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유태자본론 : 15세기 포르투갈은 20세기 이스라엘이었다 국유본론 2012
2012/10/27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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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유태자본론 : 15세기 포르투갈은 20세기 이스라엘이었다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2/10/27
1. 세계 최초 아프리카를 일주한 페니키아인은 수메르에서 왔다
2. 15세기 포르투갈은 20세기 이스라엘이었다
3. 카톨릭을 국교로 선포한 갈리시아 사람 테오도시우스 1세가 유태인에게 친절한 이유는?
1. 세계 최초 아프리카를 일주한 페니키아인은 수메르에서 왔다
콜럼버스가 처음으로 아메리카를 간 것이 아니고, 해상 민족 페니키아가 먼저 갔다, 라는 주장은 이제 진부하기까지 합니다. 해상 민족 페니키아가 기원 전에 이미 아메리카를 갔다는 자료들이 인터넷에서 조금만 검색하면 찾아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드라 주장은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죠. 페니키아 기원은 수메르라고 하는 겁니다.
페니키아인은 초기에는 수메르어를 썼다가 페니키아어를 만들었습니다. 페니키아 알파벳은 중동 종교 언어였던 수메르어에다가 이집트와 교류한 경험으로 이집트어 장점을 종합해서 상인들이 쓰기 쉽게 만든 언어입니다. 기원 전 7세기 경에 그리스 상인에게 페니키아 알파벳을 전해주어 그리스 알파벳이 나왔다고 합니다.
종교 면에서도 가나안 지방신 바알을 믿었다고 합니다만, 그 바알과 동등하기까지 한 여신 숭배 풍습이 있었습니다. 구약 솔로몬왕 이야기에 나옵니다. 수메르에는 여러 신들이 있었는데, 대홍수 이전에는 번개와 폭풍우 신 엔릴이 최고신이었는데 대홍수 이후로 수메르에서는 신들 중에서 홍수 조절하는 달 신 난나를 최고신으로 믿는 경향이 점차 우세해진 것입니다.
헌데, 아카드족이 득세하는 시기에 중동에서는 홍수가 아니라 가뭄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연도가 기원전 2,000년에서 기원전 1,500년 추정이 되는데, 아브라함이 수메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가던 비슷한 시기입니다. 이때부터 바빌론 비옥한 땅이 하류부터 가뭄으로 염분 가득한 땅으로 변해 농사를 지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해서, 수메르인이 상류에서 하류로 이동하던 전성기와 달리 하류에서 다시 강 상류로 점차 북상하였는데요. 이 시기 이후부터 가뭄 조절 신인 태양신이 최고신으로 탄생합니다. 헌데, 최고신이 달신에서 태양신으로 변화하는 권력 교체기에서 이를 잘 설명하는 논리는 결혼인 것입니다. 부족을 정복할 때 남자 승계자를 죽인 뒤, 여자 승계자와 결혼하여 부족 지배권을 차지하는 결혼 말입니다. 그로 인해, 후일 세계로 퍼진 신화에서는 달 신이 본디 남자 신인데 여자 신으로 변합니다.
설정은 달 신 난나 아들이 태양신 우투이고 난나 딸이 금성신 이난나입니다. 예서, 탐무즈(두무지) 신화에서 보듯 이난나가 형제를 사랑한다고 나오는데, 이때 형제가 태양신 우투가 아니라 양치기 신 탐무즈(두무지)로 변화하고, 탐무즈(두무지)가 죽어 부활하니 태양신 마르둑인 것입니다. 이난나는 마르둑과 인연을 맺습니다.
금성신 이난나는 중동, 유럽, 인도 등으로 퍼져나가는 여신 원형으로 짝퉁 여신들로는 아프로디테, 비너스, 자유의 여신상 등이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도 이난나가 원형이 아닐까 싶습니다.
구약에서 아브라함 때던가 솔로몬 때던가 바알과 야훼가 혼용되어 인용하던 대목이 기억나는데요. 이 시기는 가나안신 바알과 수메르신 야훼가 권력투쟁을 하던 시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구약에선 야훼가 승리하는데요. 페니키아에선 바알이 승리한 셈인 거죠.
