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흐만 1세 동맹 외교와 유태인 인맥 : 국제유태자본이 세계 이성적 존재이다,라는 명분을 주고, 한반도 통일이라는 실리를 요구하자 국유본론 2012

2012/11/01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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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흐만 1세 동맹 외교와 유태인 인맥;

국제유태자본이 세계 이성적 존재이다,라는 명분을 주고,

한반도 통일이라는 실리를 요구하자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2/11/01

 

   

10. 스페인 우마이야 왕조를 세운 라흐만 1세

   

무사와 함께 한 베르베르족 타리크는 어찌 되었을까요. 타리크 역시 주군 무사를 따라 다마스커스로 갔습니다. 허나, 황제 계승권을 둘러싼 내분 때문에 720년 공금휭령죄로 고발을 당한 뒤 아무도 모르게 쓸쓸하게 죽었습니다. 인재를 헛되이 낭비하니 우마이야 왕조가 기울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병쉰들이 칼리프로 집권하여 삼십여 년 허송세월 보낸 뒤 우마미야 왕조가 붕괴하고 아바스 왕조가 들어섭니다.

   

시리아 다마스커스를 수도로 하던 우마이야 왕조는 아랍인 무슬림이 중심이어서 같은 무슬림이어도 아랍인 우대였습니다. 허나, 수도를 바그다드로 옮긴 아바스 왕조는 지배층에 비아랍인인 이란인 등이 주도하여 무슬림 사이에 있던 차이를 없앱니다. 해서, 민심을 얻은 이슬람 제국은 아랍은 물론 이란과 중앙아시아 영역까지 확산하니 이슬람이 가하는 혹독한 종교 탄압에 이란 조로아스터교도들이 인도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바스 왕조는 우마이야 가문 씨를 말렸습니다. 허나,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가 있었습니다.

   

'자비로운 자'란 의미인 아브드 알 라흐만.

   

또는 압둘 라흐만은 19세 나이로 아바스 왕조 포위망을 뚫고 팔레스틴과 이집트를 경유하여 북아프리카에 도달합니다. 압둘 라흐만 어머니가 베르베르족이었으니 고향과 같았습니다. 예서, 라흐만 1세는 무사처럼 스페인에 밀정을 보내 상황을 살핀 뒤 베르베르족 군사력을 모아 스페인을 도모합니다.

   

"756년 5월 15일, 아브드 알-라흐만 1세는 당당하게 코르도바의 우마이야 아미르(이슬람에서 귀족이나 사령관 등의 우두머리를 가리키는 칭호-옮긴이)이자 무슬림 스페인의 지배자임을 선포했다. 이 사건은 무슬림 세계의 정치적 단합이 무너졌음을 알린다. 632년 예언자 무함마드가 죽은 이후부터, 모든 무슬림은 칼리프라는 지위가 최고의 종교적·정치적 권위를 행사하는 단일 국가 안에 통합되어 있었다.

   

무함마드 사후 2년 만에 칼리프의 영토는 놀라울 정도로 확장하기 시작했고, 8세기 즈음에는 인더스 강에서 피레네 산맥까지 이르는 광대한 제국이 되었다. 그러나 칼리프 제국은 수니파와 시아파의 분열과 아랍인과 이슬람으로 개종한 비아랍인 사이의 갈등에 시달렸다. 750년, 661년 이래로 칼리프 제국을 다스려 왔던 우마이야 왕조는 아바스 왕조에게 전복 당했다.

   

우마이야 가문 사람을 하나도 남김없이 처단하려는 아바스 가문의 끈질긴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브드 알-라흐만은 탈출에 성공해 변장을 하고 스페인으로 빠져나갔다. 스페인은 페르시아와 메소포타미아에 있는 아바스 세력 중심지로부터 무척 멀었기 때문에 아브드 알-라흐만이 그곳에 닿았던 755년에는 아직 사실상의 지배가 확립되지 못한 상태였다. 스페인에는 우마이야 왕조 동조자들이 많았고, 그들은 아바스 가문 출신의 인기 없던 총독 유수프에 대항할 수 있는 이 기회를 반가이 맞았다.

