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유태자본과 왜놈 : 인월리 국제유태자본론 중간 결산 국유본론 중간결산

2013/02/17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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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유태자본과 왜놈 : 인월리 국제유태자본론 중간 결산

국제유태자본론 : 인드라 월드리포트 13/02/17-3

 

 

예언해설가:

고견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질문 속에 있는 제 생각의 코드까지도 다 파헤쳐버리시니 적잖이 당황도 했습니다. ㅎㅎ;; 그.. 정체불명의 해양민족 말입니다... 해적집단... 일본 전국시대(봉건시대)의 키워드 아닐까요? 어떻게 보면 바이킹과 모양세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바이킹이 유럽을 쓸고 다녔듯이 이 해양민족도 중국, 한반도, 일본열도를 휘젓고 다녔고, 통치력/국력이 약한 일본의 경우 이 해양민족과 열도 원주민이 아주 뒤범벅 되버리고, 왕조세력이 전복되고 바이킹이 여러 나라 세우는 꼴로 일본 여러 곳에 세력이 등장하게 되어 일본 전국시대가 등장하게 된 것은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총포를 전해주고 재화를 전해주었으니, 알아서 톱니바퀴 맞아 들어가듯, 이 해양민족은 총포를 양산하기 시작했고, 오래도록 노려왔던, 중국을 노리기로 하지요. (국유본 의도대로) 이런 면에서 "정명가도"가 아주 거짓말은 아니겠네요 ㅎㅎ 그래서 이넘들이 임진왜란 정유재란 일으키고, 중국을 직접 침략하지는 못 했지만 국유본 의도대로 명국의 몰락이 되었으리라고 추리해봅니다. P.S) 차우셰스쿠처럼 김정일이 인터내셔널가 부르며 죽었다는 일화가 전해지면, 이거 또 영화/소설 재료로 쓰여서 코드로 자리잡겠네요? ㅎㅎ P.S 2)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아참 아참... 한 가지 빼먹었는데, 중국 치려면 해양민족이 단합해야 되는데 그게 일본 전국 통일이 된 꼴이고, 통일 되자마자 급히 조선침략을 하는 데는 역시 통일 전부터 한반도, 중국 침공이 계획 된 것이 이유이고, 교과서에서 가르치는 "내부세력 반발을 무마하기위해"는 역사위장의 구라겠네요 ㅎㅎ

 

INDRA:

글 고맙습니다. 재미있는 상상이다. 환타지는 가슴을 뛰게 한다. 허나, 현실은 끔찍하다. 자기 자신의 일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영화가 있다 하자. 보고 싶을까? 기분, 더럽다. 반면 환상적인 영화는 재미있다. 그런 세상에서 살고 싶다. 가장 재미있는 영화는? 현실적이란 현실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을 감추는 데 있다. 무엇을 드러내고, 무엇을 덮을 것인가. 이 적절한 배분이야말로 현실주의 미학의 정수다. 해서, 적정하게 현실적인 동시에 꿈을 제공해주는 영화이다. 그것이 최고의 영화이다.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 즉 변증법이다. 하여, 과거는 시대를 거치면서 늘 재해석될 수밖에 없는 환타지가 되는 게다. 역사적 과거를 말하고 있다면 이는 미래에 이러했으면 좋겠다는 의도를 표출하는 데에 지나지 않는다. 해서, 역사를 살필 때, 실증도 중요하고, 사관도 중요한 게다. 그 어느 하나를 소홀히 할 수 없다. 사관 중시하는 이도 실증을 무시할 수 없고, 실증을 중시하는 이도 사관을 우습게 여길 수 없는 게다. 해서, 다시 묻는다. 왜 역사인가. 명분이다. 하면, 역사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신이 있었다. 하여, 역사는 신의 대리자로서의 인간이 다른 인간을 조직적으로 지배하기 위한 도구였던 셈이다. 이후 신은 오직 신의 대리자를 통해서만 등장했다. 한국 고대사에 관한 관심은 원초적이다.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하는 근원적인 물음을 던질 때 초등부가 부모의 부모의 부모의 조상을 찾는다면 다음 단계에 등장하는 중학교 대목이다. 이 과정을 졸업해야만 잡신이라도 만날 수 있는 고교 과정에 입문을 한다던가^^!

 

하나, 한국 고대사의 네 종족

 

인드라는 오늘날 한국 고대사에 관심이 있는 분들을 대략 네 가지 종족으로 분류한다. 일각에서는 '빠'란 명칭으로 비하하는데, 인드라는 비판적이다. 긍정의 힘으로 세상을 보자^^! 해서, 인드라는 '빠' 대신 '인'으로 말하고자 한다.

 

1. 환인 : 줄기는 북방 기마민족론이다. 환인이 세계 최초의 문명을 건설하였다고 하여 현재 가장 강력한 판타지 시나리오를 구성하고 있다. 환인은 두 종족으로 분화되었다. 하나, 주체사상인이다. 세계 문명은 평양에서 시작되었기에 북조선인민공화국이 없다면 지구도 없다!!! 근본을 잊어버린 인류라면 핵폭탄으로 멸망해도 상관이 없다~! 둘, 바이칼인이다. 주체사상인의 주체성을 인정하면서도 협소한 한반도 사관에는 동의할 수 없다. 노자든, 공자든, 예수든 모두 바이칼인에서 비롯되었으며, 수메르 문명을 비롯한 세계 4대 문명도 바이칼인이 이룩한 것이다. 유태인은 바이칼인의 변두리 족속에 불과하며, 잠시 세계를 지배할 수 있겠으나, 이내 바이칼인 본류인 환인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다~~~!

 

2. 해인 : 줄기는 남방 인도기원론이다. 동아시아에 최초로 거주한 원주민이다. 무엇보다 오늘날 일본이 잘 나가고 있다. 부럽다. 배알이 꼴린다. 하여, 한국에서 두 번째로 잘 나가는 시나리오이다. 해인은 두 종족으로 나뉘었다. 하나, 백제인이다. 백제는 중국을 지배했고, 한반도도 지배했고, 일본 열도도 지배했다!!! 일본 일왕은 백제 후손이다!!! 이 백제인에서 갈라선 것이 가야인이다. 백제인, 왜인, 가야인 중 가야인이 짱이다~! 김유신 만쉐이. 예서, 또 근래 분가한 것이 왜인이다. 국유본의 3S 정책에 빠져 일본 야동을 많이 본 탓인지 왜인이 된 이들이다. 김구를 비난하고, 일왕을 섬기는 광주항쟁 출신 386 김완섭이 예다. 둘, 인도인이다. 마치 환인처럼 북방계 이주민을 하나로 보듯 인도인은 남방계 이주민을 하나로 본다. 중국에도 있고, 한반도 남부에도 있고, 일본 열도에도 있었다. 물론 동남아시아, 폴리네시아도 내 땅이 된다^^! 궁극적으로 인도를 그리워하게 된다.

 

3. 중인 : 카이사르의 갈리아전기를 믿는가, 아니면 영국 스톤헤지를 신뢰하나. 전자라면 그대는 중인이다. 역사시대와 선사시대의 차이는 무엇인가. 기록이다. 말보다 문자가 앞선다. 기록이 앞선 종족의 말을 따르라. 그것은 진리~~! 삼국사기, 일본서기? 풋~! 찌질한 오랑캐의 기록일 뿐! 춘추필법이 다소 문제이기는 해도, 당대 역사기술로 보자면 최고가 아니겠는가. 오류와 한계를 구분하자. 중인은 두 종족으로 변이한다. 하나, 중국인이다. 짱꼴라 만세. 짱꼴라는 우리의 조상이시며, 시조를 욕되게 하여 잇속을 차리는 중조들을 탄핵하는 바이다~! 반기문은 중인의 쾌거이지, 결코 한인 따위의 자랑이 될 수 없다~! 반도에서 김치나 먹고 떨어져라. 동북공정 만만세. 예서, 분가한 것이 대륙삼국론자, 대륙고려론자, 대륙조선론자들이다. 어릴 때부터 열심히 무협지를 탐독한 결과일까. 중국에 대한 극단적인 사랑이 넘쳐흘러 그 모순이 극에 달하자 등장한 해법은 한반도 역대 정권은 모두 중국 대륙에 있었다는 상상인 게다. 해서, 우리는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대한민국과 북조선인민공화국도 중국대륙에 있을 지도 모른다^^! 둘, 국유본인이다. 아시아는 인도로 통일하자~! 국유본의 유전자를 통한 인류 이동 연구 만쉐이~!

