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유태자본 : 제조업의 양적완화, 리콜 - 쪽발타도해방투쟁과 한반도 통일로 동아시아 시장을 키우는 것이 미국 자동차 산업 근본 해결책이다 국유본론 2013
2013/04/05 06:27
http://blog.naver.com/miavenus/70164997452
제조업의 양적완화, 리콜 :
쪽발타도해방투쟁과 한반도 통일로 동아시아 시장을 키우는 것이
미국 자동차 산업 근본 해결책이다
국제유태자본론 : 인드라 월드리포트 13/04/05
미국 자동차 도시 디트로이트가 농업 도시로 변모중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은 '모겐소 계획'을 세워 전범국가 독일을 16세기식 농업국가로 만든다는 계획을 세웠었다. 제2차 대전 당시 전 세계를 상대로 싸웠던 독일의 막강한 산업 기반을 완전히 파괴해 놓아야 전쟁 재발을 막을 수 있다는 게 기본 논리였다.
이 같은 모겐소 계획은 구소련과의 냉전이 격화돼 독일을 다시 산업국가로 일으켜야 할 전략적 필요성이 높아지면서 서류상의 계획으로 끝났다. 아마도 냉전이 없었다면 오늘날 벤츠와 BMW는 물론 세계에 명성이 자자한 각종 독일산 공산품을 구경하기 힘든 것은 물론이고, 독일은 아마도 오늘날 불가리아나 알바니아와 비슷한 유럽의 낙후된 가난한 농업국가로 머물렀을 수도 있다. 최고의 산업국가, 산업 중심 도시가 농업 지역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현대 사회에선 불가능한 일로 여겨진다.
하지만 세계 자동차 산업의 심장부였던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이 같은 농업도시로의 회귀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다. 미국 공업의 상징 디트로이트가 빠르게 농업도시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제너럴모터스(GM), 크라이슬러 등으로 대표되는 미국 자동차 산업이 급속도로 쇠퇴하면서 도시 자체가 쇠락하는 이유도 있지만 첨단 농업 시설을 유치해 도시에 새 삶을 불어넣으려는 한 재력가의 도시 재생 플랜 때문이기도 하다. 미국의 경제 전문지 포천은 최신호에서 "세계 자동차 업계의 중심 도시였던 미국 디트로이트가 금융 위기와 미국 자동차 업계의 침체 와중에 대규모 농업 도시로 변신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 보도했다. 포천에 따르면 디트로이트의 재력가를 중심으로 디트로이트 시내에 대규모 첨단 농장지대를 조성하는 투자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디트로이트의 부유층 펀드 매니저인 존 한츠(48)가 황폐한 땅으로 변해가는 디트로이트 시내에 2010년 봄 이후 3000만 달러를 투자, 농장을 조성하는 사업을 구상 중이라는 것. 한츠는 미시간·오하이오·조지아 등에 20여 개 사무소와 500여 명의 임직원을 두고 13억 달러의 자산을 운영하는 대표적인 스타 금융 서비스 기업인이었다.
금융 위기와 도시 황폐화가 1차 원인
한츠는 거주지인 디트로이트 시내에서 도시 외곽 사무실로 향하는 길에 폐허가 돼 가는 도시의 모습을 보며 디트로이트를 농업 도시로 변화시킬 아이디어를 얻었다. 1억 달러의 자산가이기도 한 한츠는 디트로이트에서 손꼽히는 재력가다. 한때 인구 200만의 미국 내 손꼽히는 대도시이자 산업화의 상징이었던 디트로이트는 지금 빈 땅이 즐비하고 인구는 90만 명으로 줄었다. 조만간 인구는 70만 명가량으로 더욱 감소될 전망이다. 탈산업화 시대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디트로이트는 비어 있는 오피스 건물과 폐가가 늘어서 있고 곳곳에 빈 황무지를 쉽게 볼 수 있게 됐다."
http://magazine.hankyung.com/main.php?module=news&mode=sub_view&mkey=1&vol_no=736&art_no=3&sec_cd=1658
이렇듯 미국 자동차산업이 그간 어떠하였길래 쇠퇴하게 된 것일까요?
미국 자동차산업 쇠퇴는 고의적 진부화가 원인
http://tyruty.tistory.com/16
이에 대해 강준만은 고의적 진부화가 원인이라고 진단합니다. 다시 말해, 미국 자동차 전문경영인들의 경영정책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인드라는 생각을 달리합니다.
http://blog.naver.com/mehta72/60059614073
강성노조와의 협약 때문이라는 데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곰파스가 누구인가. 유태계로서 아버지가 담배수입상이었다. 당시 노동기사단의 회원 자격은 법률가나 금융가가 아닌 모든 이들이 회원 자격이 있었다. 노동자만이 회원 자격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해서, 곰파스처럼 13세에 아버지 일을 이어 연초사업에 뛰어든 이도 노동기사단 자격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내 곰파스는 노동기사단을 탈퇴하여 독자적 노동조직을 만드는데 이것이 악명을 떨친, 백인 반공 노동단체 AFL이다.
당대 미국 파업운동은 어떠했나. 요즘과 비교한다면? 하늘과 땅 차이다. 미국 대통령은 경찰이 아니라 군부대 동원을 명령하였고, 군대와 노동자부대의 격렬한 대결로 끝이 나곤 했다. 1893년에 풀먼 철도 파업이 일어났을 때는 대통령이 군대를 보냈다. 그때와 지금은? 지금이 장난에 불과할 지경이다. 가상체험하려면 당대를 그린 영화를 참고하라.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건은 헤이마켓 사건이다. 무정부주의자, 혹은 아나키스트에 의해 저질러진 사건이라 여기는 8시간 노동시간 쟁취로 유명한 헤이마켓 사건으로 인해 노동기사단이 몰락하고, 보다 온건한 AFL이 노동계를 장악하였으니까.
이와 같은 위기의 시대에 금융자본은 의도적인 공황을 일으켜서 현존하는 정권을 무너뜨리고 자신에게 유리한 정권을 내세우려 했다. 이와 같은 시도는 처음이 아니며, 상용하는 수법이었다. "
국제유태자본과 매키니, 그리고 오바마 국유본론 2008
2008/07/24 04:36 수정 삭제
http://blog.naver.com/miavenus/70033344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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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유본은 유태인 하부조직을 통해 얼마든지 당대 미국 노조를 통제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자신들 통제에 따르는 미국 노조를 보호하고 키우는 대신, 자신들에 반대하는 미국 노조들을 쇠퇴시켰습니다.
