠 겐트 조약이 맺어진 지 며칠 뒤에 발생했다. 이 전투에서 영국군은 2,037명의 전사자를 낸 대 비해 미국군은 단 21명의 전사자만 낸 값진 승리로 지휘관 앤드루 잭슨이 영웅으로 떠올랐다." 

 

헌데, 겐트 조약 체결 며칠 뒤(?)인 1815년 1월 8일에 그 유명한 뉴올리안스 전투가 벌어지는 겁니다. 한마디로 전쟁 끝나고 쥐랄한 것인데요. 당대 통신사정 운운합니다. ㅎㅎㅎ 

 

잘 생각해보세요. 겐트 조약이 12월 1일에 시작해서 24일에 끝났을 것 같나요? 아닙니다. 8월인가 시작했다고 합니다. 1814년은 나폴레옹전쟁이 끝나는 해입니다. 해서, 영국으로서는 여유가 있었습니다. 헌데, 다양한 이유를 붙여서  영국이 서둘러서 종전을 하려고 했다는 겁니다.

   

웃기지 않아요?  당대 영국군은 수도인 워싱턴 DC를 불태울 정도입니다. 백악관이 처음부터 하얀 색이 아니라 이때 불타는 바람에 그 꼴이 보기 싫어 하얀 색 페인트로 칠했다고 하지요.

   

영국군은 협정 조약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해상권은 영국군이 쥐고 있었구요. 시간은 영국군에게 있었어요. 헌데, 영국군이 무엇이 두려운지 서둘러 종전합니다. 조약 조건도 굉장히 웃겨요. 아무런 보상과 책임없이 전쟁 이전으로 돌린다는 것입니다.

   

짜고 고스톱이면 수준급이네요.

   

이는 마치 영국은 절대로 전투에서 이기면 안 되는 것이어야 하고, 미국 정권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의미인 겁니다. 행여 영국이 전쟁에서 승리하면 미국이 다시 식민지로 되돌아가고 싶다고 청원할 수 있는 겁니다. 실제로 뉴잉글랜드 지역은 이 문제로 미국 연방에서 탈퇴하고 영국과 화해하는 방안을 추진중이었습니다.

   

하면, 국유본 입장에서 미국 독립시킨 의미가 없잖아요. 돈과 사람 많이 투자했는데 말이죠.

   

냄새가 나지 않나요?

   

미국 역사는 그 시초부터 철저한 조작이었던 것입니다.

미국인이 역사책에서 배우는 건 소설일 뿐입니다.

   

앤드류 잭슨? 그 넘도 노예 숫자가 최소한 300명입니다. 물론 수천 명 노예를 거느렸던 워싱턴과 제퍼슨보다는 1/10인 거죠. 아, 이래서 앤드류 잭슨과 쪽발놈현 공통점이 있는 건가요?

   

씨바르너무색희들아.

   

앤드류 잭슨이 아일랜드인이 아니라 스코틀랜드계 아일랜드인이고, 그 차이란 중앙아시아에 강제 이주당한 고려인을 중앙아시아인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중앙아시아에 있는 한국인은 중앙아시아인이 아니라 한국계 중앙아시아인인 거죠.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할 말이 많은데,

너무 피곤해서

글쓰기를 여기까지 해야겠습니다.

   

   

   

   

인드라는 정치를 하지 않겠으며,

책을 더 이상 쓰지 않으며,

언론에 기고하지도 인터뷰를 하지도 않을 것이며,

종교단체를 만들지도 않을 것입니다.

국유본론을 소명으로 여기고

지금처럼 살다

행복하게 가겠습니다

매일매일 행복하겠습니다

마.자.세.

한반도 평화와 통일, 경제 발전과 사회 복지를 위하여

친미친중 반일반북 쪽발정은 척살로 조국통일 쟁취하자

쪽발민주당 해체 쪽발석현 아웃

쪽발재벌 타도 골룸빡 처단

쪽발이에게 죽음을 쪽발왕에게 천벌을

쪽발타도해방투쟁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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