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비가 아편밀거래한 쪽발이었던 쪽발 김일성(김성주)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1/12/24 0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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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35 : 애비가 아편밀거래한 쪽발이었던 쪽발 김일성(김성주)

국제유태자본 인드라 월드리포트 11/12/24

   

   

1. 한반도 분단은 스탈린, 루즈벨트, 영국, 국유본, 빅터 로스차일드 작품이다

   

   

일반적으로 한반도 분단은 얄타 회담에서 비롯하였다고 말한다. 또한, 미국이 한반도 분단을 시켰다고 생각한다. 허나, 과연 그럴까?

   

"1945년 1월 18일 미 국무부는 「한국의 전후 지위에 관한 정책건의서」를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건의했는데, 이 건의서에서 "한국의 점령이 분할로서가 아니라 단일구역으로 조직되어야한다"고 역설하면서, 한국인들이 자치능력을 배양할 때까지 잠정적으로 한국을 국제 신탁통치나 국제 행정 지배하에 둘 것을 권고했다. 이 건의서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당시만 하더라도 미국은 한반도 전체의 점령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점이다.

   

 1945년 2월 8일, 얄타회담에서 루즈벨트는 스탈린에게 미소 3국이 위임국으로서 20-30년에 걸쳐서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를 실시하자고 제안했다. 스탈린은 신탁통치에 관해서는 대체로 찬성했으나, 신탁기간과 외국군의 주둔에 대해서 이의(異議)를 달았다. 스탈린은 영국을 포함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으며 신탁기간이 짧을수록 더 좋지 않으냐는 것이었고 혹시 외국군대가 한반도에 주둔하게 될 것이냐는 것이었다. 외국군 주둔에 대한 스탈린의 질문은 신탁이 결정되면 외군은 철수하게 될지 그 의중을 떠 본 것이다. 루즈벨트는 스탈린의 이 같은 이의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여기에서 두 가지 의문점이 생긴다. 첫 번째 의문점은 왜 스탈린은 이런 이의를 제기했나? 하는 점이다. 아마도 이때부터 한반도에서 외국군을 가능한 한 신속하게 몰아내고, 이 땅을 소련의 독점적인 영향권으로 묶어두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두 번째 의문점은 왜 루즈벨트는 스탈린의 이의 제기를 수락하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그 당시의 여건을 생각해 본다면, 한국의 자치능력의 결여를 고려한 때문으로 보인다.

   

 얄타회담은 미국의 동북아시아정책에서 큰 분기점을 이루었는데, 그 이유는 전후 동북아시아에 소련의 영향력을 끌어들이게 된 계기를 마련한 중요 회담이었기 때문이다. 미 군부 수뇌부에서 태평양전쟁에서 미군의 사상자 숫자를 줄이고 전쟁을 단축시키기 위해서라도 소련과의 제휴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특히 조지 마셜을 필두로 한 미 육군 수뇌부는 소련군의 대일참전을 적극적으로 권고하였다. 조지 마셜 육군참모총장을 위시한 미 육군수뇌부의 건의를 받아드려, 루즈벨트는 스탈린과의 비밀회담에서 대일전의 참전을 촉구하였고, 그 대가로 노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일본에게 중국과 만주에서 상실했던 구영토를 거의 회복시켜줄 것을 보장했다.

   

 여기에서 간과할 수 없는 점은 루즈벨트의 전후 평화 구상과 대소인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루즈벨트는 전후 국제질서의 기본 틀은 국제연합(유엔)의 결성을 통해 이루어지겠지만, 국제질서의 주요한 역할은 미소 등 4대강국이 세계경찰의 역할을 할 것으로 구상하였다. 이런 루즈벨트의 원대한 구상은 4대강국이 명실상부하게 전쟁에서 승전국으로 위상을 확보하는 것을 전제조건으로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944년말 아시아에서 전쟁의 상황은 루즈벨트가 기대한 만큼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장개석의 국민당 군대는 일본군에 대항해서 싸우기보다는 모택동의 공산당 군대와 내전상태에 더 몰두하여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별다른 전과를 거두지 못했는데, 그 해 가을에 일본군이 대규모 공세인 '1호작전'에서 국민당 군대는 큰 타격을 입었으며, 결국 중국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그렇게 되자 루즈벨트는 중국전선에서 대일전의 전쟁수행 능력에 대한 회의감이 커졌다. 자연히 그는 소련과의 전시 협력관계를 더욱 중시하게 되었으며, 전쟁이 종결된 이후에도 국제질서를 유지하는데 있어서 소련과의 협력체제를 유지하려고 노력했으며, 그것을 위해서 약간의 양보도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다. 루즈벨트는 더 나아가 자신의 개인외교를 통해서 스탈린을 설득하여 전후 세계평화의 동반자로서 함께 일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를수록, 루즈벨트는 국무부의 의견보다는 군부의 조언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이에 따라서 장기적이기 보다는 오히려 단기적인 군사적 목표들이 복합적으로 한국문제 처리와 나아가서 한국분단에까지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미 육군이 태평양전쟁에서 소련의 참전을 권유한 요인이외에도, 루즈벨트 행정부의 핵심부서에서는 이미 친소파내지 친공파의 인맥이 뿌리 깊게 형성되어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1929년 대공황의 발생 덕분에 집권에 성공한 민주당의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1933년 마침내 소련을 승인했다. 루즈벨트 행정부의 초기시절 뉴딜정책을 입안하고 추진했던 소위 많은 뉴딜러들은 소련의 계획경제가 실업문제나 공황을 겪지 않고 믿었기 때문에 소련에 대해서 호감을 가진 경향이 있었다. 1939년 스탈린이 히틀러와 불가침조약을 맺으면서 행정부내의 친소파의 입지가 약화되었지만, 1941년 6월 히틀러의 독일군이 소련을 침공한 뒤, 미국, 영국은 소련과 대동맹을 결성하면서 다시 그들의 영향력은 강화되었다. 그들은 소련과 군사협력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육군을 중심으로 하는 군부 수뇌부에도 친소파의 인맥을 심을 수 있게 되었다.

   

 루즈벨트가 가장 신임한 최측근이며 상공부 장관을 지낸 홉킨스, 국무부내에 국무장관의 특별보좌관이었던 앨저 히스, 1936-38년 사이에 주소대사를 지낸 조셉 데이비스, 미 육군에서 대통령직속기관인 '소비에트 의정서 위원회'(PSPC)의 집행장교인 제임스 번즈 장군 등이 대표적인 친소파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소련에 대한 막대한 무기대여 원조를 지지했으며, 실제로 소련은 미국으로부터 영국 다음으로 많은 무기대여 원조를 얻는 혜택을 누렸다. 또 그들은 "전후에도 소련과 협력이 세계평화에 필수적"이라고 주장하면서 루즈벨트 행정부의 대소유화정책의 형성과정에 많은 영향력을 미쳤다(이주천, 『루즈벨트의 친소정책』).

   

특히 앨저 히스는 정부기관내의 공산주의자 모임인 웨어그룹(Ware Group)의 일원으로서 암약했는데, 챔버스의 고발과 증언으로 위증죄로 구속되었다가, 마침내 90년대이후 베노나 파일과 소련 KGB문서가 공개되면서 반세기만에 소련간첩으로 밝혀진 인물이다. 1942년 1월 2일, 이승만 박사가 국무부를 방문했을 때, 이승만은 앨저 히스를 면담하면서 망명정부의 승인과 무기대여 원조를 촉구하면서 전후 소련이 한반도를 强占할 가능성에 우려를 표명했다. 앨저 히스는 이승만의 대표성을 인정할 수도 없고 따라서 무기대여 지원도 해 줄 수 없으면 한국문제에 대한 해결은 일본의 패망이후로 미루어야한다고 역설했다(박일영 역, 『건국의 내막』, 상). 그러니 미 행정부내에서 얼마나 많은 정보가 소련으로 흘러갔는지 능히 유추해 볼 수 있다.

   

 어쨌든 루즈벨트 행정부가 소련에게 대일전 참전을 권유하였고 이것이 결과적으로 한반도 분단의 비극적 씨앗이 될 줄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미군은 이미 오키나와 상륙작전에서 엄청난 사상자를 내었다(일본군 전사자 24만명, 미군 전사자 1만2,500명). 여기에 미 군부는 얄타회담 직전에 대일전 참전에서 미군사상자의 수치를 50만명에서 100만명까지로 추산했었다. 1944년 필리핀해전에서 처음으로 출격한 일본 항공기들의 가미카제 특공대의 돌격은 미군으로 하여금 공포에 떨게 하기에 족했다. 소련 참전 권유의 주된 이유는 미군부 지도자들은 일본 본토 상륙작전을 수행해야 일본이 항복할 것으로 판단하였고, 그 당시 미군 병력 규모로 보아 일본 본토 상륙작전에 전력 투구해야하므로 한반도에까지 병력을 투입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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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최근에는 1945년 9월 런던외상회의에서 미국과 영국이 소련의 지중해 진출과 훗카이도 지배를 거부한 까닭에 스탈린이 중국 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을 지원하여 한반도 분단이 일어났다는 주장이 있다. 이때, 소련이 북한을 중국 공산당 팔로군의 보급기지와 피신처로 삼았다는 것이다. 해서, 이승만 정읍 발언 이전에 이미 소련이 북한을 포기할 수 없는 지역으로 한반도 분단을 획책했다는 것이다.

   

"1941년 12월 22일 헐(Cordell Hull) 미국무장관은 주중미국대사 고스(Clarence Gauss)에게 '임정'의 실태와 조직, 무력병력의 수와 활동범위, 조선과 만주에 있는 혁명세력과의 관계, 그리고 '임정'에 대한 중국 국민정부의 태도나 그것과의 관계 등을 조사하여 보고하도록 지시했다7). 이 지시에 대해 고스는 1942년 1월 3일 '임정'의 실태와 조직에 관한 유력한 정보는 현재 입수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하면서도, 중국인 부대 속에 소규모의 조선인 무장부대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스스로 외상으로 자칭하는 조소앙(趙素昻)이란 인물이 '임정'을 대표하고 있으며, 혁명적인 조선인 세력과의 관계는 현재 불분명하다고 보고했다. 또한 '임정'은 그 세력은 아직 알려져 있지 않은 온건한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Korean Independence Party)에 의해 지배되고 있으며, 만주의 많은 조선인으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는 좌익적인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 National Revolutionary Party)이 있다고 들었지만, '임정' 속에는 그 기반을 두고 있지 않다고 보고했다8). 나아가 1942년 2월 12일, 고스는 조소앙과의 비공식 인터뷰 내용을 보고했는데, 조소앙이 '임정'에 대한 미국의 승인과 경제적, 군사적 원조를 요구했으며, 조선인은 독립을 위하여 일치해 있으며 '임정'이 조선독립운동의 유일한 대표기구라고 주장했으나, 주로 급진적이며 친공산주의적인 그룹이 포함되어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만주의 조선독립운동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는 대답을 회피하여 그로부터는 '임정'과 그러한 외부 그룹과의 관계에 대해서 무엇 하나 명확한 설명을 얻을 수 없었다고 보고했다9).

   

그런데 미국정부는 '임정'의 주장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1942년 2월 12일 영국주재 미국대사에게 보낸 전문 속에서, 미국무성은 조선의 독립과 전쟁에의 참가에 관심을 갖는 여러 재미 조선인 그룹이 존재하고 있는데, 현시점에서는 어떠한 조선인 조직에 대해서도 일본의 지배에 대항하는 중요한 운동으로 인정한다든가, 또는 장래 조선승인에 관해 언급할 계획이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일본의 지배를 종결시키기 위한 조선인의 노력에는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내용의 일반적인 성명을 발표할 가능성에 대해서는 고려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이런 문제에 대해서 영국정부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조사해서 보고할 것을 지시했다10).

   

2월 28일 영국정부의 견해로서 미국정부에 보고된 내용은, 전쟁발발후 조소앙과 중경에 있는 다른 조선인 조직의 대표들이 영국대사관에도 접촉을 시도한 사실을 알리면서, 그러나 조선인 세력은 분열되어 있으며, 그들의 정치적 견해도 상당히 다르다고 전했다. 또한 만주지역이나 일본에 의해 점령된 중국에서는 효과적인 항일운동의 가능성이 높지만, 조선이나 일본국내에서는 그 가능성이 극히 낮다고 판단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리고 상황이 일본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을 때 적절한 시기의 선언은 좋은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르지만, "현재와 같이 일본의 승리가 계속되는 한, 미영측의 어떠한 종류의 공식적인 선언이나 승인행동도 일본의 지배지역에 있는 조선인들 사이에 효과적인 규모의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고 판단하고, 따라서 민족해방을 목표로 하는 조선인의 노력에 동정의 뜻을 표하는 정도에서 머물러야 하며, 미국무성이 행하는 조선문제에 관한 어떠한 결정에 대해서도 지지한다는 영국 외무성의 의견이 보고되었다11). 즉 통일된 강력한 조선인 항일세력이 존재하지 않는 한, 전황이 일본측에 유리한 현시점에서는 조선인 세력에 대한 연합국의 승인이나 지지는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미국과 영국은 판단하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임정' 승인이나 전투참가 요청은 연합국에 의해 사실상 부정되었는데, '임정'이 승인되지 않았던 배경에는 다른 아시아 식민지 문제가 연관되어 있었다. 1942년 3월 28일 고스는 '식민지 조선'의 문제는 "인도를 포함한 다른 아시아 식민지 민중의 독립에 대한 기대와 완전히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다른 아시아 식민지에 대한 미국의 태도를 표명하지 않은 채, 미국이 조선에 관한 성명을 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주장했다12). 이에 대해 미국무성 당국은 4월 7일, 정보는 대단히 유용했으며 특별한 지시가 없어도 조선문제에 대한 정보 수집활동을 계속할 것을 격려했다13). "

http://kin.naver.com/open100/detail.nhn?d1id=11&dirId=111001&docId=177501

   

미국은 이차대전 중에 CIA조차 없었다. 영국의 지도, 국유본의 지도, 빅터 로스차일드의 지도를 받아 이차대전을 치루었다. 해서, 국유본론은 미국이 이 당시 세계를 주도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 또한, 한반도 분단의 궁극적 책임을 미국 루즈벨트나 소련 스탈린에 두는 견해에 부정적이다. 소련과 스탈린이 국유본 지배하에 있다는 이야기는 따로 장을 할애하여 말할 것이다.

   

전후 CIA를 만든 것도, 한반도 분단을 시킨 것도, 모택동이 중국 내전에서 승리한 것도, 냉전이 시작한 것도, 한국 전쟁을 일으킨 것도 모두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국유본의 기획이다.

   

한국전쟁을 우발적인 내전이라고 보는 수정주의자들, 대표적인 인물로 스칼라피노 같은 인물은 빌더버그, 삼각위원회 회원, 즉, 국유본 인물이다. 한마디로 국유본의 책임을 면피하기 위해 개발한 한국전쟁 원인 논리가 수정주의 논리인 게다.

   

정통론은 소련에 책임을, 수정론은 미국에 책임을 주장하나, 정통론이나 수정론이나 모두 국유본이 만든 논리에 불과하다. 국유본이 한국 분단과 한국 전쟁의 원흉이다.

   

   

2. 왜 국유본은 애비가 아편 밀거래로 떼돈을 벌다 공산주의자에게 총맞아 뒈진 쪽발 김일성을 택했는가

   

   

"국제유태자본이 결국 택한 전략은 냉전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택한 수순은 첫째, 자신들을 숨겨 잠수하는 것입니다. 둘째,  영국 대신 미국을 세계지도국으로 택합니다. 1947년에 CIA가 만들어지고, 트루먼 독트린이 나오며, 케넌 구상이 구체화됩니다. 그러나 여전히 막강한 힘은 MI6과 같은 영국 첩보부에 있다고 합니다. 가끔 미국 CIA 사업이 폭로되는 이유는 영국 첩보부의 견제로 분석됩니다. CIA에 비해 영국 첩보부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습니다. 셋째, 모겐소 계획 대신 마샬 플랜 등으로 일본과 독일을 부흥시키는 것입니다. 또한 미국이 그리스, 터키에 원조를 하면서 왕당파를 적극 지지하여 그리스에 대한 지정학적 점령을 고착화시킵니다. 이후 그리스는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감히 국제유태자본에게 대든 덕분입니다. 넷째, 영국이 물러나는 모양새를 취하면서 이스라엘 건국을 허락하는 것입니다. 다섯째, 마지막으로 냉전을 지속시킬 희생양을 찾아야 했습니다. 제한적인 전쟁. 그것은 바로 한국전쟁이었습니다.  국제유태자본은 한국전쟁을 통해서 선박왕 오아시스를 탄생시킵니다. 그는 이차대전 중 연합군 물자 수송을 도왔던 유태인입니다. 그리스는 매우 가난하면서도 80여개의 선박가문만이 세계적인 부자가 되었는데, 그중 유태인 오아시스가 선박왕이 된 것은 국제유태자본 덕분입니다. 한국전쟁으로 떼돈을 법니다. 오아시스가 국제유태자본에게 암살당했다고 알려진 케네디 미망인과 결혼한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

 http://blog.naver.com/miavenus/70032100543

   

국유본이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을 불신한 이유는 그리스에 있다. 이차대전 직후 그리스에서는 국유본 반대 민족공산주의파들이 득세했다. 이런 까닭에 골머리를 앓던 영국 정보부가 미국 CIA를 승인하면서 최초로 넘긴 사안이 그리스 문제 처리였다. 왜 그리스 민족공산주의자들이 문제인가. 한마디로 그리스를 비롯한 동구 공산주의자들이 소련 외세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이다. 허나, 이는 빅터 로스차일드와 국유본의 냉전체제 기획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일. 분쇄되어야 했기에 그리스 문제가 본보기로 진압되었다. 이후 유화적이었던 각국 민족 공산주의자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이 유럽, 일본, 한국에서 이루어졌다.

   

   

3. 쪽발 김일성의 1950년대 경제발전 신화는 전적으로 국유본 덕분이다

   

자력 갱생? 그따위 신화는 없다. 대표적인 예가 소련과 중국 갈등이다. 갈등의 원인은 중국 경제발전계획에 소련이 지원해주기로 했는데, 소련이 지원해주지 않은 데서 발생했다. 해서, 모택동이 그럼 자본없이 노동력으로 경제발전을 일으키자고 했는데, 그것이 대약진운동이다. 결과는 대재앙. 

   

하여, 중국도 하지 못한 경제 발전을 김일성이 이루었다고 주사돌이들이 주장하는데, 실상은 국유본 원조없이 북한 경제 발전을 이룰 수 없었다는 것.

   

허나, 이러한 경제 발전도 1960년대에 이르러 국유본 지시로 군수산업에 집중하면서 북한 경제는 회복할 도리없이 파탄지경에 이르른다.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34 : 한일연방공화국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1/12/23 21:19

http://blog.naver.com/miavenus/70127209396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34 : 한일연방공화국

국제유태자본 인드라 월드리포트 11/12/23

   

국유본은 근대 이후 아시아를 지배하기 위한 방편으로 일본을 전진기지화했다.

국유본은 일본을 근대화시키고, 메이지유신을 주도했고, 러일전쟁에서 자금을 대주었다.

국유본은 일본이 한국과 중국을 침략하도록 했다.

   

해서, 지금까지 국유본은 쪽발이를 내세워 다음과 같은 전략을 내세웠다.

   

하나, 일본이 싫다. 허나, 한국이 더 싫다.

둘, 북한이 싫다. 허나, 한국이 더 싫다.

셋, 쪽발민주당이 싫다. 허나, 한나라당이 더 싫다.

   

이에 대해 인드라는 국유본에게 다음과 같이 전략 수정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 한국이 싫다. 허나, 일본이 더 싫다.

둘, 한국이 싫다. 허나, 북한이 더 싫다.

셋, 한나라당이 싫다. 허나, 쪽발민주당이 더 싫다.

   

   

인드라는 국유본이 전략 수정할 수 있도록 대안을 끊임없이 제시할 것이다.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33 : 이명박 - 박원순 커넥션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1/12/21 20:10

http://blog.naver.com/miavenus/70127043690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33 : 이명박 - 박원순 커넥션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1/12/21

   

국유본 세상은 불평등한 세상이다. 그나마 있던 권리의 평등조차 점차 사라져가는 세상이다.

   

인드라가 학생이던 삼십여년전만 하더라도 과외가 따로 필요없었다. 교과서와 헌 책방에서 구입한 성문영어와 정석수학 참고서만으로 독학해서 대학 갈 수 있었다. 또, 대학을 가지 않더라도 국가 고시가 있어서 훌륭한 인재가 상류사회로 갈 수 있었다. 애비가 좌파라도 출세하는 세상이었다. 물론 그 시절에도 비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허나, 지금 쪽발이 판사들이 판치는 때보다는 나았다.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보다 나은 세상이 오리라는..

   

신분 귀천없이 인재를 키우는 것이 개인은 물론 공동체를 위한 일인지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루이 14세가 태양왕으로 불린 이유는 두 명의 인재가 그를 도왔기 때문이다. 재정은 콜베르, 군사는 루부아.  루부아는 프랑스 육군 창설자인데, 프랑스 육군을 강화시키고자 당대 획기적인 조치를 내놓는다. 능력만 있으면 평민이라도 최고 책임자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 이전까지는 능력이 있더라도 평민이어서 승진이 제한되었다. 이런 프랑스군 전통 속에서 나폴레옹이란 걸출한 영웅이 출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폴레옹이 프랑스 식민지인 코르시카 출신임에도 그 능력을 보고 발굴하는 시스템이 있었기에 프랑스가 혁명의 혼란 속에서도 외국의 침략을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에는 어떠한가. 쪽발 돼중, 쪽발 놈현 세상이 도래하면서 초등학생까지 학원 교육, 과외를 받는 세상이 되었다. 애들 사교육 때문에 애 낳을 엄두를 내지 못한다는 소리가 엄살이 아닌 것이다. 신분 사회가 고착화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명박도 쪽발 돼중이나 쪽발 놈현과 다르지 않아 실망스럽다.

   

평가가 엄정해야 기강이 바로 세워질 터인데, 평가가 모두 자기 편만 드는 세상이면 망쪼인 게다. 쪽바리 판사 색희가 자기 편이라고 무죄 내리고, 쪽발이 교사가 자기 편이 아니라고 대통령 욕하고, 이러면 나라 꼴이 제대로 돌아가겠는가. 국유본 아시아 넘버원 쪽바리왕만 좋아할 일인 게다.

   

혁명이라도 일어나 쪽발 색희들을 모조리 처단하는 그런 세상이 오길 소망하는 것은 비단 인드라만의 생각뿐일까?

   

"제2의 유대인-차별받는 아시아계

헨리 박은 명문 그로톤 고교의 1998년 졸업생 79명 중 14등의 성적으로 졸업했다. 그는 SAT 수학 과목에서는 800점 만점을, 영어와 합계 점수에서는 1600점 만점에 1560점을 기록했다. 전국 상위 0.25%에 해당하는 점수였다. 그는 바이올린 연주자이고 크로스컨트리 팀 선수로 활동했으며, 급우들과 공저한 수학 논문이 저명한 학술저널에 실리기도 했다. 자녀가 더 나은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 그로톤 고교의 수업료에 허리띠를 졸라매던 근면한 중산층 한국인 이민 가정의 아들로서 헨리는 대학입학사정관들의 관심을 끌 만한 아메리칸 드림의 주인공처럼 보였다.

   

그로톤 고교의 진학 상담교사는 헨리의 성적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헨리가 아이비리그에 합격할 가능성이 희박하다며, 다음 등급 학교에 지원하라고 권했다. 하지만 헨리는 진학 상담교사의 조언을 무시했고 결국 하버드, 예일, 브라운, 컬럼비아, 스탠퍼드, MIT로부터 불합격 통지를 받았다. 그 사이 아이비리그 학교들은 그로톤고 출신 학생 34명을 받아들였는데 브라운은 베스트셀러 작가의 딸을, 하버드는 거액 기부자의 손자를, 컬럼비아는 흑인 지원자를, 스탠퍼드는 대학 이사장인 석유재벌의 딸을 각각 받아들였다.

   

헨리의 어머니 수키 박씨는 "제가 순진했어요. 저는 대학입시에서 당락이 오로지 성적으로만 결정되는 줄 알았습니다"고 말했다.

   

아시아계 미국인은 대학 진학에 있어 제2의 유대인이다. 1950년대 이전 유대인을 배제하기 위해 세워진 동문 특혜와 리더십 같은 입학 기준들이 이제는 아시아계를 거부하는 데 적용된다. 아시아계 미국인은 다른 소수인종들처럼 인종에 따른 특혜도 없고, 백인 상류층이 축적해놓은 부와 가문에서 오는 이익도 누리지 못한다. 입학사정관들 사이에서 아시아계 학생은 수학과 과학과목을 만점 받도록 부모에 의해 조종되는 준로봇이라는 이미지로 고착화됐다.

   

1990년에 발표된 미 교육부의 보고서는 하버드대에서 아시아계 학생이 백인 학생보다 약간 우수한 SAT 점수와 학교 성적에도 불구하고 합격률이'현저하게 낮았다'고 발표했다. 보고서는 1979년에서 1988년 사이 하버드대 입시에서 아시아계는 13.2%, 백인은 17.4%의 합격률을 보였다고 결론지었다. 연방 조사관은 백인과 아시아계의 전반적인 합격률 격차를 비교하며 '백인이 독점하는 동문 입학과 체육특기생 분야에서 특혜가 있었다'고 결론지었다. 아시아계는 전체 하버드 지원자의 15.7%를 차지했지만 동문 자녀군에서는 3.5%, 체육특기생군에서는 4.1%에 불과했다. "

미국 엘리트 양성소 아이비리그의 비밀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POD&mid=sec&sid1=&oid=262&aid=0000002465

   

'고위직 자녀니까' 전력거래소 채용비리

   

"감사원 감사 결과, "수수료 과다 책정…이익으로 복지금 53억 과다출연"

머니투데이 심재현 기자 입력 : 2008.10.01 12:34|조회 : 4498

   

한국전력거래소가 고위공무원 자녀를 신입사원으로 채용하기 위해 전형기준을 임의로 바꾸고 합격자를 불합격처리하는 등 인사비리를 저지른 사실이 드러났다.

   

감사원은 공공기관 감사의 일환으로 한국전력거래소를 감사한 결과, 이 같은 문제점을 적발하고 신입사원 부당채용을 주도한 직원 A씨를 검찰수사 의뢰하고 징계를 요구했다고 1일 밝혔다.

   

감사원에 따르면 A씨는 지난 2006년 대학동문인 교육과학기술부 고위공무원의 딸 B씨를 채용하기 위해 당초 채용계획과 달리 사무직 채용 전공분야에 B씨의 전공을 추가하고 전공점수 만점인 40점을 부여해 서류전형에 합격시켰다.

   

A씨는 또 필기전형 결과 B씨가 응시자 72명 가운데 공동 70위를 기록, 불합격 대상에 포함되자 응시자를 전공별로 분류해 합격자 명단을 새로 작성했다.

   

A씨는 전공별 합격자에서도 B씨의 성적이 합격선에 못 미치자 같은 전공자 가운데 필기시험 1위 응시자를 불합격 처리하고 B씨를 합격시켰다.

   

전력거래소는 이와 함께 같은해 신입사원 채용에서 학력 차별을 하지 않는다고 공고를 내고 실제로는 대학을 등급별로 나눠 차등점수(15~30점)를 부여하는 한편 보훈대상자, 장애인 등 취업보호대상자 27명에게는 가점을 적용하지 않아 부당하게 불합격 처리한 것으로 나타났다." 

 http://blog.naver.com/miavenus/memo/70093241514

   

   

   

"점수조작으로 전교조 교사 특채 파문

   

광주시교육청이 사립학교 교사를 공립 교사로 특별 채용하는 과정에서 성적을 조작해 전교조 교사를 합격시킨 것으로 교육과학기술부 감사 결과 드러났다.

   

교과부는 인사비리 관련 공무원을 검찰에 고발할 방침이어서 수사 결과에 따라 파문이 확산될 전망이다.

   

지난해 11월 취임이후 각종 비리 척결과 공정하고 투명한 정책 추진을 강조해온 전교조 출신의 장휘국 교육감체제의 도덕적 신뢰도에도 상당한 타격이 예상된다.

   

광주시교육청은 지난 2월 1일 '사립중등교사 교육공무원 특별 채용시험' 공고를 내고 3월 1일자로 광주 D여고교사 5명, C중 1명을 공립학교 교사로 임용했다. 이들중 5명은 전교조 소속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최근 교과부 감사에서 합격자 발표 직전 음악 과목 합격자가 뒤바뀐 사실이 확인됐다.

   

당초 음악 과목 합격자는 김모(여)씨였으나 시교육청은 심사위원을 재소집한 뒤 평가표를 재작성, 김씨를 탈락시키고 전교조 소속의 다른 김모 교사를 최종 합격자로 결정한 것으로 드러났다.

   

교과부는 시교육청이 내정자를 정해놓고 특채 절차를 진행했지만 심사위원들과 속칭 '사인'이 맞지 않아 이 같은 일이 벌어진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또 평가표 재작성 행위를 사실상 공문서 조작으로 판단하고 있다.

   

최근 교과부가 시교육청에 대한 감사 기간을 전격 연장한 것도 이 같은 인사 비리 의혹을 적발한 데 따른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교과부 감사반은 관련 공무원을 검찰에 고발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

http://www.mt.co.kr/view/mtview.php?type=1&no=2011121410198291605&outlink=1

   

   

"박원순 딸, 서울미대에서 법대로 성적미달 부정전과 사실확인

   

- 특권이 상식을 이긴다 - (그러나 아직 국회와의 관계에서 자료 안주고 버틴 기관은 없었다.)

   

박원순의 딸 법대 부정전과 사실 확인을 위해서 강용석의원이 요구한 국정감사법에 의한 서울대 편입시험 자료제출 요구에 교무처장이 명단만 제출하고, 편입성적 평가 관련자료 제출을 거부하여 이를 시정하라,는 강의원 요구에도 서울대측이 불응, 이에 대한 서울대교무처장 고발조치가 있었습니다.

   

그 이후 서울대 측에서는 여러 라인을 동원해서 (성적자료 제출을 막기 위해서) 강의원을 회유 설득하고 있습니다.

   

대표적 인사로는 전 국회의장 김모의원(강용석의원 국회제명안 찬반표결 발언시에 성경구절을 인용 - "누가 이 사람에게 돌 던질 수 있느냐?" 라고 강의원 지지발언을 한, 강의원으로서는 특별히 신세 진 사연이 있는 사람)을 비롯해서 동문, 친구, 교수 등 서울대라인을 총동원하여 강의원을 회유 압박하고 있다 합니다.

   

위의 김 전 국회의장님은 "서울대총장과 부총장이 곤란한 입장이니 이 정도 선에서 마무리를 부탁한다"는 등 읍소청탁과 "서울대교수를 적으로 돌리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라",, "이는 모교 서울대를 모욕하기 위해서 고발하는 것과 같으니 절대로 고발은 하지 마라" 는 등.. 협박조 회유 등 수단방법을 총동원하여 강의원에게 호소(?)하고 있다고 강용석의원 블로그에서 자탄!, ..댓글폭주 ...

   

결국 일주 이상 고민 대치 끝에, 주말 강의원 상소심 판결 이후에야 서울대 모 처장을 강의원사무실로 보내어(서울대 고발은 않겠단 조건으로?) 관련 자료 열람하는 선에서 일 단계 진전했다 합니다.

   

가장 깨끗해야 할 상아탑의 상징인 서울대 전체가 이 모양으로 덮기에 바쁘고, 부패원조 박원순과 결탁 연루 되어있음을 반성하기는 커녕, 일부교수의 비리를 덮고 감추기 위해 서울대 동창과 친지들 라인을 총동원하여, 서울대 재직자와 출신들이 강의원을 압박, 입막음 하려 한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시대적 현상입니다.