   

756년 5월 14일, 아브드 알-라흐만은 코르도바 부근의 카르모나에서 유수프의 군대를 물리쳤고, 다음 날 도시로 들어갔다. 아브드 알-라흐만은 우마이야 왕조가 칼리프 자리에 복위하기를 바랐지만, 아바스 왕조가 보낸 이들이 반란을 조장하는 바람에 재위 기간 거의 대부분을 스페인에 묶여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가 사망한 788년 즈음, 아바스 왕조가 북아프리카의 지배권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던 반면, 스페인에 대한 우마이야의 지배력은 공고했다.

   

"승리가 우리 것이 될 수 없다면 군인처럼 쓰러지기로 맹세하자. 정복하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다!"

   

카르모나 전투를 앞두고 아브드 알-라흐만이 남긴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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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라흐만 1세 동맹 외교와 유태인 인맥

   

768년, 외교사에 흥미로운 동맹이 성립하였습니다.

   

라흐만 1세 우마이야 왕조와 비잔틴 제국, 롬바르디아 왕국이 동맹을 맺고,

샤를 마뉴 프랑크 왕국과 로마 교황과 아바스 왕조가 동맹을 맺습니다.

   

기독교/이슬람 혼성 동맹이요, 게르만, 로마인, 이슬람인 혼합 동맹인 것입니다.

   

게르만 일족인 롬바드족이 이탈리아 북부 정착하여 롬바드리아 왕국을 세우고 호시탐탐 로마를 노렸습니다. 이에 로마 교황이 프랑크 왕국에 지원을 요청합니다. 또한, 프랑크 왕국과 우마이야 왕조는 프랑스 남부에서 패권을 다투고 있었습니다. 아바스 왕조가 비잔틴 제국과 대치하며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바스 왕조는 우마이야 왕조를 무너뜨리고자 합니다. 라흐만 1세는 동맹을 맺어 북에서 프랑크 왕국, 남에서 아바스 왕조가 압박하는 난국을 돌파해야 했습니다. 반대로 프랑크 왕국은 우마이야 왕조를 남북으로 공략하자는 전략이었습니다. 롬바드리아 왕국 역시 북 프랑크 왕국, 남 로마 국면을 유리하게 끌고 가고자 하였습니다. 로마 교황은 교황령을 지킬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아바스 왕조와 협력하여 무슬림을 위해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비잔틴 제국은 스페인 우마이야 왕조 존재로 프랑크 왕국과 아바스 왕조가 비잔틴 제국 전력 분산으로 위협을 반감시킨다고 본 것입니다.

   

허나, 상황은 라흐만 1세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롬바드리아 왕국이 롬바드 전쟁에서 프랑크왕국에 패해 멸망하였습니다. 778년, 샤를마뉴가 비록 실패했지만, 우마이야 왕조를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아바스 왕조가 이베리아 총독 자리를 빌미로 충동질하니 내부에서도 총독들이 연이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또한, 토지를 잃을까 우려한 서고트족 귀족 중 일부가 이슬람으로 개종하였는데, 이들 역시 후일을 도모하기 위함이어서 반란 대열에 섰습니다.

   

라흐만 1세는 내우외환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이때, 권력을 차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풋내기 라흐만 1세가 유럽을 아우르는 동맹체제를 결성한 힘은 어디서 올까요?

   

   

유태인 인맥입니다.

   

   

하나, 카르타고 유태인 인맥이 라흐만 1세 외교를 지원합니다.

   

유태인은 세 가지 형태로 스페인에 존재했습니다.

   

하나는 유태인을 고수한 유태인입니다.

   

오늘날에도 유태인이 세 부류로 나눠진다 합니다. 일, 정통 유태인입니다. 선민 의식으로 종교적 엄숙성으로 산다 합니다. 이, 자유 유태인입니다. 종교 교리에 얽매이지 않되 유태인 정체성만 유지합니다. 삼, 개인 유태인으로 부모가 유태인이어도 유태인임을 부정합니다. 이는 유태인만 그러하지 않고 세상 모든 일이 이와 유사하다 할 것입니다.

   

라흐만 1세까지만 해도 카르타고 유태인이 대다수였을 겁니다. 이들은 과거 카르타고 식민지였던 도시들인 카디스나 카르타헤나 등 항구도시를 중심으로 해오던 무역 일을 꾸준히 해왔을 것입니다.

