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초 병인양요 음모론; 병인양요 원인은 천주교 박해와 무관하다; 병인양요 일타삼피, 메이지유신 성공, 흥선대원군 쇄국강화, 중국 양무운동 지원 ; 국제유태자본론이 동아시아 근대사를 말한다 국유본론 2013

2013/11/10 10:09

http://blog.naver.com/miavenus/70179019572

   

   

    

   

국제유태자본론이 동아시아 근대사를 말한다;

세계 최초 병인양요 음모론;

병인양요 원인은 천주교 박해와 무관하다;

병인양요 일타삼피, 메이지유신 성공, 흥선대원군 쇄국강화, 중국 양무운동 지원 

국제유태자본론 : 인드라 월드리포트 13/11/10

   

* 티스토리에서 인드라블로그에 대해 스팸블로그라며 탄압이 들어왔습니다. 아마도 근래 글들이 다음 네티즌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주는 듯합니다. 유입경로로 봐도 티스토리에서 인드라 블로그로 많이 들어왔습니다. 해당 운영자가 잘 해결하길 바랍니다. 아울러 글을 옮길 때에는 교정이 필요하니 24시간 이후에 옮겨주시길 바랍니다.

   

   

철종 조에는 천주교에 호의적인 정조 개혁 계승세력인 안동김문이 세도정치를 행하고 있었습니다. 안동김문이 장악한 조선 조정일 때는 천주교에 대해 관대하여 한번도 천주교를 박해한 적이 없었습니다. 또한, 흥선대원군 부인도 천주교인이니 고종조 초 흥선대원군의 조선 조정도 천주교를 묵인하였습니다. 해서, 베르뇌 주교, 리델 신부 등의 프랑스인 선교사가 많이 들어와 포교에 힘썼으므로 1861년에는 천주교인 수가 1만8천 명, 1865년에는 2만3천 명을 헤아리게 되었습니다.

     

1866년 1월 정월에 흥선대원군은 풍양조문 조대비파의 압력을 더 이상 이기지 못하고 전국에 천주교 탄압령을 시행합니다.  당시 조선에 머무르고 있었던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이 처형됩니다. 지방에 있어서 살아남은 프랑스 선교사 3명 중 하나였던 리델 신부는 1866년 5월 8일 탈출에 성공하였습니다. 리델은 7월 6일 청 주푸항에 도착했는데 프랑스 극동함대사령관 로즈 제독은 톈진에 있었습니다.

     

헌데, 당시 프랑스 극동함대기지 본부는 일본 요코하마에 있었습니다. 대개 한국 병인양요 설명에는 이상하게도 이 부분을 의도적으로 빼거나 생략하는 편이어서 프랑스 극동함대 기지본부가 텐진에 있는 줄 착각합니다.

     

1866년 일본 막부는 주일 프랑스대사를 통해 막부 부대 근대화를 위한 프랑스 군사고문단을 초빙하였습니다. 군사고문단이 만든 전습대라는 신식 부대도 있었습니다. 막부군은 프랑스 식 군복을 입고 프랑스 식 거점 방어전술을 익힙니다. 나폴레옹 3세는 일본에 총 2,000정을 선물합니다.

     

리델은 톈진으로 직행하여 조선에서 발생한 프랑스 신부들의 처형소식을 전하고 생존해 있는 다른 신부 두 명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즉각 함대를 출항시켜줄 것을 요청합니다. 로즈 제독은 인도차이나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주력함대가 돌아오는 대로 조선 원정을 단행할 것을 약속합니다.

     

로즈 제독에게서 조선에서 일어난 천주교 박해에 대해 보고받은 북경의 프랑스 대리공사 벨로네(Henri de Bellonet)는 청나라 총리아문대신 공친왕 혁흔에게 다음과 같은 서한을 보내 항의하며 조선 정벌의 결의를 표명했습니다.

     

"우리는 소왕국 조선에서 저질러진 끔찍한 폭행사건을 전하게 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프랑스 황제폐하는 이 같은 잔인한 폭행을 묵인하지 않을 것이다. 조선 국왕이 우리 프랑스인을 체포한 바로 그날 그의 치세가 끝나게 될 것이다. 수일 내 우리 군대가 조선을 정복하기 위해 진군할 것이다. 이제 우리 황제폐하만이 조선의 장래와 공석이 될 조선 왕위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될 것이다."

     

하지만 청나라 측은 "조선은 비록 청과 조공을 하는 나라이지만, 예로부터 내정과 외교는 자치적으로 행해 왔다."라는 내용을 담은 답신을 보내, 사건이 청나라와는 무관함과 향후 이에 대해 어떤 일이 발생하더라도 청나라 정부는 간섭할 수 없음을 프랑스 공사관 측에 통고했습니다. 한편 청나라를 통하여 프랑스의 침략 의사를 전해들은 대원군은 탄압을 더 심하게 하는 한편 변경의 방비를 더 굳게 하였습니다.

     

예서, 벨로네는 중대한 실책을 저지릅니다. 상부 보고없이 임의로 나폴레옹 3세 이름으로 청에 서한을 보냈을 뿐만 아니라 로즈제독에게 조선 침공을 지시합니다.

     

다시 말해, 병인양요는 프랑스 나폴레옹 3세의 결정이 아니라 중국대리공사 베르네의 독단 결정과 이를 알고도 지시에 따른 로즈제독의 오판이었다는 것입니다.

     

1866년 음력 9월 로즈 제독이 인솔하는 프랑스 군함 3척이 리델 신부와 조선인 신자 3명의 안내로 오늘날의 인천 앞바다에 다다릅니다. 순무영에서 프랑스 함대에 격문을 보내니 선교사가 죄없이 죽었으므로 때문에 왔다고 주장하면서, 죽은 프랑스 천주교회 선교사 9명에 갈음하여 조선인 9천 명을 죽이겠다고 협박하였습니다.

     

1866년 10월 26일(음력 9월 18일) 지금의 마곡철교 하단부를 통과하여 한성부(서울) 근교 양화진(楊花津)·서강(西江) 일대에 진출했습니다. 이에 조선 정부는 급히 어영대장 이용희를 파견하여 한강 연안 경비를 강화하였습니다. 프랑스 함대에서는 3척의 소함대로써 도성의 공격이 곤란함을 깨닫고, 그 부근의 지형만 정찰하고 11월 2일(음력 9월 25일)에 청나라로 물러났습니다. 조선 정부는 전국 산포수(총으로 산짐승을 잡는 사냥꾼)를 불러모으는 등 더욱 군비를 갖추고 한강 일대의 경비를 엄하게 하였습니다.

