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드라와 진중권 : 김연아 팬들 힘내세요! 국유본론 2012
2012/06/30 07:51
http://blog.naver.com/miavenus/70141326363
인드라 VS 진중권
국제유태자본 인드라 월드리포트 12/06/30
언젠가 어떤 이가 인드라와 진중권이 닮았다고 해서 기분이 좋지 않았었다.
헌데, 오늘 어떤 이슈를 검색하다가 진중권 이야기를 들었는데, 묘한 느낌이 있었다.
인드라는 65년생으로 양정고를 나왔다.
진중권은 63년생으로 양정고를 나왔다.
인드라는 양정고에서 정학을 받았다.
진중권은 양정고에서 정학을 받았다.
인드라는 양정고에서 조폭 같던 연극반 생활을 했다.
진중권은 양정고에서 깡패 같던 생물반 생활을 했다.
인드라는 대학에서 운동권이었다.
진중권은 대학에서 운동권이었다.
인드라는 군대에서 당번병을 한 적이 있다.
진중권은 군대에서 당번병을 한 적이 있다.
인드라는 문화사회단체 활동을 했다.
진중권은 문화사회단체 활동을 했다.
인드라는 유럽여행 중에 고향에 온 듯싶었다.
진중권은 유럽유학 중에 다시 태어나면 유럽인으로 태어나고 싶다 했다.
인드라는 누이가 음대 나와 예술비평 강의하고 동생은 컴퓨터 관련 일하다가 때려쳤다.
진중권은 누이들이 음악하고, 동생이 컴퓨터 프로그래머 한단다.
인드라는 서울 강서구에 산다.
진중권은 경기도 김포에 산다.
인드라는 아들이 둘이다.
진중권은 아들이 하나다.
인드라는 문화비평가였다.
진중권은 문화비평가이다.
인드라는 한국에서 90년대 온라인 논객 스타라고 할 수 있다.
진중권은 한국에서 2000년대 온라인 논객 스타이다.
인드라는 민주노동당원이었는데 진중권 꼴보기 싫어서 사회당 갔다.
진중권은 민주노동당원이었다.
해서, 그간 인드라가 진중권에 대해 쓴 글을 검토해봤다.
"김종화 : 선생께서는 최근 파시스트의 우상, 박주영이라는 논쟁적인 글로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간 선생을 지켜본 이로서 말씀드린다면, 선생은 솔직하게 이런 논쟁에 대한 반응들을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인드라 : 그런 면이 없지 않습니다. 저는 이를 5단계 정도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질투입니다. A가 B를 비판하거나 비난을 하면 우선 나오는 정서적 반응이란 A더러 B에게 질투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라는 것입니다. 가장 즉자적인 반응일 것입니다. 결국 히틀러의 맑스에 대한 비판이 이를 시사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애정입니다. 애증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해서, 너, 사실 그 사람 좋아하지?라고 말하는 방식이 이런 방식입니다. 사랑의 왜곡된 형태로 표출된 것이 증오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런 대목에서 살펴보아야 할 재미있는 양상은 아인쉬타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아인쉬타인의 장점이 드러나는 경우에는 독일인은 그가 독일계였음을 강조하고, 프랑스인은 그가 유태계임을 강조합니다. 반면 아인쉬타인의 단점이 드러나는 경우에는 독일인은 그가 유태계임을 강조하고, 프랑스인은 그가 독일계라는 점을 강조하곤 합니다. 최근 스타워즈 시리즈가 등장했습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이 영화가 오이디푸스 신화와 결합되어 1968년의 신좌파적 논리가 개입되었다고 봅니다. 안티 오이디푸스라고 정리할 수 있겠지요. 빌헬름 라이히의 파시즘의 대중심리라는 저서도 기본적으로 이런 점을 함축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꿈 분석에서처럼 의식의 억압적 요인으로 인하여 무의식이 왜곡되어 나타난다, 이런 것이겠지요. 해서, 이런 영화들이 많이 제작된 바 있습니다. 포르노로 파시즘에 대항한다는 것이죠. 종교적 억압에 대해서 포르노로 대항하듯이 말입니다. 히틀러는 사실 포르노와 사회주의와 유태계를 사랑했다는 것이죠. 하지만 당대의 현실 탓에 포르노와 사회주의와 유태계를 억압했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닮았다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적과 싸우다보니 적과 닮아 있더라,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 단계의 고민을 함축한다고 봅니다. 즉, 적과 닮았다는 비판은 적으로 설정한 대상이 소유한 폭력을 비판 주체도 '덜 하지만' 소유한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적보다는 완전치 못하지만 결여된 채로 소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해서, 이 단계는 '되기'를 통하여 보다 완벽하게 '적'이 되자는 것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것입니다. 가령 민노당을 비판해온 사회당이 보다 완벽하게 민노당이 되려고 노력한다든가, 열우당을 비판해온 민노당이 보다 완벽하게 열우당이 되려고 한다든가, 한나라당을 비판해온 열우당이 보다 완벽하게 한나라당이 되려고 한다는 것이겠지요. 해서, 이런 식의 비판을 하는 이들은 곧잘 그러니 당신이 더 파시즘적이다,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식의 비판에서 히틀러는 뭇솔리니 장군을 흠모하는 병사로 나오거든요. 박정희 장군을 존경하는 노무현 병장과 같은 비유가 가능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식의 비판은 그간 운동권에서 가장 많이 받은 비판입니다. 김용옥을 비판할 때는 김용옥 닮았다고 하고 비판하고, 김대중을 비판할 때는 김대중 닮았다고 비판하고, 이문열을 비판할 때는 이문열 닮았다고 하고, 김일성 비판할 때는 김일성 닮았다고 합니다. 노무현 닮았다는 이야기는 없더군요(웃음) 최근에는 진중권 닮았다는 이야기(이건 좀 아니라고 봅니다. 진중권의 넷 데뷔가 저보다 늦거든요. 그가 나를 닮은 것이겠죠.)도 나오는군요. 물론 비판과 동시에 애정 표현도 나오곤 합니다. 동시적이지요. 닮았다는 이유로 좋아하는 이들도 생기더군요.
이런 점에서 루저의 비판은 논리적 인과관계가 없이 비판한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이미지적으로 조작하는 것이 파시즘에 대한 핵심적 규정일까요? 만일 인드라가 파시즘의 핵심 규정으로 보는 인종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루저가 이미지 조작을 내세운다면 루저의 비판은 그저 신문보고 일회적으로 배설하는 양태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고, 오히려 루저의 비판 같은 것이 파시즘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다음 단계로는 독특하다,라는 반응입니다. 상기한 지점에서 A가 B를 비판하는 것은 A가 B를 닮았기 때문이다,라는 것입니다. 닮았다는 주장은 스타 닮은 꼴 찾기처럼 A를 B의 결여된 존재로 보기 때문입니다. 하여, A가 B를 비판하는 것은 B이기 위해서라는 것이죠. 이에 대해 데리다의 아르토론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가 거의 유일하게 긍정적으로 기술한 대목이라고 합니다. 근래 모 영화평론가가 감독과 스타와의 갈등을 강조한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데리다는 작가와 연출자, 그리고 배우의 갈등을 말합니다. 작가가 있고, 각색자가 있을 것이며, 이를 연출한 연출자가 있고, 배우가 있습니다. 아르토는 재현되지 않는 극을 꿈꾸었고, 발리극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만, 불가능한 꿈이라 여겨 절망했습니다. 데리다는 아르토에 연민의 정으로 강조합니다. 배우가 매순간 연극을 할 때 그것은 원본과 다른 결여된 복사물이 아니라 전혀 다른 창조물임을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A가 B를 비판하는 것이 B를 닮았거나 B이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러한 주장은 B가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여전히 A를 소유하기 위해 내세운 가짜 주장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B는 완전체이기 보다는 결여된 존재인데 A를 통하여 완전한 존재인 것처럼 현상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화에서 보면, 스탠리 큐브릭이나 홍상수를 보면, 배우와 많이 이야기를 하거든요. 술을 먹인다든가 하는 방식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스펀지처럼 빨아들여서 만드는데 결국은 보면, 이전의 스탠리 큐브릭이나 홍상수적 닮은꼴 영화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특수하다는 것과 독특하다는 것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특수하다는 것은 전체를 전제한 하위 부분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하여, 특수는 전체의 단면을 제시하지만, 전체는 아니거든요. 이런 점을 부각시키면, 스탠리 큐브릭이나 홍상수의 영화세계는 처음부터 어떤 것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결여되었는데 당대의 관계에 의해서 스탠리 큐브릭과 홍상수의 영화세계가 완성되어 전제된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다음 영화와는 많은 부분 배우와 스태프와 관객이 동일하더라도 동일하지 않은 이들이 있을 것이고, 바로 이러한 동일하지 않는 이들과의 만남 속에서 완성되었다고 믿어졌던 스탠리 큐브릭과 홍상수의 영화세계가 또 달라진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여, 계속 그들의 영화에 계속 참여했거나 보아왔던 이들은 다음 영화가 이전과 완전히 다른 영화라고 볼 가능성이 크고, 반면 새로 참여한 이들은 다음 영화가 이전의 영화가 그다지 다르지 않고 닮았다고 볼 가능성이 크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독특하다고 여기는 이들은 누구인가. 바로 경계에 선 이들입니다. 즉, 감독 자신이라는 이야기죠. 감독의 영화세계를 완전체로 믿고 참여한 이들과 구분되는 것은 감독 자신이 완전체가 아님을 자각하고 있기 때문이죠. 동시에 새로운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완전체이기를 지향하기 위해 이전의 자아를 부정하고, 또 다른 자아로 변신하고자 함인데 이것 역시도 최근의 영화를 완전체라고 보려는 이들과 구분되는 것입니다. 그것 역시도 완전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가 설정한 마지막 단계는 미지의 단계입니다. 모르겠다라는 반응입니다. 신화의 재탄생이냐 할 수 있겠는데 신화적 영역으로 남겨두려고 합니다. 이제까지 찾아볼 수 없었던 은유법이기에 논리적 인과관계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사태가 발생하고는 합니다. 이러한 점을 그레고리 베이트슨은 화성인을 처음 만난 인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무엇과 닮았다고 여겨야 인간의 두뇌는 오캄의 면도날처럼 단순화되어 표현하기 쉬운데 뭐라 말할 수 없을 만큼 단순화할 수 없다면 인간은 표현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가령 이전의 기억들로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그런 것 말입니다. 4번째 단계에서는 그나마 이전의 기억들을 조합하여 새로운 현상에 대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 이르르면, 감독이나 작가, 그리고 활동가들은 절망을 느낍니다. 지금까지 해온 그 어떤 것으로도 새로운 현상에 대처할 수 없을 때 무기력함을 느낍니다. 붓을 놓거나, 감독 일을 그만두거나, 활동을 중지합니다. 판단이 중지되는 것이죠.
