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드라 VS 김종화 : 종교개혁 프리메이슨 명예훼손 국유본론 2013

2013/11/24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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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드라 VS 김종화 : 종교개혁 프리메이슨 명예훼손

국제유태자본론 : 인드라 월드리포트 13/11/24 

   

김종화 :

선생님 안녕하세요. 요즘 동아시아 근대사 정리에 여념이 없으신데요. 그 와중에 프리메이슨이 부각이 되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은 프리메이슨이 과거에는 역사적 실체가 있었지만, 지금은 국유본의 귀속단체, 하위단체로 보는데요.

   

과거 역사적 실체가 있다면, 프리메이슨 기원을 어디서 잡아야 하는 것인지요.

   

인드라 :

프리메이슨 기원은 루터 종교개혁 이후로 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루터를 통해 전유럽에 카톨릭에 대항한 움직임이 가시화됩니다. 예서, 종교개혁을 하면 비판과 대안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니겠어요. 인민대중이 카톨릭이 무엇이 문제가 있고 문제가 있다면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나요? 라고 질문하니까 말입니다.

   

해서, 카톨릭 타락상에서 시작한 비판은 카톨릭 생성 시기로까지 올라가서 부정하기도 하고, 그 이상 더 기원을 찾기도 할 것입니다. 기원을 찾는다 함은 원조-짝퉁 논쟁에 필수적이니까요. 이때, 기록물이 중시가 될 터인데, 어디서 기록물을 구할 수 있겠어요? 유럽이요? 유럽에는 없지요.  중동과 스페인에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카톨릭을 비판하는 것이 아무리 진실이라도 내용이 카톨릭 비판이면  이교도 자료가 되므로 당시 유럽에서는 카톨릭에 대한 명예훼손이 되잖아요. 그렇다면? 그렇습니다. 십자군전쟁을 통해 기사단이 상당수 자료들을 약탈해왔는데, 이중에 미트라교와 같은 문제인 경우 카톨릭에 대해 치명적인 명예훼손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해서, 이런 자료들은 대중적으로 공개되기 보다는 극소수 귀족이나 대주교급들이 대외비 자료로 소유했을 것입니다.  

   

또 다른 문제는 번역입니다. 해석할 수 없다면 자료들이란 창고에서 썩어가겠지요. 헌데, 번역을 하려면 히브리어, 아랍어, 라틴어, 유럽어 등에 능통해야 합니다. 이런 인재들이 누가 있나요? 유대인들이죠. 중동에 거주했다면 히브리어와 아랍어에 능통하고, 스페인에 거주했다면 히브리어, 아랍어, 라틴어에 능통합니다. 하고, 스페인 추방 이후에는 유럽 각국언어에 능통하겠지요.

   

종교개혁 이전까지 자료와 자료 번역은 비밀리에 이루어질 수밖에 없을 겁니다. 하면, 극소수 상층 귀족과 대주교가 카톨릭 비판 자료에 흥미를 지닌 이유가 무엇일까요? 

   

프리메이슨? 그딴 것 없구요. 중세시대 내내 교황과 국왕/귀족파 대립이 있었는데, 왕과 상층 귀족이나 대주교가 권력을 유지하거나  국왕이나 교황이 되기 위한 방편으로 카톨릭 약점 뭐 없나 조사한 것이라고 보면 무방할 것입니다. 새로운 종교를 만든다든가 비밀조직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권력 유지 방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뜻맞는 귀족들이 서너명이 일시적으로 뭉칠 수는 있겠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헌데, 종교개혁 이후에는 양상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이전까지 카톨릭 비판이란 상층부의 권력투쟁을 위한 비공개적인 카톨릭에 대한 약점잡기 비판 분석이었다면, 종교개혁 이후에는 인민대중에까지 파급되는 전면적인 카톨릭 비판이었던 것입니다.

   

   

예서, 장미십자회 따위이니 하는 것보다 종교개혁 이후 프리메이슨이 가장 유명해졌는가.

   

하나, 다른 음모조직들이야 인민대중 조직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프리메이슨은 석공처럼 확실한 인민대중 조직이 있습니다. 종교개혁 이후에는 인민대중과 함께 해야하니 안성맞춤이었던 것입니다.

   

둘,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했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가 건축을 중시한 이유는 수메르와 이집트, 이란 등지에서 볼 수 있는 엄청난 규모의 건축물 때문입니다. 해서, 거대하고 화려하게 장식된 교회를 보면 인민대중이 자신도 모르게 신앙심을 느끼는 일이 많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일은 신이 지시하지 않고서는 어렵다 이런 생각이 들게 말이지요. 

   

셋, 마지막으로 카톨릭 교회 탄압에 맞서서 비밀교회라는 위험한 방식보다 프리메이슨 방식을 선호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연구모임과 같은 형식으로 비종교적인 조직으로 위장하기 편했던 것입니다. 

   

정리하면, 종교개혁 이전에 성당기사단이니 시온수도회이니 하는 건 중도좌파 민족주의자 박정희가 친일파다,라는 것처럼 구라일 뿐입니다.

   

김종화 : 

역시 이해가 그냥 되네요. 간단히 정리하면, 프리메이슨이란 종교개혁 이전까지는 극소수 일부 최상층 지배계급이 권력투쟁을 위한 카톨릭 약점잡기였다면 종교개혁 이후로는 최상층과 인민대중이 결합한 카톨릭 교회 타도투쟁이었던 것이로군요. 

   

하면, 영국에서, 그것도 유난하게 스코틀랜드에서 프리메이슨이 확산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인드라 : 

헨리 8세 때문입니다. 이혼을 위해 카톨릭과 대담하게 맞짱을 뜨고 영국 교회를 국교회/성공회로 만들었으 니까요. 이로 인해, 당대 유럽을 움직이던 강대국 중에 유일하게 비카톨릭국가가 된 것입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종교개혁 이후에 종교개혁가들의 거점으로 부상하게 된 것입니다.

   

해서, 헨리 8세 시절에 출세한 국왕파 귀족들과 대주교를 중심으로 카톨릭 교회에 맞짱을 뜨는 논리 등을 개발해야 하지 않았겠습니까. 이전까지 비공개조직이었다면 반공개조직으로 전환한 셈입니다.

   

헌데, 정작 헨리 8세 때보다 엘리자베스 때에 위력을 발휘하는데요. 이유는 엘리자베스가 스코틀랜드 여왕인 메리 스튜어트에 비해 왕위계승권이 후순위였음에도 불구하고 영국 여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정통성이 취약했어요. 하고, 메리 스튜어트는 스코틀랜드 여왕이요, 프랑스 왕비이며, 영국왕 계승권 1위 자격으로 엘리자베스를 몰아붙였습니다. 

   

애초에 헨리 8세 사후 국왕파 귀족들과 대주교는 엘리자베스와 무관하게 자신들만의 권력을 위해 프리메이슨연구모임을 하고 있었습니다. 딱 보면 알 수 있잖아요. 쪽발석현 골룸빡 쪽발찌라시 한경오프엠 등 한국 쪽바리들이 박근혜 대통령을 대하는 것처럼 당대 국왕파 귀족들이 엘리자베스 1세를 우습게 여긴 거죠. 해서, 박근혜대통령이 대통령이 되어서 한국 쪽바리들 다 죽어라, 하고 초기에 잠시 위세를 보이며 뭔가를 하려고 하니까 한국 쪽바리들이 급당황해서 소통 불통이네 뭐네하며 쌩쥐랄떨면서 박근혜 대통령을 압박해서 얻은 성과가 쪽발석현 똘마니 김기춘 비서실장되기 아니겠습니까. 박근혜 대통령으로는 울며겨자먹기로 쪽발석현 등 한국쪽바리 협박으로 김기춘 병쉰색희를 임명할 수밖에 없었겠죠. 냉정하게 말하면, 박근혜 대통령이나 쪽발석현 쪽발민주당 모두 국유본 세력인데 다만 국유본 내부 서열다툼 차원에서 박근혜대통령이 기선 제압을 하려고 했는데 적당히 타협한 결과다 이렇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엘리자베스 1세가 실권을 장악했다고 볼 수 없으니 첩보 귀족이 등장하는 것이지요. 인드라가 보기에, 엘리자베스 1세가 메리에게 증오심을 지녔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 반대로 메리도 마찬가지이구요. 후대 역사들, 특히 정보를 장악한 자들이 둘을 극적 라이벌로 만들었을 뿐이라고 보고 싶구요. 메리 초상화를 흉칙하게 그리고, 엘리자베스 1세를 예쁘게 그리기도 하는데요. 엘리자베스도 미인이었지만 메리도 큰 키에 미인이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메리 인터넷 초상화보면 못 생기게 그린 사진들로만 ㅎㅎㅎ 해서, 메리가 처형당하는 건 엘리자베스 1세의 의지라기 보다는 국왕파 귀족들 음모의 희생양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국왕파 귀족, 프리메이슨 귀족들이 엘리자베스 1세 이후에 제임스 1세를 임명했다고 인드라는 보고 있어요. 단지 계승 서열이 높다해서 왕으로 임명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국왕파 프리메이슨 귀족 속셈은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1세를 통일왕이라는 얼굴마담을 만들어서 영국은 물론 스코틀랜드까지 장악하려는 음모를 계획했는데요. 결과적으로 실패한 셈입니다. 

   

문제는 제임스 1세죠. 엘리자베스 1세와 달리 제임스 1세는 실세 왕이 되고 싶어했습니다. 그러하니 초기에는 사이가 좋았지만, 국왕파 프리메이슨 귀족들과도 사이가 틀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초기에는 제임스 1세도 프리메이슨이 되고, 영국에서 프리메이슨 귀족모임도 가졌다고 합니다. 이때, 프리메이슨은 왕쪽 대표가 의무 가입하고 귀족들만 가입이 가능했다고 합니다.  

