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유태자본론이 동아시아 근대사를 말한다 :사도세자 죽음 애도하던 시파 안동김문은 정조 개혁 계승세력; 흥선대원군은 천주교에 호의적이었다 국유본론 2013

2013/11/09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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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유태자본론이 동아시아 근대사를 말한다 :

사도세자 죽음 애도하던 시파 안동김문은 정조 개혁 계승세력;

흥선대원군은 천주교에 호의적이었다

국제유태자본론 : 인드라 월드리포트 13/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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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양요 원인으로 병인박해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천주교 박해하면 신유박해, 기해박해, 병인박해를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때, 조선시대 천주교 박해란 종교 이념적인 문제보다 당대 정치 배경이 중요했다고 합니다. 해서, 짧게 조선 후기 정치를 말씀드립니다.

   

조선시대는 외척정치를 통해 세도정치가 일반화하였습니다. 세도정치하면 부정적인데요. 본래는 국왕에게 권력을 위임받아 '정치는 널리 사회를 교화시켜 세상을 올바르게 다스리는 도리'라는 사림의 통치이념에서 나온 이상적인 정치 도의를 의미하였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조광조, 홍국영, 안동김문, 풍양조문, 대원군, 여흥민문이 있습니다.

   

헌데, 세도정치는 왕도정치를 전제하는 것입니다. 왕도정치란 맹자에 근거하는데, 맹자에 따르면 부국강병책을 패도라 비판하고 인의에 따른 정치를 강조하였습니다. 춘추전국시대 때 군주들이 전쟁으로 인민 삶을 피폐하게 만든 데에 대한 비판이었습니다. 해서, 세도정치란 왕이 야망에 취해 부국강병책으로 인의를 벗어나서 인민을 고단하게 만드는 것을 견제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해서, 세도정치란 왕의 정치가 아니라 신하의 정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목적만 달리 보면 국유본이 영국정치에 행했던 것과 일치합니다. 국왕의 권력을 통제하고 신하 권력을 강화시켰으니까 말입니다. 다만, 국유본은 부국강병을 내세운 반면, 유학자들은 부국강병을 패도로 보아 반대했던 것입니다.

   

헌데, 세도정치를 하다 보면 중종반정 이후로 막강한 권력 탓에 조씨가 왕이 되려 한다는 식으로 반역에 대한 위험이 컸습니다. 해서, 조광조 이후 사림이 요구하는 이상적인 정치를 지속하면서 안전장치가 있는 신하를 선호하게 됩니다. 그것이 외척입니다.

   

외척은 모계 친척을 의미하는데, 외척정치라 하면 왕비 친척이 세도정치의 중심이 되는 정치를 말합니다. 예서, 의문이 들 것입니다. 왜 왕의 외가만 정치를 하느냐. 왕의 친가는 어디에 있나 할 것입니다.

   

조선 초기 태종은 서자와 외척을 관리했는데요. 보통 유교 이념 때문에 서자가 정치할 수 없다고 여길 수 있는데요. 유교 이념과는 상관없이 조선 초기 왕의 배다른 서자들이 형제들의 난을 일으켜서 서자들이 왕권 도전할 수 없도록 한 것이 조선 중반 이후로 양반사회로 이어져서 관례가 된 것일 뿐, 조선 초기에는 서자 차별이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조선은 조선 초기 형제들의 난 등으로 인해 왕권 강화를 위해 종친이 정치에 관여할 수 없게 했습니다. 종친이 정치하게 되면 단종을 폐위시킨 세조 같은 사례가 나타납니다. 하고, 세조는 부국강병을 꾀한 패도정치 전형이 되어 사림의 공격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서, 인드라가 줄곧 주장합니다만, 세조가 욕심을 낸 것은 같은 시기 명나라 영락제와 세조를 동렬선상에서 비교하는 식으로 나라를 따로 볼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로 확대해서 중국과 함께 볼 때 더 잘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해서, 부국강병책을 중시한다면 왕도정치, 세도정치 등 유교 정치 자체를 비판할 수 있지만, 조광조나 홍국영을 긍정하면서 세도정치를 비판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것입니다. 반면, 안동김문이나 풍양조문, 흥선대원군, 여흥민문이 세도정치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비판할 수는 있겠습니다.