다만 이런 단계에서 말하는 이들은 모르기 때문에 과감하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마치 주석을 과감하게 다는 이들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모르기 때문에 주석을 단 것이지, 알기 때문에 주석을 단 것이 아니지요. 세상은 아는 이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모르는 이들에 의해서 역사가 이루어져 왔다고 저는 보는 것입니다.
저의 글쓰기는 반응을 지켜보면서 또 다른 새로운 영화를 만드는 재미와 함께 마지막 단계에 접어든 이들을 간혹 만나는 즐거움으로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http://blog.naver.com/miavenus/60013685980
"남의 나라로 국비 장학생까지 갔는데 학위도 못 받고 온 주제에 한국에서 행세하는 좆밥이 있다. 진중권이다. 이런 넘들이 이 나라 지식인을 자처하면서 한국 지식 사회는 굉장히 저렴해졌다. 이러면 안 된다. 국유본이 우습게 안다. 찌질한 넘들만으로도 지배가 가능하구나, 이렇게 여길 수 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격이 훼손된다.
중권이 문제는 매우 심각하다. 법적으로 변희재에게 맡길 사안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면 중권이는 여전히 이념적으로 의미있는 존재로 남는다. 이래서는 곤란하다. 변희재이든, 중권이든 중요한 건 품격이다. 중권이는 좌우를 떠나, 보수/진보를 떠나 대체 왜 이 아이콘이 떠야 하는가 하는 데애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필요로 할 만큼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갔다 할 수 있다.
중권이에 대해 사석에서 하는 이야기는 대동소이한 편이다. 좆도 모른다. 좆도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것이 중권이의 매력이다. 이 패턴을 따라할 것인가, 아닌가. 따라하면 진보좌파 소리를 듣는다. 대접받는다. 비판하면, 수구꼴통이 아님에도 수구꼴통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진실을 말할 것인가, 말 것인가. 참 어렵다.
왜 어려운가.
상기한 진중권의 헛소리를 살펴보자. 마르코프는 문학 연구에 자연과학적인 방법론을 결합시킨 사람이 아니다.
http://100.naver.com/100.nhn?docid=776940
마르코프는 러시아 수학자이다. 문학 연구와는 무관하다.
http://kr.blog.yahoo.com/babo0325%40ymail.com/22
마르코프가 화두가 된 건 문학이 아니라 언어학이다. 이 문제는 국유본 아도르노와 같은 프랑크푸르트 학파 국유본 딸랑이 촘스키 생성문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여기서는 중권이가 문학과 언어학 분별도 할 줄 모른다는 허접스러움에 있기에 더 이상 나아가지 않기로 한다.
다음으로 마르코프 과정, 혹은 마르코프 연쇄, 마르코프 체인으로 번역되는 데에 대한 무식한 설명이다.
마르코프 프로세스란 무엇인가. 이걸 잘 알아야 한다. 인드라가 설명한 것이 확실하니 인드라 말을 참고해야 한다.
마르코프 프로세스란 메멘토이다. 영화 메멘토 아는가. 영화 메멘토가 괜히 등장했다 여기는가? 아니다.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 그것이다. 예서, 단기 기억상실증이란 무엇인가. 어느 시점에서 어느 시점까지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허나, 이는 복잡하니, 간단하게 생각하자. 한국 드라마 중에 흔히 나오는 장면이 교통사고 후 기억상실증이다. 이것에만 유념하자.
기억이 없다. 현재와 미래만 있다. 이것이 주인공의 길이다. 이것이 마르코프 프로세스이다. 이해하겠는가.
누적된 기억? 누적된 확율? 개좆밥...^^! 아니다. 중권이는 정말 ㅄ 색희이다. 이것만 문제면 모르겠는데, 발터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에 대한 해석처럼 다른 것도 다...^^! 이 색희 책 읽고 아는 척하면 반드시 피 본다. 참고해라! 강조하지만, 중권이 같은 자가 판치는 것이 인드라는 대한민국 지식계에 몸 담은 사람으로서 늘 부끄럽고, 창피하다. 마르코프 체인 혹은 마르코프 프로세스가 유의미한 것은 결정론의 해체이다. 이러한 중대한 문제를 간과한 것은 물론 정반대로 이야기했으니 중권이는 ㅄ색희 인증^^! 허나, 국유본은 집요하다. 똑똑한 대한민국 백성들을 우민화시키고자 중권이 같은 자를 책내게 하고, 읽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집요한 국유본이다."
http://blog.naver.com/miavenus/70097668263
"지금 일각에서 '내 안의 이명박' 운운이 있다. 이는 임지현의 '내안의 파시즘'을 본딴 것인데, 한마디로 웃기는 짓거리다. 인드라가 보기에 '내 안의 이명박'도 문제이지만, '내 안의 노무현'도 문제이다. 가장 간단히 중앙일보 논조만 보면 된다. 중앙일보를 보면 노무현을 매우 그리워하고 있다. 좌측 깜빡이 달고 우측을 노래하니 삼성 애들이 얼마나 좋아하나. 인드라가 볼 때, '내 안의 이명박' 운운하는 애들이 바로 그런 애들이다. 진중권? 문제 많다. 논의하고 싶지도 않다. 조용히 살았으면 좋겠다. 허나, 진중권도 문제 많지만, 진중권 까는 니놈들이 더 문제다.
니놈들 문제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이렇다. 어디서 무엇하는지 조용하다가 선거 직전과 직후에 나타난다. 나타나서 맨 누구를 죽일 듯이 비난한다. 마치 월드컵 때만 선수들, 감독 비난하는 놈들처럼 말이다. 그리고 평가한다느니 뭐니 핑계를 대어 조직을 죽인다. 조직에서 가장 일 잘 하는 사람들을 축출한다. 하고, 자신도 사라진다. 마치 국유본에게 지시받은 양 하는 꼴이 가관이다. 평상시에는 죽어라고 일을 하지 않으면서 이상하게도 선거 전후에만 나타나서 지랄하는 새퀴들이 이런 놈들이다. 진중권이야 왜곡되어서 그렇지 머리에 든 건 좀 있잖나. 반면, 니넘들 머리에는 똥만 가득찼지. 배후가 어디냐. 친일뉴라이트참여연대냐, 아니면, 좀 더 윗선인 독일재단이냐."
http://blog.naver.com/miavenus/70088620123
"선생은 말한다.
<"명박 산성을 물리력으로 넘는 것보다는 상상력으로 넘는 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라는 진중권의 말은 한마디로 진똥개스러운 관념적인 개소리일뿐이다. 촛불항쟁은 상상력으로는 이미 관념의 명박산성을 넘었다는 사실을 이 똥개는 모르는 것이다. 상상력으로는 현실의 명박산성을 넘을 수 없다. 현실은 관념으로 넘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현실의 명박산성은 그 산성을 타도하거나 아니면 우회하여야만 넘을 수 있는 것이다. 이명박의 의식이나 행태를 촛불항쟁의 요인으로 설명하려는 진중권의 생각은 정말 진똥개스럽다고 아니할 수 없다. 이 '교수'는 이명박의 의식이나 행태를 지배하고 규정하고 강제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석하거나 성찰하려는 데에까지는 도저히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갈 수 없는 것이다. 최장집의 민주주의 이후의 민주주의가 무의미한 말장난이거나 무익한 개소리인 것처럼, 촛불이후의 촛불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촛불이후의 촛불이라는 것은 없다. 지금 여기가 아니라면. 현재 남한에서의 '쇠고기'문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문제 - 국가 권력의 인민 억압,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문제 -, 세계화된 자본의 근로인민대중 착취, 그리고, 자연에 대한 착취의 문제가 되었다. >
세상섬 선생의 놀라운 주장은, 진똥개가 HID 회원에게 폭행을 당한 사건으로 간단하게 끝낼 수 있다. 선생은 아무런 피해가 없는데, 왜 진똥개는 피해를 당해야 할까. 그렇다면 누가 더 관념적인가. 세상섬 선생. 욕조에 자신의 몸을 실어 글만 쓸 줄 알았던 마라도 프랑스 혁명 당시 결국 테러를 당했다. 그렇다면 선생은 쇠고기 항쟁 동안 무슨 일을 했던가, 나는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선생이 진똥개에 대해 비판함은 마치 헤겔 시대에서 헤겔좌파가 서로에 대해 비판하는 논조와 흡사하다. 헤겔좌파는 중력이 없다는 상상만으로 중력을 없앨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모든 논의를 종교적으로 풀어갔다. 그처럼 선생은 진똥개의 주장이 현실에 보탬이 되는가, 아닌가보다 종교적, 이념적으로 틀렸기 때문에, 물론 나도 진똥개 주장이 비현실적이라고 보지만, 설사 진똥개 주장이 현실적이어도 부정한다는 뉘앙스가 강하다. 내가 세상섬님의 주장을 비판하는 대목은 진똥개의 이념성 비판이 아니다. 그보다는 세상섬이 그렇다면 이 세계에 대한 현실성을 지니고 비판하는가 여부인 게다.