 

4. 출인 : 신념은 출세에 죄악이다. 삶의 목표는 분명하다. 첫째도 교수, 둘째도 강단, 셋째도 돈벌이이다. 출세만 할 수 있다면 환인, 해인, 중인이 대수인가. 그들 앞에서 죽으라면 죽는 시늉을 하겠다. 출인은 두 부류로 갈라진다. 하나, 강단인이다. 유행이 진리이다. 역사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가 지배하는 사기극이다. 하여, 역사는 현 권력으로부터 시작된다. 현 권력에 충성하라. 타락한 세상에 맞서지 마라, 단지 이용하라. 둘, 혁명인이다. 타락한 시대에 맞서라, 그래야 주인이 된다. 고위험 고수익. 지금까지 역사가 사기극이었다면 진정한 사기극을 연출할 것이다. 역사는 현재가 아니라 미래를 지배하기 위한 사기극이다. 유행이 진리는 아니다. 단, 자신들이 만든 것만이 유행이며, 진리이다.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 해서, 혁명인의 전략적인 출세관에 현혹당할 수 있다. 허나, 실은 그 누구보다 출세에 열망하는 족속이다. 죽고자 하면 교수가 될 것이요, 살고자 하면 영원히 시간강사이다^^!

 

하면, 이미 진부해진 혁명을 넘어선 혁명은 가능한가. 정말 가능한가. 길 없는 길은 있는가.

 

서론이 길었다. 왜 왜인인가. 이는 동아시아 고대사 연구에서 근래 주된 이슈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는 백제가 일본 천황이 되었으며, 일본을 지배했다는 판타지에 집착하고, 열도는 한반도 남부에 임나일본부가 있었다는 환상에 몰두하기 때문이다. 당대의 역사를 오늘날 각국 이익에 따라 해석하였는데, 그러다 보니 각종 문헌이나 출토되는 유물들에 대해 마땅한 답변을 할 수 없는 일이 늘어만 가고 있는 것이다. 가령 한반도 남부에서 등장하는 전방후원분 무덤이 예다.

 

다만, 본격적인 문제로 들어가기 이전에 우선 세 가지 사이트를 소개하기로 한다.

 

http://www.history21.org/

인드라가 이 사이트 개설 이후 꾸준히 이용해오고 있다. 고대사 사이트에도 유행이 있다. 당대 권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김대중 때는 백제사 중심, 노무현 때는 가야사 중심, 중국 동북공정 논란일 때는 고구려사 중심 등등~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임을 상기시켜주고 있다.

 

 

http://www.baedalguk.com/bbs/zboard.php?id=we&page=3&select_arrange=headnum&desc=asc&category=&sn=off&ss=on&sc=on&keyword=&sn1=&divpage=1

상기한 사이트는 왜와 관련한 글들만을 모아놓았기에 자료 사이트로 적당하다고 할 수 있다.

 

http://blog.naver.com/krighty21?Redirect=Log&logNo=50038679992

상기한 블로그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 왜, 한, 예에 관한 자료를 얻을 수 있다. 인드라의 상상력은 이들 사이트에서 얻은 지식을 기초로 하였음을 말씀드린다. 물론 언제나 그렇듯이 독특한 면이 있다~!

 

둘, 왜는 중국 월족의 후예이다?

 

일반적으로 고대문명은 사막화를 동반했다. 초원지대에 살던 족속이 사막이 주기적인 사막화 과정을 거치면서 오아시스를 찾아 나선 데서 문명이 발생했다. 이때, 원주민이란 최초의 이주민이다. 해서, 가진 것이 상대적으로 많은 반면 배가 부르다. 반면 뒤늦게 이주한 이주민은 몸밖에 없지만, 그만큼 공격적이다. 해서, 후대 이주민이 전대 원주민을 지배하거나 축출한다. 로마가 그리스를 군사력으로 정복한다. 하고, 로마시민은 수준 높은 그리스 문화를 그리스 노예에게서 배운다.

 

http://blog.naver.com/mirinaebae?Redirect=Log&logNo=3302139

중국 일부 역사서에는 왜는 오나라 태백의 후예라고 기록이 되어 있다. 양자강 하류 강남지역에는 월족이 살았다. 오, 월, 초나라가 이들 지역에 근거한 국가들이었다. 문신을 하였으며, 어로(漁撈)에 능하였고, 양자강 하류와 북구주 사이에 해류가 흘러 양자강 하류에서 배를 띄우면 북구주로 연결이 되기도 하는 것이 주된 근거를 이룬다. 이 주장의 핵심은 한반도 도래설을 부정하고, 야요이인은 중국에서 직접 유래했다는 것이다.

 

시바 료타로는 '항우와 유방'에서 초나라 사람 항우에 강한 감정이입을 한다. 항우가 엄청난 수의 진나라 사람을 매장해버린다. 일본이 중국에 지배에 실패한 것은 항우처럼 남경 학살과 같은 잔악한 짓을 저질렀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흥미로운 점은 진시황의 잘못된 정책으로 거론되는 분서갱유가 실은 항우가 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는 점이다. 그것도 스탠포드 대학 교수에 의해서.

 

http://blog.hankyung.com/raj99/205649

세 가지 주요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하나는 중국 역사서에서 자칭 오나라 태백의 후예임을 강조한다. 오나라 태백 가문은 중국에서도 쳐주는 가문이다. 이런 가문의 후예로 내세운다는 것은 한마디로 폼이 나는 일이다. 한국도 거의 모든 성씨가 왕가의 후손(^!^)일 만큼 족보가 인기 있는 이유인 게다. 허나, 이는 당대 한반도 남부와 일본 열도 정세를 볼 때, 이 지역 대표임을 주장하려는 외교적 수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정설로 보인다. 대표적인 예가 진승오광의 난이다. 진승오광은 자신들이 초나라 왕실의 후예임을 자처했다. 또한 견훤이 경북 문경시 출신임에도 백제의 후예를 자처한 것도 고려해야 한다. 이처럼 중세에 이르기까지 왕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썼던 두 가지 방식 중 하나였던 게다. 알에서 태어난다든가 하는 신화를 이용하면서도 한고조 유비처럼 명멸한 이전 왕조의 후예를 내세우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둘의 문화가 비슷하더라도 별개의 민족이라는 것이다. 가령 같은 삼한 족속임에도 제주사람들 풍습은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도 다르다고 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인도 - 동남아시아 - 중국 - 한반도 - 일본으로 이동하였다가 각 지역에 토착한 족속인 게다. 이는 동아시아 난생설화 분포를 봐도 알 수 있다. 헌데, 이들이 서로 유사하면서도 다른 언어, 문화를 지니게 된 것은 오세아니아 마오리족에게서도 볼 수 있다. 마오리족 일부가 먹이를 찾아 또 다른 섬으로 이동했다. 헌데, 그곳은 파라다이스였다. 헌데, 불과 몇 백 년도 안 되었는데, 섬이라는 특수한 조건으로 인해 교류가 되지 않아 마오리와는 다른 습속을 유지하며 살았다. 이후 뒤늦게 이곳을 발견한 공격적인 마오리족은 평화지향적인 이들 족속을 잔인하게 멸망시켰다. 알고 보면, 같은 족속이었음에도 말이다. 그처럼 각 지역에 토착화되어 수백 년을 살다 보니 다른 민족이 되었던 게다. 다만, 그 기원을 추적하면 유사하니 문신의 풍습을 간직할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백제의 영향이다. 왜나 마한보다 뒤늦게 대륙에서 이동한 백제 주류세력은 보다 앞선 문화를 왜에게 전해주었다. 왜는 백제를 통해서 문자를 접하고, 불교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문자와 종교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고대국가 형성이다. 이전까지 마한이나 가야, 왜는 통일된 고대왕국이 아니라 고작해야 세대수가 천여 세대의 마을 수준이거나 그 마을들이 연맹체를 이뤄 수만 세대에 불과했던 게다. 마을이 조금 거대해진 원시부족국가들이 산재해 있었을 뿐이다. 토기나 각종 무기류가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는 유물이 없다. 그보다 한반도에서 도래한 자료들은 풍부하다.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처럼 오늘날 일본일왕이 백제의 후손 따위는 잊는 것이 좋다. 그보다는 후대에 이주한 백제계가 일본열도로 먼저 이주한 가야계, 마한계, 신라계보다 귀족간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하여 일본 일왕가를 윤색한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으로 보인다. 물론 오늘날 일본 일왕 족보는 근대 이후에 막부를 무너뜨리려는 국유본의 필요에 의해 조작된 산물이다. 해서, 이를 착각하여 일제의 한반도 침략을 고토 회복이라고 여기며 오바마의 일왕 절하기 따위에 내심 감동하면서 박정희에 대해 비난하는 친일매국적인 사고는 안 하는 것이 정신건강상 좋을 것이다.