   

허나, 라흐만 3세부터 시리아와 바빌론에서 이슬람 강제 개종이 극심해지자 일부가 중앙아시아로, 다른 일부는 스페인으로 왔을 것입니다. 아랍인도 라흐만 3세 시대를 포함하여 스페인 유입 인구가 모두 합하여 기껏해야 육만 명이라고 합니다. 해서, 유태인 유입 인구 역시 많아야 최대 오 만명 이하로 추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보통 이 시기에 중동에서 인구가 줄면 유럽으로 이주했다고 생각합니다만, 상기한 인구 변화를 보면 알겠지만, 로마제국 후반기부터 천 년까지 북아프리카 중동 지역에서 모두 인구가 감소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막화입니다. 전쟁으로 인구 감소한 요인도 없지 않겠지만, 이 시기에는 중국에서도 인구가 감소하여 당송 시대에 가서야 회복합니다. 한국 역시도 삼국시대에 3국 모두 인구가 감소하던 시기가 있습니다. 이 모두 기후와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한편에서는 혹한이 진행되고, 다른 편에서는 사막화가 진행된 것입니다. 기후 이상에 따른 홍역, 천연두와 같은 전염병도 있습니다다. 흑사병도 중세온난기가 끝나면서 출현하였듯이 전염병도 로마 온난기가 끝나가면서 나타난 양상입니다. 해서, 유라시아 유목민 이동이 있었고, 가뭄 등이 이어지니 민심이 흉흉해져서 전쟁이 끊이질 않았던 것입니다. 해서, 엄혹한 시기였기에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한 배경이 되었던 것입니다. 해서, 중동에서 이슬람과 비잔틴이 탄압을 많이 해서 이주민이 많았을 것이다,라고 보기 보다는 대다수가 그 지역에서 죽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이주라고 해도 유태인이 아니더라도 중산층 이상 부자만 가능했습니다. 특히 유태인이 새로운 땅에 정착하려면 오늘날 투자이민처럼 많은 지참금을 내야 했고, 무일푼이면 노예나 다름없었습니다.  

   

"스페인에 처음으로 탈무드 교육기관인 예쉬바를 설립한 것은 바벨론에서 파송되어온 모세 벤 에녹이었다. 이 스페인의 첫 예쉬바는 주후 950년 코르도바에 세워졌다. 그러나 스페인의 유대인 디아스포라에서 탈무드 전승이 본격적으로 연구되어지고 소개되기 시작한 것은 북아프리카의 페스에서 왔다고 하여 알파시(주후 1013-1103년)라고도 불리는 페스의 이삭을 통해서였다. 프랑스에서 라쉬(주후 1040-1105년)가 그 유명한 주석을 준비하고 있을 때, 루세나(Lucena) 예쉬바 원장이었던 이삭 알파시는 스페인에서 탈무드에 관한 책을 쓰고 있었다. 라쉬가 탈무드의 전체 내용을 쉽고 분명하게 풀어 설명한데 반하여, 알파시는 탈무드의 법 부분에만 관심이 있었다. 라쉬와 그의 후계자들이 연구를 강조한 반면, 알파시와 그의 후계자들은 법의 실질적인 준수에 중점을 두었다.

   

스페인의 유대인들은 무슬림들의 문학적 관심과 연구 열기에 자극을 받아 나름대로 히브리어 시작(詩作)에도 관심을 쏟기 시작하였다. 주후 11-12세기에 스페인에서 활동했던 유명한 시인으로서는 솔로몬 이븐 가비롤(주후 1021-1069년), 모세 벤 에스라(주후 1080-1139년), 유다 하레비(주후 1086-1145년) 등을 들 수 있다. 앞의 두 사람은 대체로 종교적 색체가 나는 서정시를 즐겨 썼는데, 그들중 많은 구절이 스파라딤(스페인에 살았던 유대인들과 그 후손들을 일컫는 말)의 기도서 속에 포함되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말라가 태생의 솔로몬 이븐 가비롤은 철학자로도 유명한데, 그가 남긴 철학서중 잘 알려진 것으로는 '생명의 샘'을 들 수 있다. 하나님과 우주에 대한 가비롤의 사상을 잘 보여주는 이 작은 책자는 후에 라틴어로 번역되어 기독교인들 사이에도 많이 읽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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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세기 경 뒤늦게 스페인으로 이주한 유태인들은 이전 유태인보다 유태인 정체성에 더 많은 관심이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미국 유태인을 보면 뒤늦게 이주한 동유럽 유태인들이 더 율법에 민감하다고 합니다. 남미나 이스라엘도 정통 유태인을 보면 비슷한 사정이라고 합니다.