   

헌데, 제임스 1세가 카톨릭을 탄압해야하는데 국교도이기는 하지만 어머니가 카톨릭교도여서인지 미온적이었다는 거죠. 더 냉정하게 보면, 제임스1세가 권력을 잡은 뒤 굳이 탄압해서 싫은 소리를 들을 것 없다는 입장이었겠지요. 허나, 국왕파 프리메이슨 귀족은 제임스 1세가 카톨릭을 탄압하기를 바랬을 것이고, 해서, 가이 포크스 의회폭파미수사건이 일어난 것이 아닌가 보고 있습니다. 음모론에서는 예수회가 어쩌구 하는데요. 인드라는 좀 새롭게 봅니다. 오히려 국왕파 프리메이슨 귀족들이 꾸민 덫이 아닌가 싶은 거죠. 왜냐하면, 이 사건으로 인해 제임스 1세는 그간 미온적인 태도를 버리고 카톨릭에 대해 적극 탄압하기 시작합니다. 마치 국유본이 병인양요 져주기 한판 일으켜서 흥선대원군 카톨릭 박해를 더 강화시키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인드라가 사실 그전까지는 가이 포크스에 대해서 우발적인 사건이라고 보았는데요. 요즘 국유본이 가이 포크스를 많이 선전해서요. 이런 건 당시 프리메이슨 음모일 가능성을 크게 한다는 거죠. 하여간 그 문제는 아직 뚜렷한 정황이 없는 단지 가설에 불과하니 넘어갑니다. 이후 한동안 사이가 좋던 제임스 1세와 국왕파 프리메이슨이 사이가 멀어지기 시작하는데, 제임스 1세가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면서부터입니다.

   

예서, 국왕파 프리메이슨 사이에서 분열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는 국왕파 프리메이슨에서 제임스 프리메이슨, 혹은 성공회 프리메이슨으로 가고, 다른 하나는 국왕파 프리메이슨에서 반제임스 프리메이슨, 장로교 청교도 프리메이슨으로 간 것입니다.

   

내분이 격화되자 동서고금 다른 조직들처럼 귀족 프리메이슨 조직이 약화됩니다. 이 과정에서 영국 역사에서 봐서 알 수 있듯 제임스 세력들이 붕괴됩니다. 제임스 세력이 붕괴된다는 건 제임스 프리메이슨이 무너진다는 것이죠. 찰스 1세는 왕비로 카톨릭 신부를 맞이하는 동시에 성공회 대주교와 연대를 강화합니다. 동시에 장로교 세력을 타격합니다. 이는 성공회 프리메이슨 VS 장로교 프리메이슨이었던 것입니다. 이 싸움에도 찰스 1세는 처형당합니다. 장로교 프리메이슨은 당시 유대자본과 손을 잡고 성공회 프리메이슨을 개박살낸 것입니다. 

   

헌데, 이 당시 스코틀랜드 국교가 장로회였습니다. 당시 스코틀랜드 종교상황을 보면, 칼뱅의 제자, 존 녹스가 유럽으로 피신갔다가 칼뱅을 만나 개종하고 돌아와 전도해서 스코틀랜드 교회 대부분이 장로교회로 바뀌었습니다. 시간이 흐르자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도 귀족파와 평민파로 분열되는데, 귀족파는 제임스 찰스에 호의적인 반면 평민파는 반제임스 반찰스 노선이 된 것입니다. 예서, 평민파 우세 장로교 프리메이슨 세력이 청교도혁명으로 장악한 셈인데요. 

   

이런 상황이면 평민파 장로교 프리메이슨이 확대되어야 하지 않느냐 하지만,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프리메이슨끼리 치고박고하니 당쟁싸움이어서 인민대중이 프리메이슨 조직들에 환멸을 느낀 거죠. 런던대화재 사건도 음모론적인 면이 있지만 당시 영국인에게는 천벌 비슷하게 느꼈나 봅니다. 또 이로 인해 석공 들 일자리도 없어졌구요. 석공들이 모든 건축물을 짓는 게 아니라 교회성당 건물만 건축하거든요. 런던 건물을 재건축해야해서 성당교회 예산을 주지 않으니 실업자가 되었죠. 일거리는 많은데 석공조직에 있으면 일거리가 없어 굶어야하니 말그대로 자유석공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노조탈퇴한 석공 노동자들이 자유석공인 거죠~! 여기다가 명예혁명으로 약 100여년간의 갈등을 봉합하는 움직임이 생깁니다. 

   

해서, 프리메이슨이 18세기초부터 재조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는 그야말로 진짜 석공과 귀족들 중심이었다면, 18세기초부터 재조직화한 프리메이슨이란 석공과는 무관한, 동시에 극소수 귀족들 전용조직과도 무관한 시민사회단체로 거듭났던 것입니다. 해서, 재조직화한 프리메이슨이 영국에서 처음으로 기획한 일이 영국 스코틀랜드 통합운동이었고, 성공합니다. 제임스 1세가 염원했으나 하지 못한 일인 것입니다.  

   

이후 18세기 내내 스코틀랜드는 전세계 프리메이슨의 고향이 된 것입니다. 미국독립과 미국혁명은 확실히 스코틀랜드 프리메이슨이 일으켰습니다. 허나, 프랑스혁명은 스코틀랜드 프리메이슨 작품이 아니라 프랑스 프리메이슨/독일 프리메이슨(일루미나티) 등 다양한 프리메이슨 조직들이 뒤섞어서 만든 작품인데 프리메이슨끼리 총질해서 망한 것입니다.  

   

대체로 스코틀랜드 프리메이슨은 상당수가 장로교 신자나 목사였고, 경제 발전에 비중을 두었고, 비정치적이었고, 평화주의 입장을 견지하였습니다. 다른 종교에도 관용적이었습니다. 

   

이에 반해 프랑스 프리메이슨과 독일 프리메이슨(일루미나티)들은 경제 발전보다는 정치적이었고, 전투적이고, 다른 종교를 박멸한다는 방식이었습니다. 하고, 프랑스혁명 주체세력들이 노조 전신인 길드에 대해서 매우 적대적이었다는 것을 참고해야 합니다. 석공이란 길드 조직 중 하나였잖아요.

   

프랑스 혁명 후에 프랑스나 독일에 있던 프리메이슨이나 일루미나티 등이 러시아로 가서 러시아 프리메이슨이 흥하는데요. 프랑스 혁명 이전에도 에카테리나대제 역시 허약남편 대신 정권을 장악한 계몽군주로 프리메이슨에 호의적이었습니다. 헌데, 프랑스혁명 당시 왕이 처형되는 과격함을 보이니 정치적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 등에 대해 부정적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고, 프랑스혁명 과정에서 상당수 프리메이슨이나 일루미나티는 회의를 느껴 전향합니다. 일루미나티 수장이었던 아담 바이사우프트도 죽기 직전 말년에 반성문을 쓰고 쓸쓸하게 죽어갈 정도였습니다.  

   

김종화 : 

선생님 설명에 따르면, 프리메이슨은 나폴레옹 전쟁 이후로는 침체했다고 하는데요. 맞나요? 

   

인드라 : 

맞습니다. 이유는 장로교 프리메이슨과 손을 잡았던 수메르-페니키아-카르타고-바리새인-스페인-포르투갈-네덜란드-영국-미국 유대인 중에 로스차일드 가문이 1815년 나폴레옹 전쟁 직후 혜성처럼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나폴레옹전쟁 이전까지 영국여왕-영국귀족-동인도회사-베어링가문-장로교 프리메이슨-유대자본이 한 덩어리였다면, 나폴레옹전쟁 이후부터 유대자본이 독립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김종화 : 

확실하게 말씀해주세요. 로스차일드가문이 일루미나티 창립에 관여했나요? 

   

인드라 : 

전허요. 당시 로스차일드 1세는 젓비린내나는 병쉰이었을 뿐입니다. 프랑스혁명에도 전혀 관련이 없구요. 1800년대 초반에 가서야 로스차일드가문다운 행보가 등장하기 시작하지, 그 이전에는 듣보잡이었습니다. 

   

김종화 : 

선생님은 미국에서 19세기 초중반에 프리메이슨이 탄압을 받은 배후에는 로스차일드 가문이 있다고 했습니다. 맞나요? 

   

인드라 : 

맞습니다. 비록 로스차일드 가문이 1815년에 큰 돈과 권력을 획득했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신흥 졸부 수준이었습니다. 1815년 체제에서는 영국-프랑스-오스트리아-프러시아-러시아-베어링가문 체제였습니다. 이것이 1871년 파리콤뮨과 보불전쟁을 거치면서 영국-프랑스-오스트리아-프러시아-러시아-로스차일드가문 체제로 바뀔 때까지 약 60년간 로스차일드 가문과 프리메이슨과의 권력투쟁이 있었던 것입니다.  

   

동아시아 같은 데서 아편무역을 할 때에는 손을 잡더라도 다른 지역에서는 치열한 권력투쟁을 했습니다. 

   

김종화 : 

프리메이슨이 1815년 이후 한동한 침체되었다고 하는데요. 언제 부흥하나요? 맑스는 프리메이슨과 관련이 없나요?

   

인드라 : 

부흥한다고 하는 건 유럽대륙, 특히 유럽대륙국가 중에 당대 대륙 최강이었던 프랑스에 해당하는 일입니다. 18세기까지만 해도 프랑스는 유럽 최강국이었습니다. 그러다가 프랑스혁명을 거치면서 19세기부터 프랑스는 영국에 뒤쳐지는 영원한 삼류국가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유는 영국 프리메이슨이 프랑스를 영국을 위협하는 적대세력으로 간주해서입니다. 헌데, 이조차도 1850년대를 넘어가면 프랑스에서 러시아로 적대국이 바뀝니다. 그만큼 프랑스가 이제는 만만해졌다는 것이지요. 프랑스는 맨날 정치투쟁하는데도 워낙 17, 18세기에 경제발전을 해서요. 19세기는 17,18세기에 해놓은 걸 까먹고 지내도 충분했던 것입니다. 나폴레옹황제 시절 약간 복구한 것이 있긴 하지만. 