선생은 다음과 같이 옳게 진단하고 있다.
<이명박의 의식이나 행태를 촛불항쟁의 요인으로 설명하려는 진중권의 생각은 정말 진똥개스럽다고 아니할 수 없다. 이 '교수'는 이명박의 의식이나 행태를 지배하고 규정하고 강제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석하거나 성찰하려는 데에까지는 도저히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갈 수 없는 것이다. >
그렇다면 선생의 분석과 성찰은 진똥개와 얼마나 다를까.
<민주주의는 투쟁하여 쟁취하는 것이다. 지금의 '촛불'과 '쇠고기 항쟁'이 가능한 것은, 그 동안의 투쟁이었다. 이명박 정권은 국민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지 않는다. 무지와 결합된 끊임없는 권력과 이윤추구에의 욕망이야말로 현실에서의 이명박의 행동의 원리이자 동력이다. 촛불은 구체적인 근로인민대중의 구체적인 삶과 조직적인 투쟁 없이는 결코 승리할 수 없다. 지금 촛불에 필요한 것은 당위성이 아니라, 구체성과 조직성이다. 촛불항쟁은 아직 승리하지 못했다. >
나 역시 교수되는 과정이 의심스러운 사람의 주장을 무시하는 편이다. 왜냐하면 내 친구 중에는 그가 비록 운동권이 아니었다 해도 교수되는 과정이 당당하게 된 교수가 있기 때문이다. 해서, 운동권과 별개로 내심 무시하는 것이 있다. 그렇다. 이는 콤플렉스가 아니다. 나는 내 인생과 직업에 자부심을 느낀다. 그만큼 타인의 인생과 직업을 존중한다. 해서, 엉터리를 부정할 따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적인 태도는 사적인 면을 배제하고, 철저하게 공적인 면에서만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점이다. "
http://blog.naver.com/miavenus/70035006724
"조정환님께
님의 글을 보고 나서 한 동안 고민했던 '자유게시판'이란 무엇인가, 에 대해 저의 두서가 없는 의견이 도움이 될까 하여 글을 드립니다. 저는 요즘 안티카동호회(www.anticar.co.kr)를 자주 들립니다. 이유는 제가 5년 간 몰던 애마 티코 대신 다른 차로 바꾸려고 차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획득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른 차 관련 기업 사이트와 차주 동호회도 동시에 둘러 봤지만 제게 가장 도움이 되었던 사이트는 안티카동호회였습니다. 안티카동호회 게시판에 나타난 다양한 이들의 한국차 비판은 섬뜩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성의가 없는 글도 없지 않았지만 그보다는 어떻게 저럴 정도로 치열하게 고민하고 실천할 수 있을까 감탄이 저절로 나올 만큼 살아 있는 글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글들을 읽으면서 차종 선택을 위한 정보를 구하러 갔다가 차종 선택에 대한 도움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차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있는지, 한국차 소비자들이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으며, 또한 당국-업체에 대한 가감없는 비판과 실천을 통해 자신의 권리를 집단적으로 풀어가려는 노력을 보니 참 멋있다, 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주도하는 이들은 심심땅콩풀이로 안티카동호회를 만들었을까요? 지금까지는 그렇지 않은 듯합니다. 흡사 목숨을 건 듯이 정확한 정보에 근거하여 하나하나 현장에서 확인하면서 따져 들어가면서 소비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니 당국-업체에서도 무시할 수 없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더군요. 그렇다면 이러한 것을 이끄는 사람은 왜 이런 일을 할까? 이번 건으로 뜰려고 그런 것일까요? 안티카동호회를 주도하는 이가 어떤 상업적 계략 속에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냐,라는 비판이 그것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자기 직업이 있을 터이고 사이트 유지도 만만치 않은 것이라고 여기니 그러한 의문이 들 수 있다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안티카동호회는 철저히 아마추어리즘을 고수하겠노라고 대문에 큼지막하게 올려놨습니다. 이를 이해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는 91년부터 통신을 해왔는데 그간의 경험으로 분야만 틀릴 뿐 제도 언론을 통하지 않은 수많은 실력자들이 '순수한 열정'만으로 각자의 영역에서 열심히 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비판이 등장한다면 그 운영자가 현대냐, 기아냐, 대우냐, 삼성이냐, 외제냐하는 정치(?)적 성향에 설령 초연하더라도 게시판에서 정치꾼(혹은 각 업체 본사 판매담당자)들이 어떤 의식적 의도를 가지고서 조작할 수 있지 않느냐 하는 문제일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도 저의 그간 경험으로 보자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정치꾼들이 개입하여 말이 되면(혹은 훌륭한 기획을 잡았다면) 정치꾼들의 의도에 네티즌들이 호응하여 그들 의사에 따라 게시판이 흘러갈 것이며 반대로 정치꾼들이 개입하였음에도 말이 되지 않으면(구태의연한 수법을 써서 속이 뻔히 보인다거나 기획이 황당무계하다면) 네티즌들이 등을 돌리거나 아니면 들고일어나서 정치꾼들이 도태되거나 둘 중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정치꾼들은 말이 되면 가장 좋겠지만 최후의 방편으로 판깨기하는 방편으로 하여 해당 게시판이 '정치꾼들만의 리그'가 되는 것도 차선이라고 여길 것입니다. 네티즌의 관심을 희석시켰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운영자가 순수한 열정만으로 안티동호회를 계속 유지시키게 하고 네티즌들이 양질의 정보를 획득하기 위한 최선의 길은 '정치꾼들만의 리그'를 깨부수고 정치꾼들을 도태시키는 것이어야 하겠지요. 왜냐하면 네티즌들이 안티동호회를 찾는 것은 그간 정치꾼들에게서 올바른 정보를 얻지 못하고 그들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또한 이 판마저 깨지면 네티즌들이 올바른 정보를 구할 곳이 마땅치 않게 된다는 점에서 그렇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운영자와 네티즌들은 자신들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운영자가 흔들림없이 안티동호회를 유지해야 하는 과제와 더불어 네티즌들이 정보에 대한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스스로 공부하고 노력하는 과제가 절실합니다. 이 두 가지 중 어느 하나도 이뤄지지 않는다면 유지되기에 힘들다고 저는 그간의 통신 경험에서 감히 확언을 해봅니다. 제가 안티카동호회를 길게 논하는 까닭은 바로 님의 다음과 같은 글 때문입니다.
"님의 편지를 보고 나서 한 동안 '자유게시판'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삶의 어디에 자리잡고 있는가, 내가 자유게시판을 통해서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편에서 자유게시판은 다중의 목소리가 드러나는 곳이며 그 곳의 웅성거림과 아우성이야말로 내가 속해야 할 장소라는 생각, 다른 한편에서 이곳의 소란이 갖는 높은 엔트로피를 내가 감당해 가야한다면 어떤 이유에서인가라는 물음 사이에 나는 서 있습니다. 님은 어디에선가 자유게시판에의 기고활동을 놀이로 묘사했지만 저로서는 그것이 (넓은 의미에서 각 개개인의 삶의 놀이라 할지라도) 결코 놀이일 수만은 없는 어떤 긴장감을 늘 수반하기 때문입니다. (정보기관원인지 기자인지 아니면 저의 상상력이 미치지 않는 어떤 세계의 주민인지 모를) vnf님의 욕설과 비아냥거림 가운데에는 이런 의미에서 경청하고 음미하며 실천적으로 타개해 나갈 어떤 방향에 대한 제시가 (반면교사의 모습으로) 깃들어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제가 아래에서 자유게시판을 '무림'으로 개념 정의하고자 하는 문화일보 기사의 시각을 비판한 것은 자유게시판이 승패를 가리는 격투장으로서보다는 새로운 관점, 새로운 정서, 새로운 관계를 창출하는 생산공간으로, 나아가 다중들의 힘과 지성이 소통되는 가상 코뮌으로 자리잡을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늘날 자유게시판은 자신의 이러한 잠재력을 극히 일부밖에 실현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하는데, 이러한 진단은 저로 하여금 자유게시판이라는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다중이 이용함에 있어 (부르주아 정치권, 시장, 공장이 보여주는 격투장의 논리를 넘어설 수 있는 다중의 새로운 힘의 현시로서) 어떤 문화적-윤리적 노력이 필요한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듭니다."