 

인드라의 추론은 다음과 같다. 왜는 인도 - 동남아시아 해안 루트를 따라 기원전 만 년 전부터 중국으로 흘러들어온 이주민이다. 이들은 중국 발해만 지역과 한반도, 일본 열도 해안에 이르렀다. 다른 한편 북방계 이주민이 초원 사막화에 따라 내륙에서 해안지대로 이동하여 충돌이 불가피했다. 이때 전투력에서 뒤진 남방계 이주민이 재차 남하하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왜인이야말로 최초의 객가였던 셈이다. 해서, 한 무리는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 폴리네시아 지역으로 이동한다. 다른 한 무리는 양자강 하류, 대만, 오끼나와 등으로 이동한다. 마지막 무리는 발해만을 따라 한반도를 타고 내려와 일본 열도로 이동한다. 다시 말해, 이들은 한반도나 일본 열도의 토착인이 아니라 이들 역시 이주민이었던 게다. 이들은 각지에서 토착하면서 다양한 언어와 문화를 지닌 족속들로 분화했다. 북방 유목민족이 근본으로 가면 하나일 수 있지만, 다양한 형태로 분화되듯이 말이다. 해서, 이들은 일본 열도에 살던 오늘날 아이누인의 조상격인 열도 죠몬인과도 다르며, 한반도에서 세계 최초로 벼농사를 한 한반도 소로리인과도 다르다. 다만, 한반도와 일본 열도에서 이들 왜인은 북방계 이주민과 대대적인 혼혈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이 된다. 당대 정세를 고려하면 북방계 이주민 남자와 남방계 이주민 여자와의 혼혈이 일반적이었을 것이다.

 

왜인은 대체로 키가 작고, 등이 굽고, 어로에 익숙한 전형적인 남방계였다. 해서, 초원에서 살던 북방계 이주민이 보기에는 다들 비슷하게 보였을 게다. 동양인이 서양인을 보면 다 똑같은 사람으로 보이듯이 말이다. 초기에는 왜인에 대한 규정이 광범위했을 것이다. 해서, 하북성의 왜인 이야기가 나오는 게다. 허나, 후대에 갈수록 왜인에 대한 규정은 보다 협소해졌을 것이다. 북방계 유목민들이 점차 세력을 확장하였기 때문이다. 가령 중원이란 처음에 중국의 아주 작은 지역만을 지칭했으나 점차 확장된 개념이다. 그처럼 이전까지 이방인으로 간주한 족속들을 같은 족속으로 편입하면서 왜인의 규정은 보다 협소해졌을 것이다. 가령 만주 대륙에서 이동한 고조선 준왕이 세운 마한이나, 부여족이 세운 백제에서는 지배자에 의해 풍습이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삼국시대 위나라도 진나라처럼 북방 유목민족에 기원한 나라라고 할 수 있다. 해서, 진수의 한반도 삼한과 예에 대한 역사 기술을 사마천의 춘추필법과는 또 다르게 읽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오늘날 일본과 남한 비판과 같다고나 할 수 있을까. 진수 입장을 미국의 입장이라고 한다면, 한반도는 남한과 일본이요, 일본열도는 북한이었던 게다. 해서, 한반도에 대해서는 오히려 더 혹독하게 비판하게 되는 게다. 한반도인이 성장하여 자신들을 위협할 수도 있는 동시에 한반도인을 통제하기 위함이다. 허나, 당대 한반도인이 강력하게 저항하여 중국의 의도는 실패하고 만다. 반면 아예 일본열도에 대해서는 관용적일 수 있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 우리는 남한의 주사파에 대해 냉정하게 비판할지언정 북한에 대해서는 관용적이다. 오히려 북한의 긍정적인 면을 찬미하기까지 한다. 방글라데시나 미얀마 정도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런 배경이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깔려 있다고 보아야 한다.

 

해서, 삼국사기에 등장하여 시종일관 신라를 괴롭힌 왜는 일본 열도의 왜와 등치시키면 안 된다는 게다. 당시 일본 열도 왜가 한반도에 군사를 상주시킬 정도의 역량이 안 되었다는 것은 현 일본학계에서도 점차 인정하는 추세이다. 결국 이때의 왜란 아직 북방유목민족의 지배를 받지 않은 한반도 남부 해안가 족속들을 의미하는 게다. 신라 주류 세력이 북방 유목민족이었던 만큼 자신들 이외는 모두 왜인이었던 게다. 해서, 초기 신라에서만 왜가 많이 나타나다가 신라가 강성해지면서 왜가 사라지는 게다. 비유하면, 로마 신라가 강성해지니 이태리 한반도에 있던 족속들이 처음에는 모두 왜였지만, 점차 로마 신라인이 되었다는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대표적인 예가 가야인인 게다.

그처럼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전하는 왜인이란 진수의 입장에서 보다 왜인의 원형 형태를 유지한, 보다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생활을 지속한 족속에 대해서만 왜인으로 규정했을 것이다.

 

셋, 장수왕의 한성백제 멸망은 일본을 탄생시키는 역사적인 사건이다.

 

페니키아인들이 카르타고에 진출했다. 이때 카르타고를 페니키아의 식민지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다. 오늘날 식민지라고 말할 수 있는 관계가 형성되지 않았다. 그보다는 오늘날 현지회사, 지점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페니키아인이 왜 카르타고인으로 변모하였는가. 페니키아가 무너지자 카르타고가 자립한 것이다.

 

http://blog.naver.com/minimouse79?Redirect=Log&logNo=30031185336

본사가 위협을 받는다. 이때 지사가 능력이 없다면 같이 망한다. 허나, 윤윤수처럼 능력 있는 이가 등장한다면 지사가 본사의 능력을 흡수하여 본사가 된다. 왜 장수왕의 한성백제 멸망이 일본을 탄생시켰는가. 고구려가 국운을 크게 상승시킨 소수림왕, 고국원왕, 광개토대왕, 장수왕, 문자왕으로 이어지는 고구려 오왕 시기인 4세기말부터 6세기 초반 사이 시기에 당연히 한반도 남부에서 백제와 로마 신라의 지위란 형편없었을 게다. 카르타고 한니발이 로마 정벌을 시작하자 이태리 일부 도시국가에서 로마를 배신하고 카르타고에 붙은 예를 살펴볼 수 있다. 이 시기 로마 신라와 백제는 생존을 위해 왜에 인질을 보낸다. 왜에서 백제, 로마 신라로 보내는 인질은 없었다. 로마 신라는 박제상의 5세기 초 인질 구출기 이후로 인질 외교가 사라진다. 이후로 로마 신라가 강성해졌다는 게다. 반면 백제는 멸망 전까지 지속적으로 인질 외교를 지속한다. 예서 보듯, 일반적으로 인질이란 춘추전국시대에서 보듯 약소국이 강대국에게 보내는 외교안정책이다. 하여, 백제가 일본을 경영했다 이런 터무니없는 판타지는 자제되어야 한다. 당대 왜는 백제, 로마 신라가 모두 인정하는 대국이었다. 해서, 일본일왕은 백제의 후손이다, 따위의 친일매국세력 주장이란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처럼 정말 지겹지 않은가? 어느 정도 현실적인 판타지여야 한다.