   

이는 우리 상류사회의 상태가 얼마나 참담하게 썩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며, 우리의 '대한민국 대청소 운동'은 한갓 쓰레기통에다 장미꽃 피우려는 운동이 아닌가 하는 자괴심을 금할 수 없습니다.

   

특히 이번에 강의원이 열람했다는 사정자료에 의하면, 서울미대 등 예체능계에서 법대로의 전과는 역사상 유례가 없다고 합니다.

   

애당초 미대생이 법대로 전과한다는 발상 자체가 일반의 상식을 한참 뛰어 넘습니다. 한편 편입학 성적표를 보면 더 화가 치밉니다.

   

박양이 전과한 2006년도 자료에는 41명이 전과했다는데, 박원순이 딸은 이중 꼴지 41등입니다. (학점 역시 제일 낮음), 더 큰 문제는 불합격자 중에서도 박양보다 훨씬 높은 사람이 대부분이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번에 박원순의 딸이 불법으로 편입했다는 사실은 확실하고, 반드시 그 불법 증빙자료가 만천하에 공개 되어야 하고 이를 사주한 박원순과 서울대측 관련자에게는 공사적 책임을 철저히 물어 처벌해야 한다는 것 입니다

   

이는 법적 차원의 문제 정도가 아닙니다. 사회적 책임감은 더 큽니다.

   

대한민국에서 서울대 그 중에서도 서울법대라는 상징성.., 그리고 서울대의 총체적 자기식구 감싸기 악습도 응징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박원순이는 자칭 "아름다움"의 상징 가장 도덕적 상표를 내 세우며 한국의 만백성을 농락해 왔고, 정계, 학계의 대표적 상징 서울대, 그리고 재벌사회에서부터 사회적 약자라는 최빈층을 아우러르는 모든 층을 철저히 기만 해 온 수퍼데빌 박원순의 모습이 확실한 증거 앞에 드러난 것 입니다....

   

서울역 지하도의 노숙자를 위해 밤에도 서울역을 개방해라 는 슈퍼천사 박원순이 이런 두 얼굴을 하고 최상층으로부터 최바닥층 전부에 대한 천하 무소불위의 다중권력을 휘두르면서 세상을 농락 해 왔다는 이 현실은 참으로 역사적 인물이라 아니 할수 없을 것입니다.

   

노블레스오블리제 정신에서 그런 패륜적 집단은 이 사회에서 철저하게 매장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편 이번에 온 몸을 던져 박원순의 시장 저지에 노력했고, 사후에도 고군분투하고 있는 강용석의 운명은 참으로 기구합니다. 사석에서의 한마디 말 실수로(본인은 거듭 사실이 아니라고 합니다..만) 그의 처지는 지금 참담합니다.

   

기실 그 회식자리에서 한 농담("여자 아나운서가 출세하려면 다 줘야 한다, 그래도 기자 안 하고 아나운서 할래?"), 그 말 자체도 본인은 안 했다 하고, 설사 했다 하더라도 내용을 따져 보면 사실에 입각한 100% 팩트였음을 알수 있습니다.

   

증거 자료가 있습니다.

   

한때 KBS에서는 칼러TV방영 직후, 당시 선두주자로 잘 나가고 있던 정미홍아나운서(현 59세)가 갑자기 사표를 던지고 엔지오 활동으로 전향했습니다. - 이후 사표를 던져야 했던 이유가 바로 '여 아나운서 출세하려면 다 줘야 했기 때문' 이었음이 책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녀가 낸 책들, '자신의 날개로 날 때 아름답다'(현재 절판) 등 저서 3권이 있습니다.

   

책 내용 중에는 방송국내의 분위기들이 설정되어 있었고.., 당시 그녀의 후발주자였던 미모의 신모 아나운서는 이혼남인 상급자 박모씨의 호텔호출에 응락.., 그리고 9시뉴스 앵커우먼이 됐고, 후에 둘은 결혼까지 했던 건 사실입니다. - 이는 세간에 회자되었지요...

   

농담성 발언 하나가 증폭되어 전 언론사(TV 신문 인터넷 등) 들이 작당하여 인간 강용석죽이기에 몰두했고, 국회는 본회의까지 열어서 의원직 박탈 소동에까지 이르러 국회 본회의 소집했던 것이 이 나라의 정치의 단면인 한편,

   

국립대학에서는 힘있는 자들이 작당하여 이념사기꾼의 딸을 서울법대에 편입학시켜 출세시키고, 이를 고발하는 장면에서도, 대학당국이 나서서 감독권을 적극 행사하기는커녕, 사기꾼 한 사람을 비호하기 위해서 온갖 라인을 다 동원해서 무마하려는 것이 대한민국 리딩그룹의 구조이고 현실정서인 것입니다.

   

이런 사실이 의혹이라 할지라도 제일 앞장서서 박원순을 포격하고 서울대를 개혁해야 할 주체인, 한나라당 최고위 전직 국회의장이란 현직 지도자가의 의식구조가 이 정도이니 정치판의 수준에 대해 더 말 해 무엇 하리오!! T,T

   

순하고 아름답게만 보여 온 박원순, 그가 얼마나 위선자 인가, 이번에 명확한 서류증거가 공개되는 동시에, 빨갱이 조국교수 한 사람의 비리인지, 아니면 서울대 총체적 비리인가에 대한 것도 명확히 밝혀내야 할 것입니다.

   

진정한 정의사회, 품위있는 나라, 이 나라 장래를 위해, 이 참에 상류층의 잘못된 행각에 대한 탈법 비리사실을 낱낱이 파헤쳐야 합니다.

   

박원순을 멋모르고 찍은 서울시민에게는, 박원순의 가면을 벗겨서 본 모습을 똑똑히 국민들에게 보여줘서 국민들로 하여금 되돌아 볼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게 우리 모두의 바램입니다.

   

한편 걱정인 것은 강용석의원이 계속해서 국회의원 신분유지가 가능할 것인지... 대법원 판결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그를 도울 방법은 없는지에 대해서도 숙고해야 할 상황인 것 같습니다.

   

관련자료 출처, 강용석 블로그(특권이 상식을 이긴다) : http://blog.naver.com/equity1/

   

"

http://blog.daum.net/zero-can/2376

   

국유본은 똑똑하다. 왜 이런 문제 제기를 하필이면 강용석을 시킬까.

하고, 친일 조중동을 침묵하게 하면서 마이너 언론에서만 슬쩍 언급하는 것일까.

친일 조중동은 박원순 빠돌이인양 이명박 까는 데에만 올인하고~!

   

보르헤스의 불한당들의 세계사에는 톰 카스트로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는 필립 고세

http://en.wikipedia.org/wiki/Philip_Henry_Gosse 의 < 해적질의 역사( The History of Piracy)>를 바탕으로 보르헤스가 재구성한 것인데, 인드라가 이를 다시 재구성한다.

   

톰 카스트로 식 선거 방식이 있었다.  톰 카스트로라는 사기꾼이 가짜 아들 행세를 해서 유산 상속을 받으려 할 때 톰 카스트로가 어떻게 했냐면 가톨릭 교회에 편지를 썼다. 무슨 편지? 톰 카스트로가 사기꾼이라는 편지를 쓴 것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유산 상속을 받으려면 오히려 자신이 사기꾼임을 숨겨야 하는데, 오히려 드러낸다? 왜일까? 답은 당대 영국 종교 대립에 있었다. 톰 카스트로의 편지를 받은 가톨릭 교회 신부는 폭로 글을 언론을 통해 발표했다. 결과는? 당시 영국은 국교회를 비롯한 기독교가 주류여서 가톨릭 신부에 적대적이었다. 가톨릭 신부가 톰 카스트로를 집중 공격하니 다수파 기독교도는 톰 카스트로를 자기 편으로 인식했다는 것이다. 해서, 이후, 어떤 이들이 톰 카스트로더러 가짜 아들이라고 주장해도 당시 영국사회 주류는 톰 카스트로를 감쌌던 것이다. 한마디로 사기꾼은 진영 논리를 잘 이용해먹은 것이다.

   

   

이제 이런 이야기를 해봐도 개그 소재가 되었다. 진실이 더 이상 중요한 세상이 아닌 것이다. 어차피 인터넷에 국유본이 국정원이나 CIA 알바 몇 풀어서 아이디 한 백 개 정도 만들어서 인터넷 여론 만드는 것 누워서 떡먹기다. 인드라가 이런 일을 전혀 안 해서 그렇지, 작정하고 하면 인터넷 주요 사이트 열댓개 정도는 충분히 커버할 수 있다. 인드라 한 명이 이 정도이니 요원 한 열 명 정도만 활동하면서  여기에 동조세력 한 백 명에서 천 명만 규합하면 한국 인터넷 여론 장악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여기서 여러분들이 오해하는 것이 있다.

   

인터넷 댓글로 수꼴이나 홍어이니 하는 용어 쓰는 이들이 실은 한통속이라는 것, 어쩌면 한 인물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즉, 아이디 백 개중 오십개는 한나라당, 오십개는 쪽발민주당용으로 써서 연예인 게시판, 고시 게시판, 팍스넷 주식게시판처럼 정치와는 상관없을 게시판에 주구장창 정치이야기를 해대는 것이다. 아이디 삼천 개 만 개 만들 수 있다. 한국 주민등록번호는 죽은 자도 계속 유효하기에. 이런 죽은 아이디로만 수백, 수천, 수만개 만들 수 있다. 하고, 어느 특정 편을 드는 게 아니다. 그때 그때마다 여론 동향도 체크하면서 국유본에 유리하게 여론을 몰고 가는 것이다.

   

이것이 인터넷 여론만 그렇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결국 친일 조중동이나 쪽발찌라시 한경오프엠도 비슷한 역할인 게다. 위로 올라가면, 명령계통은 하나인 게다.

   

데모하라고 지시하는 자나 데모를 막으라고 지시하는 자나 위로 올라갈수록 결국 국유본인 게다. 허나, 지시받은 이들이 뭘 알겠는가. 노동자들이 알겠는가. 경찰이 알겠는가. 그저 장기판의 졸처럼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국유본 주류 언론의 침묵은 묘하게 지속하고~!

   

추신 : 인드라가 박원순 좋은 점만 보려고 노력하려고 했는데, 근래 박원순이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다. 오죽하면 같은 편들이 박원순을 깔까. 박원순, 인드라도 박원순 깔 생각없다. 그러니 종상향 정책 폐기하고, 살인적인 수도요금 인상안을 철회해라. 이 두 가지만 하면, 인드라가 조용히 지내마~! 어차피 비리 저지르는 애들이 너만 있는 것도 아니고. 너도 먹고 살아야지.

   

박근혜는 김정일 조문을 갈 것인가/환율, 주식시장 전망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1/12/20 04:09

http://blog.naver.com/miavenus/70126902453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32  : 박근혜는 김정일 조문을 갈 것인가/환율, 주식시장 전망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1/12/20

   

김정일이 뒈졌다. 뒈진 건 뒈진 것이고, 축하해야 할 일이지만, 이로 인해 국내외 정치, 경제적인 파급 효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냉정하게 따져보아야 한다.

   

   

   

1. 한미 FTA와 김정일 사망

   

   

   

http://blog.naver.com/miavenus/70124790155

   

인드라는 김정일 사망을 한미 FTA의 제물이라고 요약한 바 있다. 이명박 정부는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은 물론 동남아시아, 유럽, 중동, 아프리카, 남미 등 세계 대부분의 나라와 친교를 맺고 있다. 다른 건 몰라도 이명박 정부는 외교력 하나 만큼은 역대 대통령 중 최고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국유본의 기획 속에서 유엔 사무총장도 한국인인 가운데, G20 의장국이었고, 총선 전에는 핵안보정상회의가 있다. 요즘 외국에 나가 있는 사람들로부터 들려오는 소식은 요즘처럼 한국인이 대우받는 때도 없다고 들었다. 요즘 외국이 오히려 살기 어려워 한국으로의 역이민이 증가 추세라고도 한다. 이건 국유본 덕분이고, 이명박 대통령 덕분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인드라는 이명박을 역대 대통령 중 박정희, 쪽발 돼중에 이어 세번째로 일 잘 한 대통령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외에 이명박이 잘 한 정책은 부동산 정책이다. 수도권은 하향 안정화시키고 지방 부동산은 상향 안정화시켜 격차를 줄인 것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본다.

   

김정일 사망은 정국 최우선 순위를 한미 FTA에서 김정일 사망과 핵위기로 몰아갈 것이다. 국유본 외신도 이 방향이다. 해서, 이 때문에 이명박 레임덕은 없을 것으로 보는 분들이 있다. 인드라는 강조한다. 레임덕이란 없다. 왜?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해서, 쪽발 놈현도 레임덕이 없었던 것이다. 이명박도 마찬가지이다. 어차피 권력은 국유본에게 있기에 레임덕이 없는 것이다. 다만, 김정일 사망으로 인해 지지율이 오를 수 있지만, 바로 그 문제 때문에 국유본이 디도스를 일으켜서 이명박 지지율을 정체 상태로 만든 것이다.

   

허나, 이와 상관없이 이명박은 현재 시민에게 인기가 높다. 남대문 시장이든, 동대문 시장이든, 야구장이든, 축구장이든, 부산이든, 광주이든 친일 조중동이나 쪽발찌라시 한경오프엠 보도와 달리 이명박 인기가 의외로 높은 편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친일 조중동이 이명박 인기를 꺾기 위해서 연일 이명박에 비판적인 것이다. 좋은 뉴스를 내보내지 않고, 나쁜 뉴스만 내보내는 것이다.

   

국유본은 쪽발이들의 질투심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이명박을 외교 천재로 키운 만큼 이명박을 압박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최근 디도스 사태이다. 인드라가 보기에 전세계 디도스, 해킹 사건 배후는 제이 록펠러이다. 해서, 이번 디도스 사건도 국유본이 이명박 물을 먹이려고 만든 조작된 사건인 게다. 이명박이 너무 잘 나가면, 이명박이 국유본 말을 듣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본디 그렇다. 구약에서도 보면, 인간이 배부르면 신을 찾지 않는 것처럼 이명박도 국유본을 찾지 않을 것이다. 해서, 이명박이 집권하고부터 친일 조중동이 연일 이명박을 까대는 것이다. 잘 보면, 친일 조중동이 이명박이 잘 하는 일조차 보도하지 않는 편이다^^! 못 하는 일은 확대 보도하고~! 하고, 친일 조중동은 국유본 지시를 받아서 쪽발민주당 키우느라고 여념이 없다. 요즘은 쪽발통합당에 올인중이다. 친일 조중동이든, 쪽발찌라시 한경오프엠이든, 뉴라이트 네이버, 연합뉴스이든, 78%는 이명박, 한나라당 까대는 뉴스이고, 22%는 쪽발통합당 칭찬하는 뉴스가 요즘 유행이 아니겠는가^^! 이 정도인데도 쪽발통합당 지지율이 고작 10%대인 게다. 해서, 얼마나 인터넷 언론이 믿을 수 없는 것인지를 알 수 있는 게다. 인터넷 여론만 보면, 쪽발통합당 지지율이 90%는 되어야 하는데 말이다. 결국 문국현 식 열 배 뻥튀기 장사인 셈이다.

   

결국 이명박 인기나 한나라당 인기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대로이다. 쪽발통합진보당 지지율도 그대로이다. 단지 한미 FTA가 최우선순위에서 여러 다른 사안 중 하나로 밀려났을 뿐이다. 그렇다고 한미 FTA가 묻히는 건 아니다. 국유본은 지속적으로 한미 FTA가 국유본 언론에서 다루어지기를 원한다. 한미 FTA로 국론 분열되는 만큼 국유본이 이익이니까. 다만, 한미 FTA로 국론 분열을 시켜 적당하게 한나라당이 지지율을 까먹기를 바라고 있을 뿐이다. 국유본은 한나라당과 쪽발통합당 양날개로 움직여야 하니까.

   

   

   

2. 김정일 사망과 총선 대선

   

28일에 장례식이다. 해서, 이번 한 주는 조문 정국이 될 것이다. 조문을 가느냐, 마느냐로 논란이 될 수밖에 없다. 정동영이 가겠다고 분명 말할 것이다. 정동영은 애비가 쪽발이이고, 전두환 뉴스를 보도한 것이 들통이 나서 이를 만회하고자 평양 정권에 올인한 정치인이다. 가령 지난 서울시장 때도 보면, 박원순에 비판적이고, 소극적이었는데, 평양에서 박원순 지지하니 막판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평양 정권 영향력이 통하는 층이 현재 정동영 지지층이다. 해서, 정동영은 적극 가겠다고 할 것이다. 명분이야 충분하니까.

   

이런 이유로 박근혜와 안철수가 아웃될 수 있다고 보시는 분들이 있는 것 같다.

   

그렇지 않다. 선거는 중도가 이기는 것이다. 과격하면 선거에 이기는 기획이 아니다. 쪽발 놈현 예가 있지 않냐 하지만, 그건 교묘하게 국유본이 기획한 것이어서 쪽발 놈현 이미지를 과격하게 만든 것이지, 실제 쪽발 놈현이 과격한 노선이 아니다. 과격한 노선이 초장부터 삼성전자랑 손잡고 진대제를 장관시켜주겠나 ㅎㅎㅎ. 또, FTA 추진단장으로 김종훈보다 더 악랄했던 김현종을 왜 임명했겠나. 김현종, 지금 삼성에 있다^^! ㅋㅋㅋ 이제 쪽발 놈현 신화에서 제발 좀 벗어나자~! 실제로는 쪽발 놈현도 중도노선이어서 현재 이명박과 거의 다를 바 없는 노선이었는데, 이 노선을 은폐하고자 이미지 정치를 시도한 것일 뿐이다. 이 대목에서 인드라가 말한다. 사실 한나라당부터 쪽발통합당 등 대부분 정당 노선 차이가 없다고 보면 된다. 몇 가지 이슈가 차이가 있는 건, 차이가 있게 보이라고 국유본이 마련한 장치일 뿐이다. 핵심적인 건 다 같다. 해서, 중요한 건 지들끼리 몰래 다 통과시킨다 ㅋㅋㅋ

   

본론만 간단히 말하자. 조문 정국으로 유권자가 달리 생각하나? 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조문 정국에서 강성 정치인과 온건 정치인이 구분하는 계기를 만들 것이다. 즉, 한나라당을 지지하더라도 김정일 조문을 할 수도 있다, 라고 하는 층도 있기 마련이고, 쪽발통합당을 지지하더라도 김정일 조문까지는 너무한 것 아니냐, 하지 말자, 라는 층도 있기 마련이다.

   

결국 이 문제는 양당의 집토끼와 산토끼를 분열시키는 당 내부 문제가 되는 것이지, 한나라당과 쪽발통합당간의 대결 노선으로 가지는 않을 것이다.

   

하면, 이때 한나라당과 쪽발통합당에서 강성파가 유리할까, 온건파가 유리할까.

   

여러분 생각은 어떠한가? 강성파가 유리할 것이라고? 아니다. 정반대가 될 것이다. 온건파가 될 것이다.

   

한나라당 온건파는 김정일 사망으로 인해 한반도 평화통일을 앞당기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라고 평가하면서도 한반도 평화를 위해서는 북을 자극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라는 의견이 주류를 형성할 것이다. 즉, 쪽발통합당에서 북 조문가겠다고 하면 막지는 않겠다, 라는 식으로 나올 것이란 점이다. 이때, 이명박은 틀림없이 쪽발통합당에서 북 조문 가는 것을 막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남쪽에서 누군가는 가서 조문하는 것도 국익을 위한 일이다, 라는 중도적인 발언을 할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대북 문제에 지속적으로 이런 태도를 견지해왔으니까 말이다.

   

이때, 전격적으로 박근혜가 북 특사로 조문을 간다, 이러면 어찌 되나? 그러면, 박근혜가 이를 계기로 다시 한 번 차기 대통령으로 부상할 기회를 얻을 것이다. 허나, 이도 저도 아니고 그러면 박근혜는 마지막 기회를 잡지 못한 채 아웃될 것으로 본다.

   

인드라 생각하기에 박근혜는 북 조문을 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반공투사였던 닉슨 예를 떠올리면 된다. 닉슨이 케네디에게 패한 후 8년간 정치 낭인 신세였다. 아무도 그를 차기 대통령 후보로 보지 않았다. 헌데, 갑자기 닉슨이 대통령이 되었다. 누구의 힘? 국유본 힘. 하고, 닉슨은 놀라운 변신을 했던 것이다. 월맹군 지도부와 만나고, 중국을 전격 방문한다. 이 모든 것이 국유본 기획이었다. 이를 통해, 노예민주당이 극좌로 치닫을 때, 노예민주당원도 지지하는 닉슨 팬클럽을 만들어 중도층을 견인했던 것이다. 

   

박근혜가 끝난 줄 알았다. 허나, 마지막 기회는 있었던 것이다. 이번 기회를 박근혜가 살리지 못한다면, 한나라당 후보로도 못 나설 가능성이 크다. 북 조문을 과감하게 결정하여 통일 화합 대통령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 마지막 기회라고 본다. 과연 국유본이 박근혜 방북을 허락할 것인지 귀추가 주목이 된다.

   

반면, 쪽발통합당에서는 안철수가 위기일 수 있다. 허나, 안철수는 현재까지 정치인이 아니기에 조문 정국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안 가고 조용히 있으면 되니까^^! 국유본은 안철수더러 조문정국에서는 조신하게 지내라고 지시할 것 같다. 오히려 인드라가 볼 때, 안철수는 중도층을 노리고, 조문을 가지 않을 것으로 본다. 만일 안철수가 북 조문을 간다면, 실책이 될 것으로 본다.

   

문제는 정동영과 김문수, 정몽준과 김두관인데. 이들은 가든, 안 가든, 인드라가 보기에 강성 이미지가 박혀서 어려울 것으로 본다. 정리하면, 인드라가 보기에는 김정일 사망이 박근혜와 안철수에게는 기회이며, 반대로 정동영, 김문수, 김두관 등은 위기라고 본다. 정몽준이야 어차피 대통령 후보인 척하는 한반도 넘버원이니 이 기회에 북 조문을 다녀오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이렇게 되면, 박근혜도 조문을 가서 보수파 비판을 받을 터인데 이를 완화시켜주는 효과가 있다.

   

해서, 정몽준 조문이 중요할 수 있다. 정몽준이 북 조문을 가면 박근혜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고, 가지 않는다면 박근혜 힘을 빼게 되는 것이다. 박근혜가 조문을 간다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마지막으로 국유본 노림수는 한편으로 쪽발통합당을 키우면서 이명박을 길들이듯 다른 한편으로 민노당 지분을 축소시키는데 활용할 것이다. 실제로 김정일이 뒈짐으로 인해 종북 논란이 다시 일어나면서 민노당 지분이 상당 부분 약화할 것으로 보인다.

   

   

3. 김정일 사망과 환율과 주식시장

   

   

   

   

3개월 리보나 테드 스프레드는 꾸준히 오르고 있다. 강달러임을 시사한다. 뽀그리 사망이 중요 뉴스인데, 이는 국유본이 이란, 북한, 시리아를 악의 축으로 기획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국유본이 뽀그리를 아웃시킨 만큼 이번에도 단단히 빼먹을 것이란 예상을 할 수 있다. 바로 이런 것 때문에 그간 국유본이 뽀그리한테 미사일 자금도 주고, 기술도 주고 그랬던 것이다^^!

   

   

   

하면, 여기서 관건은 크게 해먹을 것인가, 적당히 먹을 것인가인데, 현재로서는 적당히 먹는 쪽이 아닐까싶다. 다만, 국유본이 적당히 먹는다 쳐도 한국 환율과 주식시장이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다. 장례식이 있는 28일까지는 어렵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즉, 올해 말까지는 풋 포지션 관점으로 가는 것이 일단 정석이 아닌가 볼 수 있는 것이다. 단, 풋장에 콜대박이 있고, 콜장에 풋대박이 있다는 말이 있듯이 올해 말에 한번쯤은 콜을 주면서 풋으로 가지 않겠나 이렇게 본다.

   

환율을 보자.

   

한국만 보면, 국유본적 세계시장 흐름을 놓칠 우려가 있다. 해서, 이런 시기일수록 오히려 브릭스 환율 차트와 비교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브라질

   

   

   

러시아

   

   

   

   

멕시코

   

터키

   

   

인도

   

인도네시아

   

중국

   

북한

   

   

대한민국

   

   

   

NDF 시장을 통해 본 러시아, 인도, 인도네시아, 터키, 멕시코, 중국, 북한, 대한민국 환율 차트이다.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첫째, 브릭스 등 한국과 유사한 단계에 있는 나라들 상당수가 거래량을 수반하면서 환율이 일제히 급등하는 모양새이다.

   

둘째, 그럼에도 핵위기 위협 대상국인 중국과 북한 차트를 보면, 안정적이다^^!

   

셋째, 결국 지금 한국 환율이 오르는 것은, 엄밀하게 보면, 김정일이 뒈졌기 때문이 아니라 국유본이 이머징마켓 환율을 일시적으로 높여 현 수준에서의 강달러를 유지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머징마켓을 그냥 누를 수는 없으니까 국유본이 러시아 부정선거이니, 파키스탄 오폭 사건이니, 이란 미군기 격추이니 하면서 환율 상승 빌미를 기획한 것일 뿐인 게다.

   

하면, 사태는 금방 완화하나?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적당한 선에서 우려먹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것은 일차로 올 연말 장례식 때까지이며, 이차는 구정인 1월 22~24일까지, 삼차는 1분기가 끝나는 3월말 총선 전까지로 구분할 수 있다.

   

이때, 일차는 위기요, 이차는 재차 위기를 줄 듯싶고, 마지막으로 삼차에서는 핵위기가 그저 쇼로 끝나는 모양을 보여줄 듯싶다. 즉, 지금은 한나라당에 굉장히 유리한 것 같지만, 총선까지 삼개월이 남았으므로 천암함 사태처럼 별 볼 일이 없을 것이다. 북풍은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 오히려 박근혜가 북 조문을 간다면 북풍이 일겠지만 말이다.

   

하여간 특별한 일이 없다면, 1,150원대라고 말했는데, 인드라가 말하자마자 사건이 터졌으니, 현 시점에서 보자면, 1,150원대에서 1,199원대 가두리권이 될 것으로 전망할 수 있는 것이다.

   

핵위기 운운해도 중국돈도 그렇고, 북한돈도 안정적인데, 유독 한국돈만 난리굿을 치면 너무 조작냄새가 짙기 때문에 국유본이 급격히 폭등시키는 작전을 구사하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31 : 축! 뽀그리 김정일 뒈졌다!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1/12/20 00:28

http://blog.naver.com/miavenus/70126894451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31 : 축! 뽀그리 김정일 뒈졌다!

국제유태자본 인드라 월드리포트 11/12/20

   

1. 김정일의 사망 시점

   

"오늘은 이 정도로 한다. 마지막으로 쪽발이 매국노 판사들이 왜 요즘 지랄을 하고, 국유본 언론이 쪽발이 매국노 판사 보도를 최우선으로 하는지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겠다. 

   

국유본은 영미처럼 한국도 국민참여재판을 추진하려고 한다. 이를 위해서 내놓는 방식이 바로 판사들의 정치적 발언을 강화시키는 것이다. 이것 모두 영미법대로 가려고 하는 국유본의 공작이다. 판사들더러 노숙자될래, 매국노가 되어 FTA 반대 발언할래? 강요해서 정치적 논란을 야기시키면, 이후 누가 판사 판결을 공정하게 보겠는가. 아무도 공정하게 보지 않을 것이다. 쪽발 매국노 무리에게는 무조건 무죄, 국유본과 맞싸우는 투사들에게는 무조건 유죄를 때릴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양상을 극단화시키면 국민 정서가 둘로 분열할 것이고, 예서, 그럼 판사들을 믿지 말고, 시민을 내세우자는 여론이 등장할 것이다. 해서, 자연스럽게 배심원제를 정착시키겠다는 것이다. 하면, 왜 국유본은 배심원제를 원하는가. 그것이 훨씬 비용을 절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애국심에 충만한 판사들이 여전히 다수다. 반면 우리하나파쇼법 연구회 쪽발매국 뉴라이트 FTA 반대 국유본 판사들은 소수다. 이들 국유본 판사만으로는 곤란하니 국유본이 배심원제를 강화시키려 하는 것이다. 로스쿨 제도도 국유본 역점 추진사업인 게다. 국유본은 궁극적으로 민족, 민중, 인류를 위해 일하는 의인을 만들어내는 국가 고시제도를 없애려하는 것이 목표인 게다. 

   

국민 여러분! 쪽발 매국노, 이완용만도 못한 국유본 판사들에게 한마디씩 합시다. 이 구족을 멸할 개씨발 색희들아. 니 쪽발이 애비 색희가 그렇게 가르치든? 이 사이코패스 개씨발색희들아.

   

하면, 이런 대목에서 여러분은 인드라가 왜 국유본 판사에게 감정적인가를 반문할 것이다. 국유본이 국유본 판사에게 힘을 실어줄 수 있는 것이지, 왜 그리 흥분하나~! 인드라여~? 하고 말이다. 이것이 인드라와 국유본의 게임인 게다.

   

국유본이여! 국유본이 원하는 만큼 놀아주겠다.

   

한반도 평화통일은 2012년에 가능한가? 쪽발 뽀그리 처형은 내년으로 미룰 셈인가?

   

국유본이여! 인드라에게 계획이 있다!

   

인드라를 지지하라!

   

혁명의 불꽃을 점화시키겠다.

   

조건은 쪽발놈현, 쪽발돼중, 쪽발뽀그리처럼, 영어 원어민 교육 찬성하는 개씨발색희들처럼, 한반도 평화와 통일, 경제발전과 사회복지에 방해가 되는 적들을 모두 쓸어버려라!"

http://blog.naver.com/miavenus/70126006255

   

인드라가 상기한 인월리를 쓴 날짜는 2011년 12월 8일 오전 11시경이다.

   

   

   

5일 후 북에서 인터넷 접속을 했다.

   

인드라 블로그에는 가끔 이상한 곳에서 접속하는 경우가 있다.

   

   

   

   

언젠가는 해적 표시인지 해골종단 표시인지 모를 해골이 그려진 것도 있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해골 표시는 사라졌다.

   

현재까지 김정일 사망 시점에 대해서는 어떠한 정보도 지니고 있지 않다.

   

다만, 현재 인드라가 추정하는 바는 세 가지다.

   

하나, 진짜 김정일은 예전에 죽었고, 지금까지 있던 김정일은 대역 김정일이다. 세계 최대 우라늄 광산을 개발하는 북한 광산회사가 영국 귀금속거래소에 상장해서 60억불인가를 자금 조달했는데 이 시기 전후로 해서 국유본이 김정일을 정리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둘, 진짜 김정일이 최근까지 살아 있었다가 2011년 12월 13일 혹은 2011년 12월 12일에 죽었다. 국유본이 인드라에게 김정일이 죽었음을 간접적으로 전달한 것이다라고 추정할 수 있다.  

   

셋, 뉴스에 보도한 대로 17일 오전 8시 30분에 죽었다. 발표가 어제인 것은 12월 19일 오전 9시 10분경 인월리서 뽀그리 처형을 내년으로 미룰 것이냐고 인드라가 독촉해서일까하고 추정할 수 있다.

