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유태자본은 수메르인이다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1/11/12 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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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11 : 국제유태자본은 수메르인이다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1/11/12

   

   

- 관리하나, 지배하지 않는다.

   

   

레바논 산맥은 산림이 울창했다.

   

   

"두로 왕 히람이 다윗에게 사자들과 백향목과 목수와 석수를 보내매 저희가 다윗을 위하여 집을 지으니"사무엘하 5:11.

   

   

특히 구약에서 여러 차례 언급할 만큼 백향목이 풍부했다. 백향목이 나무가 곧고 가공이 편리하고 해충에 잘 견뎠기에 선박과 성전, 궁전, 악기 제작 등 쓰임새가 무궁무진했다.

   

   

페니키아인이 오늘날 시리아와 레바논 지역에 자리를 잡은 것도 배 만들기 좋은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하면, 페니키아인은 어디서 왔는가. 많은 이들이 도전했지만,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구약에서는 선조가 가나안인이라고 한다. 페니키아인도 자신을 가나안인이라고 한다. 헌데, 헤로도토스 전설로는 페르시아만에서 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때, 인드라의 독특한 추정은, 헤로도토스 전설에 기반한다. 페니키아인이 수메르에서 온 것으로 본다. 왜인가. 수메르인은 독특한 도시 체제를 이루고 있었다. 다신론을 숭상한 수메르인은 도시 별로 각자 숭상하는 신이 달랐다. 하여, 때로 도시간 동맹과 전쟁을 시도하긴 했지만 제국으로 나아가지 않고 각 도시 독자성을 유지했다. 헌데, 수메르 이후 이와 같은 모습을 보여준 이들은 중동에서 페니키아인 외에 없는 것 같다. 그리스 지역은 알파벳 경로를 봐도 페니키아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인드라 추정은 다음과 같다.

   

   

기원 전 오천 년 경, 혹은 그 이전부터 바빌론에 농경문화를 정착시킨 수메르인이다. 헌데, 수메르인에게는 큰 단점이 있으니 군사력이 취약하다는 점이다. 해서, 아무리 고도의 문명도시를 이룩하더라도 순식간에 야만족의 침입을 받아 몰락하는 예가 잦았다. 역사적으로는 기원전 2,300년 전에 아카드어를 쓰는 셈족이 수메르를 정복했다고 나온다. 이때, 셈족은 마치 북방 민족이 중국 문화를 받아들이듯 수메르 문자 체계와 문화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헌데, 이러한 기록은 수메르 문명이 역사에서 사라짐을 의미할 뿐이다. 그 이전에는 침입이 없었을까? 당연히 있었을 것이다. 단지, 기록으로 남지 않거나, 기록을 하더라도 아직 발굴을 안 했거나, 침입 규모가 대대적인 규모가 아니었을 수 있는 것이다.

   

   

이때, 어떤 셈족, 혹은 이민족이 페르시아 만에 있던 수메르 도시를 공격하면서 수메르인더러 일주일 이내에 도시를 비우라고 요구한다. 만일 도시를 내놓지 않는다면, 총공격을 하여 몰살시키겠다고 하는 것이다. 이때, 수메르인은 도시를 내준 뒤 다른 지역으로 이주한다. 하여, 이주한 지역이  레반트 북부 지역인 것이다. 이 시기가 기원 전 3,000년 무렵이다. 역사에서 처음 페니키아인이 자신을 드러낸 셈이다.

   

   

이때, 레반트 북부 지역에 도착한 이들은 여러 부족일 수도 있고, 우르 지역에서 가나안으로 갔던 아브라함처럼 단일한 일족일 수 있다. 허나, 그 일족은 비록 적은 숫자이긴 해도 직계와 방계와 노예를 이끌고 레반트 북부에 도착했으리라 본다. 허나, 이들은 마치 스페인 추방령으로 포르투갈, 네덜란드, 남미로 간 유태인처럼 순식간에 지역 경제를 장악하고, 일족을 번성시켰을 것이다. 하고, 천 년이 흘렀다.

