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ER 2> 양심에 쪽팔리지 않는 수준으로 들어라, 재벌을 공중분해한 궁극 책임이 국내 정권에게 있는가, 국유본에게 있는가; 율산, 국제, 현대, 대우, 신동아, SK, 한화 국유본론 2012

2012/09/20 03:14

http://blog.naver.com/miavenus/70147380173

   

   

   

VER 2> 양심에 쪽팔리지 않는 수준으로 들어라,

재벌을 공중분해한 궁극 책임이 국내 권력에게 있는가, 국유본에게 있는가

: 율산, 국제, 현대, 대우, 신동아, SK, 한화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2/09/20

   

   

   

1. 국유본론 관점에서 보는 한국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의 권력구도 역사

   

   

<VER 1> 시대정신은 박근혜이나,

인드라한테 삐져서 국유본 변덕으로 문재인 역전가능성 있다

 http://blog.naver.com/miavenus/70147223762

   

   

이단계 : 전두환에서 노태우까지(1980년에서 1992년까지)

   

정치권력 > 경제권력

   

이 시기의 가장 큰 특징은 외환 자유화였다. 즉, 박정희 시대까지만 해도 단 한푼도 예외가 없을 정도로 외환이 철저하게 통제되었으나,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자 한국 권력층과 재벌은 앞다투어 스위스 은행과 같은 데에 비자금을 예치하였다.

   

이는 박정희 정부가 중도좌파 민족사회주의 빅터 로스차일드 정권이었기에 외환관리를 철저히 하였던 반면, 전두환 정권은 한국 최초의 뉴라이트 정권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박정희 정부가 동학농민혁명에 이은 조선 근대사 두번째 혁명이라 말할 수 있을 만큼 '가난에서 해방되자'는 정통성을 부여받은 혁명을 일으킨 반면  전두환 정권은 국유본 지시하에 불가피하게 아무런 명분없이 쿠테타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전두환 정권은 한국 최초의 신자유주의 정권이다. 대표적인 예로 박정희 정부 때까지는 산별노조였지만, 전두환 정권에 이르러서는 개별 기업노조로 바뀐다. 물론 쪽발이에게 아부하는 어용흡혈노조 교본에는 박정희나 전두환이나 똑같다고 왜곡해서 기술하겠지만, 진실은 어용흡혈노조 설명과 다르다. 여러분이 잘 생각해야 한다. 전두환이 박정희 뒤를 잇고자 했다면 굳이 5공화국이 필요없었고, 광주항쟁이 필요없었고, 박근혜를 왕따시키기는 커녕 이순자와 이혼하고 박근혜와 결혼하겠다는 식으로 나갔어야 했다. 헌데, 전두환은 국유본 지시로 5공화국을 수립했다. 박정희의 중도좌파 민족사회주의 노선과 전두환의 뉴라이트 신자유주의 노선은 달랐기 때문이다.

   

예서, 전두환 정권 특징이 하나 더 있는데, 일본에서 허문도를 수입해서 국풍 81을 일으켰다. 또한, 이 시기에 한단고기 등을 유포시키면서 오늘날 재야사학이라고 부르는, 부정적으로는 '환빠'라고 불리는, 일제가 국유본 지시를 받아 만주를 침략할 때 써먹던 만주사학 짝퉁을 유행시켰다. 쪽발이들이 쪽발돼중이나 쪽발놈현처럼 갑자기 애국자로 변신하는 순간이다. 이들이 개짓거리하는 건 쪽발이가 임나일본부설로 병쉰짓하듯 대륙백제다 뭐다 하는 개씨발짓거리다. 니 애비가 쪽발이니까 이런 병쉰짓하는 거지?

   

뉴라이트, 근본주의, 신자유주의. 이 세 가지가 데이비드 록펠러가 1973년 국유본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이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렀던 전략전술이었다.

   

이러한 시대였기에 박정희보다 전두환 시기가 정치권력이 경제권력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 이유는 신자유주의에 기인한다. 신자유주의란 정치권력보다 경제권력을 보다 신경쓰자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이를 전제하고, 여러분은 다를 바 없다고 말할 수 있을 지 모른다. 가령 율산, 국제, 현대, 대우, SK 예를 들면서 정치권력이 여전히 경제권력에 대해 압도적이지 않느냐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허나, 이는 세간의 평가일 뿐, 진실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는 것이 국유본론 입장이다.

   

   

국제그룹은 5공 시절 재계 순위 7위였다. 헌데, 전두환 정권 시절이던 1985년 2월 21일 제2금융권에서 여신을 회수하는 것을 신호로 그룹이 공중분해됐다. 설은 여러 가지다. 국제그룹의 해체는 946.6%라는 부채비율 때문이었다, 국제그룹 해체 전 총선에서 여당이 부산 지역에서 참패를 했기 때문이다, 청와대에서 열린 기업인 회의에 양정모 회장이 늦게 도착, 전두환 대통령을 몹시 화나게 했기 때문이다, 국제그룹에서 정치자금을 3개월짜리 어음으로 끊어 주었다, 심지어 용산 국제빌딩 풍수가 안 좋다까지.

   

인드라는 강조한다.

정치도 국제정치적 관점으로, 경제도 국제경제적 관점으로 볼 때, 여러분은 진실에 접근할 수 있다.

아니라면,

해방전후 한국 정치가 왜 그리 격동하였는지,

조선 선조가 왜 그리 병쉰짓을 하고 살았는지 평생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부터 국제그룹이 왜 망했나를 인드라가 말하겠다.

양심에 쪽팔리지 않는 수준으로 들어라!

참고로 인드라는 전두환 정권때 전두환 정권에 반대하다 구속되었던 사람이다.

   

    

"[지역산업 新인맥] (11) 성호ㆍ학산 신발 옛명성 2002/11/07 19:14

   

60~80년대 한국 `수출입국(立國)`의 견인차 역할을 했던 부산의 신발 산업. 신발산업 1세대 인맥은 한국전쟁 이후인 50년대 부산에서 시작됐다.

   

국제화학과 태화고무, 삼화고무, 동양고무, 보생고무 등 이른바 1세대 회사들이 창업됐는데 6ㆍ25전쟁 직후 피란민 등으로 풍부해진 부산지역 노동력이 산업 기반이 됐다.

   

신발산업에 가장 적합한 기후조건과 일본이 생산기지를 한국으로 넘겨준 것도 신발입지의 최적지로 자리잡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다.

   

국제화학 등 5개사는 수많은 인재를 양산해내는 사관학교 구실을 하면서 한국신발의 모태가 된다.

국제화학은 창업자인 양태진 회장이 50년대 중반 최대 100개가 넘는 생산라인을 갖춰 세계 제일의 공장을 운영했다.

