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드라 VS 예언해설가 : 히타이트, 왜넘, 독일대통령, 스페인 내전 인드라 VS ?
2013/03/02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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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드라 VS 예언해설가 : 히타이트, 왜넘, 독일대통령, 스페인 내전
국제유태자본론 : 인드라 월드리포트 13/03/02-4
"예언해설가:
좋은 성탄 보내셨습니까... ^^ 하루 지났지만 메리 크리스마스입니다. 신문기사를 읽다가 끌리는 내용이 하나 있었는데요. 하토야마 일본총리가 크리스마스 이브에 '대국민 사과'를 한번 했나봅니다. 죄목이 어머니로부터 100여억원의 정치자금을 불법으로 받은 혐의라는데... 비서 2명 기소되고(왜 하필 비서 2명인지) 자신은 혐의 불충분으로 불기소 된 모양입니다. 이렇게까지 압박 받는데는, 하토야마가 국유본의 지시를 불이행했거나 목표치까지 해주지 못해서 한방 맞은 거 같은데요... 뭔가 집히시는 게 있으실 것 같아 이렇게 문의를 드립니다. 그 옆기사에 차우셰스쿠 루마니아 대통령이 죽기 전에 '인터내셔널歌'을 부르며 죽었다는데.. 이 정치인들도 현실과 다르게 속으로는 이상향이 있나보다..라고 느꼈습니다.ㅎ
INDRA:
글 고맙습니다. 인드라도 예전에는 그렇게 알았다. 허나, 제이 록펠러 성향이 굉장히 정치적이다. 카자르 왕국 방식을 현대화시킨 것같다.
카자르 왕국의 왕위 계승법
"카간(KAGHAN)-카자르 군주를 의미한다, 타타르어 '칸'에서 온 단어인데 타타르어로 '칸'은 왕자 라는 뜻이다. 이븐 파들란의 주장에 따르면 카자르 민족은 카간을 강바닥에 묻었다. 카간은 언제나 또 한 명의 군주와 권령을 나누었고, 단지 제일 먼저 아침 문안 인사를 받는 정도의 권위만을 더 지니고 있을 뿐이었다. 카간은 유서 있는 왕가에서 나왔는데, 이 가문은 아마도 터키 계통이었을 것이다. 그 반면에 왕 혹은 '베이' 라고 불리던 카간의 동료 군주는 카자르 제국의 평민 출신이었다. 9세기에 씌어진 야쿠비 문서를 보면, 카간은 6세기에 이미 칼리프를 자신의 대리인으로 삼았다. 카자르 민족의 공동 통치에 대하여, 알 이스타흐리가 가장 자세하게 기록해 두었다. 아랍력으로 320년에 씌어진 이 기록은 다음과 같다. 카자르의 정치와 행정에서 그 군주는 카자르 민족의 카간이라고 불린다. 이 사람은 카자르 왕 '베이'보다 지위가 더욱 높다. 하지만 카간을 임명하는 것('카간' 이라는 직위를 내리는 것)은 바로 왕이다. 카간을 새로 임명하고 싶을 때, 왕은 카간으로 지명당한 사람을 데리고 들어와서 비단 조각으로 목을 조른다. 그런 다음에 그 사람이 거의 숨이 끓어질 지경에 이르면 얼마나 오랫동안 지배할 생각입니까? 하고 묻는다. 카간으로 지명당한 사람은 '얼마만큼이오' 라고 대답 한다. 만약 그 사람이 자신이 대답한 기간이 만료되기 전에 죽는다면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그 사람이 때가 되어도 죽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이 말한 그 해를 채우자마자 살해된다. ; 밀로라드 파비치의 카자르 사전 중에서"
고문을 하는 것과 흡사하다. 즉, 상대 답변 여부에 상관없이 일단 죽을 만큼 고문을 가한다. 고문기술자가 자신을 정말 죽일 것이라고 여기면 대부분 인간은 공포에 사로잡힌다. 공포는 인간의 비합리적인 본능을 가장 잘 보여준다. 님은 하토야마의 행위 여부 때문에 국유본이 제재를 가한다고 여기고 있다. 허나, 아니다. 상관없이 하토야마와 오자와를 일본의 전임 정권처럼 죽이는 것이다. 이는 사르코지와 이명박 역시 겪었다. 인드라도 국유본론 초창기에는 이를 잘 몰라 국유본의 이명박 압박하는 것을 이명박의 유류세 인하에 국유본이 화를 내는 것이 아닐까 했다. 아니었다. 유류세 인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인드라는 용산참사도 국유본이 이명박을 압박하고 친일매국부패민주당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CIA가 기획해서 일으킨 것이라 보고 있다. 존 콜먼의 설명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존 콜먼에 따르면, 국제유태자본은 하비스톡 연구소 등을 통해서 인간 심리에 대한 연구를 상당히 진행시켰다. 또한 근래 프랑스, 이란, 중국, 한국, 일본, 베네수엘라에서 일어나는 일들 중에는 흥미로운 사안들이 있다. 인드라는 유난히 이 사건에 국유본 국제기구가 관심을 보이는 것 자체가 국유본의 실수였다고 본다. 범죄자는 범죄현장을 반드시 한번은 다녀간다던가^^! 국유본은 베네수엘라 차베스를 압박할 때도 노벨평화상을 받은 바웬사 입국 등을 검토했다. 바웬사는 CIA 자금을 받아먹은 것이 사실로 드러난 자이다. 입국 프로그램은 인권을 빌미로 국유본이 해당 정권을 압박하는 주된 프로그램이라는 게다. 물론 이 문제는 당장 아무 것도 밝혀지지 않을 것이다.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다. 허나, 인드라의 촉이 있다. 무리수를 두면 그만큼 천리를 역행하니 어둠의 기가 발산하는 법이다. 해서, 인드라처럼 기감이 강한 이들에게 느껴지는 게 있는 게다. 의혹은 의혹으로 남을 것이다. 허나, 삼십년 정도 흐른다면 자료가 조금씩 나올 것이라 확신한다. 물론 그 이전이라도 당대 사정에 의해 유출될 수 있다고 본다.
아무튼 지난 시기 전철연은 같은 운동권에서도 왕따를 당했었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이 탄압하지, 말지 등을 동원하여 전철연 비판하지 사면초가였다. 해서, 용산참사 때에 전철연이 친일매국세력 조문을 받지 않으려는 일도 있었다고 전해 들었다. 허나, 지금은 이명박 정부 시대이다. 역설적으로 대접받는 게다. 서경석 같은 위인도 철거민 운운하며 나설 정도이면 국유본이 체계적으로 이 사건을 관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인드라는 보고 있다. 하여, 전철연은 이 시기를 잘 활용해야 한다. 이 시기 놓치면 평생 후회할 수 있다. 참고로 인드라는 용산사건 뿐만 아니라 박정희 암살사건, 육영수 암살사건, 노무현 자살사건, 박근혜 면도날 피습사건, 박정희생가 관리인 암살사건, 재보선 즈음 월북사건 등을 국유본의 작품이란 의혹을 지니고 찬찬히 문제를 풀어갈 것이다.
"박정희의 암살을 단지 박정희 핵무기 개발에만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 지역 차원에서 살펴보아야 하며, 이 지역 맹주인 중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한반도 근대사를 이해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일본 국가 정책은 "비핵삼원칙"(非核三原則)- 핵무기를 보유하는 것도 또는 생산하는 것
도 또는 일본 땅 내부에 핵무기를 가져다 놓는 것을 허가하는 것도 금지한다는 내용의 원칙 -입니다. 사토 에이사쿠가 "비핵삼원칙"을 1968년 2월 5일에 만들었고, 1971년 11월 24일에 일본 국회가 승인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사토 에이사쿠는 노벨평화상을 받았습니다만, 이후 로비설에 시달렸습니다."
브레진스키의 충격 고백과 박정희 암살 배경
http://blog.naver.com/miavenus/70031433945
님은 아마도 근래 미일 핵밀약 등을 염두하는 것인지 모른다. 미일 핵밀약이란 유사시에 미 핵잠수함 등이 일본 영해를 자유로이 지나갈 수 있고, 일본땅을 이용할 수 있게 최초의 한국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사토 에이사쿠가 미국과 벌인 밀약 내용이다. 이에 대해서는 인드라가 이미 국유본의 박정희 암살과 관련한 글들에서 언급한 바 있다. 간단하게 생각하면 된다. 정치적으로 미국과 사이가 안 좋은 듯해서 일본 내셔널리즘을 부각시킨 뒤 경제적으로 신자유주의를 강화시키고자 하는 뻔한 수법이다. 이미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이 써먹은 작품이다. 대만 판 노무현인 민진당 천수이볜은 국유본 믿고 뻘짓하다가 영원히 감방 신세를 지게 되었다. 죽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다. 인드라는 님이 하토야마 정권에 어떤 미련도 지니지 않기를 바란다. 일본 부패민주당은 최근 독도 문제 뿐만 아니라 재일교포 참정권 문제에도 태도를 돌변한 바 있다.
하토야마 지지율이 70%대에서 40%대로 낮아졌다. 앞으로도 국유본의 일본 부패민주당, 하토야마, 오자와 압박이 계속될 것이다. 물론 전략적이다. 정치적으로 하토야마 일본 부패민주당이 미국과 대립각을 내세워서 일본 시민의 지지를 이끌어내어 신자유주의 강화를 실현한다. 동시에 정치적으로 내몰린 일본 국민이 하토야마 정권을 지나치게 지지하면 곤란하니 수시로 부패민주당의 실체를 폭로하여 적당한 지지율을 만들어내어 부패민주당을 통제한다. 또한 한국의 UAE 수주 같은 건을 내세워 하토야마의 무능을 드러내기도 한다. 인드라는 하토야마 정권이 출범했을 때, 논평한 바 있다. 일본 부패민주당 출범은 국유본의 기획작품이다. 다만, 한반도 평화와 통일, 경제발전과 사회복지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일본에 무능한 부패민주당이 있는 것이 자민당이 있는 것보다 낫다고 했다. 반면, 유능한 자가 일본 정권을 담당하면 한반도에 위협이 된다. 해서, 하토야마 부패무능 정치세력이 오래도록 일본을 지배했으면 싶다. 하여, 속으로는 경멸해도 겉으로는 하토야마를 위해서 절이라도 하는 시늉을 하는 것이 좋을 게다. 전후 최고의 일본 지도자, 하토야마라고 여기자^^!
님이 관심이 있다면, 사르코지와 이명박, 하토야마를 동시적으로 살펴보면 재미있는 결과를 얻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물론 사르코지, 이명박과 함께 세 쌍둥이인 오바마도 비슷한 행보를 걷고 있다. 다만, 국유본 본토에서 일어나는 일이니 만큼 오바마에 대해서는 조금 다른 패턴을 보여주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같다.
루마니아의 차우체스쿠에 대해 뜬금없이 질문하는 님이 흥미롭다. 최근 루마니아가 재부상하고 있는데, 이유는 원유 자원 때문이다. 루마니아 관심있게 지켜볼 지역이다. 해서, 님도 관심이 갔을 것으로 본다. 차우체스쿠는 유럽의 김일성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어릴 적에 한번 찍힌 인물에 대해서는 결코 잊지 않았으며, 반드시 복수를 했다고 한다. 허나, 그는 인구 축소 계획에 반발하여 인구 증산 계획을 무식하게 해서 인드라에게 찍힌 인물이다. 님이 왜 이런 질문을 하는가. 예서, 김정일이 차우체스쿠적인 종말을 예상하는가. 김정일이 과연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며 최후를 맞이하겠는가. 인드라 답변은? 그렇다. 정일이가 그래주었으면 싶다, 설사 이미 진짜는 죽고 가짜가 흉내내고 있더라도.
5. 히타이트 제국의 비밀 : 이주민은 어디에서 왔는가?
예언해설가:
오늘 하루도 평온하셨는지요? 오늘도 글을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하는 1人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생각이 문득 떠오릅니다. '페니키아'의 경쟁상대가 '히타이트'라는 대목에서... '페니키아'가 '유태'계로 편입하는데 경쟁자의 방법을 그대로 응용한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생각의 근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1. '히타이트'는 '하티'의 잘못된 표기. 2. '히타이트'는 탈취된 민족이다.
(하티족이 철제무기를 쓰는 이방인들에 의해 민족 형태 자체를 그대로 빼앗겼다는 이야기를 본 적이 있습니다.) 역사를 좀 더 파다보면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고대민족들이 '오리지널'그 자체가 아닌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을 자꾸 깨닫게 됩니다. '고대'라고 불리우는 기간동안 발칸 지역, 인도 지역, 이집트 지역, 소아시아 지역등 원래 자라나고 있던 원주민들이 아주 쉽게 썰리는 경우가 광역적으로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언급한 지역들의 문명들을 장악한 '굴러들어온 돌'들이 모두 같은 혈통이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듭니다... 이에 대한 고견을 여쭙고 싶습니다. 좋은 밤 되시기 바랍니다.
INDRA:
히타이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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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타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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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고맙습니다. 매우 흥미로운 견해이다. 국유본의 뉴라이트 공화당 장악 시도처럼 뻐꾸기 알 낳기 방식의 오랜 기원을 생각해보는 시간이다. 1. 히타이트를 하티의 잘못된 표기로 볼 수 있지만, 그보다는 다른 표기라고 하는 것이 정확할 듯싶다. 베이징을 북경이라 부른다고 해서 잘못된 표기는 아니지 않겠는가. 2. 현재 여러 설이 있으나, 다수설은 이주설이다. 지금의 터키 지역인 소아시아에 하티족이 살았다. 헌데, 이주민이 소아시아로 우크라이나 등 중앙아시아에서 오랜 시간에 걸쳐 이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히타이트 제국을 장악하자 자신의 종족을 내세우기 보다 스스로를 하티족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이들 언어는 인도-유럽어족 중 유럽어에 가까워 유럽어의 근원어로 조사되고 있다. 해서, 특히 독일 쪽에서 열의를 지니고 고고학 탐사에 나섰다. 소수설은 이주설을 부정하고, 히타이트 제국의 주인은 토착 하티족이라는 것이다. 허나, 소수설은 유럽은 유럽에서 기원한다는 유럽인의 자존심을 고려하는 것으로 보여 현재까지는 다수설이 정설로 여겨진다.
이에 대한 인드라 추론은 다수설을 전제로 다음과 같다.
하나, 이주인들은 하나의 종족이 아니다. 대체로 통일된 무리라면 자신들 정체성을 드러내게 되어 있다. 가령 중국을 지배했던 북방민족들이 비록 중국문화에 융화되었지만, 그렇다고 자신들을 한족으로 내세우지는 않았다.
둘, 이주인들은 상층 이주가 아니라 하층 이주였을 가능성이 크다. 당대는 도시국가였다. 몇몇 도시국가와 그 인근만이 문명적이었던 반면 여타지역은 비문명적이었다. 도시국가가 번성한다는 것은 이 지역이 인간이 먹고 살기 적합한 장소임을 의미한다. 해서, 기후 변동 등이 일어나면 원거리에 있던 자들이 살 곳을 찾아 이동하기 마련이며, 도시국가에 도달할 것이다. 이들에게 도시국가는 오아시스였을 게다. 이들 신분은 용병, 노예, 상인 등이었을 게다. 오늘날 한국에 일하러 오는 몽골인, 중국인, 동남아시아인, 러시아인들은 한국어를 잘 구사하는 편이다. 이들은 모두 하층이다. 반면 역시 한국에 일하러 오지만 서양인들은 일부 학원강사를 제외하고 대체로 한국어를 잘 하지 못한다. 이들은 거의 상층이기 때문이다. 이들 몽골인, 중국인, 동남아시아인, 러시아인들은 한국에서 멸시받는 자신의 처지를 빨리 극복하고자 하루바삐 진정한 한국인이 되고 싶을 게다. 반면 상층 서양인은 특별한 메리트가 없는 한, 한국인이 되고픈 마음이 별로 없을 게다. 하층 이주민이 한국인이 된다는 것은 신분상승이지만, 상층 이주민이 한국인이 된다는 것은 신분하락이기 때문이다. 하여, 하층 이주인들은 하티족과 하티족의 언어를 정체성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하여, 다양한 하층 이주민이 하티족과 하티족의 언어로 통일하자 새로운 부족으로 등장하게 된다.
셋, 혁명이 일어났을 것이다. 로마제국 말기에 보듯 용병 출신 게르만이 로마를 장악한다. 그처럼 하층 이주민이 운이 다한 상층 토착 하티족 대신 소아시아의 주역이 된다. 이들은 전통적인 하티어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보다는 아메리칸 흑인처럼 독특한 억양의 영어를 구사했을 게다. 한마디로 방언인 게다. 이 사투리가 지배어가 된다는 것은 혁명을 의미한다. 이들이 히타이트 제국을 건설한다.
보통 문명 부족이 야만 부족을 정복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허나, 수메르문명을 정복한 아카드는 수메르에 비해 야만이었다. 즉, 그 반대라는 이야기다. 이는 중동 역사를 기술한 이븐 할둔의 저서를 읽어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대체로 상인 위주의 도시국가가 방어를 위해 용병을 들여쓰다가 용병이 국가를 장악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는 것은 근대 초기까지도 흔한 일이었던 만큼 하티족을 대체한 자들은 대체로 용병이 중심이었을 것이라 추정할 수 있겠다.
히타이트는 대개 세 가지 정도로 주목을 받는다고 볼 수 있다. 하나, 최초의 철제무기 국가였다. 이전에도 철이 생산되었으나 기술이 부족하여 청동무기보다 못했다. 허나, 히타이트 제국이 건설되면서 철제무기다운 철제무기가 생산되기 시작했다. 둘, 람세스2세와 연결이 되어 성서고고학 관심사가 된다. 셋, 메소포타미아문명이면서도 아시아와 유럽이 혼재하는 소아시아 독자적인 문화로서의 히타이트인 게다.
