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유태자본과 바스크 : 산초 3세, 앙리 4세, 카를로스파, 체게바라, 피카소, 빌바오, BBVA, 몬드라곤, 칠레 국유본론 2012
2012/11/13 07:39
http://blog.naver.com/miavenus/70151268999
국제유태자본과 바스크 :
산초 3세, 앙리 4세, 카를로스파, 체게바라, 피카소, 빌바오, BBVA, 몬드라곤, 칠레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2/11/13
18- 1. 바스크와 피카소, 가우디, 달리
18- 2. 바스크 지방, 바스크 사람, 바스크 언어
18- 3. 바스크는 독립보다 자치를 늘 원했다
18- 4. 바스크 지혜 : 외국인이어도 능력 있는 지도자를 모시고 바스크 발전을 꾀한다
18- 5. 바스크와 체 게바라
18- 6. 바스크 제국 전성기 산초 3세, 그리고 클뤼니 수도회
18- 7. 바스크와 스페인 내전, 그리고 카를로스파
18- 8. 바스크와 방코 빌바오 비스카야 아르헨티나(BBVA), 그리고 구겐하임 미술관
18- 9. 바스크와 몬드라곤
18-10. 바스크와 국제유태자본
18-11. 바스크와 칠레
18. 바스크
18-1. 바스크와 피카소, 가우디, 달리
인드라 이웃 분들, 피카소 아시죠?
피카소 게르니카
피카소는 스페인 화가로 유명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바스크 화가입니다. 피카소 대표적 작품 게르니카는 바스크 마을 게르니카 참사를 형상화한 작품입니다. 게르니카는 빌바오 인근 도시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바스크 출신 천재 화가 피카소는 역사적으로 경쟁적인 지역인 카탈루냐 출신 천재 건축가 가우디를 폄하합니다.
가우디 구엘저택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 ··· 00236376
달리 모나리자
이에 대해 살바도르 달리 역시 스페인 화가라기 보다는 카탈루냐 화가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피게레스에서 살바도르 달리를 만나다
http://blog.naver.com/miavenus/70016882522
이처럼 스페인은 지역 색이 참 강하답니다. 인드라가 유럽 배낭여행 때 인상이 깊었던 도시가 런던, 프라하, 바르셀로나인데요. 2차 배낭여행을 한다면, 아일랜드와 영국, 포르투갈, 스페인, 북아프리카, 이스라엘, 시리아, 그리스, 터키, 이란, 아프가니스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을 완전정복하고 싶군요^^! 해서, 오늘은 바스크에 대해서 말하기로 합니다.
18-2. 바스크 지방, 바스크 사람, 바스크 언어
바스크족은 인종, 언어, 역사, 정치, 경제 다양한 부문에서 여러 모로 흥미로운 족속입니다.
바스크 지방은 피레네 산맥을 중심으로 대서양 해안 쪽으로 스페인과 프랑스에 걸쳐 있습니다. 피레네 산맥은 알프스 산맥 다음으로 해발고도가 높은 산맥입니다. 한국으로 치면, 백두산에서 함경, 강원, 영남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일대나 지리산 일대를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게릴라전이나 방어하기에는 딱 좋겠지요?
그래서일까요? 북아프리카에서 이주하다 피레네 산맥에 가로막힌 원시인이 바스크에서 정착했는데, 험한 환경 탓에 다른 족속들과 동떨어져 고립화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알타미라 동굴이 있는 곳을 종종 바스크라고 소개하는데, 바스크가 아니라 바스크 이웃지역인 칸타브리아에 있습니다.
스페인 영토가 남한 영토 다섯 배입니다. 한반도 2.5배입니다. 영토는 대한민국보다 다섯 배나 큰데, 인구나 GDP가 대한민국과 비슷합니다. 그처럼 바스크 지방 면적도 꽤 큽니다. 스페인 지도에서 작게 보여서 그렇지, 바스크 지역인 바스크와 나바라를 합치면 약 17,625㎢입니다. 서울특별시 면적이 605.25㎢이니 서울특별시 약 30배 크기요, 강원도 16,571.83㎢보다 약간 큽니다. 헌데, 가스코뉴라고 불리는 프랑스 쪽 바스크 지역이 스페인 바스크 지역 1/5 크기여서 합치면 약 20,000㎢이니 수도권(서울, 인천, 경기도) 23,410㎢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바스크족은 포르투갈 루시타니아인처럼 오래 전에 북아프리카에서 이주하여 선사시대 때부터 이베리아 반도에 살던 족속으로 추정될 뿐, 유래를 알 수 없습니다. 생긴 건 백인인데, 루시타니아인도 그렇듯 보통 백인보다 더 긴 장두형입니다. 앞 얼굴이 좁아 보이고, 옆얼굴이 길다는 것입니다. 앞뒤로 크게 짱구라는 이야기죠. 인드라도 어려서 짱구 별명 들은 짱구이긴 한데, 상대적으로 그렇지, 한국인 유형인 빈대떡형에서 과히 벗어나는 건 아닙니다. 어려서 짱구라고 놀림을 받으면 상대방한테 그래, 넌 얼굴이 떡판이어서 좋겠다, 하며 분풀이했던 기억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바스크어는 인도유럽어와도 다르고 유사한 언어를 좀처럼 찾기 어렵습니다. 이런 언어를 고립어라고 하는데요. 대표적인 고립어로는 수메르어가 있습니다. 고립어 특징은 유래를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유래를 알 수 없는 데다 프랑스어와 스페인어 압박으로 이제 고작 80만 명(프랑스 10만, 스페인 70만) 정도만 쓸 정도로 급격히 소멸중인 언어여서 언어학에서도 주요한 연구대상입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일각에서는 바스크족과 수메르, 한반도를 연결시켜 본다든가 하는 판타지를 그리는데 인드라 관심사가 아닙니다.
18-3. 바스크는 독립보다 자치를 늘 원했다
기원전 74년 바스크족은 로마 지배를 받습니다. 이후 로마제국이 멸망하면서 자치를 누리다가 602년 프랑스 쪽 바스크 지역이 프랑크족에게 점령을 당합니다. 스페인 쪽도 719년 이슬람 군대가 팜플로나를 점령합니다. 허나, 바스크는 저항하면서 자치를 회복합니다. 이후에도 바스크는 프랑크, 서고트, 무슬림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으려 하는데, 그 실례 중 하나가 778년 카를대제 군대에 대한 공격입니다.
예서, 바스크인 특징이 있습니다. 바스크인은 독립보다는 늘 자치를 원했습니다. 바스크인이 저항할 때는 자치권이 훼손되었기 때문입니다.
카를대제가 바스크 지역을 스페인 공략 전진기지로 삼았는데 오늘날 철도망을 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카를대제는 라흐만 1세에 반대하는 카탈루냐 지역 이슬람 총독들 요청으로 스페인을 공략하면서 방비가 약한 바스크 지역을 통한 공격을 했던 것입니다. 문제는 공략이 실패로 끝나자 후방을 염려하여 바스크 마을들을 몽땅 다 불태워 버리려고 하니까 바스크족이 카를 대제 군대를 기습 공격한 것입니다. 허나, 전투 승리에도 불구하고 바스크족은 프랑크족 지배를 받습니다.
