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8 : 유태인 상술 78 대 22의 비밀 1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1/11/06 03:50

http://blog.naver.com/miavenus/70123228677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8 : 유태인 상술 78 대 22의 비밀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1/11/06

   

인드라는 소마 (맥주 78 대 소주 22를 혼합시킨 소맥)를 먹으며 이 글을 쓰고 있다.

   

1. 파레토 법칙

   

   

일부 국유본 언론이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이유는 국유본 권력투쟁과 관련이 있다. 뉴라이트파와 골드만파는 신자유주의에 적극적인 반면 노비네파는 신자유주의에 소극적이다. 이유는 신자유주의가 확장할수록 아시아 지분이 늘어나는 만큼 유럽 지분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헌데, 이것이 파레토 최적과 연관이 있는 것이다.

   

"20세기 초두에 고안된 개념으로서 이는 생산의 효율과 교환의 효율 두 가지에 대하여 다음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즉, 전자에 대해서는 어느 한 재화(財貨)의 생산량을 증가시키기 위해서는 다른 재화의 생산을 감소시켜야 하는 상태(다른 재화의 감소 없이 어느 재화의 생산을 증가시킬 수 있는 상태는 아직도 원료 ·재료에 여유가 있다는 증거로 최적배분의 상태로 볼 수는 없음)에 있을 것, 또 후자에 대해서는 어느 소비자의 효용을 증가시키기 위해서는 다른 소비자의 효용을 감소시키지 않으면 안 될 상태에 있어야 한다. 파레토 최적의 상태란 이상의 두 가지 조건이 동시에 성립하고 있는 경우를 가리킨다. 파레토 최적의 개념은 다른 어느 누구의 상태도 불리하게 하는 일 없이 한 개인의 상태를 유리하게 하는 일은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것이라는 비교적 약한, 그러기에 누구라도 받아들이기 쉬운 가치판단을 기초에 둔다. 또 자원배분은 그 사회를 구성하는 개개인의 선호에 의해서 정해져야 한다는 소비자주권 내지는 개인주의 원칙을 기반으로 한다. 파레토 최적은 자원배분의 효율성에 관하여 그 중핵을 이루는 중요한 분석개념으로서, 이러한 면의 이론분석에 극히 유용하다. 파레토 최적은 완전 경쟁시장에서 달성되어, 각 개인은 최대의 만족을 얻고, 기업은 이윤최대화가 달성되는 등, 중요한 법칙이 성립한다. 그러나 이 이론은 자원배분에만 관여하고 소득분배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또 파레토 최적 상태는 무수히 존재하여 우열의 결정이 안 된다는 등의 한계가 있다." 

[출처] 파레토최적 [Pareto optimum ] | 네이버 백과사전

   

쉽게 생각하면, 이전까지 유럽이 잘 살기 위해 아시아의 희생없이 불가능했던 것처럼 아시아가 잘 살기 위해서는 유럽의 희생없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파레토 최적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헌데, 파레토 최적과 함께 회자되는 이론이 있으니 파레토 법칙이다. 인드라가 78 대 22를 발견한 건, 국유본 언론이 언젠가부터 신자유주의 사회를 2080 사회로 부르기 시작했을 때였다. 왜 2080일까. 근거를 찾아 보니 '파레토 법칙'이었다. 

   

"파레토 법칙(Pareto 法則) 또는 80 대 20 법칙은 '전체 결과의 80%가 전체 원인의 20%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20%의 고객이 백화점 전체 매출의 80%에 해당하는 만큼 쇼핑하는 현상을 설명할 때 이 용어를 사용한다. 2 대 8 법칙라고도 한다. 많은 분야에 이 용어를 사용하지만, 부적절하게 사용하거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사용하는 경우도 많다. 이 용어를 경영학에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은 조셉 M. 주란이다. '이탈리아 인구의 20%가 이탈리아 전체 부의 80%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 이탈리아의 경제학자 빌프레도 파레토의 이름에서 따왔다.

