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혁명 : 박정희의 516, 재평가되어야 하는가? 국유본론 2009
2009/10/25 0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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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혁명 : 박정희의 516, 재평가되어야 하는가?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09/10/25
today4411:
이 글을 읽고 몹시 기묘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마치 인드라님의 20년 후의 모습을 미리 보게 된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까요?
제가 보건데, 인드라님이 70세까지만 사신다고 해도 언젠가는 인간의 근원과 우주, 저승세계를 밝혀내실 것 같습니다... 지금은 무신론자에서 유신론자로 잠깐 기차를 갈아타신 것 정도이지만, 언젠가는 점점 더 근원으로 회귀해서 그와 가까운 주장을 하실 것 같은 것일까요?
이렇게 생각하는 데에는 저만의 논리적인 이유가 있습니다만, 어쩐지 말로 설명하기 힘들군요. 직관이라는 것은 언제나 설명하기 힘들기에 뭔가 번쩍이는 미래상이 떠올랐음에도 제대로 설명하기가 힘든 법이지요.
그럼에도 제가 이런 뜬금없는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제가 아는 어떤 분이 주장하시는 (일반인들이 생각하기에는) 조금은 초현실적이고 비논리적인 이야기가 점점 더 인드라님이 새롭게 주장하시는 것과 일치되는 견해가 생겨나는, 다시 말해 상응점이 생긴다고 할까요? 거기에서 힌트를 얻었습니다. 인드라님이 앞으로 계속 변증법적으로 자기초월을 해나가시면(자기 주장을 수정, 보완해가며 더 거시적으로 세계를 파악해나가시면), 마치 똑똑하고 현명한 사람들이 그러하듯, 결국에는 결론(근원) 부분으로 나아갈 것이라구요.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논점이 이해가 되시나요? 어쩌면 제가 아주 엉뚱한 소리를 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다중우주의 하나의 가능성을 본 듯싶습니다.
저는 이 글에서 한국인들이 최초로 벼농사, 신석기 시대를 열었다는 부분을 읽고 잠깐 동안 머리가 얼얼해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이상하게 민족주의를 신봉하는 한국인들이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열렬한 토론이 아직까지 없네요.). 여기에도 저만의 개인적인 이유가 있지만 생략하도록 하고, 어떠하든 앞으로 인드라님이 국제유태자본의 거시적 움직임과 그리고 고대역사의 실증부분에서 더 주력해주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국유본을 파악하고, 고대역사를 파악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필시(몇 년이 걸리든) 인드라님이 우주역사나 인간의 근원에 대해 도달하실 날이 변증법적 원리에 의해 있으리라 보기 때문이지요.
아! 두서없이 글을 길게 적은 감도 있지만, 무엇보다 삼림이 우거진 멋진 요양원(?)에서 생활을 잘 하셨으면 좋겠네요. 자연과 가까이 할수록 자연적으로 몸이 회복되기 마련이니까요. 왠지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에 나오는 요양원이 생각나는군요.
말뚝 :
길을 걷지 않았을 때에 생각나는 것을 말할 때가 되었나요?
수반아 :
마지막 3곡은 사이키델릭 버전이네요.
첫 번째 곡. 강하고 빠른 비트 음악과 함께 INDRA 라는 글자가 아메바식 파도 위에 나타났다 지워지고 나타났다 지워집니다 :
그림 위에 그림을 그리고
글 위에 글을 쓰고
이름 위에 이름을 남기고
파도 위에 INDRA를 새겨보지만
두 번째 곡. Stop! Stop! 혼란의 외침.. 잠시 후 싱어 INDRA는 나즈막히 읊조립니다. OK, Let's do it….
그리하여 결단의 세 번째 곡 : Are You Ready?
하나, 중국 외교문서의 공개 : 한국사를 국제사로 파악하자
최근 중국 외교문서가 공개가 되었다. 지난 시기 49년에서 60년 사이 문건들이 해제되었고, 이번에는 61~65년 사이 문건들이라고 한다. 과거 해제된 문건에는 독도 문제와 관련한 흥미로운 문건도 있었다.
