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정벌 이슬람 총사령관 무사는 이슬람으로 개종한 유태인 출신이다 국유본론 2012

2012/10/30 11:52

http://blog.naver.com/miavenus/70150211916

   

   

   

스페인 정벌 이슬람 총사령관 무사는 이슬람으로 개종한 유태인 출신이다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2/10/30

   

5. 이슬람교 창시 무함마드는 쿰란공동체 유대교도였다

6. 우아미야 왕조는 이슬람 창시자 무함마드에 적대하던 가문이었다

7. 기독교 초대교회를 주도한 것은 시리아나 로마가 아니라 카르타고 교회였다

8. 스페인 정벌 이슬람 총사령관 무사는 이슬람으로 개종한 유태인 출신이다

9. 이슬람 스페인 정벌 때 적극 환영하던 유태인은 시리아 이주 유태인이 아니라 스페인에서 자생한 유태인, 즉 카르타고 유태인이다

        

 

     

      

 

   

5. 이슬람교 창시 무함마드는 유대교도였다 

   

이슬람교를 창시한 무함마드는 어린 시절 양친을 모두 잃은 고아였습니다. 해서, 상인인 숙부 슬하에서 자랐습니다. 무함마드가 12살 때 시리아에서 단성론이어서 기독교 이단 취급을 받던 네스토리우스파 사제를 만났는데, 사제는 무함마드가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라며 축복을 해주었습니다. 무함마드는 성인이 되자 숙부를 떠나 목동 양치기로 지냈습니다. 허나, 무함마드 아버지가 상인이었던 만큼 상인에 대한 갈망이 있었습니다. 해서, 카디자 상단 점원으로 일하게 되는데, 일도 잘 하고 품성도 좋고 잘 생겼기 때문에, 과부였던 카디자가 15살 차이가 나는 짐승돌 무함마드에 반합니다. 후일 무함마드가 자신 얼굴을 숨긴 것은 미남 교주 덕분에 이슬람이 흥했다고 조롱할 것이 뻔한 이교도들 비난을 피하기 위함인 것 같습니다. 짐승돌 숭배도 우상 숭배이긴 하기 때문이죠. 허나, 비잔틴 동방교회에서는 무함마드가 내세운 우상 숭배 배격론에 충격을 받아 그리스도 성화상 폐지 논란에 빠집니다. 오늘날로 치면, 무함마드가 내세운 것은 가수론입니다. 가수가 노래만 잘 부르면 가수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에 비잔틴 동방교회는 그래도 스타성이 있으려면 비주얼도 좋아야 하는데 입장인 것입니다.  40세 카디자는 과부여도 부자였기에 여기저기서 청혼이 들어왔지만 모두 거절한 뒤 아들 나이 격인 25세 무함마드와 결혼합니다. 무함마드 카디자 부부는 금슬이 좋아 2남 4녀를 두었습니다.

   

무함마드가 이대로 행복하게 살다 죽었다면 이슬람이란 종교가 탄생할 수 없었습니다. 무함마드가 대를 이를 아들 둘을 모두 잃습니다. 안 그래도 사색하길 즐겨하던 무함마드는 하늘이 내린 시련에 세속 일에는 끊고 방황하는 시간을 보냅니다. 카디자가 부자 상인이었기에 남편 사색을 전혀 방해하지 않고, 오히려 '힘내세요, 카디자가 있잖아요' 하고 격려합니다.

   

카디자는 아비오니교 신자였고, 사촌인 와라카는 구약성경 사본을 필사하는 수도사이면서 아비오니교 메카 종교지도자였습니다. 아비오니교 교리는 아리우스파와 유사하여 예수가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인데, 세례를 받을 때 하나님 아들이 되었으니 예수에겐 신성이 없다며 삼위일체설을 부정하는 데다 양성론과 채식주의도 반대했습니다.

   

아비오니교는 이스라엘 쿰란 공동체에서 시작하였습니다. 쿰란 공동체라면 재산 공유인 원시 공산주의 삶을 살면서 임박한 메시아를 기다리는 종교 공동체입니다. 5세기~6세기 비잔틴 제국은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해 기독교화를 진행하여 유대교 중심이 예루살렘에서 바빌론으로 바뀝니다. 이중 일부가 아라비아 반도로 이주하여 메카로 온 것입니다. 무함마드 당시 메카에는 약 300명 정도 신자가 있었다고 하는데, 자신들 경전이 따로 있었다고 하니 이 정도 규모라면 상당한 교파인 것입니다.