 

한성백제가 멸망했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마한에 이어 당대 한반도 서남부를 대표하던 세력 신망이 무너진 게다. 그간 이 지역을 대표하는 한성백제가 무너지니 한반도 남부는 저마다 살 궁리를 했을 게다. 후삼국시대처럼 옛 마한 소국이나 옛 왜를 자처하며 부족국가를 세우는 등의 일이 일어났을 것이다. 한성백제가 멸망할 때 살아남은 귀족들은 어디로 갔을까. 한반도 남쪽으로 향했을 게다. 또 일부는 일본 열도로 향했을 게다. 이전까지 일본 열도 쿠슈로 이주한 이들은 어떤 이들일까. 초기에는 하층민이 대부분 이주해서 별 볼 일이 없었을 것이다. 허나, 한성백제가 멸망한 이후에는 국가 경영에 나름 노하우가 있는 상층 귀족들이 이주했을 것이다. 한성백제는 부족연맹체와 달리 고대왕국 틀을 갖춘 국가였다. 해서, 이들은 김유신처럼 이정기처럼 왜왕을 돕는 왜의 중추적 세력이 되었을 것이다.

 

http://100.naver.com/100.nhn?docid=793235

해서, 일본의 고대왕국은 이 시기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보며, 백제가 멸망한 7세기 이후에야 체계가 자리를 잡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한성백제 귀족 후예들의 인맥으로 한반도 남부에 광범위한 세력 구축을 했을 것이다. 일부 한성백제 귀족들이 산적떼, 해적떼 우두머리가 되어 부족국가를 이루고 있었을 터이니 이들과의 연합에 나선 게다.

 

정리하면, 백제와 신라 세력이 한반도에서 약화될수록 그만큼 일본 열도의 왜 세력은 강성해졌다는 게다. 해서, 고구려가 강성할 때, 입지가 매우 축소된 신라와 백제 입장에서는 왜가 군사대국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왜에 인질을 보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허나, 절치부심한 신라는 로마 신라로 거듭난다. 한반도 동남부 작은 귀퉁이를 차지하는데 불과했던 신라는 군사력을 강화시켜 박제상 사건 이후 왜에 더 이상 인질을 보내지 않는다. 결정적인 것은 백제의 멸망이었다. 이때 왜는 백제를 돕는다는 명분으로 엄청난 수의 배와 군사를 파견한다. 허나, 당대 로마 신라군은 당나라와도 맞짱을 떠서 승리한 군단이었다. 해서, 로마 신라군은 왜군을 무찔러 대승을 거둔다. 이후 충격을 받은 왜는 일본 열도만이라도 지켜내자며 칩거에 들어간 게다. 해서, 이 시기에 한반도에서 왜를 찾아볼 수 없는 게다. 워낙, 로마 신라군이 막강하였고, 국가 조직체계가 잘 조직되었기 때문이다. 통일신라는 8세기에 당나라와의 교역으로 엄청난 부를 쌓으며 전성기를 이룬다.

 

일본은 통일신라를 매우 두려워하는 한편 통일신라가 부러워 모방하기에 바빴을 것이다. 해서, 일본 일왕은 7세기 이후에야 정립이 되는 게다. 이 시기부터 왜에서 일본으로 이름을 바꾼다. 또한 중국과 유사한 천하관을 정립한다. 이는 조선 후기 소중화주의와 생성된 배경이 유사한 게다. 그간 일본 열도 왜는 중국과 한반도라는 동아시아 구도에서 이정기처럼 인정받고자 부단히 노력하였다면, 백제 멸망 후에는 한반도에서 인연이 끊기는 것은 물론 일본 열도도 위험한 상황에 노출되었기에 열도만이라도 지켜내기 위해 자신들만의 판타지를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그것이 천황론이다. 고구려와 고려도 자신들만의 천하관을 정립했다. 허나, 일본의 천하관은 고구려와 고려의 천하관과 다르다. 고구려와 고려의 천하관은 당대 중국 주도세력이 약화된 정세와 집권 세력의 자신감이 만들어낸 능동적인 의미에서의 판타지이다. 반면 일본의 천하관은 당대 당나라와 통일신라가 이후 강력한 국가였기에 수동적인 의미에서의 판타지인 게다.

 

넷, 왜에서 일본으로 국명 개칭은 북방 유목민족에 대한 트라우마이다

 

왜 왜는 왜에서 일본으로 국명을 개칭하였는가. 간단하다. 로마 신라에게 대패해서다. 실력이 없으면 명분에 집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여, 왜는 자신들이야말로 동이족의 으뜸이라는 표식으로 일본을 국명으로 삼은 것이다.

 

예서, 왜란 명칭을 고려해야 한다. 우선 바이킹과 비교를 할 수 없다. 바이킹은 전 유럽을 공포에 떨게 하며 가는 곳마다 고대왕국을 세웠다. 유럽사에서 소홀히 할 수 없는 게다. 반면 왜는 그저 노략질만 했을 뿐이다. 하여, 말갈처럼 무시되어도 좋을 그저 그런 존재였다. 다만, 근래 국유본이 동아시아 새판을 짜면서 '주변부에 대한 관심을 통한 동아시아연합'을 추구하다 보니 동북공정이다, 뭐다 하여 고대사 연구에서 말갈이다, 왜다 하는 것이 이슈가 되는 것이다.

 

하면, 왜 일본은 바이킹과 흡사한 왜를 재조명하고, 관광상품으로 개발하지 않을까. 부끄럽기 때문이다. 무엇이 부끄러운가. 이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로마 신라가 흉노 김알제의 후손이라는 주장인 게다. 예서, 흉노란 이미지를 보자. 그 아무리 학술적으로 흉노 이미지를 바꾼들 그간 수천 년간 지배해온 중화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것이다. 한반도인이 흉노론에 당혹하듯 일본인 역시 왜인론에 당황하는 게다. 해서, 일본인의 주된 관심사는 왜인, 야요이인이 아니다. 죠몬인이 되는 게다. 일본이나 중국이나 한국은 물론 전세계 족속들은 모두 이왕이면 모두 자생적인 것을 가장 선호하고, 외래적이라면 가장 강하고 선진적인 족속의 후예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다섯, 신라구는 동아시아 최초의 해적이다?

 

왜인에 대한 평가 중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성격과 풍습도 특수하여, 걸핏하면 싸우려 들고, 여자가 야외노동을 잘한다."

http://100.naver.com/100.nhn?docid=185292

본디 왜인은 죠몬인과도 다르고, 마한인과도 다르고, 가야인과도 다르며, 이후 이주해온 백제, 신라인과도 달랐다. 왜 이들은 이런 생활을 하였을까. 왜인의 남녀 비율에서 여자가 남자에 비해 월등히 높다. 이들 지역민이 오래 살았다고 한다. 헌데, 남성이 절대 부족한 이유는 단 한 가지다. 바다에 나가 죽은 남자들이 부지기수이기 때문이다.

 

조선술은 예부터 발전했다. 한반도인의 배 제작 기술은 현존하는 세계 최초의 수준이다. 고래 그림이 있는 것을 보면 오래 전부터 연해뿐만 아니라 먼 바다까지 배를 몰고 나갔음을 의미한다. 이순신의 거북선이 근본 없이 아무렇게나 나온 게 아니라는 게다.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사람이다. 그 아무리 조선술이 발달해도 바다에 나서는 것은 위험한 일이 틀림없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다. 농지가 별로 없는 등 절대적으로 굶주림에 내몰리지 않는다면 모험할 이유가 없는 게다. 울산 고래 암각화에서 보듯 한반도인들은 일찍이 연해에서 벗어나 대양으로 나갔다. 허나, 안정된 수익이 육지에서 구할 수 있다면 굳이 모험을 할 연유는 없을 게다. 그렇다. 문제는 기술이 아니다. 그 기술을 목숨처럼 여기는 처지인 게다.