'호파' 같은 영화들을 보면, 국유본이 얼마나 미국 노조를 통제하기 용이했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미국이나 한국이나 항공노조나 노조같지 않은 노조, 언론기자 씨발색희들, 전교조 같은 좆같은 색희들이 돈만 처먹는 철밥통인 건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이들을 제외한 1970년대 이후 미국 노동자들 실질임금은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다는 통계도 있답니다. 이제 노동자도 다 같은 노동자가 아닌 겁니다. 쪽발지태놈현빠에 빌뭍어서 다른 노동자 착취하는, 더 이상 노동자로 불리기 힘든 귀족 기득권층이 따로 있는 겁니다.
한국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김진숙과 같은 노동정치자영업자 쉬발년을 쪽발찌라시 한경오프엠은 물론 조중동문스 국유본 언론과 정치권에서 엄청나게 키우지 않습니까? 그와중에도 여타 다른 노동자들은 국유본 언론 외면 속에서 신음하고 죽어가지요. 여러분, 허세욱 모르시죠? 처음 들어보죠? 또 노동자신문이 폐간되는 등 암울했던 쪽발놈현정권 치하에서 뉴또라이 노회찬 병쉰색희가 노동현실 외면하고 금뱃지에 도취했을 때 죽어가던 노동자들 모르시죠? 이런 것이 국유본 세상입니다.
물론 지금 쪽발민주당이 지지하는 척합니다. 허나, 쪽발돼중 때 전철연이 어떤 대접받았나요? 병신취급받았지요. 헌데, 오히려 이명박 정부 때, 박근혜 정부 때 살판났지요? 바로 이런 겁니다. 이것이 국유본 세상인 겁니다. 이 구조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서민은 쪽발돼중 때나 쪽발놈현 때가 죽을 판이고 이명박 정부, 박근혜 정부 때가 살판이라는 걸 말입니다. 이 역설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쪽발나라도 비슷하잖아요. 쪽발노다 병쉰색희 부패민주당 시절에는 없던 것이 쪽발아베 쒸발색희 시절에는 각종 복지정책 등이 등장하고 노동자 임금도 올리잖아요? 이런 역설을 잘 보셔야 합니다. 해서, 인드라가 쪽발 부패민주당이 영구집권하기를 바랬던 것 아니겠습니까. 쪽발나라 망하라고. 반면, 쪽발에서는 쪽발돼중, 쪽발놈현이 영구집권하기를 바랬을 것입니다. 그래야 한국이 망하니까.
허나, 전문경영인에 의한 단기 성과 의주의 경영이라는 대목에서는 동의합니다.
왜 그럴까요?
스탈린과 히틀러가 우상처럼 숭배했던 프리메이슨, 헨리 포드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헨리 포드는 반유대주의자인 동시에 프리메이슨이었습니다. 해서, 당대 국유본 권력인 로스차일드 입장에서는 마땅치 않은 인물이었습니다. 당대 로스차일드 가문은 유대인 조직을 강화시키는 대신 프리메이슨 조직에 비판적이었던 데다 미국 연방준비은행을 배후에서 조종해야 했습니다. 무엇보다 당대 국유본 권력 로스차일드 가문 최대 화두는 자신의 권력을 위협할 자본 세력을 견제하는 것이었습니다.
인드라가 강조했습니다. 국유본에게 가장 위협적인 건 정치도, 종교도 아닌 또 다른 자본이라고 말입니다. 로스차일드 가문처럼 상인 신경이 고도로 발달한 자본가인 것입니다.
해서, 국유본은 세 가지 안전장치를 마련한 것입니다.
하나, 미국 연방준비은행을 만들어서 미국이란 나라 자체를 금융으로 통제한 것입니다. 자신들 뜻대로 가지 않으면 미국을 파산시킬 수 있는 힘을 보유한 것입니다.
둘, 미국증권거래위원회(SEC)과 같은 금융제도를 만들어서 미국 금융자본을 통제합니다. 로스차일드 가문에 대들 수 있는 금융자본을 사다리 걷어차기로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입니다.
셋, 독점 방지, 주주자본주의를 만들어서 역시 사다리 걷어차기 일환으로 미국 산업자본을 통제합니다. 로스차일드 가문처럼 유럽 유대인재벌들은 대부분 비밀 가족경영을 수백년에 걸쳐서 합니다. 주식 상장도 안 하는 편입니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기업을 인수한 국유본 기업이 상장 폐지하는 사례 심심찮게 볼 수 있었습니다. 반면, 미국 기업에 대해서는 혹독하리 만큼 공개 전문인경영을 강제합니다. 온갖 법률을 들이대어 기업을 해체시켜버립니다. 다시 말해, 기업할 의욕을 꺾어버립니다.
예서, 로스차일드 국유본은 록펠러에 대해서는 이미 엄청 큰 재벌인데다 미국 연방준비은행을 만들 때 협조대상이었기 때문에 죽일 수는 없고 겁만 주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조심했음에도 불구하고, 로스차일드는 결국 록펠러에게 먹히고 말지요.
헨리 포드를 보면, 당대 국유본과 반대로 행동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국유본이 1차 세계대전을 일으켜서 미국 개입을 시키려는데 미국 참전을 반대합니다. 이외에도 노동자를 가족처럼 여기면서 당대 상상할 수 없는 이상으로 고임금 복지정책을 펴면서도 노조를 인정하지 않는데, 이는 당대 미국 노조에 유태인이 암약하여 미국 노조를 좌지우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헨리 포드는 그 자신이 직접 대통령으로 나설까 고민할 정도였습니다. 이에 대한 국유본 입장은 어떨까요?
국제유태자본 하수인이었던 루즈벨트 언급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 포드사를 국유화해야 한다.
포드사는 유능했던 아들도 잃고 헨리 포드도 사망하면서 주인없는 기업이 되고맙니다.
하면, 그 이후로 포드사는 누가 경영했을까요?
인드라는 맥나마라를 듭니다.
로버트 맥나마라. 베트남전쟁 당시 미국 국방장관은 맥나마라였습니다. 그는 포드 자동차 회사를 삼킨 업적을 평가받아 케네디 당시 국방장관이 되어 이후 베트남전쟁을 오랜 기간 진두지휘하고, 사임한 뒤에 세계은행 총재가 되었습니다.