헌데, 님이 정작 관심이 있는 것은 '굴러온 돌'이다. 해서, 관심사는 둘이 되겠다. 하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해양민족이다. 기원전 이천년전 무렵 지중해 동안에 해양민족이 들이닥쳐서 이 지역 역사를 파악하는데 큰 혼란을 야기했다. 다른 하나는 중앙아시아로부터의 이주이다. 이때 중앙아시아라는 지역은 광범위하여 온갖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해서,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게다. 어차피 고대사 영역이란 입증할 유물과 자료가 극히 적어서 소설과 역사가 종이 한장 차이가 날 정도로 과부하된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국유본이 UAE 원전수주로 룰라처럼 이명박을 키우는 이유 국유본론 2009/12/30 02:19
http://blog.naver.com/miavenus/70076917438
"예언해설가:
고견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질문 속에 있는 제 생각의 코드까지도 다 파헤쳐버리시니 적잖이 당황도 했습니다. ㅎㅎ;; 그.. 정체불명의 해양민족 말입니다... 해적집단... 일본 전국시대(봉건시대)의 키워드 아닐까요? 어떻게 보면 바이킹과 모양세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바이킹이 유럽을 쓸고 다녔듯이 이 해양민족도 중국, 한반도, 일본열도를 휘젓고 다녔고, 통치력/국력이 약한 일본의 경우 이 해양민족과 열도 원주민이 아주 뒤범벅 되버리고, 왕조세력이 전복되고 바이킹이 여러 나라 세우는 꼴로 일본 여러 곳에 세력이 등장하게 되어 일본 전국시대가 등장하게 된 것은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총포를 전해주고 재화를 전해주었으니, 알아서 톱니바퀴 맞아 들어가듯, 이 해양민족은 총포를 양산하기 시작했고, 오래도록 노려왔던, 중국을 노리기로 하지요. (국유본 의도대로) 이런 면에서 "정명가도"가 아주 거짓말은 아니겠네요 ㅎㅎ 그래서 이넘들이 임진왜란 정유재란 일으키고, 중국을 직접 침략하지는 못 했지만 국유본 의도대로 명국의 몰락이 되었으리라고 추리해봅니다. P.S) 차우셰스쿠처럼 김정일이 인터내셔널가 부르며 죽었다는 일화가 전해지면, 이거 또 영화/소설 재료로 쓰여서 코드로 자리잡겠네요? ㅎㅎ P.S 2)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아참 아참... 한 가지 빼먹었는데, 중국 치려면 해양민족이 단합해야 되는데 그게 일본 전국 통일이 된 꼴이고, 통일 되자마자 급히 조선침략을 하는 데는 역시 통일 전부터 한반도, 중국 침공이 계획 된 것이 이유이고, 교과서에서 가르치는 "내부세력 반발을 무마하기위해"는 역사위장의 구라겠네요 ㅎㅎ
INDRA:
글 고맙습니다. 재미있는 상상이다. 환타지는 가슴을 뛰게 한다. 허나, 현실은 끔찍하다. 자기 자신의 일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영화가 있다 하자. 보고 싶을까? 기분, 더럽다. 반면 환상적인 영화는 재미있다. 그런 세상에서 살고 싶다. 가장 재미있는 영화는? 현실적이란 현실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을 감추는 데 있다. 무엇을 드러내고, 무엇을 덮을 것인가. 이 적절한 배분이야말로 현실주의 미학의 정수다. 해서, 적정하게 현실적인 동시에 꿈을 제공해주는 영화이다. 그것이 최고의 영화이다.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 즉 변증법이다. 하여, 과거는 시대를 거치면서 늘 재해석될 수밖에 없는 환타지가 되는 게다. 역사적 과거를 말하고 있다면 이는 미래에 이러했으면 좋겠다는 의도를 표출하는 데에 지나지 않는다. 해서, 역사를 살필 때, 실증도 중요하고, 사관도 중요한 게다. 그 어느 하나를 소홀히 할 수 없다. 사관 중시하는 이도 실증을 무시할 수 없고, 실증을 중시하는 이도 사관을 우습게 여길 수 없는 게다. 해서, 다시 묻는다. 왜 역사인가. 명분이다. 하면, 역사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신이 있었다. 하여, 역사는 신의 대리자로서의 인간이 다른 인간을 조직적으로 지배하기 위한 도구였던 셈이다. 이후 신은 오직 신의 대리자를 통해서만 등장했다. 한국 고대사에 관한 관심은 원초적이다.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하는 근원적인 물음을 던질 때 초등부가 부모의 부모의 부모의 조상을 찾는다면 다음 단계에 등장하는 중학교 대목이다. 이 과정을 졸업해야만 잡신이라도 만날 수 있는 고교 과정에 입문을 한다던가^^!
하나, 한국 고대사의 네 종족
인드라는 오늘날 한국 고대사에 관심이 있는 분들을 대략 네 가지 종족으로 분류한다. 일각에서는 '빠'란 명칭으로 비하하는데, 인드라는 비판적이다. 긍정의 힘으로 세상을 보자^^! 해서, 인드라는 '빠' 대신 '인'으로 말하고자 한다.
1. 환인 : 줄기는 북방 기마민족론이다. 환인이 세계 최초의 문명을 건설하였다고 하여 현재 가장 강력한 판타지 시나리오를 구성하고 있다. 환인은 두 종족으로 분화되었다. 하나, 주체사상인이다. 세계 문명은 평양에서 시작되었기에 북조선인민공화국이 없다면 지구도 없다!!! 근본을 잊어버린 인류라면 핵폭탄으로 멸망해도 상관이 없다~! 둘, 바이칼인이다. 주체사상인의 주체성을 인정하면서도 협소한 한반도 사관에는 동의할 수 없다. 노자든, 공자든, 예수든 모두 바이칼인에서 비롯되었으며, 수메르 문명을 비롯한 세계 4대 문명도 바이칼인이 이룩한 것이다. 유태인은 바이칼인의 변두리 족속에 불과하며, 잠시 세계를 지배할 수 있겠으나, 이내 바이칼인 본류인 환인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다~~~!
2. 해인 : 줄기는 남방 인도기원론이다. 동아시아에 최초로 거주한 원주민이다. 무엇보다 오늘날 일본이 잘 나가고 있다. 부럽다. 배알이 꼴린다. 하여, 한국에서 두 번째로 잘 나가는 시나리오이다. 해인은 두 종족으로 나뉘었다. 하나, 백제인이다. 백제는 중국을 지배했고, 한반도도 지배했고, 일본 열도도 지배했다!!! 일본 일왕은 백제 후손이다!!! 이 백제인에서 갈라선 것이 가야인이다. 백제인, 왜인, 가야인 중 가야인이 짱이다~! 김유신 만쉐이. 예서, 또 근래 분가한 것이 왜인이다. 국유본의 3S 정책에 빠져 일본 야동을 많이 본 탓인지 왜인이 된 이들이다. 김구를 비난하고, 일왕을 섬기는 광주항쟁 출신 386 김완섭이 예다. 둘, 인도인이다. 마치 환인처럼 북방계 이주민을 하나로 보듯 인도인은 남방계 이주민을 하나로 본다. 중국에도 있고, 한반도 남부에도 있고, 일본 열도에도 있었다. 물론 동남아시아, 폴리네시아도 내 땅이 된다^^! 궁극적으로 인도를 그리워하게 된다.
3. 중인 : 카이사르의 갈리아전기를 믿는가, 아니면 영국 스톤헤지를 신뢰하나. 전자라면 그대는 중인이다. 역사시대와 선사시대의 차이는 무엇인가. 기록이다. 말보다 문자가 앞선다. 기록이 앞선 종족의 말을 따르라. 그것은 진리~~! 삼국사기, 일본서기? 풋~! 찌질한 오랑캐의 기록일 뿐! 춘추필법이 다소 문제이기는 해도, 당대 역사기술로 보자면 최고가 아니겠는가. 오류와 한계를 구분하자. 중인은 두 종족으로 변이한다. 하나, 중국인이다. 짱꼴라 만세. 짱꼴라는 우리의 조상이시며, 시조를 욕되게 하여 잇속을 차리는 중조들을 탄핵하는 바이다~! 반기문은 중인의 쾌거이지, 결코 한인 따위의 자랑이 될 수 없다~! 반도에서 김치나 먹고 떨어져라. 동북공정 만만세. 예서, 분가한 것이 대륙삼국론자, 대륙고려론자, 대륙조선론자들이다. 어릴 때부터 열심히 무협지를 탐독한 결과일까. 중국에 대한 극단적인 사랑이 넘쳐흘러 그 모순이 극에 달하자 등장한 해법은 한반도 역대 정권은 모두 중국 대륙에 있었다는 상상인 게다. 해서, 우리는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대한민국과 북조선인민공화국도 중국대륙에 있을 지도 모른다^^! 둘, 국유본인이다. 아시아는 인도로 통일하자~! 국유본의 유전자를 통한 인류 이동 연구 만쉐이~!
4. 출인 : 신념은 출세에 죄악이다. 삶의 목표는 분명하다. 첫째도 교수, 둘째도 강단, 셋째도 돈벌이이다. 출세만 할 수 있다면 환인, 해인, 중인이 대수인가. 그들 앞에서 죽으라면 죽는 시늉을 하겠다. 출인은 두 부류로 갈라진다. 하나, 강단인이다. 유행이 진리이다. 역사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가 지배하는 사기극이다. 하여, 역사는 현 권력으로부터 시작된다. 현 권력에 충성하라. 타락한 세상에 맞서지 마라, 단지 이용하라. 둘, 혁명인이다. 타락한 시대에 맞서라, 그래야 주인이 된다. 고위험 고수익. 지금까지 역사가 사기극이었다면 진정한 사기극을 연출할 것이다. 역사는 현재가 아니라 미래를 지배하기 위한 사기극이다. 유행이 진리는 아니다. 단, 자신들이 만든 것만이 유행이며, 진리이다.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 해서, 혁명인의 전략적인 출세관에 현혹당할 수 있다. 허나, 실은 그 누구보다 출세에 열망하는 족속이다. 죽고자 하면 교수가 될 것이요, 살고자 하면 영원히 시간강사이다^^!
하면, 이미 진부해진 혁명을 넘어선 혁명은 가능한가. 정말 가능한가. 길 없는 길은 있는가.
서론이 길었다. 왜 왜인인가. 이는 동아시아 고대사 연구에서 근래 주된 이슈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는 백제가 일본 천황이 되었으며, 일본을 지배했다는 판타지에 집착하고, 열도는 한반도 남부에 임나일본부가 있었다는 환상에 몰두하기 때문이다. 당대의 역사를 오늘날 각국 이익에 따라 해석하였는데, 그러다 보니 각종 문헌이나 출토되는 유물들에 대해 마땅한 답변을 할 수 없는 일이 늘어만 가고 있는 것이다. 가령 한반도 남부에서 등장하는 전방후원분 무덤이 예다.
다만, 본격적인 문제로 들어가기 이전에 우선 세 가지 사이트를 소개하기로 한다.
http://www.history21.org/
인드라가 이 사이트 개설 이후 꾸준히 이용해오고 있다. 고대사 사이트에도 유행이 있다. 당대 권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김대중 때는 백제사 중심, 노무현 때는 가야사 중심, 중국 동북공정 논란일 때는 고구려사 중심 등등~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임을 상기시켜주고 있다.
http://www.baedalguk.com/bbs/zboard.php?id=we&page=3&select_arrange=headnum&desc=asc&category=&sn=off&ss=on&sc=on&keyword=&sn1=&divpage=1
상기한 사이트는 왜와 관련한 글들만을 모아놓았기에 자료 사이트로 적당하다고 할 수 있다.
http://blog.naver.com/krighty21?Redirect=Log&logNo=50038679992
상기한 블로그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 왜, 한, 예에 관한 자료를 얻을 수 있다. 인드라의 상상력은 이들 사이트에서 얻은 지식을 기초로 하였음을 말씀드린다. 물론 언제나 그렇듯이 독특한 면이 있다~!
둘, 왜는 중국 월족의 후예이다?
일반적으로 고대문명은 사막화를 동반했다. 초원지대에 살던 족속이 사막이 주기적인 사막화 과정을 거치면서 오아시스를 찾아 나선 데서 문명이 발생했다. 이때, 원주민이란 최초의 이주민이다. 해서, 가진 것이 상대적으로 많은 반면 배가 부르다. 반면 뒤늦게 이주한 이주민은 몸밖에 없지만, 그만큼 공격적이다. 해서, 후대 이주민이 전대 원주민을 지배하거나 축출한다. 로마가 그리스를 군사력으로 정복한다. 하고, 로마시민은 수준 높은 그리스 문화를 그리스 노예에게서 배운다.
http://blog.naver.com/mirinaebae?Redirect=Log&logNo=3302139
중국 일부 역사서에는 왜는 오나라 태백의 후예라고 기록이 되어 있다. 양자강 하류 강남지역에는 월족이 살았다. 오, 월, 초나라가 이들 지역에 근거한 국가들이었다. 문신을 하였으며, 어로(漁撈)에 능하였고, 양자강 하류와 북구주 사이에 해류가 흘러 양자강 하류에서 배를 띄우면 북구주로 연결이 되기도 하는 것이 주된 근거를 이룬다. 이 주장의 핵심은 한반도 도래설을 부정하고, 야요이인은 중국에서 직접 유래했다는 것이다.
시바 료타로는 '항우와 유방'에서 초나라 사람 항우에 강한 감정이입을 한다. 항우가 엄청난 수의 진나라 사람을 매장해버린다. 일본이 중국에 지배에 실패한 것은 항우처럼 남경 학살과 같은 잔악한 짓을 저질렀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흥미로운 점은 진시황의 잘못된 정책으로 거론되는 분서갱유가 실은 항우가 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는 점이다. 그것도 스탠포드 대학 교수에 의해서.
http://blog.hankyung.com/raj99/205649
세 가지 주요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하나는 중국 역사서에서 자칭 오나라 태백의 후예임을 강조한다. 오나라 태백 가문은 중국에서도 쳐주는 가문이다. 이런 가문의 후예로 내세운다는 것은 한마디로 폼이 나는 일이다. 한국도 거의 모든 성씨가 왕가의 후손(^!^)일 만큼 족보가 인기 있는 이유인 게다. 허나, 이는 당대 한반도 남부와 일본 열도 정세를 볼 때, 이 지역 대표임을 주장하려는 외교적 수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정설로 보인다. 대표적인 예가 진승오광의 난이다. 진승오광은 자신들이 초나라 왕실의 후예임을 자처했다. 또한 견훤이 경북 문경시 출신임에도 백제의 후예를 자처한 것도 고려해야 한다. 이처럼 중세에 이르기까지 왕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썼던 두 가지 방식 중 하나였던 게다. 알에서 태어난다든가 하는 신화를 이용하면서도 한고조 유비처럼 명멸한 이전 왕조의 후예를 내세우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둘의 문화가 비슷하더라도 별개의 민족이라는 것이다. 가령 같은 삼한 족속임에도 제주사람들 풍습은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도 다르다고 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인도 - 동남아시아 - 중국 - 한반도 - 일본으로 이동하였다가 각 지역에 토착한 족속인 게다. 이는 동아시아 난생설화 분포를 봐도 알 수 있다. 헌데, 이들이 서로 유사하면서도 다른 언어, 문화를 지니게 된 것은 오세아니아 마오리족에게서도 볼 수 있다. 마오리족 일부가 먹이를 찾아 또 다른 섬으로 이동했다. 헌데, 그곳은 파라다이스였다. 헌데, 불과 몇 백 년도 안 되었는데, 섬이라는 특수한 조건으로 인해 교류가 되지 않아 마오리와는 다른 습속을 유지하며 살았다. 이후 뒤늦게 이곳을 발견한 공격적인 마오리족은 평화지향적인 이들 족속을 잔인하게 멸망시켰다. 알고 보면, 같은 족속이었음에도 말이다. 그처럼 각 지역에 토착화되어 수백 년을 살다 보니 다른 민족이 되었던 게다. 다만, 그 기원을 추적하면 유사하니 문신의 풍습을 간직할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백제의 영향이다. 왜나 마한보다 뒤늦게 대륙에서 이동한 백제 주류세력은 보다 앞선 문화를 왜에게 전해주었다. 왜는 백제를 통해서 문자를 접하고, 불교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문자와 종교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고대국가 형성이다. 이전까지 마한이나 가야, 왜는 통일된 고대왕국이 아니라 고작해야 세대수가 천여 세대의 마을 수준이거나 그 마을들이 연맹체를 이뤄 수만 세대에 불과했던 게다. 마을이 조금 거대해진 원시부족국가들이 산재해 있었을 뿐이다. 토기나 각종 무기류가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는 유물이 없다. 그보다 한반도에서 도래한 자료들은 풍부하다.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처럼 오늘날 일본일왕이 백제의 후손 따위는 잊는 것이 좋다. 그보다는 후대에 이주한 백제계가 일본열도로 먼저 이주한 가야계, 마한계, 신라계보다 귀족간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하여 일본 일왕가를 윤색한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으로 보인다. 물론 오늘날 일본 일왕 족보는 근대 이후에 막부를 무너뜨리려는 국유본의 필요에 의해 조작된 산물이다. 해서, 이를 착각하여 일제의 한반도 침략을 고토 회복이라고 여기며 오바마의 일왕 절하기 따위에 내심 감동하면서 박정희에 대해 비난하는 친일매국적인 사고는 안 하는 것이 정신건강상 좋을 것이다.
인드라의 추론은 다음과 같다. 왜는 인도 - 동남아시아 해안 루트를 따라 기원전 만 년 전부터 중국으로 흘러들어온 이주민이다. 이들은 중국 발해만 지역과 한반도, 일본 열도 해안에 이르렀다. 다른 한편 북방계 이주민이 초원 사막화에 따라 내륙에서 해안지대로 이동하여 충돌이 불가피했다. 이때 전투력에서 뒤진 남방계 이주민이 재차 남하하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왜인이야말로 최초의 객가였던 셈이다. 해서, 한 무리는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 폴리네시아 지역으로 이동한다. 다른 한 무리는 양자강 하류, 대만, 오끼나와 등으로 이동한다. 마지막 무리는 발해만을 따라 한반도를 타고 내려와 일본 열도로 이동한다. 다시 말해, 이들은 한반도나 일본 열도의 토착인이 아니라 이들 역시 이주민이었던 게다. 이들은 각지에서 토착하면서 다양한 언어와 문화를 지닌 족속들로 분화했다. 북방 유목민족이 근본으로 가면 하나일 수 있지만, 다양한 형태로 분화되듯이 말이다. 해서, 이들은 일본 열도에 살던 오늘날 아이누인의 조상격인 열도 죠몬인과도 다르며, 한반도에서 세계 최초로 벼농사를 한 한반도 소로리인과도 다르다. 다만, 한반도와 일본 열도에서 이들 왜인은 북방계 이주민과 대대적인 혼혈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이 된다. 당대 정세를 고려하면 북방계 이주민 남자와 남방계 이주민 여자와의 혼혈이 일반적이었을 것이다.
왜인은 대체로 키가 작고, 등이 굽고, 어로에 익숙한 전형적인 남방계였다. 해서, 초원에서 살던 북방계 이주민이 보기에는 다들 비슷하게 보였을 게다. 동양인이 서양인을 보면 다 똑같은 사람으로 보이듯이 말이다. 초기에는 왜인에 대한 규정이 광범위했을 것이다. 해서, 하북성의 왜인 이야기가 나오는 게다. 허나, 후대에 갈수록 왜인에 대한 규정은 보다 협소해졌을 것이다. 북방계 유목민들이 점차 세력을 확장하였기 때문이다. 가령 중원이란 처음에 중국의 아주 작은 지역만을 지칭했으나 점차 확장된 개념이다. 그처럼 이전까지 이방인으로 간주한 족속들을 같은 족속으로 편입하면서 왜인의 규정은 보다 협소해졌을 것이다. 가령 만주 대륙에서 이동한 고조선 준왕이 세운 마한이나, 부여족이 세운 백제에서는 지배자에 의해 풍습이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삼국시대 위나라도 진나라처럼 북방 유목민족에 기원한 나라라고 할 수 있다. 해서, 진수의 한반도 삼한과 예에 대한 역사 기술을 사마천의 춘추필법과는 또 다르게 읽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오늘날 일본과 남한 비판과 같다고나 할 수 있을까. 진수 입장을 미국의 입장이라고 한다면, 한반도는 남한과 일본이요, 일본열도는 북한이었던 게다. 해서, 한반도에 대해서는 오히려 더 혹독하게 비판하게 되는 게다. 한반도인이 성장하여 자신들을 위협할 수도 있는 동시에 한반도인을 통제하기 위함이다. 허나, 당대 한반도인이 강력하게 저항하여 중국의 의도는 실패하고 만다. 반면 아예 일본열도에 대해서는 관용적일 수 있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 우리는 남한의 주사파에 대해 냉정하게 비판할지언정 북한에 대해서는 관용적이다. 오히려 북한의 긍정적인 면을 찬미하기까지 한다. 방글라데시나 미얀마 정도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런 배경이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깔려 있다고 보아야 한다.
해서, 삼국사기에 등장하여 시종일관 신라를 괴롭힌 왜는 일본 열도의 왜와 등치시키면 안 된다는 게다. 당시 일본 열도 왜가 한반도에 군사를 상주시킬 정도의 역량이 안 되었다는 것은 현 일본학계에서도 점차 인정하는 추세이다. 결국 이때의 왜란 아직 북방유목민족의 지배를 받지 않은 한반도 남부 해안가 족속들을 의미하는 게다. 신라 주류 세력이 북방 유목민족이었던 만큼 자신들 이외는 모두 왜인이었던 게다. 해서, 초기 신라에서만 왜가 많이 나타나다가 신라가 강성해지면서 왜가 사라지는 게다. 비유하면, 로마 신라가 강성해지니 이태리 한반도에 있던 족속들이 처음에는 모두 왜였지만, 점차 로마 신라인이 되었다는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대표적인 예가 가야인인 게다.
