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10 : 뉴라이트 스칼라피노와 박정희, 그리고 한반도 통일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1/11/10 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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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10 : 뉴라이트 스칼라피노와 박정희, 그리고 한반도 통일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1/11/10
뉴라이트파 로버트 스칼라피노가 죽었다. 그가 죽었으면 인드라가 어떤 반응이라도 보여야 했었나? 뉴라이트 중앙일보는 어제 이정식을 내세워서 스칼라피노와 해방 정국에 관한 특집 기사를 헤드라인 기사로 올렸다. 마치 이래도 인드라 침묵할래? 하는 식이다. 인드라는 이 문제를 깊이 숙고하고, 글을 올리기로 했다.
"1946년 스탈린 "북한, 중공군 후방기지로" 지령 … 분단, 돌이킬 수 없게 됐다
[중앙일보] 입력 2011.11.09 03:00 / 수정 2011.11.09 09:12
이정식 교수가 밝혀낸 해방정국 한반도
지난 2일 노환으로 타계한 한국과 동아시아 전문가 로버트 스칼라피노 전 UC버클리 교수를 평생의 은사로 기리며 못 잊는 이가 있다. 이정식(80) 미 펜실베이니아대 명예교수 겸 경희대 평화복지대학원 석좌교수가 그다. 경희대 특강을 위해 방한한 이 교수를 6일 만났을 때 그는 스칼라피노와의 공저 『한국공산주의운동사』를 출간하던 1973년을 떠올리며 감회에 젖기도 했다.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스칼라피노는 어떤 인물이었나요.
"UCLA 정치학과에서 학사·석사 과정을 마치고, 박사과정을 다른 대학에서 하려고 물색하고 있던 차에 스칼라피노 교수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본인이 동양의 각국 공산주의를 연구하려고 하는데 자신의 조수가 되어 달라는 것이었어요. 곧바로 UC버클리 박사과정에 등록해 그의 제자가 됐고, 그게 내가 한국현대사 연구에 입문한 계기가 됐으며, 스칼라피노와 『한국공산주의운동사』를 공저로 내는 결실도 보았습니다."
-카이로회담, 얄타회담, 포츠담회담 등은 들어봤는데 런던 외무장관회담은 처음 듣습니다.
"런던 외무장관회담은 2차 대전 승전국인 미국·영국·소련의 외무장관이 모여 전리품을 어떻게 나눌지 논의하는 자리였습니다. 코리아가 언급되지 않았다고 해 한국 전문가들은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어요. 교과서에도 물론 실려 있지 않고요. 대개 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3상회의가 한반도에 관한 모든 것을 결정한 것으로 알고 있지요. 그런데 그보다 3개월 전인 45년 9월 12일부터 10월 2일까지 런던에서 먼저 3상회의가 열렸고, 이 자리가 한반도의 장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어떤 점에서 결정적입니까.
"미국과 소련의 관계가 급격히 냉각되었기 때문입니다. 런던 외무장관회담 이전까지만 해도 미국과 소련은 2차 대전 때 연합군으로 함께한 협력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아직 미온(微溫) 상태였는데, 런던 외무장관회담이 열리며 냉동 상태로 급변한 것입니다. 사실상 미소 냉전의 시작이라 할 수 있어요."
-런던 외무장관회담의 쟁점은 무엇이었나요.
"소련은 전후 일본의 통치에 참여하길 원했으나 미국이 거절합니다. 일본 홋카이도(北海道)의 북반부를 원했던 소련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소련을 자극한 것은 아프리카대륙 북단 리비아의 트리폴리 지역에 관한 것입니다. 소련이 트리폴리 지역을 할양해줄 것을 요구하지만 이 또한 영국과 미국에 의해 거절당합니다. 런던 외무장관회담 기록을 보면 당시 소련 외무장관 몰로토프가 '러시아는 지중해에 상선(商船)들을 위한 항구를 가지길 원한다는 발언을 한 후 이틀 동안 이 점을 강하게 역설했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졸랐다'고 해야 더 옳은 표현일 겁니다. 소련은 입구가 좁은 흑해에서 벗어나 지중해에 해군기지를 갖기 원했습니다. 상선을 위한 항구라고 했지만 뻔한 얘기지요. 소련 해군이 전 세계로 세력을 뻗치는 기지를 얻으려고 했는데 영국과 미국이 이를 거부한 것입니다 ."
-그것이 소련의 한국정책과 어떤 연관이 있나요.
"런던 외무장관회담에서 소련의 몰로토프 장관이 미국·영국의 장관과 부동항(不凍港)을 얻기 위해 싸웠던 게 45년 9월 15~16일이었어요. 미국과 영국의 반대에 부딪힌 후 소련의 한반도 정책과 중국 정책이 완전히 180도 바뀌게 됩니다. 9월 20일 스탈린이 "북한에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하라"는 비밀지령을 내린 게 바로 그 직후이지요. 미국과의 보조를 맞추려는 정책을 포기한 겁니다. 스탈린의 중국정책도 완전히 바뀝니다."
-스탈린의 중국정책이 어떻게 바뀌었다는 뜻인지.
"나는 당시 중국의 만주, 즉 동북3성 지역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때 기억이 지금도 납니다. 45년부터 48년까지 만주에서는 우리가 팔로군이라고 불렀던 공산당과 장제스(蔣介石·장개석)의 국민당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어요. 중국 내전이지요. 그런데 45년 8월 무렵만 해도 스탈린은 장제스의 국민당과 연합하려고 했어요. 45년 8월 9일 소련군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 후 만주로 진군을 했는데, 스탈린은 당시 공산군이 국민당군을 이길 능력이 없다고 판단하고 내전 포기를 공산당에 지령합니다. 그러나 런던 외무장관회담에서 미국과의 협조관계가 대결관계로 바뀌게 된 45년 10월 스탈린의 중국정책이 완전히 바뀝니다. 스탈린은 팔로군 30만 명의 만주 진출을 명령했던 것입니다. 이후 만주에서는 소련의 지원을 받는 팔로군과 미국의 지원을 받는 국민당군의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었어요. 처음에는 국민당군이 열세였어요. 그러다가 국민당군이 새로운 병력을 투입해 팔로군을 밀어버렸습니다. 불리한 형세에 놓인 중국 공산군은 46년 5월 북한 지역으로 퇴각합니다."