후일 국방부장관이 되고, 세계은행 총재가 되는 맥나마라이니 만큼 유능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맥나마라 이후 포드사가 망했다는 건 국유본이 포드사가 망하기를 바랬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무방하지 않겠습니까?
인드라가 이전 글에서 강조했듯이 달나라에도 가는 기술력이 미국에는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자동차 산업은 쇠퇴했습니다.
왜이겠습니까.
못 만든 것이 아니라 안 만든 것입니다.
국유본이 미국에서는 농수축산업, 문화산업, IT산업, 군수산업을 제외한 영역에서는 철저하게 기업가 정신을 탄압했던 것입니다. 해서, 미국인이 애플 스티브 잡스에 열광하는 측면이 있는 것입니다. 그는 메뚜기처럼 옮겨다니는 전문 경영인이기 보다 오너에 가까운 인물이었으니까 말입니다. 참고로 군수산업이야 전세계 51% 이상의 군사력을 보유해야만 하는 사정 때문에 이해하지만, IT산업은 왜 예외였을까요?
그것은 IT산업 역시 군수산업 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중요한 산업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구글은 전세계에서 데이터센터를 설립하고 전세계 인터넷과 인터넷 여론을 통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앞에 실시간 검색순위가 보입니까. 그걸 다 구글이 조작할 수 있습니다. 네이버나 다음 실력으로는 절대 못합니다. 어렵지 않은 간단한 기술로 여러분 쪽지나 메일, 비밀글을 다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이 구글입니다. 이 정도만으로도 그 역할이 인정되지 않습니까.
스마트폰이 상용화된 세상입니다. 이제 여러분이 24시간 동안 무엇을 하는지 일거수일투족을 다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 마무리를 할 때가 왔습니다.
고의적인 진부화, 소형차 개발 미흡 등의 문제. 이런 문제는 정말 간단하지 않습니까.
고의적인 진부화가 문제라고 합니다. 허나, 기계공학도인 인드라는 동의할 수가 없군요. 이미 당대 자동차 엔진 기술은 충분하게 앞섰기 때문에 굳이 기술개발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헨리 포드 정신대로 서민이 사기에 저렴한 차를 만들면 되었던 것입니다. 국민차 말입니다.
하고, 미국에서는 대신 규제를 하나 풀었지요. 튜닝을 자유롭게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기본만 제공하고, 돈 있고, 자동차 좋아하는 사람은 마음대로 개조하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1970년대입니다. 이 시기는 석유파동이 일어났던 시기입니다. 이 시기에 연료 효율이 좋은 차가 각광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핵심 포인트입니다. 설사 백번 양보해서 미국 자동차회사가 1970년대 이전까지 고의적인 진부화 경영정책을 내세워서 안일하게 장사를 했다손 치더라도 고유가 시대에서 얼마든지 시설투자를 할 수 있었습니다.
단기적 마인드에 집착하여 장기적 마인드를 등한시하여서 시설투자를 하지 않았다구요?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안 한 것입니다. 시설투자와 연구개발에 적극적일 정도로 의욕적인 CEO가 나타나면 김종훈을 짤라내듯이 갖가지 이유를 내세워 제거하면 되니까요. 대신 병쉰같은 넘을 마치 영웅인 듯 내세워서 모피아 병쉰색희들처럼 단기적 마인드에
치중하게 만들면 됩니다.
기술력이라구요? 세상의 핵심기술은 나사(NASA)를 비롯한 미국 군수산업에 있습니다. 국유본이 이곳 기술 중에 B급 중에서 쓸만한 것을 그때그때마다 유럽, 일본으로 기술이전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러시아나 중국으로 말입니다. 근래에는 한국, 북한으로도 기술 이전합니다.
국유본이 결심했다면, 미국 자동차회사는 설사 독일이나 일본보다 뒤늦더라도 1970년대 대대적인 시설투자을 했다면 오늘날 독일 자동차 회사나 일본 자동차 회사는 파산했을 것입니다.
허나, 당대 닉슨, 포드, 카터 때나 오바마 대통령은 이것이 늘 불만이었던 것이죠. 쌍둥이 적자라는데 무역적자 해소하려면 미국 제조업이 살아야 하고, 미국 제조업이라면 대표적인 업종이 미국 자동차 산업인데, 미국 자동차 산업만 살리면 역사에 남는 대통령이 되는 것인데, 국유본이 허락을 해주지 않는 것입니다.
하면, 그대가 오바마라면 국유본에게 어떤 방안을 요구할까요?
국유본은 절대로 미국 자동차 산업이 흥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허나, 오바마는 미국 제조업이 살고, 미국 경제가 살아야 하는 과제가 있습니다.
방법은?
그래요. 양적완화와 같은 것입니다. 미국 달러는 갈수록 부실화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건강하게 만드는 건 국유본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하면 방법은?
그래요. 같이 부실화하는 방안인 것입니다.
엔 고환율정책처럼. 각국 주요 자동차회사도 리콜 사태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하면, 일시적으로 미국 자동차가 잘 팔릴 수가 있어요. 최근 미국 자동차 회사들이 소형차 시장에서도 소폭 증가했다고 합니다.
독일차 리콜, 쪽발차 리콜, 한국차 리콜인 것입니다.
제조업의 양적완화 정책이 리콜 정책인 것입니다.
하나, 미국 양적완화를 위해 유럽, 일본 양적완화를 해야 합니다.
둘, 미국 실물경제가 살아날 때까지 양적완화로 다른 나라 실물경제가 살아나서는 안 됩니다. 실제로 일본 자동차 생산은 미국 생산 부문을 제외하고 위축되었습니다. 미국에서 생산하니 미국 경제에 보탬이 되고, 리콜되니 본사인 독일, 일본, 한국 경제를 약화시킵니다.
셋, 리콜사태로 미국 소비자들이 미국 자동차를 삽니다. 미국 자동차는 아무런 기술개발, 디자인 개선이 되지 않았습니다만...
해서, 인드라가 이런 점을 현대기아차 정몽구가 잘 파악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습니다. 미리미리 알아서 소규모로 잦은 리콜을 하라고 정몽구에게 주문한 바 있습니다. 고개를 숙이라고 강조한 바 있습니다. 현명하게 처신하라고 말입니다.
