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좌파 박정희와 독일재단, 그리고 독일 대통령 국유본론 2010
2010/02/06 17:57
http://blog.naver.com/miavenus/70079930693
중도좌파 박정희와 독일재단, 그리고 독일 대통령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0/02/07
1. 독일 대통령은 알려진 바와 달리 실세인가
2. 호르스트 쾰러 독일 대통령은 IMF 총재 출신
3. 메르켈 박사님더러 독일의 대처를 주문한 호르스트 쾰러 교수님
4. 실세 대통령으로 등장한 호르스트 쾰러
5. 호르스트 쾰러와 아데나워 재단
6. 콘라드 아데나워는 누구인가
7.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는 누구인가
8. 독일 마지막 황제 빌헬름 2세와 1차 세계대전
9. 중도좌파 박정희 정권과 에베르트 재단
10. 묄렌도르프에서 오래된 미래를 읽는다
예언해설가:
안녕하세요. 호르스트 쾰러 독일 대통령이 한국을 방한한다고 합니다.(독일 대통령을 워낙 언론에서 주목하지 않아서, 있는지 없는지도 잊었네요 ㅎㅎ) 뭔가 필이 와서 조사를 해보았습니다. 1967년 하인리히 뤼프케(기민련) 고속도로 기획, 원자력청, 1991년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기민련)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지방 자치 기초 의원 선거 1998년 로만 헤르초크(기민련) 외환위기 극복 시점, 정주영 방문 2002년 요하네스 라우(사회민주당) *기민련=기독교민주연합 기민련 출신의 독일 대통령이 한국을 방한하면, 큰 그림의 방향이 좋은 쪽으로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호르스트 쾰러도 기독교민주연합 출신... 남북한 시나리오에서 좋은 쪽을 풀린다는 시나리오는 아닐까요? 여하튼, 독일 대통령을 사람들은 있는지도 모르고, 또 알아도 총리가 모든 권한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저는 생각이 다릅니다. 빌 게이츠가 제일 돈 많아 보이지만 그게 아니듯, 총리가 실세인 거 같아 보이지만 실은 바지사장 역할이고 진짜 파워는 독일 대통령이라고 봅니다. 일본에 천황이 있고 영국에 국왕이 있듯이... Well.. 좋은 밤 되십시오. 독 호르스트 쾰러 대통령이 통일은 어느 순간 갑자기 올 수도 있으며 비용은 한국의 역량으로 감당하며 감지하지 못했던 힘을 감지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단순한 립 서비스로 듣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INDRA:
글 고맙습니다. 독일 대통령이 2월 7일 방한한다. 호르스트 쾰러는 방한하여 남북문제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의 한독 공동 협력방안, 풍력 발전사업 협력 등을 논의할 예정이다.
1. 독일 대통령은 알려진 바와 달리 실세인가
다음은 역대 독일 대통령 명단이다.
테오도어 호이스(Theodor Heuss, 1949.9.13.~1959.9.12., 자유민주당)
http://100.naver.com/100.nhn?docid=171612
하인리히 뤼프케(Heinrich Lübke, 1959.9.13.~1969.6.30., 기독교민주연합)
http://ko.wikipedia.org/wiki/%ed%95%98 ··· 5bc%2580
구스타프 하이네만(Gustav Heinemann,1969.7.1.~1974.6.30., 사회민주당)
http://100.naver.com/100.nhn?docid=185129
발터 셸(Walter Scheel, 1974.7.1.~1979.6.30., 자유민주당)
http://100.naver.com/100.nhn?docid=93549
칼 카르스텐스(Karl Carstens, 1979.7.1.~1984.6.30., 기독교민주연합)
http://100.naver.com/100.nhn?docid=150017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Richard von Weizsäcker, 1984.7.1.~1994.6.30., 기독교민주연합)
http://100.naver.com/100.nhn?docid=69036
로만 헤르초크(Roman Herzog, 1994.7.1.~1999.6.30., 기독교민주연합)
http://en.wikipedia.org/wiki/Roman_Herzog
요하네스 라우(Johannes Rau, 1999.7.1.~2004.6.30., 사회민주당)
http://en.wikipedia.org/wiki/Johannes_Rau
호르스트 쾰러(Horst Köhler, 2004.7.1.~, 기독교민주연합)
http://ko.wikipedia.org/wiki/%ed%98%b8 ··· 59f%25ac
말씀한 대로 대체로 사람들은 독일이 의원내각제이므로 총리가 모든 권한이 있으며, 독일 대통령이 상징적 존재에 불과하다고 여기고 있다.
상기한 2009년 독일 정치인 영향력을 봐도, 상위권에 총리들이 포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1위는 독일의 박정희, 아데나워이다. 예서, 흥미로운 점은 10와 11위, 12위에 대통령들이 순위권에 진입했다는 점이며, 한 명은 동독 대통령이었고, 다른 한 명은 근래 대통령이었으며, 호르스트 쾰러는 현직 대통령이라는 것이다.
하면, 독일에서 근래 대통령에 대해 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것일까. 인드라는 1990년대 후반 독일을 방문하면서 느낀 바가 있었다. 무엇보다 독일에서는 통일 이후 가장 큰 정치적 이슈가 통일 후유증을 극복하는 것이다. 해서, 그만큼 통합의 상징으로서의 대통령 역할이 증대되고 있다. 하여, 요하네스 라우 대통령 때부터 대통령 직에 대한 관심이 커진 것이다.
게다가 독일 대통령이 주목받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현직 대통령인 호르스트 쾰러가 IMF 총재 출신이라는 점이다.
2. 호르스트 쾰러 독일 대통령은 IMF 총재 출신
호르스트 쾰러는 헤겔 등을 배출한 명문 튀빙겐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후 은행업계와 재정부 장관을 거쳐 IMF 총재가 된다. 이때 호르스트 쾰러가 IMF 총재가 된 배경은 무엇일까. IMF 총재가 독일 몫이었기 때문이라 한다. 헌데, IMF 역사상 독일인이 IMF 총재가 된 것은 호르스트 쾰러가 유일하다. 인월리는 지난 글들에서 빅터 로스차일드의 빌더버그 체제를 설명한 바 있다. 해서, 세계은행 총재가 미국인 몫이라면 IMF 총재는 유럽인 몫, 보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영국, 독일을 제외한 서유럽 몫이었다. 예서, 영국이 빠진 것은 당시 세계의 중심이 런던에 있었고, 런던에는 빅터 로스차일드가 있었기 때문이다.
초대 총재가 벨기에인 것은 유럽연합 초대 대통령이 벨기에 출신인 것과 같다. 1,2차 세계대전에서 벨기에 지역이 한반도 지역처럼 늘 전쟁터가 되었기에 그에 대한 위안 성격이 강하다. 1920년 안트워프 올림픽도 마찬가지 예였다. 해서, 이들은 오늘날 반기문이 유엔 총장이지만 별 볼 일이 없듯 실제 권한이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음은 스웨덴 출신이다. 1950년대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는 스웨덴계 유태인이었다고 한다. 이차대전 전까지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던 스웨덴이 이 시기 비약적인 경제 발전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이처럼 IMF 총재는 미국 정치상황과 연동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주로 프랑스에서 총재가 등장한다. 그러다가 2000년 최초로 독일 출신 IMF 총재가 등장한다.
하면, 이 시기에 미국 정세는 어떠한가. 부시 대통령 집권 직전이었다. 인월리는 말했다. 국유본은 연임 대통령 후반기서부터 실질적인 정권교체를 준비한다. 오바마 대통령으로의 정권 교체는 2006년부터 준비되었듯이 부시 대통령으로의 정권 교체는 1998년부터 시작되고 있었던 셈이다. 하고, 부시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네오콘이다. 데이비드 록펠러 계열인 뉴라이트 중에서 소수파인 네오콘이다. 빅터 로스차일드계였다가 데이비드 록펠러계로 이적한 네오콘이다.