     

흥미롭게도 프랑스군은 흥선대원군에게 충분한 준비를 하도록 시간을 넉넉하게 주었습니다. 

   

     

하나, 베르네가 청을 통해서 조선을 침공할 것임을 알렸습니다. 청은 이를 재빠르게 흥선대원군에게 통보하였습니다.

     

둘, 로즈제독은 수도 점령군이라고 하기에는 공격력이 빈약한 소함대를 끌고 마포 일대까지 가서 무력시위를 했습니다. 서울 한양에서는 피난가야 한다고 할 정도로 떠들썩할 정도였습니다.

     

셋, 청에서 침략 사실을 알려주며 잘 대처하라고 하여 명분을 획득한 데다 프랑스군이 실제로 무력시위를 하니 조대비와 안동김문, 흥선대원군 삼각권력 지분에서 흥선대원군 지분이 극히 적었는데 병인양요로 인해 권력 지분이 흥선대원군 쪽으로 급격 쏠리게 됩니다.

     

1866년 11월 17일(음력 10월 11일) 로즈 제독은 프리깃함 게리에르(Guerrière)를 포함한 7척의 군함과 프랑스 극동함대 기지 본부가 있는 일본 요코하마에 주둔해 있던 해병대 300명을 포함한, 도합 1230여 명 가량의 해병대를 동원해 다시 강화도 부근의 물치도(勿淄島) 근처로 공격합니다.

        

     

[본문스크랩] 병인양요-프랑스군 일지 카프카 / 기억하고 싶은 글 2013/11/10 06:20 작성자: 인드라(miavenus) http://blog.naver.com/miavenus/memo/70179016042

   

   

다음 인용한 글들은 병인양요에 참전한 프랑스군 일지 중 일부입니다. 하고, 인드라가 그에 대한 주석을 달았습니다.

     

"한양공격에 이견

     

강화읍은 점령되었다. 당연히 조선 사람들은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계속 밀고 나갔어야 했고, 당시 우리는 서울을 공략하기에 충분한 군사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첫 번 원정때처럼 서울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여러 장교들이 이 같은 의견이었다. 그러나 다른 장교들은 반대의견이었다. 우리들이 할 만큼 했으니, 분명히 조선 정부가 교섭하러 올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들이 훨씬 더 유력했다. 제독은 후자의 의견을 따르기로 하고 강화에 그대로 있기로 결정을 내렸다. 아아! 슬프다! 이 같은 연약성. 이런 망설임이 프랑스의 명예에 치명타를 입히게 될 줄이야! 병력의 일부를 갑곶이 마을에 남아 있었고, 나머지 병력은 강화읍에 포진했다. 그리고 요새를 쌓는 일과 참호를 만드는데 모든 사람들을 이용했다. 역할이 뒤바뀐 것이었다. 공격을 하러 왔는데, 공격에서 성공을 거두고 나자 프랑스군들은 요새에 틀어박혀서 방어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나는 여기서 이고장 토산물들의 특성에 관해 언급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면 상당히 길어 질 것이다.

     

따라서 일반적인 느낌을 표현해 주는 단 한마디의 말로 전체를 요약해본다면 이 고장은 아름답고 변화가 있으며 풍요롭다. 장교들과 병사들은 이 지방의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을 경탄했다. 이같은 말들을 종종 들을 수 있었다. 얼마나 기후가 좋은가! 참 풍요로운 나라야! 안남을 정복하는 대신에 이곳에 자리를 잡았었더라면!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 프랑스군은 섬 안을 구경 다녔다. 그러는 동안 조선 사람들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혹시 협상을 시작하게 되면 자신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대원군은 저항하기로 결심을 했다."

     

로즈제독은 곧바로 마포까지 나아가 해병대를 상륙시켜 도성을 공략하면 성공했을 충분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조선군 전력이 보잘 데 없었기 때문입니다. 둘 다 대포와 총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사거리 면에서 프랑스 군이 월등하게 앞섰기 때문입니다. 또한, 마포에 전진기지를 둔다면 보급에도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로즈제독은 자신이 마치 몽골군에 대항하는 삼별초라도 된 듯 강화유수부를 점령하고 요새 방어에만 힘을 씁니다^^! 하고, 부하들에게는 마치 상부에서 한양 공격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허나, 상부 명령없이 독단적으로 행한 것이 조선 침공이었습니다. 당연히 상부 명령이 없습니다.

     

     

   

"전등사 전투, 해군대령인 올리비에 장이 전등사 원정의 지휘권을 맡았다. 1백60명의 상륙대원, 이들을 지휘하는 장교들, 군대의 산보정도로 그저 바람이나 쐬고 눈요기나 할 겸 전등사로 가려는 몇몇 다른 장교들과 함께 원정대를 이루었다. 콜리에싸는 안에 들어가서 구경하던 부하들을 기다리기 위해 성문에 남아 있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며칠 전에 들렀기 때문에 이 절과 절로 가는 길을 알고 있었다.

     

전날 2대의 포를 끌고 가기로 결정했으나 밤 사이에 생각을 바꾸었는데 아마 대포를 소용이 없거나 혹을 거추장스럽다고 생각해서 바꾼 것 같았다. 원정 대원들은 하루분의 식량을 갖고 상오 7시게 출발했다. 강화읍 성벽 밑을 통과 했는데 이곳에는 전날 저녁에서야 결정이 내려 졌기 때문에 이 전등사 원정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던 도즈리 분견대 정찰대가 있었다. 병사들을 지치지 않게 하기 위해 때때로 조금씩 휴식까지 취해가면서 꽤 폭이 넓은 길 위를 천천히 행진했다. 조선 사람들을 별로 만나지 않았는데 이들 중 대부분은 프랑스 병사들을 보고 도망쳤고 하나건 둘이건 누구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고 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724061&cid=4513&categoryId=4513

     

"36명 중상 신음

     