왜? 왜? 왜?
제이 록펠러가 사이버방위사령관이자 교통문제 전담 의원이기 때문입니다.
리콜하면 제이 록펠러인 것을 잊지 마세요.
인드라는 현대기아차 리콜사태에 관해 제이 록펠러에 분노하지 않습니다. 인드라가 제이 록펠러였다고 해도 같은 조치를 취했을 것입니다. 현대 정몽구는 좀 더 철이 들어야 하겠습니다.
최근 현대 노조가 생산을 미루는 태업을 하는 듯한데 이것 역시 제이 록펠러 지시사항이라고 인드라는 보고 있습니다. 한국 생산을 줄이고 흑자 규모를 축소시켜야 하니까요.
다 이해합니다.
대신 평양 주세요.
2013년, 통일하기 좋은 해입니다.
어차피 상기한 조치는 한계가 있습니다.
리콜이 불가피한 이유는 세계 생산물을 미국시장에서 소비해야 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 문제를 맬더스적으로 풀 것이 아니라 아담 스미스, 리카르도적 계보로 풀어봅시다.
더 많은 생산, 더 많은 교역이 세상을 새누리로 나아가게 할 것입니다.
중국 내수를 미국 시장만큼 더 확장해야 하겠습니다.
한반도 통일이 빨리 와야겠습니다.
만주를 포함한 동아시아 시장을 미국시장처럼 만든다면
미국 자동차 산업을 더 이상 억제할 필요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헨리 포드가 어떤 사람인지 잠깐 살펴볼까요?
""1903.8 포드의 첫 차 'A형'출시, 본격적인 판매에 들어가다
"우리는 대중을 위한 자동차를 만들겠습니다. 가족 또는 개인이 운전이든 정비든 손쉽게 할 수 있는 자동차입니다. 현대 기술을 총동원하여 가장 단순하면서도 최고의 성능과 재질을 가진 차를 만들겠습니다. 그 가격은 어지간한 봉급생활자라면 누구나 구입할 수 있을 만큼 쌉니다."
1908년, 헨리 포드가 'T형' 자동차 생산에 들어가면서 내세운 광고였다. 그리고 포드는 앞으로 포드 사에서는 오직 T형 하나만을 생산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앞으로 포드라는 상표를 붙인 자동차는 모두 똑같은 모양, 똑같은 성능을 갖게 될 것이다. 단 색깔만은 고객이 원하는 대로 선택할 수 있다-검은색이기만 한다면!
"포드가 망하려고 작정했군!"
포드의 이런 대담한 결정을 듣고 가장 소리 높여 환호한 사람들은 미국의 일반 대중이 아니라, 경쟁업체 관계자들이었다. 그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망하려고 작정했군!" 그들이 보기에 포드는 존재하지 않는 시장을 바라보고 불가능한 목표를 세웠다. 우선 자동차란 사치품이며, 소수의 부유층만이 가질 수 있는 물건이다. 부유층은 단조로움을 제일 싫어하며, 개인적 취향에 따라 이것저것 선택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런데 옵션이 전혀 없이 색깔부터 성능까지 오직 한 모델로 승부한다고? 그리고 싼 가격에 성능이 좋은 자동차를 내놓는다는 목표는 근본적으로 말이 안 된다! 같은 시간, 한때 포드의 동업자로 함께 포드 자동차 회사를 창립했던 알렉스 맬컴슨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었다. 그는 이제 옛 친구이자 동료는 끝장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자신의 선견지명을 자랑스러워 했다. 그는 이미 3년 전에 '대중을 위한 자동차'를 고집하는 포드와 충돌한 끝에 자신의 주식을 팔아 치우고 포드 사를 떠났으니 말이다.
일반 대중을 위한 자동차 'T형' 앞에 선 헨리 포드
맬컴슨은 1903년을, 포드와 의기투합해서 처음 회사를 세우던 시절을 회상했다. "그 때는 모든 게 엉성했지. 하지만 두려울 게 없었는데…." '빨리 달리는 차'가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때문에 오직 속력에만 중점을 두고 자동차를 만들었다. 그리고 경주대회에 내보내 당당히 1등! 그 여세를 몰아 마침내 회사를 창립! 목공소 건물에 세를 들고, 제작 기계도 살 수 없어서 하청을 주는 형편이었지만 의욕만은 어떤 회사 못지않았다. 그리고 그 해 7월, 그 덥던 여름날, 마침내 포드의 첫 차인 'A형'을 내놓았지. 850달러짜리 소형차였다…. 우리는 운이 좋았다. 첫 해에 2천 대 가까이 팔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헨리 그 녀석이 고집을 피워서…. "기술자로서는 최고인데, 하지만 경영자로서는 틀렸어…." 포드 자동차의 '초대 회장'이었던 맬컴슨은 옛 동료의 몰락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하지만 불과 몇 달 뒤, 그 안타까움은 당혹감과 괴로움으로 변한다. 포드의 T형이 사상 최초로 연간 1만 대 판매를 돌파했던 것이다. 그 기세는 날로 더했다. 1911년에는 3만 대, 1913년에는 10만 대를 넘어섰으며 유럽과 오스트레일리아에서도 T형이 생산되었다. 얼마 후에는 지구상의 자동차 100대 중 68대가 포드의 T형으로 채워졌다.
'마이 카'시대를 열다
"망할 작정을 했던" 포드는 어떻게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성공할 수 있었을까? 자동차는 어차피 소수를 위한 사치품이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일반 대중에서 고객을 찾은 그의 선택이 바야흐로 대중사회로 접어들고 있던 시대의 흐름과 맞아떨어졌다고도 할 수 있다.
포드는 입버릇처럼 "5퍼센트가 아니라 95퍼센트를 위한 물건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자동차라면 복잡해서는 안 되며, 기술 지식이 없는 일반인도 운전과 정비를 척척 할 수 있어야 하고(당시의 자동차는 아주 단순한 정비도 전문가에게 맡겨야 했다), 유지비도 적게 들고, 비포장도로든 어디든 달릴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그 모든 조건을 충족시키면서 싼 값으로 차를 내놓기란 쉽지 않았다. 비싼 차라면 95퍼센트의 대중이 지갑을 열 리가 없다.