네오콘의 전략은 무엇인가. 중동전쟁을 통한 세계체제 안정이다. 구사회주의권 지역, 옛 로스차일드 지역에서의 우호 노선이다. 중국 공산당은 중국에서의 이라크전쟁 반대시위를 금지시켰다. 푸틴 역시 네오콘에 호의적이었다. 차베스가 뜬다. 네오콘의 전략으로 원유로 실속을 챙기면서 반미발언을 할 수 있으니 차베스가 신났던 셈이다. 또한 두 지역에서 동시에 전쟁을 할 수 없으므로 동아시아에서는 평화정책이 요구되었다. 해서, 국유본은 동아시아에서 포용정책을 실시한다. CIA 한국지부장이었던 그레그는 포용정책과 케넌정책은 본질적으로 같다고 했다. 부시는 북한에 다국적 담배공장을 설립하게 하는 등 포용정책에 박차를 가했다. 또한 네오콘은 유럽에서 프랑스 고립작전으로 나아갔다. 이 시기 프랑스에서는 이슬람 이주민 폭동과 같은 사태가 자주 일어나며, 위기의 상황으로 치닫는다.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2006년 독일월드컵으로, 2010년 남아공월드컵, 2014년 브라질월드컵으로 이어지는 국유본의 로드맵. 예서, 호르스트 쾰러의 역할이 있었다. 호르스트 퀼러는 지난 1990년 독일 재무부차관으로 동서독 화폐통합을 주도했고 1999년 유로화 도입을 이룬 마스트리트 조약의 실무 협상가로 활약했다. 그 연속선상에서 퀼러 IMF 총재는 2000년 6월과 노무현 탄핵쇼 총선이 있던 2004년 2월 한국을 방문해 전임 깡드쉬처럼 노동시장 유연화 등을 한국에 지시한 바 있다. 특히 2000년 6월은 615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던 때다. 세계의 이목을 남북정상회담에 몰아놓고 국유본은 한반도에서 무엇을 노린 것일까. 이후 노무현 정권의 남북정상회담도 FTA와 관련이 깊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국유본은 정치적인 이벤트를 제공하여 국민을 현혹시킨 뒤 경제적 실속을 얻는다. 한번 당하고, 두번을 당했음에도 또 정신 못 차린다면 앞날이 어둡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인드라는 김대중 정권 때나 노무현 정권 때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면 언제나 환영했다. 그것이 비록 다른 이슈를 감추기 위한 물타기쇼라고 할 지라도 남북 정상이 만나는 것은 늘 지지했다. 다른 이들이 정략적이다, 선거용이다 라고 할 때 인드라는 정치인이 정략적이지 않고, 선거를 의식하지 않으면 직무 유기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호르스트 쾰러는 독일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 정치 이력이 전무하다. 그럼에도 역대 대통령과 달리 실세 대통령으로 자리매김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독일 최초의 IMF 총재였기 때문이다.
3. 메르켈 박사님더러 독일의 대처를 주문한 호르스트 쾰러 교수님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를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이처럼 호르스트 쾰러는 자서전 '곤란해지더라도 나는 솔직하고 싶다'에서 앙겔라 메르켈에게 조언을 했다. 이는 호르스트 쾰러가 1994년 독일 저축예금은행 연합회장으로 있었을 때 한 발언과는 다르다.
"하나의 금융기관이 파산하게 되면 하룻밤 사이에 수많은 연결된 기관들도 넘어가게 되고 그리하여 범지구적인 도미노 현상이 벌어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이 위험성이 증권가를 덮치게 되고 , 나아가 환율 시세에 막대한 변동을 일으킨다. 나아가서는 금방 현실세계에 심각한 변동이 오게 된다. 이런 일은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모든 거래는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되고, 시스템 전체가 붕괴될 수 있다. 나아가 이것이 확산되면 범지구적 파멸이 불가피하다. 온 세계가 1929년 10월 '암흑의 금요일(대공황)에 이미 경험했던 것처럼….: 세계화의 덫"
호르스트 쾰러는 극단적인 자유주의 경제학 신봉자로 알려져 있다. 정치적으로 보면, 기민-기사당 연합보다는 신자유주의 지향적인 자유민주당 성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해서, 독일의 대처를 주문한 것에는 이해하기에 무리가 없다. 헌데, 상기한 발언으로 보자면, 현 금융시스템에 어떤 식으로는 '개입'해야만 한다. 대체 호르스트 쾰러의 진심은 무엇일까.
호르스트 쾰러가 갑자기 IMF 총재직을 내놓는다. 독일 대통령 출마를 위해서였다. 왜 호르스트 쾰러가 나서야만 했을까. 인월리는 메르켈 때문으로 본다. 동서독간의 위화감이 날로 치솟자 국유본은 메르켈을 통한 국가 통합에 나선다.
메르켈은 1989년 동독 민주화운동단체인 민주개혁에서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예서, 알 수 있듯 메르켈의 정치적 자산은 여성이고, 서독에서 태어나 동독에서 자랐으며, 민주화운동가 출신인 게다. 이는 고스란히 메르켈의 약점이기도 하다. 해서, 누군가는 이 약점을 보완해주어야만 한다. 그것이 호르스트 쾰러이다. 메르켈은 정치적 자산이 풍부한 편이나, 급변하는 세계 경제상황에 제대로 대처할 수 있을 것인지 회의적이었다. 반면 호르스트 쾰러는 정치 경력이 전무해도 IMF 총재였던 게다. 이는 마치 박근혜가 한나라당 차기 유력한 대통령 후보로 부상하자 정몽준이 한나라당에서 무게중심을 잡고 있는 형국과 같은 셈이다.
이런 배경에서 호르스트 쾰러는 기민기사당 연합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나서는데 이때도 묘한 발언을 하여 이슈의 주인공이 된다. 쾰러는 대통령 후보 시절 뒤셀도르프에서 열린 기독교민주연합과 자유민주당의 의원 모임 연설을 통해 미국이 이라크 정책과 관련해 힘을 최우선시하며 오만하게 행동해 왔다고 비판했다. 이는 이라크 전쟁에 비판적인 사민당에게는 호재였고, 기민기사당 연합에게는 악재였다. 호르스트 쾰러는 네오콘 활약 시기에 IMF 총재가 되었다고 했다. 예서, 또 한번 호르스트 쾰러의 진심을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과연 호르스트 쾰러의 진심은? 다른 것이 없다. 국유본의 지시대로 움직인다고 보아야 한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94년 저축예금은행 회장 시절에는 응당 은행시스템의 안정을 말해야 했으며, IMF 총재 시절에는 노동유연화를 강조해야 했고, 대통령 후보 시절에는 '반미면 어때?'라는 식으로 인기몰이 정치를 시도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물론 이 시기는 네오콘이 정권교체를 준비하며 2선으로 후퇴를 준비하던 때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네오콘 3인방이라는 폴 울포위츠 국방부 차관이 세계은행 총재가 되는 것이었다. 또한 이 시기 북한 BDA 문제가 터졌다. 혹자는 이를 네오콘의 북한 압박으로 알고 있는데 아니다. 이는 오히려 제이 록펠러 측 작품으로 보아야 한다. 네오콘은 중국과 북한 인권 문제에 관대하였으며, 북한에 다국적 담배공장을 세우고, 무역거래를 해왔다. 반면 제이 록펠러 측은 담배산업에 매우 비판적이었고, 북한 인권에 민감하다. 해서, BDA 사건 이후 북한 다국적 담배공장이 폐쇄된다. 본격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이 2006년이라면 준비기가 2005년이었던 셈이다.
4. 실세 대통령으로 등장한 호르스트 쾰러
지금까지 독일 대통령들은 있으나 없는 듯했다. 비유하자면, 미국 부통령과 같은 신세다. 국민이나 외국에 대해 듣기 좋은 립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전부였다. 하고, 거부권을 행사한다 해도 절차상의 문제와 같은 사소한 것이었다. 허나, 호르스트 쾰러는 달랐다. 시기마다 정치적 쟁점을 몰고왔다.
독일 슈뢰더 소원대로 불신임 받고 쾰러 조기총선 승인
http://blog.naver.com/cinema2day?redir ··· 14615242
노무현이 감동받았다는 독일총선 분석 보고서
http://blog.naver.com/gimche?redirect= ··· 18269416
슈뢰더의 당면 과제는 현 그리스처럼 공공 부문 예산 삭감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허나, 악역을 맡기는 싫었던 슈뢰더가 택한 것은 조기 총선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슈퇴더의 선택이 아니라 국유본 정당인 사민당을 보존시키려는 국유본의 전술이겠다. 아마 이것이 노무현에게 감동을 주었던 듯싶다^^! 조기 총선으로 인해 슈뢰더는 모양있는 퇴각을 할 수 있었고, 메르켈은 총리가 될 수 있었다. 이것이 대연정에 관한 일반적인 시각이다. 허나, 인월리 입장에서 메르켈이나 슈뢰더나 궁극적으로 한 통속이라면? 이 시기는 2006~2008년에 이르는 미국 정권교체 준비기처럼 독일도 정권교체 준비기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튀는 독일 대통령, 호르스트 쾰러의 행보는 계속된다. 이제 연정 파트너인 사민당을 야당으로 보내고, 기민-기사-자민 연합을 구성해야 한다. 이를 위한 수순은 무엇일까.