   

헌데, 카르타고 유태인들은 탈무드에 상대적으로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탈무드란 모세 5경 토라를 랍비들이 정리한 것인데, 카르타고 유태인들은 그간 자신들이 지켜온 율법과 독자적인 구약 해석을 중심으로 탈무드를 재해석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런 까닭에 스페인에서 신학이 보다 풍부해지면서 르네상스를 잉태한 것으로 봅니다. 이 시기 스페인에서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가 함께 있어서 논쟁하는 일이 많았다고 하는데, 이슬람 신학자가 말하길, 유대교는 무신론이나 다름없다고 했는데요. 이는 후일 스페인에서 이집트로 정착한 마이모니데스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유태인이었으나 그 자신은 이슬람이었습니다. 이는 당시 사정과 연관이 있지만, 아무튼 이집트에 와서 다시 유태인이 되었는데요. 이 사람 주장이 계시적이고 신비주의적 면을 부정하고 유대교란 율법에 정당성을 주는 것이라 하여 근대로 치면 철학 주장을 한 것입니다. 이는 정통 유태인에게는 충격적인 발언일 수 있는데요. 그래서인지 이 시기에 철학적 유대교와 대비하여 조하르라고 해서 유대교 카발라 신비주의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건 오늘날 유태인 핵심인 카르타고 유태인은 탈무드보다 회계 장부 기록을 더 신뢰했다고 인드라는 보고 있습니다. 록펠러 1세도 회게 장부를 성경과 거의 동급으로 취급하더군요^^!

   

유태인이 유태인을 고수하는 건 단지 명분만 아닙니다. 실리도 있었습니다.

   

   

로마 제국에서는 조세 징수에서 신전 건립까지 상당 부분을 퍼블리카니(publicani)라는 주식회사 조직에 맡겼습니다. 신전 건립과 같은 공공사업에 로마 제국은 우선 모아둔 세금으로 대금을 지불한 뒤 퍼블리카니를 통해 자금을 충당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오늘날 국세청이 하는 일을 퍼블리카니가 한 것인데요. 당대 세금 징수라는 것이 오늘날 불량 대부업체가 하는 조폭 동원한 채권 추심처럼 만만치 않은 일이었습니다. 인민으로부터 많은 불만이 있겠습니다. 그럼에도 로마시대에서는 수익이 굉장해서 유태인에게 맡기지 않았는데요.

   

이자를 죄악시하는 카톨릭과 이슬람 교리와 맞지 않아 퍼블리카니로 운영되지 않았겠지만, 우마이야 왕조에서는 로마 귀족이나 할 수 있는 일을 유태인이 맡으며 담당하며 명맥을 유지한 것 같습니다. 라흐만 1세로서는 욕이나 바가지로 먹으면서도 복잡하고 귀찮은 일을 유태인이 대신 해주니 좋고, 유태인은 돈을 벌어서 좋았던 것입니다.

   

   

둘, 무슬림으로 개종한 유태인입니다.

   

   

"이슬람교도들은 그들이 점령한 지역 내에 사는 유대인들과 기독교도들이 반드시 따라야만 하는 법전을 제정하였는데, 그것은 보통 '오마르의 협약'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 협약의 목적은 이슬람 외 다른 종교(특별히 기독교)의 신도들은 이슬람보다 열등하다는 점을 확실히 해두는 것이었다. 그들은 구성원중 하나가 이슬람에 가입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고, 무거운 세금에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 수리는 허용하였으나 새 교회 또는 회당을 지을 수 없었고, 교회나 회당의 탑이 근처 이슬람 사원보다 높아서는 안됐다. 이슬람 외 다른 종교의 신도들은 말을 타지 못했고, 노새는 허용되었다. 비이슬람 교도는 칼을 차고 다닐 수 없었으며, 이슬람교도와 쉽게 구분되는 복장을 착용하여야 했다. 비록 이러한 오마르의 협약이 무어인 통치하의 스페인에서도 유효하긴 하였지만, 엄정하게 실시되지는 않았다. 따라서 무슬림 무어인들의 통치와 더불어 유대인들은 한 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위장 개종했던 자들이 다시 유대교로 돌아왔으며, 북아프리카나 프로방스 지방 등지로 도망했던 유대인들도 귀환하였다.