[편집] 예

  • 수신되는 이메일의 20%만 필요하고 나머지 80%는 스팸메일이다.
  • 통화한 사람 중 20%와의 통화시간이 총 통화시간의 80%를 차지한다.
  • 즐겨 입는 옷의 80%는 옷장에 걸린 옷의 20%에 불과하다.
  • 전체 주가상승률의 80%는 상승기간의 20%의 기간에서 발생한다.
  • 20%의 운전자가 전체 교통위반의 80% 정도를 차지한다.
  • 20%의 범죄자가 80%의 범죄를 저지른다.
  • 성과의 80%는 근무시간 중 집중력을 발휘한 20%의 시간에 이뤄진다.
  • 두뇌의 20%가 문제의 80%를 푼다.
  • 운동선수 중 20%가 전체 상금 80%를 싹쓸이한다."

    http://ko.wikipedia.org/wiki/%ED%8C%8C%EB%A0%88%ED%86%A0_%EB%B2%95%EC%B9%99

       

    파레토가 발견한 과정은 인터넷에서는 다음과 같다고 한다. 어느 날, 파레토는 열심히 일하는 개미들을 관찰하던 중에 모든 개미가 열심히 일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자세히 보니 열심히 일하지 않는 개미가 하나 둘씩 눈에 띄었고, 더욱 자세히 보았더니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 개미의 숫자가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 비율이 약 20:80 정도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후 파레토는 그 개미들을 잡아서 분류하기 시작했는데, 우선 일을 열심히 하는 개미(20%)만 따로 모아서 일을 시켰다. 처음에는 그 20%의 개미가 모두 열심히 일을 하다가, 잠시 시간이 지나자 그 20%의 개미 중에서도 일을 하지 않는 개미가 생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한참이 지난 결과 그 20%의 개미들 중에서도 20:80의 비율에 맞춰 일하는 개미와 노는 개미가 나뉘어 졌다. 이것은 게으른 80%의 개미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80%의 개미들은 처음에는 막 놀기만 하더니 어느 순간부터 일하는 개미가 발견되기 시작했고, 한참의 시간이 지나자 역시 20:80의 비율대로 일하는 개미가 생겨났다. 파레토는 자연에서 무슨 법칙이 있는 것이라 생각하고 벌을 대상으로 같은 실험을 하였으며 그때도 역시 20:80의 비율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후로 파레토는 이 20:80 이라는 비율이 비단 자연세상 뿐 아니라 인간에게도 똑같이 적용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연구를 하게 되었고 결국 파레토 법칙을 만들게 되는데, 즉 구성원의 20%가 전체 업무의 80%를 처리하고 있었으며 상위 20%의 사람들이 전체 80%의 사람들의 부를 축적하고 있었고, 상품 중 20%가 전체의 80% 매출을 올리고 있는 등 여러 분야에 파레토 법칙의 적용이 가능하였던 것이다.

       

    허나, 인드라 생각은 다르다.

       

    "파리 출생. 토리노공과대학을 졸업한 후 실업계에 투신하였다가, 경제학 연구를 시작하여 1892년 M.E.L.발라의 뒤를 이어 스위스 로잔대학 교수가 되었다. 발라의 후계자이며, 로잔학파의 대표자의 한 사람이기도 한 그는 《경제학 제요 Manuale d'economia politica》(1906) 등의 저작을 통하여 발라의 한계효용가치론을 버리고, 계측(計測)이 가능한 무차별곡선에 의한 선택의 이론을 전개, 발라가 수립한 일반균형이론을 재구성하였다. 그는 또 파레토최적(모든 사람이 타인의 불만을 사는 일 없이는 자기만족을 더 이상 증가시킬 수 없는 상태)의 사고방식을 도입, 신(新)후생경제학에의 길을 열었으며, 또 소득분포에 대해서는 통계조사에 입각하여 '파레토의 법칙'이라 하는 소득분포의 불평등도(不平等度)를 나타내는 경험적인 경제법칙을 도출하였다. 사회학 분야에도 강한 관심을 가져, 로잔대학 은퇴 후에는 제네바에서 사회학 연구와 집필에 몰두하면서 《일반사회학개론 Trattato di socio-logia generale》(2권, 1916) 등을 펴냈다. 그의 사회학은 인간행동을 합리적인 행동으로서 파악했을 뿐 아니라, 불합리한 행동면도 중시한 점에서, 이탈리아 파시즘의 사상적 원류가 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출처] 빌프레도 파레토 [Vilfredo Pareto ] | 네이버 백과사전

       

    파레토가 19세기 영국의 부와 소득의 유형을 연구하던 중 파레토 법칙이란 현상을 발견한 것이다. 예서, 19세기 영국의 부와 소득을 누가 가지고 있었나? 로스차일드 가문이다. 하면, 파레토는 로스차일드 가문을 비롯한 유태인이 엄청난 부를 소유하게 된 이유를 궁금해하였을 터이고, 그 연유를 찾아보니 78 : 22이라는 유태인 상술을 만난 것이 아닐까? 헌데, 78 : 22이라면 노골적이니 사사오입해서 8 : 2로 한 것이 아닐까가 인드라 추정이다. 하고, 로스차일드 가문을 은근히 비판한다는 연구 배경을 숨기기 위해 개미 이야기로 위장한 것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그래서일까. 파레토에 대해 파시즘적 원류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프로필에 써놓았다. 이것이 바로 국유본의 힘인 게다. 자신들에게 조금만 불리한 주장이라도 나올라치면 파시즘적 색깔을 입혀서 접근 금지 명령을 내리는 것이다.

