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 민족해방운동은 국제유태자본이 만들었다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1/11/19 12:20
http://blog.naver.com/miavenus/70124462253
전세계 민족해방운동은 국제유태자본이 만들었다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14 : 목숨을 바칠만한 제국주의가 목표였던 페이비언협회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1/11/19
둘째, 전세계 민족해방운동은 국제유태자본이 만들었다
수메르/ 페니키아/ 카르타고/ 영국은 용병에 의존하였다.
1. 상업 활동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용병이 경제적으로 합리적이었다. 군인이란 전쟁 때나 필요하다. 평상시에는 군인을 키우고, 관리하는 비용만 든다.
2. 비용이 얼마 들지 않는다 해도 군사력을 키우면 그 군사력이 언제든 자신들에게 칼을 들이댄다. 고대 바빌론, 로마, 중국, 한국. 일본에서 예외없이 일어난 일이다. 조선왕조는 고려제국 후반에 발생한 무신의 난과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그리고 조선왕조 초기 왕자의 난 덕분에 군사력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간 것이다. 다만, 조선왕조는 남는 힘을 문치에 힘을 쓴 반면, 수메르는 상업 활동에 전력을 기울인 것이다.
3. 무엇보다 권력이 집중한 만큼 상인 귀족 권력을 뛰어넘는 제국 권력을 창출할 위험이 있다. 로마제국 카이사르, 중국 진시황, 나폴레옹, 태양왕 루이14세 등등등.
이와 같은 이유로 영국에서의 국유본은 군사력을 키우는 데에 민감했다. 특히 육군을 키우지 않았다. 국유본은 영국이나 네덜란드에서 해군에 집중했던 것이다. 하고, 이마저도 불안하여 오늘날 공산주의권에 행한 방식으로 장군 감시 체계를 게을리하지 않은 것이다. 자신들에게 위협적인 장군들을 그냥 놔두지 않는다. 그 희생양 중 하나가 이차대전 패튼과 한국전쟁 맥아더인 게다~!
예서, 인드라의 한방으로 읽는 '빅토리아 시대 이전의 영국사'를 읽자.
영국은 로마제국에게 점령을 당한 뒤 카이사르의 전기에서 처음으로 역사에 출현할 정도로 미개한 지역이었다. 카이사르가 자신의 전기에서 언급할 정도라면 하찮은 영국인으로서는 영광일 것이다. 허나, 기후가 꿀꿀해서인지 로마제국은 훌륭한 문화유산을 남긴 뒤에 자진 물러나니 다시 암흑의 세계가 찾아와 영국이 역사에서 사라졌다. 시키지 않으면 뭣 하나 할 줄 모르는 전형적인 영국인의 종족 특성인 게다. 그러다가 다시 영국에 행운이 찾아왔다. 바이킹들이 영국을 정복하고 영국을 발전시켰다. 허나, 정복왕은 영국이 살기 X같은 나라라면서 영국에서 사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해서, 위대한 왕은 총독부만 둔 채 프랑스 따뜻한 나라에 가서 살았다. 이 바람에 식민지 총독부 관리들 권력이 커진 것이다. 이 식민지 총독부 관리들이 오늘날 영국 귀족 선조들이다. 바로 이 시기에 식민지 총독부 관리들이 경제에 무식했기에 상인을 필요로 했는데, 그 상인들 일부가 스페인과 이태리에서 활약하던 카르타고 유태인이었다. 일부 기록에는 11세기경 노예로 유태인이 들어왔다는데, 그것이 사실이건, 아니면 구약 욥을 응용한 상상력의 소산이건, 노예이던 유태인이 오래지 않아 영국 경제를 좌지우지했던듯 싶다.
11세기에서 13세기. 이 시기는 유럽에서 중세 온난기라 부를 정도로 기후가 좋았다. 해서, 얼음이 다 녹으니 바이킹들이 활개를 치고, 그린랜드에서 농사를 짓고, 러시아에도 진출하고, 일부는 아메리카로 건너가서 오늘날 하플로 X 타입 인자를 남긴 유럽계 인디언이 된 게다. 그런 만큼 중북부 유럽에도 나라들이 만들어지니 교역을 활성화할 수 있었다. 이때, 해상 루트는 지중해에서는 이집트, 그리스, 로마, 스페인, 포르투갈, 영국, 노르망디, 네덜란드로 이어지는 해상루트였다. 이 시기 노르망디에서는 몸집만 큰 멍청한 백인 노예들을 거래했다고 한다. 다른 한편, 육상 교역은 로마제국군이 만든 로마 길을 이용하니 이태리 북부 롬바르디아 상인과 라인강변 한자동맹 상인이 뜬 것이다. 이들의 주요 루트는 로만틱가도와 라인강변을 잇는 이태리 - 네덜란드 라인이었다.
