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8 : 대부업과 수학은 수메르에서부터 시작하였다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1/11/07 02:29

http://blog.naver.com/miavenus/70123317301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8 : 유태인 상술 78 : 22의 비밀 2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1/11/07

   

인드라가 이자를 이야기하니 국유본이 대부업을 타격했다~ㅋ 그나저나 한국산 냉동 굴 소식은 뭐냐? 인드라 스토킹하나^^! 이건 인터넷에서 전혀 언급한 적이 없는데~~!

   

5. 대부업과 수학은 수메르에서부터 시작하였다

   

언제부터 인간이 수를 사용하였는지는 구체적이지 않다. 다만, 신석기 시대 사냥을 한 뒤 손가락으로 세어볼 수 있는 정도에서 작대기 표시로 그 수를 기록한 것들이 세계 여기저기서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이집트에 이르러서야 숫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13&dirId=130103&docId=111641310&qb=6rOg64yAIOydtOynke2KuCDsiKvsnpA=&enc=utf8&section=kin&rank=1&search_sort=0&spq=0&pid=grj97F5Y7tNsscDO7E4ssc--521928&sid=Tra9CvKgtk4AABk2J6M

   

   

헌데, 이보다 더 진일보한 숫자 체계가 있었으니 바빌로니아 숫자, 혹은 수메르 숫자이다.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11&dirId=1113&docId=60189127&qb=67CU67mM66Gc64uI7JWEIOyIq+yekA==&enc=utf8&section=kin&rank=2&search_sort=0&spq=0&pid=grj%2Bdc5Y7udssv5ygrZssc--378563&sid=Tra9CvKgtk4AABk2J6M

   

   

바빌로니아 숫자 체계는 세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하나, 이집트 숫자처럼 처음에는 십진법이었으나 십진법과 육십진법을 병행하는 숫자체계를 만들었다.

   

둘, 이집트 숫자에는 2, 3, 4가 따로 없었다. 작대기 하나 더 긋는 식이 이집트 숫자였다. 반면, 바빌로니아 숫자는 2, 3, 4에 대응하는 숫자 모양을 만들었다.

   

셋, 0을 만들었다. 다만, 제한적으로 사용했다. 0이란 숫자가 다른 숫자 뒤에 와서는 안 되지만, 중간에는 배치시킬 수 있었다. 가령 208일 때 가운데 자리 0을 표시하는 걸 허용했다는 것이다.

   

하면, 당대 바빌로니아 수학 실력이 어느 정도였을까?

   

수메르 점토판에는 거래 내역과 영수증 등이 쏟아져 나올 만큼 당대 수메르 수학 실력은 오늘날에 견주어도 놀라운 수준이었다. 학교에서 수학 시험을 볼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가령 1 달란트는 60 미나이고, 1 미나는 60 쉐켈이다. 헌데 수학 시험 문제가 바빌로니아 평균 이자율인 월 이자율 1/60로 계산하였을 때, 1 미나가 64 미나가 되려면 얼마나 걸리느냐 같은 것이 시험 문제로 나왔다는 것이다.

   

함부라비 법전을 보면, 바빌론에서는 은 대부 이자율을 연리 20%, 보리 대부 이자율을 33%를 상한선으로 해서, 이를 명문화했다. 또한 그간 이자낸 액수가 원금과 같아지면, 대출을 다 갚았다고 여기는 전통이 있었다. 함부라비 법전에는 3년 후 보증인을 해방하였는데, 이는 보리 대부가 33%이기 때문이다. 또한 대부받은 상인이 도적을 만나거나 배가 침몰하거나 전쟁이 나거나 하면 대출을 갚지 않아도 되었다. 바빌론 지배자들은 가뭄, 전쟁 등 불가항력적 사태로 빚을 갚지 못하는 경우 일괄 탕감하는 방식을 써서 대출자들이 빚을 갚을 능력 이내에서만 대부업을 하도록 했다. 

    

해서, 수 천 년전이라고 해도 만일 여러분이 타임머신을 타고 수메르에 가서 장사한다 해도 성공할 보장이 전혀 없는 것이다.

   

헌데, 흥미롭지 않은가? 당대에 다른 문명에서는 채무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 오직 바빌론 지역에서만 대부업 기록이 있다. 대부업은 수메르부터 시작한 것이다.

   

최초에는 사원에서 행하는 구제 사업으로 시작했을 것이다. 사정이 어려운 인민에게 무이자로 대출을 해주고 시간을 두고 갚게 하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허나, 시간이 흐르면서 공공금융적 성격을 탈피하고, 사금융적 성격을 강화시켰을 것이다. 이는 동서고금 전 세계 어디서든 보이는 현상이다.

   

기원전 3000년부터 시작한 수메르 금융이 바빌론 전 지역으로 퍼지고, 무역 상인을 통해 그리스, 인도, 중국으로까지 널리 퍼진 것이다. 가령 이태리, 그리스에서는 기원전 750년 무렵에 대부업을 중동에서 수입했다.