   

무슬림 무어인들은 피지배 민족에 대하여 이슬람으로의 개종은 시도하였으나 박해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개종보다는 인두세 받는 일을 더 크게 여겼다. 따라서 비이슬람 교도에 대한 규제 사항들도 점차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이슬람 스페인은 이제 서서히 경제, 철학, 과학 등 여러 분야에서 꽃을 피우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매력적인 분위기 때문에 바벨론과 페르시아내 유대인 공동체의 많은 구성원들도 스페인으로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한편 주후 10세기를 전후하여 바벨론의 어려웠던 정치 경제 상황도 바벨론내 유대인들의 이주를 부채질하였다. 그들 중 많은 유대인들이 찾아나선 새로운 삶의 터전이 바로 스페인과 남부 이탈리아 같은 곳이었다. 이제 이베리아 반도는 앞으로 대략 500년 동안 전 세계 유대인 역사의 중심장이 될 기반을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스페인내 우마야드 왕조의 첫 칼리프인 압드 알라만 1세(주후 756-788년)의 통치는 주후 756년에 안달루시아(Andalusia) 지방의 코르도바에서 시작하였다. 무어인이 점령한 스페인에 기독교인들과 서고트족의 인구 비율이 큰 점을 감안 우마야드 왕조는 관용정책을 취하였다. 더 이상 바그다드에 의존하지 않고 완전히 독립하게 된 우마야드 왕조의 통치기에 스페인은 바야흐르 문화적 번영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특별히 유대인들은 압드 알라만 3세(주후 912-961년)의 통치 때 유대인 문화의 부흥기를 맞이하였다. 우마야드 왕조는 스페인에서 약 250년을 통치한 후 주후 11세기 초엽부터 기울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오랜 내전이 발발하였는데, 주후 1031년 우마야드 왕조의 마지막 칼리프가 궁중의 유혈 혁명에 의하여 폐위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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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가 개종한 유태인이었기에 무사 친지들과 부하들만 따져도 모두 이슬람으로 개종하였을 것입니다. 유태인 중에도 무슬림이 되는 이들이 꽤 있었습니다. 최상층 지배층이 아닐지라도 지배층으로 살 수 있었습니다. 오마르 협약으로 구성원 중 한 명은 무슬림이 되어야 했습니다. 또한, 북아프리카와 이집트 등과 무역하려면 이슬람 개종하는 것이 여러모로 이익이었습니다. 겉만 무슬림이면 되니까 말입니다.

   

   

셋, 카톨릭 교도이지만 아랍화한 모사라베

   

"589년 레카레드(Reccared)가 왕위에 오르자, 그는 로마 가톨릭으로 전향하고 교회 감독들과 힘을 합하여 타종교도들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유대인들은 가톨릭으로 개종하든지 아니면 나라를 떠나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하여야 했다. 그리하여 유대인들 중 일부는 북아프리카나 프랑스 남부의 프로방스 지방 등지로 도망하였고, 어떤 이들은 외면상 기독교로 개종하고는 비밀리에 유대교 의식을 준수하는 쪽을 택하였는가 하면, 일부는 스페인 내 강력한 귀족에 기대어 보호를 받고자 하였다. 주후 7세기는 스페인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생존을 위한 투쟁의 시기였다. 주후 700년경에는 유대교 의식을 행하는 것이 발견되면 노예로 팔리고 그 자녀들은 기독교 사제들에게 맡겨서 양육하도록 하는 명령이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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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많은 카르타고 유태인이 프랑스나 이태리, 북아프리카로 갑니다. 하고, 그들 중 일부는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오나, 프랑스와 이태리로 간 카르타고 유태인 중 일부가 프랑스, 이태리에 남아서 이들이 오늘날 아쉬케나지 유태인 원조가 되는 것입니다.

   

모사라베는 대부분 카톨릭을 믿지만 아랍화한 카르타고 유태인 출신입니다. 이들 언어가 라틴어족에 기반하니 오랫동안 스페인에서 산 사람들인 것입니다. 헌데, 유태인처럼 특별세를 더 내면서 부유할 수 있는 족속이 흔치 않았습니다. 대부분이 유태인인 것입니다. 일부는 유태인으로 커밍아웃하지만, 일부는 라흐만 왕조가 얼마나 갈 것인지 가늠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면, 모사라베는 무엇으로 돈을 벌었을까요? 무역으로 벌었습니다. 종교와 국적이 달라도 각국은 공식적, 비공식적 무역을 해야 했습니다. 그 무역을 담당하려면 각국 언어를 잘 알아야 할 것입니다. 적임자는 모사라베인 것입니다. 아랍어도 알고, 로만어도 아니 비잔틴 제국과 이베리아 카톨릭 왕국과 무역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유태인 인맥은 모사라베를 통해 카톨릭 국가들과 교역을 할 수 있고, 무슬림 유태인을 통해 북아프리카 국가들과 무역을 하고, 스페인에서는 유태인 이름으로 세금을 징수하며 지중해 네트워크를 만든 것입니다.