-중국 내전이 북한으로 확산되었다는 겁니까.
"46년 5월부터 북한은 중국 공산군의 후방기지로 변한 겁니다. 스탈린의 지령에 의한 것이지요. 북한은 중국 내전의 연장지역이 되고 말았습니다. 6·25전쟁 때 만주가 미군이 넘어갈 수 없는 지역이었던 것처럼 46년 5월부터 48년까지 북한은 장제스의 국민당군이 범할 수 없는 일종의 성소(聖所)였습니다. 북한으로 들어간 팔로군은 소련군의 훈련을 받으며 재편됐고, 이후 국민당군을 물리칠 힘을 비축했습니다. 북한은 46년엔 팔로군의 대피소였다가 47년부터는 국민당군에 반격을 위한 기지로 변합니다. 북한을 팔로군의 후방기지로 제공한 스탈린의 조치로 인해 한반도의 분단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당시 미군은 이런 상황의 변화를 알았나요.
"남한 주둔 미군정보처가 팔로군의 북한 이동 상황을 포착하고 있었어요. 북한에서 남하한 피란민들의 이야기를 통해, 그리고 정보원들을 통해 북한 각지에 나타난 팔로군들, 그들이 받은 훈련 상황, 그리고 기차를 통한 팔로군들의 이동 상황 등이 미군 정보보고서에 기록돼 있습니다."
-45~48년 만주와 북한은 스탈린의 독무대였군요.
"그렇습니다. 스탈린은 공산진영의 황제였어요. 공산진영의 이익을 위해 필요에 따라 자기가 통치권을 가지고 있던 북한을 중공군의 승리를 위해 제공 내지는 사용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요. 이상한 일이 있다면 우리가 아직까지 당시 만주에서의 사태가 북한에 미쳤던 영향을 바로 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지요."
-우리 교과서에는 이승만의 '정읍 발언'(46년 6월 3일)을 분단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그에 대비해 김구의 통일협상을 위한 북한행(48년 4월)을 높게 평가하는 경향을 보이는데요.
"국제사적 시야에서 한국현대사를 재조명해야 합니다. 해방정국은 우리 교과서에는 잘 보이지 않는 손이 뒤흔들었습니다. 지금까지 잘 몰랐던 진실이 운명을 결정했습니다. 한반도 분단의 수수께끼는 소련의 세계정책의 변화를 통해 풀어낼 수 있습니다. 그 키를 쥔 인물이 스탈린입니다. 해방 직후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열린 런던 외무장관회담과 스탈린의 대북한 비밀지령, 그리고 북한의 중국 팔로군 후방기지화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이해해야 비로소 수수께끼가 풀립니다. 북한이 중국 공산화의 후방지역, 내지는 연장지역으로 변한 상황에서 한반도의 남과 북이 합해 통일을 이룬다는 꿈은 춘몽(春夢)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될 경우 스탈린은 만주를, 그리고 나아가서 중국을 국민당과 미국에 넘겨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 후학들에게 한마디 부탁합니다.
"남한에서 일어난 일들의 발생 이유를 남한의 테두리 속에서만 찾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무엇보다 강대국들 사이에서 일어난 일들의 영향을 알아야 합니다. 나라가 작으니까 한국 연구가 비례적으로 쉬울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반대입니다. 한국현대사를 제대로 연구하려면 한국 자료는 물론 중국·일본·러시아·미국 자료를 찾아봐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총체적인 그림을 그리기가 힘듭니다. 시야를 되도록 넓게 가져야 하고, 러시아·중국·미국에서 일어난 일에 관심을 두어야 하며, 특히 해방 후의 일들에 대해서는 북한에서 일어난 일에 주목해야 합니다."
"
배영대 기자
로버트 스칼라피노는 누구인가.
"캔자스 레벤워스 출생. 샌타바버라대학교와 하버드대학교를 졸업하고 1948년 하버드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해 하버드대학교 강사를 지냈고, 다음해부터 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조교수, 교수(1956), 정치학과장(1962~1965), 명예교수(1990)가 되었다. 캘리포니아대학교 동아시아 연구소 소장을 지낸 아시아 문제 전문가로 《김일성》 《한국공산주의운동사 Communism in Korea》 《대전 이전 일본의 민주주의와 정당활동 Democracy and the Party Movement in Prewar Japan》 《현대 일본 정당과 정치 Parties and Politics in contemporary Japan》 《중국의 사회주의 혁명 Modern China and Its Revolutionary Process》 등 한국을 비롯하여 아시아에 관한 저서를 많이 썼다. 극동아시아문제 전문학술지 《아시안 서베이 Asian Survey》 편집장을 역임하였다. "
[출처] 로버트 스칼라피노 [Robert A. Scalapino ] | 네이버 백과사전
첫째, 그는 빌더버그 멤버이자 삼각위원회 정회원이다. 국유본 분파 중 뉴라이트파이다. 한국 제자로 이정식, 최규선, 한승주 등이 있는데, 한승주 역시 삼각위원회 회원이다.