제가 이해한 님의 글 논지는 자유게시판이 승패를 가리는 사이버 무림 격투장이냐, 이 승패를 넘어선 제 3세력의 또 다른 승리를 엿볼 수 있는 가상 콤뮌이냐의 기로에서 잠재력이 극히 일부밖에 실현되지 못하지만 잠재력을 극대화시켜 가상 콤뮌으로 갈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입니다. 만일 이러한 제 이해가 옳다면 자유게시판이 가상 콤뮌으로 가는 방편 중 하나로써 문화적-윤리적 노력이란 님이 네티즌을 이끌고 가는 제 3세력의 영수가 되고자 하는 '순수한 열정'으로 종전의 영수와 다를 뿐만 아니라 발전된 모습으로 종래의 영수를 비판하는 사이버 무림 격투를 벌이고 있는 것인 동시에 '실천적 노력' 여부에 따라 이 격투가 가상 콤뮌으로 가는 '이행'에 작은 효과를 낼 수도 있겠다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저는 님이 진중권님과 격투하는 것을 매우 흥미롭게 여기며 누가 승자가 될 것인가 관심이 있는 동시에 님과 진중권님의 '실천적 노력' 여부에 따라 두 분이 극히 제한적인 잠재력의 포로로 매몰될 것인가, 조금이나마 잠재력을 늘일 것인가를 지켜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자유게시판은 빨리 응답하지 않으면 응답이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성급함과 속도의 문화에 오염되어 있습니다. 응답의 지연, 바로 그것이 사유의 공간이며 창조의 시간일 수 있는 가능성이 왜 미리부터 배제되고 있는 것일까요? 물론 자유게시판의 프로그래밍 형식이 그러한 문화를 강제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시간순으로 데이터를 축적하며 과거를 현재 속으로 다시 끌어들이기가 매우 어려운 직선적 프로그램 구조말입니다. 현재와 과거, 미래가 아무런 어려움 없이 만날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자료저장 형식이 개발되기까지는 저로서는 속도에 애써 무관심하는 인내력을 통해서만 자유게시판의 이 바쁨의 문화를 견뎌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비록 기계과 전공을 한 사람이지만 기계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습니다. 아울러 제가 자동차회사에서 한때 자동차를 파는 영업사원이지만 차에 대해 아는 바도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제가 하는 차에 관한 상식은 극히 제한적입니다. 반면 레이싱을 즐기는 레이싱 매니아들은 대개 운전뿐만 아니라 차구조에도 해박합니다. 그들은 속도의 전사들입니다. 그들이 레이싱을 즐기는 이유와 도로를 질주하면서 나타나는 차상태에 대한 깊은 관심에 대해 제가 바보처럼 '인내심있는' 오염된 관점으로 그들의 사유의 공간과 창조의 시간을 배제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물론 허락된 곳이 아니면 도로에는 제한속도가 있기에 그러한 '인내심있는' 문화를 강제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시간순으로 데이터를 축적하며 과거를 현재 속으로 다시 끌어들이기가 매우 어려운 직선적 프로그램 구조말입니다. 현재와 과거, 미래가 아무런 어려움 없이 만날 수 있게 하는 '시공간 초월적인' 자료저장 형식이 개발되기까지는 저로서는 속도에 솔직히 콤플렉스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다시 생각하면 '구체적인 시공간' 속에 속하지 않고 이미 초월한 듯이 폼잡기 보다는 '구체적인 시공간' 한복판으로 뛰어들어 이러한 콤플렉스를 해소하면서 '여유있는 속도감'을 낼 수 있다면 레이싱 매니아들의 감성을 이해할뿐더러 넘어설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보다 빠른 스피드를 추구하는 까닭은 혹 그 빠른 스피드 속에서도 냉정을 잃지 않고 침착하려는 의지의 소산이 아닐까요? 자동차 회사들이 레이서를 고용하여 높은 스피드에서 차 테스트를 하는 이유는 저속 스피드에서도 얼마든지 견딜 수 있기 위함일 것입니다. 어느 속도까지 내면 차가 뽀개진다더라,라는 것을 레이서를 통해서 판단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인내심있는' 스피드로 시험한다면 하나마나이겠지요? 그런데 자동차 회사들이란 좋은 차를 만들기 위함이 목적이 아니라 이윤의 창출에 목적이 있다는 것을 잘 아는 아마추어 레이서들은 교통경찰의 검열을 피하면서, 자신의 돈과 시간과 목숨을 걸고서 레이싱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티코를 타면서 평소에 매우 안전운행하는 스타일이어서 레이서들을 보면 질투가 마구 납니다. 너무나 부럽습니다. 저도 저만한 차를 치밀하게 준비해서 무진장 속도를 내고 싶지만, 그리하여 다른 이들이 속도의 한계에 부딪혀서 겁을 내며 속도에 매몰될 때 제가 무섭도록 침착하게 다른 이들이 벽이라고 느끼는 속도를 넘어서고 싶지만, 몸이 따라가지 않습니다. 머리는 가상 콤뮌으로 가고 싶으나 게을러서 차도 준비할 수 없고 겁이 많아 콤플렉스가 심해서 질투만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질투가 백해무익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질투할 시간에 다른 일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몸이 안 따라주는군요.
말로는 다양하고 창조적인 공간에 속하고 있다고 여기나 사실은 획일적이고 폐쇄적인 공간에서 그들에게 시선을 던지니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깨끗이 그들을 인정하고 저는 제가 잘 하는 곳에서 열심히 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자유게시판 중 하나에서 님의 글을 읽었습니다.
"저는 지난 번 제시한 다섯 가지 문제를 아직 풀지 못했고 또 단기간에 풀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지도 않습니다. 저는 님에게 이 다섯 가지 문제에 대한 '레포트적' 답안을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님이 그러한 답안을 제시하는 것은 자유겠지만 제가 거기에 반드시 응답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저로서는 단지 우리의 논의가 생산적일 수 있기 위해, 다시 말해 논의 지평의 협소함을 넘어서기 위해 갖추어야 할 잠정적 논의틀을 제안한 것에 불과합니다. 저는 그 각각의 문제에 대해 지금 생각해 보고 있으며 자유게시판에 오르는 여러 참여자들의 견해를 읽고 분석하는 것도 그것의 중요한 작업들 중의 하나이며 '조그만 실천'님이 제안한 우리모두 사이트 탐방도 (아직은 계획으로서만 남아 있지만) 하지 않으면 안될 과제 중의 하나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저에게는 이것이 유일한 방법이며 어떤 단계도 건너뛸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님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상식 해답', 바로 그것이 제게는 시간을 바쳐 풀어야할 문제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후에 님의 답안에 대해서 언급할 기회가 있을지는 지금 정확하게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그것은 님에 대한 답변의 형식을 취하기보다 제가 제시한 논의틀에 대한 자기응답의 형식을 취하게 될 것 같습니다."
저는 제가 레이싱을 할 수 없었고 또 레이싱 문제에 대해 단기간에 풀 수 있지도 않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중장기적으로도 풀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님에게 레이싱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님에게 레이싱에 대한 '문화적 - 윤리적' 답안을 요구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님이 그러한 답안을 제시하는 것은 자유겠지만 제가 거기에 반드시 응답해야 할 의무가 있지도 않으며, 나아가 이후 어느날인가 님이 그러한 '문화적 - 윤리적' 답안을 제시한다고 해서 생산적일 것이라고 추호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님이 레이싱에 관심이 있는지는 모르나 만일 저와 비슷한 사정이시라면 레이싱을 반드시 차로만 가능한가, 글쓰기라는 통로로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라는 생각을 하실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통로에서 하면 되는 것이지 않을까 여긴다는 점입니다. 저는 이것이 유일한 방법이며 어떤 단계도 건너뛸 수 없는 범주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님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시는 오염된 통신 레이싱 문화가 제게는 시간을 바쳐 풀어야할 문제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아마도 님에 대한 답변의 형식을 취하기보다 제가 91년부터 통신을 하면서 제시한 논의틀에 대한 자기응답의 형식을 취하게 될 것 같습니다. 블라디미르, 사당의원 BBS, 르뻬떼라는 좌파세력과의 통신 활동, 통신을 통한 운동이냐, 통신을 위한 운동이냐 등등의 바통모 활동, 그밖에 수많은 게시판과 오프라인에서의 활동...
"한편 저는 '조그만 실천'님의 기사를 통해 제가 한 가지 착시 현상을 갖고 있었다는 느낌을 지금 받고 있습니다. 그것은 나도 모르게 진중권님을 안티조선 운동의 지식인 대변자 중의 한 사람으로 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각이 위험하다는 것을 지금 저는 느끼고 있습니다. 진중권님과의 대화는 우선 개인 '진중권'과의 대화로 진행되어야 하며 안티조선과의 대화는 그것의 효과로 그쳐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에 저는 도달했습니다.
다음은 님의 편지에 대한 축자적 응답입니다. 제 응답의 필요에 따라 님의 편지의 단락 순서를 일부 변경하는 것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한편 저는 그간 다중공간 왑 사이트를 그간 '안티조선운동을 안티하기 운동 도모하기'로 한몫 잡으려는 지식인 운동이며, 님이 이 사이트의 대변자로 보고 있었는데 혹 착시가 아닌가 여기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시각도 위험할 수 있다고 지금 느끼고 있습니다. 조정환님과의 대화는 우선 개인 '조정환'과의 대화로 진행되어야 하며 안티조선운동을 안티하기 운동과의 대화는 그것의 효과로 그쳐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에 저는 도달했습니다. 다음은 진중권님과 조정환님의 대화에 대한 저의 '레이싱 글쓰기적'인 응답입니다. 제 응답의 필요에 따라 저는 시간적으로 계속 서술하고자 합니다. 이같은 이유는 저는 진중권과 조정환의 양자 지양이야말로 네티즌에게 가장 필요한 작업이 아닌가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양해바랍니다.
"<1>제도 변화의 동학에 대해
진중권: 둘째, 사상전향제에서 준법서약제로의 변화에서 한국지배계급의 지배전략의 변화를 보는 것은 좀 스콜라스틱하다는 느낌입니다. 간단히 생각해 보면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민주당에서 사상전향제를 폐지하려다, 아직 의회의 다수를 차지하는 한나라당과 자민련의 반대로 그것이 어렵자, 고육지책 끝에 양쪽 다 만족시키기 위해 억지로 만들어낸 매우 인위적인 타협안일 뿐입니다. 법적 근거나 법철학적 논거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부르주아 계급이 새로운 작전을 짠 결과로 등장한 것도 아니고... 그저 현실의 역관계 속에서 등장한 ad hoc 제도라고 할 수 있지요. 이렇게 보는 게 더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조정환: 이 주장에서 님은 아무 것도 논박하지 못했습니다. 단지 저의 생각에 '스콜라스틱하다'는 이름표를 붙인 후 그 곁에 '간단히 생각해' 본 님의 생각을 나란히 대치시키고 있을 뿐입니다. 저의 생각이 님의 생각보다는 <복잡하게 생각해> 본 후에 나온 결론임을 저는 인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님처럼 생각해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것'이라는 점도 딱히 반대할 의사가 없습니다. 단지 그 자연스러움 속에서 힘을 행사하는 것은 사유하는 인간의 지성이 아니라 습속과 통념, 다시 말해 이데올로기라고 생각할 따름입니다.