 

신라구는 누구인가?

http://ko.wikipedia.org/wiki/%EC%8B%A0%EB%9D%BC%EA%B5%AC

신라구의 부각은 왜구에 대한 일본의 콤플렉스 반응에 기인한 물타기라고 볼 수 있다. 사정이 그렇더라도 신라구를 규명할 이유는 있는 게다. 신라구가 일본 지역에 진입한 시기는 어떠한 시기인가. 9세기이다. 이 시기 한반도 정세는 어떠한가. 통일신라는 7세기말에서 8세기에 걸쳐 당나라와의 교역을 통해 전성기를 구가했다. 삼국통일에 따른 지역적 반발은 극히 미미했다. 해서, 통일신라는 아랍 전문가 정수일에 따르면, 아랍 상인이 찬미하는 이상적인 국가였던 게다.

 

http://blog.naver.com/miavenus/memo/70070646187

허나, 9세기에 이르자 통일신라는 위기에 봉착한다. 원인은 두 가지다.

 

백두산 분화는 신라 멸망의 원인이다

http://ko.wikipedia.org/wiki/%EB%B0%B1%EB%91%90%EC%82%B0

하나는 백두산 분화이다. 일각에서는 백두산 분화로 발해가 멸망되었다고 보고 있다. 인드라 견해는 다르다. 이 시기 중국과 한반도 기후를 보고한 리포트를 종합하면 9세기 한반도에 중대한 기후변화가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로 인해 한반도 전역에서는 농작물 피해가 극심했을 것이다. 이로 인한 민심이 크게 요동쳤을 게다.

 

다른 하나는 기후적인 요인으로 민심이 이반되는 시기에는 중앙정부가 약화되고 지방권력이 크기 때문이다. 당나라의 약화이다. 중국 역사상 최대의 번영을 구가하던 당제국이 755년 안사의 난 이후 자체 모순을 극복하지 못한 채 875년 황소의 난(875~884)을 시작으로 급속히 붕괴되면서 907년 드디어 멸망하고 이어서 중국은 다시 분열의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오대십국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통일신라도 예외가 아니었다. 통일신라 역시 중앙정부의 약화로 지방에 대한 통제가 미미해지자 지방 토호들이 발호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여, 9세기에 이르러 사태는 급변한다.

 

이 시기 대표적인 인물이 장보고이다. 허나, 장보고 시대까지는 역설적으로 정국이 안정될 수 있었다. 문제는 장보고 이후이다. 장보고라는 구심점을 잃어버린 지방권력은 자립하기 마련이다. 백두산 분출 이후 먹고 살기는 매우 힘들다. 중국이든, 통일신라든 정세가 혼미하다. 이런 때에 떠서 나도 왕 한 번 해먹자는 분위기가 있었을 게다. 하여, 이들은 야성의 본능에 눈을 뜨게 된 게다. 대마도를 정벌하고, 쿠슈를 정복해서 살 길을 찾아야 한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더냐.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넌다. 이것이 신라구이다. 이 시기 동아시아 해상은 통일신라가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일본은 신라구의 공격에 전전긍긍하게 된다.

 

여섯, 고려는 중세 동아시아 해상제국이다

 

신라구는 이내 퇴조한다. 한반도 왜의 퇴장과 같다. 당대 고려 왕건 세력이 급부상한다. 왕건 가문이 위치한 곳은 개성이다. 개성은 당나라와의 문물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왕건가문은 당나라와의 교역으로 부를 축적한 상인 가문이었다. 즉, 왕건 가문은 해상세력이었다. 하여, 바다를 아는 만큼 후백제와의 전투에서도 해군을 이용하여 후백제 배후를 치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것이다. 이처럼 바다를 아는 왕이 나라를 건국하니 신라구들은 왕건에 충성하든가, 해외로 가든가 기로에 설 수밖에 없었을 게다. 대표적인 예가 한반도 서남부에서 활약하던 수달이다. 수달이라는 별명을 지닌 능창은 장보고 사후 한반도 서남해의 해상권을 실질적으로 장악한 신라구였지만 왕건에 의해 생포되어 참수를 당했다.

 

고려 왕건은 어떻게 왕권을 안정시켰는가. 세 가지다. 하나, 국호를 고려로 하여 궁예의 이상을 실현하는 동시에 개성 이북의 호족에게 명분을 부여한다. 둘, 신라를 평화적으로 흡수한다. 고려의 신라 합병은 매우 합리적이어서 이후 조선, 일본, 국유본의 귀감이 된다. 셋, 지방호족간의 혼인동맹을 통해 안정화한다. 왕건은 마음에도 없는 혼인을 엄청나게 한 인물이다^^!

 

"왕건의 첫 결혼 상대자는 정주 유천궁의 딸이었다. 이가 왕건의 첫째 후비(后妃)인 신혜왕후(神惠王后)이다. 정주는 오늘날의 개풍군 풍덕에 비정되는 곳으로, 예상강과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고 강화도가 마주 보이는 바닷가에 임해 있어, 해양의 요충지로 꼽히는 곳이다. 『고려사』에 의하면 유천궁은 대부(大富)였으며, 읍인들이 그를 장자(長者)라 칭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정주 지역의 유력한 해양세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 더욱 정주는 왕건의 출신지인 개성과 인접해 있어, 왕건이 해양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이곳의 유력한 해양세력을 확실한 지원자로 포섭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왕건이 이곳 해양세력 유천궁의 딸을 첫 부인으로 맞은 것은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고려사』에서는 왕건과 유천궁의 딸의 만남이 '우연'의 소산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어느날 왕건이 군대를 이끌고 정주를 지나면서 버드나무 아래에서 쉬게 되었는데, 그 때 길 옆 천상(川上)에 서있는 유천궁의 딸을 우연히 만나 동침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연'이란 항상 그 안에 '운명적'임을 내포한다. 『고려사』의 찬자는 두 사람의 만남이 운명임을 묘사하고자 하여, '우연'의 이런 속성을 이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기실 두 사람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 주도면밀한 준비의 결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왕건은 912년과 914년의 두 차례에 정주에서 점함을 수리하여 대규모의 함대를 발진시켰다. 이는 왕건이 장인 유천궁의 협조를 받아 정주를 가장 중요한 해군의 전진기지로 활용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왕건이 견훤과 서남해지방의 '도서 해양세력'의 저돌적 도전을 꺾고 서남해 쟁패의 최후 승리자가 될 수 있었던 데에는, 유천궁의 적극적 협조가 큰 힘이 되었을 것임은 물론이다. 왕건의 두 번째 결혼 상대자는 나주 목포 오다련의 딸이었다. 이가 왕건의 둘째 후비인 장화왕후이다. 흔히 나주로 통칭되는 서남해지방은 장보고의 활동 중심지로서 국내외 해양교류의 요지였을 뿐만 아니라 대규모 도자기 생산단지가 조성되어 있었다. 왕건은 서남해지방의 명성과 중요성을 모를리 없었을 것이므로, 일찍이 이 지역을 그의 해양진출의 궁극적 목적지로 삼았다. 그러나 이 지역의 해양세력은 이미 상당한 세력으로 결집되어 있었고, 견훤이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집요한 공략을 펴고 있던 중이었으므로, 서남해지방에 진출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왕건은 서남해지방에 성공적으로 진출해 가기 위한 비장의 방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되었을 것이다. 오다련의 딸과 결혼을 결행한 것이야말로 왕건의 비장의 방책 중 하나였다 할 것이다."

http://www.changpogo.or.kr/main.asp?CMenu=4&Cgubun=1&CPage=c_news0210_03.htm

고려는 태조 왕건에서 보듯 해상을 중시했다. 그런 이유로 중국, 아랍과의 교류에는 아무런 제약이 없었다. 그 때문일까. 오늘날 한반도 명칭에 대한 해외의 이름은 온통 고려인 게다. 해서, 영문 이름도 코리아인 게다. 고려는 오늘날 한국인의 정체성을 실현했다. 통일신라가 신라와 백제를 융합시켰지만, 발해와 대립해 있었기에 절반의 통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허나, 왕건이 통일신라를 평화적인 방법으로 권력을 이양을 받았고, 왕건을 도운 귀족들 상당수가 고구려 후예들이고, 발해 멸망 후 발해 유민을 받아들이면서 삼국시대 강역을 한국인의 강역으로 삼을 수 있었다. 해서, 고려는 삼국사기를 만든 것이다. 일각에서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평가절하를 하지만, 사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매우 귀중한 사료이다. 삼국사기가 없다면, 우리는 중국의 사서나 일본서기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삼국유사가 있다고는 하나, 정사는 아니다. 정사는 삼국사기뿐이다. 일부 내용에 비판적일 수는 있어도 삼국사기는 매우 높이 평가해야 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만일 삼국사기가 없다면, 오늘날 국유본의 스파이로 의심되는 박노자의 고구려는 외세였다는 식의 같잖은 주장에 어떻게 맞설 수 있다는 말인가. 삼국사기가 정사였기에 이는 김부식의 개인 입장이 아니라 고려국의 공식 입장인 게다. 하여, 삼국사기를 근거로 고려는 고구려를 외세로 받아들이지 않았음을 입증할 수 있는 것이다.