   

   

천 년이 흐른 뒤에 자신을 가나안인으로 인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불과 백여 년이 흘렀음에도 중국 교포들 상당수는 자신을 조선계 중국인으로 인식한다. 마찬가지로 미국 교포나 일본 교포 역시 자신을 한국계 미국인이나 한국계 일본인으로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한국에 거주하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자신을 몽골계 한국인, 베트남계 한국인, 미국계 한국인, 독일계 한국인, 프랑스계 한국인으로 생각한다.

   

이는 지역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서울로 이주해서 한 세대가 흐르면, 자신을 이북인이나 영남인이나 호남인, 충청인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북계 서울인, 영남계 서울인, 호남계 서울인, 충청계 서울인으로 인식한다. 더 나아가 한 세대가 더 흐르면, 특별한 조건이 없다면 서울인인 게다. 다시 말해, 국유본이 지속적으로 외부에서 압력을 행사하지 않는다면, 상당수는 정체성이 사라진다는 이야기다. 허나, 예외가 있다. 개성상인처럼 특별한 사연을 지닌 가문이고, 오래도록 탄압을 받았다면, 다른 이들과 달리 상당 기간 전통을 따를 것이다. 특히, 그 가문이 부자일수록!

   

   

페니키아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직계를 중심으로 한 소수 가문은 수메르 전통을 지키면서 가나안인과의 혼혈을 금하거나 하는 방식으로 페니키아인을 지배했을 것이다. 허나, 애초 방계 출신이거나 노예 출신인 이들은, 또한 직계이더라도 이후 권력 투쟁에 의해 방계가 된 이들은 가나안인들과 천 년간 혼혈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잃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과연 누가 살아남았을까. 수메르인이라고 다 같은 수메르인이 아닐 것이다. 상인 본능이 투철한 자들만이 수메르 사회 권력을 차지했을 것이다. 또한, 페니키아 권력을 장악했을 것이다.

   

   

해서, 페니키아인은 이중적인 모습으로 변모했을 것이다. 겉으로는 천 년이 지나니 가나안인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인 것이다. 이들이 대다수 페니키아인 보통 사람들일 것이다. 허나, 극소수 지배층은 여전히 수메르인이었을 것이다. 아니, 이들 역시 겉으로는 페니키아인이었지만, 수메르인의 전통을 지킨다는 점에서 수메르인인 셈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예언자 이사야가 페니키아인의 몰락에 안타까움을 지녔던 것이다. 구약을 보면, 신에게 선택받은 유태인 우월감이 하늘을 찌르는데, 유독 페니키아인에 대해서만 여러 대목에서 우호적이다. 왜? 왜? 왜? 그건 창세기가 말해준다 하겠다. 바로 이 대목을 회피하기 위해서, 국유본이 의도적으로 가짜 유태인론, 아슈케나지 음모론을 유포시킨 것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왜? 질투를 받지 않으려고. 정확히 말한다면, 동유럽 유태인에게 책임을 물리고, 홀로코스트에 앞장 선 서유럽 유태인인 로스차일드 책임을 면피하려고.

   

   

이러한 전통은 수메르/페니키아인이 카르타고인으로 변모해도 달라지지 않았다. 페니키아인은 수 백 년간 번성하다가 앗시리아인에게 패퇴한 후 식민지였던 카르타고를 거점 지역으로 한다.

   

   

이때, 수메르인은 페니키아인이 되고서도, 혹은 이후 카르타고인, 유태인, 네덜란드인, 미국인이 되고서도 잊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재미있는 수메르인 원칙이 있다.

   

   

무엇인가.

   

   

관리하나, 지배하지는 않는다.

   

   

수메르인은 지배하지 않고자 했다. 이유는 수메르인이 평화적인 민족이어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수익이 나지 않는다는 지극히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다. 한마디로 수메르인은 베니스의 상인 유태인, 샤일록과 같은 수전노였다.

   

   

수메르인이 누구인가. 전 세계를 항해하던 민족이다. 인도와 아프리카는 물론 남미와 태평양 지역까지 탐사했던 민족이다. 오늘날 남아 있는 남미와 태평양 고대 신화는 대부분 수메르인이 만든 신화라고 본다. 마야 문명 역시도 수메르 문명 영향 하에 있다고 본다. 오늘날 국유본이 이 문제를 희석시키고자 마야 문명을 수메르 문명보다 앞서거나 동등하게 하는 건 진실을 은폐할 목적인 게다.

