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유태자본론 : 서로마제국 멸망 이후 서양사 초간단 정리 1 : 롬바르디아 상인에서 메디치 가문까지 국유본론 2012

2012/10/23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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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유태자본론 : 서로마제국 멸망 이후 서양사 초간단 정리 1

롬바르디아 상인에서 메디치 가문까지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2/10/23 

 

 

인드라가 높임말을 쓸 때는 국유본과 대결보다는 이웃 소통용이라고 보시면 무방합니다. 아울러 인드라 특성이 있습니다. 어떤 문제를 다루려면 그 근원을 파헤쳐야 직성이 풀리는 것입니다. 이는 학자적 기질인데요. 가령 똑같이 '시간'을 생각한다 하더라도 성공적인 벤처기업인 이웃 분은 시간을 활용해서 돈을 버는 방법이 있는가 하는데, 인드라는 반대 방향으로 '시간'에 대한 근본적인 개념이 오늘날 이 시대에서 어떤 의미인가를 생각합니다.  

   

이 글도 록펠러 이야기를 하다 보니 유럽사, 서양사를 우선 거론하지 않고서는 다른 음모론자나 혹은 정설 교과서 서양사론자들에 익숙한 독자들과 인드라가 자칫 소통하기 힘들 수 있구나 하는 판단 때문입니다. 개념이 잡히지 않으면, 인드라 이야기 좀 읽다가 국유본이 깔아놓은 매트릭스 때문에 황당한 걸?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해서, 비록 인기가 없는 포스팅일지라도 개념을 잡는 것이기에 이해를 바랍니다. 게다가 흐름이 있는데요. 인드라 이웃도 유행을 타는데요. 요즘 인드라 이웃 중 주도하는 세력이 개념 이웃들이어서요^^!

   

개념 이웃들이란 당장에 연연하기보다 록펠러처럼 긴 안목으로 백 년 동안 먹고 살 사업을 구상하는 이들을 말합니다.  

 

덧글에 답글을 달아야 하는데,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인드라가 덧글에도 답글을 달려면 심사숙고를 해야 해서 심력을 많이 소모해야 합니다. 헌데, 본글에 집중해야 할 때는 덧글에 대한 답글을 쓰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나면 한꺼번에 덧글 답글을 쓰는데요. 인드라 능력 부족입니다. 다만, 읽고는 있다는 점을 간신히 말할 수 있겠습니다.   

   

   

1. 춥다

   

서로마가 멸망한 이후 중세 온난기(950년 ~ 1250년)가 오기 전까지 중북부 유럽은 인간이 살기에는 매우 추웠습니다. 게르만족들이 중앙아시아 민족에서 보듯 부족 형태로 원시적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카를 대제의 제국

   

 

 

2. 카를대제(샤를마뉴)와 롬바드리아 상인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갈리아 전쟁기에 잉글랜드처럼 세계사에 최초로 등장하는 나올 정도면 문명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 실체가 요새입니다. 유럽 주요 도시는 대부분 로마제국 요새에서 기원합니다. 맨체스터의 '스터(ster)'는 로마제국 요새를 의미하는 성곽(Castra)이란 라틴어에서 유래합니다. 그처럼 유럽 몇몇 지역들은 로마제국 식민지 정책 덕분에 문명을 경험하였습니다.

   

그중에는 네덜란드벨기에 접경지대가 있습니다. 카이사르가 정복했다면 쓸 데 없는 지역을 정복하지 않았을 것이고, 전략적 요충지를 공략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게르만족이 숱한 부족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부족 중심지를 정할 때, 이왕 만들어진 요새 중심지를 활용할 것입니다. 중심지이니 사람들이 몰려들 것이고 요새가 안전하니 시장이 형성되어 도시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유럽이 높은 위도에도 기후가 온화한 건 멕시코 만류 때문입니다. 헌데, 상대적으로 온화한 지역부터 중세 온난화 혜택을 미리 받았을 것입니다. 반면 대륙 내부는 여전히 매우 춥습니다.

   

카를대제가 로마 요새, 문명화, 대륙 내부에 비해 상대적으로 온화한 기후 덕분에 유럽을 장악합니다. 문명화하지 않은 게르만족을 물리치고 로마 교황으로부터 로마황제 칭호를 받습니다.