824년 나바라 변경백령이 되었습니다. 헌데, 바스크족에게 자치권을 주던 프랑크 왕국에서 프랑스 쪽은 물론 스페인 쪽도 자치권을 빼앗고 직접 지배하고자하자 프랑크 왕국 점령정책에 대항하여 바스크족이 새로운 영주를 뽑아 왕으로 만든 것이 905년 팜플로나 왕국입니다.
18-4. 바스크 지혜 : 외국인이어도 능력 있는 지도자를 모시고 바스크 발전을 꾀한다
바스크족 귀족들이 지도자 감을 찾다가 이니고 이니게스를 택합니다. 헌데, 왕은 바스크인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후에도 바스크족 귀족들은 지도자감을 여기저기에서 구하곤 합니다. 헌데, 흥미롭게도 이니고 이니게스 가계를 보면, 이니고 어머니는 바누 카시 통치자인 무사 이븐 포르툰과 재혼하여 무사 이븐 무사를 낳습니다. 무사 이븐 무사는 바누 카시 통치자가 되는데 이복형인 이니고를 적극 돕습니다. 다시 말해, 팜플로나 왕국은 바스크인이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바스크인 귀족들이 프랑크 왕국에 대항하여 바스크인을 보호해줄 사람을 데려다가 왕을 시킨 것입니다.
스페인을 넘어서 국제적으로 본다면, 기업에서 CEO를 모시는 것이요, 근대 영국에서 영어 한마디 못하는 하노버 왕가를 데려온 것과 유사하다 할 것입니다. 팜플로나 왕국은 비바스크 왕의 나라가 아니라 바스크 귀족들의 나라였습니다. 바스크 귀족들은 외교력을 발휘하는 등 실력이 있는 자를 구해 왕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바스크 왕으로 군림한 자들은 바스크 문화에 동화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문제인데요. 이후 포르투갈 왕국 독립도 유사한 맥락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정이 있다 보니 한국 판타지 소설 중 영지 발전물을 보면, 작가들이 스페인/포르투갈 역사에서 많은 영감을 받는 듯싶습니다. 하도 많이 써먹다보니 독일도 가끔 나오기도 하지만 말이죠.
해서, 당시 팜플로나 왕이 된 자는 FC 빌바오 비엘사 감독인 것입니다. 비엘사 감독은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칠레 감독이 되어 남아공 월드컵에서 스페인 축구팀을 압도하는 공격 축구로 인상적이었는데요. 인드라도 깜짝 놀랄 정도여서 한국 국가대표 축구팀 감독으로 초청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헌데, 요즘 뭐하나 봤더니 스페인이라면 이가 갈리는 바스크족이 스페인을 가지고 논 데에 감명을 받아 바스크 순혈팀 빌바오에서 감독으로 전격 초빙한 것입니다. 빌바오팀은 레알마드리드, 바르샤처럼 2부리그로 떨어지지 않는 팀으로 유명합니다. 칠레가 스페인 피파 매수 편파 판정을 넘어서서 남아공 월드컵 우승을 했더라면 인드라가 여전히 축구팬이었을 터인데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예서, 로마, 프랑크, 무슬림, 서고트족이 하나같이 바스크 지배에 실패한 이유는 바스크인이 다른 민족들을 열등하다고 보고 스스로 우월하다는 선민의식 때문일 것입니다. 유태인 사고방식과 유사합니다. 지배당할지언정 굴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자신들이 세계 최고 민족으로 여기니까요.
18-5. 바스크와 체 게바라
헌데, 유대인과 바스크인이 교차점에서 만나는 인물이 체 게바라(Ernesto Guevara de la Serna)입니다.
"게바라에서 마르크스, 프로이트, 아인슈타인에 이르기까지 세계사 주역의 많은 이가 유대인으로 분류된다. <세계를 움직이는 유대인의 모든 것>은 학술서가 아니다. 30여년 기자 생활을 한 저자가 "유대인을 모델로 삼아 이념에 의해 분단된 한국의 시점에서 세계로 향해 뻗어갈 수 있는 희망과 기회의 토대를 마련해보고자" 유대인 역사와 신념과 교육에 관한 '모든 것'을 에세이처럼 엮어놨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 ··· 00127277
"Ernesto Guevara was born to Celia de la Serna y Llosa and Ernesto Guevara Lynch on May 14, 1928[1] in Rosario, Argentina, the eldest of five children in an Argentine family of Spanish, Basque and Irish descent."
http://en.wikipedia.org/wiki/Che_Guevara
체 게바라는 아르헨티나 출생인데, 유대인인 동시에 바스크-아일랜드 출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게바라는 스페인 바스크 지방 마을 이름이기도 합니다.
"The village is administered by the council of Barrundia and situated in the province of Álava, in the Basque Autonomous Community, Spain."
http://en.wikipedia.org/wiki/Guevara,_Spain
체 게바라 할아버지가 바스크-아일랜드 출신으로 캘리포니아 금광을 찾아 미국으로 갔다가 남미로 이주하였는데, 인터넷에서는 자세한 사정이 없습니다. 인드라 추정으로는 카르타고 유태인 일부가 바스크 지방에 살았는데, 스페인이 오랫동안 유태인 추방령을 시행하였기에 종교와 성을 바꾸는 콘베르소(카톨릭으로 개종한 유태인) 혹은 마라노(카톨릭으로 개종하였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유대교를 믿는 유태인)이 되면서 게바라가 된 것 같습니다. 바스크 지역은 오랜 기간 중앙정부에 대항하여 자치를 누렸기에 마라노를 색출하는 스페인 종교재판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웠을 것으로 봅니다. 해서, 국외로 탈출하지 못한 마라노들이 숨어있기 좋은 곳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여차하면 빌바오 - 대서양 - 아일랜드로 도망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스페인 유태인 중 일부가 추방령 때 아일랜드로 이주했습니다. 또한, 유태인이 성을 바꿀 때, 부자나 권력자 유태인인 경우 지명으로 갈음하고는 했습니다. 반면, 가난한 유태인이라면 모욕적인 성을 받아야 했습니다. 아울러 인드라가 추정하는 또 다른 것 하나는 스페인이면 스페인이지 굳이 스페인-아일랜드 혈통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어딘지 게바라 가문 계보를 훼방하려는 의도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다만, 인드라 엄밀한 관점에서는 체 게바라에 유태인 피가 흐르지만, 유태인 전통이나 종교 등을 통해 보았을 때 체게바라는 유태인이 아닙니다. 사실 엄밀한 관점에서 맑스도 유태인이 아닙니다. 맑스가 무어인을 자기 정체성으로 삼았다면, 체 게바라는 바스크인을 자기 정체성으로 삼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체 게바라 베레모 모자는 바스크 전통 모자입니다. 베레모는 스페인 내전 당시 카를로스파 의용군들이 즐겨 쓸 만큼 용맹 상징으로 바스크 농민들이 쓰던 모자였습니다.
그럼에도, 인드라가 유대인 체게바라를 인월리에서 강조한다면, 국유본이 유태인보다 유태인적인 것을 더 중시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인 것입니다.
