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15 : 케네디 암살 배후는 빅터 로스차일드이다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1/11/21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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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15 : 케네디 암살 배후는 빅터 로스차일드이다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1/11/20

   

1789년에 뉴욕시에서 태머니 협회가 탄생한다. 태머니는 독립전쟁 이후 퇴역군인들이 조직한 공제조합이다. 이때 주목할 점은 퇴역군인이다. 왜인가.

   

   

로스차일드와 관련이 있는 헤센 카셀 용병 때문이다. 헤센 카셀 용병은 7년 전쟁에 이어 미국 독립 전쟁에도 영국을 위해 17,000명이 싸웠다. 이는 헤센 카셀 백작이 영국 조지 2세 딸과 결혼한 이후 자신이 보유한 용병을 주로 영국을 위해 제공했기 때문이다. 1769년, 로스차일드는 헤센카셀 백작 아들 빌헬름공의 궁정 어용상인이 되었지만, 별 영향력이 없었다. 정보 부족으로 2008년에 인월리를 쓸 때에는 이를 근거로 로스차일드가 미국 독립 투쟁에 간여했다고 생각했으나,  이 시기에는 로스차일드가 햇병아리에 불과해서 정책에 아무런 관여도 할 수 없을 지위였다. 게다가 이 시기는 빌헬름 아버지 헤센 카셀 백작의 시대였다.  해서, 로스차일드는 미국 독립은 물론 프랑스 혁명을 배후에서 조종할 지위가 아니었다. 로스차일드가 국유본 권력을 제대로 행사하기 시작한 것은 1820년대 금융 공황 때부터이다. 이 인위적인 금융 공황을 일으킨 배후가 로스차일드라고 인드라는 보고 있다.

   

   

1785년 헤센 카셀 백작이 죽고, 빌헬름공이 헤센 카셀 백작 작위를 계승했을 때에야 비로소 서서히 로스차일드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빌헬름 신임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당시 빌헬름공 재정 담당은 칼 프리드리히 부데루스(Karl Friedrich Buderus)였기 때문이다. 부데루스는 빌헬름의 가정교사였다 신임을 받아 수석 재정관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헌데, 부데루스의 고민은 권력이 있으나 돈이 없었다. 월급이 맡은 일에 비해 작은 데다 고속 승진한 까닭에 궁정에서 외톨이였다. 로스차일드는 공무원 부데루스의 고민을 간파하고, 그의 충직한 부하가 되었던 것이다. 하여, 1802년, 빌헬름이 숙부인 덴마크 국왕에게 돈을 꾸어주어야 했는데, 친척이라 떼먹힐 가능성이 커서 부데루스와 상의하여 상업차관으로 빌려주기로 한 것이다. 헌데, 상업차관인 만큼 명의가 빌헬름 이름이어서는 곤란하니, 내세운 대리인이 로스차일드였다. 이 큰 거래에서 부데루스는 부데루스대로, 로스차일드는 로스차일드대로 빌헬름 종자돈으로 큰 돈을 만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빌헬름의 절대 신임을 받은 것은, 나폴레옹 전쟁 때 빌헬름이 중립을 선언했음에도 나폴레옹이 빌헬름 재산을 장악하려고 했을 때였다. 이때, 부데루스의 명으로 로스차일드는 프랑크푸르트에서 빌헬름 재산을 숨기고 있었는데, 나폴레옹 군대가 아무리 모진 고문을 해도 로스차일드는 죽기를 각오하고 입을 열지 않았다. 해서, 성공적으로 돈 관리를 한 덕분에 로스차일드는 빌헬름의 일등 공신으로 떠올랐던 것이다. 이명박이 태국 공사에서 금고를 지켜 정주영 눈에 들었던 스토리와 같은 게다.  

   

   

   

예서, 하센 카셀 용병들은 어떤 이들인가.  중세에서 근대에 이르른 시기, 남부 독일은 천육백 만에서 육백 만으로 인구가 격감할 정도로 페스트에 이어 오랜 전쟁 탓에 농지가 황폐화되어 지을 땅이 없어 농민은 떠돌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귀족도 상속권을 지닌 자만 계승할 뿐, 나머지는 기사가 되어야 했듯, 땅을 나누다가 더 나눌 땅조차 없게 되자 생존을 위해 농민이 택한 방식이 장자상속제였다. 장자는 고향에 남아 농사를 계속 짓되, 나머지 형제는 이농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 대부분이 용병이 되어 스위스 용병과 맞서 싸웠다. 왜냐하면, 스위스 용병은 로마제국 시대부터 명성을 유지한 유럽 최고의 용병이어서 주로 가톨릭 국가를 위해 싸웠기에, 교황파에 맞선 국왕파들은 대체 용병으로 독일 용병을 택한 것이었다. 이들 독일 용병이 미국 독립 전쟁이 일어났을 때, 영국군 삼만 용병 중 절반이 넘는 만 칠천 명이 투입이 되었던 것이다.

   

미국 측은 이들 용병 실력을 잘 알아 매우 두려워하였다. 전쟁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는 스위스 용병과 달리 오갈 데가 없어서 도덕성에서 자유로웠던(?) 란츠크네이트 용병이었기에 두려웠던 것이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미국 독립전쟁 당시 미국은 친영 온건파와 독립 과격파로 분열되어 초기에는 중도파가 친영 온건파에 기울여져서 독립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다시 말해, 최대의 자치권을 얻어내는 정도였다. 허나, 영국 왕이 무슨 까닭인지 미국 측에게 일방적으로 왕과 신하간의 관계를 끊어버려 온건파 입지를 최대한 축소시키고, 과격 독립파 입지를 강화시켰다. 이는 오늘날 이란 정치와 비교하면 된다. 이란은 개혁온건파가 정권을 얼마든지 잡을 수 있었고, 인기도 있었다. 허나, 무슨 까닭인지 미국은 시종일관 이란을 내몰아 강경파가 잡게 만든다.  팔레비를 축출하고 국유본 스파이, 호메이니를 모셔오는 정치공작을 벌여서 이라크와 전쟁을 벌이게 만드는 과정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해서, 강경파가 정권을 잡은 이란은 전쟁을 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최근에도 이란 - 이스라엘 핵전쟁 위기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지난 시기 브레진스키 정치 공작을 떠올린다면, 여기에는 국제유태자본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하여, 독립 과격파 최대 현안은 용병 대처였으며, 이에 따라 나온 대안이 용병 회유책이었다. 즉, 투항하면 토지를 약속했던 것이다. 당시 용병의 꿈은 토지였다. 해서, 전쟁 중, 혹은 전쟁 직후, 상당수가 미국에 남았던 것이다.  이들이 오늘날 보통 말하는 독일 가톨릭계 이주민 주류라고 인드라는 보고 있다. 아울러 이들은 전쟁 후 대체로 버지니아 서부, 오늘날 웨스트버지니아 등으로 자작농으로 나갔다. 이들은 내심 전쟁 중립파였거나 친영파였는데, 이유는 당시 영국왕이 독일계 왕이었기 때문에 독립전쟁 가담자는 극소수였던 것으로 보인다. 대신, 이들은 대부분 흑인 노예 없이 자영농을 하였기에 이후 남북전쟁 당시 남부군 핵심거점이 된 남부 버지니아주 부농과 달리 북부에 정치적으로 기울어져 버지니아주에서 웨스트버지니아주로 분리독립하는 계기를 만든다. 이들이 드라마 '초원의 빛'에 나오는 자작농 이미지와 가장 유사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적으로는 루터 종교개혁파 신앙이고, 정치적으로는 노예해방을 지지하는 공화당 지지자들이었다.

   

흑인 노예를 강간해서 클로텔을 낳은 후 나 몰라라 했던 아편농장주 토머스 제퍼슨이 장자상속권을 폐지했다 어쩐다 자랑질을 하는데 까는 소리이다. 농토가 부족해서 생존을 위해 나온 제도가 장자상속권인 만큼 미국에서는 애초에 의미가 없는 제도였다. 오히려 이 당시 여전히 중요한 쟁점은 유럽 이주민을 장려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유럽에서 백인 계약노예제가 잠시 활성화되었던 이유가 미국에 가서 조금만 고생하면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한다느니 하는 쌩구라를 쳤기 때문인데 막상 다들 가서 말라리아 등 풍토병에 걸려 대다수가 죽는 등 그 소문이 유럽으로 퍼져서 종교적 이유로 정말 죽을 각오로 가는 것이 아니면 미국행을 다들 기피했던 것이다. 오죽하면, 1850년대까지 영국 런던 부랑자들을 군에 입대시키거나 아니면 미국에 보내든가 했던 것이다. 해서, 등장한 것이 흑인 노예 활성화 대책이었던 것이다.  하여간, 하나하나 까다 보면, 도대체 위대한 자유주의자이니, 가장 강력한 혁명가이니 하는 역겨운 수식어로 칭송하는 제퍼슨을 평가하는 촘스키가 국유본 간첩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촘스키에 관한 3대 의혹은 그의 보잘 것 없는 경력으로 어떻게 교수가 되었고, 하필 군 지원을 받았는가 한다는 점, 존 콜먼의 국제유태자본 하수인 명단으로 등장한다는 점, 그리고 토머스 제퍼슨 예를 봐도 왜 미국 역사를 이상하게 평가하고,  삼각위원회에 대해 높이 평가하느냐 하는 점이다.  

   

아무튼 퇴역 군인 대책은 로마 제국 군대 이후로 언제나 큰 관심사였다. 로마제국은 로마 시민이면 누구나 군인으로 복무했을 뿐더러 일정 기간 군인으로 일하면 로마인이 아니더라도 로마 시민권이란 특권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는 오늘날 미국에서 미군으로 복무하면 이민자에게 시민권을 주는 제도로 이어진 것이다.  퇴역 군인 대책 핵심은 물론 정착할 수 있는 자금 지원이었다.  

   

   

   

헌데, 세이스 반란에서 보듯 당시 막 독립한 미국 정부는 대책이 없었다.  왜냐하면, 미국 독립으로 인해 그간 영국 정부가 맡아야 했던 식민지 예산을 몽땅 다 미국 신정부가 책임져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영국은 미국 독립으로 인해 속으로 웃을 수 있었던 것이다. 세이스는 독립전쟁의 영웅이었다. 허나, 전쟁 후에 빈농으로 전락한 세이스는 과도한 인두세에 항의하여 농민반란의 선봉에 선다. 하여, 어제의 독립투사, 애덤스 대통령이 철저한 부자의 편이 되어 세이즈를 핍박했던 것이다. 세이즈의 반란은 철저하게 진압당한다. 허나, 세이즈 반란의 영향으로 또 다른 극과 극의 만남으로 역설적으로 연방파의 입김이 우세하여 주정부의 과도한 개입을 제어하게 하는 미국 헌법이 등장한다.

   

   

   

마치 쪽발 놈현 정권 때 찢어죽일 지주 조병갑의 후손이 고위직을 역임케 하는 등 쪽바리들이 쪽발 놈현 정권 최고위직에 있으면서, 농민, 노동자를 죽음으로 이끄는 등 민심을 잃자 동학농민혁명의 전봉준처럼 한국 민중이 분노하여 떨쳐 일어난 것처럼 세이스가 나선 것이다. 허나, 국유본 언론은 이를 철저하게 은폐시켰다. 쪽발 놈현이 죽었을 때, 상당수 인민은 쪽발 놈현이 죽었다고 잘 죽었다고 죽을 넘 죽었다고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허나, 뉴라이트 네이버 등 포털부터 시작해서 공중파 방송, 친일 조중동이 하루 종일 쪽발 놈현 찬양만 보여주니 이삼일만에 한국인 대다수가 세뇌당했던 것이다. 이것이 미디어의 힘인 것이다. 하루 종일 쪽발 찬양에 나서면 인민 모두가 쪽바리가 되고, 자신도 모르게 일본 지진에 성금을 보내기 마련인 것이다. 지진 피해로 터키나 중국에도 사상자가 났는데, 왜 일본에만 유독 지진 성금이었던가. 그것이 국유본 미디어의 힘이라는 아직도 모르는가? 다만, 인드라가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면, 국유본은 인드라가 다시 쪽발 노빠들이 나서주기를 원하나? 하고 분석해서 다음 날 뉴스에 쪽발 노빠들, 아직 안 죽었어, 이런 뉴스 내보낼 가능성이 크다^!^ 국유본아, 이거 웃기잖아. 쪽발 노빠 정치인들이 FTA 지지하고 나서는 모양새가 너무 웃기잖아~! 통일은 아직도 멀었건만. 이럴 때, 인드라라도 나서서 씹어주어야 쪽발 노빠 색희들 자존심에 상처를 입으면서 발광할 것 아니겠어? ㅎㅎㅎ.

   

   

   

   

아무튼 태머니 협회의 결성은 언제든 무장이 가능한 퇴역군인에 대한 관리에서 시작하였던 것이다. 즉, 태머니 협회는 퇴역군인의 혁명성과 긍정성을 고취시키려는 목적하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퇴역군인의 혁명성과 긍정성을 제거하기 위해 설립한 단체라는 점이다. 

   

하면, 왜 이름이 태머니인가. 태머니 협회는 17세기 인디언 추장 태머니에서 유래한다. 태머니를 Temane, Tamenand, Taminent, Tameny 등으로 불렀다. 태머니는 윌리암 펜과 인디언과 백인이 공존하는 평화 조약을 맺은 것으로 유명하다. 해서, 추장 태머니는 서양인에게 '자애롭고 현명하다'라는 평가를 받았다.

   

미국 서부개척사란 계속 이주해오는 유럽 이민자들을 인디언이 있는 서부 땅으로 내모는 정책이었던 것이다. 해서, 태머니란 이름을 지었다면, 최소한 태머니 협회는 인디언과의 평화 공존에 힘쓰고, 인디언을 강제 축출하는 정책에는 반대하는 것이어야 했다. 헌데, 실상은 어떠한가. 

   

   

   

체로키족이라고 있었다. 이들은 고종의 대한제국처럼 근대적 국가를 형성하고자 노력했다. 신문도 만드는 등 서양인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다. 하지만 서양인들은 이들과의 계약을 위반한다. 보통 선거권 확대와 연방은행의 사유화를 거부해서 프리메이슨 이야기가 나오면 반드시 나오는 잭슨 대통령은 1830년 인디언 강제 이주법을 만들어 인디언을 서부로 추방했다. 인디언들은 이후 버팔로와 함께 약 삼백만 명이 학살당하였다. 매우 우습고도 슬픈 사실은, 태머니파가 이런 잭슨 대통령 만들기에 적극 나섰다는 점이다. 이 홀로코스트에 대한 역사적 책임을 어찌 생각하는가. 세계가 과연 도덕적이라고 여기는가. 아니면 철저한 위선과 기만으로 점철된 파렴치한 세계라고 여기는가. 

   

그처럼 겉보기 이름이 진보좌파 단체라고 해서 노동자를 위한다고 농민을 위한다고 생각하지 말기를 바란다. 국유본 입김이 들어간 진보좌파 단체만 살아남는다. 해서, 국유본이 지시하면 진보좌파 단체 이름으로 얼마든지 노동자 인민을 학살하는 것이 진보좌파의 본질이다. 이는 역사를 보면 금방 확인이 된다.  당장 평양 정권만 봐도 1990년대에 수백 만 인민을 굶어죽이지 않았나? 보수우파 단체도 마찬가지이다. 보수우파이든, 진보좌파이든 두 단체가 존속하는 이유는 국유본의 민중 통제가 목적인 것이다. 한마디로 국유본 세상에는 진보좌파도 없고, 보수우파도 없다. 국유본 민중 통제에서 벗어나면 로스차일드 - 비스마르크 연합이 1871년 파리 콤뮨의 노동자들을 학살한 사건이 반복할 것이다.  로스차일드는 바쿠 유전이나 남아공 다이아몬드 광산처럼 이익이 있을 때에만, 파업 투쟁과 민족해방투쟁, 러일전쟁과 러시아, 쿠바, 중국 혁명을 지원한다.

   

그렇다면, 퇴역군인 단체에 불과한 태머니 협회가 왜 중요한가.

   

   

   

미국 정치사에서 태머니 협회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영화 '갱스 오브 뉴욕'에서 보듯, 뉴욕은 유럽 이주민이 최초로 아메리카 대륙에서 만나는 공간이었다. 유럽 이주민이 배에서 내리면 가장 먼저 만나는 것 중 하나가 태머니 협회 찌라시였다. 하면, 왜 이주민이 중요한가. 이주민 한 표가 태머니 협회의 정치적인 자산이기 때문이다. 태머니 협회가 이주민 정착을 지원하면, 이주민은 태머니 협회를 지지하는 것이다. 게다가 서부 개척이 일단락이 되자 태머니 협회는 뉴욕을 재구성하기 시작한다. 즉, 소방 자경대를 만들어서 자기 편이 아닌 지역에 일부러 불을 저지른 뒤 소방대를 출동시켜 물건을 터는 일이 흔했던 것이다. 또한, 뉴욕시장 등을 맡아 뉴욕의 온갖 비리에 손대지 않은 것이 없었다. 명분으로는 이주민 정착, 인디언과의 평화, 민주화, 노동자 권리 보장을 말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온갖 이권에 개입해서 비리를 저질렀던 것이다. 하여, 19세기 후반에 이르르면, 태머니파는 당대 언론들의 표적이었을 만큼 악명을 떨친다.

   

이때, 뉴욕이 왜 중요한가. 지정학적으로 뉴욕은 북 잉글랜드와 남 버지니아 사이의 중앙에 위치한다. 해서, 미국 독립 전쟁 때도 핵심 전략 거점이었다. 정치적으로도 뉴욕은 북 잉글랜드 공화당과 남 버지니아 노예민주당의 판세를 결정하는 캐스팅보드 역할을 했다. 뉴욕에서 승리한 당파가 정권을 잡는다는 말이 과한 말이 아니었다. 하면, 이런 뉴욕을 지배한 정파가 누구였나. 태머니파였다. 하고, 노예민주당과 태머니파는 공존공생하면서 서로의 이익을 챙겼던 것이다.

   

케네디가 정권을 잡았던 1960년대까지 아메리카 갱은 미국 정치에서 핵심적인 장치였다. 특히 노예민주당에서 대통령 후보를 하려면 루즈벨트, 트루먼, 케네디 할 것없이 선거에서 모두 갱 도움을 받아야만 선거운동이 가능했다. 하위 정당원들 상당수가 갱들이었기 때문이다. 해서, 이를 모방한 것이 이승만 정권이었던 게다.  헌데, 뉴욕 3대 조폭이 이태리 갱, 아일랜드 갱, 유태인 갱이다.

   

이중 아일랜드 갱(혹은 아일랜드 - 스코틀랜드 연합 갱, 둘 다 구교도 범켈트족이어서.)이 태머니 협회 주류였다. 특히 케네디는 아버지가 아일랜드 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해서, 아일랜드인이 유태인, 이태리인처럼 정치적이다, 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아일랜드계인 빌 클린턴이 제 2의 케네디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예서, 유태인할 때는 루즈벨트 같은 상류층 유태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카르타고 유태인이 아니다. 이들 유태인은 동유럽 유태인이다. 국제유태자본과는 별 상관이 없는,  국제유태자본 핵심층이 오히려 경멸하는, 오히려 국제유태자본 때문에 이차대전 때 학살당한 자들이 동유럽 유태인이다. 아무튼 이 시기 태머니 협회는 이태리 갱과 유태인 갱과 경쟁 관계였던 것이다. 그것이 '갱스 오브 뉴욕' 배경 중 하나이다.

   

   

   

   

해서, 루즈벨트가 노예민주당 대선 후보로 나올 때, 경쟁자가 태머니파 아일랜드 계열 알 스미스였다. 노동법 이야기할 때 나오는 와그너법의 와그너도 태머니파였다. 루즈벨트는 노예민주당 경선 방식 때문에 단일화를 해야 했는데, 이때 루즈벨트는 자신이 유태인이었기에 이태리갱과 단일화를 했던 것이다. 당시 노예민주당이 남부 KKK단과 뉴욕 갱연합을 주요 지지세로 하고 있었기에 루즈벨트는 유태인 로스차일드 후원을 받아 부통령을 남부 백인 깡패들을 대표하는 자로 한 뒤, 뉴욕에서 태머니파를 고립시키는 전술로 이태리 갱과의 연합을 해서 대통령에 당선했던 것이다. 이후, 루즈벨트 보복이 시작한 것이다.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는 간 쓸개를 다 내줄 것처럼 하던 루즈벨트는 대통령이 되자마자 경제 공황 물타기를 위한 역점 사업 중 하나로 1930년대, 태머니파 비리를 집중 캐서 태머니파를 쓸어버린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지지했던 이태리 갱마저도~! 태머니파야 적이었으니 태머니파는 처분을 감수한 편이었던 반면 계약 위반이다 해서 열 받은 이태리 마피아들이 전면 투쟁에 나서는 바람에 이 시기부터 이태리 마피아가 세계적으로 알려진 것이다.

   

허나, 이때 태머니파가 죽었을까. 죽었다면, 케네디가 대통령에 나설 수 없었다. 케네디 아버지, 조지프 케네디가 1938년에 주영대사로 간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이 시기 미국 주영대사란 약간 과장해서 말해 미국 대통령과 동격이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차후 케네디 가문에서 대통령이 나온다는 것을 의미했다. 국유본 전술은 이런 점에서 놀라운 편이다. 즉, 알 스미스를 철저하게 깨부순 뒤, 같은 아일랜드 계인 다른 자를 대표로 만드는 것이다. 가령 남한에서도 유사했다. 그간 키웠던 이철승을 떡실신시킨 뒤, 쪽발 돼중을 키우는 것이 예다.

   

이때, 케네디가 당선할 수 있었던 배경이 국유본 지지여서 케네디가 유태인 고맙소, 했다. 동시에 케네디 당선에는 마피아도 역할을 했다. 헌데, 케네디도 루즈벨트처럼 입을 싹 닦았다. 역시 또 열 받은 이태리 마피아~!  하면, 여기서 의문을 표할 수 있다.

   

과연 케네디의 재임 중 죽음은 박정희 죽음처럼 계획한 국유본의 기획이었나. 아니면, 재임 중 발생한 우발적인 사건인가. 인드라가 현재까지 추론한 바는 빅터 로스차일드가 케네디를 죽일 생각이었지 않았나 싶다.

   

예서, 중요한 비교는 재임 중 암살이라는 점이다. 참고로 쪽발 놈현 자살 사건은 쪽발 놈현이 국유본에 대항하려 해서 죽은 건 아니다. 저항하려 했다면, 재임 중 박정희처럼 죽였을 것이다. 허나, 퇴임 후 죽였다는 건, 탄핵 사건처럼 쪽발민주당에 힘을 실어주려는 국유본의 기획이라고 보아야 한다. 실제로 찌라시 한걸레가 국유본 지시를 받았는지 쪽발놈현더러 뒈지라고 칼럼까지 쓰지 않았나? 

   

   

박정희 암살 배후에는 데이비드 록펠러와 브레진스키가 있다면, 케네디 암살 배후에는 빅터 로스차일드가 있었으리라 본다. 박정희와 케네디는 1917년 동갑내기이다.

   

1973년에 국유본 권력이 빅터 로스차일드에서 데이비드 록펠러로 정권 교체했다고 했다. 또한, 정권 교체의 힘은 국유본 귀족이  쿠테타를 일으킨 것이라고 했다. 이때, 원인은 베트남 전쟁이다.

   

하면, 왜 베트남 전쟁인가.

   

빅터 로스차일드는 미국이든, 소련이든 인기 있는 지도자가 나오기를 바라지 않았다. 둘 다 강경파여서 강한 힘을 추구하기 바랬다. 그래야 007 제임스 본드 빅터 로스차일드의 가치가 커지는 법이니까. 반면, 국유본 귀족 300인위원회는 빅터 로스차일드의 빌더버그 때문에 비록 힘이 약화하였지만, 빅터 로스차일드가 무시못할 권력을 유지하였다. 그 한 예로 이차대전 이후 영국 총리의 주요 학력이 옥스퍼드 대학 출신이다. 심지어 케임브리지 대학 출신인 빅터 로스차일드의 자손도 옥스퍼드 대학 출신이다.

   

빅터 로스차일드는 이차대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중동전쟁처럼 지속적인 전쟁을 통해서 신세계 질서로의 이행을 재촉했다. 반면, 국유본 귀족 300인위원회는 신세계 질서로의 이행을 지지하지만, 기득권을 인정받는 선에서 비판적 지지를 했던 것이다. 이러한 갈등은 케네디 때부터 표면화한 것이 아닌가 본다.

   

케네디 재임 기간 중에도 빅터 로스차일드는 미국과 소련을 움직여서 쿠바 위기 등 계속적으로 위기를 만들어내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잘 해결한 셈이지만, 케네디 정권 정당성을 약화시켰다. 다시 말해, 케네디 정권은 진보좌파를 지지해주는 척하는 역할을 맡았기에 국유본 귀족과 빅터 로스차일드 합의하에 탄생한 정권이다. 헌데, 빅터 로스차일드는 케네디 정권을 계속 위기로 몰아넣었다. 대체 공화당 정권과 무엇이 다르냐 하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말이다. 이는 케네디 이후 노예민주당 정권이 베트남 전쟁을 지속시킨 것과 맥락이 닿아 있다. 이로 인해, 노예민주당 지지율이 굉장히 나빠졌던 것이다.

   

이는 미국에 기반을 두고 노예민주당을 지지해왔던 데이비드 록펠러 심기를 매우 불편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300인 위원회 국유본 귀족들에게도 좋지 않았다. 무엇보다 영국 노동당 페이비언 협회에서 갈피를 잡지 못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국유본 귀족인 버트런트 러셀이 1965년 영국 노동당증을 찢어버렸는데, 빅터 로스차일드에 대한 항의 표시였던 것이다. 우스운 것이 버트런트 러셀이 세습백작 지위를 지니고서 영국 노동당원이었다는 사실 자체가 영국 노동당이 얼마나 허구적인 정당인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왜인가. 미국과 영국은 이차대전 이후로 양국 정치권이 밀접한 관계이다. 외교적으로는 언제든 협력을 추구했다. 빌더버그 협회 덕분이지만. 해서, 미국 정치권력은 영국 정치권력에 영향을 주고, 영국 정치권력을 미국 정치권력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가령 로즈장학생 토니 블레어 영국 노동당 총리가 푸들이란 악명에도 개의치 않고 부시 미국 공화당 대통령의 대이라크 전쟁을 한결같이 지지한 것이 예다.

   

이런 여건에서 미국 공화당이면 모르되, 영국 노동당처럼 같은 리버럴 성향이라 평가받는 미국 노예민주당 정권이 베트남 전쟁을 지속하면, 이는 미국 노예민주당뿐만 아니라 영국 노동당에게도 악영향을 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국유본 귀족들로서는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빅토리아 시대나 엘리자베스 시대 모두 국유본 귀족이 겉으로는 영국 보수당을 지지하는 척하나 내심 지지한 것은 영국 보수당이 아니라 영국 자유당이요, 영국 노동당이었다. 정확히는 양당 체제 선호였다. 영국 노동당이 허약하니 영국 노동당을 내심 밀어주어야 간신히 양당체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위선 덕분에 국유본이 오늘날 호의호식한다고 본 것이다.  헌데, 영국 노동당마저 무너진다면, 양당 체제가 무너지는 것이요, 이는 국유본 체제의 위기를 도래하는 것이다.