역대 인촌기념강좌 강사 명단
http://www.inchonmemorial.co.kr/inchon_chair03.html
뉴라이트 모임인 인촌기념강좌 강사 명단을 보면 브레진스키, 스칼라피노 등 삼각위원회 회원들과 일본 정치인 등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해서, 스칼라피노가 주요한 시기마다 한국에 적극 관여한 것, 국유본 권력이 바뀐 해인 1973년에 한국공산주의연구를 책으로 펴낸 점, 1980년대 이후 북한 4차례 방문한 점 (89, 91, 92, 95년), 이번 스칼라피노 죽음과 이정식 특별 인터뷰가 결코 예사로운 것이 아니다. 이는 한반도 변화, 즉 한반도 통일로 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왜?
"
● 특별히 한국인에게 전하는 그의 동북아 미래 전망 10제를 옮겨본다.
Q1. 한반도 통일은 실질적으로 가능한가?
A. 북한의 붕괴나 전쟁이 발발하지 않는 이상 한반도 통일은 당분간 불가능해 보인다. 북한의 빈곤 정도로 보면 한국이 지불할 통일 비용은 어마어마할 것이다. 나아가 군의 지배를 받아온 북한 주민에게 남북통일은 심각한 정치적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 따라서 통일이 이루어지려면 반드시 북한 내부에서 대대적인 정치 경제적 변화가 선행되어야 한다.
Q2. 일본의 군국주의는 부활할 것인가?
A. 일본에 군국주의가 부활할 조짐은 없다. 현재 일본의 대외정책은 안보 문제에 있어서 미국과 더욱 돈독한 관계를 원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최근 오키나와의 후텐마 미군기지 이전 문제에서 친미적 입장이 일본 내에서 많은 반발을 초래하고는 있지만 일본은 안보상 책임을 지거나 그 비용을 부담할 입장이 아니다. 이 문제는 중요한 과제로 계속 남을 것이다.
Q3. 중국은 미국을 능가할 것인가?
A. 현재의 추세가 계속되면 20~30년 후, 경제력에서 중국이 미국을 초월해 세계최고의 경제대국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극심한 빈부갈등, 해안지역 대도시와 낙후 내륙지역 간의 격차, 한 자녀 정책이 가져 올 고령화 문제 등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다. 중국의 정치적 영향력은 경제적 영향력을 따라가기 어려울 것이다.
Q4. 사회주의를 고수하면서 중국이 세계 최대 경제대국이 될 수 있는가?
A. 사회주의는 여러 형태로 존재한다. 중국은 민간 부문을 대대적으로 확대하는 데 성공했으나 정치적인 표현과 행동을 철저히 규제하고 있으며, 공산당 일당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독재주의가 다소 완화되고 개방주의, 국제주의, 중산층의 확대 및 교육기반의 확대 등을 추구하는 더 큰 문호 개방 요구에도 독재는 계속될 것이다.
Q5. 미국, 일본, 중국 가운데 한국은 누구와 가장 가까워져야 하는가?
A. 역사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준다. 한국은 모든 주변국과 비교적 균등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지리적으로 가장 먼 미국과 전략적 특수 관계도 지속하는 것이 국익에 가장 유리하다. 통일 후에도 한국은 상대적으로 작은 국가이므로 이러한 전략이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국익에 가장 바람직하다.
Q6. 아시아는 유럽연합처럼 블록을 형성할 수 있는가?
A. 아시아는 경제발전 수준으로 보나, 정치적 풍토로 보나 국가 간 격차가 너무 크기 때문에 당분간 EU같이 아시아 전체를 아우르는 조직을 이루는 것은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세안이나 상하이 협력기구 같은 지역주의적 성격을 가진 조직이 나오고 경제와 전략적 과제를 중심으로 한 양자간 합의체들도 나오고 있어 앞으로 아시아의 지역주의는 여러 형태로 발전할 것으로 보인다.
Q7. 한국은 다문화 사회를 만드는데 올바른 길로 가고 있는가?
A. 한국은 정치 경제 및 사회 발전을 이룩해 가는 과정에서 복합적인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 과정에서 서양 문화를 위시해 다른 여러 사회의 원칙과 관행을 도입하고 있다. 이 과정은 계속될 것이다. 반면 한국은 전통문화를 중시하고 있으니 이 상황은 결국 변할 것이다. 그러나 언제 어떻게 변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Q8. 한국은 진정한 강대국이 될 수 있는가?
A.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분명 세계에서 중요한 지역에 위치한 나라 중 하나로 상당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나라 규모와 자원의 부족으로 남북통일을 이루더라도 한국은 세계 열강으로 등극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Q9. 북한은 붕괴할 것인가?
A. 과거 많은 이들이 북한은 경제적 실패와 고립정책으로 붕괴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최근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건강 악화와 지도권 계승을 둘러싼 불확실성 등 몇가지 요인의 증가로 붕괴 가능성은 더욱 힘을 받았다. 그러나 북한의 위기 극복 능력은 생각했던 것보다 컸다. 북한의 붕괴를 구체적으로 예측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다만 가능성과 개연성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현재 북한의 붕괴는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군 세력과 민간 부문에서 조직된 정치 세력의 부재로 어디까지 가능성만 존재할 뿐이다.
Q10. 아시아의 어느 나라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은가?
A. 태평양전쟁 때부터 지난 70여년간 회의에 참석하거나 강연, 연구 목적으로 아시아를 60번정도 방문했다. 아시아에는 가보지 않은 나라가 없고 심지어 외딴 부탄과 고립된 북한에도 다녀왔다. 그러는 동안 아시아 각국의 지인들과 교우관계를 맺고 그 일을 항상 즐거워 했다. 나는 미국인이다. 그래서 미국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 그래도 나는 아시아에 계속 갈 수 있기를 바라며, 특히 한국 같은 멋진 나라에 다시 가기를 희망한다."
http://blog.daum.net/orrong/12752163
예서 보듯, 스칼라피노는 급격한 통일보다는 완만한 통일을 주장했다. 국유본 뉴라이트파 중에서도 노비네파에 약간 가까운 입장인 게다. 그런 스칼라피노의 사망은 스칼라피노 개인에게는 유감이 없지만, 한반도 평화와 통일, 경제 발전과 사회 복지를 위해서는 호재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한 시대가 가고 있는 것이다.