   

해서, 라흐만 1세가 유태인 인맥으로 외교 동맹을 구축할 수 있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12. 라흐만 3세와  궁전 유태인 하스다이 이븐 샤프루트

   

라흐만 1세 목표는 우마이야 왕조를 부강한 국가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 목표는 라흐만 3세에 이르러서야 결실을 맺습니다.

   

북아프리카와 이집트, 비잔틴, 유럽을 연결하는 서지중해 패권을 장악하면서 수도인 코르도바가 인구가 오십만 명(삼십만 명설에서 백만 명설까지 있습니다)에 이를 정도로 우마이야 왕조 경제는 절정에 이릅니다. 당시 유럽 주요 몇몇 대도시 인구는 기껏해야 십 만 정도였으며, 그 외는 2~3만 명이 고작이었습니다.

   

대외적인 변화가 있었습니다. 이집트를 중심으로 한 파티마 왕조가 등장하면서 이슬람 제국이 아바스, 파티마, 우마이야로 삼분하니 아바스 왕조 영향력이 쇠퇴합니다. 이에 한결 여유를 찾은 라흐만 3세는 칼리프를 칭하니 칼리프가 세 명인 시대가 된 것입니다.

   

또한, 유럽에서는 오토대제가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됩니다. 중앙아시아 유목민 약탈경제 풍습에 따라 프랑크왕국 샤를마뉴가 땅을 셋으로 균등 분할하여 아들들에게 나누어줍니다. 그처럼 오토대제가 유럽을 일통하여 봉건제가 유럽에서 정착되기 전까지 땅을 둘러싼 내부 다툼에 치중하여 외부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던 것입니다.

   

헌데, 오토대제가 독일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세력을 확장하면서 프랑스 남부까지 도모하니 샤를마뉴와 달리 우마이야 왕조까지 장악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적의 적은 친구라는 오랜 정치적 격언처럼 이베리아 카톨릭 왕국들을 변경백으로 삼으면서 우마이야 왕조와 카톨릭 왕국들 대립을 이용하여, 카톨릭 왕국들을 통제하여 서부 전선을 안정화시키고 로마에 집중하는 것이 상책이었던 것입니다.

   

해서, 라흐만 3세는 전투에서 숱하게 패배하고도 이베리아 기독교왕국들 외부 지원이 없으니 별 타격을 입지 않았던 것입니다. 또한, 북아프리카도 비슷한 사정이니 안정적인 국정 운영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즉위한 912년 이후 불과 2년이 지난 뒤에, 오르도뇨(Ordono) 2세가 수도를 레온으로 옮기고 레온 왕조를 창건하면서 다시금 이슬람의 (이베리아에서의) 축출을 천명했다. 이슬람 성립 초기에 기독교와 이슬람이 친했다고해도 이제 그것은 옛 말이 되었던 것이다.

   

오르도뇨 2세는 군을 이끌고 메리다 산맥의 종곡(縱谷)인 메리다를 포위하고 바다호스 주민들을 포섭했다. 이 곳들은 현재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의 남동쪽 국경지대에 위치한 도시들로 이 곳에서 시에라모레나(Sierra Morrena)산맥만 넘으면 바로 코르도바였다.

   

한 때 스페인 통일 직전까지 갔던 이슬람 세력이 이제 본거지가 위태로운 지경에 다다른 것이다. 나라의 위기였다! 알 라흐만 3세는 일단 군을 보냈지만 그들은 산 에스테반(San Esteban)에서 모조리 격퇴당했다. 아랍군의 목이 돼지 목과 함께 주렁주렁 매달렸다. 이런 불안한 정세가 10년 가까이 지속되었다. 서유럽은 이베리아에서 이슬람이 축출당해가는 것을 기쁨을 자제하면서 즐겁게 지켜보고 있었다.