그의 아들인 양정모 회장은 현재 `프로스펙스` 브랜드의 국제상사를 재창업해 경쟁력을 갖췄으며 양정모 회장 동생 규모 씨도 진양화학을 세워 역시 신발업계에 뛰어들었다.

   

`범표` 삼화고무 김지태 창업자 역시 50년대 대규모 공장을 세우고 신발산업에 진출했는데 그의 아들 영주씨는 부친의 업을 이어받아 상당한 경영수완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는 70년대 말 상경해 서울대를 나온 `유학파`로 업계의 인재였으며 이후 이른바 2, 3세대의 신발업종 경영자들을 배출해 낸 사관학교 구실을 하게 됐다.

   

`기차표` 상표로 유명세를 탄 동양고무는 현재 화승그룹 회장인 현승훈씨의 부친인 현수명씨가 창업해 현재까지 이르고 있는데 창업주 현수명씨 승계자는 아들 수창씨였다. 현재 현승훈 회장은 독립적으로 창업한 경우다.

   

태화고무 김학명 회장은 아들 윤기씨에 이르기까지 신발산업의 대를 이어갔다.

   

이들 1세대에 이어 경영수업을 쌓은 후배들은 60~70년대 들어 본격적 인 부산신발의 중흥기를 준비한다.

   

월남전쟁 당시 국내 미8군에 납품하면서 신발산업은 비로소 수출산업으로 인정받기 시작했으며 이때부터 외화획득이 가능한 산업으로 인정돼 정부에서 갖가지 특혜를 받게 된다.

한국신발은 60년대부터 싼 임금을 기반으로 세계시장의 신발선진국인 일본과 본격적인 경쟁을 시작한다.

70년대 신발 물량이 대폭 증가하면서 국내 업체들이 라인을 늘리고 공장을 확장했다.

70년대 들어 설립된 회사는 세원(회장 김병춘)과 태광실업(회장 박연차)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김병춘 회장은 동양고무를 거쳐 풍영화성 전무 출신의 신발전문가였으며 박연차 회장은 처음 정일산업이라는 회사를 창업해 현재의 태광 실업에 이르고 있다.

두 회사는 2세대 회사로 현재 해외생산기지를 성공적으로 운영해 세계 신발산업을 주도하는 인물들이다.

   

80년대 들어 부산신발은 일본과 같은 저생산성의 운명을 맞게 된다.

동남아와 중국에 경쟁력을 내주면서 이른바 3세대 신발창업자들이 전면에 나서게 되는데 세원 출신 성호실업 권동칠 사장과 삼화 출신 학산의 이원목 사장 등이다.

국제상사 출신 트바스 이균철 사장과 우연 정철상 대표도 3세대로 분류된다.

이들은 일반운동화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보다는 등산화, 테니스화 , 사이클화 등 자기 브랜드로 특수화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부산 = 김성진 기자 sjkim@mk.co.kr>

   

   

[지역산업 新인맥] 태광ㆍ세원ㆍ트렉스타中ㆍ베트남서 승부걸어 2002/11/07 18:31

   

부산신발은 10년 전 산업합리화 업종으로 분류되는 치욕을 겪으면서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치게 된다. 국내에서 노동집약적 산업인 신발이 도저히 경쟁력을 갖출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게 되면서 대형업체들을 중심으로 해외이전을 본격화 했다.

   

   

대표적인 기업이 태광실업과 세원, 트렉스타 등이다.

태광실업(회장 박연차)은 94년 베트남에 진출해 현재까지 세계 최고 브랜드인 '나이키'를 생산 대행하고 있다.

태광 베트남공장은 1만2000명의 인원과 연간 1억4000만달러의 생산액 , 연간 800만족을 생산한다.

이 회사는 김해 본사와 완전한 디지털화를 이뤄 베트남 현지에서의 생산과정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첨단시설을 자랑하고 있다.

   

세원도 95년 중국 칭다오에 성공적으로 진출해 역시 나이키 브랜드를 생산하고 있는데 생산능력은 연간 500만족이다. 부산 본사는 기획분야 등 핵심업무를 수행하고 중국은 생산기지로서 역할을 분담하는 체제로 성공적인 해외진출의 표본이 되고 있다.

   

트렉스타 브랜드를 생산하는 성호실업은 95년과 2000년 각각 중국 1 공장과 2 공장을 설립했다.

성호실업 중국공장은 고용인원 5600여 명이 연간 7000만달러 이상의 생산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성호는 자체상표 트렉스타를 키워 세계시장을 공략하고 있는데 최근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인라인 스케이트화도 중국에서 생산한다.

   

중국이 세계시장의 생산기지를 충실히 하고 있는 전형적인 사례를 만들어 냈다. <부산 = 김성진 기자 sjkim@mk.co.kr>

   

   

[지역산업 新인맥] 삼화ㆍ동양고무 출신신발 인맥 '뿌리' 2002/11/07 18:25

   

부산신발의 인맥은 삼화고무와 동양고무 계보로 크게 나뉘어진다.

   

삼화고무는 1950년 중반 부산 범천동 일대에서 김지태 회장이 창업해 최고 근무인원이 1만명을 넘을 정도로 부산신발의 대표적인 간판기업이었다.

삼화 출신으로는 현재 국내 테니스화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학산 이원목 사장을 우선 들 수 있다.

   

이 사장은 고려대를 졸업하고 삼화고무에서 직장생활을 해 신발업계 경영을 익혔으며 88년 독립해 현재의 학산을 설립했다.

   

삼화고무 출신으로 창신아이엔씨(옛 대신교역) 정환일 사장도 대표적인 인물이다.

   

최대 기업인 태광실업 박용길 부회장과 박춘택 사장도 삼화 출신의 대표적인 인물로 퇴직 후 새로운 둥지에서 전성기를 맞이한 인물이다 .

   

현재 화승그룹의 모태가 된 동양고무는 1953년 설립됐으며 인맥들이 현재 화승그룹에 많이 근무하고 있다.

화승 서진석 부회장과 손기창 화승그룹 부회장이 동양고무 출신으로 '기차표' 브랜드를 탄생시킨 주역이다.

   

성공적으로 중국에 진출해 나이키 브랜드를 생산하고 있는 세원 김병춘 회장도 해양대 졸업 후 동양고무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부산 = 김성진 기자>

   

   

부산신발의 쇄락은 노동쟁의와 바이어 이탈이 원인 2002/11/07 13:59

   

부산의 신발산업은 80년대 말 불어닥친 노동쟁의와 90년대초 '신발산업 합리화' 조치의 파고를 넘지 못하고 수많은 회사들이 역사의 뒤안 길로 사라졌다.

   

삼화고무를 비롯한 초기 회사들은 이 시기에 대거 문을 닫았으며 수 많은 크고 작은 회사들이 경쟁력을 잃었다.