   

빅터 로스차일드는 신세계 질서로의 빠른 이행을 위해 양당체제마저 무너뜨릴 작정을 한 듯싶다. 세계가 보다 위기에 놓여야만 세계는 시온의정서가 잘 요약한 국가사회주의체제로 급속히 이행할 것으로 본 것이다.

   

국유본 귀족들은 제동을 걸어야 했다. 그 역할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한 자들이 오늘날 페이비언 협회가 아니었을까? 하고, 그 페이비언 협회와 손잡은 이가 바로 데이비드 록펠러였던 셈이다. 하고, 이들 두 세력이 합작해서 만든 것이 닉슨을 대통령으로 만든 뒤 재임 중 퇴임하게 하는 것이다. 빅터 로스차일드가 케네디를 대통령으로 만든 뒤 재임 중 암살한 것처럼 빅터 로스차일드에게 당한 것을 그대로 복수한 셈이다.

   

하면, 페이비언 협회는 그후 어떻게 되었는가.

   

이태리 마피아랑 비슷한 신세인 것 같다^!^ 국유본은 언제나 그렇듯이 사냥개에게는 사냥개 취급만 할 따름이다. 권력을 잡기 전까지는 동맹이지만, 일단 권력을 잡은 뒤에는 철저하게 밟아야 하는 것이다.

   

페이비언 협회와 데이비드 록펠러는 한동안 사이가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빅터 로스차일드와 싸울 때는 옥스퍼드 대학 출신 대처를 내세워서 영국 보수당을 엿먹이는 데에 잘 협조한 것 같다.

   

허나, 그 이후는? 페이비언 협회는 두 번 당했다. 한 번은 데이비드 록펠러에 의해서. 부시 정권과 토니 블레어를 통해서. 다른 하나는 제이 록펠러에 의해서. 부시 정권 때, 빌 클린턴은 옥스퍼드 대학 총장 후보로 거론한 적이 있었다. 헌데, 옥스퍼드 대학에서는 품위가 떨어진다고 격렬하게 반대했다. 빌 클린턴은 자신의 딸을 옥스퍼드에 보낼 정도인데, 왜 이랬을까.

   

한마디로 왜 페이비언협회, 혹은 일부 국유본 귀족들이 록펠러 가문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인가. 제이 록펠러와 제이콥 로스차일드는 왜 사이가 좋은가?

   

인드라는 그 혐의를 존 콜먼에 둔다.

   

영국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존 콜먼의 300인 위원회가 비판하는 대상은 과연 누구인가. 데이비드 록펠러인가, 빅터 로스차일드인가. 둘 다 아니다. 300인위원회요, 옥스퍼드 로즈위원회요, 페이비언 협회인 게다.

   

존 콜먼의 진정한 목표는 무엇인가.

   

그는 과연 어느 세력인가. 그는 누구의 보호를 받길래 암살당하지 않고 여태 살아남을 수 있었나. 하고, 왜 그는 그 누구에게도 고소당하지 않는가~! 비틀즈만 해도 들고 일어날 만큼 엄청난 폭로 사건인데~!

   

용병의 이천년사

http://blog.daum.net/skxogkswhl/12459053

   

백인 노예

http://www.hani.co.kr/arti/society/life/294428.html

   

뉴욕시 역사

http://100.empas.com/dicsearch/pentry.html?i=125900

   

태머니

http://www.encyber.com/search_w/ctdetail.php?gs=ws&gd=&cd=&q=&p=&masterno=154521&contentno=154521

   

Chief Tammany

http://www.freewebs.com/delawarein/delawarechiefs.htm

   

셰이스 반란

http://economy.hankooki.com/lpage/opinion/200708/e2007082817492463820.htm

   

세인트 태머니협회 초기 활동

http://tiny.britannica.co.kr/bol/topic.asp?article_id=b07m2081a&top

   

케네디와 마피아 애증 관계

http://blog.joinsmsn.com/nanoda/10362815

   

전세계 민족해방운동은 국제유태자본이 만들었다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1/11/19 12:20

http://blog.naver.com/miavenus/70124462253

   

   

   

   

전세계 민족해방운동은 국제유태자본이 만들었다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14 : 목숨을 바칠만한 제국주의가 목표였던 페이비언협회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1/11/19

   

   

둘째, 전세계 민족해방운동은 국제유태자본이 만들었다

   

수메르/ 페니키아/ 카르타고/ 영국은 용병에 의존하였다.

   

1. 상업 활동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용병이 경제적으로 합리적이었다. 군인이란 전쟁 때나 필요하다. 평상시에는 군인을 키우고, 관리하는 비용만 든다.

   

2. 비용이 얼마 들지 않는다 해도 군사력을 키우면 그 군사력이 언제든 자신들에게 칼을 들이댄다. 고대 바빌론, 로마, 중국, 한국. 일본에서 예외없이 일어난 일이다. 조선왕조는 고려제국 후반에 발생한 무신의 난과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그리고 조선왕조 초기 왕자의 난 덕분에 군사력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간 것이다. 다만, 조선왕조는 남는 힘을 문치에 힘을 쓴 반면, 수메르는 상업 활동에 전력을 기울인 것이다.

   

3. 무엇보다 권력이 집중한 만큼 상인 귀족 권력을 뛰어넘는 제국 권력을 창출할 위험이 있다. 로마제국 카이사르, 중국 진시황, 나폴레옹, 태양왕 루이14세 등등등.

   

   

이와 같은 이유로 영국에서의 국유본은 군사력을 키우는 데에 민감했다. 특히 육군을 키우지 않았다. 국유본은 영국이나 네덜란드에서 해군에 집중했던 것이다. 하고, 이마저도 불안하여 오늘날 공산주의권에 행한 방식으로 장군 감시 체계를 게을리하지 않은 것이다. 자신들에게 위협적인 장군들을 그냥 놔두지 않는다. 그 희생양 중 하나가 이차대전 패튼과 한국전쟁 맥아더인 게다~!

   

예서, 인드라의 한방으로 읽는 '빅토리아 시대 이전의 영국사'를 읽자.

   

   

영국은 로마제국에게 점령을 당한 뒤 카이사르의 전기에서 처음으로 역사에 출현할 정도로  미개한 지역이었다. 카이사르가 자신의 전기에서 언급할 정도라면 하찮은 영국인으로서는 영광일 것이다. 허나, 기후가 꿀꿀해서인지 로마제국은 훌륭한 문화유산을 남긴 뒤에 자진 물러나니 다시 암흑의 세계가 찾아와 영국이 역사에서 사라졌다. 시키지 않으면 뭣 하나 할 줄 모르는 전형적인 영국인의 종족 특성인 게다. 그러다가 다시 영국에 행운이 찾아왔다. 바이킹들이 영국을 정복하고 영국을 발전시켰다. 허나, 정복왕은 영국이 살기 X같은 나라라면서 영국에서 사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해서, 위대한 왕은 총독부만 둔 채 프랑스 따뜻한 나라에 가서 살았다. 이 바람에 식민지 총독부 관리들 권력이 커진 것이다. 이 식민지 총독부 관리들이 오늘날 영국 귀족 선조들이다. 바로 이 시기에 식민지 총독부 관리들이 경제에 무식했기에 상인을 필요로 했는데, 그 상인들 일부가 스페인과 이태리에서 활약하던 카르타고 유태인이었다. 일부 기록에는 11세기경 노예로 유태인이 들어왔다는데, 그것이 사실이건, 아니면 구약 욥을 응용한 상상력의 소산이건, 노예이던 유태인이 오래지 않아 영국 경제를 좌지우지했던듯 싶다.

   

   

11세기에서 13세기. 이 시기는 유럽에서 중세 온난기라 부를 정도로 기후가 좋았다. 해서, 얼음이 다 녹으니 바이킹들이 활개를 치고, 그린랜드에서 농사를 짓고, 러시아에도 진출하고, 일부는 아메리카로 건너가서 오늘날 하플로 X 타입 인자를 남긴 유럽계 인디언이 된 게다. 그런 만큼 중북부 유럽에도 나라들이 만들어지니 교역을 활성화할 수 있었다. 이때, 해상 루트는 지중해에서는 이집트, 그리스, 로마, 스페인, 포르투갈, 영국, 노르망디, 네덜란드로 이어지는 해상루트였다. 이 시기 노르망디에서는 몸집만 큰 멍청한 백인 노예들을 거래했다고 한다. 다른 한편, 육상 교역은 로마제국군이 만든 로마 길을 이용하니 이태리 북부 롬바르디아 상인과 라인강변 한자동맹 상인이 뜬 것이다. 이들의 주요 루트는 로만틱가도와 라인강변을 잇는 이태리 - 네덜란드 라인이었다.

   

   

   

이때 자세한 사정을 알 수 없으나, 인드라가 추정한 바로는,  유태인 상인은 스페인/포르투갈과의 해상 교역에서 중요한 거래자였을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스페인/포르투갈에는 궁정유태인들이 상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헌데, 이들이 누구인가. 수메르/페니키아/카르타고의 상술을 비전으로 익혀온 이들이지 않은가. 특히 해상교역에는 타고난 재주가 있었다. 하여, 순식간에 영국 상권을 장악하지 않았나 싶다. 그런 까닭에 육상 교역에 강했던 롬바르디아 상인과 한자 상인들이 위기의식을 느꼈을 것이다. 해서, 이들 상인들이 13세기말 몰려온 몽골제국 군대를 빌미로 유태인 상인을 쫓아낼 계책을 만들어냈고, 마침 영국 국왕이 유태인 상인에게 크게 빚을 지고 있었기에 영국 국왕과 롬바르디아/한자동맹 상인이 협잡하여 유태인 추방령을 13세기말에 시행한 것이다.

   

   

해서, 14세기 이후 영국에서는 유태인이 살 수 없었다. 반면, 영국 상권을 장악한 자들이 롬바드리아 상인이었다. 해서, 오늘날 영국 시티지구 핵심부에는 롬바드가가 있는 것이다. 미국에 월가가 있다면, 영국에는 롬바드가! 물론 그 롬바드가는 로스차일드 가문이 장악하고 있다~! 이들은 이 시기에 주로 거래한 것이 네덜란드를 통한 양모였다. 영국에서 양모를 만들면 이를 롬바드 상인이 네덜란드에 팔고, 한자동맹 상인이 네덜란드에서 가공한 원단을  이태리 등에 파는 것이다. 이 때문에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 원인을 영국과 네덜란드간 교역에서 찾는 분석도 있다. 쪽발이가 임진왜란을 일으켜서 조선 도공들을 끌고가서 도자기 산업을 일으켰듯 영국은 백년전쟁 와중에 의류 기술자들을 영국으로 데려갔기 때문이다.

   

   

   

   

하면, 추방당한 스페인계, 혹은 세파라딤 유태인들은 어디로 갔나. 처음에는 프랑스로 가나 프랑스에서도 추방령이 떨어지니 간 곳이 바로 독일이었던 게다. 이것이 독일계 유태인, 혹은 아슈케나지 유태인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독일 등지에서 극소수 유태인이 있었긴 하지만, 당시 독일은 수많은 자유도시와 공국들로 갈라져 있었기에 상대적으로 규제가 덜 했던 것이다. 이들이 독일 등지에서 열심히 실력을 키웠던 게다. 허나, 결정적인 변수는 스페인 추방령이었다. 당대 실력파 유태인들은 대부분 스페인 궁정 유태인을 중심으로 이태리와 독일, 식민지 네덜란드, 북아프리카를 잇는 교역에 종사하고 있었다. 헌데, 스페인이 추방을 시키니 이들이 어디를 가겠는가. 포르투갈, 이태리, 독일, 튀니지, 리비아, 이집트, 바그다드, 남미 등지로 간 것이다. 이때, 포르투갈이나 독일, 이태리로 갔던 이들이 점차 집결한 곳이 바로 네덜란드였다. 당시 네덜란드는 스페인과 독립투쟁중인 데다가 종교개혁가들의 해방 공간이었다. 그런 만큼 유태인 입장에서는 종교 탄압을 덜 받는 데다 오랜 스페인 식민지였다 보니 네덜란드와 많이 교역을 해서 잘 아는 동네였다.

   

   

헌데, 기적이 일어났다. 스페인은 스페인 경제와 함께 그 이후로 내리막길을 걸었던 반면, 스페인 궁정유태인을 중심으로 한 유태인들이 입국한 지 불과 십수 년만에 네덜란드는 유럽 강국으로 부상한 것이다. 1602년에 동인도회사를 만든다. 전 세계 최초로 증권거래소를 만든다. 나아가 스페인 아르마다 함대를 깨부순 영국 함대를 곧잘 위협했던 것이 네덜란드 함대였던 것이다.

   

하면, 왜 네덜란드에 있던 유태인들이 영국으로 대거 이주했는가.

   

"제1차(16521654)는 영국 크롬웰 정부의 항해조례(航海條例) 발포(1651)와 네덜란드 선박에 대한 임검수사권(臨檢搜査權) 요구가 원인이 되었다. 일진일퇴의 결과 영국이 승리하여 1654년 웨스트민스터조약이 체결되었는데, 네덜란드가 암보이나 사건의 배상까지 포함하여 양보하였다. 제2차(16551667)는 영국 왕정복고(王政復古) 정부에 의한 1660년의 항해조례 경신(更新), 신대륙의 네덜란드 식민지 점령 등으로 일어났다. 로이테르가 지휘한 네덜란드 함대가 템스강의 입구를 봉쇄하고 포격을 가하기도 했으나, 전체적으로는 영국이 우세하여, 브레다조약으로 신대륙의 뉴암스테르담(뉴욕으로 改名)을 할양시켰다. 제3차(16721674)는 프랑스루이 14세에 의하여 네덜란드전쟁이 일어나자 1670년 루이 14세와 도버밀약(密約)을 맺고 있던 영국 왕 찰스 2세가 약속에 따라 참전하였다. 그러나 의회가 전비(戰費)를 승인하지 않아서 승패가 뚜렷이 판가름나지 않은 채 종결되었다. 이 전쟁에서 결정적인 승리는 없었으나, 대체로 영국측이 우세하였고, 사회 ·경제면에 끼친 영향도 네덜란드측이 심각하였다. 이 전쟁을 계기로 네덜란드의 해상권(海上權)은 쇠퇴하고 영국이 이에 대신하게 되었다."  [출처] 영국-네덜란드전쟁 [英國-戰爭, Anglo-Dutch Wars ] | 네이버 백과사전

   

영국에서는 종교 전쟁이 일어났다. 스코틀랜드 장로파가 대륙 유태인과 동맹하여 유태인 자금을 융통하면서 종교 혁명을 꾀했다. 그 영향으로 크롬웰 청교도 혁명을 일으킬 수 있었다. 하고, 크롬웰은 정권을 잡은 뒤 유태인 입국을 허가했던 것이다. 허나, 유태인 입국 허가가 떨어졌다고 유태인들이 즉시 영국으로 이주한 것은 아니었다. 중요한 건 크롬웰은 정세 파악을 제대로 했다는 점이다. 크롬웰은 크롬웰대로 네덜란드가 강국으로 올라선 이유를 알고 있었고, 네덜란드 유태인들은 유태인대로 크롬웰의 강점을 파악하고 있어서 서로간 충돌을 피했던 것이다. 허나, 크롬웰의 야망은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를 정벌하여 10년간 계속한 영국 내전을 종결짓자 곧바로 항해 조례를 발표한다. 영국 식민지에 물건을 팔 때는 영국배로만 해야 한다는 것을 주요 골자로 한 것이 항해 조례이다. 이에 네덜란드 유태인 상인들은 식민지 몇 곳을 포기할 터이니 양보하라고 했지만, 크롬웰은 완강하게 버텼다. 해서, 일어난 전쟁이 영국 - 네덜란드 전쟁이었다. 3차에 걸친 전쟁에서 영국은 강한 면모를 보여준다. 이에 놀란 네덜란드 유태인 상인은 먼 옛날 카르타고 선조들이 무력이 강했던 로마제국에게 패했던 때를 기억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명예혁명 과정까지 유태인 상인들이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 알 수는 없다. 다만, 명예혁명이 발발하자 이 시기 네덜란드에 살던 영국왕과 연줄이 있던 네덜란드 유태인 상인들이 대거 영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이런 유태인 후손 중 하나가 고전경제학파 유태인 리카르도인 게다. 이 시기에 독일계 상인들도 들어왔다. 베어링 가문이 그중 하나다. 이 시기 유태인 상인이 자신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여전히 유태인에 대한 규제가 강했으며, 어떤 공직도 진출할 수 없었다. 해서, 늘 배후로만 움직여야 했는데,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프리메이슨 세력을 활용했던 것이다. 해서, 인드라는 베어링 가문이 프리메이슨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본다. 아무튼 유태인 상인들은 배후에서 프리메이슨 세력을 통해 영국 정계를 장악하여 첫번째 사업으로 영국중앙은행을 장악한다. 물론 얼굴마담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프리메이슨이었다. 이 시기 직후 네덜란드 자본 유출이 극심했다. 네덜란드에서 영국으로의 이주는 1795년 나폴레옹 전쟁으로 종결난다. 이때, 나폴레옹을 피해 영국 런던으로 망명한 네덜란드 국왕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권리를 영국 동인도회사에게 넘기고, 일정 지분을 보장받는다. 이것이 오늘날 빌더버그에서 네덜란드 왕가가 역할을 하는 이유이다. 말하자면, 동인도회사의 두 번째 주주인 게다.

   

사정이 이렇지만, 유태인들이 전면에 나선 것은 아니었다. 허나, 로스차일드 가문이 19세기 나폴레옹 전쟁을 통해서 영국 경제를 순식간에 장악하니 그간 국유본 맹아기 권력을 형성했던 베어링 가문을 제치면서 이 시기부터 본격적인 국제유태자본 시대가 열렸던 것이다. 뒤에서 조용히 숨어 있던 유태인 상인들이 로스차일드 권력 장악 이후 로스차일드 도움을 받아 점차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해서, 프랑스 혁명 배후에 로스차일드가 있다는 건 웃기는 일이다. 로스차일드가 국유본 권력을 제대로 행사하기 시작한 것은 1820년 이후 금융공황을 일으키면서부터라고 하는 것이 인드라 추정이다.

   

무엇보다 로스차일드가 국유본 권력을 장악한 뒤 조직 재편에 나섰는데, 그중 하나가 그간 사냥개 역할을 했던 프리메이슨 세력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하면, 프리메이슨을 제거한 뒤에는? 유태인으로 대체했던 것이다. 해서, 미국에서 반메이슨운동이 일어났는데, 이 운동 배후에는 로스차일드가 있었다.

   

이 결과에 대해 올림픽 운동을 주도했던 쿠베르탱은 영국인들이 스포츠를 통해 단련했기에 네덜란드에서 유태인을 스카웃할 수 있었다고 보았던 것이다. 해서, 프랑스가 융성하려면 육체가 튼튼해야 한다 믿어서 국유본 후원 하에 일으킨 운동이 올림픽 운동이다. 허나, 인드라 생각은 다르다.

   

종교와 자본, 그리고 포르노(문화)는 수메르 이후 함께 간다. 신전에서 대부하고, 몸을 팔았다. 기원은 모두 신성한 이유였다. 금과 은은 신전에 보관한 뒤, 금과 은 영수증을 대체한 화폐를 시민에게 유통시킨 것은 신들의 영광을 함께 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신전에서 여사제들이 몸을 판 것은 세례였다. 더럽고, 추잡한 욕망덩어리인 인간이 순수한 여사제의 몸을 통해 새생명을 얻는 종교적인 예식이었다. 허나, 이런 혜택을 아무나에게 줄 수 없자, 나온 발상이 포르노였던 게다. 여사제, 여신의 나신만이라도 볼 수 있다면, 안구 정화해서 남은 삶을 선하게 살 수 있으니까. 해서, 초기 이자놀이는 남사제들의 고유 영역이었고, 매춘놀이 역시 여사제들의 독점 영역이었다.

   

   

이 시기 네덜란드 유태인에게 없었던 것이 튼튼한 육체인 것도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했던 것은 종교/정치 운동이었다. 로마 가톨릭에 대항한 종교/정치 운동이 독일과 영국에서 특히 거셌다.

   

로스차일드는 정경유착이 대자본으로 가는 지름길이라 했다. 대상인은 사람 장사인 게다. 유럽의 대부호, 메디치, 푸거 모두 당대 권력을 배경으로 컸다. 로스차일드 역시 당대 유럽 제일의 부호, 헤센 노예군주 자금을 밑천으로 했던 것이다. 이때, 메디치나 푸거는 로마 가톨릭에 의존했던 반면, 로스차일드는 로마 가톨릭에 대항하는 국왕파 편에 선 것이다. 예서, 유럽에서 어느 나라가 당대 종교운동에서 가장 격렬하게 투쟁했는가. 영국이었다. 크롬웰이었다.

   

하면, 독일도 정치/종교 운동이 격렬하지 않았느냐 반문할 수 있다. 또한, 독일 자본이 만만치 않았다. 유태인이 독일에서 오랜 기간 생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유본이 독일을 택하지 않은 이유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이었다. 유럽 중앙부에 위치하였기에, 이로 인해 육군을 키우지 않을 수 없었고, 이는 왕권 강화를 낳기 마련이고, 왕권 강화는 귀족 상인 권력 규제로 나아간다.

   

네덜란드 유태인들은 수메르/페니키아/카르타고처럼 아메리카와 아시아 대륙 등지에서 식민지 건설보다는 교역을 중시했다. 카르타고가 망한 것도 결국 식민지 건설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듯싶다. 반면, 영국은 미국 예를 봐도 프리메이슨 회사를 동원해서 영국인을 버지니아주에 강제 이주시키고, 미국 뉴잉글랜드 지역으로 청교도를 이주시킨다. 허허벌판이나 다름없는 지역에 이들이 자생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오직 종교적 헌신 외에는 없다 하겠다. 바로 이런 점이 네덜란드 유태인에게는 없었던 것이다. 해서, 네덜란드 유태인들은 판단했을 것이다. 자신의 경제력과 저들의 종교적 열정이 결합한다면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볼 것이라고!

   

   

결과는 생각한 대로였다. 18세기에 이르르면 전 세계 해상이 모두 영국 손아귀에 떨어졌다. 17세기말부터 18세기초까지는 해적들의 황금시대였다. 심지어 여자 해적 두목도 곧잘 등장했다. 허나, 영국과 네덜란드가 결합하여 막강해진 영국 해군은 18세기 초반만 하더라도 해적과 손잡고 해상을 정리하더니 18세기 중반에 이르르면 해적들마저도 소탕하기 시작했다. 해서, 1750년대 7년 전쟁을 기점으로 영국은 세계를 장악한 것이다. 반면, 프랑스는 7년 전쟁을 기점으로 국력이 하강하기 시작하여 프랑스 혁명을 만난다.

   

전 세계 해상을 장악하였기에  18세기 후반에 이르르면 미국을 독립시키는 것이 오히려 남는 장사였다. 국유본은 고정비 부담을 늘 부담스럽게 생각했다. 역대 부자들과 왕국이 망한 것은 결국 고정비 증가 때문으로 본 것이다. 해서, 식민지를 유지시키기 보다 독립시켜서 아웃소싱하면서 우려먹는 것이 경제적으로 이익이라고 본 것이다. 무엇보다 국방비였다. 국방비 부담을 피하고자 국방 부담을 막 식민지에서 독립한 식민 정권에게 전가시키고, 전쟁이 나면 동맹이라는 빌미로 참전하게 만드는 것이다. 역사책과는 달리 국유본은 미국을 독립시킨 뒤 남몰래 웃을 수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미국을 독립시킨 결정적인 배경은, 동인도회사 아편 무역에 집중하기 위함이다. 이런 이유로 조지 워싱턴이나 토머스 제퍼슨 모두 아편농장을 꾸렸던 것이다. 루즈벨트 엄마 가문도 아편무역에 열을 올렸다. 

   

18세기말 19세기초는 아편 무역의 시대였다. 이 시기부터 동서양 부가 재편하는 것이다. 그 이전까지는 여전히 동양이 우세였다. 허나, 아편 무역으로 동서양 부는 서양 우위로 기울었다. 해서, 국유본은 아편 무역에 집중하기 위해 미국 독립을 허용했던 것이다. 오늘날로 치면, 두 개의 전쟁을 동시에 할 수 없다는 전략이라고 할까. 서인도 대신 동인도에 선택과 집중을 한 것이다.

   

1773년 동인도 회사가 경영난을 호소하여 동인도 회사 감독 관리를 강화하는 노스 규제법이 등장한다. 헌데, 속사정은?

   

1. 동인도회사의 특권을 영국 국왕 특허장에서 보장하던 것을 영국 의회 사안으로 변경한 것이다. 조지 1,2세와 달리 조지 3세는 명예혁명 이후 50년간 집권한 휘그당(금융자본가당)을 멀리 하고 토리당(지주당)을 가까이 하면서 적극적인 정치 개입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해서, 국유본은 국유본이 장악한 의회를 통한 안전 장치를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2. 노스규제법은 동인도회사 직원을 공무원 격으로 지위를 격상했다. 이는 그만큼 동인도회사 직원 업무가 보다 중요해졌음을 의미한다. 1773년에 영국 동인도회사는 19세기 전반까지 유효한 중국 아편무역 독점권을 따냈다. 영국은 공식적인 것만도 1729년에는 아편 연 이백 상자, 1776년에는 1,000 상자, 1790년에는 5,000 상자, 1820년에는 10,000 상자를 중국에 보냈다. 

   

3. 노스규제법은 동인도회사만 배불리고 영국 시민은 배가 고프다는 비판을 회피할 수 있었다. 겉보기엔 분명 동인도회사가 적자였다. 또한, 더 감독 관리한다고 한다. 허나, 분식회계와 반대인 역분식회계가 있다.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얼마든지 수익을 비용 처리하거나, 은폐시킬 수 있었다.

   

적자라면 영국이 왜 동인도회사 독점권을 포기하지 않았을까^^?

   

로스차일드가 국유본 권력을 장악하면서 주목한 것은, 용병 자금을 밑천으로 한 만큼 전쟁이었다. 특히 프랑스 혁명을 통해 나타난 인민의 정치 열망이었다. 이는 이전 종교 열망의 연장선이었다. 하여, 로스차일드는 인민의 정치/종교 열망을 통한 돈벌이를 깊이 연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첫 사업이 1820년대 그리스였다.

   

겉보기에는 그리스 지원으로 인해 로스차일드가 적자로 보인다. 그리스 정부가 로스차일드 채권을 잘 갚지 못했기 때문이다.

   

해서, 이 대목이 경제사적으로 이슈인 게다.