       

    2. 78 대 22

       

     "공기의 성분이 질소 78에 산소와 기타가 22인 비율로 이뤄져 있다. 사람의 신체도 수분이 78, 기타 물질이 22의 비율로 이뤄져 있다. 이 '78대 22의 법칙'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대자연의 법칙이다. 인간이 인위적으로 질소 60에 산소 40인 공기를 만들었다고 해도 이 속에서 인간은 도저히 살아 나가지 못할 것이다. 또 인체의 수분이 60이 되면 인간은 죽고 만다. 그러니 '78대 22의 법칙'은 결코 '75대 25'나 '60대 40'으로는 되지 않는 절대의 법칙이다. 이 법칙 위에 유대인의 상술은 성립되어 있다. 세상에는 '돈을 빌려 주고 싶어하는 사람'과 '돈을 빌려쓰는 사람'이 있는데 그중에는 '빌려주고 싶어하는 사람'이 단연코 많다. 은행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돈을 빌어다가 일부 사람들에게 빌려주고 있다. 만일 '빌려쓰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으면 은행은 당장 문을 닫는다. 이를 유대식으로 말하면 이 세상은 '빌려주고 싶다는 사람'78에 빌려쓰고 싶어하는 사람'22의 비율이 성립된다. 무슨 일이든지 성공률은 78이고 실패율은 22인 것이다. 실패율 22를 생각지 말고 나도 하면 78의 성공률 속에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좌절하지 말아야 한다."

    http://blog.naver.com/j2557865/120014541950

       

    78 대 22를 접한 이들이 다양하게 이 법칙을 적용했다. 인간은 78% 유전과 22% 후천적 환경으로 성향이 나타난다든가, 인간 행동과 판단은 78% 본능과 22% 이성으로 결정한다든가 증시 격언 무릎에서 사서 어깨에서 팔라는 것은 78 : 22 법칙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든가, 회사 조직은 78% 영업과 22% 관리 부문으로 나눠야 조직 원리상 최적이라든가 하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사실 많은 한국인들은 원리보다는 응용에 많은 관심이 있다. 이때 인드라 관심은 응용에 있지 않았다. 원리에 관심이 있었다. 기초를 알면, 보다 많은 분야에 응용할 수 있지 않겠나 하는 것이다. 해서, 이 원리란 대체 어디에서 왔을까 고민을 했다.

       

    "78의 78%는 78*78/100=60.84이다. A²/100=B일 때, A=10*B이다. 피보나치 수열의 0.6180339에서  61.80339를 B에 대입하면 A값으로 무엇이 나오나? 78.6151...이 나온다~!"

     http://cafe.naver.com/ijcapital/11407

       

    엇~! 피보나치 수열이네~!

       

    3. 피보나치 수열

       

       

       

    "이를테면, 제3항은 제1항과 제2항의 합, 제4항은 제2항과 제3항의 합이 되는 것과 같이, 인접한 두 수의 합이 그 다음 수가 되는 수열이다. 즉, 0, 1, 1, 2, 3, 5, 8, 13, 21, 34, 55,… 인 수열이며, 보통 a1=a2=1, an+an+1=an+2 (n=1,2,3…) 로 나타낸다. 이것은 L.피보나치가 1202년 《산술(算術)의 서(書)》에서 처음으로 제기하였다. 이렇게 단순한 수열이 중요해진 것은 이 수열이 자연계의 일반법칙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피보나치 수열의 인접한  두수의 비(뒷수와 앞수의 비)를 분수의 형태로 하여 수열을 만들면,

       

          

       

    또는

       

          

       

    와 같이 되는데, 이 두 수열은 각각

       

    (5-1)/2=0.6180339…와

    (5+1)/2=1.6180339…

       

    에 수렴한다. 이것은 황금분할의 비로 잘 알려진 수로, 자연계에서 많은 생물의 구조가 이를 따르는 것으로 밝혀져 있다. 예를 들어, 솔방울을 살펴보면 비늘 같은 조각이 오른쪽나선과 왼쪽나선을 이루며 교차하고 있는데, 그 나선의 수는 각각 8개와 5개로 되어 있다. 5와 8은 피보나치수열에서 서로 이웃하는 항이다. 이 밖에도 식물 중에는 꽃잎의 배열이 13:8 또는 34:21 등으로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또한 앵무조개의 달팽이 모양 껍데기의 구조도 황금분할의 비를 잘 보여 준다. 이러한 황금분할의 비는 예로부터 자연계의 가장 안정된 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수학·음악·미술 등의 분야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미술작품들이 철저히 황금분할을 이용한 것이라든지, 음악에서 고전파소나타 형식이 황금분할의 비를 나타내고 있는 것 등이 그 예이다. 특히 B.바르토크의 《현악기와 타악기 및 첼리스트를 위한 음악》은 피보나치 수열에 따라 새로운 주제의 도입, 악기의 배치, 음색 변경 등의 시점을 정한 것으로 유명하다."