이때 자세한 사정을 알 수 없으나, 인드라가 추정한 바로는, 유태인 상인은 스페인/포르투갈과의 해상 교역에서 중요한 거래자였을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스페인/포르투갈에는 궁정유태인들이 상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헌데, 이들이 누구인가. 수메르/페니키아/카르타고의 상술을 비전으로 익혀온 이들이지 않은가. 특히 해상교역에는 타고난 재주가 있었다. 하여, 순식간에 영국 상권을 장악하지 않았나 싶다. 그런 까닭에 육상 교역에 강했던 롬바르디아 상인과 한자 상인들이 위기의식을 느꼈을 것이다. 해서, 이들 상인들이 13세기말 몰려온 몽골제국 군대를 빌미로 유태인 상인을 쫓아낼 계책을 만들어냈고, 마침 영국 국왕이 유태인 상인에게 크게 빚을 지고 있었기에 영국 국왕과 롬바르디아/한자동맹 상인이 협잡하여 유태인 추방령을 13세기말에 시행한 것이다.
해서, 14세기 이후 영국에서는 유태인이 살 수 없었다. 반면, 영국 상권을 장악한 자들이 롬바드리아 상인이었다. 해서, 오늘날 영국 시티지구 핵심부에는 롬바드가가 있는 것이다. 미국에 월가가 있다면, 영국에는 롬바드가! 물론 그 롬바드가는 로스차일드 가문이 장악하고 있다~! 이들은 이 시기에 주로 거래한 것이 네덜란드를 통한 양모였다. 영국에서 양모를 만들면 이를 롬바드 상인이 네덜란드에 팔고, 한자동맹 상인이 네덜란드에서 가공한 원단을 이태리 등에 파는 것이다. 이 때문에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 원인을 영국과 네덜란드간 교역에서 찾는 분석도 있다. 쪽발이가 임진왜란을 일으켜서 조선 도공들을 끌고가서 도자기 산업을 일으켰듯 영국은 백년전쟁 와중에 의류 기술자들을 영국으로 데려갔기 때문이다.
하면, 추방당한 스페인계, 혹은 세파라딤 유태인들은 어디로 갔나. 처음에는 프랑스로 가나 프랑스에서도 추방령이 떨어지니 간 곳이 바로 독일이었던 게다. 이것이 독일계 유태인, 혹은 아슈케나지 유태인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독일 등지에서 극소수 유태인이 있었긴 하지만, 당시 독일은 수많은 자유도시와 공국들로 갈라져 있었기에 상대적으로 규제가 덜 했던 것이다. 이들이 독일 등지에서 열심히 실력을 키웠던 게다. 허나, 결정적인 변수는 스페인 추방령이었다. 당대 실력파 유태인들은 대부분 스페인 궁정 유태인을 중심으로 이태리와 독일, 식민지 네덜란드, 북아프리카를 잇는 교역에 종사하고 있었다. 헌데, 스페인이 추방을 시키니 이들이 어디를 가겠는가. 포르투갈, 이태리, 독일, 튀니지, 리비아, 이집트, 바그다드, 남미 등지로 간 것이다. 이때, 포르투갈이나 독일, 이태리로 갔던 이들이 점차 집결한 곳이 바로 네덜란드였다. 당시 네덜란드는 스페인과 독립투쟁중인 데다가 종교개혁가들의 해방 공간이었다. 그런 만큼 유태인 입장에서는 종교 탄압을 덜 받는 데다 오랜 스페인 식민지였다 보니 네덜란드와 많이 교역을 해서 잘 아는 동네였다.
헌데, 기적이 일어났다. 스페인은 스페인 경제와 함께 그 이후로 내리막길을 걸었던 반면, 스페인 궁정유태인을 중심으로 한 유태인들이 입국한 지 불과 십수 년만에 네덜란드는 유럽 강국으로 부상한 것이다. 1602년에 동인도회사를 만든다. 전 세계 최초로 증권거래소를 만든다. 나아가 스페인 아르마다 함대를 깨부순 영국 함대를 곧잘 위협했던 것이 네덜란드 함대였던 것이다.
하면, 왜 네덜란드에 있던 유태인들이 영국으로 대거 이주했는가.