해서, 솔로몬왕이 야훼와 이난나를 같이 모신 건 야훼가 이난나 사랑을 얻어 바알을 이겨 가나안 유일신이 되었다는 상징이 아닐까 싶습니다.
탐무즈(두무지) 신화가 수메르 신화라고 하지만, 아카드족이 수메르를 정복하면서 수메르 신화를 변형시킨 것입니다.
수메르에서는 자원이 없어 일찍부터 무역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허나, 그 당시에는 배가 원정무역을 할 만큼 큰 배 제작술이 없었고, 유물도 나오지 않아 현재로서는 추정만 가능한 뿐입니다. 이집트가 기원전 2500년경에 레바논 지역과 무역한 것도 지중해가 작은 배로도 가능했기 때문이지, 배가 대서양이나 인도양을 항해하려면 큰 배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헌데, 모헨조다로 유적에 뼈가 새겨진 인장이 발견되었는데요. 원통형 인장하면 수메르가 원조이고 모헨조다로 연대가 수메르와 동시대인 기원전 3000년대여서 수메르와 모헨조다로가 그 당시에도 교류를 한 것이 아닌가 보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대홍수와 노아 방주가 수메르 신화에서 보듯 사실이면 유물이 아직 나타나자 않았을 뿐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가령 세계 최초 배가 한국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무려 팔천 년전, 기원전 육천 년경입니다. 믿지 못할 이야기인데, 사실이니 어쩌겠습니까.
"조기(早期) 신석기 시대인 8000여년 전 물고기 잡이에 활용한 목제 선박과 노가 한꺼번에 경북 울진군 죽변에서 발견됐다. 신석기시대 배와 노는 창녕 비봉리 유적에 이어 국내 두 번째 출토다. 제작 연대는 비봉리 유적과 비슷한 국내 최고(最古)로, 전 세계를 통틀어서도 현존하는 가장 이른 시기 배에 속한다.
▲ 경북 울진군 죽변에서 발굴된 약 8000년 전 조기 신석기 시대에 사용된 판자형 나무배의 일부. 삼한문화재연구원은 낚시 도구들이 함께 나와 물고기 잡이 배로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된다며 땅 밑 180㎝에 묻혀 있었다고 27일 밝혔다. 울진 연합뉴스 |
매장문화재 전문조사 기관인 삼한문화재연구원은 울진군 의뢰로 2010년 5월 울진군 죽변면 죽변리 일원 도시계획도로 부지에 포함된 조기 신석기 유적 출토 유물을 최근 정리하고 보존처리하는 과정에서 목제 선박 조각과 노를 확인했다고 27일 밝혔다. 목제 선박 조각은 현존 길이 64㎝에 너비 50㎝, 두께 2.3㎝로 편평한 판재 형태를 띠며 가장자리 쪽이 바깥으로 들려 올라갔다. 판재의 수종은 단단한 녹나무다. 목제 노는 잔존 길이 170㎝×최대폭 18㎝×두께 2.1㎝로, 물에 잠기는 갈퀴 부분은 넓은 사다리꼴이며, 손잡이 부분은 단면 직사각형이다. 수종은 상수리나무다.
김구근 원장은 "이들 선박과 노는 현재 지표 약 180㎝ 아래의 제4문화층에서 출토됐다."면서 "심한 부식으로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워 흙덩이 상태로 떠서 옮겨와 보존처리하던 중 정확한 용도를 확인하게 됐다."고 말했다. 유적 내에서 비록 파손됐지만 결합식 낚시의 부품을 비롯한 각종 어로 관련 도구가 출토돼 이들 목선은 어로 행위에 사용한 것으로 짐작된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해서, 인드라는 수메르가 기원전 3,000년경에 큰 배를 만들지 못했더라도 기원전 1,500년에서 기원전 2,000년경에는 기존 배를 개량해서 원정항해가 가능한 배를 만들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집트 고왕국(기원전 2850년 ~ 기원전 2200년) 시절, 상선대를 만들어서 레바논 목재를 거래했다고 합니다. 헌데, 이집트가 페니키아인을 최초로 발견한 것이 기원전 1,500년경입니다. 즉, 그 이전까지 이집트가 레바논과 무역할 때는 페니키아인을 발견하지 못한 것입니다. 헌데, 어느 날 느닷없이 나타났다는 겁니다.