   

이 시기 카를대제 보호를 받는 동시에 교황청과 거래를 튼 이탈리아 북부 롬바드리아 상인이 활약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롬바드리아하면 뭐야 하실 분이 있겠죠^^? 한국인이 이태리 여행가면 반드시 들러 쇼핑한다는 밀란, 혹은 밀라노하면 이해가 되시나요? 밀란은 롬바르디아 주도이며, 대표적 상업도시입니다. (인드라도 밀란을 여행했답니다, 쇼핑 목적은 아닙니다만~!)

   

롬바드리아 상인은 영국 런던까지 가서 오늘날에도 금융권이 밀집한 런던 시티가에 흔적을 남겼습니다. 

 

정리하면, 이시기 왜 롬바드리아이니까. 그건 중동 이교도와 교황청, 카를대제 중북부유럽을 로만틱 가도(로마제국 때 건설한 로마 도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길목, 연결 통로, 허브였기 때문입니다. 이후 롬바드리아 상인은 십자군 원정으로 원정 무역을 통한 전성기를 누립니다.  

   

   

   

   

   

 

3. 오토 1세와 중세 온난기, 게르만족 재산 균등분할, 교회 권력, 상인길드, 선제후 

 

  

아헨은 쾰른 남서쪽 70km 지점에 있으며, 네덜란드·벨기에와의 국경에 접한 베스트팔렌 지역, 라인 지역입니다. 로마시대부터 쾰른에서 아헨을 거쳐 브뤼셀 파리를 잇는 로만틱 가도에 있던 지역이기도 합니다. 이곳에서 종종 신성로마제국 대관식이 벌어졌는데요. 오토 1세도 아헨에서 왕위에 오릅니다.

   

오토대제가 즉위했다는 건 그만큼 유럽 기후가 보다 더 따뜻해졌다는 것입니다. 

 

헌데, 오토대제는 왕이 되자마자 시련에 봉착합니다. 징기스칸은 아들들에게 정복 지역을 균등 분할을 했습니다. 그처럼 게르만족은 장자에게 재산을 몰아주기보다 유목민 전통에 따라 균등 분할을 했습니다.  해서, 카를대제는 아들들에게 제국을 분할해서 물려주었던 것입니다.

 

   

 

2차 베르됭 조약과 리베몽 조약에 의한 분할

 

   

 

각자 기반이 있으니 능력에 따라 형제들 사이에 분쟁이 있겠지요?  왕국 내에서조차 영지전을 불사하는 상황이라 오토대제는 자신 능력을 입증해야 했습니다.  

   

오토대제가 왕위에 오른 뒤 초기에는 형제들에게 대공과 변경백 자리를 주며 유화책을 취합니다. 허나, 이런 노력도 허사가 되어 곳곳에서 형제들 반란이 일어납니다. 이에 오토대제 방책은 종교였습니다. 교회와 동맹하여 명분을 획득하여 정권을 안정화시킵니다. 

   

또한, 네이버 두산백과사전 설명에 따르면, 유럽 인구는 1,000년까지 자연증가율이 정체되었습니다. 헌데, 중세 온난기에 접어들면서 인구는 폭발적으로 늘어났습니다. 1000년에 약 4200만 명이었던 유럽의 인구가 1150년까지 5000만 명으로 증가하였으며, 이후 50년 동안 그 수가 6200만 명에 이를 정도로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던 것입니다.

   

인구가 증가하니 도시도 증가했습니다. 1150년부터 1950년까지 중부 유럽에 건설된 새로운 도시의 숫자를 보여 주는 자료에 의하면, 1200년경에 50여 개의 도시가 건설되기 시작하면서 중부 유럽에서 새로 건설된 도시의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1250년경 이후에는 100여 개의 도시가 건설되었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1300년경에 절정에 도달하여 220여 개의 도시가 건설되었습니다.

