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유태자본론 : 서양사 초간단 정리 2 ; 카르타고 유태인 상인에서 베네치아 상인까지국유본론 2012

2012/10/25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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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유태자본론 : 서양사 초간단 정리 2 ; 카르타고 유태인 상인에서 베네치아 상인까지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2/10/25 

 

  

   

 

 

1. 카르타고 유태인 시조, 하밀카르 바르카스  

   

   

제 1차 포에니전쟁에서 카르타고가 패합니다. 하밀카르 바르카스(Hamilcar Barcas)는 전권대사로 나섰고, 전후에도 카르타고 용병 반란을 진압합니다. 허나, 바르카스는 포상은 커녕 자칫 역적으로 몰릴 위기에 처합니다. 임진왜란 때 선조와 이순신 관계와 같다고나 할까요?

   

카르타고 본토에 있던 카르타고 상인 귀족회의는 로마 요구를 어지간하면 다 받아주려는 입장이었던 반면, 본거지 시칠리아를 잃는 등 바르카스는 어린 아들을 신전에 대려가 로마에 대한 복수를 맹세할 정도로 호전적이었습니다.

   

전통적으로 카르타고인은 상인이지, 군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군사력을 용병에 전적으로 의존하였습니다. 해서, 카르타고 귀족들은 같은 카르타고인이지만, 카르타고인과 이질적인 바르카스에 두려움을 느낍니다.

   

기원전 230년경 카르타고 귀족사회 견제에 견디다 못한 바르카스는 카르타고를 떠나 이베리아 반도로 갑니다. 카르타고는 기원전 천 년 전부터 스페인 동남부에 광물을 캘 목적으로 그리스인과 경쟁하며 여러 식민 항구도시를 건설하며 서지중해를 지배해왔습니다.

   

이베리아 반도에 도착한 바르카스는 '새로운 카르타고', 카르타헤나 항구도시를 건설합니다. 바르카스에 이어 사위 하스드루발 대에 이르러서야 완성하여 바르카 가문이 근거지로 삼았습니다. 이곳에서 바르카스 아들이 사위 보호 속에서 크는데, 그가 바로 그 유명한 한니발 장군입니다.

   

유태인 심리학자 프로이트가 두 명을 존경했습니다. 한 명은 청교도 혁명가 크롬웰이고, 다른 한 명은 한니발입니다. 한 명은 카톨릭에 적대적이었고, 다른 한 명은 로마에 적대적이었습니다. 합치면? 로만 카톨릭이군요^^!

   

하밀카르 바르카스와 한니발 모두 로마군단에 패배하고 맙니다. 카르타고는 3차에 걸친 포에니 전쟁 결과 기원전 146년 카르타고에 풀 한 포기 안 남기고 몰살을 당했습니다. 허나, 지중해 곳곳에는 카르타고 상인 인맥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다 몰살당한 것이 아닙니다.

   

기원을 전후하여 지중해 전역에서 유태인이 자연 증가를 훨씬 넘어서는 열 배 넘는 인구 증가율을 기록했습니다. 이는 개종 이외에는 답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하면, 지중해 전역에서 놀라운 인구 증가율을 기록할 족속이 누가 있답니까. 그리스인이거나 카르타고인입니다. 그리스인은 이 시기 이집트 등에서 유태인과 상권을 두고 목숨 건 전투를 벌였습니다. 게다가 그리스인이 카톨릭이 아닌 유대교로 개종할 이유는 없습니다.

   

        

   

        

 

2. 서고트왕국과 유태상인

   

아틸라로 대표하는 투르크계 훈족이 유럽으로 진출합니다. 한때 훈족은 오늘날 오스트리아 빈이라 불린 지역을 공격할 정도로 위협적이었습니다. 용맹이 뛰어나니 로마 용병으로도 활약합니다.

   

훈족에게 박살난 게르만이 역사적인 게르만 대이동을 합니다. 게르만족이 서로마제국으로 넘어와 로마제국에 동맹을 요구하여 항구적인 터전을 마련하는데, 이중에 고딕 양식으로 자취를 남긴 고트족이 있습니다. 로마제국 말기에 서고트족이 서고트왕국을 세워 로마제국과 동맹을 맺은 덕분에 차기 로마 황제가 되는 일도 있을 정도로 강했습니다.