   

아무튼 프리메이슨이 침체되어 유럽대륙에서 거의 잊혀질 정도로 되어가는 것은 나폴레옹 황제 덕분으로 프리메이슨이 내세웠던 목표들이 완성된 건 아니지만 상당 부분 전파되어 이미 진부한 것이 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것이 필요했지요. 동시에 혁명 와중에 전쟁 만큼이나 끔찍한 참상을 겪은 뒤라 일루미나티적인 것도 거부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일루미나티적 흐름 속에서 공산주의도 나타난 것입니다. 허나, 직접 연결하기는 곤란합니다. 맑스는 오히려 프리메이슨적, 일루미나티적 조직을 비판 해체시키고 공산주의자그룹을 만들었거든요. 물론 그 와중에 엥겔스적 후원과 엥겔스 후원 뒤에는 로스차일드 가문이 맑스 모르게 있었느냐 여부는 모를 일입니다. 맑스와 로스차일드는 친척관계거든요. 헌데, 맑스가 어머니랑 사이가 안 좋아서요. 어머니가 맑스 모르게 로스차일드 가문더러 맑스 좀 챙겨라, 라고 할 수는 있는데, 맑스가 로스차일드에게 구걸한 적은 없습니다. 

   

아무튼 1871년까지 유럽대륙에서 프리메이슨은 침체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도 부진했습니다. 반면 영국과 동아시아에서는 프리메이슨이 여전히 활발했습니다. 영국은 프리메이슨 본산이니 건들 수가 없었고, 유럽대륙과 미국에서는 현지 프리메이슨이 만만하니 로스차일드 유대네트워크가 대체할 건 대체할 수 있었구요. 동아시아에서는 같이 해먹어야 하니 연대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1871년부터 19세기말 약 30여년간 유럽 프리메이슨이 다시 흥합니다. 이 시기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자유의 여신상 사건이 있었습니다. 프리메이슨 작품이죠. 프리메이슨 부흥에는 맑스 권위 실추가 크게 한 몫합니다. 이 당시 엥겔스도 매우 외로웠다고 합니다. 국제노동자계급운동, 공산주의운동은 잊혀졌습니다. 이유는  1880년대에 비로소 영국 로스차일드에게 세습 남작작위가 수여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세계권력이 로스차일드 가문으로 넘어간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는 영국여왕-영국귀족-프리메이슨-베어링가문이 국유본권력을 장악하고, 일부를 로스차일드 가문에게 있었습니다. 1871년 이후부터는 국유본 권력 지분 상당 부분이 로스차일드 가문에게 있고, 그밖의 지분을 영국여왕-영국귀족-프리메이슨-베어링가문에게 있게 된 것입니다.

   

레닌은 1880년대부터 독점자본주의시대라고 규정했습니다. 독점자본이 자본주의를 지배하는 시대라고 말입니다. 그 이전에는 베어링자본과 로스차일드 자본이 자본끼리 자유경쟁하던 시기였다면 1880년대부터는 로스차일드 독점자본시대로 접어들었다는 것입니다. 이 시기부터 세계 중앙은행들이 연이어 설립되면서 중앙은행들이 연계한 신비로운 세계경제체제, 본격적인 제국주의시대가 작동됩니다.

 

해서, 이 시기는 로스차일드 가문이 국유본 권력을 장악한 뒤 탕평책을 쓰던 시기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프리메이슨이 자기 실력으로 부흥한 것이 아니라 로스차일드가 탕평책을 쓰니 살아난 것처럼 보였을 뿐이라는 겁니다.

   

김종화:

20세기는 어떤가요?

   

인드라 :

로스차일드 가문 전성시대였는데요. 특이한 건 로스차일드 가문이 십년 주기로 유대네트워크(편의상 일루미나티로 하지요) VS 프리메이슨을 교대로 가동합니다.

   

1900년대에는 시온의정서로 반유대 기치를 내건 프리메이슨 시대였습니다.

1910년대에는 록펠러를 때려잡자 일루미나티 시대였구요.

1920년대에는 반유대 프리메이슨 헨리 포드를 내세운 프리메이슨 시대였습니다.

1930년대에는 유대인 루즈벨트를 내세운 프리메이슨 시대였습니다.

1940년대에는 이차대전 때인 전반기에는 반파시즘 반나찌 반쪽발 일루미나티이었는데

              전쟁 후인 후반기에는 반공 프리메이슨이었습니다.

1950년대에는 반공 프리메이슨 시대였습니다.  

1960년대에는 반문화 반전 히피를 내세운 일루미나티 시대였습니다.  

1970년대에는 마침내 국유본 권력이 빅터 로스차일드에서 데이비드 록펠러로 바뀝니다. 

   

김종화 : 

로스차일드 시대와 록펠러 시대 차이는 무엇인가요? 프리메이슨에 대한 차이가 있나요?

   

로스차일드 :

큰 차이가 있습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공산정권의 후원자였습니다. 프리메이슨에 대해서는 필요할 때만 이용했을 뿐, 어느 정도 키우다가 커지면 버렸습니다.

   

반면, 록펠러 가문은 정반대입니다. 역으로 필요할 때만 약간 키우되 결국은 일루미나티를 죽입니다. 이를 위해 프리메이슨을 키웁니다. 1973년 전 세계 프리메이슨 랏지 중 가장 큰 규모인 동시에 전 세계 민족해방운동 중 상당 부분을 관리하는 프랑스 프리메이슨 대동방 세력이 거의 백수십 년간 대외활동을 중지했다가 재개한다고 발표했습니다. 데이비드 록펠러가 후원하기 때문입니다. 인드라가 보기에 생시몽 재단이라든가 프랑스 정당들은 모두 데이비드 록펠러 소유입니다. 프랑스 공산당만 로스차일드 소유입니다. 

   

냉전이 무너지고 소련이 붕괴한 건 데이비드 록펠러와 프리메이슨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데이비드 록펠러를 따르는 프리메이슨 조직을 오늘날 이름으로는 삼극위원회라고 합니다.  

   

반면 과거 로스차일드 가문과 함께 했던 조직은 빌더버그입니다. 해서, 지금 빌더버그가 해체 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1990년대부터 동인도회사 해체과정처럼 아주 느리게 말입니다.  

   

다만, 역사의 수레바퀴가 어디로 향할 지는 알 수 없습니다. 빌더버그는 죽더라도 다른 조직이 대체할 지는 말입니다. 다만, 국유본 권력이 교체되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습니다. 

   

   

   

"이와는 또 다른 프리메이슨의 기원에 관한 설이 있습니다. 이 설은 나름대로의 역사적인 근거와 개연성도 가지고 있지요. 그러나 그다지 매력은 없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와 시종들

   

프리메이슨(1)에서 말했듯이 로마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1세는 이교 탄압 정책을 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도에게 유스티니아누스 1세를 아주 좋아했던 것은 아닙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황제가 종교를 포함해 지구상 모든 것의 왕이요, 최고 권위라고 주장함으로써 교항이 그리스도를 대리한다고 말하는 카톨릭과 갈등을 빚었습니다. 그러나 로마가 퇴락한 이후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카톨릭이 되었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기독교를 전 세계(당시의 세계)에 퍼트렸고 나중에는 이슬람 세력과의 전쟁을 위해 게르만을 포기하면서 유럽지역은 교회와 교황의 세력 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없었다면 현재의 기독교가 없다고 봐도 되는 것이죠.

비잔틴 양식의 건축물

   

또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비잔틴 양식이라 불리는 새로운 디자인과 건축물을 등장하게 하였습니다. 건축을 장려하면서 제국 곳곳에 거대한 기념비와 건축물을 세웠던 것이죠. 이것은 훗날 이슬람과 중세 유럽의 고딕 양식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중세라고 불리는 이상한 열정의 시대에 신의 영광을 위해 돌을 깎는 행위는 매우 신앙적 작업이었습니다. 때문에 종교적 신앙뿐 아니라 이를 돌에 표현할 수 있는 재능까지 갖춘 이들은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일을 맡았습니다. 이들은 스스로를 자유 석공free masons이라고 불렀습니다만 아직까지는 고용주의 지시에 따라야 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고용주가 왕이든, 시 당국이든 교회든 간에 석공들의 노동과 삶은 엄격한 규정을 따라야 했슷비낟. 임금의 상한선이 동결되어 있던 당시의 상황은 자연스럽게 비밀 노동조합을 결성시키는 결과를 만들었습니다.

   

석공들에게 개별적으로 협상하는 부담을 지지 않기 위해 고용주들은 규제를 한층 더 강화했습니다. 1360년에는 석공과 목수들 사이의 비밀 합의 및 비밀 서약을 금지하는 법이 제정되었고 1425년에는 영국 석공들이 아예 모임을 가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채 2년도 지나지 않아 법은 유명무실해졌고 그 효력을 강화시키려는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영국의 자유 석공들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와 독일의 석공들도 성당 건축 시기 동안 직업적 재능 덕분에 특권을 했고 여러 비밀 단체를 만들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콩파뇽Compagnons이라 불렸고 독일에서는 슈타인메첸Steinmetzen이라 불렸습니다. 이 단체들은 상징적 의식을 거쳐 다른 유럽 나라의 석공들을 받아들이는 중심 세력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이 때 독일의 어느 작은 교회에서 일어난 일이 건축에 종사하는 기술인들이 충분한 대가와 대우를 받기 위해 만든 형제애 모임에 불과했던 프리메이슨이 직종에 상관없는 광범위한 남성 단체로 바뀌게 만들었습니다.(물론 유럽의 역사 자체를 바꾸기도 했습니다. 아니 세계의 역사를 바꾸었지요)

   

1490년에서 1499년에 걸쳐 현자 프레데렉 선제후를 위해 세워진 숄스키르헤 성당에는 시 공무원이나 대학 직원, 교수와 학생들이 쪽지나 공고문을 붙이는 나무 출입문이 있었습니다.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라고 하는 34세의 수도사가 그 문에 종이 한 장을 붙였습니다. 1507년에 사제 서품을 받은 그는 전기 작가에 의하면 '신경질과 불평이 많으며 이상주의적이고 논쟁적인 성격'이었다고 합니다. 마르틴 루터는 교회 성직자들, 혹은 교회 제도라는 중간 매게자가 신과 인간 사이에 설 자리는 전혀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종교 혁명의 본질이 이럴진데..... 만약 마르틴 루터가 우리나라에 와서 교회 현실을 보았다면 크게 화를 낼 것입니다. 새벽기도가 무엇이고 십일조가 무엇입니까. 성전이 무엇이고 목사 세습이 무엇입니까. 중세 카톨릭이 밟았던 부패의 길을 그대로 걷고 있는 우리나라의 기독교를 보면 대갈할 것입니다) 영혼의 구제를 위해 필요한 것은 오직 믿음 뿐이라고 확신한 그는 교회 제도를 공격하는 글 '95개조 반박문'을 교회 문에 붙이고 프로테스탄트 개혁을 시작하였습니다.