페론정권의 곡물카르텔과의 투쟁
http://blog.empas.com/ylemming/28469574
국제유태자본과 체게바라, 그리고 쿠바혁명
http://blog.naver.com/miavenus/70032340293
"9월 11일에는 록펠러의 지시를 받은 헨리 키신저가 CIA 작전으로 피노체트 군사 쿠테타를 일으켜서 세계 최초로 평화적으로 사회주의 정권 교체를 이룩한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을 붕괴시켰고, 록펠러 주도하에 유태계 밀턴 프리드만의 연출로 신자유주의 프로그램을 실험했다. 9월 28일에는 아르헨티나의 유태자본에게 권력을 빼앗겼던 후안 페론이 18년 만에 다시 정권을 되찾았다. 이는 국제유태자본이 후안 페론 정권을 무너뜨리고 관심을 다른 데에 돌리기 위해 유대인 혁명가 체게바라의 쿠바혁명을 일으킨 것처럼 칠레 아옌데 정권을 무너뜨린 데에 대한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려는 국제유태자본의 고육지책이었다. 쿠바는 데이비드 록펠러가 체이스맨해튼은행 해외영업부에서 일을 시작할 때 맡은 담당 지역이다. 이런 인연으로 록펠러는 체 게바라와 카스트로 등과 친교를 맺고 있다. "
국제유태자본 : 1973년의 세계사
http://blog.naver.com/miavenus/70045592091
체 게바라가 국유본이 남미에서 바라던 사업을 충실하게 해냈다는 점에서, 유태인 기업 스타벅스 같은 데서 체게바라를 상품화하는 데서 그 연관성을 더 중시하기 때문입니다.
체 게바라 이야기는 이쯤하고 다시 바스크로 돌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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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바스크 제국 전성기 산초 3세, 그리고 클뤼니 수도회
당시 스페인 정세는 프랑크 왕국 아니면 이슬람 왕국이었는데, 팜플로나 왕이 모계를 통해서 흥미롭게도 무사란 개종 유태인 이름을 지닌 이슬람 변방 왕국 지배자와 연결이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팜플로나 통치자 이름이 무타리프 이븐 무사입니다. 예서, 이븐이란 아들이란 의미입니다. 해서, 이름 풀이를 하면 무사 아들 무타리프란 것입니다. 무사가 누굽니까. 이슬람으로 개종한 유태인 아들이자 스페인 정복 총사령관인 것입니다.
팜플로나 왕국은 이슬람 변방 왕국 도움을 받아 프랑크 왕국 침입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헌데, 프랑스 왕국 침략이 불발로 그치자마자 팜플로나 왕국이 이슬람 변방 왕국과도 거리를 두고, 서고트족 왕국인 아스트리아스 왕국을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바스크족은 그때그때 주변 강대국을 활용하여 왕국을 유지시켰던 것입니다.
팜플로나 왕국에서 발전한 나바라 왕국(나바라 왕국이란 팜플로나 왕국에 대한 프랑스식 어법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전성기는 산초 3세(재위 1000∼1035), 혹은 산체스 3세입니다.
"Sancho Garcés el Mayor 라고도 부른다. 이베리아반도의 국토회복운동 중기의 '대왕(大王)'으로, 산초 1세의 손자이며, 가르시아 3세의 아들이다. 정치적 수완이 뛰어나 군사력에 의하지 않고 각지의 내부적 동향을 이용하여 나바라왕국의 발전을 꾀하였다. 먼저 피레네 산록지대의 이슬람군을 소탕하고 아라곤을 제압, 바르셀로나에까지 세력을 뻗치는 동시에 인척관계를 이용하여 카스티야와 레온왕국을 치하에 넣음으로써 북부 그리스도교 여러 왕국을 거의 통일하고 에스파냐라 칭하였다.
내치(內治)에 있어서도 클뤼니 수도회방식에 의한 종교개혁의 도입(導入), 법전(法典)의 정비 등 주목할 만한 것이 있지만, 최대의 공적은 이슬람 세력을 배제하고 북부의 그리스도교 여러 나라를 통일하여 이른바 국토회복운동에 신기원을 이룩한 것과, 임종시 네 아들에게 영토를 나누어 주어 나바라왕국(가르시아 산체스 1세), 카스티야 레온왕국(페르난도 1세), 아라곤 왕국(라미로 1세)을 세움으로써 역사의 방향을 결정한 점에 있다. 그는 카스티야왕으로서는 산초 1세(재위 1027∼1035)라 불린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 ··· 00001140
팜플로나 왕국은 약소국 전형답게 강국들에게 조공을 바치면서 버티다가 마침내 산초 3세에 이르러 흥합니다. 산초 3세 업적은 당대 안달루시아 왕국을 좌지우지하던 만수르, 한국으로 치면 연개소문인 만수르, 라흐만 3세 전성기를 이어가려던 만수르를 전쟁터에서 격파하더니 죽게 만든 것입니다. 산초 3세는 스페인 북부 기독교 국가를 통일시킬 뿐만 아니라 프랑스 쪽 가스코뉴 역시 통합시킵니다.
헌데, 산초 3세는 스페인 북부 기독교 왕국들을 기껏 통합한 뒤 아들들에게 분할로 나눕니다. 왜 이랬을까요? 유라시아 유목민 전통입니다. 프랑크족도, 몽고족도, 알렉산더도 다 이랬습니다. 수메르인이나 카르타고인도 이 연방제적 전통에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로마인이나 유태인, 중국인 등이 중앙집권적 전통이 있었던 것입니다. 고루 나누어주기보다 한 놈에게 몰아주는 방식입니다.
다만, 인드라 관심사는 영토가 아니라 종교입니다. 산초 3세는 프랑크왕국에서 일어난 클뤼니 수도회와 접속했던 것입니다.
"클뤼니
원어
Cluny(프랑스어)
프랑스 중동부 부르고뉴 지방의 소느 에 루아르의 마을. 910년에 아키테느공(公) 기욤이 이곳에 수도원을 창설. 926년, 수도원장 성(聖) 오동에 이르러 베네딕트회 산하에 들어가 급속히 번영, 성(聖) 푸고, 존자(尊者) 페텔스 등의 지도하에 12, 13세기까지에 유럽 각지에서 오리엔트에 이르는 광범한 지역에 분원을 차례차례로 창설하여 그 수가 1500에 달하고, 그리스도교 사회의 문화 추진상 중요한 구실을 담당했다. 그 중심을 이루는 수도원 성당은 세차례나 다시 세워져, 제3차의 것은 1088~1130년의 건립으로 오랑식(五廊式), 2개의 트란셉트, 7기의 탑, 5개의 방사상(放射狀) 제실(祭室), 나르텍스 등을 갖추어 전길이가 182m에 달하며, 당시의 그리스도교 사회의 최대건물이었다. 본전의 궁륭(穹窿)은 벽화로 장식되고, 성당 입구는 장엄한 조각으로 덮여 있으며 미술의 전분야에서 부르고뉴, 더 나아가 그리스도교 사회각지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이 거대한 모뉴멘트는 프랑스 혁명 후 왕립수도원이 폐원된 까닭에 헐려서 현재는 남쪽편의 대회랑 일부 및 얼마 안되는 부속 건축을 남길 뿐이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서, 케네스 코낸트(Kenneth John Conant) 등에 의한 발굴 조사가 진척되어 간소한 제1성당, 이어 대소의 5제실을 제형(梯形)으로 배치한 베네딕트회 플랜의 두부(頭部)를 가지고 있는 트란셉트, 나르텍스를 갖춘 3랑식의 제2성당(944경~1000경)을 추적, 확인할 수가 있었다. 다소의 조각단편이 발견, 공개되고 있다. 석조미술관이 되어 버린 파리니에(방앗간)에는 구(舊) 본전의 주두군(柱頭群)등이 보존되고, 또한 오시에 미술관에도 조각단편 등이 수장되어 있다. 이 마을에는 그외에도 로마네스크의 팔각탑을 가진 생 마르셀 성당, 로마네스크의 민가 2동 등이 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 ··· d%3D1853
아키텐주
"클뤼니 수도원[ Cluny Abbey ]
한때는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였던 기억이 어린 유적
클뤼니 수도원 유적을 돌아보고 나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이 조촐한 유적을 내려다보고 있으면, 한때 이 교회가 전 기독교 국가 중에서 가장 컸으며 수도원장들이 행사한 영향력은 교황에만 둘째갈 정도였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워진다.