저는 님이 말한 바, 사상전향제에서 준법서약제로의 변화가 '현실의 역관계 속에서' 등장했다는 점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어떤 역관계인가요? 저는 그것이 자본과 노동의 역관계의 투영이라고 보았습니다. 님은 그것이 의회 내 당파싸움의 역관계의 투영이라고 봅니다. 님은 '부르주아 계급이 새로운 작전을 짠 결과'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현재 구성된 의회 내의 당파싸움의 핵심은 누가 다중을 더 효과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가를 둘러싼 싸움입니다. 즉 이들의 당파싸움 자체가 지배를 위한 법적, 제도적 개혁의 방향을 결정짓는(즉 새로운 작전을 짜는) 일종의 구수회의라고 한다면 제가 너무 지나친 것일까요? 이러한 개혁들에 법적, 법철학적 논거가 있어야 하는 것일까요? 설마 님이, 지금까지의 제도들이 (힘이 아니라) 어떤 법이나 법철학에 근거를 두고 구축되어 온 것이라고 보시지는 않겠지요."
창비에서 노해문, 그리고 안티조선으로의 변화에서 한국지배계급의 지배전략의 변화를 보는 것은 타당하다는 것이 저의 입장입니다. "새로운 관점, 새로운 정서, 새로운 관계를 창출하는 생산공간으로, 나아가 다중들의 힘과 지성이 소통되는 가상 코뮌으로 자리잡을 필요성을 강조"한다고 보는 것은 단견이 아닐까요? 저는 그것이 자본과 노동의 역관계의 투영이라고 봅니다. 다시 말해 팔십년대때 운동가들이 운동과 캠페인을 구별하고자 노력했던 그 관점에서 보시면 이해가 빠르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님은 새로운 관점, 새로운 정서, 새로운 관계를 창출하는 생산공간으로 자유게시판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구성된 진중권 VS 조정환이라는 당파싸움의 핵심은 누가 다중이라는 네티즌을 더 효과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가를 둘러싼 싸움입니다. 즉 이들의 당파싸움 자체가 지배를 위한 법적, 제도적 개혁의 방향을 결정짓는(즉 새로운 작전을 짜는) 일종의 구수회의라고 한다면 제가 너무 지나친 것일까요? 이러한 개혁들에 법적, 법철학적 논거가 있어야 하는 것일까요? 설마 님이, 지금까지의 인터넷 제도들이 (힘이 아니라) 어떤 법이나 법철학에 근거를 두고 구축되어 온 것이라고 보시지는 않겠지요. 물론 GNU 강령이다, 해커다, 카피레프트다 잠시 유행했던 때는 있었습니다만... 그러니까 솔직히 까놓고 말해 네티즌 중 얼마만한 사람들이 창비 게시판에서 백낙청이 말한다고 관심있게 볼 사람이 누가 얼마나 있겠느냐라는 것입니다.
다음 대목은 길어서 분량을 나누어서 보겠습니다.
"<2>안티조선의 관점에 대해
진중권: 첫째, 안티조선운동이 준법서약서제를 지지할 것이라는 말씀은 별로 타당하지 않은 듯 하군요. 안티조선에서는 이에 관한 합의가 없지만, 이제까지 게시판의 분위기로 보아, 사상전향제는 물론이고 그보다 약한 준법서약서제에도 반대하는 게 대체적인 정서입니다. 안티조선운동은 특정 세계관이나 이념을 전제하고 있지 않습니다. 거기에 너무 많은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지 마십시오. 그저 간단하게 조선일보의 몰상식한 행태에 열받은 시민들이 시작한 일이라고 생각해 두십시오. 굳이 멋 있게 부르자면 "일반민주주의투쟁"이라고 할까. 특정한 사안에 대한 지지와 반대의 예측을 결론으로 끄집어낼 수 있을 정도로 체계적인 이념이나 세계관이 안티조선에는 없습니다.
조정환: <1>의 주제는 안티조선 논의의 필수적인 구성부분은 아니지만 이 주제는 우리의 논의에서 필수적입니다. 한국 사회의 여러 좌파 부분들이 신자유주의(의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에 대한 비판에 집중하고 있는 현 시기에 안티조선이 (신자유주의까지 포괄하는) 반극우 (미디어) 전선을 형성하는 것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실천적 옹호로 비치고 있는 현상에 대해 안티조선은 응답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물론 좌파들은 좌파의 신자유주의 비판이 그 국가주의적 경향성 속에서 권위주의 세력과 부단히 영합하는 경향을 띠는 현상에 대해 응답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저는 여기서 한가지 의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국 사회의 여러 좌파 부분들이 정말로 진심으로 진지하게 신자유주의(의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에 대한 비판에 집중하고 있는가를 묻고자 합니다. 또한 안티조선이 (신자유주의까지 포괄하는) 반극우(미디어) 전선을 형성하는 것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실천적 옹호로 비치고 있는 현상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일부 좌파가 좌파의 신자유주의 비판이 국가주의적 경향성 속에서 권위주의 세력과 부단히 영합하는 경향을 띠는 현상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진중권님과 조정환님이 신자유주의와 반극우노선에 혹 영합하고 있지 않는가에 대해 응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기에 대한 저의 질문은 간단합니다. "지금 여러분은 인터넷에서 무엇을 위해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흡사 한나라당 비판적 지지파나 민주당 비판적 지지파와 같은 위상으로 지금 우리 앞에 서 있는 것은 아닌가요?
"저는 준법서약제로의 변화를 신자유주의적 제도개혁의 일부로 파악하기 때문에 제가 제시한 자료는 (준법서약제 자체에 대한 논의를 제기한 것이라기보다) 현재의 안티조선의 실천이 가져오는 효과에 대해 판단해 줄 것을, 그리고 진중권님과 안티조선이 신자유주의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 답해 달라는 요청이기도 했습니다. "제가 판단하기에 안티조선의 전술은 사상전향제를 반대하되 준법서약제를 보호하며 국가보안법을 반대하되 민주질서수호법의 보존을 지지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에 대해 실제로 안티조선이 어떤 견해를 갖고 있는지 그것이 무엇인지를 아직 저는 모르고 있습니다)"라고 한 구절은 그 이상의 어떤 의미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저는 진중권님과 조정환님의 인터넷 진출에 대해서는 신자유주의적 제도개혁의 일부로 파악하기 때문에 제가 제시한 자료는 (레이싱적 글쓰기 자체에 대한 논의를 제기하는 것이라기보다) 현재의 진중권 VS 조정환이 신자유주의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 알고 싶다는 것입니다. "제가 판단하기에 진중권님과 조정환님은 그간의 문단 고압적 자세를 반대하면서도 창비 백낙청식 인터넷 자유게시판 개입에 대해서는 보호하며 레이싱적 글쓰기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대보다는 자신들이 하는 만큼의 레이싱적 글쓰기에 대한 보존을 지지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에 대해 실제로 님들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 저는 아직도 모릅니디만) 제가 예상하기로는 창비나 문지가 90년대 중후반에 한때 시도한, 제한적인 레이싱적 글쓰기 인정 차원에서 봉합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저의 의문에 답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지금까지의 실천에서 안티조선은 스딸린주의적 정치활동의 시대에 유행했던 '무엇이 우선인가(소위 주요와 부차)'의 관점(독점, 종속을 우선 해결 과제로 설정한 80년대의 단계론적 사고를 상기해 보십시요. 저 자신도 이런 관점에 빠져 있었던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과 유사한 방식으로 조선일보 우선 타격의 태도를 보이면서 여타 신문이 보이는 경향들, 특히 신자유주의적 경향들에 대한 태도표명을 유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님은 안티조선에 그에 대한 합의가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진중권님의 개인 견해는 무엇입니까? 어째서 권위주의와 극우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그토록 치열한 분노를 표현하면서 준법서약서라는 신자유주의 제도(저의 생각에서 볼 때)에 대해서는 게시판의 분위기를 통해서 읽어내야 할 정도의 불명확한 정서적 반대에 만족하시는 것인지요? 그리고 '안티조선에는 특정한 세계관이나 이념이 없다'거나, 또 아래에서 님이 말하듯 안티조선의 행동에는 특별한 이론이 불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마치 어떤 새로운 운동의 관점이자 방식일 수 있기나 하다는 듯이 주장되는 것은 당혹스럽습니다. 안티조선이 하나의 운동이고자 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관점 확립을 피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게다가 신자유주의에 대한 태도표명의 요구는 결코 세계관이나 이념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권위주의나 극우가 단순한 이념이나 세계관에 머물지 않는 행동이듯이 신자유주의도 이념이자 정책이고 또 행동이 아닌가요?"
캠페인이 아니라 운동이라고 님들이 생각하는 한 과연 지금 통신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님들의 행위에 상응하는 관점 확립을 피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점에서는 저도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님이 스딸린주의적 정치활동의 시대에 유행했던 '무엇이 우선인가'의 관점을 비판하시고, 그 관점에 빠졌다고 고백하시지만 지금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당장 님들의 글쓰기나 저나 팔십년대적 글쓰기와 그다지 다르다 여기지 않습니다. 이런 글쓰기는 통신 글쓰기라고 볼 수 없지요. 신자유주의가 이념이자 정책이고 또 행동이고 글쓰기라면 이 점에서 심지어 저까지 과연 헤어날 수 있는 문제인가 스스로 의심을 던져 봅니다. 왜 우리는 온라인에서의 힘이 아니라 이미 형성된 오프라인의 권위에 의존하여 대리전적인 논쟁이 되어야만 하는가. 그 오프라인적 권위는 신자유주의가 선사한 저널리즘적 급진성 속에서만 발현되고 있는 것인가. 상대를 때려눕히고 절멸시키고야 말겠다는 19세기의 폭로와 비판이 아닌 상생적인 파파라치적 비판과 폭로에 의존하고 있는 것인가. 그 효과란 오로지 일간지에 논쟁이 있었다라는 가쉽거리 취급으로 스스로 만족해야 하는가. 왜 서준식님이 말씀하시듯 '까고 부시지 못하고' 까고 부시는 척하는 절차적 글쓰기에 민감한가. 필요하다면 절차적 글쓰기를 깡그리 무시할 수도 있는데 왜 그리들 연연하는가. 그리도 정말 '까고 부시고자' 한다면 구십년대, 이천년대가 허용된 글쓰기 광장으로 달려가지 못하고 있는가. 일간지 논설위원으로 보이는 이도 다중이 사용하는 곳으로 가서 과감하게 자신의 논지를 펼치는데 왜 소위 좌파라고 자칭하는 먹물들은 그저 자신을 추종할 것만 같은 박수부대, 혹은 독서토론회, 또는 새로운 중앙조직 안에서만 만족하고 있는가. 왜 당신들은 광장으로 달려가지 않는가. 그곳에 가서 두 분이 정연한 논리로 치고 박고 싸운다면 그 싸움이 차라리 해볼만한 싸움이 아니던가. 왜 제한적인 공간에서만 글쓰기를 고집할까. 흡사 어항 속의 물고기들이 제각각 영역을 차지하고 나서 서로에 대해 입을 꿈벅꿈벅 벌리는 것으로만 보일까. 너무나 평화롭다. 너무나 평화로우니 짜증이 난다.