해서, 인드라는 수메르인이 육로를 통해서 페르시아만에서 가나안으로 이주한 것이 아니라 해로를 통해 가나안으로 이주했다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왜 육로가 아닌 해로입니까. 육로는 도적패들이 많습니다. 또한, 이집트에서 탈출한 유태인이 가나안에 이르는 과정에서 보듯 많은 부족 지역을 통과해야 하니 어려움이 한둘이 아닙니다.
반면, 해로는 도적패 등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해상에 배 제작술 미흡으로 그 당시에는 해적패가 없다시피했을 터이니까요. 또한, 육로로 민족이 대이동을 한다면, 인근 지역에서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소문이 퍼졌을 것입니다.
페니키아인이 이집트 왕명을 받들어 기원전 600년경에 홍해, 아프리카 동부해안을 경유하여 아프리카 희망봉에 도달해서 그곳에서 겨울을 나고 항해하여 아프리카 서부해안, 지중해를 거쳐 이집트로 돌아오는데, 2 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시대적 차이가 있고, 민족 대이동이이기에 수메르인이 그보다 더 오랜 기간에 여러 번에 걸쳐 선발대, 본대, 후발대로 보냈다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바다하면 태평양인데요. 폴리네시아인들 언어가 하와이나 피지나 비슷해서 말이 통한다고 합니다. 이는 본디 같은 족속이었다는 것이지요. 헌데, 이들 배란 원시적 카누가 전부입니다. 이들 이주하는 방식도 선발대를 보내서 살만한 섬을 발견하면, 본대, 후발대가 여러 번에 걸쳐서 다른 섬으로 이주하였던 것입니다. 폴리네시아인이 태평양에서도 가능했던 것을 수메르인이 인도양과 대서양에서 항해가 불가능했다고 볼 수는 없지 않을까요?
아울러 페니키아인이 이집트 왕명이라고 선뜻 아프리카 일주 원정에 나설 수 있겠습니까. 이집트왕은 몰라도 페니키아인에게만 아는 전례가 있다면 가능하지 않았겠습니까. 실제로 콜럼버스 이전에도 아메리카 항해가 비밀리에 있었기에 콜럼버스 항해가 가능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수메르인이 레바논으로 이주를 결심했다면 이유는 배나 성전 건축할 때 필요한 목재 때문입니다. 구약에도 나올 만큼 레바논 백향목이 최상품이었습니다.
페니키아인은 솔로몬에 성전 건축을 해주고, 이집트에 해군 함선을 제작해주고, 그리스에 알파벳을 전수해줍니다. 이런 수준 높은 문명이 갑작스레 출현한다는 건 매우 기이한 현상이 분명합니다. 허나, 수메르인이 바다를 통해 왔다면 가능한 것입니다. 페니키아인은 기원전 12세기에 이베리아 남단에 카디스란 도시를 건설하니까요. 그뿐 아니라 브리튼, 영국은 물론 아이슬랜드, 아메리카까지 탐험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아메리카 원주민이나 태평양 폴리네시아인 사이에서 포르투갈, 스페인 백인 원정대를 보고 전설을 떠올렸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수메르인, 페니키아인, 카르타고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해서, 그리스가 잘 나갈 때인 기원전 5세기 인물인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페니키아인이 페르시아만에서 왔다고 하는 주장이 그냥 나온 주장이 아닐 것입니다. 헤로도토스는 고향인 할리카르나소스를 떠나 흑해 지방, 스키티아,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더 나아가 이집트, 바빌로니아 방면까지 여행하며 각지 자료들을 수집해서 과거 사실을 실증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2. 15세기 포르투갈은 20세기 이스라엘이었다
유태인 콜럼버스는 제노바 출신입니다. 제노바는 리구리아주 주도이고, BC 7세기경부터 리구리아인 항구도시였습니다. 리구리아인은 켈트족, 게르만족 이전부터 유럽 선주민으로 살았는데요, 프랑스 남부에서 이탈리아 중부 에트루리아에 분포되어 있었습니다.