   

그중 페니키아/카르타고 상인이 있었으니 이들이 스페인 무슬림 국가로 가서 수메르 셈법을 써서 어려운 수식도 간단히 계산하니 똑똑하다고 궁정 유태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6. 바빌로니아 숫자체계에서 인도 숫자체계로의 이행

   

http://kin.naver.com/knowhow/detail.nhn?d1id=10&dirId=10&docId=559776&qb=7Lm064uI7Iuc7Lm0&enc=utf8&section=kin&rank=2&search_sort=0&spq=0&pid=griCRc5Y7u4ssuwEUMGssc--480893&sid=TrZewG5Otk4AAGBUD2c

   

본디 순서는 이 항목이 먼저로 기획했지만, '이자' 문제 때문에 5번 항목을 상위로 올렸다~!

   

불교인들에게 불교 근본 원리를 물으면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삼법인 [ 三法印 ]

불교의 근본교리 가운데 하나로, 여기에서 법은 진리를 뜻하며 인(印)은 진리의 표적이라는 말. 삼법인은 세 가지 불변의 진리라는 말이다. 법인은 "모든 존재는 변하고 있다"는 제행무상(諸行無常)과 "모든 사물은 실체가 없다"는 제법무아(諸法無我)와 "열반의 세계만이 고통이 없는 진리의 세계이다"라는 열반적정(涅槃寂靜)의 세 가지 명제로 되어 있다. 이 가운데 열반적정은 "모든 것은 괴롭다"라는 「일체개고」(一切皆苦)로 대체되어 말해지기도 한다.  삼법인은 불교의 존재론적 기본입장과 인생관의 핵심을 아주 간명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모든 존재는 영구불변의 것이 아닌 바, 그 원인은 모든 사물이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고, 이러한 진리를 모르는 데에서 번뇌가 생기는 것이니, 진리를 깨달아 번뇌를 제거한 열반의 세계에 이르는 것이 인생에 있어 최고의 이상이라는 것이다.

   

불교 경전마다 차이를 보이는 것이 삼법인 중 일체개고와 열반적정 중 어느 명제를 넣느냐이다. 이때, 왜 일체개고와 열반적정이 차이일까.

   

부처가 보리수 나무에서 깨달은 건 연기법이었다. 

   

"

연기(緣起)란 "연(緣)해서 생겨나 있다" 혹은 "타와의 관계에서 생겨나 있다"는 현상계(現象界)의 존재 방법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 세상에 있어서의 존재는 반드시 그것이 생겨날 원인("인 · 因")과 조건("연 · 緣")하에서 연기의 법칙에 따라서 생겨난다는 것이다. "연기"라는 단어는 산스크리트어: प्रतीत्यसमुत्पाद Pratītyasamutpāda 프라티트야 삼무파다를 뜻에 따라 번역한 것으로 "인연생기(因緣生起: 인과 연에 의지하여 생겨나다, 인연따라 생겨나다)"의 준말이다.[1] 한역(漢譯) 경전에서는 "발랄저제야삼모파다(鉢剌底帝夜參牟播陀)"로 음차하여 표기한 경우도 있다.[1] "프라티트야(산스크리트어: Pratītya)"의 사전적인 의미는 "의존하다"이고 "삼무파다(Samutpāda)"의 사전적인 의미는 "생겨나다 · 발생하다"이다. "영어: dependent arising (의존하여 생겨남)"[2], "conditioned genesis (조건지워진 생성)", "dependent co-arising (의존된 상호발생)"[3][4] 또는 "interdependent arising (상호의존하여 생겨남)"[5] 등으로 번역된다. 연기에 대한 불교 교의를 연기설(緣起說)이라고 한다. 고타마 붓다십이인연(十二因緣) 또는 십이연기(十二緣起)의 연기설을 가르친 이래 불교 역사에는 여러 가지의 연기설이 출현하였다. 구사종(俱舍宗)의 업감연기(業感緣起), 유식종(唯識宗)의 아뢰야연기(阿賴耶緣起),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의 진여연기(眞如緣起) 또는 여래장연기(如來藏緣起), 화엄종(華嚴宗)의 법계연기(法界緣起), 진언종(眞言宗)의 육대연기(六大緣起) 등이 있다."

http://ko.wikipedia.org/wiki/%EC%97%B0%EA%B8%B0_(%EB%B6%88%EA%B5%90)

   

   

극단적인 유심론으로서 모든 것은 영화 매트릭스처럼 마음에서 일어난 미망에 의한 것이기에 이 미망에서 벗어나면 주인공 네오처럼 해탈한다는 것이다.