   

이러하니 외척정치는 조선 정치시스템상 필연이었습니다. 조선 역사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고 있는 임금 중 하나인 개혁군주 정조조차 외척 홍국영을 내세울 정도였습니다.

   

정조 이후 왕은 순조, 헌종, 철종, 고종으로 이어집니다. 왕비 계보를 볼까요?

   

정조 - 청풍김문

순조 - 안동김문

헌종 - 안동김문

철종 - 안동김문

고종 - 여흥민문

   

예서, 영조 계비 경주김문 정순왕후가 있구요. 사도세자 부인이자 정조 생모 풍산홍문이 있습니다. 정조 부인인 청풍김문 효의왕후가 후사가 없어 상상임신까지 할 정도여서 후사를 위해 홍국영의 동생, 원빈홍문을 들입니다. 또한 순조 생모 반남박문을 들입니다. 순조의 왕세자가 죽는 바람에 순조의 손자 헌종이 즉위하는데 헌종 어머니가 조대비 신정왕후였습니다.

   

인드라는 정조 독살 음모론에 대해서는 소설적 재미일 뿐, 근거가 없다고 보고 있습니다.

   

정조는 자신 사후에 대해 걱정을 많이 하였습니다. 해서, 정조가 사후 히든카드로 마련한 인물이 안동김문 김조순이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안동김문을 천주교 박해한 벽파로 오해하고 있는데요. 사도세자에 동정적이고 천주교에도 관용적이었던 시파입니다.

   

정조는 자신 임기 때에 사도세자 죽음에 관련된 자들을 처벌하고 귀양을 보냈습니다. 여기에는 15세에 66세 영조와 결혼한 정순왕후 경주김문도 있다 하여 정순왕후 경주김문을 벽파 중심세력으로 보고 정조 독살 범인으로 보는데요.

   

경주김문 정순왕후보다 사도세자 부인 풍산홍문 혜경궁 홍씨와 홍봉한이 벽파 중심세력입니다. 경주김문 정순왕후는 당시 한미한 가문이었는데 풍산홍문에서 뒷받침했다고 합니다. 헌데, 계비가 되자 외척가문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려다 보니 풍산홍문과 경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경주김문이 풍산홍문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열악했습니다.

   

핵심은 정조입니다. 정조는 천재적이었지만, 동시에 감수성이 매우 뛰어나서인지 사도세자 아버지 죽음에 대해 매우 비통해하였습니다. 해서, 노론이니 소론이니 남인이니 이런 구별보다 사도세자를 죽인 자들에 대한 심판을 가장 우선시하였습니다.

   

해서, 벽파 시파가 나온 것입니다. 노론소론 구별없이 사도세자 죽음이 정당하다고 하면 벽파고 사도세자 죽음이 억울하다고 보면 시파인 것입니다.

   

정조가 사도세자 죽음 책임을 물어 경주김문 풍산홍문 모두를 처벌합니다.

   

해서, 정조는 자신 사후 대비책으로 순조 비로 시파인 안동김문 김조순 딸을 삼았던 것인데요.

김조순은 흥선대원군처럼 술에 술탄 듯 물에 물탄 듯하며 처신하면서 후일을 도모했던 것입니다. 흥선대원군 모델이 안동김문 김조순이었던 것입니다.

   

정조가 정순왕후보다 나중에 죽었다면 세상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소설적 상상력이 나오는데요. 이 대목에서 인드라가 이덕일을 매우 비판적으로 봅니다. 이덕일이 하는 짓은 쓰레기 같다고 보고 있어요. 이덕일 애비가 쪽바리가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입니다.

   

정순왕후와 정조가 대립적이었다고 보는데요. 아닙니다. 정순왕후는 오히려 정조 정책을 계승했습니다. 정조도 하지 못한 노비해방도 하는 등 수렴청정 기간 4년간 개혁 정책을 하였고, 수렴청정도 4년하고 스스로 물러나 순조가 친정을 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수구반동이라든가 하는 이덕일적 쪽바리 해석이 병쉰논리라는 것입니다.