   

반성직자 운동이 퍼져나가는 와중에도 영국의 프리메이슨은 계속 카톨릭교회에 충실하였습니다. 불법 노동조합을 꾸리는 이들이 종교문제에 있어서는 매우 준법적이었다는 것이죠. 캐서린과의 결혼을 무효로 하고 애인 앤 볼린과 결혼을 하려함을써 성직자들과 충돌했던 핸리 8세는 1534년 수위령을 반포하면서 스스로를 영국 교회의 수장으로 만들었습니다.(성공회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왕으로선 대단히 편리한 방법이었지만 프리메이슨은 그로 인해 식어버린 건축붐으로 인해 쇠락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언제부터 석공일을 하는 기술자들의 모임이 아닌, 석공 연장을 상징으로 삼아 삶의 수수께끼나 삶의 의미를 관조하는 모임으로 성격이 바뀌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1646년의 기록을 보면 프리메이슨 지부가 엘리아스 애쉬몰Elias Ashmole이라는 귀족과 헨리 메인워링Henry Mainwaring이라는 대령을 가입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이 새로운 관행이라는 언급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그 전에 이미 성격이 바뀐 것으로 여겨집니다.

종교 개혁가 마르틴 루터

   

프리메이슨은 서서히 비밀노동조합에서 비밀 결사와 같은 성격으로 바뀐 것 같습니다.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 복잡한 가입절차와 상징, 의례등을 만들었고 모든 것을 서열에 따라 나누었습니다. 헨리8세의 저항과 함께 시작하여 윌리엄 오렌지 경이 프로테스탄티즘을 정착시키면서 종결되었던 종교적, 정치적, 사회적 변혁과 소요, 시민 전쟁의 시기에 이 시기에 프리메이슨의 거의 모든 것이 형성되었고 결속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런 혼란이 끝나갈 무렵 런던은 연이어 두 가지 재난을 맞았습니다. 1665년, 흑사병이 돌아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고 다음해에는 대화재가 발생해 가옥 4만 채와 교회 86곳을 태워버린 것입니다. 도시를 재건해야 했지만 런던만의 석공으로는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영국 전역에서 숙련공들이 모여 위대한 건축가 크리스토퍼 렌 Christopher Wren경 휘하에 결집했습니다. 그러나 건축붐은 일었지만 교회를 짓는 일은 거의 중단되었고 이로 인해 프리메이슨 지부도 침체 되었습니다. 남아있던 지부들도 의식과 상징을 거의 잃어버렸습니다. 연례행사가 중단되었고 런던의 지부도 4 곳이나 버려졌습니다. 1700년이 되자 영국 전체에 지부라고는 6개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프리메이슨 반대 운동도 일어났습니다. 1698년 런던에 유인물이 배포된 사건이 대표적인데 Mr. Winter라는 인물이 서명한 이 유인물은 '신심 깊은 모든 이들에게 프리메이슨이라 불리는 이들의 해악과 악마적 관행을 경고'했습니다. 그리고 '이들 악마적인 부류는 비밀리에 만나 자신의 믿음 외에는 모든 것에 반대하겠다는 맹세를 한다. 이들은 신에 댛나 두려움을 잊게 만드는 반그리스도이다'라고 썼습니다.

크리스토퍼 렌 경의 초상화

   

결국 프리메이슨의 미래를 위협하는 상황을 맞아 런던의 네 개 지부 회원들은 영국 내 모든 지부를 총괄하는 총지부를 만들기로 결정했습니다. 1717년 2월(보통의 백과사전에 기록된 프리메이슨의 결성일입니다) 네 지부가 모두 모였습니다. 성 베드로 성당 근처 구스 앤 그리디론Goose and Gridiron술집에서 모이던 지부1, 파커스 레인의 크라운Crown술집에서 모이던 지부2, 코번트 가든의 애플트리Apple Tree술집에서 모이던 지부3, 웨스트민스터 채널 로우Channel Row의 러머 앤 그레이프스Rummer and Grapes술집에서 모이던 지부4가 그들이었습다. 규모가 가장 큰 것은 회원 수가 70명 가량인 지부 4였습니다. 1717년 6월24일(이날은 프리메이슨의 수호성인 중 하나인 세례자 성 요한의 날이기도 합니다)에 구스 앤 그리디론에 다시 모인 이들은 지부 3의 회원인 엔서니 세이어Anthony Sayer를 총지부장으로 선출합니다. 이후로 1722년 존 몬태규John Montagu공작이 선출되고 278년동안 총지부장 지위는 귀족이나 왕족이 독점합니다."

http://blog.naver.com/miavenus/memo/70179833637

   

    

   

http://phoenixjournals.wavenews.net/threads/27573-제137-139권-유태인들의-영국-지배사

   

"여왕 폐하의 비밀 정보기관[Her Majesty's Secret Service]의 숨겨진 역사에 대해서는, 미국 내에서도 정보기관 그룹[Intelligence Circles]을 제외하고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으나, 그 연원은 400년도 넘게 거슬러 올라간 약 A.D. 1570년경에 이른다. 처음에는 단 두 사람으로 시작되었으며, 그 중 한 명은 프랜시스 웰싱햄 경[Sir Francis Walsingham](1532-1590)으로 그는 진취적인 영국 프리메이슨[English Freemason]이자, 당시 (튜더 왕조[the House of Tudor]) 엘리자베스 1세 여왕[Queen Elizabeth I] 휘하의 양대 국무장관[Joint Secretary of State] 중 한 사람이었다. 여왕의 스파이 업무 최고 책임자로서, 웰싱햄은 정교한 스파이 시스템을 구축했으며, 그 때 당시 꾸몄던 불행한 음모는 궁극적으로 (스튜어트 왕조[the House of Stuart])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Mary Queen of Scots]을 덫에 걸려들게 만들었고, 1587년 결국 그녀의 참수로 이어졌다. 메리 여왕은 그 무렵 카톨릭을 배후로 한 음모를 꾸며, 엘리자베스를 죽이고, 자기 자신이 영국 여왕으로 등극하려는 의도를 가졌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메리는, 진정 독사 같은 인물이자 야심차고 양심의 가책이라고는 없었으며, 동성연애자이자 프리메이슨이었던 스코틀랜드 제임스 6세 왕[King James VI]의 어머니였다. 제임스 6세는 로마와 공모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엘리자베스 여왕과는 연대를 맺기도 했었는데, 그는 "어머니의 처형이 있을 당시, 조용히 이를 받아들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세 영국에서 있었던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을 둘러싼 모든 음모와 간계들을 주의깊게 살펴보면, 메리는 당시 영국 여왕을 둘러싸고 있던 메이슨들이 꾸민 영리한 장치[clever set-up]에 걸려 들었던 불행한 희생자였다는 주장도 제기 된다. CIA 국장을 지낸 앨런 덜레스[Allen Dulles]가 쓴 '정보기관의 술수[The Craft of Intelligence](1963년)'라는 책에 보면, 이러한 의혹을 이내 확인해 볼 수 있다. 덜레스의 서술에 따르자면, 메리는 실로, 웰싱햄의 교활한 음모 가운데 하나에 "성공적으로 걸려 들었던" 것이다. "웰싱햄 덕택에,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을 영국 여왕으로 옹립하려 했던 바빙턴[Babington]의 어리석고도 엉성한 음모는, 엉뚱한 결말을 맺게 되었고, 결국 엘리자베스로 하여금 메리의 처형을 명하는 문서에 서명할 구실만을 만들어 주었다." 메리는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위치한 스타 체임버 법정[Star Chamber Court](15세기 후반부터 1641년까지 운영되었던 법원으로 일반 법원에서 다루기에는 부담이 되는 거물급 인사들의 재판을 담당--역주)에 기소되었으며, "엘리자베스의 암살 음모를 입증하는, 웰싱햄의 손으로 쓴, 많은 편지 카피본들이 주된 증거가 되어 결국 사형을 선고받게 되었다." 이 악명 높았던 스타 체임버는, 헨리 7세가 봉건시대 군주들의 전횡을 막기 위해 설립했던 법정으로, 그 이전에는 유태인들과 관련된 각종 권리 증서나 "문서들[starres]"(starr는 헤브루어로 'document'를 의미--역주)을 안전하게 보관하는 장소로 쓰인 곳이었다. 스타 체임버는 튜더 왕조시대 형사 재판소와 마찬가지로, 배심원들의 결정과는 독립적으로 운영되었다. 

   

웰싱햄과 함께 영국 정보기관을 세운 또 한 명의 공동 창립자는 윌리엄 세실(버레이 경) 1대 남작[William Cecil(Lord Burleigh), 1st Baron](1520-1598)으로, 그는 28세에 이미 상당한 정치적 권력을 거머쥐었던 인물로,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최고 참모[chief adviser]가 되어, 이후 약 40년 동안 그녀를 보좌했다. 그는 캠브리지 대학을 졸업하고,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 재임시절(1542-1567)에는 로마 카톨릭을 따랐었다. 그러나 이후 1570년, 그는 엘리자베스 여왕 정책의 교활한 기안자이자 주의깊은 지휘자가 되었으며, 메리 여왕에 대한 직접적인 음모를 꾸미기 위해 스파이 조직을 구성했으며, 심지어 훗날 그녀가 처형되기 전부터 그녀를 죽음으로 이끌었던 실질적인 책임자로 간주되었다. 당신들도 기억하겠지만, 영국 프리메이슨의 그랜드 마스터였던 토마스 색빌[Thomas Sackville](1536-1608, 영국 시인, 정치가--역주)은, 메리가 잔인하게 참수되기 직전에, 그녀의 사형을 발표하는 인물로 선정되기도 했다.