   

헌데, 이때 마침 유대교에서 탈무드가 등장한 것입니다. 유태인들이 기원 후 로마와 전쟁하여 대패합니다. 성전이 파괴됩니다. 전쟁에서 패하니 열심당이 망했고, 성전이 파괴되니 제사장 집단 사두개파가 몰락하고, 에세네파도 사라지고, 바리새인이 유대교를 장악합니다. 성전이 파괴되니 이제 토라(모세 5경)로만 신앙을 유지해야 하니 나시 가문 중심으로 랍비 유대교가 등장합니다. 예서, 랍비란 하나님 계시를 받은 예언자가 아니라 오늘날로 치면 성서학교 교사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가르치려면 학습서가 필요하겠습니다. 탈무드입니다. 바빌론 유수에서 돌아온 기원전 500년대부터 구술로 전해지던 탈무드를 정리하기 시작하는데, 600년대에 이르러 예루살렘 탈무드에 이은 팔레스틴 탈무드가 나옵니다.

   

무함마드 아내와 아내 사촌이 아비오니교인 데다가 구약 사본을 필사하고 시리아 등 원정무역을 할 능력이니 탈무드를 익히는 데에 아무런 장애가 없었을 것입니다. 진리를 갈구하며 독학하던 무함마드는 지식을 전승받습니다. 어쩌면, 메카 아비오니교 교단 차원에서 카디자가 총명하고 똘끼 있는 무함마드를 한눈에 알아보고 후계로 선택한 것이 아닐까요? 무함마드가 큰일을 할 영적 지도자라는 것을 굳게 믿었던 카디자는 무함마드가 나이 마흔에 이르러 동굴에서 계시 천사인 가브리엘을 만나 각성하자 1호 신자가 됩니다. 2호 신자는 카디자 사촌입니다.

   

유대교도 전도하고 다녔습니다. 유태인만 유대교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아랍인 중에도 유태인 신자가 꽤 있었습니다. 무함마드도 그중 한 명이었습니다. 해서, 자신이 새로운 예언자임을 인정받기 위해 메카로 온 유대교인들을 대접하고 예루살렘에 경배하고 안식일 등 율법을 지키려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허나, 유대교도는 바리새인인 것입니다. 게다가 무함마드는 에세네파 일부인 쿰란공동체 출신이니 유대교에서 이단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언행이 에세네파와 흡사하다는 주장이 지금까지도 전해오고 있으니까요. 바리새인은 계시적이고 신비주의적인 데에 비판적이고 율법적이고 현실주의적이었습니다.

   

무함마드는 자신이 메시아가 아니라 구약에 나오는 예언자일 뿐이라고 말해도 바리새인들이 콧방귀만 뀐 것입니다. 이에 무함마드는 바리새인 중심 유대교에서는 더 이상 길이 없다고 보고, 아브라함 서자 이스마엘처럼 길 없는 길을 택한 것입니다. 이후 무함마드는 기독교는 물론 유대교와도 분리하여 안식일을 하루 앞당겨 금요일로 율법을 정하는 등 아랍인 중심 이슬람으로 나아갑니다.

        

   

   

        

 

6. 우아미야 가문은 이슬람 창시자 무함마드에 적대하던 가문이었다

   

우아미야 가문은 무함마드와 같은 쿠라이쉬 부족인 집안입니다. 대상인 집안이었기에 이슬람 초기에는 전투를 할 정도로 무함마드를 반대하였습니다. 무함마드가 중소상인 등을 통해 세를 확대하자 이를 눈치 챈 아랍 종교 세력들이 무함마드는 물론 부족 전체를 몰살시킬까 두려웠던 것입니다. 허나, 무함마드가 세를 크게 불리니 조력자로 나선 것입니다.

   

무함마드와 아비오니교파가 영성권력에 열심이었다면, 우아미야 가문은 세속권력에 집착하였습니다.

   

우마이야 가문 무아위야는 무함마드 핏줄인 알리와 이슬람 황제격인 칼리프 자리를 놓고 대결을 합니다. 예서, 오늘날 수니파와 시아파가 발생했습니다. 알리가 사산왕조 페르시아 바빌론 지역에 기반하였다면, 우마이야 가문은 비잔틴 지역 시리아 다마스커스 총독이 됩니다. 이후 오늘날까지 이어져 이란인 중심 시아파 대 아랍인 중심 수니파 구도가 됩니다.

   

"680년에 무아위야의 아들 야지드 1세(Yazd Ⅰ, 680~683)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할리파가 되었다. 그의 아버지를 닮아 유능하고 재치 있는 통치자였으나, 그의 불행은 이라크 내에서 일어난 사태 때문에 시작되었다. 이라크 총독인 지야드와 그의 아들이며 후계자인 우바이둘라('Ubaydulāh)의 난폭한 통치 때문에 이라크 거주 아랍 인의 감정은 크게 악화되었다. 게다가 그들은 시리아의 우대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제4대 정통 할리파 알리의 둘째 아들 후세인에게 지지를 보냈다.