   

왜 영국 금융 자본은 국내 투자 대신 해외 투자를 하였는가. 국내 투자 수익률이 높지 않아서. 국내 투자 수익률 이상으로 해외 투자 수익률이 좋아서. 이에 대해 맑스주의 이론가들은 금융 자본의 요구라고 한다. 맑스주의 이론가들 이론이 일단 옳다. 하면, 구체적으로 금융 자본이 해외 투자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제국주의다. 헌데, 왜 영국 금융 자본은 영국 제국주의의 근간이랄 수 있는 영국 제조업을 키우지 않고, 오히려 잠재적인 영국 제국주의의 적이라고 할 수 있는 유럽, 러시아, 미국, 일본 제조업에 투자하여 결과적으로 이들 국가 제국주의를 키웠는가. 맑스주의 이론가들은 자본에는 국경이 없다는 말로 대신할 것이다. 허나, 여기서 난점이 발생한다.

   

지금까지의 맑스주의 제국주의론은 국가 중심이었다. 가령 오늘날도 보면, 미국 중심 제국주의론이다. 무엇이든 미국 국가 위주이다. 허나, 미국 중심이면 오늘날 월가 시위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왜 자신의 힘을 자신이 나서서 오히려 약화시키는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국유본 하수인, 촘스키 같은 애들을 동원해서 반미 의식을 고취시키는 것도 미국 중심이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자본에는 국경이 없다. 맞는 말이다. 동시에 자본에는 국적이 없다. 국유본은 종교, 정치, 민족해방, 애국심, 신 기타 모든 것을 교환 대상으로 여길 뿐이다.

   

여기까지가 빅토리아 시대 이전의 영국사였다.

   

빅토리아 시대가 시작하였다.

   

http://ko.wikipedia.org/wiki/%EB%B9%85%ED%86%A0%EB%A6%AC%EC%95%84_(%EC%98%81%EA%B5%AD)

   

빅토리아 시대란 1837년부터 1901년까지이다.

   

1. 빅토리아는 일편단심 휘그당/자유당(금융자본가당) 편이었다. 허나, 로스차일드와 친구 사이인 유태인 디즈데일리가 토리당/보수당(지주당) 총리가 된 이후에는 자유당만 편애하지 않았다. 모두 국유본 편이었기 때문이다. 빅토리아는 자신의 권력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하여, 빅토리아 시대에 영국은 명실상부하게 세계 최고 최대 제국,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다.

   

빅토리아가 왕위에 오르자마자 발생한 아프간 전쟁 패배는 국유본이 빅토리아 여왕을 길들이기 위한 고육지책이 아닌가 본다. 마치 이명박이 집권하자마자 쪽발민주당에게 지시해서 국유본이 이명박을 곤경에 처하게 만든 것이 예다. 우리 식으로 액땜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를 통해 빅토리아는 장기 집권하다가 공교롭게도 보어전쟁 와중에 죽었다.

   

2. 빅토리아 시대에는 항해조례법, 곡물법 등을 모두 폐기한다. 또한, 로스차일드 가문이 하원의원에 진출할 수 있었고, 세습할 수 있는 남작 작위를 획득했다. 유태인이 총리 자리까지 올랐다. 한마디로 자유무역파의 승리이자 자유당의 승리였고, 금융자본가의 승리요, 국유본의 승리였다. 게다가 1850년부터 소빙하기가 풀려 기후가 온난해지기 시작했다.

   

이는 인간의 숙명론을 약화시키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화시켰다. 마치 중세 십자군 운동이 일어나던 때와 유사한 상황인 게다. 한편으로는 인간의 자유 의지가 강화하니 무신론이 득세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자유 의지로 인해 타락한 인간들이 오만방자하다 보니 신을 두려워하지 않아 온갖 악행을 저질렀다. 이로 인해, 새로운 종교운동이 발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허나, 중세 때는 십자군 운동으로 일어났지만, 근대에는 차티스트 운동, 러다이트 운동, 뉴에이지 운동, 페이비언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나중에 온 이사람에게도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6258601

   

http://ko.wikipedia.org/wiki/%EC%A1%B4_%EB%9F%AC%EC%8A%A4%ED%82%A8

   

이 중심에 존 러스킨이 있었다. 자유무역파가 주류가 된 이상 표적은 자유무역파. 존 러스킨은 자유무역파 이론인 고전경제학파를 맹렬히 비판했다. 이때, 존 러스킨 비판의 핵은 무엇인가. 인간 이기심을 전제로 한 고전경제학파 비판을 성경 구절로 대신했던 것이다. 그것이 인도주의적 경제학이었다. 존 러스킨의 저서,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가 유명하다.

   

마태복음에 있는 말씀이다. 포도밭 농장 주인이 하루 일꾼을 고용했는데, 일을 하는 와중에도 일꾼을 계속 고용했다. 헌데, 농장 주인이 일 끝마치기 전에 온 일꾼이나 처음부터 일을 한 일꾼이나 동일한 임금을 주자 처음부터 일을 한 일꾼이 불만을 표했다. 이에 포도밭 농장 주인이 자신은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나중에 온 사람에게도 너에게 주는 것과 똑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다,라고 말한다.

   

이는 맑스 이전에 이미 노동과 노동력을 정확히 분리해서 사고한 방식일 수 있다.

   

자본제 생산하에서는 노동력이 특수한 상품으로서 매매된다. 상품으로서의 노동력은 다른 상품과 마찬가지로 사용가치교환가치를 가지는데, 노동력이 특수한 상품인 것은, 노동력의 사용가치인 노동이 자기의 교환가치를 웃도는 가치를 낳기 때문이다. 노동력의 가치는 노동력의 소유자인 노동자의 생활수단의 가치에 의해 규정되며, 이를 웃도는 가치가 이른바 잉여가치가 되는 것이다. 

[출처] 노동력 [勞動力, labor power ] | 네이버 백과사전

   

임금이란 일한 만큼이 아니라 인간이 하루에 필요한 생활비를 의미하는 것이다.

   

인드라는 이를 변형해서 최근 인드라 몸값을 말한 바 있다.

   

당신의 몸값이 얼마입니까. 이에 많은 분들이 자신의 몸값을 따지기에는 자신이 비천하다 이렇게 말씀들을 많이 하셨다. 그것이 자본주의 하의 사고방식인 게다. 반면, 인드라 방식은 무엇인가. 364억을 제시했던 것이다. 왜? 인드라 능력이 364억이어서? 아니다. 인드라가 생계에 필요한 액수가 364억이기 때문이다 ㅎㅎㅎ

   

   

존 러스킨은 맑스 자본론이 등장하기 전에 인도주의 경제학을 발표하여 센세이널을 일으켰다. 이에 맑스가 자극을 받아 자본론을 발표했는데, 반응이 없었다 ㅠㅠㅠ 심지어 노이즈 마케팅까지 했는데, 무반응이었다 ㅋㅋㅋ (그러게~ 맑스야. 좀 쉽게 쓰지, 일부러 현학적으로 써서 그러냐. 짝퉁의 열등감이냐? 헐^^!)

   

존 러스킨 사상은 원론적이었다. 해서, 고전경제학파에 맞서는 구체적인 모델을 구해야 했는데, 바로 그 대목에서 그간 놀림을 받던 맬더스의 공황론이 재평가받기 시작한 것이다. 왜냐하면, 고전경제학파인 리카르도와 가장 격렬하게 투쟁해서 곡물법을 통과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헌데, 맬더스 지론 기초는 영주, 혹은 지주의 입장이었다. 해서, 존 러스킨 사상을 구체화하기 위해서는 중세 낭만주의에 기초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착하고, 현명한 영주가 다스리는 영지~! 판타지 영지물의 기본이 아닌가~! 해서, 착하고, 현명한 영주가 다스리는 영지처럼 나라도 그리 만들자~! 그것이 국가사회주의요, 확장하면, 제국주의였던 것이다.

   

해서, 기사가 기사도 정신을 발휘하여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을 만큼 영주가 착하고 현명해야 하며, 영주가 인정할 만큼 기사는 물론 영지민도 목숨을 바쳐서 영주를 보필하라.     

   

   

   

이걸 한마디로 하면? 주체사상~!

   

오케바리~?

   

해서, 나타난 현상이 젠트리를 주목하라였다.

   

젠틀맨 계층이라는 뜻으로, 향신(鄕紳)이라 번역되기도 한다. 본래는 '가문이 좋은 사람들'이라는 뜻이며, 넓은 의미로는 귀족을 포함한 좋은 가문의 사람들을 지칭해서 쓰이나, 보통은 신분적으로 귀족 아래이고, 요먼리의 윗계층으로서 가문의 문장(紋章) 사용이 허용된 사람들을 지칭한다. 또, 본래의 지주가 그 중심을 이루었으나, 도시인이나 그 밖의 사람으로서 토지를 매입해서 지주가 된 사람도 포함하였다. 중세 말기에서 근세에 걸쳐 귀족이나 요먼리의 세력이 쇠퇴하여 간 데 반해 이 계층만은 지방의 유력자로서 순탄하게 신장(伸張)되어 절대주의시대에 이르러서는 치안판사 및 그 밖의 사회적 지위를 맡아서 활약하여 사회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시대가 흐름에 따라 협의(狹義)의 계층적인 개념은 엷어지고 젠틀맨은 교양 있고 예의 바른 남성을 지칭하게 되었다.  [출처] 젠트리 [gentry ] | 네이버 백과사전

   

젠트리 현상을 대표하는 것이 셜록 홈즈 소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셜록 홈즈 총에는 VR이 새겨져 있는데, 빅토리아 여왕을 의미한다.

   

오늘날 말하는 영국 신사, 젠틀하다의 그 젠트리이다. '80일간의 세계일주'에 등장하는 영국 귀족들. 남성 전용 클럽에서 카드놀이하는 그들 말이다.

   

해서, 빅토리아 시대는 십자군 전쟁 때처럼 오히려 종교적 신심과 도덕, 예절, 품격이 강조되던 시기였다. 오늘날 근대 쪽발이가 근대 이전 쪽발이와 다른데, 이유는 근대 쪽발이가 국유본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국유본은 원숭이를 대상으로 외국에도 적용하는가를 최초로 실험을 실시했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헌데, 이 대목에서 국유본이 왜 존 러스킨에 감동했던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존 러스킨 주장의 맹점을 정확히 간파했기 때문이다. 8시간 일한 이들과 1시간 일한 이들을 동등하게 대우한다. 신의 이름으로! 해서, 1시간 일한 이들 임금 기준으로 8시간 일한 이들에게 임금을 지불하는 방식이다~! 야호~!!!

   

   

그것이 국가사회주의요, 현실사회주의였던 것이다.

즉, 주체사상이었던 것이다.

   

   

대표적인 영화는 영화, 마지막 황제 부의인 게다. 포도밭 주인인 국유본을 제외하고서는, 혹은 조금 양보해서 각 국가 재벌과 왕을 제외하고서는 모두 다 평등하게 가난한 세상.

   

이 대목은 여기까지 하고. 다음 기회에 또~!

   

3. 항해조례와 곡물법을 폐기한다는 것은 국유본이 단일한 제국주의 시대에서 다극화한 제국주의 시대를 열겠다는 의미이다. 이 의미를 오해한 나폴레옹 3세는 국유본이 자신을 후원하자 이제 국유본이 프랑스로 오는 줄 착각했다. 이는 비스마르크도 동일했다.

   

   

문제는 비스마르크였다.

   

국유본 귀족, 로스차일드와 같은 사도회 멤버였던 버트런트 러셀 세습백작이 근대 이후 말썽쟁이로 두 사람을 들었다. 하나는 비스마르크요, 다른 하나는 록펠러였다. 이는 버트런트 러셀이 국유본 입장을 웅변한 것이라 보지 않을 수 없다.

   

흥미롭지 않은가. 뭇솔리니도 아니고, 히틀러도 아니고, 맑스도 아니고, 레닌도 아니고, 모택동도 아니고, 스탈린도 아닌, 비스마르크와 록펠러라니~!

   

비스마르크는 세계 최초로 복지 정책을 실시했다.

   

바로 이것이 페이비언 협회가 태동한 배경 중 하나였던 것이다. 독일은 영국보다 후진 나라여야 했다. 영국은 언제나 앞서가는 나라여야 했다. 허나, 이를 배반한 사례가 있으니 비스마르크였다.

   

이에 대한 국유본 입장은 무엇인가.

   

국유본은 환영했던 것이다. 왜? 복지주의로 인한 높은 고정비 부담, 즉 인건비를 사실상 고정비에 포함시키는 정책은 필연적으로 독일의 파멸을 재촉할 것이기 때문이다.

   

해서, 페이비언 협회 내부의 투쟁은, 사실은 국유본 입장을 재정리하는 데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정리하면, 영국 로스차일드와 국유본 입장에서 빅토리아 시대의 페이비언 협회 주장에서 경청할만한 주장은, 노예일지라도 품격을 갖추고, 자신의 직분을 다 하자는 것이다. 좋은 일이다. 이 대목은 인드라도 긍정적이다. 인간 자신이 품격을 지니고 산다는 것, 그것 자체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육신을 내줄지라도 정신만은 똑바로 살다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페이비언 협회가 민중 지향적인 면에서도 긍정적이었다. 국내적으로는 페이비언 협회가 노동운동의 과격화를 약화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국외적으로는 에니 베산트처럼 페이비언 협회 운동가들이 인도와 같은 지역에서 민족해방투쟁에 앞장섰기에 오히려 국유본에게 유리한 정세를 제공했던 것이다. 국유본은 민족해방투쟁도 도구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익을 위해서라면, 국유본은 혁명은 물론 파업 투쟁도 서슴치 않았던 것이다.

   

가령 오늘날 한미 FTA 반대는 오바마 정권이 재집권하는 데에 유리할 뿐더러 미국 FTA 반대파들을 침묵하게 만드는 좋은 재료인 것이다. 한미 FTA는 미국과 한국 국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국유본을 위한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국유본이 친일 조중동을 동원하여 FTA 반대 분위기를 연일 띄우는 것이다. 한국 국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유본 이익을 위해서.

   

해서, 국유본이 선택적으로 지원하자 페이비언 협회 방향성은 국가 사회주의와 해외 민족해방투쟁 지원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이 방향은 오늘날 남한 민주노동당 내 하위그룹인 다함께(런던 트로츠키 그룹) 방향과 일치한다. 영국에서의 투쟁보다 주변부 투쟁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헌데, 그것은 언제나 국유본의 이해와 일치해야만 한다.

   

이런 작업 끝에 만든 것이 인드라는 시온의정서라고 본다. 시온의정서는 위서이다. 헌데, 시온의정서는 백 년 뒤인 지금에 보더라도 매우 뛰어난 저작이다. 하면, 이 시온의정서는 누가 만들었을까. 국유본이다. 하면, 구체적으로 이 작업을 한 이들은 누구일까. 현재로서는 페이비언 협회 인물들이 요주의 대상이다.

   

윌리엄 모리스는 시온의정서에서 말한 그대로의 세상을 역설한 바 있다. 국유본이 생산수단의 모든 것을 장악한다. 노동자는 직분대로 자기의 역할을 지정받아 일한다 등등. 이를 형상화한 작품이 올더스 헉스리의 '멋진 신세계'였다. 웰즈가 페이비언 협회이기도 했고.

   

국유본이 기획하고, 페이비언 협회가 실무를 담당한 작품이라 추정하는 위서, 시온의정서는 전세계 제국주의와 민족해방운동의 불길을 타오르게 했던 것이다.

   

해서, 이 방향을 훌륭히 제시한 선도적인 운동이 있었다. 그것이 미국 태머니파였다.

    

오늘은 여기까지~! 3부 이어집니다.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14 : 목숨을 바칠만한 제국주의가 목표였던 페이비언협회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1/11/19 07:18

http://blog.naver.com/miavenus/70124447659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14 : 목숨을 바칠만한 제국주의가 목표였던 페이비언협회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1/11/19

   

대개 음모론자들은 페이비언 협회의 애니 베산트(Annie Besant)의 뉴에이지 성향, 버나드 쇼와 윌리엄 모리스의 진보 좌파 성향, 영국 노동당과의 관련을 언급하면서 페이비언 협회를 비판한다. 허나, 여기에는 뭔가 빠져 있는 것이 있지 않나 싶은 것이다. 그것은 페이비언 협회가 영국의 이익, 구체적으로 후기 제국주의의 이익을 추구했다는 점이다.

   

예서, 자타가 공인하는 고대사 전문  김태식 기자의 기사를 보자.

   

 "김태식 기자 = '페이비언 사회주의'(Fabian Socialism)라는 말에 대체로 많은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무엇보다 '페이비언'은 도대체 뭐냐는 물음이 앞선다. 'Fabian'이라는 말은 로마 장군 파비우스(Fabius)에서 유래했다. 이는 그 자체가 일반명사이기도 해서 라틴어로 '지연자'(delayer)라는 의미를 가진다고 한다. 파비우스는 한니발이 이끄는 카르타고와의 전쟁에서 적당한 때가 올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리되, 일단 때가 되면 사정없이 내리치는 전법을 구사했다. 이에 주목해 버나드 쇼를 비롯한 잉글랜드 일부 지식인이 '페이비언 협회'(Fabian Society)를 창립한 것이 1884년. 지금도 왕성한 활동을 보이는 협회의 위상은 토니 블레어 영국 수상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회원 7천명을 거느리고 있다는 점에서 확인된다. 협회는 영국 노동당과는 별개의 단체이면서도 노동당의 단체회원이기도 하다. 따라서 영국사회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페이비언 협회'의 강령을 돌아보는 일이 필수불가결하다고 할 수 있다. 마침 여기에 이 협회가 표방한 사회주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1급 자료가 우리 앞에 섰다. 협회 창립 5년 뒤인 1889년 협회 주요 멤버 7명이 필진으로 참여해 발간한 'Fabian Essays in Socialism'이 그것이다. 최근 고세훈 고려대 공공행정학부 교수가 '페이비언 사회주의'(아카넷)라는 제목을 달아 '대우학술총서' 중 하나로 선보인 이 논설집 집필자는 쇼를 필두로 시드니 웨브, 윌리엄 클라크, 시드니 올리비에, 그레이엄 월러스, 애니 베즌트, 허버트 블랜드. 각각 1편씩 썼으나 쇼만 2편을 기고했다. 여기에 나타난 사회주의는 마르크시즘과는 판이하다. 예컨대 낭만적 무정부주의자로 분류되는 윌리엄 모리스가 "노동자에게 혁명 외엔 희망이 없다"고 하자, 쇼는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노동자에게는 진정 희망이 없다"고 맞받아 쳤다. 때려 부수고 뒤엎어버리는 파국주의(catastrophism)를 페이비언주의는 거부했다. 대신 이들은 철저한 합헌주의(constitutionalism)와 점진성의 불가피성(inevitablity)을 강조했다. 법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점진적으로, 그러나 기회가 되면 그것을 놓치지 않고 달성하겠다는 사회주의론을 주창한 것이다. 나아가 같은 맥락에서 쇼의 표현을 빌리면 "바리케이드에 등을 돌리고 영웅적인 패배를 맛보기보다 지루한 성공을 택하기로 결정"한 페이비언주의자들은 그 일환으로 침투(permeation) 전략을 채택했다. 독자적 정당을 창당하는 것보다 기존 정당이나 단체에 침투해 그들을 설득해 사회주의자로 전향시킴으로써 그들의 개혁정책을 실현시켜 나간다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이 때문에 페이비언주의는 노동계급에 대해서도 매우 회의적이다. 가뜩이나 독설로 이름 높은 쇼는 노동계급에 대해 "늘 티격태격하는 도둑떼와 다름 없이 방약무도하고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파벌과 당파로 분산돼 있다"고 비판했다. 따라서 페이비언주의는 거의 필연적으로 중산층과 국가 혹은 제국주의의 이익을 중시하고 옹호하는 성향을 보이게 된다. 이는 쇼가 페이비언들이 주창하는 주의를 '국가사회주의'라고 규정한 대목에서 잘 드러난다. 사회주의를 제창하면서도 '무정부주의, 폭력, 혼돈'을 혐오한 페이비언주의는 많은 문제점이 있음에도 역자인 고 교수에 의하면 영국 사회주의를 마르크스주의에서 구출했다고 평가한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POD&mid=sec&sid1=&oid=001&aid=0001276456

   

책을 안 읽어도 좋다. 인드라도 읽으려고 했는데, 시간이 없어서 못 읽었다. 기회가 오면 읽을 것이다. 이처럼 읽으면 좋지만 바쁜 생활인이라면 인월리만 읽자~!

   

페이비언 협회를 처음 들어본 이들이야 상관없지만, 그래도 한번이라도 이름을 들어본 이들은 지금까지의 설명과는 좀 다른 페이비언 협회에 대한 접근법에 의아해할 것이다. 그것이 인월리이다. 인월리가 기존 이론이나 기존 음모론대로 이야기하던가. 길없는 길을 가는 것이 인월리를 읽는 맛이겠다.

   

페이비언 협회가 왜 이 시기에 등장하였는가.

   

첫째, 목숨을 바칠만한 제국주의를 원했다.

   

   

   

세실 로즈이다.

   

세실 로즈는 누구인가. 토니 블레어와 빌 클린턴이 로즈 장학생인데, 그 로즈가 남아공의 학살자요 제국주의자였던 세실 로즈이다. 세실 로즈는 1853년에 태어나 평범하게 살았는데, 영국 공기가 산업화의 결과로 악취를 풍겨 폐가 썩어갔다. 해서, 요양할 생각으로 17세에 남아공에 갔는데, 그때 마침 남아공에서 다이아몬드 광산 붐이 일어나 삼촌에게 돈을 빌려 사업한 결과 대박이 난 것이다. 이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 세실 로즈는 돌연 영국으로 돌아와 옥스퍼드에서 두 학기를 듣는데, 그때 운명의 남자를 만났으니 그가 바로 존 러스킨이다. 로스차일드 투자를 받는 조건이 존 러스킨 과목 수강이었던 것일까. 그는 존 러스킨에게 큰 감명을 받는다. 하고, 본래의 목적이었던 로스차일드 투자를 받아서 남아공 다이아몬드 사업을 90% 이상 석권했던 것이다. 37세에 케이프 총독까지 올랐다. 자신의 이름을 따서 로디지아(짐바브웨)라는 나라까지 만들었다.

   

이때, 영국인에게 쫓겨 남아공 내륙으로 들어간 네덜란드계 이민자인 농사꾼 보어인들이 세운 여러 공화국 중 하나인 트랜스발 공화국에서 초대형 다이아몬드 광산을 발견한 것이다. 이에 가만 있을 세실 로즈인가. 역시 강도 도둑넘다웠다. 다이아몬드 광산을 강탈할 작정으로 존 러스킨 사상을 바탕으로 한 로스차일드 방식을 써먹었던 것이다.

   

무엇인가. 로스차일드가 수에즈 운하를 어떻게 해처먹었나. 자신이 장악한 영국 언론을 동원해서 연일 수에즈 운하 공사장 노동자들이 착취를 당하고 있다고 선전을 해댄 그 방식이다. 이런 식으로 수에즈 운하 공사를 질질 끌게 해서 이집트와 프랑스 사업자들을 빚더미에 오르게 한 뒤에 먹은 것이다.

   

하면, 왜 존 러스킨 사상인가. 다음 단락에서 상세하게 설명하겠지만, 간단 요약하면, 영국인은 미개인들을 문명화시키는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해서, 세실 로즈는 다이아몬드 광산 노동자들을 선동해서 파업을 일으킨 뒤, 혼란에 빠진 다이아몬드 광산을 강탈하려 했는데,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이것이 1차 보어 전쟁이다. 1차 보어전쟁은 1880년 12월 16일부터 1881년 3월 23일까지 영국이 일으킨 전쟁이다. 헌데, 놀랍게도 보어인이 승리했다. 그 결과, 영국은 트란스발 공화국과 오렌지 자유국 독립을 인정했던 것이다.

   

이에 로스차일드가 세실 로즈더러 한심하다고 질책을 하면서도 워낙 큰 건이니 후일 일으킨 것이 2차 보어전쟁인 것이다. 역사에는 로스차일드가 세실 로즈의 무리한 제국주의 정책을 비판하면서 보어전쟁을 만류했다고 나온다 ㅋㅋㅋ 그런 로스차일드와 오펜하이머 가문이 드비어스 다이아몬드 회사를 날름 삼킨 건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예서, 로스차일드가 중심인 국유본은 왜 영국군이 패하는가에 대한 분석을 시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왜 영국군은 패했는가.

   

영국군이 처음 패한 것이 아니다. 미국과의 독립 전쟁과 그 이후 미영 전쟁에서도 패했다. 또한, 1830년대에 있었던 아프간 전쟁에서도 패했다. 무엇보다 아편 전쟁에서도 영국군이 패한 것은 아니지만, 광저우 삼원리 투쟁이 영국군을 당혹시켰다. 영국군은 승승장구하며 광저우로 진격하였다. 헌데, 갑자기 비가 엄청 내리는 바람에 총을 못 쓰게 되었다. 사정을 눈치챈 광저우 삼원리 농민 수만 명이 원시적인 전쟁 도구인 낫과 망치를 들고서 포위하니 영국군은 졸지에 전멸할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이때, 영국군은 청나라에 긴급하게 제안을 하고, 이에 청은 수락한다. 해서, 영국군은 포위망을 뚫고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때, 청이 무장한 인민의 게릴라전이 두려워서 받아들였다고 하는데, 아니다. 그보다는 당시 청을 장악한 관료들이 문제였다. 전투 결과로 인해 자신들이 문책을 받을 것을 염려한 것이다.

   

가령 바쿠 유전지대에서 로스차일드 회사에서 알바를 하는 등 국유본의 스파이로 동료 혁명가들에게 끊임없이 의심을 받았던 스탈린은 러시아 혁명 직후 폴란드와의 전쟁에서 대패했는데, 이로 인해 스탈린이 트로츠키 비판을 받아 스탈린 최대 정치 위기에 빠졌었다. 이때, 국유본이 지원해서인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스탈린은 이후 카틴 숲의 학살을 자행하면서 보복을 한 것이다. 빅터 로스차일드는 책임있는 영국 정보부 자리에 있으면서 이 사건을 덮었다. 이때 얼마나 스탈린이 잔혹하게 폴란드인들을 죽였는지 그 사진들이 공산주의의 만행이라면서 지금도 인터넷 사진으로 돌아다닌다. 정말 잔인하게 죽였다. 스탈린의 예처럼 전투 실패는 정치 생명을 크게 위협받게 되는 사건이다. 해서, 청나라 관료는 영국군 화평 제안을 수락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영국군이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지만, 영국군이 당대 청나라 실정을 소상히 알고 있지 않다면 나올 수 없는 전술이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영국을 자극했던 사건이 일어났다.

   

   

"중국의 고든 장군이라고 불린 영국의 고든 장군은

19세기에 영국이 세계를 지배할 무렵 영국의 제국주의 팽창을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알마흐디는 서양 제국주의의 침탈에 맞서 싸운

수단의 민족 영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국군 포병 장교의 아들로 태어난 찰스 죠지 고든(Charles George Gordon,1833-1885)은

열아홉 살 때부터 공병대 장교로 군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러시아하고 영국이 싸운 크리미아 전쟁에서

무모하다는 말을 들을 정도의

용감성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고든은 이후로 영국 전역에 이름을 떨치게 되었습니다.