 

일곱, 고려 말 왜구는 왜 극성이었는가?

 

http://ko.wikipedia.org/wiki/%EC%99%9C%EA%B5%AC

고려 말에 왜구 활동이 극심했다. 이에 대해 일반적인 설명은 무엇인가. 당대 일본 열도는 일본 일왕이 둘로 갈라지는 등 막부체제였다. 해서, 이 갈등의 영향으로 물자 조달 등으로 정규군이 왜구가 되면서 왜구가 극심했다는 게다. 이는 어딘지 설명이 미흡하다. 이를 위해서는 고려 무신정권과 몽골 침략이라는 동아시아 정세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하여, 고려말 왜구의 강화는 세 가지로 분석해야 한다.

 

가, 몽골의 침략과 삼별초의 항쟁이다.

 

고려 무신정권은 몽골 침략에 강화도로 피신했다. 그만큼 바다에 친화적이라는 의미다. 또한 고려 삼별초는 강화도 항전에 이어 제주도 항전을 하였다. 그만큼 고려는 해양강국이었던 셈이다. 해서, 몽골의 침략 전까지인 13세기 초반까지 고려가 동아시아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해서, 왜구가 날뛸 수가 없었던 게다. 이 대목에서 인드라는 무신정권에 대한 재평가를 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조선왕조 입장에서야 무신정권이 문제이겠지만, 오늘날 관점에서 보자면,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일본의 막부체제와 비교하여 왜 고려의 무신정권 체제는 단명하였는가를 연구하는 흐름이 형성이 되었으면 싶다. 그럼에도 무신정권에 비판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국유본의 지시를 받은 친일매국부패세력이 박정희 죽이기를 하기 때문이다. 해서, 고려 무신정권을 부정적으로 묘사해야 하는 게다. 반면 일본 막부에는 긍정적인 게 친일매국부패세력의 특징이다. 사실 한국 민중사적 입장에서 무신정권 시대야말로 중요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정치권력이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던 다른 시기와 달리 이 시기는 그야말로 천민도 권력을 잡을 수 있었던 독특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다만, 왜구와 관련하여 무신정권이 중요한 것은 몽고에 대항한 삼별초가 무신정권의 후예들이었기 때문이다.

 

http://www.jang-soo.co.kr/zboard/view.php?id=korea&no=13

해서, 몽고는 무인정권과 삼별초를 제거하려 했던 게다. 무인 정권의 몰락 없이 고려의 항복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여, 육전에는 강하나, 해전에는 약한 몽골이 마침내 삼별초를 꺾고 고려를 식민지로 만든다. 고려 주력군은 삼별초의 항쟁 등으로 소진된다. 삼별초는 몽고가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배를 만들려고 고려 땅에 세운 조선소를 공격하여 배들을 불태우기도 했다. 다시 말해, 해상 전투력을 잃게 된다. 게다가 결정적인 것은 여몽연합군이 일본 정벌을 하다 실패한 것이다. 동아시아 해상을 장악한 군사력 대부분을 잃은 게다.

 

나, 중앙권력의 약화는 지방 세력의 강화로 이어진다.

 

고려가 몽골에 유린을 당하니 한반도 남부 사정이 어떠하겠는가. 중앙권력이 식민지 정권으로 전락하니 신뢰를 잃게 된다. 또한 중앙권력의 통제가 지방에서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니 각 지역은 독립하게 된다. 대표적인 예가 삼별초다. 삼별초는 진도와 제주에 근거지를 마련하면서 일본에 문서를 보내 몽골과 맞서는 연합전선을 제안하기도 했다. 사정이 이러하니 한반도 남부인들은 초기 삼별초에 호의적이었을 것이다.

 

http://blog.daum.net/zapari/15714594

헌데, 이들 삼별초는 대몽항쟁 과정에서 무리하게 군량미를 끌어 쓸 수밖에 없었다. 해서, 강화도인이나 진도인이나 제주인들은 처음에는 삼별초를 호의적으로 대하다가 자신들을 혹사하니 등을 돌렸을 것이다. 삼별초의 패전은 일차적으로 막강한 몽골군에 원인이 있겠으나, 대민사업에 소홀했던 면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삼국지에서 유비가 군사적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난민과 함께 하려 한 '덕치'란 측면을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삼별초는 제주에서 최후를 맞이하지만, 일부는 오끼나와나 일본 구주로 도피했을 것으로 추정이 되고 있다.

 

하면, 살아남은 삼별초가 쿠슈에 갔다면 이들은 강화도인이나 진도인, 제주인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 몽고의 식민지는 더 이상 내 나라가 아니었을 것이다. 또한 자신들에게 등을 돌린 강화도인, 진도인, 제주인에 대한 원한이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이들은 한반도 지형은 물론 동아시아 해상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아는 해양 전사들이었다. 이들 핵심전력이 쿠슈로 망명하니 쿠슈가 이들을 특급 대우했을 것이 자명하다. 안 그래도 몽골의 일본 정벌이 코앞에 닥쳐 정보가 필요한 마당에 휭재한 셈일 게다.

 

다, 구주의 동아시아 해상장악 시도

 

여몽연합군의 일본 정벌이 실패로 돌아간다. 하여, 동아시아 해상은 잠시 무주공산이 되는 셈이다. 허나, 엄청난 노다지였던 만큼 다른 실력자가 이 자리를 채우게 된다. 그들이 일본 구주 지방 세력이었던 게다. 물론 당대 일본 정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허나, 일본 중앙정치 사정과 별개로 구주 지방 세력은 욕심을 내었던 게다.

 

http://blog.naver.com/sws5138?Redirect=Log&logNo=140007036207

왜구는 구주 지방정부와 결탁하여 정규군이 포함된 왜구가 있었을 것이며, 중앙정부가 약화된 틈을 타서 준동한 해적떼 무리 왜구가 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시기 왜구는 단지 구주 왜구뿐만 아니라 중국, 고려인 출신 왜구도 있었을 것이다. 왜구란 해적무리이니까^^! 해서, 13세기말부터 고려 말까지 중국과 한반도에서의 왜구의 노략질이 극심해지는 것이다. 이 시기 송과 고려는 몽골의 침략으로 국력이 매우 쇠약해져 있었다. 또한 몽골의 침략으로 민심이 흉흉해졌기에 지방세력 중 일부는 스스로 왜구를 참칭하면서 노략질을 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http://100.naver.com/100.nhn?docid=173703

허나, 이처럼 막강했던 왜구도 고려 말에 이르면, 퇴조하게 된다. 최무선, 이성계, 최영이라는 영웅의 등장이다. 특히 최영의 홍산대첩에 이어 이성계는 황산대첩에서 정규군 왜구를 결정적으로 박살을 내버린다. 이는 해적 소탕전이 아니라 임진왜란 때의 전쟁과 다름없는 전쟁이었다. 하여, 홍산대첩에 이어 황산대첩에서 왜구가 참살을 당하자 이후 동아시아 역사에서 한동안 왜구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여덟, 세종대왕의 대마도 정벌이 전기, 후기 왜구의 분기점

 

14세기말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한다. 이성계는 명과의 외교에 사활을 걸고 있었다. 해서, 명과 같은 제도를 상당 부분 따른다. 조선의 해금정책은 고려말 공도정책의 연장선에서 보아야 하겠지만, 명의 해금정책을 따른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인드라가 강조했듯 조선왕조에서 이해하지 못할 일들이 일어나면 이는 명나라와 관련이 깊다. 가령 선조와 광해군의 대립 배경에는 당대 명나라 권력투쟁을 알면 이해가 빠르다.