   

680년에 후세인과 그의 추종자들이 남부 이라크의 카르발라(Karbalā')에서 우마이야군과 충돌했으나 패하여 학살당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한 즉각적인 정치적 반응은 심각하지 않았으나, 시간의 흐름과 함께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였다. 즉, 할리파 위의 계승권을 주창한 후세인이 극적으로 죽게 되자, 그 죽음은 순교로 떠받들어졌다. 그 결과, 우마이야조에 대한 반대 세력은 알리의 자손을 구심점으로 내세워 그들만이 할리파 위의 정당한 계승자라고 주장하게 되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 ··· d%3D3270#

   

   

비잔틴 제국 유태인들은 이슬람이 레반트 지역을 지배하자 초기에는 아랍인을 해방자로 받아들였습니다.

   

"5세기 후엽에서부터 유스틴 황제(527-565년 C.E.)가 즉위하기까지 기독교는 교회내의 각기 다른 종파간의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 문제의 신학 논쟁이 계속되는 동안 팔레스틴 내의 유대인들은 그들의 지위가 어느 정도 증진되면서 곳곳에 많은 회당을 짓고 발전을 도모하였으나, 비잔틴의 군사력이 부활되면서 유대인은 보다 많은 박해를 받게 되었다.

   

유스틴 황제가 즉위하면서 유대인에 대한 즉각적인 박해가 시작되었다. 유대인의 권리와 재산 보호의 법적 근거를 제거해 버렸으며, 유대교에 대한 지위를 하락시켜 나갔다. 이 시기에 일어난 많은 신학적 논쟁과 더불어 정치적으로 팔레스틴에서는 사마리아인들의 반란(529 C.E.)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가장 중요한 혁신 조처 가운데 하나는 유대법을 국가법과 동등한 규정으로 적용시켜 나갔으며, 기독교 내의 각종 제도를 유대교의 그것들로부터 분리시켜 나갔다. 나아가 성경 해석에 있어서 유대교적인 전통과 관점으로부터 떠나 기독교적인 성경해석 방식에 의해 해석해 나갔다. 이를 위해 유대인의 성경 해석서인 미쉬나를 금서로 지정하기도 하였다. 미쉬나는 하늘의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지상의 인간의 작품이며, 유대 랍비들의 해석은 성경의 가치를 모두 부인하고 있는 까닭이다.

   

교황 그레고리 1세(Pope Gregory I,590-604)는 유대인을 기독교인과 맞서 하나님의 선택권을 놓고 싸우는 관계로 규정하고 있다. 그는 욥기를 해석하면서 유대인의 고집스러운 태도를 비판하였다. 기독교는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박은 일을 반복적으로 강조하면서 하나님의 선택이 유대교로부터 기독교로 옮겨오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유대인은 에서요, 이방인이었던 기독교인은 야곱이었다. 동시대의 교부들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기독교와 유대교의 궁극적인 차이를 주장하였다. 그는 이러한 신학적 입장에서 유대인들의 행동을 제약하였다. 유대인의 회당을 새로 짓는 일을 금하였으며, 법으로 기독교인이 되지 않은 유대인들을 차별하였다.

   

이러한 비잔틴 시대의 유대인들은 다른 어떤 제국의 통치 기간과 마찬가지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였다. 614년 페르시아가 팔레스틴의 변방에까지 이르자, 과거 바빌로니아에서 페르시아로부터 얻은 유대인의 구원과 같은 갑작스러운 구원을 기대하며 강력한 메시아적 흥분을 가라앉치지 못하였다. "페르시아가 팔레스틴에 이르렀을 때, 유다의 남은 자들은 페르시아와 연합하여 기독교인들과 맞서 싸웠다"(Sebeos,ch.24). 유대인들은 갈릴리로부터 가이사랴, 룻다를 거쳐 614년 5월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성을 정복하였다.

   

예루살렘을 정복한 페르시아는 기독교인을 추방하고 교회를 파괴하였다. 이 시기에 마르 사바(Mar Saba) 같은 수도원이 불타고 수 천명의 수도사들이 화형되기도 하였다. 예루살렘에 새로 시작된 유대인 공동체의 지도자는 느헤미아 벤 후시엘(Nehemiah ben Hushiel)과 에브라임 벤 요셉(Ephraim ben Yosep)이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희생제사를 재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페르시아의 친유대 정책은 3년이 채 못되어 617년 역전되어 친기독교, 반유대인 정책으로 돌아서면서 유대인의 지도자들은 처형되고 유대인의 지위는 예전처럼 돌아갔다.