"님은 안티조선에 '너무 많은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안티조선운동의 의미는 제가 부과한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실천이 낳는 효과입니다. 그것이 "일반민주주의 투쟁"일까요? 그것이 님의 말에서는 '멋있게 부르'기 위한 용어에 불과하므로 진지하게 대할 필요는 없겠지만 상호연결되어 있는 수많은 악들에 대한 투쟁을 특정한 '악'에 대항하는 투쟁으로 환원하는 것으로서의 "일반 민주주의"란 실제로는 그 특정한 악과의 투쟁마저도 곤경에 처하게 할 하나의 환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약 진정한 '일반'(general) 민주주의가 있다면 그것은 이런저런 유보 없이 다중이 자신의 삶의 존엄을 유감없이 표현할 수 있는 절대적 공화국의 정치형태에 합당한 이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님이 다중에 의해 추동되는 안티조선 운동을 '몰상식한 행태에 열받은 시민'의 감정적 행동으로 격하시키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보면 자연스럽습니다. 몰'상식'(commonsense)이라는 용어는 무엇을 드러내고 무엇을 숨깁니까? 저는 현존하는 부르주아 사회의 상식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들의 다중 속에의 침전물이라고 봅니다. 사실 이런 의미에서의 상식이란 우리가 잊어버림으로써만 넘어 설 수 있는 그 무엇입니다. 조선일보는 상식을 잊게 하는 것('몰')이 아니라 끊임없이 우리에게 상식을 주입하고 상식에 따라 살도록 강제하는 신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commonsense의 또 다른 의미, 즉 공동체적 감각이라는 의미를 알고 있습니다. 제가 조선일보에 반대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의미에서인데, 조선일보의 상식이 다중의 공동체적 감각을 '상식'을 통해 침식하고 파괴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 공동체적 감각에 대한 이러한 적대의 태도가 조선일보에 국한되지 않고 때로는 한겨레신문까지 포함하는 다양한 매체에 실존한다는 것, 아울러 이런 매체들에서만이 아니라 국가와 자본의 제 활동형태들 속에 나타난다는 것에 저는 주목합니다. 이것들에 온몸으로 저항하고 새로운 대안(대안은 전망이 아니라 우리를 현재 서 있는 자리에서 이동시킬 대체물입니다. 한자 그대로인데 案은 아이디어가 아니라 책상을 의미합니다)을 창출하는 것이, 삶의 행복을 찾아나갈 수 있는 다중적 방법이라고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조선일보에 반대하는 방법은 다른 매체들과 반공감(反共感)적 힘들의 여러 실존형태들에 저항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는 것이어야 합니다. 제가 조선일보 반대라는 기치에 찬성하면서도 기고 반대라는 그 전술에 극구 반대하는 이유는 그것이 그 길을 닫기 때문입니다. 그 전술의 한계는 동아, 중앙에의 기고를 조선에의 기고를 반대하기 위한 방법으로 사용하고자 한 강준만님의 방법과 그에 대한 이의제기들에서 이미 드러났다고 저는 봅니다."
좃선일보와 한걸레 신문. 근래에 두 신문이 아닌 다른 신문사 소속 기자의 결혼식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와 안면이 없어서 그의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들은 바로는 종래 정권이 유지되었다면 부조금이 더욱 늘어났을 것인데 하는 안타까움을 표했다고 합니다. 결혼식에는 물론 양당 화환이 걸려 있었습니다. 제가 그 자리에 가서 "화환을 치워라, 이 신자유주의자들아"라고 외친다면 나야말로 신자유주의자일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저는 님이 온몸으로 저항하고 새로운 대안을 찾고자 안티조선과 개인 '진중권'에 집중하는 것에 한편으로 동의합니다. 저 또한 조선일보 반대라는 기치에 찬성하면서도 기고 반대라는 그 전술을 운동이란 양식으로까지 승화(?)시킬 바에야 한겨레 반대라는 기치가 보다 현 정세에 부각되는 전술이 아닌가 여긴다는 점입니다. 그 점에서 저는 두분 모두 한계를 드러내지 않았는가 생각합니다. 사실 저도 반성적인 지점이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안티조선이나 다중공간 왑에 글쓰기하는 것을 다시금 고민해야 합니다. 왜 나는 하이텔 플라자 같은 곳에서 글쓰기를 스스로 일년간 봉쇄시켰을까. 신자유주의 반대와 김대중 반대. 김대중 정권 초기때부터 김대중 정권 비판하다가 김대중 욕하다 짤렸는데 왜 지금과 같은 호기에서 왜 그 광장으로 나아가지 못하는가. 대안이 없어서인가. 몰상식한 다중에 좌절해서인가. 아, 씨발. 나 같은 놈이 재수없다는데 할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우선순위를 매기는 나 자신을 보았고 그 우선순위를 포기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우선순위를 매기는 등급을 까부수기 위한 고리를 타격하고자 하였는데 그 꼴을 못봐주겠다는 겁니다. "왜 너만 예외냐?"라는 데에 대한 답변을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잠시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있다가 반성중이어서 안티조선에서의 글쓰기도 반성중인데 그러던 차에 님의 글을 읽고 이곳에도 한자쓰게 된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안티조선에서의 진중권님과 다중공간 웹에서의 조정환님의 차이란 무엇인가. 내게 그 차이보다는 글쓰기 후 등장하는 오프라인 경력에 더 눈이 가더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것이 다중이 몰리는 이유이지 않을까. 정말 진심으로 반극우이자 신자유주의 반대여서 안티조선에 몰리고 다중공간 왑이 몰리는 것인가. 내게는 차라리 안티카 동호회가 훨씬 더 실천적으로 보입니다. 그 캠페인이 말입니다. 그 소비자적 캠페인 한계가 더 현실인 것이 이 신자유주의적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3>거대담론과 미시담론, 귀납과 연역에 대해
진중권: 님의 글에서 아직도 거대담론에 대한 미련이나 향수를 봅니다. 제가 앞에서 지적한 두 가지 점을 잘 생각해 보십시오. 님이 논리를 펴는 방식에 어떤 편향이 있음을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님은 님이 구성해놓은 어떤 이론체계에서 연역적으로 사고를 하고 계십니다. 철학적 근대에 대한 포스트모던의 비판에 합리적 핵심이 있다면, 근대의 합리주의적 사유 속에 내재된 이 편향에 대한 폭로와 비판이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 우리의 지식인들은 가능한 한 구체적인 문제에서 출발하여 구체적인 대안 위주로 사유하여 그 결과를 이론화하는 귀납적 절차로 작업하는 방향으로 전회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즉 책에 들어 있는 이론이 아니라 신문, 잡지, 방송, 인터넷, 일상생활의 대화 속에 들어 있는 현실에서 출발하여 위로 올라가는 그런 방식 말입니다.