그러나 생산기지를 중국과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로 옮긴 회사 들은 제조부분에서 경쟁력을 갖춰 나갔는데 OEM의 완전탈피가 여전히 큰 숙제로 남아있다.

   

업계에서는 부산신발이 30여년간의 세계 1위의 명성을 뒤로하고 중국 등 후진국에 자리를 내준 것에 여러가지 이유를 댄다.

   

부산신발은 1980년대 중반 부터 뚜렷한 하락세를 나타냈다.

최고 생산실적을 보였던 1986년에 국제상사가 1만5700명의 종업원을 보유한 것을 비롯해 동양고무 1만2650명, 삼화 9200명, 태화 8600명, 진양고무 7000명 등 5대업체가 모두 5만4000명이 넘는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했다.

   

그러나 80년대 후반기에 노동운동과 임금인상 압력 파고를 넘지 못하고 메이저급 회사들의 도산이 잇따르게 된다. 80년대 말 부터 90년대 초까지 삼화, 진양, 태화, 동양 등 대규모 회사들이 도산했으며 국제상사도 라인을 대폭 줄일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1992년 정부로부터 발표된 신발합리화 정책은 부산의 신발산업을 정리의 대상으로 인식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그 이후 탈(脫) 부산 러시를 이룬 부산신발은 중국과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지로 생산기지를 대거 이전했다.

부산신발의 쇄락에 대해 업계 관계자는 "80년대 중반부터 대형 신발회사들이 독자브랜드를 가지려고 움직임을 보이자 그것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의 브랜드들이 물량을 줄였던 것이 주요 요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부산의 신발산업은 이른바 주문자 부착방식의 OEM체제를 벗어나 르까프와 프로스펙스, 트렉스타, 비트로 등의 독자브랜드를 성공적으로 출현시켜 새로운 중흥기를 모색하고 있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 다.

   

부산신발산업 개성공단 진출 가시화 기대 2002/11/03 09:00

   

내년말까지 북한의 개성공단 1단계 100만평을 개발하기로 합의됨에 따라 부산 신발산업의 북한진출이 가시화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 고 있다.

   

3일 부산 신발업계에 따르면 현대아산이 개발할 총 2천만평의 개성공단 가운데 내년말까지 100만평을 우선 개발하면서 노동집약적인 산업을 우선 입주시킬 경우 대표적인 노동집약산업인 신발이 가장 유리하다는 것이다.

수년전부터 현대아산과 북한진출을 협의해온 부산 신발지식산업협동조합이 최근 200여개 업체들을 대상으로 개성공단 진출 여부를 조사한 결과 100여개 업체가 15만 평의 공장부지를 희망한 것으로 나타났다.

   

신발지식조합은 업체별로 원하는 공장부지 면적과 생산품목 투자규모 등을 파악한 뒤 현대아산측과 협의를 거쳐 개성공단에 대규모 신발단지를 조성한다는 계획이다.

부산신발업계는 개성공단은 지리적으로 가까워 물류비가 절감되는데다 언어소통에 문제가 없어 기반시설만 갖춰지면 동남아보다 훨씬 유리하다는 판단을 하고 있다.

   

부산은 1990년대 초반까지만해도 세계최대의 신발생산기지였으나 인건비 상승 등으로 인해 해외 바이어들이 떠나면서 대형 업체들이 대부분 도산하거나 생산기지를 해외로 옮긴 상태고 현재는 중소 완제품업체와 부품업체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북한에 대규모 신발산업단지가 조성되면 부산은 제품기획과 핵심 원부자재 생산을 담당하고 개성공단은 값싼 노동력을 무기로 완제품 생산을 맡는 분업이 이뤄지면 충분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 업계의 분석이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아직 개성공단 조성계획이 완전히 구체화된 것은 아닌데다 북한의 산업기반시설이 매우 낙후 또는 미비해 섣부른 낙관은 이르다는 지적도 하고 있다.

   

모 신발업체 관계자는 "북한의 인건비가 동남아보다 높은 수준에서 결정되거나 기반시설 구축이 늦어질 경우 신발생산기지로서 매력이 반감될 수 있다"며 "이 부분 에 대해 신중한 접근이 필요할 것으로 본다"고 조심스런 입장을 보였다.

lyh9502@yonhapnews.net (부산=연합뉴스) 이영희기자"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 ··· aachheq0

   

국제그룹의 몰락은 전두환 때문이 아니라 국유본 지시 때문이다.

   

하나, 국유본은 1980년대부터 중국의 개혁개방정책을 결정하였다. 결정하였으니 중국이 경제발전해야 했다. 하여, 국유본은 첫번째로 동남아시아 화교자본더러 중국에 자본을 투자하도록 지시했다. 그 이전까지 국유본은 미국, 유럽, 일본 등에만 자본을 투자했다. 동남아시아 화교자본은 국유본 마약자금을 중간단계에서 세탁한 자본이다. 두번째로는 중국을 생산기지로 만들어야 했다. 이를 위해서는 신발산업 같은 노동집약형 경공업 산업이 유리했다. 중국이 당대 과장해서 말해 물값보다 싼 가격이 노동력이었으니까. 세번째로는 신발산업에 경쟁력이 있는 업체를 죽여야 했다. 그것이 국제그룹이다. 국제그룹은 국내 1위 신발 회사였으니까.

   

둘, 산업합리화도 한 몫을 한다. 산업합리화란 과잉생산을 이유로 중복투자한 산업을 통합하는 것이다. 언론 통폐합도 유사한 취지인 게다. 이는 석유파동을 통과하면서 박정희의 민족사회주의 정책 대안으로 신자유주의가 등장한 데도 원인이 있다. 신자유주의 전도사, 천재 김재익을 생각하면 될 일이다. 다른 말로 성장억제 정책이다. 성장억제 정책, 어디서 들어봤나. 그렇다. 삼성 이건희가 동경선언을 하게 한 동인인 것이 성장억제 정책이었다. 전두환은 성장억제 정책을 취했고, 저부가가치산업에서 고부가가치산업으로의 전환을 꾀했던 것이다. 당시 울산, 포항, 여수, 창원 등에서는 기계, 조선, 전자류 중공업산업으로 재편하여 떠오르는 해였지만, 부산은 여전히 신발고무 경공업 등 사양산업을 고수하며 스스로 저무는 해이기를 자청했다.

