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걸으면 생각이 난다 국유본론 2011

2011/04/26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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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걸으면 생각이 난다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1/04/26

   

국유본 : 노엄 촘스키랑 인월리랑 다를 것이 없는 것 같은데,

           왜 인월리는 노엄 촘스키를 비난하지요?

   

인드라 : 노엄 촘스키가 한반도 이해에 소홀해서입니다.

           그가 한반도에 대해 긍정적이라면 인월리도 그에 대한 비난을 멈출 것입니다.

           노엄 촘스키의 싸가지가 없는 언행을 멈추기를 바랍니다.

   

국유본 : 왜 인월리는 언론이나 학계에서 공론화가 되는 것에 반대하나요?

   

인드라 : 인월리는 세상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허접 국유본 언론에 인월리가 인용된다면 인월리 개인은 돈도 벌고 좋을 것이지만,

           한반도의 통일과 평화와 경제발전과 사회복지에는 이롭지 않습니다.

           둘 다 같이 갈 수는 없습니다.

           그저 아는 분들 몇 분 정도만 인월리를 알면 족합니다.

   

국유본 : 당신과 시오니스트의 차이를 설명해주세요.

           당신의 지독한 한반도 사랑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구별이 쉽지 않습니다.

   

인드라 : 인드라는 한반도 인연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 세상에서 한반도인으로 태어났습니다.

           최선을 다 할 것입니다.

           인드라는 천국에 갈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여러분도 꼭 천국에 가세요.

           열심히 사세요.

   

   

   

"History buffs and nostalgic socialists can seek out the Karl Marx Museum...but don't expect to see anything particularly revolutionary."

 Western Europe on a shoestring(Lonely planet)의 Trier 소개 중에서;

   

   

1997년 4월 28일 월

   

어제 격정적으로 놀던 영국인들과 어울린 탓에 모처럼 늦게 일어났다. 잘츠부르크에서 만난 게이꼬는 빈 국립 미술관이 좋았고, 이곳도 좋다면서 오스트리아가 마음에 든다고 하루 더 머무르겠다고 한다. 은근히 같이 동행하자는 의미로 내게 말한 것이었지만, 나는 잘츠부르크를 떠나기로 했다.

   

잘츠부르크를 떠나 뮌헨에 도착하였다. 미국의 텍사스 지역과 유사한 독일 바바리아 지방의 주도 뮌헨. 잔뜩 긴장했으나 베를린에서처럼 인종차별을 겪지는 않았다. 공원에서 중년 남녀들이 우리네 구슬치기 같은 게임에 열중하고 있었다. 다만 구슬이 매우 컸다. 호프 브로이 바깥에서만 구경했다. 안에서 누가 노래하고, 또 고함도 치고 있었다. 호프 브로이 앞에는 일본식 음식점이 있었다. 막시밀리안-슈바빙 거리를 걸었다. 단 한 명의 관광객이라도 끌어들일 작정으로 옛건물들을 복원하고 있었는데 남는 건 없었다. 독일 청년이 다가와 설문조사를 요청했다. 어디서 왔냐, 뮌헨이 어떠냐, 뭐가 문제라고 여기나, 얼마나 쓰고 있느냐 등등. 또 나처럼 혼자 쏘다니는 일본인 관광객을 만났다. 그는 뮌헨에서 삼일을 지냈다면서, 내가 이태리로 갈 예정이라고 하자 이태리의 베로나, 파도바, 베네치아, 로마가 괜찮다고 말한 뒤, 동유럽을 가보고 싶다고 일정의 짧음을 아쉬워했다. 점심을 태국음식점에서 볶음밥으로 먹다. 중국음식점보다 볶음밥 값이 싸다. 볶음밥도 종류가 있는데 재료가 거의 들어가지 않은 맨밥을 볶았을 뿐이지만 한국의 볶음밥보다는 비싸다. 하지만 그중에 가장 싸다. 뮌헨역에 들리니 한국인들이 많았다. 부다페스트로 가려는 이들이 많았다. 그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각자 따로 출발했다가 비행기에서 만나고, 여행지에서 만나서 같이 다닌다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한중일 여성 구분법 - 조용하면서도(중국인들이 활달한 편이고 말을 많이 하는 편이다) 대부분 화장을 진하게 한다(일본인들이 말수가 적으면서도 화장기는 거의 없다).