조정환: (쟁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제가 거대담론을 '미련이나 향수'로서 정도가 아니라 방법론의 '하나로' 선택하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편이 낫겠군요. 님은 벌써 포스트모더니즘의 '거대담론 비판과 미시담론' 주장을 이미 입증되고 확인된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입니까? 저 역시도 거대담론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의 비판에 합리성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제가 거대한 사회적 직조 속에서 미시성, 자유로운 사회적 개인들, (지식인이 아니라) 자유인을 저의 삶의 입장으로 설정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승인의 산물입니다. 하지만 거시적 시각은 여전히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미시적인 힘들이 거시적인 힘들에 포착되어 있는 것이 현대 부르주아 사회의 변함없는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지배는 미시적 선을 따라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거시적 구조의 직조를 통해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오늘날 산업재구조화, 신자유주의, 지구화 등은 하나의 거시적 흐름입니다. 미시적인 것은 거시적인 것과 긴밀히 얽혀들어 있습니다. 해방운동에서 중요한 것은 미시적인 것과 거시적인 것의 관계와 배치구조를 밝히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바로 이러한 현실은 '거시 대신 미시'라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시각역전이 거울놀이의 함정에 빠져있음을 보여줍니다. (저의 이 주장이 미시적 운동들의 문제제기적 힘을 무시하는 것으로 이해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똑같은 이유에서 '연역 대신 귀납'이라는 서술방법론의 역전 역시 문제가 있습니다. 양자 중 어떤 방법을 선택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서술의 필요, 사유의 필요에 따라 조절될 문제일 것입니다. 제 사유가 과연 연역적이었는가라는 문제가 여전히 남지만 이러한 전제 위에서 보면(즉 연역은 오류다, 혹은 근대적이므로 나쁘다는 관념을 떠나서 보면) 그 문제를 밝히는 데 더 이상 시간을 바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여전히 반복되는 문제이군요. 흡사 신앙이냐, 종교냐, 혹은 기복이냐, 믿음이냐하는 끝나지 않을 문제를 흡사 자신의 대에서 멈추리라고 생각하지 않으시리라 두분 다 여겨봅니다. 현실 < 서술 < 사유로 이어지는 이성에 대한 신뢰는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두분 다 깊숙이 껴안고 있지 않습니까.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이름의 비판은 아무짝에도 쓸모 없으나 포스트모더니스트, 혹은 포스트주의자로 낙인찍힌 - 그람시도 이 범주에 들어간다면, 아마 트로츠키나 로자 룩셈부르크, 아니 맑스 사후의 엥겔스서부터 포스트주의자로 해야 정당하지 않을까요? - 이들의 비판에 합리성이 없다고 한다면 바보 취급당하리라 봅니다. 문제는 합리성이 아니라 합리성 계보이겠지요. 지금 논쟁 배후에서 끈덕지게 나오는 계보에 대한 의심이 모든 합리성에 대한 인준에 선행하는 것. 그것이 현실적인 발언이 아닐까요. 반성한다고 이 계보가 없어지나요? 오히려 계보는 위기와 반성 속에서 강화되는 것은 아닐까요. 이 계보에 대한 비판이라면 가장 현실적인 투쟁의 장은 학생운동 총학생회 선거판일 것이고, 노동운동 선거판일 것입니다. 그때 가장 멋지고 열심히 투쟁하는 동지들이 눈물겹습니다. 그렇게 선거기간 동안 열심히 뛰어다니길 일년내내 했다면 많이 달라졌을 터인데. 즉 문제는 신자유주의 투쟁이 아니라 누가 신자유주의 투쟁의 선봉, 혹은 주도하느냐가 아닙니까. 선점한 자와 선점하지 못한 자의 싸움. 이 싸움은 얼마든지 지금도 망원경과 현미경으로 얼마든지 구경가능합니다. 정작 신자유주의 투쟁보다 이러한 싸움을 더욱 즐기는 팬들이 많으니까요. 아, 다시 한번 1980년대 논쟁저서들을 무협지 읽듯이 읽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왜 그때는 그리도 노동운동 자체 설명저서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을까요? 공동체란 무엇인가보다 공동체 논쟁사, 이런 책이 더 재미날 수 있다는 서글픈 형식. 현실은 진부하고 이빨만 뜨겁다. 그러나 이것이 지금 논쟁할 때냐, 나가 짱돌을 던지자로 해석하여 주시기 말길 바랍니다. 다만 안티조선조차도 제가 보기에는 퇴조의 기미를 보이는데 흡사 김영삼 퇴임 후 돌던지기와 같은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한걸레조차도 다중에게 이미 진부해져서 폭로할 것도 없고 폭로해서 놀랄 것도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작금에서 현재의 논쟁이란 무슨 의미를 가질까요?
성폭력 근절 백인위원회인가의 폭로가 더 의미가 있지 않나 생각이 드네요. 그러나 성폭력 명단 폭로도 자유게시판에서 누군가가 언급했듯 아무도 다치지 않고 단지 떴다,라는 것만으로 되는 상황이 서글픈 따름입니다. 죽일 놈은 죽이고 살 놈은 살아야 하는데... 다 살잖아요.
"<4>정당화의 기술과 사유의 기술
진중권: 제가 보기에 님의 주장은 너무나 강하게 theory-laden 되어 있지요. 그런데 과연 준법서약서나 안티조선의 문제에 관해 상식적인 판단을 내리는 데에 굳이 님이 구성해놓고 계신 혹은 구성하고 계신 거대한 이론이 필요한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님이 준거로 삼고 계신 그 이론적 틀에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의를 해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쩐 주장이든, 그것을 정당화하는 절차는 간단합니다. 그 주장을 논리적 조작이나 경험적 증거의 제시를 통해 모든 사람이 납득하는 상식의 수준으로 끌고 내려가, 그 특수해 보이는 주장이 실은 만인이 납득할 만한 상식과 동의적 표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준거가 되는 이 사회상식이라는 것은 가능한 한 덜 theory-laden되어 있을수록 옳을 확률도 크고,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확률도 크지요. 책에서 얻은 이론은 종종 사람을 속일 수가 있습니다.
조정환: 이 문단 전체에서 님은 논증되어야 할 것을 이미 전제하고 있습니다. '안티조선의 문제에 상식적인 판단을 내리는 데에 ...거대한 이론이 필요한가. 당신의 이론은 이론에 시달리고 있다'. 당연히 '상식적인 판단'을 내리는 데에는 상식만 필요하고 거대한 이론은 불필요합니다. 그러나 님의 목적은 상식적인 판단을 내리는 데 있지만, 저의 목적은 상식을 넘어서는 판단을 내리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님에게는 이론이 필요 없고 저에게는 이론이 필요한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 않을 수 없군요. 안티 한걸레도 이미 상식의 수준이 되었습니다. 이론이란 이러한 상식을 깨는 관점이라 한다면, 혹은 그람시적 표현에 따라 상식에 대한 비판적 의식에 있다면 안티 한걸레도 이미 상식의 수준이면 안티 안티 한걸레에서 비로소 이론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요? 이에 대해 하이텔 플라자에 가보시길 바랍니다. 한걸레는 이미 많은 이들에게 더 이상 충격적인 단어가 아닙니다. 이들에게 이를 이론적으로 제시해봐야 뭐, 그런 것까지 이론을 동원해서 할 필요가 무엇이 있느냐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이텔 플라자와 같은 곳은 그래도 중간치 먹물들이 노는 곳이어서 그렇다구요.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한 우리 아버지도 한걸레의 정체를 잘 알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안티 한걸레의 정체도 알고 있기까지 합니다. 우리 아버지가 정치적인 수준이 높다구요. 요즘 유행하는 택시기사들 만나서 물어보시죠. 지금 대개의 논점 핵심은 다음과 같죠. "너라고 무엇이 다르냐." 김대중은 물론 아직 집권조차 하지 않은 이회창까지, 더 넘어서 권영길과 청년진보당까지, 운동진영 전체에까지, 그리하여 자기 자신에 이르르는 혐오감이 팽배하여 주체는 없고 오로지 안티만이 환영받는 기이한 세계에서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지금 행해지고 있는 신자유주의. 흡사 노동자가 파업할 때 자본가가 코웃음치며 열가지 사안 중 하나만 수틀려도 파업이 망가지는 상황의 반복. 그럼에도 그나마 해 놓은 아홉가지라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시간에 쫓겨 대충 구겨넣은 상황. 겉보기에는 번지르르하지만 속은 곪은 한국차와 같은 모습. 당원이 많아야 기만명밖에 되지 않음에도 한걸레를 비롯한 제도언론에서 과도하게 취급해주는 진보정당들. 뻥튀기의 연속성 속에 몸을 내맡기다가 한숨짓기. 그처럼 재판만 돌입해도 성공적이라고 여기고 있는 출판사 편집장을 상대로 열심히 글쓰기하기. 다중을 위한 글쓰기인가, 출판사 편집장을 위한 글쓰기인가?
"많은 사람들의 동의 여부는 사실 저의 이론활동과는 완전히 독립된 별개의 문제입니다. 저는 오직 저 혼자를 설득하기 위해서 적지 않은 시간을 이론적 사유와 연구에 바치기도 합니다. 위 준법서약서에 관한 자료도 오직 저 자신을 이해시키고 설득시키기 위한 작업 중의 하나였습니다. 요령부득인 것은 님이 사유의 기술과 정당화의 기술을 완전히 혼동하고 전자를 후자 속에 해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님은 말합니다. "어쩐 주장이든, 그것을 정당화하는 절차는 간단합니다. [가]그 주장을 논리적 조작이나 경험적 증거의 제시를 통해 모든 사람이 납득하는 상식의 수준으로 끌고 내려가, [나]그 특수해 보이는 주장이 실은 만인이 납득할 만한 상식과 동의적 표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또 님은 말합니다. "그리고 준거가 되는 이 사회상식이라는 것은 가능한 한 덜 theory-laden되어 있을수록 옳을 확률도 크고,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확률도 크지요." 이런 정당화의 기술이 오늘날 우리들의 두뇌를 얼마나 짓누르고 있습니까? 많은 담론들, 나아가 넓은 의미에서보면 상품광고도 이런 정당화의 절차(기술)를 사용합니다. 이 기술에서 저는 님이 저보다 더 뛰어난 기술을 갖고 있다는 점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님보다는 조선일보가 더 탁월한 실력을 갖고 있다는 점을 여기서 반드시 입증해야 할까요?
제게 있어서 사유는 존재자의 구성적 자기언표이기 때문에 정당화로 대체될 수 없는 고유성을 갖습니다. 지구가 돈다는 사실이 만인이 납득할만한 정당화의 수준을 얻지 못해도 '도는 것은 지구'라고 생각할 자유는 존엄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해체에 대해서 님에게 말씀드릴 점은 딱 한가지입니다. 저는 님이 팔십년대라면 상기한 대목에서 "해체" 대신 "환원"이라는 표현을 썼으리라 본다는 점입니다. 아울러 님이 말씀하신 '사유'는 보통명사가 아니라 고유명사일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님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은 저 또한 고유명사라고 여기는 '사유'가 가장 뛰어나게 정당화된 것이어서 감히 진중권님이나 조정환님이나 조선일보나 기독교나 헤겔에 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과학적이라는 의미라고 저는 봅니다. 저의 관점에서는 조선일보보다 한겨레가, 한겨레보다는 강준만님이, 강준만님보다 딴지일보가, 딴지일보보다 진중권님이, 진중권님보다 조정환님이 더 정당화를 잘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저의 입장에서는 제가 님들보다 정당화를 잘 하는 셈입니다라고 스스로를 간주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러한 정당화에 대한 제 자신의 모든 환상을 지워가는, 혹은 폐지하는 운동이 사유의 근본운동이 될 것입니다.