   

"화폐란 미래 가치이다. 만일 인류가 달을 개발할 수 있다면, 달 자원 개발 만큼이나 화폐는 늘어날 것이다. 그처럼 인류가 빠른 시일내에 뽀그리와 쪽발 정은을 처형하고 한반도 통일을 이루는 인류사적 쾌거를 이룬다면 화폐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

   

화폐란 희망이다."

http://blog.naver.com/miavenus/70126825688

   

허나, 모든 것은 알 수 없는 것이다. 국유본이 인드라 시나리오를 채택했건, 아니면 인드라에게 어떤 직관적인 힘이 있어서 과거에도 그랬듯 중요한 인물이 뒈질 징조를 안다는 것이든 중요한 건 앞으로도 진실이 밝혀지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2. 국유본은 김정일 뒈진 것으로 무엇을 노리고 있는가 

   

"

   

   

김정일/김정은 처형이 한미 FTA 성사를 위한 첫걸음이다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1/08/10

   

   

김종화 :

선생님. 김정은이 국유본 지시를 받아 연평도에서 포사격을 한 모양인데요? 이번 의도는 무엇인가요?

   

인드라 :

초점은 한미 FTA입니다. 투 트랙 전술 중 하나입니다. 하나는 이미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쪽발이매국수구반동좀비버스세력을 한진중공업에 올인시켜서 이 동력으로 국회에서 공중분양 해머치기 쌩쇼를 벌이는 것입니다. 이 장면을 생중계해서 미국 시청자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국유본 입장은 표결로 평화적으로 한미 FTA가 통과시키는 것이 목표가 아닙니다. 한쪽은 날치기하고 다른 쪽은 노르웨이 테러범처럼 선혈이 낭자할 만큼 미국 프로레슬링쇼보다 더 코믹하고 잔인하게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래야 이 장면을 본 미국인이 저리 한국인이 반대하는 걸 보면 오바마가 일을 잘 하는구나, 모처럼 미국을 위해서 일을 했네 이런 생각을 할 것입니다. 미국에서 FTA를 반대하는 국유본 반대 보수세력이나 노조세력을 왕따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한 트랙은 한국인이 절실하게 한미 FTA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러자면 주변국과의 충돌을 자꾸 일으키는 것이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외교적 고립이 있는 양 하는 것이지요. 해서, 국유본이 반기문을 애매한 시기에 일본 방문하게 만들고, 일본더러 독도 문제를 제기하라고 지시하고, 한국더러 일본에 강하게 반응하라고 주문하는 것입니다. 덩달아 놈정일이 색희도 독도 문제를 언급하고 나서잖아요? 국유본 지시를 받아서 그래요.

   

허나, 이것만으로는 안 된다고 여겼나 봅니다. 인드라가 이 문제에 대해서 일본 공산당을 언급하면서 국가 대 국가 문제가 아닌 계급 문제, 게급 문제에 FTA를 위한 국유본 공작으로 몰고가자 이에 당황하여 연평도까지 나오게 한 것이지요. 방식은 같습니다.

   

일본 대지진으로 한국인이 일본에 성금 보내주는 시점을 노려서 일본더러 독도 문제를 제기하라고 국유본이 지시한 것처럼 북한 수해로 한국인이 북한에 물자를 보내주는 시점을 노려서 평양정권더러 연평도 이슈를 터트릴 것을 국유본이 지시한 것입니다.

   

동시에 국유본은 미국과 영국 정부를 내세워 일본 편인양 동해 문제를 거론하고, 북미대화를 하는 것입니다.

   

양측을 격렬하게 싸우게 만든 뒤 중간에서 이익을 취한다는 수법이죠.

   

한국인들이 뭐라 생각하겠습니까. 싫어도 미국이 일본이나 북한에 더 가깝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한미 FTA를 성사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확율적으로 쪽발이매국수구반동좀비버스세력에 쏠린 소수는 그러니까 더더욱 더 한미 FTA를 반대해야 한다고 여기겠지만, 바로 이런 것까지 계산에 넣은 것이 국유본입니다.

   

김종화 :

그렇다면, 저놈들이 한미 FTA를 통과시켜주면 동해를 동해로 하는 것인지요? 연평도 문제도 평화적으로 풀리는 것인지요.

   

인드라 :

엄밀히 말하면 관계가 없습니다. 어차피 한미 FTA만 성사시키면 국유본은 당분간 상기한 문제를 덮어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건도 안 일으키고, 다른 사건으로 물타기를 할 것이고, 국유본 언론도 조용할 것입니다. 허나, 사안은 그대로이죠. 때가 되면 다시 써먹기 위해서요. 해서, 상기한 문제 때문에 한미 FTA를 성사시킨다, 안 한다 따위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http://blog.naver.com/miavenus/70115707790

   

   

3. 김평일 시나리오 가능한가?

   

"통일 시대 지도자는 잘 생기고, 똑똑해야 한다. 김일성은 잘 생겼고, 박정희는 똑똑했다. 김정일과 이명박은 똑똑했고, 정동영, 박근혜는 잘 생겼다. 경제난국 시대이므로 시대는 똑똑한 사람을 택했다. 다시 평화롭고 경제번영의 시대가 오면 잘 생긴 사람이 지도자가 될 확률이 높다. 허나, 통일 시대 지도자는 잘 생기고, 똑똑해야 한다. 어느 하나만 잘 나서는 통일이 어려운 게다. "

http://blog.naver.com/miavenus/70095841271

   

선생님은 김정일에 대해서는 똑똑하지만 못 생겼다고 하고, 김정은에 관해서는 잘 생겼지만 찌질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때에 김평일은 어떤 변수가 되지 않을까요?

   

인드라 :

좋은 질문입니다. 김평일은 '한국의 고르바초프'로 한반도 통일에 결정적인 기여를 할 큰 인물입니다.

   

   

   

하나, 김평일은 잘 생기고, 똑똑한 인물입니다. 김일성을 닮아 잘 생겼다는 평가가 일반적입니다. 문제는 똑똑한가인데요. 똑똑합니다. 예를 들면, 김정남은 찌질이죠. 그 어느 누가 오늘날 김정남을 차기 북한 지도자라고 여길 수 있겠습니까. 그 아무리 김정은이 패악 짓거리를 벌일지라도 그 대안이 김정남이면 차라리 김정은이 낫다는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해서, 김정남처럼 하지 않았다는 것만 보더라도 김평일은 똑똑합니다. 이외에 김일성이 군을 평일에게 맡긴다고 하는 구상에서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지도력이 있다는 이야기죠. 김일성이 누굽니까. 빨치산 대장 이력이 있잖아요. 이런 걸 잘 고려해야 합니다. 김정일이 근래 국방위원장을 하며 군 우위 정치를 하는 이유에는 김평일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김정일에 비해서는 덜 똑똑하지 않느냐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영화 '포화속으로'나 영화 '애너미 앳 더 게이트', 혹은 영화 '닥터 지바고'를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현실 사회주의 군제도에는 독특한 점이 있는데, 지휘계통이 둘로 나뉜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군 지휘계통인데, 다른 하나는 당 지휘계통이라는 것입니다. 이들 차이는 영화 '닥터 지바고'에서 극명하게 차이를 보여주는데요. 한마디로 군 지휘계통 장교가 그 아무리 작전을 훌륭하게 수행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더라도 당성이 부족하거나 당성을 위배하면 전쟁 후에 반동분자로 내몰린다는 것입니다.

   

이때, 당성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무엇입니까. 국유본이죠. 국유본에 충성하는 정치력이 최우선이라는 것입니다. 능력은 그 다음입니다. 해서, 국유본이 김평일을 재평가한다면, 당연 김평일은 김정일보다 똑똑한 인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을 전제하고, 인드라가 김평일 지도력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니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현재 국유본이 한반도 통일을 결정할 때, 고심거리 중 하나가 김정일 정권이 붕괴하였을 때, 북한의 무정부 상황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현재는 김정일, 김정은이 국유본 지시에 따라 북한 사회를 잘 통제하고 있으나, 김정일 정권이 붕괴한다면 국유본으로서는 대안을 모색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국유본이 신뢰할만한 지도자를 내세워서 통제 가능한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김평일은 훌륭한 히든카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잘 생겼으나 찌질한 김정은, 못 생겼는데 찌질하기까지 한 김정남, 못 생겼는데 똑똑한 장성택 모두가 북한 주민에게는 마땅치 못한 지도자들입니다. 이때 김평일이 등장한다면, 북한 인민은 떨쳐 일어나 열렬한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김평일 카드까지 나온 것은 국유본으로서는 어려운 결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간 농구네, 스위스 유학이네 잔뜩 김정은을 키웠지만, 대한민국 시민 반응이 영 시원찮았습니다. 게다가 북한 내부에서도 반응이 좋지 않으니 국유본으로서도 플랜 B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둘, 가택연금이 중요합니다. 이 가택연금이 만일 김정일이나 김정은 짓이라면 바보 같은 짓거리를 한 셈입니다. 가택연금이란 정치적으로 오히려 김평일을 키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김평일이 야심이 있다면 오히려 바라는 일입니다.

   

김평일이 지금까지처럼 폴란드 주재 대사로 영원히 남아 있다면 별다른 변수가 될 수 없습니다. 그 아무리 김평일이 똑똑하고, 잘 생기면 무엇합니까. 인민에게 잊혀진 존재라면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허나, 가택연금이라면 다른 이야기죠.

   

김정일 정권이 붕괴하였을 때, 김평일은 북한 인민과 호흡을 같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북한 인민이 헐벗고 굶주리고 탄압을 받을 때, 김평일 역시 탄압을 받았다는 공감대란 엄청난 정치적 자산인 것입니다. 반면에 폴란드 주재 대사다? 속사정이야 어떠하든, 북한 현실과 동떨어져서 북한 귀족으로서 산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바로 이것이 김정남의 치명적인 한계인 것입니다.

   

해서, 김정일, 김정은이 국유본 지시 없이 독단으로 김평일을 불러들여서 가택연금을 결정했다면 아주 바보 같은 짓이 틀림없습니다. 허나, 이것이 국유본 지시에 의해 불가피하게 결정한 것이라면? 김정은은 몰라도 김정일이 그리 찌질한 인간이 아닙니다. 바로 여기서 국유본론이 빛을 발하는 대목입니다.

   

예서, 확인해야 할 것이 AP통신의 평양 지국 개설입니다. 이는 언뜻 들으면 북한 지지자들에게는 희소식일 수 있습니다. 허나, 과연 그럴까요?

   

"현재까지 위키리크스의 탄생 시기 및 AP 통신, LA타임즈 등등과 중국 천안문 항쟁을 운운하며 중국 반체제를 강조하는 것을 보자면, 뉴라이트 계열로 잠정 추정할 수 있다."

http://blog.naver.com/miavenus/70091198593

   

김정일 정권이 굳이 AP통신 지국을 허용할 이유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북한에 세계 4대 통신사가 없더라도 평양정권이 언론플레이를 잘 해오지 않았습니까. 당장 친일 조중동과 쪽발이매국수구반동좀비찌라시 한경오프엠 국유본 언론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김정일에 대해서 얼마나 받들어 총! 입니까. 이런 대접을 받는 세계 정치인은 김정일과 쪽발이왕이 유일합니다. 해서, 이 메카니즘을 잘 파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김정일 정권이 AP통신 지국 개설이란 국유본 지시를 따른다는 것. 이것은 한반도 통일 과정에서 기념비적인 사건인 것입니다.

   

왜? AP통신 평양지국이 개설한 이후 AP통신은 과연 어떤 보도 태도를 보여줄까요? 반김정일 노선으로 나아갈까요? 아닐 것입니다. 만일 이런 개하수 정책을 취한다면 인드라가 국유본에 대해 매우 실망할 것입니다. 인드라 예상이라면, AP통신은 그 누구보다도 열렬한 김정일 팬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결정적일 때, AP통신은 김정일의 친구라면서 지나가듯이 슬쩍 비판을 합니다. 바로 이것이 언론플레이의 진수인 것입니다. 측근의 배신이 가장 뼈아픈 법이지요^^! 국유본이 리비아 카다피 몰락시킬 때 쓰는 수법 중 하나를 잘 생각해보세요. 측근의 배신 때리기. 카다피는 로이터 통신을 축출합니다. 끝난 거죠, 로이터가? 아니죠. 카다피가.

   

하면, 이 두 가지 조건에 대한 대가는 무엇이었을까요? 유럽 집행위원회의 북한 식량 지원입니다.

   

   

셋, 김평일과 장성택의 조합은 김정일 이후 과도기를 주도할 최선의 방책입니다.

   

최근 김정일, 김정은과 메드베네프 정상회담 이야기가 나왔다가 없던 일이 되었습니다. 하면, 이것은 그 아무리 산케이, 요미우리, 아사히 등 쪽발이 언론이 개삼류찌라시국유본 언론이라 하더라도 아예 없는 것 꾸며낸 것일까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인드라 추론은 이렇습니다. AP통신 지국 개설과 김평일 가택연금이라는 조건으로 마지 못해 받은 유럽 식량 지원. 여기에 그냥 당할 김정일이나 김정은은 아닐 것입니다. 해서, 최후로 수를 쓰려고 했겠지요.

   

그 첫 번째가 외교적 고립을 벗어나기 위해 중국을 다시 방문한 것입니다. 이는 북한 역시 고물가로 인민 고통이 날로 커지는 동시에 한중일 지도자들이 모인 데다 중동에서 이집트, 리비아, 시리아 등 친북한 권력이 위기에 봉착하고, 차베스마저 와병중인 것이 큰 영향을 끼쳤을 것입니다. 허나, 베이징 권력은 냉정했습니다. 한편으로 이전과 다를 바 없이 환대를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은근히 평양권력을 씹는 이중플레이를 했습니다. 이전의 동북아 정세를 이야기하는 중국 입장과 달리 이미 중국은 한반도 통일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다만, 국유본 눈치를 보느라 겉과 속이 다른 이야기를 잘 버무려서 이야기할 따름입니다. 눈치챌 사람들만 눈치를 채게 말이지요.

   

중국 지도부와 별 성과 없이 끝낸 이후 김정일과 김정은은 박정희의 소련 비밀협정 체결 노력처럼 러시아와의 교섭을 시도합니다. 이는 다른 것 없습니다. 현재처럼 일방적이기까지 한 중국과의 관계를 러시아를 통해서 등거리 외교를 시도하려는 것입니다. 허나, 이 시도도 무산된 것입니다. 왜? 중국이든, 러시아든 모두 국유본 통제 하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 정권 모두가 이명박이나 쪽발이왕처럼 어느 정도 자율적인 권력을 지니고 있지만, 한계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모든 시도가 좌절되면서 등장한 것이 김평일 가택연금 소식과 AP 지국 개설, 그리고 유럽 집행위원회의 식량 지원인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김평일은 훗날 한반도 통일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다만, 가택연금한다 해서 곧바로 권력을 장악하는 것은 아닙니다. 미얀마의 수치나 한국의 김영삼처럼 언제 권력을 잡을 지는 국유본 마음입니다.

   

김종화 :

그렇군요. 여기서 미묘한 면도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지난 16년 전인 1994? 1995년 글에서 김평일 역할에 대해 다른 이야기를 하신 바 있습니다.

   

"게다가 야당인 진보적 주체사상을 꿈꾸는 민족연대당(이하 주민연)은 의회해산 요구, 총선거를 요구하였습니다.... 현재 발해자치공의 상황을 보면 야당인 주민연의 인기가 망국적인 지역주의에 편승하여 개혁사회주의당을 위협할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특히 주민연 당수인 김평일과 김가문에 대한 애정을 잊지 않고 있는 극렬분자들뿐만 아니라 평안도민들, 실업자들, 발해쪽 중소기업업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

http://blog.naver.com/miavenus/60003466834

   

선생님 구상이 매우 혁신적인 것은 분명합니다. 선생님은 국가보안법이 엄존하는 상황 하에서도 주체사상에 대해서도 파시즘적인 사상일 뿐이다, 한국 유일의 혁명이론이다 라는 양극단에서 벗어나는 놀랄만한 주장을 펼친 바가 있습니다. 또한 선생님은 황장엽 식의 주체사상론을 잘 만 벗겨내서 소화할 수 있다면 한반도 통일에서 의미있는 작업이 될 것이라는 말씀까지 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상기한 선생님의 시나리오에서 보자면, 국유본이 김평일을 내세운 건, 혹 국유본이 선생님 시나리오를 적극 검토한 데서 나온 것이 아닐까요? 오히려 반통일, 반평화적 관점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요?

   

   

인드라 :

오늘날 기획이란 확률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목표가 여건에 따라 차등적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해서, 인드라가 늘 강조하잖아요. 일타삼피 말입니다. 이는 무슨 말이냐면, 세 가지 중 하나만 얻어도 된다는 데서부터 세 가지 모두 목표를 달성한다는 데까지 다양한 가능성을 포괄해서 만든 기획이란 의미인 것입니다.

   

해서, 국유본은 상기한 인드라 시나리오도 당연 포함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국유본은 자신의 바깥에서 상상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을 바라지 않거든요. 세상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다 국유본 심계 안에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국유본입니다.

   

하면, 국유본이 최상으로 두는 조합은 무엇일까요. 장성택과 김평일의 조합입니다. 장성택은 네오콘 친중, 김평일은 뉴라이트 친미. 이런 조합이면 미국도 중국도 만족하는 카드일 것입니다. 허나, 확률이 적더라도 다른 가능성도 고려해야겠지요. 최악의 조합은 인드라가 제시한 시나리오입니다. 장성택과 김평일 분열이지요.

   

허나, 그 어떤 시나리오대로 굴러가건, 김평일은 현재 꽃놀이패를 쥐고 있다는 것입니다. "

 http://blog.naver.com/miavenus/70112729218

   

정리하자.

   

한비자가 말하길, 사람이란 이익대로 움직인다 했다. 마차를 파는 사람은 사람들이 모두 부자이길 원하며, 관 장사하는 사람은 사람들이 모두 죽기를 바라며, 임금의 아들들은 임금이 죽기를 바란다고 했다. 김정일을 죽인 건 김정은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음모론의 기초는 누군가 죽으면 그로 인해 가장 이득을 챙길 자이다. 가령 쪽발 한걸레가 그토록 쪽발 놈현더러 죽어라 죽어라 칼럼을 쓴 것은 쪽발 놈현이 죽어야 쪽발 민주당이 지방선거나 총선에서 승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 쪽발 놈현 탄핵처럼 말이다.

   

그처럼 뽀그리가 죽어서 슬픈 사람도 있고, 기쁜 사람도 있는 것은 그로 인해 이득을 기대하기 때문이지, 그 사람 인간성과는 무관하다. 더 나아가 사상과도 무관한 것이다. 김정일 독재에는 왜 관용적이고 박정희 독재에는 야박한가 따위 질문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김정일이 자신에게 밥 먹여주면 그가 아무리 백만 인민을 굶여죽여도 자신에게는 신적 존재가 아니겠는가. 다시 말해, 사상의 탈을 썼을 뿐이지, 실은 밥벌이 문제인 게다.

   

하면, 인드라는 다른가. 근본적으로 보자면, 다르다. 허나, 현상적으로는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은 무슨 말인가 곱씹어보지 않으면 모를 것이다. 억지로 이해하지 말길 바란다 ㅎㅎㅎ. 번개에 몇 번 나온 분들이야 다소간 이해하겠지만^^!

   

(번개에 나오지 않은 스페르치님이 댓글을 다니 추가로 글을 적는다. 한비자의 '세림하편'에서 보면, 돼지에 붙어사는 이들의 싸움 이야기가 있다. 돼지에 붙어사는 이들이 더 맛있는 피를 빨 작정으로 자리 다툼을 하고 있었다. 그때, 이를 보던 다른 이가 지나가면서 한 마디를 한다.

   

- 너희들은 섣달 그믐달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는 것도 모르냐. 그 때가 되면 이 돼지는 불에 그슬러 제사상에 오르게 될 텐데. 그때 너희들도 함께 불에 그슬릴 걱정이나 하시지.

   

그러자 세 마리의 이는 힘을 합해 있는 힘을 다해 돼지의 피를 빨기 시작하였다. 돼지가 바짝 마르자 제사상에 올리기 곤란하게 되었다. 결국 사람들은 그 돼지를 죽이지 않았다.

   

큰 안목에서 보면 세상이 달리 보인다.

   

국유본은 십 년마다 공황을 일으키는데, 2008년과 이번 금융위기는 미국과 유럽에서 벌어졌다. 이제껏 국유본 패턴을 보면 화전민식으로 공황을 일으킨다. 해서, 다시 올 대공황 국면이 또 다시 미국과 유럽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아시아가 타켓일 가능성이 크다. 이때, 한국은 어떠한가. 중국에서 기침만 해도 흔들릴 것이 자명한 게 한국이다. 다시 말해, 국유본은 다음에 올 대공황 국면에서 한반도란 맛있는 밥상인 게다. 맛있는 돼지다. 맛있는 제물이다. 이때, 한반도가 통일을 한다면!!! 국유본은 한반도를 빼고 처리하자는 기획을 세울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인드라가 대공황 이전에 한반도 통일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통일은 당위가 아니라 생존이다.

   

한반도 평화와 통일, 경제 발전과 사회 복지를 위해서!)

   

   

인드라는 한반도 평화와 통일, 경제 발전과 사회 복지를 위해 뽀그리가 뒈지는 것이 순리라고 보았다. 통일의 걸림돌이기 때문이다. 그외에 뽀그리에게 개인 원한은 없다. 다만, 통일이 되면, 뽀그리에 대한 인류 범죄적 심판은 불가피할 것이다. 허나, 누군가는 반대로 생각할 수 있다. 해서, 각자 주장의 숨은 진의를 파악하지 못한 채 겉보기 주장만으로 양분하여 논란을 벌이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그보다는 결과로 나타나면 될 일인 것이다. 실제로 뽀그리가 죽어서 통일로 가는 길이 나타난다면 그것이 길이 아니겠는가.

   

추신 : 올해 가기 전에 쪽발왕도 보내준다면, 국유본에게 정말 고맙겠다. 이왕이면 일본 야쿠자에게 돌림빵 당해서 쪽발왕이 죽었으면 좋겠다. 불가능하겠지? ㅋ

   

금본위제 허실과 시세 변동의 비밀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1/12/19 09:10

http://blog.naver.com/miavenus/70126825688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30 : 금본위제 혀실과 시세 변동의 비밀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1/12/19

   

A. 금본위제 음모론의 허실

B. 은값 폭등의 비밀

C. 옥수수 : 먹는 것 가지고 장난치지 마라

D. 강달러 시대는 도래하는가?

E. 실전 투자자를 위한 지표

   

"나는 유마거사이며 자신은 문수보살이라 했다. 석가모니 생존에 바이살리 성에 유마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말솜씨가 뛰어났고 마음대로 신통력을 부렸으며, 다라니를 얻었으며, 두려움을 여의었으며, 마와 적대자들을 떨쳐낸 자였다. 유마는 세속에 머물면서도 욕계와 색계와 무색계를 훌쩍 뛰어넘나들어서 자식과 아내와 고용인들을 거느리고 있었지만 항상 몸이 청정했으며 주위에 친족들이 들끓어도 여유롭게 처신하였다. 도박이나 주사위 노름을 하는 곳에도 모습을 드러냈지만 노름에 빠진 이들을 효과적으로 제도하기 위해서였고 출세간적인 주문이나 논서에도 해박했지만 오직 불법이 주는 기쁨만을 누리리라 다짐한 사람이었다. 아울러 애욕의 허망함을 보여주고자 창녀촌도 마다하지 않았고 부자였으며 존경받는 대신 중의 하나였고 궁중의 젊은 여인들을 이끌었기에 최고의 내관이기도 했다. 유마가 병을 가장하자 석가모니는 그를 문병할 사람을 찾는데 모두가 유마의 고매한 품격에 자격없다고 하며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그때 문수가 나서 문병을 했다는 것이다.

나로서는 처음 듣는 소리였다. "

http://blog.naver.com/miavenus/60004093271

   

http://blog.naver.com/miavenus/70121431851

   

http://blog.naver.com/miavenus/70118992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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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naver.com/miavenus/70119726551

   

http://blog.naver.com/miavenus/70120592788

   

   

연말이 다가온다.

   

해서, 이번에는 잠시 프랑스 혁명을 접어두고 경제 이야기를 할까 한다. 이번 글은 지난 인월리 글들을 종합하고, 새로운 내용을 추가하되, 좀 더 쉽게 설명하고자 마련한 글이다.

   

A. 금본위제 음모론의 허실

   

   

국유본이 인드라 말을 유념하여 인드라가 예상한 연말 1,600달러선으로 r금값이 달려가고 있다.

   

국유본이 귀금속 부문에서는 인드라 말을 잘 들어주는 편이다. 현재까지 귀금속 부문은 국유본 분파 중 노비네파가 담당하고 있다. 다만, 국유본과 인드라는 늘 게임을 하고 있음을 잊지 말길 바란다.

   

인드라는 지금까지 틈만 나면 금본위제 음모론의 허실을 지적해왔다. 세계 경제가 금본위제로 돌아갈 수 없음을 틈만 나면 강조해았다. 이 점에서 쑹훙빙이 국유본 간첩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물론 쑹훙빙 뿐만 아니라 이리유카바 최를 비롯해서 음모론 관련 책을 낸 자들을 죄다 국유본 간첩으로 일단 의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음모론을 제조하는 이들은 국유본이니까.

   

하면, 금본위제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론적으로 좔좔 이야기할 수 있으나, 번개에서 이야기를 들으면 이야기가 굉장히 어렵다고, 특히 경제 이야기가 어렵다고 하시니 쉽게 간다.

   

금본위제 시대의 화폐 개념과 오늘날 종이화폐 시대의 화폐 개념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금본위제 시대의 화폐 개념이란 수메르 시대부터 은행에 금을 보관한 뒤 금 가치에 해당하는 만큼의 보관증, 혹은 영수증을 화폐로 쓴 것이다.  간단 생각하면, 수표요, 오늘날의 체크카드이다. 여러분은 은행에 입금한 돈 만큼 체크카드로 쓸 수 있지 않은가. 이것이 금본위제 시대의 화폐 개념이었다.

   

반면, 오늘날의 종이화폐 시대의 화폐 개념이란 오늘날 유무형의 재화 가치에 해당하는 만큼의 신용평가서를 화폐로 쓰고 있다. 간단 생각하면, 주식이요, 선물옵션이다. 주식 시세는 해당 기업의 청산가치(현 시점에서 기업을 팔 때 현금화할 수 있는 가치)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이러면, IT 기업, 특히 뉴라이트 네이버 주가 시세 가치를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뉴라이트 네이버 따위가 무슨 노비네 삼성도 아니고^^! 쉽게 가자면, 주식 시세는 미래 가치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1703 에 의해서 움직인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당장 당신이 지니고 있는 금을 기준으로 당신의 신용 상태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앞으로 얼마나 많은 금, 혹은 금과 유사한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지를 기준으로 당신의 신용 상태를 평가하고 보관증, 혹은 영수증을 내어주는 것이다.

   

카이사르가 그랬다. 카이사르는 한 푼도 돈이 없었으나, 수전노 고리대금업자, 크라수스는 카이사르에게 돈을 빌려주었다. 카이사르가 앞으로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예서 보듯, 채권 본위제는 금 본위제보다 앞선 제도임을 알 수 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시라. 결혼할 때 결혼 상대가 현재 지닌 돈이 없고, 직장도 없다. 허나, 장래는 상당히 밝다. 지닌 재능이 특출하기 때문이다. 이때, 부모가 청산 가치만을 보고 결혼을 반대한다면 여러분 생각은 어떠하겠는가. 반대로 부모가 미래 가치를 보고 결혼에 찬성한다면?

   

채권 본위제 부모는 결혼을 승낙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 자네, 내게 빚을 졌네. 언제 갚을 터인가^^?

   

허나, 여러분 중 일부는 금본위제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허나,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 금이 있는 만큼만 빼고 종이화폐 시대 때 풀렸던 화폐를 모두 폐기처분해야 한다. 이게 가능한 일일까^^? 가능한 일이기는 하다. 전 세계 주식거래소와 원자재 거래소, 은행을 문 닫으면 되니까.

   

아직도 이런 고루한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대는 사람이 살지 않은 아마존 원시림 같은 곳으로 가서 탈속하여 살라. 아니라면, 여전히 문명 세계에 남고자 한다면, 당신의 선택은 분명해야 한다.

   

화폐란 미래 가치이다. 만일 인류가 달을 개발할 수 있다면, 달 자원 개발 만큼이나 화폐는 늘어날 것이다. 그처럼 인류가 빠른 시일내에 뽀그리와 쪽발 정은을 처형하고 한반도 통일을 이루는 인류사적 쾌거를 이룬다면 화폐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

   

화폐란 희망이다.

   

   

    

B. 은값 폭등의 비밀

   

   

   

인드라가 예상한 가격 30달러 안팎에서 움직이고 있다.

   

현재 추세를 보면, 연말까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차트도 그렇고, 유럽 재정위기 등 세계 경제 돌아가는 것도 그렇고, 별달리 특이사항이 보이지 않으므로, 남은 연말까지 아주 특별한 일이 발생하지 않는 한, 올해 말 은값 전망이 30달러선이 될 것이라는 전망을 유지하고자 한다.

   

"최종입력시간 : 2011-04-29 15:26:31 

글로벌 경제에 하방 압력이 거세지면서 안전자산 수요가 급증하는 가운데 은 가격이 폭등세를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은 선물 가격은 지난 25일(현지시간) 뉴욕상업거래소(NYME)에서 한때 49.79달러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은 가격은 4월 한달 동안에만 무려 29% 뛰며 1979년 이래 최대 상승률을 기록했다.

   

인터넷 투자정보매체인 스마트머니는 이례적인 은 값 폭등 현상에 대해 "버블이 끼었다"고 진단하고 원인을 6가지로 요약했다.

   

   

은 가격 추이. 

출처 스마트머니

   

스마트머니는 은 값 폭등의 첫 번째 원인으로 비상식적인 추이를 지적했다.

   

최근의 은 가격은 대부호인 헌트 형제가 불법으로 사재기에 나섰던 1981년 이래 30년만의 최고치에 머물고 있다.

   

당시 은은 폭등했다 곧바로 폭락했다. 이는 현재 폭등하고 있는 은 가격도 조만간 폭락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스마트머니는 투자자들이 이 같은 이상현상에 휘말려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은 광풍의 두 번째 이유는 투자자들이 은 투자펀드 붐에 휩쓸리고 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스마트머니는 투자자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캐나다의 은 투자펀드인 스프롯트 피지컬 실버 트러스트의 예를 들며, 이 회사의 주가에도 버블이 끼어있다고 지적했다.

   

스프롯트의 주가는 연초 대비 2배로 상승해 지난 22일에는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하지만 이 회사의 실제 가치는 주당 18.11달러. 이 회사의 주식을 사는 사람은 은 열풍에 눈이 멀어 함정에 빠졌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은이 온스당 44달러로 상승했다는 것은 스프롯트의 주식을 사는 사람이 은 1온스당 54달러를 지불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스마트머니는 전했다.

   

세 번째는 은의 가치가 안전자산의 대명사인 금에 비해 과대평가되고 있다는 점이다. 1984년 은 가격은 금의 1.56%에 불과했다. 1온스의 금 값이 64온스의 은과 같은 가치를 지녔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현재 은의 가치는 금의 3%까지 올랐다. 스마트머니는 은 가격이 금에 비해 과대 평가됐다고 강조하고, 달러 가치가 추락하면서 상대적으로 귀금속 가치가 높아지는 지금은 은을 팔고 금을 사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조언했다.

   

   

   

네 번째 이유는 은을 둘러싼 음모설이 나돌고 있다는 것이다.

   

스마트머니에 따르면 시장에서는 파생상품 시장에서 대량의 은 관련 상품을 갖고 있는 JP모건체이스와 HSBC가 은 선물을 대량으로 팔고 있으며, 최근 은 가격이 이들의 마지노선인 온스당 30달러선을 넘으면서 파산할 수도 있다는 루머가 전부터 확산돼왔다.

   

하지만 HSBC의 주가는 연초 이래 5% 올랐고, 작년 여름 바닥세에서는 25%나 상승했다. JP모건의 주가 역시 연초 대비 5% 상승해 금융 위기 이전 수준을 회복했다.