그러나 추격임무를 맡았던 병사들은 『그 조선사람이 도대체 어떻게 됐는지를 모르겠으며, 마치 땅속으로 숨어 버린 것 같았다.』고 하였다. 어쨌든 그가 사라져버린 것은 사실이다. 조선 사름들은 잘 달리며 산을 오르거나 내려 오는게 매우 재빠른데 특히 사냥꾼들이 그렇다 성문까지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을 때 가까이 접근해서 성문 안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모두를 쉬게 하며, 또한 앞서 사라졌던 선발대를 기다리기 위해 본대는 정지했다. 선발대는 뒤처져 있었다. 이 선발대는 협곡으로 들어선 후 다른 지점으로 해서 성벽에 접근했다. 절 안에 있는 것은 완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쓸데없이 성문 너머를 주시했으나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아 그 안에 조선 군인들이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기까지 했다. 성벽 가까이에는 정확히 말해 허수아비같이 보이던 한두 사람만의 머리가 보였는데 공격신호를 하기 위해 살피고 있던 지휘관이 분명했다. 잠시 후 나팔소리가 들리자 프랑스 병사들은 각자 자신의 위치로 돌아갔다. 접근조 몇 사람을 보냈고 이들은 앞장서 나갔다. 나머지 대원들은 밀집종대로 그 뒤를 따랐다. 우리는 저항 없이 입성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주저하고 있다가 미리 대비하는 것을 소홀히 했으며, 이 같은 상황에서 필요로 하는 전략적인 준비도 소홀히 했다. 선발대 역할을 하던 정찰대원들(접근 임무를 맡은 대원들)이 성문에서 몇 m밖에 안되는 곳에 있었고 본대의 선두는 약 30m 거리에 있으면서 점심식사를 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성벽 전체로부터 일제 사격이 가해졌다. 사격은 아주 맹렬했다.

     

갑작스런 공격으로 기습을 당한 프랑스군은 멈췄다가 사방에서 반격을 가했다. 그러나 우리들이 있던 곳은 몸을 숨길만한 데가 전혀 없이 조선인들의 총탄에 노출되어 있으니 얼마나 불리한 위치였던가! 반면에 성곽 뒤에 숨어 있는 적군은 감시구로 사격을 해댔기 때문에 머리꼭지만 내보였다. 사격을 가한 후 프랑스군이 맨 처음 취한 동작은 거리를 두는 것이었다. 지휘관들의 명령은 아랑곳하지 않고, 병사들은 각자 재빨리 본능적으로 성벽으로부터 거리를 두었다. 사실상 사격을 해봤자 전혀 소용이 없어서 사격중지 명령이 내려졌다.

     

우리는 적군의 사격 속에서 조금씩 후퇴했다. 드투아르씨는 부하 소총수들을 짚더미 뒤로 올 수 있었고 그렇게 해서 조선인들의 위험스런 출격을 막아냈다.

        

     

선발대장 사경

     

또한 그는 짚더미 뒤에서 36명이나 되는 많은 부상자들을 나르던 병사들을 엄호해 주었다. 조선군의 사격은 계속되었고, 이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밖으로 출격하려고 했으나 지휘관들이 반대하는 것 같았고, 프랑스군의 사격 또한 이들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막았다. 그 순간에 마치 맹수에게 쏘듯 그를 겨누고 퍼붓는 조선군의 사격을 받으며 성벽에서 별로 떨어져 있지 않은 산에서 급하게 내려오는 사람이 보였다. 누군가 『프랑스인이다』라고 소리를 쳤다. 그를 엄호하러 몇 사람이 앞으로 갔다. 몇 분이 흘렀다. 얼마 후 그 사람은 맞으러 갔던 라게르씨의 양 팔에 들려 있었다. 그 사람이 자기 혼자서 너무 앞으로 전진했던 선발대 지휘관 드 라살르 씨임을 알아 볼 수 있었는데, 위독한 정도로 부상을 당했다.

     

     

조금씩 부상자들을 절의 성문과 마주보이는 곳인 적군의 총탄과 포탄이 미치지 않는 나지막한 언덕으로 후송했다. 올리비에 지휘관은 전 부대를 이 언덕으로 모이게 했다. 여기서 성벽위에 서서 거칠게 고함을 쳐대는 조선 사람들을 볼 수 있었는데 그게 그들의 승전가 소리였다. 조선군은 자신들이 거둔 승리의 기쁨에 취해 있었고 그토록 쉽게 해낸 것에 놀라고 있었다. 이들은 주시할 시간은 충분했다. 36명의 부상자와 이들에게 붕대를 감아줄 단 한명의 군의관 밖에 없었다. 모두 지쳐 있었다. 그리고 아무도 점심을 먹지 못했다. 장교들의 식량은 무기와 짐꾸러미를 실은 채 적진으로 달아난 노새에 실려 있었다. "

     

   

산성 공략을 하는데 대포 없이 갑니다. 만일 대포가 있었다면 먼저 포격을 해서 조선군 사기를 크게 낮출 수 있고 조선군 사상자를 낸 뒤에 프랑스군이 산성을 공략했다면 별다른 병력 손실이 없이 충분한 승산이 있었습니다.

     

이 당시 조선 군부를 살펴봅니다. 조선은 강화부성을 탈환하기 위한 순무영(巡撫營)을 금위영 산하에 설치하여 순무사(巡撫使)에 이경하, 중군에 이용희, 천총(千摠)에 양헌수를 임명합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흥선대원군 격려를 받으며 선봉 중군 이용희와 천총 양헌수는 보병 5개 중대, 기병 1개 중대를 이끌고 강화도 갑구지의 대안(對岸)인 김포 통진까지 진출해 진을 칩니다.

   

     

   

여기서 기회를 살피던 양헌수 천총은 프랑스 함대 7척이 강화도 해협을 감시하고 있음에도 군선 3척에 500명이 넘는 인원을 이끌고 달빛이 어두운 11월 5일(음력 9월 28일)을 택해 손돌목으로 강화도로 잠입합니다.

   

   

병력 구성은 강원도와 경기도 출신 관기포수 370명과 정규군(경초군,표하군) 159명과 천총 자신을 포함한 장교들이었습니다. (기록마다 다릅니다. 526명부터 549명까지...)

   

     

손돌목은 조운선이 서울로 올라가는 길목인데 물살이 굉장히 빠르고 거칠어서 수시로 배가 난파하여 인드라가 살고 있는 염창동과 더불어 유명세를 획득하고 있는 곳입니다.

   

   

양헌수는 야간에 은밀히 상륙하여 약 4 Km 안 쪽에 위치한 정족산성에 입성하여 파수, 매복합니다. 헌데, 처음부터 정족산성을 목표로 한 것은 아닌 듯합니다. 매복하기 좋은 장소를 찾다가 마침 쓰지 않아 폐성이 된 정족산성이 최적이어서 선택했다 합니다.

   

   

     

예서, 봅시다.