"제1차(1652∼1654)는 영국 크롬웰 정부의 항해조례(航海條例) 발포(1651)와 네덜란드 선박에 대한 임검수사권(臨檢搜査權) 요구가 원인이 되었다. 일진일퇴의 결과 영국이 승리하여 1654년 웨스트민스터조약이 체결되었는데, 네덜란드가 암보이나 사건의 배상까지 포함하여 양보하였다. 제2차(1655∼1667)는 영국 왕정복고(王政復古) 정부에 의한 1660년의 항해조례 경신(更新), 신대륙의 네덜란드 식민지 점령 등으로 일어났다. 로이테르가 지휘한 네덜란드 함대가 템스강의 입구를 봉쇄하고 포격을 가하기도 했으나, 전체적으로는 영국이 우세하여, 브레다조약으로 신대륙의 뉴암스테르담(뉴욕으로 改名)을 할양시켰다. 제3차(1672∼1674)는 프랑스 왕 루이 14세에 의하여 네덜란드전쟁이 일어나자 1670년 루이 14세와 도버밀약(密約)을 맺고 있던 영국 왕 찰스 2세가 약속에 따라 참전하였다. 그러나 의회가 전비(戰費)를 승인하지 않아서 승패가 뚜렷이 판가름나지 않은 채 종결되었다. 이 전쟁에서 결정적인 승리는 없었으나, 대체로 영국측이 우세하였고, 사회 ·경제면에 끼친 영향도 네덜란드측이 심각하였다. 이 전쟁을 계기로 네덜란드의 해상권(海上權)은 쇠퇴하고 영국이 이에 대신하게 되었다." [출처] 영국-네덜란드전쟁 [英國-戰爭, Anglo-Dutch Wars ] | 네이버 백과사전
영국에서는 종교 전쟁이 일어났다. 스코틀랜드 장로파가 대륙 유태인과 동맹하여 유태인 자금을 융통하면서 종교 혁명을 꾀했다. 그 영향으로 크롬웰 청교도 혁명을 일으킬 수 있었다. 하고, 크롬웰은 정권을 잡은 뒤 유태인 입국을 허가했던 것이다. 허나, 유태인 입국 허가가 떨어졌다고 유태인들이 즉시 영국으로 이주한 것은 아니었다. 중요한 건 크롬웰은 정세 파악을 제대로 했다는 점이다. 크롬웰은 크롬웰대로 네덜란드가 강국으로 올라선 이유를 알고 있었고, 네덜란드 유태인들은 유태인대로 크롬웰의 강점을 파악하고 있어서 서로간 충돌을 피했던 것이다. 허나, 크롬웰의 야망은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를 정벌하여 10년간 계속한 영국 내전을 종결짓자 곧바로 항해 조례를 발표한다. 영국 식민지에 물건을 팔 때는 영국배로만 해야 한다는 것을 주요 골자로 한 것이 항해 조례이다. 이에 네덜란드 유태인 상인들은 식민지 몇 곳을 포기할 터이니 양보하라고 했지만, 크롬웰은 완강하게 버텼다. 해서, 일어난 전쟁이 영국 - 네덜란드 전쟁이었다. 3차에 걸친 전쟁에서 영국은 강한 면모를 보여준다. 이에 놀란 네덜란드 유태인 상인은 먼 옛날 카르타고 선조들이 무력이 강했던 로마제국에게 패했던 때를 기억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명예혁명 과정까지 유태인 상인들이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 알 수는 없다. 다만, 명예혁명이 발발하자 이 시기 네덜란드에 살던 영국왕과 연줄이 있던 네덜란드 유태인 상인들이 대거 영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이런 유태인 후손 중 하나가 고전경제학파 유태인 리카르도인 게다. 이 시기에 독일계 상인들도 들어왔다. 베어링 가문이 그중 하나다. 이 시기 유태인 상인이 자신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여전히 유태인에 대한 규제가 강했으며, 어떤 공직도 진출할 수 없었다. 해서, 늘 배후로만 움직여야 했는데,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프리메이슨 세력을 활용했던 것이다. 해서, 인드라는 베어링 가문이 프리메이슨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본다. 아무튼 유태인 상인들은 배후에서 프리메이슨 세력을 통해 영국 정계를 장악하여 첫번째 사업으로 영국중앙은행을 장악한다. 물론 얼굴마담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프리메이슨이었다. 이 시기 직후 네덜란드 자본 유출이 극심했다. 네덜란드에서 영국으로의 이주는 1795년 나폴레옹 전쟁으로 종결난다. 이때, 나폴레옹을 피해 영국 런던으로 망명한 네덜란드 국왕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권리를 영국 동인도회사에게 넘기고, 일정 지분을 보장받는다. 이것이 오늘날 빌더버그에서 네덜란드 왕가가 역할을 하는 이유이다. 말하자면, 동인도회사의 두 번째 주주인 게다.
사정이 이렇지만, 유태인들이 전면에 나선 것은 아니었다. 허나, 로스차일드 가문이 19세기 나폴레옹 전쟁을 통해서 영국 경제를 순식간에 장악하니 그간 국유본 맹아기 권력을 형성했던 베어링 가문을 제치면서 이 시기부터 본격적인 국제유태자본 시대가 열렸던 것이다. 뒤에서 조용히 숨어 있던 유태인 상인들이 로스차일드 권력 장악 이후 로스차일드 도움을 받아 점차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해서, 프랑스 혁명 배후에 로스차일드가 있다는 건 웃기는 일이다. 로스차일드가 국유본 권력을 제대로 행사하기 시작한 것은 1820년 이후 금융공황을 일으키면서부터라고 하는 것이 인드라 추정이다.
무엇보다 로스차일드가 국유본 권력을 장악한 뒤 조직 재편에 나섰는데, 그중 하나가 그간 사냥개 역할을 했던 프리메이슨 세력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하면, 프리메이슨을 제거한 뒤에는? 유태인으로 대체했던 것이다. 해서, 미국에서 반메이슨운동이 일어났는데, 이 운동 배후에는 로스차일드가 있었다.