헌데, 리구리아인은 포에니 전쟁 때에는 로마가 아닌 카르타고 편을 들어 한니발 부대에 리구리아 경장보병들이 출전합니다. BC 117년경에는 로마제국에 복속되었습니다.
"콜럼버스는 1451년 8월과 10월 사이에 이탈리아 남서 해안의 항구 도시인 제노바에서 도미니코 콜럼버스와 수산나 디 폰타나로사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이 부부에게는 두 아들 바르톨로메오와 지아코모가 있었는데, 이들은 형을 도와 같이 탐험을 했다. 콜럼버스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고 다만 독실한 가톨릭 교도로 성장해 아버지의 직업인 양모 직공 일을 도왔다는 정도만 남아있다.
콜럼버스는 1476년 그의 나이 25세 때 탑승한 제노바의 상선이 프랑스와 포르투갈 해적선의 공격을 받아 수많은 인명 피해를 입고 침몰해 거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 이때 그는 바다에 떠있는 노를 잡고 수영을 해서 기적적으로 살아나 포르투갈의 리스본으로 갔다. 리스본은 대서양을 향해 열린 유럽의 거대 항구로서 전 유럽에서 건너온 선박들이 머무는 곳이기도 했다. 콜럼버스는 리스본에 이미 와 있던 동생 바르톨로메오와 함께 지도 제작을 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항구도시 리스본은 그의 꿈을 실현시키기에 매우 적절한 장소였다. 그곳에는 막 항해를 마치고 온 선장들과 미지의 땅에 대한 도전으로 가득한 사람들이 젊은 콜럼버스의 주위에서 싱싱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리스본에서 콜럼버스 형제는 뛰어난 지도 제작자로 명성을 날렸다. 항로와 육로를 정확하게 인식하게 된 이 시기는 이후 콜럼버스가 항해를 할 때 큰 힘이 되었다. 이러한 준비기간이 있었기에 대서양 횡단이 가능했던 것이다. 더불어 독학으로 에스파냐어를 공부했고, 독서를 통해 교양을 쌓았다. 그리고 당시 인기 있던 선박인 카라벨의 조종법을 익혔고 북대서양의 아일랜드와 아이슬란드를 항해하기 시작했다. 콜럼버스는 리스본에서 부유한 포르투갈의 관리이자 선장의 딸인 펠리파 페레스트렐로에 모니즈를 만났다. 그녀는 전통적인 귀족 집안의 젊고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콜럼버스는 리스본의 한 교회에서 그녀를 만나 1478년에 꿈의 결혼식을 올렸다. 이 결혼으로 인해 콜럼버스는 위험한 탐험의 길을 떠나지 않더라도 최소한 처가의 인맥으로 부유한 상인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거기에 멈추지 않았다. 항상 마음속에는 '검은 바다'로 불린 대서양이 파도치고 있었다. 그는 장인이 유품으로 남긴 항해 지도와 선장 일지, 지도 등을 장모로부터 물려받았다. 이 유산은 대서양의 바람과 해류에 관한 소중한 기록들로 그에게는 그 어떤 보물보다 귀중한 것이었다."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323
당대는 콜럼버스 집안처럼 겉으로는 가톨릭이지만 속으로는 유대교를 믿는 일이 흔했습니다.
"[토픽]葡 유태인집단,5세기만에 정체 드러내
| 기사입력 1994-09-09 09:06
(파리=聯合)申淇燮특파원=지난 5세기 동안 포르투갈정부의 종교적인 박해를 피하기 위해 유대교를 신봉하면서도 가톨릭교도임을 가장, 비밀리에 집단거주해온 약 2백명의 유태인들이 최근 정체를 드러냈다고.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紙의 보도에 따르면 포르투갈의 벨몬테라는 외진 마을에 모여사는 이들 유태인은 15세기말부터 시작된 리스본정부의 탄압에서 벗어나기 위해 약 5백년 동안 대대로 구전된 유대교를 믿으며 토요일에는 유대교안식일을 지키고 일요일에는 가톨릭미사에 참석하는가 하면 같은 집단의 남녀간에만 이뤄지는 결혼도 공개적으로는 성당에서 의식을 치른 후 별도로 유대교 의식을 갖는 등 철저하게 비밀을 유지해 왔다는 것.