   

짧은 기간에 군주 통치권력을 넘어서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도시가 늘어나고, 도시에 상인길드가 형성되고, 상인길드와 귀족이 결탁하니 귀족 권력이 강화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십자군 원정 때문에 원정상인이 중심인 상인길드 영향력은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베스트팔렌동맹, 라인동맹, 프로이센동맹 등이 발생합니다. 원정 상인길드는 상인 보호나 상거래에 국한하기 보다는 귀족과 결탁하여 도시 상권을 전체를 장악하는 방식입니다.  

   

명분 때문에 교회 권력이 필요했고, 실리 때문에 원정상인 자금을 확보한 귀족 권력이 필요했기에, 이 영향으로 신성로마제국은 황제를 선제후 제도로 선출하게 됩니다. 선제후란 투표권이 있는 제후를 의미하는데요. 보통 대주교 등 교회 세력 3명과 귀족 세력 3명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헌데, 여기서 대주교도 황제가 임명하거든요.  이것이 문제가 되어 교회 개혁, 서임권 분쟁, 카놋사의 굴욕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4. 카놋사의 굴욕, 황제와 교황 권위 추락, 십자군 원정 : 기벨린(황제파)와 겔프(교황파) 대결

   

   

왜 국유본은 다빈치 코드를 통해 성당기사단 음모론을 퍼트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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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놋사의 굴욕으로 대표되는 그레고리우스 7세와 하인리히 4세 사이 서임권 투쟁은 종교 개혁에서 비롯하였습니다. 오토대제 이후 황제가 대주교를 임명할 권한을 행사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헌데, 프랑스 베네틱트 산하 부르고뉴 소재 클뤼니 수도원 종교 개혁이 민중 지지를 받아 전 유럽으로 퍼지면서 교황도 이 여론을 무시하고서는 교황 권력을 보장할 수 없기에 세속화한 교회를 개혁하고자 하였습니다. 하여, 르네상스 시대 데카메론과 같은 풍자 문학에서 보듯 정치권력과 교회 유착 관계가 당대에도 주요 비판 대상이다 보니 교황은 당대 한참 장사에 재미를 보던 밀라노 지역 대주교 임명 압력을 철회하라고 하인리히에게 요구합니다.

   

이에 하인리히가 교황 요구를 무시하였는데요. 이때, 여론은 교황이 유리했습니다. 눈치를 보던 제후들이 교황 편을 듭니다. 교황이 교회 개혁하겠다는 명분이 있으니까요. 속셈으로는 하인리히가 교황마저 무시하는 패권적 권력에 두려움을 느끼고 견제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에 하인리히가 맨발로 카놋사까지 가서 교황에게 항복 선언을 합니다.

   

헌데, 교황 권위가 회복되나, 카놋사의 굴욕으로 제후들 태도가 바뀝니다. 제후 대표격인 하인리히가 교황에게 당하니 제후 권력 역시 교회에 명분상 일부 지지를 받고 있던 터에 제후보다 교회가 우위를 선언한 카놋사의 굴욕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해서, 바뀐 여론을 명분으로 하인리히는 로마로 원정을 가서 교황을 교체합니다. 

 

이로 인하여 당대 교황 대 황제 투쟁이라는 영향을 고스란히 받을 수밖에 없던 롬바드리아 상인 중심지 밀란에서는 기벨린(황제파)와 겔프(교황파) 세력으로 분열하여 이후 근대까지 이어집니다. 300인위원회 같은 음모론 책자를 보면, 검은 귀족이니 국왕파, 교황파 운운하는 대목이 나오는데요. 연원이 롬바드리아 밀란에 있다는 것을 참고하세요^^!

   

또한, 이 사건은 교황 권위 추락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인드라가 강조했지요. 십자군 원정은 중세 온난화로 경제가 살아나고, 그로 인한 추락한 교황 권위 회복을 위한 전쟁이라고 말입니다. 황제가 위기로 추락한 위신을 되찾았듯, 교황 역시 황제로 인해 축출을 당하자 이태리에서는 교황 권력을 지키자는 흐름이 등장합니다.  

 

교회 개혁이란 경제가 살아나니 숙명론적 신본주의적 가치관에서 자유의지적 인본주의적 가치관이 점증하는 데서 나온 교회 응답이며, 경제 발전에 따른 빈부격차가 발생하니 교회가 이에 응답하는 과정에서 나온 결과인 것입니다. 