포드는 이 문제를 '생산 공정 단순화'와 '합리화'로 해결했다. 오직 T형만을 생산하기로 함으로써 생산 공정은 표준화되었다. 여기에 테일러가 수립했던 '과학적 관리기법'을 도입, "노동자가 단 한 순간도 업무에 불필요한 동작을 하지 않게 하고", "작업장의 단 한 뼘도 불필요한 공간이 없도록" 모든 것이 최고의 효율성을 발휘할 수 있게 설계되었다. |
조립 라인의 노동자들(1913년) |
1911년부터는 컨베이어 벨트까지 도입했다. 그때까지는 백화점 진열장 등에서 부분적으로 사용되던 컨베이어 벨트를 처음으로 공장에 설치한 포드는 끊임없이 돌아가는 벨트의 부품에 노동자들이 일렬로 서서 똑같은 작업을 반복하는 라인 생산 시스템을 창출해냈다. 이로써 작업 속도가 비약적으로 빨라져, 1908년에는 노동자 한 사람이 연간 자동차 3대를 생산하는 꼴이었으나 1914년에는 19대를 생산할 수 있었다. 1908년에는 한 시간에 한 대 꼴로 자동차가 만들어졌는데, 1914년에는 24초당 1대가 되었다. 그만큼 가격도 싸져서, 1908년에 900달러이던 T형이 1914년에는 400달러가 되었다. 생산 비용이 줄어든 만큼 종업원의 임금도 후해졌다. 포드 사의 노동자들은 일당 5달러를 받았는데, 동종업계에 비해 두 배에 이르는 고임금이었다. 헨리 포드 자신도 주체할 수 없는 돈을 벌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포드의 T형 덕분에 미국은, 그리고 곧 이어 세계는 '마이 카 시대'에 접어들었다. 이제는 노동자도 차를 타고 다닐 수가 있었다. 그것은 말이건, 마차건, 자동차건 '자가용 탈것'은 언제나 소수 귀족-부유층의 전유물이었던 오랜 역사를 마감하는 '혁명'이었다. 때마침 미국에서는 고속도로가 뚫리기 시작했고, 일주일 동안 고된 근무를 하고 주말에는 가족과 함께 자동차로 멀리 여행을 떠나는 풍경이 점차 일상화되었다. 오늘날에도 미국인들의 생활은 자동차가 없으면 안 되며, 출근, 통학에서 쇼핑, 레저, 뭐든지 자동차 도로를 중심으로 생활의 틀이 짜여 있다. 이런 생활방식이야말로 포드가 "망하려고 작정"했기 때문에 이루어질 수 있었다. 포드의 생산 방식과 경영 철학은 T형 자동차처럼 세계로 퍼져나갔고, 컨베이어 벨트에 의한 라인 생산, 과학적 관리기법, 소수가 아닌 대중을 상대로 하는 소품종 대량생산은 현대 자본주의의 주요 테마로 자리잡았다. 학자들은 이것을 '포디즘'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포디즘의 그림자도 컸다. 이제는 세계 최대의 부자 대열에 낀 포드는 노동조합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특별히 고임금을 주고 있는 자신의 회사에서도 노동쟁의가 벌어지는 것은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파업을 벌이다가 경찰의 손에 질질 끌려가며 외치는 노동자들의 말에 포드는 고개를 흔들었다. "맞는 말이야. 인간은 기계가 아니지. 기계에 비하면 훨씬 못한 존재라고. 그런데도 그들을 고용하고 비싼 임금을 주고 있어. 그런데 대체 뭐가 문제지?"
기계를 사랑한 고독한 소년
헨리 포드는 1863년 7월 30일, 미시건 주 디트로이트에서 얼마 떨어진 곳에 있는 디어번에서 태어났다. 디어번은 당시 개발이 전혀 안 된 시골 마을이었고, 주민들은 모두 농업에 종사했다. 헨리의 아버지 윌리엄 포드는 아일랜드 이민자로, 농민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이었다. 고향인 아일랜드에서 농사지을 땅이 없어서 미국으로 온 처지였으니, 아무 걱정 없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미국이야말로 그에게는 '약속의 땅'이었다. 그러나 그의 장남인 헨리는 도무지 농사일에는 흥미가 없었다. 대신 공학이니 발명이니 하는 데 흥미가 있었고, 어쩌다가 기계류를 보면 눈을 반짝이곤 했다. 포드네 집 일대에는 자명종 시계가 하나도 없었다. 어린 헨리가 보기만 하면 순식간에 분해해 버렸기 때문이다. 나이가 조금 들고부터는 분해했다가 다시 완벽하게 조립해 냈으니 문제가 없었지만. 어릴 때부터 헨리 포드에게는 인간보다 기계가 친근했고, 그가 존중할 수 있는 인간은 토머스 에디슨 같은 발명가나 패러데이 같은 과학자뿐이었다.
젊은 시절의 헨리 포드(왼쪽),토머스 에디슨과 함께. 왼쪽에 있는 이가 헨리(1929년)
청소년이 된 헨리는 유일하게 자신을 이해해 주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기계 따위는 제발 집어치고 농사일을 착실하게 배우라는 아버지의 잔소리가 심해지자 결국 가출을 해서 디트로이트로 간다. 거기서 작은 공장에 취직했는데, 얼마 안 되어 쫓겨났다. 일을 못 해서가 아니라, 공장의 업무 과정을 단순하게 고침으로써 작업 능률을 향상시키고 필요 인력을 줄일 수 있는 기획안을 대뜸 내놓았기 때문이다. 헨리는 노동자들이 노동력 수요를 줄이는 구조조정을 싫어하는 것을 공감하지 못했다. 그의 생각에 더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다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고, 그러면 노동자도 더 많은 임금을 받을 테니 모두가 좋아지는 것이었다. 노동조합에 대한 그의 불신은 이미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헨리는 에디슨 일루미네이팅 사에서 일하며 점차 능력을 인정받고, 수석 기사가 되었다. 34세 때는 그가 고안해낸 엔진을 본 토머스 에디슨의 격려도 받았다. 자신이 평생 존경해온 인물의 인정을 받은 그는 뛸 뜻이 기뻤고, 그 자신감을 바탕으로 마침내 자신만의 자동차 생산에 들어가게 된다.