1950년 中외교부 "독도·쓰시마 한국에 귀속을"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22&aid=0000044773
허나, 여기에는 단서가 있다.
中 "한국전 외교문서 공개 못해"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22&aid=0000021535
한국전 관련 문서를 공개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의미한다. 이에 대해서는 인드라와 같은 이들이 얼마나 국유본과 전략적 게임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역사는 과거가 아니다. 우리의 미래다.
또한 모택동 암살 음모도 있었다고 했다. 국유본이 중국 공산당에는 호의적이어서 중국혁명을 배후 조종했으면서도 모택동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아무래도 국내파 모택동보다는 프랑스 유학파 출신을 선호한 것이 아닐까 싶다. 국유본은 전통적으로 국내파보다는 해외파를 선호하고, 국내파라도 호메이니처럼 잠시라도 해외 망명생활을 해주어야 한다. 그래야 국유본 교육을 받아 국유본 정치인으로 거듭나기 때문이다. 모택동의 대약진운동의 실패를 이러한 관점에서 접근하면 의미 있는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싶다.
과거사에 대한 인드라 입장은 어떠한가. 이 시기 국유본의 실권은 빅터 로스차일드가 쥐고 있었으며, 그의 지휘로 이차대전과 한국전쟁, 베트남전쟁이 기획되고, 실행이 되었다. 또한 냉전체제와 중국혁명의 배후에 빅터 로스차일드가 있다. 해서, 중국 외교문서 발표는 국유본론을 각론에서 정립하는데 큰 도움을 주리라 기대하고 있다.
이 시기는 과학기술의 미발달로 국유본의 각국 정부에 대한 통제 양상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해서, 오늘날처럼 직접적이기 보다는 간접적이었고, 정치권력에 대한 자율권을 대폭 허용하는 대신 경제 권력을 장악하는 수법을 취했다. 이것을 신식민주의 개념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다만, 중요한 지정학적 위치에 있는 국가인 경우는 일본처럼 정치권력의 자율권을 상당 부분 포기하게 만들었다.
"북, 5·16 예견 지지 성명 준비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10152309591&code=910303
북한, 5·16 쿠데타 '지지성명' 준비했었다... 중국 외교문서
http://www.ytn.co.kr/_ln/0104_200910160457177135
김일성, 두 번의 오판…결국 불량국가 불씨됐다
http://www.heraldbiz.com/SITE/data/html_dir/2009/10/16/200910160369.asp
평양정권이 박정희 세력을 처음에는 진보세력으로 파악했다. 이것이 틀린 판단인가. 아니다. 박정희 아버지는 동학도였고, 박정희의 형은 남로당원으로 대구 폭동 과정에서 죽었다. 박정희가 가장 믿고 따르던 이가 박정희의 형, 박상희였다. 인드라 입장에서 볼 때, 박정희가 일본 육사에 간 것도 박상희의 허락을 받았던 것으로 보기까지 한다.