   

하여, 로마 교황청은 십자군 원정이란 승부수를 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5. 십자군 전쟁, 메디치가, 루이 14세와 프랑스 왕권 강화

 

"동로마제국 황제가 당대 셀주크투르크에게 대패했다. 직후 황제가 이슬람 세력으로부터의 보호 요청을 카톨릭 교회에 호소하자 카톨릭 교회가 기독교적 대의라는 명분하에 십자군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허나, 명분과 달리 실제로는 정치경제적인 배경이 있었다. 농업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증가하여 인구가 늘었다. 교황 권위를 유지하는 것은 물론 동로마까지 장악하여 명실상부하게 기독교 세계의 수장이 되려는 당대 교회의 야심이 있었다. 장자상속권 탓에 미지의 영토를 장악하려는 유럽 봉건귀족과 기사들의 토지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   

 

중세유럽은 세 가지 공동체가 공존했다. 하나, 종교적 공동체다. 교황과 수도승의 세상이다. 둘, 정치적 공동체다. 왕과 영주, 기사들의 세상이다. 셋, 경제적 공동체다. 교황과 왕, 영주는 장원을 통해 농노를 지배했다. 이 세 가지에서 공통적인 피지배층은 농노이며, 권력층은 교회 권력과 국가 권력, 그리고 지방귀족 권력으로 분리되어 중세유럽은 이 세 권력이 서로 대립, 갈등하는 시대였다. 해서, 상기한 설명은 이들 각각의 권력에 대한 동기부여를 하는 셈이다.

   

   

이것이 대체적인 십자군 전쟁 배경에 대한 정설 요약이다. 허나, 과연 이것 뿐일까.

    

 

첫째, 경제적 공동체에 관한 것이다. 대부분의 설명은 농업 생산력이 월등하게 높아져서 인구가 증가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허나, 여기에는 의문이 있는 게다. 왜 하필 이 시기에 농업 생산력이 늘어난 것일까. 이에 대한 가장 간명한 답변은 기후 변화이다. 유럽에서는 9세기~13세기까지 온화한 날씨가 계속돼 평균기온이 3~4도 정도 올라가 농경을 할 수 있는 지역이 늘어났다. 사람들의 영양상태도 좋아졌다. 키도 커졌다고 한다.

     

 

둘째, 정치적 공동체에 관한 이야기다. 기후 온난화 이전만 하더라도 중북부 유럽에는 사람이 살기에는 매우 불편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알래스카 같은 땅이었다고나 할까. 허나, 10세기에 이르면, 프랑크 왕국이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로 분열된다. 이뿐인가. 아니다. 덴마크, 폴란드 등 유럽 각 지역에서 독립왕국이 연달아 출현한다. 왜인가. 먹고 살만 하기 때문이다. 기후가 온화하니, 경작지가 늘고, 농업 생산성이 높아진다.

   

   

셋째, 종교적 공동체에 관한 논리다. 십자군전쟁 때문에 교회와 교황의 권위가 실추했다고 설명을 한다. 아니다. 교회와 교황의 권위는 십자군전쟁 이전부터 하락할 수밖에 없었다. 해서, 정확하게 말한다면, 이미 추락하는 교황의 권위를 지키기 위한 것이 십자군전쟁인 셈이다. 왜인가. 500년에서 700년 사이에 유럽에서는 큰 기후 재앙이 있었다고 한다. 특히 660년 유럽이 유난히 추웠다고 한다. 이런 시기에서는 당연 종교가 득세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이성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혹한의 추위를 견뎌낼 재간이 있겠는가. 해서, 이때는 숙명적 사고가 보탬이 된다. 인간이 견디기에는 참으로 가혹한 시련에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은 한시적으로 숙명적인 태도로부터 비롯된다. 외부의 어떠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는 내면을 유지할 수 있다. 반면 10세기부터 13세기에 이르는 시기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강조가 되던 시기이다. 구약에서 보라. 신의 선민이라는 유태인이 조금만 먹고 살만하면 신을 잊는 것을 말이다. 해서, 교회와 교황은 다급했다.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누가 신을 떠올리겠는가. 중세 온난화로 인해 인민 생활 여건이 나아지자 카톨릭 교회가 권력을 지속시키자니 전쟁을 택했던 것이다.