   

물론 게르만족 중에는 개별적으로 살 길을 도모하고자 하는 로마 용병도 있습니다. 오도아케르는 고트족에 패해 로마로 온 스키리족 출신인데, 자신도 로마제국과 동맹을 맺은 게르만족처럼 나라를 세울 수 있다 여겨 로마를 멸망시킵니다.

    

 

로마가 멸망한 후에도 게르만족은 이탈리아를 지배했습니다. 서고트족은 5세기에 프랑스 남부와 스페인에 서고트 왕국을 세웁니다. 이후 서고트족은 프랑크족에게 패해 스페인으로 집중합니다.

   

약 30만 명으로 추정되는 서고트족이 700만 명이 거주하던 이베리아 반도를 정복합니다. 해서, 산악지대를 방패삼아 방어에는 이골이 난 이베리아 반도 터줏대감인 바스크인 지역과 비잔틴 상인(그리스 상인)이 장악한 남단을 제외한 이베리아 반도 대부분을 장악합니다.

   

정복은 쉬우나 통치는 어려운 법입니다. 북방민족이 중국에 들어가서 중국화하듯 서고트족 역시 로마화합니다. 서고트족을 비롯한 게르만족은 중앙아시아 유목민족들처럼 대체로 천신 종교였답니다. 해서, 예수 신성을 부정한 아리우스파를 부족 종교와 유사하다고 보아 믿었습니다. 이러한 게르만족 경향은 이후 에크하르트 - 루터 - 칼뱅 - 위그노파 종교개혁 기반으로 이어집니다. 다만, 이들은 예수 신성을 긍정했지만, 오늘날 아리우스 신비주의 영향을 받은 유니테리안들은 예수 신성을 부정합니다.

   

반면, 스코틀랜드를 제외하고 켈트족 기반에서는 로마제국 이래로 카톨릭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이베리아 반도에서도 선이주민이자 다수 부족이었던 켈트족, 카톨릭이었습니다. 즉, 히스파노 로마노였습니다.

   

서고트족은 정복 초기에는 부족간 금혼령을 내려 혼혈을 피합니다. 허나, 서고트족이 사회 안정책으로 노예제에서 봉건제로 이행함에 따라 일부 히스파노 로마노 귀족을 신분 상승시키면서 초기 부족간 혼인 금지령이 풀려 급속하게 혼혈합니다. 서고트 남자와 히스파노 로마노 여자가 결혼했을 것이고, 문화란 모계 쪽으로 흐르니, 카톨릭으로 통일하게 된 것입니다.

   

카톨릭화한 서고트족은 카르타고 유대인에게 개종하든가 떠나든가 요구합니다. 헌데, 이때 요구들이란 카르타고 유태인들에게 부채를 탕감을 받거나 새롭게 정치 자금을 요구하는 관행이었던 것입니다. 이는 유태인 몸값 풍습도 원인이 있습니다. '비드온 슈바임'이라 합니다. 유태인은 다른 유태인이 노예이거나 노예가 될 위험에 처했다면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해서, 유태인은 이를 위한 공동기금을 만들었습니다. 유태인 공동체는 청소년 유태인에게 장래 사업을 위한 종자돈을 만들어주며, 자기 자신 가치를 금전적으로 환산할 수 있도록 자각시키는 것 같습니다. 이는 오늘날 청소년에게 경제 조기교육을 하자는 흐름으로 이어집니다.

   

요구가 있을 때마다 유태인들은 거부하기 보다 자신들 경제적 중요성을 역설하면서 몸값을 치루었던 것입니다. 서고트족이나 이베리안이 셈법을 잘 알지 못합니다. 반면 카르타고 유태인은 수천 년간 해온 가문 비법이 있었던 것입니다. 처음부터 큰 자본으로 시작한 이들은 극히 소수고, 대부분은 유태인 하층 기능공이었습니다. 구두 수선, 보석 세공, 유리 세공, 직물 제조, 재단사 등으로 시작한 유태인은 번 돈을 쓰기보다 최대한 절약해서 남은 돈을 가문 비법인 대출 사업으로 돌려 돈을 불렸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유태인은 빠르게 상권을 장악해서 부자 자유민 신분이 됩니다.

        

 

   

 

   

3. 이슬람 왕국과 유태상인

   

8세기 무렵, 서고트족 사이에 왕위 승계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이때, 북아프리카 아랍 용병을 불러들이는데, 아랍 용병들은 이베리아 반도에 들어서자마자 태도를 돌변합니다. 시리아, 레반트, 이집트 등지에서 친지들 불러서 총 6만 명으로 바스크, 카탈루냐, 나바라 정도 남기고 아라곤 왕국까지 포함해서 이베리아 반도를 정복합니다. 정복한 후에는 이슬람 본국과도 관계를 끊고 독립합니다.

