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죽었을지라도 혁명은 살아있다 국유본론 2011

2011/05/08 06:18

http://blog.naver.com/miavenus/70108490996

   

   

   

세상이 죽었을지라도 혁명은 살아있다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1/05/07

   

김종화 :

인드라 선생. 이내 다시 뵈려했는데 일이 있었습니다. 살아간다는 것 참 어렵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하루하루를 보낼 때마다 저의 어리석음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감당해야 할 것이고, 겸허해야 할 것이고, 인내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마음을 열고, 자세를 낮추고, 세상에 감사한다.

   

인드라 :

힘내세요. 죽는 그날까지 배워도 부족함이 많은 것이 우리네 삶이지요. 이런 삶에 과학이란 무엇일까를 늘 생각한답니다.

   

김종화 :

고맙습니다. 인드라 선생답습니다. 과학 이야기를 이런 식으로 풀어가는군요. 고견 듣겠습니다.

   

인드라 :

과학이란 오만한 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겸허한 자들을 위한 선물이 아닐까 싶습니다.

   

김종화 :

네? 그것이 무슨 말씀이신지요?

   

인드라 : 

과학은 그 기원으로 따지면 오래 전부터 인간과 함께 했지만, 오늘날과 같은 과학을 구성한 것은 근대 이후 서양에서부터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근대 이전 과학이란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생존 무기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반면 근대 이후 서양에서 만든 과학이란 꼭 필요한 생존 무기인 것입니다.

   

김종화 :

네? 그럼 근대 이전 인간이 꼭 필요했던 생존 무기는 무엇입니까.

   

인드라 :

종교였습니다. 인간은 죽음 직전까지 가면 모두들 하나같이 예수, 알라, 부처, 신 등을 부르짖으며 죽어갔습니다. 무신론자라도 엄마하며 죽어갔던 것입니다. 엄마신이죠.

   

김종화 :

무슨 말씀인지 알 듯 말 듯입니다. 과학과 종교를 대비시킨다?

   

인드라 :

아니요. 과학과 종교를 대비시키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과학과 종교를 대비시키기보다 과학과 종교 구분 너머를 보고자 하기 위함입니다.

   

김종화 :

너머요? 무슨 말씀인지?

   

인드라 :

서양에서 근대 과학 발달사를 보면, 늘 당대 일등 종교와 충돌했습니다. 과학이란 당대 종교를 비웃고, 몰락시키는데, 큰 역할을 해왔던 것입니다. 만일 과학이 이런 역할을 할 수 없었다면, 과연 오늘날처럼 과학이 이토록 대우받을 수 있었을까요?

   

김종화 :

아, 그런 맥락이라면. 설마 오늘날 과학을?

   

인드라 :

그렇습니다. 1970년대 이후 과학이란 그 이전 시기 과학과는 다른 길을 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전까지 과학은 종교와의 투쟁에 누구보다도 앞장서는 미국이었습니다. 미국 민주주의는 과학이었습니다. 반면, 1973년 국유본 권력 교체 이후에는 과학이란 마치 미국과도 같은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반미 = 반과학입니다. 1973년 이전까지 과학자는 시대를 앞서가는 선지자였습니다. 허나, 1973년 이후에 과학자는 공공의 적이 되었습니다.

   

김종화 :

1973년을 강조하는군요. 1973년은 국유본론 이론대로라면 국유본 권력이 빅터 로스차일드에서 데이비드 록펠러로 바뀐 시기입니다.

   

인드라 :

그렇습니다. 1973년 이전까지 과학은 미신과 별개 영역이었습니다. 과학은 세상 모든 종교를 미신으로 볼 만큼 선긋기를 했습니다. 헌데, 1973년 이후부터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과학이란 그저 판타지의 일부일 뿐입니다.

   

이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인 것입니다. 이해하시겠어요?

   

김종화 :

맙소사! 왜 이를 모르겠습니까. 흥미롭습니다. 계속해보세요.