클뤼니는 910년, 아키텐느 공작이 새로운 베네딕트 회 수도원을 위해 자기의 오래된 사냥 별장이 있던 주변의 땅을 기부했을 때 설립되었다. 그가 하사한 이 선물은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후원자들은 보통 자기 친척들을 그 자리에 앉힐 수 있도록 수도원장을 선정하는 데에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하려 드는데, 아키텐느 공작이 내린 땅에는 그러한 제약이 없었던 것이다.
수도원장들은 이러한 독립성을 이용해 다른 부속 수도원들에 강력한 지배권을 행사하면서 교단을 연합해 나갔다. 따라서 클뤼니 교단이 그 권력의 정점에 도달했던 시절, 수도원장은 사실상 약 1,200군데의 수도원과 1만 명의 수도사들을 거느린 수장이었다. 이 조직은 프랑스 너머로도 세력을 확장해 독일, 영국, 스페인에도 소(小)수도원이 있었다.
클뤼니의 세력이 커져 갈수록 교회 건물의 규모도 커져 갔다. 원래의 건물은 955년 새로이 대체되었으며, 최후이자 가장 웅장하게 지어진 건물은 1088년경 위그 드 세뮈르(나중에 성 위그가 된다)가 짓기 시작했다. 결국 클뤼니는 자신이 거둔 성공의 희생자가 되었다. 클뤼니 수도원이 부와 특권의 보루가 되어 갈수록, 더욱 엄격한 시도파 수도사들이 종교 개혁에 앞장서게 되었다.
클뤼니는 점점 더 구체제의 일부로 간주되었으며, 따라서 혁명이 일어났을 때 결정적인 목표가 되었다. 1790년 교단은 탄압을 받았고 건물은 대부분 파괴되었다. 얼마 동안 이 유적은 채석장으로 쓰이기도 했는데, 수도원의 90퍼센트가 파괴되었다고 추정된다. 남아 있는 부분은 종탑, 곡식 창고, 마구간 정도이다. 자그마한 부속품들은 지역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최근 수십 년에 들어, 어느 정도의 보수 작업이 진행되어 왔다.
"클뤼니는 이제 더 이상 찬송가의 선율에 화답하지 않으며 옛 수도원장들은 이름 없는 무덤에 잠들어 있다."
뉴욕 타임즈 매거진, 1928년 3월 4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 ··· d%3D1967
이는 이후 포르투갈 왕국 독립에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전까지 바스크족에게 카톨릭이란 단지 지배종교였을 뿐이고, 바스크족에게는 루시타니아족처럼 민간신앙이 있었던 것입니다.
헌데, 산초 3세 때부터 바스크족 일상에 카톨릭이 자리 잡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면, 이때 왜 산초 3세가 클뤼니 수도회에 빠졌을까요?
하나, 중부 유럽 농업 생산력이 기후 변화, 즉 중세 온난기를 맞이하여 폭발적으로 높아졌습니다. 당대에는 신의 축복으로 분석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의 축복 기간에 교세를 확장한 것이 클뤼니 수도회입니다.
클뤼니 수도회가 내세운 건 청빈한 삶입니다. 농업 생산력이 커져 부가 축적되니 제정일치 시대인 중세에 변화가 불가피합니다. 헌데, 이전 카톨릭은 혹독한 자연 환경에 순응하는 숙명론적 기독교였습니다. 자연재해 앞에서는 잘 난 놈이나 못 난 넘이나 다 죽기 마련이니까요. 허나, 중세 온난기에 접어들자 신학도 자유의지론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스 철학과 결합한 스콜라 신학이 괜히 나왔겠습니까? 잘 난 놈들 선민적인 종교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클뤼니 수도회가 뜬 배경입니다.
그래서인지 클뤼니 수도회는 1차 십자군 전쟁 때 독일에서 수만 명 유태인이 학살당하자 2차 십자군 전쟁 때는 유태인 학살에 반대하고 금지시켰습니다. 따지고 보면, 유대교란 선민의식으로 똘똘 뭉친 잘 난 넘들 종교잖습니까?
권력이 있는 자가 스스로 권력을 제한하니 폼이 나지 않겠습니까? 잘 난 넘이 스스로 기득권을 포기하고 앞으로 나아가니 영웅적인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이 당시 클뤼니 수도회는 1% 영웅들 종교였던 것입니다.
하여간 클뤼니 수도회가 청빈을 강조하는데, 클뤼니 수도회가 청빈을 강조할수록 오히려 부가 클뤼니 수도회에 집중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세속에 때 묻지 않은 수도회라는 명성이 높아져서 부를 기부해도 하나님 가까이에 있는 수도회에 기부해야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둘, 중부 유럽에서 은대지제와 같은 봉건제가 전면적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이는 산초 3세에게도 영향을 주어 부하들 충성심을 이끌어낼 수 있었습니다. 허나, 땅을 줄 터이니 그 땅 먹고 자족하라든가, 왕인 내가 없으면 신하인 네 땅도 없다든가, 이를 계약서로 작성하자고 해도 신하들이 왕을 죽이면 그만이지 않겠습니까?
해서, 봉건제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보다 강력한 사상과 제도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제정일치에서 정치 권력과 종교 권력이 분리하여 종교 권력이 자율화한 것입니다. 카를대제와 오토대제는 신성로마황제 자리를 받은 다음에 대주교 임명권이 있었습니다. 허나, 클뤼니 수도회에서는 세속 권력이 종교에 침범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아키텐공이 클뤼니 수도회에게 간섭을 하지 않고 자율권을 주었던 데에 근거합니다. 이는 이후 카놋사의 굴욕 사건을 일으키는 대사건으로 발전하였는데요. 예서, 중요한 건, 바스크족이 카톨릭을 받아들일 근거를 마련했다는 것입니다.
정치권력과 자율적인 종교 권력을 행사하니 로마 교황청 영향력이 신성로마제국을 넘어서 서유럽 전체로 확산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클뤼니 수도회 이후 카톨릭은 신성로마제국을 위한 종교가 아니라 서유럽 기독교인을 위한 종교가 된 것입니다. 후일 클뤼니 수도회가 교황을 배출하고, 클뤼니 수도회 출신 교황이 십자군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원동력이 된 것입니다.