   

이슬람 왕국은 상대적으로 관용 정책을 취합니다. 유태상인에게도 인두세 등 세금을 다른 부족에 비해 좀 더 많이 내라고 합니다. 허나, 당대 여타 다른 카톨릭 왕국과 비교하면 유태상인에게는 그야말로 껌값이었습니다.

   

이베리아 유태상인은 부를 축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유태인에게는 국가가 없었으므로 정치적 대립이 어떠하든 유태인은 유태인 인맥을 통해 장사를 했습니다. 영국, 북유럽과 지중해, 북아프리카 중계 무역만 해도 부자가 되는 것 시간 문제였습니다. 여기에 종교 문제가 사라지니 날개를 단 격입니다. 게다가 당시 이슬람 문화는 세계 최고 선진 문화였습니다. 카르타고 유태인은 아랍어에 능통했던 만큼 다른 기독교인과 비교할 바 없이 빠르게 문화를 흡수합니다.

   

이 시기 유태인은 국가 살림살이까지 맡는 궁정 유태인으로 출세합니다. 요즘 중동 국가와 유사합니다. 나라 안전보장은 사막부족에게 맡기고, 나라 경제는 월가 금융가에게 맡기고, 이슬람 왕과 귀족은 할렘에서 향락을 즐기면 되었던 것입니다.

   

   

4. 비잔틴제국과 그리스 상인

   

8세기 이전까지는 비잔틴 상인이라 부르는 그리스 상인이 지중해 인맥을 구축했습니다. 그리스에도 게르만족이 이동하고, 슬라브족이 그리스에 눌러 살다보니 그리스인 역시 이베리아 남단, 시칠리아, 지중해 섬 등으로 디아스포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 상인은 비잔틴 상인으로, 카르타고 상인은 유태인 상인으로 이름만 바꾼 채 기원전부터 지중해 무역 패권을 다투었던 것입니다.

   

허나, 여기에 새 강자가 등장합니다. 과거 카르타고 본거지 근방인 튀니지에 근거지를 둔 이슬람 세력이 8세기에 지중해를 장악합니다. 827년, 이슬람세력이 시칠리아를 정복합니다. 또한, 코르시카, 샤르데니아, 이탈리아 반도를 수시로 공략합니다. 846년에는 로마 베드로 성당이 불탈 정도였습니다.

   

예서, 당대 카톨릭이라면 이슬람왕국에서 궁정유태인으로 지내는 유태상인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5. 노르만족과 제노바, 베네치아 상업 도시 출현

 

11세기에 또 다른 강자가 등장합니다. 영국을 정복한 노르만족이 지중해로 진출합니다. 이들은 튀니지 이슬람 세력뿐만 아니라 비잔틴 상인세력까지 차례로 무너뜨립니다. 로마까지 곧장 가서 교황을 구출합니다.  

   

유태상인, 그리스상인, 이슬람, 노르만족 공통점은 항해술에 뛰어나다는 것입니다. 해서, 점차 유럽 기후도 온화해지고, 게르만족도 정착단계로 가자, 지중해 중심으로 무역이 활성화되고, 제노바, 베네치아 상업 도시가 기술을 전수받아 무역에 눈을 뜨기 시작합니다.

   

      

     

   

6. 아라곤왕국연합과 바르셀로나 유태상인

        

 

아라곤 왕국은 피레네산맥 남부 사라고사를 수도로 하는 왕국이었는데 이슬람 왕국에 정복당했습니다. 이후 아라곤 왕국은 국권을 회복하고 정략결혼을 통해 카탈루냐와 합쳐 아라곤왕국연합 시초를 이룹니다.

   

아라곤과 카탈루냐를 비교하면,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발전한 카탈루냐 국력이 월등하게 높았습니다.

   

한니발 가문인 바르카 가문은 오늘날 카탈루냐 바르셀로나라 불리는 도시를 기원전 3세기경에 건설하였습니다. 바르셀로나란 도시 이름은 바르카 가문 소유 도시라는 바르시노(Barcino)에서 유래합니다.

   

하면, 카탈루냐와 바르셀로나는 왜 부유했을까요?

소금 때문입니다.