이 결과에 대해 올림픽 운동을 주도했던 쿠베르탱은 영국인들이 스포츠를 통해 단련했기에 네덜란드에서 유태인을 스카웃할 수 있었다고 보았던 것이다. 해서, 프랑스가 융성하려면 육체가 튼튼해야 한다 믿어서 국유본 후원 하에 일으킨 운동이 올림픽 운동이다. 허나, 인드라 생각은 다르다.
종교와 자본, 그리고 포르노(문화)는 수메르 이후 함께 간다. 신전에서 대부하고, 몸을 팔았다. 기원은 모두 신성한 이유였다. 금과 은은 신전에 보관한 뒤, 금과 은 영수증을 대체한 화폐를 시민에게 유통시킨 것은 신들의 영광을 함께 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신전에서 여사제들이 몸을 판 것은 세례였다. 더럽고, 추잡한 욕망덩어리인 인간이 순수한 여사제의 몸을 통해 새생명을 얻는 종교적인 예식이었다. 허나, 이런 혜택을 아무나에게 줄 수 없자, 나온 발상이 포르노였던 게다. 여사제, 여신의 나신만이라도 볼 수 있다면, 안구 정화해서 남은 삶을 선하게 살 수 있으니까. 해서, 초기 이자놀이는 남사제들의 고유 영역이었고, 매춘놀이 역시 여사제들의 독점 영역이었다.
이 시기 네덜란드 유태인에게 없었던 것이 튼튼한 육체인 것도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했던 것은 종교/정치 운동이었다. 로마 가톨릭에 대항한 종교/정치 운동이 독일과 영국에서 특히 거셌다.
로스차일드는 정경유착이 대자본으로 가는 지름길이라 했다. 대상인은 사람 장사인 게다. 유럽의 대부호, 메디치, 푸거 모두 당대 권력을 배경으로 컸다. 로스차일드 역시 당대 유럽 제일의 부호, 헤센 노예군주 자금을 밑천으로 했던 것이다. 이때, 메디치나 푸거는 로마 가톨릭에 의존했던 반면, 로스차일드는 로마 가톨릭에 대항하는 국왕파 편에 선 것이다. 예서, 유럽에서 어느 나라가 당대 종교운동에서 가장 격렬하게 투쟁했는가. 영국이었다. 크롬웰이었다.
하면, 독일도 정치/종교 운동이 격렬하지 않았느냐 반문할 수 있다. 또한, 독일 자본이 만만치 않았다. 유태인이 독일에서 오랜 기간 생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유본이 독일을 택하지 않은 이유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이었다. 유럽 중앙부에 위치하였기에, 이로 인해 육군을 키우지 않을 수 없었고, 이는 왕권 강화를 낳기 마련이고, 왕권 강화는 귀족 상인 권력 규제로 나아간다.
네덜란드 유태인들은 수메르/페니키아/카르타고처럼 아메리카와 아시아 대륙 등지에서 식민지 건설보다는 교역을 중시했다. 카르타고가 망한 것도 결국 식민지 건설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듯싶다. 반면, 영국은 미국 예를 봐도 프리메이슨 회사를 동원해서 영국인을 버지니아주에 강제 이주시키고, 미국 뉴잉글랜드 지역으로 청교도를 이주시킨다. 허허벌판이나 다름없는 지역에 이들이 자생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오직 종교적 헌신 외에는 없다 하겠다. 바로 이런 점이 네덜란드 유태인에게는 없었던 것이다. 해서, 네덜란드 유태인들은 판단했을 것이다. 자신의 경제력과 저들의 종교적 열정이 결합한다면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볼 것이라고!
결과는 생각한 대로였다. 18세기에 이르르면 전 세계 해상이 모두 영국 손아귀에 떨어졌다. 17세기말부터 18세기초까지는 해적들의 황금시대였다. 심지어 여자 해적 두목도 곧잘 등장했다. 허나, 영국과 네덜란드가 결합하여 막강해진 영국 해군은 18세기 초반만 하더라도 해적과 손잡고 해상을 정리하더니 18세기 중반에 이르르면 해적들마저도 소탕하기 시작했다. 해서, 1750년대 7년 전쟁을 기점으로 영국은 세계를 장악한 것이다. 반면, 프랑스는 7년 전쟁을 기점으로 국력이 하강하기 시작하여 프랑스 혁명을 만난다.