   

   

헌데, 왜 수메르인은 이 지역들을 식민화하지 않았을까. 이유는 간단했다. 식민지 유지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수메르인은 아웃소싱의 천재들이었던 셈이다. 수메르인 사고방식을 한마디로 규정하면 경제 동물이다. 심지어 수메르인은 앗시리아인, 그리스인이 쳐들어올 때조차 앗시리아인, 그리스인과 전쟁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경제적으로 계산했던 것이다. 해서, 그들은 앗시리아인, 그리스인에게 지배받을 동안에도 도시 자치권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골치 아픈 정치나 군사력은 위임한다는 것이다. 군사력이 강한 족속은 경제를 모른다. 반면 자신은 경제를 안다. 타협이 가능한 것이다.

   

   

바로 이런 사고방식에서 특이하게도 다른 문명에서는 볼 수 없는 용병 제도가 발생한 것이다. 이는 전적으로 수메르인에게 기인하는 것이다.

   

   

수메르인은 알렉산더 대왕에게 멸망을 당하기 전까지는 자신의 전통을 지킨 것 같다. 하면, 그 전통이란 무엇인가. 제국을 만들지 말라, 식민지를 건설하지 마라, 정치에 과도하게 개입하지 마라 등등.

   

그런 수메르가 왜 식민지를 만들었을까. 알렉산더의 영향이 크다. 알렉산더는 식민지를 만들면서 피지배층에게 자신의 문화를 전파했을 뿐만 아니라 피지배층의 문화도 흡수했던 것이다. 이것은 남는 장사였다. 해서, 수메르인 역시 알렉산더 식 식민지를 건설했던 것으로 본다.

   

   

헌데, 카르타고가 식민지를 만들면서부터 신의 뜻인지 로마의 공격을 받는다. 카르타고가 식민지를 만드는 방식은 우수했다. 허나, 수전노 카르타고였다. 이에 대항한 체제가 있으니 로마였다. 로마와 카르타고 전쟁에서 승인의 결정적인 요인은 식민지 사람들에 대한 처리 규정이다.

   

   

카르타고는 야박했다. 용병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각종 중과세를 물린 반면 로마는 관대했다. 카르타고는 아무리 성공하더라도 이너서클에 진입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반면 로마는 능력만 있으면 노예에서 황제까지도 가능했다.

   

무엇보다 카르타고는 불신에서 멸망했다. 한니발이 끝내 자결한 것은 로마 제국 때문이 아니라 사태가 불리함을 느끼고, 막바지에 배신을 때린 카르타고 원로원의 밀고 때문이다. 두 명의 행정관이 상징한다. 잘 되면 서로 견제를 할 수 있어 발전을 보장한다. 허나, 위기 시에는 모래알이 되어 서로를 극히 불신하게 만든다. 마치 조선시대 조선통신사로 파견한 동인/서인과 같다. 과두제의 비극이다.

   

로마는 카르타고의 장점을 모조리 흡수했다. 행정관을 두 명으로 하여 세금 포탈 등을 막는 방법하며, 비상대국에는 독재관을 두어 대권을 위임하는 방식도 모두 카르타고, 아니 수메르에서 배운 것이다.

   

   

이제는 이런 비밀을 나열식이 아니라 체계적으로 드러낼 때가 왔다.

   

   

지금이다.

   

   

그것이 인드라이다.

   

   

전 세계에서 오직 하나, 인드라만이 이 문제를 접근할 수 있다.

   

   

허나, 현재까지 어떤 이유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수메르인은 알렉산더 대왕에게 굉장한 불쾌감을 느낀 것 같다. 다시 말하자면, 수메르인이 최초로 자신보다 선진적인 문화를 알렉산더에게서 느낀 것이 아닐까 싶다. 현재까지 인드라가 보기에는, 알렉산더 경쟁력은 기존 도식을 넘어섰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즉, 중동에서는 오래도록 야만족이 힘만 가지고서 대륙을 침략한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북방 민족이 오직 군사력만으로 중국을 침입한다는 것이다. 헌데, 이 도식이 깨졌다. 그 북방 민족이 오히려 선진 문화를 지니고 있다면?