   

여기에는 쪽발지태와 같은 병쉰색희들이 토호로 작용했던 것이 원인으로 지적할 수 있다. 쪽발놈현 같은 병쉰색희가 쪽발지태 장학생이자 쪽발지태 땅소송 반환 변호사라는 악질쪽발짓거리를 했으니 더 할 말이 없다. 이후 쪽발이들이 쪽발지태는 되고, 우리는 왜 안 되냐고 계속 땅소송중이다. 쪽발민주당이 존재하는 한, 쪽발영표, 쪽발미경, 쪽발기남 같은 쪽발이 색희들이 정치 중심인 한, 그들의 땅소송이 계속될 것이다. 쪽발타도투쟁은 생명을 건 투쟁이며, 오늘날 한국에서 모든 것에 우선하는 투쟁이다.

   

전두환 정권으로서도 국유본 지시가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삼성 반도체와 같은 산업을 키우고, 그 대가로 신발산업 따위란 중국에 넘겨주어야 윈윈하지 않겠느냐는 지시를 받았을 때, 전두환은 중국 관계자와 만나 한국이 당신들을 위해 희생하니 지금은 아니더라도 노태우 때 국교 수립하자고 제안할 수 있는 것이다. 629가 국유본 작품이자 전두환 작품이듯, 한중 국교 수립 역시 국유본 작품이자 전두환 작품이라고 보는 것이 인드라 입장이다.

   

셋, 국제그룹 자체의 문제다. 국제그룹이 그간 정치권을 잘 몰랐다? 니검마조지나건빵이다. 해방 직후 적산불하받아 후일 쪽발지태와 함께 '한반도 인민의 영원한 개씨발놈', 박연차 씹색희로 대표할 수 있는 쪽발놈현으로 계보가 이어진 삼화 인맥과 동양 인맥과 더불어 부산 경제를 움직인 양태진이 누구인데?

   

또한, 양태진, 양정모가 박정희 때 정경유착하지 않고, 어떻게 1962년부터 수출이 가능했던 것일까? 이 시기는 국유본이 쪽발일성 대신 박정희를 선택한 시점, 1960년대 후반 중화학공업 결정과 달리 미일안보조약과 같은 엔블록권과 베트남전쟁을 위해서 한국의 경공업 발전을 승인하였던 시점이다. 이때, 박정희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막을 수 있었는데?

   

결국 정리하면, 국유본이 전략적으로 결정하고, 전두환 정권이 시범케이스로 지시를 받아 국제그룹을 불가피하게 정리한 건 분명하다. 허나, 이는 국제그룹이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고 방만한 경영 운영을 한 것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삼박자가 어울렸기에 일타삼피로 국제그룹 공중분해가 불가피했던 것이다.

   

이는 1980년대 후반 공해산업인 고무신발산업이 몰락한 데서도 찾아볼 수 있다. 1980년대 초반부터 중국 신발고무산업이 공해산업임에도 무섭게 컸다. 또한, 1980년대 후반 한국은 노동쟁의로 설 자리를 찾지 못한 고무신발산업이 대거 중국으로 공장 이전했다. 노동쟁의, 중국 저임금 상품 공세, 근시안적인 안목으로 쪽발지태를 비롯한 상당수 병쉰기업들이 무너졌다. 외압으로 무너졌다 생각하나? 쪽발지태 병쉰색희 같은 넘이 무슨 경영 안목이 있겠냐? 쪽발이 주제에. 허나, 쪽발놈현 병쉰색희가 가장 존경한 건 독립운동가 김구선생이나 조만식선생이 아니라 일제 때 쪽발이짓으로 한반도 인민을 착취한 쪽발지태였던 것이다. 차라리 쪽발놈현이 대통령이 되지 않았다면 그냥 묻힐 수도 있었는데, 용서가 되겠냐. 악마가 천사처럼 행세하는 꼴을 보아야 하겠는가. 분노가 일어나지 않는가. 허나, 자제하자. 

 

혁명은 단순한 감정의 산물이 아니다. 차분해야 한다. 이 말도 안 되는 기원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국유본이다.

   

국유본이 아무렇게나 타켓을 찍었겠냐?

   

아직도 국제그룹 몰락을 단지 전두환의 사심이 작동했기 때문이라는 쪽발찌라시 여론을 믿을 것인가?

   

하면, 여러분은 박정희 때의 율산을 생각할 것이다.

   

율산은 과연 소문대로 호남 차별인가?

역시 니검마떡보지되시겠다.

   

인드라의 국유본론을 읽으면서 '국유본 떡밥으로부터의 해방'을 만끽하며 조용히 평안을 얻을 지어다.

   

   

"<1979년 율산그룹의 몰락>

   

1

   

'율산(栗山)의 젊은이들'

   

1975년 6월 17일, 율산그룹의 모체인 율산실업은 신선호(申善浩·당시 27세)씨와 그의 경기고교 동창들에 의해 설립됐다. 자본금은 고작 1백만원.

   

율산의 창립초기에는 시멘트 등의 중동수출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했다. 이점은 율산 보다 뒤늦게 설립됐다가 더 빨리 물거품처럼 사라졌던 제세산업(制世産業), 원기업(元企業) 등과 맥을 같이 한다.

   

신선호씨가 사우디아라비아에 시멘트수출로 큰 재미를 볼 수 있었던 데는 물리학박사인 맏형 은호(殷浩)씨와 친한 사우디 왕자의 도움이 크게 작용했다는 얘기도 있고, 원기업(元企業)의 원길남(元吉男)씨와 손을 잡았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다.

   

어쨌든 율산이 재계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은 같은 해 3백40만 달러의 수출실적을 올리고 신진(新進)알미늄을 인수하고부터였다.

   

곧이어 금용해운(金龍海運), 동원건설(東源建設)을 잇달아 인수하고 1976년 4천3백만 달러, 1977년 1억6천5백만 달러를 수출, 1978년에는 종합무역상사로 발돋움했다.

   

1977년 12월 5일에는 서울신탁은행으로부터 연리 9%의 저리수출금융 10억원을 대출 받아 자기돈 한푼 안들이고 기존기업 하나를 인수하여 율산해운을 탄생시켰다.

   

율산실업을 비롯 율산건설, 율산알미늄, 광성피혁(光星皮革), 경흥물산(京興物産), 율산전자, 율산해운, 율산중공, 호텔내장산, 율산제화, 유신관광(有信觀光), 동아공업 등 14개 회사를 거느려 외형상 '그룹'의 형태를 갖추는데는 성공했다.

   

율산그룹의 경영진은 우리 나라의 모든 재벌기업이 다 그렇듯이 창업자와의 학연, 지연 등으로 인연이 닿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앙기획본부장인 정문수(丁文秀·창업당시 25세)씨는 신선호씨의 경기고 1년 후배이고, 자금담당이사 경흥물산 전무인 강동원(姜東元·창업당시 26세)씨는 광주서중 동창이면서 율산그룹의 모체가 된 오퍼상시절부터 신씨와 함께 고락을 함께 해온 창업동지이다.