고든의 주활동 무대는 바로 중국이었어요.

이 무렵 중국은 아편 전쟁 이후로 영국의 침탈에 시달리면서

서서히 식민지로 전락하는 상태였고,

중국 남부에서는 홍수전이 태평천국을 세워서 중국의

지배세력과 외국의 침략 세력에 맞서고 있었죠.

이런 상황 속에서 1856년 애로우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중국 관리들이 중국인 해적을 체포하기 위해 애로우호(the Arrow)라는 배에 올라간 일이 생겼는데,

이 과정에서 중국 관리들이 배에 게양되어 있던

영국 국기 유니온 잭을 끌어내렸습니다.

영국 정부는 이 사건을 트집잡아서 배상금과 사과문을 요구했고,

더 나아가서 1860년에는 중국에 군대를 보내서 북경을 점령했어요.

때로는 제2차 아편전쟁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 애로우호 전쟁에

고든은 자원해서 참전했어요.

북경 점령에 참가한 고든은 중국 황제의 여름 궁전을

태워버리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그 사이에 중국 남쪽에서는 청조와 외세에 맞서 일어난

태평청국군이 상해에 접근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고든은 태평천국군으로부터 상해를 방어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고든은 Ever-Victory Army,

다시 말해서 상승군(常勝軍) 사령관이 됩니다.

상승군은 제국주의 세력과 청조 관리들이 만든

반란진압 부대인데, 고위장교는

외국인이고 병사들은 중국인이었습니다.

상승군의 병력은 3만 5천명 정도였지만,

최신식 무기로 무장한 데다가 증기선으로

이동해 다녀서 커다란 기동성을 발휘했습니다.

고든은 이 상승군을 이끌고 1년 반 동안

중국 대륙을 휘젓고 돌아다니면서

태평천국군을 용감하게 무찌르죠.

태평천국을 분쇄하는 데 상승군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어쨌든 청나라 황제는 태평천국 반란군을 처치해준

고든에게 후한 상을 내리고 벼슬을 내렸어요.

   

고든은 얼마 뒤에 영국에 귀환했는데,

곧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언론은 고든에게

"중국의 고든"(Chinese Gordon)이라는

별명을 붙이고 영웅시했습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기도 한 고든 장군은

이집트 지배층의 부탁으로 나일강 하류

지방으로 가서 노예 무역을 근절하는 데 몰두하기도 했습니다.

수단에서 몇 년간 총독 자리에 있었던 것도 이 무렵이었습니다.

   

이럴 즈음 수단에서는 알마흐디(Al-Mahdi)라는

인물이 태풍의 눈으로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알마흐디는 원래 무하마드 아흐마드(Muhammad Ahmad, 1840-1885)

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마흐디는 "신의 인도를 받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말이었는데,

원래는 현세의 타락을 끝장내고 올바른 세상을 만들어 주리라는

기대를 받는 종교지도자에게

붙여지던 칭호였습니다.

전통적인 봉건 지배층과 새로 진출한 영국인들에게

시달리고 있던 수단의 민초들이

마흐디가 와서 공정하고 평등한 세상을 만든다는

전설에 한 가닥 희망을 품는

상황이 충분히 상상 가능하죠.

   

이런 상황에서 자기가 "알마흐디"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여럿 나타나게 됩니다.

아랍어에서 알(Al)이 영어의 "the"에 해당하는 정관사거든요.

그러니까, '내가 Al-Mahdi다'고 하는 것은

'내가 바로 그 마흐디다'가 되는 것이었더랬습니다.

이런 마흐디 중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사람이

바로 1881년에 스스로를 마흐디로

칭한 무하마드 아흐마드였습니다.

아흐마드는 성전(聖戰)을 벌여서 외국 침략자들을

쫓아버리자고 호소했고, 이 아흐마드를 중심으로 뭉쳐봉기를

한 반란군은 꽤 큰 세력으로 자라나기

시작했습니다.

   

가난한 조선공의 아들로 태어난 아흐메디는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성년이 되어서는 이슬람 신학자가 되어서 가난한 농민과

어부들과 어울리면서

이슬람교를 전도하다가, 제국주의자들의 횡포를 보게 되었고

어떻게든 영국인들을

몰아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마흐디가 이끄는 반란군은 처음에는 300명을 조금 넘는

무리에 지나지 않았지만,

민초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세력이 눈덩이 불어나듯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영국군은 마흐디군을 진압하려고 만 명이 넘는

최정예 부대를 파견했지만, 이미 4만 명을 헤아리게 된

마흐디군은 게릴라전과 정면 대결을 적절히 구사했고,

오히려 1883년에는 힉스(Hicks)장군이 이끄는

영국군을 포위해서 섬멸하기까지 했습니다.

마흐디군이 승리한 배후에는 수단 사람들의

전폭적인 지지가 작용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기세가 오른 마흐디군은 1885년에 수단의 서울인 하르툼(Khartoum)

까지 포위했습니다.

이 때 하르툼에는 고든 장군이 있었죠.

고든은 마흐디를 회유하려고 했지만, 마흐디는

고든에게 수도승이 입는 두루마기 옷을 보냈다고 합니다.

나쁜 짓을 그만두고 수도승처럼 선행을 쌓으라는 뜻이었죠.

하지만 고든은 항복을 하지 않았고,

마흐디군은 드디어 하르툼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고든은 한 달 동안 근근히 버티면서 지원군을 기다렸지만,

1885년 1월에 결국

방어선이 뚫리고 마흐디군이 하르툼을 점령하게 됩니다.

고든은 도망가려고 했지만 마흐디군 병사에게 잡혀

창에 찔려 비참한 최후를 마치고 맙니다.

"중국의 고든"도 수단에서는 어쩔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승리를 거둔 마흐디는 독립국가를 세우려고

노력하던 도중에 병에 걸려

고든이 죽은 그 해에 숨을 거두고 맙니다.

그 후계자들이 마흐디의 뜻을 이어받아

제국주의 세력과 싸웠습니다만,

14년 뒤에 수단은 결국 다시 영국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고든과 마흐디의 대결은 영화로 만들어진 적도 있습니다.

챨튼 헤스턴(Chalton Heston)이 고든 장군 역을 맡았었죠.

지금 헤스턴은 미국 총기협회 회장으로 있고,

미국 우파의 당당한 일원으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서구 제국주의 팽창의 전성기였던

19세기 후반기 동시대를 살았던 고든과 알마흐디는

각각 제국주의 세력과 그에 맞선 식민지의 저항을 상징하는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http://kr.blog.yahoo.com/zetleeplus/280

   

영국의 적은, 국유본의 적은 장교와 병사 할 것없이 함께 목숨을 바쳐 투쟁했다. 반면, 국유본은 영국에서 돈놀이하고, 국유본의 하수인인 장교만 열심히 싸울 뿐이다.

   

이 시기 영국군 사정은 어떠한가.

   

육군이야 말할 필요없이 장교만 영국인이고, 병사들은 대개 현지에서 뽑은 자들이거나 용병이었다. 미국 독립 전쟁이나 이후 미영 전쟁에서도 동원한 보병 병사들은 대개 독일 용병들이었다. 동인도회사 병력 대부분은 인도인이었다. 아프리카에는 아프리카인이다. 앞선 전략 전술과 보급, 무기 체계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해군은 아니었나. 마찬가지였다. 당시 영국 해군 병사들 생활이란 끔찍했다. 오늘날 새우잡이 배를 생각하면 된다. 해서, 워낙 지원자가 없다 보니 영국 해군이 만든 계책이 무엇이었나. 첫째, 미국 상선을 공격해서 상선 선원을 항해 조례 위반죄라는 터무니없는 죄목으로 포로 취급한 뒤 노예로 부리는 것이었다. 둘째, 스코틀랜드 마을과 마을을 돌아다니며 길거리를 다니는 스코틀랜드 청년들을 무작정 끌어다가 배에 실어서 선원으로 만들었다. 셋째, 이것이 압권인데, 대영제국 수도 런던은 1850년대 인구 250만을 자랑하던 초대형 도시였다. 하여, 늘 과잉 인구가 문제였다. 이에 대한 해결책 중 하나가 부랑자들을 닥치는 대로 모아서 군에 보내는 것이다~!

   

문제는 명확하다.

   

왜 영국군은 패할 수밖에 없었던가.

   

용병이다.

하면, 왜 영국군은 용병에 의존해야 하는가.

   

영국 제국주의는 국유본만 잘 사는 이념이기 때문이기에.

   

대안은 없는가.

   

존 러스킨이다.

페이비언 협회이다.

   

파비언 막시무스와 당대 영국 사정은 정반대인데 왜 페이비언 막시무스 이름을 따서 페이비언 협회인가?  당대 영국군이 처한 상황은 한니발이 이끌던 카르타고군과 똑같았다. 로마를 침략한 한니발에 맞서 막시무스는 정면 대결을 피하고 한니발 보급선을 끊으면서 게릴라 전법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대목을 생생하게 보려면, 로마군 위주여서 비판을 받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쪽발귀족학교 학습원 출신인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읽으면 좋다. 쪽발 학습원 출신이기에 읽는 것이지, 다른 이유는 없다. 적을 알아야 하니까. 인류 특급 전범 개쪽발왕에 대한 단호한 척결 의지를 가슴에 품고, 적의 책을 빠짐없이 읽어야 한다.)

   

영국군이 아프간에서, 광저우 삼원리에서, 남아공 트랜스발에서, 수단 하르툼에서 패배한 것은, 상대가 모두 파비우스 막시무스처럼 게릴라 전법을 구사했기 때문이다.

   

해서, 페이비언 협회인 것이다.

   

왜? 국유본은 대중적 제국주의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것이 후기 제국주의이다. 국유본만 제국주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유럽 국가와 미국과 러시아와 일본도 제국주의를 할 뿐만 아니라 영국 시민도, 노동자도, 농민도, 빈민도 제국주의를 하자는 것이 페이비언 협회의 진정한 목표였던 것이다.

   

목숨을 바칠만한 제국주의.

   

국유본은 민족해방투쟁마저도 국유본을 위한 도구로 삼은 것이다.

   

로스차일드를 비롯한 국유본은

유태인 프로이트가 카르타고 한니발 장군을 존경하듯

카르타고인을 자신들의 진정한 조상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 오늘은 여기까지하고 2부는 다음에~!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13 : 걸그룹, 포르노는 국유본의 현대판 인신공양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1/11/18 03:12

http://blog.naver.com/miavenus/70124342928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13 : 걸그룹, 포르노는 국유본의 현대판 인신공양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1/11/18

   

   

페니키아인은 수메르인이다, 라는 인드라 주장을 정리하고 새로운 내용을 추가하여 다시 한 번 정리한다.

   

   

   

첫째, 페니키아인이 가나안인이라고 할 때는, 연변 조선족 등 중국 소수민족더러 중국인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중국 땅에 산다는 의미에서라면, 연변 조선족도 중국인이다. 허나, 연변 조선족이 한국인이듯 족속이 중국인이라는 의미는 아닌 것이다. 그처럼 페니키아인이 가나안인이라고 하는 것은 블레셋인도 가나안인, 유태인도 가나안인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가나안 땅에 산다는 의미에서이다. 허나, 본디 그곳에서 산 가나안인이라는 족속의 의미에서라면 페니키아인은 가나안인이 아닌 것이다.

   

구약에서는 가나안인을 함족의 후예인 리비아인이나 이집트인, 이디오피아인의 일부로 보고 있다. 또한, 구약에서 함의 자손, 가나안에 대한 저주가 있는데, 페니키아인은 블레셋인처럼 가나안인에 대한 저주에서 벗어난 족속이다. 해서, 구약 말대로라면, 페니키아인은 가나안인이 아니다. 블레셋인이 본디 가나안인이 아니라 에게해와 크레타 섬에서 온 유럽계 이주민인데 이주해와서 불과 150년만에 가나안 문화와 융합한 족속이다. 그처럼 페니키아인도 아브라함과 동시대, 혹은 그 이전에 가나안으로 이주하여 가나안 문화와 융합한 이주민이다. 최소한 함족이 아니다.

   

무엇보다 수메르인 이후 상인적 기질을 발휘한 중동 족속은 페니키아인이 거의 유일하다는 점이다. 다른 중동 족속은 양을 치거나 무력을 키웠을 뿐이다. 반면, 수메르인과 페니키아인은 군사력을 키워 제국으로의 국가 건설을 하기보다는 군사력을 최소화하여 상업활동에 필요한 도시국가를 건설하는 데에 초점을 두었다. 게다가 수메르인 기원에 대해서는 페르시아만에서 왔다는 설이 있는데, 수메르 문명은 이라크 남부 페르시아만에 근접해 있다.

   

"수메르 왕 계보에 의하면 왕권이 하늘에서 내려온 후부터 홍수가 휩쓸 때까지 다섯 도시에서 8명의 왕이 통치한다. 홍수 후에 또 다시 왕권이 하늘에서 내려온다.  왕권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후, 에리두(Eridu)에 왕권이 있었다. 에리두에 아룰림(Alulim) 왕은 3600×8년 다스렸다. 아랄갈(Alagal)이 3,600×10년 다스렸다. 두 왕이 3,600×10+3,600×8년을 다스렸다. 에리두가 무너지자 왕권은 바드티비라(Bad-Tibira)로 옮겨갔다. 바드티비라에 엔멘루안나(Enmenluanna)가 3,600×10+3,600×2년 다스렸다. 엔멘갈안나(Enmengalanna)가 3,600×8년 다스렸다. 양치기 두무지(Dumuzi)는 3,600×10년 다스렸다. 세 왕이 3,600×30년 다스렸다. 바드티비라가 무너지자 왕권은 라라크(Larak)로 옮겨갔다. 라라크에 엔시파지안나(Ensipazianna)가 3,600×8년 다스렸다. 한 왕이 3,600×8년 다스렸다. 라라크가 무너지자 왕권은 씨파르(Sippar)로 옮겨 갔다. 씨파르에 엔멘두르안(Enmenduranna)가 왕이었고 3,600×5+(600×2)×2+600년 다스렸다. 한 왕이 3,600×5+(600×2)×2+600년 다스렸다. 씨파르가 무너지자 왕권은 슈르파크(Shuruppak)로 옮겨갔다. 슈르파크에 우부르투투(Uburtutu)가 왕이었고 3,600×5+600년 다스렸다. 한 왕이 3,600×5+600년 다스렸다. 다섯 도시에 여덟 왕이 3,600×60+3,600×7년을 다스렸다. 홍수가 휩쓸고 간 후, 홍수가 휩쓸고 간 다음에 왕권이 하늘에서 내려온 후, 키쉬(Kish)에 왕권이 있었다."

http://www.astrovil.co.kr/bbs/zboard.php?id=in_situ&no=30

   

   

   

또한, 수메르인은 다신론이지만, 도시 별로 유일신적인 최고신을 모셨는데, 수메르 도시 중에는 여신을 모신 지역이 있다. 이중 이난나 신을 모신 도시가 있는데, 페니키아인이 유별나게 여신을 최고신이나 다름없이 숭상했다는 점에서 아브라함과는 다른 경로에서 온 수메르 이주민이라고 보는 것이다.

   

해서, 인드라 추정은 다음과 같다. 수메르인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혼혈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때, 직계는 수메르인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해안 도시를 중심으로 상업 활동을 하였을 것이나, 방계나 기존 원주민들은 시리아, 팔레스타인 내륙에서 수메르 문명을 받아들이되, 양치기 생활을 계속했을 것이다. 이들은 연변을 떠나 베이징, 상하이, 광동으로 이동한 뒤 백 년이 흘러 중국인으로 정체성이 변모한 연변 조선족처럼 가나안인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둘째, 페니키아어는 셈어파 가나안어에 속하는데, 히브리어, 모압어, 암몬어와 유사하다. 하면, 히브리어를 통해 페니키아어 생성을 추론할 수 있는 것이다. 히브리어는 아브라함이 기원전 21~20세기에 우르와 하란을 통해 가나안으로 이주하면서 생성하기 시작한 언어이다. 해서, 이 언어는 초기에 수메르어와 서쪽 셈어인 아카드어였다가 가나안 지역 언어와 융합했다. 이때, 원주민 가나안 언어는 무엇이었을까. 가나안 원주민은 함족이었던 이집트인이 쓰던 에굽어와 유사한 언어를 쓰지 않았을까 싶다. 예서, 히브리인이 이집트에서 400여년간 생활하였기에 보다 에굽어가 보다 많이 반영하였을 것이다.

   

페니키아어 역시 수메르어와 아카드어가 기존 가나안어(이집트 에굽어)와 융합해서 탄생한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주장을 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세상을 바꾼 문자, 알파벳」(존 맨 지음. 남경태 옮김)은 메소포타미아에서 발원, 이집트와 히브리를 거쳐 페니키아에 이르러 모양을 갖추고 그리스에서 폭발력을 드러낸 알파벳의 성립과정을 따라가며 그 도상에 존재했던 문명의 진화를 살피고 있다.  책에서 '알파벳'은 '소수의 문자기호로 수많은 발음을 표기할 수 있는 문자 체계'로 정의된다. 알파벳 문자의 속성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언어는 영어임에 틀림없지만, 이 정의에 따르면 상형문자, 한자, 한글도 알파벳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특히 한글은 '알파벳의 꿈'으로 간주될 만큼 대표적 알파벳으로 분류된다. 사가인 저자의 관심은 세계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알파벳의 연원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설형문자(수메르)일 것이라는 가설이다. 그들이 이 문자를 사용한 것은 '경제활동'의 기록 때문이었다. '길가메시 서사시'와 같이 성경과 고대서양신화에 영향을 준 '비경제활동'의 이야기의 기록도 존재하지만, 대개는 상거래 장부의 기록이었다. 장부'에 주목하는 것은 '리버스'의 원리 때문이다. 리버스는 'for you'를 '4 you'로 표기하는 것처럼 뜻은 다르나 발음은 같은 기호를 사용하는 표기방식. 이집트로 전해지면서 이는 자음집단과 발음상의 보어, 한정사 등을 나타내는 700개의 기호로 이뤄진 상형문자로 발전한다. 설형.상형문자의 알파벳 개념을 알파벳 글자로 발전시킨 공로는 시나이 반도와 지금의 이스라엘 일대를 떠돌던 아시아 유목민들에게 돌아간다. 이들이 남긴 비문이 990년 시나이 반도 와디 엘홀이라는 곳에서 발견됐다. 거기서 a,b,r,n,m,p,w,t와 셈문자 네개의 원형이 드러난다. 지금의 시리아와 레바논 등 항구도시들을 포괄하는 페니키아의 우가리트는 당대의 국제도시로 일곱개 문자와 네개 언어가 사용되고 있었다. 남에서 북으로 전파돼가던 알파벳의 개념이 이곳에서 받아들여졌고, 우가리트 사람들은 이를 바탕으로 자기만의 문자를 만들었다. 이는 무역.식민활동을 타고 지중해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0463432

   

욥이 이집트 생활을 하기 오래 전부터 페니키아인들이 이집트와 배를 타고 상거래를 했다는 기록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예서, 인드라 추정은 페니키아 알파벳이 수메르어에서 기원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나 이집트, 히브리를 통해서 페니키아로 간 것이 아니라 수메르, 이집트, 페니키아를 통해 히브리로 갔다고 보는 것이다. 히브리 -> 페니키아가 아니라 페니키아 -> 히브리이다.

   

이유는 존 맨처럼 언어의 쓰임새 때문이다. 발굴한 수메르어 점토판을 보면, 종교적 내용과 상거래 장부 두 가지로 분류한다. 이는 당시 문자를 쓰는 이들이 소수 사제와 상인들이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오늘날도 한국인만 문맹률이 0%에 가깝지, 여전히 전 세계에서 문맹인들이 많다. 굳이 문자를 쓰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배울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면, 대다수가 양치기 목동인 히브리인이 굳이 자신의 문자를 가질 필요가 있었는지 반문할 수 있다. 실제로 모압인이 쓴 모압어를 보면, 페니키아어 방언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예는 중앙아시아 북방민족들이 문자를 필요로 하지 않은 것과 유사한 것이다. 반면, 페니키아인은 상인이기 때문에 문자 발명이 절실했다. 당시 중동 언어는 종교어로는 수메르어, 외교어로는 아카드어를 사용했는데, 상인들이 기존 수메르 문자를 활용할 때, 종교적인 면을 과감하게 탈색하여 상업활동에 이용하기 좋게 기호를 간략히 표기하고자 했을 것이다. 마치 오늘날 '국제유태자본'을 줄여서 국유본으로 하는 것과 같다.

   

인드라는 페니키아어가 수메르 언어에게 영향을 받았다는 기존 주장에서 한발 더 나아가 페니키아인이 수메르 후손이기 때문에 문자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질문은 왜 아카드어에서 페니키아어가 영향을 받기보다, 수메르어에서 영향을 받았는가이다. 기존 언어 연구는 성경 연구 때문에 히브리어를 중심으로 하기에 아브라함 이주 궤적을 따라서 움직이다 보니 이 문제를 중시하지 않는데 인드라 생각은 다르다. 왜 페니키아어가 아카드어와 이집트어를 합성하지 않고, 보다 오랜 언어인 수메르어와 이집트어를 합성시켰는가이다.

   

종교적인 분석가들은, 수메르 신화가 당시 중동 신화의 본산이었기에 종교 해석의 차이라고 볼 것이다. 즉, 아카드어로 한 수메르 신화는 서부 셈족의 종교로 변신하였기에, 서부 셈족에서 독립하고자 아카드어가 아닌 수메르어 원본을 중심으로 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여기에 이집트에서 발생한 아톤 유일신 사상을 접목시키기 위해 우가리트 문자, 즉 페니키아 문자를 발명하였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것이다.

   

"수메르어는 역사상 가장 먼저 문자로 표기된 언어이다. BC 3,000년대에 메소포타미아 남부지방에서 사용된 이 언어는 설형문자로 표기되었다. 수메르어의 역사는 4시기로 나눌 수 있는데, 원시 수메르어, 고대 수메르어, 신수메르어, 후기 수메르어 시대이다. 원시 수메르어는 BC 3,100~2,500년경에 쓰였으며 대표적인 문헌은 교과서 및 상업이나 행정문서들이다. 그러나 원시 수메르어는 아직도 거의 해독되지 못한 상태이다. 고대 수메르어는 BC 2,500~2,300년에 지속되었고, 주로 수메르인의 도시인 라가시의 초기 통치자들이 남긴 기록이 대부분이다. 이 기록은 상업?법률?행정과 관련된 문서, 신에게 바친 비문, 편지, 주문 등을 포함하고 있다. 학자들은 이 형태의 수메르어를 더 잘 해석하고 있다. 신수메르어가 쓰이던 시기에 셈족인 아카드인들이 바빌로니아를 통치했으며, 그 결과 수메르어 대신 아카드어가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BC 2,000년경 사막에서 온 셈족이 수메르인의 3번째 왕조인 우르 왕조를 멸망시켜 셈족의 왕조인 이신 왕조, 라르사 왕조, 바빌론 왕조를 세우게 되자 신수메르어는 소멸되었다. 이 왕조들이 번성한 시기를 고대 바빌로니아 시대라고 부른다. BC 2,000년경부터 수메르인들은 정치적 주체성을 잃어버렸고, 수메르어는 구어로는 차츰 쓰이지 않게 되었으며 대신 아카드어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문어는 설형문자가 사라질 때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이 시기의 수메르어를 후기 수메르어라고 한다. 이 시대의 초기에 수메르 문어는 왕의 비문뿐만 아니라 법률 및 행정 문서에서도 널리 찾아볼 수 있는데, 이런 문헌들은 대개 수메르어와 바빌로니아어의 2가지 언어를 함께 사용하고 있다. 수메르어로 된 문헌은 매우 풍부하여, 신화, 서사시, 송가, 애가, 의례전서, 주문, 격언집 등과 처세훈을 모아 놓은 지혜 문집을 망라하고 있는데, 이 문헌들은 대부분 고대 바빌로니아 시대에 처음으로 기록되었다. 헬레니즘 시대에는 수메르어의 낱말들을 그리스 문자로 옮겨 쓴 것을 보여주는 설형문자 서판이 만들어졌다.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할 무렵, 수메르어에 대한 지식은 설형문자에 대한 지식과 함께 완전히 사라졌다. 이 언어가 다시 발견된 것은 19세기초에 설형문자로 씌어진 문헌이 해독된 뒤였다. 수메르어의 방언은 수메르어의 공식 방언인 '에메기르'와, 송가나 주문에 흔히 쓰인 '에메살'을 비롯한 몇몇 방언이 알려져 있다."

http://www.astrovil.co.kr/bbs/zboard.php?id=in_situ&no=30

   

인드라 생각은 다르다. 페니키아 족속은 뼈속까지 상인이었다. 국가나 종교 활동조차 상업 활동의 연장선에서 생각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이다. 해서, 인드라 추론은 이렇다. 페니키아 상인들이 상업적 이용을 위해 문자를 발명하면서 이 문자의 정당성을 위해, 즉 사제와 시민을 설득하기 위해 수메르 신화의 재해석을 한 것이 아닌가 이렇게 보는 것이다. 한글 창제 과정이 비록 상업적 목적이 아니었지만 세종도 한글을 만든 뒤 한글 정당성을 위해 여러 작업을 한 바 있다.

   

헌데, 이것이 왜 페니키아인이 수메르인의 후손인가이다. 수메르 신화에 나타난 신들을 보면, 굉장히 인간적이고, 이해타산적이다. 가령 구약에서는 대홍수 발생 원인이 인간의 도덕적 타락으로 보는 반면, 수메르 신화에서는 신들의 이해 다툼이 원인이다.

   

이런 기질은 수메르인과 페니키아인이 놀랍도록 닮았다. 그들은 침략을 당하는 순간에도 어떻게 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이익인가를 먼저 따졌을 정도라고 한다. 이것은 다른 가나안이나 히브리인과는 전혀 다른 민족 특성인 것이다. 이는 수메르인과 페니키아인에게만 고유한 것이다, 라고까지 할 정도이다.

   

하여간, 이 대목에서 말하는데, 한국이 역사가 오래되었다고 자랑질 좀 하지 마라. 국유본이 얼마나 질투심이 강한 족속들인지 아직도 모르느냐. 역사가 오랜 지역만 골라서 전쟁터로 삼는 것 봐라. 한국넘들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려서 이런 국유본 성격을 모르고, 국유본에게 놀아나서 세계 최고 문명이네, 어쩌네 캐병쉰질을 하는데, 한번에 훅갈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오늘날 선진국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나라 역사가 어떤가?