   

622년 비잔틴의 황제 헤라클리우스(Heraclius)는 군대를 강화하여 페르시아 정벌에 나서 엑바타나 전투에서 승기를 잡고 페르시아의 영토를 되돌려 받았다.

   

629년 비잔틴의 황제가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기독교의 예루살렘을 복원시켰다. 그는 팔레스틴의 유대인들에게 어느정도의 관대한 조치를 취하였으나 얼마후 성직자들의 강요로 깨어지고 말았다. 성직자들은 황제의 위증죄에 대한 책임을 강요하게 되면서 결국 유대인을 예루살렘과 그 주변으로부터 추방하도록 명령하고 말았다.

   

교회는 유대인을 이집트와 주변 사막으로 추방하였으며, 이에 반대하고 나선 유대인들을 처형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박해와 더불어 유대인을 강제로 개종시키는 공적인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적어도 기독교 제국 내의 유대인들은 기독교의 신앙을 거부한 구약의 수호자이며,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자들이었다.

   

이러한 유대인과 기독교인 사이의 갈등은 640년 팔레스틴의 새주인으로 떠오른 아랍의 등장과 함께 종말을 고하고, 유대인들은 이제 수세기 동안 새로운 "악한 왕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 아랍의 등장과 함께 모슬렘과 기독교의 갈등이 시작되었으며, 같은 뿌리를 가진 세 종교와 민족의 갈등은 팔레스틴을 새로운 국면으로 치닫게 하였다. 가장 확실한 변화는 이제 더 이상 팔레스틴이 유대인의 삶의 중심지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http://blog.naver.com/miavenus/memo/70 ··· D7705369

   

   

무아위야는 시리아 정복 당시 유태인 노예를 전리품으로 획득합니다. 휘이씨 정리에 따르면, 그 유태인 노예가 스페인 정복을 진두지휘했던 무사 빈 누사이르 아버지였습니다.

   

http://blog.naver.com/byron1st/60113265688

   

이후는 휘이씨 정리에 인드라 의견을 첨가한 것입니다.

        

 

   

   

7. 기독교 초대교회를 주도한 것은 시리아나 로마가 아니라 카르타고 교회였다

   

무사 아버지는 무아위야에게 비잔틴 제국 콘스탄티노플 점령을 위해서는 양쪽에서 공격해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이에 무아위야가 의견을 받아들여 사령관을 무사 아버지로 하여 계획을 세웠지만, 알리와 내전을 치루느라 백지화합니다. 유태인이 사령관이 될 수는 없습니다. 무사 아버지는 이슬람으로 개종했던 것입니다.

   

무아위야에서 시작한 우마이야 왕조는 압둘 말리크와 아들 알 왈리드에 이르러 중앙집권적 절대왕권 체제를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헌데, 이런 일에는 개종한 유태인 출신이 적격인가 봅니다.

   

알 왈리드는 무사 빈 누사이르를 북아프리카 정벌 군사령관으로 중용합니다. 무사는 전임자와 달리 베르베르족을 강제 개종하지 않고 전통을 존중하였습니다.  

 

   

   

 

   

베르베르족은 아랍인이 아닌 무어인입니다. 헌데, 아랍인이나 무어인 모두 인종적으로는 흑인이 아닌 백인 계통인 코카소이드입니다. 다만, 무어인  언어를 보면 함족계입니다. 종족별로 약간씩 흑인과 혼혈한 정도 차이가 있습니다.  

    

   

 

베르베르족(오늘날 모로코, 리비아 지역 정착민)은 이슬람 역사에서 아랍인, 이란인, 터키인과 함께 중요한 종족입니다. 알리 부인도 베르베르족이었고, 아랍인과 베르베르인 갈등을 활용하여 파티마 왕조가 들어서기도 하니까요. 오늘날에는 축구선수 지단이 베르베르족인 거죠. 또한, 스페인 역사에서 베르베르족이 차지하는 위상은 엄청나기도 합니다.

      

     

헌데, 이들 베르베르족이 왜 거세게 반발하였을까요?

   

'고백록'으로 유명한 로마초대교회 교부 아우구스티누스(354.11.13 ~ 430.8.28)는 북아프리카 출신입니다. 아버지 파트리키우스는 이교도의 하급관리였고 어머니인 모니카는 열성적인 그리스도 신자였습니다. 카르타고로 유학해서 이후 교부가 되었다고 하는데요. 기독교면 시리아나 로마로 유학을 가야지, 하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허나, 당대 카르타고란 로마나 시리아를 압도하며 초기 기독교 역사를 주도하였습니다. 펄페튜아와 펠리시타스같은 유명한 순교자들이 있으며, 서방 기독교 신학 창시자인 터툴리안이 있습니다.