   

인드라:

가진 자들은 신앙이 있었습니다. 신앙이 가진 자들을 지켜주고 있었습니다. 반면 과학이란 못 가진 자들 신앙이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못 가진 자들 신앙 중 하나였습니다. 다만, 못 가진 자들 신앙 중 가장 반대편에 있었습니다. 과학은 말했습니다. 모든 종교란 하늘 위에 있다. 하지만 인간을 보라. 하늘에 있는가. 모두 땅 위에 있다. 오직 과학만이 땅 위의 인간을 말하고 있다. 반면, 미신들은 구름 위 하늘만을 떠들고 있다.

   

김종화 :

그렇군요. 역시 재미있습니다. 그래서요. 지금도 과학은 그런 역할을 맡고 있지 않나요? 철학이나 문학에서는 모더니티로 풀고 있습니다. 포스트 모더니티에 대해 아직 모더니티는 끝나지 않았다는 식입니다. 예상한 바 있지만, 역시 이런 움직임도 그 배후는 국유본이군요.

   

인드라 :

그렇습니다. 1973년 국유본 권력교체 이후에 나타난 것입니다. 한마디로 끝난 것입니다.

   

오늘날 대중적으로는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1962)부터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허나, 그 징후, 특히 국유본 내부에서 징후는 일찍 시작하였습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05&aid=0000087007

   

일명 부지깽이 사건입니다. 국유본 인물인 바람둥이 양성애자 버트런트 러셀 세습 백작과 온리 동성애자 비트겐슈타인은 동성애 관계였습니다. 오스트리아 재벌 아들, 비트겐슈타인 추천으로 히틀러가 국유본이 구상하는 제 2차 대전 파트너가 되었다는 가설이 나올 만큼 버트런트 러셀 세습백작은 비트겐슈타인 항문을 매우 사랑했다는 후문입니다. 이런 러셀과 비트겐슈타인이 왜 갈라섰을까요? 왜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처럼 역시 오스트리아 유태인인 칼 포퍼를 불러 논쟁을 유도했을까요?

   

김종화 :

그렇다면? 식은 땀이 흐릅니다. 러셀이 비트겐슈타인을 질투 유발시키려 희롱한 것이군요. 연애 달인, 러셀이 새 연인 칼 포퍼를 옛 애인, 비트겐슈타인에게 소개하는 이벤트가 부지깽이 사건 핵심이었다는 말씀입니까. 정말 흥미롭습니다. 국유본론 끝이 어디일까요. ㅎㅎㅎ. 대체 왜 이들 철학자 세 명이 만나 시덥잖은 쌈박질을 했나 싶었는데, 국유본론이 단칼에 의문을 해소시키는군요. 요점은 항문이군요.

   

인드라 :

항문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이 러셀을 떠났습니다. 부지깽이 사건은 러셀이 비트겐슈타인 마음을 잡기 위한 최후 이벤트로 보입니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은 단호히 국유본 권력자, 러셀을 거부합니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전기 비트겐슈타인과 후기 비트겐슈타인으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이 분리에 대해 여러 이야기가 나오는데, 인드라 입장은 단호한 편입니다. 러셀 연인일 때 비트겐슈타인과 러셀과 이별 후의 비트겐슈타인이 실질적인 구분점이라고 말입니다.

   

김종화 :

그렇다면, 그들이 왜 헤어진 것일까요? 비록 러셀이 개차반 바람둥이이긴 합니다만. 가령 버트런트 러셀은 '4월은 잔인한 달'로 유명한 시인, 토머스 엘리어트와 인연이 있습니다. 어느 날, 버트런트 러셀 세습백작은 마치 봉건시대 영주처럼 초야권을 부활시켰습니다. 토머스 엘리어트 연인과 밀월여행을 떠났던 것입니다. 이에 아무런 힘이 없던 토머스 엘리어트는 고맙다고만 이야기했을 뿐입니다. 버트런트 러셀 세습백작에다가 국유본 인물이었으니까요. 시인이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오늘날 토머스 엘리어트가 그나마 시인이랍시고 그의 시가 인용되는 것도 다 국유본 덕분이고, 버트런트 러셀 덕분입니다. 일각에서는 토머스 엘리어트도 버트런트 러셀의 창녀였다는 주장이 제기되더군요.