     

프랑스군은 40여일간 강화에 머무르면서 강화 곳곳을 약탈하고 정찰합니다. 로즈제독도 강화 여기저기를 돌아다닌 듯합니다.

     

강화유수부와 전등사가 있는 정족산성 거리는 약 15킬로입니다. 일반인이 킬로당 15분 정도 걷는 산보로 걷는다 해도 3시간 45분 정도입니다.

     

또한, 로즈제독과 대원군은 프랑스어가 되는 천주교인들을 통해 수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해서,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가 가능합니다.

   

     

로즈제독 : 대원군, 나는 상부 지시로 왔지만, 이 싸움을 지속시킬 생각이 전혀 없소.

대원군 : 무슨 개소리냐?

로즈제독 : 믿건 안 믿건 그대 자유요. 우리는 강화도 바깥으로는 나갈 생각이 없소.

대원군 : 못 믿겠다.

로즈제독 : 좋소. 그렇다면 일단 우리는 문수산성을 공략하는 척할 것이오. 내 말이 맞는가 틀리는가 보시오.

대원군 : 리얼리?

     

문수산성 공략 후

     

로즈제독 : 내 말을 믿겠소?

대원군 : 으음. 대체 내게 무엇을 요구하는 것이오이까.

로즈제독 : 아무 것도 요구하는 바가 없소. 나는 단지 부하들에게 철수 명령을 내리고 싶을 뿐이오. 이를 위해서는 약간만 도와주시면 되오.

대원군 : 무엇을 도와달라는 말인지...

로즈제독 : 강화도를 돌아다니다 보니 폐성 정족산성이 쓸만해보이더이다. 그곳에 총 잘 쏘는 병사들을 배치하여 매복하고 기다리시오. 기다렸다 내가 보낸 프랑스군에게 일제사격을 하시오.

대원군 : 우리가 이길 수 있단 말이오?

로즈제독 : 그렇소. 우리는 대포도 안 가져갈 것이오. 정찰한 결과 그곳은 민둥산이어서 은폐할 데도 없소. 매복했다가 일시에 사격하면 프랑스군이 버틸 수 없을 것이오.

대원군 : 좋소. 허나, 그것으로 끝이오? 보복은 없소?

로즈제독 : 보복은 없을 것이오. 우리는 정족산성 전투 패배 후 곧바로 퇴각할 것이오.

대원군 : 허허허. 그리 된다면야...

로즈제독 : 그대 권력이 확고하게 될 것이오. 그뿐이오? 청나라와 일본 막부에게도 승전보를 전해 그대 명성을 드높이기를 바라오.

대원군 : 그대는 패전 장수가 될 터인데 괜찮겠소?

로즈제독 : 상부 지시오. 잠시 잠수타면 될 것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좋소.

     

"말뿐인 설욕전

     

이번 사건의 결말을 알고서 제독이 보인 고민과 불안을 묘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멀리서 희미하게 총성이 들렸기 때문에, 이미 프랑스 야영기지에선 국지전이 벌어졌을 거라는 추측을 했다. 불타버린 마을위의 관측소로 이용되던 절 안에 있던 조선사람들은 국지전이 벌어졌던 전등사 쪽을 바라보며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아침에 떠나보낸 전등사 파견대의 일원으로 떠났던 노새 한 마리가 오는 게 보였는데, 여러 발의 총탄을 맞아 온몸이 피범벅이었다. 너무 걱정된 나머지 제독은 참모진 일부를 대동하고 길을 떠났다. 제독은 파견대의 선두에 오던 병사들을 만나고 참담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제독은 부상자들에게 일일이 위로의 말을 건넸고, 자신이 아끼던 장교들 몇몇이 부상자들 가운데기여 있음을 알고 매우 가슴아파했다. 저녁 무렵, 조금씩 병사들이 야영기지에 도착했다. 얼마 후 강화읍에 있던 도즈리 분견대와 함께 다음날 설욕전을 벌인다는 결정이 내려질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모두들 설욕전을 원했으며 이에 참가하고자 했다. 설욕전은 절박한 것 같았다.

     

몇몇 장교들은 공략이 쉽다고 주장했으며 전등사 원정이 성공을 거두지 못했던 것은 바로 이번 원정이 잘못 이끌어졌고 경솔하게 지휘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전투 중에 병사들은 『우리를 도살장으로 몰아 넣었다!』라고 말했다. 이는 아마도 허둥대며 도망친 것을 변명하는 말이었을 게다.

     

소총성능 월등

     

다른 병사들은 이렇게 말했다. 『1백 60명의 병사를 줘보라지, 그러면 단한명도 잃지 않고 조선군 모두를 격퇴시킬 테니까! 왜냐하면 우리가 그들보다 훨씬 멀리 나가는 소총을 갖고 있기 때문이지. 그들을 명중시킬 수 있는 적당한 거리에 자리만 잡으면 그들은 성능이 신통치 않은 소총으로 우리를 맞힐 수가 없을 것이며, 따라서 그들을 항복하게 만들 수밖에 없지! 사격거리가 훨씬 더 멀리 나가는 이점을 잦고 있는데도 왜 그 점을 이용하지 않는 거지?』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프랑스군은 양떼처럼 조선군이 숨어 있던 성벽 가까이로 접근해갔다. 이들은 엄폐물이 없이 노출된 우리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그러나 중상을 입히지는 못했는데, 그들이 명사수들이었고 단단히 무장을 했더라면 우리들 중의 누구도 모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그날 저녁에 이번 참패를 만회하고 전등사를 파괴하며 프랑스 국가의 명예를 설욕하기 위해 너무도 당연한 원정을 단행하기로 결정됐으며 모두 그렇게 하리라고 믿었다고 한다.

     

밤새도록 승선

     

그런데 로즈 제독이 도줄리 분견대에게 『떠날 준비를 하고서 강화읍의 모든 것을 불사르고 군함으로 돌아오고 요새를 포기하고 떠나라』는 명령을 냈다는 사실을 다음날 알고서 얼마나 어리둥절했으며 얼마나 놀랐겠는가! 우리는 아연 실망했다. 도주가 시작된 것이다. 우리는 패배했다. 프랑스가 조선에 의해 패주 당하다니! 그리고 그 다음날 새벽 6시에 군함들과 원정부대가 출발했는데, 출발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패주하기 시작했다."