   

여기에는 유력 싱크탱크나 미 외교문제평의회, 유럽 귀족, 정재계 수장이 모이는 빌더버그 그룹, 로마 교황, 에딘버러 공작 등이 이들 은행의 주식을 매집해 주가를 끌어올렸다는 소문도 있다.

   

귀가 얇은 투자자들은 JP모건이나 HSBC 주식의 풋옵션을 매입해 폭락에 대비하면 큰 돈벌이가 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는 것이다.

   

루머가 사실일 경우 2013년 1월까지 유효한 JP모건 주식을 20달러에 파는 풋옵션은 60센트에 살 수 있으며, 만일 주가가 '제로'가 되면 갑부가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은 가격을 둘러싼 음모설이 힘을 얻고 있다.

   

다섯 번째는 이 같은 음모설이 블로그를 타고 겉잡을 수 없이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스마트머니는 음모설의 진원은 대부분이 귀금속 판매업자들이라며, 이들이 순진한 투자자들을 현혹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마지막은 은이 부족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미국 조폐국이 발행하는 아메리칸 이글 은화는 현재 없어서 못 팔 정도로 불티가 나 은 부족 소문을 부풀리는데 일조하고 있다.

   

하지만 스마트머니는 은화를 쉽게 손에 넣지 못하는 것은 수요가 지나치게 강한 탓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스마트머니는 아무리 은이나 금이 안전자산이라고 해도 일상생활필요한 옷이나 음식, 거주지가 아닌 만큼 무리해서 살 필요는 없다고 결론지었다."

http://www.etoday.co.kr/news/section/newsview.php?TM=news&SM=3001&idxno=433436 

   

   

1. 은값 폭등의 비밀 : 수요를 자극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경쟁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 시장의 법칙이 있다. 수요자가 많으면 그만큼 가격이 오른다. 휴가철 해수욕장 물가가 뛰어오르는 이유이다. 헌데, 이 가격을 폭등시키고 싶다면? 붐을 일으켜 경쟁을 시키는 것이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나는 그다지 마음에 내키지 않는다. 헌데, 나를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 별로 마음이 없었는데, 그 사람에게 내가 모르는 남다른 매력이 있었나 하는데 그때부터 자신도 모르게 태도를 바꾼다. 

   

헌데, 만일 경쟁 상대가 굉장한 실력파 상대라면?

   

"2대 주주인 쉰들러 도이치가 현대엘리베이(017800) (123,000원 6,500 -5.02%)의 지분을 추가 매입하며 현대엘리베이터가 6% 넘게 급등하고 있다. 22일 장 초반 현대엘리베이터는 11% 넘게 상승하기도 했다.

   

1대 주주 현대그룹과 2대 주주 쉰들러 도이치 간 지분경쟁 가능성이 다시 제기됐다. 지난 19일 쉰들러 도이치는 현대엘리베이터의 주식 12만6084주를 추가 매수했다고 밝혔다. 쉰들러 도이치가 보유한 현대엘리베이터의 지분은 기존 33.34%에서 34.51%로 증가했다.

   

우호지분을 포함해 현대그룹은 현대엘리베이터의 지분 절반을 보유하고 있다. 당장 경영권 분쟁이 발생할 가능성은 적지만, 쉰들러 도이치가 현대엘리베이터 지분을 35% 가까이 보유하고 있고 계속 비중을 늘려가고 있다. 경영권을 방어하려는 현대그룹과 쉰들러 도이치가 지속적으로 지분을 사들이면 주가에 호재로 작용할 수 있다는 분석에 투자자금이 유입되고 있다.

   

다만 쉰들러 도이치는 "현대엘리베이터의 경영권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구체적인 계획은 없다"면서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 산업의 선도 기업인 현대엘리베이터에 관심이 많다"라고 말했다. "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8/22/2011082200571.html

   

주식 시장에서 M&A 루머는 호재이다. 한 쪽에서는 경영권을 방어하기 위해, 다른 한 쪽은 경영권을 탈취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주식을 사들인다고 보기 때문이다. 마치 경매 시장에서 호가 경쟁하는 것과 같은 게다. 해서, 개미들도 주가가 오를 것을 기대하고 주식을 사들여 주가가 더 오른다.

   

   

2. 은값 폭등의 비밀 : 경쟁을 붙이기 위해서는 승부사 근성을 부추겨라

   

인간은 고스톱을 쳐도 내기를 걸지 않으면 흥미를 잃는다. 반면 10원짜리 내기라도 걸면 푼돈이라도 쓸 데 없이 자존심을 건다. 

   

인드라는 여기에 행동경제학, 진화경제학의 핵심이 있다고 보고 있다. 인간이 생각하는 인간, 이성적인 인간, 합리적인 인간일 수 있는 것은 도박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도박이란 표현이 마음에 걸린다면 승부하는 인간이라고 하자.

   

행동경제학, 진화경제학의 전제는 무엇인가. 생존이다. 생존을 위해서라면 인간은 무엇이든 해야했다. 헌데, 허약하기 그지 없는 인간에게 매순간 선택은 도박, 승부였다. 이것이 오랜 원시시대 동안 체득하였기에 오늘날 인간은 과거 원시인이 보기에는 매우 합리적인 선택인 비합리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다.

   

이때, 승부는 두 가지 경향(엄밀하게 말하면, 세 가지 방향)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확실히 이기는 방향이다. 대다수 인간은 소심하다. 자신의 인류애를 고작 동료를 고발하기, 파파라치하기, 배신자 폭로하기 정도로 만족한다. 해서, 그 아무리 판돈을 걸고 유혹해도 대부분은 은행에 저축한다.

   

다른 하나는 모험을 거는 방향이다. 매우 낮은 확율에 '인생은 한방'이라는 신조인 게다.

   

예서, 어차피 '인생은 한방' 족속은 어떤 상황이든 '인생은 한방'이다. 허나, 이들이 목표가 아니다. 실제 목표는 소심한 인간들 중에 약간의 모험심이 있는 자들을 유혹하는 것이다. 이들을 기브 앤 테이크족이라고 하자.

   

타켓은 언제나 이들이다. 고수익 고위험을 부담스러워하면서도 은행 적금 이자로는 만족할 수 없는 이들. 이들을 꼬셔서 어떻게든 장사를 해보자는 것이 국유본 기획인 게다.

   

이들이 어지간한 떡밥에 넘어오겠나. 허나, 상대가 국유본이라면? 응? 국유본?

   

   

3. 은값 폭등의 비밀 : 떡밥으로는 음모론만한 것이 없다

   

빅터 로스차일드가 실제 모델이었던 영화 007 영화 21탄 '007 카지노 로얄(2006)' 장면을 상기하자.

   

007은 도박을 한다. 상대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다가 중요 순간에는 자신도 모르는 습관을 보여준다. 007은 이 습관을 철썩같이 믿고 배팅을 했다가 돈을 다 날린다. 상대는 연기를 했던 것이다.

   

이것이 음모론이다.

   

국유본이 왜 음모론의 진앙지인가. 사람들이 엉뚱한 데에 원인 진단을 하게 만들기 위함이다. 사람들을 속이기 위함이다. 해서, 음모론이 필요한 것이다.

   

헌데, 만일 인드라가 음모론을 폭로하고, 음모론 속의 음모를 까발린다면? 예서, 가위바위보 게임이 되는 것이다. 가위바위보 게임에 대해서는 생략하고!

   

자, 상기한 기사에서 핵심은 '음모론'이다. 음모론 루머로 인하여 은값이 뛰고 있다는 것이다. 음모론 핵심은 JP모건체이스나 HSBC가 은 선물에서 풋옵션을 취하고 있기에 은값이 폭등하면 파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한은 2013년 1월이다.

   

이 음모론을 분석하자.

   

JP모건체이스나 HSBC는 국유본 분파 중 로스차일드 빌더버그 네오콘부시 분파 은행이다. 헌데, 이 분파 강점은 금을 비롯한 귀금속 거래다. 헌데, 이들 분파가 귀금속 거래로 망한다?

   

로스차일드는 나폴레옹 전쟁 당시 누구보다 승전 소식을 빨리 받은 뒤 런던 시장에 나가 마치 자살할 것 같은 포즈로 한숨을 쉬다 돌아왔다. 이 뉴스를 접한 런던 투자자들은 패닉에 빠져 앞다투어 투매했다. 로스차일드는 이들 주식과 채권을 모조리 헐값에 사들인 뒤 떼돈을 벌었다.

   

데이비드 록펠러에 패한 빅터 로스차일드도 가문 관례에 따라 JP모건 은행에서 일을 하기도 했다. 그만큼 JP모건은 로스차일드의 미국 지부였고, 오늘날 데이비드 록펠러가 장악하고 있는 네오콘부시파의 강력한 근거지이다. 영국 노동당 전 수상 블레어는 퇴임 후 JP모건 고문으로 낙하산을 탔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록펠러가 석유시장을 재패했던 방식이다. 

   

여기! 록펠러 싫은 넘 모여라! 해서, 록펠러 싫은 석유업자들이 죄다 모여 타도! 록펠러 동맹을 만들었다. 허나, 알고 보니, 타도! 록펠러 동맹이 실은 록펠러 자회사^^! 망했당~! 

   

결국 이 정보는 역정보일 가능성이 크다.

   

오히려 HSBC나 JP모건체이스가 귀금속 거래로 크게 한탕을 치려는 수작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인 것이다.

   

당신이 상대의 패를 정확히 읽었다고 생각하고 올인을 하는 순간,

   

망한다!

   

한강으로 직행!

   

   

   

4. 은값 폭등의 비밀 : 공범자를 양산하면 가격이 폭등한다

   

순진하게 주식시장에 접근했다 쓴 맛을 본 이들 대다수 다음 행동 패턴이 뻔하다. 작전주에 매력을 느낀다. 이전까지 작전주에 부정적이었지만, 모르고 당한 놈만 바보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작전주를 움직이는 세력과 한 몸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기 마련이다. 결국 주식도, 환율도, 모든 게 돈 놓고 돈 먹기. 사기치는 것 아니면 사기당하는 것.

   

해서, 공범자가 되는 것이다. 허나, 그냥 되는가. 그렇지 않다. 반드시 돈 백원이라도 사기당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이벤트가 필요하다. 어떤 이벤트?

    

국유본이 만든 동영상 '시대정신'을 보면, 은행 돈을 빼내라고 권한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라고 선동한다. 이런 것을 따라하는 병쉰이 있나 싶겠지만, 있었다. 그것도 박지성의 롤모델로 가끔 거론되는 맨유의 전설, 에릭 칸토나이다.

   

   

"프랑스 신문 지면에 온통 칸토나의 얼굴이 실렸습니다.

   

칸토나는 최근 부패하고 범죄를 저지르는 은행 시스템이 글로벌 재정위기를 불러왔다면서 7일 하루동안 예금을 인출해 은행 시스템을 마비시키자는 운동을 벌였기 때문입니다.

   

페이스북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해 운동에 동참하겠다는 사람이 5만여명이 넘었습니다.

.............

한 마디로 은행을 마비시키자는 이 엉뚱한 운동은 실패로 돌아간 것입니다.

   

프랑스와 유럽연합 정치가와 은행 관계자들은 칸토나의 주장을 무책임하며 순진한 것이라며 이 운동의 실패를 예견했었습니다....

   

실패의 원인을 들자면 셀 수 없겠지만 가장 큰 원인을 꼽자면 칸토나의 아내에게 있었습니다.

   

영화배우인 칸토나의 아내가 '금융위기의 주범'으로 꼽히는 은행광고에 출연했기 때문입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4808863

   

흥미롭게도 칸토나 운동을 배후에서 지원했던 세력 중 하나가 로스차일드 소유의 리베라시옹이었다는 것이 이 사건의 묘미이다~!

   

정리하자.

   

국유본은 음모론을 내세워 한 편으로 '타도! 국유본'을 내세운다. 지금 은을 사면 국유본을 타도시킬 수 있다! 타도 제국주의! 타도 국유본! 은을 사자! 은을 사자! 은을 사서 국유본을 망하게 하자! 윤도현이나 김여진처럼 머리에 든 게 하나도 없는 골 빈 연예인 칸토나를 내세워서 국유본을 망하게 하자! 허나, 끝이 허무하다^^!

   

이십대 청년들은 국유본이 꾸민 광우병 파동, 4대강 반대, 독도 사태 등에 대해 그때마다 쪽발민주당 넘들이 죄다 거짓말한 것을 알게 된다. 극단적인 정신병 증세를 앓을 수밖에 없다. 이를 임시처방하는 방법은 '인지부조화'이다. 하고, '인지부조화'를 정당화하는 내면적인 방식이 '수단이 목적보다 우선한다'는 것이다. 허나, 사실은 이조차도 아니다. 그저 머리가 아플 뿐이다. 세상은 미쳐 있고, 자신은 한심하다는 생각일 따름이다. 그때 국유본이 지속적으로 쪽발 놈현 사진을 제공하면 자신도 모르게 동일시가 일어난다. '바보 놈현 = 자기 자신' 바로 이것이 교묘한 국유본의 세뇌 과정인지 모른 채 무의식에 쪽발 놈현을 가져가면 그 다음부터는 자동이다. 쪽발 놈현이란 표현만 보면 자신도 모르게 반발하고, 멋있게 보였던 '인드라'도 나쁜 넘이 아닐까 의심하게 된다.

   

마침내 이런 황당한 소리를 하게 되면, 당신은 심각한 상황이다.

   

- 쪽발 놈현, 내가 죽였습니다.

   

국유본이 노린 것이 바로 이것이다!

   

죽인 것은 국유본인데, 국유본이 쪽발 놈현을 한껏 이용하다가 유통기한이 다 해서 그냥 죽인 것 뿐인데, 그 기간 동안 쪽발 놈현은 나라를 완전히 망쳤을 뿐인데, 당신은 나라 망친 쪽발 놈현 생각은 하나도  안 하고, 그저 쪽발 놈현 추억에만 빠져 든다. 그러고 한 마디를 한다. 쪽발 놈현, 내가 죽였습니다.

   

공범자 심리 완성이다!

   

   

5. 은값 폭등의 비밀 : 편가르기를 하면 양심이 즉어간다

   

정직한 고백을 하더라도 듣는 이가 꼼수이니 하면 심리가 불안정해지기 마련이다. 반면 정직한 고백에 따른 격려가 있다면 심리는 한층 안정되기 마련이다. 같은 사안을 꼼수냐, 소신이냐로 판단하는 근거는 편가르기로 향한다.

   

편가르기 심리는 의외로 간단하게 입증할 수 있다.

   

여러분이 내일 당장 옵션 계좌를 열고, 풋이든, 콜이든 딱 한 개만 매수하면 안다. 콜이면 세상이 온통 긍정적이다. 풋이면 세상이 온통 부정적이다.

   

허나, 바로 이런 과정 속에서 양심은 오갈 데가 없다. 진영 논리에 의해 바른 말하는 이들은 숙청을 당할 수밖에 없다.

   

이 시기에 도달하면, 은값 기사도 폭등 아니면 폭락이라는 극단적인 기사를 양산하기 마련이다.

   

   

6. 은값 폭등의 비밀 : 설거지는 당신의 몫

   

국유본이 모든 것을 다 완성시킨 후, 최종적인 임무를 당신에게 맡긴다.

   

당신의 임무는 기지를 폭파하는 버튼을 누른 후 자폭하는 것.

   

당신에게 영혼이 남았나?

   

없다.

   

국유본이 모든 것을 가져갔다.

   

왜 당신은 국유본이 시키는 대로 자폭하나?

   

국유본은 위대하고, 자기 자신은 세상에서 가장 한심하기 때문이다.

   

   

   

   

너무 우울한 이야기인가.

   

할 수 없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러하니까.

   

   

C. 옥수수 : 먹는 것 가지고 장난치지 마라

   

   

   

곡물 시장은 국유본 분파간 균형이 이룬 시장이다. 곡물 시장 1위는 뉴라이트 카길이지만, 곡물 시장을 좌우하는 세력들을 살펴 보면, 노비네와 뉴라이트가 적절하게 경쟁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틈새 시장으로는 일본, 중국 등이 세력화해왔지만, 골드만파 영향 때문인지 근래 이명박 정부 들어서서 한국 역사상 최초로 한국도 틈새 국제 곡물시장에서 나름 역할하려고 분투하나 역부족인 상황이다.

   

아무튼 옥수수 등 곡물 가격도 국유본은 인드라가 원하는 방향으로 연말 가격을 움직이고 있다.

   

세세하게 말할 수는 없겠지만, 인드라는 그간 수년간 인월리에서 먹는 것 가지고 장난치지 말자, 는 주장을 해왔고, 국유본은 이런 인드라 주장에 화답해왔다.

   

   

D. 강달러 시대는 도래하는가?

   

   

   

달러 인덱스 차트를 보면, 달러 인덱스가 80레벨을 넘어섰다. 달러 인덱스는 70레벨에서 역사적인 강력한 저항선을 구축하고, 추후 75레벨을 기준으로 75~80 사이 박스권에서 움직였는데, 최근 상향 이탈했다. 이는 기술적 분석으로 당분간 달러가 강달러임을 시사한다 하겠다.

   

헌데, 인드라는 지금껏 무엇이라고 주장해왔나. 약달러 시대보다 강달러 시대를 더 경계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 현재까지 한국이 낳은 최고의 경제학자, 신현송도 같은 이야기를 한 바 있다. (신현송 정도라면 그 명예를 인드라가 기꺼이 양보할 의사가 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한 이론적 설명은 백문백답 인월리에서 따로 장을 할애하여 말할 것이다.

   

지금은 초간단으로 말한다. 약달러이면 달러의 세계 확산, 강달러이면 달러의 미국 집중이다.

   

   

   

달러 - 유로 거래에서 주목할 것은 거래량 증가를 동반한 유로화 가치 하락, 달러 가치 상승이다. 허나, 현재 유로화 환율 수준과 거래량으로 보았을 때, 폭등 수준이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연말은 물론 내년에도 강달러를 유지할 것으로 전망함에 따라 연말 한국 원화 환율은 1,144원 안팎에서 움직이리라 볼 수 있다. 현재까지는 앞으로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돌발 변수가 없다면, 1,150원대 선이 유력하다.

   

다만, 이런 흐름이 달러 휴지화로 가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그보다는 IMF SDR 체제로 가려는 국유본의 작전인 게다.

   

"BIS의「세계 외환 및 장외파생상품시장 거래규모」조사결과.hwp

http://www.bok.or.kr/down.search?file_path=/attach/kor/559/2008/11/1226518469396.hwp&file_name=

   

   

한국은행과 블룸버그가 국제결제은행(BIS) 자료를 공개한 것에 의하면, 2007년 4월말 현재 주식과 채권 통화 금리 관련 전체 파생상품 시장 규모는 596조 달러이며, 거래소를 통한 장내파생상품 거래 규모를 포함한 세계 외환 및 파생상품시장 일평균 거래규모는 11.5조 달러로 추정되며, 세계 외환 및 장외파생상품시장의 거래규모는 일평균 5.3조 달러이며, 현물환, 선물환 및 외환스왑 등 전통적(traditional) 외환거래 규모는 일평균 3조 2,100억 달러이고, 이중 660억 달러가 FX거래다. 외환FX마진거래 사이트(http://www.kebf.com/fx/)에서는 FX마진거래의 투기성을 강조하기 위해 전통적 외환거래 규모를 FX마진거래 일일 거래액인양 하는데 잘 못 된 것 같다. 전통적 외환거래 규모에 비해 2% 정도에 불과한 것이 FX마진거래인데 왜들 난리인지 모르겠다.

   

   

한국의 경우 2005년 9월 기준 전체 파생상품이 2조 6,200억 달러이므로 BIS 조사 결과에 따른 세계적 추세와 국내적 추이가 3년 만에 70% 증가한 점을 통해 볼 때, 2008년 10월에 이르러 전체 파생상품 규모가 4조 4,500억 달러로서 환율 1300원 기준으로 5,800조원으로 추정이 된다. 2007년 4월말 현재 전통적 외환거래 규모는 일평균 334억 달러이다. 그리고 FX마진거래는 2008년 최고 월평균 632억 달러를 기록하여 3% 정도인 일일 약 20억 달러, 환율 1300원 기준 2조 6000억 원 규모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2008년 미국, 유럽에 이어 3위권인 한국 선물옵션 시장 일평균 거래액은 35조원이다.

   

   

세계 전체 외환거래는 영미가 50%, 스위스, 일본, 싱가포르, 홍콩, 호주까지 해서 75%를 차지한다. 반면 한국은 18위권으로서 0.8%로 1%가 채 되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 외환거래 시장은 주요국보다는 낮지만, 이탈리아, 인도와 비슷하며, 대만, 멕시코, 네덜란드, 스페인보다 큰 시장이다.

   

   

FX시장도 크게 다르지 않다. 런던시장이 32%, 뉴욕 19%, 도쿄 6% 등으로 3개 지역에서 57%를 차지한다. 인기 거래 통화는 US 달러, 일본 엔, 유로, 영국 파운드인데, 시기적으로 호주 달러, 뉴질랜드 달러처럼 특정 통화가 인기를 끈다."

   

http://blog.naver.com/miavenus/70040748729

   

E. 실전 투자자를 위한 지표

   

달러 인덱스 차트이다.

   

http://charts.insidestocks.com/chart.asp?vol=Y&jav=adv&late=y%1cy&grid=Y&divd=Y&org=stk&sym=%24DXY&data=H&code=BSTK&evnt=adv

    

달러인덱스 챠트에서 달러, 엔, 파운드, 유로 비중이 워낙 커서 스웨덴 통화와 스위스 통화로 인한 오차가 있다 해도 아직까지는 별 무리가 없다 본다. 그렇다 하더라도 앞으로 달러 인덱스에는 거래비중이 높은 통화들로 재편성해야 할 것이다.

   

리보금리이다.

   

http://fx.keb.co.kr/FER1802M.web?q=AC1A0219189E00C799202EF5B0A9B4DB055196F37047E0;mjkvyMY9%2BsgahqSIVkfJKrdINn5FTSgCLOVaoaM2XMLRZJxy0J4Orsd1Vjby650e;wHExpR%2BGJ/Q8EfL8mE9h3ks7M4s%3D

   

USD 3개월물 리보 금리를 보통 본다.

   

리보 삼개월 차트이다.

   

http://stockcharts.com/h-sc/ui

   

http://www.bloomberg.com/quote/US0003M:IND

    

테드 스프레드도 있다.

   

3개월 리보에 미국채 3개월 수익율을 뺀 것이다.

   

미국 국채 3개월 수익률과 리보(LIBOR) 간의 차이를 말한다. TED는 미국 국채(T-Bill)와 유로달러(Euro Dollar)의 약자로, 유로달러란 유럽의 은행에 예치된 미국 달러를 말한다. 유로달러 금리의 기준에는 주로 런던 은행 간 금리인 '리보'가 쓰이며, 리보(LIBOR) 3개월 금리가 유로달러를 대신해 비교대상으로 쓰인다. TED스프레드는 리보에서 미국 국채 3개월 수익률을 빼서 산출하며, 국제적인 단기자금 시장의 여건을 가늠하는 데 활용되어 신용경색 정도를 나타낸다. 스프레드의 증가는 딘기자금 조달 비용이 더 많이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하며, 스프레드의 축소는 자금조달 여건이 개선됨을 의미한다

   

http://www.bloomberg.com/quote/!TEDSP:IND

   

이렇듯 달러인덱스 챠트와 리보 금리와 테드 스프레드를 함께 보면 도움이 많이 될 것이다.

   

여기에 역외환시장(NDF) 챠트도 보면 무척 도움이 될 것이다.

    

http://www.xe.com/currencycharts/?from=USD&to=KRW&view=1D

    

마지막으로 환율 뉴스는 이데일리 마켓인 뉴스가 그날 외환 시황을 정리해주는데 이를 참고하면 좋을 듯하다. 주말에는 연합인포맥스 NDF 기사를 참고하는 것이 현명하다.

   

http://www.edaily.co.kr/news/NewsRead.edy?SCD=DG25&newsid=01407126596413904&DCD=A10303&OutLnkChk=Y

    

이 다섯 가지만 보면 될 듯하다.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29 : 프랑스 혁명과 위그노, 록펠러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1/12/18 01:55

http://blog.naver.com/miavenus/70126752590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29 : 프랑스 혁명과 위그노, 록펠러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1/12/18 

   

1. 프랑스 혁명과 위그노

2. 위그노란?

3. 칼뱅과 교회개혁사

4. 프랑수와 1세와 모나르코마키

5. 루이 14세와 낭트 칙령 폐기

6. 위그노와 록펠러

   

1. 프랑스 혁명과 위그노

   

프랑스는 오늘날 육천만 명 인구를 보유하고 있다. 헌데, 그 면적은 남한의 다섯 배요, 한반도의 두 배 이상이다. 남한 인구 기준으로 환산하면, 프랑스는 삼억 명 땅에 육천만 명이 사는 것이다.  이런 프랑스에 오늘날 프로테스탄트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은 80여만 명이며, 그중 40여만명이 위그노이다. 하면, 나머지는 가톨릭일까. 그렇지는 않다. 가톨릭이 인구의 51% 차지하니 나머지 인구 상당수는 무신론자이거나 이슬림교인 게다. 아무튼 오늘날 40여만에 불과한 위그노는 종교개혁운동이 한창이던 1598년에는 인구 2,000여만영에 125만명으로 프랑스 인구의 6%~10%를 차지하였다. 하면, 소수에 불과한 이들이 종교적으로나 정치경제적으로나 왜 중요한 것일까.

   

"루이 14세가 가톨릭을 프랑스의 국교로 삼기위하여 낭트 칙령을 폐기하자, 수많은 위그노들이 네덜란드, 영국, 프로이센 등지로 망명하였다. 일부는 미국 (현재의 뉴욕캐롤라이나지역)으로 건너가기도 했다. 상공업은 물론, 여러가지 기술을 지니었던 그들이 망명하자, 프랑스의 경제는 몰락하고 말았다. 이것이 후에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는 원인을 가져왔다."

http://ko.wikipedia.org/wiki/%EC%9C%84%EA%B7%B8%EB%85%B8

   

프랑스 혁명이라 할 때는 1789년 혁명, 1830년 7월 혁명, 1848년 2월 혁명을 이야기하거나, 여기에 1871년 파리콤뮌까지 넣기도 하지만, 보통은 1789년 혁명을 말한다. 해서, 다른 프랑스 혁명과 구분하기 위해 1789년 혁명을 프랑스 대혁명이라고 부른다.

   

프랑스 대혁명은 왜 일어났을까. 하나, 종교적으로 신구교간 갈등이 있었다. 둘, 정치적으로 입헌군주제 등 근대 정치적 요구가 비등하였다.  셋, 경제적으로 국가 재정 위기가 심화하였다.  예서, 위그노는 프랑스 대혁명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 직접적인 원인을 낳게 한 종교, 정치, 경제 면에서 모두 영향력을 미치는 세력이었다. 

   

   

2. 위그노란?

   

해서, 오늘은 위그노에 관하여 말하고자 한다.

   

"1)위그노의 어원 '위그노(Huguenot)'는 16C 프랑스의 칼뱅 파 교도에 대한 호칭이다. 위그노라는 말의 어원에 대한 정설은 없다. 여러 개의 어원이 제시되어 왔으나 그 중에 어원으로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는 것은 독일어 Eidgenossen이다. 이것은 '연합한 자' 혹은 '동맹한 자'를 뜻한다. 이처럼 위그노가 '동맹'을 의미하는 말에서 파생된 원인은 그것이 주로 제노바의 동맹시 프라이부르그와 베른을 중심으로 전파되어 그 인근 지역인 리옹과 노르망디 랑그독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프랑스의 옛 왕인 위그 까페(Hugh Carpet)의 '위그'에서 파생되었다는 설도 있다. 이는 기즈家 사람들이 경쟁자인 부르봉가 사람들을 조롱하기 위해 부르는 별명이다. 기즈 가문의 조상은 816년에 왕위에 오른 샤를마뉴이고 부르봉가의 조상은 988년에 왕이 된 위그 까페이기 때문에 왕위 계승의 정통성이 자기들 보다 떨어진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부르봉가 사람들을 위그 까페의 후손이라는 뜻으로 위그노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한편 huguenot 즉 중세에 사용된 아주 작은 화폐단위가 어원이라는 설이다. 이는 프랑스의 칼뱅 파 교도들을 위그노만큼 아무 가치가 없는 존재라고 비아냥거리기 위해 이 단어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위와 같이 위그노에 대한 어원은 통일되지 않고 있으며 어원으로 제시되는 말들의 의미가 상이하다. 그러나 위그노라고 불린 프랑스 개신교들은 위의 단어들이 내포하는 속성들을 가지고 있다. 당시 카톨릭교도들이 개신교들에게 나타낸 적대감 멸시 경멸 등의 의미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2) 위그노 종교개혁의 시작 위그노의 종교개혁운동은 16세기 초에 시작되어 16세기 중엽에 절정에 달한다. 그러나 프랑스의 종교적 개혁의 움직임은 이미 루터 이전부터 있었다. 특히 루터주의의 영향을 받은 파리 대학의 르페브르는 성서 원전을 연구하고 불어판 성서를 간행하였다. 또한 그는 루터의 영향을 받아 참된 종교적 구원은 개인의 신앙에 의해서만 획득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1508년 성경의 원전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논문을 썼고 불어 성서를 간행하기까지 했다. 프랑스에 전파된 루터주의는 귀족과 노동자들에게 확산되었다. 이렇듯 종교개혁이 일어날 사상적 토대는 상당히 일찍 형성되었지만 실제적인 위그노들의 개혁 운동이 시작된 것은 상대적으로 늦은 편이다. 16세기 초엽 르페브르와 같은 대 사상가의 존재와 인쇄술의 공헌으로 종교개혁의 사상은 루터의 독일과 거의 같은 때에 보급되었으나 본격적인 종교개혁 운동이 시작된 것은 독일이나 스위스에 비하여 20년이 늦다."

http://ask.nate.com/knote/view.html?num=559455

   

위그노는 프랑스 프로테스탄트, 혹은 신교도를 말한다.

   

하면, 위그노가 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며, 어떤 배경을 지니고 있을까.

   

하나, 역사적인 배경이다.

   

이베리아반도는 유럽과 아프리카와의 통로가 되어 있었고, 온갖 종족이 이 땅에 거주하였다. BC 3000년대 아프리카로부터 햄족계의 이베리아족이 이주하고, 이어서 BC 1000년 무렵부터 중부유럽 방면의 인도유럽계의 켈트족이 이주해 왔다. 하여, 이베리아반도 중부에서 두 민족의 피가 섞였고, 이것이 에스파냐 민족의 근간을 이루는 켈트 이베리아족이 되었다.

   

헌데, 이런 이베리아족과 켈트족의 이주보다 먼저 피레네산맥의 북방에 있던 종족은 바스크족이라는 학설까지 있는 것이 바스크족이다. 바스크족이 알타미라동굴의 벽화를 남긴 구석기시대인의 직계라고 보는 학설이 그것이다. 바스크족은 이베리아 반도와 프랑스 서남부에 걸쳐 있다.   http://ko.wikipedia.org/wiki/%EB%B0%94%EC%8A%A4%ED%81%AC 

   

또한, BC 1100년 무렵에는 페니키아인이 카디스에 상업기지를 건설하였고, BC 6세기에는 그리스인이 발렌시아 주변에 식민시를 세웠으며, 같은 무렵에 카르타고가 바르셀로나에서 카르타헤나에 걸쳐 식민시를 건설하였다. 카르타고는 또한 안달루시아지방으로부터 에스파냐 중부까지 침입하여 이 땅을 지배하였다. BC 3세기에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에 포에니전쟁이 일어나 패배한 카르타고는 로마인에 의해서 추방되고, 에스파냐의 지중해연안은 로마의 지배 아래 놓였다.