또한, 이 시기 서로마교회와 동로마교회가 결별하는 배경도 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서로마교회가 동로마교회더러 너네 없이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간 서유럽은 중국, 인도에서 오는 물자를 받기 위해 비잔틴제국 혹은 동로마제국에 굽신굽신했습니다. 서유럽이 수출할 품목이 목재나 백인 노예밖에 없을 만큼 사실상 전무했던 반면, 서유럽이 수입할 품목이 비단, 향신료를 비롯해서 무궁무진했습니다.
셋, 수준 높고 힘이 있는 문명에 대해 개방적인 바스크족이 산초 3세 노선에 적극 협력하니 나바라 왕국이 급격하게 영향력이 커진 것입니다. 앞선 문명으로 명분이 서니 북부 기독교왕국과 외교로 통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만, 운명이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자유의지론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는 믿음은 왕후장상 씨가 따로 있나? 하는 식으로 나도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될 수 있다는 생각, 이베리아 반도에서도 신성로마제국을 한 번 만들어보자는 생각을 널리 유포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스크 왕조와 압바스 왕조는 종교가 다르지만, 한편으로는 유사한 환경에 놓여 있었던 것입니다. 누구나 기독교인이 될 수 있다, 누구나 무슬림이 될 수 있다고 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자유의지적으로, 능력적으로 가장 잘 난 기독교인, 가장 잘 난 무슬림을 추구했다는 것입니다. 하여, 이러한 정신은 이후 알폰소 6세로 이어집니다.
정리하면, 산초 3세는 결론적으로 클뤼니 수도회로부터 받은 종교적 명분으로 기독교 왕국들을 평정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18-7. 바스크와 스페인 내전, 그리고 카를로스파
이러한 카톨릭적 환경을 강조하는 것은 바스크인들이 스페인 다른 어떤 지역보다 카톨릭을 신봉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특히 스페인 내전에서 바스크인을 이해하는데 필수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스페인 내전을 20세기 이념적 잣대를 적용하면 바스크인처럼 이해하기 힘든 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스페인 내전
http://ko.wikipedia.org/wiki/%ec%8a%a4 ··· 5a0%2584
19세기 유럽에서는 아나키즘과 사회주의 사상이 유행하였습니다. 프리메이슨/일루미나티 사상이 프랑스 혁명 시기, 특히 나폴레옹 전쟁을 통해 왕궁과 귀족, 식자층에서 농민, 노동자로 대중적으로 확산합니다.
이때, 농민, 노동자들이 신사상에 빠진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 오늘날 인터넷에서 보듯, 과거 지도자와 영웅들이 죄다 프리메이슨이었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혼탁하면 메시아가 계시를 받아 기독교 비밀을 푸는 열쇠를 받아 세상을 구원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바스크인 버전으로 설명하면?
있잖아? 산초 3세가 프리메이슨이었다는구만. 그우래에에에에에에에에?
둘, 인류 습관 중 하나가 무조건 옛날이 좋았다고 하는 겁니다. 물론 이런 습관이란 78% 인류가 인류애를 실현하는 손쉬운 생존방식인 것입니다. 78% 인류는 남을 미워하여 인류애를 실현합니다. 이는 현재 권력을 의식적으로는 거부하고, 무의식적으로 수용하는 습관을 낳습니다. 인간 기억은 10대 후반부터 30대 초반까지는 아무리 좋은 일도 역겹고, 짜증나고, 부정적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유의지론적이죠. 40세를 넘기면 괴롭고 슬프고 아프던 청춘도 아름답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숙명론적입니다.
이를 바스크인 버전으로 설명하면?
생각해봐라. 우리 바스크인은 신이 선택한 사람들이야. 산초 3세 때 바스크인은 행복했지. 산초 3세가 누구냐고? 산초 3세는 광개토 대왕이었어. 응? 광개토 대왕이 누구야? 어? 말 실수를 했네. 근초고 왕이야. 근초고 왕은 또 뭐냐? 으응? 또 실수를 했구만. 산초 3세야. 이건 뭐냐? 인드라 식 농담이지.
셋, 백문이 불여일견입니다. 눈앞에 보여야 하는 겁니다. 일명 정답 제시입니다. 쪽발일성인가? 조만식 선생인가? 김구 선생인가? 이승만 선생인가? 여운형 선생인가? 김창숙 선생인가? 김두봉 선생인가? 박헌영 선생인가?
바스크인 버전으로 말한다면? 카를로스파냐?
카를로스파?
근대에 이르러 바스크인은 딜레마에 빠집니다.
하나, 앙리 4세 때문입니다.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 ··· d%3D2241
앙리 4세가 누구냐면, 한국으로 치면, 광해군이나 정조에 비교할 만큼 논쟁적인 프랑스 왕입니다. 인드라 같은 연극 영화에 심취한 자들은 프랑스 왕들 중 루이 14세보다 앙리 4세를 기억할 것입니다. 헌데, 앙리 4세는 본디 바스크 왕이었습니다. 나바라 여왕인 어머니로부터 바스크 지역을 물려받았습니다. 게다가 앙리 4세는 루이 14세로 대표하는 부르봉 왕가 시조입니다. 헌데, 루이 14세 손자인 필리페 5세가 스페인 왕이 됩니다.
http://blog.naver.com/flick/20000751788
무엇보다 앙리 4세가 얼마나 중요하냐면, 메디치가 왕비를 둔 앙리 4세가 좀 더 현명했다면, 프랑스에서 앙리 4세가 사실상 위그노파 정치적 지도자였던 만큼 위그노파가 축출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논쟁적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인드라가 인정하는 역대 세계 최고 전기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가 앙리 4세 전기를 쓰지 않은 것은 슈테판 츠바이크가 유대인이어서 앙리 4세를 질투하는 것인가 생각할 정도입니다.
해서, 바스크인들은 중세는 물론 근대에 와서도 독립보다는 자치에 방점을 찍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반면, 프랑크족과 유태인 입김이 강하고, 지중해 무역으로 경제적 풍요를 누리던 카탈루냐인들은 자치보다는 독립이었던 것입니다. 스페인 종교재판 목적 중 하나가 부의 강탈이었기에 유태인이 아니어도 무어인이 아니어도 종교재판으로 얼마든지 카탈루냐 부자들을 유태인이나 무어인으로 둔갑시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둘, 돈 카를로스 VS 돈 카를로스
미치광이 혹은 비운의 왕자, 돈 카를로스
http://blog.naver.com/snoopyzito/60022315192
인드라는 명작 '돈키호테' 원형이 돈 카를로스 왕자라고 봅니다. 한국으로 치면, 영조로부터 버림을 받은 사도세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돈 카를로스 왕자는 여러 여건상 스페인/합스부르크왕가/카톨릭에서 벗어나고자 했습니다.
청년 바스크인 입장에서는 돈 카를로스 왕자가 앙리 4세와 유사하다고 보지 않았겠습니까? 다만, 이는 어떤 역사서에 근거하기보다는 순전히 인드라 추정에 불과합니다.
인드라는, 청년 바스크인이 자치를 원한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카톨릭보다는 계몽사상에 경도했을 것으로 봅니다. 해서, 이들은 앙리 4세, 돈 카를로스 왕자 계보를 만들었을 것으로 봅니다.
청년 바스크인은 예수 생존 당시 열심당처럼 자치보다는 독립을 원했을 것입니다. 청년이라면 굶어죽어도 내 맘대로 세상이 아니겠습니까?