   

웰싱햄이 주도했던 메이슨주의에 기반한 영국 스파이 기구의 성장 과정에 있어서, 신규 요원 채용과 관련하여, 외교관계위원회(CFR)의 위원이자 전 OSS의 관리였던 덜레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옥스포드와 캠브리지를 졸업한 가장 재능있는 젊은이들이 주 대상이었으며, 웰싱햄은 이들을 다시 프랑스로 유학 보냈는데, 프랑스 법원을 비롯한 주요 기관에 침투시켜 프랑스의 대영 전략을 파악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

   

이 양 대학교는 여전히 영국 정보기관 인력 충원에 활용되고 있으며, 꼭 마찬가지로 CIA는 주요 인력을 하버드와 예일(이 대학들은 영국 식민지 개척자들에 의해 창설되었다.)에서 끌어들이고 있다. 자신의 책에서 영국 상류 계급과 정보 기관 활동을 높이 찬양하는 한편, 로스차일드 가문에 대해서도 많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알렌 덜레스는, 나아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밝히고 있다. : "웰싱햄의 지휘 아래에서, 영국 국무장관이 국내 및 국외의 많은 서신들을 중간에서 가로 채, 열어 보고, 읽어 보고, 다시 봉해서 원래 발송지로 재송하는 것은 일종의 관행이 되었다. 이에 따라 비밀 서신은 코드나 암호로 쓰여져야 했고, 웰싱햄은 이 업무에 관한 전문가, 예를 들면, 토마스 펠리페스[Thomas Phelippes]와 같은 인물을 고용하기도 했는데, 그는 암호문 서기이자, 암호문 분석가의 역할을 했다. : 말하자면, 그는 비밀 코드를 개발하여, 웰싱햄이 가로챈 메시지 안에 집어 넣기도 했던 것이다. 요컨대, 웰싱햄은 최초로 진정한 의미의 '전문 정보기관 서비스'를 만들어 냈던 인물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이내 프랑스 재상 리슐리외[France's Cardinal Richelieu]라는 라이벌을 만나기도 했다. 하지만, 19세기가 되기까지 이들만큼의 스파이 전문가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임마누엘 레볼드[Immanuel Rebold]의 가장 흥미로운 책인 '프리메이슨 일반사[A General History of Freemasonry]'에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이 나와 있는데, 바빙턴 사건[Babington affair]이 발생하기 몇 년 전이었던 1561년, "엘리자베스 여왕은 프리메이슨들이 그녀의 부군에게 종신 그랜드 마스터 지위를 부여하지 않는 데 분개하여, 같은 해 12월 27일, 메이슨 단체에 대해 해산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바로 그 날은 메이슨들이 준-연례 모임[semi-annual meeting]를 가진 날이기도 했다. 여왕은 자신의 칙령 수행을 위해 무장한 부대도 파견했다. 그러나, 여왕의 명을 받았던 부대 사령관이 이 모임이 정치적으로 무해한 성격을 띤 것이라고 보고하자, 여왕은 자신의 명령을 철회했다. 이후 엘리자베스 여왕은 그녀의 왕국에서 프리메이슨들의 보호자[protectress]가 되었으며, 프리메이슨들이 토마스 색빌[Thomas Sackville]을 그랜드 마스터로 선택한 것도 추인해 주었다." 색빌은 자신이 얻게 된 이 새로운 지위의 직접적인 결과로서, 귀족들 간에 있어서는 벅허스트 남작[Baron Buckhurst]으로 추대되었으며, 나중에는 제 1대 도르셋 백작[1st Earl of Dorset]이 되기도 했다. 이후 영국에서 프리메이슨들의 조직은 항상 상명하달 방식으로 운영되었으며, 대개 대단히 부유한 자들로 구성되었고, 사회내 노동자 계급은 포함되지 않았다.

   

몇 년 후인 1578년, 프란시스 베이컨 경[Lord Francis Bacon](1561-1626, 영국 철학자, 정치가--역주)은 아직 십대였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에서 파울렛 대사[Ambassador Paulet] 수행원의 일원으로 템플 기사단 단원[a Knights Templar]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비밀 단체에의 가입이 정확히 어떤 절차를 거치는 것인지 궁금해 했으며, 또한 이 단체는 사실상 동성애에 기반한 의식도 갖는 것으로 알려졌기에, 가입 초기 단계에 그런 류의 통과 의례를 거치는지도 궁금해 했다. 어떻든 간에, 베이컨은 캠브리지에서의 뛰어난 학업 성적으로 인해 영국 정보기관의 일원으로도 활동 중인 것으로 여겨졌던 인물이면서, 동시에 평균적인 수준의 메이슨이기도 했다. 오컬티스트 맨리 팔머 홀[Manley Palmer Hall]이 쓴 '메이슨 형제단[Masonic Orders of Fraternity]'에 보면,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 "게마트리아[gematric](전통 유태 방식에 따라 단어나 문자에 숫자를 할당하는 시스템--역주) 숫자 등치 방식에 따르면 b,a,c,o,n이라는 문자는 메이슨적인 의미로는 숫자 33을 가리킨다.--이는 고대 의식과 전래된 스코틀랜드 의식에 따른 '단계'를 가리킨다. 문자 A.U.M.은 아르티펙스 유니베르수스 문디(세계의 위대한 건축가)[Artifex Universus Mundi(The Great Architect of the World)]라는 말로 간주되며, 같은 방식의 숫자적 독해에 따르면 역시 총합이 33이 된다. 따라서 A.U.M.은 '베이컨[Bacon]'에 해당하는 카발라[cabala](유대 신비교의--역주)인 것이다." 그렇지만, 홀이 의도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사실이 있다면, 세상의 모든 33단계 프리메이슨들은 이 "위대한 건축가"--즉 루시퍼[LUCIFER]--를 숭배한다는 점이다!

   

A.D. 1600년, 웰싱햄 사후 10년이 되는 해이자, 세실 경이 죽은 지 2년지 지났을 무렵, 그들의 비밀 승계자들은, 시티 오브 런던에서 소그룹으로 활동하던 부유한 마라노 유태인(신분을 숨긴 유태인들--역주) 상인들[Marrano Jewish Merchants]과 조용한 연대 관계를 맺었으며, 이들은 노년의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긴급히 무역 독점권[trading charter]을 자신들에게 허가해 줄 것을 강요했다. 무역 독점권이 부여되고 난 후 처음으로 설립한 것이 영국 동인도 회사[British East India Company]였다. 정보기관 요원들과 유태인들은 자신들의 공동 작전의 성공에 크게 흥분했다. 한편, 초기 형성 과정을 거쳐 발전해 나가던 영국 정보 기관은 이제, 이전부터 해오던 모든 작전들의 범위를 대폭 확장시키기 시작했다. 왕으로부터 권한을 부여받은 이들은 인도를 시작으로, 많은 다른 나라들과 무역 카르텔을 형성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과 그들의 지도자에게 이득이 되는 전쟁도 조장했다. 또한 대단히 이윤이 많이 남는 사업이었던 마약 거래의 토대도 형성했다. 2년 후, 암스텔담에서 네덜란드 정부를 좌지우지해 오던 사립의 유태계 은행가들은, 엄청난 이윤의 낌새를 눈치채고, 영국의 전철을 밟아, 마찬가지로 끔찍했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Dutch East India Company]를 설립했다. 이들은 재빠르게 자신들만의 마약 거래 사업을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비극'을 다루는 추악한 일이었지만, 또 하나의 높은 이윤을 남기는 사업에 곧 착수했다.--흑인 노예 무역! 역사 기록에 따르면, 이 특별한 유태계 무역상들은 아프리카 서부 해안으로부터 흑인 노예들을 잡아다가 '신 세계(대륙)'에 처음으로 공급했다. 이들은 1619년, 마치 여느 가축들을 다루듯, 버지니아 제임스타운[Jamestown, Virginia]에다 흑인 노예들을 하역했다. 그들은 마찬가지 방식으로 영국의 엘리트들에게도 유사한 인간 화물들을 공급했는데, 다수의 노예들은, 셀 수 없이 많은 배에 나눠 실린 채, 사나운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동안, 냄새나는 갑판 아래에서 쇠사슬에 묶인 채 고통 속에 죽어 갔다. 이들 비정한 유태계 노예 상인들은 값싼 장신구, 구슬, 거울, 색유리 등을 오늘날의 나이지리아에 해당되는 지역에 살던 원주민들에게 물물교환의 대가로 건넸으며, 이 곳 원주민들은 아프리카 내륙 지방을 약탈하여, 다른 흑인 부족들을 포획하고 노예로 사로잡았다. 반드시 주목해야 될 사항이 있다면, 이러한 모든 일들은 영국 동인도 회사의 협조 속에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노예 거래를 했던 이들 네덜란드 유태인들은, 현대 역사에서 볼 때는, 사실상 두번째였으며, 처음 노예 거래를 시작했던 건, 그들과 같은 종교를 가졌던 포르투갈 유태인들로, 이들은 약 1세기 전에(1503년) 검은 대륙에서 불행한 흑인들을 잡아다 노예로 삼았었다.(이보다 앞선 시기의 노예 거래는 주로 로마 제국에 의해 행해졌다.)

pp.96-99 

   

그러는 동안, 1603년 엘리자베스 여왕이 죽자 마자, 스코틀랜드 메리 여왕의 37세된 아들은 영국 국왕이 되었다. 맨리 팔머 홀이 의미심장하게 언급한 것처럼,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James VI]는 (또한) 메이슨주의[Masonry]에 호의적이었으며, 정식으로 지정된 롯지에서 메이슨이 되는 과정을 거친 인물이기도 했다. 그가 대영제국의 제임스 1세가 되었을 때, 그는 메이슨주의를 장려했다. 그를 승계한 찰스 1세[Charles I] 역시 메이슨으로 받아들여진 인물이었다." 말하자면, 프리메이슨과 영국 정보기관은, 정보기관 태생 시기부터, 명백하게 그리고 복잡하게 상호 연계되어 있었다. 프리메이슨은 최소한 16세기 중반 이래, 영국 왕실과 영국 귀족 사회에 의해 보호되는[royally protected] 단체였다. 이처럼 상호의존적인 관계는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제임스 1세나 찰스 1세 모두, 엘리자베스 여왕이 그랬던 것처럼, 정보기관을 광범위하게 활용했으며, 요원들은 주로 외교관으로 위장하여 다른 나라에 파견되었다.--특히 프랑스.