"이런 가운데 호르스트 쾰러(Horst Koehler) 대통령은 정부의 지역 보조금이 경제침체의 원인이 되고 있다고 비판하고 나섰다. 무리한 보조금으로 국가채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경제회복을 위한 정책을 제대로 추진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재무차관과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를 역임한 경제전문가인 쾰러 대통령은 지난 9월 12일 "정부가 지역별 생활수준을 맞추기 위해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은 후세에 엄청난 부채를 떠맡기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국가의 정책 목표를 동서 양지역의 동일한 생활수준으로 설정한 자체가 모순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의 발언은 동독인의 저항을 불러왔고 9월 19일 치러진 동독지역의 작센(Sachsen) 州와 브란덴부르크(Brandenburg) 州 의회선거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우려했던 대로 극우정당인 NPD(독일민족당)와 극좌정당인 PDS(민주사회주의당) 등 극단적 정당들의 진출이 두드러졌다. 브란덴부르크 주의 경우, 舊 동독 공산당 SED의 후신인 민사당(PDS)의 득표율이 사민당과의 각축을 벌이며 28%를 차지해 31.9%를 차지한 사민당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 쾰러 대통령이 동서독 동일한 생활수준을 목표로 한다면 독일은 '보조금 국가'라는 오명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부채국가을 모면할 수 없다며 목표 수정을 제의한 데 대해 슈뢰더 연방총리도 맞짱구를 치고 나왔다. 그는 독일 사회에 광범위하게 확산된 무임승차 근성을 지적하며 현재 '공짜근성' (Mitnahme- Mentalitaet)이 중산층까지 확산되어 경제는 독일경제를 좀먹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http://blog.naver.com/goldenwook?redir ··· 03131305
네오콘 부시가 환경당 네이더와 차베스를 응원하여 재선에 성공하듯, 호르스트 쾰러는 좌익당을 사실상 옹호하는 발언을 연달아 낸다. 여기에 대책없이 슈뢰더가 동조하니 점입가경이 아닐 수 없었던 게다. 기민기사연합과 사민당 모두에게 실망감을 느낀 동독 주민들이 민주사회당으로 급속히 쏠리게 된다.
"5월 13일 실시된 아일랜드 국민투표에서 EU(유럽연합)의 미니헌법에 해당하는 '리스본조약'의 비준안이 부결됨에 따라 조약의 장래에 대한 암운이 깃든 가운데, EU의 쌍두마차 중의 한 나라인 독일의 호르스트 쾰러 대통령이 리스본조약의 비준을 보류해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는 기독민주연합(기민련, CDU)의 페터 가우바일러 의원과 원내 좌파당(Die Linke)이 리스본조약의 합헌성의 문제를 들어 위헌소송을 제기했기 때문인데, 베를린에 있는 대통령관저는 30일 현재 그와 같이 위헌소송이 제기되어 있는 점을 들어 리스본조약을 일단은 비준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사민당과 기민련, "유럽회의론자들을 부추긴다" 비판.. 이러한 쾰러 대통령의 결정에 대해 사회민주당(사민당, SPD)과 기민련은 즉각 비판을 가했다. 악셀 쉐르퍼 사민당 유럽정치부문 대변인은 그것을 '잘못된 신호'라고 표현하며, "에이레인들의 반대 이후 물에다 기름을 붓는 격으로 유럽회의론자들을 부추기는 것"이라고 경제지 '한델스블라트'에다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쾰러 대통령이 서명을 통해 연방정부와 연방의회의 통합노선을 명백히 지지하고 있음을 보여주었어야 했다"고 말했다."
http://real.jinbo.net/news/view.php?bo ··· ry1%3D38
1970년대까지만 해도 유럽연합, 세계정부론에 대해 진보좌파는 긍정적이었다. 왜? 빅터 로스차일드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나, 1980년대 빅터 로스차일드가 데이비드 록펠러에게 패배한 이후 진보좌파는 태도를 돌변한다. 이유는? 이제 유럽연합과 세계정부를 주도하는 자가 빅터 로스차일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해서, 부르주아적 통합에는 반대한다는 노선을 정립한다. 허나, 이들은 이상주의적 소수에 불과했다. 어차피 전후 진보좌파란 국유본이 고안한 발명 장치였기에. 하면, 호르스트 쾰러는 왜 이들 이상주의적 좌파에 동조하는 발언을 했을까.
"현재 독일 정치인들에게는 쾰러 대통령에게 '제동'을 걸 뾰족한 방법이 없는 듯하다. 대통령 권한 남용을 이유로 헌법재판소에 소추하는 것은 매우 드물면서도 극단적인 방법이라 부담스럽다. 무엇보다도 쾰러 대통령은 국민에게 인기가 좋다. 지난해 12월 중순 설문조사에 따르면, 쾰러 대통령이 현실 정치문제에 관여하는 것에 대해 85%가 "긍정적"이라고 평가했다."
http://blog.naver.com/ebinpa?redirect= ··· 33723640
호르스트 쾰러의 정치적 행각은 천방지축이다. 물론 이 시기 세게의 정치지도자들은 국유본의 지시에 따라 막말 경쟁에 나선 시기이기도 했다. 막말을 해댈수록 인기를 얻었다. 중요한 것은 이 시기 정치 지도자들에게는 그때 그때마다 언론플레이를 하여 표계산에 능할 뿐, 딱히 소신이라는 것이 없었다는 점이다. 결국 이러한 행보 끝에 호르스트 쾰러는 재선에 성공한다.
5. 호르스트 쾰러와 아데나워 재단
전 세계 재단 중 독일 재단은 미국 재단과 늘 비교가 되는 모범적인 재단이다. 무엇보다 독일 재단의 특징은 정치적이라는 점이다. 기독교민주당(CDU)은 콘라드 아데나워 재단을, 기독교사회당(CSU)은 한스 자이델 재단을, 사회민주당(SPD)은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재단을, 자유민주당(FDP)은 프리드리히 나우만 재단을, 녹색연합(Gruene)은 하인리히 뵐 재단을, 마지막으로 민주사회당(PDS)은 로자 룩셈부르크 재단을 갖고 있다. 이들 재단 중 현재 한국에 상륙한 재단은 아데나워 재단, 자이델 재단, 에베르트 재단, 나우만 재단이다. 이들 재단들은 국내외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체계적인 교육훈련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해서, 호르스트 쾰러는 물론 메르켈도 아데나워 재단인 게다.
하면, 국내 아데나워 재단 활동을 보자.
아데나워 재단 홈페이지에 있는 파트너들이다. 하나같이 쟁쟁하다.
형식적인 파트너가 아니다. 한나라당 차세대 정치인 양성을 위한 정치 교육에서 보듯 한국 정치 최전선을 형성하고 있다.
하면, 다른 재단 상황은 어떠한가.
이는 에베르트 재단 활동이다. 아데나워 재단과 에베르트 재단 두 곳만으로도 이들이 한국사회에서 얼마나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는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여, 예언해설가님처럼 상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닌 것이다. 그것이 독일 대통령으로 나타나든, 독일 재단으로 나타나든 국유본은 이들을 통해서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해서, 상상을 해보라. 국유본이 한국사회를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려 한다면 어떤 방법이 있겠는가. 간단하다. 아데나워 재단과 에베르트 재단 상층에 간단한 메모 한장만 남기면 된다. 하면, 각 재단은 인맥을 통해 한국사회에 명령을 전달하고, 전달받은 국내 '꼰대'들은 똘마니들에게 전한다. 인월리는 강조했다. 국유본은 대립하는 양측 모두를 지원한다. 짜고 고스톱을 위하야!