이에 대해 열심당이 아닌 바리새인파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카를로스파였던 것입니다.
스페인 내전 - 1936년 7월 17일 개전까지-1
http://cafe.naver.com/nuke928/230047
서고트족 관습 중에 여성에게는 왕위를 줄 수 없다는 살리카법이 있습니다.
페르니난드 7세
http://blog.naver.com/friderike/19155923
페르니난드 7세는 후사가 없자 딸인 이사벨에게 왕위를 물려줍니다. 이에 반발한 것이 페르니난드 7세 형제인 카를로스파인 것입니다. 한국으로 치면, 단종 대 세조 대결 구도인 것입니다. 카를로스파는 집권에 성공하지 못한 세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해서, 카를로스파는 19세기에 몇 번이나 반란을 일으켰지만 죄다 실패합니다.
헌데, 카를로스파는 반란 실패 이유를 유태인 - 사회주의(맑스주의) - 프리메이슨으로 보고, 이들을 적대했습니다. 이는 시기적으로 1871년 파리콤뮨 실패 이후 서유럽에 불던 분위기를 탄 것이었습니다.
국제유태자본과 프리메이슨, 자유의 여신상, 그리고 메이데이의 유래
http://blog.naver.com/miavenus/70137223776
예서, 차이가 있다면,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에서는 유태인, 맑스, 사회주의에 대항하여 프리메이슨 움직임이 활발했다면, 스페인에서는 카를로스파에서 보듯 프리메이슨마저도 적대시했다는 점입니다.
하면, 왜 카를로스파는 프리메이슨마저 적대시했을까요?
스페인 내전 당시 좌파를 지지하던 카를로스 의용군조차 대부분 카톨릭이었습니다. 카를로스 의용군 최대 목표는 자치였습니다. 독립도 자치를 위한 최대 강령이었을 뿐입니다. 카를로스파는 아라곤 지역에 유래합니다. 아라곤 지역이 카탈루냐 지역을 합병할 때 내세운 것이 명분이었습니다. 해서, 카를로스파는 명분을 내세워 자치와 전통을 강조한 것입니다. 자치 최대강령이 독립이므로 자치 문제에서 명분에서 밀리니 내세운 것이 전통이었던 것입니다. 즉, 카를로스파는 카탈루냐를 설득할 때는 자치를 내세우고, 바스크를 설득할 때는 보다 복잡한 자치와 전통을 내세운 것입니다.
셋, 카를로스파는 스페인 내전에서 패배합니다. 허나, 이것이 바스크 전부일까요? 아닙니다. 바스크는 자치, 전통에 이어 생존을 중시했습니다.
혹자는 바스크가 프랑코 정권에게 배신당했다고 생각합니다. 일리가 있는 주장입니다. 실제로 스페인 내전을 보면, 프랑코는 보수적 카를로스파 지원에도 불구하고 게르니카를 공략하여 바스크 지방을 차지하니까요.
허나, 이것이 끝일까요? 대개 역사적 설명은 이후로 바스크 지방 발전이 없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빌바오가 역사에서 사라졌어야 합니다.
빌바오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 ··· d%3D3706
프랑코가 타격한 것은 열심당 바스크이지, 바스크 전체가 아닙니다. 프랑코 시절 프랑코와 바스크는 로마 황제와 나시 가문 바리새인과 같은 관계를 맺습니다.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18-8. 바스크와 방코 빌바오 비스카야 아르헨티나(BBVA), 그리고 구겐하임 미술관
"개인과 법인을 대상으로 대출, 저축, 투자금융 서비스, 펀드 운용, 자산관리 등의 서비스를 제공한다. 1857년 스페인거래소(Spanish Board of Trade)의 지원을 받아 통화 발행 및 할인 은행 업무를 하는 빌바오은행(Banco de Bilbao)이 세워졌다. 1901년에는 비스카야은행(Banco de Vizcaya)이 세워졌다. 1920년 은행가들과 제조업체들이 컨소시엄을 구성해 기업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장기대출 서비스 중심의 신용산업은행(Banco de Cr?dito Industrial, BCI)을 세웠다. 빌바오은행과 비스카야은행도 이 컨소시엄에 참여했다. 1998년 빌바오은행(Banco de Bilbao)과 비스카야은행(Banco de Vizcaya)의 합병으로 빌바오비스카야은행(Banco Bilbao Vizcaya)이 세워졌다. 1999년 빌바오비스카야은행은 아르헨타리아(Argentaria)와 합병하여 빌바오비스카야아르헨타리아은행(Banco Bilbao Vizcaya Argentaria)이 되었다. 이 합병으로 빌바오비스카야아르헨타리아은행은 시가 총액이 610억 유로에 이르는 스페인의 거대 은행이 되었다. 본사는 스페인의 빌바오에 있다. 2010년 기준 총 10만 6900여 명의 직원을 두었으며, 총자산 5527억 유로, 매출 209억 1000만 유로를 기록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 ··· d%3D2061
바스크 지역 빌바오에 본사가 있는 방코 빌바오 비스카야 아르헨티나(BBVA)는 프랑코가 사망하기 전인 1975년 전까지 스페인 최대 은행이었습니다. 바스크 지역은 광물이 풍부하여 19세기 주목을 받았습니다. 빌바오는 19세기 중반부터 바스크 지역 광물을 수출하는 역할로 부각한 도시입니다. BBVA는 광물 거래 활성화로 국제적인 은행으로 도약한 은행인 것입니다.
헌데, 빅터 로스차일드파인 프랑코가 죽고 난 이후 칸탄브리아 소재 지방은행에 불과했던 산탄데르 은행이 갑자기 미친 듯이 성장하여 오늘날 스페인 1위 은행이 되었습니다.
현대차 산탄데르 도킹
http://blog.naver.com/miavenus/memo/70106921486
2위는 BBVA입니다.
산탄데르가 무섭게 크니까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 BBVA입니다. 흥미롭게도 빅터 로스차일드가 사망한 1991년입니다.
이 시기는 스페인 빌바오에서 구겐하임 미술관을 구상하기 시작한 시기와도 일치합니다. 구겐하임은 광산업으로 떼돈을 번 대표적인 유태인 가문입니다.
18-9. 바스크와 몬드라곤
더 흥미로운 건 몬드라곤입니다.
몬드라곤을 보고, 협동조합을 배우자
http://blog.naver.com/miavenus/memo/70151114294
올해는 유엔이 정한 협동조합 해입니다. 하고, 이명박 정부는 협동조합법을 통과시켰습니다. 이 대목에서 중시해야할 인맥은 존스홉킨스 인맥인 것입니다만 넘어가기로 하고. 인드라는 협동조합법에 대해 우려를 표명한 바 있습니다.
이명박의 경제 정책 : 협동조합 기본법 개정안과 중소기업 전용 주식시장
http://blog.naver.com/miavenus/70133369740
왜 인드라는 국유본과 유엔, 이명박 정부, 골룸빡, 쪽발민주당이 지지 찬성하는 협동조합법에 비판적일까요?