"스칼라피노는 빌더버그 회원이자 삼각위원회 회원인 동시에 한국전쟁에 관한 내전론을 주창하여 브루스 커밍스와 함께 한국 대학생들에게 잘 알려진 진보 성향으로 알려진 수정주의 학자이다. 또한 그는 현실 정치에 깊숙하게 개입하고 있다.
스칼라피노 美교수 방북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607042234471&code=100100
北 군부, 이례적으로 美 방북단 면담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2050748
"美허드슨 연구소의 로버트 두저릭은 31일 로버트 스칼라피노(버클리대 명예교수), 빅터 차(국가안보회의 아시아담당 보좌관), 닉 에버스탯 (미국기업연구소 연구원), 마커스 놀런드(국제경제연구소 연구원), 조너선 폴락(美해군대학 교수)등 쟁쟁한 한반도 전문가들의 논문 16편을 엄선, '한국: 동북아의 안보축'(Korea:Security Pivot in Northeast Asia)을 편찬해 냈다... 이들은 "한국전의 결과로 생긴 현재의 상태가 이 지역의 평화를 유지시키는 '전략적 구조(strategic architecture)'의 핵심이었기 때문에 한국은 동북아 안보의 관건"이라면서 "이러한 환경의 중요 요인은 주한 미군에 의해 보장되고, 주일 미군에 의해 강화되는 '팍스 아메리카(미국의 지배에 의한 평화)'에 있다"고 설명했다."
"한반도 통일돼도 미군 주둔해야"<美전문가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1371891
한국전의 결과로 생긴 현재의 상태가 이 지역의 평화를 유지시키는 전략적 구조(strategic architecture)의 핵심이라는 문구에 주의하라. 이 말이 무슨 말인가 하면, 한국전쟁 덕에 한반도에 미군을 주둔시킬 수 있는 명분을 획득했다는 의미다. 더 나아가 북한 정권의 존재로 말미암아 미군 주둔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게다. 그러나 근래 국제 환경이 국제유태자본이 더 이상 북한 정권을 용인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으므로 북한 정권 없는 미군 주둔이 필요하며, 이에 따라 십년 내 동북아에서 상상 이상의 사태가 등장할 가능성이 있다는 게다.
통일 이후에 북한에 미군이 주둔한다는 시나리오를 처음 말한 이는 고 윤한봉 선생이었다. 그 이야기는 내가 모임을 이끌고 광주에 내려갔을 때 직접 들은 이야기다. 선생의 말은, 미국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친중 통일국가이므로 안전장치로 미군 주둔을 원산쯤에 하면 미국이 통일을 허락할 것이라는 게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과연 이것이 윤한봉 독자적 견해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광주항쟁으로 미국으로 밀항한 이력이 있는 만큼 미국 쪽에서 흘러 다니는 소식을 전해준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일까. 이후 이와 같은 견해가 조용히 여기저기서 나와 정치권에서도 등장했다.
한미동맹 미래 공동협의 결과 보고서
http://weekly.hankooki.com/lpage/politic/200602/wk2006022213172137050.htm
이것만 봐도 김대중, 노무현이 국제유태자본이 시키는 대로 하는 '충직한 개'에 불과하였음을 잘 알게 되는 셈이다. 즉, 이전의 615이니, 햇볕이니 하는 것도 자신의 의지라기보다는 국제유태자본이 지시한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가령 햇볕은 미국의 포용정책에서 나온 것이다. 해서, 도널드 그레그가 햇볕정책을 만든 김대중 전 대통령과 1948년 미 국무성 정책기획 최고담당자로 대 소련 봉쇄정책의 기초를 놓았던 조지 케넌이 유사하다고 말한 것이다. 참고로 그는 전 주한 미국 대사이자 김대중 납치사건 당시 CIA 서울지부장으로 남북화해무드에 찬물을 끼얹고 박정희에게 물을 먹이고자 김대중 납치를 주도하였다고 내게 의심받는 인물이다. 김대중 납치 사건 배후는 국제유태자본이다?
http://blog.naver.com/miavenus/70031283893"
국제유태자본: 삼각위원회, 주한미군, 인도, 북핵
http://blog.naver.com/miavenus/70036365567"
http://blog.naver.com/miavenus/70087754302
둘째, 스칼라피노는 동아시아 전문가이다. 특히 그를 유명하게 한 것은 <콜론 보고서>이다. 스칼라피노 등이 작성한 콜론보고서는 1959년 9월 미 의회에 제출한 보고서였다. 헌데, 국유본이 이 보고서를 번역해서 1960년 1월부터 5월까지 야당 잡지인 '사상계'라는 잡지에 기고한 것이다. 보고서 내용은 이승만 정권의 동요로 인한 불안한 정세를 우려하면서 정당 정치가 실패하면 언젠가 군사 지배가 등장할 것임을 경고한 것이다.
일은 실제로 일어났다. 과연 국유본이 예측해서 그대로 일어난 것일까? 아니면, 국유본이 먼저 시나리오를 던져준 뒤 일을 진행시킨 것일까^^! 인드라는 확신한다. 후자인 것을! 이것이 국유본 일처리 방식이다.
<콜론 보고서>를 접한 젊은 장교들이 당시 모두 우국충정에 들끓어서 너도 나도 정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나폴레옹부터 시작해서 나세르, 케말 파샤까지 (카스트로도 넣어줄까~^^?) 당시 청년 장교들은 이대로 주저 앉아 있으면 국제 사회(미국)가 우리를 우습게 볼 것이라고 여겼다는 것이다.