   

카탈루냐 카르도나에는 품질이 좋은 암염이 있었습니다. 산 자체가 구약에 나오는 소금기둥처럼 소금 산인 겁니다. 카르도나 소금은 바르셀로나 항에서 지중해 전역으로 수출되었고, 이중 주거래 상인으로는 이후 베네치아 상인과 소금 전쟁을 하는 제노바 상인이 있었던 것입니다.

   

소금은 염인이라 하여 화폐수단 대용으로까지 쓸 만큼 무역 핵심 물품이었습니다. 당대 원정 무역 대표적 물품 두 가지만 들자면, 소금과 노예인 것입니다. 소금과 노예과 각지 특산품을 매매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서, 베네치아는 구약에 등장하는 레바논처럼 목재가 좋은 산지를 두고 있어서 목재가 추가되었던 것입니다.

   

바르셀로나를 포함한 카탈루냐 지역은 농수산물이 풍부하고, 특산물인 귀한 소금까지 있으니 부유하지 않을 까닭이 없습니다.

   

카탈루냐 바르셀로나에 유태인이 있었습니다.

   

샤를5세 프랑스왕은 아라곤왕 페드로 4세에게 지도 제작을 의뢰합니다. 당시 카탈루냐 지도제작술은 유럽 최고였기 때문입니다. 아라곤왕은 당대 최고 장인인 유태인 아브라함 크레스크에 지도 제작을 맡깁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카탈루냐 지도'입니다. 

 

   

   

14세기에 제작된 이 지도가 한국인에게 흥미로운 건, 아시아 동쪽 끝에 '카올리(Kao-li)'를 표기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쪽발을 지시하는 '지팡구(Zipangu)'를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당대 유태인 지식 수준이 매우 높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포르투갈 돈 주앙 왕실 천체학자인 유태인 아브라함 자쿠토(Abraham Zacuto)는 태양 고도를 측정하여 위도를 구할 수 있는 천측력(Almanach Perpetuum)을 히브리어로 출판했습니다. 동인도 항로를 개척한 바스코 다 가마가 아브라함 자쿠토에게 천문을 배웠다는 설이 있습니다. 또한, 아메리카를 발견한 컬럼버스 또한 아브라함 자쿠토가 만든 항해도를 썼다고 합니다.

   

참고로 제노바 사람 콜럼버스는 유태인이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유태인 콜럼버스 동상이 바르셀로나에 있습니다.

   

이처럼 카탈루냐 바르셀로나는 유태인 역사가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인드라가 수십 년간 좌파였기에 스페인 내전 배경에 오랜 기간 관심이 있었습니다. 아시는지요? 빅터 로스차일드가 중심이었던 케임브리지 대학 조직이 스페인 내전을 계기로 소련 간첩이 되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물론 진실은 모릅니다. 소련 공산당이 빅터 로스차일드 3대 남작이 간첩인지, 빅터 로스차일드 3대 남작이 소련 간첩인지. 허나, 인드라는 소련 공산당이 빅터 로스차일드 간첩이었다는 데에 무게를 둡니다. 해서, 오늘날 카탈루냐 독립운동도 국유본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이 인드라 분석입니다.

   

이처럼 유태인 활약이 뚜렷한 만큼 멸망도 극적입니다. 황영조 마라톤 금메달로 유명한 몬주익이란 유태인 산이라는 이름입니다. 헌데, 유태인 학살 시기에 학살을 많이 당해서 유태인 무덤으로도 불리는 것입니다.

        

 

6. 왜 카탈루냐공화국, 혹은 바르셀로나 공화국이 아니라 아라곤연합왕국인가

 

헌데, 왜 명함이 바르셀로나나 카탈루냐가 아니라 아라곤인가. 아라곤이나 카탈루냐, 바르셀로나 모두 프랑크 왕국 영향 하에서 백작령으로 출발해서 지위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아라곤 왕이 산초 3세 후손이기에 카탈루냐보다 지위가 높은 데다 명분이 있었습니다. 산초 3세는 북부 자잘한 왕국들을 군사력에 의하지 않고 정치력으로 통일하여 에스파냐를 건설하였습니다.

   

해서, 아라곤왕 공주와 바르셀로나 백작 라몬 베렝게르 4세 결혼임에도 국명이 아라곤이 되었습니다. 일부에서는 카탈루냐 백작이라고도 하는데, 딱히 틀린 표현이 아닙니다. 당대 바르셀로나 백작이 카탈루냐 지역을 장악했습니다. 하여간, 이들 결혼으로 알폰소 2세가 등장합니다.