   

미국, 호주, 캐나다 삼백년? 영국과 북유럽, 서유럽 (스페인, 로마, 그리스 제외) 천 년? ㅋㅋㅋ

   

   

   

셋, 인신공양 문제이다. 전 세계에는 인신공양 이야기가 많다. 서양은 물론 동양에도 중국과 일본에 많다. 한국은 단군 홍익인간 덕분인지 덜 하지만, 없었던 것이 아니다. 목적은 제사보다는 대규모 토목 공사나 상업적 목적이었다. 주춧돌에 아이를 넣어 건물의 안정성을 보장받거나 배의 안전 귀환을 위해 심청이처럼 인당수에 퐁당시키는 것이다. 특히 쪽발이는 일제 시대 때에 건물을 짓다가 승강기를 일부로 고장내게 하는 방식으로 해서 한국인 여러 명을 죽여 사업 발전을 꾀했다. 또한, 처녀 피를 봐야 사업이 잘 된다고 동남아 십대 여자 아이를 사서 강간하는 예가 심심찮게 있었다는 것이다.

   

하면, 이러한 사례가 유럽, 아시아, 아메리카 동시다발적이니 인간의 보편적인 문제일까. 예서, 인드라는 최초의 문명, 수메르에 혐의를 지니는 것이다. 특히, 아메리카 고대 문명인 아즈텍과 마야 문명에 영향을 준 족속이 페니키아인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인드라는 최초 인신공양 예식이 수메르에서부터 있었으리라 본다.

   

이는 구약 아브라함에서 근거를 찾는데, 수메르인 아브라함더러 신이 자식을 인신공양하라 한다. 이때, 아브라함이 아들을 인신공양하려다가 동물을 공양한다. 이런 차이는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당시 인신공양은 신에 대한 최대한의 예의였다. 해서, 자신이 가장 아끼는 것을 바쳐야만 그만큼 신들의 축복을 받을 수 있었다. 허나, 이러한 인신공양은 다른 모든 제도와 마찬가지로 후대에 이르르면 본래 의미를 잃고 형식으로만 남아 노예로 대체하였을 것이다. 그러다가 아브라함처럼 인신공양에서 동물공양으로 바뀌었을 터인데. 문제는 이런 풍습을 오래도록 간직한 족속들이 있기 마련인데, 인드라 추정으로는 배타는 사람들이었을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도 보면, 배를 타는 사람들이 이상한 미신을 많이 지니고 있다. 그만큼 바다에서는 갑자기 들이닥치는 풍랑으로 목숨을 잃는 일이 부지기수였으니 신들의 분노를 달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성전 건축일 것이다. 헌데, 성전 건축과 배 만드는 기술을 타고난 기술자들이 있었으니 페니키아인들이다. 혹, 솔로몬 성전을 설계한 석공도 페니키아인, 수메르인이 아니었을까? 하고, 그들 기술이 전 세계로 퍼져나간 것이 아닐까?

   

제카리아 시친의 급진적인 해석이 아니더라도 수메르에서는 오래 전부터 대규모 토목 공사와 상업 활동이 있었다. 이러한 수메르인 활동에서 인신공양 풍습이 있었다고 본다. 이것이 페니키아로 이어져서 아메리카와 아랍, 유럽, 아시아로 퍼져나간 것이라 본다. 동양에서는 불교 영향력이 크지 않았나 싶다. 한국에서도 불교 문화의 전래와 함께 비로소 대형 건축물이 들어서지 않았는가. 하고, 그 이후, 등신불, 분신. 이런 것이 발생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는 그 이전 제도인 순장과는 다른 문화라고 보는 것이다. 이는 결국 수메르인의 인신공양을 변형시킨 것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인드라가 제석천이 되듯. 관세음보살도 남자였다. 헌데, 보살이란 본디 부처만 보살이었다. 헌데, 이것이 조로아스터 영향을 받은 대승불교 탓에 누구나 부처처럼 보살이 될 수 있다는 사상이 퍼져 너도 나도 보살이 된 것이다. 한국에서도 여자 무당한테 보살님, 이러잖은가^^! 힌두교에도 여신이 있으니, 불교에도 여신이 필요한 지 만든 것이 관세음보살이 아닌가 싶다.

   

하여간, 인드라 주장을 정리하면, 세계 인신공양 유래는 수메르로부터 시작했다. 수메르에서 시작해서 페니키아 - 카르타고로 이어지면서 유럽, 인도, 아시아, 아메리카로 퍼져나가 최근까지도 섬 종족들 중심으로 여전히 인신공양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중요한 건 국유본이 인신공양을 매우 중시한다는 것이다. 최근 해외 한국 여성들을 중심으로 연이어 살해 사건이 벌어지는 것은 국유본이 한국을 발전시키기 위해 희생양을 만드는 것으로 본다. 예전에 국유본이 일본을 매우 키울 때 일본 여성들을 상대로 감금 강간 살해 등 별 해괴스런 변태적인 사건들이 일본에서 많이 발생했었다. 하고, 포르노도 그렇다. 여러분이 포르노를 우습게 생각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 포르노 사업 역시 마약 사업과 함께 국유본이 중시하는 사업이다. 마약도 아무나 만들 수 없듯이 포르노도 아무나 만드는 것이 아니다. 포르노 만드는 국가는 규약이 있고, 마약처럼 국유본의 엄격한 통제를 받는다. 해서, 보면 선진국 위주로 포르노가 만들어진다. 포르노는 마약, 스포츠,뉴스 미디어처럼 국유본의 대중 통제조작 수단의 하나이다. 한국이 포르노를 통제하는 것은 국유본의 지시 때문이다.

   

포르노는 처녀를 희생양으로 만드는 고대 의식을 해석한 국유본의 신들을 향한 예식인 셈이다. 해서, 국유본이 한국을 정말로 발전시키고자 한다면, 국유본은 차츰 한국도 포르노 국가로 만들 것이다. 단, 요즘 추세를 보면, 포르노 대신 걸그룹을 내세우는 것 같다. 만일 그렇다면, 한국은 현 수준에서 포르노 문화가 유지할 것으로 보고, 대신 걸그룹이 더욱 확산할 것으로 본다. 기업 광고에 여자 모델이 나오는 것 역시 여자 모델로 판매 수익을 더 올릴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고 본다. 특히 모델로 처녀, 아이, 동물이 선호되는 까닭이 무엇일까. 이들은 모두 과거 공양의 제사물이었다.

   

여러분은 이게 무슨 괴상망칙한 주장이냐 하겠다. 허나, 잘 생각해보시라. 장사하는 분들이 아침에 첫 손님으로 여자를 받으면 재수없다고 한다. 이런 미신들, 어디서 왔겠나? 유교에서 왔다고 생각하나? 천만의 말씀이다. 유교 나라 조선도 임진왜란 전까지 처녀 그런 것 잘 안 따졌다. 허나, 임진왜란이 발생하고, 전 세계적으로 이 시기 소빙하기가 찾아와 매우 생활이 어려워지자, 전 세계가 다 그러하듯, 윤리적인 면이 강화하였을 뿐이다. 그런 때조차도 그것은 양반 사회나 그랬지, 평민 사회에서는 별 규제없었다. 문란했다. 다시 말해, 한국에서 처녀 운운하는 신화는 최근의 일이고, 구체적으로 국유본이 지시해서 쪽발이가 한국을 침략한 이후에 만들어진 신화일 뿐이다. 하고, 이런 신화는 쪽발이가 국유본에게 배운 것이다,라고 본다.

   

예서, 당장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팍스넷 선물옵션토론게시판을 가보라. 그곳은 외인과 기관, 부띠끄가 95% 이상 장악한 곳이다. 헌데, 사용자들을 보면, 안구 정화다, 뭐 이런 핑계로 끊임없이 여성 포르노 사진을 올린다. 하고, 프로필도 남성임에도 대부분 포르노 사진이거나 아니면 동물 사진을 선호한다. 왜일까? 잘 생각해야 한다. 사업 성공을 위한 것이다.

   

아울러 여기서 더 국유본이 활용한 것이 테러 사건을 이용한 정치이다. 가령 국유본에 대한 비판을 잠재우기 위해 의도적으로 동유럽 유태인을 고립시켜서 학살당하게 만든 것이 대표적인 예다. 이로 인해, 국유본을 대중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꺼려하게 만들었다. 그 아무리 국유본론이 이성적일 지라도 국제유태자본? 하면 파시즘부터 떠올리게 어릴 때부터 세뇌 교육을 단단히 받은 것이다. 교육도 모자라서 일 년마다 한 편씩 유태인 관련 영화가 나온다.

   

이는 각국 정치를 장악하는 유효한 수단이 되곤 한다. 가령, 북유럽에서 총기 테러 사건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노르웨이 총선에서 압승했다. 이런 일은 특히 한국에서 흔해 빠졌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전쟁으로 오랜 기간 여당이 집권했다. 광주항쟁으로 쪽발민주당이 집권했다. 박근혜 피습으로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이 승리했다. 쪽발 놈현 탄핵 사건으로 쪽발열우당이 압승했다. 쪽발 놈현 자살 사건으로 쪽발 민주당이 지방선거에서 이겼다. 이는 한국만 그런 것이 아니라 유럽, 미국에서 지금도 끊임없이 일어나는 일이다. 이런 모든 기획이 국유본이 배후에서 조작한 것이다.

   

세계 대부분의 정치는 국유본이 통제하고 있다. 북한도 예외가 아니다.

   

희생자는 여자일수록, 아이일수록, 귀여울수록 좋다.

   

최대한 동정심을 일으켜야 하기 때문이다.

   

정리를 하자.

   

인드라는 국유본이 수메르인 혈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국유본이 세계를 제패하면서 역사 공부를 많이 했는데, 그중 가장 관심을 기울인 족속이 페니키아/카르타고인이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 작업 중 하나가 페이비언 협회이다.

   

다음 백문백답에는 페이비언협회, 뒤를 이어 300인 위원회를 말할 것이다.

   

추신 : 표절녀 이효리를 선거판에 내보낸다든가, 뽕녀 황수정을 북한 간첩으로 드라마에 출연시키는 기획은 배후에 국유본이 있다고 본다.

   

국유본 채텀하우스는 여전히 세계 최고 권력인가, 아니면 변방으로 밀려났나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1/11/14 01:23

http://blog.naver.com/miavenus/70123967352

   

   

   

국유본 채텀하우스는 여전히 세계 최고 권력인가, 아니면 변방으로 밀려났나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12 : 세계의 싱크탱크 2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1/11/14 

   

9. 일본 ERINA는 뉴라이트파이다.

   

 "특히 북한과 러시아 관련 정보는 일본 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많이 축적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지방(니가타현)에 있으면서도 민감한 국제정세를 다루는 브레인집단이라는 것이 연구소 아라이 히로후미 홍보실장의 설명이다. ERINA는 16억 동북아시아 지역 사람들의 교류를 활발히 진행해 궁극적으로 동북아시아 경제권을 형성, 발전시키는 것을 최종 목표로 삼고 있다. ERINA는 1980년대 말 중국과 소련의 개혁·개방정책이 본격화되자 동북아 교류시대를 대비해 설립이 추진됐다. 니가타현이 동북아 지역의 경제교류가 활발해질 수밖에 없다고 판단,"동북아시아 장래를 연구하는 거점 싱크탱크가 필요하다."고 결론을 내 1993년 10월 출범했다. 특히 니가타현은 물론 니가타시와 아오모리·이와테·미야기·아키타·야마가타·후쿠시마·군마·나가노·도야마·이시가와현 등 지방자치단체와 니가타의 도쿄전력, 도호쿠전력, 도시바, 히다치,NEC, 호쿠에쓰은행 등 8개 민간기업들까지 공동 설립주체로 참여한 것이 이채롭다. .. ERINA가 개최하는 동북아시아 경제회의에는 매년 26명의 한국 경제·외교안보 전문가들이 참석한다. 지난 해의 경우 나웅배 전 경제부총리가 패널리스트로 참석했고, 2004년 회의 때는 남덕우 전 부총리가 참석했다. 초청 강연도 활발하다. 산자부 과장 시절인 1998년 동북아시아경제회의에 참석하거나 수차례 강연을 했던 주일 한국대사관 서석숭 상무관은 10월2일 '고이즈미 이후의 한·일 경제관계'를 주제로 강연을 한다. 정부공직자나 수출입은행 관계자가 ERINA에서 객원연구활동도 한다. ERINA의 한국 연구는 '한국경제시스템연구회'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나카지마 도모요시 연구주임이 이끌고 있는 연구회에는 국중호 요코하마시립대 교수, 박상준 와세다대 교수 등 20여명의 한국과 일본 교수들이 참여,2개월에 한 차례 정도 세미나를 개최한다. 연구결과는 책으로 출판돼 호평을 받기도 한다. 북한도 1996년 동북아시아경제회의에 과장급 인사 3명이, 98년 회의에는 김일성종합대학 교수 등 2명이 참석하는 등 인적교류가 활발했다. 97년에는 정부 과장급 2명이 1개월간 초청돼 일본 8개 지역서 투자촉진설명회에 참석하기도 했지만 99년부터 북·일 관계가 냉각되면서 중단됐다. .. 활발하다. 한국의 교통연구원, 에너지경제연구원 등 3개 연구소와 제휴하고 있다. 러시아의 극동경제연구소 등과도 제휴 관계다. 중국도 동북지방 3곳의 사회과학원과 제휴하고, 대학과도 제휴했다. 후단대학 등과도 교류한다. 한국 등과 국제인적교류도 적지 않다. 북한의 경우 제휴는 아니지만 국제무역촉진위원회 등과 교류가 활발하다."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60926014003

   

설립연도나 설립 방식, 연구 목적을 보면 뉴라이트로 보인다.  설립연도가 소련 붕괴 직후이다. 설립 방식이 지방 자치단체와 기업이 합작하여 만드는 것인데, 노비네파가 중앙집중형이라면 뉴라이트파나 골드만파는 분산형이라고 할 수 있다. 핵심 연구 목적 사업은 에너지 관련 사업이다. 구체적으로는 소련, 중앙아시아에서 에너지 자원을 끌어오는 일이다. 헌데, 에너지 문제는 국책 사업일 정도로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특히 이차대전 때는 에너지 수급이 전쟁을 좌지우지했다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 국책사업이라 할 수 있다.

   

니가타란 어떤 지역인가.

   

http://citrain64.blog.me/100102090237

   

예나 지금이나 군사 도시이다. 이차대전 때 연합군이 핵공격할 계획이 있던 군사 도시 중 하나였다. 예서, 군사 도시란 군사 시설 달랑 하나 있다고 군사 도시가 아니라 말 그대로 도시 자체가 요새화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군기지가 집중되어 있어야 한다.  니가타는 일본 육해공군 기지가 몰려 있다.

   

동해에서 비상사태가 벌어지면 일본은 니가타항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미국 항공모함을 정박할 수 있는 시설도 있다. 해서, 통일 한국이 중심인 한일연방공화국 수립을 위한 내전이 벌어질 경우, 통일 한국군의 기습 공격지로 자주 거론하는 도시가 바로 니가타항이다. 해서, 니가타에 있는 핵시설을 타격하여 기선 제압하는  작전을 통해 니가타항을 무력화시켜야 일본 본토 진입 작전이 용이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기업은 노비네 미쓰이 계열과 뉴라이트 미쓰비시 계열 기업이 참여했다. 예서, 지역 은행이 참여했는데, 호쿠에쓰은행이다.

   

   

   

   

호쿠에쓰 은행이 아닌 호쿠에쓰 제지이지만, 적대적 인수합병 사건이 있었을 때, 호쿠에쓰 제지가 의존한 기업이 뉴라이트 미쯔비시상사였었다. 또한, 에너지 사업과 같은 중후장대한 사업은 현대 - 미쯔비시 - 록펠러 - 뉴라이트에게 어울리는 사업이다.

   

마지막으로 대북 교류가 중단한 시점이 99년부터인데, 이유야 어떠하든, 이 시기는 노비네파 시기이다. 뉴라이트 시기에 활발하게 교류하다 노비네파 시기에 교류가 끊겼다면 이 단체가 뉴라이트 성향임을 시사한다 할 것이다.

   

10. 영국 채텀하우스 혹은 왕립국제문제연구소는 노비네파이다.

   

 "런던 시내 버킹엄궁에서 10여분 거리에 있는 세인트제임스 스퀘어 10번지.18세기초 지어진 빅토리아 양식의 건물 입구에 채텀 하우스(Chatham House)라고 적혀있다. 국제문제와 관련해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싱크탱크인 왕립국제문제연구소(RIIA·The Royal Institute of International Affairs)가 둥지를 틀고 있는 곳이다.RIIA가 대외적인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는 채텀하우스는 건물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RIIA는 1차 세계대전을 마무리짓기 위한 파리평화회의(1919년)의 영국측 대표단을 주축으로 해 1920년 영국국제문제연구소라는 이름으로 설립됐다. 연구소는 1926년 특별 헌장에 따라 '왕립(Royal)'의 칭호를 받으면서 정부의 영향권에서 벗어났다. 정부의 영향권을 벗어났다는 얘기는 국민의 세금을 가져다 쓰지 않으며, 따라서 정치적으로나 이념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다는 뜻이다... 공명정대하고 수준높은 연구 결과물이 나올 수 있는 기반은 내부 규율로 정해 놓은 '채텀하우스 룰(Rule)'이다.1927년 정해진 이 규율의 골자는 '채텀하우스에서 진행되는 모든 토론 내용은 정보로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으나 어떠한 경우에도 발언자, 참가자의 이름은 물론 소속을 밝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정보 공유와 투명성을 장려하기 위한 것으로 현재 전 세계에서 자유로운 토론을 보조하기 위한 수단이 되고 있다. 재정적 자립 역시 독립성 유지를 위해서 필수적인 조건이다. 채텀하우스는 철저한 회원제로 운영된다. 세계적인 기업체들과 국제적 금융기관, 각국 대사관, 비정부기구 등이 주축을 이루는 260여개의 협력 회원들과 1500명에 이르는 개인회원들이 내는 연회비가 운영비의 대부분을 구성한다... 아시아 프로그램에는 중국, 인도, 일본, 한국, 동남아시아와 관련한 토론그룹이 구성돼 있다. 한국 관련 토론그룹의 모임에서는 북핵과 관련한 한반도 긴장문제, 대미관계, 납치문제와 관련한 북·일관계 등이 주요 이슈로 다뤄지고 있다. 오는 19일 열리는 정기 토론모임에서는 조지 W 부시 대통령 행정부 1기때 미국국제개발협력처 부관장을 지낸 동아시아 지역 전문가 패트릭 크로닌 박사가 '한반도의 평화구제'에 대해 강연한다. 이어 25일에는 외교통상부 국제안보대사인 문정인 연세대교수가 한·미동맹을 주제로 발표할 예정이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1&aid=0000105995

   

채텀하우스, 혹은 왕립국제문제연구소는 세계 싱크탱크 중 톱 3 중 하나를 차지할 만큼 매우 중요한 싱크 탱크이다. 특히, 채텀하우스가 중요한 것은 국유본 권력이 여전히 로스차일드와 영국 여왕에게 있다는 존 콜먼 박사의 '300인 위원회' 주장 때문이다. 인드라는 이 문제에 대해, 국유본 백문백답 '300인 위원회'를 통해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인드라가 현재까지 추정한 결론으로는 300인 위원회란 과거 세계를 움직이던 최고위급 조직이었다. 허나, 빅터 로스차일드에서 데이비드 록펠러로 권력이 이동한 1973년부터 점차 영향력을 상실해가는 조직이다. 다시 말해, 현재 최고위급 조직이 아니다, 라는 것이 인드라 잠정적 추론이다. 허나, 그렇다고 이 조직이 오늘내일하는 조직이 아니다. 때로는 록펠러 가문이 자신의 필요에 의해 로스차일드 가문이나 300인 위원회를 후원할 수 있기 까지 하다.

빅터 로스차일드 시대까지만 하더라도 300인 위원회는 최고위급 조직이었다. 물론 긴급한 사안인 경우, 1891년 2월 5일 설립한 로스차일드 가문과 영국의 다른 은행가들이 모여 비밀 조직인 '원탁회의'를 중심으로 논의했다. 

   

"영국의 '원탁의 기사' 전설도 있지만, 1886년 아일랜드 자치문제로 자유당이 분열되자, 급진파 J. 체임벌린의 제창으로 이듬해 1월 개최한 원탁회의가 최초로 일컬어진다. 오늘날 '원탁'이란 용어는 회의의 협조주의적 정신을 표방한 의미로 사용되며, 실제로는 원형테이블이 아니라도 관계없다. 1930년대 3회에 걸쳐서 열린 인도 자치에 관한 영국-인도원탁회의, 1947년 제2차 세계대전파키스탄의 인도로부터 분리를 결정한 인도-파키스탄원탁회의, 1949년 인도네시아네덜란드로부터 독립이 논의된 네덜란드-인도네시아원탁회의 등이 유명하다. "

[출처] 원탁회의 [圓卓會議, round table conference ] | 네이버 백과사전

   

원탁회의를 중심으로 300인 위원회, 시온연합, 로즈위원회 등을 조직화하고, 채텀하우스와 미국 외교협회(CFR)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일차대전 마무리와 새로운 이권을 위해 1919년 5월 파리 로스차일드가 원탁회의 구성원인 영국과 미국 주요 은행가와 정치인 등을 소집한다. 이때 만든 것이 채텀하우스와 CFR이다. 하면, 이들이 조직을 만든 주요 목적은 무엇인가. 신세계 질서로의 이행을 위해 볼세비키 러시아 혁명을 성공시킨 뒤 바쿠 유전과 러시아 미래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주 이슈였다. 이 문제는 매우 중대하여 다른 백문백답에서 말할 것이다.

   

채텀하우스(왕립국제문제연구소)가 만들어진 이후 원탁회의나 300인 위원회는 주요 정책 이슈를 공개적인 조직인 채텀하우스를 통해 집행할 수 있었다.

   

허나, 채텀하우스가 아무래도 영국 중심이다 보니 신세계 질서와 영국 국익간의 이익 사이에서 갈등이 불가피했다. 가령 이차대전을 거치면서 비록 형식적이지만 외형적 권력을 미국과 소련에 넘기는 것은 영국 국익을 훼손하는 것이었다. 또한, 그만큼 300인 위원회 국유본 귀족들 지분을 축소시킬 수 있는 결정이었다.

   

하여, 이 갈등을 풀기 위해 만든 것이 빌더버그였던 셈이다. 300인 위원회를 유지하면서도 빌더버그를 만든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있는데, G5를 만드는 것과 같다. G5가 G20이 될 때까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여전히 역할을 하는 것과 같다. 물론 아는 이들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G5로 권력이 이동했음을 눈치챌 수 있지만, 99.99%는 모를 것이다.

   

아무튼, 이런저런한 계기를 거치면서 채텀하우스는 힘을 잃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데이비드 록펠러가 집권하면서 최고 권력 지위를 삼각위원회에 넘겨주었다. 참고로 삼각위원회도 300명으로 구성했었다. 지금은 어떤지 몰라도~!

   

11. 콩코드 재단은 뉴라이트파이다.

   

"콩코드는 창립 9년 만에 '엘리제궁과 가장 가까운 싱크탱크'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프랑스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실제 재단의 초기 멤버 가운데 6명이 지난 2002년 자크 시라크 대통령 재선에 공을 세운 뒤 입각했다. 도미니크 페르벤 법무부 장관, 르노 뒤트레유 공직·국가개혁부 장관, 에르베 게마르 농업·수산·전원부 장관 등이다. 여기에 시라크 대통령의 오랜 정치고문인 제롬 모노가 재단 창립부터 지금까지 든든한 후원자로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다. 집권당의 유력한 대통령 후보인 니콜라 사르코지 내무장관도 재단의 주요 회원이다. 콩코드 재단의 특징은 전통적으로 '앙가주망(사회참여)'을 기치로 한 사회주의 지식인의 목소리가 강한 프랑스 사회에서 우파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다는 점이다... 비교적 연혁이 오래된 국제관계연구소(IFRI)와 국립과학연구센터(CNRS) 등이 대표적이다.IFRI는 외교·안보분야,CNRS는 기초학문 분야와 통계 분야에서 유명하다. 영미식 싱크탱크가 등장한 것은 80년대 들어서다. 대표적인 단체가 1985년 중도 좌우파 연합을 기치로 내건 생시몽 재단과 범 우파 연합의 성격을 띠고 1997년 창설된 콩코드 재단이다. 이 재단들은 정·관·학계는 물론 기업·언론인 등이 함께 모여서 연구하고 활동하는 이른바 '거버넌스(분야간 협력체제) 담론'에 바탕한 싱크탱크다. 최근 한국에서도 강조되고 있는 '사회적 파트너십'에 따른 두 싱크탱크의 등장과 활동은 프랑스에 많은 논란을 불러왔다. 처음에는 이전처럼 학문적 수준의 연구에 그치는 게 아니라 다양한 주체의 현실 참여로 주목받았다. 총체적 시각으로 정책을 내놓고 이슈를 제기해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그러나 특정 정파나 계층의 이해관계를 대변한다는 비판이 거세게 일었다. 특히 생시몽 재단의 경우는 미국 자본이 뒤에서 후원해 '세계화'를 미화하는 데 일조한다는 이유로 좌파 진영의 질타를 받았다.'제3의 길'에 가까운 노선을 취했던 생시몽재단은 좌파 지식인들과 격렬한 논쟁을 벌이다 지난해 문을 닫았다. "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61031014003

   

생시몽 재단은 쪽발 돼중 재단, 쪽발 놈현 재단처럼 진보좌파 진영에서 쪽발이 좀비 만들기 프로젝트를 위한 알박기라는 비판을 받아 폐쇄한 것 같다.

   

http://www.cyworld.com/shuuuuing/3202491

   

그 이후 나타난 것이 국제정치연구소인 듯싶다.

   

   

   

"지금까지는 계획만 있고 성과가 없기 때문에 국민들의 반발이 거세다. 나는 선거에서 사르코지에 표를 던졌지만 그의 동시다발적 개혁을 프랑스 사회가 온전히 수용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한국은 동시다발적 개혁의 장단점이 무엇인가 또는 한국의 현실에 어떻게 적용 가능한가 등의 질문을 던져보고 따져보면서 개혁정책을 치밀한 일정아래 우선 순위를 매겨 단계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외신들이 사르코지의 친미정책을 빗대어 영국 토니 블레어 전 총리에 이은 부시의 두 번째 푸들이라고 표현했는데.

사르코지는 대미 관계를 실용적 차원에서 개선하려 할 뿐 절대 미국의 편이 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미국이 이란을 침공하거나 한다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부시는 내가 보건대 역사상 가장 나쁜 미국 대통령인 것 같다. 그는 이미 끝났다. 그러니 한국의 이명박 당선인도 부시대통령에게 너무 투자하지 말라고 충고하고 싶다."

http://www.interview365.com/news/540

   

예서 보듯, 몽브리알은 뉴라이트 친여당 신문인 르 피가로와 뉴라이트 친야당 신문인 르 몽드에 동시 기고하는 칼럼니스트인 우파 성향의 안철수, 혹은 평화 재단인 게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좀 더 보수우파에 힘을 실어주는 흐름이 필요한 듯싶다. 그것이 콩코드 재단인 것 같다. 한국으로 치면, 평화재단보다 매우 미세하게 우로 슬쩍 이동한 박세일 재단인 셈이다.