   

   

불교나 자이나교나 인도에서 변방인 마가다 지역에서 일어났다. 예서, 부처가 아리안인이 아니라 동이족이었다, 네팔인, 티벳인, 몽골인이었다 등등 논란이 많다. 일부에서는 환빠 조작으로 이야기하는데, 국유본이 요즘 기획하는 기획물 중 하나라고 보는 것이 인드라 입장이다. 환단고기도 뉴라이트 데이비드 록펠러 집권 이후 가톨릭, 불교와 함께 근본주의를 강화시키기 위한 문화 정책의 산물인 게다. 해서, 뉴라이트 전두환 정권 때부터 환단고기가 나왔고, 쪽발놈현 정권 때부터 유난히 환빠들이 극성을 부린 것이다. 대체로 환빠들은 애비가 신기남, 이미경, 정동영, 김희선, 유시민, 김근태처럼 쪽발이일 가능성이 높은 뉴라이트 쪽발노빠들이다. 아무튼 한줌도 안 되는 뉴라이트 쪽발노빠들을 한반도에서 축출하거나 교화시킨다면 그만큼 한반도 통일이 가까이 온다고 생각하면 된다. 아! 매국노 쪽발노빠들이여, 제발 정신차리고, 모든 재산을 국가에 헌납하고, 바르게 살아라. 니넘들이 대한민국에 폐를 끼친 것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지만, 그 정도라면 용서가 가능하다. 언제까지 무뇌아로 나라를 망치며 살아갈 셈인가. 부끄럽지도 않느냐. 참고로 뉴라이트 데이비드 록펠러는 민족 종교에 긍정적이다.

   

부처가 몽골인이다, 라는 주장을 논문으로 제출한 이가 소승불교, 혹은 상좌부 불교, 남방 불교 태국 학자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국유본이 왜 이런 주장을 키우는가 하면, 나찌와 불교 관련성을 떼어놓기 위함이 아닌가 싶다. 이렇게 해서 키운 달라이라마로 중국 공산당을 압박하고, 틱낫한 같은 승려를 동원해서 동남아시아에서 정권을 감시하기 위함으로 본다.

   

아무튼 불교가 등장한 배경에는 당대 브라만교와의 대결 구도였다는 점을 말씀드린 바 있다. 이천 년 뒤에 일어나는 로마 가톨릭과 신교도/국왕 대결인 게다. 이때, 불교를 지지한 층은 어떤 층들일까?

   

하나, 기층민중이다. 신분에 상관없이 차별하지 않고 출가가 가능하니 환영을 받았다.

   

둘, 왕가와 귀족들이다. 제국이 들어섰을 때까지는 사제 계급이 우위였지만, 제국에서 십육대국으로 분열하여 왕국끼리 전쟁을 벌이자 전사 계급인 크샤트리아가 떠올랐던 것이다. 크샤트리아들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왕이 되는 일이 잦았다. 헌데, 이들을 구속하는 이들이 있으니 사제 계급이었던 것이다. 해서, 새로운 지배계급은 새로운 종교를 찾게 되었던 것이다. 자이나교나 불교도 초기에는 브라만교의 사문으로 출발한 것이다. 다시 말해, 부처는 당대 종교개혁가였던 것이다.

   

셋, 자본가들이다. 불교는 농촌 사람보다 도시민에게 오히려 인기가 있었고, 특히 상인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상인들이란 대체로 세속화한 브라만교 승려 출신이거나 크샤트리아 출신이었다. 상인들은 사제 계급의 엄격한 교리로 인한 경제적 손실에 불만이었던 것이다. 허나, 교리가 있으니 참고 있을 수밖에 없다. 이에, 부처가 나타나 그것은 모두 미망에 불과한 것이라 하니 마음의 짐을 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헌데, 부처가 죽은 뒤 일백 년이 흐르자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부처는 불상을 만들지 말라고 했다. 우상 숭배를 배격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인드라가 마치 책을 내지 않겠다는 것처럼 경전으로 남기지 말라 하니 남은 것은 뭔가. 부처의 사리 뿐이다. 해서, 사리 숭배가 나타났고, 사리를 모신 불탑 숭배로 나타났던 것이다.

   

대승불교는 불탑 숭배자들이 중심인 것이다. 불탑 숭배자들은 출가 승려가 아니다. 이들은 부처가 무슨 말을 했는가에는 솔직하게 말하면 관심이 없었다. 다만, 부처에게 기도하면, 자기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소박하게 믿었을 뿐이다. 왜냐하면, 신 중에 가장 높은 신이기 때문이다. 이때, 이 주장을 가장 높이 떠받든 이들이 불탑 관리인들이다. 신자들이 많이 올수록 관리인들이 돈을 벌기 때문이다. 해서, 백 년이 흐르자 부처는 인격신으로 격상이 되었다. 다시 말해, 브라만교의 신 중 하나가 된 것이다.

   

예서, 상좌부들이라 할 수 있는 유랑승려 집단이 불탑 숭배자들더러 부처의 뜻을 왜곡시키는 자들이라 여기니, 이에 대해 불탑파를 변호할 논리가 필요했는데, 이들이 대승불교인 게다.

   

대승불교 핵심 이론이 무엇이냐.