아들을 먼저 보내고 되돌아 본 회한의 세월
1922년, 그는 이제 창당한 지 얼마 안 되는 유럽의 조그마한 정당에 거액의 정치자금을 기부했다. 독일의 잔챙이 정당에서 그가 이익을 볼 전망은 없었고, 여전히 세계 최대의 자동차 회사를 거느리고 있는 그가 절실히 원하는 이익도 없었다. 그런데도 막대한 기부를 한 것은 그 정당이 그의 평생 신념과 일치하는 노선을 내세웠기 때문이었다. 반(反) 노동조합, 반 사회주의, 그리고 반 유대주의. 정당의 이름은 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당, 바로 히틀러의 나치당이었다. 16년 뒤, 포드는 당의 초창기에 아낌없이 베푼 재정적 기여에 보답하는 의미로 이제는 집권당이 된 나치당에게서 대십자 훈장을 받는다.
대공황에서 제2차 세계대전에 이르는 세월 동안, 서구 자본주의와 서구문명이 위기에 빠졌던 이 시기에 그 찬란한 꽃을 상징했던 포드 역시 위기로 빠져들었다. 포드의 완강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포드 사에도 노동조합을 수립해야 한다는 노동자들의 요구는 갈수록 과격해졌고, 집단 파업이 잇달았다. 마침내 포드는 1941년이 되어서야 "이대로라면 회사는 망하고, 당신은 맞아 죽을 것이다. 고집을 계속 피운다면 당신과 갈라서겠다"는 아내 클라라의 최후통첩에 못 이겨 노조 설립을 승인했다.
세 살부터 77살까지 헨리 포드의 초상
아들인 에셀과의 불화도 골칫거리였다. 에셀 포드는 그의 유일한 자식이었는데, 1930년대에 포드 사 대표 자리를 물려준 상태였다. 포드는 아버지처럼 뛰어난 기술자였고 경영자였지만 경영철학은 아버지와 많이 달랐다. 특히 T형 단일 품종의 생산을 고집하는 아버지에게 에셀은 경쟁사인 GM처럼 차의 성능보다 디자인을 강조하고, 다양한 모델을 선보일 필요가 있다고 맞섰다. 결국 아버지가 져서 새로운 'A형'을 비롯한 여러 모델이 나오게 되지만, 에셀이 암에 걸려 1943년에 사망함으로써 아버지의 가슴에는 빼낼 수 없는 못이 박혔다. 당시 81세였고 뇌졸중 증세가 있던 헨리는 아들을 대신해서 다시 회장직에 취임했다. 나이로나 건강으로나 도저히 제대로 일을 할 처지가 아니었지만, 그의 고집은 아무도 말릴 수 없었다. 하나뿐인 아들이자 후계자를 잃은 마음의 고통을 평생 몸 바쳐서 이룩한 또 하나의 아들을, 사랑하는 '기계'를 돌봄으로써 달래려 했던 걸까? 아무튼 회사 상황은 그가 경영을 놓지 않는 동안에 계속 나빠져만 갔다. 그가 나치 협력자라는 비난이 쇄도했다. 포드가 만들어 놓은 비인간적인 노동 시스템을 질타하는 지식인들도 끝이 없었다. 루스벨트 행정부는 전쟁 중이라는 이유로 포드 사를 국유화할 계획까지 세웠다. 이런 고난과 실망과 회한에 시달릴 대로 시달린 헨리 포드는 1945년에 다시 은퇴했고, 1947년 4월 7일에 뇌출혈 발작을 일으켜 영영 눈을 감았다.
포드는 자동차도 컨베이어 벨트도 과학적 관리기법도 처음으로 만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 경영의 기적을, 그리고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냈다. 20세기 초, 소수에게만 허락되던 개인용 탈것을 만인의 것으로 대중화시킨 그의 혁명은 20세기 말, 컴퓨터가 대중화되는 혁명에만 비교 가능한 규모와 의의를 갖고 있다. 그리고 20세기 말의 혁명은 포디즘의 혁명을 폐기할 가능성을 보여준다. 소품종 대량생산의 시대를 접고 다품종 소량생산의 시대로 옮겨가는 것이다. 그가 가졌던 여러 가지 신념, 노동조합과 복지국가에 대한 불신과 오로지 효율성만을 따지는 경영철학, 그리고 나치즘이나 반유대주의 성향 등도 오늘날에는 대부분 낡았거나 혐오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이 세상은 기본적으로는 포드가 만든 틀에 얹혀서 돌아간다. '기계' 부분은 포드의 것이고, '디자인'은 포드 이후의 것이랄까. 미국의 유머작가이며 배우였던 윌 로저스는 포드를 두고 1920년대에 이런 말을 했다. "그가 우리에게 도움을 주었는지, 괴로움을 주었는지 알려면 백 년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하다. 그로 인해 우리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 2009년, 아직 백 년은 되지 않았다.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859
"
이는 백설공주 문고판처럼 헨리 포드에 대한 동화적인 이야기를 할 따름이다.
"스탈린·히틀러도 우러러본 '복지 자본주의'원조
새 시대를 연 거목들 <8> 헨리 포드
김환영<whanyung@joongang.co.kr> | 제262호 | 20120318 입력 <iframe height="0" marginheight="0" src="http://sunday.joins.com/article/findReporterIDnew.asp?reporter=김환영" frameborder="0" width="0" marginwidth="0" scrolling="no"> </iframe>
포드는 이렇게 말했다. "교도소 출신이건 하버드대 졸업생이건 내겐 마찬가지다. 우리는 사람을 채용하는 것이지 사람의 과거를 채용하는 게 아니다." |
한때 소련의 공장에는 레닌의 초상화와 더불어 헨리 포드(1863~1947)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스탈린은 포드가 자동차 분야에서 이룩한 대량생산이 전 산업 분야로 확산됐고 대량생산이 연합군 승리의 원동력이라고 평가했다. 포드는 미국 국민뿐만 아니라 소련의 아이콘이었다.
소련은 모범에 도달하지 못했다. '노동자 천국'이어야 할 공산주의 사회에서 자동차는 공장의 당간부들이나 타는 것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자들은 자동차를 굴릴 만한 임금을 받았다. 괴리를 극복하지 못한 소련·동구권은 붕괴했다.