   

강씨와 함께 율산실업의 신태승(申泰升), 최안준(崔晏準)씨도 모두 창업멤버다. 이중 최씨도 광주서중 동기동창생.

   

신 사장의 장인인 부완혁(夫琓爀·회장)씨와 상공부차관보를 지낸 이문홍(李文弘·부사장)씨 등은 율산이 재벌의 면모를 갖추고 난 뒤 참여한 멤버들이지만 신 사장의 경기고교 선배들이다.

   

부완혁 회장과 이문홍 부사장 등은 표면상 율산의 수뇌부에 속해 있었지만 회사 내에서의 영향력에 있어서는 정문수, 강동원씨 등 직제상의 하급 경영자들보다 크게 뒤졌다고 한다.

   

이 때문에 경영층 내부의 불협화음이 가끔 회사 밖으로 전해지기도 했으며 이것이 율산호의 침몰을 가속화시켰다는 지적도 있다.

   

어쨌든 부완혁씨와 이문홍씨는 율산사건이 신 사장의 구속으로 확대되기 전에 사실상 율산을 떠났다.

   

임원진 중에 경기고나 서울대 출신으로 신 사장과 동문관계에 있는 경영자가 절반선에 육박한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점이다.

   

이 같은 경영진의 인적구성은 다같이 경기고교와 서울공대를 나온 제세산업의 이창우(李彰雨)씨와 마찬가지로 신 사장이 지연보다 학벌에 더 중점을 두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최고경영자가 젊은 창업자이거나 2세일수록 강한 학벌위주는 50대 이상의 기업인이 이끄는 경영진의 지연중심과 대조적인 것이다.

   

   

2

   

그러나 뿌리가 깊지 않은 율산에게는 웬만한 비바람이 불어 처도 뿌리째 흔들리게 마련이다.

   

율산이 위험하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한 것은 제세산업이 도산하기 훨씬 전인 1978년 7월경부터였다. 율산이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추방될지도 모른다는 풍문이 단자회사와 사채업자들 사이에 나돌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자금사정의 악화가 표면화되었다.

   

이 같은 풍문은 율산이 외국인의 도소매행위를 금지하고 있는 사우디 아라비아의 국내법을 어겼기 때문에 비롯됐다.

   

율산 관계자들은, "현지직원 1명이 사우디 아라비아 관리들 함정단속에 걸려들었기 때문에 약간의 문제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경미한 사건에 불과하다"고 해명하고 다녔지만, 소문이 돌면서 1978년 8월이후 단자회사의 어음할인한도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벌금을 내는 것으로 완결되었던 이 사건이 없었다면 율산의 자금사정이 그토록 급하게 막히지는 않았을 것이고 어쩌면 그처럼 급하게 몰락의 길로 치닫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단자회사와 사채시장에서 자금융통이 막히는 것과 비슷한 시기에 부동산 붐이 8·8투기억제조치로 급격하게 식기 시작했다는 것도 율산에게는 불운이었다.

   

1979년 1월 25일, 이상한 사건이 발생했다. 하오 2시 30분쯤 경제기획원(지금의 광화문앞 ) 정문 앞에서 모고위기관을 사칭한 20대 괴한 3명에게 승용차로 납치 당했다가 55분만에 경부고속도로 양재 톨게이트에서 극적으로 탈출했다.

   

이 사건에 대해서 소문이 무성했다. 사업자금난으로 궁지에 몰리자 이를 모면하려는 자작극이라는 것이다. 어쨌든 이때로부터 신 사장은 하향길로 줄달음치고 있었다.

   

1979년 3월, 박정희 대통령의 비서실장이었던 김정렴(金正濂)씨가 10년만에 청와대를 떠나 주일대사로 나갔다. 그리고 남덕우(南悳祐) 경제기획원장과 김용환(金龍煥) 재무부장관까지 갱질 되어 3명의 경제팀이 교체된 셈이다.

   

그 즈음에 청와대 사정당국자에게 이상한 첩보가 날라들었다.

   

   

"신선호의 처 부정애(夫貞愛)씨가 거액 도박을 한다. 강남에 있는 수억 원대 호화주택이 그의 것이다."

당시 청와대 사정당국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우선 치안본부에 특수수사대를 편성케 하여 장악한 수사력과 국세청을 동원한 탈세조사, 그리고 은행감독원 검사원을 이용한 은행계좌 즉, 자금추적을 지휘하고, 검찰의 지원까지 받는 등 권력이 무소불위(無所不爲)였다.

즉각 수사팀이 구성되고 국세청 조사원이 투입되어 첩보내용을 중심으로 내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부정애가 도박을 한 사실도 인지된 것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거주하는 주택도 그리 호화스럽지도 않다는 후문이다. 국세청 조사원도 이렇다할 탈세사실을 적발하지 못했다.

   

어쨌든 청와대사정당국자는 율산그룹 처리에 몰두하게 된다. 이미 극심한 자금난을 겪고 있으며 이로 인하여 은행의 감리단이 파견되었고, 경영부실이 국민의 눈에 비취고 있는데 물러설 수는 없었다.

   

특수수사대는 3월 20일 신선호 사장을 불러 드렸다. 이에 앞서 율산그룹의 장부도 압수했으며, 융자해준 시중은행에 대해서도 조사가 이루어 졌다.

   

신선호 사장을 구속수사를 함으로써 율산그룹으로부터 손을 떼게 하고 이 사건을 마무리하려는 의지가 사정당국자에게 있었을는지 모른다.

   

사정당국자에 의해서 작성된 율산사건 보고서는 대통령에게 보고되고, 대책의 하나로서 신선호 사장을 구속한다는 내신이 담겨 있었다.

   

4월 3일. 특수수사대에 파견되어온 주광일 심재윤 두 검사는 율산그룹 총수 신선호 사장을 업무상횡령과 외환관리법 위반 혐의로 서울 구치소에 구속 수감하게 된다.

   

구속사유는 이렇다.

'1975년 6월 17일 1백만원의 자본금으로 율산실업을 세운 이래 1978년말까지 총자본금 1백억원에 이르는 14개 계열회사와 37개 해외지사에 8천3백여명의 회사원을 거느리는 대기업으로 성장해 오는 과정에서

   

일반융자금, 수출융자금 해외공사선수금 등을 그룹산하 계열사에 제대로 입금시키지 않고 가지급금 형식으로 변태지출, 다른 회사를 잇달아 흡수합병, 인수하거나 증자하는데 사용하는 방법으로 지난 3년동안 134차례에 걸쳐 회사돈 1백5억여원을 빼돌려 회사자본금의 89%를 자신의 개인재산으로 만들었다.