   

트리에로 떠나기로 했다. 벨기에에서 룩셈부르크를 잠시 들릴 때 트리에까지 가려고 했다가 포기하였던 아쉬움이 있었다. 유럽 남부로 내려올수록 점차 부대끼는 한국인들이 많아서 긴장감이 떨어지는 감도 있었다. 일정상 독일쪽으로 다시 오기가 힘들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맑스가 사는 동네가 어떤 동네일까 하는 것이었다.

   

11시 17분 발 5시 22분 도착 예정 기차를 타다. 그러나 가는 도중 독일 기차도 고장이 났다. 이럴 수가~. (인드라는 여행 중에 별 일을 많이 겪는 편!) 사람들 따라 기차를 바꿔 탔다. 예정 시간이 많이

지연되었다. 계획을 아주 촘촘하게 짠 편이라 일정이 어긋나자 짜증이 밀려왔다.

   

1997년 4월 29일 화

   

시계까지 말썽이다. 시계가 고장이 났다. 룩셈부르크로 가는 기차로 도중에 트리에에서 내려야 하기 때문에 신경이 곤두섰다. RB선으로 갈아탔다. RB선을 굳이 비유한다면 우리네 비둘기호라고 할까. 역마다 선다. RB선도 콤파트먼트식이지만, 탁자가 없으며, 흡연석은 1등석에만 있다. 

   

비가 내린다. 새벽 기차를 타고 비가 내리는 라인강을 바라보며 가니 언짢은 기분이 조금씩 풀려온다. 춘천행 기차를 떠올려 보라. 생각해 보니 라인강변보다는 북한강변이 훨씬 괜찮은 듯싶었다. 새삼 우리네 금수강산에 대한 자긍심이 밀려온다. 비가 계속 내린다. 약간 배고프다. 프랑스 바케트빵 맛이 그리워졌다. 바케트빵에 독일 맥주 한 잔이라면 더할 나위 없는 낭만일 터인데... 식욕을 잠재우고자 생각에 몰두하였는데 생각할수록 더 배가 고팠다. 점심 먹고 물만 먹었으니...

   

새벽을 지나 이제는 아침이다. 기분이 상쾌해졌다. 아침 기차에는 출근하려는 사람들이 많다. 학생들은 학교를 가기 위해 기차를 탔다. 기차 안이 떠들썩하다. 그들이 나를 바라본다. 나도 그들을 본다. 문득 나는 즐거워졌다. 내가 여행하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다른 이들이 여느 날처럼 일상적 생활을 할 때 바로 옆에서 나는 그들을 지켜볼 수 있다는 것이 이 얼마나 큰 행운이란 말인가.

   

내가 조금 흥분하여 노트를 꺼내 열심히 끄적이기 시작하는데 차장이 표 검사를 한다. 내가 아랑곳하지 않고 뭔가를 계속 쓰자 차장이 나를 슬쩍 보더니 윙크를 하고 다른 사람에게로 간다. 기분이 점점 좋아진다. 비는 계속 내리고. 학생들은 코헴역에서 대부분 내린다. 굳이 유람선이나 로맨틱가도를 달리는 버스를 탈 필요가 없지 않은가. 우연히 풍경에 녹아든 독일인들의 일상을 보니 마음이 즐겁다. 이런 걸 두고 전화위복이라고 해야 할까? 비가 내리는 라인강변의 집들은 아름다웠다. 우리네 금수강산에도 자연과 합일하는 건축물들이 많이 지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절로 들었다. 저들보다 더욱 아름다운 강산인데...

   

트리에 도착. 역에서 시내만 다니는 전차를 타서 Hauptmarkt에서 내려 맑스 기념관으로 향하다. 작은 읍 정도에 불과한 이 도시도 겉모습만 보면 참 살기 좋은 동네로 보인다. 가는 도중 재래시장을 접하다. 아침 일찍 신선한 야채와 꽃, 생선 등을 거리에 진열하려고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이 그림엽서처럼 괜찮았다.

   

맑스 기념관 가까이에 이르러 한 여성이 길가에서 담배를 피고 있었다. 파마를 한 검정머리, 푸른 눈의 그녀는 나를 보더니 대뜸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사우쓰? 노오쓰?라고 묻는다. 그래도 사정을 아는 여성이다. (몇몇 독일인들과의 접촉을 통해서 본 조심스런 생각은 독일인들이 한국에 대해 다른 유럽인보다는 아는 편인 듯싶다.) 뭐 이런 촌동네에 볼 것이 있겠냐하는 투가 역력한 표정으로 여기에는 왜 왔냐고 했다. 맑스를 보러왔다고 했다. 그랬더니 담배를 비벼 끄더니 오! 맑스! 그러면서 놀라면서도 친근한 표정을 짓는다.