    

 

십자군 전쟁이 화폐 경제를 정착시켰다."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5 : 자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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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세기에 접어들면서 중세 유럽에는 중세 온난기가 찾아왔습니다. 그 이전까지 야만 상태에 머물렀던 중북부 유럽이 따뜻해지면서 북방 바이킹족이 모스크바, 영국은 물론 그린랜드(이 시기 그린랜드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와 북아메리카까지 항해할 정도로 활동 영역을 넓혔습니다. 해서, 그간 지중해 무역의 일부였던 이태리와 북해 무역의 바이킹족을 연결하는 로만틱 가도를 통해 육상 교역을 시작하는 원거리 상인들이 발생하였습니다. 이들 원거리 상인들이 밀라노 상인, 롬바르디아 상인입니다.

   

헌데, 원거리 상인들이 로만틱 가도를 따라 과거 로마 요새였던 지역을 북해에 이르는 중간 거점으로 개발하니 요새에서 시장이 발생하고, 요새와 시장을 합치니 도시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등장한 것이 한자 상인입니다. 롬바드리아 상인에 대해 한자상인은 토착 현지 상인 이점을 내세워 이익 배당을 요구합니다.

   

이때, 교황권을 내세운 롬바르디아 상인에 맞서 한자상인이 내세울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황제권입니다. 허나, 황제권 실상이란 실제로 각 도시 상권과 결탁한 귀족권이었습니다. 귀족들이 제 못대로 황제권을 내세울 만큼 교황 권력만큼이나 황제 권력 또한 약화하였습니다.

   

교황과 황제 대결이 그 어느 편 승리로 끝나지 않자 롬바드리아 상인은 한자 상인과 같은 토착 상인에게 독점하던 이권을 나눠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에 따라 한자 상인 영향력이 급속도로 커지면서 십자군 원정을 기회로 롬바르디아 상인처럼 원정 상인으로 나서게 됩니다.

   

상인들은 길드를 만들었습니다. 헌데, 길드란 실제 목적이 거래의 이득을 취하는 것이지만, 명분상으로는 교회의 영광을 전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종교가 우선인 조직이었습니다. 장사란 전도를 위한 자체 경비 마련 수준이었던 것입니다. 헌데, 갈수록 세속화하여 실리적인 면만 남았을 뿐입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수공업자 길드가 두 가지 이유로 반발한 것입니다. 하나는 한자 상인 역시 롬바드리아 상인처럼 전도보다 이익에만 몰두한다는 명분적 종교적 비판입니다. 다른 하나는 도시 안에서 부유하게 살던 한자 상인에 비해 도시 바깥에 살던 수공업자는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실리적 경제적 비판인 것입니다.

   

해서, 15세기에 이르면, 도시를 장악했던 도시동맹체들이 사라집니다.

   

두 가지 요인입니다. 하나는 사회 경제 발전에 따라 정치권력도 집중도가 높아졌기 때문입니다. 이전에는 할 수 없었던 도시들을 통합 관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수공업자 길드가 상인길드를 만들어서 직거래를 하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아래에서 샌드위치로 당하니 도시동맹체가 당할 도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는 동시에 상인길드와 직거래할 수 있을 만큼 대자본을 보유한 대상인을 잉태한 것입니다. 소상인들이 숱하게 망하면 대상인이 탄생합니다.  이러한 이치는 대기업, 중앙은행, 정치권력 탄생도 마찬가지 이치인 것입니다. 오늘날 중산층을 파괴하면 부자와 빈민만을 양산시키는 이치와 같습니다. 

    

 

 

메디치 가문은 이탈리아의 중부지방 피렌체공화국, 당대 토스카나, 혹은 투스카니 공국 중산층 가문이었으나 은행업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하면서 유명해진 가문입니다. 이 지역은 로마 제국 초기에 로마세력과 융합하여 로마제국 중추가 된 에르투리아인 지역이기도 합니다. 또한, 메디치 가문은 동방 문물을 수입해와 번역하는 등 르네상스 주역이었습니다. 이후 나폴레옹이 스페인과 비밀협정을 통해 루이지애나를 받고 내준 지역이 바로 토스카나인 것입니다.