   

또 그룹산하 회사원들의 해외출장비를 실제 지급액보다 10%정도 많게 책정, 그 차액인 7만3천여 달러를 빼돌린 다음 이를 금융기관 등에 보관하거나 등록하지 않고 자신의 사무실에 보관했다.'

   

3

   

율산그룹의 총수 신선호(申善浩)씨가 구속됐다는 기사가 신문, 방송을 타고 퍼져 나갔다. 한때 젊은이들의 부러움을 샀던 그의 구속은 단순히 한 기업의 성쇠라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해묵은 고질적인 기업풍토와 특혜금융의 문제점을 또 들어낸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온 국민의 관심을 모았다.

   

여론은 율산의 도덕적 해이냐 정부권력층의 구조적 과오냐 두갈래로 나누어지고 있다.

   

먼저 주간조선 논설위원 김성두(金成斗)씨가 쓴 '누가 율산을 욕할 것인가 ?'를 보자.

   

"원리적으로 따저 기업인이 애국애족하며 사회에 봉사하기 위해 기업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큰 오해이다. 기업인들은 산업훈장을 타기 위해 기업활동에 전념하는 것도 아니고 수출목표달성을 위해 기업활동에 전념하는 것도 아니다. 기업인이 기업 하는 목적은 하나에서 열까지 돈을 벌 자는데 있다.

   

돈벌이가 가능한 한에 있어서 수단방법의 윤리성이 큰 문제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원리적으로는 그렇다. 당초부터 반사회적이며 비도덕적인 업종을 택해 출발하는 기업들도 우리 주변에는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만큼이나 많다.

   

그 '왕성한 기업의욕'을 사회경제의 발전을 위해 소망스러운 방향으로 유도하고 반사회적인 해악을 배제하도록 하는 것은 사회제도가 할 일이요, 정치권력이 담당해야 할 과제이다.

   

율산사건은 이 권력(權力)이 담당해야 할 중차대한 과제를 얼마나 소홀히 하고 허술하게 수행해 온 것인지를 단적으로 입증하는 것이다. 기업인의 사회적 책임의식을 믿고 귀중한 국가 재산을 집중 공급한 위에 그렇게 허술하게 내맡겨 둔 것인지는 몰라도 기업인의 사회적 책임을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이지 기업인이 스스로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국회재무위에서 신상우(辛相佑)위원의 발언을 보자.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國富論)에 보면 재미있는 얘기가 한 구절 있습니다. '우리가 저녁을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것은 푸줏간이나 양조장이나 빵집의 자비심을 믿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자신의 이익을 스스로 돌 볼 것이라는 그 믿음 때문에 우리가 저녁을 안심하고 먹을 수 있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이것은 소위 자본주의 체제가 갖는 그 나름대로의 하나의 합리성을 의미하는 것인데 곧 개인의 이익이 국가의 부가 된다는 뜻이 올시다.

   

때문에 이번 율산사건을 계기로 보면 이러한 자본주의 경제체제하의 하나의 그러한 구실을 빙자해 가지고 권력만 가지면 돈을 버는 것은 막연하나마 나라의 부(富)로서 연결된다고 하는 이런 추상적인 관념만 가지고 권력의 보호 속에서 돈만 벌면 그만 이라는 오만불손한 생각이 표출된 사건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4

   

김치열 검찰총장에 의해서 율산그룹 간부, 과다 융자한 시중은행, 이를 묵과한 여신관리당국인 은행감독원, 금융정책당국인 재무부를 비롯한 정부관계부처 등 관련자에 대한 전면수사로 확대하게 된다.

   

그래서 서울지검 특수부를 중심으로 수사지휘권을 확보하였고, 강달수 서울지검 제3차장 등 4명이 맡고 있는 수사본부를 보강해 7명의 검사가 이 사건을 맡았다.

   

그리고 치안본부 특수수사대에는 윤종수 특수1부장검사를 비롯, 보강된 홍함표, 이건개, 이종찬, 이상현 검사가 파견된다. 한편 사정당국의 지휘를 받던 각 기관의 요원들도 이에 편성시켰다.

   

4월 12일 오후, 1주일동안 수사를 진행한 검찰은 중간보고서를 작성하여 대통령에게 보고한다. 보고 받은 대통령은 금융부조리의 진상과 실태에 대해 크게 노했고, 이 자리에 참석했던 고위관계자들이 관련자들에 대한 단호한 문책 방침을 굳히게 되었다.

   

이에 재무장관은 12시에 은행집회소에 은행장들을 모아 놓고 격려를 했는데, 2시에 청와대에 갔다가 5시에 돌아와 조진희(趙晉熙) 은행감독원에게 정부의 방침을 전달, 전격적으로 홍윤섭(洪允燮) 주거래 서울신탁은행장, 김정호(金正浩) 부거래 한일은행장, 홍승환(洪承煥) 제일은행장 등 3명의 사표를 전격 수리하였다.

   

대한민국 주식회사 사장인 대통령이 재채기하니, 재무부장관은 감기 들고, 하수인 은행장은 앓아 눕는 격이다.

   

율산그룹에 대한 부정대출의 책임자를 구속한다는 방침을 굳힌 검찰은 4월 13일 오전, 상업은행장을 제외한 4개 시중은행장을 한꺼번에 소환, 12시간에 걸쳐 마라돈 심문을 했다.

   

누가 구속되느냐 ? 국민의 초유의 관심은 검찰에 모아졌고, 서소문 검찰청사 15층 조사실에는 불이 밤새도록 환하게 밝혀졌다. 그리고 수많은 사진기자는 15층 입구 철문앞 복도에서 밤을 맞고 있었다.

   

특수수사대에 파견되었던 홍함표, 이종찬, 이건개, 이상현 검사가 4개 시중은행장을 각각 맡아 심문하였다.

   

홍종수 부장검사와 홍함표 검사가 홍윤섭 행장을 구속하려한다고 '세 홍씨 시리즈'라고 우수게 소리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홍윤섭행장에 대한 심문은 이상현 검사가 맡았다. 이 검사는 상업은행 출신으로 검사중 가장 금융에 밝았다. 본래 그가 접근하는 방법은 기업분석기법이었다.

   

4월 14일 12시 40분. 서울신탁은행장 홍윤섭씨는 업무상배임혐의로, 율산그룹의 창업멤버이며 종합기획본부장인 정문수씨를 외환관리법위반 및 업무상횡령혐의로 각각 구속하였다.

   

구속사유는 이렇다.

   

"은행장 홍윤섭은 1978년 9월 율산그룹이 극도의 자금압박을 받아 도산 위기에 처했을 때 한일은행 김정호 행장, 조흥은행 이동수 행장, 제일은행 홍승환 행장 등을 모아 구제금융회의를 열고 무담보로 특혜금융 1차 30억원 2차 40억원 도합 70억원을 지원해 주었다.'