그처럼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전하는 왜인이란 진수의 입장에서 보다 왜인의 원형 형태를 유지한, 보다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생활을 지속한 족속에 대해서만 왜인으로 규정했을 것이다.
셋, 장수왕의 한성백제 멸망은 일본을 탄생시키는 역사적인 사건이다.
페니키아인들이 카르타고에 진출했다. 이때 카르타고를 페니키아의 식민지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다. 오늘날 식민지라고 말할 수 있는 관계가 형성되지 않았다. 그보다는 오늘날 현지회사, 지점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페니키아인이 왜 카르타고인으로 변모하였는가. 페니키아가 무너지자 카르타고가 자립한 것이다.
http://blog.naver.com/minimouse79?Redirect=Log&logNo=30031185336
본사가 위협을 받는다. 이때 지사가 능력이 없다면 같이 망한다. 허나, 윤윤수처럼 능력 있는 이가 등장한다면 지사가 본사의 능력을 흡수하여 본사가 된다. 왜 장수왕의 한성백제 멸망이 일본을 탄생시켰는가. 고구려가 국운을 크게 상승시킨 소수림왕, 고국원왕, 광개토대왕, 장수왕, 문자왕으로 이어지는 고구려 오왕 시기인 4세기말부터 6세기 초반 사이 시기에 당연히 한반도 남부에서 백제와 로마 신라의 지위란 형편없었을 게다. 카르타고 한니발이 로마 정벌을 시작하자 이태리 일부 도시국가에서 로마를 배신하고 카르타고에 붙은 예를 살펴볼 수 있다. 이 시기 로마 신라와 백제는 생존을 위해 왜에 인질을 보낸다. 왜에서 백제, 로마 신라로 보내는 인질은 없었다. 로마 신라는 박제상의 5세기 초 인질 구출기 이후로 인질 외교가 사라진다. 이후로 로마 신라가 강성해졌다는 게다. 반면 백제는 멸망 전까지 지속적으로 인질 외교를 지속한다. 예서 보듯, 일반적으로 인질이란 춘추전국시대에서 보듯 약소국이 강대국에게 보내는 외교안정책이다. 하여, 백제가 일본을 경영했다 이런 터무니없는 판타지는 자제되어야 한다. 당대 왜는 백제, 로마 신라가 모두 인정하는 대국이었다. 해서, 일본일왕은 백제의 후손이다, 따위의 친일매국세력 주장이란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처럼 정말 지겹지 않은가? 어느 정도 현실적인 판타지여야 한다.
한성백제가 멸망했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마한에 이어 당대 한반도 서남부를 대표하던 세력 신망이 무너진 게다. 그간 이 지역을 대표하는 한성백제가 무너지니 한반도 남부는 저마다 살 궁리를 했을 게다. 후삼국시대처럼 옛 마한 소국이나 옛 왜를 자처하며 부족국가를 세우는 등의 일이 일어났을 것이다. 한성백제가 멸망할 때 살아남은 귀족들은 어디로 갔을까. 한반도 남쪽으로 향했을 게다. 또 일부는 일본 열도로 향했을 게다. 이전까지 일본 열도 쿠슈로 이주한 이들은 어떤 이들일까. 초기에는 하층민이 대부분 이주해서 별 볼 일이 없었을 것이다. 허나, 한성백제가 멸망한 이후에는 국가 경영에 나름 노하우가 있는 상층 귀족들이 이주했을 것이다. 한성백제는 부족연맹체와 달리 고대왕국 틀을 갖춘 국가였다. 해서, 이들은 김유신처럼 이정기처럼 왜왕을 돕는 왜의 중추적 세력이 되었을 것이다.
http://100.naver.com/100.nhn?docid=793235
해서, 일본의 고대왕국은 이 시기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보며, 백제가 멸망한 7세기 이후에야 체계가 자리를 잡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한성백제 귀족 후예들의 인맥으로 한반도 남부에 광범위한 세력 구축을 했을 것이다. 일부 한성백제 귀족들이 산적떼, 해적떼 우두머리가 되어 부족국가를 이루고 있었을 터이니 이들과의 연합에 나선 게다.
정리하면, 백제와 신라 세력이 한반도에서 약화될수록 그만큼 일본 열도의 왜 세력은 강성해졌다는 게다. 해서, 고구려가 강성할 때, 입지가 매우 축소된 신라와 백제 입장에서는 왜가 군사대국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왜에 인질을 보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허나, 절치부심한 신라는 로마 신라로 거듭난다. 한반도 동남부 작은 귀퉁이를 차지하는데 불과했던 신라는 군사력을 강화시켜 박제상 사건 이후 왜에 더 이상 인질을 보내지 않는다. 결정적인 것은 백제의 멸망이었다. 이때 왜는 백제를 돕는다는 명분으로 엄청난 수의 배와 군사를 파견한다. 허나, 당대 로마 신라군은 당나라와도 맞짱을 떠서 승리한 군단이었다. 해서, 로마 신라군은 왜군을 무찔러 대승을 거둔다. 이후 충격을 받은 왜는 일본 열도만이라도 지켜내자며 칩거에 들어간 게다. 해서, 이 시기에 한반도에서 왜를 찾아볼 수 없는 게다. 워낙, 로마 신라군이 막강하였고, 국가 조직체계가 잘 조직되었기 때문이다. 통일신라는 8세기에 당나라와의 교역으로 엄청난 부를 쌓으며 전성기를 이룬다.
일본은 통일신라를 매우 두려워하는 한편 통일신라가 부러워 모방하기에 바빴을 것이다. 해서, 일본 일왕은 7세기 이후에야 정립이 되는 게다. 이 시기부터 왜에서 일본으로 이름을 바꾼다. 또한 중국과 유사한 천하관을 정립한다. 이는 조선 후기 소중화주의와 생성된 배경이 유사한 게다. 그간 일본 열도 왜는 중국과 한반도라는 동아시아 구도에서 이정기처럼 인정받고자 부단히 노력하였다면, 백제 멸망 후에는 한반도에서 인연이 끊기는 것은 물론 일본 열도도 위험한 상황에 노출되었기에 열도만이라도 지켜내기 위해 자신들만의 판타지를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그것이 천황론이다. 고구려와 고려도 자신들만의 천하관을 정립했다. 허나, 일본의 천하관은 고구려와 고려의 천하관과 다르다. 고구려와 고려의 천하관은 당대 중국 주도세력이 약화된 정세와 집권 세력의 자신감이 만들어낸 능동적인 의미에서의 판타지이다. 반면 일본의 천하관은 당대 당나라와 통일신라가 이후 강력한 국가였기에 수동적인 의미에서의 판타지인 게다.
넷, 왜에서 일본으로 국명 개칭은 북방 유목민족에 대한 트라우마이다
왜 왜는 왜에서 일본으로 국명을 개칭하였는가. 간단하다. 로마 신라에게 대패해서다. 실력이 없으면 명분에 집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여, 왜는 자신들이야말로 동이족의 으뜸이라는 표식으로 일본을 국명으로 삼은 것이다.
예서, 왜란 명칭을 고려해야 한다. 우선 바이킹과 비교를 할 수 없다. 바이킹은 전 유럽을 공포에 떨게 하며 가는 곳마다 고대왕국을 세웠다. 유럽사에서 소홀히 할 수 없는 게다. 반면 왜는 그저 노략질만 했을 뿐이다. 하여, 말갈처럼 무시되어도 좋을 그저 그런 존재였다. 다만, 근래 국유본이 동아시아 새판을 짜면서 '주변부에 대한 관심을 통한 동아시아연합'을 추구하다 보니 동북공정이다, 뭐다 하여 고대사 연구에서 말갈이다, 왜다 하는 것이 이슈가 되는 것이다.
하면, 왜 일본은 바이킹과 흡사한 왜를 재조명하고, 관광상품으로 개발하지 않을까. 부끄럽기 때문이다. 무엇이 부끄러운가. 이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로마 신라가 흉노 김알제의 후손이라는 주장인 게다. 예서, 흉노란 이미지를 보자. 그 아무리 학술적으로 흉노 이미지를 바꾼들 그간 수천 년간 지배해온 중화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것이다. 한반도인이 흉노론에 당혹하듯 일본인 역시 왜인론에 당황하는 게다. 해서, 일본인의 주된 관심사는 왜인, 야요이인이 아니다. 죠몬인이 되는 게다. 일본이나 중국이나 한국은 물론 전세계 족속들은 모두 이왕이면 모두 자생적인 것을 가장 선호하고, 외래적이라면 가장 강하고 선진적인 족속의 후예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다섯, 신라구는 동아시아 최초의 해적이다?
왜인에 대한 평가 중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성격과 풍습도 특수하여, 걸핏하면 싸우려 들고, 여자가 야외노동을 잘한다."
http://100.naver.com/100.nhn?docid=185292
본디 왜인은 죠몬인과도 다르고, 마한인과도 다르고, 가야인과도 다르며, 이후 이주해온 백제, 신라인과도 달랐다. 왜 이들은 이런 생활을 하였을까. 왜인의 남녀 비율에서 여자가 남자에 비해 월등히 높다. 이들 지역민이 오래 살았다고 한다. 헌데, 남성이 절대 부족한 이유는 단 한 가지다. 바다에 나가 죽은 남자들이 부지기수이기 때문이다.
조선술은 예부터 발전했다. 한반도인의 배 제작 기술은 현존하는 세계 최초의 수준이다. 고래 그림이 있는 것을 보면 오래 전부터 연해뿐만 아니라 먼 바다까지 배를 몰고 나갔음을 의미한다. 이순신의 거북선이 근본 없이 아무렇게나 나온 게 아니라는 게다.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사람이다. 그 아무리 조선술이 발달해도 바다에 나서는 것은 위험한 일이 틀림없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다. 농지가 별로 없는 등 절대적으로 굶주림에 내몰리지 않는다면 모험할 이유가 없는 게다. 울산 고래 암각화에서 보듯 한반도인들은 일찍이 연해에서 벗어나 대양으로 나갔다. 허나, 안정된 수익이 육지에서 구할 수 있다면 굳이 모험을 할 연유는 없을 게다. 그렇다. 문제는 기술이 아니다. 그 기술을 목숨처럼 여기는 처지인 게다.
신라구는 누구인가?
http://ko.wikipedia.org/wiki/%EC%8B%A0%EB%9D%BC%EA%B5%AC
신라구의 부각은 왜구에 대한 일본의 콤플렉스 반응에 기인한 물타기라고 볼 수 있다. 사정이 그렇더라도 신라구를 규명할 이유는 있는 게다. 신라구가 일본 지역에 진입한 시기는 어떠한 시기인가. 9세기이다. 이 시기 한반도 정세는 어떠한가. 통일신라는 7세기말에서 8세기에 걸쳐 당나라와의 교역을 통해 전성기를 구가했다. 삼국통일에 따른 지역적 반발은 극히 미미했다. 해서, 통일신라는 아랍 전문가 정수일에 따르면, 아랍 상인이 찬미하는 이상적인 국가였던 게다.
http://blog.naver.com/miavenus/memo/70070646187
허나, 9세기에 이르자 통일신라는 위기에 봉착한다. 원인은 두 가지다.
백두산 분화는 신라 멸망의 원인이다
http://ko.wikipedia.org/wiki/%EB%B0%B1%EB%91%90%EC%82%B0
하나는 백두산 분화이다. 일각에서는 백두산 분화로 발해가 멸망되었다고 보고 있다. 인드라 견해는 다르다. 이 시기 중국과 한반도 기후를 보고한 리포트를 종합하면 9세기 한반도에 중대한 기후변화가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로 인해 한반도 전역에서는 농작물 피해가 극심했을 것이다. 이로 인한 민심이 크게 요동쳤을 게다.
다른 하나는 기후적인 요인으로 민심이 이반되는 시기에는 중앙정부가 약화되고 지방권력이 크기 때문이다. 당나라의 약화이다. 중국 역사상 최대의 번영을 구가하던 당제국이 755년 안사의 난 이후 자체 모순을 극복하지 못한 채 875년 황소의 난(875~884)을 시작으로 급속히 붕괴되면서 907년 드디어 멸망하고 이어서 중국은 다시 분열의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오대십국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통일신라도 예외가 아니었다. 통일신라 역시 중앙정부의 약화로 지방에 대한 통제가 미미해지자 지방 토호들이 발호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여, 9세기에 이르러 사태는 급변한다.
이 시기 대표적인 인물이 장보고이다. 허나, 장보고 시대까지는 역설적으로 정국이 안정될 수 있었다. 문제는 장보고 이후이다. 장보고라는 구심점을 잃어버린 지방권력은 자립하기 마련이다. 백두산 분출 이후 먹고 살기는 매우 힘들다. 중국이든, 통일신라든 정세가 혼미하다. 이런 때에 떠서 나도 왕 한 번 해먹자는 분위기가 있었을 게다. 하여, 이들은 야성의 본능에 눈을 뜨게 된 게다. 대마도를 정벌하고, 쿠슈를 정복해서 살 길을 찾아야 한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더냐.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넌다. 이것이 신라구이다. 이 시기 동아시아 해상은 통일신라가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일본은 신라구의 공격에 전전긍긍하게 된다.
여섯, 고려는 중세 동아시아 해상제국이다
신라구는 이내 퇴조한다. 한반도 왜의 퇴장과 같다. 당대 고려 왕건 세력이 급부상한다. 왕건 가문이 위치한 곳은 개성이다. 개성은 당나라와의 문물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왕건가문은 당나라와의 교역으로 부를 축적한 상인 가문이었다. 즉, 왕건 가문은 해상세력이었다. 하여, 바다를 아는 만큼 후백제와의 전투에서도 해군을 이용하여 후백제 배후를 치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것이다. 이처럼 바다를 아는 왕이 나라를 건국하니 신라구들은 왕건에 충성하든가, 해외로 가든가 기로에 설 수밖에 없었을 게다. 대표적인 예가 한반도 서남부에서 활약하던 수달이다. 수달이라는 별명을 지닌 능창은 장보고 사후 한반도 서남해의 해상권을 실질적으로 장악한 신라구였지만 왕건에 의해 생포되어 참수를 당했다.
고려 왕건은 어떻게 왕권을 안정시켰는가. 세 가지다. 하나, 국호를 고려로 하여 궁예의 이상을 실현하는 동시에 개성 이북의 호족에게 명분을 부여한다. 둘, 신라를 평화적으로 흡수한다. 고려의 신라 합병은 매우 합리적이어서 이후 조선, 일본, 국유본의 귀감이 된다. 셋, 지방호족간의 혼인동맹을 통해 안정화한다. 왕건은 마음에도 없는 혼인을 엄청나게 한 인물이다^^!
"왕건의 첫 결혼 상대자는 정주 유천궁의 딸이었다. 이가 왕건의 첫째 후비(后妃)인 신혜왕후(神惠王后)이다. 정주는 오늘날의 개풍군 풍덕에 비정되는 곳으로, 예상강과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고 강화도가 마주 보이는 바닷가에 임해 있어, 해양의 요충지로 꼽히는 곳이다. 『고려사』에 의하면 유천궁은 대부(大富)였으며, 읍인들이 그를 장자(長者)라 칭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정주 지역의 유력한 해양세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 더욱 정주는 왕건의 출신지인 개성과 인접해 있어, 왕건이 해양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이곳의 유력한 해양세력을 확실한 지원자로 포섭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왕건이 이곳 해양세력 유천궁의 딸을 첫 부인으로 맞은 것은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고려사』에서는 왕건과 유천궁의 딸의 만남이 '우연'의 소산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어느날 왕건이 군대를 이끌고 정주를 지나면서 버드나무 아래에서 쉬게 되었는데, 그 때 길 옆 천상(川上)에 서있는 유천궁의 딸을 우연히 만나 동침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연'이란 항상 그 안에 '운명적'임을 내포한다. 『고려사』의 찬자는 두 사람의 만남이 운명임을 묘사하고자 하여, '우연'의 이런 속성을 이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기실 두 사람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 주도면밀한 준비의 결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왕건은 912년과 914년의 두 차례에 정주에서 점함을 수리하여 대규모의 함대를 발진시켰다. 이는 왕건이 장인 유천궁의 협조를 받아 정주를 가장 중요한 해군의 전진기지로 활용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왕건이 견훤과 서남해지방의 '도서 해양세력'의 저돌적 도전을 꺾고 서남해 쟁패의 최후 승리자가 될 수 있었던 데에는, 유천궁의 적극적 협조가 큰 힘이 되었을 것임은 물론이다. 왕건의 두 번째 결혼 상대자는 나주 목포 오다련의 딸이었다. 이가 왕건의 둘째 후비인 장화왕후이다. 흔히 나주로 통칭되는 서남해지방은 장보고의 활동 중심지로서 국내외 해양교류의 요지였을 뿐만 아니라 대규모 도자기 생산단지가 조성되어 있었다. 왕건은 서남해지방의 명성과 중요성을 모를리 없었을 것이므로, 일찍이 이 지역을 그의 해양진출의 궁극적 목적지로 삼았다. 그러나 이 지역의 해양세력은 이미 상당한 세력으로 결집되어 있었고, 견훤이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집요한 공략을 펴고 있던 중이었으므로, 서남해지방에 진출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왕건은 서남해지방에 성공적으로 진출해 가기 위한 비장의 방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되었을 것이다. 오다련의 딸과 결혼을 결행한 것이야말로 왕건의 비장의 방책 중 하나였다 할 것이다."
http://www.changpogo.or.kr/main.asp?CMenu=4&Cgubun=1&CPage=c_news0210_03.htm
고려는 태조 왕건에서 보듯 해상을 중시했다. 그런 이유로 중국, 아랍과의 교류에는 아무런 제약이 없었다. 그 때문일까. 오늘날 한반도 명칭에 대한 해외의 이름은 온통 고려인 게다. 해서, 영문 이름도 코리아인 게다. 고려는 오늘날 한국인의 정체성을 실현했다. 통일신라가 신라와 백제를 융합시켰지만, 발해와 대립해 있었기에 절반의 통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허나, 왕건이 통일신라를 평화적인 방법으로 권력을 이양을 받았고, 왕건을 도운 귀족들 상당수가 고구려 후예들이고, 발해 멸망 후 발해 유민을 받아들이면서 삼국시대 강역을 한국인의 강역으로 삼을 수 있었다. 해서, 고려는 삼국사기를 만든 것이다. 일각에서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평가절하를 하지만, 사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매우 귀중한 사료이다. 삼국사기가 없다면, 우리는 중국의 사서나 일본서기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삼국유사가 있다고는 하나, 정사는 아니다. 정사는 삼국사기뿐이다. 일부 내용에 비판적일 수는 있어도 삼국사기는 매우 높이 평가해야 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만일 삼국사기가 없다면, 오늘날 국유본의 스파이로 의심되는 박노자의 고구려는 외세였다는 식의 같잖은 주장에 어떻게 맞설 수 있다는 말인가. 삼국사기가 정사였기에 이는 김부식의 개인 입장이 아니라 고려국의 공식 입장인 게다. 하여, 삼국사기를 근거로 고려는 고구려를 외세로 받아들이지 않았음을 입증할 수 있는 것이다.
일곱, 고려 말 왜구는 왜 극성이었는가?
http://ko.wikipedia.org/wiki/%EC%99%9C%EA%B5%AC
고려 말에 왜구 활동이 극심했다. 이에 대해 일반적인 설명은 무엇인가. 당대 일본 열도는 일본 일왕이 둘로 갈라지는 등 막부체제였다. 해서, 이 갈등의 영향으로 물자 조달 등으로 정규군이 왜구가 되면서 왜구가 극심했다는 게다. 이는 어딘지 설명이 미흡하다. 이를 위해서는 고려 무신정권과 몽골 침략이라는 동아시아 정세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하여, 고려말 왜구의 강화는 세 가지로 분석해야 한다.
가, 몽골의 침략과 삼별초의 항쟁이다.