419 학생운동 배후에 국유본이 있었다. 미일안보조약과 엔블록권 강화를 위해서 한일수교가 필요했는데, 항일운동가 이승만 대통령이 어떤 경우에도 일본과 교섭은 없다고 완강히 거부했기 때문에 이승만을 제거해야 했다. 그렇다고 쪽발민주당을 내세울 수 없었다. 이유는 아직 해방한 지 얼마 안 되었기에 쪽발민주당 넘들이 윤보선을 비롯하여 죄다 쪽발이라는 것을 저학력 저소득층 기층민중인 국민이 더 잘 알았다. 지금이야 한국 역사 교과서 조작으로 고학력 고소득층 학생들이 모를 뿐이다.
교과서는 진실을 가르치는 게 아니야. 국유본 세뇌용이다. 그래서 국유본 하위기관, 전교조같은 넘들이 필요한 것이다. 조작질 전문이잖아, 전교조 색희들이 말이야. 초창기 의식있던 교사들을 죄다 퇴출시키고, 지금 남은 색희들은 정말 쓰레기 같은 색희들이다. 도저히 선생으로 볼 수 없는 색희들이 지금 교사질을 하고 있어. 무뇌아 넘들이지.
해서, 국유본이 택한 대안은 박정희였다. 박정희는 친일 좌파였다. 아버지가 동학교도이고, 형은 좌파로 대구 폭동 때 죽었다. 박정희가 젊어서부터 따르던 형이 공산주의자였는데, 그 형은 집안 사람들 중 하나가, 특히 박정희가 레닌이나 나폴레옹이나 이성계 같은 인물이기를 기대한 것 같다. 형인 자신은 백이숙제처럼 살되, 동생에게는 담대한 길을 권한 것 같다. 해서, 박정희 자신도 여순반란 사건에 가담했다가 사형당할 뻔했는데, 국유본이 구출해주었다.
교과서에서는 밑의 사람들이 구명을 해주었다는데, 죄목이 위중한데, 밑에서 구명운동한다고 풀려나나? 절대 아니다. 국유본이 박정희를 그때부터 주목한 것이다. 게다가 풀려난 박정희가 한국전쟁 중에도 조신하게 있어도 모자를 판에 틈만 나면 정권을 뒤집어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점이다. 누군가 뒤에서 밀어주지 않고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자신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516 혁명이 일어났는데, 이때, 혁명은 총 한 방 없이 끝나면 허무하니까, 살짝 총성 한 번 울리고 끝났다. 러시아 혁명이나 쿠바 혁명과 같았다. 혁명이 일어난다는 조짐이 곳곳에서 있었음에도 군 당국, 정부, 미국 CIA 어느 누구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딱 한 명이 이 혁명을 저지하려고 나선 이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김재규였다. 그런 김재규를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장에 임명한 것이 과연 박정희 의지였을까? 아니면, 국유본 의지였을까^^?
무엇보다 인드라가 중시하는 건, 이런 박정희를 누가 감시했겠는가이다. 현재 인드라 추정으로는 다음과 같다. 이승만 때는 유한양행 유일한이다. 유일한은 CIA 전신인 OSS 출신이다. 박정희 때는 김종필로 보인다. 중앙정보부를 만들었는데, 그간 국유본 관례상, 이런 직위를 아무에게나 맡기지 않는다. 전두환 때는 장세동으로 보이며, 노태우 때는 박철언에게 이 역할을 맡겼다가 박철언이 제 멋대로 행동하는 바람에 국유본 눈 바깥에 난 듯싶다. 김영삼 때는 권영해, 쪽발 돼중 때는 박지원, 쪽발 놈현 때는 문재인, 이명박 때는 정두언 이렇게 추정한다. 확정적인 것이 아니라 잠정적이다. 다른 인물이 감시자, 즉 국유본 간첩일 수 있으니 의견 개진 부탁드린다.
하여간 소련이든, 북한이든, 한국이든, 일본이든, 2인자를 키워서 2인자가 권력자를 감시하게 하는 것이 국유본 지배 방식이라는 점에서 이 점을 주의깊게 연구하는 분들이 많이 나왔으면 싶다.
스칼라피노는 516 혁명 직후에 또 등장한다. 혁명 직후 스칼라피노는 내한하여 군사 혁명 관계자들을 만난다.
http://blog.naver.com/kslnollo/80127536082
이 시기 박정희, 김종필을 비롯한 군사혁명가들은 시장경제가 아닌 계획경제, 다시 말해,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생각했다는 것이다. 즉, 이들이 말하는 진정한 반공이란, 이북 체제보다 더 잘 사는 체제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당시 이북이 남한보다 더 잘 살았으니까. 김일성은 군사혁명이 일어난 직후, 남한에 좌파 정권이 들어섰다고 판단하여 박정희 형 친구를 급히 남파하여 박정희와 접선하려고 했다. 당시 박정희와 공화당 핵심 인사들 상당수가 남로당 전력이 있는 좌파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하면, 박정희도 뉴라이트파가 아니냐고 오해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아니다. 빅터 로스차일드파이다. 이 시기, 국유본은 오직 빅터 로스차일드파만 있었을 뿐이다. 뉴라이트파는 1973년 국유본 권력이 빅터 로스차일드에서 데이비드 록펠러로 교체한 다음에 등장한 것이다. 해서, 이 시기까지 스칼라피노 역시 빅터 로스차일드파였던 것이다.
박정희는 빅터 로스차일드 계열이다. 해서, 혁명이 성공하자 세계에서 가장 먼저 승인한 정권이 이스라엘 중도좌파인 마파이 정당이다. 오늘날 이스라엘 노동당의 전신이 마파이당이다. 마파이당이 오랜 기간 독재를 했는데, 이 시기 이스라엘 정치를 조종한 이는 빅터 로스차일드이다. 왜?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를 만든 사람이 빅터 로스차일드이니까~!