6. 콘라드 아데나워는 누구인가
"아데나워는 마셜정책에 감사를 표하면서도 독일의 공업정책을 제한하는 정책에 대해서는 "세계시장으로부터 독일을 견제하려는 정책"이라고 반발했으며, 독일인들이 스스로 국가를 재건할 수 있도록 독일인들에게 행정권이 돌아가야 한다면서 연합군 진영에 대해서 비판적인 모습을 보였다. 또한 유럽을 공산주의 국가 소련으로부터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여 반공주의적인 정견을 보였는데, 이러한 연설은 사회민주당으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았다. 또한 연합군 진영의 반발을 사 영국 의회에서 독일내 영국군 점령당국에 대해 해명을 요청하였다."
http://ko.wikipedia.org/wiki/%ec%bd%98 ··· 59b%258c
콘라드 아데나워는 오늘날 독일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독일의 '박정희'이다. 그의 인기는 단순명료하다. 오늘날 독일 경제를 일으킨 장본인이라 평가받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인월리 입장은 긍정하면서 부정한다. 왜? 배후는 국유본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국유본 내부에서는 이 시기 두 갈래 노선이 있었다. 하나는 독일을 낙농업국가로 만드는 모겐소 구상이었다. 이는 소련과 미국, 유럽 사회주의자들이 찬동했다. 다른 하나는 독일을 여전히 광공업 국가로 남겨두는 안이다. 뉴욕 금융 자본가들은 독일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했다. 로열더치셀 원유 회사는 전쟁 내내 일본군을 위한 원유 공급을 했다. 빅터 로스차일드는 전쟁 때부터 독일 재산 보호를 위해 영국 정보부에서 일했다. 빅터 로스차일드는 후자를 선택한다. 그것이 마셜 플랜이다. 마셜 플랜은 공산주의로부터의 보호나 굶어죽는 유럽민을 위한 제도가 아니었다. 국유본 재산을 보존하고 냉전체제를 형성하여 전후 세계질서를 구성하는 것이 목표였다. 하여, 모겐소 구상 편에 섰던 헨리 윌리스 미국 부통령은 트루먼에게 미국 부통령직을 빼앗겼으며, 이후 대통령 선거에서는 프리메이슨 혐의를 받아 결국 패퇴한다. 나아가 이들 세력들 상당수가 소련 간첩 혐의로 숙청이 된다.
http://blog.naver.com/humorcare?redire ··· 68094967
존 콜먼은 빌리 브란트가 300인 위원회 회원이자 KGB 간첩임을 폭로한다. 정확히 말하면, 빌리 브란트는 KGB 간첩이 아니다. 빅터 로스차일드의 하수인일 뿐이다. 그처럼 콘라드 아데나워 역시 마찬가지이다. 존 콜먼은 빅터 로스차일드의 좌익 계열에 대해서만 폭로한 것이다. 하여, 빅터 로스차일드가 없었다면, 오늘날 독일도 없고, 콘라드 아데나워도 없다.
7.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는 누구인가
"독일 노동자들은 분명히 피를 흘렸다. 그들은 국제주의적인 마르크스시스트는 아니었다. 만일 1914년에 독일 노동자들이 마르크스시스트였던들 세계대전은 3주일 후에는 이미 끝나버렸을 것이다. 당시 독일 민족이 끈질기게 싸울 수 있었다는 사실은 마르크스시즘적인 망상이 독일 국민의 마음 속에 깊이 파고들지 못하였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 히틀러, 나의 투쟁 중에서"
로스차일드의 사생아로 알려진 아돌프 히틀러 만큼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일당을 잘 묘사한 이는 없다. 허나, 사도회 멤버 비트겐슈타인의 동창생, 아돌프 히틀러 이상으로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를 잘 이해한 이들이 있으니 국유본이다. 상기한 아돌프 히틀러의 발언을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으로 연계시켜 보라. 국유본이 전쟁에서 기대하는 바는 무엇인가. 어느 한 편의 승리가 아니다. 그보다는 전쟁이 오래도록 지속되는 것이다. 그래야 돈을 버니까.
"1919년 2월 국민의회에 의해 바이마르공화국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었고, 독일 국내외에서의 적대세력과 싸우기 위하여 제정(帝政) 군부의 재건에 의한 군비강화에 노력한 결과 우익 제정파의 힘의 증대를 가져왔으며, 1920년 3월 카프 봉기(Kapp Putsch)를 초래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전승국의 과대한 배상요구에 대항하려 하였으나, 영국 ·프랑스의 압박에 굴복하여 베르사유조약을 승인하였다. 이후 조약이행을 충실히 해가면서 그 부담의 경감을 도모하려고 특히 영국과 가까워졌다. 그러나 1925년 임기만료 직전 사망하였다. 정치적 재능은 부족하였으나, 공평한 인물로 부하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http://100.naver.com/100.nhn?docid=110706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에 대해서는 우파보다 좌파가 더 비판적이다. 로자 룩셈부르크를 때려죽인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민주사회당 재단 이름이 로자 룩셈부르크 재단이다.
흥미롭게도 부담 경감을 위해 영국과 친했다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영국=국유본=로스차일드라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결국 에베르트의 역할이란 독일 마지막 황제인 빌헬름 2세를 안전하게 네덜란드로 피신시키고, 패전 독일 뒤처리용으로 나서 승전국 요구에 순응하고, 아돌프 히틀러 정권을 탄생시키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8. 독일 마지막 황제 빌헬름 2세와 1차 세계대전
"107년 만에 '봉인'이 풀린 황제의 밀서. 1902년 당시 독일의 황제 빌헬름 2세(1859~1941)가 대한제국의 독립을 기원하며 고종 황제에게 보내려던 밀서가 처음 공개됐다. 1902년 7월 20일자로 작성된 이 편지엔 빌헬름 2세의 자필 서명과 함께 "(고종) 황제 폐하가 앞으로도 오랫동안 통치해 축복받은 정부가 되길 바란다"는 내용이 담겼다. 편지는 당시 대한제국 주재 독일 영사를 통해 개인적으로 보낸다는 점을 덧붙였다. 비밀리에 전달되는 '밀서'임을 밝힌 것이다. 당시 복잡한 국내외 상황 탓에 밀서는 독일 외교부 정치문서보관소에 100여 년간 봉인돼 있었다. "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 ··· D3798953
근래 국유본 언론이 빌헬름 2세를 뜬금없이 부각시켰다. 하면, 국유본은 100여 년간 봉인된 문서를 계속 봉인할 일이지 왜 새삼스레 지금 꺼내든 것일까^^!
"보불전쟁 때 프랑스 임시정부 요인들이 엄청난 전쟁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런던 시티 로스차일드를 찾아갔다. 이때 로스차일드에게 언질을 받은 비스마르크가 기획에 따라 프랑스 국채가 휴지가 될 것이라고 선전한다. 미네르바의 원조는 비스마르크^!^ 이때, 주니어스 모건이 휴지가 거의 된 프랑스 국채 5,000만 달러어치를 사들인 게다. 모건 전문가들은 모건의 역사학 공부를 칭찬한다. 모건이 프랑스 역사에 대한 연구를 통해 채무를 이행하지 않은 사례가 한 번도 없었다는 점을 고려했다는 게다. 그러나 이런 연구는 로스차일드의 언질이 없으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게다. 프랑스는 비스마르크에게 패배했지만 외국 돈을 떼어먹지 않는다는 국가적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전쟁 후 액면가에 채권을 사들였다. 패색이 짙은 외국정부의 채권 인수를 감행한 주니어스 모건은 750만 달러라는 거금을 번다. 프랑스는 무엇을 믿고 채권을 사들인 것일까? 보불전쟁이 끝난 후 제임스 로스차일드가 독일에 배상금을 대신 지불한다. 모건은 이 자금을 바탕으로 1873년 공황 이후 전개된 미국 철도시대에서 주역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로스차일드가 이로 인해 얻은 이익은 무엇일까. 이미 나폴레옹3세로부터 얻을 것은 다 얻은 로스차일드이다. 상징적인 예 중 하나가 프랑스가 자랑하는 포도주이다."
http://blog.naver.com/miavenus/70046343147
이전 인월리에서 국유본의 사업 방식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국유본은 어느 한 편이 아니라 양 편을 모두 지원해서 배후에서 조종하는 수법을 취한다고 했다. 하여, 국유본은 교묘한 외교 전략으로 국가들끼리 전쟁을 일으켜서 권력을 집중하고, 국가 내부에서는 전후 정당 정치를 통해서 정당끼리 싸움을 붙여 이익을 극대화한다. 지난 시기에 국유본이 나폴레옹 3세를 어떻게 키워서 잡아먹었는가를 말한 바 있다. 이제 프랑스판 나폴레옹 3세인 빌헬름 2세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1886년 그의 나이 17세가 되던 해에, 당시의 세계를 지배한다는 대영제국의 여왕 빅토리아는 자신의 외손자인 빌헬름 2세에게 생일선물로 아프리카의 최고봉인 킬리만자로를 선물한다. 지금 탄자니아와 케냐의 국경선은 그때 그가 받은 케냐 산의 일부인 킬리만자로를 영국이 독일에게 양도하면서 그려지게 되었다."
http://blog.naver.com/rlagudtjq94?redi ··· 41892138
빌헬름 2세가 누구인가를 단 한마디로 규정한다면?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자다. 다음으로 빌헬름 2세가 누구인가라고 한다면 일차 세계대전의 전범인 게다. 1차 세계대전의 배경에 대해 여러 요인이 제기된다. 그중 유력한 가설은 영국의 3C정책과 독일의 3B정책의 충돌이다.