 

하면, 왜 명나라는 해금정책을 취했던 것일까. 이는 원나라 정책을 이어간 게다. 원나라는 초원 지대에서의 전쟁에서는 강했지만, 바다나 밀림에서의 전투에는 취약했다. 베트남과의 전쟁에서 패한 것도 이 때문이다. 무엇보다 원나라가 공도정책을 포함한 해금정책을 취했던 것은 고려 무신정권 때문이다. 고려 무신정권은 강화도로 피신하면서 대몽항쟁을 장기적으로 끌어간다. 이에 당황한 것이 원나라였다. 해서, 원나라로서는 섬을 불온시할 수밖에 없었다. 명목은 왜구로부터의 침입에서 백성을 보호한다는 조치이지만, 실은 반란을 예방하기 위함이었다. 하면, 주원장은 왜 원의 해금정책을 계승한 것일까. 주원장도 같다. 주원장은 반란을 통해 집권하였다. 해서, 누구보다 반란의 속성을 이해했다. 해서, 주원장 생애 내내 주원장은 누가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싶어 닥치는 대로 죽였다. 그런 주원장이니 만큼 해금정책도 반란 방지가 목적이었다. 왜구가 문제가 아니었던 게다. 해금정책에는 밀무역 금지도 포함되어 있다. 예서, 당대 동아시아 무역을 잠깐 살펴보자.

 

"중국의 명나라와 일본의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 사이에 행해진 감합무역(조공무역, 명일무역)은 명나라의 건문제(建文帝)와 무로마치 막부의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 때 개시되었다. 명나라가 해금 정책(海禁政策)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아시카가 막부의 쇼군은 「일본국왕」으로 책봉받음과 함께, 왜구(倭寇)와 구별하기 위한 감합부(勘合符, 해적과의 구별을 위해 무역선이 소지한 표찰)를 명나라로부터 발행받는다. 무역은 이 감합부를 통해 상대방을 승인하는 조공 형태로 행해졌으며, 십년에 한번 조공을 하는 등의 제한이 가해져 있었다. 막부(바쿠후)가 파견한 사절에는 하카타(博田)나 사카이(堺) 등의 유력한 일본 상인들이 따라갔으며, 그 사이에 사무역(私貿易)이 행해졌다."

http://ko.wikipedia.org/wiki/%EB%8B%9D%EB%B3%B4%EC%9D%98_%EB%82%9C

당송시대는 인류 역사상 가장 부유했던 시기 중 하나다. 송나라 때에 종이, 화약이 발명되었을 만큼 이 시기 중국은 산업혁명을 일으키고 있었다. 오늘날 서양이 자랑하는 발명품 상당수가 이미 송나라 때에 발명되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해서, 당송과의 교류는 그야말로 노다지였다. 해서, 신라, 고려는 엄청난 부를 획득할 수 있었다. 헌데, 몽골 침략 전에도 고려는 안보를 이유로 화약 등 특수물자를 일본에 전해주지 않았다. 엄격하게 단속했다. 이런 까닭에 고려말 최무선이 화약과 대포로 왜군을 섬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중국에는 없는 것이 없을 정도다. 반면 일본은 물자가 빈궁했다. 해서, 일본은 사활을 걸 수밖에 없었던 게다.

 

하면, 이때 일본 상황은 어떠한가. 가마쿠라 무신정권이 등장한 시기가 고려 무신정권이 등장한 시기와 유사하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간 동아시아적인 귀족 중심의 국가관료제에서 봉건제로의 이행을 찾아볼 수 있다. 다시 말해, 고려 무신정권의 출현은 새로운 세상을 알리는 기폭제였다. 허나, 고려에서 무신정권이 좌절된다. 몽고 때문이다. 이성계도 무신 출신이다. 이처럼 무신을 우대하면 언제든 반란의 위험이 있었다. 해서, 군사력을 억제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었다. 반면 일본은 지리적인 이점을 안고 봉건제로 이행한다. 해서, 전국시대가 불가피했다. 이들을 통제할 권력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 일왕은 존재 자체가 부정당했다. 명이 쇼군을 왕으로 책봉했다는 것은 당대에 이미 일본 일왕은 없는 것이나 진배가 없었던 셈이다. 다만, 고려 무신정권이 왕을 존립시킨 것처럼 무신정권의 핸디캡 때문에 공연한 반발이 일어날까 싶어 연금조치 정도로 한 것이다. 어차피 실질권력을 지니고 있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삼국지에서 보면 조조가 힘없는 황제를 갖고 노는 방식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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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쿠라 막부와 무로마치 막부의 결정적인 차이는 무엇인가. 가마쿠라 막부가 춘추시대라면 무로마치는 전국시대인 게다. 전자는 일왕을 명분만이라도 모신 이원집정부제였다면, 후자는 일왕을 배제한 단독정권인 게다. 해서, 무로마치 이후 일본 일왕이란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 즉, 현존하는 일본 일왕제는 근대 이후 국유본의 필요에 의해 날조된 사기극이다.

 

헌데, 막부체제라는 것은 명분이 아니라 강자만이 살아남는 시스템이다. 해서, 전국시대가 필연적이었던 게다. 고려 무신정권을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해서, 이 시스템은 역동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천민도 얼마든지 권력을 잡을 수 있었던 게다. 이성계도 무신정권이 아니었다면 조선을 건국할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다. 왜구는 무로마치 정권 출현 시기와 맞물린다고 보면 된다. 이전까지는 명분을 중시했다고 할 수 있다. 허나, 일본 일왕을 배제한 마당에 무로마치가 두려울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철저히 실리 중심으로 간 게다. 해서, 일본 각 지방영주들 목표는 한결같아진 게다. 부국강병. 부를 축적하여 군사력을 키운다. 군사력을 키워서 무로마치처럼 자신들도 언젠가는 일본을 석권하겠다. 해서, 명과 조선과의 무역에 목매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왜구는 이성계에게 황산대첩에서 대패한 이후 한동안 조용했다. 허나, 당대 일본정세로서는 그대로 물러날 수가 없었다. 하여, 다시 왜구가 준동한다. 허나, 세종대왕이 대마도 정벌을 지시한다. 이 시기는 조선 건국 세대가 살아 있었을 때이므로 조선 군사력이 매우 막강했다. 하여, 깜짝 놀란 일본은 조선의 실력에 두려워하여 정규군을 포함시킨 해적질을 중단한다. 허나, 무로마치 정권 통제 바깥에 있던 변두리 해적떼와 민간상인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특히 무로마치 정권은 명나라나 조선과의 조공무역을 독점하여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반면 변두리 지방영주는 해적질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으며, 민간상인들은 죽어라고 밀무역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해서, 세종대왕의 대마도 정벌을 기준으로 전기 왜구와 후기 왜구를 분류할 수 있는 것이다. 전기 왜구는 비공식적일지라도 일본 정규군이 포함된 왜구였다면, 후기 왜구는 민간 상인이 중심이 되고, 은밀하게 지방영주가 뒷돈을 대주는 왜구였다. 하여, 후기 왜구에는 단지 왜인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밀무역으로 큰 부를 축적할 수 있었기에 중국인, 조선인도 있었던 게다.

 

아홉, 포르투갈 카르타고 유태인이 왜인에게 조총을 건넨 이유?

 

포르투갈에서는 1498년 유태인 추방이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포르투갈 상인이 1543년 일본에 조총을 건네주었다고 알려져 있다. 정확히 말한다면, 일본에 조총을 전해준 자들은 네덜란드 유태인 상인일 것이다. 네덜란드 유태인 상인이 포르투갈산 조총을 왜인에게 판 게다. 이때, 대부분의 포르투갈, 네덜란드 상인은 99% 유태인이라고 보면 된다. 가령 향신료 무역을 주도한 것은 겉보기에는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이지만, 알고 보면 다 같은 유태인들이다. 인드라가 강조한 카르타고 유태인, 세파라딤 유태인, 궁정 유태인인 게다.