   

"불교의 2대 유파의 하나로, 소승불교에 대립한다. 석가가 주창한 활기찬 초기불교도 200년, 300년이 지나는 중에 그 명쾌한 가르침은 아비다르마(abhidhar-ma, 법의 연구)의 발달과 함께 철학화되고, 번잡화되어서 청신한 종교로서의 생명을 잃고, 그 신앙도 고갈화되었으며 기원 전후경부터 주로 재속신자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불교부흥운동이 전개 되었다. 그 운동에는 그들의 기세에 찬동하고, 구불교에 만족치 않고 그곳을 뛰쳐나온 출가자들의 참여도 간과 할 수 없는데 그들중에는 그 운동의 이론적 지도자가 된 자도 있었을 것이며, 대승경전의 제작에 관해서 중요한 시사를 준 자도 있었다고 생각된다. 또한 이들은 인도 각지에 산재하는 불탑(스투파)을 중심으로 모이고, 불타를 찬양하고 불타에 대한 열렬한 신앙을 가졌다. 그들은 불타의 전생의 호칭인 <보살>을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보고, 또한 이 운동에 만진하는 자를 남녀 노소를 불문하고 <보살>이라고 하였으며 재래의 출가자 중심의 교단인 <승가(僧伽)>에 대해서, <보살 가나>라고도 하였는데 그들은 결국 자신의 사상을 표명하는 수단으로서 새로운 경전을 계속 만들어냈고 『반야경』, 『법화경』, 『화엄경』, 『아미타경』 등이 그 경전군이다. 이들 경전중에서 그들은 자신의 새로운 불교운동을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지향하는 큰 탈 것>이라는 의미를 담아서 <대승>이라고 하고, 종래의 구불교를 <한정된 출가자만의 작은 탈 것>이라는 의미로 <소승>이라고 멸시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이 경전의 사행시에서도 수지(受持)ㆍ독송ㆍ해설하고, 이를 필사(筆寫)사경하면 많은 공덕이 있다>는 구불전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경전숭배>를 강력하게 밝히고 있다. 대승불교의 기본적 이념은 <자비>로 뒷받침된 <공(空)>—이론적으로는 모든 것은 그 자체의 고유한 실체를 가지지 않는 <무자성(無自性)>인 것이며, 따라서 실천적으로는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마음으로 행동하는 <무집착>이어라—의 입장에 있다고 하며 불에 절대적으로 귀의하고 자기 중에 불이 될 수 있는 가능성(불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체현할 것을 그들은 지향했다. 그를 위해서는 <반야의 지혜>와 <방편의 자비>를 겸비할 것을 지향하고, 특히 타인에 대한 선행(이타행(利他行))을 제일의 안목으로 생각했다.

이와 같은 대승불교운동은 후에 용수, 무착, 세친 등에 의해서 그 사상이 조직ㆍ체계화되어 5세기경부터 밀교가 성행하고, 이어서 7세기경부터 힌두교가 세력을 회복했다. 그리고 1203년 벵골 불교의 중심이었던 비크라마시라사(寺)가 이슬람의 군대에 의해 파괴 되어서 중앙 인도에서 불교는 그 모습을 감추게 되었고 태어난 고향인 인도를 쫓겨나게 된 대승불교이지만, 국경을 넘어서 티벳으로 전파되었으며 중앙아시아를 거쳐서 중국, 한국, 일본에 전해져 각 지역에서 화려한 꽃을 피웠다. 우리나라에는 고구려 문자왕(文咨王, 491~518) 때 용수(龍樹)의 중관론(中觀論) 등 삼론(三論)을 비롯, 천태ㆍ열반 등의 교법이 들어와 대승불교에 대한 연구 및 교화가 활발하였다. 또한 길장(吉藏, 549~623)은 삼론을 바탕으로 삼론종(三論宗)을 개종하는 등 우리나라에서의 대승불교는 마침내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되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628940

   

이타행, 보살행이다. 이는 기존의 두타행과는 차이가 있다 하겠다. 예서, 이타행과 보살행은 조로아스터교에서 영향을 받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공 사상이다. 부처는 공 사상에 대한 특별한 언급이 없다. 다만, 후대 불제자들이 공사상이 부처의 연기법과 통한다고 주장할 따름이다. 이는 공 사상이 부처 사후에 성립하였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인도에 바빌로니아 숫자 체계가 들어온 것은 부처 생존 시기 이후라는 것이다. 하면, 인도에 언제 유래했을까. 가장 유력한 가설은 알렉산더 침공 시기인 기원전 327년부터 325년이다. 이 시기, 알렉산더는 그리스, 페르시아 문명을 인도에 전수했다는 것이다. 하면, 그 이전에도 상인들끼리 교류가 있었을 터인데, 왜 그 이전에는 인도에서 수용할 수 없었을까. 의외로 이 문제는 간단하다. 숫자 체계란 비록 상인들이 상용하는 것이긴 해도 사제의 몫이었다. 해서, 이민족의 숫자 체계를 수용한다는 것은, 이민족 종교를 받아들이는 것과 같으므로 신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허나, 이는 침략을 당하면 사정이 달라지는 것이다. 

   

페니키아/카르타고인이 왜 유대교로 개종했나? 전쟁에서 패했기 때문이다. 자신을 지켜주어야할 신이 자신을 지켜주지 못한다면 믿을 이유가 있나? 없다. 그처럼 인도가 알렉산더 침공으로 혼란을 겪자 기존 인도 신앙에 대한 반성이 등장한 것이다. 