"주로 양과 치즈 생산이 주류이며 그 외 축산물, 젤리가공 등이 있다. 이것들을 도시 소비자와 연결해 그들이 체험하고 관광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지역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소비한다. 수익금은 생산자에게 돌아가며 그 수익금 중 일부는 상근직원의 급여로 쓰인다. 이곳에서 판매되는 농산물은 시중 가격보다 월등하게 비싸다고 한다. 체험마을에서 농민이 갖는 수익은 유럽평균 27%인데 비해 이 마을은 85% 정도가 된다. 주변의 수려한 자연환경과 전통문화를 결합하여 한해에 2만여 명의 관광객들이 다녀간다. 이 협동조합은 4년 동안 이 지역의 땅 3%를 사들였고, 초지, 젤리 가공공장, 지역농산물 판매 가게 등 공동의 재산을 계속 늘려가고 있는 과정이었다. 처음에는 6명에서 시작해서 지금은 36명이 일자리를 갖게 됐다. 이곳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당장 자신의 사업들을 물려받을 후계의 문제가 부딪히고 있고, 아이들의 교육문제 또한 만만치 않았다. 자신들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주변의 환경이라고 말하며, 자신들이 대대로 사용해오던 3,500개에 달하는 생활용품, 농기구, 지역의 역사물 등을 자료화해서 방문객들을 모으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우후죽순처럼 체험마을이 생겨나고 있지만, 정작 마을 전체가 공동으로 운영하기 보다 몇몇 사람의 생업으로 전락하는 모습과는 대조적이다. 이곳의 책임을 맡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가장 중요한 일은 일자리 창출이라고 말한다. 공동의 자산을 지속적으로 늘려가고, 이를 통해 새로운 일자리를 꾸준히 늘려가면서 삶의 질을 높여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http://cafe.naver.com/lovfarm/379
인드라 관점은 몬드라고에 집중합니다. 인드라는 사노맹 실패 이후 한국에서 경실련, 참여연대, 환경운동연합 시민운동 바람이 불면서 몬드라고 관련 책을 접했습니다. 콤뮨 유행과 거의 일치했다는 기억입니다.
이때가 인드라가 군대 제대하고 새로운 혁명 이론을 개발하느라 골방에 처박혀서 오로지 혁명 이론을 공부하던 시기여서 독일과 유고슬라비아 등 자주관리 이론을 집중 연구하던 때입니다. 예서, 왜 자주이론인가 하면, 당시 주사파 쪽에서 동구권이 망해도 북한이 존립하는 이유로 관료주의 타파 자주관리 제도를 내세웠기 때문입니다. 해서, 인드라는 이를 이론적으로 혁파하기 위해 유고, 독일, 스페인 자주관리 제도를 공부했던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인드라는 일찍이 왜 레닌 방식만 옳고, 생시몽 방식, 로자 방식 등을 무시하는가에 대해 의문을 품었습니다.
이때 여러분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왜 좋은 제도가 한국에서는 어려울까요? 이에 대해서 노량진 학원강사 병쉰색희 최진기 같은 무식한 쪽발지태놈현경제학파 쥐색희들이 무조건 한국 제도를 비난합니다만, 실제 한국 제도가 문제일까요? 아닙니다. 환율 문제만 생각해도 쪽발지태놈현경제학파 주장이란 일고의 가치가 없을 정도로 치매 걸린 주장인 것입니다. 해방 전후 쪽발에게 차명계좌로 장사하던 쪽발지태놈현경제학파 넘들 주장이란 99.99% 사기입니다. 0.001%,인 것은 국유본이 전략적으로 인드라를 엿을 먹일 확률뿐입니다.
인드라가 정리한 바로는 몬드라고 문제는 북유럽 문제처럼 현지 특성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현지 특성을 무시하고, 무조건 도입하면 필히 망한다는 것입니다.
몬드라고 성공 요인은 무엇일까요?
하나, 카를로스 의용군 실패로 말미암아 프랑코 정부 하에서 자치권을 박탈당했습니다. 허나, 이는 정치적인 영역이었을 뿐입니다. 경제적으로는 오히려 바스크 경제가 확장하여 BBVA는 스페인 1위 은행이었습니다.
둘, 개성상인과 같습니다. 프랑코 정권 하에서 바스크 자치가 크게 위협을 당하니 바스크 에너지가 경제로 몰린 것입니다. 평상시라면 전혀 가능하지 않을 듯한 상거래가 가능해진 것입니다.
가령 여러분은 조악한 국산품과 세련된 외제품 사이에 능력만 된다면 외제품을 선택하지 않겠습니까. 허나, 정치적으로 내몰리면 경제적 손실을 도외시하는 것입니다. 바스크인은 형편없는 국산품을 애용하였습니다.
셋, 국제유태자본입니다. 아무리 지역적으로 공동체를 구성한다 해서 잘 나갈 수가 없습니다. 카톨릭 신부가 최초 구성한 협동조합도 근간이 농업이 아니라 생활가전 공업입니다. 우연스럽게도 1956년 소련이 헝가리를 침공한 시기에 시작한 몬드라고 실험 최대 우선 순위는 망하지 않는다는 신용이었습니다. 만일 국제유태자본이 몬드라고를 보증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몬드라고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요?
인드라는 북유럽 사회복지, 남유럽 몬드라곤, 독일 중소기업 모두가 환상이라고 봅니다. 현지 맥락, 역사 맥락을 읽지 못하고 무조건 도입하는 건 흡사 퇴직자를 노린 재벌이 편의점 장난과 비슷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준비하지 않고 편한 것만 추구하면 알거지가 되는 것입니다.
몬드라곤이 그토록 효과적이라면, 공동체가 많은 미국에서부터 큰 반향을 일으켰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몬드라곤이 오직 스페인, 특히 바스크 지방에만 국한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전시장인 것입니다. 따라 하기 힘든 모델하우스인 셈입니다.
몬드라곤 역시 빅터 로스차일드 사망 이후 시점인 1991년부터 남미를 중심으로 한 해외 진출을 하였고, 이때부터 몬드라곤이 자본주의화했다는 비판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정리합니다. 인드라는 협동조합이 주식회사보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고 봅니다.
하나, 월등한 자본입니다. 아무리 실패해도 무한정 자본을 투입하면 협동조합이 성공할 수밖에 없습니다.
둘, 월등한 과학기술입니다. 생산력이라 해도 좋습니다.
누군들 부채 없이 장사하고픈 마음이 없겠습니까. 누군들 독점적인 제품 개발하여 장사하고픈 마음이 없겠습니까?
특정 기업이 동종업계에서 급여가 두 배 이상 수준을 지불한다면 해당 분야에서 독점적인 지위이기 때문일 것이요, 독점적 지위인 이유가 월등한 품질 때문일 것입니다.
협동조합이 주식회사보다 나은 근로조건을 월등하게 제시할 수 있을 만큼 과학기술력을 발휘해 독점적인 시장을 유지하면 될 것입니다.
셋, 첫째, 둘째 요인에 비해서는 영향력이 작으나,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정치입니다. 당대 국유본 목표는 무엇입니까?
국유본은 바스크파 혹은 카를로스파는 물론 아나키파 좌우파를 모두 통제해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당근과 채찍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정치적 요구하는 카를로스파에게는 게르니카와 같은 처절한 응징이었습니다. 경제적 요구하는 카를로스파에게는 프랑코 정부 내내 키웠던 것입니다.