   

게르만족 이동에 쫓긴 켈트인이 프랑스 서남부와 이베리아 반도인 카탈루냐(아라곤), 바스크, 가스코뉴에  새롭게 정착했다.  뿐만 아니라 브르타뉴어도 켈트어인데, 브르타뉴는 본디 영국으로 건너간 켈트인이었는데, 게르만족에 쫓겨 섬에서 프랑스 브르타뉴로 온 켈트인이다. 심지어 바스크어도 켈트언어로 분류한다.  

   

다시 말해, 프랑스에서 위그노가 많이 사는 지역은 역사적으로 온갖 종족 전시장이었다는 점이다.

   

정리하면, 이 지역은 게르만적인 면, 로마적인 면과 함께 켈트, 바스크, 수메르/페니키아/카르타고에 이슬람적인 지배를 잠시 받기도 하여 그 영향까지 섞인 유럽의 가나안 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셈이다.

   

둘, 종교적인 배경이다.  

   

"알렉산드리아교회의 사제(司祭) 아리우스는, '성부·성자·성신(성령)의 세 위격(位格)은 대등하며, 오직 성부만이 영원하다. 성자는 모든 피조물과 같이 창조되었을 뿐, 신이되 피조물과 신의 중개역할을 하고, 신이 그에게 세상을 구원하도록 선택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의 은총을 입어 하느님의 양자로 선택받은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의 주장은 성자를 반신(半神)으로 전락시켰으며, 성자만이 인간과 하느님을 화해시킬 수 있다는 구속 개념을 훼손하였다고 반박하였다. 니케아 공의회(325)에서는 이같은 아리우스의 주장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배척하였으나, 그뒤 아리우스와 그 일파는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 접근하는 데 성공하여 콘스탄티우스 2세 아래서는 전 로마제국을 지배할 만큼 세력을 떨쳤다. 콘스탄티우스 2세 때 아리우스파는 '성자는 성부와 같지 않다'라고 과격한 입장을 선언하여 온건파를 자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엄격(嚴格) 아리우스파와 반(半)아리우스파의 분열이 일어난 데다 황제의 죽음(361)까지 겹치자 급속도로 몰락하였다. 제1회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는 니케아 신경(信經)을 재확인하고 아리우스파 문제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뒤로도 아리우스파는 제국의 북쪽 게르만인(人)들 사이에 널리 퍼져 게르만인의 민족적 종교라고도 할 만한 위치를 얻었다. "

[출처] 아리우스파 [派, Arianism ] | 네이버 백과사전

   

종교 개혁사

http://blog.naver.com/freemcmxcix/10123946925

   

게르만족은 아리우스파 기독교를 신봉한 편이었다. 헌데, 갈리아땅으로 온 게르만 족 중 하나인 살리 프랑크족의 왕 클로비스는 481년 교회와 프랑크족, 로마인들의 지지를 받으며 프랑크 왕국을 건설했다. 클로비스가 메로빙거 가문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가 세운 왕조를 메로빙거 왕조라고 한다. 496년, 그는 신하 약 400명과 함께 정통 아나타시우스파로 개종하여 과거의 로마 귀족과 로마 교회와 제휴했다.  클로비스가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원주민들과의 종교적 마찰이 줄어들었고, 로마 교황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클로비스가 개종한 이유는 갈리아 중복부 지역이 전략적 요충지여서 로마 문화가 융성하였고 이로 인해 로마화한 켈트족이 많이 살았기 때문에 이들 원주민과의 융합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프랑스 서남부의 서고트왕국, 동남부의 부르군트 왕국이 게르만족의 민족종교이다시피 한 아리우스파를 가톨릭으로 개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이유는 프랑스 남부 지역에서의 켈트족들이 로마화하지 않았던 데서 찾아야 할 듯싶다. 

   

카타리파가 중세에 융성한 것도 프랑스 남부 지역이다.  카타리파 또는 알비파는 12세기에서 13세기까지 프랑스 남부의 알비와 툴루즈를 중심으로 활동하다 가톨릭이 이단으로 정죄한 기독교 교파이다.

   

이러한 반 가톨릭적인 종교적 전통 때문인지 이 지역에서 독일 루터파 종교개혁운동에 적극적으로 호응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바로 이런 이유로 칼뱅파, 혹은 위그노파는 다른 교파에게 아리우스파라는 비난을 받곤 했는데, 칼뱅은 정작 아리우스파에 적대적이었다.

   

셋, 경제적인 배경이다.

   

위그노인은 은행가, 상인, 수공업자가 많았다. 이 시기 위그노인에 중산층 시민이 많은 이유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1. 프랑스 남부는 기원전부터 지중해 무역이 활발했던 지역이다. 2. 이베리아 반도는 13세기까지 이슬람이 지배하던 지역이다. 이 시기 유대교로 개종한 카르타고 후예들이 맹활약한다. 헌데, 1492년 당시 유럽에서 가장 선진적인 기술을 보유하였던 유태인을 에스파냐 종교재판소가 추방한다. 이 사건으로 유태인들이 해외로 이주하였다. 이들 중에는 로스차일드 가문처럼 독일로 이주한 이들도 있고, 네덜란드로 이주한 이들도 있는데, 일부는 신분을 속이고 프랑스로 이주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다른 지역은 몰라도 바스크 지역은 가능했다. 정치적 피신을 상호 받아주는 지역이었다. 유태인 몽테뉴가 이런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3. 칼뱅의 청부론, 부의 축적을 옹호한 교리가 중산층 환영을 받았다.

   

3. 칼뱅과 교회개혁사

   

http://blog.naver.com/gracepark69/80119986582

   

"프랑스 북부 피카르디 지방 누아용 출생. 아버지는 지방 귀족의 비서 ·경리 등으로 일한 소시민이었다. 1523~1528년 파리에서 신학을, 그 후 오를레앙 부르주의 대학에서는 법학을 공부했다. 1532년 세네카의 《관용에 대하여》의 주해(註解)를 발표하여 인문주의자로서의 학문적 재능을 인정받았다. 1533년 에라스뮈스와 루터를 인용한 이단적 강연의 초고를 썼다는 혐의를 받고, 은신해 지내면서 교회를 초기 사도시대의 순수한 모습으로 복귀시킬 것을 다짐하고 로마 가톨릭 교회와 결별했다. 그는 이른바 '돌연한 회심(回心)'에 의해 복음주의적(福音主義的), 즉 프로테스탄트주의의 입장을 명확히 했다. 1535년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의 이단에 대한 박해로 신변의 위험을 느낀 그는 스위스의 바젤로 피신하여, 그 곳에서 1536년 복음주의의 고전이 된 《그리스도교 강요(綱要: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를 저술하였다. 이것은 박해받고 있는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티즘에 대해 변호하고 그 신앙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무렵, 제네바종교개혁을 위해 함께 일할 것을 G.파렐에게서 요청받고 그의 종교개혁 운동에 참가하였다. 그런데 처음부터 신권정치(神權政治)에 기반을 둔 엄격한 개혁을 추진하려 했기 때문에 파렐과 함께 추방되어,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로 갔다. 그는 그곳에서 설교자(說敎者) ·신학교수로 있으면서 《로마서 주해》를 저술, 추기경 사드레와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는데, 3년 후에는 상황의 변화로 다시 제네바에 초빙되어 거기서 《교회규율》(1542)을 제정하고 교회제도를 정비하여, 세르베토스 등의 인문주의자들을 누르고 제네바의 일반 시민에게도 엄격한 신앙생활을 요구하여, 신정정치적 체제를 수립하였다. 제네바는 그 후 종교개혁파의 중심지로서 전 유럽에 영향을 끼쳤다." 

[출처] 장 칼뱅 | 네이버 백과사전

   

   

'프랑스 고백서' 또는 위그노도피장소의 이름을 따서 '라로셸신앙고백(Confessio de La Rochelle)'이라고도 한다. 기본구조는 칼뱅이 초안했고 1559년에 그의 제자들이 완전히 정리한 것이다. 여기에 서명한 사람은 왕비인 나바라의 요한나(Johanna von Navarra), 제독이던 드 콜리니(De Coligny)와 그리고 베자(Theodor Beza)였다. 이 고백서는 1556년에는 카를 9세의, 1571년에는 앙리 4세의 재가를 받았으며, 1559년에는 제네바의 성서출판사에서 인쇄되었고 교회법과 더불어 하나의 신앙고백서로 성장했다. 위험천만한 시대에 생겨났고 여러 번 피로 인(印)을 친, 40가지 조항으로 된 이 고백서는 사도신경의 구조에 따라 신학적인 문제는 물론 국가권력에 대한 문제를 다루었다. 특징은 예정론인간론그리스도론 사이에 위치하고 율법론이 그리스도론과 더불어 성화론(聖化論)과 교회론 사이에 위치한다. 네덜란드 고백서와 공통되는 점은 창조사역과 섭리사역을 통한 계시와 하느님의 말씀과 정경(正經)을 통한 계시 등 이중적인 하느님 계시를 강조한 점이다. 이런 점에서 이 고백서는 나중에 생겨난 고백서의 모범이 되었다. 이 고백서는 인간 이성은 영적인 어두움 때문에 신(神)을 인식하는 데 있어서 왜곡될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창조물을 통한 계시가 절대적이지 못함을 지적하고 있다.

[출처] 갈리아 신앙고백서 [信仰告白書, Confessio Gallicana ] | 네이버 백과사전

   

"2. 칼빈과 프랑스의 위그노 교회

   

프랑스의 개혁주의 교회는 유럽의 그 어느 국가에서보다 극심한 박해를 경험했고 이 과정에서 전 유럽에 칼빈의 신학과 교회의 이상을 확산시킨 신앙적 피난민들을 많이 배출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칼빈주의자들은 칼빈 자신이 그랬듯이 박해와 피난의 상황 가운데 그들이 추구한 성경적인 교회 개혁을 위한 신앙고백과 실천적 노력을 경주했다.

   

칼빈이 본격적으로 종교개혁 운동에 동참하기 이전부터 프랑스에서는 인문주의와 루터의 영향으로 종교개혁 신학을 지지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그러나 프랑스의 종교 개혁 운동이 구체적인 교회의 설립과 통일적인 운동으로 나타나는 데 있어서는 칼빈의 영향이 컸다. 칼빈은 그의 모국이었던 프랑스 교회의 개혁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지속적인 서신 교환을 통해 고난 당하는 고국의 개혁주의 교회들을 위로하고 격려했다. 칼빈이 제네바에서 지도력을 확립한 1555년 이후부터는 1559년 설립된 제네바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칼빈과 제네바에 있던 프랑스 피난민 교회는 고국의 개혁 교회를 세우고 지원하는 일에 박차를 가했다. 그 결과 괄목할만한 수의 개혁주의 교회들이 급속하고 설립되었다. 1556년 최초의 개혁주의 교회가 파리에 세워진 이후 불과 3년 뒤인 1559년 5월 25일에서 29일까지 파리에서 최초의 개혁파 교회 총회가 모였을 때 72개의 교회 대표들이 그 총회에 참석했다. 파리 총회에서는 제네바 교회를 모델로 삼아 갈리아 신앙고백(Gallican Confession)과 치리서를 채택하여 통일성 있고 신학 위에 기초한 교회의 연합을 기했다. 칼빈은 이 신앙고백의 초안을 작성했고 그의 제자인 앙토완느 드 라 로쉐 샹디외(Antoine de la Roche Chandieu, 1534-1591)가 이 초안을 수정해 최종본을 완성했다. 샹디외는 제네바에서 칼빈의 제작 된 이후 1556년경 파리에 창설된 개혁파 교회의 두 번째 목사였으며 파리를 중심으로 설립된 개혁주의 교회들의 조직화 되는데 결정적이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그는 1562년 종교 전쟁이 발발했을 때와 1572년 발생한 성 바돌로뮤 축일 대학살 때 11년 간 제네바와 로잔에서 피난민의 삶을 살아야 했는데 그의 이런 피난민의 삶은 프랑스의 칼빈주의자들이 경험했던 고난과 피난의 삶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박해의 상황 가운데 제정된 갈리아 신앙고백은 35개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서문에 프랑스의 "고난 받는 신자들"과 이 고백을 듣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헌정한다고 기록하였다.

   

파리 총회 이후 프랑스의 개혁주의 교회는 더 급속도로 성장하여 1561년 라 로셀에서 총회가 모였을 때에는 이미 2000여 개가 넘는 교회들이 설립되었으며 칼빈주의적 신앙 고백을 따르는 회중의 수는 150만에서 200만을 헤아리고 있었다. 이런 급속한 위그노 교회의 성장은 많은 목회자들의 수급을 필요로 하였고 칼빈의 제네바 아카데미는 이 수요를 채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공식적인 신학 교육 기관이었다. 그러나 철저한 목회자 양성을 추구한 제네바 개혁자들의 성향과 아카데미의 영세성으로 인해 1567년까지 제네바가 프랑스에 제공할 수 있었던 목회자의 수는 120명 정도에 불과했다.

   

프랑스의 내의 개혁주의 교회들은 초기에는 주로 수공업자, 숙련공, 중산층 상인들을 중심으로 확대되어 갔으나 이후 교회가 급속도로 부흥하면서 많은 귀족들 역시 칼빈주의 사상에 동참했다. 발로아 왕조를 이어 프랑스의 왕조를 형성한 부르봉 가문과 프랑스 제독이었던 가르파르 드 콜리니(Gaspard de Coligny, 1519-1572)가 속해 있던 몽모겡시 가문의 여러 인물들도 칼빈주의를 따르는 위그노 교회에 합류하였다. 프란시스 1세 사망 이후 강력한 지도력을 행사하지 못한 앙리 2세와 프란시스 2세의 치세 가운데에서도 위그노 교회와 귀족들은 계속해서 로마 카톨릭 교회를 지지하는 귀족들로부터 불이익과 핍박을 당했다. 그들은 이런 상황을 극복하고자 1560년 암보아즈 음모 사건과 같이 폭력을 동원해 왕에 대한 카톨릭 귀족들의 영향력을 제거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칼빈은 그들과 다른 입장을 견지했다. 녹스나 불링거, 심지어 베자까지도 교회 개혁을 위한 정치적 변혁을 지지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칼빈 자신은 정치적 혁명을 통한 개혁 교회의 수립과 확장을 지속적으로 반대한 것이다. 그는 군사적 정치적 혁명보다는 고난을 감수하거나 신앙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라면 망명할 것을 장려했다.

   

프란시스 2세가 1560년 사망한 이후 프랑스 왕위를 계승한 어린 왕 샤를르 9세의 섭정을 담당했던 캐더린 드 메디치(Catherine de Medici, 1519-1589)는 1561년 파와시에서 종교 회의를 소집해 갈등 상황에 있는 로마 카톨릭파 귀족들과 위그노파 귀족들을 대화를 통해 화해시키려 해다. 그러나 결코 타협할 수 없는 종교적 신념의 차이를 가지고 있던 양측은 화해에 이르지 못했고 프와시 회의는 1562년의 관용령을 통해 위그노들의 신앙을 보호하는 정도에 성과만을 낳았다. 이런 관용 정책도 잠시였고 강력한 로마 카톨리파 귀족이었던 기즈 가문과 그 배후에 있는 스페인의 압력에 정치적 위협을 느낀 캐더린은 결국 로마 카톨릭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선회했다. 그 결과 1562년 3월 기즈 공작이 이끄는 토벌대가 바시에서 예배를 드리던 위그노 70여 명을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졌고 이 사건을 계기로 본격적인 프랑스의 종교전쟁이 시작되었다. 칼빈이 계속해서 폭력과 전쟁을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위그노파 귀족들은 무력으로 저항했다. 위그노와 카톨릭 세력 사이에서 30년간 8차례에 걸쳐 벌어진 프랑스의 종교 내전은 사실 종교적 신념의 차이 때문만 아니라 프란시스 1세 치하에서 세력을 키운 로렌 지역 출신의 기즈 가문과 이에 맞선 부르봉 가문 사이의 정치적 알력이 크게 작용하였다. 기즈 공작과 앙주의 앙리 - 이후 앙리 3세 - 의 음모로 벌어진 1572년의 성 바돌로뮤 축일 대학살은 콜리니와 그가 대표하던 위그노 귀족들의 세력이 무너지게 되는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1572년 8월 24일 발생한 성 바돌로뮤 축일 사건은 캐더린의 딸 마가렛 발로아와 위그노였던 안톤 부르봉의 아들 앙리 부르봉의 결혼식을 축하하려 모인 위그노파 귀족들 중 200 여명을 기즈 공작이 주동한 카톨릭 세력이 학살한 사건이다. 파리에서 벌어진 이 사건 이후 왕실의 방관 속에서 프랑스 전역에 걸쳐 위그노와 개신교도들을 향하 학살이 잫애되었고 이후 7000명에서 9000명의 위그노들이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건 후 프랑스의 정치적 지형은 크게 변화했고 위그노들은 정치적 영향력을 급속히 상실했다. 앙리 3세에 이어 왕위를 계승한 앙리 부르봉마저 격렬한 권력 투쟁의 과정에서 자신의 왕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 로마 카톨릭 신앙으로 다시 개종했다. 비록 위그노파 귀족들의 계속되는 투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관용책으로 발표된 낭트 칙령 이후 일정 기간 위그노들은 종교적 자유를 획득해 내기도 했지만 프랑스의 칼빈주의자들은 16세기 후반 이후 거의 대부분의 시기를 소수자로서 당하는 핍박 가운데 보내야 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개혁주의 교회는 핍박과 차별 가운데서도 남부 프랑스를 중심으로 신앙적 일관성을 지키고 전수하기 위해 자신들의 개혁주의적 신앙 고백에 기초한 교회의 설립 노력을 꾸준히 지속했다.

http://www.apologia.co.kr/lib/16950

   

   

   

http://jbjoon63.blog.me/30094352914

   

   

   

루터와 칼뱅의 16세기 종교개혁운동과 중세 교회개혁운동이 차이가 있다.

   

"본격적인 종교개혁은 M.루터에 의해서 비롯되었으나 루터 이전에도 개혁의 선구자로 불리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민중 사이에서 성서적 신앙을 인도한 프랑스의 발도, 롤러드파(派)를 이끌던 영국의 위클리프, 위클리프의 사상을 이어받아 독립운동을 일으킨 보헤미아의 후스, 윤리적 쇄신을 시도하였다가 끝내 순교한 피렌체사보나롤라를 들 수 있다. 그러나 르네상스적 인문주의와 종교개혁과는 본질적으로 성격을 달리한다. 즉, 르네상스적 인문주의는 예술적이고 귀족적이어서 참으로 역사를 변혁할 힘을 갖지 못하였다. 이와는 달리 종교개혁운동은 깊이 민중의 마음을 포착하여 역사를 움직였다. 마찬가지로 근대의 서곡이라 할 르네상스와 종교개혁과는 그 출발점과 역사상 미친 영향면에서 볼 때 근본적으로 다르다."

[출처] 종교개혁 [宗敎改革, Reformation ] | 네이버 백과사전

   

16세기 종교개혁운동이 깊이 민중의 마음을 포착하여 역사를 움직인 연유는 무엇일까. 경제이다. 15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유럽 경제의 중심은 지중해 무역을 독점했던 이태리였다. 물론 중세 온난화와 십자군 원정 시기에 지중해와 북해를 내륙으로 잇는 프랑스 상파뉴 지역에서 교역이 활발하여 프랑스 미남왕이 한때 교황을 좌지우지할 때도 있었으나 중세온난화가 지나간 뒤에는 롬바드 지역이 재부상하여 유럽 경제의 핵이 된 것이다. 그 중심에 메디치 가문이 있고. 허나, 베네치아가 독점하면서 활로를 찾아 대서양 교역에 나섰던 이베리아 국가들이 대항해시대를 열면서 유럽 경제의 중심이 롬바르디아에서 이동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경제 중심이 움직이니 정치 권력이 변화하고, 변화한 정치 권력에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종교 변혁, 사상 혁신이 필수적인 것이다.

   

이를 루터적, 칼뱅적 언어를 인드라 고유의 패러디적 발언으로 말하자. 영적 사도(의인)와 영적 교회와 영적 정부를 총괄하는 하늘 나라는 중세에도 있었다.  허나, 중세에는 죄 많은 지상의 정부와 만나지 못했다.  문제는 죄 많은 지상의 정부이다. 루터는 지상의 권력을 움직인다는 발상에 대한 경계가 유난했다. 인간의 유한한 사고가 말썽을 부릴 것을 우려하여 거리를 두었다. 칼뱅 역시 유사했지만, 루터보다는 좀 더 과감했다. 정치적으로 억압을 받는다면 투쟁하기 보다 망명하라.

   

교회는 대표적으로 스코틀랜드 장로제처럼 민주적으로 운영해야 한다. 허나, 인간이 만든 결과에 회의하라. 인간이 만들었기에 온전할 수 없다. 인간의 무오류성이야말로 인간이 가장 경계해야 할 바벨탑적 교훈이다.  동시에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더라도 지상과 합일해야 한다. 완전하나 인간이 이해하기에는 인간이 여전히 야만인 수준과 다를 바 없기에 어렵다.  아무리 영웅 자질을 타고났더라도 시대가 원하지 않는다면 영웅이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 반면, 시대가 원하는 요구를 이해하더라도 신의 뜻이 아니라면 역시 영웅은 세상을 1그램도 변화시킬 수 없다.

   

이러한 정치종교사상을 전 세계적으로 가장 잘 설명한 신화가 단군 신화이다. 하늘 사람과 땅 사람이 만나 결혼하여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것이다. 세상은 하늘 사람만으로도 땅 사람만으로도 이룰 수 없다. 하늘과 땅 사람이 합심해야 세상을 만든다. 세상에 이런 정치종교사상은 수메르 신화와 비견할 만큼 흥미로운 신화임이 틀림없다.

   

   

4. 프랑수와 1세와 모나르코마키

   

"[편집] 관료정치 개혁

1539년, 프랑수아는 자신의 성에서 빌레르 코트레 칙령을 반포함으로써 왕국의 행정 언어를 라틴어 대신 프랑스어로 바꾸었다. 이 칙령은 필수적으로 성직자들에게 탄생, 결혼 그리고 죽음과 설립을 모든 교구의 호적 등기소에 등록하라고 요구하였다. 이것은 유럽에서 이용할 수 있는 친자 관계와 더불어 인구 유동 통계의 첫 번째 기록을 정착시켰다.

[편집] 종교

프랑수아의 통치 기간에 서유럽 기독교의 분열이 일어났다. 마르틴 루터로마 가톨릭교회의 타락과 방종을 비난하자 이 소식은 곧 프랑스를 포함한 많은 유럽 국가에 널리 퍼져 프로테스탄트 운동의 형성을 가져오게 하였다. 처음에는 그가 가장 사랑하는 누이 마르그리트 드 나바르의 영향 아래 프랑수아는 새로운 운동에 비교적 관대하였으며, 한층 더 깊이 생각한 후 많은 독일 제후들이 생각을 바꾸어 그의 적 카를 5세에 반대하면서 그것이 정치적으로 유용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개신교에 대한 프랑수아의 태도는 1534년 10월 17일 밤에 일어난 '벽보 사건' 후에 바뀌었다. 개신교도들은 파리 시내와 다른 주요 도시의 여러 장소에 미사를 부정하는 격문을 붙이고 다녔으며, 심지어 국왕의 침실문에까지 붙였다. 이 벽보를 작성한 사람은 개신교의 목사 앙트완느 마르코르트였다. 대다수 열렬한 가톨릭교도들은 벽보의 내용을 읽고 격분하였다. 프랑수아도 프로테스탄트 운동을 자신에 반대하는 음모로 보았으며, 프로테스탄티즘 신봉자들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개신교도들은 모두 투옥당하고 처형되었다. 어떤 지역에서는 마을 전체가 파괴되었다. 인쇄물은 검열을 받았으며 프로테스탄트를 이끈 칼뱅과 같은 이들은 강제로 국외추방을 당했다."

http://ko.wikipedia.org/wiki/%ED%94%84%EB%9E%91%EC%88%98%EC%95%84_1%EC%84%B8_(%ED%94%84%EB%9E%91%EC%8A%A4)

   

인드라가 보기에 프로수아 1세는 루이 14세의 롤모델이 아니었나 싶다.

   

이러한 전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 문제에서는 1504년 재정 개혁과 1508년 세금 동결 및 세금 징수과정 개선 등 많은 노력을 기울여 프랑스 국내에서 큰 지지를 받아 1506년 투르에서 열린 삼부회에서 루이 12세는 '국민의 아버지'(프랑스어: Père Du Peuple)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http://ko.wikipedia.org/wiki/%ED%94%84%EB%9E%91%EC%8A%A4%EC%9D%98_%EB%A3%A8%EC%9D%B4_12%EC%84%B8

   

반면, 루이 12세와 앙리 4세가 오버랩하고^^!

   

역사에는 '만약에'가 없지만, 잠시 팩션화시켜 프랑수와 1세가 영국왕 헨리처럼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독립을 했다면 프랑스 역사는 물론 세계사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프랑수와 1세 누이 마르그리트 드 나바르도 위그노였던 만큼 카를 5세와 맞서 영국 국교회 방식으로 프랑스 국교회로 가는 것이다. 교회 수장은 프랑수와 1세가 되고. 스코틀랜드 피의 매리 여왕이 프랑스와 아무런 연고를 지니지 못할 수도 있고~! 물론 존 녹스의 장로교 투쟁이 있기에 역사가 달라지지 않았을 가능성도 크다. 스코틀랜드 장로교는 박해와 탄압 속에서 영국 국교도로부터도 멀어졌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도 처음부터 신교도가 많지 않았다. 엘리자베스 초반 집권기에는 가톨릭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허나, 후반으로 갈수록 신교도가 많아졌다는 것이다. 해서, 역사가들은 프랑스에서 신교가 뿌리내리지 못한 이유를 위그노파가 프랑스 남부에만 치중한 데서 찾기도 한다. 즉, 프랑스 수도인 파리를 장악했어야 했다고 한다. 이는 무슨 말인가. 프랑스 왕이 결심해야 할 문제였던 게다.

   

허나, 이 문제는 혁명적인 발상이다. 메로빙거 왕조 이후 왕조의 정통성을 가톨릭에 의존했던 만큼 영국 헨리왕처럼 왕 자신에게 절실한 문제가 아니라면, 다시 말해 순교를 각오하지 않는다면 어려운 일인 게다. 프랑수와 1세가 국교회를 선언하지 않고 가톨릭 교회를 행정기구화하는 정도에서 멈춘 것이 결국 프랑스 혁명에서 루이 16세 처형이 이루어진 배경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여, 위그노파에서 결국 모나르코마키가 나온 것이다. 화해할 수 없는 적대 노선.

   

"폭군방벌론자(暴君放伐論者)'라고도 한다. 유럽에서 16세기에 무력저항권론을 주창하여 군주에 대한 무력투쟁을 정당화한 프로테스탄트, 카톨릭 양방의 정치사상가의 총칭. '군주에게 도전하는 자들'이라는 의미의 그리스어에서 합성된 라틴어로 바클리(William Barclay)에 의한 비판을 위한 명명(命名)(『왕국ㆍ왕권론』 1600)이다. 즉 구교와 군주가 결합했을 때, 이 군주는 인민과의 계약을 위배한 폭군이므로, 방축살해(放逐殺害)하는 것도 정당하다는 이론이다. 무력 저항권론은 종교개혁에 이은 박해ㆍ전쟁 속에서 프로테스탄트가 형성하였다.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가 가장 체계적이며, 대표적인 저작은 오트만(Francois Hotman)의 『프랑코 갈리아』(1573), 베이즈(Théodore de Béze)의 『종속적 통치자의 권리』(1574), 듀플레시 모르네(Philippe du Plessis Mornay)의 『폭군에 대한 권리주장』(1579)이다. 그들은 신분제의회나 종속적 통치자(상급귀족이나 지방ㆍ도시의 대표)에 의해 인민ㆍ국가주권이 행사되는 제한군주정론을 전개하여 무력저항권을 변증하였다. 프랑스에서 프로테스탄트의 왕을 추대할 가능성이 발생하자 카톨릭도 교황지상주의 하에서 프로테스탄트의 이론을 도입한 무력저항권론을 형성하였다. 대표적 저작은 예수회 마리아나(Juan de Mariana)의 『군주ㆍ군주교육론』(1599)이다.

   

모나르코마키는 왕권신수설이나 보댕(Jean Bodin)의 주권론에 기초한 절대군주정론과 대결하고, 다음 세기의 로크(John Locke)에 영향을 미쳐 입헌주의의 선구가 된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727062

   

예서, 특히 중요한 것은 1579년에 등장한 위그노파의 '폭군에 대한 항변'이다. 이 작자 미상의 '폭군에 대한 항변'은 신교도들 사이에서 엄청난 반향을 낳았다. 왕 살해를 정당화했다. 왜 이러한 논의가 필요했을까. 앙리 2세의 죽음과 무관치 않은 듯싶다.

   

http://blog.daum.net/sirius2375/819

   

칼레의 시민으로 유명한 영국 식민지 칼레를 해방시킨 앙리 2세가 위그노 탄압을 강화하겠다고 선언한 직후 참가한 마상시합에서 눈에 찔려 결국 죽는다. 이 죽음을 둘러싸고 위그노 암살 음모론이 비등하면서 가톨릭 측에서 맹공격에 나서니 위그노 전쟁을 낳았으며, 앙리 3세와 앙리 4세가 가톨릭 자객에게 연달아 암살당하게 되었던 게다. 이러한 선상에서 왕의 암살이 사실이든,아니든 신학적 논란을 낳았을 것이다.

   

해서, 이는 영국에서도 출판하여 영국에서 찰스 1세를 처형하는데, 이론적 근거를 마련했다는 평가가 있을 만큼 베스트셀러가 되어 이후에도 몇 차례에 걸쳐 재출판되었다고 한다. 하여, 프랑스 혁명 당시 루이 16세에 대한 처형은 불가피했던 것이다. 부르봉 왕가에 대한 삼백 년간의 원한이 있었으니까. 헌데, 이를 성당기사단과 연관시키는 건 코웃음칠 만큼 어줍잖은 음모론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5. 루이 14세와 낭트 칙령 폐기

   

루이 14세는 1785년 낭트 칙령을 폐기한다. 이로 인해, 프랑스 위그노 인구 백여만 명 중 이십여만 명이 해외로 이주했다고 한다. 허나, 이는 과장된 숫자라고 본다.

   

가령 신교 측 입장에서는 위그노인 숫자를 늘이고 싶을 것이다. 해서, 여러 자료를 보았는데, 유태인보다는 뻥이 약했다. 대부분 2배 뻥튀기 정도 한다. 또한, 1572년 '성 바르톨로메오 학살' 과정에서 숨진 사람도 팔천여 명 정도로 보이는데, 17,000명 정도로 간다. 반면, 유태인은? 열 배 뻥튀기가 기본이다. 한 명 죽으면 열 명이 죽었다고 난리인 게 유태인이니까^^! 그래서일까. 어떤 자료는 유태인 식대로 희생자를  30,000, 100,000명까지 잡기도 한다^^!

   

루이 14세가 낭트 칙령을 폐기할 때 해외 이주를 금했다. 스페인 추방령으로 인해 에스파냐 경제가 흔들리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해서, 많은 수의 위그노인이 당시 해외로 이주했다고 보기 힘들다. 위그노인을 가장 많이 받았다는 영국도 이만 명 정도이다. 독일도 그 정도 된다고 할 때, 영국, 네덜란드, 독일, 스위스, 미국 등 아메리카, 남아공 정도로 보면, 아무리 많아야 십만 명 정도이다. 가령 남아공에는 200여명만 이주했다고 하니까. 그조차 남아공 백인의 1/6을 차지했다나~!