"엄민영은 일제고문 합격자로 군수를 한 친일파인데 해방 후 남로당 당원이 되었습니다. 1950년 6.25 전쟁 직후엔 당시 북에서 남파된 역사학자 전석담 밑에서 서울지역 대학책의 중요 요직을 담당 활동하다가, 미군이 진격해 들어오자, 먼저 처자를 평양에 보내고 그 후에 월북하다가 동두천근처에서 미군포로가 되어 거제도에 수용되었다가 그 후 석방된 자입니다. 그는 박정희가 집권할 때에 내무장관과 주일 한국대사를 했고 박정희의 정치고문이었습니다. 그의 규슈제대 출신과 인연이 되어 박정희 주변에서 활약한 이는 공화당 의장 백남억입니다. 백남억은 대구대학 교수로서 공화당에 가담하는 것으로 돼 있으나, 원래 그는 일제 때 조선총독부 철도국 직원이었다가 해방 후에 부산 철도국 운수과장으로서 총파업을 지도 선동한 주모자로 활약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미군정의 수배인물로 돼 도망쳐서 잠적했다가 후에 대구대학교수가 된 인물입니다. (정영진, '폭풍의 세월 - 대구10-1사건을 일으킨 사람들과 그 이데올로기'(한길사,1990년 ,297쪽 참조). 그가 박정희의 공화당 간부가 되었습니다. 김형욱의 '회고록'을 보면, 김성곤 공화당 재무위원은 남조선 노동당 경북도당 재무책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박정희처럼 내무부 정보파일에 기록된 그의 남로당 참여기록을 말소하려고 갖은 노력을 했으나 실패했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북한 김일성은 사태를 오판하여 황태성을 박정희에게 보내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인물은 유원식입니다. 516 직후 진시황으로까지 불린 8기생 유원식 대령은 당대 정책을 좌지우지했던 한국의 트로츠키였습니다. 유원식의 아버지는 유림으로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였지만, 그는 박정희처럼 만주군관학교를 다녔으며, 대학에도 다니는 등 이론적인 면에서도 많은 공부를 했던 인물이었습니다. 해서, 오늘날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계획에 대한 논란이 있는데, 가령 이승만 때 이미 기획했다, 장면 때에 있던 것을 박정희 정권이 베낀 것이다 등등이 많은데, 이런 주장은 무능했던 민주당 정권을 옹호하고, 박정희를 무조건 까대기 위한 근거 없는 주장이라고 보입니다. 그보다는 유원식 작품이다, 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지 않나 싶습니다.
처음 박정희에게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작성하겠다고 했을 때만 해도 박정희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무엇을 하는 것이냐고 물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 경제개발5개년계획에 관해 유원식은 "나는 완전 고용의 꿈을 꾸었다. 경제성장을 하려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고 하였으며, 그해 10월 한국을 방문한 스칼라피노 박사와의 대담에서 스칼라피노가 후진국이 경제성장을 하려면 불균형성장이 불가피하다고 한 데에 대하여 뜻밖에도 균형발전론을 주장했다고 합니다. 해서, 당시 "한국의 군사정부에 사회주의 경제학자가 있더라"라고 스칼라피노 박사가 미 정부에 보고했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박정희, 나폴레옹, 국제유태자본
http://blog.naver.com/miavenus/70030439320
예서,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당대 권력은 미국 워싱턴이나 뉴욕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영국 런던에 있었다는 점이다. 유엔을 만든 것도, 마셜플랜을 결정한 것도, 브래튼우즈체제를 만든 것도, 미국 CIA에 힘을 실어준 것도 모두 빅터 로스차일드가 행한 결정이기 때문이다. 하여, 빅터 로스차일드는 박정희 세력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세계에서 그 누구보다 가장 먼저 이스라엘 정부가 박정희 정권을 승인하였다. 당대 이스라엘 정권은 마파이당이 집권하고 있었는데, 마파이당은 사회민주주의 성향의 중도좌파 정권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반공이 국시인 나라에서 유원식은 대체 뭘 믿고서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꿈꾸었는가. 답은 간단명료하다. 빅터 로스차일드가 평양정권을 지원하다가 서울정권을 지원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당대 빅터 로스차일드는 케임브리지 5인방을 통해 한편으로는 KGB와 연결이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 CIA와 이스라엘 모사드와 연계가 되었다. 물론 그 중심에는 영화 007처럼 영국 정보부가 있었다. 빅터 로스차일드는 영국 정보부에서 막중한 역할을 수행한 바 있다.
예서, 중요한 것은 소련에서의 스탈린 실각이다. 이후 중국과 북한에서 동일한 일이 발생해야 했다. 허나, 중국은 성공하여 모택동이 대약진운동 실패의 책임을 지고 2선으로 물러난 반면, 김일성은 즉각 박헌영을 숙청하고, 그것도 모자라 연안파, 소련파, 남로당파 모두를 친미, 친일파라는 이상한 명목으로 모두 끝장을 내었다.