고려 무신정권은 몽골 침략에 강화도로 피신했다. 그만큼 바다에 친화적이라는 의미다. 또한 고려 삼별초는 강화도 항전에 이어 제주도 항전을 하였다. 그만큼 고려는 해양강국이었던 셈이다. 해서, 몽골의 침략 전까지인 13세기 초반까지 고려가 동아시아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해서, 왜구가 날뛸 수가 없었던 게다. 이 대목에서 인드라는 무신정권에 대한 재평가를 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조선왕조 입장에서야 무신정권이 문제이겠지만, 오늘날 관점에서 보자면,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일본의 막부체제와 비교하여 왜 고려의 무신정권 체제는 단명하였는가를 연구하는 흐름이 형성이 되었으면 싶다. 그럼에도 무신정권에 비판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국유본의 지시를 받은 친일매국부패세력이 박정희 죽이기를 하기 때문이다. 해서, 고려 무신정권을 부정적으로 묘사해야 하는 게다. 반면 일본 막부에는 긍정적인 게 친일매국부패세력의 특징이다. 사실 한국 민중사적 입장에서 무신정권 시대야말로 중요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정치권력이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던 다른 시기와 달리 이 시기는 그야말로 천민도 권력을 잡을 수 있었던 독특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다만, 왜구와 관련하여 무신정권이 중요한 것은 몽고에 대항한 삼별초가 무신정권의 후예들이었기 때문이다.
http://www.jang-soo.co.kr/zboard/view.php?id=korea&no=13
해서, 몽고는 무인정권과 삼별초를 제거하려 했던 게다. 무인 정권의 몰락 없이 고려의 항복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여, 육전에는 강하나, 해전에는 약한 몽골이 마침내 삼별초를 꺾고 고려를 식민지로 만든다. 고려 주력군은 삼별초의 항쟁 등으로 소진된다. 삼별초는 몽고가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배를 만들려고 고려 땅에 세운 조선소를 공격하여 배들을 불태우기도 했다. 다시 말해, 해상 전투력을 잃게 된다. 게다가 결정적인 것은 여몽연합군이 일본 정벌을 하다 실패한 것이다. 동아시아 해상을 장악한 군사력 대부분을 잃은 게다.
나, 중앙권력의 약화는 지방 세력의 강화로 이어진다.
고려가 몽골에 유린을 당하니 한반도 남부 사정이 어떠하겠는가. 중앙권력이 식민지 정권으로 전락하니 신뢰를 잃게 된다. 또한 중앙권력의 통제가 지방에서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니 각 지역은 독립하게 된다. 대표적인 예가 삼별초다. 삼별초는 진도와 제주에 근거지를 마련하면서 일본에 문서를 보내 몽골과 맞서는 연합전선을 제안하기도 했다. 사정이 이러하니 한반도 남부인들은 초기 삼별초에 호의적이었을 것이다.
http://blog.daum.net/zapari/15714594
헌데, 이들 삼별초는 대몽항쟁 과정에서 무리하게 군량미를 끌어 쓸 수밖에 없었다. 해서, 강화도인이나 진도인이나 제주인들은 처음에는 삼별초를 호의적으로 대하다가 자신들을 혹사하니 등을 돌렸을 것이다. 삼별초의 패전은 일차적으로 막강한 몽골군에 원인이 있겠으나, 대민사업에 소홀했던 면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삼국지에서 유비가 군사적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난민과 함께 하려 한 '덕치'란 측면을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삼별초는 제주에서 최후를 맞이하지만, 일부는 오끼나와나 일본 구주로 도피했을 것으로 추정이 되고 있다.
하면, 살아남은 삼별초가 쿠슈에 갔다면 이들은 강화도인이나 진도인, 제주인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 몽고의 식민지는 더 이상 내 나라가 아니었을 것이다. 또한 자신들에게 등을 돌린 강화도인, 진도인, 제주인에 대한 원한이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이들은 한반도 지형은 물론 동아시아 해상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아는 해양 전사들이었다. 이들 핵심전력이 쿠슈로 망명하니 쿠슈가 이들을 특급 대우했을 것이 자명하다. 안 그래도 몽골의 일본 정벌이 코앞에 닥쳐 정보가 필요한 마당에 휭재한 셈일 게다.
다, 구주의 동아시아 해상장악 시도
여몽연합군의 일본 정벌이 실패로 돌아간다. 하여, 동아시아 해상은 잠시 무주공산이 되는 셈이다. 허나, 엄청난 노다지였던 만큼 다른 실력자가 이 자리를 채우게 된다. 그들이 일본 구주 지방 세력이었던 게다. 물론 당대 일본 정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허나, 일본 중앙정치 사정과 별개로 구주 지방 세력은 욕심을 내었던 게다.
http://blog.naver.com/sws5138?Redirect=Log&logNo=140007036207
왜구는 구주 지방정부와 결탁하여 정규군이 포함된 왜구가 있었을 것이며, 중앙정부가 약화된 틈을 타서 준동한 해적떼 무리 왜구가 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시기 왜구는 단지 구주 왜구뿐만 아니라 중국, 고려인 출신 왜구도 있었을 것이다. 왜구란 해적무리이니까^^! 해서, 13세기말부터 고려 말까지 중국과 한반도에서의 왜구의 노략질이 극심해지는 것이다. 이 시기 송과 고려는 몽골의 침략으로 국력이 매우 쇠약해져 있었다. 또한 몽골의 침략으로 민심이 흉흉해졌기에 지방세력 중 일부는 스스로 왜구를 참칭하면서 노략질을 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http://100.naver.com/100.nhn?docid=173703
허나, 이처럼 막강했던 왜구도 고려 말에 이르면, 퇴조하게 된다. 최무선, 이성계, 최영이라는 영웅의 등장이다. 특히 최영의 홍산대첩에 이어 이성계는 황산대첩에서 정규군 왜구를 결정적으로 박살을 내버린다. 이는 해적 소탕전이 아니라 임진왜란 때의 전쟁과 다름없는 전쟁이었다. 하여, 홍산대첩에 이어 황산대첩에서 왜구가 참살을 당하자 이후 동아시아 역사에서 한동안 왜구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여덟, 세종대왕의 대마도 정벌이 전기, 후기 왜구의 분기점
14세기말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한다. 이성계는 명과의 외교에 사활을 걸고 있었다. 해서, 명과 같은 제도를 상당 부분 따른다. 조선의 해금정책은 고려말 공도정책의 연장선에서 보아야 하겠지만, 명의 해금정책을 따른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인드라가 강조했듯 조선왕조에서 이해하지 못할 일들이 일어나면 이는 명나라와 관련이 깊다. 가령 선조와 광해군의 대립 배경에는 당대 명나라 권력투쟁을 알면 이해가 빠르다.
하면, 왜 명나라는 해금정책을 취했던 것일까. 이는 원나라 정책을 이어간 게다. 원나라는 초원 지대에서의 전쟁에서는 강했지만, 바다나 밀림에서의 전투에는 취약했다. 베트남과의 전쟁에서 패한 것도 이 때문이다. 무엇보다 원나라가 공도정책을 포함한 해금정책을 취했던 것은 고려 무신정권 때문이다. 고려 무신정권은 강화도로 피신하면서 대몽항쟁을 장기적으로 끌어간다. 이에 당황한 것이 원나라였다. 해서, 원나라로서는 섬을 불온시할 수밖에 없었다. 명목은 왜구로부터의 침입에서 백성을 보호한다는 조치이지만, 실은 반란을 예방하기 위함이었다. 하면, 주원장은 왜 원의 해금정책을 계승한 것일까. 주원장도 같다. 주원장은 반란을 통해 집권하였다. 해서, 누구보다 반란의 속성을 이해했다. 해서, 주원장 생애 내내 주원장은 누가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싶어 닥치는 대로 죽였다. 그런 주원장이니 만큼 해금정책도 반란 방지가 목적이었다. 왜구가 문제가 아니었던 게다. 해금정책에는 밀무역 금지도 포함되어 있다. 예서, 당대 동아시아 무역을 잠깐 살펴보자.
"중국의 명나라와 일본의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 사이에 행해진 감합무역(조공무역, 명일무역)은 명나라의 건문제(建文帝)와 무로마치 막부의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 때 개시되었다. 명나라가 해금 정책(海禁政策)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아시카가 막부의 쇼군은 「일본국왕」으로 책봉받음과 함께, 왜구(倭寇)와 구별하기 위한 감합부(勘合符, 해적과의 구별을 위해 무역선이 소지한 표찰)를 명나라로부터 발행받는다. 무역은 이 감합부를 통해 상대방을 승인하는 조공 형태로 행해졌으며, 십년에 한번 조공을 하는 등의 제한이 가해져 있었다. 막부(바쿠후)가 파견한 사절에는 하카타(博田)나 사카이(堺) 등의 유력한 일본 상인들이 따라갔으며, 그 사이에 사무역(私貿易)이 행해졌다."
http://ko.wikipedia.org/wiki/%EB%8B%9D%EB%B3%B4%EC%9D%98_%EB%82%9C
당송시대는 인류 역사상 가장 부유했던 시기 중 하나다. 송나라 때에 종이, 화약이 발명되었을 만큼 이 시기 중국은 산업혁명을 일으키고 있었다. 오늘날 서양이 자랑하는 발명품 상당수가 이미 송나라 때에 발명되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해서, 당송과의 교류는 그야말로 노다지였다. 해서, 신라, 고려는 엄청난 부를 획득할 수 있었다. 헌데, 몽골 침략 전에도 고려는 안보를 이유로 화약 등 특수물자를 일본에 전해주지 않았다. 엄격하게 단속했다. 이런 까닭에 고려말 최무선이 화약과 대포로 왜군을 섬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중국에는 없는 것이 없을 정도다. 반면 일본은 물자가 빈궁했다. 해서, 일본은 사활을 걸 수밖에 없었던 게다.
하면, 이때 일본 상황은 어떠한가. 가마쿠라 무신정권이 등장한 시기가 고려 무신정권이 등장한 시기와 유사하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간 동아시아적인 귀족 중심의 국가관료제에서 봉건제로의 이행을 찾아볼 수 있다. 다시 말해, 고려 무신정권의 출현은 새로운 세상을 알리는 기폭제였다. 허나, 고려에서 무신정권이 좌절된다. 몽고 때문이다. 이성계도 무신 출신이다. 이처럼 무신을 우대하면 언제든 반란의 위험이 있었다. 해서, 군사력을 억제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었다. 반면 일본은 지리적인 이점을 안고 봉건제로 이행한다. 해서, 전국시대가 불가피했다. 이들을 통제할 권력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 일왕은 존재 자체가 부정당했다. 명이 쇼군을 왕으로 책봉했다는 것은 당대에 이미 일본 일왕은 없는 것이나 진배가 없었던 셈이다. 다만, 고려 무신정권이 왕을 존립시킨 것처럼 무신정권의 핸디캡 때문에 공연한 반발이 일어날까 싶어 연금조치 정도로 한 것이다. 어차피 실질권력을 지니고 있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삼국지에서 보면 조조가 힘없는 황제를 갖고 노는 방식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http://100.naver.com/100.nhn?docid=64496
가마쿠라 막부와 무로마치 막부의 결정적인 차이는 무엇인가. 가마쿠라 막부가 춘추시대라면 무로마치는 전국시대인 게다. 전자는 일왕을 명분만이라도 모신 이원집정부제였다면, 후자는 일왕을 배제한 단독정권인 게다. 해서, 무로마치 이후 일본 일왕이란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 즉, 현존하는 일본 일왕제는 근대 이후 국유본의 필요에 의해 날조된 사기극이다.
헌데, 막부체제라는 것은 명분이 아니라 강자만이 살아남는 시스템이다. 해서, 전국시대가 필연적이었던 게다. 고려 무신정권을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해서, 이 시스템은 역동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천민도 얼마든지 권력을 잡을 수 있었던 게다. 이성계도 무신정권이 아니었다면 조선을 건국할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다. 왜구는 무로마치 정권 출현 시기와 맞물린다고 보면 된다. 이전까지는 명분을 중시했다고 할 수 있다. 허나, 일본 일왕을 배제한 마당에 무로마치가 두려울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철저히 실리 중심으로 간 게다. 해서, 일본 각 지방영주들 목표는 한결같아진 게다. 부국강병. 부를 축적하여 군사력을 키운다. 군사력을 키워서 무로마치처럼 자신들도 언젠가는 일본을 석권하겠다. 해서, 명과 조선과의 무역에 목매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왜구는 이성계에게 황산대첩에서 대패한 이후 한동안 조용했다. 허나, 당대 일본정세로서는 그대로 물러날 수가 없었다. 하여, 다시 왜구가 준동한다. 허나, 세종대왕이 대마도 정벌을 지시한다. 이 시기는 조선 건국 세대가 살아 있었을 때이므로 조선 군사력이 매우 막강했다. 하여, 깜짝 놀란 일본은 조선의 실력에 두려워하여 정규군을 포함시킨 해적질을 중단한다. 허나, 무로마치 정권 통제 바깥에 있던 변두리 해적떼와 민간상인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특히 무로마치 정권은 명나라나 조선과의 조공무역을 독점하여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반면 변두리 지방영주는 해적질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으며, 민간상인들은 죽어라고 밀무역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해서, 세종대왕의 대마도 정벌을 기준으로 전기 왜구와 후기 왜구를 분류할 수 있는 것이다. 전기 왜구는 비공식적일지라도 일본 정규군이 포함된 왜구였다면, 후기 왜구는 민간 상인이 중심이 되고, 은밀하게 지방영주가 뒷돈을 대주는 왜구였다. 하여, 후기 왜구에는 단지 왜인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밀무역으로 큰 부를 축적할 수 있었기에 중국인, 조선인도 있었던 게다.
아홉, 포르투갈 카르타고 유태인이 왜인에게 조총을 건넨 이유?
포르투갈에서는 1498년 유태인 추방이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포르투갈 상인이 1543년 일본에 조총을 건네주었다고 알려져 있다. 정확히 말한다면, 일본에 조총을 전해준 자들은 네덜란드 유태인 상인일 것이다. 네덜란드 유태인 상인이 포르투갈산 조총을 왜인에게 판 게다. 이때, 대부분의 포르투갈, 네덜란드 상인은 99% 유태인이라고 보면 된다. 가령 향신료 무역을 주도한 것은 겉보기에는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이지만, 알고 보면 다 같은 유태인들이다. 인드라가 강조한 카르타고 유태인, 세파라딤 유태인, 궁정 유태인인 게다.
하면, 이것이 어떤 의도가 있었을까. 왜 하필 왜인에게만 주었을까. 결론부터 말한다면, 아니다. 포르투갈산 조총은 1529년에 이미 중국에 전해졌다. 일본보다 14년 빠른 셈이다. 중국에도 주고, 조선에도 전해졌다. 그럼에도 왜 중국, 조선에서는 조총을 취급하지 않았을까. 이유는 중국과 조선은 방어용 무기가 필요했고, 일본은 공격용 무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해서, 중국과 조선은 대포를 특화시켰고, 일본은 조총을 특화시킨 게다. 다만, 예서 중요한 것은 당대 중국과 조선은 일본에게 화약류 판매를 엄격히 단속했다. 오늘날 국유본이 전세계 무기를 엄격히 통제하는 것과 같다. 여러분이 상상하는 이상으로 국유본은 세심하게 무기 관리를 한다. 가령 북한 무기는 동아시아 긴장을 일으키는 전략으로 국유본이 의도적으로 평양정권에게 흘린 무기인 게다. 핵무기고, 뭐고 다 국유본의 손바닥이다.
http://blog.hankyung.com/raj99/294370
결국 핵심은 무기가 아니다. 무기를 쓰는 사회이며, 그 사회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역사가 움직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면, 이 당시 유태인이 어떤 의도가 있었을까. 인드라는 회의적이다. 이 당시 포르투갈, 네덜란드 유태인 관심사는 향신료였다. 반면 로스차일드를 필두로 한 영국 유태인 관심사는 아편이었다. 로스차일드가 중국 공략에 적극 나선 이유는 중국이 아편 무역을 금지시켰기 때문이다. 그 이전까지는 중국이 영국과 독점적으로 아편 무역을 허용해서 중국을 장악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로스차일드 이전 영국 유태자본은 미국을 독립시켜 동인도회사에 대한 영국인의 관심사를 미국 독립에 신경을 쓰게 한 사이에 중국 아편 무역에 올인했다.
또한 전쟁을 이용해서 돈을 번다는 발상은 로스차일드 이후의 사업방식이다. 그 이전까지 유태인은 향신료 무역이나 금은광산 채굴 같은 데에 몰두했다. 반면 로스차일드는 헤센가가 용병장사로 큰돈을 버는 것을 목격하였기에 각국 국채를 사들여서 나폴레옹전쟁서부터 전쟁을 조장하기 시작한 게다. HSBC나 스탠다드차타드 은행이 중국 청나라 정권과 거래한 데서도 확인이 된다. 국유본은 청나라 국채를 사들인다. 청나라는 국채발행한 돈으로 국유본 무기를 구입하고, 군사력을 키운다. 또 국유본은 일본 국채를 사들인다. 일본은 국채발행한 돈으로 국유본 무기를 구입하고, 군사력을 키운다. 청과 일본은 조선에서 전쟁을 벌인다. 이런 식인 게다.
해서, 인드라는 국유본이 1820년대 이전까지는 동아시아에서 일본을 이용하겠다는 전략이 전무했다고 보고 있다. 허나, 그 이후로는 로스차일드가 적극적으로 일본을 이용하는 전략을 짠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배경에 국유본의 음모가 있다고 보지 않는다. 인드라는 국제유태자본의 기원을 1600년 네덜란드 주식거래소 탄생에서 보고 있으며, 로스차일드 시대에 이르러 국유본의 본격적인 세계 공략이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해서,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침략한 배경에 대한 인드라 설명은 다음과 같다. 배가 고파서.
열, 한반도 평화통일과 경제발전을 위한 역사를 생각한다
님의 상상력이 재미있다고 여긴다. 해서, 님이 주장한 것을 바탕으로 팩션을 써볼 수 있을 것이다. 가령 국유본이 일본은 물론 중국에도 조총과 대포를 주어 동아시아 전쟁을 일으키려고 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할 수 있었던 데는 유태인 상인이라는 숨은 주역이 있었다. 그는 그 누구도 승리하지 못하는 전쟁을 바랐다. 해서, 그는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이용해먹을 대로 이용해 먹은 뒤 암살한다. 또 다른 그의 목적은 명을 전쟁으로 쇠잔하게 해서 망하게 하는 것이었다. 왜 명을 망하게 하였나. 해금정책 때문이다. 하여, 청의 건국에는 유태인 상인이 있었다. 허나, 청 역시 원, 명에 이어 여전히 해금정책을 취하자 청을 내부로부터 말아먹는 아편을 팔아먹기 시작한다. 이에 청이 아편무역을 금지하자 아편전쟁을 개시하는데... 재미있지 않겠는가. <다빈치 코드>나 <천사와 악마>처럼 써먹을 수 있지 않겠는가. 제목은... <임진유란> 어떠한가. 임진왜란은 유태인이 일으켰다는 의미에서 임진유란이다^^! 물론 이는 허구다. 허구이지만, 허구이기에 오히려 상업화에는 부담이 없을 수 있다. 오히려 영화 소재가 빈궁한 요즘 자본이 탐을 낼 수도 있다. 영화의 첫 장면은 커다란 조총구멍이다. 화면이 빠르게 줌아웃되면서 왜군의 조총사격이 이루어진다. 백의를 입은 조선 의용군이 피를 흘리며 쓰러진다. 백의에 시뻘건 핏물이 점차 번지며 화면이 바뀐다. 화면에는 깃발이 휘날린다. 정명가도... 이 시놉시스보고 당장 연락올 지도 모르겠다^^! 그럼 님이랑 공동 시나리오 쓰면 되나~!