    [출처] 피보나치수열 [Fibonacci sequence ] | 네이버 백과사전

       

    설명이 어려운 듯싶다. 그림으로 보면 한결 이해가 빠를 것이다.

    뭐니뭐니해도 피보나치 수열을 이해하기 가장 빠른 방법은 토끼 설명이다.

       

     http://blog.naver.com/devotion20/80120887670

       

       

    토끼 설명에서 보듯 피보나치 수열은 생명 현상과 관련이 깊다 할 수 있다. 토끼 사례를 인간 종족 번식 사례를 압축한 것이라 할 수 있다면, 근대 이전까지의 대가족 제도와 조혼을 생각하면, 피보나치 수열을 쉽게 연상할 수 있을 것이다.  

       

    십대 후반이면 남녀가 만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다. 그 아이가 십대 후반이면 짝을 만나 아이를 낳는다. 헌데, 사십대에도 여전히 아이를 낳을 수 있다.

       

    이를 은행 이자 복리 개념으로 생각해보자. 남녀는 원금이다. 이 원금은 원금대로 이자, 즉 아이를 낳는다. 헌데, 그 아이가 때가 되면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다. 이것은 이자가 이자를 낳는 것이다. 이것이 복리 개념인 게다.

       

    이 시기 피보나치가 하릴없이 피보나치 수열을 번역하였겠는가. 다 쓸모가 있어서이겠다. 인도와 아랍의 선진 기법을 도입해서 이자 계산하려고 했던 게다. ㅋㅋㅋ

       

    그래서일까. 월터 로스차일드 2대 남작은 비록 공식적인 활동은 생물학 연구이고, 비공식 활동은 국유본 비밀 조직 유지였지만, 영국 의회에서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오로지 생물학 연구에 평생을 바쳤다.

       

    그대는 열정적인 가슴으로 피보나치 수열이 만든 자연의 신비를 만끽하시라~!

       

       

       

    http://a308501.blog.me/10103156466

       

    그동안 국유본은 차가운 머리로 돈을 벌어 부자가 된다???

       

    한국은 복권 수익으로 유럽, 미국, 일본처럼 강남 한복판 한국전력 자리에 자연사 박물관을 만들어야 국운이 융성하는데, 복권 돈으로 허접한 민속박물관 따위나 양산하고 있으니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게 다 쪽발 돼중/놈현 탓인 게다. 그넘들의 쪽발 컴플레스를 왜 한국인이 감당해야 한다는 말인가. 니 애비가 쪽발이인 게 왜 한국인 탓이냐. 이 씨발넘들아.

       

    하면, 피보나치는 어떻게 피보나치 수열을 발견할 수 있었을까? 발명이 아니다~!

       

       

    "피사 출생. 피사의 레오나르도라고도 불린다. 아라비아에서 발달한 수학을 섭렵하여 이를 정리 ·소개함으로써, 그리스도교 여러 나라의 수학을 부흥시킨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아버지가 아프리카 북안(北岸) 부지항(港)의 피사의 상무관장(商務館長)으로 있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수판(數板)에 의한 계산법을 배우고 또한 이슬람교 학교에서 인도 기수법(記數法)을 익혔다고 한다. 그 후 이집트 ·시리아·그리스 ·시칠리아 등지를 여행하여 갖가지 계산법을 습득한 다음 피사로 돌아와, 1202년 《주판서(珠板書)》를 저술하였다. 15장으로 된 이 책은 아라비아의 산술 및 대수(代數) 지식이 많이 포함되어 있으며, 당시의 수학서의 결정판으로서 그 후 수세기동안 유럽 여러 나라에서의 수학원전(數學原典) 구실을 하였다. 기하학에 대한 저서 《기하학의 실용》(1220)에서는 유클리드를 소개하고 몇 가지 정리를 증명하기도 하였다."