이들은 그러나 지난 21년 유대교의 합법화조치 이후 최근 들어 포르투갈사회가 가톨릭 이외의 종교에 관대해지고 이스라엘의 지원 까지 받게 되자 용기를 얻어 마침내 가톨릭교도라는 가면을 벗고 유대교도임을 선언하고 나섰다는 것."
헌데, 포르투갈이란 나라가 어떤 나라이기에 부모가 직공 일을 하던 평민 출신 유태인 콜럼버스가 어떻게 포르투갈 귀족 딸과 결혼할 수 있을까요?
당시 인구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정확하지는 않으나, 15세기 포르투갈 인구는 대체로 백만 명이었다고 합니다. 이중 유태인 인구는 십만 명이었습니다. 무려 10%인 것입니다. 헌데, 스페인 유태인 추방령으로 스페인에서 이주한 유태인이 십만 명에 달해서 한때, 포르투갈 유태인 비율은 20%에 육박한 것입니다.
스페인 유태인 추방령 때 추방된 유태인 인구가 16만 명에서 80만 명 등 다양합니다만, 인드라는 당대 스페인 유태인 비율을 3% 정도, 약 삼십만 명 정도로 봅니다. 16만 명선이란 최소치 추정인 만큼 의심나는 건 모두 빼고 정했을 것이며, 80만 명선이란 포르투갈도 10% 선이니 스페인도 10% 선일 것이다, 라고 잡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해서, 인드라는 쉽게 생각합니다. 당대 스페인은 오늘날 미국이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유태인에게는 좋은 환경이었습니다. 헌데, 이런 미국에서 유태인 비율이 2.5% 정도입니다. 그 외 지역에서는 대부분 0.5%에서 1% 정도입니다.
헌데, 당대 포르투갈 유태인 비율이 10%다? 이 정도면 당대 포르투갈이 오늘날 이스라엘이다, 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것입니다.
하면, 포르투갈은 어떤 나라인가요?
포르투갈인은 인종적으로 거의 단일민족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보통 루시타니아인이라고 합니다.
루시타니아인 기원은 논란입니다. 언어로 보면, 인도유럽어족입니다. 허나, 게르만이나 켈트 이전 선사시대에 이미 이베리아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해서, 역사시대에 이주한 켈트인과 구별하여 선켈트인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헌데, 또 다른 주장은 이들이 북아프리카 경로를 통해 왔다고 합니다. 해서, 루시타니아인이 켈트족과 이베로족이 섞인 켈티베로족에 속한다고 보기도 합니다.
켈트족은 금발머리가 많다는 점에서 게르만과 비슷하면서도 빨강머리라 불리는 머리도 많고, 특히 연한 하늘색(또는 녹색) 눈이 특징입니다. 아일랜드인이 대표적입니다.
이베로족은 기원이 분명치 않습니다. 대체로 북아프리카와 이태리 남부 등지에서 볼 수 있는 인상 같습니다. 마피아 영화에 나오는 시칠리아인들 말입니다. 그래서인지 일부 인종주의자들은 시칠리아인들을 같은 백인으로 생각하지 않는 경향도 있는 것 같습니다.
헌데, 다른 켈티베로족이 로마인이나 켈트족이나 게르만족과 많이 섞여서 오늘날 스페인인에게서 자취를 찾기가 어려운 반면, 루시타니아인은 예전 그대로 모습을 지금까지 간직했다고 합니다. 다른 종족과 금혼을 할 정도로 정복민에게 비타협적이었다고 합니다. 해서, 거의 단일민족이나 다름없다고 합니다.