자, 문화적 마인드는 이쯤으로 하자. 오늘날 남방계 왜나 북방계 흉노 등을 적극적으로 접근해야 할 이유가 있다. 국유본의 근래 기획은 아시아연합이다. 이를 위해 역사적 재조정화가 각국에서 진행중이다. 하고, 최근 한민족은 동남아시아로부터 왔다, 라는 식의 국유본 연구가 등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하면, 여기에 일일이 반응하기보다 그들 기획을 알아야 한다. 현재 국유본이 만든 틀은 중국과 일본이라는 2강에 한국과 동남아시아, 그리고 호주,뉴질랜드 등 오세아니아, 마지막으로 인도를 포함시키는 6자 경제공동체 구조이다. 물론 안보공동체로 가면 나토처럼 미국이 환태평양 국가라는 명분으로 참여하며, 미국만 참여하면 뻘쭘하니 캐나다 정도를 함께 갈 수 있을 것이다. 하면, 이때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 경제발전과 사회복지를 위한 길은 무엇인가. 북방계와 남방계가 잘 융합된 지역이 한반도이다. 해서, 국유본이 한류 붐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를 잘 활용해야 하는 것이다. 동아시아에서 중국, 일본이라는 2강의 구도보다 한중일 3강 구도가 오히려 이 지역 균형과 안정에 가장 나은 방안임을 역설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하기 위해 한반도 통일이 진행되어야 하고, 한반도 국력이 이른 시기내에 일본 국력에 도달해야 한다는 점을 설득력있게 주장해야 하는 것이다."
2010년 경제전망: 삼성, 대우건설, 금호사태의 비밀과 박정희 죽이기 국유본론 2010
2010/01/09 23:00
http://blog.naver.com/miavenus/70077737564
"예언해설가:
안녕하세요. 호르스트 쾰러 독일 대통령이 한국을 방한한다고 합니다.(독일 대통령을 워낙 언론에서 주목하지 않아서, 있는지 없는지도 잊었네요 ㅎㅎ) 뭔가 필이 와서 조사를 해보았습니다. 1967년 하인리히 뤼프케(기민련) 고속도로 기획, 원자력청, 1991년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기민련)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지방 자치 기초 의원 선거 1998년 로만 헤르초크(기민련) 외환위기 극복 시점, 정주영 방문 2002년 요하네스 라우(사회민주당) *기민련=기독교민주연합 기민련 출신의 독일 대통령이 한국을 방한하면, 큰 그림의 방향이 좋은 쪽으로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호르스트 쾰러도 기독교민주연합 출신... 남북한 시나리오에서 좋은 쪽을 풀린다는 시나리오는 아닐까요? 여하튼, 독일 대통령을 사람들은 있는지도 모르고, 또 알아도 총리가 모든 권한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저는 생각이 다릅니다. 빌 게이츠가 제일 돈 많아 보이지만 그게 아니듯, 총리가 실세인 거 같아 보이지만 실은 바지사장 역할이고 진짜 파워는 독일 대통령이라고 봅니다. 일본에 천황이 있고 영국에 국왕이 있듯이... Well.. 좋은 밤 되십시오. 독 호르스트 쾰러 대통령이 통일은 어느 순간 갑자기 올 수도 있으며 비용은 한국의 역량으로 감당하며 감지하지 못했던 힘을 감지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단순한 립 서비스로 듣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INDRA:
글 고맙습니다. 독일 대통령이 2월 7일 방한한다. 호르스트 쾰러는 방한하여 남북문제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의 한독 공동 협력방안, 풍력 발전사업 협력 등을 논의할 예정이다.
1. 독일 대통령은 알려진 바와 달리 실세인가
다음은 역대 독일 대통령 명단이다.
테오도어 호이스(Theodor Heuss, 1949.9.13.~1959.9.12., 자유민주당)
http://100.naver.com/100.nhn?docid=171612
하인리히 뤼프케(Heinrich Lübke, 1959.9.13.~1969.6.30., 기독교민주연합)
http://ko.wikipedia.org/wiki/%ED%95%98%EC%9D%B8%EB%A6%AC%ED%9E%88_%EB%A4%BC%EB%B8%8C%EC%BC%80
구스타프 하이네만(Gustav Heinemann,1969.7.1.~1974.6.30., 사회민주당)
http://100.naver.com/100.nhn?docid=185129
발터 셸(Walter Scheel, 1974.7.1.~1979.6.30., 자유민주당)
http://100.naver.com/100.nhn?docid=93549
칼 카르스텐스(Karl Carstens, 1979.7.1.~1984.6.30., 기독교민주연합)
http://100.naver.com/100.nhn?docid=150017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Richard von Weizsäcker, 1984.7.1.~1994.6.30., 기독교민주연합)
http://100.naver.com/100.nhn?docid=69036
로만 헤르초크(Roman Herzog, 1994.7.1.~1999.6.30., 기독교민주연합)
http://en.wikipedia.org/wiki/Roman_Herzog
요하네스 라우(Johannes Rau, 1999.7.1.~2004.6.30., 사회민주당)
http://en.wikipedia.org/wiki/Johannes_Rau
호르스트 쾰러(Horst Köhler, 2004.7.1.~, 기독교민주연합)
http://ko.wikipedia.org/wiki/%ED%98%B8%EB%A5%B4%EC%8A%A4%ED%8A%B8_%EC%BE%B0%EB%9F%AC
말씀한 대로 대체로 사람들은 독일이 의원내각제이므로 총리가 모든 권한이 있으며, 독일 대통령이 상징적 존재에 불과하다고 여기고 있다.
상기한 2009년 독일 정치인 영향력을 봐도, 상위권에 총리들이 포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1위는 독일의 박정희, 아데나워이다. 예서, 흥미로운 점은 10와 11위, 12위에 대통령들이 순위권에 진입했다는 점이며, 한 명은 동독 대통령이었고, 다른 한 명은 근래 대통령이었으며, 호르스트 쾰러는 현직 대통령이라는 것이다.
하면, 독일에서 근래 대통령에 대해 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것일까. 인드라는 1990년대 후반 독일을 방문하면서 느낀 바가 있었다. 무엇보다 독일에서는 통일 이후 가장 큰 정치적 이슈가 통일 후유증을 극복하는 것이다. 해서, 그만큼 통합의 상징으로서의 대통령 역할이 증대되고 있다. 하여, 요하네스 라우 대통령 때부터 대통령 직에 대한 관심이 커진 것이다.
게다가 독일 대통령이 주목받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현직 대통령인 호르스트 쾰러가 IMF 총재 출신이라는 점이다.
2. 호르스트 쾰러 독일 대통령은 IMF 총재 출신
호르스트 쾰러는 헤겔 등을 배출한 명문 튀빙겐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후 은행업계와 재정부 장관을 거쳐 IMF 총재가 된다. 이때 호르스트 쾰러가 IMF 총재가 된 배경은 무엇일까. IMF 총재가 독일 몫이었기 때문이라 한다. 헌데, IMF 역사상 독일인이 IMF 총재가 된 것은 호르스트 쾰러가 유일하다. 인월리는 지난 글들에서 빅터 로스차일드의 빌더버그 체제를 설명한 바 있다. 해서, 세계은행 총재가 미국인 몫이라면 IMF 총재는 유럽인 몫, 보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영국, 독일을 제외한 서유럽 몫이었다. 예서, 영국이 빠진 것은 당시 세계의 중심이 런던에 있었고, 런던에는 빅터 로스차일드가 있었기 때문이다.
초대 총재가 벨기에인 것은 유럽연합 초대 대통령이 벨기에 출신인 것과 같다. 1,2차 세계대전에서 벨기에 지역이 한반도 지역처럼 늘 전쟁터가 되었기에 그에 대한 위안 성격이 강하다. 1920년 안트워프 올림픽도 마찬가지 예였다. 해서, 이들은 오늘날 반기문이 유엔 총장이지만 별 볼 일이 없듯 실제 권한이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음은 스웨덴 출신이다. 1950년대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는 스웨덴계 유태인이었다고 한다. 이차대전 전까지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던 스웨덴이 이 시기 비약적인 경제 발전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이처럼 IMF 총재는 미국 정치상황과 연동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주로 프랑스에서 총재가 등장한다. 그러다가 2000년 최초로 독일 출신 IMF 총재가 등장한다.
하면, 이 시기에 미국 정세는 어떠한가. 부시 대통령 집권 직전이었다. 인월리는 말했다. 국유본은 연임 대통령 후반기서부터 실질적인 정권교체를 준비한다. 오바마 대통령으로의 정권 교체는 2006년부터 준비되었듯이 부시 대통령으로의 정권 교체는 1998년부터 시작되고 있었던 셈이다. 하고, 부시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네오콘이다. 데이비드 록펠러 계열인 뉴라이트 중에서 소수파인 네오콘이다. 빅터 로스차일드계였다가 데이비드 록펠러계로 이적한 네오콘이다.
네오콘의 전략은 무엇인가. 중동전쟁을 통한 세계체제 안정이다. 구사회주의권 지역, 옛 로스차일드 지역에서의 우호 노선이다. 중국 공산당은 중국에서의 이라크전쟁 반대시위를 금지시켰다. 푸틴 역시 네오콘에 호의적이었다. 차베스가 뜬다. 네오콘의 전략으로 원유로 실속을 챙기면서 반미발언을 할 수 있으니 차베스가 신났던 셈이다. 또한 두 지역에서 동시에 전쟁을 할 수 없으므로 동아시아에서는 평화정책이 요구되었다. 해서, 국유본은 동아시아에서 포용정책을 실시한다. CIA 한국지부장이었던 그레그는 포용정책과 케넌정책은 본질적으로 같다고 했다. 부시는 북한에 다국적 담배공장을 설립하게 하는 등 포용정책에 박차를 가했다. 또한 네오콘은 유럽에서 프랑스 고립작전으로 나아갔다. 이 시기 프랑스에서는 이슬람 이주민 폭동과 같은 사태가 자주 일어나며, 위기의 상황으로 치닫는다.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2006년 독일월드컵으로, 2010년 남아공월드컵, 2014년 브라질월드컵으로 이어지는 국유본의 로드맵. 예서, 호르스트 쾰러의 역할이 있었다. 호르스트 퀼러는 지난 1990년 독일 재무부차관으로 동서독 화폐통합을 주도했고 1999년 유로화 도입을 이룬 마스트리트 조약의 실무 협상가로 활약했다. 그 연속선상에서 퀼러 IMF 총재는 2000년 6월과 노무현 탄핵쇼 총선이 있던 2004년 2월 한국을 방문해 전임 깡드쉬처럼 노동시장 유연화 등을 한국에 지시한 바 있다. 특히 2000년 6월은 615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던 때다. 세계의 이목을 남북정상회담에 몰아놓고 국유본은 한반도에서 무엇을 노린 것일까. 이후 노무현 정권의 남북정상회담도 FTA와 관련이 깊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국유본은 정치적인 이벤트를 제공하여 국민을 현혹시킨 뒤 경제적 실속을 얻는다. 한번 당하고, 두번을 당했음에도 또 정신 못 차린다면 앞날이 어둡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인드라는 김대중 정권 때나 노무현 정권 때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면 언제나 환영했다. 그것이 비록 다른 이슈를 감추기 위한 물타기쇼라고 할 지라도 남북 정상이 만나는 것은 늘 지지했다. 다른 이들이 정략적이다, 선거용이다 라고 할 때 인드라는 정치인이 정략적이지 않고, 선거를 의식하지 않으면 직무 유기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호르스트 쾰러는 독일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 정치 이력이 전무하다. 그럼에도 역대 대통령과 달리 실세 대통령으로 자리매김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독일 최초의 IMF 총재였기 때문이다.
3. 메르켈 박사님더러 독일의 대처를 주문한 호르스트 쾰러 교수님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를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이처럼 호르스트 쾰러는 자서전 '곤란해지더라도 나는 솔직하고 싶다'에서 앙겔라 메르켈에게 조언을 했다. 이는 호르스트 쾰러가 1994년 독일 저축예금은행 연합회장으로 있었을 때 한 발언과는 다르다.
"하나의 금융기관이 파산하게 되면 하룻밤 사이에 수많은 연결된 기관들도 넘어가게 되고 그리하여 범지구적인 도미노 현상이 벌어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이 위험성이 증권가를 덮치게 되고 , 나아가 환율 시세에 막대한 변동을 일으킨다. 나아가서는 금방 현실세계에 심각한 변동이 오게 된다. 이런 일은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모든 거래는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되고, 시스템 전체가 붕괴될 수 있다. 나아가 이것이 확산되면 범지구적 파멸이 불가피하다. 온 세계가 1929년 10월 '암흑의 금요일(대공황)에 이미 경험했던 것처럼….: 세계화의 덫"
호르스트 쾰러는 극단적인 자유주의 경제학 신봉자로 알려져 있다. 정치적으로 보면, 기민-기사당 연합보다는 신자유주의 지향적인 자유민주당 성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해서, 독일의 대처를 주문한 것에는 이해하기에 무리가 없다. 헌데, 상기한 발언으로 보자면, 현 금융시스템에 어떤 식으로는 '개입'해야만 한다. 대체 호르스트 쾰러의 진심은 무엇일까.
호르스트 쾰러가 갑자기 IMF 총재직을 내놓는다. 독일 대통령 출마를 위해서였다. 왜 호르스트 쾰러가 나서야만 했을까. 인월리는 메르켈 때문으로 본다. 동서독간의 위화감이 날로 치솟자 국유본은 메르켈을 통한 국가 통합에 나선다.
메르켈은 1989년 동독 민주화운동단체인 민주개혁에서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예서, 알 수 있듯 메르켈의 정치적 자산은 여성이고, 서독에서 태어나 동독에서 자랐으며, 민주화운동가 출신인 게다. 이는 고스란히 메르켈의 약점이기도 하다. 해서, 누군가는 이 약점을 보완해주어야만 한다. 그것이 호르스트 쾰러이다. 메르켈은 정치적 자산이 풍부한 편이나, 급변하는 세계 경제상황에 제대로 대처할 수 있을 것인지 회의적이었다. 반면 호르스트 쾰러는 정치 경력이 전무해도 IMF 총재였던 게다. 이는 마치 박근혜가 한나라당 차기 유력한 대통령 후보로 부상하자 정몽준이 한나라당에서 무게중심을 잡고 있는 형국과 같은 셈이다.
이런 배경에서 호르스트 쾰러는 기민기사당 연합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나서는데 이때도 묘한 발언을 하여 이슈의 주인공이 된다. 쾰러는 대통령 후보 시절 뒤셀도르프에서 열린 기독교민주연합과 자유민주당의 의원 모임 연설을 통해 미국이 이라크 정책과 관련해 힘을 최우선시하며 오만하게 행동해 왔다고 비판했다. 이는 이라크 전쟁에 비판적인 사민당에게는 호재였고, 기민기사당 연합에게는 악재였다. 호르스트 쾰러는 네오콘 활약 시기에 IMF 총재가 되었다고 했다. 예서, 또 한번 호르스트 쾰러의 진심을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과연 호르스트 쾰러의 진심은? 다른 것이 없다. 국유본의 지시대로 움직인다고 보아야 한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94년 저축예금은행 회장 시절에는 응당 은행시스템의 안정을 말해야 했으며, IMF 총재 시절에는 노동유연화를 강조해야 했고, 대통령 후보 시절에는 '반미면 어때?'라는 식으로 인기몰이 정치를 시도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물론 이 시기는 네오콘이 정권교체를 준비하며 2선으로 후퇴를 준비하던 때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네오콘 3인방이라는 폴 울포위츠 국방부 차관이 세계은행 총재가 되는 것이었다. 또한 이 시기 북한 BDA 문제가 터졌다. 혹자는 이를 네오콘의 북한 압박으로 알고 있는데 아니다. 이는 오히려 제이 록펠러 측 작품으로 보아야 한다. 네오콘은 중국과 북한 인권 문제에 관대하였으며, 북한에 다국적 담배공장을 세우고, 무역거래를 해왔다. 반면 제이 록펠러 측은 담배산업에 매우 비판적이었고, 북한 인권에 민감하다. 해서, BDA 사건 이후 북한 다국적 담배공장이 폐쇄된다. 본격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이 2006년이라면 준비기가 2005년이었던 셈이다.
4. 실세 대통령으로 등장한 호르스트 쾰러
지금까지 독일 대통령들은 있으나 없는 듯했다. 비유하자면, 미국 부통령과 같은 신세다. 국민이나 외국에 대해 듣기 좋은 립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전부였다. 하고, 거부권을 행사한다 해도 절차상의 문제와 같은 사소한 것이었다. 허나, 호르스트 쾰러는 달랐다. 시기마다 정치적 쟁점을 몰고왔다.
독일 슈뢰더 소원대로 불신임 받고 쾰러 조기총선 승인
http://blog.naver.com/cinema2day?Redirect=Log&logNo=14615242
노무현이 감동받았다는 독일총선 분석 보고서
http://blog.naver.com/gimche?Redirect=Log&logNo=140018269416
슈뢰더의 당면 과제는 현 그리스처럼 공공 부문 예산 삭감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허나, 악역을 맡기는 싫었던 슈뢰더가 택한 것은 조기 총선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슈퇴더의 선택이 아니라 국유본 정당인 사민당을 보존시키려는 국유본의 전술이겠다. 아마 이것이 노무현에게 감동을 주었던 듯싶다^^! 조기 총선으로 인해 슈뢰더는 모양있는 퇴각을 할 수 있었고, 메르켈은 총리가 될 수 있었다. 이것이 대연정에 관한 일반적인 시각이다. 허나, 인월리 입장에서 메르켈이나 슈뢰더나 궁극적으로 한 통속이라면? 이 시기는 2006~2008년에 이르는 미국 정권교체 준비기처럼 독일도 정권교체 준비기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튀는 독일 대통령, 호르스트 쾰러의 행보는 계속된다. 이제 연정 파트너인 사민당을 야당으로 보내고, 기민-기사-자민 연합을 구성해야 한다. 이를 위한 수순은 무엇일까.
"이런 가운데 호르스트 쾰러(Horst Koehler) 대통령은 정부의 지역 보조금이 경제침체의 원인이 되고 있다고 비판하고 나섰다. 무리한 보조금으로 국가채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경제회복을 위한 정책을 제대로 추진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재무차관과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를 역임한 경제전문가인 쾰러 대통령은 지난 9월 12일 "정부가 지역별 생활수준을 맞추기 위해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은 후세에 엄청난 부채를 떠맡기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국가의 정책 목표를 동서 양지역의 동일한 생활수준으로 설정한 자체가 모순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의 발언은 동독인의 저항을 불러왔고 9월 19일 치러진 동독지역의 작센(Sachsen) 州와 브란덴부르크(Brandenburg) 州 의회선거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우려했던 대로 극우정당인 NPD(독일민족당)와 극좌정당인 PDS(민주사회주의당) 등 극단적 정당들의 진출이 두드러졌다. 브란덴부르크 주의 경우, 舊 동독 공산당 SED의 후신인 민사당(PDS)의 득표율이 사민당과의 각축을 벌이며 28%를 차지해 31.9%를 차지한 사민당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 쾰러 대통령이 동서독 동일한 생활수준을 목표로 한다면 독일은 '보조금 국가'라는 오명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부채국가을 모면할 수 없다며 목표 수정을 제의한 데 대해 슈뢰더 연방총리도 맞짱구를 치고 나왔다. 그는 독일 사회에 광범위하게 확산된 무임승차 근성을 지적하며 현재 '공짜근성' (Mitnahme- Mentalitaet)이 중산층까지 확산되어 경제는 독일경제를 좀먹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http://blog.naver.com/goldenwook?Redirect=Log&logNo=150003131305
네오콘 부시가 환경당 네이더와 차베스를 응원하여 재선에 성공하듯, 호르스트 쾰러는 좌익당을 사실상 옹호하는 발언을 연달아 낸다. 여기에 대책없이 슈뢰더가 동조하니 점입가경이 아닐 수 없었던 게다. 기민기사연합과 사민당 모두에게 실망감을 느낀 동독 주민들이 민주사회당으로 급속히 쏠리게 된다.