    [출처] 레오나르도 피보나치 [Leonardo Fibonacci ] | 네이버 백과사전

       

    13세기면 이태리가 아라비아 상인들과의 지중해 무역을 독점하여 떼돈을 벌 때이다. 이런 때에 피보나치는 이슬람 학교로 유학가서 인도 수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책을 낸 셈이다. 다시 말해, 피보나치가 원조가 아니라 단지 유럽 말로 번역한 것이다 ㅋㅋㅋ

       

    해서, 피보나치 업적은 피보나치 수열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아라비아 숫자를 번역한 것에 더 무게를 두어야 한다.

       

       

       

       

    4. 아라비아 숫자

     "

       

    아라비아 숫자 체계는 수학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발전 중 하나로 간주된다. 대다수의 역사가들은 아라비아 숫자 체계가 인도에서 처음 형성되었으며[4], 이슬람 세계에 전파되었다가 그 후에 북아프리카(Maghreb)와 스페인(al-Andalus)을 거쳐 유럽으로 전해졌다는 데 동의한다. 인도에서 0을 사용한 최초의 기록은 대략 400년경까지 추적할 수 있다. 아리아바타(Aryabhata)의 숫자 코드는 기호 0 에 대한 완전한 지식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인도에서는 바스카라 1세(Bhaskara I)[5]까지는 이미 9개의 기호를 사용한 십진법이 널리 쓰이고 있었으며, 0 의 개념(당시에는 점으로 표시되었다)이 알려져 있었다.[6] 하지만 불교 철학의 수냐타(shunyata)[7] 개념이 힘을 얻어가던 1세기의 어떤 시점에서 0 기호가 발명되었을 수도 있다.

       

       

    1세기의 힌두 숫자

       

    이 숫자 체계는 670년 경까지는 중동에 도달하였다. 현재의 이라크 지역에서 일하던 알 콰리즈미(Al-Khwarizmi)를 비롯한 무슬림 수학자들은 바빌로니아 숫자 체계에 익숙해 있었는데, 이 체계에서는 0 이 다른 숫자들 뒤에 쓰일 수는 없었지만 그 사이에서는 쓰일 수 있기 때문에 한 단계 더 일반적인 체계로 나아가는 게 그다지 어렵진 않았을 것이다. 10세기에 아랍 수학자들은 Abu'l-Hasan al-Uqlidisi이 952년에서 953년 사이에 쓴 논문에 기록되었듯이 분수를 포함하도록 십진법을 확장하였다.

       

    알제리베자이아(Bejaia)[8]에서 공부한 이탈리아 수학자 피보나치1202년에 출판된 그의 책 Liber Abaci|en을 통해 유럽에서의 아라비아 숫자 체계 사용을 장려하였다. 그러나 이 체계는 인쇄술이 발명되기까지는 유럽에서 널리 사용되지 못했다. [9] 최근에 이르기까지 무슬림 세계에서는 오로지 수학자들만이 아라비아 숫자 체계를 사용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무슬림 과학자들은 바빌로니아 숫자 체계를 사용했으며, 상인들은 그리스 숫자 체계 내지 히브리 숫자 체계와 비슷한 숫자 체계를 사용했다. 그러므로, 피보나치 이전까지는 아라비아 숫자 체계가 인구 다수에 의해 사용되지 않았다."

    http://ko.wikipedia.org/wiki/%EC%95%84%EB%9D%BC%EB%B9%84%EC%95%84_%EC%88%AB%EC%9E%90

       

    아라비아 숫자는 아랍인들이 만든 것이 아니다. 인도인이 만들었다. 헌데, 아라비아 숫자로 알려진 것은 피보나치를 비롯한 유럽인의 착각 때문이다. 아라비아 상인이 중국에서 종이를 가져오듯, 인도에서 인도 숫자 체계를 가져와 사용한 것이다. 이를 본 피보나치와 유럽인은 자신이 배우는 숫차 체계를 아라비아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아 아라비아 숫자라고 한 것이다.

       

    인도인은 오늘날에도 IT산업에서 발군의 역량을 보여주고 있다. 머리가 똑똑하다. 이야기를 듣자하니 잔머리가 고도로 발달한 족속이란다. 못 사는 나라라고 인도인이 순박하겠거니 하고 인도에서 인도인 상대하다가는 빤쓰까지 다 저당을 잡힌다는 소문이 있다. 중국 상인도 못 당하는 게 인도 상인이란다. 길거리에서 동냥질하는 아이들도 기본적으로 19단 정도는 줄줄 외운다고 한다. 해서, 수학하면 인도이다.

       

       

    인드라에게는 인도인의 피가 흐르나? 그래서 인드라냐 ㅋㅋㅋ.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인드라가 고교 때 혼자 놀면서 저런 것 실험하면서 놀았는데~! 보통 정석 수학 공부했는데, 인드라는 하루에 한 문제를 가지고서 이런 저런 것 장난치는 게 낙이라면 낙이었다. 인드라가 과목 중에 제일 쉬웠던 과목이 수학이었다. ㅠㅠㅠ

       

    이야기가 샜다~!