   

향후 정략결혼을 통한 영토 확장은 에스파냐 역사에서 중요합니다.

   

1469년 아라곤 왕 페르난도와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과의 결혼으로 오늘날 스페인이 탄생하였고, 이후에는 합스부르크 왕조와 정략결혼을 하여 오스트리아와 스페인을 다스리는 카를로스 1세, 또는 카를 5세를 탄생시켰습니다. 게다가 불발이었지만, 정략결혼으로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합칠 수도 있었습니다.

   

아라곤연합왕국은 십자군 전쟁으로 인한 영향으로 군사력 증강과 정략결혼을 통한 정치력과 카탈루냐 경제력, 유태상인 영향력을 바탕으로 에스파냐 이슬람 세력을 물리쳐서 발렌시아를 정복한 이후 해상으로 진출하여 발레아레스 제도 마요르카, 나폴리와 시칠리아, 비잔틴까지 영향을 끼칩니다.

   

해서, 14세기 중엽 알폰소 5세 나폴리 정복 이후 카탈루냐 유태인 상인들은 영국에서 수단, 콘스탄티노플에 이르기까지 지중해를 한동안 카탈루냐 영지로 만듭니다. 

 

하면, 14세기에 카탈루냐 지중해 무역이 전성기였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 14세기에 접어들면 유태인 상인이 고위직에 진출합니다. 아라곤왕 페르난도 2세는 카스티야 왕녀 이사벨라와 결혼하여 스페인과 오스트리아를 통치하는 카를로스 1세를 탄생시키는 왕입니다. 또한 이베리아 반도 이슬람을 끝장내고 유태인 추방령을 내린 왕이기도 합니다. 헌데, 페르난도 2세 고조할머니가 유태인이었을 만큼 유태상인은 이미 스페인 왕가와 귀족사회에 뿌리를 내렸던 것입니다.

     

      

둘째, 아라곤연합왕국 왕권이 취약했습니다. 아라곤연합왕국은 통일국가라기보다는 연합국가였습니다. 각 연합 국가마다 사실상 군주격인 귀족이 따로 있고, 의회가 따로 있었습니다. 심지어 아라곤연합왕국 초기에는 왕이 귀족 특권을 인정한다는 서약을 하고 왕에 등극할 정도였습니다. 왕이 한마디로 귀족들 눈치를 보아야 했던 것입니다. 헌데, 이런 느슨한 연합이 성장기에는 야심가들을 포용할 수 있는 좋은 그릇이었습니다. 그런 만큼 아라곤연합왕국이 수틀리면 언제든 탈퇴할 수 있었습니다.

    

 

셋째, 14세기에 유럽은 백년 전쟁과 페스트에 시달립니다. 이는 육로 교역을 어렵게 하는 요인입니다. 이는 지중해 무역하는 이들에게는 반사이익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허나, 15세기 중엽 오스만투르크가 지중해를 장악하면서 아라곤연합왕국은 급속히 쇠퇴합니다.

   

   

7. 제노바 상인 VS 베네치아 상인

   

베네치아는 고트족 등 게르만족을 피해 정착한 이주민이 주축입니다. 베네치아는 비잔틴 세력이 약화하고 그에 따라 그리스 상인이 힘을 쓰지 못하자 8세기부터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사업을 하려면 길드를 조직하고 수호성인이 필요하였는데 828년 이집트에서 성 마르코 유해를 밀반입하여 명분을 만들어 지중해 무역을 통한 부의 축적으로 비잔틴제국은 물론 로마교황청과도 독립합니다.

   

베네치아는 13세기 4차 십자군 원정을 적극 지원하여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여 잔존 비잔틴 상인세력을 무력화시켜 동지중해 패권을 장악합니다. 이후 소금전쟁 등을 통해 제노바와 경쟁하나 14세기 중반에 이르러 제노바를 패퇴시키고 지중해 무역을 독점하고 15세기 중반 1453년 비잔틴 제국이 멸망하자 최전성기를 맞이합니다.

   

허나,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투르크가 지중해를 위협하고, 이는 프레베자 해전으로 절정에 다다릅니다. 프레베자 해전은 1538년 9월 28일 그리스의 북서부에 있는 프레베자 근해에서 교황 바오로 3세가 조직한 로마 가톨릭 동맹의 군대와 오스만 함대 간에 벌어진 전투입니다. 이 때 가톨릭 동맹은 교황령, 스페인, 제노바, 베네치아, 몰타 기사단 등 유럽 지중해 전력을 몽땅 투입한 것인데, 대패합니다.