"<5>자유게시판 토론의 방법에 대해서
진중권: 님이 '토론자료'를 올려놓는 방식으로 논의를 이끌어가려고 하시는 것은 바로 그런 성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 경우 님과 논쟁을 하려면 먼저 님이 '케리그마'처럼 선포하신 그 추상적인 문장들을 반박해야 하는 번거로운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왜? 님이 준법서약서나 안티조선에 대해 내리는 판단의 준거가 바로 그 '토론자료'라는 이름으로 올라온 특정한 '이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이 경우 논쟁은 곧바로 세계관의 싸움으로 비약을 하게 되지요. 즉 논쟁이 아니라 신들의 전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는 특정 사안에 대해 자기 견해를 밝히시고, 그 근거가 무엇인지 가능한 한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제시하셨으면 합니다. 즉 자기의 세계관의 '선포'가 아니라 (이 경우 논쟁은 구체적인 접점을 찾지 못하고 공전하게 되지요) 타인의 논리와 맞물릴 수 있는 구체적인 논증의 형태로 자기 주장을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겠지요.
조정환: 이 문단은 저의 토론방식에 일정한 해명이 필요하다는 요구로 받아들이겠습니다. 토론자료를 제가 올린 것은 님과 신정은님이 해석하신 것과는 다른 이유에서입니다. 즉 님을 권위적으로 무시하거나 혹은 제 방식대로 토론을 이끌 어떤 술책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다섯 가지의 문제를 하나의 작업과제로 설정하고 이를 연구해 보겠다고 했는데 님이 특별히 숙고된 내용이라고 보기 어려운 그 문제들에 대한 '답안'을 내놓았기 때문입니다. 기회가 되면 왜 제가 그것들에 숙고된 내용이 담겨있지 않다고 보는지 밝히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는 연구의 시간을 확보하고 있을 수 있는 님의 다음 기고행위가 고려해야할 지점들을 지적하기 위해 응답이 아니라 자료의 형식으로 그 게시물을 올린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나쁜 것은 나쁜 것이다'라는 동어반복적 분노의 '자명성'을 다시 생각해 보도록 돕자는 취지를 함축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문제 지점은 답을 하는가 마는가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답이라고 생각하는가, 답은 어떤 속도로 주어져야 하는가에서 발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견해를 밝히라는 님의 요구를 제가 앞으로도 충족시킬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언어라는 것 자체가 '서로 알아듣기 위한 실험'이지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음'이 언어행위의 전제조건은 아니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소통불가능성을 타개해 나가는 창조적 소통의 노력이 언어활동입니다. 언어는 명백한 알아들음을 통해서도 소통의 길을 열지만 때로는 타자 앞에서의 알아들을 수 없는 저 막막함이 새로운 소통의 공간을 열기도 합니다. 모든 언어는 실상은 외인어, 비유하자면 외국어입니다. 실제로 저는 님의 말 속에서도 저로서는 '알아 들을 수 없는 언어'를 드물지 않게 발견합니다. 예컨대 '상식에 기초하여 전개될 수 있는 실천' 같은 생각은 저를 몹시 어리둥절하게 합니다. 맑스는 '모르면서 행하는 것'이 곧 이데올로기라고 말했지요? 그렇다면 이론과는 무관한 자리에 독립해 있는 '상식'은 앎의 형태인가요, 아니면 '모름'인가요? 오리무중입니다.
쓰고 보니 또 진중권님과 안티조선운동을 동일시한 듯한 느낌을 받는군요. 이것은 전적으로 안티조선 운동의 총체에 대한 저의 지식부족에서 연유하는 것인데 차차 극복해 나가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조그만 실천'님이 제기한 문제에 대해서도 준비가 되는대로 응답할 것입니다. 님이 책에 속지 않도록 경계하라고 한 점 명심하겠습니다. 이 고마운 충고에 대한 보답으로 저는 님에게 상식에 속지 않도록 경계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느냐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그런데 중권님, 우리 이렇게 해서 '뜨는' 게 확실합니까? 실수가 없어야 할 텐데......아뭏든 뜨는 것도 참 고생스럽네요.)"
어느 차주 동호회의 회원 말이 자신들의 동호회를 anti도 아니고 nice도 아닌 성격으로 규정해주기를 바라더군요. 그런 구절을 측은하게 읽다가 님의 마지막 구절을 읽으면서 님과 동질감을 느껴 봅니다. "그런데 중권님, 우리 이렇게 해서 '뜨는' 게 확실합니까? 실수가 없어야 할 텐데......아뭏든 뜨는 것도 참 고생스럽네요" 이러한 멘트로 끝맺는 방식에서 진중권님과 조정환님과 저는 한통속임을 강하게 느껴봅니다. 이러한 멘트가 주는 역설을 세 명뿐만 아니라 다수의 사람들도 인지하지 않을까 예상이 됩니다. 저는 '모르는 척하면서 행하는 것'을 이마골로기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미지+이데올로기의 합성용어로 느림이란 소설도 발표하기도 한 밀란 쿤데라가 언명한 것이죠. 언제 광고는 까고 부술 수 있을까요? 은행이 더 이상 이자를 줄 때를 찾지 못한다면 파산하겠지요. 그렇다고 해서 자본의 운동이 멈추지는 않을 듯 합니다. 근래의 신자유주의처럼. 그처럼 우리의 사랑스런 광고도 자본의 운동에 힘을 입어 열심히 자기복제를 거듭하고 있군요. 저는 제가 마침표가 되리라고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솔직한 심사는 말하지 않아도 아시겠지요? 저는 언제 상대가 절대로 논박하지 못할 것을 들이민다는 환상을 깰까요? 아마 제가 이 세상을 지배한 이후에 될 것같아요. 그래야 환상이 현실이 되고 그리하여 환상을 만드는 현실 자체가 부정당할 터이니까. "
http://blog.naver.com/miavenus/60002889925
요즘 진중권이 김연아 때리기에 나선 모양이다.
김연아 때리면 진중권이 미워하는 박근혜 대통령 당선이 멀어질까.
인드라는 반성부터 해본다.
인드라는 왜 진중권을 밥맛없다고 여겼던가.
그 연유는 첫번째로 진중권이 '보편상식론'을 꺼냈기 때문인 것 같다.
인드라는 세상이란 다수가 보편상식으로 아는 것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국유본론을 정립하기 전부터 실제로는 국유본과 같은 세력이 세상을 움직인다고 보았다.
헌데, 진중권이 대중이 좋아하는 말로 달콤하게 하니
인드라는 진중권이 요설로 대중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사악한 존재로 본 것 같다.
인드라는 지금 진중권을 국유본 끄나풀로 보더라도 사악한 존재로까지 보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진중권이 그래도 본성이 착한 넘인 것 같은데,
병쉰짓 그만하고 좀 조용하게 살 수 없나 이런 생각이 지배적이다.
두번째로는 인드라의 열패감이 있었던 듯싶다.
이 점을 인정하기 참 어려웠는데,
국유본론을 정립하면서
마음을 열고, 자세를 낮추고, 세상에 감사한다
마자세를 열심히 하다 보니
인정하게 되었다.
인드라가 구십년대 잘 나갔던 사람이다.
인드라가 피시통신에서 한마디하면 조금 과장해서 한국 문화판이 움직였다.
그러다가 인드라는 김대중정권 들어서면서 책임을 느끼고 야인을 택했는데
그때 마침 진중권이 뜨기 시작한 게다.
이걸 비유하면,
잘 나가던 연예인 스타가 개념있는 짓한다고 군대갔는데
그 사이에 다른 연예인 스타가 뜬 것이다.
하고, 군대갔다 돌아오니 잊혀진 스타가 된 것이다.
인드라가 말하자면 잊혀진 스타라고나 할까.
속으로 아니라고 부정해봤지만,
인드라 내면에 그런 의식이 있었던 것 같다.
내 자리를 빼앗겼다 뭐 유치한 의식 말이다.
겉으로는 그런 자리를 부러워하지 않았는데,
사실 부럽지 않다고 생각해왔는데,
잘 생각해보니까 남들에 비해서 정말로 부러워하지 않았지만,
마음을 비우지 못한 면이 있는 것 같다.
해서, 이번에 반성하면서 깨끗하게 털어내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안 부럽다.
진중권 같은 삶보다 인드라 지금 삶이 더 멋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태어나도 진중권과 비교한다면 인드라 삶으로 살 것이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약간 부러운 면이 있었는데,
그건 그 길을 가보지 못한 데에 대한 호기심이 컸던 것 같다.
그런 말이 있다.
한국에서는 교수가 되어야 장모가 좋아하고.
일본에서는 폼이 나지 않더라도 자기 길을 가면 장모가 좋아한다는데
이런 건 인드라가 일본의 좋은 면을 닮은 것 같다.
다행히 돌아가신 장모도 좋은 사람이었다.
정리하면,
진중권은 진중권 길로 가면 되고,
인드라는 인드라 길로 가면 될 듯싶다.
조선일보에서 새누리당 이에리사가 김연아 활동 금지법안
같은 것 입안한다는 소식을 들으니까
인드라는 지금까지는 아니었지만 김연아를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국유본은 참 대단했다.
광우병 촛불시위 때 팬심을 활용했다.
십대 여학생 팬클럽에 들어가서
오빠 사랑해요, 오빠 사랑하는 팬 여러분, 광우병 시위에 나서주세요.
이런 식으로 팬심을 강화하니
촛불시위가 일어난 것이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시위 방식이었다.
허나, 국유본은 기발한 시위 참여 방식을 발명하고 있는 것이다.
보편상식론으로 몸대주다 정신병 앓는 쪽발노빠 애들보다가
팬심을 강화해서 혁명을 일으키는
김연아 팬들을 보니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절로 생긴다.
김연아 팬들 활동을 열심히 지켜볼 예정이다.
김연아 팬들 힘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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