       

    하면, 인도인이 숫자 체계에 밝은 이유는 왜일까. 그 역사를 살펴볼 수밖에 없겠다. 해서, 초간단 고대 인도 역사를 말한다.

       

    http://blog.naver.com/miavenus/memo/70123092343

       

    인도가 왜 중요한지는 상기한 링크에서 설명할 수 있겠다. 다만, 인드라가 제노그래픽 프로젝트에는 비판적이니 인월리와 같이 읽으면 금상첨화이겠다.

       

    http://blog.naver.com/miavenus/70073766812

       

    인도는 드라비다인이 오랜 기간 다른 종족들을 제압, 흡수, 혼혈하여 문명을 이루며 살고 있었는데, 이란 고원에 있던 아리안족이 기원전 이천 년 무렵에 인도로 침입했다. 초기 아리안족은 유목부족 특성을 지녔다. 이 시기에는 카스트 제도가 없었다. 사제, 전사, 농민 구분도 단지 직업적 분류였지, 계급적 분류가 아니었다. 이 시기에는 신들이 평등을 유지하였는데, 가장 인기가 있던 신은 전쟁의 신, 싸움꾼 인드라였다.  

       

    헌데, 인드라라는 신을 놓고 보면, 아리안족은 중동 후르리인과 연관이 있다 할 것이다.

       

       

    "미탄니(Mitanni)는 오늘날의 쿠르디스탄 지역을 지배하였던 고대 부족이다. 미탄니 제국은 후르리인이 세운 가장 강력한 국가였다. 후르리인은 고대 소아시아 지역에 살았던 민족이다. 북부 메소포타미아와 동양과 서양의 경계의 지역에 기원전 2500년경부터 살았다. 그들은 아마도 코카서스에 기원이 있었으며, 명확하지는 않지만 북쪽에서부터 진입하였다. 그들의 알려진 고향의 중심은 카부르 강 계곡의 수바르투이다. 카부르강은 남동 터키에서 시작하여 남쪽의 시리아로 흐른다. 그곳에서 그것은 유프라테스 강으로 합류한다. 강은 아에이지, 다라, 지르지브, 자그자그, 라드 와 제르간 강의 지류와 함께 한해의 대부분 흐르지 않는 계절적인 강이다. 하부르 강이라는 다른 하나의 강이 터키 시르나크에서 시작하여 이라크의 자코를 거쳐 터키, 이라크, 시리아의 삼중점 근처에서 티그리스 강으로 합류한다. 후르리인은 후에 북부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 전역에 걸쳐있는 작은 왕국의 지배자로 스스로 일어났다. 후르리인이 세운 가장 강력한 국가는 미탄니 제국이었다. 후르리인은 히타이트 역사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어떤 학자들은 미탄니는 쿠르드 언어의 근원이라고 생각한다.... 미탄니의 약간의 이름 또는 용어는 인도-아리안 초대국을 나타내며 인도아리아인 엘리트는 인도아리아인의 팽창의 과정에 스스로를 후르족에 편승시켰다. "

    http://ko.wikipedia.org/wiki/%EB%AF%B8%ED%83%84%EB%8B%88

       

    아리안족은 인도 서쪽에서 서서히 동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http://blog.yes24.com/blog/blogMain.aspx?blogid=sorgio&artSeqNo=1528627

       

    "면적은 인도 5,362, 파키스탄 20만 5344, 인구는 인도 2573만 2900명, 파키스탄 8643만 2500명(2004)이다. 원래 펀자브는 인더스강의 5개 지류(젤룸·체나브·라비·베아스·수틀레지)가 흐르는 지방(5강 지방)이라는 뜻이며 넓은 충적평야로 이루어져 있다. 기후는 고온·건조하고 연평균강수량은 500mm 이하이지만 관개용수를 이용하여 예로부터 비옥한 농경지대를 형성해왔다. 따라서 고대부터 개발되어 선사문화(先史文化)의 유적도 많고 북서부에서 침입해온 아리아인(人)들의 발전기지가 되었다. BC 4세기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으로 그 영향을 받았으며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이민족(異民族)의 침입을 받았다. 이 때문에 종교적으로도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가 뒤섞여 사는 지역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시크교도의 본거지가 되었고, 언어도 힌디어(語)와 펀자브어의 두 언어를 사용하는 지역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독립할 때, 인도령과 파키스탄령으로 펀자브 지방이 분할된 것은 이상과 같은 종교·언어상의 복잡성 때문이며 두 나라의 국경은 수틀레지강이다. 그러나 인도령이 된 펀자브주에서는 그 뒤에도 동요가 수습되지 않았으며, 1966년에는 힌디어와 펀자브어 사용지역(후자에는 시크교도가 많다)이 분리되어 하리아나·펀자브 2개 주가 되었다." 