   

프랑스는 주요 정당이 모두 뉴라이트이다. 반면, 노비네파는 로스차일드 가문 영향 때문에 경제계에서는 여전히 위력적이나, 정치계에서는 거의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2. 일본 아시아경제연구소는 노비네파이다.

   

"1960년 당시 통산산업성 산하 특수법인으로 설립된 아시아경제연구소(일본 약칭:아지켄)는 150명의 연구원 가운데 여성이 50% 가까울 정도로 여성의 힘이 막강하다고 후지타 마사히사 소장이 소개했다.

   

아지켄은 관련국들과 인적교류도 활발하다. 연구소 개발스쿨에는 16개 개발도상국에서 1명씩이 초대돼 같은 수의 일본인 연구원과 함께 연수중이다. 개발스쿨 연수자는 150여명이다. 설립 이후 아지켄의 연수 프로그램을 통해 거쳐간 각국 연구자는 지난해까지 600명에 가까웠다.

   

아지켄은 특히 한국, 타이완, 중국, 타이,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국가 연구에 강점을 갖고 있다는 것이 미즈노 준코 신영역연구센터 장의 설명이다. 집중연구 분야는 세계정세의 변화에 따라 변했다.196070년대에는 인도와 중국,7080년대는 한국, 타이완 등 아시아 신흥공업국(NICS)연구가 왕성했다.8090년대 들어 다시 중국 연구가 활발하다. 아프리카 연구도 90년대 이후 활발하다.

   

미즈노 센터장은 "라틴아메리카 연구는 70년대는 매우 많았지만 80년대들어 이 지역에 대한 일본 전체의 관심이 약화되며 연구 인력도 함께 줄었다."고 소개했다.

   

아지켄은 몇 %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예산을 정부로부터 받는다. 이 예산은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 등 개발도상국 연구에 쓰여지기 때문에 정부개발원조(ODA) 원조액의 일부로 계상된다...

아시아경제연구소는 1965년 한·일 수교 이후 한국의 산업화시대의 주역들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지금까지 66명의 한국 저명인사가 이곳서 연구활동을 했다.

   

1986년부터는 2년 정도의 객원연구원으로 활동한 정부 관료들이 그 후 최고위 관료로 진출했다.

   

김광림 전 재경부 차관, 오종남 전 통계청장, 박재윤 전 재경부장관 등이 아지켄에서 연구했다.

   

1996년 한국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기 전까지는 이 연구소의 초청 프로그램에 따라 연수가 이뤄졌다. 하지만 이후에는 한국 정부와 기관 지원 등으로 바뀌었다.

   

특히 총리를 역임한 이현재 전 서울대 총장과의 인연이 각별하다고 미즈노 준코 연구소 신영역연구센터장이 소개했다. 그래서 인적교류 초기에는 정영일 등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 다수가 이 연구소에서 연구했다.

   

유명 학자들도 많이 거쳐갔다. 한국 민법의 대가 곽윤직 전 서울대 법대 교수가 1971년 반년간 연구했고, 어윤대 고려대 총장이 85년 2월부터 1년간,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가 79년말부터 5개월, 최장집 고려대 교수는 96년 8개월간 연구활동을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도 인연이 있다고 미즈노 센터장은 소개했다. 김 전 대통령이 국회의원이던 1960년대 당시 도쿄시내 이치가야에 있던 이 연구소를 방문한 뒤 "한국도 이 곳 같은 연구소가 있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1&aid=0000109725

   

   

엔블록권 확대를 위한 제 3세계 연구소인 셈이다. 한때, 남미에까지 관심을 기울였지만, 데이비드 록펠러 뉴라이트파가 쪽발이더러 이제 남미에게 손 떼라, 라는 지시를 한 이후 남미 연구를 축소한 것으로 보인다. 대신, 이 지역 남미 몫은 데이비드 록펠러에게 명을 받아 한국이 열심히 일해서 따내야 할 것이다. 그냥 얻어지는 것은 없다. KPOP으로 만사 오케이라고 사고한다는 건 게으름의 표지 다름 아니다.

   

스페인어 연구소, 중남미 연구소를 국책사업으로 즉각 설립해야 한다. 향후 수십년 흐르면 미국 주요 언어 중 하나가 히스패닉 덕분에 스페인어가 될 것이 확실하다. 스페인어는 영어, 중국어, 러시아어, 프랑스어와 함께 세계 5대 언어 중 하나가 아니겠는가. 쪽발이어보다 시급한 것이 스페인어 인재 확충이라는 생각이 인드라 생각이다. 어차피 쪽발이어는 쪽발돼중과 쪽발놈현이 쪽발어만 좆나 쉽게 내주는 수능 정책 때문이 아니더라도 야동, 로맨스 등 국유본 세뇌 과정 때문에 이미 국민 상당수가 쪽발어를 하고 있다. 더 지원하지 않아도 된다. 반면 스페인어는 정책적으로 수능시험만 봤다 하면 대다수가 만점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하여간, 이 연구소는 앞으로 별 볼 일이 없을 것으로 본다. 연구 방법론이 오늘날 신자유주의 흐름과 달리 과거 빅터 로스차일드가 지배하던 종속이론적 관점이기 때문이다.

   

13. 브루킹스 연구소는 골드만파이다.

   

"브루킹스의 역사는 1916년 개혁주의자들에 의해 세워진 정부연구소(Institute for Government Research)로부터 시작한다. 이 연구소의 탄생을 지원했던 세인트루이스 출신의 사업가 로버트 브루킹스는 1922년과 1924년에 경제연구소(Institute of Economics)와 브루킹스대학원을 추가로 설립한 뒤 1927년 세 기관을 모두 합쳐 브루킹스연구소로 재탄생시켰다... 브루킹스는 연구소 내에 교육 정책, 아동과 가정, 동북아정책연구, 사회 및 경제 변동, 미국과 유럽, 중동정책을 연구하는 별도의 연구센터를 운영 중이다. 이와 함께 보수적 성향의 미국기업연구소(AEI)와 공동으로 각종 행정규제를 완화하는 방안을 정부에 제시하기 위한 연구도 수행 중이며, 어번연구소와는 세금 정책을 함께 연구하고 있다. 지난해 미국의 국제경제정책연구소가 발간한 싱크탱크의 영향력 분석 자료에 따르면 지난 1997년부터 지난해까지 연구 결과가 가장 많이 언론에 인용된 연구소는 브루킹스였다.2000년과 2002년에 이뤄졌던 비슷한 조사에서도 브루킹스는 1위를 차지했었다. 브루킹스의 국내외적인 영향력은 다양한 부류의 거액 기부자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지난해 50만달러(약 5억원) 이상 기부자 가운데는 뉴욕의 카네기 사와 영국의 국제개발부, 카타르 대사관, 미 상공회의소가 포함돼 있고 25만달러 이상 기부자에는 보스턴 칼리지와 포드 재단, 도쿄 클럽 재단, 타이베이 경제문화대표부가 들어 있다. .. 브루킹스의 대표적인 한국 전문가는 리처드 부시 선임연구원이다. 부시 연구원은 중국과 타이완 문제 전문가였으나 한반도까지 연구의 폭을 넓혔다. 부시 연구원은 스스로를 대북 강경론자라고 말하지만 보수적인 싱크탱크의 한반도 전문가들에 비해 중도적이고 온건한 정책 제안들을 제시해온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컬럼비아 대학에서 정치학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은 부시 연구원은 미 국가정보위원회에서 아시아 정책을 분석·조정하는 업무를 담당했으며, 하원 국제관계위원회에서도 일한 경험이 있다. 부시 연구원은 브루킹스 동북아정책연구센터의 소장을 맡고 있다. 이 센터에는 한국과 일본, 중국, 타이완, 홍콩 등에서 선발된 정부 관리나 연구원, 언론인 등이 관심 분야를 연구하고 있다. 현재 한국에서는 박형중 통일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이 방문연구원으로 파견돼 동북아 정세 속에서의 한국 외교 정책 방향을 연구 중이다. 박 연구위원 직전에 파견됐던 임원혁 한국개발원(KDI) 연구원은 워싱턴에서 열린 각종 한반도 토론회에서 '외롭게' 대북 포용정책의 불가피성을 설파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브루킹스의 마이클 오핸런 선임연구원도 안보분야에서 손꼽히는 한반도 전문가다. 프린스턴에서 학사·석사·박사 학위를 모두 받은 오핸런 연구원은 군사전략과 군사기술, 군축 분야 등에 일가견을 갖고 있어 이라크전 등 주요한 안보 현안이 터질 때마다 미국 미디어에 단골로 등장하는 인물이다. 오핸런 연구원은 민주당이 정권을 잡을 경우 행정부로 옮겨 대외정책을 다룰 것으로 예상된다. 오핸런 연구원의 현재 연구 과제 가운데는 이라크와 북한 정책이 포함돼 있기 때문에 민주당이 다수를 차지한 의회에서 그의 정책 보고서가 영향력을 발휘할 가능성이 있다. 잭 프리처드 전 대북협상 특사는 최근까지 브루킹스에서 한반도 현안을 다루다 한국경제연구소(KEI)의 소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브루킹스는 지난 5월에는 세종연구소와 함께 '서울-워싱턴 포럼'을 출범시켰다. 두 연구소의 한반도 전문가들이 매년 서울과 워싱턴을 오가며 한반도 관련 현안들에 대해 토론하는 모임이다. "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61114014004

   

브루킹스는 그 시초는 빅터 로스차일드, 노비네파로부터 시작하지만, 근래 흐름은 뉴라이트 중에서도 좌파적인, 혹은 자유주의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골드만파 포지션을 구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http://cn.moneta.co.kr/Service/paxnet/ShellView.asp?ArticleID=2008111019415104301

   

오바마가 집권하자 나온 전망만 봐도 알 수 있다. 헤리티지 재단은 지고, 브루킹스는 뜬다는 자극적인 기사 제목이 아니더라도 브루킹스는 오바마 집권 기간 동안 많은 일을 하고 있다.

   

특히, 인드라 주목을 끌었던 것이 오바마 당선 직후 브루킹스연구소가 뉴욕대와 스탠퍼드대와 공동으로 낸 보고서, 변화된 세계를 위한 새 시대의 행동 계획이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G8에서 G16으로 확대해야 한다면서 G16에 한국이 빠진 것이었다. G16 구상은 기존 G8에 중국, 브라질, 인도, 남아프리카공화국, 멕시코, 인도네시아, 터키, 이집트 OR 나이지리아를 포함한 지역강대국(영토나 인구, 자원이 많은 나라) 중심이었다.

   

사실 오바마 집권 기간 동안 이렇게 갈 뻔했다. 쪽발 돼중과 쪽발 놈현 무리들은 매국노답게 환호했지만, 인드라는 냉철하게 대처했다.

   

국유본에게 요구했던 것이다. 대한민국이 G16에 포함되지 않아도 좋다. 단, 금융안정화포럼에만 포함을 시켜 달라. 이렇게 요구했다.

   

이에 국유본 답변은, 인드라 요구를 백 프로 들어주었을까, 거부했을까. 둘 다 아니었다. 한편으로 대한민국이 G20 형태로 포함했을 뿐만 아니라 차기 의장국이 되었다. 이것은 인드라가 요구한 사항이 아니다. 다른 한편, 국유본은 대한민국을 금융안정화포럼에 포함시켰는데, 참여 국가 수를 왕창 늘였다는 것이다. 인드라 요구는 참여 국가 수를 그대로 둔 채, 대한민국을 포함시켜달라는 것인데.

   

인드라는 국유본의 제안을 수용했다.

   

아무튼 오늘날 전 세계에서 인월리를 가장 열심히 읽는 싱크 탱크는 브루킹스 연구소일 것이다.

   

14. 중국 국제문제연구소는 노비네파이다.

   

"정부 설립후 처음으로 설립된 '국가급' 국제문제 연구소로 24일로 설립 50주년을 맞는다.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 등 국가 지도자들이 설립을 제안했다... "중국 외교정책이 싱크탱크에 의해 좌우되지는 않는다."

   

   

마전강 소장의 대답은 다소 의외였다. 중국 외교 정책 수립과정에서 국제문제연구소의 영향력을 물은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그동안 중국의 다른 종합적 성격의 싱크탱크들이 국가 주요 지도자들에게 몇편의 보고서를 내는지를 소개하며 국가 정책에 대한 직접적인 영향력을 설명했던 것과는 다른 반응이다. 많은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외교의 속성을 표현한 발언이면서도, 외교관 출신으로서의 조심성과 겸손함에서 비롯된 듯 보였다. 마 소장은 전 영국대사였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1&aid=0000111398

   

마 소장도 전 영국대사이고, 2011년 빌더버그 회의에 파견한 인물이 전직 주영대사였다. 헌데, 마 소장 이야기는 싱크탱크답지 않은 자학적인 말을 한다. 영향력이 많이 줄었다는 이야기인 게다.

   

허나, 여기가 끝일까. 그렇지 않다. 주은래가 만든 싱크 탱크이다. 해서, 향후 중국이 노비네파, 뉴라이트파, 골드만파로 바뀔 때, 가장 먼저 골드만파로 바뀔 공산이 큰 것이 국제문제연구소이다.

   

15. 유럽정책센터는 허접해서 언급할 가치가 없다.

   

"먼저 유럽의 유력 인사들로 구성된 이사회와 자문위원회의 '휴먼 네트워크'가 강점이다.EU집행위원회 사무총장을 지낸 하이웰 세리 존스 이사회 의장을 비롯해 칼 빌트 전 스웨덴 총리, 피터 프라제 국립벨기에은행 이사, 마리아 조앙오 로드리게스 리스본대 교수 등 정치·기업·학계 등 다양한 분야의 인사들이 참여해 EPC의 주제를 풍부하게 하고 힘을 더해준다.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1&aid=0000112295

   

이런 이유로 국유본이 유럽 위기를 만든 것이다. 허접한 걸 제대로 만들어보라고 말이다. 굳이 말하면, 변방 노비네파인데, 없는 것이 낫다. 현재로서는 창조적 파괴가 필요한 시점이다.

   

16. 미국 전략문제연구소는 뉴라이트이다.

   

"략국제문제연구소(CSIS)는 '중립적인'연구소다. 공화당과 민주당, 보수와 진보가 편을 갈라 싸우는 워싱턴에서 이념적,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싱크탱크는 매우 드물다. 국제경제정책연구소가 지난해 발간한 싱크탱크 분석 자료에 따르면 미국의 17개 주요 싱크탱크 가운데 중립적이고 비당파적인 연구소는 CSIS와 국제경제연구소(IIE)뿐인 것으로 평가됐다. SIS는 냉전이 절정기로 치닫던 1962년 데이비드 애브셔와 알레이 버크에 의해 설립됐다. 한국전 참전용사인 애브셔는 나토 대사를 지냈고,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 시절 외교담당 특별보좌관을 지냈다. 버크는 6년간 해군작전사령관을 지낸 경력의 소유자로 당파성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 현재 CSIS 이사회 의장은 샘 넌 전 상원 군사위원장이 맡고 있다. 이사회에는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전 국가안보보좌관, 월리엄 코언 전 국방장관, 리처드 아미티지 전 국무부 부장관, 조지프 나이 국방부 차관보 등 국제안보 분야에서 이름을 날린 쟁쟁한 인물이 포진해 있다.CSIS의 현 소장은 빌 클린턴 전 대통령 시절 국방부 부장관을 지낸 존 햄리 박사다. CSIS는 지난 40여년 동안 성장하면서 에너지와 바이오테크놀로지, 노령화, 에이즈, 국제경제 등 다양한 분야로 연구의 범위를 확대해 왔다. 그러나 여전히 중점을 두는 연구 분야는 국방 및 안보 정책, 국제 안보, 지역 안보 등이다.CSIS는 지역 연구가 상대적으로 강한 편이다. 아메리카, 아프리카, 유럽, 중동, 남아시아를 연구하는 프로그램이 있고 일본, 러시아, 터키는 별도 프로그램에서 다룬다. 마이클 그린 전 백악관 아시아담당 선임보좌관이 맡고 있는 일본 연구 프로그램 '재팬 체어'에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아들이 소속돼 있다......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에는 한반도 전문가들이 많다. 다른 싱크탱크들과 마찬가지로 한반도만을 전담하는 연구원은 없고 중국과 일본 등 다른 국가나 아시아, 국제안보 전문가들이 한반도 관련 연구를 병행한다.

   

북한이 핵 실험을 실시한 직후인 지난 10월11일 CSIS가 발빠르게 주최한 북한 관련 언론 브리핑에는 마이클 그린 선임고문, 커트 캠벨 부소장, 데렉 미첼 선임연구원, 존 울프스탈 선임연구원 등이 연구소를 대표하는 한반도 전문가로 나섰다.

   

그린 선임고문은 지난해 말까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에서 아시아 담당 선임보좌관으로서 한국 문제를 다뤘다. 한반도 관련 정책을 직접 다뤘기 때문에 미 언론이 북한 핵 문제 등과 관련해 그린 고문의 코멘트를 자주 인용하고 있다. 또 최근 워싱턴에서 열리는 한반도 관련 세미나에 주제발표자나 토론자로 자주 참석한다. 그린 고문은 도쿄대에서 수학했고, 일본에서 기자와 컨설턴트로 활동했으며, 일본 의회에서도 5년 동안 전문위원으로 일한 경험이 있는 일본통이다. 그린 고문은 박사학위를 받은 존스홉킨스 대학에서 국제학을 강의한 바 있으며, 현재도 조지타운대 국제관계학과 교수를 겸임하고 있다.

   

중국 전문가로 분류되는 캠벨 부소장도 한국 문제에 대해 자주 언급한다. 국방부 아시아태평양 담당 부차관보와 백악관 국가안보위원회 국장을 지낸 캠벨 부소장은 국제테러, 비확산, 미사일 방어 등을 다루면서 북한 문제에도 관심을 보였다. 그는 지난 2월 한·미경제연구소가 주최한 세미나에서 한·미 관계를 "파문 때문에 공개적인 이혼을 원치않는 왕과 왕비"라고 비유해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다.

   

미첼 선임연구원도 난징 대학에서 중국어를 공부한 중국통이다. 미첼 연구원은 CSIS의 국제안보프로그램에서 진행되는 모든 아시아 관련 연구를 책임지고 있다. 연구 가운데는 '미 의회의 한국에 대한 태도'라는 주제가 포함돼 있다. 미첼 연구원은 지난 2004년 '전략과 감정:미국과 한·미동맹에 대한 한국의 시각'이라는 보고서를 낸 바 있다. 연세대와 공동으로 발간한 이 보고서는 한국 사회의 변화가 한·미동맹에 미친 영향을 집중 분석했다. 미첼 연구원은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 국방부 아시아태평양 담당 특별 보좌관을 지냈고,1998년에는 국방부 동아시아정책보고서의 주요 저자로 참가했다.

   

   

울프스탈 연구원은 대량살상무기 비확산 전문가이다. 미국의 핵 비확산정책과 옛 소련의 핵 정책 등을 토대로 이란과 북한의 핵 문제를 연구한다. 울프스탈 연구원은 에너지부에서 5년간 근무했으며, 그 당시 북한 영변의 핵 시설을 시찰한 경험이 있다.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의 전임자인 제임스 켈리 차관보도 CSIS의 선임고문을 맡고 있으나 대외적으로 활발한 활동은 눈에 띄지 않고 있다.

   

클린턴 대통령 당시 국무부 비확산 담당 차관보였던 로버트 아인혼 선임고문도 한국과 북한 문제 모두 관심을 갖고 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1&aid=0000114017

   

그린 연구원은 뉴라이트 중앙일보에 칼럼을 내고 있다. 주의깊은 사람이라면 빠짐없이 읽어야 할 칼럼이다.

   

헨리 키신저와 브레진스키. 이 두 명만 언급해도 이 연구소의 위상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이 연구소 위상을 단번에 알려주는 사건이 있었다.

   

   

이런 일은 처음이다. 그간 한국 대통령과 북한 주석들이 국유본에게 마름 격으로 봉사해왔지만, 이렇듯 비록 형식적이지만, 동등한 자리에서 파트너쉽을 보여주었던 예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명박이 처음이다. 어떤 이들은 그만큼 이명박이 그들에게 굴종한 것이 아니냐고 하겠지만, 인드라 시각은 다르다. 이명박보다 더 노예로 행세했던 대통령들은 많았다. 가령 쪽발 놈현이 대표적이다. 겉으로는 반미면 어떠냐 했지만, 속으로는 가장 썩은 자가 뉴라이트 쪽발 놈현이었다. 헌데, 근래 뉴라이트 라이스조차 전기에서 이명박과 쪽발 돼중을 높이 평가하는 반면, 쪽발 놈현에 대해서는 이상한 사람 취급하지 않았던가. 쪽발 놈현! 그는 이장감도 못 되는 아해였을 뿐이다. 나라에 폐만 끼치고 갔다.

   

인드라는 이명박 이런 모습을 긍정적으로 본다. 차기 대통령은 더더욱 더 이런 모습을 더 보여주어야 한다고 본다. 국내에서는 당당한 척하고, 국외에 가면 병쉰 삽질 그 자체인 뉴라이트 쪽발 놈현과 같은 대통령은 다시 나오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아무튼 현재 세계 3대 심크탱크를 들라면, 채텀하우스, 미국 국제전략문제연구소, 브루킹스연구소라고 보는 것이 인드라 입장이다.

   

17 일본 에너지경제연구소는 노비네파이다.

   

"도쿄만에서 가까운 스미다강 하구 강변에 자리잡은 '일본에너지경제연구소(IEE)'는 일본 에너지산업의 정책제언이나 국제협력을 책임진 '아시아 최고 에너지분야 싱크탱크'라는 평가를 받는다.

1966년 도쿄시내 미나토구에 설립된 뒤 도쿄도 주오구 가치도키의 현 사무실로는 6년전 옮겨 왔다. 재단법인으로, 기업이나 단체들이 낸 회비와 연구용역 수입으로 운영되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 미국 베이커연구소 및 MIT에너지환경연구소, 중국 에너지연구소 및 칭화대학, 한국에너지경제연구원, 영국 왕립국제문제연구소 및 옥스퍼드에너지연구소, 던디대학에너지법정책센터 등과 교류한다. 이밖에 석유수출국기구(OPEC)사무국, 인도의 타타에너지연구소, 베트남 에너지연구소, 사우디아라비아 석유광물자원성, 이란 국제에너지연구소, 러시아 과학아카데미에너지시스템연구소 및 러시아 아카데미연료에너지콤플렉스국제연구소 등 20여개 연구소와 교류 중이다. 특히 IEA와는 4년전부터 매년 공동세미나를 개최하고 있다. 이렇게 형성된 국제네트워크를 통해 일본의 종합적인 에너지 전략을 마련한다.... 일본에너지경제연구소는 한국과 인연이 깊다. 현재의 'SK'가 유공 시절이던 1987년 일본의 석유산업과 에너지산업을 연구하겠다며 법인회원으로 가입한 뒤 20년간 2년에 1명씩,10명의 연구원을 차례로 파견했다. 도이치 전무이사는 "SK에서 온 연구원들은 일본어로 논문을 쓰거나 연구과제를 공동으로 수행하는 등 에너지 문제 전문가로서의 자질을 가다듬고 있다."고 소개했다. 현재는 유호정씨가 산업연구단 석유부문에서 연구원으로 활약하고 있다. 이 밖에도 한국가스공사나 한국석유품질관리원 등이 연구원을 파견, 교류를 하고 있다. 한국석유품질관리원은 석유제품의 규격이나 환경규제에 대한 노하우를 교환하고, 바이오에탄올 등 바이오연료에 대한 공동연구도 하고 있다. 한국전력공사도 연구원 2명을 34차례 파견한 적이 있었다. 이에 대해 도이치 전무는 "한국의 석유, 전기, 가스, 연구소 등 에너지 관련 기관이나 회사들과 매우 관계가 깊다."고 한국과의 인연을 강조했다. 이 연구소에 채용된 한국인도 있다. 지난 4월 교토대에서 환경경제 박사학위를 취득한 한국인이 연구원으로 채용됐다. 도쿄대에서 환경문제로 박사학위를 딴 한국인 1명이 연구원으로 수년전 채용됐다가 지금은 서울 소재 D대학 교수로 자리를 옮기기도 했다. 한국 에너지경제연구원과도 교류가 활발하다. 십수년전부터 상층부는 물론 실무진까지 포함한 상호 공동연구를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는 것이 이 연구소측의 소개다. 유호정 연구원에 따르면 이 곳에 연구원으로 파견되면 초기에는 전담 일본 연구원이 배치돼, 매일매일 에너지관련 일본어 공부를 시키고 복습까지 확인해준다. 첨단에너지 연구를 위한, 세미나·연구회 참석 등도 빈번하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1&aid=0000114844

   

SK도 노비네파. 일본 에너지경제연구소도 노비네파. 교류는 당연한 일이다. 일본 에너지경제연구소가 ERINA와 달리 도쿄 인근에 있지 않은가. 이것만 봐도 노비네파인 게다. 게다가 협력 단체 명단만 봐도 노비네파이다.

   

노비네파라고 해서 전망이 불투명한 것은 아니다. BP, 로열더치쉘 등이 모두 노비네파이다. 다른 노비네파 전망이 어둡다지만, 에너지 문제와 관련이 있는 이 연구소는 노비네파라고 해도 생명력이 길 것이라는 것이 인드라 진단이다.

   

18. 일본 니혼게이자이연구센터는 노비네파에서 뉴라이트파로 변신 노력중이다.

   

"163년 비영리 사단법인으로 설립된 민간연구기관으로 회원단체들의 회비와 연구용역, 기부금 등으로 운영된다. 모체인 최대 경제지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연구소의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한다는 것이 무로이 히데타로 아시아연구부 주임연구원의 설명이다...... 지난달 일본정부의 경제정책 사령탑인 정부세제조사회장에 고사이 유타카 특별연구고문이 내정되면서 이 연구센터는 관심을 끌었다. 연구센터의 일본내 영향력을 방증해 주는 대목이다. 고사이 회장은 1987년부터 16년간 연구센터의 이사장과 회장을 지냈다. 아울러 고이즈미 정권 5년반 동안 고이즈미 정부의 개혁을 진두지휘한 다케나카 헤이조 전 총무상이 지난해 12월 특별고문이 된 것도 화제다. 향후 그의 역할이 주목된다. 이 밖에도 일본 최대의 경제단체인 게이단렌의 미타라이 후지오 회장, 조 후지오 도요타자동차 회장 등이 연구센터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1&aid=0000118956

   

니혼게이자이 신문이 노비네파이다. 허나, 빅터 로스차일드가 데이비드 록펠러에게 패배한1980년대 후반 이후 이 연구센터는 뉴라이트파로 변신하려고 노력중이라고 할 수 있다. 고이즈미가 일본에서 인기가 있었던 것은 노비네파 자민당 내의 뉴라이트파였기 때문이다.

   

이 단체는 자신이 어떤 흐름을 만들어내기 보다 추세에 순응하는 조직이므로 크게 주목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 조직과 관련해서 말한다면, 한나라당 박진 의원이 전경련을 싱크탱크로 전환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이에 허창수 전경련 회장이 싱크탱크로의 전환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했다. 미국식으로의 변환이라고 하는데, 결과는 일본식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영미식이란 어젠다 능력이 필요한데, 일본이나 한국이 어젠다 능력이 있느냐? 없다. 독일이나 프랑스도 없는데, 한국이 있을 턱이 없다.