1500만 대가 생산된 포드 모델 T 자동차. |
헨리 포드는 자동차 시대를 개막한 주역이다. 헨리가 자동차를 발명한 것은 아니지만 그가 1918년에 도입한 어셈블리라인(assembly line, 부품을 컨베이어에서 조립하는 공정)은 자동차 한 대를 생산하는 데 드는 시간을 12.5시간에서 93분으로 단축했다.
포춘지가 선정한 20세기 최고의 인물
어셈블리라인으로 가능해진 대량생산은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타임스(Modern Times)'에서 보듯 현대를 상징한다. 포드가 개막한 자동차 시대는 소비가 미덕인 시대, 중산층의 시대와 함께 등장했다. 경제전문지 포춘(Fortune)은 2000년 포드를 '세기의 인물(Man of the Century)'로 선정했다. 올더스 헉슬리의 디스토피아 소설 『멋진 신세계』(1932)에서는 역사를 기원전·기원후가 아니라 포드 이전(Before Ford), 포드 이후(After Ford)로 나눈다.
포드는 비교적 넉넉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바람과 달리 포드는 가업을 이을 생각이 없었다. 포드는 어려서부터 기계를 다루는 손재주가 있었다. 온 마을의 망가진 시계를 수리했다. 고등학교는 문턱에도 가지 않고 15세에 학교를 그만뒀다. 그는 평생 읽기·쓰기가 수월하지 못했다. 꿈을 이루기 위해 포드는 16세에 가출했다. 디트로이트의 기계제작소에서 도제로 일하며 내연기관 제조를 배웠다.
1891년에는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의 회사에 기술자로 취직했다. 시간만 나면 자동차 개발에 골몰했다. 회사는 자동차 연구를 그만두는 조건으로 그에게 관리총책임자 자리를 제의했다. 그럴 수 없었다. 포드는 1899년 회사를 그만두고 자동차 개발에 매진했다. 실패가 거듭됐다.
포드는 1903년 포드자동차를 창립했다. 당시 미국에는 이미 88개의 자동차 회사가 있었지만 포드는 성공의 기회를 붙들었다. 1908년 모델 T 자동차를 출시했다. 1927년까지 1500만 대가 팔린 대히트였다. 1913년부터 10년간 포드자동차의 생산량은 매년 두 배로 뛰었다. 1920년대 초반에는 미국 자동차의 반이 모델 T였다. 포드는 1910년에서 1927년까지 모델 T만 생산했는데 1913년부터는 색상을 검은색으로 통일했다. 페인트가 빨리 마르기 때문이다. 포드자동차는 1932년 세계 자동차 생산의 3분의 1을 차지했다.
포드의 경영 철학은 '포드주의(Fordism)'라고 불린다. 최고 품질의 제품을 최대한 싸게 만들어 최대한 많이 팔고 노동자들에게는 임금을 최대한 많이 주는 게 포드주의다. 포드의 박리다매(薄利多賣) 전략은 성공했다. 자동차는 더 이상 부자들의 사치품이 아니었다. 일반 서민들의 필수품이 됐다.
포드는 '복지 자본주의(Welfare Capitalism)'를 실천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14년 포드는 노동자 최저임금을 두 배나 인상했다. 일당 5달러는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120달러다. 동시에 근무 시간은 9시간에서 8시간으로 단축했다. 1926년에는 주5일 근무제를 도입했다. 노동자들이 여가가 많고 쓸 돈이 많아야 경제가 잘 돌아간다는 게 포드의 지론이었다.
대공황(1929~39) 때인 1932년에는 어쩔 수 없이 임금을 깎았다. 형편이 나아지자 1935년 고임금 정책으로 복귀했다. 포드는 저축이 아니라 지출이 경제를 살린다고 봤다. 그는 "성공한 사람치고 저축하는 사람 없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포드자동차를 구매해 차이를 절약하세요(Buy a Ford and Save the Difference)"라는 광고 카피를 가져오자 '절약'을 지우고 '지출(Spend)'로 바꾸라고 지시했다.
포드는 시대를 앞서간 고용 정책을 실천했다. 장애인, 상이군인의 채용을 위해 쿼터를 뒀다. 그는 또한 미국 사회의 인종 갈등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흑인들에게 일자리를 주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흑인들은 남부를 떠나 북부로 이주해 포드자동차 공장으로 몰려들었다.
아내의 <ec37>가출<ec38> 통첩에 노조 설립 승인
포드는 오점도 남겼다. 그는 노조 설립을 저지했다. 포드자동차에는 '포드 서비스부(Ford Service Department)'라는 부서가 있었는데 하는 일은 노조 설립 저지였다. 서비스부의 인력은 800명의 전직 깡패들로 채워졌다. 1932년에는 노조 설립을 추진하다 해고된 노동자들과 경찰이 충돌해 5명이 사망하고 19명이 부상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포드는 노조를 인정하느니 회사 문을 아예 닫을 궁리를 했다. '내부'의 반발이 있었다. 아내 클라라는 회사를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싶어했다. 아내가 "집을 나가겠다"는 최후통첩을 들이대자 포드는 결국 1941년 노조를 승인했다. 일단 노조를 승인하면서 맺은 협약은 다른 회사들보다 노동자들에게 유리했다.
포드는 독실한 성공회 신자였다. "참 종교는 오직 개신교만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 그는 노동자들도 기독교 가치에 맞춰 살기를 바랐다. 그는 술·담배·도박뿐만 아니라 껌 씹는 것까지 싫어했다. 고임금 정책을 썼지만 대신 노동자들의 가정 생활, 특히 음주 습관까지 감시했다. 그는 고무 확보를 위해 아마존에 포드랜디아(Fordlandia)라는 농장을 설립했는데 현지 노동자들의 기숙사 위생검사를 실시하고 성병 감염 여부를 조사했다.
부자유친(父子有親)은 실천하지 못했다. 아들 에드셀 포드(1893~1943)는 4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과도한 스트레스가 원인이 된 위장암 때문이었다. "아버지 때문에 죽었다"는 풍문이 돌았다. 아들에겐 아버지 못지않은 능력이 있었다. 에드셀이 개발한 1941년형 링컨콘티넨털은 자동차 역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델 중 하나로 기록된다. (링컨콘티넨털은 1963년 11월 22일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됐을 때 타고 있던 차다.) 사장직을 물려주고 난 다음에도 포드는 아들을 믿지 않고 달달 볶았다.
