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5 : 자본주의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1/11/02 03:38

http://blog.naver.com/miavenus/70122850647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5 : 자본주의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1/11/02 

   

자본주의는 언제 시작하였으며, 성립 배경이 무엇인가? 

   

이론 진영은 대체로 http://blog.naver.com/shiroyume?Redirect=Log&logNo=150122529579 와 같다. 반면, 음모론은 딱히 이론적인 근거없이 닥치고 유태인이 자본주의를 만들었다, 라는 식이거나 침묵한다.

   

이에 대한 국제유태자본론 입장은 무엇인가.

   

국제유태자본론은 음모론 진영에서 이론 진영 논리를 비판적으로 고찰하면서 이론적인 근거를 제시하고자 한다.

   

하나, 국제적인 요인, 전쟁과 기후이다.

둘, 유태적인 요인, 유태인 스페인 추방이다.  

셋, 자본적인 요인, 대항해시대와 가격 혁명이다.

   

국제유태자본론은 자본주의가 유럽에서 발생한 인위적이고, 특수한 제도라고 본다. 전 세계로 보급할 만큼 인류에게 유익한 제도가 아닌 게다. 

   

   

   

십자군전쟁이 일어난 진짜 배경은?

   

동로마제국 황제가 당대 셀주크투르크에게 대패했다. 직후 황제가 이슬람 세력으로부터의 보호 요청을 카톨릭 교회에 호소하자 카톨릭 교회가 기독교적 대의라는 명분하에 십자군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허나, 명분과 달리 실제로는 정치경제적인 배경이 있었다. 농업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증가하여 인구가 늘었다. 교황 권위를 유지하는 것은 물론 동로마까지 장악하여 명실상부하게 기독교 세계의 수장이 되려는 당대 교회의 야심이 있었다. 장자상속권 탓에 미지의 영토를 장악하려는 유럽 봉건귀족과 기사들의 토지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

   

중세유럽은 세 가지 공동체가 공존했다. 하나, 종교적 공동체다. 교황과 수도승의 세상이다. 둘, 정치적 공동체다. 왕과 영주, 기사들의 세상이다. 셋, 경제적 공동체다. 교황과 왕, 영주는 장원을 통해 농노를 지배했다. 이 세 가지에서 공통적인 피지배층은 농노이며, 권력층은 교회 권력과 국가 권력, 그리고 지방귀족 권력으로 분리되어 중세유럽은 이 세 권력이 서로 대립, 갈등하는 시대였다. 해서, 상기한 설명은 이들 각각의 권력에 대한 동기부여를 하는 셈이다.

   

이것이 대체적인 십자군 전쟁 배경에 대한 정설 요약이다. 허나, 과연 이것 뿐일까.

   

첫째, 경제적 공동체에 관한 것이다. 대부분의 설명은 농업 생산력이 월등하게 높아져서 인구가 증가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허나, 여기에는 의문이 있는 게다. 왜 하필 이 시기에 농업 생산력이 늘어난 것일까. 이에 대한 가장 간명한 답변은 기후 변화이다. 유럽에서는 9세기~13세기까지 온화한 날씨가 계속돼 평균기온이 3~4도 정도 올라가 농경을 할 수 있는 지역이 늘어났다. 사람들의 영양상태도 좋아졌다. 키도 커졌다고 한다.

   

둘째, 정치적 공동체에 관한 이야기다. 기후 온난화 이전만 하더라도 중북부 유럽에는 사람이 살기에는 매우 불편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알래스카 같은 땅이었다고나 할까. 허나, 10세기에 이르면, 프랑크 왕국이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로 분열된다. 이뿐인가. 아니다. 덴마크, 폴란드 등 유럽 각 지역에서 독립왕국이 연달아 출현한다. 왜인가. 먹고 살만 하기 때문이다. 기후가 온화하니, 경작지가 늘고, 농업 생산성이 높아진다. 