     

     

11월 9일 프랑스군 160명이 야포도 없이 동문 남문 쪽으로 공격했습니다. 양헌수는 적이 올 때까지 포수들을 보이지 않도록 했습니다. 칼과 창 등 구식 무기만 지닌 병사들만 얼굴만 보이게 하여 프랑스군을 안심시켰습니다. 양대장은 후에 "우리 총은 사거리가 100여 보에 불과했지만, 적의 총알은 500보를 능가했다"고 정족산성 전후 있었던 일을 일지로 기록하였습니다.

   

조선 화승총 사거리인 100보 거리 이내에 프랑스 병사들이 온 연후에야 사격을 하였습니다. 일부 흥분한 병사들이 성밖으로까지 나서 추격하려는 것을 막았습니다. 조선군은 전사자 1명, 부상 4명이었습니다. 프랑스군 사상자는 조선군 장계보다는 프랑스군 일지가 더 정확할 것입니다. 전투가 끝나자 추가로 관서 산포수, 유명한 강계 포수들이 88명 도착하나 이들은 전투에 참가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조선군은 총알이 떨어졌습니다. 만일 프랑스군이 반격했다면 꼼짝없이 몰살당할 수 있었습니다.

     

허나, 프랑스군은 반격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군 장교들 반대에도 불구하고 로즈제독은 철수 명령을 내렸습니다.

     

"중국인도 놀라

     

프랑스군들과 맞서서 조선인들이 거둔 승리는 조선 정부의 대담함과 무례함 그리고 거만함만을 부추겨 놓았을 뿐이었다. 반대로 유럽의 위신은 조선에서 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실추되었을 뿐이다.

     

중국인은 실제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국에 조공을 바치는 하찮은 조선인이 어떻게 유럽인을 자기 나라에 발붙이지 못하게 막을 수가 있었단 말인가! 그런데 대중국의 백성인 우리들은 유럽인을 쫓아내며 다시 오지 못하게 막을 수가 없었다니, 수치스럽기 짝이 없군! 이런 말과 생각을 수많은 중국인들이 했다. 극동에서의 프랑스기의 명예손상과 프랑스 위신의 실추, 그리고 조선에서의 전 유럽 권위의 실추, 이것이 실패로 끝나고만 조선 원정의 결과였다."

     

병인양요 이후 주중대리영사 벨로네는 파면당합니다. 로즈제독은 중국 텐진으로 돌아갔다가 프랑스 극동함대 기지본부가 있는 일본 요코하마로 가서 1968년까지 임무를 수행하다가 프랑스로 돌아갑니다. 명령없이 무단 이탈하여 조국의 명예를 실추시킨 대역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로 돌아가서도 별다른 징계는 없었던 듯합니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로즈제독은 1869년에 부제독으로 임명되었으며, 해군 본부 협의회(Conseil d'amirauté)에서 근무하였습니다. 그는 Préfet Maritime de la Manche et de la Mer du Nord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는데 1869년에서 1871년(보불전쟁 기간과 겹침)까지 그가 브르타뉴 연안을 경비했던 그의 위치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1875년에는 지중해의 소함대 사령관(Escadre de la Méditerranée)으로 임명되었습니다. 1882년에 파리에서 사망했습니다.

     

벨로네 소식은 인터넷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당시 주일영국대사인 해리 파크스가 평생 직장 마련해주었을까요?

     

왜 패전에 대한 보복이 없었을까요?

     

프랑스가 공격당해서 보복한 사례는 중국과 일본 모두 있었습니다. 일본에서는 시모노세키전쟁이 있습니다. 일본은 항복했습니다. 프랑스는 전쟁 후 시모노세키에서는 대포를, 강화도에서는 책을 가져와 지금까지 돌려주지 않고 있습니다. 의궤에 보물이 잔뜩 있는지 알았다가 책만 있어서 바다에 다 버리고 300여권만 가져갔다고 합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중국입니다. 베트남 역시 중국 조공국 중 하나였습니다. 헌데, 청은 조선과 달리 베트남에 대해선 권리를 주장하여 프랑스와 전쟁했다 진 것입니다.

     

청프랑스 전쟁이 있었습니다. 1884년 8월 5일 프랑스 극동함대는 사령관 쿠베르를 앞세워 타이완의 지룽[基隆]의 청국 진지를 공격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 극동함대는 상륙을 실패하였고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프랑스는 청나라에 배상금을 요구하였다가 거절당하자 8월 21일 다시 푸저우[福州] 및 민장[閩江] 연안을 공격하였습니다. 민장은 청나라 복건성 해군이 주둔하는 곳으로 수군이 운용하는 선박들이 거의 괴멸되었습니다. 이 전투를 '마강전투(馬江戰鬪)'라고 하며 청나라에서는 이 전투를 통해 근대적인 함대를 구축해야 된다는 자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1885년 초에는 프랑스 해군이 닝보[寧波]를 봉쇄하고 펑후군도[澎湖群島]를 점령하는 등 청국 해군을 압도하였습니다. 1885년 3월 청나라 정부는 톈진[天津]에서 프랑스와 강화조약을 체결하였고, 결국 베트남에 대한 프랑스의 보호권을 인정하였습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프랑스군이 조선을 식민화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반면에 베트남은 식민화할 생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청 역시 이러한 움직임을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하면, 이러한 미묘한 외교적 움직임을 알 수 없을까요? 있습니다.

     

"현재 프랑스 고등 사회 과학 대학원[EHES]에서 박사 과정에 있는 피에르 엠마뉴엘 후[Pierre Emmanuel Roux]씨가 집필한 십자가, 고래, 그리고 대포[La Croix, La Baleine et Le Canon, Ed. Cerf] 라는 저서다. 부제목은 19세기 프랑스의 대조선 정책으로, 피에르 엠마뉴엘씨는 현재 파리의 동양언어 대학인 이날꼬[Inalco]에서 한국어와 한자를 가르치고 있다. 그는 중국학을 연구하다 자연스럽게 한국학을 접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한국어를 완벽하게 구사하고 있어 인터뷰 내내 프랑스말 한마디하지 않아도 되었다. 막히는 단어가 있으면 불어를 사용하지 않고 생각할 시간을 가지면서 어떻게 하든지 한국어로 설명해주려고 했었다. 그가 이번에 출간한 저서, 십자가, 고래, 그리고 대포는 역사 저서치고는 제목부터 남달랐다. 이는 한국학 석사 논문을 바탕으로 여러 차례 수정을 가한 것이라고 한다. 기독 서적을 주로 발간하고 있는, cerf 출판사는 책 제목을 보고는 바로 계약을 하자고 했다.

     

지도 교수가 그에게 준 주제는 프랑스인들이 당시 왜 조선에 갔을까였다.