   

헌데, 카르타고 기독교 기원이 불투명합니다. 이는 승자가 기록하는 역사 관점에서 카르타고 역사에서 뭔가 숨기고 있는 대목이 있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인드라 추정은 카르타고인입니다. 포에니 전쟁 당시 카르타고에는 카르타고인 25만이 있었는데 20만이 죽고 5만이 살아남았다고 하는데, 그 후예입니다. 스페인 카르타고인과 지중해 소도시에 있던 카르타고인도 물론 살아남았구요. 어떤 분들은 아무 데나 카르타고를 붙이냐 하겠지만, 문명이란 하루 아침에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수메르가 망해도 그 문명이 중동 전체를 지배하였듯 카르타고가 망해도 최소한 수세기간 영향을 미치는 법입니다.

   

여기에 사도행전을 보면, 이스라엘과 시리아 지역인 인디옥이 중심이 아닙니까. 헌데, 이스라엘과 시리아가 아닌, 또한 로마도 아닌, 카르타고로 초대교회 주도권이 넘어갔다는 것은 주체가 달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독교가 로마제국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 중 하나는 신 앞에 황제나 노예나 동등하다 하여 하층을 대변했다는 것입니다. 로마 황제들이 속주들 귀족 가문과 정략결혼하면서 제국을 유지하였는데, 로마 황제들이 외가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해서, 온갖 지방종교들이 로마로 유입하였는데, 이중 기독교가, 특히 로마제국과 3차에 걸쳐서 맞짱을 뜬 카르타고 기독교가 가장 경쟁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정치 최고봉은 배갯머리 송사가 아니겠습니까. 로마제국 귀족 여성들이 기독교에 많은 관심이 있었다고 합니다. 형제 부탁을 무시해도 처남 부탁 무시하기 힘듭니다. 하여,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하는데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목사 아들, 니체가 기독교를 약자 종교요, 여자 종교라고 비판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뉘앙스를 뭐라고 해야 하나. 내시 종교다? 이렇게 하면 이해할 수 있을까요?

   

카르타고 기독교 특징은 사도행전에 나타난 대로 기독 신앙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때리면 저항하지 않고 묵묵히 처맞으며 순교를 영광스럽게 여겼습니다. 해서, 아우구스티누스 어머니가 초대교회 기독교가 지니는 숙명론적 매력에 흠뻑 빠졌던 것입니다. 젊은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젊을 때는 누구나가 자유의지론자이니까요. 허나, 지적 방황 끝에 다시 어머니 앞으로 돌아와 쓴 게 '고백록'인 것입니다.

   

숙명론과 자유의지론. 어느 하나가 옳은 것이 아닙니다. 잘 나가면 자유의지론자가 되고, 되는 일 하나 없이 뭘 해도 망하면 숙명론자가 됩니다. 기후가 따뜻하면 인류는 자유의지론으로 흘러가고, 추워지면 반대로 숙명론으로 갑니다.

   

이유는 인류가 인류애를 발휘하는 세 가지 종족 경향 때문입니다.

   

1%는 영웅적인 행위를 합니다. 이들은 어떤 시기이든 능력을 발휘합니다만, 단, 기질 탓에 평화 시대에 능력을 발휘하는 농부형 영웅이 있고, 위기 시대에 능력을 발휘하는 선장형 영웅이 있습니다. 해서, 나라를 세우거나, 종교를 창시할 때나 기업을 만들 때는 선장형이 맡고, 유지할 때는 농부형이 맡는 것입니다.

   

78%는 어느 시대이건 숙명론자들입니다. 인류애 실현하는 방법도 미워하기 뿐입니다. 질투입니다. 그것이 오랫동안 약자 생존 방식이었기 때문이죠. 역사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혁명적이고 개혁적인 군주나 박정희 대통령 같은 사람들이 쪽발이 귀족에게 모함을 받는 것 말입니다. 이것이 흔히 쪽발이 기득권 때문이라고 여기는데요. 아닙니다. 쪽발이 귀족이 78% 숙명론자들 질투 심리를 이용한 것입니다. 박정희는 잘 난 사람이다, 하지만 못난 구석도 있다. 예서, 못난 구석을 음모론적으로 집중 까면 숙명론자들은 내가 못 사는 건 박정희 때문이다, 라고 착각하기 마련인 것입니다. 허나, 이는 그간 국유본 뉴라이트에서 집중 세뇌한 결과이지, 사실은 아닙니다. 가령 뉴라이트는 십수 년 이상 이순신을 죽이고 원균을 살리고자 엄청나게 노력하지 않았습니까. 유홍준 같은 병쉰색희를 동원하여 한국사에 대못질을 하며 역사를 망치지 않았습니까? 허나, 최근 뉴라이트가 변화 조짐이 있습니다. 과거와 달리 반한적이 아니라 친한적인 경향이 있습니다. 이유는 불분명합니다. 데이비드 록펠러가 사망했기 때문일까요? 혹은 인드라 때문일까요^^?