   

그 회의과정에서 홍행장은 율산이 사우디 아라비아 주택성(MOH)과 계약한 3억 달러 공사가 취소된 줄 알면서도 앞의 세 은행장에게 마치 이 사실이 있는 것같이 이야기했고, 또 율산이 재무구조가 악화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양호하다고 기망을 했다."

   

은행에 손실을 끼쳤다는 내용은 없다. 도산을 알고도 대출해 준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은행장 하나를 속죄양으로 이 사건을 마무리하려는 셈이다.

   

   

5

   

4월 27일, 국회가 폐회한지 10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재무위가 갑작스럽게 소집되었다. 그 동안 여러 차례 여야 총무회담이 있었고, 2일간 상임위를 개최하도록 합의하는 과정이 있기는 했지만.

   

재무위 위원 21명 전원이, 재무위원아닌 의원도 20명이나 출석하였다. 또 이 자리에는 재무부 장관 김원기(金元基)씨를 비롯한 국장급 이상 전원, 국세청장 김수학(金壽鶴)씨와 간부전원, 그리고 신병현(申秉鉉) 한은 총재와 조진희 은행감독원장이 출석하였다.

   

그런데 재무위 초두부터 말만 무성했지 무엇하나 풀리는 것이 없었다.

   

이 사건을 정치권력의 개입에 의한 특혜부조리로 간주하여 정치문제화 시키려던 야당과 단순한 금융제도상의 모순에서 야기된 사건으로 다루려는 여당의 입장은 처음 출발부터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야당이 개회벽두부터 이 사건을 다루기 위해서는 김원기 재무장관 외에 남덕우 전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김용환 전 재무장관 김정렴 전 청와대비서실을 증인으로 출두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근거도 바로 금융에 대한 권력의 개입여부를 캐기 위한 것이었다. 이 같은 여야의 팽팽한 주장은 증인출석을 둘러싼 문제에서부터 첫 대결을 벌였다.

   

김승목(金承穆)위원은 의사진행발언을 통해, 은행장 임의대로 이 막대한 돈이 대출될 수 있었는지 전 경제 팀이 국회에 나와서 증언을 해주어야 하다고 주장했다.

   

"이 율산 문제라고 하는 것은 성격상으로 규정짓는다면 저는 이 문제가 건국이래 유래 없는 중대한 부정사건임과 동시에 국민적 공분을 사는 사건이다 이렇게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관치금융체제하에서 은행이 자율기능을 잃은 지 오래인데 이 율산에 대한 변칙금융이 있을 수 있는 것이 결과를 금융인 에게만 뒤집어 씌어 가지고 금융인을 제물로 삼는 것은 정책당국자는 시정을 해야 되지 않겠느냐, 그리고 그 이면을 가려야 되지 않겠느냐, 그래서 은행장 뒤에서 이것을 시켜서 한 것이 있다 이거예요."

   

이에 대하여 공화당의 구범모(具範模)위원은, 율산사건의 본질은 수출주도형의 경제성장정책에 의해 빚어진 것으로 권력이 작용했거나 장관이 개입한 것이 아니라며 종합무역상사나 기업이 악용만 하려 든다면 이 같은 사태는 언제든지 재발할 가능성이 현제도에 있다고 지적하고 이 같은 제도적 허점을 어떻게 보완하느냐가 급선무라고 말했다.

   

결국 여야의 찬반토론 끝에 이 출석요구 안은 여당의 반대로 찬성 7, 반대 12, 기권 1로 부결되고 말았다.

   

호남출신 일부 위원들은 질문과정에서 율산이 호남인의 기업이기 때문에 당한 것이 아니냐는 항간의 오해가 있다는 것을 소개했다.

   

담양, 곡성, 화순 출신 신민당 고재청(高在淸)위원의 발언내용.

   

"그러나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정치권력의 소지관계로 인해서 그러는지 또는 세간에 말하고 있는 금융인맥상에 있어서 여기에서 그러한 비운을 맛보게 되었는지도 모르겠거니와 또한 율산기업이 많은 세상 사람들이 얘기하고 있는 전라도 기업이기 때문에 이렇게 구제금융을 받지 못하고 침몰 파산했다는 많은 항간의 예기에 대해서 장관은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가 ?"

   

한편 해남, 진도출신 민정회 임영득(任煐得)위원.

   

"율산실업은 분명히 호남인의 기업이었습니다. 때문에 지금 이 재무위원회에서 따지고 있는 것과는 반대로 우리 호남지역에 가면 왜 하필이면 율산실업이 얻어 맞아야 되느냐 많은 종합상사들이 그러한 수출금융을 악용하고 있는 일이 얼마든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율산만이 얻어 맞아야 되느냐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분개하고 있는 그런 일부의 여론이 있습니다. "

   

국민들의 비상한 관심속에 율산금융부정사건을 다루기 위해 소집된 국회재무위는 국민의 궁금증을 속시원하게 풀어주지 못한채 아쉬운 이틀간의 회기를 모두 끝냈다.

   

거액의 금융특혜이면을 샅샅이 파헤쳐보겠다던 야당의 으름짱은 증인출두요구와 특별위원회의 구성요구결의안이 모두 부결돼 버림으로써 아무런 결실도 보지 못했다.

   

   

6

   

율산사건에 관련된 공직자가 수백명이 된다는 소문이 퍼져 나갔다.

제102회 제4차 국회본회의 질의 내용에 대한 답변.

   

한병채(韓柄寀)의원은 율산실업에 관련해서 수뢰한 공무원 150명의 처리결과를 밝히라고 질의했다. 이에 대한 김치열(金致烈) 법무장관의 답변을 들어보자.

   

"국무총리에게 질의하신 사실을 제가 답변 드리게 된 것을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저는 150명의 공무원이 수뢰했다 하는 근거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율산실업사건이 발생했을 때에 그 규모가 너무나 충격적이기 때문에 검찰로서는 수사 또는 비밀구좌의 유무 각 방면의 수사를 다 했습니다. 그 결과 관련 공무원이 11명 있었습니다. 수사는 20여명이 했습니다마는 그 중에서 밝혀진 것이 11명인데 그 사람들이 받은 돈은 5만원 내지 50만원입니다.

   

그것이 명절에 지극히 의례적인 성격의 것으로 판단하고 공무원축정원칙에 따라서 각 해당 부서에 통보함으로써 면직이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부실채권과 채권보전대책은 어떠했는가 ?

   

국회재무위에서의 이용만 재무부재정차관보 브리핑내용을 들어보자.

   

"1979년 3월말현재 형태별로 본 여신현황을 말씀드리자면 대출금 597억원, 선수출환어음매입 344억원, 지급보증이 391억원 합계 1,332억원입니다.