     

외규장각 도서 약탈이 있었던 병인양요는 우리가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원인인 프랑스 선교사 박해는 핑계일 뿐이라고 피에르 엠마뉴엘씨는 이야기 했다. 그는 1840년부터 있었던 프랑스 외교 고문서를 몇 달에 걸쳐 읽었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프랑스는 당시 동아시아에 식민지 건설 계획은 없었다. 하지만 영국이 아편전쟁에서 승리하고 다른 유럽 나라들이 아시아권 나라에 세력을 확장하는 것을 보고는 힘이 약해질 것을 우려해 덩달아 나선 것이라고 한다.

     

그가 책을 소개하면서 들려준 병인양요가 일어난 발단, 즉 1866년 프랑스 함대가 조선에 간 이유는 4가지로 볼 수 있다. 먼저 당시 프랑스의 표적은 조선이 아닌 중국이었다. 병인양요시 프랑스 군인은 상하이와 광주 주둔하고 있는 이들로, 고작 5백명이었다고 한다, 피에르 엠마뉴엘씨는 오백명으로 어떻게 한나라를 공격할수 있냐는것, 그래서 당시 조선은 북경으로 향하고자 했던 프랑스인들의 다리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그다음 책 제목에서도 언급했다시피 고래는 상하이 프랑스 공사가 조선 바다에 고래가 출몰하기에 잡으로 간다고 했다고 한다. 실제로 1850년대에 조선 바다에 고래가 나오기는 했었다. 하지만 이내 사라졌다. 세번째 러시아의 남하 진출을 방해하기 위한 것이었다. 1853년부터 1856년까지 러시아와 유럽 연합 국가들과의 크림 전쟁 이후 러시아와 프랑스는 대립 관계였다. 그리고 네번째는 1860년대 중국에 있는 선교사들이, 정부에 의한 박해가 아닌 암암리에 살해되는 일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에 중국에서 활동하는 서양 선교사들을 보호하기 위해 조선에서 대포를 쏘며 프랑스의 힘을 보여주는 대포 정책을 편 것이다. 그래서 책 제목에 대포가 들어간 것이다. "

http://parisjisung.com/news.php?code=&mode=view&num=9964

     

     

피에르 엠마뉴엘 후와 인드라는 병인양요 원인이 병인박해 때문이 아니라는 데에 의견이 일치합니다.

     

인드라가 병인박해 때문에 병인양요가 발생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하나, 기해박해 때도 3명의 프랑스 선교사가 죽었지만, 프랑스 정부는 아무런 조치를 취한 바 없습니다.

     

둘, 기해박해 때와 병인박해 때 프랑스정권이 다르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나폴레옹 3세가 제국주의 정책을 취했으니 조선 식민화 야욕이 있을 수 있습니다. 허나, 병인양요 침공에는 나폴레옹 3세 의중이 공식적으로는 없습니다. 중국주재 외교관과 지역 사령관이 저지른 독단적인 행동일 뿐입니다.

     

셋, 피에르 엠마뉴엘 후와 일치하는 의견인데, 이 당시 프랑스 제국주의 정책은 전적으로 영국 정책을 순응한 데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실 당대 프랑스는 영국, 프러시아, 오스트리아, 러시아와 함께 5대 강국으로 알려졌지만, 계속되는 혁명과 쿠데타 속에서 스페인, 포르투갈처럼 국력이 약화되고 있었습니다.

     

당시 해외팽창을 고려할 국가는 영국과 러시아 정도였습니다. 당시 프러시아나 오스트리아가 프랑스만큼 힘이 없어서 팽창정책을 추구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헌데, 국유본이 나폴레옹 3세에게 힘을 실어주는 듯하자 프리메이슨이었던 나폴레옹 3세가 '국유본이 나한테 홀딱 반했다' 착각하고 일을 진행시키다가 역시 국유본 지원을 받은 프러시아 비스마르크에게 뒤통수 제대로 맞은 것이 보불전쟁이었던 것입니다.

     

국유본은 시기적으로 흥선대원군, 나폴레옹 3세, 비스마르크, 쪽발이토처럼 적당하게 힘을 실어주다가 어느 순간 확 돌아선다는 것입니다. 이때 당황하면 카다피, 아사드. 차베스, 베를루스코니, 쪽발아베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병인양요는 프랑스의 의지보다 영국의 의지, 국유본의 의지가 더 들어간 것입니다.

     

그렇다면 국유본은 병인양요로 무엇을 노린 것일까요?

     

인드라가 세계 최초로 병인양요 정설보다 강력한 병인양요 음모론을 일타삼피로 설명합니다.

     

   

하나, 국유본은 일본 메이지유신 성공을 원했습니다.

     

당시 국유본은 해리 파크스와 토머스 글로버에게 임무를 맡겼습니다. 참고로 1866년 당시 국유본은 겉으로는 영국 귀족 프리메이슨이 여당이고, 로스차일드 유대인 조직이 야당인 결합체였지만, 속으로는 반대로 로스차일드 유대인 조직이 여당이고, 영국 귀족 프리메이슨이 야당인 국제조직이었습니다.

     

해리 파크스가 유대인이 아니더라도 사순-로스차일드 라인이라면 토머스 글로버는 프리메이슨 라인입니다.

     

1866년은 막부의 2차 조슈정벌이 파크스-글로버 힘으로 실패로 돌아갈 때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메이지유신 관련 포스팅을 이토 히로부미를 중심으로 한 번 더 구체적으로 기술할 예정입니다.

     

이 시기 삿초동맹이 파크스-글로버 주도로 역할이 뻥튀기된 마름꾼 사카모토 료마에 의해 성립이 됩니다. 일본에서 사카모토 료마를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생각하는데요. 사실 역할이 소설 등으로 굉장히 과장된 겁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파크스-글로버가 해낸 일 대부분을 사카모토 료마에게 집중시키니 사카모토 료마가 신처럼 보이는 것이지요. 사실 사카모토 료마가 한 일이란 별 게 없습니다. 언론이 만들어낸 불쌍한 우상일 뿐입니다. 냉정하게 사카모토 료마를 판단할 줄 아는 일본인들이 소수 있겠지만, 대다수 쪽바리들은 쪽발왕에게 원전 문제를 제기한 국회의원에게 하듯 비난하겠지요.