영국의 3C정책과 독일의 3B정책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 ··· aaeyjiq8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870∼71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승리한 독일은 유럽의 강자로 급부상한다. 독일 재상 비스마르크는 교묘한 외교술로 프랑스를 고립시켜 대륙을 안정시킨다. 그러나 그가 물러나며 호전적이던 빌헬름 2세가 즉위하자 상황은 돌변했다. 지레 겁을 먹은 프랑스·영국·러시아가 손을 잡고 독일을 고립시킨 것. 이에 독일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동맹을 맺어 고립상태를 타개하려 한다. 이에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그리고 오스만투르크의 이해관계가 교묘하게 얽힌 발칸반도가 화약고로 변한다. 마침내 1914년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세르비아 테러리스트에게 암살되는 사건이 터졌다. 전쟁을 부른 것이다."
http://www.segye.com/articles/news/cul ··· Bsubctg2=
하면, 오스트리아 황태자는 세르비아 테러리스트에게 왜 암살되었나.
"이들은 그 당시에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내부의 슬라브인들에게 "자치권"을 줌으로서 그들을 포섭하여 "제국의 영광스러운 구성원"으로서의 신분을 계속 유지하고 싶도록 하려던 "프란츠 페르디난드 황태자"를 암살하여 그가 황제의 보위에 오름으로서 그러한 사태가 벌어짐을 막으려고 하였던 것인데, 이와 같이 "이성적 판단에 바탕 한 '당시의 국제관계에 대한 상황'과 관련한 뚜렷한 계산"도 없이 "무조건 하고 보자" 식으로 일을 한 결과, 결국 그들의 조국 "세르비아 왕국"이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과 전쟁을 벌이게 되는 상황을 가져왔고, 이는 당시의 국제정치적 상황으로 인하여, 마침내 "제1차 세계대전"으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http://kin.naver.com/open100/detail.nh ··· aaeyjiq8
흑수단 배후에 누가 있었을까. 여러 설이 있으나, 로스차일드의 충직한 하수인이었던 바실 자하로프라는 유태인 전쟁상인을 떠올린다면 무난한 설명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일차세계대전에서 영국군이 쏘는 총알과 독일군이 쏘는 총알, 프랑스군의 총알과 터키군의 총알 모두는 자하로프에게 구입한 것이었다. 영국과 독일의 선박 경쟁도 결국은 바실 자하로프의 농간이라고 보아야 한다. 바실 자하로프는 일차 세계대전 후 한 번 더 대세르비아 떡밥을 던지고 장사하려다가 사전에 들통이 나서 은퇴한다^^!
http://100.naver.com/100.nhn?docid=132101
나폴레옹 3세가 정권을 잡고 십여 년은 제국주의 정책으로 잘 나갔다. 그처럼 빌헬름 2세 역시 1888년부터 빅토리아 여왕이 죽기 전까지인 1901년까지는 국유본이 멍석을 깔아준 만큼 제국주의로 치달았다. 허나, 그 이후는 나폴레옹 3세와 마찬가지로 고립무원의 상태로 치닫는다. 여기에는 사촌인 에드워드 7세가 큰 몫을 했다.
"에드워드는 왕실의 재정을 단단히 챙겼다. 결과 에드워드는 빚 없이 왕위를 계승한 유일한 국왕이 되었다. 그에게는 유태인 재정자문관들이 있었다. 유명한 유태계 은행가인 로트쉴트(Rothschild)가족도 에드워드의 친구였다. 당시에는 영국에서 반유태인 정서가 널리 퍼져 있었다. 에드워드는 유태인들과 친하게 지낸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떠들려면 떠들어라'면서 개의치 않았다... 빅토리아 여왕의 자손들, 그리고 장인이 되는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국왕의 가족들은 유럽의 여러 왕가와 그야말로 거미줄 같은 인척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래서 한집 건너 두 집이 에드워드의 친척이었다. 만났다하면 사촌이고 조카였다. 예를 들면, 독일황제 빌헬름2세, 러시아의 짜르 니콜라스2세, 헤쎄의 에르네스트 루이스 대공, 작세-코부르크 및 고타의 챨스 에드워드 공작은 모두 에드워드의 조카들이었다. 스페인의 빅토리아 유제니아 왕비, 스웨덴의 황태자비인 마가레트, 루마니아의 황태자비인 마리, 그리스의 황태자비인 소피아, 러시아의 황비인 알렉산드라 훼오도로브나는 조카딸들이었다. 노르웨이의 하콘7세 국왕은 조카이지만 나중에는 사위가 되었고 그리스의 게오르게1세 국왕, 덴마크의 프레데릭3세 국왕은 모두 처남들이었다. 벨기에의 알베르1세 국왕, 포르투갈의 마누엘2세 국왕, 불가리아의 짜르 페르디난드, 네덜란드의 빌헬미나 왕비, 브룬스위크-뤼네버그의 공작인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왕자는 모두 사촌이었다. 그래서 에드워드7세는 '유럽의 삼촌'이라는 별명을 들었다."
http://blog.daum.net/johnkchung/6824206
로스차일드의 친구, 에드워드 7세는 영국-프랑스-러시아 삼국협약을 맺어 독일을 고립시켰다.
"중동(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 ·티베트)에 있어서 영국 ·러시아 양국 간의 이해 대립을 조정하고 서로의 세력범위를 확정하였다. 즉 페르시아는 3분하여 북부를 러시아, 남동부를 영국세력범위, 중부를 중립지대로 정하고, 아프가니스탄은 러시아에 대한 공격기지로 하지 않는 조건으로 영국의 세력범위로 하며, 티베트에 있어서 중국의 종주권을 승인하여 내정불간섭(內政不干涉)을 약속하였다. 군사조항은 포함시키지 않았으나 이미 존재하는 러시아 ·프랑스 동맹(1893), 영국-프랑스 협상(1904)과 관련을 맺고 여기에 독일에 대한 포위체제라 할 수 있는 3국 협상을 완성시키는 결과가 되었으며 이것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의 '연합국'으로 발전하게 된다. 또한 이 협약에 앞서 1907년 6월에는 러시아-일본 협약도 성립되어 국제관계에 이제까지의 일본 ·영국 대 러시아 ·프랑스의 긴장은 해소되었다."
http://100.naver.com/100.nhn?docid=113537
이런 힘이 어디서 나오겠는가. 영국 귀족인 로스차일드의 힘, 300인 위원회의 힘, 국유본의 힘 되시겠다. 예서, 미국까지 끌어들이고자 했던 바, 그 기초를 다지기 위해 로스차일드가 모건에게 지시하여 1907년 공황을 일으키고, 이를 빌미로 연방준비은행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빌헬름 2세는 1918년 11월 독일혁명이 일어나자 네덜란드로 망명하였다. 연합국 측은 제 1차 세계대전의 개전 책임을 그에게 물어 네덜란드 정부에 그의 신병 인도를 요구하였으나 거절되었다. 이상한 일이다. 약소국 네덜란드가 무슨 힘이 있다고 연합국의 요구를 거절했을까. 국유본의 힘인 게다. 네덜란드 왕가를 알면, 또 2차 대전 뒤 빅터 로스차일드와 네덜란드 왕자가 빌더버그를 만든 것을 고려하면, 이해가 된다.
해서, 빌헬름 2세와 관련한 교훈은 무엇인가.
하나, 빌헬름 2세는 악역을 맡았던 셈이다. 국유본은 자신의 권력을 확장, 집중하기 위해 그때그때마다 악역을 택한다. 국유본은 악역을 키울 만큼 키운 뒤 포동포동할 때 잡아먹는다. 나폴레옹 3세, 비스마르크, 빌헬름 2세, 히틀러, 스탈린, 김일성, 모택동, 후세인, 빈 라덴 등이다.
둘, 국유본은 유라시아 대륙에서 유서가 깊고, 언제든 세력을 강화시킬 왕조를 반드시 몰락시킨다. 중국, 러시아, 한국, 독일, 이태리, 프랑스가 예이다. 예서, 한국에 의문을 달 수 있다. 허나, 중국 대륙과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으면서도 그 방식이 비록 구차할 수 있으나 오랫동안 독립국가로 유지해온 것은 국유본에게 예사롭지 않은 것이다. 반면 전략적으로 필요하다고 여겨 급조한 일본 왕조나 별 볼 일이 없는 북유럽 왕조 등을 유지시킨다.
셋, 빌헬름 2세의 고종에 대한 친서는 일제의 조선 침략 배후에 국유본이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국유본 로스차일드는 일본을 근대화시켰고 러일전쟁을 지원하고 영일동맹으로 일제의 조선 강점을 지시했던 게다.