전 세계 해상을 장악하였기에 18세기 후반에 이르르면 미국을 독립시키는 것이 오히려 남는 장사였다. 국유본은 고정비 부담을 늘 부담스럽게 생각했다. 역대 부자들과 왕국이 망한 것은 결국 고정비 증가 때문으로 본 것이다. 해서, 식민지를 유지시키기 보다 독립시켜서 아웃소싱하면서 우려먹는 것이 경제적으로 이익이라고 본 것이다. 무엇보다 국방비였다. 국방비 부담을 피하고자 국방 부담을 막 식민지에서 독립한 식민 정권에게 전가시키고, 전쟁이 나면 동맹이라는 빌미로 참전하게 만드는 것이다. 역사책과는 달리 국유본은 미국을 독립시킨 뒤 남몰래 웃을 수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미국을 독립시킨 결정적인 배경은, 동인도회사 아편 무역에 집중하기 위함이다. 이런 이유로 조지 워싱턴이나 토머스 제퍼슨 모두 아편농장을 꾸렸던 것이다. 루즈벨트 엄마 가문도 아편무역에 열을 올렸다.
18세기말 19세기초는 아편 무역의 시대였다. 이 시기부터 동서양 부가 재편하는 것이다. 그 이전까지는 여전히 동양이 우세였다. 허나, 아편 무역으로 동서양 부는 서양 우위로 기울었다. 해서, 국유본은 아편 무역에 집중하기 위해 미국 독립을 허용했던 것이다. 오늘날로 치면, 두 개의 전쟁을 동시에 할 수 없다는 전략이라고 할까. 서인도 대신 동인도에 선택과 집중을 한 것이다.
1773년 동인도 회사가 경영난을 호소하여 동인도 회사 감독 관리를 강화하는 노스 규제법이 등장한다. 헌데, 속사정은?
1. 동인도회사의 특권을 영국 국왕 특허장에서 보장하던 것을 영국 의회 사안으로 변경한 것이다. 조지 1,2세와 달리 조지 3세는 명예혁명 이후 50년간 집권한 휘그당(금융자본가당)을 멀리 하고 토리당(지주당)을 가까이 하면서 적극적인 정치 개입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해서, 국유본은 국유본이 장악한 의회를 통한 안전 장치를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2. 노스규제법은 동인도회사 직원을 공무원 격으로 지위를 격상했다. 이는 그만큼 동인도회사 직원 업무가 보다 중요해졌음을 의미한다. 1773년에 영국 동인도회사는 19세기 전반까지 유효한 중국 아편무역 독점권을 따냈다. 영국은 공식적인 것만도 1729년에는 아편 연 이백 상자, 1776년에는 1,000 상자, 1790년에는 5,000 상자, 1820년에는 10,000 상자를 중국에 보냈다.
3. 노스규제법은 동인도회사만 배불리고 영국 시민은 배가 고프다는 비판을 회피할 수 있었다. 겉보기엔 분명 동인도회사가 적자였다. 또한, 더 감독 관리한다고 한다. 허나, 분식회계와 반대인 역분식회계가 있다.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얼마든지 수익을 비용 처리하거나, 은폐시킬 수 있었다.
적자라면 영국이 왜 동인도회사 독점권을 포기하지 않았을까^^?
로스차일드가 국유본 권력을 장악하면서 주목한 것은, 용병 자금을 밑천으로 한 만큼 전쟁이었다. 특히 프랑스 혁명을 통해 나타난 인민의 정치 열망이었다. 이는 이전 종교 열망의 연장선이었다. 하여, 로스차일드는 인민의 정치/종교 열망을 통한 돈벌이를 깊이 연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첫 사업이 1820년대 그리스였다.
겉보기에는 그리스 지원으로 인해 로스차일드가 적자로 보인다. 그리스 정부가 로스차일드 채권을 잘 갚지 못했기 때문이다.
해서, 이 대목이 경제사적으로 이슈인 게다.
왜 영국 금융 자본은 국내 투자 대신 해외 투자를 하였는가. 국내 투자 수익률이 높지 않아서. 국내 투자 수익률 이상으로 해외 투자 수익률이 좋아서. 이에 대해 맑스주의 이론가들은 금융 자본의 요구라고 한다. 맑스주의 이론가들 이론이 일단 옳다. 하면, 구체적으로 금융 자본이 해외 투자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제국주의다. 헌데, 왜 영국 금융 자본은 영국 제국주의의 근간이랄 수 있는 영국 제조업을 키우지 않고, 오히려 잠재적인 영국 제국주의의 적이라고 할 수 있는 유럽, 러시아, 미국, 일본 제조업에 투자하여 결과적으로 이들 국가 제국주의를 키웠는가. 맑스주의 이론가들은 자본에는 국경이 없다는 말로 대신할 것이다. 허나, 여기서 난점이 발생한다.
지금까지의 맑스주의 제국주의론은 국가 중심이었다. 가령 오늘날도 보면, 미국 중심 제국주의론이다. 무엇이든 미국 국가 위주이다. 허나, 미국 중심이면 오늘날 월가 시위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왜 자신의 힘을 자신이 나서서 오히려 약화시키는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국유본 하수인, 촘스키 같은 애들을 동원해서 반미 의식을 고취시키는 것도 미국 중심이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자본에는 국경이 없다. 맞는 말이다. 동시에 자본에는 국적이 없다. 국유본은 종교, 정치, 민족해방, 애국심, 신 기타 모든 것을 교환 대상으로 여길 뿐이다.