포르투갈에는 약 5% 정도 흑인이 있는데요. 특히 스포츠 분야에서 두드려져 나니 같은 선수가 있는 것이지요. 해서, 포르투갈 선수 피구를 보면 백인이냐, 흑인이냐 논란을 부르는 셈인 거죠. 백인입니다. 보통 이런 얼굴을 라틴형이라고 합니다만, 루시타니아인 전형적인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포르투갈 식민지였던 브라질은 더 심하구요.
이처럼 인드라가 루시타니아인을 자세히 언급한 것은, 이들이 오랜 역사와 언어, 다른 모습을 하고 있어서 이베리아 반도 내에서 스페인으로 통일하지 않고 지금까지 자주성을 유지해왔다는 것을 보여드리고 싶었던 것도 있지만, 페니키아인/카르타고인과의 관계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루시타니아인은 로마인, 켈트족, 프랑크족과 모두 맞섰습니다. 헌데, 예외적 존재가 카르타고인입니다.
페니키아인은 기원전 10~12세기경 스페인 남부에 카디스란 항구도시를 건설했을 뿐만 아니라 이베리아 반도 서안인 루시타니아 지역에도 페이토리아(Feitoria)를 곳곳에 설치했습니다. 페이토리아란 원정항해에 싣고 갈 물건들을 보관해두던 창고이자 요새 역할을 했던 장소입니다. 방어를 위해 병사가 지켰습니다. 이후 포르투갈이 페니키아 상인을 본받아 대항해시대에 식민지 곳곳에 페이토리아(Feitoria)를 설치하고 대포 등을 배치하는 등 적극 활용하였습니다.
또한, 카르타고인 한니발은 루시타니아인과 결혼동맹, 즉 정략결혼을 합니다. 해서, 한니발이 루시타니아인 보병을 이끌고 전쟁을 치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헌데, 루시타니아인이 다른 종족과 피를 섞는 것을 금할 만큼 정체성 확보를 해왔는데, 한니발 카르타고인에게 마음을 열었다는 것은, 페니키아인과의 오랜 교류와 어쩌면 셈족인 카르타고인과의 종족적 동질감을 느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2차 포에니전쟁이 로마 승리로 끝나고 한니발이 망합니다. 해서, 로마가 이베리아반도 패자가 되는데, 실제 영향력은 동부와 동남부였고, 루시타니아인이 사는 서부지역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해서, 기원전 155년 루시타니아 전쟁이 일어나는데 역시 로마군단 승리입니다. 로마는 루시타니아 지역을 속주로 편입합니다.
3. 카톨릭을 국교로 선포한 갈리시아 사람 테오도시우스 1세가 유태인에게 친절한 이유는?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는 이베리아 반도를 타라코넨세, 루시타니아 및 베티카 등 3개의 주로 분리했습니다. 그후 로마는 216년, 타라코넨세를 분리하여 북부 지역을 갈리시아라 하여 4개 주로 개편했습니다.
갈리시아는 루시타니아 지역, 포르투갈 북쪽 지역입니다. 박주영이 뛰는 축구단이 있는 비고가 갈리시아 도시입니다.
갈리시아에서 사용되는 갈리시아어(Galego)는 에스파냐어보다는 포르투갈어과 가까운 언어입니다. 초기 갈리시아포르투갈어(Galego-Português)는 갈리시아어와 포르투갈어로 나뉘었으며, 이 두 개 언어는 갈리시아와 포르투갈에서 사용됩니다. 갈리시아에는 포르투갈인도 많이 삽니다.
헌데, 갈리시아는 카톨릭 역사에서 중요하다면 중요할 수 있는 지역입니다.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는 삼위일체설을 믿는 사람들만 카톨릭으로 인정하는 칙령을 발표한 황제인데, 테오도시우스 1세 고향이 이베리아 갈리시아 출신입니다.
"379년경 테오도시우스가 통치하던 동방 제국내에서 니케아 신경을 옹호하는 그리스도인들과 아리우스주의자를 비롯한 다른 종파 사이에 적대 관계가 고조되면서 복잡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테오도시우스 자신은 심한 병을 앓고 난 뒤 380년 세례를 받고 니케아 신경를 신봉했다. 그는 제국 내에서 신앙의 통일을 이루기 위해 열성적으로 노력했는데 380년 2월 28일 테오도시우스는 병에서 회복되자마자 교회 당국자들에게 아무런 자문도 구하지 않고 모든 시민들이 니케아 신경을 신봉해야 한다고 규정한 칙령을 발표했다. 이 때부터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설을 믿는 사람들만 보편적 기독교인(가톨릭)으로 인정되었다. 가톨릭이라는 호칭이 문서에 등장한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다.