    [출처] 펀자브 [Punjab ] | 네이버 백과사전

       

    이유는 동쪽이 훨씬 살기가 좋아서이다. 펀잡 지역은 한국으로 치면 한강 유역을 차지한 세력이 한반도 주역이 되듯 인도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지역이다. 해서, 기원전 천 년 경에 마침내 아리안족은 펀잡주까지 정복 지역을 확장한다. 하면, 이 시기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하나, 카스트 제도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유는 피정복민인 드라비다족을 노예층으로 편입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저 피정복인 신세였던 드라비다족이 불가촉천민으로까지 천대당한 것은 혼혈 때문이다. 수백 년에 걸쳐 아리안족이 정복사업을 펼치다 보니 드라비다족 여성을 강간하여 숱하게 혼혈이 발생했다. 헌데, 아리안족은 소수이고, 드라비다족은 다수였다. 더 나아가 토지 분배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몽골 황금씨족처럼 유목 문화라는 종족 정체성을 강화시켜야만 정착문화적 인도에서 아리안 유목 문화를 지속시킬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지배 계급이 흔들릴 위기에 처해 있던 아리안족은 순혈정책을 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에 대응하여 드라비다족은 자살 폭탄 테러를 감행하며 용맹하게 아리안족과 맞싸웠으나, 중과부적이었다. 허나, 이때 남긴 드라비다족 인류 유산이 있었으니 윤회였다. 지금 죽을 지라도 다시 태어날 때는 자살 폭탄 테러로 복받은 사람으로 태어날 것이라는 윤회 이론이었다. 윤화설은 드라비다족이 만든 혁명적인 발명품이다. 아리안족 발명품이 아니다. 다만, 아리안족은 드라비다족 발명품인 윤회설까지 흡수해서 브라만교를 정립하기 시작했다. 드라비다족에서는 윤회설이 혁명적이었지만, 아리안족 브라만교에서는 윤회설이란 오히려 현실을 정당화시켰다. 윤회설이 전생에서 좋은 일을 많이 해서 오늘날 아리안족이 세상을 지배한다는 논리로 둔갑한 것이다.

       

    둘,  이 시기 가장 큰 화두는 물질적으로 정복한 드라비다족을 정신적으로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되겠다. 해서, 사제의 역할이 중요했다. 하여, 사제를 최상위층으로 하는 카스트 제도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 시기부터 인드라라는 신이 나락으로 떨어지고, 브라만, 비슈누, 시바 신 등이 각광받기 시작했다.

       

    셋, 동쪽으로의 이동 과정이 마무리가 되자 아리안 부족들로 나눠졌던 아리안족은 왕국, 제국으로 발전하였다. 허나, 정복 시대가 끝나자 알렉산더와 징기스칸의 예에서 보듯 아리안 제국이 왕국들로 분열하여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혹은 오호십육국 시대처럼 이권 다툼이 치열해졌다.

       

    '무사(武士)' 또는 '영토의 지배자'라 번역되며 군사 및 정치에 종사하는 왕 등의 지배층을 말한다. 최상급 신분인 브라만(사제)과 함께 인도사회를 지배하는 계층이다. 또한 제1 계급인 브라만, 제3 계급인 바이샤(서민)와 함께 종교적으로 재생할 수 있는 드비자(dvija:再生族)를 형성한다.

       

    카스트 제도는 피부 빛깔의 차이를 일컫는 바르나 제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백인종인 아리아인들이 인도에 침입한 이후 자신들을 피정복민이자 유색인종인 드라비다족과 구별하기 위해서 만든 제도였다. 그러나 이후 아리아인들이 인도에 정착하면서 점차 혼혈이 생기고 사회적·경제적으로 신분이 나뉘고 발전하면서 오늘날과 같이 직업을 주로 한 신분제도로 변모하였다.

       

    한편 종족 간의 전쟁이 자주 일어나자 군사를 맡은 크샤트리아 계급의 세력이 점점 커졌고, 전쟁에서 큰 공적을 세우면 그 대가로 크샤트리아 신분에 오를 수 있었다. 현재는 귀족집단인 라지푸트를 중심으로 다양한 지위의 카스트 집단이 이 신분에 포함된다. 석가모니가 불교를 전파할 때 전도활동을 지지한 것은 마가다국을 다스리던 크샤트리아층이었다.