"5월 13일 실시된 아일랜드 국민투표에서 EU(유럽연합)의 미니헌법에 해당하는 '리스본조약'의 비준안이 부결됨에 따라 조약의 장래에 대한 암운이 깃든 가운데, EU의 쌍두마차 중의 한 나라인 독일의 호르스트 쾰러 대통령이 리스본조약의 비준을 보류해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는 기독민주연합(기민련, CDU)의 페터 가우바일러 의원과 원내 좌파당(Die Linke)이 리스본조약의 합헌성의 문제를 들어 위헌소송을 제기했기 때문인데, 베를린에 있는 대통령관저는 30일 현재 그와 같이 위헌소송이 제기되어 있는 점을 들어 리스본조약을 일단은 비준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사민당과 기민련, "유럽회의론자들을 부추긴다" 비판.. 이러한 쾰러 대통령의 결정에 대해 사회민주당(사민당, SPD)과 기민련은 즉각 비판을 가했다. 악셀 쉐르퍼 사민당 유럽정치부문 대변인은 그것을 '잘못된 신호'라고 표현하며, "에이레인들의 반대 이후 물에다 기름을 붓는 격으로 유럽회의론자들을 부추기는 것"이라고 경제지 '한델스블라트'에다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쾰러 대통령이 서명을 통해 연방정부와 연방의회의 통합노선을 명백히 지지하고 있음을 보여주었어야 했다"고 말했다."
http://real.jinbo.net/news/view.php?board=news&id=43660&page=8&category1=38
1970년대까지만 해도 유럽연합, 세계정부론에 대해 진보좌파는 긍정적이었다. 왜? 빅터 로스차일드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나, 1980년대 빅터 로스차일드가 데이비드 록펠러에게 패배한 이후 진보좌파는 태도를 돌변한다. 이유는? 이제 유럽연합과 세계정부를 주도하는 자가 빅터 로스차일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해서, 부르주아적 통합에는 반대한다는 노선을 정립한다. 허나, 이들은 이상주의적 소수에 불과했다. 어차피 전후 진보좌파란 국유본이 고안한 발명 장치였기에. 하면, 호르스트 쾰러는 왜 이들 이상주의적 좌파에 동조하는 발언을 했을까.
"현재 독일 정치인들에게는 쾰러 대통령에게 '제동'을 걸 뾰족한 방법이 없는 듯하다. 대통령 권한 남용을 이유로 헌법재판소에 소추하는 것은 매우 드물면서도 극단적인 방법이라 부담스럽다. 무엇보다도 쾰러 대통령은 국민에게 인기가 좋다. 지난해 12월 중순 설문조사에 따르면, 쾰러 대통령이 현실 정치문제에 관여하는 것에 대해 85%가 "긍정적"이라고 평가했다."
http://blog.naver.com/ebinpa?Redirect=Log&logNo=80033723640
호르스트 쾰러의 정치적 행각은 천방지축이다. 물론 이 시기 세게의 정치지도자들은 국유본의 지시에 따라 막말 경쟁에 나선 시기이기도 했다. 막말을 해댈수록 인기를 얻었다. 중요한 것은 이 시기 정치 지도자들에게는 그때 그때마다 언론플레이를 하여 표계산에 능할 뿐, 딱히 소신이라는 것이 없었다는 점이다. 결국 이러한 행보 끝에 호르스트 쾰러는 재선에 성공한다.
5. 호르스트 쾰러와 아데나워 재단
전 세계 재단 중 독일 재단은 미국 재단과 늘 비교가 되는 모범적인 재단이다. 무엇보다 독일 재단의 특징은 정치적이라는 점이다. 기독교민주당(CDU)은 콘라드 아데나워 재단을, 기독교사회당(CSU)은 한스 자이델 재단을, 사회민주당(SPD)은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재단을, 자유민주당(FDP)은 프리드리히 나우만 재단을, 녹색연합(Gruene)은 하인리히 뵐 재단을, 마지막으로 민주사회당(PDS)은 로자 룩셈부르크 재단을 갖고 있다. 이들 재단 중 현재 한국에 상륙한 재단은 아데나워 재단, 자이델 재단, 에베르트 재단, 나우만 재단이다. 이들 재단들은 국내외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체계적인 교육훈련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해서, 호르스트 쾰러는 물론 메르켈도 아데나워 재단인 게다.
하면, 국내 아데나워 재단 활동을 보자.
아데나워 재단 홈페이지에 있는 파트너들이다. 하나같이 쟁쟁하다.
형식적인 파트너가 아니다. 한나라당 차세대 정치인 양성을 위한 정치 교육에서 보듯 한국 정치 최전선을 형성하고 있다.
하면, 다른 재단 상황은 어떠한가.
이는 에베르트 재단 활동이다. 아데나워 재단과 에베르트 재단 두 곳만으로도 이들이 한국사회에서 얼마나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는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여, 예언해설가님처럼 상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닌 것이다. 그것이 독일 대통령으로 나타나든, 독일 재단으로 나타나든 국유본은 이들을 통해서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해서, 상상을 해보라. 국유본이 한국사회를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려 한다면 어떤 방법이 있겠는가. 간단하다. 아데나워 재단과 에베르트 재단 상층에 간단한 메모 한장만 남기면 된다. 하면, 각 재단은 인맥을 통해 한국사회에 명령을 전달하고, 전달받은 국내 '꼰대'들은 똘마니들에게 전한다. 인월리는 강조했다. 국유본은 대립하는 양측 모두를 지원한다. 짜고 고스톱을 위하야!
6. 콘라드 아데나워는 누구인가
"아데나워는 마셜정책에 감사를 표하면서도 독일의 공업정책을 제한하는 정책에 대해서는 "세계시장으로부터 독일을 견제하려는 정책"이라고 반발했으며, 독일인들이 스스로 국가를 재건할 수 있도록 독일인들에게 행정권이 돌아가야 한다면서 연합군 진영에 대해서 비판적인 모습을 보였다. 또한 유럽을 공산주의 국가 소련으로부터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여 반공주의적인 정견을 보였는데, 이러한 연설은 사회민주당으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았다. 또한 연합군 진영의 반발을 사 영국 의회에서 독일내 영국군 점령당국에 대해 해명을 요청하였다."
http://ko.wikipedia.org/wiki/%EC%BD%98%EB%9D%BC%ED%8A%B8_%EC%95%84%EB%8D%B0%EB%82%98%EC%9B%8C
콘라드 아데나워는 오늘날 독일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독일의 '박정희'이다. 그의 인기는 단순명료하다. 오늘날 독일 경제를 일으킨 장본인이라 평가받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인월리 입장은 긍정하면서 부정한다. 왜? 배후는 국유본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국유본 내부에서는 이 시기 두 갈래 노선이 있었다. 하나는 독일을 낙농업국가로 만드는 모겐소 구상이었다. 이는 소련과 미국, 유럽 사회주의자들이 찬동했다. 다른 하나는 독일을 여전히 광공업 국가로 남겨두는 안이다. 뉴욕 금융 자본가들은 독일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했다. 로열더치셀 원유 회사는 전쟁 내내 일본군을 위한 원유 공급을 했다. 빅터 로스차일드는 전쟁 때부터 독일 재산 보호를 위해 영국 정보부에서 일했다. 빅터 로스차일드는 후자를 선택한다. 그것이 마셜 플랜이다. 마셜 플랜은 공산주의로부터의 보호나 굶어죽는 유럽민을 위한 제도가 아니었다. 국유본 재산을 보존하고 냉전체제를 형성하여 전후 세계질서를 구성하는 것이 목표였다. 하여, 모겐소 구상 편에 섰던 헨리 윌리스 미국 부통령은 트루먼에게 미국 부통령직을 빼앗겼으며, 이후 대통령 선거에서는 프리메이슨 혐의를 받아 결국 패퇴한다. 나아가 이들 세력들 상당수가 소련 간첩 혐의로 숙청이 된다.
http://blog.naver.com/humorcare?Redirect=Log&logNo=120068094967
존 콜먼은 빌리 브란트가 300인 위원회 회원이자 KGB 간첩임을 폭로한다. 정확히 말하면, 빌리 브란트는 KGB 간첩이 아니다. 빅터 로스차일드의 하수인일 뿐이다. 그처럼 콘라드 아데나워 역시 마찬가지이다. 존 콜먼은 빅터 로스차일드의 좌익 계열에 대해서만 폭로한 것이다. 하여, 빅터 로스차일드가 없었다면, 오늘날 독일도 없고, 콘라드 아데나워도 없다.
7.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는 누구인가
"독일 노동자들은 분명히 피를 흘렸다. 그들은 국제주의적인 마르크스시스트는 아니었다. 만일 1914년에 독일 노동자들이 마르크스시스트였던들 세계대전은 3주일 후에는 이미 끝나버렸을 것이다. 당시 독일 민족이 끈질기게 싸울 수 있었다는 사실은 마르크스시즘적인 망상이 독일 국민의 마음 속에 깊이 파고들지 못하였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 히틀러, 나의 투쟁 중에서"
로스차일드의 사생아로 알려진 아돌프 히틀러 만큼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일당을 잘 묘사한 이는 없다. 허나, 사도회 멤버 비트겐슈타인의 동창생, 아돌프 히틀러 이상으로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를 잘 이해한 이들이 있으니 국유본이다. 상기한 아돌프 히틀러의 발언을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으로 연계시켜 보라. 국유본이 전쟁에서 기대하는 바는 무엇인가. 어느 한 편의 승리가 아니다. 그보다는 전쟁이 오래도록 지속되는 것이다. 그래야 돈을 버니까.
"1919년 2월 국민의회에 의해 바이마르공화국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었고, 독일 국내외에서의 적대세력과 싸우기 위하여 제정(帝政) 군부의 재건에 의한 군비강화에 노력한 결과 우익 제정파의 힘의 증대를 가져왔으며, 1920년 3월 카프 봉기(Kapp Putsch)를 초래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전승국의 과대한 배상요구에 대항하려 하였으나, 영국 ·프랑스의 압박에 굴복하여 베르사유조약을 승인하였다. 이후 조약이행을 충실히 해가면서 그 부담의 경감을 도모하려고 특히 영국과 가까워졌다. 그러나 1925년 임기만료 직전 사망하였다. 정치적 재능은 부족하였으나, 공평한 인물로 부하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http://100.naver.com/100.nhn?docid=110706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에 대해서는 우파보다 좌파가 더 비판적이다. 로자 룩셈부르크를 때려죽인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민주사회당 재단 이름이 로자 룩셈부르크 재단이다.
흥미롭게도 부담 경감을 위해 영국과 친했다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영국=국유본=로스차일드라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결국 에베르트의 역할이란 독일 마지막 황제인 빌헬름 2세를 안전하게 네덜란드로 피신시키고, 패전 독일 뒤처리용으로 나서 승전국 요구에 순응하고, 아돌프 히틀러 정권을 탄생시키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8. 독일 마지막 황제 빌헬름 2세와 1차 세계대전
"107년 만에 '봉인'이 풀린 황제의 밀서. 1902년 당시 독일의 황제 빌헬름 2세(1859~1941)가 대한제국의 독립을 기원하며 고종 황제에게 보내려던 밀서가 처음 공개됐다. 1902년 7월 20일자로 작성된 이 편지엔 빌헬름 2세의 자필 서명과 함께 "(고종) 황제 폐하가 앞으로도 오랫동안 통치해 축복받은 정부가 되길 바란다"는 내용이 담겼다. 편지는 당시 대한제국 주재 독일 영사를 통해 개인적으로 보낸다는 점을 덧붙였다. 비밀리에 전달되는 '밀서'임을 밝힌 것이다. 당시 복잡한 국내외 상황 탓에 밀서는 독일 외교부 정치문서보관소에 100여 년간 봉인돼 있었다. "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3798953
근래 국유본 언론이 빌헬름 2세를 뜬금없이 부각시켰다. 하면, 국유본은 100여 년간 봉인된 문서를 계속 봉인할 일이지 왜 새삼스레 지금 꺼내든 것일까^^!
"보불전쟁 때 프랑스 임시정부 요인들이 엄청난 전쟁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런던 시티 로스차일드를 찾아갔다. 이때 로스차일드에게 언질을 받은 비스마르크가 기획에 따라 프랑스 국채가 휴지가 될 것이라고 선전한다. 미네르바의 원조는 비스마르크^!^ 이때, 주니어스 모건이 휴지가 거의 된 프랑스 국채 5,000만 달러어치를 사들인 게다. 모건 전문가들은 모건의 역사학 공부를 칭찬한다. 모건이 프랑스 역사에 대한 연구를 통해 채무를 이행하지 않은 사례가 한 번도 없었다는 점을 고려했다는 게다. 그러나 이런 연구는 로스차일드의 언질이 없으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게다. 프랑스는 비스마르크에게 패배했지만 외국 돈을 떼어먹지 않는다는 국가적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전쟁 후 액면가에 채권을 사들였다. 패색이 짙은 외국정부의 채권 인수를 감행한 주니어스 모건은 750만 달러라는 거금을 번다. 프랑스는 무엇을 믿고 채권을 사들인 것일까? 보불전쟁이 끝난 후 제임스 로스차일드가 독일에 배상금을 대신 지불한다. 모건은 이 자금을 바탕으로 1873년 공황 이후 전개된 미국 철도시대에서 주역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로스차일드가 이로 인해 얻은 이익은 무엇일까. 이미 나폴레옹3세로부터 얻을 것은 다 얻은 로스차일드이다. 상징적인 예 중 하나가 프랑스가 자랑하는 포도주이다."
http://blog.naver.com/miavenus/70046343147
이전 인월리에서 국유본의 사업 방식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국유본은 어느 한 편이 아니라 양 편을 모두 지원해서 배후에서 조종하는 수법을 취한다고 했다. 하여, 국유본은 교묘한 외교 전략으로 국가들끼리 전쟁을 일으켜서 권력을 집중하고, 국가 내부에서는 전후 정당 정치를 통해서 정당끼리 싸움을 붙여 이익을 극대화한다. 지난 시기에 국유본이 나폴레옹 3세를 어떻게 키워서 잡아먹었는가를 말한 바 있다. 이제 프랑스판 나폴레옹 3세인 빌헬름 2세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1886년 그의 나이 17세가 되던 해에, 당시의 세계를 지배한다는 대영제국의 여왕 빅토리아는 자신의 외손자인 빌헬름 2세에게 생일선물로 아프리카의 최고봉인 킬리만자로를 선물한다. 지금 탄자니아와 케냐의 국경선은 그때 그가 받은 케냐 산의 일부인 킬리만자로를 영국이 독일에게 양도하면서 그려지게 되었다."
http://blog.naver.com/rlagudtjq94?Redirect=Log&logNo=10041892138
빌헬름 2세가 누구인가를 단 한마디로 규정한다면?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자다. 다음으로 빌헬름 2세가 누구인가라고 한다면 일차 세계대전의 전범인 게다. 1차 세계대전의 배경에 대해 여러 요인이 제기된다. 그중 유력한 가설은 영국의 3C정책과 독일의 3B정책의 충돌이다.
영국의 3C정책과 독일의 3B정책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13&dirId=130102&docId=41547663&qb=M0LsoJXssYU=&enc=utf8§ion=kin&rank=2&sort=0&spq=0&pid=f2r%2BUz331zZssa2VL0ossv--322020&sid=S2rx9PLgaksAAEYjIQ8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870∼71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승리한 독일은 유럽의 강자로 급부상한다. 독일 재상 비스마르크는 교묘한 외교술로 프랑스를 고립시켜 대륙을 안정시킨다. 그러나 그가 물러나며 호전적이던 빌헬름 2세가 즉위하자 상황은 돌변했다. 지레 겁을 먹은 프랑스·영국·러시아가 손을 잡고 독일을 고립시킨 것. 이에 독일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동맹을 맺어 고립상태를 타개하려 한다. 이에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그리고 오스만투르크의 이해관계가 교묘하게 얽힌 발칸반도가 화약고로 변한다. 마침내 1914년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세르비아 테러리스트에게 암살되는 사건이 터졌다. 전쟁을 부른 것이다."
http://www.segye.com/Articles/NEWS/CULTURE/Article.asp?aid=20080425001697&subctg1=&subctg2=
하면, 오스트리아 황태자는 세르비아 테러리스트에게 왜 암살되었나.
"이들은 그 당시에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내부의 슬라브인들에게 "자치권"을 줌으로서 그들을 포섭하여 "제국의 영광스러운 구성원"으로서의 신분을 계속 유지하고 싶도록 하려던 "프란츠 페르디난드 황태자"를 암살하여 그가 황제의 보위에 오름으로서 그러한 사태가 벌어짐을 막으려고 하였던 것인데, 이와 같이 "이성적 판단에 바탕 한 '당시의 국제관계에 대한 상황'과 관련한 뚜렷한 계산"도 없이 "무조건 하고 보자" 식으로 일을 한 결과, 결국 그들의 조국 "세르비아 왕국"이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과 전쟁을 벌이게 되는 상황을 가져왔고, 이는 당시의 국제정치적 상황으로 인하여, 마침내 "제1차 세계대전"으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http://kin.naver.com/open100/detail.nhn?d1id=11&dirId=111002&docId=57095&qb=7Z2R7IiY64uo&enc=utf8§ion=kin&rank=2&sort=0&spq=0&pid=f2V4Tg331xCssczHguRssv--270513&sid=S2rx9PLgaksAAEYjIQ8
흑수단 배후에 누가 있었을까. 여러 설이 있으나, 로스차일드의 충직한 하수인이었던 바실 자하로프라는 유태인 전쟁상인을 떠올린다면 무난한 설명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일차세계대전에서 영국군이 쏘는 총알과 독일군이 쏘는 총알, 프랑스군의 총알과 터키군의 총알 모두는 자하로프에게 구입한 것이었다. 영국과 독일의 선박 경쟁도 결국은 바실 자하로프의 농간이라고 보아야 한다. 바실 자하로프는 일차 세계대전 후 한 번 더 대세르비아 떡밥을 던지고 장사하려다가 사전에 들통이 나서 은퇴한다^^!
http://100.naver.com/100.nhn?docid=132101
나폴레옹 3세가 정권을 잡고 십여 년은 제국주의 정책으로 잘 나갔다. 그처럼 빌헬름 2세 역시 1888년부터 빅토리아 여왕이 죽기 전까지인 1901년까지는 국유본이 멍석을 깔아준 만큼 제국주의로 치달았다. 허나, 그 이후는 나폴레옹 3세와 마찬가지로 고립무원의 상태로 치닫는다. 여기에는 사촌인 에드워드 7세가 큰 몫을 했다.
"에드워드는 왕실의 재정을 단단히 챙겼다. 결과 에드워드는 빚 없이 왕위를 계승한 유일한 국왕이 되었다. 그에게는 유태인 재정자문관들이 있었다. 유명한 유태계 은행가인 로트쉴트(Rothschild)가족도 에드워드의 친구였다. 당시에는 영국에서 반유태인 정서가 널리 퍼져 있었다. 에드워드는 유태인들과 친하게 지낸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떠들려면 떠들어라'면서 개의치 않았다... 빅토리아 여왕의 자손들, 그리고 장인이 되는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국왕의 가족들은 유럽의 여러 왕가와 그야말로 거미줄 같은 인척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래서 한집 건너 두 집이 에드워드의 친척이었다. 만났다하면 사촌이고 조카였다. 예를 들면, 독일황제 빌헬름2세, 러시아의 짜르 니콜라스2세, 헤쎄의 에르네스트 루이스 대공, 작세-코부르크 및 고타의 챨스 에드워드 공작은 모두 에드워드의 조카들이었다. 스페인의 빅토리아 유제니아 왕비, 스웨덴의 황태자비인 마가레트, 루마니아의 황태자비인 마리, 그리스의 황태자비인 소피아, 러시아의 황비인 알렉산드라 훼오도로브나는 조카딸들이었다. 노르웨이의 하콘7세 국왕은 조카이지만 나중에는 사위가 되었고 그리스의 게오르게1세 국왕, 덴마크의 프레데릭3세 국왕은 모두 처남들이었다. 벨기에의 알베르1세 국왕, 포르투갈의 마누엘2세 국왕, 불가리아의 짜르 페르디난드, 네덜란드의 빌헬미나 왕비, 브룬스위크-뤼네버그의 공작인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왕자는 모두 사촌이었다. 그래서 에드워드7세는 '유럽의 삼촌'이라는 별명을 들었다."
http://blog.daum.net/johnkchung/6824206
로스차일드의 친구, 에드워드 7세는 영국-프랑스-러시아 삼국협약을 맺어 독일을 고립시켰다.