   

오르도뇨 2세 사후 라미로(Ramiro)2세가 즉위할 즈음에 알 라흐만 3세는 조금씩 기독교 세력을 북쪽으로 축출하기 시작했다. 924년 벌어진 나바라(Navarra)왕국의 수도 팜플로나(Pamplona)에서 벌어진 격전은 그 절정이었다. 마드리드와 오스마 부르고스(Bur gos)에서는 피 말리는 격전이 벌어졌고 장기전에 돌입하자 재정적으로 유리한 후 우마이야 군대가 끝내 승리했다.

   

기독교 세력은 결국 다시 레온으로 철수했고, 스페인의 주도권은 (오랫만에) 이슬람 세력으로 돌아왔다. 서유럽은 씁쓸했다. 이어 알 라흐만 3세는 사라센의 특권 귀족들을 제압해 왕권을 강화하면서 또한 파티마 왕조 세력 또한 견제했다. 레온 왕조와도 '뚱보 산초' 왕자를 내쫓겨날 뻔한 것을 감금 작전으로 살을 빼 준 뒤(;;)군을 이끌게 해주어 왕위를 얻게 해주는 작전으로 화평을 이룩했다.

   

마침내 929년, 그는 스스로 칼리프임을 선언했다. 아미르 알 무니닌(amīr al-mu'minīn :: 신도의 우두머리)이 된 것이다. 이리하여 (삼국지에서 흔히 쓰이는) 삼국정립, 아니 칼리프 정립 시대가 도래했다. 하지만 그의 정복 사업은 끝나지 않았다. 아직 카스티야 왕국이 남아있었다.

   

그는 932년 안달루시아(Andalucía)일대를 확보하여 경제적인 우위를 확고히 하면서, 사이가 좋아진 레온 왕국을 이용해 카스티야 왕국을 견제했다. 비록 936년에 알 안데가에서 격파되었지만, 사실 큰 피해도 오지 않아서 카스티야 역시 꿈을 접을 수 밖에 없었다."

http://gall.dcinside.com/list.php?id=h ··· %3D72846

   

   

라흐만 3세에게는 유능한 외교관인 하스다이 이븐 샤프루트가 있었습닌다.

   

"하스다이 이븐 샤프루트(주후 약915-970년)는 의사로서 심지어는 우마야드 왕조의 칼리프를 치료하기도 하였다. 헬라어 고전들을 번역하기도 한 그는 또한 비공식적으로 칼리프(압드 알라만 3세)를 위한 외교 분야 자문역을 맡기도 하였다. 코르도바 항구의 세관 총감독 일도 그의 차지였다. 그는 이름만 없다뿐이지 사실상 외무대신 일을 전담하다시피 하였다. 압드 알라만 3세가 죽은 후에도 (주후 961년) 그의 아들 하캄 2세는 하스다이를 유임시키고 그가 죽기까지 궁중에서 일을 돕도록 하였다.

   

하스다이는 동족에게도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각국에서 사절단이 올 때마다 그는 그 나라들에 사는 유대인들의 상황을 묻곤 하였다.

   

바벨론 수라의 예쉬바가 기울고 있을 때 네 명의 유명한 학자들이 기금을 모으고자 바벨론을 떠나 다른 유대인 공동체들로 향하였다 (주후 972년). 모세 벤 에녹은 이들중 한 사람이었는데, 그는 스페인 안달루시아 해적들에게 잡혀서 숱한 역경을 겪은 후 결국은 코르도바에게 노예로 팔려갔는데 그곳의 유대인 공동체에 의하여 속량되어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는 해박한 탈무드 지식이 알려져서, 하스다이의 도움을 받아 세운 예쉬바의 원장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함께 온 아들과 더불어 스페인 디아스포라에 바벨론의 탈무드 연구 방법을 전수해 주었다."

http://blog.yahoo.com/_tmn2c4cz5ua73vm ··· 2F131293

   

   

하스다이는 유럽 궁정 유태인 대표 인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카자르 왕국 소식을 듣고 편지를 보낸 것도 하스다이입니다.

   

우마이야 왕조는 라흐만 3세 이후로도 백여 년간 지속되다가 붕괴합니다. 이후로는 중국 위진남북조 시대처럼 이슬람 소왕국들이 난립하는 타이파 시대로 접어듭니다.