     

하면, 병인양요가 일본 정세에 어떤 역할을 한 것일까요? 당대 한일간에서는 임진왜란 이후 한참 지나서 한일교류가 재개되면서 '서계'로 연락을 주고받았습니다. 조선 국왕이 일본에 내리는 것인데요. 조선도 많이 헛갈렸나 봅니다. 수신자를 왕으로 했다가 쇼군으로 했다가 왔다리갔다리 했습니다.

     

헌데, 조선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는 소식이 알려지니 어떠합니까. 당시 막부군은 2차 조슈정벌 실패에 대한 자각으로 프랑스 군사고문단을 받아들여 프랑스식으로 전습대를 만들어서 훈련하고 있었습니다.

     

전습대에 대한 두려움은 삿초동맹군에게 컸습니다. 전장 승패를 좌우하는 승부처일 정도였습니다. 헌데, 전습대에 대한 두려움을 떨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정신적으로 크게 고무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조선도 하는데 우리라고 못할까 하는 자신감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아무리 병력이 많고 장비가 좋더라도 군사기가 낮으면 예측 못 할 패배를 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늘이 우리를 돕고 있다 생각해야 승리합니다.

     

막부군과의 전쟁에서 삿초동맹군은 각 지역에서 끌어들인 막번 농민병사들에게는 아무런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또한, 막번 소속 사무라이들에게도 큰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막부 말기 사무라이들이란 수백 년간 평화시대를 통과하면서 행정직으로 전환하였기에 무늬만 사무라이였습니다. 또한, 검술학원에서 검술을 익혔다고 하더라도 실제 전투를 겪은 이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극소수를 제외하고서는 단지 돈만 노리고 사무라이로 위장한 뜨내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이를 보통 낭인이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말로만 수백을 죽였다는 전설적인 소드마스터 사기꾼들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알고 있다면, 그건 대부분 쪽발 애니 영향 때문입니다. 한국 사극 영화 드라마가 진실을 얼마나 포함하고 있습니까. 한국 사극 영화 드라마보다 열 배 정도 뻥튀기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총알을 피해 날라다니는 사무라이 검술^^? ㅋㅋㅋ

주모, 여기 일뽕 한 사발 주시오~! 취한다!!!

     

해서, 해리 파크스와 토머스 글로버가 작정했다면?

     

영국이 한마디를 하니 대마도를 점령했던 러시아군이 순식간에 물러납니다. 이 당시에 러시아는 동아시에서 영국이 말하면 다 들어주고 싶을 뿐입니다.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는데, 그저 영프연합군의 베이징 함락을 참관한 것뿐인데, 1860년 텐진회담에만 참가했었는데, 연해주를 그냥 주었습니다. 사실 프랑스도 마찬가지 신세입니다~!

     

영국-사쯔마 전쟁에서 영국은 사쯔마를 작살냅니다. 시모노세키전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해서, 막부로서는 영국이 자기 편이 된다면 눈물나게 고마운 노릇인 것입니다. 헌데, 영국이 꿈쩍하지 않고, 프랑스만 반응하니 프랑스 군사고문단을 초빙한 것입니다.

     

해리 파크스와 토머스 글로버의 사석작전이라고나 할까^^!

     

     

둘, 국유본은 흥선대원군의 성공을 원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국유본이 당시 조선에 관심이 없었다고 알고 있지만, 정반대입니다. 국유본은 조선에 엄청나게 관심이 많았는데, 이유는 이스라엘과 같은 족속들이어서 다루기 힘들다고 여겼다는 것입니다.

     

군주가 부국강병 원하지 않고 신하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세계 모든 나라들 군주와 신하는 부국강병을 원합니다.  허나, 유일하게 이에 대해 반대하는 족속들이 사는 나라가 있으니 하나는 성경 속의 이스라엘이고, 다른 하나가 조선이었습니다.

     

공맹사상으로 살아가는 나라라니 원조 중국보다 더 철저하니 놀랠 노자인 것입니다. 이는 율법으로 나타나는데요.

     

오늘날 유대인은 성경에서 말하는 바리새인들입니다. 역사를 보세요. 기원 전후에서 유대교를 지킨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강하지요? 하고, 바리새인들은 회계, 상업에도 강합니다. 수메르 - 페니키아 - 카르타고 - 스페인 - 포르투갈 - 네덜란드 - 영국 - 미국으로 이어집니다. 성경에 나오는 유대인들이 오늘날 유대인이라구요? 아니죠. 목동 유대인들은 상술에 무지했습니다. ㅎㅎㅎ

     

이쯤하고, 국유본과 쪽발석현은 왜 오늘날까지 쪽발스런 이덕일 같은 병쉰색희를 동원하면서까지 정조 개혁 계승세력인 안동김문을 비난하려는 것일까요?

     

여러분이 아는 흥선대원군, 안동김문은 실제보다 과장되게 비난받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국유본의 한국 근대사 입장이 뭔지 아시나요? 당시 조선 조정이 한 일 대부분을 비꼬고 부정하는 것입니다. 헌데, 흥선대원군 병인양요 대목만 보세요. 칭찬 일색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미양요는 또 어떠하구요? 의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병인양요, 오베르트 도굴, 신미양요로 이어지면서 흥선대원군 권력은 강화됩니다. 사실 이 시기는 십 년에 걸친 풍양조문 조대비 수렴청정 기간이었습니다. 조대비가 병쉰년이었던 것입니다.

     

국유본은 왜 흥선대원군 권력이 강화되기를 원했을까요? 경복궁 건설과 서원 철폐에서 보듯 흥선대원군은 세조처럼 부국강병 왕권강화 욕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인물입니다. 인드라는 흥선대원군이 조선 초기에 태어났다면 세종, 태종과 같은 역량을 발휘했을 것이라 봅니다. 동시에 안동김문 역시 조선을 개국한 정도전처럼 역량이 있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국유본은 세도정치하는 안동김문 세력을 약화시키고 싶어했습니다. 조대비 세력은 안중에 없었습니다. 쓰레기이니까요. 흥선대원군을 이토 히로부미처럼 활용하고 싶어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을 키우고 싶었습니다.

     

왕권 강화!!! 부국강병책!!!

     

허나, 착각하지 맙시다. 국유본 관심사 일순위는 일본이었습니다. 일본인이 잘 나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단지 지정학적 위치 때문입니다. 역설적으로 한국인은 지정학적 지위에 비해 인간들이 개별적으로 상당히 뛰어났기에 국유본이 분단을 시켜서 능력을 억압하는 것입니다. 다만, 이제는 세계사적으로 지정학적 요인이 해소되어 한국이 역할을 할 때가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냉정합시다.