   

그러나, 제임스 1세는 자신의 불행했던 어머니와는 달리, 아주 격렬하게 반-카톨릭적 태도를 취했으며, 대관식이 있은 지 1년 후 영국내 모든 예수회를 금지시켰다. 이후 1606년에는 당시 영국에 살고 있던 카톨릭 교도들을 억압하기 위한 대단히 엄격한 법률안을 통과시키기도 했다. 또한 이 무렵 그는 햄프턴 궁정 회의[the Hampton Court Conference]를 열었으며, 이를 계기로 1611년 아름다운 킹 제임스 성경[King James Version of the Holy Bible]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새로운 성경을 만든 데에는 단 하나의 목적이 있었다. : 그는 이 새롭게 공인된 영어 번역 판본이 1525년에 만들어진 틴달 성경[the Tyndale Bible of 1525]을 대신하는 것을 넘어 사실상 부인할 것을 명령했다.[하톤: 아직도 이러한 성경들에 조작과 변경이 없었을 것이라고 보십니까?] 틴달 성경은 10년도 넘는 기간동안 윌리엄 틴달[William Tyndale](틴달은 위압적인 주교들과 왕세자들의 뜻에 반해서 작업했으며, 그들은 틴달 성경을 불태울 것을 명령했다.)이 번역했던 훨씬 더 정확하고 포괄적인 성경이었다. 틴달 성경은 고대 그리스어 판본으로부터 직접 번역했던 것으로, 당시 존재하던 다른 어떤 문서들보다 훨씬 더 진실에 가까웠다. 킹 제임스 성경은 앞선 판본에 나와 있던 진실을 효과적으로 두리뭉실하게 만들어 버렸으며, 예수를 유태인으로 바꿔놓은 데다가[turned Jesus into a Jew], 마틴 루터[Martin Luther]의 참된 기독교 프로테스탄티즘을 일종의 휴머니즘적인 독트린으로 변경시키려는 시도도 했다. 그 과정에서, 예수와 그 제자들이 사용한 언어이기도 했던 훨씬 초기의, 훨씬 정확했던 아람어[Aramaic language] 판본과 비교해 보자면, 엄청나게 많은 변경과 엄청나게 많은 오류들이 생겨났다.

   

제임스 왕의 사치와 전제 정치 그리고 그가 주장했던 소위 말하는 왕권신수설[divine right of Kings]은 궁극적으로 청교도 혁명[the Puritan Revolution]을 야기했다. 그의 통치 시기, 철저히 부패했던 영국 국교회는, 국민들에게 '복지'를 강제하고 국가 종교를 강요하던 교회이자, 봉건 정부의 폭정 은폐를 위해 매수된 영국 정치인들에 부합하여 운영되던 조직으로, 최초 설립 당시의 모습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당신도 기억하겠지만, 1607년, 북아메리카에 숙명적인 영국 식민지가 건설되기 시작했으며, 이 때부터 1620년, 참된 기독교 이주자들이 영국 플리머스[Plymouth, England]를 떠나 메이플라워호[the Mayflower]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메사츄세츠 케이프 코드[Cape Cod, Massachusetts]에 뉴 플리머스[New Plymouth]를 설립했던 시기는, 제임스 왕의 통치 시기였다.

   

제임스 1세 시대, 그의 후원 아래에 있던 그랜드 마스터는 런던의 저명한 건축가 이니고 존스[Inigo Jones]였으며, 그는 그리니치[Greenwich]에 있는 여왕의 저택을 설계한 인물이기도 했다. 후대의 그랜드 마스터였던 크리스토퍼 렌[Christopher Wren](1685-1702)은 이 지역내 한 지점을 동과 서를 가르는 "영"점["0" point]으로 선정했으며, 나중에 바로 이 곳에 왕립 천문대가 들어섰다. : 지리학적 경선은 그리니치 공원 안에 있는 이 지점을 통과하는 선을 여전히 기준 경선으로 삼는다.

   

이주자들이 영국을 떠나간 지 1년 후, 제임스 왕은 템플 기사단원이자 프리메이슨인 프란시스 베이컨 경을 자신의 최고 참모[his Lord Chancellor]로 지명했다. ; 그러나 곧이어 베이컨은 뇌물 수수 혐의로 체포되었으며, 그에 따른 결과로, 그는 더 이상 정치인으로서의 활동이 금지되었다. 부득이 은퇴를 맞이하게 된 베이컨은 자신의 남은 생애를 여러 권의 조예 깊은 수필집과 오컬트적이고 철학적인 주제의 저서들을 쓰면서 보냈다. 한편, 바로 그 해는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the Dutch West Indies Company]가 설립된 해이기도 했다.

   

여기서 한가지 주목할만한 중요한 일이 있는데, 1630년 6월 12일은, 부유한 영국 법조인, 존 윈트롭[John Winthrop]이 지휘했던 아르벨라호[the Arbella]가 영국을 떠나 (메사츄세츠) 살렘[Salem]시에 도착했던 날로, 바로 이 때부터 미국이 미래에 직면하게 될 여러 가지 문제들이 시작되었다. 윈트롭은 캠브리지 대학, 트리니티 칼리지[Trinity College]에서 교육받았으며, 런던 법조계에서 경력을 쌓았던 인물이었다. 그는 찰스 1세 왕[King Charles I]으로부터 동부 메사츄세츠 지역의 할양과 이 지역 정착에 대한 특권[Charter]을 부여받았으며, 그가 이끄는 그룹이 미국을 향해 떠나기 전부터, 그는 메사츄세츠 식민지의 주지사로 이미 선정되어 있었다. 초기 이주자들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 이들 정착자들은 모든 것이 다 마련된 상태로 도착했으며, 이미 고등 교육을 이수한 인물들이었던 데다, 영국 상류계층과도 계속된 유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때 이후로 "캠브리지 사람들[The Cambridge Crowd]"이라 불렸던 이들은 엄청난 양의 서적들도 함께 가지고 갔으며, 캠브리지 대학의 일종의 연장으로서, 하버드 칼리지[Harvard College]를 설립했다. 하버드는 그 설립 첫 날부터 자유주의자들[Liberals]의 양성소 역할을 했으며, 그 졸업생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악명 높은 미국 동부의 여러 기관들을 세웠으며, 바로 그들로부터 미국의 보이지 않는 정부[the Invisible Government]가 생겨났던 것이다.

   

버지니아[Virginia]가 영국의 식민지가 된 1624년, 제임스 1세는 프랑스와 동맹관계를 맺었으며, 바로 그 해, 능수능란한 술수를 가졌던 카톨릭 추기경 리슐리외[Richelieu](아르망 장 뒤 플레시[Armand Jean du Plessis])는 소년 왕 루이 13세[the boy King Louis XIII]가 이끌던 프랑스의 최고 수상[Chief Minister]이 되었다. 리슐리외는 이내, 파리에서 활동 중이던 영국 비밀 정보 기관 소속 스파이들의 계속되는 정탐활동에 대한 방어책으로, 그 라이벌이 될만한 프랑스 정보 기관 설립에 착수했다. 이듬 해, 제임스 1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찰스 1세가 또 한 명의 스코틀랜드계 스튜어트 가문의 프리메이슨으로서, 영국 왕좌에 오르게 되었는데, 이 무렵, 암스텔담에 있던 부유한 유태인들은 마침내 다가오는 영국 전복을 위한 이상적인 꼭두각시이자, '트로이의 목마' 역할을 해 줄 인물을 발견했다. 그가 바로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로, 그는 캠브리지를 졸업한 26세의 청년이자 영국 상류 사회에서 선호되는 유복한 가문 출신의 젊은이였지만, 언뜻 보기에는 그다지 적절한 후보가 아니었다. 하지만 3년 후, 상당한 배후 작전과 재정적 지원 아래, 크롬웰은 하원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것은 바로, 그렇잖아도 이미 과중한 부담을 지고 있던 영국 국민들에게는 그들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가 되었다.

   

찰스 왕은 당시 대단히 역동적이었던 제 1대 버킹검 공작, 조지 빌리어스 수상[Prime Minister George Villiers, 1st Duke of Buckingham]의 손아래 움직이는 완전한 도구 역할만을 하고 있었는데, 1629년 수상의 많은 호전적인 계획들에 의회가 순응하지 않자, 수상은 왕에게 의회 해산과 함께 독자적인 왕권에 의한 국정 운영을 권고하기도 했다. 이 때 이후로, 혁명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빌리어스는 너무나도 분명히 영국 정보기관 최고위급 관리이기도 했으며, 한 번은 스페인 대사와 함께 독일 팔츠[the German Palatinate] 지방을 스페인이 점령하는 일을 돕는 계략을 꾸며, 맨스펠드 백작[Count Mansfeld]이 이끄는 원정대를 파견하기도 했지만, 별 실익을 챙기지 못한 적도 있었다. 빌리어스가 고안했던 이런 저런 별로 인기 없었던 모험주의적인 시도들을 시행하는 데에 있어, 그가 함께 일하기를 선호했던 인물은 에드워드 세실 경[Sir Edward Cecil]으로, 세실은 영국 정보기관 탄생 초기 공동 창립자였던 버레이 경[Lord Burleigh](윌리엄 세실)의 가까운 인척이었다. 독일 팔츠 개입이 대실패로 끝난 3년 뒤, 빌리어스는 하원에 의해 해고되었으며, 이후 암살되었다. 그러나 무대 뒤에서 기다리며, 이러한 드라마가 펼쳐지는 무대의 중심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여러가지 코치를 받고, 손질 중에 있던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올리버 크롬웰이었다.