셋째, 1973년에 스칼라피노와 이정식의 <한국공산주의운동사>가 나왔다. 이 책은 1987년 돌베개로 나왔다. 이 책은 서대숙의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 연구, 화다, 1985>와 함께 등장하여 한국에서 자생적인(?) 주사파가 나오게 만든 원인을 제공했다.
물론 번역서는 1980년대에 집중적으로 나왔지만, 스칼라피노와 같은 수정주의 학파 문서들을 번역한 일본 카피본들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한 문서들이 팜플릿 형태로 1970년대말부터 대학원을 중심으로 해서 대학가에 퍼지고 있었다.
예서, 정통주의와 수정주의란 무엇이냐. 한국전쟁에 관한 견해다. 정통주의란 김일성 북침으로 벌어진 전쟁이 한국전쟁이다. 반면, 수정주의란 계급 갈등이 폭발하여 발생한 내전이 한국전쟁이다. 또한, 정통주의는 가짜 김일성을 내세운다. 반면, 수정주의는 진짜 김일성을 내세운다. 정통주의란 좌파와 우파 갈등을 내세운다. 수정주의는 매국 대 항일운동을 내세운다.
해서, 이 시기 자유 진보 성향인 이들은 대부분 수정주의를 지지하게 되었던 게다. 허나, 바로 이것이 국유본의 함정일 줄이야~!
정통주의를 만든 것도 국유본이고, 수정주의를 만든 것도 국유본이다. 만든 이유는 필요해서이다.
해서, 인드라가 초간단 정리하겠다.
김경천
김일성 진짜다. 보천보 전투도 허접했긴 하지만, 사실이다. 허나, 김일성은 여럿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다시 말해, 만주에서의 김일성 전설 모두가 다 김일성이 한 것이 아니다. 허나, 한 때, 김일성이 활약한 것도 사실이다. 어차피 이 시기 활동이란 열 배 뻥튀기는 기본이니까. 하고, 백마 탄 김일성 장군 전설은 김경천일 가능성이 크다. 김경천은 일본 육사 출신으로 만주로 망명가서 백마 타고 항일운동을 하다가 소련에 간첩으로 몰려 소련에서 1942년에 죽었다. 소련은 김경천의 대체물로 김일성을 선택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김일성은 가짜는 아니나 김일성 전설을 만든 여러 김일성 중 하나여서 김경천이 죽자 대안으로 나온 인물이다. 참고로 김일성 애비는 아편 팔던 쪽발이였다. 해서, 김일성 친지들 중에 상당수가 쪽발이다~! 박정희 아버지는 동학교도, 김일성 애비는 아편 팔아 떼돈을 벌다가 공산주의자에게 총맞아 뒈진 쪽발이~! 해서, 북한 초대 내각을 보면, 남한 주사파들이 보면 피를 토할 정도로 쪽발이들이 굉장히 많다.
http://blog.naver.com/miavenus/memo/70123201442
뭐, 하긴 지금 주사파들이 어디 이념으로 하나. 이렇게 죽나, 저렇게 죽나, 출세 한 번 하고 죽자는 생각으로 하는 애들이다. 모르는 것 아니다. 설사 김일성이 쪽발이고, 북한 주민을 수백만 학살하더라도 주사파들은 김일성을 영원한 인류의 어버이로 생각할 것이다~! 휴~! 세뇌가 십 년만 넘으면 삶이 된다. 삼십 년 흐르면 진리가 된다 ㅠㅠㅠ
http://blog.naver.com/yukin48/50089192223
좌파냐, 우파냐. 매국이나 항일운동이냐. 이 구도는 빅터 로스차일드이냐, 데이비드 록펠러이냐 하는 것이다.
빅터 로스차일드 시기에는 좌우파를 주요 지표로 삼았다. 이때, 좌파는 좌파 민족주의요, 우파는 우파 자유주의였다. 해서, 중도좌파 민족주의 정권인 박정희 정권 주요 반대자들이 우파 자유주의자였다. 물론 우파 자유주의자 본질은 쪽발민주당이었다.
http://blog.naver.com/miavenus/70027609268
해서, 이 구도를 깨야 했다. 데이비드 록펠러는 왜 한국 정치를 중시하나? 이는 오늘날로 보면 안다. 왜 국유본은 변방이랄 수 있는 시리아, 예멘, 튀니지, 리비아 같은 나라에서 재스민 혁명을 일으키나. 변방에서 바람이 불면 이 바람을 이용해서 중심부에서 일을 원활히 할 수 있다. 마치 그리스에서 시끌시끌해서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것과 같다.
한국 정치를 움직이려면? 그중 하나가 이념적인 작업이었다. 당시 박정희 왈, 한국에는 혁명이 두 번 있었는데, 한 번은 동학혁명이요, 다른 하나는 516 혁명이라고 말할 정도로 민족주의를 강화시켰을 때이다.
이런 때에 스칼라피노의 <한국공산주의운동사> 출간은 박정희에게 위협이요, 김일성에게는 호재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 빅터 로스차일드가 한국전쟁을 위해 김일성을 줄기차게 밀어주다가 미일안보조약을 위해 박정희를 밀어주어서 김일성이 갈피를 못 잡고 헤매고 있을 때였다. 이럴 때, 새로 바뀐 국유본 주인이 이제는 다시 김일성이다, 하니 김일성이 만세를 부르고 싶지 않겠는가. 반대로 박정희는 1960년대의 김일성처럼 위기의식을 느끼고 한국판 주체체제인 유신체제로 달려갔던 것이다. 소련과의 비밀 협정 등 비동맹 외교 강화, 남북회담으로 우리민족끼리 대단결, 원자폭탄 개발 등등등.