   

문제는 21%입니다. 이들은 영웅도 아니고, 숙명론자도 아닌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고학력 고소득층으로 분류하는 중산층 사십대인 것입니다. 왜 사십대냐. 사회를 주도하는 실무 책임자입니다. 헌데, 경계가 애매합니다. 가령 기업에서 과장을 노동자로 볼 것인가, 경영진으로 볼 것인가 논란이 있지 않습니까? 과장을 중심으로 대리급에서 부장급이 21%인 것입니다. 농수산업, 자영업도 월수입 300만원에서 1000만원 영역에 있는 것입니다.

   

이들 21%가 중도좌파 민족주의자 박정희 대통령 같은 영웅을 이성적으로 요구하면 사회가 진보합니다. 반면 박정희 대통령 같은 영웅을 질투 감정을 선동해서 비난하면 사회는 퇴화합니다.

   

하면, 21%는 왜 시기마다 다른 입장이 되는 건가요? 간단하죠. 영웅은 일자리를 늘려야 합니다. 프랑스 혁명 당시 나폴레옹이 전쟁에서 이겨 국고를 채울 때는 환호했습니다. 허나, 나폴레옹이 전쟁에서 지니까 비난하였습니다.

   

박정희가 지금까지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국유본 황제가 빅터 로스차일드에서 데이비드 록펠러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허나, 지금 다시 박정희가 부활하는 것은 데이비드 록펠러에서 제이 록펠러 시대로 변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서, 국유본도 흐름을 일시적으로 제한할 수는 있지만, 대세를 막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국유본이 지금까지 흥했던 것은 그 흐름을 누구보다 먼저 알고 적극 대처했기 때문입니다.

     

   

      

  휘이씨 자료 

 

 

 

8. 스페인 정벌 이슬람 총사령관 무사는 이슬람으로 개종한 유태인 출신이다

   

다시 무사와 카르타고로 돌아옵니다.

   

"반달족은 로마보다는 카르타고 방식에 따라 통치하려 했다. 반달족의 힘이 해군력에 있었던 만큼 그들은 약 440년에서 480년까지 지중해 서안 지역을 지배했다. 그들은 북아프리카 내지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했는데, 북아프리카 항구들에 대한 이러한 통제방식은 북아프리카 역사를 통해 되풀이되었다. 해안선을 따라 지배하다 보니 다른 정복자들도 항구와 소수의 고립된 내지만을 공략하고 아프리카 내륙 안쪽에 사는 정착민의 문제에는 거의 관심을 쏟지 않았다. 반달족은 많은 재산을 약탈했고, 이러한 경제착취 정책은 북아프리카의 경제력 하락을 가속화시켰다. 이에 대해 베르베르인들도 점차 반항적이 되었다.

   

동로마제국이 비잔틴제국으로 불릴 즈음 북아프리카에는 반달족 대신에 다른 정복자가 들어섰다. 로마제국의 서쪽 지역이 게르만 민족에게 침략을 당하는 동안에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동부에서는 중무장한 페르시아 기병대가 국경을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us) 황제는 530년대에 이탈리아 반도와 로마를 재정복할 목적으로 해군력을 증강시키기 시작했다. 지중해 서안의 해군력 지배를 위해서는 먼저 반달족의 해군력을 제압해야 했다.

   

유스티니아누스 군대의 이탈리아에 대한 마지막 공격은 실패했지만, 북아프리카에 대한 첫 공격은 성공했다. 533년 유스티니아누스의 장군 벨리사리우스(Belisarius)가 반달족을 제압했다. 그 후 1세기 반 동안, 즉 700년 직후에 무슬림에 정복당하기 전까지 마그립의 반달족 통치 지역은 비잔틴 군대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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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달족이 카르타고 방식대로 통치하려고 했는데 실패합니다. 반달족이 물질적인 데만 카르타고를 따라하고, 정신적인 면을 몰랐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베르베르족이 반발한 것입니다. 베르베르족은 무사가 오기 전까지 78%가 기독교로 개종할 정도였습니다. 이후 무사로 인해 베르베르족은 대부분 이슬람교로 개종합니다.

   

하면, 무사가 베르베르족을 설득한 전략이 무엇이었을까요?

   

명분을 주고, 실리를 취하는 것입니다.

   

대개 출생부터 귀족인 이들이란 명분을 중시하는 반면 졸부 귀족들은 실리를 택하는 편입니다.