18-10. 바스크와 국제유태자본
"영국의 MI-6 소속 정보원이었던 허그 포랄드 소령은 스페인령 모로코에서 프랑코와 후안 마르크 오르디나가 스페인의 아프리카 주둔군 진영에서 접선하였다고 보고하였다."
http://ko.wikipedia.org/wiki/%ec%8a%a4 ··· 5a0%2584
쑹훙빙 '화폐전쟁'을 78 : 22로 읽자고 인드라는 주장한 바 있습니다. 가령 과거 역사 부문설명 대목에서는 긍정적으로 보되, 대안에서는 일절 무시하자고 했습니다. 이는 비단 쑹훙빙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쪽발 음모론자들 모두 포함하여 전 세계 대부분 음모론자들 책자가 포함되는 것입니다. 해서, 인드라가 책을 내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인드라가 만일 책을 내기로 결심했다면 이는 국유본에 포섭을 당한 결과인 것입니다.
쑹훙빙에 따르면, 빅터 로스차일드가 국유본에게 두 가지 길을 선택받습니다. 하나는 반 유태인 노선이요, 다른 하나는 친 유태인 노선인 것입니다. 예서, 빅터 로스차일드는 친 유태인 노선을 택한다고 합니다. 예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당대 영국 해외 정보부는 유태인 문제에 대하여 일방적으로 친 유태인 입장을 지지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영국 정보요원이었던 존 필비와 같은 인물을 거론할 수 있습니다.
http://economy.hankooki.com/lpage/opin ··· 3820.htm
유태인 문제도 이렇다면, 스페인 문제 역시 비슷하지 않겠습니까.
혹자는 국유본이 일방적으로 스페인 좌파에 편을 들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허나, 그렇다면, 스페인 내전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게 인드라 생각입니다.
하나, 프랑코는 결코 주류가 아니었습니다. 당대 보수우파 주류는 카를로스파였습니다. 허나, 카를로스파가 내세운 인물들이 연달아 의문의 죽음을 당하니 남은 것은 프랑코였습니다. 당대 프랑코 역할은 진보좌파 주류인 아나키파도 우파인 카를로스파에도 치우치지 않는 역할이었습니다.
둘, 스페인에서는 카탈루냐마저도 지배적인 사상은 아나키즘이었습니다. 헌데, 사회주의가 19세기에 맑스 사위 라파르크에 의해 들어옵니다. 라파르그는 아버지가 스페인 사람이고, 어머니가 프랑스계 유태인이었습니다. 사회주의는 카탈루냐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퍼지는데, 스페인 내전 시기조차도 사회주의는 카탈루냐에서조차 지배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카탈루냐 사회주의노동자당은 트로츠키 지도하에 아나키즘적 경향에 동조하지만, 스탈린은 이내 카탈류냐 사회주의노동자당을 부정하고 스페인 공산당을 만듭니다. 스페인 공산당 입장은 놀랍게도 히틀러나 무솔리니 입장과 유사했습니다. 우로는 카를로스파를 무찌르고, 좌로는 아나키스트를 박멸하는 것이었습니다.
셋, 이 당시 영국 입장은 소위 정통파 입장이었습니다. 정통파 입장이란 카를로스파가 추대한 인물을 부정하고 영국에 있던 스페인 왕가를 내세우는 것입니다. 이 당시 빅터 로스차일드는 케임브리지 멤버를 스페인 내전에 파견하여 소련 스탈린과 접촉을 하였습니다.
사마란치가 예가 될 수 있을까요?
카탈루냐 부르주아 출신 사마란치는 우파 프랑크 정권에서 출세하여 좌파 소련 대사로 갑니다. 소련에서는 사마란치 역량을 높이 평가하여 88 서울 올림픽을 성사시킵니다. 이처럼 기존 좌우파 이론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는 현실을 국유본론에서는 설명 가능한 것입니다.
18-11. 바스크와 칠레
오늘날 바스크인이 가장 많이 진출한 해외 지역은 어디인가요? 칠레입니다.
칠레는 특이한 나라입니다.
우선 아옌데는 유태인 출신입니다. 헌데, 칠레 남부에서는 독일계 이주민이 많이 살고 있습니다. 그뿐입니까. 요즘 한국인에게 칠레하면 와인이지 않습니까? 일반적으로 칠레 와인은 로스차일드 가문이 지배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예서, 칠레 차명계좌 소유주가 궁금하지 않습니까?
놀랍게도 칠레 경제계를 장악한 이들은 바스크 족속과 팔레스타인 족속입니다.
http://blog.naver.com/yupanqui/30024048953
상기한 블로거처럼 일방적으로 독일계를 비난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만, 이는 한국인이 국유본 역사책에 지나치게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좀 더 역사 공부를 하시길 바랍니다. 그렇다고, 역으로 독일계에 호의적인 것은 부작용일 것입니다. 이는 마치 일본계가 브라질에서나 페루, 미국 하와이에서 성공한 것을 역설적으로 과대 포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골드만파와 제이 록펠러, 클린턴은 유태계도 아니고 독일계도 아닌, 중국인도 아니고 일본인도 아닌, 대한민국적인 길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인드라 이웃 분은 외교에 달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힘이 없는데, 무슨 외교인가 하지만, 역설적으로 힘을 기르기 전까지는 외교가 중심일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과 칠레가 FTA를 맺은 것이 우연일까요?
아나키즘을 바쿠닌/한제국/백제/유가/우마이야/수니파/신성로마제국/비스마르크/페이비언/존 러스킨/기독교/경제조합주의/노조 중심/소비에트/지방주의/농민중심/농촌공동체/피카소/영지 발전물/바스크/빌바오/프리메이슨/뉴라이트/록펠러 사상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14 :목숨을 바칠만한 제국주의가 목표였던 페이비언협회
http://blog.naver.com/miavenus/70124447659
이에 반해, 사회주의란 맑스/신라/진제국/법가/압바스/시아파/클뤼니수도회/레닌/공산당/트로츠키/유대교/정치주의/당 중심/수령/중앙주의/노동자 중심/노동자 독재/달리/대체역사 제국건설물/카탈루냐/레알마드리드/일루미나티/노비네파/로스차일드 사상이라고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53 : 일루미나티
http://blog.naver.com/miavenus/70132601898
오늘날 국유본 골드만파 수장이자 실질적인 국유본 황제인 제이 록펠러. 록펠러 4세는 빅터 로스차일드와 데이비드 록펠러, 이 둘을 융합하려는 야심에 찬 기획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해서, 빅터 로스차일드 직계와도 협력방안을 연구중인 것입니다.
인드라는 정치를 하지 않겠으며,
책을 더 이상 쓰지 않으며,
언론에 기고하지도 인터뷰를 하지도 않을 것이며,
종교단체를 만들지도 않을 것입니다.
국유본론을 소명으로 여기고
지금처럼 살다
행복하게 가겠습니다
매일매일 행복하겠습니다
마.자.세.
한반도 평화와 통일, 경제 발전과 사회 복지를 위하여
친미친중 반일반북 쪽발정은 척살로 조국통일 쟁취하자
쪽발민주당 해체 쪽발석현 아웃
쪽발재벌 타도 골룸빡 처단
쪽발이에게 죽음을 쪽발왕에게 천벌을
쪽발타도해방투쟁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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