"중동(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 ·티베트)에 있어서 영국 ·러시아 양국 간의 이해 대립을 조정하고 서로의 세력범위를 확정하였다. 즉 페르시아는 3분하여 북부를 러시아, 남동부를 영국세력범위, 중부를 중립지대로 정하고, 아프가니스탄은 러시아에 대한 공격기지로 하지 않는 조건으로 영국의 세력범위로 하며, 티베트에 있어서 중국의 종주권을 승인하여 내정불간섭(內政不干涉)을 약속하였다. 군사조항은 포함시키지 않았으나 이미 존재하는 러시아 ·프랑스 동맹(1893), 영국-프랑스 협상(1904)과 관련을 맺고 여기에 독일에 대한 포위체제라 할 수 있는 3국 협상을 완성시키는 결과가 되었으며 이것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의 '연합국'으로 발전하게 된다. 또한 이 협약에 앞서 1907년 6월에는 러시아-일본 협약도 성립되어 국제관계에 이제까지의 일본 ·영국 대 러시아 ·프랑스의 긴장은 해소되었다."
http://100.naver.com/100.nhn?docid=113537
이런 힘이 어디서 나오겠는가. 영국 귀족인 로스차일드의 힘, 300인 위원회의 힘, 국유본의 힘 되시겠다. 예서, 미국까지 끌어들이고자 했던 바, 그 기초를 다지기 위해 로스차일드가 모건에게 지시하여 1907년 공황을 일으키고, 이를 빌미로 연방준비은행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빌헬름 2세는 1918년 11월 독일혁명이 일어나자 네덜란드로 망명하였다. 연합국 측은 제 1차 세계대전의 개전 책임을 그에게 물어 네덜란드 정부에 그의 신병 인도를 요구하였으나 거절되었다. 이상한 일이다. 약소국 네덜란드가 무슨 힘이 있다고 연합국의 요구를 거절했을까. 국유본의 힘인 게다. 네덜란드 왕가를 알면, 또 2차 대전 뒤 빅터 로스차일드와 네덜란드 왕자가 빌더버그를 만든 것을 고려하면, 이해가 된다.
해서, 빌헬름 2세와 관련한 교훈은 무엇인가.
하나, 빌헬름 2세는 악역을 맡았던 셈이다. 국유본은 자신의 권력을 확장, 집중하기 위해 그때그때마다 악역을 택한다. 국유본은 악역을 키울 만큼 키운 뒤 포동포동할 때 잡아먹는다. 나폴레옹 3세, 비스마르크, 빌헬름 2세, 히틀러, 스탈린, 김일성, 모택동, 후세인, 빈 라덴 등이다.
둘, 국유본은 유라시아 대륙에서 유서가 깊고, 언제든 세력을 강화시킬 왕조를 반드시 몰락시킨다. 중국, 러시아, 한국, 독일, 이태리, 프랑스가 예이다. 예서, 한국에 의문을 달 수 있다. 허나, 중국 대륙과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으면서도 그 방식이 비록 구차할 수 있으나 오랫동안 독립국가로 유지해온 것은 국유본에게 예사롭지 않은 것이다. 반면 전략적으로 필요하다고 여겨 급조한 일본 왕조나 별 볼 일이 없는 북유럽 왕조 등을 유지시킨다.
셋, 빌헬름 2세의 고종에 대한 친서는 일제의 조선 침략 배후에 국유본이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국유본 로스차일드는 일본을 근대화시켰고 러일전쟁을 지원하고 영일동맹으로 일제의 조선 강점을 지시했던 게다.
9. 중도좌파 박정희 정권과 에베르트 재단
경술국치 이후로 한국과 독일의 인연이 끊겼다가 1955년 재개된다. 허나, 본격적인 교류는 1963년 파독 광부 파견 때부터이다. 1963년 12월 21일 4만 6천명의 치열한 경쟁을 뚫고 선발된 광부 123명이 서독 루르와 아헨 지역의 석탄 광산으로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그 후 1977년까지 서독에 파견한 광부는 7936명이나 됐다. 1960 년대 실업자가 250만 명이나 되고 국민 소득이 100달러도 안 되던 시절 3년 계약으로 독일 탄광으로 일자리를 찾아 나선 광부들은 한 달에 1400-1600 마르크(당시 28만원-32만원)를 받아 방값, 식대를 빼고 1000마르크쯤 손에 쥐었다. 그리고 평균 800마르크를 고국의 가족에게 보냈다.
"백 원장은 박 대통령의 16일간 서독 방문 당시 전담 통역사 겸 경제 고문 자격으로 수행했다. 그는 58년 뉘른베르크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은 흔치 않은 '서독 유학파'였다. 귀국해 중앙대 교수를 하다 발탁돼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참여했다. 대통령의 경제 브레인으로만 15년을 지냈다... 에르하르트 서독 총리를 만난 박 대통령은 "우리나라 광부와 간호사들이 서독에서 힘들게 일하고 있다"며 "군인은 거짓말을 안 하니 나를 믿고 돈 좀 빌려달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사실상 박 대통령이 서독에서 일하고 있던 광부와 간호사들을 담보로 돈을 빌린 모양새였다."
http://blog.daum.net/wcm001/16498591
인월리는 그간 박정희 정권을 중도좌파 정권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하나, 산별노조, 전임자 임금지급 등 오늘날 민주노총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중도좌파 노동자 복지 정책을 전향적으로 취했다. 둘, 식목일 제정, 그린벨트 실시 등으로 역대 그 어떤 대통령도 안 하고, 후퇴시킨 녹색성장 정책을 실시했다. 셋, 의료사회주의 제도를 실시하여 오늘날 전 세계인으로부터 찬사를 받게 했다. 넷, 입시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고교 교육평준화 정책을 실시했다. 다섯, 예술영화를 만드는 이에게 수입쿼터를 주는 방식으로 문화역량을 높였다. 오늘날 노무현 정권이 축소시킨 스크린쿼터제의 기초를 닦았다.
허나, 오늘날 어떠한가. 악질 친일매국노 김지태 일당으로 인해 중도좌파 박정희 선생의 자취를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국유본의 사주를 받은 악질 친일매국노 김지태 일당들 때문이다. 독립군 고문한 일제 헌병 자식들 주제에 탈레반 행세하는 친일매국노 김지태 일당들 때문이다. 백범 김구선생이 무덤에서 운다. 김구선생 이름 팔지 마라. 천벌을 받을 것이다.
냉정하자. 인월리는 중도좌파 박정희 정권이 초반 한국의 트로츠키, 유원식의 경제계획을 구상했지만, 계속 실패했다고 밝힌 바 있다.
"516 직후 진시황으로까지 불린 8기생 유원식 대령은 당대 정책을 좌지우지했던 한국의 트로츠키였습니다. 유원식의 아버지는 유림으로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였지만, 그는 박정희처럼 만주군관학교를 다녔으며, 대학에도 다니는 등 이론적인 면에서도 많은 공부를 했던 인물이었습니다. 해서, 오늘날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계획에 대한 논란이 있는데, 가령 이승만 때 이미 기획했다, 장면 때에 있던 것을 박정희 정권이 베낀 것이다 등등이 많은데, 이런 주장은 무능했던 민주당 정권을 옹호하고, 박정희를 무조건 까대기 위한 근거 없는 주장이라고 보입니다. 그보다는 유원식 작품이다, 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지 않나 싶습니다. 처음 박정희에게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작성하겠다고 했을 때만 해도 박정희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무엇을 하는 것이냐고 물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관해 유원식은 "나는 완전 고용의 꿈을 꾸었다. 경제성장을 하려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고 하였으며, 그해 10월 한국을 방문한 스칼라피노 박사와의 대담에서 스칼라피노가 후진국이 경제성장을 하려면 불균형성장이 불가피하다고 한 데에 대하여 뜻밖에도 균형발전론을 주장했다고 합니다. 해서, 당시 "한국의 군사정부에 사회주의 경제학자가 있더라"라고 스칼라피노 박사가 미 정부에 보고했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http://blog.naver.com/miavenus/70030439320
문제는 돈이었다. 1962년 실패한 화폐개혁을 한 것도 자금 마련 때문이었다. 베네수엘라나 북한처럼 화폐개혁이 성공하려면 결국 외자 도입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던 게다. 하면, 왜 이때 미국은 도와주지 않았을까. 이것이 국유본의 교묘한 수순인 게다.
국유본은 러시아 혁명 때나 중국 혁명, 쿠바 혁명 때에도 유사한 방식을 썼다. 정권을 잡기 전까지는 은밀하게 도와주다가 막상 권력을 잡고 나서는 압력을 가했다. 소비에트 정권은 유럽 국가들의 포위와 백군 반란에 직면해야 했다. 말할 나위없이 이 시기에 경제는 만신창이가 되었다. 하여, 레닌은 혁명보다 경제 건설이 더 어렵다고 하소연한 것이다. 쿠바나 중국도 마찬가지다. 사실상 국유본이 정권을 만들어준 것이나 다름없지만, 막상 혁명이 성공하자, 국유본은 미국 정권에 지시하여 중국, 쿠바 정권을 다방면으로 압박했다. 국유본의 의도는 단순명료했다. 돈의 힘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박정희 정권도 마찬가지였다. 박정희가 정권을 잡을 때까지는 은밀히 지원하던 국유본은 박정희가 정권을 잡고 나니 도움을 주기는 커녕 미국 정권과 국유본 언론을 통해 비판적이었다. 물론 박정희를 일방적으로 내몰 수만도 없으므로 이스라엘 중도좌파 마파이당 정권이 박정희 정권을 세계 최초로 승인했다. 허나, 중요한 건 돈이었다.
국유본의 목표는 한일수교였다. 이를 위해 빌헬름 2세 망명사태와 같은 CIA를 통한 이승만 하야공작을 폈던 것이다. 또한 박정희를 양쪽으로 압박한다. 즉, 한편으로는 한일회담 반대운동을 지원한다. 해서, 강원룡 같은 이는 국유본이 이승만처럼 박정희를 축출할 것으로 여기기도 했다고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금을 대주지 않는다. 완전고용 구상을 하면 무엇하는가. 돈이 없으면 모택동의 대약진운동처럼 참패가 자명하다. 돈줄 끊기면 1960년대 김일성처럼 광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화폐개혁 실패를 목도한 박정희 정권에게 구원의 손길이 온다. 서독이다. 서독은 대한민국 정부에 파독 광부와 간호사 요청을 한다. 한푼의 외화가 아쉬운 박정희 정권은 이내 승낙한다. 마치 오늘날 이라크 파병부대에 한국 병사들이 앞다투어 지원하는 것과 같다. 미국 병사들이 기피하는 이라크 파병부대에 한국 병사들이 지원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생존이다.
예서, 의문을 가져보자. 왜 하필 서독이었을까. 당대 영국, 프랑스 등 수많은 나라가 있음에도 대한민국에 차관을 빌려줄 나라는 미국, 서독, 일본에 불과했던 것일까. 이는 오늘날 국유본의 인수합병 시장과 무관할까. 아무나 돈을 빌려주는 것이 아닌 게다. 기획이 있는 게다.
하고, 왜 미국은 자금을 대주지 않았는가. 당대 미국 정권은 노예민주당 정권이다. 노예민주당이 박정희 정권을 도와주어서는 그림이 안 나온다. 속으로는 도와주지만, 겉으로는 오히려 비판해야 한다. 그것이 노예민주당이다. 이렇게 되면, 박정희 정권은 정권대로 더더욱 노예민주당에 의존하게 되고, 야당은 야당대로 노예민주당 노예를 자청하게 된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국유본은 미국과 일본 대신 서독을 택한 것이다. 왜? 오늘날 FTA와 비교하면 된다. 미국과의 최종적인 FTA 체결 이전에 유럽과 먼저 FTA를 체결하는 것이다. 이때 FTA 반대단체에서 반대하나? 전혀 안 한다. 혹자는 한국과 유럽간의 FTA는 별 영향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리석은 이야기다. 그런 식으로 말하면, 한국과 미국간의 FTA도 별 영향이 없다. 인월리는 간단히 말한다. 기획된 것이다. 시나리오인 게다.
서독광부를 파견하게 하고, 이를 담보로 돈을 꾸고, 이 돈으로 경부고속도로 등 사회간접시설, 인프라를 짓는다. 이 과정에서 국유본은 악질 친일매국노 윤보선과 같은 자들을 내세워 맹렬하게 경부고속도로를 반대하게 한다. 국유본의 지시를 받은 악질 친일매국노 윤보선이 중도좌파 박정희더러 빨갱이라고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국유본은 중도좌파 박정희 정권을 한일수교를 하게끔 다그치는 것이다. 한편 인월리는 역대 중앙정보부장들에 대해서 체게바라와 같은 역할을 하였음을 주장한 바 있다. 즉, 체게바라는 쿠바와 무관한 아르헨티나 출신의 유대인이다. 그런 그가 쿠바혁명에 참가한 것은 국유본과 관계가 깊다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여, 김종필, 이후락, 김형욱, 김재규 등 중도좌파 박정희 정권 때 중앙정보부장을 맡았던 이들은 중도좌파 박정희가 임명한 것이 아니라 국유본이 임명했다고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 중도좌파 박정희의 우군이 아니라 국유본의 지시를 받아 중도좌파 박정희를 감시하는 자들이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중도좌파 박정희를 훈련시킨 국유본은 60년대말 에베르트 재단을 동아시아에 투입시킨다. 1967년 우선적으로 일본에 에베르트 재단을 파견시킨다. 직후 대한민국에도 지부를 만든다. 중도좌파 박정희가 승인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시기 오늘날 여의도연구소 안병직이 후진국경제학회를 서울대에서 결성했다는 점이다. 친일 뉴라이트 안병직이 박정희에 비판적인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인드라는 친일매국수구 민주당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지만, 친일 뉴라이트 안병직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http://nahdoo.nayes.net/zb4pl5/view.php?id=pphl&no=6481
에베르트 재단은 1960년대 말 중도좌파 박정희 정권 때 한국 사무소를 설치하면서 활동을 개시했다.
http://www.fes.or.kr/index_kor/kact/kactivities.htm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다. 중도좌파 박정희 정권 때에 독일 최초로 들어온 재단이 중도우파 아데나워 재단이 아니라 중도좌파 에베르트 재단이다. 세계 최초로 중도좌파 박정희 정권을 승인한 것도 이스라엘 중도좌파 정당 마파이당 정권이었다. 김일성 정권도 박정희 정권의 516사태 소식에 맨 먼저 반응한 것은 남한에 진보정권이 들어섰다고 인식했다는 점이다. 그처럼 독일에서 최초로 들어온 재단이 중도좌파 성향의 에베르트 재단이다. 이러한 중도좌파 박정희 정권에 반대한 것은 악질 친일매국노 윤보선과 같은 친일매국무능 민주당이었던 게다. 이에 대해 중도좌파 박정희 정권은 친일파 재산 환수법 등을 통해 악질친일매국노 김지태 일당의 재산을 환수하는 민족적 자존심을 드높인 쾌거를 보인다. 허나, 이후 국유본은 이를 무효로 하여 악질 친일매국노 김지태 승소 결정을 내린다. 이에 고무된 악질 친일매국노 세력이 연달아 반환소송을 내게하는 동인이 되었던 게다. 이에 국유본은 자칫 자신들의 기획이 들통날까 싶어 다른 친일매국노 소송에 대해서는 패소시킨 게다. 아, 악질 친일매국노 김지태 일당과 그 장학생들. 천벌을 받으라. 지옥에 가리라. 독립군들이 용서를 하지 않을 것이다. 김구선생과 윤봉길 의사, 안중근 의사가 네 놈들 사지를 갈기갈기 사분오열시킬 것이다.
예서, 인월리는 푸에블로호 사건 이후에는 중도좌파 박정희 정권이 이상하게 일이 잘 풀렸다고 했다. 왜인가. 이는 당대 국제정세를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인드라는 김신조의 청와대 공격과 푸에블로호 사건 역시 베트남 전쟁을 지속시키기 위한 성동격서 작전이라고 보고 있다. 한국전쟁 때와 같다. 당시 국유본은 맥아더가 한국전쟁을 속전속결로 끝내지 못하도록 애를 썼다. 그처럼 이 시기 베트남 전쟁 역시 한국군이 일당백이었기에 미군 이백만 명에 달하는 한국군 이만명만 동원한다면 베트남 전쟁을 조기에 끝낼 수 있었다. 허나, 국유본 목적은 베트남전쟁의 승리가 아니었다. 베트남전쟁을 장기화시켜서 무기도 팔아먹고, 냉전체제도 지속하고, 미국 경제를 비롯한 세계경제 성장의 계기를 마련하고자 했던 게다."
http://blog.naver.com/miavenus/70079324465
미국은 국유본의 지시로 김신조의 청와대 공격에도 어떤 논평도 발표하지 않았다. 대신 푸에블로호에 과민하게 대응했다. 김신조의 청와대 공격과 푸에블로호 사건으로 남한은 베트남 추가 파병을 할 수 없었다. 이 결과로 미국은 보다 오래도록 베트남 전쟁을 할 수 있었다. 이 당시 국유본 관심사는 베트남 전쟁의 승리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국유본이 모두 일으킨 일이차 세계대전보다 한국 전쟁보다 베트남 전쟁을 더 오래도록 끄는 것이 유일한 목표였다.
하면, 왜 이때 국유본은 독일 재단을 본격적으로 한국으로 상륙시켰던 것일까.
하나, 대일청구권은 화폐로 지불된 것이 아니다. 기술과 시설투자로 된 것이다. 예서, 왜 국유본은 한일수교를 강제한 것일까. 달러 부족 사태로 야기된 동아시아 방위비 분담 때문이다. 일본은 자력으로 동아시아 방위를 전담할 수 있어야 했다. 국유본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일본은 오늘날 필리핀과 같은 경제상황이었을 게다. 일본은 경제성장을 해야 했다. 엔 블록권이다. 오늘날 중국이 경제성장을 할수록 한국이 혜택을 입는 것처럼 당시 싸구려 상품 따위나 팔던 일본의 입장도 비슷했다. 하여, 한국은 외자 뿐만 아니라 시스템을 갖추어야 했다. 독일 재단이 등장할 수밖에 없었다.
둘, 왜 아데나워 재단이 아니라 에베르트 재단인가. 이전까지 국유본은 남한을 방치했다. 대신 북한을 키웠다. 허나, 박정희 정권 이후로 남한을 유럽의 서독으로 여기게 되었다. 중도좌파 박정희가 혁명에 성공한 후 일갈이 무엇인가. 지금까지의 반공은 반공이 아니었다? 왜일까. 이에 대해서는 인월리는 두 가지 시나리오를 고려하지만 아직 확신할 수 없다. 처음 시나리오는 이렇다. 국유본은 당대 정보통신의 미비로 각국 정치에 대한 자율권을 두었다. 그런 이유로 중도좌파 박정희도 반발할 수 있었다. 그처럼 김일성은 국제공산주의운동에서 스탈린 격하가 이루어지자 재빨리 박헌영 등을 숙청하면서 주체사상을 내세웠다. 국유본 입장에는 괘씸죄인 게다. 해서, 중도좌파 박정희를 키워서 북한보다 잘 사는 남한을 만들었던 게다. 두 번째 시나리오다. 국유본은 전전 독일과 일본의 예처럼 달러 위기 해소와 베트남 전쟁을 위해 의도적으로 김일성 정권을 고립시켰다. 평양 정권의 박헌영 숙청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국유본이 이미 기획한 것이다. 해서, 중도좌파 박정희 정권의 아젠다, 선의의 경쟁 역시 박정희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에베르트 재단 작품이다.