   

오스만군은 10척을 침몰시키고 3척을 불에 태웠으며 36척을 나포하였고, 3,000명을 포로를 잡았습니다. 오스만 군은 한 척도 잃지 않았고, 단지 400명의 전사자와 800명의 부상자를 기록했을 뿐입니다. 오스만 군은 프레베자 승리와 1560년 드제르바 전에서 승리하여 1571년 레판토 해전 패배 때까지 지중해를 장악합니다.

   

14세기 중반에 베네치아에게 지중해 상권을 내주고 15세기에 들어서는 비잔틴 제국 멸망과 오스만투르크 위협이 가시화하니 제노바 상인은 다른 방도를 찾아야했습니다.

   

해서, 유태인 컬럼버스가 신대륙 탐험에 나섰다는 것입니다. 컬럼버스는 처음에 포르투갈을 찾아가 거절당하고 스페인에서 허가를 받아 아메리카로 향했습니다. 이때, 포르투갈이 왜 거부한 것입니까.

   

일반적으로는 포르투갈이 희망봉을 경유한 동인도 항해 경로 기득권에 집착하여 컬럼버스 제안을 거절하였다고 나옵니다.

   

"동 주앙 2세 때에는 페르낭 둘모가 다시 원정대를 조직해 줄 것을 왕에게 요청하자, 왕은 1486년에 왕령으로 그에게 장차 발견하게 될 섬이나 대륙의 세습 통치권을 미리 인정했다.

   

1487년에 실행된 것으로 추측되는 둘모의 이 여행은 콜럼버스의 항해보다 5년 전에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여, 신대륙의 발견에 있어 포르투갈이 선취권을 가졌음이 몇몇 사가(史家)들에 의해 입증된다. 자료의 불충분 때문에 일부 사가들은 서류가 없음은 카스티야 왕국과 라이벌 관계에 있었던 포르투갈 왕들의 비밀 정책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영국의 역사가 데이비스(A. Davies)는 그 원정이 실현되었음을 주장할 뿐만 아니라, 포르투갈의 지도를 통해서도 증명되고, 페르낭 둘모가 1487년에 아메리카의 해안에 상륙하여 그 곳을 답사했고, 포르투갈의 한 해도(海圖) 작성가의 배신으로 그 사실을 알게 된 콜럼버스가 1492년에 그의 항해를 위해 그 자료들을 이용했다고 밝혔다.

   

둘모의 여행이 실현되었든 안 되었든 간에 콜럼버스의 전기 작가들이 기록한 바를 보면, 콜럼버스 자신도 아메리카 대륙의 해안에 포르투갈의 항해자들이 여행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 항해자들 중에는 1484년 이전에 안토니오 레미라는 마데이라 인이 있었는데, 그는 서대서양 쪽에서 3개의 섬을 보았음을 보고했던 것도 밝혀져 그 섬들이 앤틸리스 제도인 것이 확실하다. 이 사실로 비추어 볼 때, 아메리카 대륙은 콜럼버스 이전에 포르투갈의 항해자들에 의해 이미 발견되었음을 알 수 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 ··· d%3D3272#

   

허나, 둘모 탐험이 밝혀짐에 따라 포르투갈 왕실 늦장 대응으로 정리되는 듯싶습니다.

   

   

8. 유태인 추방령은 불가피했다

   

14세기에서 15세기 중엽까지 백년 전쟁과 흑사병으로 인해 지중해 무역이 활성화되어 유태인 상인을 비롯한 지중해 상인들이 큰 부를 획득한 반면, 에스파냐 내륙에서는 인구 감소와 경제 침체로 큰 고통을 받아야 했습니다. 해서, 에스파냐 곳곳에서 농민은 물론 도시민도 포함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이에 대한 아라곤연합왕국 처방은 유태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는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잘 나갈 때는 유태상인과 함께 해먹더니 CU 편의점이 문제가 발생하자 쪽발석현만 공격하는, 쪽발민주당, 골룸빡, 쪽발한걸레, 쪽발참여연대, 공정위 태도와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수 년 전부터 문제가 있어 편의점 점주가 항의데모할 때는 입 닥치던 자들이 인드라가 근래 이슈 파이팅하니 호들갑을 떠는 건 당대 스페인 성직자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불만은 세 가지 양상으로 나타납니다.