   

   

알렉산더 대왕은 최초의 제국주의자였다. 기존의 대왕들은 그저 식민지 지역을 물리력으로 압도할 따름이지, 정신적으로까지 지배하는 것이 아니었다. 허나, 그것을 알렉산더 대왕이 해냈다. 이것이 인도에 영향을 주어 공사상을 일으키고, 중동에 영향을 주어 수메르족이 카르타고족으로 변모시키게 했던 것이다.

   

왜? 수메르족은 이해타산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하여, 알렉산더 식 식민지 지배 방식은 이전 식민 지배 방식보다 남는 장사였다. 해서, 수메르족은 한노, 혹은 마고 가문을 주축으로 하여 페니키아인에서 카르타고인으로 변모한다.

   

카르타고인은 최초로 식민지를 건설하는데, 바로 그 지역이 오늘날 리비아이다. 그 이전까지 수메르인은 경제 관념에 투철했다. 그 자신은 어떤 땅도 소유할 수 없다고 여겨 아무리 자신보다 미개한 족속이라도 땅을 임차한 뒤 지대를 냈다. 하지만, 알렉산더 대왕 이후로는 땅을 소유하기 시작했다.

   

   

땅을 소유했기에 수메르인이 고난을 받았던 것일까.

   

   

수메르인은 누구보다 식민지 경영에 앞섰다. 오늘날 로마 체계라고 알려진 상당수는 수메르인이 만든 카르타고 제도이다.

   

   

수메르인은 리비아인과 유태인을 대상으로 엄청난 노예제 집단농장 시스템을 만든다. 예서, 로마인보다 못한 점이 무엇일까. 수메르인은 결코 이민족이 자신과 같다고 여기지 않았다. 엄청난 이분법이다. 반면, 로마인은 이민족이 노력해서 결과가 같다면 로마 시민으로 인정했다.

   

   

수메르인은 최초로 독재 시스템을 만들었다. 수메르인 정치 구조는 300인으로 구성한 장로회의가 기본이다. 여기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권한이 있는 귀족이 중심인 자영 농민을 포함한 민회를 개최했다. 허나, 민회란 대부분 허울 좋은 것이기 일쑤였을 만큼 시민 역량이 매우 낮았다. 또한, 300인 원로회, 혹은 장로회가 하원 격이라면, 좀 더 위급한 일을 결정할 때는 오늘날 상원 격인 백인회 혹은 104인회가 판결을 내렸다. 이들은 수메르인 가문 대표자들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더 나아간다면, 장군이었다. 헌데, 이 장군은 영구 보직이었다. 하여, 대외적으로는 군주제처럼 보일 수 있었던 것은 장군이 영구 통치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 예가 한니발이다.

   

   

행정관은 두 명이었다. 임기는 1 년이었음에도 두 명인 것은, 그 기간 동안 해먹지나 않을까 하는 수메르인 서로의 경계심 때문이다. 이 경계심이란 매우 유명하여 한니발을 자살하게 만든 것이 수메르인 원로원이 로마에 밀고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제도로 인해 오늘날 공산 진영에서 두 명의 장교를 파견하지 않는가. 이 모든 건 수메르에서 기원하는 것이 아닌가 보고 있다.

   

수준 높은 문명에 비해 군사력은 턱없이 낮았던 수메르는 씨족장들의 장로회와 일반 시민의 성년남자로 구성되는 민회가 있었다. 헌데, 전쟁과 같은 도시의 사활에 직결되는 상황에서는 일시적으로 도시의 전권이 위임되는 왕이 선출되었다.

   

이러한 전통은 놀랍도록 페니키아/카르타고 정치체제와 일치한다.

   

근거는 셈족이다. 셈족이란 셈어를 쓰는 민족들을 말한다. 셈어에 속한 언어로는 고대와 현대 아카드어(Akkadian), 암하라어(Amharic), 아랍어(Arabic), 아람어(Aramaic), 그으즈어(Ge'ez), 히브리어(Hebrew), 몰타어(Maltese), 페니키아어(Phoenician), 티그레어(Tigre), 티그리냐어(Tigrinya) 등이 있다.

   

여기서 가장 오래된 언어가 아카드어인데, 아카드어는 문자로 수메르어인이 고안한 설형문자를 사용했다. 이 아카드어로 기록한 대표적인 문서가 길가메시 서사시이다.

   

- 졸려서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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