   

더군다나 해외 이주할 정도라면 대부분 중산층인 게다. 같은 위그노파여도 농민은 해외 이주할 엄두를 낼 수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프랑스에 남아 있던 위그노 농민이 1700년대 루이 14세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해서, 인드라가 정리한다면, 낭트 칙령 폐기로 해외로 이주한 위그노인이 20만명이라는 것이 아니라 프랑스 위그노파 탄압으로 그간 해외로 이주한 위그노파 인원이 이십만명 선이 아닌가 싶다. 이백 년간 이십만 명이면 적당하다 본다.

   

하면, 왜 루이 14세는 종교 다원주의 정책이라 할 수 있는 낭트 칙령을 폐기해야만 했을까.

   

이에 대해서는 뚜렷한 정설이 없는 것 같다.

   

하나, 용기병을 위그노파 지역에 투입한 뒤 사건 사고를 일으켜서 위그노파가 들고 일어나자 이를 빌미로 폐기했다는 가설. 여기에는  과정만 있을 뿐, 루이 14세가 폐기한 배경을 알 수 없다.

   

   

둘, 맹트농 후작 부인 연루설.

   

http://blog.daum.net/elara1020/8464454

   

현재까지 불확실하면서도 다른 가설이 신통치 않아 지지받고 있는 가설이다. 맹트농 가계는 신교도 가문인데, 맹트농 자신이 가톨릭이 될 만큼 열성적인 신도였다고 한다.

   

하면, 루이 14세는 왜 맹트농을 총애했던가. 1680년대에 이르르면 루이 14세가 총애하던 콜베르도 죽는다. 또한, 왕비도 죽었다.

   

http://blog.daum.net/elara1020/8464418

   

루이 14세가 맹트농을 총애한 것은 성적인 이유가 아니라 정신적인 이유였다. 루이 14세는 1680년대에 이르러 방탕했던 자신을 반성하고 경건한 삶을 살기 시작했는데, 그때 루이 14세가 가장 의존한 인물이 맹트농이었다. 해서, 종교적인 이유로 낭트칙령을 폐기했다고 볼 수 있다.

   

   

인드라가 보기에는, 루이 14세가 테레즈 왕비를 조강지처로 나름 아낀 듯싶다. 테레즈 왕비와 맹트농 공통점은 미모와는 거리가 있는 후덕한 몸집의 소유자다. 가끔 우리 주변에 매우 잘 생긴 남자랑 결혼하는 여자가 의외로 안 생긴 여자들이 좀 있는데, 이유는 간단하다. 잘 생긴 남자들이란 여자랑 수도 없이 엮이고 꼬였을 터이니 마음 착한 여성을 선호한다는 이치. 아무튼 루이 14세는 맹트농과 비밀결혼까지 했다. 왕비 테레즈를 연상시키는 것일까? 해서, 루이 14세 전반기를 마자랭, 중반기를 콜베르, 하반기를 맹트농이라 말할 수도 있는 셈이다.

   

셋, 루이 14세의 과대망상

   

루이 14세가 낭트 칙령을 폐기한 것은 루이 14세의 과대망상이 결정적인 것이지, 종교적 문제는 부차적인 문제였다는 것이 인드라 가설이다.

   

왜 과대망상인가.

   

이는 루이 14세에 대해 자세히 언급해야 하므로 나중에 따로 프랑스혁명과 루이 14세로 장을 할애할 것이다.

   

루이 14세는 세종대왕 만큼 숱한 여성들을 섭렵했던 엄청난 정력가요, 하루에 8시간은 반드시 정무를 볼 만큼 일 중독증 환자였다. 이런 루이 14세가 여성에게 정신적인 의존을 할 수 있지만, 그 여성에게 정무를 모두 맡길 만큼 바보가 아니었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루이 14세는 재정총감없이 스스로 모든 것을 하려고 했다. 리슐리외서부터 콜베르에 이르기까지 왕의 권력이 분산화되는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 루이 14세가 어린 시절 지방을 떠돌며 생활해야 했던 경험이 큰 역할을 한 셈이다.

   

바로 이 대목. 즉, 루이 14세가 그 모든 것이기 위해서는 그 모든 것이기 위한 정신적인 위로가 필요했고, 그 위로를 맹트농이 해주었을 뿐이다.

   

게다가 마자랭과 콜베르로 이어지는 천재적인 재정 관료들의 노력으로 프랑스는 당대 유럽 최강자로 떠올랐다. 허나, 루이 14세는 그 모든 업적을 자기 것으로 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전 시기는 섭정처럼 자신이 관련 업무를 잘 몰라 맡긴 것이고, 이제 자신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나선 셈이다.

   

하면, 그것이 왜 낭트 칙령 폐기인가.

   

이는 지난 프랑스 역사를 살펴야 하는데, 간단히 삼총사에 등장했던 리슐리외 추기경 이야기만 하면 된다. 리슐리외가 신교도를 탄압했던 것은 종교적인 이유가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였다. 국가 통합을 위한 것이었다. 실제로 리슐리외는 전쟁이나 외교에서는 종교가 없다고 할 만큼 유연했다. 해서, 잉글랜드와도 동맹을 맺는 등 실용적 노선을 보여주었다. 이는 리슐리외만이 예외가 아니다. 심지어 메디치 가문의 딸들이자 프랑스 왕비들도 종교에 관해 관용적 노선을 추구했던 것이다. 이러한 전통은 콜베르까지 이어져온 정책이다. 결국 루이 14세는 국론 통일, 국가 통일의 일환으로 낭트 칙령을 폐기한 것이다.

   

게다가 이웃 왕국 사정이 하나같이 좋지 않은 데 비해, 루이 14세는 교황청으로부터 가톨릭의 유일한 안전판이라 부를 수 있는 상황. 욕심을 내지 않으면 인간이 아닐 수 있다.

   

하여,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루이 14세는 바벨탑적 욕망으로 빛의 속도로 빨려들어가 결국 프랑스 대혁명의 도화선이 되고만 것이다. 콜베르가 살아 있을 때까지 루이 14는 신의 축복을 받은 듯싶었다. 실제로 여러 행운이 겹쳐 그리 믿는 백성들이 날로 늘어났고, 이것이 루이 14세가 세상 귀족 중에서 가장 다스리기 어렵다는 프랑스 귀족들을 복종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허나, 콜베르 사망 이후, 그 자신이 모든 것을 다 하기 시작했을 때, 프랑스 국운은 그때부터 쇠퇴하기 시작했다.

   

   

   

6. 위그노와 록펠러

   

위그노의 해외 이주는 세계사적인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영국으로 이주한 위그노는 야만국 영국에 엄청난 보물을 안겨다 주었다. 잠사 의류산업, 야채과일 가꾸는 법, 가구 제조술 등을 영국인에게 전수했다. 매뉴펙처  방식 등을 전하여 영국 산업혁명의 모체라고까지 말하기도 한다.

   

네덜란드로 이주한 위그노는 유태인과 함께 네덜란드 상권을 장악했다. 독일로 이주한 위그노는 독일 기계공업의 아버지가 되었다. 록펠러 가문은 위그노 탄압으로 프랑스에서 독일로 이주한 위그노 가문이었다.  이 당시 미국으로 간 위그노도 많았는데, 미국에서도 위그노는 강한 영향을 끼쳤다. 가령 미국 초기 재무장관 해밀튼 어머니가 위그노였다. 워렌 버핏 가문도 위그노이다. 루즈벨트의 외할아버지, 워렌 델라노는 300인 위원회 회원이며, 중국 광동성에서 러셀 공사 총책임자로 있으면서 마약 거래를 담당했다. 무엇보다 스위스로 이주한 위그노는 오늘날 스위스 시계공업(정밀기계)과 스위스 은행이 되었다.

   

루이14세는 자금을 빌리기 위해 낭트 칙령 폐기 이후 스위스로 이주한 위그노와 거래를 해야 했기에 비밀 엄수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스위스 은행의 고객 비밀주의가 시작한 것이다. 이것만 보더라도 루이 14세가 종교적인 이유로 낭트 칙령을 폐기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해서, 프랑스 혁명 당시 프랑스 혁명을 지지한 귀족이나 중산층이 있다면, 상당수는 위그노이거나 위그노에 심정적 동조인 자들이다. 스위스인 네케르가 재정총감이 된 것도 위그노의 위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상당수 입헌군주제파도 위그노와 연관이 깊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해, 프랑스 혁명 당시 우파라고 부르던 이들 상당수가 위그노와 직간접적인 관계였다.

   

이것이 위그노의 빛이라면 그림자는 없을까.

   

프랑스 해적이란 위그노 해적이었다. 위그노는 사략선을 가지고 있어 에스파냐 선박을 효과적으로 약탈할 수 있었다. 이들은 신의 이름으로 가톨릭 이교도 무리의 재산 약탈을 정당화했던 것이다. 위그노 해적이 어찌나 위력이 있던지 1685년 무렵까지 프랑스는 콜베르의 해상 무역 강화 정책으로 영국, 네덜란드 못지 않게 해상에서 위력을 떨칠 수 있었다. 허나, 낭트 칙령 폐기 이후 프랑스는 바다를 영국에 영원히 내어주어야 했다. 물론 영국이 해상 제해권을 완전 장악하는 시기는 1740년대이지만, 그 단초는 낭트 칙령 이후부터인 게다.

   

헌데, 이 시기 해상 무역 주수입원이란 노예 무역이었다. 서아프리카에서 흑인을 짐짝처럼 창고에 쑤셔박고 유럽이나 중동, 아메리카에 팔아먹었다.

   

밀무역의 선두주자이기도 했다. 국가로 돌아가야 할 세금을 중간에서 착복하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프랑스에서 세금을 대납해주고 고리의 이자를 뜯는다는가 하는 다기다양한 악랄한 방식으로 대부업을 하며, 국가 재정을 파탄시키는 데에 혁혁한 공을 세운다. 

   

특히 소금은 국가 산업이었는데, 각 영지마다의 관세가 다른 점을 이용해서 위그노 소금업자들이 폭리를 취했던 것이다. 해서, 프랑스 혁명 당시 영지간 관세를 철폐하자 자코뱅 혁명의 고향, 브르타뉴에서 오히려 반혁명이 일어났던 것이다. 관세 철폐하지 말라고~! 금주법 시대가 지속되기를 바라는 미국 마피아의 원조격이었던 게다.

   

정리하면, 지난 오백여년간 유태인과 위그노는 유대교와 프로테스탄트 관계처럼 사이가 좋았다. 유태인과 위그노 가문끼리 심심찮게 결합하는 예가 많았다. 허나, 어느 순간부터 둘의 관계가 어긋나기 시작한다.

   

1973년 빅터 로스차일드에서 데이비드 록펠러로의 국유본 권력 교체 이후인 게다.

   

국유본 뉴라이트파는 위그노를 중심으로 브레진스키, 요한 바오로 2세로 이어지는 폴란드 커넥션을 통해서 가톨릭을 중립화시켜 국유본 노비네파 유태계를 압박해왔다. 오백년간의 동맹 체제가 깨진 셈인가? 아니면, 이 역시 짜고 고스톱인가?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28 : 프랑스 혁명과 일루미나티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1/12/15 04:23

http://blog.naver.com/miavenus/70126524102  

   

   

   

국유본 기술과 자금 지원하에 개발하고 있는 국유본 꼬붕 정일이 광명성 로케트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27 : 프랑스 혁명과 일루미나티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1/12/15

   

프랑스 혁명에서 일루미나티 문제를 거론하려니 일루미나티를 우선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프리메이슨이나 일루미나티에 대한 입장은 대체로 둘로 구분할 수 있다.

   

전자는 프리메이슨과 일루미나티를 세계를 지배하는 최종 음모 조직으로 보는 것이다. (긍정)

   

후자는 프리메이슨과 일루미나티를 역사적으로 실재했지만, 오늘날에는 게임 유희로나 쓰이는 별 것없는 것으로 본다. (부정)

   

이에 대한 인드라 입장은 후자 같지만, 엄밀하게 말한다면 두 입장 모두를 부정하는 것이다.

   

프리메이슨이나 일루미나티는 국유본이 최근에 활용하는 신상품이다. 해서, 겉보기에는 단지 게임 유희와 같이 보이지만, 국유본이 의도적으로 프리메이슨과 일루미나티 음모론을 인터넷에 유포시키고 있는 것이다. 왜인가. 소설 '푸코의 추'에서 보듯, 국유본은 이런 음모론 떡밥에 낚여서 사람들이 자생적으로 프리메이슨이나 일루미나티 조직을 만들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국유본이 분위기를 조성할 뿐, 실제 개입하지 않으면, 완벽한 알리바이가 나오기 때문이다. 하여, 일루미나티 조직 따위를 만들어서 빈 라덴 흉내를 내면 이를 빌미로 사이버 전쟁을 한다. 이것이 제이 록펠러의 사이버방위사령부 디도스 프로젝트 기본 전략인 게다.  이것이 불가능하게 보이는가? 아니다. 실제로 국유본은 1980년대 한국에서 이와 같은 실험을 한 바 있다. 난 데 없이 한국에 1960년대 해방신학 바람을 불어넣어 자생적인 좌파 조직들을 양산시켰으니까. 국유본은 스탠퍼드 연구소 실험실과 같은 데서 검증한 결과물로 사회 실험에 나서는 격이다.  잊지 마시라. 국유본은 분위기만 조성하는 것이다.

   

정리하면, 국유본이 프리메이슨/일루미나티 음모론을 양산시키고 있다. 이때, 국유본이 음모론을 인터넷에 유포시키는 방식은 무엇인가.

   

하나, 프리메이슨/일루미나티에 대한 노이즈 마케팅 수법이다. 겉으로는 프리메이슨/일루미나티를 비판하는 양식을 갖춘다. 간혹 열성 기독교 신자인양 꾸며(실제로는 CIA나 국정원 관계자일 가능성이 있는) 자신의 사이트를 포장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자기 얼굴이나 신상 공개하지 않은 이러한 사이트들 상당수는 의심 대상으로 보아야 한다.

   

둘, 타켓이 십대 후반에서 이십대 초반이다. 해서, 이미지 중심이다. 십대에서 이십대 층은 어릴 때부터 국유본 미디어에 노출되어 있기에 시각적 정보를 보다 쉽게 받아들이도록 자신도 모르게 세뇌당해왔다. 해서, 프리메이슨 수신호이니 전시안이니 하는 허접한 이미지들로 인터넷 장사를 하는 것이다. 허나, 이십대 후반부터는 사회 생활해야 해서 극소수 사람들만 이에 관심을 지닐 뿐, 생계 걱정하느라 프리메이슨이니 뭐니 신경쓸 겨를이 없다. 여기서 이미지에만 식상한 이들을 위해 만든 레시피가 인물 위주 노이즈 마케팅이다. 모차르트가 프리메이슨이었더라, 라는 식이다^^! 이 효과는 꽤 있다. 박지성이나 소녀시대와 같은 스포츠연예스타가 CF 찍으면 해당 기업 우호도가 대폭 증가하지 않던가. 해서, 바로 이런 효과를 위해 요즘 국유본이 역점을 두는 것이 소녀시대, 2NE1의 프리메이슨 상징 운운인 게다. 이러면 프리메이슨에 부정적일까? 오히려 긍정적이 된다. 마치 쪽발이가 독도 비행 대한항공 공격하면 대한항공에 우호적인 감정이 생기는 것과 같다. 해서, 처음에는 음모론자 병쉰색희들 지랄해대는 것 비웃는 재미로 보다가 일정한 비율로 특정한 층은 반드시 프리메이슨이나 일루미나티에 호의적이게 된다. 여기에 이십대 특유의 사회 반항적인 호르몬 영향과 결합하면 자신도 모르게 정말로 프리메이슨이나 일루미나티가 바라는 세상이 오기를 바라게 된다.

   

셋, 이미지 전달 방식이 주로 십대 등을 대상으로 한 선동 방식이라면, 이론 중심적인 전달 방식은 음모론에 심취한 이들을 타켓으로 한 선전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국유본은 세심한 검토를 통해 대상을 택한다. 그중 하나가 미네르바로 보인다. 미네르바가 단지 현 정부에 비판적이기 때문에 국유본이 활용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현 정부에 비판적이지만, 쪽발민주당에 대해서도 동시에 비판적이었다는 점이다. 아울러 미네르바 과거 이력을 검토했던 듯싶다. 이런 미네르바가 국유본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자 다른 대상을 골랐던 듯싶다. 그중 하나가 인드라인 듯싶다. 인드라가 대선 당시 이명박에 매우 비판적이었고, 과거 운동권이어서 감옥도 다녀오고, 정치 활동도 활발해서 이명박은 물론 쪽발민주당에도 비판적이어서 사회불만세력을 끌어모으는 데 적격으로 본 것 같다. 하여간, 국유본이 원하는 건, 사회 혼란, 정부 불신, 정치권 불신이다. 이는 지금 친일 조중동조차 앞장서서 해나아가는 방식이고, 전 세계적으로도 국유본이 유럽, 아시아, 북미에 걸쳐 하고 있는 일이다. 최근 역점 사업은 러시아이고^^! 다만, 인드라는 이 시기에 북한을 정리하자고 국유본에게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프리메이슨/일루미나티를 보면, 정부 전복에 나서지 않던가. 헌데, 이상하게도 한국의 음모론자들은 이명박 정부 전복에 나서고 있거나 이명박 정부 전복하는 세력과 한 편이 되어 있다. 이 모순을 무엇으로 설명할까. 이명박이 단지 삼각위원회, 프리메이슨이라는 것 때문에 비판한다면, 그 이명박을 비판하는 세력 역시 프리메이슨과 삼각위원회, 빌더버그에 연관이 없을까. 쪽발 돼중과 쪽발 놈현이 관계가 없을까? 뽀그리는^^? 한국의 시민사회단체는^^? 그럼에도 오직 이명박 비판에만 열을 올리는 한국의 음모론자들은 스스로 생각해볼 때가 된 셈이다. 혹 내가 누군가의 세뇌 기법에 당해서 움직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마지막으로 극소수를 대상으로 해서 조직을 만들도록 고무시켜야 한다. 가령 인드라가 그런 역할을 해주기를 국유본이 간절하게 바라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국유본은 국유본 반대 시민운동 조직이나 협회 혹은 혁명조직 이런 것을 인드라가 만들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헌데, 인드라가 계속 딴청을 부린다. 인드라가 쪽발민주당 까는 건 좋은데, 가끔이라도 이명박 비판해주길 바라는데, 인드라가 외면한다. 또, 외교 문제에서도 국유본이 원하는 구도에 인드라가 따라와주길 바라는데, 뜬금없이 한중우호가 중요하다는 식으로 훼방만 놓으니 답답한 게다. 해서, 인드라 대신 다른 이를 발굴해야 하는데, 현재까지 인드라가 뿌려놓은 바리케이트가 엄청나서 다른 이들이 진입하기를 부담스러워 하는 편이다~! 이런 이유로 요즘 쪽글 같은 것으로 CIA나 국정원 인물로 보이는 이들이 익명들로 인드라에 항의하곤 한다 ㅎㅎㅎ. 이에 대한 인드라 입장은 간단하다. 한반도 평화와 통일, 경제발전과 사회복지를 위해서 평양에서의 탱크쇼에 이은 쿠테타, 김정일, 김정은 처형으로 이어지는 급속한 한반도 통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면, 국유본, 니 뜻대로 해줄 의향이 있다는 것이다.

   

프랑스 혁명 이후 일루미나티는 어디로 간 것일까.

   

음모론자들은 일루미나티가 프랑스 혁명 이후 지하로 숨어들었다가 이후 로스차일드와 결합했다는 것이다.

   

음모론자 비판자들은 일루미나티는 프랑스 혁명 이후 소멸했다는 입장이다.

   

인드라 입장은 일루미나티가 프랑스 대혁명 이후 1830년 7월 혁명 이전까지 단계적으로 소멸 과정에 있었다고 본다.

   

음모론자들은 존 로비슨 이야기에 근거하여 로베스피에르 이후인 1797년에도 일루미나티가 은밀하게 활동한다는 이야기에 무게를 둔다. 허나, 이는 음모론자들이 프랑스 혁명사를 단편적으로 이해하는 데서 나온 오류이다. 음모론이 주류 역사계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이 국유본이 학계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지만, 음모론자들이 역사를 피상적으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인드라는 세 가지 지점을 말하고자 한다.

   

하나, 존 로비슨 책이 1797년에 출간하여 유럽에서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당대 여론주도층이 일루미나티에 대한 환상을 깨면서 등을 돌렸다는 점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단두대로 가는 상황이 알려져 안 그래도 평판이 극히 나빠지는 상황에서 존 로비슨 책이 불을 지른 셈이다. 일루미나티의 반계몽주의, 반지성주의, 반인륜주의가 문제가 된 셈이다.

   

존 로비슨(John Robison)은 자연과학자였다. 에딘버그 대학의 교수이며, 1783년에 에딘버그 상류사회의 총서기관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로비슨이 1805년 죽었을 때, 증기기관을 발명한 제임스 와트는 로비슨을 "가장 명석한 두뇌와 내가 알고 있는 어느 누구보다도 가장 과학적인 사람"이라고 했다. 허나, 그가 정말 중요한 이유는 다른 데에 있다. 존 로비슨은 스코틀랜드 장로교 독실한 신자이자 프리메이슨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대륙 일루미나티의 초청을 받아 일루미나티와 접촉하였고, 참가를 요청받았던 프리메이슨 인물이다. 재미있는 것은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를 비판하는 글에서 로비슨 말만 인용하고, 그가 프리메이슨이었다는 사실을 쏙 뺀다~! 아무튼 로비슨은 고심 끝에 거절했다. 그가 거절한 이유는 무엇일까.

   

1797년에 로비슨은 "훌륭한 전거들로부터 수집한, 프리메이슨, 일루미나이티, 그리고 독서회의 비밀 모임이 관리한, 유럽의 모든 종교와 정부들을 대항하는 음모의 증거들"을 내놓았다.

   

 "그들은 작가 부대를 고용하였다; 그들은 부지런히 모든 가정과 모든 오두막 안으로 그들의 저서들을 밀어 넣었다. 그런 기록물들은 사람들의 관능적인 욕구를 불 지르기 위해서, 그리고 그들의 판단을 왜곡시키기 위해서 평등하게 보급되었다. 그들은 학교들, 특히 저학년들을 사로잡으려 노력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엄청나게 많은 순회 도서실과 독서회를 설립하고 운영하였다. 그들은 경제학자들의 이름을 빌려, 상업, 공업, 농업, 재정 등 을 증진시키기 위한 계획에 전념하는 체했다. 그리고 때때로 그러한 주제들에 대해 유명한 습작들을 출판했다. 그러나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계획은 그리스도교와 모든 종교들을 파괴하고, 정부의 완전한 변화를 유도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부패하고 불경스런 책들을 꾸미는 작가들을 고용하였다 - 이들은 독서회에서 기안되고, 목적에 적합해질 때까지 교정되었다. 많은 책들이 보기 좋게 출판되었고, 판매용으로; 그리고 더 많은 책들은 가능한 한 싼 가격으로 찍어서, 공짜로 나눠주거나 혹은 헐값으로 행상인이나 소매상인들에게, 비밀리에 도시와 마을 전역에 배포하라는 명령과 함께 나눠주었다."

   

예서 보듯, 로비슨은 프리메이슨인 동시에 스코틀랜드 개신교도였다. 이 시기 상당수 프리메이슨들이 신교이거나 구교라도 개혁파 구교였다. 한마디로 기독교 신앙과 프리메이슨 회원이 양립가능했다. 해서, 그가 일루미나티를 거부한 것은 종교적인 거부감 때문으로 보인다.

   

또한, 이 대목에서 프랑스 프리메이슨 대롯지가 둘로 쪼개진 연유를 짐작할 수 있다.  일루미나티가 원인이 되어 일루미나티파와 프리메이슨파로 분열한 것이다. 이중 그랑 오리앙은 여러 정황상 일루미나티파였던 것이다.

   

여기에 나폴레옹에 걸었던 기대가 있었다. 일부 철지난 자코뱅주의자들은 여전히 나폴레옹이 얼굴마담이고, 실제 움직이는 것은 시에예스나 푸셰, 아담 바이스하우프트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또한 자코뱅주의자 나폴레옹이 전유럽을 싹 쓸어주기를 바랬는데, 웬 걸~! 유럽 군주들과 협약해서 땅따먹기에 나서는 것도 모자라 스스로 황제에 오른 것이다. ㅋ

   

더 나아가 나폴레옹 시대가 끝나니 다시 왕정 복고 시대~! 그때마다  시에예스, 푸셰 등의 추악한 권력욕이 드러나면서 이념질에 의존한 사회 혁명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깨달았던 것이다.

   

둘, 독일은 이론적 두뇌, 프랑스는 정치적 두뇌, 영국은 경제적 두뇌가 있다 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아무리 이론적 두뇌가 뛰어나도 독일을 보면, 영국이나 프랑스와 같은 사회혁명이 20세기 이전에 일어나지 않았다. 이론만으로는 세상이 바뀌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하겠다. 실제로 맑스가 영국이나 프랑스, 독일에서 떠들었지만, 혁명이 일어난 곳은 러시아였다^^! 게다가 맑스가 죽고 난 이후에~! 정치적 역할과 이론적 역할을 구분해야 한다.

   

아담 바이스하우푸트는 17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망명지 고타에서 열심히 프랑스 혁명 정치인들과 서신 교환 등을 주고 받았던 듯싶다. 1795년 로베스피에르 정권까지인데, 넉넉하게 잡아 총재정부 때까지 보자. 허나, 1800년대 나폴레옹 시대에 이르르면 아담 바이스하우프트는 활동을 중지한다. 왜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떠들어봐야 들어주는 이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총재 정부 때까지는 시에예스 같은 인물이 있었다. 허나, 나폴레옹 정권에 이르러서는 시에예스가 정부에서 쫓겨난다~! 허나, 이뿐이면 다행이다. 나폴레옹 정부에는 역전의 용사, 프랑스의 김종필, 푸셰가 있었다. 오늘날의 국정원장과 같은 역할인 경찰총감을 맡은 푸셰는 그 자신이 자코뱅이었기에 누구보다 자코뱅 방식을 잘 알아서 자코뱅들을 제거했다. 심지어 푸셰는 네오 자코뱅파라는 봉기주의자 바뵈프를 활용해서 일망타진하는 수법을 보여주기도 한다.

   

나폴레옹 시대에 정부를 배후에서 움직이던 시에예스와 같은 자를 정치권 상부에서 축출하고, 정부 전복을 노리고 사회 각계에서 이정히는 말자지랑 씹했다더라, 한명수는 돌림빵을 당한 뒤에 병쉰이 되었다더라 따위 포르노그래피를 활용한 선동질에 나섰던 윤전기 돌리는 색희들을 죄다 제거하니 아담 바이스하우프트가 망연자실할 수밖에. 한마디로 머리만 있으면 뭐 하나. 머리를 지탱할 몸과 팔과 다리가 있어야 하는 법. 팔다리가 다 짤린 상황에 머리가 무슨 소용이 있으리.

   

해서, 아담 바이스하우프트는 이후 절필하고 교회에서 참회하다 뒈졌던 게다. 혹자는 비밀리에 교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글쟁이들 속성을 모르고 하는 이야기다. 아담 바이스하우프트는 글쟁이이고, 이론가이다. 이런 이론가가 절필한다는 건 끝났다는 것이다. 허나, 흥미롭게도 국유본은 아담 바이스하우프트가 뒈진 다음부터 기다렸다는 듯이 1830년 7월 혁명으로 다시 유럽에서 혁명의 불길을 당겼으니 흥미롭지 않은가^^? (이 과정은 이후 프랑스 혁명 시리즈에서 자세히 언급할 것이다.)

   

셋, 프리메이슨이니 일루미나티도 결국 유행인 게다. 1830년 이전까지 쏙 들어갔다가 1830년 7월 혁명 이후 국유본이 다시 분위기를 조성하니 이에 발맞추어 전설의 조직을 흉내내는 조직들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이 조직들이 대박치는 뻔한 수는 다른 게 없었다. 바로 어제 조직을 결성해놓고서 마치 지난 삼십여년간 활동해온 것처럼 조작하는 것이다. 그래야 연륜이 묻어나오는 폼이 나지 않겠는가. 허나, 삼십년 전통을 자랑하는 조직답지 않게 당대 조직들은 죄다 어설펐던 것이다. 결국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 법. 맑스의 노동자 인터내셔널이 대체하였던 셈이다. 허나, 이 조직은 음모 조직도 아니고 공개 조직이었다~!

   

하면, 일루미나티가 왜 지금 다시 부각이 되는가.

   

세 가지 계기가 있다.

   

하나는 300인 위원회가 만들어지는 20세기 초반에 국유본은 로스차일드를 중심으로 하여 세계 체제 정비에 나섰던 것이다. 이때, 국유본은 세계대전 규모의 전쟁을 통한 세계 지배를 강화할 목적으로 위서인 시온의정서를 시중에 유포시켰던 것이다. 이는 유럽 대륙에서 다시금 일루미나티와 같은 음모 조직을 만들어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던 것이다. 이 시기에 급작스럽게 나찌즘, 파시즘, 레닌이즘이 등장한 것이 우연이 아닌 것이다. 국유본이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위서 시온의정서를 슬쩍 유포시키니 난리가 난 것이다. 여기서도 흥미로운 것이 엥겔스가 1895년에 죽었는데, 그 이후부터 시작했다는 것이 흥미롭지 않은가^^? 맑스와 엥겔스는 자신의 생애에서 혁명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기대했건만, 국유본은 그들의 기대를 무참히 저버렸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국유본이 무서운 대목이다.

   

둘, 1973년 국유본 권력 교체 시점에서 발생한 국유본 내부 사정 때문이다. 이 시기 세계에서 두번째로 큰 롯지인 프랑스 프리메이슨이 프리메이슨 박물관을 설립하겠다고 나선 것이 의미심장한 것이다. 빅터 로스차일드는 전후 빌더버그와 냉전을 통해 음모론적 싹을 제거해왔던 것이다. 허나, 1973년 국유본 권력 교체로 권력 공백이 생기니 그 틈을 타고 국유본 귀족들 일부가 새로운 혁명의 시대라 여겨 슬며시 프리메이슨이니 뭐니 하고 고개를 쳐들고 나온 것이다. 허나, 웬 걸! 소리소문없이 CIA, KGB와 같은 정보기관 사이에서 조용한 전쟁으로 흐르더니 1980년 레이건 시대로 접어들면서 잠잠해졌던 것이다.

   

셋, 아들 부시 집권이 새로운 음모론 시대로 접어들게 했다. 빅터 로스차일드 사망 후 데이비드 록펠러가 권력을 잡았지만, 일부에서는 바야흐로 춘추전국시대라 여기는 이들도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아들 부시가 집권하고, 이 부시 정권하에서 911이 터지면서 음모론이 전 세계적으로 퍼지는 계기를 만든 셈이다. 이때, 부시가 해골종단이고, 해골종단이 일루미나티다, 이런 음모론이 뜬 것이다. 해서, 한국에서도 음모론 역사가 과히 길지 않으며 911 음모론서부터 찾으면 무리가 없다. 그 이전에 한국에서는 음모론다운 음모론이 거의 유행하지 않았다. 하면, 이런 음모론도 역시 국유본이 유포한 것인가. 그렇다. 국유본은 새로운 전쟁을 원한다. 음모론을 통해 이슬람형제단 같은 국유본 산하기관을 통해 중동에서 테러 사건을 유발시키고, 전쟁으로 해결을 보는 것이다.

   

이제 간단히 일루미나티에 대해 정리를 해보자.

   

일루미나티를 그 기원을 예수회부터 찾는 이들이 있다. 헛수고이다. 예수회에 대해서는 인월리 백문백답에서 따로 장을 할애할 것이다. 예수회 음모론이든 프리메이슨이나 일루미나티 음모론이든 음모론 장사로 돈 좀 벌어볼까 하는 이들과 이들을 활용하여 음모론을 유포하는 국유본 이익 때문이다. 이들은 음모의 기원이 보다 오래되어야 이익이 증대한다고 믿는 편이다. 우주전쟁 SF도 가급적 먼 미래를 다루어야 폼이 나는 것과 같다. 아주 오래 되거나 매우 미래적이거나. 헌데, 세계를 지배하는 조직 결성이 언제 이루어졌지? 하는데, '어제' 이러면 음모론이 시시해지지 않겠는가^^!