   

셋째, 종교적 공동체에 관한 논리다. 십자군전쟁 때문에 교회와 교황의 권위가 실추했다고 설명을 한다. 아니다. 교회와 교황의 권위는 십자군전쟁 이전부터 하락할 수밖에 없었다. 해서, 정확하게 말한다면, 이미 추락하는 교황의 권위를 지키기 위한 것이 십자군전쟁인 셈이다. 왜인가. 500년에서 700년 사이에 유럽에서는 큰 기후 재앙이 있었다고 한다. 특히 660년 유럽이 유난히 추웠다고 한다. 이런 시기에서는 당연 종교가 득세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이성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혹한의 추위를 견뎌낼 재간이 있겠는가. 해서, 이때는 숙명적 사고가 보탬이 된다. 인간이 견디기에는 참으로 가혹한 시련에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은 한시적으로 숙명적인 태도로부터 비롯된다. 외부의 어떠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는 내면을 유지할 수 있다. 반면 10세기부터 13세기에 이르는 시기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강조가 되던 시기이다. 구약에서 보라. 신의 선민이라는 유태인이 조금만 먹고 살만하면 신을 잊는 것을 말이다. 해서, 교회와 교황은 다급했다.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누가 신을 떠올리겠는가. 중세 온난화로 인해 인민 생활 여건이 나아지자 카톨릭 교회가 권력을 지속시키자니 전쟁을 택했던 것이다. 

   

십자군 전쟁이 화폐 경제를 정착시켰다 

   

이러한 십자군 전쟁의 결과로 유럽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1. 경제적 변동이다. 유럽에서 자급자족 경제가 급속도로 무너지면서 화폐 경제가 자리잡기 시작했다.

   

원정대는 과거 로마제국 요새들을 부대 집결지로 하였는데, 이 집결지가 지역 거점이 되면서 도시로 성장하여 오늘날 프랑스, 독일 주요 대도시가 되었다. 원정대가 로마제국 요새들을 부대 집결지로 한 것은, 이 지역이 로마 때부터 있던 길 덕분에 교통이 편리했기 때문이다. 교통 덕분에 한국의 장날처럼 상인들이 요새에서 장사를 하였는데, 이 시기는 자급자족 시대여서 대부분 좁은 지역에서 상인끼리 화폐를 사용한 것이다. 허나, 십자군으로 인해 상인들이 십자군 루트를 통해 동방을 상대로 원거리 무역이 가능하였기에 화폐 사용이 전유럽으로 확산하였다. 

   

무엇보다 이득을 본 것은 베네치아, 피렌체, 제노아 등과 같은 이탈리아의 북부 도시들이었다. 특히 제 4차 십자군 원정 이후 이탈리아 상인은 동지중해와 흑해의 교역권을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빼앗아 베네치아와 제네바 등의 도시가 급속히 발달하였다. 이 시기, 중동을 잘 아는 카르타고/페니키아 유태인이 상대적으로 우위에 설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히브리어 뿐만 아니라 아랍어에도 능통하므로.

   

헌데, 십자군 원정으로 인하여 상인 뿐만 아니라 왕족과 귀족과 기사들도 재산을 처분하여 원정 자금을 만들어야 했고, 전쟁에서 획득한 전리품을 휴대하기 편하게 보유해야 했기에 화폐를 쓰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영주 직영지들이 축소, 소멸하였고, 농노들이 부역 대신 생산물이나 화폐를 지대로 바치는 새로운 형태의 장원제가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화폐 거래가 자주 이루어지니 화폐 경제가 급속도로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이나 고려에서도 화폐가 쓰이기는 했다. 허나, 한시적이었기에 대부분 상인들끼리만 사용했고, 이에 따라 화폐 경제가 자급자족 경제를 대체할 수 없었다.

   

2. 정치적 변동이다. 십자군 전쟁은 왕권 강화에 크게 기여했다.