   

예외적이라면, 인드라는 어젠다 능력이 있다~!

   

19. 워싱턴 한국연구소들은 뉴라이트파이다.

   

"한·미연구원은 지난해 10월 SAIS 내에 설립됐다. 워싱턴의 대표적인 한반도 전문가 돈 오버도퍼 SAIS 교수가 원장을 맡았다. 연구원은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이 지원한 4억원으로 출범했으며, 내년부터 3,4년간은 우리 정부가 매년 40만50만 달러를 출연하는 방식으로 재정을 뒷받침하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미연구원의 중요한 기능 가운데 하나는 미래의 한반도 전문가들을 양성하기 위한 젊은층과의 네트워크이다. 한반도에 관심있는 미국 젊은이들의 모임인 '세종 소사이어티'와의 연대가 대표적이다. 세종 소사이어티는 SAIS에서 한국어를 공부했던 애틀랜타 출신 스태퍼드 워드가 만든 연구 모임이다. 워드는 현재 국무부에서 들어가 외교관으로서 인도네시아에 근무하고 있지만 대표 역할을 계속 맡고 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1&aid=0000119853

   

   

여러분은 앞으로 '소사이어티'를 '빌더버그' 만큼이나 주목해야 한다. 아시아 소사이어티, 코리아 소사이어티에서 반기문이 유엔 사무총장이 될 수 있었다. 재선할 수 있었다. 소사이어티는 데이비드 록펠러가 삼각위원회 강화를 위해 빌더버그에 대항한 아시아환태평양 그룹이다. 빌더버그가 대서양 그룹이라면, 소사이어티는 태평양 그룹이다.

   

오늘날 한국에서 허접하게 데모질하면서 조직 이름을 무슨 무슨 소사이어티라고 하고 있다면, 데이비드 록펠러 시다바리로 이해하면 무리가 없다^^!

   

"이도운특파원|한·미경제연구소(KEI)는 20여년 동안 워싱턴에서 한반도 전문가들의 '사랑방' 역할을 해온 기관이다.1982년 설립된 KEI는 한국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의 재정 지원을 받고 있다.

   

KEI의 역할은 한국의 발전과 한·미관계의 현황을 미국인들에게 알리고 한국의 경제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며 한국의 정부 관리들에게 미국 외교 및 경제 정책의 변화와 흐름을 전해주는 것이다.

   

KEI는 한국 정부 등 국내 기관이나 단체가 미국에서 개최하는 대부분의 공식 행사를 지원한다. 또 주미 한국대사와 주한 미국대사의 미국내 동반 '투어'도 주관한다. 국제교류재단의 후원을 받아 미국내 각 대학의 한국 연구 프로그램도 지원한다.

   

KEI의 소장은 미 국무부 대북협상특사를 지낸 찰스 프리처드 전 대사가 맡고 있다. 프리처드 소장은 민주당 출신인 빌 클린턴 정부와 공화당 출신인 조지 부시 대통령 정부에서 모두 일한 경험을 갖고 있다.KEI로 오기 전까지 브루킹스연구소에서 아시아 문제를 연구하기도 했다.

   

또 미 재무부의 국제금융정책국장 등을 역임한 제임스 리스터 부소장을 비롯해 KEI에는 6명의 상근 직원이 일하고 있다.

   

직원 가운데 선임인 플로렌스 로-리(한국명 이명화) 재정 및 출판 담당자는 KEI의 월간 뉴스레터인 '코리아 인사이트'에 한국과 북한의 경제와 사회 이슈를 분석하는 글을 쓴다.KEI는 한국의 경제와 관련해 연례적으로 보고서를 출판하며, 특별한 현안이 생길 때마다 보고서를 작성한다.

   

제임스 앨비스 홍보 담당자는 '코리아 클럽'의 운영자이기도 하다. 코리아 클럽은 한반도에 관심을 가진 워싱턴 지역 인사들의 모임으로 한반도 정책과 관련된 주요 인사들을 초청해 강연을 듣고 질의응답 시간을 갖는 행사를 개최한다. 오공단 미 국방연구원 책임연구원, 제임스 켈먼 미 국무부 국제안보 및 비확산국 부과장이 앨비스 연구원과 함께 코리아 클럽을 운영하고 있다.

   

최근의 강연 초청자 가운데는 대니얼 글레이저 미 재무부 테러금융 및 금융범죄 담당 부차관보, 성 김 국무부 한국과장, 찰스 카트먼 전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사무총장, 빅터 차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아시아 담당 보좌관 등이 포함됐다.

   

존스홉킨스 대학 국제학대학원(SAIS) 소속이어서 학술적인 측면도 강한데.

   

-올해부터 SAIS와 한·미연구원 공동으로 한반도 학위 프로그램을 신설했다. 오는 9월 한국을 전공한 전담 교수를 임용할 계획이다. 이제부터 SAIS에서 한국을 연구하는 학생들도 중국 연구자나 일본 연구자와 마찬가지로 학위를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1&aid=0000119853

   

성 김, 빅터 차, 존스홉킨스를 기억하라. 이재오, 존스홉킨스에서 공부하고 왔다. 스탠퍼드 다음으로 존스홉킨스이다. 뉴라이트이다.

   

20. 베를린폴리스는 골드만파이다.

   

"현재 활동 중인 독일 싱크탱크는 140개 안팎.2000년 수도를 베를린으로 정한 뒤 외교·안보 정책 등을 연구하는 주요 싱크탱크들이 베를린으로 몰려들면서 활기를 띠고 있다.

   

주요 특징은 운영 형태가 국가 혹은 정당과의 연계성이 강하다는 것이다. 국가지원을 받는 싱크탱크만 10여곳이 되는데 주로 경제와 외교·안보 연구에 무게를 두고 있다.

   

대표적인 곳은 140명의 상근 연구원을 갖춘 '학문과 정치재단'으로 독일에서 가장 영향력이 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 대부분의 정당이 느슨한 관계로 싱크 탱크와 연계돼 있다는 것도 특징이다. 사민당-프리드리히 에르베트재단, 녹색당-하인리히 뵐 재단, 기민당-콘라드 아데나워 재단, 기사당-한스 자이델재단, 자민당-프리드리히 노이만 재단, 좌익당-로자 룩셈부르크 재단 등의 결합이 대표적 사례다. 이들 싱크탱크는 주요 재원을 연방 의회로부터 지원받으면서 연계된 정당의 정책·정강을 개발하고 있다.

   

자칫 정부나 정당에 매이게 되는 관계지만 독립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초당적 합리성을 내세우면서 공평한 정책 개발에 비중을 둬 왔다는 게 일반적 평가다.

   

그러나 최근 새 바람이 불고 있다. 민간 혹은 민·관 혼합 성격의 싱크탱크가 많이 늘어나면서 정치적 중립지대의 공간이 넓어졌다. 알프레드 하우젠 협회와 베를린폴리스가 대표적이다.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1&aid=0000120722

독일재단에 대해서는 인드라가 인월리를 통해 자세하게 다룬 바 있다.

   

중도좌파 박정희와 독일 재단, 그리고 독일 대통령

http://blog.naver.com/miavenus/70105235670

   

뭔가 기존 방식과 다르게, 그리고 거버넌스적으로 나아가는 방식은 골드만파 방식이다. 다만, 뉴라이트를 배제하지는 않겠다. 허나, 노비네파는 아니다.

   

다만, 인드라가 베를린폴리스를 골드만파로 추정하는 건, 형식을 깨고 나왔기 때문이다. 뉴라이트파는 기존 시스템에 자신을 맞추면서 약간 자유스럽게 포장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반면, 골드만파는 과감한 형식 파괴를 통해 급진적인 접근을 하는 경향이 있다. 베를린폴리스가 예다.

   

독일은 재단 사업이 매우 잘 되어 있다. 독일과 비교할 수 있는 나라는 전 세계에 영국과 미국밖에 없다. 그만큼 독일 재단은 위력적이다. 국내에만 머물지 않는다. 한국에도 모든 정당, 사회단체에 영향을 갖출 만큼 국제적이다.

   

다만, 이 시스템은 빅터 로스차일드 시절에 만든 시스템. 데이비드 록펠러는 그저 그 시스템 안에 자신을 변호할 재단 하나 만드는 것에 만족했다면, 제이 록펠러는 이 시스템을 창조적으로 파괴하고,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할 생각을 하는 것 같다.

   

그런 시도 중 하나가 베를린폴리스 같은 것이다. 최근 독일에서 등장한 해적당을 인드라는 골드만파 작품으로 보고 있다.

   

(수정)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12 : 세계의 싱크 탱크 1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1/11/13 04:56

http://blog.naver.com/miavenus/70123891136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12 : 세계의 싱크 탱크 1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1/11/13

   

서울신문 기획물 세계의 싱크 탱크 기사를 중심으로 국유본 세상과 분파 분류를 시도할 것이다.

   

   

1. 스위스 세계경쟁력연구소는 뉴라이트파이다.

   

"가렐리 교수가 소장으로 있는 세계경쟁력연구소(WCC)의 '2006년 세계 경쟁력 연감'은 한국의 경쟁력이 61개 경제권(국가 및 지역) 가운데 38위로 지난해(29위)보다 9단계가 후퇴했다고 지난 5월 평가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1&aid=0000097157

   

 IMD가 뉴라이트파인 것은 다음 기사만 봐도 알 수 있다.

   

http://www.edaily.co.kr/news/NewsRead.edy?SCD=DD21&newsid=01125046596250232&DCD=A00303&OutLnkChk=Y

   

하면, 같은 스위스이면서 세계 국가경쟁력을 발표하는  세계경제포럼(WEF), 혹은 다보스포럼 성향은?

   

"정의

세계의 저명한 기업인·경제학자·저널리스트·정치인 등이 모여 범세계적 경제문제에 대해 토론하고 국제적 실천과제를 모색하는 국제민간회의.

개설

1971년 독일 태생의 유대인 클라우스 슈밥(Klaus Schwab)이 비영리재단 형태로 창립했다. 정식 명칭은 세계경제포럼이(World Economic Forum: WEF)지만 스위스 다보스에서 매년 초 총회가 열려 다보스포럼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2002년에는 9·11테러에 맞선다는 의미로 다보스 대신 뉴욕에서 열렸다. 본부는 스위스 제네바에 있다.

역사적 배경

1971년 미국 하버드대 클라우스 슈밥 교수가 설립, 독립적 비영리 재단형태로 출범했다. 처음에는 '유럽인 경영 심포지엄'으로 출발했으나 1973년부터 참석 대상을 전 세계로 넓히고 정치인으로까지 확대했다. 다보스포럼은 연차총회 외에도 지역별 회의와 산업별 회의를 운영하면서 세계경제문제에 접근해 왔다.

경과

세계의 정계·재계·언론계·학계 지도자들이 참석해 '세계경제올림픽'으로 불릴 만큼 권위와 영향력이 있는 유엔 비정부자문기구로 성장하면서 세계무역기구(WTO)나 서방선진 7개국(G7) 회담 등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세계경제포럼 산하 국제경영개발원(IMD)이 발표하는 '국가경쟁력보고서' 등을 통해 세계의 경제정책 및 투자환경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그러나 세계화와 시장개방을 주도하는 대표적 단체로 최근에는 반(反)세계화주의자들의 주요 표적이 되어왔다. 격월간 기관지 '월드 링크'(World Link)를 발행하며 국가별 국제경쟁력을 담은 '세계경쟁력보고서'를 매년 발간하고 있다. 2009년 1월28일부터 2월1일까지 개최된 금년 행사에는 예년보다 더 많은 국가 수반급 지도자(40여명)와 기업 CEO(1400개 기업)가 찾아와 외형상 평년작은 유지했다. 올해 다보스포럼은 '위기 후 세계질서 개편(Shaping the Post·Crisis World)'을 주제로 설정해 세계 언론의 큰 관심을 모았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72077

   

다보스포럼은 노비네파이다. 주창자인 클라우스 슈밥이 독일계 유태인이고, 다보스 클럽을 활성화하는데, 헨리 키신저와 영국 히스 전 총리가 큰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모임은 1973년이라는 것이 의미하듯, 국유본 권력 교체에 따라 만든 노비네파 모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해서, 뉴라이트파 혹은 골드만파로 추정하는 국유본 분파는 세계사회포럼을 만들어 다보스포럼을 견제하고 있다. 현재까지는 세계사회포럼 주도자들은 골드만파가 유력하다.

   

그래서일까.

    

"작년에 이어 글로벌 HRD 경쟁력 보고서 작성을 총괄한 오헌석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한국인적자원연구센터장 · 사진)는 12일 "단순하게 결과만을 나열하는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이나 세계경제포럼(WEF) 보고서에 비해 HRD 경쟁력 보고서는 인재개발에 관한 전문가들의 이론적인 연구를 바탕으로 꼭 필요한 지표들을 선별한 것이 특징"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1101251411

   

정부에서도 그냥 당하고만 있지 않겠다면서 정부 차원에서 대응하는 것 같다.

   

   

"주제네바대표부 참사관이기도 한 상품공동기금(CFC) 우상현 겸임이사는 한국개발연구원(KDI)의 '나라경제'에 실린 기고문을 통해 "2007년 이후 WEF 등위는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IMD 등위는 2008년 이후 상승세이지만 두 기관이 별도의 평가모델을 운영하고 있는 등 방법론에 기인한다. 결국 지난해까지의 평가 등위에서 볼수 있듯이 양 기관의 평가가 결국 비슷한 수준으로 수렴해 왔다"고 분석했다."

http://korea.kr/newsWeb/pages/brief/categoryNews2/view.do?newsDataId=148721871&category_id=subject&section_id=EDS0101008&call_from=extlink&subjectName=economy

   

쪽발 놈현이나 이명박이나 모두 뉴라이트파이다. 그럼에도 쪽발 놈현은 변방 뉴라이트였고, 이명박은 정통 뉴라이트라는 차이가 있다. 해서, 뉴라이트 스위스 세계경쟁력연구소가 2008년 이후에는 한국에 후한 점수를 주는 반면, 노비네파 세계경제포럼, 혹은 다보스포럼은 2007년 이후로 매년 낮게 평가하는 것이다. 

   

한국 GDP는 1.1조 달러가 적정선이다

http://blog.naver.com/miavenus/70069444733

   

인드라가 쪽발 놈현을 비판할 것은 하더라도 옹호할 때는 철저하게 옹호한다는 것을 잊지 말길 바란다. 노비네파 IMF가 노비네파 정권인 쪽발 돼중 정권 때와 다르게 쪽발 놈현 정권 때부터 한국 GDP를 굉장히 인색하게 평가했다. 뉴라이트나 골드만파인 CIA나 세계은행 발표와 비교하면 금방 차이가 난다.

   

포춘지 선정 2009년 500대 기업 리스트

http://money.cnn.com/magazines/fortune/global500/2009/full_list/

   

해서, 인드라가 포춘지 선정 500대 기업 리스트를 토대로 각국 GDP를 세계 최초로 발표한 것이다. (인드라는 맨날 세계 최초래~!)

   

하여간, 인드라가 IMF를 졸라리 씹어서인지 그 이후로 IMF가 한국에 대해 태도가 많이 긍정적으로 변모했다. 특히, 노비네 계열인 영국 이코노미스트, 영국 파이낸셜 타임즈 논조가 많이 향상했다.

   

2. 미국기업연구소는 노비네파이다.

   

"특히 조지 부시 대통령의 임기 동안 AEI는 정부 요직의 산실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딕 체니 부통령과 폴 오닐·존 스노 전 재무장관이 AEI의 이사회 멤버였다. 또 로렌스 린지 백악관 경제보좌관, 백악관 경제자문위원장도 AEI에 몸담았었다.AEI의 대외관계 담당자인 베로니크 로드먼이 불러주는 AEI 출신 부시 행정부 인사들의 명단은 일일이 받아적을 수도 없을 정도였다.

   

AEI는 부시 대통령이 '테러와의 전쟁'을 기획하고 수행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친 이른바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의 요새'로도 유명하다. 국무부에서 군축 및 국제안보 담당 차관을 지내며 '무리할' 정도로 이라크 전의 당위성을 설파해왔던 존 볼턴 유엔주재 미국대사는 AEI 부소장을 지냈다.

이라크 전의 기획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히는 리처드 펄 전 국방정책 자문위원장은 AEI로 돌아왔다. 최근에는 지난 2002년 부시 대통령의 국정연설에서 북한과 이란, 이라크를 '악의 축'으로 규정하도록 연설문을 작성했던 데이비드 프럼 전 대통령 보좌관도 최근 AEI로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AEI에 네오콘들이 자리잡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이념의 충돌은 자유사회의 근원"이라는 연구소의 오랜 믿음 때문이라고 로드먼은 설명했다. 그러나 로드먼은 "AEI의 네오콘은 외교 정책과 관련된 분야에만 국한돼 있다."면서 "AEI를 네오콘과 동일시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했다. 로드먼은 "AEI는 외교 정책 말고도 법률과 정치, 경제, 문화, 종교, 바이오 테크 등과 관련해 수많은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현재 미국기업연구소(AEI) 내의 대표적인 한반도 전문가는 제임스 릴리 전 주한대사와 니컬러스 에버스타트 선임연구원이다.

   

중앙정보국(CIA) 출신 외교관이었던 릴리 전 대사는 역대 주한대사들 가운데서도 대표적인 대북 강경파로 손꼽힌다. 그는 지난해 북한 핵 문제가 고조되자 미 언론들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은 대북 사업 및 관광 프로젝트를 중단하고, 미국은 유엔 제재를 재추진하며, 일본은 대북 물자 선적을 중단하는 등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릴리 전 대사는 북한인권법에 따라 신설된 북한인권특사에 거론되기도 했으나 본인이 고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버드대 정치경제학 박사인 에버스타트 연구원은 당초 인구경제학을 연구하다가 한반도 문제로 연구의 폭을 넓혔다. 에버스타트 연구원은 지난 2004년 11월 조지 부시 대통령이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직후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청와대에서 부시의 낙선을 원했던 인사가 누구인지 이름까지 댈 수 있다."며 노무현 정부를 비판해 큰 파문을 일으킨 바 있다.

   

네오콘(신보수주의자)으로 분류되는 에버스타트 연구원은 이후에도 '한·미동맹 청산론'과 '북한붕괴론' 등을 제기하는 등 한국과 북한 정권에 강경한 목소리를 계속 내고 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1&aid=0000097982

   

네오콘부시파의 산실이다. 더 이상 설명이 필요한가?

   

3. 일본 미쓰이물산전략연구소는 노비네파이다.

   

"삼성도, 도요타도, 그 어떤 기업도 자신의 힘만으로는 할 수 없는 시대다.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1&aid=0000098757

   

삼성, 도요타, 미쓰이 모두 노비네파이다. 미쓰이는 일본의 대표적인 노비네 재벌이다. 미쯔비시가 대표적인 뉴라이트 재벌이다. 삼성 - 미쓰이 - 로스차일드. 미쯔비시 - 현대 - 록펠러 이렇게 생각하면 된다.

   

4. 중국 국무원 발전연구중심은 뉴라이트파이다.

   

"국무원 발전연구중심(DRC) 관계자가 하는 얘기는 몇년 뒤에는 반드시 정책으로 현실화된다."

한국 경제계의 한 주요인사는 DRC에 대해 이렇게 소개했다."올 초에 나온 11·5규획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수년 전 DRC 연구원들이 얘기했던 것들이 다 들어가 있더라."는 얘기다.DRC가 갖는 '정책 선도' 기능을 단적으로 설명해준다. DRC는 중국의 개혁·개방을 선도해온 기관이다.1981년 경제연구중심, 기술경제연구중심, 가격연구중심 등 3곳이 통합돼 설립됐다. 이후 1990년 농촌발전연구중심의 기능과 연구인력을 부분적으로 흡수했다. 지난 20여년간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의 수립을 위한 연구를 수행했고, 특히 경제사회발전 5개년 계획과 장기발전 프로그램의 개발 등을 담당했다.

특히 DRC는 '정보의 사막' 중국에서 정보공급 기능이 가장 탁월한 기관으로 꼽힌다.DRC의 홈페이지(www.drcnet.com.cn)는 중국 경제에 관한 한 가장 종합적인 정보를 제공한다. 해외 기관이나 기업들은 연간 수천만원을 내고 기꺼이 유료회원에 가입하고 있다. 또한 DRC는 지방에 강하다. 당 중앙위와 각 성의 위원회가 추진하고 있는 경제적·사회적 발전에 대한 종합적·전략적·장기적 문제들에 대한 연구를 수행한다. 최근 톈진의 빈하이 신구 조성을 비롯한 균형적 지역발전 등 문제에 깊게 관여돼 있다. DRC가 지난 2000년부터 매년 34월 정기국회격인 양회(兩會) 직후 개최하는 '중국발전포럼'은 각 부처 장관들이 총출동, 중국 정부의 정책 방향을 가늠케 하는 행사로 환영받고 있다.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60808006001

   

국무원 발전연구중심은 경제제일주의를 내세우기에 중립이라고 보면 된다.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76)이 중국 국무원 직속의 싱크탱크인 "중국 발전연구중심"으로부터 고문직을 제의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박 명예회장이 고문직을 수락하면 중국의 중장기 경제정책 설계에 참여할 전망이다. 27일 박 명예회장 측근에 따르면 중국 정부는 오래전부터 박 명예회장에게 중국발전연구중심 고문직을 여러차례 제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박 명예회장은 아직 수락여부를 결정하진 않았으나 수락 가능성이 큰 것으로 알려졌다. 박 명예회장이 수락하면 리콴유(李光耀) 전 싱가포르 총리에 이어 두번째로 중국 정부의 경제고문역이 된다.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은 외교안보분야 고문으로 활약한 바 있다. 중국 발전연구중심은 1981년 설립된 국무원 직속 연구기관으로 한국개발연구원(KDI)처럼 중국의 중장기 경제정책을 설계하는 싱크탱크로 "국민경제와 사회발전 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있다. 박 명예회장이 중국 정부의 경제고문직을 요청받은 것은 그가 과거 포항제철 회장으로 한국경제를 이끌어온 역량을 인정받았기 때문.덩샤오핑 전 중국 국가주석은 박 명예회장을 영입해 중국 철강산업을 국가 기간산업으로 육성하는 방안을 검토하기도 했었다. 한편 박 명예회장은 중국뿐 아니라 최근 브라질 멕시코 등으로부터도 경제자문역을 요청받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15&aid=0000587591

   

박태준은 소망교회 신자이다. 뉴라이트이다. 박정희 인맥이어서 노비네파로 알 분도 있겠지만, 아니다. 박태준이랑 뉴라이트 삼류저질작가 조정래와 친하다. 한국은 이런 저질 삼류 작가들이 사라져야 발전한다.

   

또한, 중국 국무원 산하 발전연구중심이 초창기 헨리 키신저나 리광요를 고문으로 초청해서 노비네파로 알겠지만, 아니다. 후진타오가 아무리 노비네파라도 경제는 뉴라이트파를 중시한다. 다만, 사정이 이렇다고 해서, 발전연구중심이 시진핑 상하이방을 가까이 하고, 후진타오 공청단을 멀리하는 것이 아니다. 뉴라이트파이되, 정치적으로 중립이라는 것이다.

   

2011년 빌더버그 회의에 중국이 한 명은 외교 전문가, 다른 한 명은 경제 전문가를 내보냈다. 인드라는 외교 전문가를 노비네파, 경제 전문가를 뉴라이트파로 분석한 바 있다.

   

http://blog.naver.com/miavenus/70117472404

   

5. 헤리티지 재단은 뉴라이트파이다.

   

"이후 1990년대까지 헤리티지는 레이건 행정부 대외정책의 길잡이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 헤리티지는 1994년 공화당이 의회에서 수십년만에 민주당을 제치고 다수당이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뉴트 깅리치 하원의장의 '미국과의 계약'을 탄생시키는 데도 핵심적 역할을 하는 등 국내 정치 및 정책에서 영향력을 계속 유지해왔다.

   

헤리티지는 1973년 쿠어스 맥주 창업자 조지프 쿠어스가 기탁한 50만달러를 종자돈으로 삼아 설립됐다. 쿠어스는 정치적 보수주의자였다. 헤리티지는 재단 임무를 '자유로운 기업활동과 제한된 정부, 개인의 자유, 전통적인 미국의 가치, 강력한 국방의 원칙에 따라 공공정책을 제안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1977년에 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한 에드윈 풀너는 헤리티지를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싱크탱크 가운데 하나로 성장시킨 인물로 평가된다.

   

레이건 대통령의 국가안보보좌관이었던 리처드 앨런, 이라크 전 당시 미 행정관을 맡았던 폴 브레머, 현 노동장관인 일레인 차오, 국방부 대변인인 로렌스 디 리타 등이 대표적인 헤리티지 출신 인사들이다.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1&aid=0000101018

   

신기하지 않은가. 주요 기관 설립연도가 1973년이다!!!

   

많은 이들이 헤리티지 재단을 노비네파로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늘 보수우파를 지지하니까. 허나, 레이건 때를 자랑으로 내세운다는 것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뉴라이트이다. 뉴라이트도 친공화당이 아니고 친노예민주당이 있다. 헤리티지 재단은 친공화당 뉴라이트이다.

   

   

6. 중국 사회과학원은 뉴라이트파이다.

   

"1978년 5월 중국사회과학원은 중국과학원 소속의 철학사회과학학부를 모태로 탄생했다. 마오쩌둥의 비서 출신으로 당대 최고 이론가로 꼽히던 후차오무(胡喬木)가 초대 원장을 맡았다. 내로라하는 학자와 이론가를 불러들인 것은 물론이다. 사회과학원은 바로 '사회주의 시장경제' '사회주의 상품경제' 등의 용어를 생산해내며 개혁·개방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 중국 사회의 길잡이 역할이 시작된 것이다."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60829012003

   

허나, 그렇다고 해서 중국 사회과학원이 후진타오의 공청당을 멀리 하거나, 반대로 시진핑의 상하이방을 지나치게 가까이 하지 않는다. 중립이다. 

   

미국에는 미국 전략문제연구소가 있고, 영국에는 왕립국제문제연구소가 있다면, 중국에는 사회과학원이 있다.

   

"중국 사회과학원(중국어: 中院, CASS)은 중국 국무원 직속 싱크탱크로서, 중국 최대 규모의 연구기관이다. 1977년 5월에 설립되었으며, 철학, 경제, 역사 등의 개별 연구소가 존재한다. 사회과학원 산하의 변강사지 연구센터동북공정이 한중간의 분쟁거리가 되었다. 2008년 12월 26일, 카네기 국제평화재단이 출판하는 포린 폴리시는 전세계 최고의 싱크탱크 순위를 발표했다. 1위 브루킹스 연구소, 2위 미국외교협회(CFR), 3위 카네기 국제평화재단, 4위 랜드연구소, 5위 헤리티지재단을 선정했고, 미국 이외의 싱크탱크로는, 영국의 채텀 하우스, 국제전략문제연구소(IISS), 스웨덴의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 중국의 중국사회과학원(CASS)이 최고로 선정되었다."