   

예서, 문제는 천주교 박해였는데요. 이는 정순왕후가 혜경궁 홍씨와 정국 주도권을 가져가기 위한 명분이었습니다. 시파를 몰락시키고자 했다기보다는 홍낙임이 천주교인임을 알고 풍산홍문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시파를 몰락시키고자했다면 당대 시파 최대 세력이던 안동김문을 탄압했어야 하는데 오히려 사이가 좋았다고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정순왕후의 천주교 박해를 책임이 없다거나 옹호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풍산홍문 혜경궁 홍씨입니다. 정순왕후가 죽자 풍산홍문을 변호하고 정조를 비난하는 '한중록'을 씁니다. 한중록 독자는 순조인 것입니다. 한마디로 순조더러 풍산홍문이 아무 잘 못이 없으니 건들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이를 위해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가 정신병자였다고 말합니다.

결국 벽파=수구꼴통=새누리당, 시파 개혁=쪽발민주당 쪽발놈현빠 정조 개혁 계승인 정조 독살설 음모론으로 보면 대체로 시파 안동김문에 비판적이니 한마디로 웃긴 이야기되겠습니다.

   

게다가 같은 집안이라고 해서 파벌이 같은 것도 아닙니다. 노론, 소론 견해가 형제끼리 다르기도 했습니다. 해서, 풍산홍문 홍낙임이 천주교도라고 해서 풍산홍문이 모두 천주교도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순조는 본디 순종이었다가 순조로 개명되는데요. 조선시대 조자 돌림과 종자 돌림 차이가 있습니다. 조자가 붙으면 나라에 재난이 많아 국난을 극복한 왕임을 의미합니다. 실제 국난을 극복했느냐 여부는 선조처럼 논란이 있어도 당대 인민 생활이 어려웠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순조 재임 시에 전세계적으로 소빙하기 막바지이기에 생활이 정말 어려워서 한중일 모두 농민반란이 급증할 때입니다. 홍경래 난이 대표적입니다. 영조, 정조 때도 임진왜란 선조 때만큼은 아니어도 살림살이가 어려웠다는 것입니다.

   

조선은 기후와 정치를 일치시켰습니다. 막바지 소빙하기로 기후가 안 좋으면 정치를 잘 못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왕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으니 세도정치를 하는 안동김문에게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에 세조는 아버지 정조와 달리 안전장치로 시파 안동김문를 견제할 풍양조문을 세자비로 들인 것입니다.

   

정순왕후가 죽고 순조가 친정하는 시기에, 혜경궁 홍씨가 1815년까지 살다 뒈졌는데, 이 시기에 인민 살림살이가 너무 어려우니 순조가 큰 부담을 느껴 자신의 장인인 안동김문을 견제하는 세력으로 풍양조문 조만영을 택합니다. 그럼에도 계속되는 궁핍함에 책임을 통감하고 헌종의 아버지,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청을 맡길 정도였습니다. 허나, 왕자는 몇 년을 하다가 일찍 죽습니다. 순조도 죽습니다.

   

이에, 헌종이 즉위합니다. 순조비 안동김문 순원왕후가 수렴청정하니 김조순의 아들이자 순원왕후 오빠 김유근이 정국을 주도합니다. 헌데, 김유근이 천주교 신자가 됩니다. 시파인데다 김유근이 천주교 신자였으니 천주교에 관용적이었습니다.

   

그러다가 1840년 김유근이 죽고, 안동김문 순원왕후 수렴청청도 끝납니다. 헌종이 친정하는데, 조대비가 어머니이니 풍산조문 영향력이 급격하게 커지고, 안동김문이 약화되는 것입니다. 예서, 기해박해가 시작되는데요. 풍양조문 조대비가 안동김문이 시파이고 천주교에 관용적이니 안동김문을 약화시키고자 천주교를 탄압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안동김문이 살아남는데요. 역시 헌종 비를 안동김문으로 하여 안전장치를 마련한 것입니다. 풍양조문 핵심인물 조만영이 1846년 죽으니 세도정치는 다시 안동김문으로 돌아옵니다.

   

세월이 흘러 강화도 도령 철종이 죽고 고종이 1863년 즉위합니다. 헌데, 고종이 왕이 되는 데에는 풍양조문 조대비 힘이 컸습니다. 향후 10년간 수렴청정하는 조대비와 흥선대원군은 안동김문 약화를 위해 손잡은 것입니다.

   

고종이 즉위하고 특이하게도 외척이 아닌 종친이 흥선대원군이 세도정치를 폅니다. 안동김문으로서는 고종이 별달리 외척도 없고 종친이야 신경을 쓰지 않은 데다가 흥선대원군 연기가 제대로 먹혀서 철종처럼 다루기 좋다고 여겼던 것인데 뒤통수 제대로 맞은 겁니다.