   

한편, 영국 역사학자이자 장군이었던 A.H.M 람세이[A.H.M. Ramsay]가 쓴 '이름없는 전쟁[The Nameless War]'에서 이미 보았듯이, 유태인들이 조장했던 1640년의 내전이 진행되는 동안, 람세이가 "칼뱅의 음모[a Cohenist Conspiracy]"라 부르는 일이 갑자기 발생했는데, 이는 1평방 마일의 구시가, 시티 오브 런던을 중심으로, 중무장한 건달들 또는 "작전 수행원들"의 집단이, 모든 사람들을 위협하고 겁에 질리게 만든 일이었다. 유태인들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았던 이 악당들의 수는 "만 명에 육박했다." 1640년부터 1660년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영국 왕실과 국교회를 비난하고, 혁명의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팜플렛과 전단지 "약 3만장"을 뿌렸는데, 모두 암스텔담과 제네바에서 인쇄된 것들이었다. 이러한 일은 영국 국민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분열시켰으며, 국민들로 하여금 혁명의 불꽃에 부채질을 하도록 만들었다. 이상한 일이지만, 우리는 영국 정보기관이 이러한 국가 전복 시도의 싹을 자르기 위해 움직였다는 어떠한 증거도 발견하지 못했는데, 이는 그들이 이미 크롬웰과 크롬웰을 돕는 유태인 후원자들 편에 서 있었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우리가 알게 된 바에 따르면, 국가 전복적 성격의 이러한 과도한 비난은 프랑스 유태인이자 "개혁자[reformer]"였던 장 칼뱅[John Chavin]의 광신적인 장광설의 결과였다. 그는 1533년 국가 전복 시도를 이유로 파리에서 추방되었으며, 스위스 바젤로 피난했던 인물이었다. 그 곳에서 그는 '기독교 강요(綱要)[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라는 불화를 야기하는 책을 썼으며, 소위 말하는 기독교 칼뱅 운동(칼뱅주의)[Christian Calvinist Movement]의 창시자가 되었는데, 그 때부터 '장 칼뱅'이라는 이름이 사실상 알려지게 되었다. 이 때 이후로 영국은 기독 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카톨릭이 훨씬 더 많이 수용되었다.)으로 양분되었다. 칼뱅은 "엄청난 수의 혁명적 웅변가들을 만들어 냈으며, 결코 적지 않은 수가 영국과 스코틀랜드에 해를 끼쳤다. 말하자면, 종교적 열정이라는 구실 아래, 혁명의 토대가 형성되었던 것이다."--그리하여 영국은 두 개의 반대되는 캠프로 분열되었으며, 유태인들은 후에 아일랜드로 옮겨 가서 마찬가지의 일을 했다.

   

그러한 영리한 분열의 도구 가운데 하나는 "사바스(안식일)[Sabbath]"에 대한 엄격한 준수를 요구하는 그의 비명과도 같은 주장이었으며, 이에 따른 결과로서 1650년, 왕(찰스 1세)이 처형되고 난 후, 안식일을 어기는 자는 그 어느 누구라도 가혹한 형벌에 처하는 법안이 통과되기도 했다. 이러한 일이 가능했던 것은, 그 무렵 영국 상원은 "헤브루 랍비들의 기관"처럼 변모되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람세이 장군[Capt. Ramsay]에 따르자면, 유태인들의 음모를 추구했던 거리 혁명가들은 "수평파[Levellers]"(찰스 1세 시대 의회파로 구성된 당파원--역주) 또는 "합리주의자들[Rationalists]"로 불렸는데, 이들은 자기 자신들이 만든 "럼프" 국회["Rump" Parliament](직역하면 "잔여 국회"가 되며, 찰스 1세를 반역죄로 기소하는 데 반대하는 의원들을 모조리 숙청하고 난 뒤 구성된 의회로, 실질적이고 합법적인 의회 기능을 상실하고 '남겨진 의회'를 가리키는 표현--역주)를 구성한 자들이기도 했다.

   

1642년, 영국 전역을 휩쓰는 내전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크롬웰은 의회를 이끄는 핵심 세력이 되어 있었고, 그 의회는 이미 2년 전부터 재구성되어 있는 상태였다. 찰스 왕의 지지자들이었던 소위 말하는 왕당파들[Royalists] 또는 기사파들[Cavaliers]과 왕에 대해 격렬히 반대하는 "의회파들[Paliamentarians]", 또는 라운드헤드들[Roundheads](짧게 자른 머리에서 유래한 명칭--저자주)간에는 유혈이 낭자한 싸움이 계속되고 있었다. 크롬웰은 물론 의회파를 지휘했으며, 심지어 끝없이 이어지는 전투에서 병력을 직접 지휘하는 일도 도맡았다. 그리고 대단히 성공적이었다.(무엇보다도 그는 돈으로 사들일 수 있는 최고의 유태인 군사 전략가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하톤: 물론, 당신들도 잘 알겠지만, 미국 의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영국의 유태인들[the Jews in England]"(런던에서 간행)이라는 책에서도 확인해 볼 수 있는데, 여기에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 "1643년, 한 무리의 유태인 집단이 영국으로 들어 왔는데, 마라노[Marrano](비밀 유태인)였던 포르투갈 대사 데소사[De Souza]가 그 중계 역할을 했다. 그들 가운데 유명한 자로는 페르난데스 카라할[Fernandez Crajal]이 있었는데, 그는 잘 알려진 금융업자이자 군사 청부업자였다." 실제로 카라할은 크롬웰의 '신모범군[New Model Army]' 구성의 총 책임자가 되었다! 그 때, 그리고 그 이후로 크롬웰 주변에 있던 다른 유태인들은, 주로 그의 핵심 참모 역할과 자금 흐름 관리 역할을 맡아 했으며, 그 중에는 암스텔담 출신의 유태인들인 시몬 데 카세레스[Simon de Casseres]랍비 메나샤 벤 이스라엘[Rabbi Menassah ben Israel]도 있었다. 랍비 벤 이스라엘은 영리한 선전물 책자인 '에스페란사 데 이스라엘(이스라엘의 경험)[Esperanza de Israel(Experiences of Israel)]'의 저자였는데, 이 책은 크롬웰의 주목을 끌게 되었고, 결국 "그가 유태인들의 영국 입국을 허용하는 결정을 내리는 데에도 기여했다." 이 무렵 크롬웰을 도왔던 또 다른 인물 가운데는 존 툴로[John Thurloe]가 있었는데, 그는 정보 총 책임자의 역할을 맡았다. 앨런 델레스[Allen Dulles]가 자신의 책에 기술한 바에 따르자면, 툴로는 자신이 거느리는 많은 스파이들로부터 비밀 정보를 캐내는 데에만 한 해에 7만 파운드도 넘게 쓰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이러한 기능은 "정보국[Department of Intelligence]"을 형성하게 되었고, 이 기관은 영국 정부의 여러 기관들 가운데 가장 초창기부터 그 공식 기능이 할당된 기관이 되었다. 툴로는 몇 년 뒤 크롬웰이 호국경[Lord Protector](호국경은 영국에서 왕권이 미약할 때 왕을 섭정하던 귀족에게 붙이는 호칭이었으나 크롬웰은 왕정 폐지 후 자신이 호국경이 되면서 왕의 역할을 대신함--역주)으로 있는 코먼웰스[Commonwealth](처음에는 크롬웰 정권을 가리키는 명칭이었으나 나중에 '조직화된 정치 공동체' 및 '영연방'으로 의미가 확대--역주) 아래에서 국무상[Secretary of State]이 되었다.

   

1645년 한 해 동안 전장에서의 두 번의 결정적인 패배 이후,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인들에게 항복했다.--이들은 이내 그를 크롬웰이 이끄는 적들에게 넘겼다. [하톤: 그렇지만 이 악당들 사이에서는 왕에 대한 어떠한 예우도 충성심도 없었습니다.] 람세이 장군이 밝힌 바에 따르면, 1647년 6월 16일, 올리버 크롬웰은 뮐하임[Mulheim]시나고그에 소속된 에베네저 프라트[Ebenezer Pratt]를 통해 암스텔담의 유태인들과 접촉하고, 그들과 공모하여, 찰스 1세를 암살할 것인지, 아니면 덫에 빠뜨려 죽일 것인지에 관한 음모를 꾸미는 일에 착수했다. 람세이에 따르면, 왕에게 씌워진 죄명은 완전한 거짓이었지만, 이는 이삭 도리스라우스[Isaac Dorislaus]라는 외국의 유태인에 의해 고안된 혐의로, 이에 따라 결국 왕은 죽음을 맞아야만 했다. 1649년, 찰스 1세는 반역죄로 기소되었으며, 계획대로 유죄판결을 받고 참수되었다. 그 때 이후로, 올리버 크롬웰 장군이 지휘하는 신모범군[the New Model Army]은 의회보다도 더 큰 권력을 휘두르며, 완전한 통제권을 장악했다. 또한 크롬웰은 유태계 병력이었던 "철기군(철갑 기병대, 아이런사이드)[Ironsides]"도 함께 지휘하며, 영국 전역에 걸친 사실상의 군사 독재를 감행했다. 그 때부터 유태 사회주의[Jewish Socialism]가 영국 땅에 전파되었다.

   

1653년 7월 4일[하톤: 으으으으음?], 올리버 크롬웰은 새로운 "국가 회의[council of state]"(행정부의 기능을 담당--역주)를 설립하고, 140명의 국회의원들을 새로 지명했다. 이 국회는 이후 베어본스 국회[Barebone's parliament]라고 불렸는데, 완전히 유태인들에 의해 점령된 국회였다. 크롬웰의 최고위 섭정직[the top of Cromwell's Protectorate]은 존 툴로[John Thurloe]가 맡았으며, 당시 그는 국회의원 신분이기도 했다. 툴로는 심지어 정보기관장의 역할과 체신국장의 역할도 동시에 맡아 하면서, 보다 능률적으로 일을 수행하게 되었으며, 자신의 보스에게 주변의 다른 강대국들의 비밀 계획을 지속적으로 알려 주었다. 툴로는 또한 크롬웰로 하여금 왕위를 넘겨 받기를 권유하기도 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크롬웰이야말로 외국의 적들을 등에 업고 혁명을 일으켜 정권을 잡은 사실상의 반역자였다. 2년 뒤, 이 세상 어디에 있는 유태인들이건 간에, 모든 유태인들의 공식적인 영국 입국이 크롬웰에 의해 마침내 허용되었다. (이것은 크롬웰이 애당초 유태인들과 범죄적 결탁을 맺었을 때부터, 유태인 후원자들과 체결한 비밀 협정의 일부였다.)