   

첫째, 종교 부문입니다. 중세 온난기는 950년부터 1250년까지입니다. 기후가 변화하니 14세기에 접어들어 농산물 수확이 좋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흑사병까지 겹치니 농산물 생산이 급감합니다. 이처럼 환경이 혹독해지면, 인류 사이에서는 자유의지론보다는 숙명론이 우세하게 됩니다.

   

자유의지론과 숙명론 사이에서 어느 것이 낫다 할 수 없습니다. 인간 대처 방식입니다.

   

숙명론은 내 꼬라지가 원래 이렇지 하는 생각으로 마음을 평온하게 할 수 있습니다. 누가 아무리 재주가 있더라도 부처님 손바닥, 예수님 앞 속죄양입니다. 이것이 평등사상 기초입니다. 이리 하면, 인간은 공동체를 이루어 없이 사도 원래 없이 살았기에 견딜 수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방글라데시 같은 나라 사람들이 행복한 것입니다. 공동체주의입니다.

   

반면 자유의지론은 내 꼬라지 태어나길 형편없지만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유사상 기초입니다. 다함께 못 살 때 나 홀로 잘 살면 마음이 편치가 않습니다. 허나, 중세 온난기처럼 기후가 온화하고 사회 발전이 가속화하면 새로운 발견과 발명으로 획득한 부가 미덕이 됩니다. 예서, 개인주의, 자유주의가 발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생존과 관련이 있습니다. 해서, 재테크도 보면, 활황일 때는 고위험 고수익을 노리고, 불황일 때는 안전 투자하지 않습니까.

   

해서, 자유와 평등은 대립 관계입니다. 이런 것 제대로 모르고, 진보이니 보수이니, 좌파이니 우파이니 하면 인드라한테 병쉰 취급 받습니다.

   

정리하면, 성직자로서는 유태인 책임 전가가 불가피하지만 최선인 것입니다. 숙명론적 관점에서 보면, 유태인이 부자가 되고, 카톨릭이 거지가 되면, 카톨릭이 망한 꼴이 아니겠습니까. 카톨릭이 부자가 되고, 유태인이 거지가 되어야 하는 겁니다.

   

   

둘째, 정치 부문입니다. 아라곤연합왕국은 스페인을 기반으로 합니다. 헌데, 1421년 아라곤 연합왕국 알폰소 5세는 나폴리 왕국에서 일어난 내분에 개입하며 1443년 나폴리 왕국을 합병하는 데 성공합니다. 이후, 알폰소 5세는 나폴리가 마음에 들어 수도로 하고 나폴리 궁전을 짓고 삽니다.

   

왕이 스페인을 잊고 이태리만 신경을 쓰니 귀족들이 반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귀족들로서는 농민 반란에 왕이 이태리만 잘 해주고 스페인을 푸대접하니 귀족들이라고 무슨 수가 있겠냐는 식으로 변명할 수 있었습니다.

   

   

셋, 경제 부문입니다. 인간은 눈앞에 벌어지는 일에 민감합니다. 본디 잘 사는 이들이 잘 사는 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허나, 자신처럼 하층이었는데, 어느 순간 상류층이 된 자들에 대해서는 민감합니다. 자신이 못 사는 건 숙명인 줄 알았는데, 동료나 친구, 친지가 출세를 합니다.

   

유태인은 어떤 시대이든 숙명론을 자유의지론으로 바꿀 수 있는 민족인 듯 보입니다. 아무리 악독한 환경에 유태인을 가두어도 유태인은 영화 '쇼생크 탈출'처럼 탈출하고야 마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유태인에 감탄하면서도 자기 자신을 바라보니 형편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무능합니다. 그 무능을 직시해야 발전이 옵니다만, 사람이란 어디 그렇습니까. 최소한 78%는 타인 탓을 하는 것이 마음이 편합니다.

   

이는 인류 보편적 행동양식입니다. 인류는 세 가지 방식으로 인류애를 실현합니다. 하나, 1% 정도는 영웅적인 행위로 인류를 구원합니다. 둘, 기브 앤 테이크. 21% 정도는 다른 이 행복을 책임질 수는 없어도 자기 한 몸 정도 책임질 수 있습니다. 셋, 고발 및 증오. 가장 손쉬운 인류애 실현 방식입니다. 그냥 누구 미워하면 됩니다. 이는 원시 시대에 공동체에서 다수파가 아니면 살아남기 힘들다는 오래된 기억에 따른 것입니다.