   

이러면, 나오는 대책이란 무엇인가. 하나, 알렉산더가 저토록 힘센 이유는 무엇인가. 찾아보니, 바빌로니아 숫자 체계를 쓰고 있다. 이것이 효율적이더라? 둘, 바빌로니아 숫자체계처럼 선진 시스템이 인도에도 있을 것이다. 무엇이 있나? 어? 불교? 고다마 싯다르다 이야기???

   

알렉산더가 물러난 뒤 인도를 정복한 왕조는 마우리아 왕조이다.

   

"마우리아 왕조는 찬드라 굽타 마우리아에 의해 기원전 322년 창시되었다. 그는 난다 왕조를 전복하고 중서 인도를 가로질러서 팽창하였는데, 알렉산더 대왕마케도니아 왕국군과 페르시아 군대가 서쪽으로 후퇴하여 지방 권력이 와해되자 이를 기회로 영토를 확장하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은 직후 마우리아 왕조의 창건자 찬드라 굽타는 남부의 타밀 지방을 제외한 인도 대륙 전역의 영토 대부분을 차지했다. 기원전 316년까지 마우리아 왕조는 북서 인도를 완전히 점령하여 알렉산더가 남긴 총독령을 격파하고 정복하였다. 제국이 최대 판도일 때, 북쪽으로 히말라야 산맥의 자연 경계를 따라 뻗어 나갔고, 동쪽으로 현재의 아삼 주까지 뻗어나갔다. 서쪽으로는 제국은 현재의 파키스탄을 너머서 현재의 아프가니스탄의 상당한 부분에 도달하였는데, 이는 현재의 헤라트칸다하르 지방을 포함한다.

[편집] 아소카 치세

불교를 선양한 찬드라 굽타의 손자 아소카 왕(기원전 265년경 ~ 기원전 238년 또는 기원전 273경 ~ 기원전 232년)의 치적은 칙령들을 정교하게 돌에 새겨 그가 전국에 세웠던 비문을 통해 많이 알려졌다. 이 비문은 판독이 가능한 인도의 고문서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그가 왕위에 오른 지 9년째 되던 해 인도의 남동부, 현재의 오리사 해안의 칼링가 지방을 정복했는데, 그 전쟁의 참상을 반성하고 불교를 신봉하게 되었으며, 그후로는 무력에 의한 정복을 중지하였다. 그리고 모든 인간이 지켜야 할 윤리인 다르마(dharma: 法)에 의한 정치를 이상(理想)으로 삼고 이를 실현하는 데 진력하였다. 부모·어른에의 순종, 살생을 삼가는 등의 윤리를 백성들에게 장려하고, 지방관이나 신설된 관리에게 명령하여 백성들이 윤리를 철저히 지키도록 하였다. 또 도로·관개(灌漑) 등의 공공사업을 전개하는 등 많은 치적을 남겼다. 당시 인도에는 그에게 대항하는 세력이 없었고, 북서 국경의 그리스 세력도 그들 내분 때문에 다른 지방을 침략할 힘이 없었다. 이와 같은 정세에서 제반 생활양식이 다른 광대한 영토를 현실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는 그가 취한 정책이 매우 현명했던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그 이면에는 원시불교의 영향이 있었다. 또한 그의 정치이념은 인근 제국이나 민족에게 전파되어 그의 사절(使節)이 이집트마케도니아 왕국에 이르렀다.

[편집] 멸망

아소카 왕이 죽은 후 제국은 외침, 남부 제후들의 이반 및 왕위계승을 둘러싼 암투 등으로 위축되었다. 마지막 왕인 브리하드라타는 기원전 185년 브라만 출신 최고사령관 푸시아미트라에게 살해되었다. 그뒤 푸시아미트라는 슝가 왕국을 세우고 약 1세기 동안 중인도를 통치했다."

   

인도에서 불교하면 아소카 왕이다. 하면, 왜 아소카 왕은 불교도가 되었을까. 진심이 우선일 것이다. 허나, 배경도 있다. 아소카 왕도 브라만교 특권층이다. 해서, 인도 제국을 건설하는 데에는 난관이 있었던 것이다.

   

불교를 적극 지지한 아소카 황제나 기독교를 받아들인 콘스탄티누스 황제나 공통 분모는 제국 경영이다. 지방 신을 믿기에는 제국 경영이 어려웠다. 반면, 불교나 기독교는 신분 차별없이 왕 앞에서 평등하다. 왕즉불, 왕즉신이니까. 하여, 왕권 강화, 제국 강화에 보탬이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공유 논쟁'이다.

   

http://blog.naver.com/hwaq708/90019861510

   

부처 가르침을 경이라 하고, 부처 실천 규범을 율이라 하고, 부처 말씀 해석을 논이라 한다. 원시 불교에서는 경과 율이 우선이었다. 헌데, 후대로 가면서 논이 우선이기 시작했다. 논에서 시작해서 경과 율이 정해졌다.