포드는 어려서부터 반유대주의를 신봉했다. 반유대주의는 당시 미국에 만연된 풍조였다. 쿼터로 유대인들의 하버드대 입학을 제한하던 시절이었다. 포드는 1919~27년 '디어본인디펜던트(Dearborn Independent)'라는 주간지를 발행했다. 이 주간지에는 '국제 유대인:세계 최고의 문제(The International Jew:The World's Foremost Problem)'와 같은 반유대주의 기사를 실었다. 디어본인디펜던트는 러시아 비밀경찰이 19세기 말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시온 장로 의정서(Protocols of the Learned Elders of Zion)』에 나오는 주장을 미국 사회에 유포했다. 포드는 유대인들이 세계 지배와 경제적 이익을 위해 전쟁을 부추긴다고 믿었다.
포드는 히틀러의 우상이었다. 히틀러는 미국을 미워했지만 포드는 사랑했다. 포드는 히틀러의 『나의 투쟁(Mein Kampf)』에 나오는 유일한 미국인이다. 히틀러는 포드가 발간한 반유대주의 기사의 선집을 애독했다. 히틀러의 꿈은 포드가 미국에서 이룩한 것을 독일에서 재현하는 것이었다. 폴크스바겐은 모델 T를 벤치마킹한 것이다. 포드는 1922년 나치스당에 7만 달러(오늘날 가치로 90만 달러)를 후원했다.
들끓는 여론 때문에 포드는 디어본인디펜던트를 1927년 폐간하고 사과하는 한편 기사 내용을 몰랐다며 오리발을 내밀었다. 다른 사람이 썼지만 기사는 포드가 저자로 돼 있었다. 포드는 죽을 때까지 반유대주의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나치스 독일은 포드에게 1938년 메달을 수여했다. 유대 단체들이 되돌려주라고 요구했으나 묵살했다.
사망 당시 1881억 달러 재산 남겨
포드에겐 사회공학자(social engineer)의 면모가 있었다. 그는 전쟁에 반대했으며 세계연방의 설립을 꿈꿨다. 돈키호테 기질도 있었다. 1915년에는 미국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을 막겠다며 '평화의 배(Peace Ship)'를 유럽으로 출항시켰다. 웃음거리가 됐다. 1918년에는 상원의원 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4000표 차로 낙선했다. 1920년대에는 대통령 출마를 두고 고민했다.
포드는 자동차 산업의 천재였으나 역사나 철학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그는 1919년 시카고 트리뷴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그가 무식쟁이라는 기사를 문제 삼은 것이다. 재판 과정에서 "미국혁명이 1812년에 일어났다"는 둥 그가 실제로 '무식'하다는 게 드러났다.
경제전문지 포브스에 따르면 포드는 사망 당시 1881억 달러(2008년 가치)의 재산을 남겼다. 그러나 그는 소탈한 삶을 살았다. 모델 T의 100만 대 돌파 기념식에서 연설을 부탁하자 그는 "여러분, 뭐든지 100만이라는 것은 아주 많은 겁니다"라고 딱 한마디만 하고 자리에 다시 앉았다.
포드는 프리메이슨 단원이었으며 정부(情婦)를 두었다. 아내 클라라의 묵인 아래 30년 동안 내연의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부자나 사회 명사들이 아니라 농부·기술자·발명가 같은 사람들을 좋아했다. 말년에는 18~19세기 물품 수집에 열중했다. 그는 20세기의 심벌이지만 그에게 마음의 고향은 도시화되기 이전의 농촌사회 미국이었던 것이다. "
</ec38></ec37>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25312
헨리 포드는 살아 생전 시오니즘과의 투쟁 속에서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헨리 포드는 시온의정서를 비판하여 미국에 시온의정서 열풍을 불러오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헌데, 헨리 포드 그 자신이 프리메이슨이다.
이 사실을 무엇으로 설명할 터인가. 이는 오직 전세계적으로 국제유태자본론만이 설명가능한 것이다."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83 : 한국 불교에게 죽음을! : 사이언톨로지, 헨리 포드, 프리메이슨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2/07/04 00:17 수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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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도에서의 친절한 가이드
길을 걸으면 생각이 난다
인드라는 정치를 하지 않겠으며,
책을 더 이상 쓰지 않으며,
언론에 기고하지도 인터뷰를 하지도 않을 것이며,
종교단체를 만들지도 않을 것입니다.
국유본론을 소명으로 여기고
지금처럼 살다
행복하게 가겠습니다
매일매일 행복하겠습니다
마음을 열고
자세를 낮추고
세상에 감사한다
마.자.세.
한반도 평화와 통일, 경제 발전과 사회 복지를 위하여
쪽발이에게 죽음을 쪽발왕에게 천벌을
쪽발왕 폭살하려 한 이봉창 열사 정신 이어받아
불타는 쪽발산 불량배터리를 쪽발왕 아가리에 쑤셔넣자
최고의 자살폭탄테러용 차량, 기름 새는 엔진 리콜 쪽발차를 쪽발왕궁으로 보내 폭발시키자
쪽발왕이 10초 안에 똥 못 싸면 왜놈이 중국인 노동자 다루듯 때려죽이자
쪽발왕 천한 피를 1그램이라도 보유한 왜놈들에 한해 후쿠시마산 세슘물고기를 평생 먹이자
쪽발노다랑 쪽발차 캠리를 마주보고 달리는 충돌시험시키자
쪽발아베 항문에 불법도용 유니클로 양말 수만큼 쑤셔넣자
쪽발놈현에 온몸으로 항거한 허세욱 열사와 중도좌파 민족주의자 박정희 대통령의 이름으로
조국과 민족을 배반한 쪽발민주당 해체
쪽발의 나팔수 네이버 주가 오백원
인민의 적, 쪽발찌라시 한경오프엠(한겨레 경향 오마이 프레시안 엠비씨) 아웃
일인 복마전, 골룸빡 처단
단군이래 최악의 매국노, 쪽발지태놈현 재산 몰수
파시스트 집단, 쪽발놈현빠에게 죽음을
쪽발삼구 쪽발석현 비리엘쥐 재벌해체
쪽발정은 척살로 2013년을 통일 원년으로
친미친중 반일반북 조국통일 쟁취하자
쪽발타도해방투쟁 만세
체념 끝에 피어오르는 희망
그 희망을 죽이고서야 우리는 살 것이다
인드라 블로그 운영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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