 

하면, 이것이 어떤 의도가 있었을까. 왜 하필 왜인에게만 주었을까. 결론부터 말한다면, 아니다. 포르투갈산 조총은 1529년에 이미 중국에 전해졌다. 일본보다 14년 빠른 셈이다. 중국에도 주고, 조선에도 전해졌다. 그럼에도 왜 중국, 조선에서는 조총을 취급하지 않았을까. 이유는 중국과 조선은 방어용 무기가 필요했고, 일본은 공격용 무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해서, 중국과 조선은 대포를 특화시켰고, 일본은 조총을 특화시킨 게다. 다만, 예서 중요한 것은 당대 중국과 조선은 일본에게 화약류 판매를 엄격히 단속했다. 오늘날 국유본이 전세계 무기를 엄격히 통제하는 것과 같다. 여러분이 상상하는 이상으로 국유본은 세심하게 무기 관리를 한다. 가령 북한 무기는 동아시아 긴장을 일으키는 전략으로 국유본이 의도적으로 평양정권에게 흘린 무기인 게다. 핵무기고, 뭐고 다 국유본의 손바닥이다.

 

http://blog.hankyung.com/raj99/294370

결국 핵심은 무기가 아니다. 무기를 쓰는 사회이며, 그 사회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역사가 움직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면, 이 당시 유태인이 어떤 의도가 있었을까. 인드라는 회의적이다. 이 당시 포르투갈, 네덜란드 유태인 관심사는 향신료였다. 반면 로스차일드를 필두로 한 영국 유태인 관심사는 아편이었다. 로스차일드가 중국 공략에 적극 나선 이유는 중국이 아편 무역을 금지시켰기 때문이다. 그 이전까지는 중국이 영국과 독점적으로 아편 무역을 허용해서 중국을 장악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로스차일드 이전 영국 유태자본은 미국을 독립시켜 동인도회사에 대한 영국인의 관심사를 미국 독립에 신경을 쓰게 한 사이에 중국 아편 무역에 올인했다.

 

또한 전쟁을 이용해서 돈을 번다는 발상은 로스차일드 이후의 사업방식이다. 그 이전까지 유태인은 향신료 무역이나 금은광산 채굴 같은 데에 몰두했다. 반면 로스차일드는 헤센가가 용병장사로 큰돈을 버는 것을 목격하였기에 각국 국채를 사들여서 나폴레옹전쟁서부터 전쟁을 조장하기 시작한 게다. HSBC나 스탠다드차타드 은행이 중국 청나라 정권과 거래한 데서도 확인이 된다. 국유본은 청나라 국채를 사들인다. 청나라는 국채발행한 돈으로 국유본 무기를 구입하고, 군사력을 키운다. 또 국유본은 일본 국채를 사들인다. 일본은 국채발행한 돈으로 국유본 무기를 구입하고, 군사력을 키운다. 청과 일본은 조선에서 전쟁을 벌인다. 이런 식인 게다.

 

해서, 인드라는 국유본이 1820년대 이전까지는 동아시아에서 일본을 이용하겠다는 전략이 전무했다고 보고 있다. 허나, 그 이후로는 로스차일드가 적극적으로 일본을 이용하는 전략을 짠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배경에 국유본의 음모가 있다고 보지 않는다. 인드라는 국제유태자본의 기원을 1600년 네덜란드 주식거래소 탄생에서 보고 있으며, 로스차일드 시대에 이르러 국유본의 본격적인 세계 공략이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해서,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침략한 배경에 대한 인드라 설명은 다음과 같다. 배가 고파서.

 

 

열, 한반도 평화통일과 경제발전을 위한 역사를 생각한다

 

님의 상상력이 재미있다고 여긴다. 해서, 님이 주장한 것을 바탕으로 팩션을 써볼 수 있을 것이다. 가령 국유본이 일본은 물론 중국에도 조총과 대포를 주어 동아시아 전쟁을 일으키려고 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할 수 있었던 데는 유태인 상인이라는 숨은 주역이 있었다. 그는 그 누구도 승리하지 못하는 전쟁을 바랐다. 해서, 그는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이용해먹을 대로 이용해 먹은 뒤 암살한다. 또 다른 그의 목적은 명을 전쟁으로 쇠잔하게 해서 망하게 하는 것이었다. 왜 명을 망하게 하였나. 해금정책 때문이다. 하여, 청의 건국에는 유태인 상인이 있었다. 허나, 청 역시 원, 명에 이어 여전히 해금정책을 취하자 청을 내부로부터 말아먹는 아편을 팔아먹기 시작한다. 이에 청이 아편무역을 금지하자 아편전쟁을 개시하는데... 재미있지 않겠는가. <다빈치 코드>나 <천사와 악마>처럼 써먹을 수 있지 않겠는가. 제목은... <임진유란> 어떠한가. 임진왜란은 유태인이 일으켰다는 의미에서 임진유란이다^^! 물론 이는 허구다. 허구이지만, 허구이기에 오히려 상업화에는 부담이 없을 수 있다. 오히려 영화 소재가 빈궁한 요즘 자본이 탐을 낼 수도 있다. 영화의 첫 장면은 커다란 조총구멍이다. 화면이 빠르게 줌아웃되면서 왜군의 조총사격이 이루어진다. 백의를 입은 조선 의용군이 피를 흘리며 쓰러진다. 백의에 시뻘건 핏물이 점차 번지며 화면이 바뀐다. 화면에는 깃발이 휘날린다. 정명가도... 이 시놉시스보고 당장 연락올 지도 모르겠다^^! 그럼 님이랑 공동 시나리오 쓰면 되나~!

 

자, 문화적 마인드는 이쯤으로 하자. 오늘날 남방계 왜나 북방계 흉노 등을 적극적으로 접근해야 할 이유가 있다. 국유본의 근래 기획은 아시아연합이다. 이를 위해 역사적 재조정화가 각국에서 진행중이다. 하고, 최근 한민족은 동남아시아로부터 왔다, 라는 식의 국유본 연구가 등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하면, 여기에 일일이 반응하기보다 그들 기획을 알아야 한다. 현재 국유본이 만든 틀은 중국과 일본이라는 2강에 한국과 동남아시아, 그리고 호주,뉴질랜드 등 오세아니아, 마지막으로 인도를 포함시키는 6자 경제공동체 구조이다. 물론 안보공동체로 가면 나토처럼 미국이 환태평양 국가라는 명분으로 참여하며, 미국만 참여하면 뻘쭘하니 캐나다 정도를 함께 갈 수 있을 것이다. 하면, 이때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 경제발전과 사회복지를 위한 길은 무엇인가. 북방계와 남방계가 잘 융합된 지역이 한반도이다. 해서, 국유본이 한류 붐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를 잘 활용해야 하는 것이다. 동아시아에서 중국, 일본이라는 2강의 구도보다 한중일 3강 구도가 오히려 이 지역 균형과 안정에 가장 나은 방안임을 역설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하기 위해 한반도 통일이 진행되어야 하고, 한반도 국력이 이른 시기내에 일본 국력에 도달해야 한다는 점을 설득력있게 주장해야 하는 것이다.

2010년 경제전망: 삼성, 대우건설, 금호사태의 비밀과 박정희 죽이기국유본론 2010

2010/01/09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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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도에서의 친절한 가이드

길을 걸으면 생각이 난다

인드라는 정치를 하지 않겠으며,

책을 더 이상 쓰지 않으며,

언론에 기고하지도 인터뷰를 하지도 않을 것이며,

종교단체를 만들지도 않을 것입니다.

국유본론을 소명으로 여기고

지금처럼 살다

행복하게 가겠습니다

매일매일 행복하겠습니다

 

마음을 열고

자세를 낮추고

세상에 감사한다

마.자.세.

 

 

한반도 평화와 통일, 경제 발전과 사회 복지를 위하여

쪽발이에게 죽음을 쪽발왕에게 천벌을

쪽발왕 폭살하려 한 이봉창 열사 정신 이어받아

불타는 쪽발산 불량배터리를 쪽발왕 아가리에 쑤셔넣자

쪽발왕과 쪽발왕계, 쪽발아베, 쪽발노다, 이 병쉰들이 10초안에 똥 못 싸면 때려죽이자

쪽발놈현에 온몸으로 항거한 허세욱 열사와 중도좌파 민족주의자 박정희 대통령의 이름으로

쪽발민주당 해체

인민의 적, 쪽발의 나팔수 네이버 주가 오백원

쪽발찌라시 한경오프엠 아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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