   

허나, 인드라는 허접한 애들처럼 이것이 부처 가르침을 위배하는 것이라 보지 않는다. 위배한다는 것 자체가 부처 가르침에서 벗어난 것이다. 왜? 부처는 연기법이니까. 부처 연기법으로 보면, 그 모든 것을 연결하고 있으니까.

   

인드라 입장에서 '공유 논쟁'이란 후대가 만든 쇼라고 본다. 공유 논쟁의 유식파 입장은 무엇인가. 유식파 최대 화두는 윤회와 연기법을 연결시키는 것이었다. 뭔 말이냐. 부처 연기법은 실체, 즉 브라만적 개념, 아트만을 부정한다. 무아론이다. 반면, 윤회는 아트만을 전제한다. 아트만, 변화하지 않는 개인 영혼이다. 문제는? 윤회는 브라만교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브라만교가 드라비다인의 저항을 무마시키고자 드라비다인 발명품인 윤회설을 수용한 것이다. 해서, 불교를 지지하는 기층민중에게 이 딜레마를 설명해야 했던 것이다. 유식파들 최대 과제는 인식론적 고민이었던 것이다.

   

유식파나 중관파나 모두 대승불교이다. 단지, 당대 시대적 화두가 달랐을 뿐이다. 유식파는 인식론적 고민을 풀어내어야 했다. 해서, 발명한 것이 '알리야식'이다.

   

"불교에서 분류하는 인식의 일곱번째 "말라 식(識, 式)"은 인간 인식에 있어, 구분하고 분별하는 판별식이라고 합니다. 대부분의 경전에서 "거짓 나"를 강조할 때 가짜의 나가 분별하고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에 함부로 분별하고 판단하여 업(業)을 짓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덟번째 인식인 "알리야 식, 장식(藏識 감출 장)"인 잠재되어 있는 내면을 깨워 깨달음을 증득 하여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 까지가 현재까지 나온 불교의 가장 앞선 선지식입니다. 요렇게 밖에는 더 이상 설명을 해 주지 않았고 여지껏 새로이 나온 법문을 보아도 이 부분에서의 더 이상은 설명이 없습니다."

 http://blog.daum.net/mentalsoul/468

   

한마디로 헤겔 변증법과 판단 중지의 교묘한 결합인 게다. 왜 판단 중지인가. 부처가 행한 길을 부처도 아닌데 억지로 받아들이면 내공이 딸려 폭발하니 주의가 필요하다는 게다. 왜 헤겔 변증법인가. 실체가 아닌 아트만이지만, 절대정신으로의 회귀를 거듭하면 실체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인민의 윤회설도 다치지 않고, 부처의 무아론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유식파가 불교를 간신히 지킨 셈이다. 하면, 이는 이론적인 영역 뿐일까. 그렇지 않다. 브라만교와 불교는 상호 교류하며 서로의 장점을 취하려 노력했다. 브라만교는 불교의 무자성론을 어떻하든 흡수해야 했다. 반면, 불교는 브라만교의 관혼상제 예식을 흡수해야 했다.

   

이러는 와중에 알렉산더가 침공하고, 마우리아 왕조가 들어서고, 그 이후에는 다른 왕조가 들어선다. 왕조가 바뀔 때마다 불교의 부침이 컸다. 이에 브라만교는 한층 더 자세를 낮춘다. 이때, 발생한 흐름이 박티 요가이다.

   

"박티 요가(भक्ति योग, Bhakti Yoga)는 "신에 대한 충실한 헌신"을 불러일으키는 영적인 수행을 가리킨다. 이러한 신에 대한 헌신을 힌두교 용어로 박티(Bhakti)라 한다. 힌두교 전통에 따르면, 박티 요가에는 9가지 형식이 있다. 힌두교 전통에 따르면, 박티 요가는 자유 또는 해탈(모크샤)로 가는 네 가지 길 중에서 가장 쉬운 길인 것으로 여겨진다. 다른 세 가지 길은 카르마 요가 · 라자 요가 · 즈나나 요가이다. 힌두교의 시대 구분에 따를 때 지금의 시대가 속한 칼리 유가의 시대에서, 특히 박티 요가가 효과적인 길인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박티를 계발하는 박티 요가의 길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경전으로는 《바가바타 푸라나》와 《바가바드 기타》가 중요하다.[1] 박티 운동(Bhakti movements)은 박티 요가를 주요 수행법으로 하는 힌두교 운동을 가리킨다. 힌두교 종파들 중 박티 운동에 속한 주요 종파는 시바파(Shaivism· 비슈누파(Vaishnavism· 샤크티파(Shaktism)이다.[2]"

   

박티를 한마디로 설명하면, 자신이 자유의지대로 살았다는 것이 착각이 아닌가 반성하고, 오직 신에 대한 충실한 헌신을 목표로 고행을 하는 것이다.

   

이는 브라만교가 힌두교로 바뀌는 종교개혁이었다. 마치 가톨릭에서 예수교 역할을 한 것이 박티운동인 것이다. 박티운동은 기원전 1세기에 인도에서 유행했다.