더 이야기하는 것은 이후 백문백답에서 상술하기로 하고.
국제유태자본론 없이는 이 기자회견을 이해할 수 없다
딱 하나만 이야기하자.
전두환이 집권하는데, 굳이 광주항쟁이 필요했을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지금 시리아 등 중동 지도자들을 보라. 얼마든지 집권 가능하다. 문제는 국유본이었다. 국유본이 결정하면 무너진다. 봐주니까 안 무너진 것이다. 해서, 전두환이 굳이 광주항쟁을 일으킬 필요가 없었다. 유신체제를 계속 이어간다 해서 뭐랄 사람도 별로 없었다. 혹자는 시민들이 많이 반대했다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지식인 층과 기독교인 일부 등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왜 전두환은 광주항쟁을 일으켰을까. 아니, 질문을 똑바로 하자.
국유본은 왜 광주항쟁을 일으켰는가.
하나, 신자유주의 도입 때문이다. 박정희가 완강하게 신자유주의를 거부했다. 박정희의 5대 업적이 무엇인가. 1. 산별노조와 전임노조간부 임금 보장. 2. 사회주의 의료체계. 3. 친환경 그린벨트로 우리 강산 푸르게. 4. 교육 평준화. 5. 새마을운동.
이러한 업적은 삼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세계가 인정하는 업적이다. 오직 한국에서만 푸대접을 받지, 전 세계적으로 박정희는 성공한 지도자 중 하나이다. 이차대전 이후 식민지 국가 중에 선진국이 된 나라는 한국 하나 뿐이다. 이 역할을 지금 뉴라이트는 정주영으로 돌리려고 정몽준을 한반도 넘버원으로 만들었는데, 박정희이다. 정주영은 아무리 드라마 영웅시대 등으로 미화해도 박정희의 짝퉁이었다.
국유본은 박정희 업적을 모두 말살하기 위해서 한국 최초의 신자유주의 정권, 전두환 정권을 출범시킨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박정희 후계자가 아닌 박정희와 차별하는 정권이 들어서야 했다. 이를 위해서는 비상사태가 필요하고, 신헌법이 필요했다. 제 5공화국이다.
둘, 새로운 정치 구도를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전의 구도는 도농간 구도였다. 도시는 야당, 농촌은 여당이었다. 이 구도를 지역 구도로 바꾸어야 했다. 왜? 데이비드 록펠러와 뉴라이트는 근본주의 종교 갈등, 지역 갈등을 냉전구도를 극복할 효과적인 수단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해서, 한국에서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호남을 타격해서 지역 갈등을 만든 것이다.
국유본은 이 방식을 여러 가지 목적으로 이미 동유럽 유태인에게 써먹은 바 있다. 동유럽 유태인을 고립시켜 오히려 유럽인들에게 탄압받게 만드는 방식이다.
처음부터는 곤란하니 차츰 차츰 구도를 만들어가서 마침내 오늘날 영호남 구도를 만들어낸 것이다. 인드라가 강조하는데, 1987년 이전에 영호남 갈등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국유본이 전혀 없는 걸 만들지는 않는다. 있는 것을 열 배 뻥튀기하는 게 국유본이니까. 국유본이 지난 역사를 연구해서 갈등 요인을 분석해서 뽑은 자료로 보니 활용 가능하다 여겨 나온 게 영호남 갈등인 게다. 헌데, 사실 조선 시대에는 영호남 갈등보다는 평안도/함경도 출신 갈등이 더 심했다. 홍경래 난만 봐도 알 수 있다. ㅠㅠㅠ 왜 한국전쟁 직후 남한에서 평안도/함경도 출신들이 득세한 줄 아는가? 그만큼 그들이 오랫동안 설움을 당해서 독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970년대 중후반 이후부터 국유본이 작업을 한 것인지 여기저기서 호남 안티를 마구 만들어내는 식으로 작업을 걸고, 광주항쟁으로 꽃을 피운 다음에 오늘날에는 오히려 쪽발민주당을 제외하고서는 호남/호남인 우대 정책을 써서 목적을 충실하게 달성한다고 할 수 있겠다. 국유본이 참 재미있는 게, 쪽발민주당에서는 오히려 호남인을 차별하게 만든다 ㅎㅎㅎ.
대표적인 예가 동교동계를 아예 묵사발을 낸 것이다.
아무튼 이번 광주 번개에서 다시 한 번 느꼈는데, 호남인들도 뭔가 이상하다라고 느끼는 분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워낙 강렬하게 세뇌 작용을 시켜서 어렵다고 보았는 데도 세뇌가 풀리는 분들이 생겨나는 걸 보면 국유본이 완벽하지는 않은 것 같다. 정말 이중 삼중으로 세뇌 결계를 펼쳐서 빠져 나갈 호남인이 별로 없다고 보았는데~!
하여간, 기존 유신 체제로 가는 건, 계속 도농 구도로 간다는 것이다. 이 구도는 사회주의 대 자유주의 구도이니 안 될 말이다. 신자유주의가 달리 신자유주의인가. 예서, 전두환이 무슨 신자유주의야, 라고 반문할 사람이 있겠다. 천재 경제학자라던 김재익이라고 아는가. 이 사람이 대표적인 신자유주의자다~! 또한, 두발 자유화, 교복 자유화. 전두환 때 일어난 일이다. 학원 자율화도 마찬가지이다. 동시에 전두환은 민족주의을 넘어서 국수주의로 가야 했다. 그것이 국풍 81이요, 한단고기이다. 그런 전두환인데, 독도 문제는 이승만, 박정희와 달리 쪽발 돼중이 따라했듯 침묵하는 정책을 펼쳤다^^!