   

http://blog.naver.com/miavenus/memo/70056567335

   

http://blog.naver.com/kurtnam/150048247696

http://blog.naver.com/miavenus/memo/70083206305

일루미나티와 관련한 글 셋이다. 마지막 것은 인드라가 쓴 것이다. 세 글쓰기 공통점은 일루미나티 음모론에 비판적이란 점이다. 시간이 지났으니 보다 축적한 국유본 자료들로 일루미나티 글을 재정리해 본다.

   

   

http://blog.naver.com/kurtnam/150048247696

일루미나티의 창시자는 아담 바이스하우프트이다. 일각에서는 그를 유태인으로 보는데, 현재까지 인드라가 분석한 바로는 유태인이 아니다. 그는 1774년에 프리메이슨에 입단했으나 프리메이슨에 만족할 수 없어 2년 뒤 탈퇴한 뒤 , 1776년 5월 1일(노동절^^! - 허나, 노동절은 공식적으로 이 날을 기념한 것이 아니라 미국 시위를 기념한 것이다.)에 바이에른 잉골슈타트(Ingolstadt) 대학에서 동료 교수 및 학생들을 모아 완성추구자 기사단(the Order of Perfectibilists)을 창설한다. 이것이 일루미나티이다.

   

이 기사단은 처음 다섯 명의 학술 모임으로 시작했으나 점점 숫자가 불어 1779년에는 바이에른의 도시 다섯 군데에 지부를 둔다. 뮌헨을 중심으로 하는 조직이 커지자 바이스하우프트는 학술 모임에서 정치 모임으로의 전환을 모색한다. 그 결과, 프리메이슨에 조직원들과 재가입하여 내부에서 프리메이슨을 장악하기로 한 것이다.

   

바이스하우프트의 사상을 압축시킨 일루미나티 강령은 다음과 같다.

   

1. 모든 군주제와 정부의 폐지

2. 사유재산과 상속제 폐지

3. 애국주의와 민족주의 폐지

4. 가족제와 결혼제도 폐지, 그리고 아동들에 대한 공동체의 교육

5. 모든 종교의 폐지

   

1782년에 이르자 멤버들의 숫자는 삼사천 명에 이르렀으며 헤르더, 괴테, 모차르트, 고타 공작 등의 유명인사들도 일루미나티의 회원일 정도였다. 일이 이쯤되니 일루미나티는 단순히 바이에른 국내의 "학술모임"에만 머물지 않고 덴마크, 포르투갈을 거쳐 1785년에는 뉴욕에 지부가 설치되었고, 브라질에 진출한 부류는 그곳에서 일루미나티 반란을 계획하다 진압당하기도 했다.

   

이 시기는 신성로마제국 요제프 2세 황제 시기이다. 요제프 2세는 마리 앙트와네트의 오빠이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이태리 찬양 신하보다는 독일 찬양 신하를 은근 편드는 모양새를 취하는 그 황제인데, 픽션일 수 있어도 없는 걸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실제로 요제프 2세는  계몽사상에 심취해 있었다. 계몽주의 사상에 심취하였던 그는 '계몽주의 전제군주'의 모습을 지향하였다. 교황 권력을 벗어나 국왕 권력을 강화시키고자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 같은 그룹 활동을 이전처럼 탄압하기보다는 동조성 묵인을 하고 있었다. 프리메이슨에 몰래 가입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조직이 커지자 내부 파벌 투쟁이 극심해졌다. 바이스하우프트와 폰 크니게 남작 대결이 예다. 마당발 폰 크니게 남작이 유럽 프리메이슨/일루미나티 통합을 통한 공동지도자 자리를 바이스하우프트에게 요구했는데, 바이스하우프트가 이를 거절하자 앙심을 품는다.

   

인간교제술 효과적인 237가지 법칙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php?bid=1224082

   

정치란 마당발인 게다. 바이스하우프트처럼 책이나 들입다 파는 관념적 족속은 죽었다 깨어나도 정치를 모르는 게다. 냉정하자. 정치권에서 정책위원장 따위 자리를 맡고 있다? 무시하라. 현실이다. 보수당이건, 진보당이건 정책위원장이란 허울 좋은 자리일 뿐이다. 트로츠키와 스탈린 중 누가 레닌의 다음 권력을 맡았는가. 조직을 책임지는 직책이라면 그 직책이 아무리 하위직일지라도 의미가 있다. 비유하자. 군대에서 똥별이라고 있다. 별이라도 같은 별이 아니라는 게다. 육군본부 같은 데서 합참의장을 보좌하는 참모진들 대체로 장군들이다. 별이다. 하지만 직속부하가 없다. 위기상황 시에 별 볼 일이 없다는 것은 한국사에서 잘 보여준 바다. 중요한 것은 라인이다. 김일성의 갑산파다. 조직이다. 고대 손자병법 이래로 내려온 철칙이 있다. 군인은 직속상관에 충성한다. 왕이 와도 불심검문에 응해야 한다는 규칙은 교묘한 법칙인 게다. 자, 오늘날 이것을 사회에 적용하자. 누가 네 놈을 시장 시켜주었는가. 이것이 국제유태자본의 권능이다.

   

당대 영국과 유럽에서는 수많은 프리메이슨 조직들이 산재해 있었다. 그리고 그들 이념 성향은 지역적으로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었다. 지역 현안이 모두 다르므로. 또한 이들 조직끼리는 서로 우위를 점하기 위해 경쟁했다. 이때, 바이스하우프트에게 전권을 위임받은 크니게가 마당발로 대륙 프리메이슨과 일루미나티 조직 통합을 성사시킨다. 이에 당근 크니게가 지분을 요구하는데 쪼잔한 바이스하우프트가 들어주겠는가. 크니게 스타일과 바이스하우프트 스타일이 있는 게다. 열 받은 크니게는 탈퇴하는 것은 물론 당국에 몽땅 분다. 마침 프랑크푸르트에서 파리로 가던 연락책이 벼락을 맞아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일루미나티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가 이루어져서 조직은 해체된다.

   

일루미나티는 단기간에 급격히 세력을 확장하긴 했지만 채 십년을 넘기지 못하게 되어버린다. 1785년, 요한 야콥 란츠라는 남자가 조직의 임무를 맡아 비가 쏟아지는 굳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프랑크푸르트를 떠나 레겐스부르크에서 말을 타고 달리던 도중 갑자기 벼락에 맞아 죽은 것이다. 바이에른 관리들이 죽은 사람에 대해 조사하면서 그가 가지고 있던 일루미나티의 문서들이 바이에른 정부에 넘어갔고 곧 바이에른 당국은 일루미나티의 사상에 기절초풍을 했다. 란츠의 시체에서 압수된 문서 중에 바이스하우프트의 편지가 있었는데 그 내용 중 일부를 보면 이렇다.

   

"조직의 진정한 목표는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다. 이것을 이루기 위해 조직은 모든 종교의 파괴, 모든 정부의 전복, 사유재산 폐지 등이 필요하다."

   

이외 "혁명을 통한 새로운 세계질서확립"같은 아주 위험한 사상들로 인해 난리가 난 바이에른 정부는 일루미나티를 불법단체로 선포하고 바이스하우프트를 반역죄로 기소했다. 그는 대학의 교수자리에서 해임되었고 곧 고타로 망명할 수 밖에 없었다. 조직의 또 다른 주요멤버였던 슈바르츠 박사는 모스크바로 떠났으며 다른 멤버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허나, 바로 이러한 위급한 상황이 프랑스 혁명을 가속화시키는 원동력을 낳았던 것이다. 독일에서는 식자층만이 반응했을 뿐이다. 영국은 상대적으로 체제가 안정적이었다. 반면, 프랑스는 여러 모로 여건이 무르익었다. 언론이 다른 나라에 비해 자유로운 데다가 김두갱 좆은 장롱다리 좆이다 따위 저급한 포르노그라피를 통한 신문과 전단 선동 방식이 먹혀서 하층까지 사회 불만이 폭등하였다. 만일 프랑스 상황이 역으로 좋았다면 일루미나티 선동이 통했을까? 통하지 않았을 것이다. 영국과 독일에서처럼 일루미나티 시도는 좌절했을 것이다. 여기에는 사전에 이미 알고 있었던 국유본이 묵인 방조한 것도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이 시기 국유본은 로스차일드 이전 시기로서 동인도회사(영국 왕실과 국유본 귀족) - 베어링 - 프리메이슨 삼각 편대로 움직이던 시절이다. 로스차일드는 이 시기 핏덩이에 불과한 존재여서 돈버는 방법을 열심히 공부만하고 있을 때였다.

   

해서, 정리한다.

   

일루미나티가 프랑스 혁명을 기획한 것은 사실로 보인다. 허나, 프랑스 혁명이 진행하면서 프리메이슨/일루미나티 세력간 상이한 정치 기획들 차이로 인한 갈등 투쟁 양상을 거듭하면서 프랑스 혁명은 일루미나티 창시자가 원하는 길과는 반대의 길로 갔던 것이다.  

   

프랑스 혁명과 프리메이슨 2 - 자코뱅 VS 푀양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1/12/14 01:24

http://blog.naver.com/miavenus/70126434902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27 : 프랑스 혁명과 프리메이슨 2 - 자코뱅 VS 푀양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1/12/14

   

일단 인물들이 많이 등장하니 프랑스혁명 인물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사이트를 참고하시라.

   

http://ko.wikipedia.org/wiki/%ED%94%84%EB%9E%91%EC%8A%A4_%ED%98%81%EB%AA%85_%EA%B4%80%EB%A0%A8_%EC%9D%B8%EB%AC%BC_%EB%AA%A9%EB%A1%9D

   

프랑스 혁명 운운하면 머리가 지끈거리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이때, 인드라가 추천하는 소설과 만화책이 있다.

   

먼저 만화책으로는 베르사이유의 장미가 있다. 여기서 마리 앙투와네트에 뻑가면 영화 '마리 앙투와네트'를 봐도 되는데, 추천하고 싶지는 않다. ㅋ. 예서, 지적 욕구에 몸부림치는 분들을 위해서는, 이들 만화책과 영화의 원작 격인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리 앙투와네트' 일독을 권한다.

   

http://ko.wikipedia.org/wiki/%EC%8A%88%ED%85%8C%ED%8C%90_%EC%B8%A0%EB%B0%94%EC%9D%B4%ED%81%AC

   

슈테판 츠바이크는 오스트리아 유대인 작가인데, 인드라가 전 세계 전기 작가 중 최고로 손꼽는 작가이다. (왜 인드라가 호평하는 인물이 나중에 알고 보면 80% 이상이 유대인인 것인지 ㅠㅠㅠ) 나중에 아내와 함께 자살했다. 프랑스 혁명을 보다 흥미롭게 읽고자 한다면, 슈테판 츠바이크의 다른 소설인 '발자크 평전'과 '어느 정치적 인간의 초상, 조제프 푸셰'를 권한다. 여러분은 슈테판 츠바이크를 통해서 프랑스 혁명을 보다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According to tradition, the first Masonic Lodge in France was founded in 1688 by a Royal Irish Regiment that followed the deposed King James II of England into exile. An English Lodge is also said to have been founded at Dunkirk in 1721. However, the first Lodge whose existence can be verified was organised by English merchants in Paris about 1725. By the time of the French Revolution, there were some 1250 Masonic Lodges in the country.[2] The Grand Orient de France was founded in 1733.[3]

[edit] French RevolutionThe Lodge Les Neuf Sœurs was a prominent lodge attached to the Grand Orient de France that was particularly influential in organising French support for the American Revolution and later in the intellectual ferment that preceded the French Revolution. Benjamin Franklin was a member of this Lodge when he was serving as liaison in Paris.

Some notable French revolutionaries were Freemasons, including Voltaire,[4] Marquis de Condorcet,[5] Mirabeau,[6] Georges Danton,[7] the Duke of Orléans,[8] and Hébert.[9]"

http://en.wikipedia.org/wiki/Grand_Orient_de_France

   

위키피디아에 의하면, 프랑스에서 검증이 가능한 최초 프리메이슨은 스코트랜드인 존 로가 재정총감을 맡았던 시대인 1725년에 영국 상인이 조직하였다. 후일 프랑스 대표 프리메이슨으로 부상한 그랑 오리앙(위대한 동방 : The Grand Orient) 은 1733년에 조직을 결성했다.

   

다만, 검증할 수 없는 전설에 따르면, 1688년 제임스 2세를 추종하는 왕립 아일랜드 연대가 프랑스로 망명한 뒤 프리메이슨 조직을 만들었다고 한다. 만일 사실이라면 놀라운 이야기다. 일반적으로 프리메이슨은 신교에 친화적인 반면 구교에 적대적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역시 전설에 의하면, 1721년에 Dunkirk에서 영국인 롯지가 등장했다는 것이다.

   

   

피에르 제르마에 의하면, 형제애, 자유, 관용의 기치를 내건 프리메이슨은, 17세기 후반에 최초로 영국에서 출현하였고, 1717년 영국에서 연맹을 결성하였고, 스페인(1728), 독일(1733), 포드투갈, 네덜란드(1735), 스위스(1740)으로 퍼져갔다고 한다. 또한, 프랑스에는 1720년대에 프리메이슨이 유입하였다고 한다. 이후 프랑스 프리메이슨은 발전을 거듭한 끝에 1755년에 이르러 프랑스 그랜드 롯지를 창설하기에 이르른다. 헌데, 1773년 단체 내 분열로 인해 <그랑 오리앙>이 탄생했다고 한다.

   

프리메이슨은 프랑스에 등장한 지 30년만인 1955년에 프랑스 대롯지를 건설하였으나, 1773년에 분열한다. 하면, 왜 분열하였을까?

   

"프리메이슨의 성격이 변화한 것은 프랑스에 그람토리암(Grand Orient, 대동사(大東社))이 1773년에 성립하고, 프랑스 혁명에 참가한 이후라고 한다. 영국 본국의 프리메이슨이 일반적으로 정치문제를 회합에서 화제로 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서, 그람토리암의 산하에 들어온 대륙계 프리메이슨은 오히려 적극적으로 사회개혁을 추진했다. 사실, 프랑스 혁명의 선언은 프리메이슨의 로지 내에서 기초되고, 기존의 권력을 폭력적으로 전복할 것을 지향한 계명결사도 독일의 로지 내에서 결성되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631472

   

오늘날 프랑스 프리메이슨을 대표하는 프랑스 롯지는 그랑 오리앙이다. 이들은 프리메이슨 박물관까지 1973년에 만들었다. 흥미롭지 않은가. 하필이면 1973년일까^^!

   

"프리메이슨 박물관이 처음 세워진 것은 1889년이다. 당시 프랑스 프리메이슨의 중앙 본부였던 그랑 오리앙 드 프랑스(Grand Orient de France)가 박물관 설립을 주도했다. 프리메이슨은 영국에서 시작된 석공(石工)들의 조직이었다. 길드 조직으로 출발해 유럽 각지로 퍼졌고 지식인과 중산층이 많이 가입해 진보적인 성향을 띠고 있었다. 프랑스 혁명 등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직 이름인 프리메이슨은 '자유로운 석공(free mason)'이라는 뜻의 합성어다.

   

박물관은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직후 독일군에 의해 상당수 자료들이 파손되는 등 위기를 맞기도 했다. 또 전쟁이 끝난 뒤 승전국인 소련으로 많은 자료들이 유출됐다. 프리메이슨과 관련된 다양한 자료들을 보강한 뒤 박물관은 1973년 다시 문을 열었다. 2000년에는 소련에 유출됐던 박물관 소장 자료들을 다시 찾아오면서 전시품 숫자가 크게 늘어났다. 프리메이슨 박물관은 이 해에 프랑스의 공식 박물관으로 등록됐다.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647523

   

위키피디아에 의하면, 프리메이슨 인물로 볼테르, 미라보, 콘도르세, 오를레앙 공작이 나온다. 라파예트와 로베스피에르가 없다.

   

"The Lodge Les Neuf Sœurs was a prominent lodge attached to the Grand Orient de France that was particularly influential in organising French support for the American Revolution and later in the intellectual ferment that preceded the French Revolution. Benjamin Franklin was a member of this Lodge when he was serving as liaison in Paris.

Some notable French revolutionaries were Freemasons, including Voltaire,[4] Marquis de Condorcet,[5] Mirabeau,[6] Georges Danton,[7] the Duke of Orléans,[8] and Hébert.[9]"

   

반면, 프리메이슨 계열로 추정할 수 있으며, 황당무계한 언설로 인기를 끄는 그레이엄 핸콕에 따르면, 루소, 당통, 마라도 프리메이슨이라 주장한다.

   

프랑스아 퓌레에 의하면, 바이이, 탈레랑, 브리소, 라파예트, 콩도르세, 마라 등은 프리메이슨이었으나, 카미유 데물랭, 당통, 로베스피에르는 프리메이슨이 아니라 한다.

   

   

올리비에에 따르면, 생쥐스트 역시 프리메이슨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http://www.nomad21.com/bbs/uboard.asp?id=nomad_gisa&u=2&u_no=715

   

인드라 입장에서 이러한 프리메이슨 분류에는 각자의 정치적 입장이 있으리라 본다. 허나, 다양한 입장에도 불구하고 단 한 명에 대해서만큼은 프리메이슨이 아닐 것으로 보는 이가 있으니 로베스피에르이다.

   

   

   

   

   

프랑스 혁명하면 로베스피에르이다. 로베스피에르에 비한다면, 다른 이들은 조연급이다. 여기에 이의가 없다면, 다음과 같은 명제에 수긍할 것이다.

   

프리메이슨이 프랑스 혁명에 참여했지만, 프랑스 혁명의 주체가 아니었다.

   

헌데, 로베스피에르를 움직인 것은 루소이다. 혹자는 루소를 낭만주의의 시조로 본다.

   

http://blog.naver.com/theogeo/30027083739

   

   

루소를 낭만주의의 시조로 보는 것은, 루소가 디드로의 백과전서파와 친교했다가 결별했기 때문일 것이다. 해서, 볼테르의 계몽주의와 대립하는 루소의 낭만주의로 그림을 그린 것 같다. 허나, 이러한 구도가 의미있는 구도일까.

   

http://blog.naver.com/theogeo/30014025086

   

루소에게 낭만주의 딱지가 따라다니는 것은 루소 특유의 신비주의 때문인데, 그렇다면, 볼테르 역시 프리메이슨이었는데, 이 차이를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허나, 볼테르 등 사회사상사에 대해서는 나중에 말하기로 하고~!)

   

아무튼 인드라가 강조하는 것은, 루소적 신비주의는 감성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루소는 지성도 중요하지만, 감성도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견해를 지녔기에 중세 스콜라학파적인 백과전서파와 결별한 것이다. 하면, 바로 여기서 눈치챌 분도 있겠지만, 바로 이러한 루소적 신비주의 배경은 시토파 베르나르두스 사상과 맥락을 같이 한다는 것이다.

   

이는 이후 로베스피에르가 프랑스 혁명에서 지도적 지위에 오르는 데에 중요한 원동력이었음을 강조한다.

   

여기까지 전제하고, 본론 격인 자코뱅 VS 푀양 구도로 가자.

   

"출생. 렌의 고등법원 변호사를 거쳐 1789년 삼부회(三部會) 대의원이 되었다. 브르통클럽(후의 자코뱅클럽)을 창설하였으며, '8월 4일 밤'의 헌법제정 국민의회 의장이 되어 봉건제도 폐기에 관한 법령을 기초(起草)하였다. 그러나 1791년 루이16세가 바렌으로 탈출한 후에는 온건개혁파의 입장을 취하였다. 그리하여 투표권을 유산자에게 한정시켜야 한다는 입헌군주파에 합류하였으며, 6월 14일 노동자단결금지법인 '르샤플리에법'을 가결시켰다. 1792년 영국을 방문하였는데, 이것이 이적행위로 간주되어 귀국 후 체포되어 왕정유지 혐의로 처형되었다."

[출처] 장 르샤플리에 | 네이버 백과사전

   

1789년 삼부회가 있기 전 베르사이유에서 브르따뉴 출신인 랑쥐네(Jean Denis, comte Lanjuinais, 1753-1832)와 르 샤플리에(Isaac Ren Guy Le Chapelier 1754-1794)는 자코뱅 클럽의 전신인 브르통 클럽(Club breton)을 만든다. 궁정과 의회가 파리로 이전한 뒤 재조직되었으며, 생트노레가(街) 자코뱅 수도원에 본부를 설치하면서 자코뱅당이 일반적인 명칭이 되었다. 원래의 명칭은 <헌우회 Socit des amis de la Constitution>이며, 92년 9월이 되어서야 <자유와 평등의 친구인 자코뱅 클럽>이라는 명칭을 갖게 되었다. 6월부터는 미라보 등 주요 혁명 인사들이 모두 참여하는 모임으로 나아간다. 1790년 8월 15일까지 프랑스 30개 도시 중 26개 도시에 91개 클럽이 등장한다. 1791년 상반기에는 클럽 수가 212개까지 증가한다.

   

http://blog.naver.com/braveattack?Redirect=Log&logNo=10045985734

   

일설에 따르면, 미라보는 1786년 자코뱅 파리대학(Jacobins College of Paris)을 세운다. 여기서, 브르통 클럽이 혁명 과정에서 재조직하면서 자코뱅 수도원에 본부를 설치한 것이 미라보 후작 영향력이 컸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시기 미라보는 혁명 세력에서 가장 인기가 있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예서, 왜 혁명 세력이 다른 이름을 놔두고 하필이면 자코뱅을 선호했는가, 모임 장소를 굳이 자코뱅에 할 필요가 있었는가 하는 것이 인드라 관심사이다.

   

이런 문제를 연구하는 이가 프랑스 혁명을 연구하는 이들 중에 있을 지 모르지만, 인터넷으로 검색했을 때는 인드라가 일단 독보적인 것 같다. 아무도 이런 문제에 관심이 없는 듯싶다.

   

왜 자코뱅인가.

   

자코뱅 수도원은 도미니크회가 세운 수도원이다.

   

"1216년 에스파냐 오스마 주교관구의 사제였던 도미니쿠스프랑스 프루유에

설립한 수도회로 정통 신앙을 옹호하고 학문과 청빈을 중시하며, 복음을 전파하는 활발한 선교활동을 목적으로 한다.

   

도미니크 수도회 이전의 수도회는 넓은 토지를 소유하며 농사와 학문에 종사했으나, 도미니크수도회는 특정한 성당에 소속하지 않고 곳곳을 편력하며 설교를 하였으며, 고정수입을 바라지 않고 헌물을 받아 의식을 해결하는 등 전혀 새로운 형태의 수도회였다. 이 설교수도회는 1216년 교황 호노리오 3세의 정식 인가를 받은 후 급속히 유럽 전역에 퍼졌으며, 프란체스코회(會)와 더불어 중세 유럽의 최성기를 형성하는 주요소가 되었다.

   

1221년 창설자 도미니쿠스가 죽자, 독일인 요르단이 2대 총회장이 되어 회칙 개정, 조직강화를 하고 사도적 교설(敎說)과 영혼구제, 이교도에 대한 전도에 힘썼다. 한편 복음 전파를 위해 신학의 학문적 중요성을 깨닫고 파리대학을 비롯한 쾰른·볼로냐·옥스퍼드 등의 명문대학에서 성서와 설교 및 신학·철학·교회법 등을 연구하여 학문적인 공헌을 하였다.

   

또한 많은 학자들을 배출하였는데, 그 중에서 알베르투스 마그누스(Arbertus Magnus),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1243년에 이 수도회에 들어가 철학적·신학적 가르침에 근거를 둔 확고한 정통주의 신학을 고수하며 스콜라철학을 완성하였다. 그외에도 신과의 직접적인 체험을 중시하며 이를 체계화하는 데 힘쓴 신비주의 신학자로 사보나롤라, 에크하르트, 타울러 등이 있다.

   

1887년에는 도미니크선교수녀회가 설립되어 선교와 더불어 교육사업과 다양한 자선사업을 하고 있다. 1995년 현재 82개국에 남자 수도회원 7,000여 명, 관상수녀회원 4,800여 명, 활동수녀회원 4만여 명, 재속회원 7만여 명에 이른다. 한국에는 도미니크수도회가 1990년에 진출하였고, 도미니크선교수녀회는 이보다 앞서 1983년 진출하였다."

[출처] 도미니크 수도회 [修道會, Dominican Order ] | 네이버 백과사전

   

당대 가톨릭은 왜 도미니크 수도회를 필요로 했나.

   

카타리파 때문이다.

   

"청정무구(淸淨無垢)를 의미하며, 물질을 악의 근원이라 해서 신과 대립시키는 이원론(二元論)과 육식 ·결혼생활, 재산의 사유 등을 부정하는 극단적인 금욕주의가 특징이다. 11세기 후반 불가리아보고밀파로부터 영향을 받은 소종파(小宗派)가 남유럽에 나타나, 특히 1140년부터 30년간에 걸쳐 그 교세가 급속히 신장하여 라인란트, 남북 프랑스, 북이탈리아에까지 퍼지는 등, 12세기 말까지 11주교구(主敎區)가 개설되었다. 로마 교회는 이를 이단으로 단정하고 여러 차례 개종토록 했으나 효과가 없자, 교황 이노켄티우스 3세는 11811229년 3차례에 걸쳐 십자군을 파견하여 이들을 토벌하였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이용당한 이 십자군은 그 잔혹성으로 후세에 오명을 남긴 결과가 되었다. 카타리파는 이때부터 붕괴되어 15세기 초 완전히 소멸되었다. "

[출처] 카타리파 [派, Cathari ] | 네이버 백과사전

   

카타리파란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등 이란 종교 유파에서 불교와 기독교를 혼합하여 아르메니아에서 유래한 종교 유파이다. 동양에서는 역사적으로 주원장의 명나라를 일으키는데 큰 역할을 했던 명교를 의미하고, 혹은 환타지 무협지에서는 마교를 말한다.

   

카타리파가 왜 문제였나. 교회 바깥에서 교회를 맹렬히 비판했기 때문이다. 교회는 악의 무리요, 자신들이 진정한 신의 사도이기에 교회는 자신들 교회로 대체해야 한다 주장했다. 옷 하나만 달랑 걸치고 심지어 신발도 신지 않고 둘셋이서 함께 다니면서 전도하는 것이 카타리파였다. 카타리파는 극단적인 이원론자들이었다. 물질적인 것은 악이요, 정신적인 것만을 선으로 보았다. 해서, 결혼, 사적 소유, 육식을 금한 공동체 생활을 강조했다. 

   

가톨릭 교회는 카타리파를 사탄의 무리로 몰아서 카타리파를 강간한 뒤 죽이거나 화형에 처한 뒤 재산을 모두 몰수했다.

   

허나, 카타리파를 통해 민심의 동요가 있는 것은 자명한 일. 가톨릭 교회는 당근책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해서, 나온 것이 도미니크회인 게다. 민심 수습용인 게다.

   

하면, 다른 수도회에 대해 도미니크회 특징은 무엇인가. 교리에 강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드라처럼 썰 푸는 데에 강점이 있다는 게다. ㅋㅋㅋ.  그런 까닭에 토마스 아퀴나스가 나왔고, 에크하르트가 나온 것이다.

   

특히, 에크하르트가 중요하다. 왜인가. 서양이든, 동양이든, 보통 시조로 불리는 이들 대부분은 신비주의자이다. 뉴튼도 마지막 연금술사로 불리지 않던가^^? 인드라 역시 신비주의자이고~!

   

인드라 블로그를 방문하는 이들 중, 혹은 인드라 번개에 참여하는 이들 중 대체적으로 20%는 영성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다~! 대표적인 분이 수반아님이다.

   

하면, 왜 에크하르트인가. 루터 때문이다.

   

http://blog.naver.com/luther1?Redirect=Log&logNo=10053959987

   

루터 사상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의인'이 아니라 '성화'이다. 이 대목에서 루터는 에크하르트에게 크게 의존한 것이다.

   

"셋째로 루터는 신비주의자들의 신학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는 특별히 요하네스 타울러(Johannes Tauler, 1300-1361)에게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 타울러는 1361년 사망 할 때까지 라인강가의 도시에서 복음을 전했던 도미니크 수도회의 수도승이며 신부였다. 당시 루터는 신비주의적인 합일과 금욕주의적인 생활에 매료되었다. 타울러의 사상은 그의 설교집에 잘 드러나 있다. 타울러는 하나님과의 신비적 연합을 위해서는 인간 자신의 어떤 역할이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의를 얻는 길은 자기 포기와 자기 멸절를 통해서 참된 복종을 통해서 가능하다.[1]) 자신의 모든 욕망, 의지, 세상의 모든 사물들과 자신에게서부터도 분리되어야 한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소멸 될 때에 하나님과의 결합이 현재화되는 것이다. 이러한 타울러의 가르침은 루터에게 크나큰 관심을 끌었다. 루터가 그의 신학을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 중세 신비주의가 실제로 어떤 중요성을 지니면서 영향을 주었는지는 명확하지는 않지만 아무튼 루터는 중세의 신비주의자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특별히 1516-18년에 이르기까지 그의 신학을 형성하던 중요한 시기에 루터는 독일의 신비 전통에 최고의 찬사를 표했다. 그의 친구 죠지 스팔라틴(Georg Spalatin)에게 보낸 편지에서 루터는 요하네스 타울러(Johannes Tauler)의 설교들은 "순수하고 확고부동한 신학"으로 그리고 복음서들과 밀접한 합의들을 보여 주고 있다고 기술하였다. 그가 1518년 95개 테제들에 관해서 변호를 할 때 스콜라 신학보다는 타울러에게서 훨씬 훌륭한 신학을 발견했노라고 고백하였다. 이러한 점을 고려한다면, 학자들이 엑크하르트와 타울러를 종교개혁의 진정한 선구자들로 간주하면서 독일의 신비 전통을 개신교 신학의 중세적 뿌리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 조금도 놀랄 일이 못된다. 루터가 중세 수도원주의나 고행을 통한 선행-의인화 신학을 공격할 때 그의 공격의 자원은 독일의 신비전통이었다."

 http://kin.naver.com/open100/detail.nhn?d1id=6&dirId=613&docId=465483&qb=66Oo7YSwIOyLoOu5hOyjvOydmA==&enc=utf8&section=kin&rank=2&search_sort=0&spq=0&pid=gXPllU5Y7bRssuMKnfRssc--432244&sid=TudzuXJo504AAEmMCW8

   

루터는 수도사였다. 그래서인지, 루터는 종교 개혁을 단지 교회 부패를 일소하는 데에만 두지 않았다. 당대 루터까지의 교회사를 철저하게 공부한 루터인 만큼 교황을 비롯한 목자들의 행태만을 비판한다 해서 달라지지 않은 역사를 배웠을 것이다. 그렇다면, 루터가 행하는 비판은 보다 근본적이어야 했다.

   

해서, 그 비판은 필연적으로 교황을 뛰어넘어야 했다. 교황에게 사도로서의 특권을 부여한 신을 부정해야 했다. 즉, 예수다. 예수를 넘어서 신과 직접 통한다. 이것이 '성화'이다. 중세라면 이단이라고 정죄할 대목이다.

   

허나, 루터는 정치적이기도 했다. 루터는 라틴 신비주의인 베르나르두스의 신과의 사랑을 매개체로 활용한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신과 통한다는 것이다. 이는, 베르나르두스 초기 시토파가 주장했던 성경을 통하여 신과 소통한다는 것이다.