   

   

9. 1492년 스페인 유태인 추방령

   

1492년 1월 그라나다를 함락합니다.

1492년 3월 유태인 추방 칙령을 발표합니다.

1492년 8월 컬럼버스 배가 출항하고 10월 신대륙에 도달합니다.

   

   

알함브라(Alhambra) 칙령, 1492년 3월 31일

http://blog.naver.com/miavenus/memo/70149850287

   

유태인 추방史

1012 - 마인츠            1446 - 브란덴부르크     1541 - 프라하

1182 - 프랑스            1462 - 마인츠           1550 - 제노아

1276 - 북부 바이에른     1483 - 마인츠           1551 - 바이에른

1290 - 잉글랜드          1483 - 바르샤바         1557 - 프라하

1306 - 프랑스            1492 - 스페인           1569 - 교황령

1322 - 프랑스            1496 - 포르투갈         1649 - 함부르크

1394 - 프랑스            1496 - 나폴리           1669 - 비엔나

1420 - 리용              1498 - 뉘른베르크       1744 - 보헤미아

1421 - 오스트리아        1510 - 브란덴부르크            모라비아

1424 - 퀼른              1515 - 제노아                  프라하

1438 - 마인츠            1533 - 나폴리           1891 - 모스크바

1439 - 오거스부르크       1541 - 나폴리

   

   

1492년 스페인 유태인 추방령은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유럽에서 이전 이후로 유태인 추방령이 있었지만, 1492년 스페인 유태인 추방령이 가장 영향력이 있었다고 인드라는 평가합니다. 이 사건 배경을 놓고 여러 설이 분분합니다.

   

이에 대한 인드라 국유본론 입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 아라곤연합왕국 종교적 입장이 최우선이었다고 봅니다. 십자군 전쟁을 최후까지 벌여서 유럽에서 이슬람 세력을 몰아낸 것은 중세 최대 이슈인 것입니다. 이는 카톨릭 국가 중에서 아라곤연합왕국 지위를 한층 높이는 것입니다. 실리보다 명분이 우선이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실리적 이유로 유태인 추방령을 했던 다른 유태인 추방령 정책과 결정적인 차이인 것입니다.

   

당시 여왕의 보좌관과 세금 징수 총책임자로 고위직을 맡고 있던 유태인 아브라바넬과 아브라함 세니오는 천문학적 숫자인 3만 냥의 금화를 내면서 이를 막아보려 했지만 종교 재판소장 토르케마다의 반대로 무산됐습니다.

   

둘, 15세기말 아라곤연합왕국은 귀족, 도시민, 농민, 식민지 반발에 정신이 없던 때입니다. 이런 때에 그라나다 함락과 함께 유태인 추방령을 전한다면, 정치적으로 몇 가지 효과가 발생합니다. 아라곤연합왕국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란 효과입니다. 여기에 그간 유태인과 아라곤연합왕국이 붙어먹어서 신이 노했다는 민간신앙을 잠재울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아라곤연합왕국 자신감입니다. 지금까지 이베리아 반도에 무슬림이 있어서 유태인을 인정하였지만, 무슬림이 없으면 유태인도 없는 것입니다.

   

셋, 상당한 착각입니다만, 여왕은 유태인이 없어도 국가 경영이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해서, 1492년 3월 30일 스페인에 살고 있는 모든 유대인은 8월 전까지 나라를 떠나거나 기독교로 개종하라는 왕명이 떨어졌습니다.

   

30만 명에 달했던 유태인 추방령 결과는 어떻습니까.

   

스페인 경제가 한동안 마비상태였고, 이후 오랫동안 스페인 경제 회복이 어려웠습니다. 이후 세계사에서 스페인이 사라집니다. 황금알을 낳는 닭을 죽인 결과였습니다.

   

   

      

인드라는 정치를 하지 않겠으며,

책을 더 이상 쓰지 않으며,

언론에 기고하지도 인터뷰를 하지도 않을 것이며,

종교단체를 만들지도 않을 것입니다.

국유본론을 소명으로 여기고

지금처럼 살다

행복하게 가겠습니다

매일매일 행복하겠습니다

마.자.세.

한반도 평화와 통일, 경제 발전과 사회 복지를 위하여

친미친중 반일반북 쪽발정은 척살로 조국통일 쟁취하자

쪽발민주당 해체 쪽발석현 아웃

쪽발재벌 타도 골룸빡 처단

쪽발이에게 죽음을 쪽발왕에게 천벌을

쪽발타도해방투쟁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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