이듬해 열린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주교 150명이 모여 아리우스파와 그 종파를 이단으로 확고히 했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 교구는 향후 로마 교구와 버금가는 명예와 위신을 가진다고 발표하였다. 이 무렵 아리우스파 기독교도들은 모든 도시에서 집회를 금지당했고 정통 가톨릭교회로 개종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385년부터 테오도시우스는 동물을 제물로 바치는 제사를 더욱 엄격히 금지하였고, 391년 로마와 이집트에서 일체의 비기독교 의식을 금지하고 이듬해에는 공적이든 사적이든 모든 형태의 이교 숭배를 제국의 전역에서 불법으로 규정했다."
http://ko.wikipedia.org/wiki/%ed%85%8c ··· 584%25b8
헌데, 당대 정치경제사회적 요인보다는 갑자기 병을 앓다가 회복한 뒤 종교지도자들과 아무런 상의없이 테오도시우스 1세는 카톨릭을 국교로 선포하고, 이교도와 아리우스파를 맹렬하게 탄압하였지만, 유태인에 대해서는 관대하였습니다. 유태 나시 직무를 인정하고 힘을 실어 주었으며, 회당을 보호하였습니다. 이는 다른 로마황제와는 달랐습니다.
예서, '나시'란 무엇일까요?
"70년 이전(2차 성전 시대)의 유대교는 크게 3개의 종파로 나뉜다.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가 바로 이것이다. 2차 성전의 멸망으로 인해 성전 중심의 사두개파는 정치 · 사회적 구심점을 잃었고, 쿰란 공동체로 일반적으로 동일시되는 에세네파는 유대 반란 중 로마에 의해 사라지게 된다. 그리하여 남은 것은 바리새파인데, 바리새파인들 중에서 라반 요하난 벤 자카이(Rabban Yohanan ben Zakkai)는 예루살렘이 베스파시아누스에 의해 포위되었을 때, 예루살렘 성을 빠져나와 베스파시아누스를 만나 야브네에 학교를 세우는 것을 허락받음으로써, 이 곳에서 랍비 유대교가 태동되었다. 라반 요하난 벤 자카이 이후 1세기 후반에 가말리엘 가문의 라반 가말리엘 2세가 지도자가 되면서 본격적인 나시 가문이 형성되었고, 이들은 로마가 인정하는 정치 · 사회적 지도자로 유대인을 대표하게 되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 ··· d%3D3270#
인드라가 지난 인월리에서 숱하게 주장한 바 있습니다. 카르타고 유태인들이 바리새파 유태인으로 개종했다고 말입니다. 나시 가문이란 당시 로마가 인정하는 유태인 대표 가문이었던 것입니다.
테오도시우스 1세 출신이 궁금해집니다. 테오도시우스 1세 집안이 할아버지 때부터 기독교 가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 이전은?
테오도시우스 1세 가문은 페니키아인, 카르타고인, 루시타니아인, 리구리아인, 유태인과 관계가 있을까요?
길어서 오늘은 여기까지 씁니다.
인드라는 정치를 하지 않겠으며,
책을 더 이상 쓰지 않으며,
언론에 기고하지도 인터뷰를 하지도 않을 것이며,
종교단체를 만들지도 않을 것입니다.
국유본론을 소명으로 여기고
지금처럼 살다
행복하게 가겠습니다
매일매일 행복하겠습니다
마.자.세.
한반도 평화와 통일, 경제 발전과 사회 복지를 위하여
친미친중 반일반북 쪽발정은 척살로 조국통일 쟁취하자
쪽발민주당 해체 쪽발석현 아웃
쪽발재벌 타도 골룸빡 처단
쪽발이에게 죽음을 쪽발왕에게 천벌을
쪽발타도해방투쟁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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