아울러, 여기서 선거를 하면, 야당이 무조건 이긴다고 여기는 환상이 있다. 아니다. 선거는 국유본이 장악했다. 빅터 로스차일드가 계속 집권했다면, 박정희 다음으로는 쪽발 돼중이 집권할 예정이었다. 쪽발 돼중이 신민당에서 김영삼과 이철승을 물리친 건 99% 중앙정보부의 힘이다. 즉, 국유본의 힘이다. 당시 국유본 주문은 박정희와 쪽발 돼중으로 대선을 치루되, 승부는 1%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하라는 것이었다.
해서, 전두환 대 쪽발 돼중이든, 전두환 대 김영삼이든, 전두환이 누구와 상대하든, 전두환이 얼마든지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이는 1987년 대선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광주항쟁을 일으킨 건 지역 감정을 일으켜서 정치 구조를 바꾸기 위해서이다.
셋, 쪽발 돼중을 키우기 위함이다. 쪽발 돼중은 세 가지 이유로 유용했다. 1. 향후 지역 구도에서 쪽발 돼중이 역할을 해서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2. 광주항쟁으로 운동 진영에서 김영삼보다 도덕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우위에 설 수 있기에. 실제로 인드라가 1987년 마지막까지 도심에서 찌라시를 뿌리면서 노태우 당선 저지운동을 할 때 상급에서 지시내린 말이 뭐냐면, 김영삼이 당선되지 않아도 부산에서는 별 일이 없을 것이다, 허나, 쪽발 돼중이 당선 무산하면 광주 인민이 다시 일어날 것이다. 제 2의 광주항쟁이 일어날 것이다. 해서, 우리는 쪽발 돼중을 지지해야 한다.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허나, 노태우가 당선했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 니기미, 이때, 인드라는 중요인물도 아닌데, 잡혀가는 줄 알고, 집에서 피신해서 지방을 한동안 전전했잖아. 제기랄~! 3. 국유본이 원하는 대로 신자유주의를 시키는 대로 하기 위해. 실제로 역대 대통령 중 쪽발 돼중 만큼 국유본 지시사항을 충실하게 한 이가 없다.
역대 대통령과 북한 주석들은 모두 국유본이 임명했다. 헌데, 국유본이 지시한 대로 충실하게 한 대통령을 들라면, 인드라는 박정희, 쪽발 돼중, 이명박을 들겠다. 이들은 국유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아는 대통령이었다. 해서, 국유본 지시를 따라도 한국 국익에 이바지한 면도 없지 않다. 그래서인지 국립묘지에는 박정희, 쪽발 돼중이 있는데, 인드라 생각으로는 이명박도 반드시 국립묘지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이승만,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쪽발 놈현 이런 대통령들은, 국유본 지시를 충실하게 따랐지만,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즉, 무식한데, 부지런하기만 했던 대통령들이 아니었나 싶다. 이런 대통령을 국유본이 임명하면, 한국인도 같이 고생한다. 해서, 한국인들은 간절하게 기도해야 한다. 국유본이여! 허접한 넘들을 제발 대통령으로 뽑지 말아주세요. 이왕 뽑아도 박정희, 쪽발 돼중, 이명박 같은 대통령을 뽑아주세요!라고 해야 한다.
박정희, 쪽발 돼중, 이명박은 대통령이다. 존경할 분들이다. 반면 나머지 대통령들은 대통령이니까 존경해야 하지만, 가급적 교과서 같은 데서 인용하지 않았으면 싶다. 후손을 위해서라도 언급을 하지 않는 것이 국익을 위한 일인 것 같다.
자, 이제 결론으로 가자.
핵심은 무엇인가. 이제 변화하는 시대인 게다.
국유본은 늘 준비한다.
1950년 한국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1945년부터 준비한 것이 국유본이다.
그처럼 1980년 광주항쟁을 일으키기 위해 1973년부터 준비한 것이 국유본이다.
이제 또 삼십 년이 흘렀다. 2010년이다.
독일 통일과 같은 새로운 이야기가 나와야 한다.
김정일이나 김정은이 평양에서 평양시민을 향해 탱크로 수 천 명을 죽이는 쇼가 나와야 한다.
국유본은 능력이 있다. 왜 안 하나?
충분하게 시나리오를 제공하지 않아서다. 여러분들이 나서야 한다. 한시라도 빨리 한반도 평화통일과 경제발전, 사회복지를 위한다면 나서야 한다.
하고, 국유본은 지금 입질을 하는 중이다. 이제까지 정통주의/수정주의를 만든 것이 국유본이다. 관련 자료들을 국내 학자들이 모를까? 운동권이 모를까? 다 안다. 그럼에도 왜 침묵하나?
가령 어용관변 부동산업자 강만길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런 애들이 학교에서 지랄하고 있는데, 누가 감히 다른 이야기를 한다는 이야기인가. 안 그래도 교수되기가 하늘의 별따기인데? 강만길 같은 넘 앞에서 빤쓰 벗고 춤을 춰도 될까 말까 한 것이 요즘 학계 세상이다. 기득권이 한순간에 사라지지 않는다. 십 년은 간다. 그처럼 수정주의파들도 십 년은 간다. 정통주의파도 십 년은 갔다. 다만, 이제 막바지다. 북한 인권 문제만 나오면 수정주의파들 속으로 한숨을 푹푹 쉰다.
바로 이런 물꼬를 과감하게 트겠다는 것이 이정식과 뉴라이트인 것이다. 이미 젊은 층에서 호응하고 있다. 허나, 인드라는 이것만으로 부족하다.
2015년 이내에 통일이 되어야 한다.
국유본은 48시간 내에 김정일을 숙청할 수 있다.
필요한 것은 시나리오이다. 즉, 명분이다.
한국인이여!
통일을 원하는가!
그렇다면, 통일을 하자!
평화통일로 경제위기를 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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