9. 중도좌파 박정희 정권과 에베르트 재단
경술국치 이후로 한국과 독일의 인연이 끊겼다가 1955년 재개된다. 허나, 본격적인 교류는 1963년 파독 광부 파견 때부터이다. 1963년 12월 21일 4만 6천명의 치열한 경쟁을 뚫고 선발된 광부 123명이 서독 루르와 아헨 지역의 석탄 광산으로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그 후 1977년까지 서독에 파견한 광부는 7936명이나 됐다. 1960 년대 실업자가 250만 명이나 되고 국민 소득이 100달러도 안 되던 시절 3년 계약으로 독일 탄광으로 일자리를 찾아 나선 광부들은 한 달에 1400-1600 마르크(당시 28만원-32만원)를 받아 방값, 식대를 빼고 1000마르크쯤 손에 쥐었다. 그리고 평균 800마르크를 고국의 가족에게 보냈다.
"백 원장은 박 대통령의 16일간 서독 방문 당시 전담 통역사 겸 경제 고문 자격으로 수행했다. 그는 58년 뉘른베르크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은 흔치 않은 '서독 유학파'였다. 귀국해 중앙대 교수를 하다 발탁돼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참여했다. 대통령의 경제 브레인으로만 15년을 지냈다... 에르하르트 서독 총리를 만난 박 대통령은 "우리나라 광부와 간호사들이 서독에서 힘들게 일하고 있다"며 "군인은 거짓말을 안 하니 나를 믿고 돈 좀 빌려달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사실상 박 대통령이 서독에서 일하고 있던 광부와 간호사들을 담보로 돈을 빌린 모양새였다."
http://blog.daum.net/wcm001/16498591
인월리는 그간 박정희 정권을 중도좌파 정권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하나, 산별노조, 전임자 임금지급 등 오늘날 민주노총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중도좌파 노동자 복지 정책을 전향적으로 취했다. 둘, 식목일 제정, 그린벨트 실시 등으로 역대 그 어떤 대통령도 안 하고, 후퇴시킨 녹색성장 정책을 실시했다. 셋, 의료사회주의 제도를 실시하여 오늘날 전 세계인으로부터 찬사를 받게 했다. 넷, 입시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고교 교육평준화 정책을 실시했다. 다섯, 예술영화를 만드는 이에게 수입쿼터를 주는 방식으로 문화역량을 높였다. 오늘날 노무현 정권이 축소시킨 스크린쿼터제의 기초를 닦았다.
허나, 오늘날 어떠한가. 악질 친일매국노 김지태 일당으로 인해 중도좌파 박정희 선생의 자취를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국유본의 사주를 받은 악질 친일매국노 김지태 일당들 때문이다. 독립군 고문한 일제 헌병 자식들 주제에 탈레반 행세하는 친일매국노 김지태 일당들 때문이다. 백범 김구선생이 무덤에서 운다. 김구선생 이름 팔지 마라. 천벌을 받을 것이다.
냉정하자. 인월리는 중도좌파 박정희 정권이 초반 한국의 트로츠키, 유원식의 경제계획을 구상했지만, 계속 실패했다고 밝힌 바 있다.
"516 직후 진시황으로까지 불린 8기생 유원식 대령은 당대 정책을 좌지우지했던 한국의 트로츠키였습니다. 유원식의 아버지는 유림으로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였지만, 그는 박정희처럼 만주군관학교를 다녔으며, 대학에도 다니는 등 이론적인 면에서도 많은 공부를 했던 인물이었습니다. 해서, 오늘날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계획에 대한 논란이 있는데, 가령 이승만 때 이미 기획했다, 장면 때에 있던 것을 박정희 정권이 베낀 것이다 등등이 많은데, 이런 주장은 무능했던 민주당 정권을 옹호하고, 박정희를 무조건 까대기 위한 근거 없는 주장이라고 보입니다. 그보다는 유원식 작품이다, 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지 않나 싶습니다. 처음 박정희에게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작성하겠다고 했을 때만 해도 박정희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무엇을 하는 것이냐고 물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관해 유원식은 "나는 완전 고용의 꿈을 꾸었다. 경제성장을 하려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고 하였으며, 그해 10월 한국을 방문한 스칼라피노 박사와의 대담에서 스칼라피노가 후진국이 경제성장을 하려면 불균형성장이 불가피하다고 한 데에 대하여 뜻밖에도 균형발전론을 주장했다고 합니다. 해서, 당시 "한국의 군사정부에 사회주의 경제학자가 있더라"라고 스칼라피노 박사가 미 정부에 보고했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http://blog.naver.com/miavenus/70030439320
문제는 돈이었다. 1962년 실패한 화폐개혁을 한 것도 자금 마련 때문이었다. 베네수엘라나 북한처럼 화폐개혁이 성공하려면 결국 외자 도입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던 게다. 하면, 왜 이때 미국은 도와주지 않았을까. 이것이 국유본의 교묘한 수순인 게다.
국유본은 러시아 혁명 때나 중국 혁명, 쿠바 혁명 때에도 유사한 방식을 썼다. 정권을 잡기 전까지는 은밀하게 도와주다가 막상 권력을 잡고 나서는 압력을 가했다. 소비에트 정권은 유럽 국가들의 포위와 백군 반란에 직면해야 했다. 말할 나위없이 이 시기에 경제는 만신창이가 되었다. 하여, 레닌은 혁명보다 경제 건설이 더 어렵다고 하소연한 것이다. 쿠바나 중국도 마찬가지다. 사실상 국유본이 정권을 만들어준 것이나 다름없지만, 막상 혁명이 성공하자, 국유본은 미국 정권에 지시하여 중국, 쿠바 정권을 다방면으로 압박했다. 국유본의 의도는 단순명료했다. 돈의 힘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박정희 정권도 마찬가지였다. 박정희가 정권을 잡을 때까지는 은밀히 지원하던 국유본은 박정희가 정권을 잡고 나니 도움을 주기는 커녕 미국 정권과 국유본 언론을 통해 비판적이었다. 물론 박정희를 일방적으로 내몰 수만도 없으므로 이스라엘 중도좌파 마파이당 정권이 박정희 정권을 세계 최초로 승인했다. 허나, 중요한 건 돈이었다.
국유본의 목표는 한일수교였다. 이를 위해 빌헬름 2세 망명사태와 같은 CIA를 통한 이승만 하야공작을 폈던 것이다. 또한 박정희를 양쪽으로 압박한다. 즉, 한편으로는 한일회담 반대운동을 지원한다. 해서, 강원룡 같은 이는 국유본이 이승만처럼 박정희를 축출할 것으로 여기기도 했다고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금을 대주지 않는다. 완전고용 구상을 하면 무엇하는가. 돈이 없으면 모택동의 대약진운동처럼 참패가 자명하다. 돈줄 끊기면 1960년대 김일성처럼 광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화폐개혁 실패를 목도한 박정희 정권에게 구원의 손길이 온다. 서독이다. 서독은 대한민국 정부에 파독 광부와 간호사 요청을 한다. 한푼의 외화가 아쉬운 박정희 정권은 이내 승낙한다. 마치 오늘날 이라크 파병부대에 한국 병사들이 앞다투어 지원하는 것과 같다. 미국 병사들이 기피하는 이라크 파병부대에 한국 병사들이 지원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생존이다.
예서, 의문을 가져보자. 왜 하필 서독이었을까. 당대 영국, 프랑스 등 수많은 나라가 있음에도 대한민국에 차관을 빌려줄 나라는 미국, 서독, 일본에 불과했던 것일까. 이는 오늘날 국유본의 인수합병 시장과 무관할까. 아무나 돈을 빌려주는 것이 아닌 게다. 기획이 있는 게다.
하고, 왜 미국은 자금을 대주지 않았는가. 당대 미국 정권은 노예민주당 정권이다. 노예민주당이 박정희 정권을 도와주어서는 그림이 안 나온다. 속으로는 도와주지만, 겉으로는 오히려 비판해야 한다. 그것이 노예민주당이다. 이렇게 되면, 박정희 정권은 정권대로 더더욱 노예민주당에 의존하게 되고, 야당은 야당대로 노예민주당 노예를 자청하게 된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국유본은 미국과 일본 대신 서독을 택한 것이다. 왜? 오늘날 FTA와 비교하면 된다. 미국과의 최종적인 FTA 체결 이전에 유럽과 먼저 FTA를 체결하는 것이다. 이때 FTA 반대단체에서 반대하나? 전혀 안 한다. 혹자는 한국과 유럽간의 FTA는 별 영향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리석은 이야기다. 그런 식으로 말하면, 한국과 미국간의 FTA도 별 영향이 없다. 인월리는 간단히 말한다. 기획된 것이다. 시나리오인 게다.