여기까지가 빅토리아 시대 이전의 영국사였다.
빅토리아 시대가 시작하였다.
http://ko.wikipedia.org/wiki/%EB%B9%85%ED%86%A0%EB%A6%AC%EC%95%84_(%EC%98%81%EA%B5%AD)
빅토리아 시대란 1837년부터 1901년까지이다.
1. 빅토리아는 일편단심 휘그당/자유당(금융자본가당) 편이었다. 허나, 로스차일드와 친구 사이인 유태인 디즈데일리가 토리당/보수당(지주당) 총리가 된 이후에는 자유당만 편애하지 않았다. 모두 국유본 편이었기 때문이다. 빅토리아는 자신의 권력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하여, 빅토리아 시대에 영국은 명실상부하게 세계 최고 최대 제국,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다.
빅토리아가 왕위에 오르자마자 발생한 아프간 전쟁 패배는 국유본이 빅토리아 여왕을 길들이기 위한 고육지책이 아닌가 본다. 마치 이명박이 집권하자마자 쪽발민주당에게 지시해서 국유본이 이명박을 곤경에 처하게 만든 것이 예다. 우리 식으로 액땜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를 통해 빅토리아는 장기 집권하다가 공교롭게도 보어전쟁 와중에 죽었다.
2. 빅토리아 시대에는 항해조례법, 곡물법 등을 모두 폐기한다. 또한, 로스차일드 가문이 하원의원에 진출할 수 있었고, 세습할 수 있는 남작 작위를 획득했다. 유태인이 총리 자리까지 올랐다. 한마디로 자유무역파의 승리이자 자유당의 승리였고, 금융자본가의 승리요, 국유본의 승리였다. 게다가 1850년부터 소빙하기가 풀려 기후가 온난해지기 시작했다.
이는 인간의 숙명론을 약화시키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화시켰다. 마치 중세 십자군 운동이 일어나던 때와 유사한 상황인 게다. 한편으로는 인간의 자유 의지가 강화하니 무신론이 득세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자유 의지로 인해 타락한 인간들이 오만방자하다 보니 신을 두려워하지 않아 온갖 악행을 저질렀다. 이로 인해, 새로운 종교운동이 발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허나, 중세 때는 십자군 운동으로 일어났지만, 근대에는 차티스트 운동, 러다이트 운동, 뉴에이지 운동, 페이비언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나중에 온 이사람에게도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6258601
http://ko.wikipedia.org/wiki/%EC%A1%B4_%EB%9F%AC%EC%8A%A4%ED%82%A8
이 중심에 존 러스킨이 있었다. 자유무역파가 주류가 된 이상 표적은 자유무역파. 존 러스킨은 자유무역파 이론인 고전경제학파를 맹렬히 비판했다. 이때, 존 러스킨 비판의 핵은 무엇인가. 인간 이기심을 전제로 한 고전경제학파 비판을 성경 구절로 대신했던 것이다. 그것이 인도주의적 경제학이었다. 존 러스킨의 저서,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가 유명하다.
마태복음에 있는 말씀이다. 포도밭 농장 주인이 하루 일꾼을 고용했는데, 일을 하는 와중에도 일꾼을 계속 고용했다. 헌데, 농장 주인이 일 끝마치기 전에 온 일꾼이나 처음부터 일을 한 일꾼이나 동일한 임금을 주자 처음부터 일을 한 일꾼이 불만을 표했다. 이에 포도밭 농장 주인이 자신은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나중에 온 사람에게도 너에게 주는 것과 똑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다,라고 말한다.
이는 맑스 이전에 이미 노동과 노동력을 정확히 분리해서 사고한 방식일 수 있다.
자본제 생산하에서는 노동력이 특수한 상품으로서 매매된다. 상품으로서의 노동력은 다른 상품과 마찬가지로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가지는데, 노동력이 특수한 상품인 것은, 노동력의 사용가치인 노동이 자기의 교환가치를 웃도는 가치를 낳기 때문이다. 노동력의 가치는 노동력의 소유자인 노동자의 생활수단의 가치에 의해 규정되며, 이를 웃도는 가치가 이른바 잉여가치가 되는 것이다.
[출처] 노동력 [勞動力, labor power ] | 네이버 백과사전
임금이란 일한 만큼이 아니라 인간이 하루에 필요한 생활비를 의미하는 것이다.
인드라는 이를 변형해서 최근 인드라 몸값을 말한 바 있다.