   

하여, 불교가 이에 대응한 것이 중관파 입장이며, 중관파 입장의 주된 사상이 공사상인 게다.

   

하면, 왜 공사상인가. 유식파도 공사상이지만, 이는 기층민중과의 대화가 초점이었다. 윤회설과 연기법 무아론을 함께 설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인신론적이다.

   

반면, 박티운동이 융성하던 이 시기 불교는 절대절명의 위기로 내몰렸던 것이다. 다시 말해, 불교가 그간 인도에서 존재할 수 있었던 정체성을 송두리 채 빼앗기는 것이었다.

   

왜? 브라만교와 불교의 차이는 무엇인가. 브라만교는 영혼 불멸을 전제하여 범아일여 사상인 게다. 범과 아 모두 실체를 인정한 셈이다. 반면 불교는 부정했다. 특히 불교가 문제삼은 것은, 아요, 아트만이었다. 이 문제를 브라만교가 해결한다? 불교의 위기였던 게다.

   

해서, 등장한 것이 공 사상이라 본다.

   

부처는 공 사상에 대해 별다르게 언급한 바 없다. 다만, 연기법, 무아론에서 유사한 이야기를 했을 뿐이다. 이를 후대 불제자들은 연기법과 무아론과 공사상이 연결된다고 레닌이 주장하듯 맑스와 레닌이 통한다고 말한 것이다. 이후 스탈린이 맑스레닌주의로 통일시키지만.

   

결국, 공 사상은 당대 인도 불교의 위기를 말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브라만교에서 힌두교로 발전하는 주류 흐름에 맞서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존재론적 발버둥이었던 셈이다.

   

허나, 바로 이런 발버둥에서 역설적으로 0이 탄생했던 것이다. 0이야말로, 공사상이야말로 브라만교든, 힌두교든, 조로아스터교든 흉내낼 수 없는 불교만의 진리가 아니겠는가?

   

마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고 하는 성철 스님 말씀이 떠오른다.

   

허나, 바로 이런 까닭에 불교 논리는 헤체적 논리와 닮아 있다. 자신에게 유리한 것은 차이화시키고, 불리한 것은 무기한 연기하는 것이다. 이를 동시에 말하니 이것도 연기법인가~!!! 그 연기법에 근거한 것이 만일 오늘날 데이비드 록펠러 국유본 권력이라면! ㅋㅋㅋ

   

7. 78 : 22 법칙, 0의 원리부터 무너진다

   

0이란 숫자는 신기한 숫자이다.

   

"원전 700년 무렵 수메르키시에서 제작된 계산 기록에서 0은 두개의 줄로 표기한 쇄기문자로 표현되고 있다.[5] 기원전 300년 무렵 바빌로니아의 수학자들은 계산의 편의를 위해서 0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6] 876년 인도에서 만들어진 비문에 0을 나타내는 숫자가 최초로 등장하였다. 인도에서는 0의 개념을 훨씬 이전부터 계산에 사용하고 있었다.[2] 한편 고대 그리스에서는 0을 숫자로 도입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그들은 "어떻게 없는 것을 나타낼 수 있단 말인가?"하고 반문하였다.[7][주해 1]"

http://ko.wikipedia.org/wiki/0

   

"많은 사람들이 나눗셈을 할 때 0으로 나눌 수 없다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0으로 나눌 수 없는 이유는 모든 선생님이 가르쳐 주었을 텐데, 여전히 0으로 나누는 것이 왜 안 된다는 건지 모르겠다는 말을 많이 한다. 다른 수학 문제에 비하면 0으로 나누는 것을 도무지 모르겠다는 사람의 수는 그래도 적은 편이지만, 그래도 끊임없이 제기되는 문제인 것만은 분명하다. 한번 0으로 나눌 수 없는 이유를 짚어보자."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184

   

3 곱하기 0은 0. 여러분은 말할 것이다. 당연하잖아? 허나, 인드라는 아니다. 어릴 때, 이 문제 때문에 정말 고민했다. 왜? 0인가? 왜 0과 곱하는 모든 것은 0이 되는가. 인드라는 예나 지금이나 그랬다. 철학이나 수학이 제시하는 명제는 반드시 현실에 실재한다고 생각했다. 해서, 3 곱하기 0 문제를 골똘히 생각했는데, 정말 풀리지가 않았다. 대체 이 0이라는 넘은 뭐하는 넘이냐 ㅠㅠㅠ

   

사칙연산.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929

   

세상에서 확실한 진리가 있을까. 사칙연산과 같은 수학이 진리일까. 아니다. 사칙연산에서 덧셈보다 곱셈을 우선하는 건 어디까지나 경험적인 약속이지, 필연적 결과물이 아니다. 사칙연산에서 보듯 수학에서조차 경험 법칙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런 전제에서 사칙연산으로 0을 생각해보자.

   

인드라가 신기해하는 것은, 0의 곱셈과 나눗셈이다. 왜 0과 만나는 곱셈 상대자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속성을 잃는 것일까. 또한, 0만은 왜 나눗셈이 곤란한 것일까.