서독광부를 파견하게 하고, 이를 담보로 돈을 꾸고, 이 돈으로 경부고속도로 등 사회간접시설, 인프라를 짓는다. 이 과정에서 국유본은 악질 친일매국노 윤보선과 같은 자들을 내세워 맹렬하게 경부고속도로를 반대하게 한다. 국유본의 지시를 받은 악질 친일매국노 윤보선이 중도좌파 박정희더러 빨갱이라고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국유본은 중도좌파 박정희 정권을 한일수교를 하게끔 다그치는 것이다. 한편 인월리는 역대 중앙정보부장들에 대해서 체게바라와 같은 역할을 하였음을 주장한 바 있다. 즉, 체게바라는 쿠바와 무관한 아르헨티나 출신의 유대인이다. 그런 그가 쿠바혁명에 참가한 것은 국유본과 관계가 깊다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여, 김종필, 이후락, 김형욱, 김재규 등 중도좌파 박정희 정권 때 중앙정보부장을 맡았던 이들은 중도좌파 박정희가 임명한 것이 아니라 국유본이 임명했다고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 중도좌파 박정희의 우군이 아니라 국유본의 지시를 받아 중도좌파 박정희를 감시하는 자들이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중도좌파 박정희를 훈련시킨 국유본은 60년대말 에베르트 재단을 동아시아에 투입시킨다. 1967년 우선적으로 일본에 에베르트 재단을 파견시킨다. 직후 대한민국에도 지부를 만든다. 중도좌파 박정희가 승인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시기 오늘날 여의도연구소 안병직이 후진국경제학회를 서울대에서 결성했다는 점이다. 친일 뉴라이트 안병직이 박정희에 비판적인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인드라는 친일매국수구 민주당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지만, 친일 뉴라이트 안병직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http://nahdoo.nayes.net/zb4pl5/view.ph ··· o%3D6481
에베르트 재단은 1960년대 말 중도좌파 박정희 정권 때 한국 사무소를 설치하면서 활동을 개시했다.
http://www.fes.or.kr/index_kor/kact/kactivities.htm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다. 중도좌파 박정희 정권 때에 독일 최초로 들어온 재단이 중도우파 아데나워 재단이 아니라 중도좌파 에베르트 재단이다. 세계 최초로 중도좌파 박정희 정권을 승인한 것도 이스라엘 중도좌파 정당 마파이당 정권이었다. 김일성 정권도 박정희 정권의 516사태 소식에 맨 먼저 반응한 것은 남한에 진보정권이 들어섰다고 인식했다는 점이다. 그처럼 독일에서 최초로 들어온 재단이 중도좌파 성향의 에베르트 재단이다. 이러한 중도좌파 박정희 정권에 반대한 것은 악질 친일매국노 윤보선과 같은 친일매국무능 민주당이었던 게다. 이에 대해 중도좌파 박정희 정권은 친일파 재산 환수법 등을 통해 악질친일매국노 김지태 일당의 재산을 환수하는 민족적 자존심을 드높인 쾌거를 보인다. 허나, 이후 국유본은 이를 무효로 하여 악질 친일매국노 김지태 승소 결정을 내린다. 이에 고무된 악질 친일매국노 세력이 연달아 반환소송을 내게하는 동인이 되었던 게다. 이에 국유본은 자칫 자신들의 기획이 들통날까 싶어 다른 친일매국노 소송에 대해서는 패소시킨 게다. 아, 악질 친일매국노 김지태 일당과 그 장학생들. 천벌을 받으라. 지옥에 가리라. 독립군들이 용서를 하지 않을 것이다. 김구선생과 윤봉길 의사, 안중근 의사가 네 놈들 사지를 갈기갈기 사분오열시킬 것이다.
예서, 인월리는 푸에블로호 사건 이후에는 중도좌파 박정희 정권이 이상하게 일이 잘 풀렸다고 했다. 왜인가. 이는 당대 국제정세를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인드라는 김신조의 청와대 공격과 푸에블로호 사건 역시 베트남 전쟁을 지속시키기 위한 성동격서 작전이라고 보고 있다. 한국전쟁 때와 같다. 당시 국유본은 맥아더가 한국전쟁을 속전속결로 끝내지 못하도록 애를 썼다. 그처럼 이 시기 베트남 전쟁 역시 한국군이 일당백이었기에 미군 이백만 명에 달하는 한국군 이만명만 동원한다면 베트남 전쟁을 조기에 끝낼 수 있었다. 허나, 국유본 목적은 베트남전쟁의 승리가 아니었다. 베트남전쟁을 장기화시켜서 무기도 팔아먹고, 냉전체제도 지속하고, 미국 경제를 비롯한 세계경제 성장의 계기를 마련하고자 했던 게다."
http://blog.naver.com/miavenus/70079324465
미국은 국유본의 지시로 김신조의 청와대 공격에도 어떤 논평도 발표하지 않았다. 대신 푸에블로호에 과민하게 대응했다. 김신조의 청와대 공격과 푸에블로호 사건으로 남한은 베트남 추가 파병을 할 수 없었다. 이 결과로 미국은 보다 오래도록 베트남 전쟁을 할 수 있었다. 이 당시 국유본 관심사는 베트남 전쟁의 승리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국유본이 모두 일으킨 일이차 세계대전보다 한국 전쟁보다 베트남 전쟁을 더 오래도록 끄는 것이 유일한 목표였다.
하면, 왜 이때 국유본은 독일 재단을 본격적으로 한국으로 상륙시켰던 것일까.
하나, 대일청구권은 화폐로 지불된 것이 아니다. 기술과 시설투자로 된 것이다. 예서, 왜 국유본은 한일수교를 강제한 것일까. 달러 부족 사태로 야기된 동아시아 방위비 분담 때문이다. 일본은 자력으로 동아시아 방위를 전담할 수 있어야 했다. 국유본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일본은 오늘날 필리핀과 같은 경제상황이었을 게다. 일본은 경제성장을 해야 했다. 엔 블록권이다. 오늘날 중국이 경제성장을 할수록 한국이 혜택을 입는 것처럼 당시 싸구려 상품 따위나 팔던 일본의 입장도 비슷했다. 하여, 한국은 외자 뿐만 아니라 시스템을 갖추어야 했다. 독일 재단이 등장할 수밖에 없었다.
둘, 왜 아데나워 재단이 아니라 에베르트 재단인가. 이전까지 국유본은 남한을 방치했다. 대신 북한을 키웠다. 허나, 박정희 정권 이후로 남한을 유럽의 서독으로 여기게 되었다. 중도좌파 박정희가 혁명에 성공한 후 일갈이 무엇인가. 지금까지의 반공은 반공이 아니었다? 왜일까. 이에 대해서는 인월리는 두 가지 시나리오를 고려하지만 아직 확신할 수 없다. 처음 시나리오는 이렇다. 국유본은 당대 정보통신의 미비로 각국 정치에 대한 자율권을 두었다. 그런 이유로 중도좌파 박정희도 반발할 수 있었다. 그처럼 김일성은 국제공산주의운동에서 스탈린 격하가 이루어지자 재빨리 박헌영 등을 숙청하면서 주체사상을 내세웠다. 국유본 입장에는 괘씸죄인 게다. 해서, 중도좌파 박정희를 키워서 북한보다 잘 사는 남한을 만들었던 게다. 두 번째 시나리오다. 국유본은 전전 독일과 일본의 예처럼 달러 위기 해소와 베트남 전쟁을 위해 의도적으로 김일성 정권을 고립시켰다. 평양 정권의 박헌영 숙청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국유본이 이미 기획한 것이다. 해서, 중도좌파 박정희 정권의 아젠다, 선의의 경쟁 역시 박정희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에베르트 재단 작품이다.
셋, 한국을 키웠다가 다시 왕따를 시키는 국유본의 전략인가. 지금까지 보았듯 국유본은 키우면 죽인다. 박정희 정권 때까지는 승승장구한 한국경제는 1988년 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침체기로 접어든다. 이는 명백히 국유본 전략인 게다. 하면, 인드라가 이를 그냥 두고 볼 수 있겠는가. 아니다. 국유본과 투쟁할 것이다. 국유본의 앞잡이, 친일매국수구세력과 싸울 것이다. 하여, 국유본의 기획을 수정하거나 폐기토록 할 것이다.
10. 묄렌도르프에서 오래된 미래를 읽는다
조선과 독일은 1883년 11월 26일 조선의 전권대사 민영목과 요코하마 독일총영사 자페가 한·독수호통상조약을 체결통상 조약을 체결하면서 외교관계를 맺으면서 시작한다. 헌데, 이는 1883년 11월 경복궁에서 해리 파크스의 주도로 조선과 영국간의 우호, 통상, 항해 조약 조인을 직후이다.