   

그녀와 헤어진 후 맑스기념관을 찾았는데 문이 닫혀 있었다. 해서, 이리저리 거리 구경하다 다시 가보니 계속 닫혀 있는 것이다. 어? 무슨 일일까, 싶어서 문을 열고 들어가니 기념관에서 일하는 여성이 당신이 찾는 맑스기념관은 여기가 아니라 맑스가 탄생한 집이고 여기서 지근거리에 있는 곳이라고 한다. 그곳은 연구소쯤 되는 것이었다. 관료적 말투로 딱딱하게 대하는 것이 기분이 안 좋았다.

   

그런 기분으로 맑스가 탄생한 집에 갔다. 관광객들은 거의 없었다. 혼자서 맑스 집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전시된 사진들을 본다. 아, 초라하기 짝이 없다. 책으로만 보던 이들이 이런 식으로 살면서 사회주의운동을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후일 상하이 임시정부청사에 갔을 때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아무튼 별 느낌이 없이 맑스 동상에 이르렀는데 그때 마침 중국인들이 몰려왔다. 모택동 모자를 쓴 중국인들은 꽤 높은 지위에 있는 이들로 보였다. 나는 안중에도 없이 자기들끼리 저마다 맑스 동상 앞에서 사진을 찍다가 나에게 와서 단체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을 한다. 찍어주었다. 갑자기 나는 내 자신이 그렇게 웃길 수가 없었다. 난 지금 무엇 때문에 이 곳에 왔는가? 중국 관료들로 보이는 저들과 무엇이 다를까? 중국 관료들이야 자신들 출세시켜 주었으니 맑스를 고맙게 여기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나는 뭔가. 내가 찾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가. 뭔가 다른 듯이 행동하는, 론리 플래닛에서 '향수에 젖은 사회주의자들'이란 대목을 읽으면서도 스스로 현재형이라고 믿었던, 뭔가 혁명적인 계기를 얻을 것만 같았던 그 모든 것들이 마치 연극처럼 느껴졌다. 잔뜩 긴장한 채로 뭔가를 갈구하며 맑스의 집에서 헤매던 나를 일깨워준 것은 중국 관료들이었다. 그들은 현실적이었다. 그들은 맑스 흉상을 원했으며, 다른 것들은 안중에 없었다. 마치 정치인의 사진 찍기처럼. 그들은 그것만으로도 즐거워하였으며, 그것으로 맑스 관광이란 소기의 성과를 거둔 것이다. 아아! 그들에 비한다면 나는... 나는 반성하는 자세로 그들에게 나도 사진을 찍어줄 것을 부탁했다. 나의 초라하고, 우스꽝스런 표정을 보라.

   

트리에에서의 아침은 이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맑스를 비난하는 이들이나 맑스에서 한치라도 벗어나면 죽을 듯이 보이는 교조주의자들 모두에게서 나는 해방되었다. 그만큼 그들과 나에게 맑스는 신이었다. 그러나 나는 인간 맑스를 만났으며, 맑스를 좋아하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세상의 어느 곳에서는 맑스 산업이 되기도 하고, 세상의 어느 곳에서는 맑스가 박정희와 같은 대접을 받고, 세상의 어느 곳에서는 여전히 맑스는 금기된 무엇이기도 하다. 그 무거운 짐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 여겼던, 아니, 그 굴레를 영광스럽게 여기기까지 했던 모든 관념들이 깨끗하게, 일순간에 정리된 것이다. 이제 나는 맑스를 내 머리에서 해방시킨 것이다. 맑스가 맑스주의자라고 했던 그 모든 굴레들로부터 맑스를 해방시킨 것이다. 맑스여! 당신, 그동안 내 머리 안에서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그러니 맑스여! 해방이다! 그 순간 동상의 맑스가 내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이제 세상이 나, 맑스를 해방시킬 일만 남았군, 그래." 나는 순간 혁명적인 전율에 몸을 떨었다. 

   

안녕! 트리에! 안녕! 맑스 산업! 그리고 기념하는 모든 것들이여! 이제는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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