   

   

   

13. 국제유태자본이 세계 이성적 존재이다,라는 명분을 주고, 한반도 통일이라는 실리를 요구하자. 적당한 긴장 관계로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 국유본과 한국인이 오랫동안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미국의 저명한 군사교육기관인 버지니아 군사학교가 "타리크 이븐 지야드의 지브롤터 해협 도하" 1300주년 기념식을 준비 중이다. 무어족이 스페인을 정복하여 800년 동안 점령하는 계기가 된 이 역사적 사건이 "두 세계의 융합"을 촉발했다고 학교 측은 설명했다. "

http://www.segye.com/articles/news/opi ··· tg2%3D01

   

지브롤터란 타리크 상륙 지점을 뜻하는 아랍어 '자발 알 타리크'(타리크의 언덕) 발음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세상은 한국인이 지배하나요? 스페인은 베르베르족이 지배했나요? 아니죠? 아랍인과 베르베르족과 이란인은 다릅니다. 허나 통칭하는군요. 이는 혼동을 가져옵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오늘날 승자가 국유본인데, 스페인 역사 안에 숨겨진 유태인 디아스포라를 더 부각시키면 시켰지, 왜 숨기려는 경향이 있을까요? 질투 때문입니다. 안 그래도 잘 나가는 유태인인데, 유태인이 서구인에게 노출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령 미국에서 유태인 학생 비율이 많자 유태인 학생 비율을 낮추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유태인들은 질투를 다른 데로 돌리는 방안을 고심했던 것입니다. 그중 하나가 일을 유태인이 배후에서 하고 명의만 다른 족속에게 빌려주거나, 역사에서 유태인이 희생당한 면만 부각시키고 반대로 유태인이 잘 나가거나 가해자인 경우는 조용히 넘긴다는 전략인 겁니다. 그렇게 해도 여기저기 찾아보면 유태인이 엄청나게 잘 나간 것을 알 수 있지만, 이건 78%가 모르고 21%만 아는 이야기가 되어 안정적인 것입니다.

   

78%는 뭔 지를 잘 모르니 질투할 수가 없고, 21%는 자신들이 섬기는 주인들이 국유본인 것을 눈치를 채지만 국유본 힘에 압도되는 것입니다. 서구에서 살수록, 고학력일수록, 부유층으로 갈수록, 금융권일수록 국제유태자본 위력을 절감합니다. 반면 78%는 누가 자신을 지배하는지 모르고 국유본이 만든 언론플레이 구조에서 쪽발이들에게 세뇌되어 이명박 욕이나 하는 겁니다.

   

국유본은 자신들을 배후로 돌리고 세계를 한국인이 지배하고 있다고 농담합니다. 명분을 주고 실리를 취하는 것입니다. 해서, 한국인은 국유본에게 명분 일부를 돌려주고 실리 일부를 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가령 겉보기에는 한국인인데 알고 보면 쪽발이인 자들, 쪽발석현, 쪽발삼구, 쪽발정은처럼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쪽바리들을 국유본에게 돌려주고, 한반도 통일이라는 실리를 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당장 주는 명분에 지나치게 혹하면 좋은 관계가 오래가지 못합니다. 명분만 실리만 취하는 건 현명한 전략이 아닙니다. 명분과 실리를 합리적으로 고루 취해야 합니다. 적당한 긴장 관계로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 국유본과 한국인이 오랫동안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국유본은 결코 강제로 세계정부를 만들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그랬다가는 78%가 지배자 실체를 깨닫기 때문에 10년 내에 세계정부는 물론 국유본도 붕괴되고 말 것입니다. 국유본은 현재 상태를 유지하면서 거의 모든 대다수 인류가 자발적으로 국유본에 항복하길 기다릴 것입니다. 시간이 더디더라도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방법이니까 말입니다.

   

   

      

인드라는 정치를 하지 않겠으며,

책을 더 이상 쓰지 않으며,

언론에 기고하지도 인터뷰를 하지도 않을 것이며,

종교단체를 만들지도 않을 것입니다.

국유본론을 소명으로 여기고

지금처럼 살다

행복하게 가겠습니다

매일매일 행복하겠습니다

마.자.세.

한반도 평화와 통일, 경제 발전과 사회 복지를 위하여

친미친중 반일반북 쪽발정은 척살로 조국통일 쟁취하자

쪽발민주당 해체 쪽발석현 아웃

쪽발재벌 타도 골룸빡 처단

쪽발이에게 죽음을 쪽발왕에게 천벌을

쪽발타도해방투쟁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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