   

무아위야는 무사 아버지가 전략을 제시했다 하여 무사 아버지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려 했습니다. 총사령관 자리는 전공에 따라 황제 자리도 넘볼 수 있는 자리인 것입니다. 이런 자리를 선뜻 주겠다고 한 것은 무아위야가 보통 인물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알 왈리드가 무사를 북아프리카 정벌 총사령관으로 임명한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무사가 알 왈리드에게 충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무사는 말년에 비극적인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만.

   

다시 말해, 이슬람 우마이야는 알 왈리드까지 졸부 실리 노선을 택해서 흥했던 것입니다. 허나, 그 이후 귀족 명분 노선을 택하니 망한 것입니다.

   

유태인 디아스포라 역사를 보면 흥미로운 것이 권력과 유태인이 협력할 때는 권력이 졸부 실리 노선을 택할 때입니다. 반대로 권력과 유태인이 반목할 때는 권력이 귀족 명분 노선을 택할 때인 것입니다.

   

무사는 명분을 주어 베르베르족 마음을 얻었습니다. 그 결과로 타리크 이븐 지야드를 얻습니다. 무사가 유비라면 타리크는 관우였던 것입니다.    

 

무사는 왜 북아프리카 정복에 그치지 않고 스페인 정벌에 나섰던 것일까요?

   

서고트왕국(비시고도) 마지막 왕 로데릭이 어느 날 어여쁜 아가씨가 강가에서 목욕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데려와 강간합니다. 강간이지만, 왕 은혜를 입었으니 영광이기도 합니다. 이 아가씨 아버지가 줄리안이란 귀족인데, 세우타 총독이었다고 합니다. 헌데, 그 딸이 왕궁 근처에서 목욕을 한다? 우연일 수도 있고, 설정일 수도 있겠습니다. 중요한 건, 로데릭이 줄리안 딸만 취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우연이든, 설정이든, 출세 기회를 놓친 줄리안 입장에서는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억울한 마음이나 힘이 없으니 무사에게 청원한 것이 스페인 정복 출발점인 겁니다.

   

헌데, 여기서 인드라는 무사가 치밀한 성격 소유자라고 보고 소설 상상력을 발휘합니다. 줄리안이 딸이 푸대접받는다고 무사한테 와서 토로할 정도면 무사와 줄리안 사이에 이전부터 교류가 있던지, 교류가 없더라도 무사 명망으로 줄리안이 접견을 요청했을 것입니다. 인드라는 전자라고 봅니다.

   

무사는 아버지 뜻을 실현하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더 나아가 자신이 만든 왕국을 꿈꾼 것 같습니다. 스페인 정벌은 무사 기획이지, 알 왈리드 칼리프 기획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스페인 정벌할 때 알 왈리드는 공이 크니 돌아오라고 하지만, 무사는 이를 무시하고 스페인 정복을 완료한 뒤에야 수도인 시리아 다마스커스로 돌아갑니다.

   

무사는 밀정을 풀어 스페인을 탐색하였고 지역 귀족들에게 선무공작을 했던 것입니다. 무사가 베르베르족을 설득하여 북아프리카를 장악한 전략인 것입니다. 불만사항을 접수하고 이를 명분으로 정벌하고 하층 지지를 이끌어낸다는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무사 진격로와 베르베르족 타리크 진격로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 차이란 무엇일까요? 명분이 필요한 곳에는 무사가 진격했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루시타니아 지역인 것입니다.

        

 

   

9. 이슬람 스페인 정벌 때 적극 환영하던 유태인은 시리아 이주 유태인이 아니라 스페인에서 자생한 유태인, 즉 카르타고 유태인이다 

   

스페인에 유태인이 많은 이유에 대해 인드라는 카르타고인이 개종한 결과다, 라고 말합니다. 허나, 정설이 아니지요. 정설이란 스페인에서 유태인이 많은 이유가 불분명하지만, 이슬람이 스페인 정벌하면서 중동 유태인이 많이 끌고 온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있습니다. 과거 인드라 이웃인 안박사님이 문제제기했던 대목이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 인드라가 다시 정리합니다.

   

첫째, 승자 기록인 역사가 왜 이탈리아 르네쌍스론을 강조할까요? 이슬람 문명이었던 스페인 역사를 지우거나 최소화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이슬람 왕국 수도였던 스페인 코르도바는 당대 인구 오십만 명을 자랑할 정도 도시였습니다. 잘 나가던 이태리 베네치아 도시 16세기 인구가 고작 이십 만이었습니다. 유럽 대도시가 이 정도이니 그 외 도시들이란 수 만 명 수준이고, 수천 명이면 큰 마을이었고, 수 백 명이면 요새였던 것입니다.