인드라는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조봉암이 부상된 것으로 보고 있다. 즉, 국유본의 통제 하에 있던 평양은 김일성 주체사상 노선으로 인해 자율성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해서, 상기한 해석에 인드라는 입장을 달리한다. 박정희 정권 출범으로 인해 김일성 정권이 군사 부문에 투자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현상적인 분석이다. 보다 본질적인 것은 무엇인가. 스탈린 실각에서 비롯된 영향이 북한에까지 파급되기를 바랐던 국유본의 의도가 김일성의 신속한 행동으로 좌절되었다는 점이다.
하여, 국유본이 내세운 최초의 대안은 조봉암이었다. 조봉암은 전향한 좌파였다. 해서, 국유본은 조봉암에게 영어 과외교습을 하라고 권할 정도로 대안을 삼았었다. 조봉암은 자신이 대통령이 될 줄 알고 헌신적으로 일했다. 허나, 국유본 방침이 바뀐다. 마치 해방 직후 여운형에게 권력을 줄 듯 하던 태도와 흡사하다. 아무래도 조봉암 개인이 설사 항일운동가 이승만과 달리 한일수교에 적극적이더라도 지지자들이 용인하겠는가 하는 문제가 있었던 것이라 볼 수밖에 없다. 해서, 국유본은 급격히 CIA를 통한 이승만 하야공작을 실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친일파인 민주당을 옹립하는 태도를 취했다. 허나, 이때 친일파 윤보선, 장면 등이 너무나 무능했던 것이 국유본의 실망을 가져다 준 것으로 보인다.
국유본의 목표는 두 가지였다. 하나, 국유본의 최우선 방침은 브래튼우즈 체제 하에서의 달러 안정이었으며, 이를 위해 동북아에서의 일본 방위비 부담이 필요하였다. 이 결과로 국유본은 세계전략에서 차지하는 일본의 지위를 고려하여 미일안보조약을 한국전쟁 중인 1951년 9월 8일 체결하고, 1960년 6월 20일에 신조약을 개정하고, 최종판인 한일국교가 이루어진다. 이 모든 것은 일본의 한국계이자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사토 에이사쿠와 남조선노동당 출신의 박정희 사이에서 이루어진 일이지만, 그 배후는 빅터 로스차일드이다.
다른 하나는 평양 정권에 대한 견제였다. 1950년대 국유본은 허가이 등의 소련파를 통해서 평양정권을 통제할 수 있었다. 허나, 소련파 숙청으로 말미암아 국유본은 평양정권을 통제할 수단을 잃었다. 이에 대한 국유본의 조치는 단호했다.
경제 지원 중단!!!
이전까지 평양 정권은 국유본의 지원으로 재건사업에 크게 성공할 수 있었다. 해서, 1970년 이전까지 북한은 남한보다 잘 살았다. 허나, 이것은 김일성의 몫이기는 하지만, 그 배후를 잊어서는 안 된다. 마치 박정희 정권의 경제발전과 같다. 이는 박정희가 잘 해서이지만, 그 배후에는 국유본, 빅터 로스차일드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이웃 중국 모택동 정권과도 비교할 수 있는 일이다. 모택동은 시종일관 소련 정권 등에게 도와달라고 했지만, 소련 정권은 외면했다. 해서, 시작한 것이 대약진운동이다. 자본 없이 농민의 힘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하겠다는 것이었다. 결과는 대실패였다. 재앙이었다. 국유본의 지원이 없다면 말짱 꽝이라는 것을 모택동이 몸소 보여주었던 게다.
김일성도 이를 모르지 않았다. 허나, 중요한 것은 권력이었다. 김일성은 스탈린 실각 전까지 동도서기 관점을 철저히 유지하여 유럽중심주의, 맑스레닌주의 노선에 충실했다. 허나, 그 이후로는 주체사상을 내세우게 된다. 그런 김일성에게 유일한 희망이 있다면 남조선에서의 혁명이었다. 그것이 516의 염원이었다. 김일성의 판단이 그리 틀린 것이 아니다. 국유본이 중동에서는 낫세르를 지원했고, 중남미에서는 카스트로가 쿠바를 장악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허나, 기대는 좌절되었다. 해서, 김일성은 중소 군사동맹을 맺을 수밖에 없었던 게다. 마치 1970년대 박정희가 유신체제를 선포하고, 소련과의 비밀협정에 나서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게다.