   

이제 문제는 흥선대원군 개혁정치인데요. 이를 위해서는 안동김문과 조대비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했던 것입니다.

   

예서, 조대비 입장은 안동김문이 시파이고 천주교에 관용적이어서 안동김문 세도정치 때에는 천주교 박해가 없었으니 흥선대원군에게 나라 기강을 세우기 위해서는 천주교 박해가 필요하다고 의견을 적극 개진하는 것입니다.

   

권력의 한 축인 조대비 측 의견은 흥선대원군에게 큰 정치적 부담이었습니다. 여기에 더 흥미로운 것은 흥선대원군 아내가 천주교인이라는 것입니다.

   

흥선대원군 아내이자 고종 어머니인 여흥민문 부대부인 민씨와 고종 유모였던 '박마르타'가 천주교 신자였습니다. 또한 흥선대원군이 남인 모두가 천주교가 아니지만, 남인=천주교라 할 수 있을 만큼 남인 중에 천주교도가 많았는데, 남인을 많이 기용했습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흥선대원군은 천주교 박해에 부정적이었던 것입니다. 허나, 바로 이 때문에 조대비가 일타삼피로 안동김문을 약화시키고, 흥선대원군 권력도 약화시키면서, 풍양조문 부활을 노리고 천주교 박해를 강력하게 요구했던 것입니다.

   

흥선대원군으로서는 난관을 돌파해야했습니다.

   

1860년 애로우호사건에 따라 톈진조약이 맺어지고 러시아가 연해주 지방을 차지하게 되면서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과 러시아는 국경을 맞대게 되었습니다. 그 뒤 러시아는 두만강을 건너와 통상을 요구하게 됩니다. 대원군을 비롯한 정부고관들은 이에 당황하였고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1864년 2월 28일에 5명의 러시아인이 경흥으로 찾아와 통상을 요구하였습니다. 이에 흥선대원군은 통상을 거절하였는데요. 1854년 러시아 선박 함경도 해안에 침입, 어민들을 살상한 일이 있어 위협을 느낀 것입니다. 헌데, 러시아 연해주에서는 1863년 13~14세대의 한인 가구가 등장해서 러시아 측에 정착하게 해 달라고 요청하니 러시아 측에서는 허가했습니다. 한인들 요청을 받아들였는데 이와 무관치 않아 보이지만, 당시에는 사정을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때, 홍봉주, 김면호, 남종삼 등 천주교인들이 여흥민문 부대부인 민씨와 박마르타를 통해 영국, 프랑스, 한국 삼국 동맹으로 러시아 남하를 막자고 흥선대원군에게 제안합니다. 그 대가로 천주교인의 자유로운 포교를 약속받는 것입니다.

   

흥선대원군으로서는 처음에 거절했지만 부인 민씨까지 나서서 배갯송사를 하니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승지 벼슬을 지낸 남종삼은 대원군에게 한불조약을 체결하여 나폴레옹 3세의 위력을 이용하면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이를 보다 구체화시키기 위해 조선에 체류하고 있는 주교 베르뇌와 만나볼 것을 건의합니다.

   

대원군은 만약 러시아를 물리칠 수 있다면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겠다는 암시를 주었습니다. 허나, 프랑스 출신으로 교황청에서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받은 뵈르네 시메온 주교는 답변을 차일피일 미룹니다. 그러다가 , 뵈르네 시메온 주교는 결국 몇 년 끌다가 뒤늦은 답변을 주었는데 '정치에 개입하지 않겠다'하고 거절합니다.

   

흥선대원군 측도 사정이 바뀌었습니다. 그 이유는 우선 한참 지나도 러시아 쪽에서 잠잠하니 러시아 위협론으로 3국 동맹 및 천주교 포교를 얻고자했던 논리가 빈약해지고 만 것입니다. 여기에 1866년 1월에 도착된 북경사신의 편지에서 영불연합군의 북경함락 이후 양민학살이 보고되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원하지 않았지만 정치적 부담을 더 안고 간다면 자신의 정치적 생명도 끝장나기에 천주교 박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병인박해입니다.