   

당대 왕국들은 중앙집권적 왕국이 아니라 귀족 중 강한 귀족이 대표를 맡는 왕국이어서 전국적으로 조세를 할 수 없었고, 직할지에서만 세금을 거두었다. 허나, 십자군 전쟁을 이유로 일부 왕국을 시작으로 조세를 하기 시작하면서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다. 반면, 귀족들이 십자군 전쟁에 참가한 것은, 보다 큰 공을 세워 왕을 해먹거나, 영지를 늘릴 목적이었다. 헌데, 결과는 귀족들이 대부분 죽고 극소수만 살아남아 귀족 권력이 크게 약화하였다. 

   

3. 종교적 변동이다. 십자군 전쟁은 신의 의지보다 인간의 의지를 강화시켰다.

   

십자군 전쟁에 참가한 귀족들 다수는 죽었다. 소수만 살아남았다. 헌데, 과연 이들 신앙심이 강화하였을까. 정반대이다. 십자군 전쟁이 대승이었다면 모르되, 패배했다. 해서, 살아남은 자들은, 사제의 축복 대신 자신의 전쟁 경험을 더 신뢰했을 것이다. 

   

유럽에는 다시 페스트와 함께 혹한이 찾아왔다

   

13세기까지 유럽은 중세 온난기라 하여 기후가 온화하였다. 허나, 14세기에 접어들면서 유럽이 추워지기 시작했다. 해서, 15세기말서부터 17세기말 시기는 유럽 소빙하기라고 할 만큼 혹한이 유럽에 밀어닥쳤다. 이 시기 굶어죽는 이들이 속출하였고, 마녀로 몰려 처형당한 이도 50만 명에 이를 만큼 극한의 시대였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432682

   

게다가 페스트가 창궐했다. 페스트로 인해 전 유럽 인구의 1/3, 혹은 1/2인 삼천여만 명이 죽었다. 

   

  http://kin.naver.com/open100/detail.nhn?d1id=11&dirId=111002&docId=272264&qb=7Y6Y7Iqk7Yq4IOycoOufveyduOq1rA==&enc=utf8&section=kin&rank=3&search_sort=0&spq=0&pid=grt5p35Y7vlssZClRzZssc--107009&sid=TrAwiHIJsE4AAGp9Eik 

   

해서, 사태는 어떻게 변모하는가.

   

가. 화폐 경제의 저항이다. 십자군 전쟁으로 자리잡은 화폐 경제는 다시 자급자족 경제로 되돌아가느냐, 화폐 경제를 유지하느냐 갈림길에 놓였다. 이러한 화폐 경제에 부정적인 요인은 페스트였다. 특히 당대나 오늘날 분석을 통해서 보면, 동방 무역을 통해 페스트가 들어왔기에 공격 대상은 유태 상인일 수밖에 없었다. 이득을 가장 많이 취했으므로.

   

허나, 백년 전쟁이 페스트 공격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재개한다. 이는 화폐 경제가 페스트와 혹한에도 불구하고, 화폐 경제의 역동성을 확인하는 결과물이다.

   

혹한과 페스트로 인하여 유럽 도시들 상당수가 타격을 크게 입었지만, 살아남은 도시에서는 오히려 화폐 경제가 강화하였다.

   

나, 잔다르크에서 보듯 백년 전쟁으로 왕권은 더욱 강화한다. 혹한과 페스트를 통과한 유럽인들은 영지민에서 왕국민으로 나아간다. 인구가 확연히 줄어들었으니까.

   

예서, 중요한 건, 유럽인이 극한에 처했을 때, 바깥으로 탈출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유럽인이 잘 나서 아메리카 대륙 침략을 꾀한 것이 아니다. 한계 상황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한국인이 한국전쟁을 겪었기에 오늘날 죽을 둥 살 둥 해서 경제 기적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만일 한국인에게 한국전쟁과 같은 비극이 없었다면? 남미인이나 남태평양폴리네시안이나 동남아인처럼 살고 있지 않았을까?

   

다. 왕권은 교권에 도전하기 시작한다. 십자군 전쟁 이후 중동과의 교역으로 권력을 장악한 메디치 가문과 같은 귀족들이 예다.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에서 보듯 메디치 가문은 이후 교황파와 국왕파 싸움이라는 500년 음모론의 배후가 된다.

   

오늘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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