   

1658년, 마침내 크롬웰이 서거하자, 그의 아들 리처드[Richard]가 호국경의 지위를 물려 받고, 일탈한 자신의 아버지의 계획을 뒤따르려고 애를 썼지만, 결국 실패했다. 불과 8개월도 지나지 않아 그는 사임이 강요되었다. 당신들은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인가? 너무 멀리 나갔나? 전혀 그렇지 않았다. 유태인들이 직접 만든 엄청나게 두꺼운 책, '서구 문명에 대한 헤브루의 영향[The Hebrew Impact on Western Civilization]'(1951년 총 922페이지)에 보면, 우리는 이 모든 내용들과 관련된 추가적인 사항들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이 책 111페이지에 보면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 "영국 정부에 대해 지브롤터 해협을 점령하라고 충고한 건 쇼넨버그[Schonenberg]였는데, 이건 마치, 1655년 유태인 시몬 데 카세레스[Simon de Casseres]가 올리버 크롬웰에게 자메이카 섬을 점령하라고 충고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또한 537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도 있다. : "랍비 마나셰 벤 이스라엘[Rabbi Manasseh Ben Israel](1604-1657)은, 크롬웰의 주목을 끌었던, 자신의 책 '에스페란사 데 이스라엘[Esperanza de Israel]'을 통해 그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미쳤다..." "유태인들의 영국 재입국을 허용하는 법률을 제정함에 있어서, 영국 정부로 하여금 그 이외에는 다른 어떠한 대안도 없도록" 만들기 위해, 처음부터 법안의 틀을 직접 짰던 인물이 사실상 랍비 마나셰였다. (같은 책 797페이지에 나와 있다.) 물론 엄청난 실수였다!

   

리처드 크롬웰이 현직에 있는 동안 툴로는 그를 부친과 마찬가지로 후원했다. 그러나 리처드의 신속한 몰락 이후, "모든 영국인들은 왕이 권좌로 되돌아가는 왕정 복고를 환영했다." 이에 따라, 1660년 5월 8일, 찰스 2세는 자신이 왕이 되었음을 선포하고, 3주 후 런던에 입성했다. 웹스터 인명사전[Webster's Biographical Dictionary](1943년)에 따르면, 왕정 복고가 있던 무렵, 크롬웰의 정보 총 책임자였던 존 툴로는 왕의 차기 국무상에 대한 참모 역할을 맡는다는 조건으로, "대역죄[charges of high treason]로부터 사면되었다." 이듬해 국왕으로부터 특권을 부여받은 영국 동인도 회사는, 해외 영토를 확보하고, 임의로 전쟁을 치를 수도 있었으며, 관할권내 영국국민들에 대한 민사 재판권도 획득했다!

   

그 사이 프리메이슨들은 늘 그렇듯 막후에서 자신들만의 비열한 계략을 짜느라 분주했다. 1646년 10월 16일, 영국 골동품 수집가였던 엘리아스 애쉬몰[Elias Ashmole]은 워링턴[Warrington]에서 프리메이슨이 되었으며, 런던 메이슨 홀[Mason's Hall]에서 열렸던 회합에도 참석했다. 내전 기간 왕당파에 속했던 그는, 나중에 가터회(동맹)[Order of the Garter](가터는 영국의 최고위급 기사를 지칭--역주)의 개괄적인 역사를 다룬 책을 펴 내기도 했다. 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었고, 그를 통해 헤브루어를 배우기도 했다. 라루덴 신부[Abbe Larudan]는 당시 출판된 자신의 책, '프리메이슨들이 압도하다[Franc-macons Ecrasse]'에서 영국에서 유태인들이 메이슨 조직을 좌우할 수 있었던 것은 크롬웰 덕택이라고 썼다. 그리고 1648년, 유태계 메이슨들 덕택에 크롬웰은 절대 권력을 거머쥘 수 있게 되기도 했다. 17세기 중반에는 프랑스에서도 프롱드의 난[the Fronde](부르봉 왕조에 대한 귀족세력의 반항에 따른 내란--역주)이라 불리는 유혈이 낭자한 내란(1648-53)이 발생하기도 했다. 한편, 예수회는 파리에서도 정부전복적 성격의 게리네(일루미나티)[Guerinets(Illuminati)]라는 조직체를 창설했으며, 암스텔담의 유태인들은 조만간 폴란드가 맞이하게 될 심각한 문제를 조장하고 있었다. 멀린스[Mullins]의 책, '유태인들의 새로운 역사[New History of the Jews]'(84페이지)에 보면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사항이 나와 있다. : A.D. 1655년 유태인들은 영국에서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해 나가는 한편, 스웨덴 찰스 10세[Charles X]의 폴란드 침공을 비밀리에 돕기도 했다. 스웨덴의 폴란드 침공은 대단히 성공적이었는데, 왜냐하면 폴란드계 유태인 지도자들이 사전에 스웨덴 국왕에 밀사를 보내, 폴란드의 방어 역량과 관련된 정보들을 그 구체적인 사항까지 다 알려줬기 때문이었다. "찰스 10세의 폴란드 정복 이후, 유태인들은 점령 정부의 고위직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유태인들은 악질적으로 자신들의 권력을 남용했으며, 이에 저항한 스테판 차르니에키[Stephen Czarniecki]와 같은 폴란드 애국주의자들이 폭동을 일으켜, 찰스 10세와 점령자들을 자국 땅에서 쫓아냈다. 스웨덴인들이 물러가고 난 후, 폴란드인들은 이번엔 유태인들을 집중 공격했으며, 그들의 반역 행위에 대한 응징으로 30만명의 유태인들을 학살했다." 많은 사람들은 미국 국민들이 노예화된 삶을 살고 있는 자신들의 실상에 관련된 진실에 눈을 뜨게 된다면, 마찬가지의 일이 미국에서도 발생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pp.10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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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걸으면 생각이 난다

BY 인드라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위하여

길을 간다고 생각했었다

   

   

뒤돌아보니

우연히 누구를 만났고

낯설은 무엇이 있었다

   

   

가는 길에

우연히 만나니 반갑고

낯설게 대하니 좋았다

   

   

다시 길을 떠나려는데

내가 사랑한 것은

누구였을까

무엇이었을까

길이었을까

   

   

인드라는 정치를 하지 않겠으며,

책을 더 이상 쓰지 않으며,

언론에 기고하지도 인터뷰를 하지도 않을 것이며,

종교단체를 만들지도 않을 것입니다.

국유본론을 소명으로 여기고

지금처럼 살다

행복하게 가겠습니다

매일매일 행복하겠습니다

마음을 열고

자세를 낮추고

세상에 감사한다

마.자.세.

한반도 평화와 통일, 경제 발전과 사회 복지를 위하여

쪽발이에게 죽음을 쪽발왕에게 천벌을

친미친중 반일반북 쪽발타도해방투쟁 만세

쪽발왕 폭살하려 한 이봉창 열사 정신 이어받아

불타는 쪽발산 불량배터리를 쪽발왕 아가리에 쑤셔넣자

최고의 자살폭탄테러용 차량, 기름 새는 엔진 리콜 쪽발차를 쪽발왕궁으로 보내 폭발시키자

쪽발왕이 10초 안에 똥 못 싸면 왜놈이 중국인 노동자 다루듯 때려죽이자

쪽발왕 천한 피를 1그램이라도 보유한 왜놈들에 한해 후쿠시마산 세슘물고기를 평생 먹이자

쪽발노다랑 쪽발차 캠리를 마주보고 달리는 충돌시험시키자

쪽발아베 항문에 불법도용 유니클로 양말 수만큼 쑤셔넣자

우리에게 힘과 마법을 주세요

- 인드라 창작 뮤지컬 마법천자문 주제가

어둔 길을 걷는 이들이여

저 밝은 빛을 보아요

   

그림자 땅에서 고통받는 이들이여

스며드는 희망의 빛을 보아요

증오하는 마음으로 슬프고 아플 때마다

부질없는 욕심으로 괴롭고 힘들 때마다

우리를 상처를 낼 때마다

우리를 갈라서게 할 때마다

있는 듯 없는 듯 나타나는 바람처럼

젖을수록 더욱 맑아지는 물처럼

당신은 우리의 자랑이며

당신은 우리의 친구입니다

땅을 뒤흔드는 힘

놀랍고 신기한 마법

우리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힘과 마법을 주세요

쪽발놈현에 온몸으로 항거한 허세욱 열사와 중도좌파 민족주의자 박정희 대통령 이름으로

조국과 민족을 배반한 쪽발민주당 해체

쪽발 나팔수 네이버 주가 오백원

인민의 적, 쪽발찌라시 한경오프엠(한겨레 경향 오마이 프레시안 엠비씨) 아웃

서민 등골 빼먹는, 일인 복마전, 골룸빡 처단

한국의 야스쿠니, 쪽발놈현 무덤은 한반도에 저주를 내리는 대못이다

쪽발놈현 무덤 철거하고, 쪽발지태놈현 재산 몰수하자

빠시스트 집단, 쪽발놈현빠에게 죽음을

쪽발삼구 쪽발석현 비리엘쥐 재벌해체

쪽발정은 척살로 2013년을 통일 원년으로

친미친중 반일반북 조국통일 쟁취하자

   

  

마음

자세

세상

인드라

열다

낮추다

감사한다

인드라

신나다

흥하다

정든다

다음 최세훈

모으다

잇다

흔들다

새드릿

동상이몽

이심전심

새옹지마

Flow

eating 먹다

digesting 걸러내다

shitting 싼다

카리스만

비우다 empty

바로하다 stance

바라보다 intuition

인드라

하늘 天

땅 地

사람 人

인드라

존재;

공기처럼 자유롭게

인식:

물처럼 유연하게

실천:

바위처럼 든든하게

   

   

   

   

   

   

   

   

   

   

   

   

   

   

체념 끝에 피어오르는 희망

그 희망을 죽이고서야 우리는 살 것이다

무인도에서의 처세술을 위한 친절한 가이드

인드라 블로그 운영 안내

http://blog.naver.com/miavenus/70153225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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