     

1866년 기준으로 조선이 개혁개방하면 일본이 당해낼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일본이 오년 일찍 하더라도 조선이 이깁니다. 국유본이 그걸 깨달은 것입니다. 이는 정한론까지 나아갑니다. 국유본이 왜 그토록 이토 히로부미를 시켜 정한론을 반대한 이유를 말입니다. 한국을 정복하고 싶었기에 국유본이 이토 히로부미더러 자제를 촉구한 것입니다. 한국, 만만하게 보아 임진왜란처럼 대들면 역으로 일본이 조선에게 말아먹힐 것이다, 라고 판단한 것이 국유본인 것입니다. 해서, 국유본은 당대 일본에게 요구합니다.

     

한국을 삼키고 싶으면 실력을 키워라.

     

그것이 이와쿠라 신사유람단을 대한 국유본 메시지였던 것입니다.

   

     

셋, 중국 공략입니다.

     

일본을 무식하게 키우고, 한국을 쇄국으로 가게 하는 모든 이유는 중국 공략입니다.

     

동인도회사 이사진이 만든 펀드회사는 1882년 일본 채권투자를 하고, 1884년 중국 채권투자를 합니다.

     

사순-로스차일드가 중국 아편시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서태후 청국이 유지되어야 합니다. 만일 정권이 바뀐다면 기존 조약들이 무효화될 수 있고 다시 작업에 들어가야 합니다.

     

해서, 양무운동이다 해서 리홍장을 키웁니다. 쑨원도 키우지요. 후일 쑨원 비용 많이 들어가니 영국이 빠지고 일본에게 맡깁니다. 해서, 일본 흑룡회가 쑨원 자금 지원합니다. 동학도 지원하지요. 오늘날 쪽발석현, 쪽발민주당, 쪽발찌라시 쪽발걸레, 골룸빡 지원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그렇다고 이들 성공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적당한 수준에서 한국을 망치길 바랄 뿐입니다. 헌데, 여기에 인드라가 변수로 나타나서 지금 국유본이 전략 수정을 거듭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폴레옹 3세와 달리 인드라가 별다른 착각이 없거든요^^? 요즘도 꾸준하게 유혹중입니다만, 인드라가 별달리 흔들리지 않습니다.

     

인드라는 국유본에게 제안하는 것입니다.

     

국유본이여!

인드라와 함께 세상을 조직하자.

보다 인류를 아름답고 부유하고 행복하게 만들자!

     

   

해외 후원

영문은행명 : kookmin Bank

   

계좌번호 : 524968 - 11 - 001819

Jong Hwa Kim

S/C : CZNBKRSEXXX

B/A : 244-3, Yeomchang-Dong, Ganseo-Gu, Seoul, Korea 157-861

(이 주소는 인드라 집주소가 아니라 은행 주소입니다~!)

국내 후원

국민은행 524902 - 96 - 101910 김종화

길을 걸으면 생각이 난다

BY 인드라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위하여

길을 간다고 생각했었다

뒤돌아보니

우연히 누구를 만났고

낯설은 무엇이 있었다

가는 길에

우연히 만나니 반갑고

낯설게 대하니 좋았다

다시 길을 떠나려는데

내가 사랑한 것은

누구였을까

무엇이었을까

길이었을까

인드라는 정치를 하지 않겠으며,

책을 더 이상 쓰지 않으며,

언론에 기고하지도 인터뷰를 하지도 않을 것이며,

종교단체를 만들지도 않을 것입니다.

국유본론을 소명으로 여기고

지금처럼 살다

행복하게 가겠습니다

매일매일 행복하겠습니다

마음을 열고

자세를 낮추고

세상에 감사한다

마.자.세.

한반도 평화와 통일, 경제 발전과 사회 복지를 위하여

쪽발이에게 죽음을 쪽발왕에게 천벌을

친미친중 반일반북 쪽발타도해방투쟁 만세

쪽발왕 폭살하려 한 이봉창 열사 정신 이어받아

불타는 쪽발산 불량배터리를 쪽발왕 아가리에 쑤셔넣자

최고의 자살폭탄테러용 차량, 기름 새는 엔진 리콜 쪽발차를 쪽발왕궁으로 보내 폭발시키자

쪽발왕이 10초 안에 똥 못 싸면 왜놈이 중국인 노동자 다루듯 때려죽이자

쪽발왕 천한 피를 1그램이라도 보유한 왜놈들에 한해 후쿠시마산 세슘물고기를 평생 먹이자

쪽발노다랑 쪽발차 캠리를 마주보고 달리는 충돌시험시키자

쪽발아베 항문에 불법도용 유니클로 양말 수만큼 쑤셔넣자

우리에게 힘과 마법을 주세요

- 인드라 창작 뮤지컬 마법천자문 주제가

어둔 길을 걷는 이들이여

저 밝은 빛을 보아요

   

그림자 땅에서 고통받는 이들이여

스며드는 희망의 빛을 보아요

증오하는 마음으로 슬프고 아플 때마다

부질없는 욕심으로 괴롭고 힘들 때마다

우리를 상처를 낼 때마다

우리를 갈라서게 할 때마다

있는 듯 없는 듯 나타나는 바람처럼

젖을수록 더욱 맑아지는 물처럼

당신은 우리의 자랑이며

당신은 우리의 친구입니다

땅을 뒤흔드는 힘

놀랍고 신기한 마법

우리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힘과 마법을 주세요

쪽발놈현에 온몸으로 항거한 허세욱 열사와 중도좌파 민족주의자 박정희 대통령 이름으로

조국과 민족을 배반한 쪽발민주당 해체

쪽발 나팔수 네이버 주가 오백원

인민의 적, 쪽발찌라시 한경오프엠(한겨레 경향 오마이 프레시안 엠비씨) 아웃

서민 등골 빼먹는, 일인 복마전, 골룸빡 처단

한국의 야스쿠니, 쪽발놈현 무덤은 한반도에 저주를 내리는 대못이다

쪽발놈현 무덤 철거하고, 쪽발지태놈현 재산 몰수하자

빠시스트 집단, 쪽발놈현빠에게 죽음을

쪽발삼구 쪽발석현 비리엘쥐 재벌해체

쪽발정은 척살로 2013년을 통일 원년으로

친미친중 반일반북 조국통일 쟁취하자

체념 끝에 피어오르는 희망

그 희망을 죽이고서야 우리는 살 것이다

무인도에서의 처세술을 위한 친절한 가이드

인드라 블로그 운영 안내

http://blog.naver.com/miavenus/70153225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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