   

해서, 기독교 승자 기록 입장에서 이슬람 스페인 정벌에 스페인 내부에서 적극 호응했다 하면 문제가 있지 않겠습니까. 허나, 실제 역사 기록으로는 무사 정벌에 스페인 유태인들이 적극 호응하였으며, 루시타니아에서 반발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둘째, 무사가 유태인이니 숨은 유태인들을 스페인으로 초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실례도 있습니다. 무사가 사돈팔촌 집안사람들을 스페인으로 불러들인 정황이 있으니까요. 허나, 무사는 개종한 이슬람입니다. 기껏해야 집안사람들인 겁니다.

   

더군다나 유태인이 팔레스틴에서 거주하기 힘들다하지만, 바빌론이 있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유태인은 7세기에 바빌론에서 예루살렘 탈무드보다 방대한 바빌론 탈무드를 완성시킵니다. 가까운 곳을 두고 굳이 멀리 스페인까지 가는 이들이 있더라도 극소수라는 것입니다. 가더라도 비잔틴도 아니고, 이슬람도 아닌 카자르왕국이 있던 중앙아시아로 갈 것입니다.

   

게다가 당대 유태인이 시리아를 비롯한 중동에서 스페인으로 이주했다는 실증 자료도 없습니다.

   

   

셋째, 무사가 총사령관이니 권력 때문에 순식간에 스페인에 유태인 씨를 퍼트릴 수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닙니다. 무사는 스페인을 정복한 후 엄청난 전리품과 함께 다마스커스로 돌아갔는데, 분위기가 냉담했습니다. 이유는 무사가 지지했던 황제인 알 왈리드가 병석에 있었던 반면, 차기를 노리던 황제 동생이 실권을 장악했기 때문입니다.

   

무사 공적이라면 대대적인 퍼레이드를 해주어야 합니다. 허나, 황제 동생이 무사에게 공적을 자신에게 돌려라라고 제안했는데, 무사는 거절하였습니다. 무사가 보기에 황제 동생 제안이란 사탕발림이었다고 본 것 같습니다. 무사 생각은 옳았습니다. 황제 동생은 황제감이 아니어서 그가 황제에 오르자 우마이야 왕조가 급격히 망하는 길로 가니까요.

   

알 왈리드 황제가 죽고 황제 동생이 황제에 오릅니다. 황제는 무사를 지위에서 박탈합니다. 무사는 울분에 사로잡혀 지냅니다. 예서, 황제가 그쳤을까요? 스페인 총독이던 무사 아들을 암살하고 무사를 조롱합니다. 710년에 시작한 스페인 원정, 불과 수 년 만에 무사 가문이 몰락한 것입니다.

   

또한, 무사가 유태인 확산을 노렸다면, 본심이 여전히 유대교였다면, 무사 아들을 기독교왕국 공주와 결혼시키지 않았을 것입니다. 무사 방식은 유대교에 따른 것이 아니라 점령지 총사령관 작전 지침에 따른 것입니다.

   

정리하면, 무사는 스페인 정벌 때 3개 세력에 의존했던 것입니다.

   

하나, 이슬람 아랍 세력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알 왈리드 황제 세력입니다. 허나, 이교도 출신 우대정책에 불만이 있던 차기 황제가 집권하자 끈 떨어진 실처럼 몰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617년 알 왈리드 동생 황제 시절, 반기독교 친유대 정책에서 친기독교 반유대 정책이 나온 배경이 무사 가문에 대한 적개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둘, 베르베르족입니다. 단 7,000명을 이끌고 타리크 스페인 정복 사령관은 스페인을 정복합니다. 이는 삼십만 명으로 칠백만 명 스페인을 정복한 서고트족보다 더 한 전과인 것입니다. 스페인 정복 이후에도 군사력을 베르베르족에게 의존하였습니다.

   

셋, 카르타고 유태인입니다. 정복 후 행정문제에 카르타고 유태인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행정관, 세금 징수관 등 주요 직책을 맡았습니다. 또한, 정복 과정에서 심하게 황폐화한 지역에는 카르타고 유태인을 집단으로 이주시키기도 했습니다.  

 

 

      

인드라는 정치를 하지 않겠으며,

책을 더 이상 쓰지 않으며,

언론에 기고하지도 인터뷰를 하지도 않을 것이며,

종교단체를 만들지도 않을 것입니다.

국유본론을 소명으로 여기고

지금처럼 살다

행복하게 가겠습니다

매일매일 행복하겠습니다

마.자.세.

한반도 평화와 통일, 경제 발전과 사회 복지를 위하여

친미친중 반일반북 쪽발정은 척살로 조국통일 쟁취하자

쪽발민주당 해체 쪽발석현 아웃

쪽발재벌 타도 골룸빡 처단

쪽발이에게 죽음을 쪽발왕에게 천벌을

쪽발타도해방투쟁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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