예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김일성이 박정희 정권 때문에 경제 중심 노선을 수정한 것이 아니라는 게다. 생각해 보라. 박정희 정권이 무엇인데, 남한보다 앞선 경제력을 지녔던 북한이 무엇이 아쉬워서 경제성장 계획을 늦추겠느냐 이 말이다.
결론은 자명하다. 외부 지원이 끊긴 게다. 국유본, 빅터 로스차일드가 김일성더러 마치 김영삼에게 하듯 너, 지원 끊으면 끝장난다, 외환위기가 온다고 경고하는 것과 같다. 물론 김일성보다 김영삼이 통제가 쉬웠다. 과학기술의 발달 덕분이다. 청와대에는 박정희 정권 때부터 도청 장치가 일상화되었다. 해서, 김일성은 어쩔 수 없이 군사 부문을 확대할 수밖에 없었던 게다. 원인은 박정희 정권 출범이 아니라 국유본인 게다.
정리하자. 박정희가 왜 정권을 잡을 수 있었는가. 한일수교의 최적임자였다. 이 점에서 친일파 중의 친일파로서 친일민주당이 최적임자이기는 했다. 허나, 친일민주당은 두 번째 문제인 평양 정권과의 정립에서 문제가 되었던 게다. 친일파 장면이나 윤보선이 김일성과 비교하면 게임이 되지 않았던 게다. 항일운동가 집안 김정일과 친일파 김대중의 만남에서 기대할 것이 없는 것도 이 때문인 게다.
이 점에서 조봉암은 김일성과 맞대응할 인물이었다. 허나, 그는 결정적인 데서 탈락한 게다. 한일수교라는 것. 이것은 당대 국유본의 최우선 방침이었다.
해서, 낙점한 것이 박정희인 게다.
친일이면서 좌파인 박정희.
국유본, 빅터 로스차일드는 이승만 하야 공작, 419, 516을 통해서 일타 삼피로 실험했던 셈이다.
하나, 419혁명을 통해 이후 68혁명과 드골퇴진이라는 밑그림을 만들었다. 마치 칠레에서 신자유주의를 실험하고, 전 세계에 유포시킨 것과 같다. 근대사는 다시 씌어져야 한다. 68혁명은 419혁명에서 시작되었다. 물론 배후는 빅터 로스차일드이다.
둘, 이승만은 항일운동가이자 국부였다. 이승만에게는 친일민주당 뿐만 아니라 유일한처럼 세련된 국유본 스파이가 견제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유일한은 평양정권에서 소련파 역할을 했던 셈이다. 허나, 시대가 변화한다. 하여, 이승만 권력을 무너뜨려야 했다. 국부를 퇴장시키는 유일한 방식은 부패다. 해서, 자유당 시대에 대한 새로운 역사 읽기가 필요하다. 조폭? 루즈벨트나 트루먼이나 당대 조폭 없이 정권을 획득하기 어려웠다. 인드라가 강조한다. 조선 선조의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명나라 당대 정치구조를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셋, 박정희를 동양의 나폴레옹으로 만들 구상을 마친 셈이다. 이로 인해 김일성이 위기의식을 느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예견된 혁명, 허나, 그 혁명이 자신의 목줄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순간, 택할 수 있는 패턴은 단순하다. 다만, 64년 이전까지는 김일성이 수동적이었다면, 본격적으로 군사 부문에 예산을 투입했던 65년 이후로는 국유본의 메시지를 받아서인지 탄력적으로 된다.
둘, 박근혜의 차기 대통령은 따논 당상인가?
인드라는 뉴욕타임즈를 정기구독하고 있으며, 포브스 코리아도 읽고 있다. 이외에도 국유본 언론 동향을 예의주시하는 편이다. 포브스 코리아 2009년 10월호에서 민감한 부분이 포착이 되었다.