   

참으로 놀랍다. 고전학파 스코틀랜드 유대인 아담 스미스는 프랑스 중농학파 케네에게서 '생산' 개념과 '자유무역' 개념을 차용해서 대박을 터트리더니 독일인 루터는 프랑스 시토파 베르나르두스의 '성경'과 '노동'과 '사랑'을 차용하여 왕대박 축포를 쏘아올린다. 이 모두가 감성적인 실천에 유난히 강한 켈트적 프랑스인의 전통에서 비롯하였으니 아이리쉬적 음악이 전 세계인의 심금을 울리는 이유와 같다고나 할까?

   

하면, 루터 사상은 프랑스에서 어떤 평가를 받았나. 호평이었다. 이유는 루터가 시토회 베르나르두스 사상을 존중했기 때문이다. 하긴, 예수회 로욜라도 시토회 수사의 글을 읽고 감명을 받았다고 했으니까.

   

아무튼 루터 이후로 헤겔이 등장하고, 문제의 일루미나티 바이샤우트가 등장한다.

   

http://repan.blog.me/50068804100

   

여기서 뻔한 레파토리가 나온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인드라주의, 인드라교는 인드라가 의도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인드라는 자유로운 이론가, 사상가, 실천가였을 뿐이다. 허나, 인드라 제자들이 인드라를 구속하고, 교리화했던 것이다. 우리는 인드라 제자, 혹은 추종자들이 말한 인드라를 넘어서 인드라를 입체적으로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드라주의에는 정작 인드라가 없다!!!

   

일면 타당성이 있는 분석이다. 왜냐하면, 인격신도 나약하게 보는 마당에 인간 역시 인격신을 닮아 나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해서, 인드라의 긍정성과 부정성을 모두 부정하는 방식을 택한다. 특히 부정의 부정이라는 변증법적 방식을 통하여 인드라가 찰나지간에 보았다는 신의 경지를 탐구하는 것이다.

   

허나, 이것은 과연 성공적인 방법일까? 아니다. 이는 영화 '염소를 노려보는 사람들'에서 케빈 스페이시처럼 단지 그 '기술'만을 가로채는 데에 있다. 허나, 오늘날 CIA 등에서 실험한 초능력 프로젝트 결과는 어떠한가. 초능력이란 있지만, 복사할 수 없다는 것으로 결론이 나지 않았던가. 다시 말해, 영화 '디스트릭트 나인'의 나이지리아 조폭처럼 초능력자 육신을 먹으면 초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자본주의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재생산되지 않는 가치(교환가치)란 무의미하다.

   

켈트적 프랑스인(아일랜드, 스코틀랜드인)은 이론적으로 무언가를 창출하는 데에는 부족한 면이 있다. 반면, 게르만적 영국인, 독일인은 '생각'할 수 있었다. 이 '생각'의 기원이 어디인가 궁금한 이들이 많았던 듯싶다. 해서, 그 기원을 인도로까지 나간 것 같다. 인도인이 수학을 잘 하니까.

   

아무튼 당대 프랑스에서 필로조프(프리메이슨 볼테르에 의해서 지식인으로 개념화했다 할 수 있는데, 이는 이후 인월리에서 자세하게 언급하겠다.)들 원천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영국이요, 다른 하나는 독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프리메이슨 바람이 영국에서부터 불어온다. 프리메이슨은 반합법이었다. 18세기에 거의 공개적으로 회원 요청이 있을 정도였다. 더군다나 프리메이슨 영국 유학파 볼테르 명성이라면 옥케이였다! 왜냐하면, 이 시기 프리메이슨 볼테르와 만남이 있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프랑스 살롱 사교계에서 이름을 날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프리메이슨 볼테르가 자신의 이름을 한번 인용했다면 그것은 그냥 끝장이었다. 잘 나가는 프랑스 귀족 귀부인들이 저마다 침대에서 부를 지경인 게다~!

   

여기에 은근 반발하는 그룹이 있었다. 그들은 누구인가. 영국적이면 모든 것이 좋다더냐. 바다 건너온 것이면 다 명품이더냐. 우리 것은 좋은 것이여~! 경제적으로는 중농학파 케네요, 정치적으로는 루이 14세파요, 신학적으로는 구관이 명관, 가톨릭이었다.

   

바로 이 지점을 가장 충족한 이가 미라보였던 것이다.

   

아버지가 케네처럼 대표적인 중농학파였다. 정치적으로는 라파예트와 1789년 협회를 만들 정도였지만 속으로는 적대적이었는데, 이유는 라파예트와 달리 반영적 친대륙적 외교 노선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미라보는 오스트리아 황녀 마리 앙투와네트와 교류하는 것이다. 이것을 혁명파 입장에서 해석할 수 있지만, 프랑스 혁명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런 편협한 분석에서 벗어날 줄 알아야 한다. 무엇보다 미라보가 끌린 이유는 신학적인 이유였으리라 본다. 왜냐하면, 예나 지금이나 종교적 신념만큼 인간 행동을 결정짓는 것이 없었기에. 

   

해서, 미라보는 자코뱅에게 기울게 되는 것이다.

   

예서, 자코뱅이란 영국을 제외한 유럽 대륙이란 의미인 게다. 이는 오늘날 국유본이 영국과 유럽 대륙을 분리시키는 수법을 사용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스코틀랜드 독립까지 우려먹으면서 하는 일종의 트릭이다.

   

이에 반발한 세력이 있으니 푀양파인 게다.

   

"푀양클럽이라고도 한다. 파리의 튈르리 왕궁에 가까운 푀양수도원을 본부로 한 데서 푀양파로 불렸다. 자코뱅당(黨)을 탈퇴한 의원들이 부유한 시민, 지주 등과 연대하여 결성한 모임이다. 이들은 프랑스혁명 중인 1791년 6월 루이 16세가 도망간 뒤 앙투안 피에르 바르나브(Antoine Pierre Barnave), 아드리앵 뒤포르(Adrien Duport) 등 자코뱅당의 의원들이 주도한 왕의 교체를 촉구하는 청원서에 반대하여 자코뱅당을 탈퇴하였다.

   

왕정의 파괴와 개인재산의 몰수를 두려워했던 이들은 혁명을 반대했으며, 1791년 10월 입법의회가 성립하자 지롱드당에 대하여 우익(右翼)을 형성, 내각을 조직하고 상당한 세력으로 부상하여 활동하였다. 이들은 1791년의 헌법을 원칙으로 하여 입헌왕정을 견지하고 망명한 귀족에게 귀국할 것을 호소했으며, 협조외교(協助外交)를 제창하였다.

   

그러나 당내에 내분이 끊이지 않은 상태에서 1792년에 지롱드당이 정권을 장악함에 따라 혁명전쟁이 유발되었으며, 전후에 다시 내각을 조직했으나, 8월 10일의 왕정타도를 위한 시민봉기(8월 10일 사건)로 푀양파는 와해되었다. 

[출처] 푀양파 [派, Club of the Feuillants ] | 네이버 백과사전

   

예서, 푀양파는 왜 하필이면 푀양 수도원으로 근거지를 옮겼던 것일까. 푀양 수도원 정체가 궁금하다? ㅎㅎㅎ. 푀양 수도원은 시토파 시도원의 분파다. 푀양회는 원래 시토(Citeaux) 수도원에 속해 있었으나, 교황 식스투스 5세의 허락을 얻어 1586년 독립된 교단이 되었다.

   

예서, 특기할만한 것이 위그노 신교 성향의 앙리 4세를 암살한 자가 푀양파 수도사였다는 게다, 알려진 바로는, 푀양파는 당대 시토파에 비해 엄격한 규율을 지녔다 했다. 여기서 엄격한 규율이란 것은 프랑스 왕과의 관계가 우선이었을 것이다.

   

"파리에서 북쪽으로 35km 위치에 있는 르와요몽 수도원(L'Abbaye de Royaumont)은 유럽의 수많은 수도원ㆍ고성들 가운데 비교적 옛 모습을 잘 간직한 편에 속한다.

   

면적이 20가 넘는 이 곳은 옛 수도원 건물들은 물론이고 정원, 소운하, 동굴 등 구석구석을 잘 보존하고 정성스레 가꾼 덕분에 프랑스의 일급 문화관광 자원으로 꼽힌다.

   

그러나 르와요몽은 단순히 옛 모습을 보여주는 여느 수도원ㆍ고성과는 다른 데가 있다. 건물들과 주변의 자연을 통틀어 하나의 문화예술 센터처럼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연중무휴로 문을 여는데다 파리와 가깝다는 지리적 이점까지 작용해 늘 방문객이 넘치는 이곳은 특히 날씨가 좋은 요즘에는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넘쳐 입구가 잘 보이지 않을 지경이다.

   

1228년 생 루이(Saint Louis) 왕의 명에 의해 지어진 르와요몽 수도원은 시토(Citeaux)파 수도원으로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왕들이 예배를 보던 곳이다. 그래서 지금도 이곳은 '왕의 수도원(L'abbaye royale)'으로 불린다.

   

혁명 이후 트라바네 후작의 손에 넘어갔다가 방직공장으로 전락하는가 하면 제1차 세계대전 때에는 부상병들을 위한 병원이 되기도 했던 르와요몽이 서서히 예술의 향기를 피워올리기 시작한 것은 40여 년 전 한 예술애호가에 의해서였다. 물론 1936년 결성된 '문화로비(Foyer culturel)'라는 모임이 이곳에서 음악회를 열었던 것이 먼 배경이 돼주기는 했다.

   

이 수도원을 사들인 앙리 구앵과 이자벨 구앵 부부(Henry-Isabel Gouin)는 '메세나 부부'로 불릴 정도로 열성적인 음악 애호가이자 예술 후원자였다. 이들은 1964년 '인간 학문의 진보를 위한 르와요몽 재단(La Fondation Royaumont pour le progres des Sciences de l'Homme)'을 설립, 본격적인 메세나 활동에 들어갔다.

   

초기에는,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예술보다는 학문 중심이었다. 특히 언어학에 관심이 깊어서 변형생성문법의 창시자인 노엄 촘스키를 중심인물로 내세워 많은 활동을 펼쳤으며 여러 나라의 시(詩)를 다양한 언어로 번역하는 데 많은 지원을 제공했다.

   

최근에는 학문보다 예술, 특히 음악과 무용에 치중하고 있다. 예술가들의 창작, 공연, 실험, 연구를 지원하는 '프로페셔널리즘의 심화(深化)'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연수, 세미나, 레지던스 등 각종 프로그램이 연중 끊이지 않는다. 본관 안내 데스크에 쌓여 있는 각종 안내 쪽지와 소책자만 해도 족히 한 아름은 돼보였다.

   

그렇다고 일반대중에 소홀한 것은 결코 아니다. '정원으로 난 창문' '음악 시즌' 등 갖가지 프로그램으로 관객을 부르고 있으며 어린이들을 위한 특별 프로그램도 다채롭게 준비돼 있다. 이렇게 생산된 작품과 프로그램들은 수도원을 벗어나 프랑스 전역을 돌고 있으며 종종 외국에서도 소개된다. 글자 그대로 문화 발신지(發信地)가 되고 있는 것이디.

   

음악부문에서는 성악ㆍ현대음악ㆍ중세음악ㆍ즉흥음악 등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수도원 회랑 쪽에 붙은 테이야르 드 샤르댕 홀(Salle de Teihard de Chardin)에서는 신학자의 이름을 딴 방답게 종교음악 수업이 진행되고 있었고 회랑의 벽들에는 이곳에서 작업을 했던 세계 각국 음악가들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수도승들의 식당으로 쓰이던 방에서는 한동안 먼 곳에 옮겨가 있던 파이프 오르간을 다시 가져다 설치하고 있었다.

   

무용은 음악보다는 꽤 늦게 1995년 추가됐다. 수전 버지 무용단을 상주무용단으로 두고 있으며, 버지 여사의 지도 아래 매년 즉흥ㆍ구성ㆍ레퍼토리 워크숍이 열린다. 이 워크숍에는 한국의 젊은 무용가들도 참여한 바 있다.

   

23일 저녁에는 1주일간의 즉흥무용 워크숍을 마무리하는 미니공연이 있었다. 옛 수도원 화장실을 개조한 꼭대기 층에서 춤을 감상하는 것은 각별한 체험이었다(시토파 수도승들에게는 무조건 침묵해야 하며 무엇이든 다함께 해야 하는 계율이 있었는데 화장실 사용도 물론이었다. 그것도 같은 시간에 전원이 함께해야 했다. 이날 저녁 무용수들은 아주 기하학적이고 미니멀한 동작으로, 그러나 틈틈이 그들의 상상력을 변주로 삽입하는 방식으로, 수 백 년 전 수도승들의 침묵을 이어가고 있었다).

   

음악 무용 외에 여러 장르의 어울림, 특히 학문과 예술의 만남을 중시하는 것이 르와요몽재단의 독특한 발상이다. 언어와 이미지, 동작과 소리의 조화와 충돌을 통해 인간의 지성을 제고하고 인식의 지평을 넓힌다는 창립 이념을 충실히 지키고 있는 셈이다. 버지 여사 역시 무용 세미나에 즐겨 고고학자나 기호학자들을 초빙한다. 예술이란 기호로 뭔가를 표현하는 것이라는 그의 평소 생각과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르와요몽 재단의 재원은 다양하다. 부부가 남긴 유산 외에 수도원 유지ㆍ보수에 필요한 정부 보조금도 다소 받고 있고, 그밖에 다양한 민간 후원금을 확보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즉흥무용 공연이 끝난 뒤 만난 앙리 구앵 위원회(르와요몽 재단 후원기업들의 모임) 회장인 베르나르 투블랑(Bernard Toublanc) 씨는 "프랑스에는 메세나 활동이 워낙 다양하지만 르와요몽의 경우는 수도원이라는 공간의 역사적 의미를 살려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 동시에 순수 문화예술의 요람이 되고 있다는 점이 매우 독특하다"고 평가했다.

   

프랑스 주요 공연장들의 연합체인 센 나시오날의 한 지역 모임(L'Apostrophe Scene nationale de Cergy Pontoise et du Val d'Oise) 대표이기도 한 그는 "설립자의 이념에 감동받아 후원회를 맡고 있다"고 말했다.

   

또 앙리 구앵 위원회와는 별도로 26세 미만의 젊은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기업ㆍ개인들의 모임인 '르와요몽의 친구들 협회'에도 무려 525명이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현재 르와요몽은 프랑스 정부가 지정한 16개 '만남의 문화센터(Centre culturel de rencontre)' 가운데 하나이다. 이 센터는 고성이나 수도원 등 색다른 역사적 배경을 지닌 장소들 가운데 문화적 만남의 장이 되고 있는 곳들이다.

   

상근직원 60명, 연간예산 650만유로(2004년) 규모의 재단 업무를 총괄하는 프랑시스 마레샬(Francis Marechal)은 "프랑스의 문화력을 지탱해주는 요인은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르와요몽과 같은 진정한 메세나 정신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수도원 안쪽에는 재단 설립자 부부의 딸이 살고 있다. 70세가 좀 넘었는데 언젠가 세상을 떠나면 그의 거처도 재단으로 귀속된다고 한다. 그가 자신의 사후 그 공간을 '문화적으로 멋지게' 꾸밀 방도를 놓고 자주 재단측과 머리를 맞댄다고 하니 예술사랑도 대를 잇는 모양이다.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1285570

   

캐병쉰 국유본 간첩 색희, 노엄 촘스키 운운하면서 바퀴벌레 떡치는 소리를 해대지만, 메세나 운동을 후원하는 것은 록펠러이다. 이제 한국인이라면 이런 기초 정도는 마스터하고 사회 생활할 때도 되었다. 언제까지 쪽발 돼중, 쪽발 놈현이라는 국유본 장난질에 세뇌되어서 살아갈 것인가.

   

시토파하면 성당기사단인데, 프랑스 왕과 유착? 웬 시츄에이션? 할 법도 하다. 허나, 역사 공부를 달리 하는가? 사건별로 보면 이해가 안 가지만, 이 사건들을 모아 역사적으로 살피는 것이 역사인 게다.

   

가령 인드라의 국제유태자본론은 그간 음모론이 사건 별로 말하는 것을 뛰어넘어 시대적으로, 역사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해서, 국유본이 마치 맑스를 대하듯 주의깊게 인드라를 대하고 있다는 것 정도를 파악해야 한다.

   

자, 진도 나가자.

   

시토파는 초기 베르나르두스 시대에는 정말 잘 나갔다. 베르나르두스가 성당기사단 이상으로 신성력도 있던 모양이다. 가는 곳마다 조용기적 이적을 일으키니 베르나르두스 인기는 교황을 뛰어넘을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베르나르두스는 교황을 탐내지 않았다. 수도원장에 머물렀다. 그것이 더욱 더 베르나르두스 인기를 배가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시토회 교리상 재산도 탐내지 않고, 교황을 할 수 있음에도 명예도 탐하지 않으니 베르나르두스 인기는 상상 초월이었다. 여기에 황무지를 일구어 유민들을 끌어들여 실업자 해소에 나서니 예수가 재림한 것이 아닌가 싶을 지경이었던 게다. 허나, 베르나르두스는 겸허했다. 그는 늘 예수의 밑에서 순종하는 태도로 임했다. 

   

허나, 나이를 먹어가면서 베르나르두스 신성력이 사라졌다. 베르나르두스는 조용히 절망하다 삶을 마친다. 이후 시토회는? 개판 오분 직전이 된다. 대표적인 예가 베르나르두스 생애에 지켜지던 베르나르두스 건축양식이 사라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처럼 12세기 말엽에 이르면, 시토회는 베르나르두스 바램과 달리 프랑스왕과 교황의 충실한 부대로 활약한다. 해서, 이후 프랑스왕들이 시토회 예배당에서 예배를 보았던 것이다.

   

헌데, 푀양파가 이러한 시토파에서 독립한 푀양 수도원에서 일을 도모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이겠는가.

   

적대적인 라파예트와 미라보를 함께 결속시킨 푀양파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외국 간섭에 대한 경계이다.

   

푀양파에 속한 각 인물들의 이해 관계는 다양했을 것이다. 허나, 중요한 건, 모두들 소탐대실을 동상이몽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혁명 직후 레닌처럼 독일 등 외국에 굴욕적으로 양보하는 선을 고려했을 것이다. 사실 이 정도가 영국의 입장이었다. 실제로 1795년 네덜란드 왕이 런던으로 망명하자 네덜란드 왕과 동인도회사를 통합시키지 않았던가. 또한, 혁명 직후, 영국이 프랑스에게 시종일관 내세운 조건이 해외 식민지 양도이기도 했다.  

   

예서, 사후에 규정한 지롱드당이니 하는 것은, 인드라가 볼 때, 큰 의미가 없다고 본다.

   

중요한 건, 왜 자코뱅당과 푀양당으로 나누었는가 하는 점이다.

   

하고, 프랑스 혁명 주체 세력에서 분화한 그룹이 왜 하필 푀양당을 자임하고 있는가이다.

   

혁명세력 중 일부가 자코뱅당에서 푀양당으로 움직인 이유는, 푀양당파가 프랑스를 프랑스 왕의 소유물이 아니라 인민의 나라로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푀양파는 그 이름에서 보듯 영국은 물론 유럽 대륙으로부터의 프랑스 독자성을 지키는 길이요, 프랑스 군주제 개혁의 산증인이었다.

   

해서, 푀양파를 넘어서기란 자코뱅파에선 힘든 일이었다.

   

허나, 그 일을 이루어내는데, 로베르피에르였던 것이다. 누구보다 프랑스적이며, 루소적인 인물이 자코뱅파의 대표가 되니 푀양파 위상이 크게 추락할 수밖에!!!

   

*****

   

아이고, 오늘은 술 취해서 여기까지. 요즘 며칠 감기를 앓아서요. 감기 조심하세요.

   

   

   

미라보 다리 / 기욤 아폴리네르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은 흐르고

우리의 사랑도 흐른다

마음속 깊이깊이 아로새길까

기쁨 앞엔 언제나 괴로움이 있음을

   

밤이여 오너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만 머문다

   

손에 손을 잡고 얼굴 마주하며

우리의 팔 밑 다리 아래로

영원의 눈길 지친 물살이

천천히 하염없이 흐른다

   

밤이여 오너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만 머문다

   

사랑이 흘러 세느 강물처럼

우리네 사랑도 흘러만 간다

어찌 삶이란 이다지도 지루하더냐

희망이란 또 왜 격렬하더냐

   

밤이여 오너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만 머문다

   

햇빛도 흐르고 달빛도 흐르고

오는 세월도 흘러만 가니

우리의 사랑은 가서는 오지 않고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만 흐른다

   

밤이여 오너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만 머문다

   

- 시집『알콜』(1912)

   

   

 http://youtu.be/uiNQehY2VZk

   

프랑스혁명과 프리메이슨 1 - 신비주의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1/12/13 05:48

http://blog.naver.com/miavenus/70126359469

   

   

   

   

http://blog.naver.com/theogeo/30026747608

   

   

루소가 프랑스 혁명에 미치는 영향력은 프랑스 혁명 인권선언에서 잘 나타나 있다.

   

http://blog.naver.com/law1227/80056388923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26: 프랑스혁명과 프리메이슨 1 - 신비주의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1/12/13

   

기독교 신비주의 - 에크하르트와 베르나르두스

   

이 글은 프랑스 혁명과 프리메이슨 관계를 신비주의적 관점에서 짚어보는 글이다. 이 글 목적은 프랑스 혁명과 프리메이슨에서 신비주의가 사건의 원인을 제공한 바 있지만, 사건의 본질이 아님을 강조하고자 함이다.

   

요즘 인드라는 기발한 독서법으로 책읽기를 하고 있다. 가령 맑스의 프랑스 삼부작에서 맑스가 성경 구약을 인용하는 대목만 살펴보는 것 같은 것이다. 구약 어느 대목을 인용했나. 또 왜 이 대목에서 하필 구약 이야기를 예로 들었는가. 그 대목이 맑스 사상과 이론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어떠한가 등등.

   

왜 이러한가 하면, 인드라가 수십년 무신론자로 살다가 근래 유신론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인드라는 신을 믿는다. 헌데, 이 신에 대해 그 어떤 이성적인 설명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인드라가 어느 순간 빛처럼 쏟아지는 신을 찰나지간에 느꼈기 때문이다. 그 이외에는 달리 설명할 수 없기에 인드라는 대체 왜 이런 일이 인드라에게 일어났는가 싶어서 숙고를 거듭했다.

   

그런 과정 중 하나로 기독교 신비주의를 고찰할 수 있었다.

   

http://kslim713.blog.me/40145274679

   

여기에는 스웨덴보리에 관심이 있으신 수반아님 영향을 무시할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드라 삶에서 우연치 않은 여러 만남들 중에 하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처음에는 매우 낯설지만, 알면 알수록 친숙한 느낌?

   

아무튼 인드라는 중세 기독교 신비주의의 두 대표자인 시토파 베르나르두스와  도미니크파 에크하르트에 주목했던 것이다.

   

에크하르트

http://blog.naver.com/miavenus/memo/70125746986

   

베르나르두스

http://blog.naver.com/rsg861/80134535211

   

둘의 공통점은 중세 최고 이론가인 토마스 아퀴나스의 스콜라 학파에 비판적이었다는 점이다.

   

   

하면, 왜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러한 신학론을 전개하지 않을 수 없었는가. 그리스 철학을 수용한 이슬람 종교철학을 십자군 원정에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http://blog.daum.net/crossenglish/891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리스 철학과 이슬람 종교철학에 대응한 신학 체계를 종합하였다. 허나, 이는 두 갈래 반발을 낳았다. 그 하나는 시토파 베르나르두스로 대표할 수 있는 기독교 신비주의, 라틴 신비주의이다. 다른 하나는 에크하르트로 대표할 수 있는 기독교 신비주의, 게르만 신비주의이다. 이때, 베르나르두스와 에크하르트를 묶을 수 있는 기독교 신비주의의 기원은 디오니시우스이다. 

   

기독교 부정신학이란 디오니시우스에서 비롯한다.

   

"위(僞) 디오니시우스(Pseudo-Dionysius) 또는 아레오파고스의 디오니시우스(Dionysius the Areopagite)라고 알려진 이 신비신학자는 서기 500년경의 사람이다. 아레오파고스의 디오니시우스는 사도행전 17:34에 나오는 사람으로 바울과 논쟁을 벌였던 인물인데, 6세기에 이 사람의 이름으로 된 글과 편지들이 나왔기 때문에 그를 이렇게 부른다. 후에 신비신학에 엄청난 영향을 준 그의 글은 묘하게도 그의 사상을 계승한 토마스 아퀴나스와 에크하르트 같은 신학자들이 파문 등의 수난을 겪은 것과는 달리, 사도적(使徒的)이고 정통적인 것으로 인정받아 동방그리스도교와 서방그리스도교 양쪽에서 모두 거의 정경(正經) 취급을 받았다.

   

그의 이름으로 남아 있는 글은 『천상의 위계』(Celestial Hierarchy),『교회의 위계』(Ecclesiastical Hierarchy),『신의 이름들』(The Divine Names),『신비주의 신학』(Mystical Theology), 그리고 10편의『편지들』(Letters).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그의 저작들에 대한 수 없이 많은 번역들과 주석서들이 이어졌다. 위 디오니우스의 신학을 거의 완벽하게 보여 주는 탁월한 책이다. 이 책은 하나님에 대해서는 '이렇다'라거나 '저렇다'라고 긍정적으로 말할 수 없고, 오직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라고 부정적으로만 말할 수 있다고 하는 이른 바 "부정신학"(The Negative Theology)의 기원이 되는 책이다. 그러나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여기서 디오니시우스가 말하는 "부정"은 "긍정"의 반대말이 결코 아니다. 그의 "부정"은 "긍정과 부정의 부정"으로 "완전한 부정"이며, 따라서 궁극의 원인인 하나님은 "전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알 수 없다"라는 말은 결코 불가지론이나 회의주의가 아니다. 이 "알 수 없다"야말로 완전한 긍정이다.

   

여기에 이른 사람의 상태를 그는 이렇게 표현한다. "여기서 사람은 자기 자신도 아니요 그렇다고 다른 누구도 아닌 상태에서, 모든 앎이 활동을 멈춘 상태에서 도무지 알 수 없는 분과 지극하게 합일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게 됨으로써 마음을 넘어서서 알게 된다."

   

놀랍게도 그가 본질을 표현하는 다음과 같은 말은 불경에서 진여(眞如)를 설명하는 말과 완전히 일치한다.

   

그것은 영혼이나 마음이 아니요, 그것은 상상력이나 확신이나 말이나 이해력을 지니고 있지도 않다. 그것은 말 자체도 이해력 자체도 아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고, 이해력으로도 알 수 없다. 그것은 수(數)나 질서가 아니며, 거대함이나 작음도 아니고, 평등이나 불평등도 아니며, 유사함이나 다름도 아니다. 그것은 움직일 수 없음도 아니고, 움직이는 것도 아니며, 휴식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권능을 지니고 있지도 않으며, 권능도 아니고, 빛도 아니다. 그것은 살아 있지도 않고, 생명도 아니다. 그것은 실체도 아니며, 영원이나 시간도 아니다. 그것은 지식도 아니고 진리도 아니므로 이해로 알 수 없다. 그것은 왕권도 아니다. 그것은 지혜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도 아니고 합일도 아니며, 신성(神性)도 아니고 선함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해하는 의미의 영(靈)도 아니다. 그것은 아들이나 아버지도 아니며, 우리에게나 다른 어떤 것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비존재의 영역에도 속하지 않고 존재의 영역에도 속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들은 그것을 사실 그대로 알지 못하며, 그것은 존재하는 것들을 그 자체로 알지 못한다. 그것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으며, 그것에 대한 이름도 앎도 없다.

   

어둠과 빛, 오류와 진리― 그것은 이들 중 어느 것도 아니다. 그것은 주장과 부정을 넘어선다. 우리는 그것과 비슷한 것(what is next to it)을 주장하고 부정하는 것이지, 그것에 대해 주장하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니니, 그것은 만유의 완전하고 유일한 원인이므로 모든 주장을 넘어서며, 한없이 단순하고 절대적인 본성으로 인해 모든 경계를 벗어나고, 모든 경계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또한 모든 부정을 넘어선다."

http://kin.naver.com/open100/detail.nhn?d1id=6&dirId=60902&docId=287660&qb=65SU7Jik64uI7Iuc7Jqw7Iqk&enc=utf8&section=kin&rank=2&search_sort=0&spq=0&pid=gXi2o35Y7bssstsjSRdssc--135021&sid=TuY-zPIW5k4AACukJTw

   

   

인드라는 어둠과 빛, 오류와 진리, 그 어떤 것도 아니다, 라는 것을 수메르 신화에서 찾는다.

   

하나, 수메르 신화에서 등장하는 여러 인격신들의 갈등과 투쟁에서 대홍수가 일어났다.

   

둘, 이후 인간들은 인격신들간의 갈등과 투쟁에서 승리한 인격신을 중심으로 대홍수 사건을 이해한다.

   

셋, 허나, 대홍수 사건을 가장 설득력이 있게 설명한 인격신조차 최종적으로 승리한 인격신이 아니며 현재진행형이다.

   

다시 말해, 인격신이 대홍수 사건 원인이지만, 대홍수 사건 본질은 미래 권력에 의해 우연적이다.

   

도식적으로 말한다면,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슬람 종교 철학에 대해 이치에 맞음을 말하면서도 그 이치 상위에 계시를 두어 '수동적'으로 방어하려 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이슬람 종교철학이 당대 철학에서 가장 뛰어남을 인정하면서 이를 서양화, 현지화시킨 것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업적인 것이다. 이에 대해 베르나르두스와 에크하르트가 자존심에 상처를 입어 적극 비판을 했던 것이다. 

   

라틴 신비주의, 베르나르두스 신비주의 비판 방향은 감성이요, 노동이요, 생산이다. 지식은 결코 진리가 아니다.

   

부정 신학 바탕 위에서의 긍정 신학이다. 해서, 신과의 교제와 사랑이다. 베르나르두스는 권력을 탐하지 않았다. 그는 얼마든지 당대 교황으로 나갈 수도 있었는데, 수도원장에 머물렀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자신이 예수가 되는 길보다는 예수를 앞세우고 순종하여 모범하는 길을 간다는 점에서 소승불교, 남방불교, 본래 부처가 설파한  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게르만 신비주의, 에르하트트 신비주의 비판 방향은 지식이었다. 부정 신학을 보다 완성하려는 바벨탑적 욕망이 에크하르트를 낳았다. 예수를 역사화하고, 예수 자리에 자신을 위치시키고픈 욕망. 모든 인간을 현세에서 심판하는 독재적 지위에 오르려는 욕망. 하여, 에크라르트는 정당하게도 이단이 되었다. 헌데, 바로 그런 이유로 에크하르트는 후대 루터와 헤겔의 스승이 된 셈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대승불교, 북방불교, 부처 제자들에 의해 조작된 대승불교, 부처가 끔찍하게도 반대했던 길을 간 셈이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게르만 신비주의자들은 부처 본래의 길보다 이단화한 티벳 밀교를 더욱 숭상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해석은 인드라의 전술적 해석이긴 하다^^!

   

프랑스 혁명은 놀랍게도 이 두 가지 길의 갈등과 투쟁의 역사였다.

   

하면, 오늘날 이 교훈은 어떠한가.

   

오늘날 한국은, 고려 시대 말 땡중 신돈과 같은 씹색희 법륜과 같은 땡중들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

   

록펠러 일가가 봉은사를 방문한 이후 법륜과 같은 씨팔색희들이 CIA나 그와 역할을 같이 하는 여러 국유본 재단 - 쪽발 놈현 재단도 배후에는 국유본일 것이다 - 지원하에 개난리를 치고 있다.

   

이들은 이것이 사회적 참여라는 미명하에 참가하는데, 과연 그것이 부처의 길일까? 아니면, 니넘들의 숨은 젖같은 욕망 때문일까?

   

개씨발색희들아, 더러운 짓거리 그만하라. 법륜! 니 애비가 정녕 쪽바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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