   

1866년 5월 조선을 탈출한 펠릭스 클레르 리델(Félix Clair Ridel) 신부는, 중국 톈진에 주둔한 프랑스 인도차이나함대 사령관 피에르 로즈(Pierre Roze) 제독에게 한국에서 일어난 천주교도 학살사건을 알렸습니다. 이에 보고를 받은 베이징 주재 프랑스 대리공사는 청국정부에 공한을 보내어 한반도로 진격할 결심을 표명하고, 이후 어떠한 사태가 발생하든 청국정부는 이에 간섭할 수 없다고 통고하였습니다. 청국은 대원군에게 이 사실을 알립니다. 대원군은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과 변경 수비를 강화했습니다.

   

병인박해로 인해 병인양요가 일어납니다.

   

헌데, 인드라는 병인양요 음모론을 세계 최초로 제기를 해보고픈 것입니다. 국유본이 병인양요 때 나폴레옹 3세와 협의해서 프랑스 부대의 강화도 주둔과 더불어 고의적 패배 후 한 달 만에 철수하는 각본을 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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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걸으면 생각이 난다

BY 인드라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위하여

길을 간다고 생각했었다

뒤돌아보니

우연히 누구를 만났고

낯설은 무엇이 있었다

가는 길에

우연히 만나니 반갑고

낯설게 대하니 좋았다

다시 길을 떠나려는데

내가 사랑한 것은

누구였을까

무엇이었을까

길이었을까

인드라는 정치를 하지 않겠으며,

책을 더 이상 쓰지 않으며,

언론에 기고하지도 인터뷰를 하지도 않을 것이며,

종교단체를 만들지도 않을 것입니다.

국유본론을 소명으로 여기고

지금처럼 살다

행복하게 가겠습니다

매일매일 행복하겠습니다

마음을 열고

자세를 낮추고

세상에 감사한다

마.자.세.

한반도 평화와 통일, 경제 발전과 사회 복지를 위하여

쪽발이에게 죽음을 쪽발왕에게 천벌을

친미친중 반일반북 쪽발타도해방투쟁 만세

쪽발왕 폭살하려 한 이봉창 열사 정신 이어받아

불타는 쪽발산 불량배터리를 쪽발왕 아가리에 쑤셔넣자

최고의 자살폭탄테러용 차량, 기름 새는 엔진 리콜 쪽발차를 쪽발왕궁으로 보내 폭발시키자

쪽발왕이 10초 안에 똥 못 싸면 왜놈이 중국인 노동자 다루듯 때려죽이자

쪽발왕 천한 피를 1그램이라도 보유한 왜놈들에 한해 후쿠시마산 세슘물고기를 평생 먹이자

쪽발노다랑 쪽발차 캠리를 마주보고 달리는 충돌시험시키자

쪽발아베 항문에 불법도용 유니클로 양말 수만큼 쑤셔넣자

우리에게 힘과 마법을 주세요

- 인드라 창작 뮤지컬 마법천자문 주제가

어둔 길을 걷는 이들이여

저 밝은 빛을 보아요

   

그림자 땅에서 고통받는 이들이여

스며드는 희망의 빛을 보아요

증오하는 마음으로 슬프고 아플 때마다

부질없는 욕심으로 괴롭고 힘들 때마다

우리를 상처를 낼 때마다

우리를 갈라서게 할 때마다

있는 듯 없는 듯 나타나는 바람처럼

젖을수록 더욱 맑아지는 물처럼

당신은 우리의 자랑이며

당신은 우리의 친구입니다

땅을 뒤흔드는 힘

놀랍고 신기한 마법

우리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힘과 마법을 주세요

쪽발놈현에 온몸으로 항거한 허세욱 열사와 중도좌파 민족주의자 박정희 대통령 이름으로

조국과 민족을 배반한 쪽발민주당 해체

쪽발 나팔수 네이버 주가 오백원

인민의 적, 쪽발찌라시 한경오프엠(한겨레 경향 오마이 프레시안 엠비씨) 아웃

서민 등골 빼먹는, 일인 복마전, 골룸빡 처단

한국의 야스쿠니, 쪽발놈현 무덤은 한반도에 저주를 내리는 대못이다

쪽발놈현 무덤 철거하고, 쪽발지태놈현 재산 몰수하자

빠시스트 집단, 쪽발놈현빠에게 죽음을

쪽발삼구 쪽발석현 비리엘쥐 재벌해체

쪽발정은 척살로 2013년을 통일 원년으로

친미친중 반일반북 조국통일 쟁취하자

체념 끝에 피어오르는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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