 

메디치 가문이 뜬 것이 우연이 아닙니다. 당대 이탈리아는 동방 무역 중심지였기에 경제 발전과 함께 빈부격차가 극심해졌습니다. 이에 메디치 가문이 나서서 평민 수공업자 이해를 챙겨주면서 상거래 이익을 낮추면서 박리다매 방식을 취하니 귀족과 결탁한 롬바르디아, 한자 상인 등이 붕괴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메디치 가문은 이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 은행 지점을 낼 뿐만 아니라 주식회사 형태도 만들기까지 했습니다.

   

귀족과 상인 반발로 추방을 당하는 등 시련 속에서 메디치 가문은 영향력을 강화시켜 교황을 배출해내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때부터 메디치 가문은 남자를 낳으면 교황에, 여자를 낳으면 유럽 왕비로 결혼 동맹을 꾀하는 전략을 취합니다. 헌데, 당대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역사적인 이유로 교황과 대립하였던 반면, 프랑스 왕은 십자군 원정 이후로 교황과 사이가 좋았습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메디치 가문 역시 프랑스 왕가에 왕비를 보내게 됩니다. 하여, 루이 14세에게는 메디치 가문 피가 흐른 것입니다.

   

350년간 영화를 누리던 메디치 가문에도 종말이 다가왔습니다. 1737년 메디치 가문 마지막 대공 잔 가스토네(Gian Gastone de' Medici)가 죽자 기다렸다는 듯이 친프랑스 메디치 가문에 감정이 많은 합스부르크 가문이 6,000 명 벙력으로 토스카나를 정복합니다. 결혼동맹으로 유명한 합스부르크 왕가는 메디치 가문 계승권이 있던 안나 마리아 루드비카를 며느리로 맞이하여 토스카나, 혹은 투스카니를 흡수합니다.

   

 합스부르크 왕가와 프랑스 왕가는 이태리에 왜 그리 집착했던 것일까요.

   

하나, 교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카를대제, 오토대제처럼 실력으로 유럽을 제패한 뒤 교황 인준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중국 춘추시대와 같습니다. 중국 춘추시대에서 주나라 왕실 권한이 쪼그라들어 제후 눈치를 봤지만,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반면 전국시대에는 제후들이 주나라 왕실을 아예 무시합니다. 그처럼 중국 제후나 서양 제후가 주나라와 교황을 챙긴 건 명분 때문입니다. 제후들과 일대일로 싸워 승리하면 좋겠지만 소모가 큽니다. 그보다는 대표 몇 넘만 쓰러트린 뒤 장로 중재와 교섭을 받아 황제가 되는 길이 지름길인 것입니다. 그 장로가 교황이나 주나라 왕실인 겁니다.

   

둘, 동방무역 거점입니다. 동방무역으로 들어온 귀한 물자를 취하는 것은 큰 이권이었습니다. 황제가 귀족들을 포섭하거나, 반대로 귀족이 황제 환심을 사기 위해 진상품이 필요한데, 진상품 대부분이 동방무역을 통해 들어옵니다. 더군다나 이태리 상인과 무역 독점권을 획득할 수 있다면 초대박인 것이지요.

   

추신 : 하이고! 오늘은 여기까지! 졸립네요.

 

      

인드라는 정치를 하지 않겠으며,

책을 더 이상 쓰지 않으며,

언론에 기고하지도 인터뷰를 하지도 않을 것이며,

종교단체를 만들지도 않을 것입니다.

국유본론을 소명으로 여기고

지금처럼 살다

행복하게 가겠습니다

매일매일 행복하겠습니다

마.자.세.

한반도 평화와 통일, 경제 발전과 사회 복지를 위하여

친미친중 반일반북 쪽발정은 척살로 조국통일 쟁취하자

쪽발민주당 해체 쪽발석현 아웃

쪽발재벌 타도 골룸빡 처단

쪽발이에게 죽음을 쪽발왕에게 천벌을

쪽발타도해방투쟁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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