"파크스의 행보에 있어 네 번째로 주목할 사례는 한영 수호조약 체결과 관련된 사항이다. 1882년 4월 4일에 미국의 슈펠트(R. W. Shufeldt) 제독이 한국과 수호통상을 맺자, 영국 정부는 해군 제독 윌리스(R. Willis)를 전권대신으로 파견하여 같은 해인 6월 6일 한미 수호조약과 동일한 조약 원안을 조인하고, 별도 세 항목을 조회형식(照會形式)으로 인정 설명하도록 약정했다... 파크스가 한국과의 통상 교섭이 있던 즈음, 일본에서 함께 근무하였고 당시는 중국에 가 있는 독일 공사 브란트(Herr von Brandt)에게 보낸 서신의 일부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사실은 조약(윌리스에 의한 수호통상조약)이 맺어진 얼마 후인 6월 21일에서 7월 2일 사이, 나는 서울에 있었다. 나는 이곳을 보면서 한국은 정치ㆍ외교적으로는 변방이 위치해 있다는 결론을 단숨에 내렸다. 다시 말해서, 내가 중국과 일본에서 협상을 주도하던 때처럼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될 정도란 말이다: 백성들은 너무 점잖고 조용했다. 질서도 잘 잡혀 있었으며 …… 특히 중국의 영향력이 무척 큰 곳이었다."
http://blog.naver.com/uuuau?redirect=l ··· 10049992
인월리가 강조했듯 해리 파크스는 토머스 블레이크 글로버와 함께 19세기 동아시아 역사를 주도하며 조선을 일제의 식민지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토머스 글로버는 평범한 무기상일까. 이 시대에 평범한 무기상은 없다. 그는 그야말로 근대 일본에서 종횡무진한 전설적인 인물이다. '라스트 사무라이'의 톰 크루즈조차 울고 갈 정도이다. 왜? 그는 일본인으로 귀화하였고, 그의 아내는 푸치니의 나비부인 모델로 알려졌으며, 그는 일본 유신정권에서 맹활약하는 인물들을 대거 영국에 유학을 보낸 장본인이며, 대표적으로 일본 최초의 철도와 조선소, 그리고 최초의 기린맥주 사장이었으며, 메이지유신 때 국제유태자본의 기획에 따라 해리 파크 공사의 지시를 받아 막부정권을 무너뜨리는 무기를 사츠마 - 조슈번에 지원을 했으며, 무엇보다 대부분의 사업을 이와사키 야타로라는 미쓰비시 창업자에게 넘겼다는 데에 있다."
http://blog.naver.com/miavenus/70040636893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듯, 독일이 조선과 교류할 수 있었던 것은 국유본의 허락을 받은 이후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세창양행(E. Meyer & Co.)은 1883년 조선과 독일의 수교 이후 조선에 진출한 최초의 독일계 상사였다... 해방 이전 주부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독일제 '세창 바늘'은 아무리 오래 써도 부러지지도, 녹슬지도 않는 마술과도 같은 바늘이었다. 1884년 인천에서 독일인이 설립한 세창양행은 바늘, 금계랍, 염료, 석유 등을 앞세워 조선 소비자를 공략했다. 하지만 정작 세창양행의 주요한 수입원은 조선 정부를 상대로 한 대규모 이권 사업이었다... 1886년 세창양행은 자체 자금 2만 파운드를 조선 정부에 차관으로 제공하고, 매년 3만 섬의 세미를 운송할 권리를 획득했다. 관세를 담보로 설정했고, 매년 10%의 이자를 받기로 했으므로 세미 운송권은 말 그대로 덤이었다. 그해 12월 목포항에 집하된 세미가 없어 세 차례나 빈 배로 운항하게 되자, 세창양행은 조선 정부에 손해배상을 청구해 5000원을 받아냈다. 1887년 세창양행은 조선 정부에 연리 12%의 고리로 차관을 제공하고 독일 기선 2척의 구매를 대행했다. 세창양행은 조양호와 창룡호라 명명된 두 기선의 운항 역시 대행했다. 세창양행이 자체 자금으로 사서, 자체적으로 운항한 기선 사업에 조선 정부가 차관을 얻어 명의를 빌려준 셈이었다... 조선 정부를 상대로 한 이권 사업 전체를 놓고 보자면 매년 엄청난 액수의 흑자를 보았다."
http://blog.naver.com/efsofa7/140089203681
당대 상인들이 자본주의 경제가 발달하지 않은 조선에서 장사를 해봐야 별 이문이 남지 않았다. 손해만 보지 않아도 다행이었다. 하면, 역점을 둔 분야는 무엇이었는가. 국책사업이었다. 세창양행의 방식은 당대 국유본 자본의 전형적인 방식과 다를 바가 없다. 가령 동인도회사를 발전적으로 해체한 국유본은 중국에 HSBC와 스탠다드차타드 등의 은행을 운영한다. 이들 은행은 중국 정부에 자금을 빌려주고, 그 자금으로 자신들의 무기나 상품을 구매하게 했다. 이처럼 당대 중국, 조선은 물론이요, 투르크 왕조도 개혁에 적극적이었음에도 왜 나라가 망했는가. 국유본 때문이다. 국유본의 세계 전략상 이들은 망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 국유본은 오직 지정학적인 이유로 일본을 키운 것이다. 일본은 그 대가로 성심껏 국유본을 위한 포르노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인월리가 그간 일본 포르노를 많이 강조한 탓일까. 뚜렷한 증거도 없이 국유본 언론이 한국을 비난한다.
한국은 정욕의 나라 1위
http://polinews.co.kr/viewnews.html?pa ··· %3D99135
묄렌도르프는 왜 해리 파크스나 토머스 블레이크 글로버와 다른 길을 가야했을까. 고종은 이미 영국이 일본을 지원하여 조선을 삼킬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허나, 대안이 없었다. 청 역시 이홍장에서 보듯 국유본의 손아귀에서 움직이고 있었을 뿐이다. 여기에 저항한 이가 묄렌도르프였던 것이다. 그는 조선을 위해 투쟁한 인물이다. 이홍장으로서는 청보다 조선을 위해 일하는 묄렌도르프를 해고시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는 재정고문으로 민씨 세력의 지지를 받았으며 당오전(當五錢)을 발행하여 재정문제를 해결할 것을 주장하였다... 일본 주재 러시아 공사 스페이에르와 결탁, 한국에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였다 하여, 외무협판에 재직 중인 1885년, 이홍장의 압력으로 해임되었으며, 한국을 떠나 중국 닝보[寧波]에서 죽었다. 한국 역사에 조예가 깊었고 만주어에 능통하였다."
http://100.naver.com/100.nhn?docid=64099
고종은 묄렌도르프의 노고를 잊지 못했던 것일까. 이후 독일계 러시아인 손탁을 크게 신임한다.
"문헌상으로 고증 가능한 최초의 커피 음용 기록은 고종이 아관파천(1896년) 당시 러시아 공사관에서 커피를 마신 것이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의 처형인 안토니에트 손탁이 만든 양식을 즐겨 먹었고, 러시아 공사관에서 직접 볶은 원두커피에 맛을 들였다. 덕수궁으로 환궁한 뒤에도 정관헌에서 사발로 음미할 정도로 커피를 좋아했다고 한다."
http://news.hankooki.com/lpage/health/ ··· 4520.htm
당대 독일인과 조선인은 동병상린이었다. 국유본으로부터 선택받지 못하고 지정학적 악역의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는 절망감. 그 절망에서 희망을 찾으려 노력하나 수포로 되돌아가고 마는 것이다. 해서, 진한 커피향이 절망을 달래줄 수 있었을까?
한국관광공사 사장 이참에게 묻는다. 그대는 진심으로 대한민국을 위해 일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아니면, 국유본의 지시를 받아 자신의 삶을 낭비하고 있는 것인가. 진심으로 일을 하시라.
예서, 인월리는 진지하게 여러분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 상황이다. 노선이니, 이념이니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이미 국유본은 조선 침략, 조선 식민지, 조선 분단, 한국 전쟁을 계획했다. 하면, 그대는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왕은 노예들에게 말했다. 돌을 성문 앞까지 운반해도 죽고, 운반하지 않아도 죽는다. 단, 돌을 운반할 때까지는 죽이지 않겠다. 그러자 노예들은 모두 돌을 들고 성문 앞까지 가서 죽었다.
통일은 원하든, 원치 않든 찾아올 것이다. 그대, 그때 무엇을 할 것인가. 어차피 노예이므로 노예의 삶이 편하다고 여길 수 있다. 허나, 1%의 확율로 노예가 아닌 길을 생각한다면, 그대에게는 노예의 삶보다 험난한 길이 닥칠 것이다. 준비되었는가.
추신 : 제 2외국어로 팔십년대까지 독일어가 우세했지만, 구십년대 이후로 일본어가 우세하다가 최근 아랍어가 우위인 것이 단지 쉽게 출제해서 점수 따기 좋은 것이 이유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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