    [출처] 크샤트리아 [Kshatriya ] | 네이버 백과사전

       

    이 시기 인도는 넘치는 잉여 농산물을 토대로 상업 자본가와 금융 자본가가 힘을 쓰기 시작했다. 또한, 상업 자본가와 금융 자본가 후원 덕에 본디 전사 출신인 크샤트리아 왕족들은 권력을 독점하는 사제 계급에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마치 로마 가톨릭 교황파 권력에 대항하는 영국 국교도 국왕파 구도와 흡사했다.

       

    "수드는 인도 펀잡 지역에서 성으로 많이 쓰이고 있다.  산스크리트어에서 유래했으며, 적들에게 용감한 자, 또는 승리자를 의미한다. 또한 진보를 가능케 하는 자를 뜻하기도 한다. 아울러 수드는 대부이자를 의미한다. 해서, Soods는 대금업자로 알려져 있다. Soods는 오래되고, 영광스럽고, 고귀한 품격을 갖춘 유래를 지니고 있다."

    http://blog.naver.com/miavenus/70034623969

       

    하면, 당대에서 상업 자본가와 금융 자본가 역할을 하던 이들은 누구일까. 세속화한 일부 사제 계급과 전사 계급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사제계급을 공동의 적으로 하여 새로운 종교를 만들어내고 싶었을 것이다. 마치 로마 가톨릭에 대항한 개신교와 자본의 결합처럼 말이다.

       

    그 종교 중 가장 영향력이 있던 종교가 불교였다. 해서, 석가모니는 왕족 출신이어야만 했던 것이다~! 왕권 강화~! 고대 한국에서 불교가 국교가 된 것도 왕권 강화가 명분이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최초로 혁명적이었던 불교는 왜 인도에서 쇠퇴했는가. 이유는 지나치게 혁명적이었기 때문이다.

       

    이유는 여러가지로 분석하고 있다.

       

    http://lljy3414.blog.me/70029278899

       

    허나, 인드라가 볼 때,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관혼상제 때문이다. 인간은 생로병사한다. 인간이 힘들어하는 이런 때에 종교가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허나, 불교가 이런 관례를 헛것이다, 무시하니 불교가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쇠퇴하던 불교에서 따온 인도 수학이 어떻게 0을 발견할 수 있었을까.

       

    "(空)은 순야타(산스크리트어: शून्यता, Śūnyatā, 비어 있음 · 공허(空虛))를 번역한 것으로, 일체개공(一切皆空)을 주장하는 공 사상(空思想)은 불교를 일관하는 기본 교의 또는 사상이다. 공 사상은 대승불교(大乘佛敎)가 흥기하게 되자 특히 《반야경(般若經)》 계통의 근본사상으로 강조되었다. 원래, 공 사상은 부파불교(部派佛敎) 시대에서 상좌부(上座部) 계통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를 중심으로 주장된 법유(法有)의 입장을 예리하게 비판하고, 일체의 존재를 상의상대(相依相待: 서로 의존함)라는 연기(緣起)의 입장에서 파악하며, 일체의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을 배격한 무애자재(無礙自在)의 세계를 전개하려고 한 것이다. 《반야경(般若經)》과 용수의 《중론(中論)》 등에 나오는 공 사상을 바탕으로 성립된 인도 불교의 종파가 중관파이다. 중국 · 한국 · 일본 불교의 삼론종은 《중론》·《십이문론》·《백론》의 삼론을 연구 · 강술하는 종파로 인도 불교중관파에 해당한다.[1] 공 사상은 인도 대승불교의 이대조류인 중관파유가유식파 모두의 근저가 되는 사상이다. 유가유식파에서도 공 사상이 중시된 것은 유가유식파법상종의 소의 논서인 《성유식론(成唯識論)》의 서두에서 논의 저술 목적 중의 하나로, 이공(二空: 두 가지 공)에 대해서 미혹된 견해나 잘못된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이공(二空)의 교의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 하여 그들이 해탈(열반)과 보리(반야)로 나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에서 잘 알 수 있다.[2] 또한, 중국 · 한국 · 일본 · 티베트 등의 대승불교는 모두 인도대승불교를 바탕으로 하므로, 공 사상은 대승불교 전체의 기초적인 또는 근본적인 교의라고 할 수 있다."

     http://search.naver.com/search.naver?sm=tab_hty.top&where=nexearch&ie=utf8&query=%EA%B3%B5%EC%82%AC%EC%83%81

       

     *** 졸립고,취해서 여기까지 쓴다. 한 방에 다 쓰려고 했는데, 본의 아니게 2부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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