   

인드라는 미적분을 떠올리며 곱셈/나눗셈이란 차원의 문제로 가정했다. 0차원은 점이고, 1차원은 선이고, 2차원은 면적이고, 3차원은 공간이고, 4차원은 시간이다.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을 더 하거나 빼면 존재하는 것이다.

허나,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을 곱하거나 나누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흥미롭다.

   

다시 말해, 덧셈과 뺄셈에서는 차원 이동이 일어나지 않는다.

반면, 곱셈과 나눗셈에서는 차원 이동이다.

   

이거 뭔가?

   

곱하면 오직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고, 나누면 세상의 모든 것이 되는 존재.

   

너, 누구냐!

   

나다.

   

8. 78 대 22는 독신 법칙, 피보나치 수열은 생명 법칙?

   

78 : 22 법칙에서 랍비 이야기가 나온다. 78 : 22는 78% 만큼 성공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다. 헌데, 랍비에게는 78%의 78%인 60%만 인정한다는 게다. 이를 기존 가설에서는 인간이 하는 바른 판단의 최고 한계는 78% 라고 하는데, 유태인들이 랍비에게 기대하는 조언의 정확도는 78% * 78% = 60% 정도라고 한다는 것이다.

   

왜 이렇게 계산할까. 인드라 랍비는 말한다. 솔로몬 송사와 같다. 솔로몬 송사를 보면, 아이가 저마다 자기 아이라고 주장하는 여인네 송사가 나온다. 이때, 솔로몬은 아이를 둘로 나눠 가져가라고 판결한다. 기괴한 판결인 게다. 이처럼 랍비에게까지 왔다면, 해결이 쉽지 않은 문제인 게다. 어려운 판결이 아니라면, 이미 그 이전에 당사자간 합의가 있었을 것이다. 해서, 78%의 78%인 게다.

   

하면, 이때 78%을 곱하면, 왜 피보나치 수열일까. 이는 솔로몬 판결이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생명 현상이라고 말이다. 피보나치 수열을 가장 잘 설명하는 것이 토끼 이야기인 것처럼 말이다. 반면, 78 : 22는 어떠한가. 솔로적인 설명이다. 또한 동태적이기 보다는 정태적인 설명이다.

   

해서, 이익이, 이자율이 22%라는 것은 생명의 절반만을 의미하는 것이다,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하여, 이것이 피보나치 수열로 되돌림을 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

   

혹, 이것이 브래튼우즈 금본위 체제도, 신자유주의 석유기반 체제도, 후기 신자유주의 SDR기반 체제 이후의 길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인가.

   

인드라가 만일 이 일을 해낸다면, 세상은 개벽이다.

   

9. 조로아스터교?

   

"이슬람교의 대두와 아랍 제국의 확장으로 사산 왕조가 무너지자 조로아스터교도 입지가 흔들리게 되었다. 이슬람교에서는 한때 유대교와 기독교를 향해 관용을 베푼 것처럼 조로아스터교에 대해서도 관용을 베풀었다. 그러나 이후 100년 사이에 대대적인 박해로 인해 조로아스터교도 중 상당수가 고향을 떠났고, 오늘날은 인도와 이란의 일부 지역에만 소수가 남아있다. 특히 인도의 조로아스터교도인 '파르시'('페르시아인'이라는 뜻)는 18-19세기부터 상공업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현재는 인도 경제계를 주도하는 세력으로 대두했지만, 그 숫자는 점차 줄어드는 추세다."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4289 

   

"란에 있던 조로아스터교도의 일부가 8세기에 신흥 이슬람교도에 쫓겨 현재의 인도 구자라트주(州) 해안지방에 이주하였다. 그 중심지는 수라트시(市) 남쪽 교외의 나우살리시(市)로, 이곳에는 당시의 사원이 아직도 남아 있다. 17세기에 이르러 수라트시에 동인도회사(東印度會社)의 상관(商館)이 설치되자 많은 파르시들은 상업 또는 무역업에 종사하게 되었고, 18세기에 영국 동인도회사의 상관이 뭄바이(봄베이)로 옮기게 되자 그들의 대다수도 뭄바이로 옮겨 살게 되었다. 19세기에 이르러 그들은 뭄바이를 중심으로 상공업을 크게 일으켜 뭄바이는 인도에서 상공업의 중심지가 되었고, 면방적업(綿紡績業) 등도 일으켜 인도 민족자본의 대표적인 존재가 되었다. 이들은 이지적이고 진취적으로 알려져 유럽의 근대 과학기술을 습득하고 많은 근대적 공업을 일으켜 인도 경제계에 커다란 세력을 지니고 있다. 현재 인도 최대의 재벌로 꼽히는 타타재벌도 그들의 것이다. 뭄바이를 중심으로 살고 있는 이들의 인구는 약 15만에 이른다."

[출처] 파르시 | 네이버 백과사전

   

카르타고/페니키아 유태인 입장에서 조로아스터 교인이란 형제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일까. 엄청 키워준 듯싶다. 다만, 최근에는 데이비드 록펠러 권력이어서 물 먹을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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