경기도지사이자 과거 주사파와 구별되는 운동권 좌파 출신의 김문수, 이명박 지지 정치사이트인 엔파람이 차기 대통령으로 사실상 공식 지지한 김문수가 표지모델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연인가. 아니다. 포브스는 영향력이 있는 백대 여성 순위를 선정했다. 헌데, 여기에 박근혜가 빠졌다.
예서, 탑 100 순위를 잠시 살핀다. 1위가 앙겔라 메르켈 독일 수상이다. 3위가 인드라 누이이다. 5위가 테마섹 호칭이다. 7위가 듀퐁 CEO 앤절라 브랠리이다. 눈치 채었는가. 모두 국유본 인물이다. 문제는 백위권 내에 차라리 한국인이 한 명도 없다면 별 문제가 아닌데, 한 명이 포함되었다는 게다. 그녀는 누구인가.
현정은이다. 79위이다.
박근혜는 초조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재 박근혜에 대한 민심은 바닥이다. 오직 믿을 것은 국유본이다. 선덕여왕 인기에나 바라보고 있을 처지가 박근혜인 셈이다. 허나, 이처럼 국제기관에서 박근혜를 무시한다면 이는 크나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해서, 섣불리 박근혜가 뻥카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다. 허나, 인드라 생각은 다르다. 이는 박근혜에 대한 경고로 보인다. 즉, 수틀리게 굴면 언제든지 현재의 지지도를 하락시킬 수 있음을 국유본이 협박한 셈이다. 그 결과로 박근혜가 근래 세종시 문제를 언급한다고 해석할 수 있겠다.
중요한 것은 박근혜가 아니다. 또한 이를 원동력으로 한 재보선도 아니다.
핵심은 국유본의 한반도 전략이며, 이는 끊임없이 수정한다는 점이다.
예서, 인드라의 혁명론이 발생한다. 인드라는 키신저와 브레진스키와 국가전략연구소와 현재 전투중이다. 냉정해질 수밖에 없다. 다소 상식을 거침없이 넘어선다면, 역사는 과거형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라는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여러분은 인드라가 한국에서 태어난 것을 정말 다행스럽게 여겨야 한다.
셋, Paul Johnson은 왜 길을 걸으면 생각이 난다고 했나?
폴 존슨은 영국 역사학자이다. 하고, 포브스 포커스를 담당하는 칼럼니스트이다. 그의 지론은 미사여구가 없어서 좋다. 숨김없는 유럽 로스차일드적인 태도를 내보인다는 점에서 인드라가 유념해서 읽고 있다. 이에 비해 정기구독하고 있는 뉴욕 타임즈가 얼마나 읽을거리가 없는가. 폐간됨이 마땅하다.
그는 '불황탈출, 산책이 답이다'라는 이슈를 제시한다. 헌데, 그는 이 글에서 별 쓰잘 데 없는 이야기들을 과거 사례에서 잔뜩 인용한 뒤 결론 부분에서 말한다.
<왜 걸으면 생각이 떠오르고 명확해지는지는 모르나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더 많이 걸어야 한다. 대표 이사들 특히 대기업 대표들은 많이 걸어야 한다. 오바마 대통령도 위대한 트루먼 대통령처럼 날마다 장시간 산책해야 한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으로 재임명된 벤 버냉키도 가능한 한 차를 타지 말고 걸어야 한다. 시인 소로의 또 다른 말을 기억하자. "발걸음을 떼는 순간 머릿속에 생각이 흐른다">
여러분은 이제 국유본론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여전히 국유본론이 공상에 불과한 것이라고 여기는가. 그렇다. 후자일수록 인드라는 도전 의식이 발생한다.
혁명은 이미 시작되었다.
여러분과 인드라. 인드라가 소심했다.
준비하시라, 인드라와 혁명을!
약속을 지키겠다.
추신 : 제이 록펠러가 한글을 공부한다면 제주도 방언으로 공부하는 것이 인류사의 지대한 발전을 이루리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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