당신의 몸값이 얼마입니까. 이에 많은 분들이 자신의 몸값을 따지기에는 자신이 비천하다 이렇게 말씀들을 많이 하셨다. 그것이 자본주의 하의 사고방식인 게다. 반면, 인드라 방식은 무엇인가. 364억을 제시했던 것이다. 왜? 인드라 능력이 364억이어서? 아니다. 인드라가 생계에 필요한 액수가 364억이기 때문이다 ㅎㅎㅎ
존 러스킨은 맑스 자본론이 등장하기 전에 인도주의 경제학을 발표하여 센세이널을 일으켰다. 이에 맑스가 자극을 받아 자본론을 발표했는데, 반응이 없었다 ㅠㅠㅠ 심지어 노이즈 마케팅까지 했는데, 무반응이었다 ㅋㅋㅋ (그러게~ 맑스야. 좀 쉽게 쓰지, 일부러 현학적으로 써서 그러냐. 짝퉁의 열등감이냐? 헐^^!)
존 러스킨 사상은 원론적이었다. 해서, 고전경제학파에 맞서는 구체적인 모델을 구해야 했는데, 바로 그 대목에서 그간 놀림을 받던 맬더스의 공황론이 재평가받기 시작한 것이다. 왜냐하면, 고전경제학파인 리카르도와 가장 격렬하게 투쟁해서 곡물법을 통과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헌데, 맬더스 지론 기초는 영주, 혹은 지주의 입장이었다. 해서, 존 러스킨 사상을 구체화하기 위해서는 중세 낭만주의에 기초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착하고, 현명한 영주가 다스리는 영지~! 판타지 영지물의 기본이 아닌가~! 해서, 착하고, 현명한 영주가 다스리는 영지처럼 나라도 그리 만들자~! 그것이 국가사회주의요, 확장하면, 제국주의였던 것이다.
해서, 기사가 기사도 정신을 발휘하여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을 만큼 영주가 착하고 현명해야 하며, 영주가 인정할 만큼 기사는 물론 영지민도 목숨을 바쳐서 영주를 보필하라.
이걸 한마디로 하면? 주체사상~!
오케바리~?
해서, 나타난 현상이 젠트리를 주목하라였다.
젠틀맨 계층이라는 뜻으로, 향신(鄕紳)이라 번역되기도 한다. 본래는 '가문이 좋은 사람들'이라는 뜻이며, 넓은 의미로는 귀족을 포함한 좋은 가문의 사람들을 지칭해서 쓰이나, 보통은 신분적으로 귀족 아래이고, 요먼리의 윗계층으로서 가문의 문장(紋章) 사용이 허용된 사람들을 지칭한다. 또, 본래의 지주가 그 중심을 이루었으나, 도시인이나 그 밖의 사람으로서 토지를 매입해서 지주가 된 사람도 포함하였다. 중세 말기에서 근세에 걸쳐 귀족이나 요먼리의 세력이 쇠퇴하여 간 데 반해 이 계층만은 지방의 유력자로서 순탄하게 신장(伸張)되어 절대주의시대에 이르러서는 치안판사 및 그 밖의 사회적 지위를 맡아서 활약하여 사회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시대가 흐름에 따라 협의(狹義)의 계층적인 개념은 엷어지고 젠틀맨은 교양 있고 예의 바른 남성을 지칭하게 되었다. [출처] 젠트리 [gentry ] | 네이버 백과사전
젠트리 현상을 대표하는 것이 셜록 홈즈 소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셜록 홈즈 총에는 VR이 새겨져 있는데, 빅토리아 여왕을 의미한다.
오늘날 말하는 영국 신사, 젠틀하다의 그 젠트리이다. '80일간의 세계일주'에 등장하는 영국 귀족들. 남성 전용 클럽에서 카드놀이하는 그들 말이다.
해서, 빅토리아 시대는 십자군 전쟁 때처럼 오히려 종교적 신심과 도덕, 예절, 품격이 강조되던 시기였다. 오늘날 근대 쪽발이가 근대 이전 쪽발이와 다른데, 이유는 근대 쪽발이가 국유본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국유본은 원숭이를 대상으로 외국에도 적용하는가를 최초로 실험을 실시했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헌데, 이 대목에서 국유본이 왜 존 러스킨에 감동했던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존 러스킨 주장의 맹점을 정확히 간파했기 때문이다. 8시간 일한 이들과 1시간 일한 이들을 동등하게 대우한다. 신의 이름으로! 해서, 1시간 일한 이들 임금 기준으로 8시간 일한 이들에게 임금을 지불하는 방식이다~! 야호~!!!
그것이 국가사회주의요, 현실사회주의였던 것이다.
즉, 주체사상이었던 것이다.
대표적인 영화는 영화, 마지막 황제 부의인 게다. 포도밭 주인인 국유본을 제외하고서는, 혹은 조금 양보해서 각 국가 재벌과 왕을 제외하고서는 모두 다 평등하게 가난한 세상.
이 대목은 여기까지 하고. 다음 기회에 또~!
3. 항해조례와 곡물법을 폐기한다는 것은 국유본이 단일한 제국주의 시대에서 다극화한 제국주의 시대를 열겠다는 의미이다. 이 의미를 오해한 나폴레옹 3세는 국유본이 자신을 후원하자 이제 국유본이 프랑스로 오는 줄 착각했다. 이는 비스마르크도 동일했다.
문제는 비스마르크였다.