   

인드라 :

완벽히 드러난 것은 아니나, 상당수 진실을 내포한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중요한 건 이것이지요. 그들이 국유본 중심부에서 놀았기에, 그들 사적 연애는 세계를 움직였던 것입니다. 조선왕조 왕족과 귀족들이 버트런트 러셀처럼 놀았다면 망국의 징조이지만, 버트런트 러셀이 영국에서 놀았던 이유만으로 이는 근대 희망이 되는 것입니다. 웃기지 않습니까.

   

김종화 :

그렇군요. 선생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이런 반문도 할 수 있을 듯하군요. 누군가 당대 조선 왕족과 귀족은 버트런트 러셀처럼 생각하지 않았다고 반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 다 개망나니 인생이었지만, 버트런트 러셀은 천재적이었다고. 미래를 볼 수 있었다고 말입니다.

   

인드라 :

흥미로운 지적입니다. 그런 예가 윤치호라고 있습니다.

   

http://ko.wikipedia.org/wiki/%EC%9C%A4%EC%B9%98%ED%98%B8

   

인드라가 보기에, 버트런트 러셀과 윤치호 차이는 없습니다. 있다면, 러셀은 뻗어가는 영국 귀족 자제로 태어났고, 윤치호는 망해가는 조선 귀족 자제로 태어났다는 차이밖에 없습니다. 국유본론으로 말한다면, 만일 국유본이 영국이 아닌 조선을 중심으로 택했다면, 오늘날 인류는 버트런트 러셀이 어떤 종자인지 모를 것입니다. 반면 세계인들은 윤치호 천재성을 찬미하고 있겠지요.

   

아무튼 이야기를 다시 원점으로 돌아갑시다. 왜 이들은 헤어졌을까요?

   

김종화 :

원자력이군요.

   

인드라 :

그렇습니다. 원자폭탄. 그것은 당대 지식인들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과학은 딩대 지식인들이 숭상하는 유일 종교였습니다. 하지만, 그 유일 종교가 저지른 것이 무엇입니까. 원자폭탄이었던 것입니다.

   

일본에 떨어졌지요. 이에 대해 일본인을 동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순진한 생각입니다. 그들은 원자폭탄을 받을 만큼 국유본에게 특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일본인들은 한반도 전체가 수십 년간 국유본에게 받아야했던 고통을 단지 몇 년간 일부 지역에서만 받았을 뿐입니다.

   

하지만, 세계 지식인들은 이런 한반도인 고통에 무감각하지요. 온통 히로시마에만 열중합니다. 왜 이럴까요? 세계 지식인들이 모두 미친 놈들이기에. 아닙니다. 그들은 미치지 않았습니다. 다만, 국유본에게 세뇌를 당했을 뿐입니다. 그들은 국유본이 만든 허상에 놀아났던 것입니다. 과학이 진실하게 보였던 것은 과학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국유본이 지원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계 지식인들은 과학이란 허상에 탐닉했던 것입니다.

   

이미 이 시기부터 국유본 내부에서 과학은 기존 종교처럼 의심 대상으로 전락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징후가 바로 버트런트 러셀과 비트겐슈타인의 이별이었던 것입니다.

   

바람둥이이자 국유본 기획에 따라 영국 노동당원이었던 버트런트 러셀 세습백작은 상당 기간 빅터 로스차일드와 함께 했습니다. 하지만, 버트런트 러셀 세습백작도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빅터 로스차일드에 반기를 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

   

버트런트 러셀이 영국 노동당증을 찢은 것이 그가 인류애적인 인물이어서?

   

아닙니다.

   

국유본 귀족, 버트런트 러셀은 너무 빠른 신세계 질서가 두려웠던 것입니다.

   

007 실제 주인공, 빅터 로스차일드는 신세계 질서를 누구보다 앞장서서 추진했습니다.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너무 진행이 빠르다 보니, 프랑스 혁명 때와 같은 사태가 일어난 것입니다. 버트런트 러셀이 어제는 혁명군 일원인 당통이었는데, 오늘은 버트런트 러셀이 단두대로 가는군요.

   

김종화 :

아, 이 말씀은?

이 글 원제목이 비정규직 해법을 우주론에서 찾는다였던가요?

평행이론을 기대했는데,

흡사 평행이론의 사회과학 버전을 읽은 느낌입니다.

   

인드라 :

당신은 살아 있습니다.

살아 있는 한,

투쟁하십시오.

세상은 죽었을 지라도

혁명은 살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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