셋, 한국을 키웠다가 다시 왕따를 시키는 국유본의 전략인가. 지금까지 보았듯 국유본은 키우면 죽인다. 박정희 정권 때까지는 승승장구한 한국경제는 1988년 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침체기로 접어든다. 이는 명백히 국유본 전략인 게다. 하면, 인드라가 이를 그냥 두고 볼 수 있겠는가. 아니다. 국유본과 투쟁할 것이다. 국유본의 앞잡이, 친일매국수구세력과 싸울 것이다. 하여, 국유본의 기획을 수정하거나 폐기토록 할 것이다.
10. 묄렌도르프에서 오래된 미래를 읽는다
조선과 독일은 1883년 11월 26일 조선의 전권대사 민영목과 요코하마 독일총영사 자페가 한·독수호통상조약을 체결통상 조약을 체결하면서 외교관계를 맺으면서 시작한다. 헌데, 이는 1883년 11월 경복궁에서 해리 파크스의 주도로 조선과 영국간의 우호, 통상, 항해 조약 조인을 직후이다.
"파크스의 행보에 있어 네 번째로 주목할 사례는 한영 수호조약 체결과 관련된 사항이다. 1882년 4월 4일에 미국의 슈펠트(R. W. Shufeldt) 제독이 한국과 수호통상을 맺자, 영국 정부는 해군 제독 윌리스(R. Willis)를 전권대신으로 파견하여 같은 해인 6월 6일 한미 수호조약과 동일한 조약 원안을 조인하고, 별도 세 항목을 조회형식(照會形式)으로 인정 설명하도록 약정했다... 파크스가 한국과의 통상 교섭이 있던 즈음, 일본에서 함께 근무하였고 당시는 중국에 가 있는 독일 공사 브란트(Herr von Brandt)에게 보낸 서신의 일부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사실은 조약(윌리스에 의한 수호통상조약)이 맺어진 얼마 후인 6월 21일에서 7월 2일 사이, 나는 서울에 있었다. 나는 이곳을 보면서 한국은 정치ㆍ외교적으로는 변방이 위치해 있다는 결론을 단숨에 내렸다. 다시 말해서, 내가 중국과 일본에서 협상을 주도하던 때처럼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될 정도란 말이다: 백성들은 너무 점잖고 조용했다. 질서도 잘 잡혀 있었으며 …… 특히 중국의 영향력이 무척 큰 곳이었다."
http://blog.naver.com/uuuau?Redirect=Log&logNo=40010049992
인월리가 강조했듯 해리 파크스는 토머스 블레이크 글로버와 함께 19세기 동아시아 역사를 주도하며 조선을 일제의 식민지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토머스 글로버는 평범한 무기상일까. 이 시대에 평범한 무기상은 없다. 그는 그야말로 근대 일본에서 종횡무진한 전설적인 인물이다. '라스트 사무라이'의 톰 크루즈조차 울고 갈 정도이다. 왜? 그는 일본인으로 귀화하였고, 그의 아내는 푸치니의 나비부인 모델로 알려졌으며, 그는 일본 유신정권에서 맹활약하는 인물들을 대거 영국에 유학을 보낸 장본인이며, 대표적으로 일본 최초의 철도와 조선소, 그리고 최초의 기린맥주 사장이었으며, 메이지유신 때 국제유태자본의 기획에 따라 해리 파크 공사의 지시를 받아 막부정권을 무너뜨리는 무기를 사츠마 - 조슈번에 지원을 했으며, 무엇보다 대부분의 사업을 이와사키 야타로라는 미쓰비시 창업자에게 넘겼다는 데에 있다."
http://blog.naver.com/miavenus/70040636893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듯, 독일이 조선과 교류할 수 있었던 것은 국유본의 허락을 받은 이후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세창양행(E. Meyer & Co.)은 1883년 조선과 독일의 수교 이후 조선에 진출한 최초의 독일계 상사였다... 해방 이전 주부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독일제 '세창 바늘'은 아무리 오래 써도 부러지지도, 녹슬지도 않는 마술과도 같은 바늘이었다. 1884년 인천에서 독일인이 설립한 세창양행은 바늘, 금계랍, 염료, 석유 등을 앞세워 조선 소비자를 공략했다. 하지만 정작 세창양행의 주요한 수입원은 조선 정부를 상대로 한 대규모 이권 사업이었다... 1886년 세창양행은 자체 자금 2만 파운드를 조선 정부에 차관으로 제공하고, 매년 3만 섬의 세미를 운송할 권리를 획득했다. 관세를 담보로 설정했고, 매년 10%의 이자를 받기로 했으므로 세미 운송권은 말 그대로 덤이었다. 그해 12월 목포항에 집하된 세미가 없어 세 차례나 빈 배로 운항하게 되자, 세창양행은 조선 정부에 손해배상을 청구해 5000원을 받아냈다. 1887년 세창양행은 조선 정부에 연리 12%의 고리로 차관을 제공하고 독일 기선 2척의 구매를 대행했다. 세창양행은 조양호와 창룡호라 명명된 두 기선의 운항 역시 대행했다. 세창양행이 자체 자금으로 사서, 자체적으로 운항한 기선 사업에 조선 정부가 차관을 얻어 명의를 빌려준 셈이었다... 조선 정부를 상대로 한 이권 사업 전체를 놓고 보자면 매년 엄청난 액수의 흑자를 보았다."
http://blog.naver.com/efsofa7/140089203681
당대 상인들이 자본주의 경제가 발달하지 않은 조선에서 장사를 해봐야 별 이문이 남지 않았다. 손해만 보지 않아도 다행이었다. 하면, 역점을 둔 분야는 무엇이었는가. 국책사업이었다. 세창양행의 방식은 당대 국유본 자본의 전형적인 방식과 다를 바가 없다. 가령 동인도회사를 발전적으로 해체한 국유본은 중국에 HSBC와 스탠다드차타드 등의 은행을 운영한다. 이들 은행은 중국 정부에 자금을 빌려주고, 그 자금으로 자신들의 무기나 상품을 구매하게 했다. 이처럼 당대 중국, 조선은 물론이요, 투르크 왕조도 개혁에 적극적이었음에도 왜 나라가 망했는가. 국유본 때문이다. 국유본의 세계 전략상 이들은 망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 국유본은 오직 지정학적인 이유로 일본을 키운 것이다. 일본은 그 대가로 성심껏 국유본을 위한 포르노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인월리가 그간 일본 포르노를 많이 강조한 탓일까. 뚜렷한 증거도 없이 국유본 언론이 한국을 비난한다.
한국은 정욕의 나라 1위
http://polinews.co.kr/viewnews.html?PageKey=0101&num=99135
묄렌도르프는 왜 해리 파크스나 토머스 블레이크 글로버와 다른 길을 가야했을까. 고종은 이미 영국이 일본을 지원하여 조선을 삼킬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허나, 대안이 없었다. 청 역시 이홍장에서 보듯 국유본의 손아귀에서 움직이고 있었을 뿐이다. 여기에 저항한 이가 묄렌도르프였던 것이다. 그는 조선을 위해 투쟁한 인물이다. 이홍장으로서는 청보다 조선을 위해 일하는 묄렌도르프를 해고시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는 재정고문으로 민씨 세력의 지지를 받았으며 당오전(當五錢)을 발행하여 재정문제를 해결할 것을 주장하였다... 일본 주재 러시아 공사 스페이에르와 결탁, 한국에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였다 하여, 외무협판에 재직 중인 1885년, 이홍장의 압력으로 해임되었으며, 한국을 떠나 중국 닝보[寧波]에서 죽었다. 한국 역사에 조예가 깊었고 만주어에 능통하였다."
http://100.naver.com/100.nhn?docid=64099
고종은 묄렌도르프의 노고를 잊지 못했던 것일까. 이후 독일계 러시아인 손탁을 크게 신임한다.
"문헌상으로 고증 가능한 최초의 커피 음용 기록은 고종이 아관파천(1896년) 당시 러시아 공사관에서 커피를 마신 것이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의 처형인 안토니에트 손탁이 만든 양식을 즐겨 먹었고, 러시아 공사관에서 직접 볶은 원두커피에 맛을 들였다. 덕수궁으로 환궁한 뒤에도 정관헌에서 사발로 음미할 정도로 커피를 좋아했다고 한다."
http://news.hankooki.com/lpage/health/200807/h2008071903002684520.htm
당대 독일인과 조선인은 동병상린이었다. 국유본으로부터 선택받지 못하고 지정학적 악역의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는 절망감. 그 절망에서 희망을 찾으려 노력하나 수포로 되돌아가고 마는 것이다. 해서, 진한 커피향이 절망을 달래줄 수 있었을까?
한국관광공사 사장 이참에게 묻는다. 그대는 진심으로 대한민국을 위해 일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아니면, 국유본의 지시를 받아 자신의 삶을 낭비하고 있는 것인가. 진심으로 일을 하시라.
예서, 인월리는 진지하게 여러분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 상황이다. 노선이니, 이념이니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이미 국유본은 조선 침략, 조선 식민지, 조선 분단, 한국 전쟁을 계획했다. 하면, 그대는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왕은 노예들에게 말했다. 돌을 성문 앞까지 운반해도 죽고, 운반하지 않아도 죽는다. 단, 돌을 운반할 때까지는 죽이지 않겠다. 그러자 노예들은 모두 돌을 들고 성문 앞까지 가서 죽었다.
통일은 원하든, 원치 않든 찾아올 것이다. 그대, 그때 무엇을 할 것인가. 어차피 노예이므로 노예의 삶이 편하다고 여길 수 있다. 허나, 1%의 확율로 노예가 아닌 길을 생각한다면, 그대에게는 노예의 삶보다 험난한 길이 닥칠 것이다. 준비되었는가."
중도좌파 박정희와 독일재단, 그리고 독일 대통령 국유본론 2010
2010/02/06 17:57
http://blog.naver.com/miavenus/70079930693
"예언해설가:
안녕하세요. 잠자리에 들면서 문득 2차 대전 바로 직전의 스페인 내전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스페인 내전에서 각국 여러 나라의 지식인들이 파시스트 프랑코에 맞서 사재를 털어 금전적으로 지원하기도 하고, 재력이 없는 지식인들은 직접 참전까지 했다는데... 당시 세계 2차 대전 시나리오를 파악, 우려하던 각국 '지성'들이 괴멸적 파괴를 막고자 한결같은 마음으로 메이저 자본의 속셈을 막기 위해 적극 저항한 대단한 사건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스페인이 파시스트 세력 밑으로 들어가면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고 나서도 큰 걱정이 없습니다. 왼쪽이 튼튼하니, 소련에 총공세를 펼칠 수 있었겠지요. 그렇게 되면 전쟁도 더 오래가고, 미국도 참전 명분과 타이밍을 얻게 되는 것이고.... 그러나 스페인 지역이 파시스트 세력이 아니라면... 지브롤터가 영국소유라는 것을 생각하면, 전쟁은 매우 쉽게 끝납니다. 일단 독일의 전력이 양분되고 스페인 지역의 지브롤터항으로 연합군 상륙...
INDRA:
글 고맙습니다. 해서, 스페인이란 오늘날의 이라크인 셈이다. 국유본은 떡밥을 중시한다. 해서, 빅터 로스차일드의 '케임브리지 링'이 결성 배경으로 설명되는 것이 스페인 내전이기 때문이다. 앤소니 블런트는 간첩 혐의로 심문받던 과정에서 1930년대에 관해 정보요원더러 당신은 1930년대를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라고 말한 바 있다. 마치 인드라와 같은 1980년대 386 운동권의 자존심처럼 보인다. 이처럼 노동자 출신도 아니고, 노동자 생활을 해본 적도 없는 영국 초 엘리트 출신이 왜 운동권이 되었는가에 대한 의문을 현상적으로 스페인 내전에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단지 독재에 반대해서?
이러한 의문은 킴 필비의 활동에서 해소가 된다. 킴 필비는 스페인 내전 당시 스페인에 파견되었다. 하면, 킴 필비는 파시스트에 대항한 활동을 펼쳤던가. 아니다. 당시 킴 필비는 왕당파 파시스트 편에 서 있었다. 이때 빅터 로스차일드 등은 소련에 충성을 서약하는 편지를 보냈다고 하고, 소련은 초엘리트 귀족 자제들의 편지를 의심스러워했다는 것이다. 어찌된 일일까. 인월리 결론은 간단하다. 국제유태자본이 몸통인 게다. 킴 필비 등이 훗날 소련 스파이가 된 것은 스페인 내전 등 파시스트 준동 탓이라고 둘러대었으나, 이를 믿는 이들은 영국에서조차 겉으로 내색하지 않아도 드물지 않나 싶다. 킴 필비는 나중에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10대가 되기 전에 이미'신을 믿지 않는 작은 반제국주의자'가 되었다고 회상했다. 킴 필비의 아버지, 존 필비의 활약상에 대해서는 따로 언급하지 않겠다.
http://blog.naver.com/miavenus/memo/70081661162
인드라는 영화 '랜드 앤 프리덤'에 감동한 사람이다.
http://blog.naver.com/miavenus/60003597931
동시에 스페인 여행 중에 살바도르 달리 미술관을 방문하면서 살바도르 달리가 히틀러와 스탈린 훈장 모두를 거리낌 없이 받아들였던 배경을 이해하려고 노력한 사람이기도 하다.
http://blog.naver.com/miavenus/70016882522
하고, 지난 이차대전 과정에서 국유본과 트로츠키 암살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루즈벨트는 레온 트로츠키의 미국 입국을 불허했다. 유럽에서 트로츠키는 스탈린의 표적이었다. 스페인 인민전선의 내분 http://brainstem.egloos.com/4326805 하지만, 미주지역에서의 트로츠키란 스탈린에게 무의미했다. 트로츠키가 제4인터내셔널을 주창했지만, 유럽에서 가장 세가 있었던 스페인과 프랑스에서 인민전선의 영향으로 위축되었다. 해서, 사실상 트로츠키는 미국 노동자운동 세력에게만 기대하는 처지였다. 하여, 이런 트로츠키를 암살하고자 했다면 스탈린의 의지만으로 부족하다. 카사블랑카 회담 초청을 받고도 불참을 했다. 스탈린은 처칠-루즈벨트 정상회담에 나서기 전에 주변 정리를 했다. 대표적인 것이 코민테른 해산이다. 노골적인 소련 이익을 주장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보다 심각하게 고민한 것이 루즈벨트다. 뉴욕주 귀족 출신으로 노예 남부주 눈치를 볼 수밖에 없던 처지이기에, 그리하여 흑인을 백주에 처형시키는 린치를 반대하는 법안에 루즈벨트는 노예주 편에 섰던 것이다. 뉴딜정책도 오직 남부 노예주 입장만을 대변했었다. 해서, 그의 입장은 멕시코가 다만 잠잠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이 기회를 활용하여 카르데나스가 혁명 조치를 취했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카르데나스는 한국에서 박정희만큼 멕시코 인민에게 존경받는 지도자다. 다만, 이 글은 트로츠키 암살 의혹을 다루는 글이 아니므로 여기까지 하겠다. 중요한 것은 미국은 이차대전 참전 시 주변정리를 할 필요가 있었으며, 멕시코 및 트로츠키를 어떤 방식으로든 조용하게 만들어야 했다는 것이다."
http://blog.naver.com/miavenus/70035805865
스페인 인민전선 정부의 내분
http://brainstem.egloos.com/4326805
"무엇보다 제 4인터내셔널이다. 트로츠키가 주도한 제 4 인터내셔널은 스페인 인민전선정부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공화파 군대의 중핵을 이루던 마르크스주의통일노동자당(POUM)과 무정부주의자들이 점차 소련의 압력에 쉽게 굴복하는 공산당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다. 그들은 레온 트로츠키를 추종했다. 그러나 이들은 잡혀서 스탈린의 고문 등으로 몰락했다. 이처럼 트로츠키는 유럽에서 설 곳을 찾지 못한 채 스탈린의 암살을 피해 결국 북미로 망명해야만 했다. 이로써 스탈린은 트로츠키를 죽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스탈린의 관심은 유럽에서의 트로츠키 영향력을 죽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해서, 이 당시 트로츠키가 만든 제 4인터내셔널 주요 세력은 사실상 미국 노동자운동 세력밖에 없었다. 이때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트로츠키의 미국 입국을 불허했다. 카르데나스가 트로츠키를 받아주었다. 그런데 전쟁을 앞두고 국제유태자본은 본토 안전을 위해 미국과 멕시코의 화해를 추진한다. 그리고 역시 같은 이유로 국제유태자본이 트로츠키를 암살했다고 나는 보고 있다. 물론 이는 비주류적 해석이다. 주류적 해석은 스탈린의 짓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국제유태자본의 짓이라고 보는 것이다. "
http://blog.naver.com/miavenus/70036063626
결론적으로 님의 논리 구성은 나폴레옹 시대에는 적합하다. 실제로 나폴레옹 시대에는 님의 논리 전개대로 되었다. 허나, 20세기 지정학 논리로서는 부족한 면이 있다. 이는 스페인 내전이 국유본의 짝퉁 전개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마치 오늘날 남북 대치 상황을 한국전쟁 직전처럼 묘사하는 것과 같다.
여러 자료에서 보듯, 국유본은 파시스트는 물론이요, 나찌에게도 자원을 지원했으며, 일본에 대해서도 에너지를 공급했다. 또한 국유본은 스탈린을 지원했다. 국유본은 모든 정치세력을 지원했고, 모든 정치세력으로부터 수주를 받아 공장을 돌려 커다란 이익을 취한 것은 물론이요, 정치 권력까지 장악했다.
참고로 흥미로운 일 중 하나가 올림픽위원장이어서 한국과도 관계가 깊던 사마란치다. 사마란치는 스페인 귀족 출신으로 프랑코 정권 때 IOC 위원이 되었고, 체육장관이 되었을 만큼 프랑코로부터 신임을 받는 자였다. 허나, 프랑코가 죽자 공직에서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주소대사로 간다. 그는 1980년 IOC 위원장이 되는데, 소련 브레즈네프 정권의 막후 지원이 절대적이라는 것이 객관적인 평가다. 소련 브레즈네프 정권이 사마란치를 지지한 것은 사마란치가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대회를 거부하는 서방측을 비판한 데서 비롯된다고 알려지고 있다. 여기서 의문은 남는다. 아무리 그래도 소련 브레즈네프 정권이 어떻게 프랑코의 충직한 신하를 믿을 수 있다는 말인가. 해서, 이념의 틀을 벗고서 현실을 마주하면 답이 나온다. 국유본 세상의 이면을 살펴보면 재미있는 일들이 많다."
2010년 이사분기 한국경제 전망 : 도요타 이후는 삼성전자? 국유본론 2010
2010/03/05 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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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발왕 폭살하려 한 이봉창 열사 정신 이어받아
불타는 쪽발산 불량배터리를 쪽발왕 아가리에 쑤셔넣자
쪽발왕과 쪽발왕계, 이 병쉰들이 10초안에 똥 못 싸면 때려죽이자
쪽발노다랑 쪽발차 캠리를 마주보고 달리는 충돌시험시키자
쪽발아베 항문에 불법도용 유니클로 양말 수만큼 쑤셔넣자
쪽발놈현에 온몸으로 항거한 허세욱 열사와 중도좌파 민족주의자 박정희 대통령의 이름으로
쪽발민주당 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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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미친중 반일반북 조국통일 쟁취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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