국유본 귀족, 로스차일드와 같은 사도회 멤버였던 버트런트 러셀 세습백작이 근대 이후 말썽쟁이로 두 사람을 들었다. 하나는 비스마르크요, 다른 하나는 록펠러였다. 이는 버트런트 러셀이 국유본 입장을 웅변한 것이라 보지 않을 수 없다.
흥미롭지 않은가. 뭇솔리니도 아니고, 히틀러도 아니고, 맑스도 아니고, 레닌도 아니고, 모택동도 아니고, 스탈린도 아닌, 비스마르크와 록펠러라니~!
비스마르크는 세계 최초로 복지 정책을 실시했다.
바로 이것이 페이비언 협회가 태동한 배경 중 하나였던 것이다. 독일은 영국보다 후진 나라여야 했다. 영국은 언제나 앞서가는 나라여야 했다. 허나, 이를 배반한 사례가 있으니 비스마르크였다.
이에 대한 국유본 입장은 무엇인가.
국유본은 환영했던 것이다. 왜? 복지주의로 인한 높은 고정비 부담, 즉 인건비를 사실상 고정비에 포함시키는 정책은 필연적으로 독일의 파멸을 재촉할 것이기 때문이다.
해서, 페이비언 협회 내부의 투쟁은, 사실은 국유본 입장을 재정리하는 데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정리하면, 영국 로스차일드와 국유본 입장에서 빅토리아 시대의 페이비언 협회 주장에서 경청할만한 주장은, 노예일지라도 품격을 갖추고, 자신의 직분을 다 하자는 것이다. 좋은 일이다. 이 대목은 인드라도 긍정적이다. 인간 자신이 품격을 지니고 산다는 것, 그것 자체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육신을 내줄지라도 정신만은 똑바로 살다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페이비언 협회가 민중 지향적인 면에서도 긍정적이었다. 국내적으로는 페이비언 협회가 노동운동의 과격화를 약화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국외적으로는 에니 베산트처럼 페이비언 협회 운동가들이 인도와 같은 지역에서 민족해방투쟁에 앞장섰기에 오히려 국유본에게 유리한 정세를 제공했던 것이다. 국유본은 민족해방투쟁도 도구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익을 위해서라면, 국유본은 혁명은 물론 파업 투쟁도 서슴치 않았던 것이다.
가령 오늘날 한미 FTA 반대는 오바마 정권이 재집권하는 데에 유리할 뿐더러 미국 FTA 반대파들을 침묵하게 만드는 좋은 재료인 것이다. 한미 FTA는 미국과 한국 국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국유본을 위한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국유본이 친일 조중동을 동원하여 FTA 반대 분위기를 연일 띄우는 것이다. 한국 국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유본 이익을 위해서.
해서, 국유본이 선택적으로 지원하자 페이비언 협회 방향성은 국가 사회주의와 해외 민족해방투쟁 지원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이 방향은 오늘날 남한 민주노동당 내 하위그룹인 다함께(런던 트로츠키 그룹) 방향과 일치한다. 영국에서의 투쟁보다 주변부 투쟁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헌데, 그것은 언제나 국유본의 이해와 일치해야만 한다.
이런 작업 끝에 만든 것이 인드라는 시온의정서라고 본다. 시온의정서는 위서이다. 헌데, 시온의정서는 백 년 뒤인 지금에 보더라도 매우 뛰어난 저작이다. 하면, 이 시온의정서는 누가 만들었을까. 국유본이다. 하면, 구체적으로 이 작업을 한 이들은 누구일까. 현재로서는 페이비언 협회 인물들이 요주의 대상이다.
윌리엄 모리스는 시온의정서에서 말한 그대로의 세상을 역설한 바 있다. 국유본이 생산수단의 모든 것을 장악한다. 노동자는 직분대로 자기의 역할을 지정받아 일한다 등등. 이를 형상화한 작품이 올더스 헉스리의 '멋진 신세계'였다. 웰즈가 페이비언 협회이기도 했고.
국유본이 기획하고, 페이비언 협회가 실무를 담당한 작품이라 추정하는 위서, 시온의정서는 전세계 제국주의와 민족해방운동의 불길을 타오르게 했던 것이다.
해서, 이 방향을 훌륭히 제시한 선도적인 운동이 있었다. 그것이 미국 태머니파였다.
오늘은 여기까지~! 3부 이어집니다.
'국유본론백문백답'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16 : 300인위원회 존 콜먼은 빅터 로스차일드의 이중간첩 충신? (0) | 2013.11.20 |
---|---|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15 : 케네디 암살 배후는 빅터 로스차일드이다 (0) | 2013.11.20 |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14 : 목숨을 바칠만한 제국주의가 목표였던 페이비언협회 (0) | 2013.11.20 |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13 : 걸그룹, 포르노는 국유본의 현대판 인신공양 (0) | 2013.11.20 |
국유본 채텀하우스는 여전히 세계 최고 권력인가, 아니면 변방으로 밀려났나 (0) | 2013.11.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