   

은행측추정으로서의 채권회수가능액은 기업체처분에 따른 회수추정이 731억원, 그리고 부동산 처분에 따른 회수추정이 10억원, 장부상의 해외자산 480억원중에서 회수가능부분을 최대한 관리 처분하여 회수한다고 볼 때 약 240억원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서울종합 터미널의 고가매각 추정인데 시가기준으로는 190억원이고 장기상환기준으로는 400억원 이렇게 해서 대체로 1,171억원 내지 1,381억원의 회수가 가능하지 않겠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부족채권이 하나도 없다는 얘기나 다름없다. 담보가액은 물론 재무당국이 부풀린 액수이겠지만 오늘날 대우채권 사태로 온 국민이 예금원리금 피해를 보고 있는 것에 비한다면 실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편 홍윤섭 행장 재판결과를 보자.

   

서울형사지법은 1979년 8월 31일 율산그룹 부정사건과 관련, 구속 기소된 전 서울은행장 홍윤섭씨에게 업무상배임죄를 적용, 징역 3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율산그룹의 주거래은행장이었던 홍윤섭 피고인은 율산계열기업의 재무구조가 지극히 나쁘고 사업전망이 어두워 대출금을 회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도 이 그룹에 여신행위를 계속해 준 것은 앞의 은행에 손해를 발생시킬 목적은 없다 하더라도 손해발생을 충분히 예견하고 한 미필적 고의가 있었음이 인정된다'지적하면서 '이 같은 여신행위가 감독관청인 재무부의 지시에 따른 것처럼 말하고 있으나 은행장은 소속은행의 이익을 위해 경영해야 되고 설사 감독관청의 부당한 지시에 따랐다 해서 위법행위가 용서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고 판시했다."

출처 : 금융정보연구소 이국영님 홈페이지

   

우선 율산이 호남그룹이다,에 대한 명쾌한 설명이다.

   

"임원진 중에 경기고나 서울대 출신으로 신 사장과 동문관계에 있는 경영자가 절반선에 육박한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점이다.

   

이 같은 경영진의 인적구성은 다같이 경기고교와 서울공대를 나온 제세산업의 이창우(李彰雨)씨와 마찬가지로 신 사장이 지연보다 학벌에 더 중점을 두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병쉰논리가 있다. 아인슈타인이 물리학계에 혁명적인 발견을 한다. 이에 독일 당국은 그가 게르만 환경에서 작업을 했음을 강조한다. 허나, 떡질을 해서 논란이 발생했다. 이에 재빨리 독일 당국은 그가 유태인임을 상기시킨다.

   

율산 공중분해에 대한 견해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눠진다. 박정희 측은 기업을 무리하게 운용해서, 김영삼 쪽은 박정희가 율산을 특혜지원해서, 쪽발돼중 쪽은 호남이니까. 여기에 소수 의견으로는 사우디 때문이다?"

   

"율산이 위험하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한 것은 제세산업이 도산하기 훨씬 전인 1978년 7월경부터였다. 율산이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추방될지도 모른다는 풍문이 단자회사와 사채업자들 사이에 나돌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자금사정의 악화가 표면화되었다.

   

이 같은 풍문은 율산이 외국인의 도소매행위를 금지하고 있는 사우디 아라비아의 국내법을 어겼기 때문에 비롯됐다.

   

율산 관계자들은, "현지직원 1명이 사우디 아라비아 관리들 함정단속에 걸려들었기 때문에 약간의 문제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경미한 사건에 불과하다"고 해명하고 다녔지만, 소문이 돌면서 1978년 8월이후 단자회사의 어음할인한도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

   

인드라 입장은 간단하다. 정말로 박정희가 율산을 막고자 했다면 자라나는 싹을 초기에 누르듯 율산이 애초에 사우디 진출을 하지 못하도록 했을 것이다. 지금이야 어렵지만, 박정희 때는 가능했다. 헌데, 박정희는 율산이 현대나 삼성을 위협할 정도로 커도 방관했다. 아니, 실은 도와줬다. 안 도와주었으면 율산이 뭘 믿고 수출에 올인하겠냐. 오히려 박정희는 율산 임원에 평가를 했을 것이다. 왜? 역사적으로 충청, 전라 지역은 농수산물이 풍부해서 굳이 상공업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그런 이유로 근래 조금 변화하였다 하나 충청/호남 지역에서 수출입에 대해 둔감한 것이 사실이지 않은가. 단지 지정학적인 이유만이 아닌 것이다. 사정이 이러니 오히려 박정희가 더 도와준 것이다. 더 나아가 국유본은 박정희 다음으로 쪽발돼중을 대통령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빅터 로스차일드 시대에서 말이다. 허나, 국유본 권력투쟁으로 데이비드 록펠러 정권으로 바뀌면서 사정이 바뀌었던 것이다.

   

박정희 집권 말년에 율산 사건이 터진다. 그것도 사우디 사건이다. 사소해보인다. 허나, 국유본론 관점에서 사우디란 핵심 노비네파 국가이다. 이런 국가에 함부로 지랄을 한다? 이는 노태우 때의 박철언과 같은 것이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울 줄 모르고 날뛰니 국유본 입장에서는 따끔한 훈계가 필요했던 것으로 본다.

   

더군다나 이 시기 박정희는, 한층 감시체계를 높인 국유본 때문에 국유본 간첩인 김재규를 임명하기까지 했다. 김재규란 어떤 자냐. 박정희 혁명 당시 미군에 혁명 사실을 고변하려고 했을 만큼 박정희에 적대적이었다. 미군은 김재규 고변에도 박정희 혁명을 체게바라 쿠바혁명처럼 묵인한다.

   

마지막으로 이 시기는 국유본이 뉴라이트 브레진스키 지도하에 아프카니스탄 침공을 유도하던 시기였다.

사우디는 이 시기 빈 라덴을 비롯하여 전사들을 아프카니스탄에 파견하던 시기였다.

소련이 아프칸 침공하면서 내심 안심했던 것이 고유가다.

헌데, 소련이 아프칸 침공하자마자 유가가 개폭락하여 결국 소련이 아프칸에서 철수하는 계기를 만든다.

   

사우디 지랄이 단지 사우디만의 일이 아님을 쪽발돼중과 쪽발놈현과 '영혼유령크로스떡질하기'수준이 아니라면 알 것이다.

   

이후 현대, 대우, 신동아 등이야 말해 무엇하랴.

   

인드라는 다만 말하겠다.

   

그럼에도 각 경제권력에 가하는 수위는 달랐다고 말이다.

   

   

추신 : 쓰다쓰다 졸립네요~ 후

        오늘도 큰 사건을 겪으면서도 완벽한 마자세는 아니더라도 준비하는 마자세를 취해 하루를 더 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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