   

현재 한국에서 가장 필요한 싱크탱크가 중국 사회과학원과 같은 조직이다. 정권이 바뀌어도 국가 방향과 시책을 한결같이 흐르게 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인드라가 보기에, 현재 공청단과 상하이방이 교대로 주기적으로 평화적 정권 교체하는 것은 국유본의 지시를 받은 중국 사회과학원의 힘으로 본다. 물론 중국 사회과학원 배후에는 데이비드 록펠러가 있다.

   

"후진타오(胡錦濤·호금도·사진) 중국 국가주석은 2002년 11월 중국공산당(중공) 총서기로 선출된 바로 다음 달 당 정치국 국원 25명을 상대로 '집체(集體) 학습'을 시작했다. 당이 정부를 영도하는 중국의 권력구조에서 당 총서기는 최고의 권력자다. 전통시대로 치자면 황제의 지위에 오른 바로 다음 달 '새로운 황제'가 가장 먼저 관심을 둔 것이 바로 학습이었던 것이다. 이듬해 3월 국가주석에 공식 취임한 이후에도 후 주석은 학습을 중단하지 않았다. 집체학습은 2002년 12월 26일 첫 모임에서 후 주석이 "이를 제도화해 장기간 계속하라"고 내린 지침에 따라 올해로 10년째 이어지고 있다.

   

중국 베이징 시내에 있는 호수인 중난하이의 위성지도사진. 중난하이에선 중국의 고위 관료들을 대상으로 한 집체학습이 열린다. [중앙포토]

   

그렇다면 당·정 간부들이 주거와 집무를 겸하는 중난하이(中南海)에 들어가 '현대판 황제'에게 일종의 현대적 제왕학(帝王學)을 가르쳐온 중국 최고의 두뇌집단은 어디일까. 인민일보 해외판은 1일 '중난하이(中南海)의 10년 필수 과목'이란 특집 기사에서 그 면면을 분석했다.

   

이에 따르면 그동안 74차례 진행된 강의에는 모두 142명의 전문가가 강단에 섰다. 이들은 해당 분야에서 중국에서 첫손가락에 꼽히는 학자와 연구원들이다.

   

   

   

   

   

   

7.

소속 기관을 기준으로 보면 중국사회과학원이 24명을 배출해 가장 많았다. 중국 최대 싱크탱크라는 세간의 평가에 걸맞게 자존심을 지켰다. 다음은 국무원(중앙정부) 발전연구중심으로 11명의 전문가를 출강시켰다. 대학 중에서는 베이징대와 칭화대를 제치고 중국인민대학이 10명을 보내 눈길을 끌었다. 이 밖에 거시경제정책을 총괄하는 국가발전개혁위원회 산하의 거시경제연구원(8명), 중국군사과학원(8명), 중앙당교(7명), 중앙당사연구실(6명)도 다수를 배출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25&aid=0002153614

   

   

   

 7. 일본 노무라종합연구소는 노비네파이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1&aid=0000102631

   

딱히 설명을 더 할 필요가 없다. 리먼브라더스 사태 때 해먹는 것만도 알 수 있다. 인드라가 권고하는 것은 노무라에 대한 환상을 지우라는 것이다. 노무라, 반드시 망한다. 한국이 리만브라더스 인수하지 않은 것은 정말 잘 한 일이다.

   

이제 당신의 정보 소스에서 노무라를 지워라!!!

   

노무라는 지는 해이다. 노무라 보고서를 무시하라!!! 끝났다. 인드라, 이 말 듣고 국유본이 약간 노무라를 키울 수는 있을 지언정 중장기적으로 보면 인드라 말대로 될 것이다.

   

노무라와 관계한 한국 기업들이 있다면, 지금부터 조금씩 발을 빼서 안전 자산을 확보해야 할 것이다.

   

http://cafe.naver.com/ijcapital/12212

   

8. 미국 국제경제연구소는 노비네파이다.

   

<"연구의 질과 양식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가장 탁월한 싱크탱크가 국제경제연구소(IIE)이다."(폴 크루그먼 프린스턴 대학 경제학과 교수)

   

"IIE는 워싱턴 최고의 국제경제 연구소다."(워싱턴포스트)

   

IIE는 국제경제 정책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싱크탱크이다.IIE는 상무장관과 대통령 국제경제보좌관을 역임했던 피터 피터슨 블랙스톤 그룹 회장 등에 의해 1982년 설립됐다. 피터슨 회장은 지금도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다.

   

IIE는 국제경제 분야에서 떠오를 것으로 예상되는 이슈들을 미리 파악해 공공의 논쟁을 유도할 수 있는 실질적인 아이디어와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연구소의 목적이라고 밝히고 있다.

   

하버드 대학 총장을 지냈던 로렌스 서머스 전 재무장관은 "정치인들의 의회 발언에는 싱크탱크의 연구 결과가 빈번하게 인용되며 그 가운데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기관이 IIE"라고 말한 바 있다.

   

IIE가 21세기로 넘어오면서 중점을 두고 있는 연구 과제는 국제 거시경제, 국제 자금과 금융, 무역, 투자, 그리고 기술의 발전이 국제사회에 미치는 영향이다. 특히 올해의 경우에는 중국 세계화 및 그에 대한 반작용 아웃소싱 국제금융기구 개편 다자·양자·지역별 통상협상을 핵심 연구 과제로 선정했다.

   

IIE의 연구 결과가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상대적으로 정치적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롭다는 점이다. 국제경제 전문지인 '인터내셔널 이코노미'가 지난해 미국 주요 싱크탱크의 정치성향을 분석한 결과 IIE는 비당파적이며, 중립적인 것으로 평가됐다. 미국의 20대 주요 싱크탱크 가운데 이같은 평가를 받은 곳은 IIE와 전략국제연구소(CSIS)뿐이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1&aid=0000104232

   

오바마 정부 때 노벨경제학상 받은, 인드라에게 삼류저질 경제학자라고 평가받아 상처받은, 골드만파 폴 크루구먼이 칭찬하고, 뉴라이트파 워싱턴포스트가 상찬한다. 서머스야 오바마 정부 관료이고~! 

   

다른 사람은 볼 것도 없다. 피터 피터슨만 보자.

"리처드 닉슨 전(前)대통령의 상무담당 비서관이었던 뉴욕소재 투자회사 블랙스톤 그룹의 회장 피터 패터슨은 특히 부시 행정부의 재정적자를 강력히 비난하고 나섰다. 그는 공화 민주 양당을 모두 비난했지만, 특히 공화당 지도자들이 재정적자에 대해 무책임하다고 공격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08&aid=0000446125

   

노비네파이다. 특히 눈에 들어오는 것은 제이콥 로스차일드~! 게다가 피터 패터슨 자신도 노비네파 닉슨 상무담당 비서관이었으니~!

   

   

"국제경제연구소(IIE)의 대표적인 한반도 전문가는 마르커스 놀란드 선임연구원이다. 놀란드 연구원은 한·미관계와 미·북관계, 남북관계, 그리고 한·미 경제통상 분야까지 연구의 관심 범위에 포함시키고 있다. 그는 1993년부터 94년까지 대통령 경제자문위원회의 선임 경제학자를 역임한 바 있다. 또 존스홉킨스대, 남가주대 등 미국의 대학뿐만 아니라 도쿄대 등 외국의 대학에서 초빙 연구원을 지내기도 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에서 방문 연구원을 지냈던 경험이 한반도 전문가로 자리매김하는 데 계기가 됐다. 그는 지난 2004년 발간한 '김정일 이후의 한국'은 북한의 붕괴와 한국의 흡수 통일 가능성을 제기해 관심을 모았다.

   

컬럼비아대와 듀크대, 매사추세츠공대(MIT) 등에서 경제·경영학을 강의했던 에드워드 그레이엄 선임연구원도 한국 문제에 정통하다. 그레이엄 연구원은 미 재무부의 국제투자국에서 국제경제연구원을 맡은 바 있으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기획평가담당관도 역임해 학문과 실무 모두 경험이 풍부하다. 그는 2003년에 '한국 재벌의 개혁'이라는 저서를 발간했다.

   

IIE는 올해 외교통상부 산하기관인 국제교류재단으로부터 지원금을 받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바람직한 방향 등을 연구하고 있다. 이 연구는 프레드 버그스텐 소장이 직접 지휘하고 있다.1982년 연구소 창립 때부터 소장을 맡아온 버그스텐은 미 재무부의 국제담당 차관보를 역임했으며, 헨리 키신저 국가안보보좌관의 국제경제 담당 보좌관도 지낸 바 있다. 버그스텐 소장은 현재 '동아시아에서의 경제지역주의'라는 제목의 저서를 준비 중이다.

   

한·미 FTA 연구의 실질적 담당자는 제프리 쇼트 선임연구원이다. 쇼트 연구원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과 우루과이라운드 등 국제 통상협상과, 미국의 양자 통상 협상 분야의 최고 전문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쇼트 연구원도 미 재무부에서 경제연구원을 지냈다.'경제제재의 재고'라는 저서를 낸 바 있는 쇼트 연구원은 대북 제재 분야에서도 전문성을 갖고 있다.

   

IIE에는 지금까지 3명의 한국인을 초빙 연구원으로 받아들였다. 조순 전 경제부총리와 사공일 전 재무장관, 최인범 경기도경제단체연합회 사무처장 등이다."

   

힘드네~! 오늘은 여기까지~!

   

추신 : 인드라 추정은 잠정적입니다. 데이터가 추가로 유입하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추신 2 : 국제경제연구소를 뉴라이트파에서 노비네파로 수정합니다. 삼각위원회 사공일 등이 있고, 중립 노선을 걷는다 해서 뉴라이트파라고 했으나, 이후 자료를 보완해서 살펴보니 역시 노비네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령 바클레이즈 같은 경우도 CEO를 뉴라이트파로 하는 등 뉴라이트 노선을 내세웁니다. 허나, 이것은 시기에 조응하려는 것이지, 조직이 달라진 것은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국제유태자본은 수메르인이다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1/11/12 04:11

http://blog.naver.com/miavenus/70123808908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11 : 국제유태자본은 수메르인이다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1/11/12

   

   

- 관리하나, 지배하지 않는다.

   

   

레바논 산맥은 산림이 울창했다.

   

   

"두로 왕 히람이 다윗에게 사자들과 백향목과 목수와 석수를 보내매 저희가 다윗을 위하여 집을 지으니"사무엘하 5:11.

   

   

특히 구약에서 여러 차례 언급할 만큼 백향목이 풍부했다. 백향목이 나무가 곧고 가공이 편리하고 해충에 잘 견뎠기에 선박과 성전, 궁전, 악기 제작 등 쓰임새가 무궁무진했다.

   

   

페니키아인이 오늘날 시리아와 레바논 지역에 자리를 잡은 것도 배 만들기 좋은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하면, 페니키아인은 어디서 왔는가. 많은 이들이 도전했지만,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구약에서는 선조가 가나안인이라고 한다. 페니키아인도 자신을 가나안인이라고 한다. 헌데, 헤로도토스 전설로는 페르시아만에서 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때, 인드라의 독특한 추정은, 헤로도토스 전설에 기반한다. 페니키아인이 수메르에서 온 것으로 본다. 왜인가. 수메르인은 독특한 도시 체제를 이루고 있었다. 다신론을 숭상한 수메르인은 도시 별로 각자 숭상하는 신이 달랐다. 하여, 때로 도시간 동맹과 전쟁을 시도하긴 했지만 제국으로 나아가지 않고 각 도시 독자성을 유지했다. 헌데, 수메르 이후 이와 같은 모습을 보여준 이들은 중동에서 페니키아인 외에 없는 것 같다. 그리스 지역은 알파벳 경로를 봐도 페니키아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인드라 추정은 다음과 같다.

   

   

기원 전 오천 년 경, 혹은 그 이전부터 바빌론에 농경문화를 정착시킨 수메르인이다. 헌데, 수메르인에게는 큰 단점이 있으니 군사력이 취약하다는 점이다. 해서, 아무리 고도의 문명도시를 이룩하더라도 순식간에 야만족의 침입을 받아 몰락하는 예가 잦았다. 역사적으로는 기원전 2,300년 전에 아카드어를 쓰는 셈족이 수메르를 정복했다고 나온다. 이때, 셈족은 마치 북방 민족이 중국 문화를 받아들이듯 수메르 문자 체계와 문화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헌데, 이러한 기록은 수메르 문명이 역사에서 사라짐을 의미할 뿐이다. 그 이전에는 침입이 없었을까? 당연히 있었을 것이다. 단지, 기록으로 남지 않거나, 기록을 하더라도 아직 발굴을 안 했거나, 침입 규모가 대대적인 규모가 아니었을 수 있는 것이다.

   

   

이때, 어떤 셈족, 혹은 이민족이 페르시아 만에 있던 수메르 도시를 공격하면서 수메르인더러 일주일 이내에 도시를 비우라고 요구한다. 만일 도시를 내놓지 않는다면, 총공격을 하여 몰살시키겠다고 하는 것이다. 이때, 수메르인은 도시를 내준 뒤 다른 지역으로 이주한다. 하여, 이주한 지역이  레반트 북부 지역인 것이다. 이 시기가 기원 전 3,000년 무렵이다. 역사에서 처음 페니키아인이 자신을 드러낸 셈이다.

   

   

이때, 레반트 북부 지역에 도착한 이들은 여러 부족일 수도 있고, 우르 지역에서 가나안으로 갔던 아브라함처럼 단일한 일족일 수 있다. 허나, 그 일족은 비록 적은 숫자이긴 해도 직계와 방계와 노예를 이끌고 레반트 북부에 도착했으리라 본다. 허나, 이들은 마치 스페인 추방령으로 포르투갈, 네덜란드, 남미로 간 유태인처럼 순식간에 지역 경제를 장악하고, 일족을 번성시켰을 것이다. 하고, 천 년이 흘렀다.

   

   

천 년이 흐른 뒤에 자신을 가나안인으로 인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불과 백여 년이 흘렀음에도 중국 교포들 상당수는 자신을 조선계 중국인으로 인식한다. 마찬가지로 미국 교포나 일본 교포 역시 자신을 한국계 미국인이나 한국계 일본인으로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한국에 거주하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자신을 몽골계 한국인, 베트남계 한국인, 미국계 한국인, 독일계 한국인, 프랑스계 한국인으로 생각한다.

   

이는 지역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서울로 이주해서 한 세대가 흐르면, 자신을 이북인이나 영남인이나 호남인, 충청인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북계 서울인, 영남계 서울인, 호남계 서울인, 충청계 서울인으로 인식한다. 더 나아가 한 세대가 더 흐르면, 특별한 조건이 없다면 서울인인 게다. 다시 말해, 국유본이 지속적으로 외부에서 압력을 행사하지 않는다면, 상당수는 정체성이 사라진다는 이야기다. 허나, 예외가 있다. 개성상인처럼 특별한 사연을 지닌 가문이고, 오래도록 탄압을 받았다면, 다른 이들과 달리 상당 기간 전통을 따를 것이다. 특히, 그 가문이 부자일수록!

   

   

페니키아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직계를 중심으로 한 소수 가문은 수메르 전통을 지키면서 가나안인과의 혼혈을 금하거나 하는 방식으로 페니키아인을 지배했을 것이다. 허나, 애초 방계 출신이거나 노예 출신인 이들은, 또한 직계이더라도 이후 권력 투쟁에 의해 방계가 된 이들은 가나안인들과 천 년간 혼혈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잃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과연 누가 살아남았을까. 수메르인이라고 다 같은 수메르인이 아닐 것이다. 상인 본능이 투철한 자들만이 수메르 사회 권력을 차지했을 것이다. 또한, 페니키아 권력을 장악했을 것이다.

   

   

해서, 페니키아인은 이중적인 모습으로 변모했을 것이다. 겉으로는 천 년이 지나니 가나안인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인 것이다. 이들이 대다수 페니키아인 보통 사람들일 것이다. 허나, 극소수 지배층은 여전히 수메르인이었을 것이다. 아니, 이들 역시 겉으로는 페니키아인이었지만, 수메르인의 전통을 지킨다는 점에서 수메르인인 셈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예언자 이사야가 페니키아인의 몰락에 안타까움을 지녔던 것이다. 구약을 보면, 신에게 선택받은 유태인 우월감이 하늘을 찌르는데, 유독 페니키아인에 대해서만 여러 대목에서 우호적이다. 왜? 왜? 왜? 그건 창세기가 말해준다 하겠다. 바로 이 대목을 회피하기 위해서, 국유본이 의도적으로 가짜 유태인론, 아슈케나지 음모론을 유포시킨 것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왜? 질투를 받지 않으려고. 정확히 말한다면, 동유럽 유태인에게 책임을 물리고, 홀로코스트에 앞장 선 서유럽 유태인인 로스차일드 책임을 면피하려고.

   

   

이러한 전통은 수메르/페니키아인이 카르타고인으로 변모해도 달라지지 않았다. 페니키아인은 수 백 년간 번성하다가 앗시리아인에게 패퇴한 후 식민지였던 카르타고를 거점 지역으로 한다.

   

   

이때, 수메르인은 페니키아인이 되고서도, 혹은 이후 카르타고인, 유태인, 네덜란드인, 미국인이 되고서도 잊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재미있는 수메르인 원칙이 있다.

   

   

무엇인가.

   

   

관리하나, 지배하지는 않는다.

   

   

수메르인은 지배하지 않고자 했다. 이유는 수메르인이 평화적인 민족이어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수익이 나지 않는다는 지극히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다. 한마디로 수메르인은 베니스의 상인 유태인, 샤일록과 같은 수전노였다.

   

   

수메르인이 누구인가. 전 세계를 항해하던 민족이다. 인도와 아프리카는 물론 남미와 태평양 지역까지 탐사했던 민족이다. 오늘날 남아 있는 남미와 태평양 고대 신화는 대부분 수메르인이 만든 신화라고 본다. 마야 문명 역시도 수메르 문명 영향 하에 있다고 본다. 오늘날 국유본이 이 문제를 희석시키고자 마야 문명을 수메르 문명보다 앞서거나 동등하게 하는 건 진실을 은폐할 목적인 게다.

   

   

헌데, 왜 수메르인은 이 지역들을 식민화하지 않았을까. 이유는 간단했다. 식민지 유지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수메르인은 아웃소싱의 천재들이었던 셈이다. 수메르인 사고방식을 한마디로 규정하면 경제 동물이다. 심지어 수메르인은 앗시리아인, 그리스인이 쳐들어올 때조차 앗시리아인, 그리스인과 전쟁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경제적으로 계산했던 것이다. 해서, 그들은 앗시리아인, 그리스인에게 지배받을 동안에도 도시 자치권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골치 아픈 정치나 군사력은 위임한다는 것이다. 군사력이 강한 족속은 경제를 모른다. 반면 자신은 경제를 안다. 타협이 가능한 것이다.

   

   

바로 이런 사고방식에서 특이하게도 다른 문명에서는 볼 수 없는 용병 제도가 발생한 것이다. 이는 전적으로 수메르인에게 기인하는 것이다.

   

   

수메르인은 알렉산더 대왕에게 멸망을 당하기 전까지는 자신의 전통을 지킨 것 같다. 하면, 그 전통이란 무엇인가. 제국을 만들지 말라, 식민지를 건설하지 마라, 정치에 과도하게 개입하지 마라 등등.

   

그런 수메르가 왜 식민지를 만들었을까. 알렉산더의 영향이 크다. 알렉산더는 식민지를 만들면서 피지배층에게 자신의 문화를 전파했을 뿐만 아니라 피지배층의 문화도 흡수했던 것이다. 이것은 남는 장사였다. 해서, 수메르인 역시 알렉산더 식 식민지를 건설했던 것으로 본다.

   

   

헌데, 카르타고가 식민지를 만들면서부터 신의 뜻인지 로마의 공격을 받는다. 카르타고가 식민지를 만드는 방식은 우수했다. 허나, 수전노 카르타고였다. 이에 대항한 체제가 있으니 로마였다. 로마와 카르타고 전쟁에서 승인의 결정적인 요인은 식민지 사람들에 대한 처리 규정이다.

   

   

카르타고는 야박했다. 용병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각종 중과세를 물린 반면 로마는 관대했다. 카르타고는 아무리 성공하더라도 이너서클에 진입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반면 로마는 능력만 있으면 노예에서 황제까지도 가능했다.

   

무엇보다 카르타고는 불신에서 멸망했다. 한니발이 끝내 자결한 것은 로마 제국 때문이 아니라 사태가 불리함을 느끼고, 막바지에 배신을 때린 카르타고 원로원의 밀고 때문이다. 두 명의 행정관이 상징한다. 잘 되면 서로 견제를 할 수 있어 발전을 보장한다. 허나, 위기 시에는 모래알이 되어 서로를 극히 불신하게 만든다. 마치 조선시대 조선통신사로 파견한 동인/서인과 같다. 과두제의 비극이다.

   

로마는 카르타고의 장점을 모조리 흡수했다. 행정관을 두 명으로 하여 세금 포탈 등을 막는 방법하며, 비상대국에는 독재관을 두어 대권을 위임하는 방식도 모두 카르타고, 아니 수메르에서 배운 것이다.

   

   

이제는 이런 비밀을 나열식이 아니라 체계적으로 드러낼 때가 왔다.

   

   

지금이다.

   

   

그것이 인드라이다.

   

   

전 세계에서 오직 하나, 인드라만이 이 문제를 접근할 수 있다.

   

   

허나, 현재까지 어떤 이유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수메르인은 알렉산더 대왕에게 굉장한 불쾌감을 느낀 것 같다. 다시 말하자면, 수메르인이 최초로 자신보다 선진적인 문화를 알렉산더에게서 느낀 것이 아닐까 싶다. 현재까지 인드라가 보기에는, 알렉산더 경쟁력은 기존 도식을 넘어섰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즉, 중동에서는 오래도록 야만족이 힘만 가지고서 대륙을 침략한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북방 민족이 오직 군사력만으로 중국을 침입한다는 것이다. 헌데, 이 도식이 깨졌다. 그 북방 민족이 오히려 선진 문화를 지니고 있다면?

   

   

알렉산더 대왕은 최초의 제국주의자였다. 기존의 대왕들은 그저 식민지 지역을 물리력으로 압도할 따름이지, 정신적으로까지 지배하는 것이 아니었다. 허나, 그것을 알렉산더 대왕이 해냈다. 이것이 인도에 영향을 주어 공사상을 일으키고, 중동에 영향을 주어 수메르족이 카르타고족으로 변모시키게 했던 것이다.

   

왜? 수메르족은 이해타산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하여, 알렉산더 식 식민지 지배 방식은 이전 식민 지배 방식보다 남는 장사였다. 해서, 수메르족은 한노, 혹은 마고 가문을 주축으로 하여 페니키아인에서 카르타고인으로 변모한다.

   

카르타고인은 최초로 식민지를 건설하는데, 바로 그 지역이 오늘날 리비아이다. 그 이전까지 수메르인은 경제 관념에 투철했다. 그 자신은 어떤 땅도 소유할 수 없다고 여겨 아무리 자신보다 미개한 족속이라도 땅을 임차한 뒤 지대를 냈다. 하지만, 알렉산더 대왕 이후로는 땅을 소유하기 시작했다.

   

   

땅을 소유했기에 수메르인이 고난을 받았던 것일까.

   

   

수메르인은 누구보다 식민지 경영에 앞섰다. 오늘날 로마 체계라고 알려진 상당수는 수메르인이 만든 카르타고 제도이다.

   

   

수메르인은 리비아인과 유태인을 대상으로 엄청난 노예제 집단농장 시스템을 만든다. 예서, 로마인보다 못한 점이 무엇일까. 수메르인은 결코 이민족이 자신과 같다고 여기지 않았다. 엄청난 이분법이다. 반면, 로마인은 이민족이 노력해서 결과가 같다면 로마 시민으로 인정했다.

   

   

수메르인은 최초로 독재 시스템을 만들었다. 수메르인 정치 구조는 300인으로 구성한 장로회의가 기본이다. 여기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권한이 있는 귀족이 중심인 자영 농민을 포함한 민회를 개최했다. 허나, 민회란 대부분 허울 좋은 것이기 일쑤였을 만큼 시민 역량이 매우 낮았다. 또한, 300인 원로회, 혹은 장로회가 하원 격이라면, 좀 더 위급한 일을 결정할 때는 오늘날 상원 격인 백인회 혹은 104인회가 판결을 내렸다. 이들은 수메르인 가문 대표자들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더 나아간다면, 장군이었다. 헌데, 이 장군은 영구 보직이었다. 하여, 대외적으로는 군주제처럼 보일 수 있었던 것은 장군이 영구 통치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 예가 한니발이다.

   

   

행정관은 두 명이었다. 임기는 1 년이었음에도 두 명인 것은, 그 기간 동안 해먹지나 않을까 하는 수메르인 서로의 경계심 때문이다. 이 경계심이란 매우 유명하여 한니발을 자살하게 만든 것이 수메르인 원로원이 로마에 밀고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제도로 인해 오늘날 공산 진영에서 두 명의 장교를 파견하지 않는가. 이 모든 건 수메르에서 기원하는 것이 아닌가 보고 있다.

   

수준 높은 문명에 비해 군사력은 턱없이 낮았던 수메르는 씨족장들의 장로회와 일반 시민의 성년남자로 구성되는 민회가 있었다. 헌데, 전쟁과 같은 도시의 사활에 직결되는 상황에서는 일시적으로 도시의 전권이 위임되는 왕이 선출되었다.

   

이러한 전통은 놀랍도록 페니키아/카르타고 정치체제와 일치한다.

   

근거는 셈족이다. 셈족이란 셈어를 쓰는 민족들을 말한다. 셈어에 속한 언어로는 고대와 현대 아카드어(Akkadian), 암하라어(Amharic), 아랍어(Arabic), 아람어(Aramaic), 그으즈어(Ge'ez), 히브리어(Hebrew), 몰타어(Maltese), 페니키아어(Phoenician), 티그레어(Tigre), 티그리냐어(Tigrinya) 등이 있다.

   

여기서 가장 오래된 언어가 아카드어인데, 아카드어는 문자로 수메르어인이 고안한 설형문자를 사용했다. 이 아카드어로 기록한 대표적인 문서가 길가메시 서사시이다.

   

- 졸려서 다음에~!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10 : 뉴라이트 스칼라피노와 박정희, 그리고 한반도 통일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1/11/10 03:10

http://blog.naver.com/miavenus/70123619783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10 : 뉴라이트 스칼라피노와 박정희, 그리고 한반도 통일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1/11/10

   

   

뉴라이트파 로버트 스칼라피노가 죽었다. 그가 죽었으면 인드라가 어떤 반응이라도 보여야 했었나? 뉴라이트 중앙일보는 어제 이정식을 내세워서 스칼라피노와 해방 정국에 관한 특집 기사를 헤드라인 기사로 올렸다. 마치 이래도 인드라 침묵할래? 하는 식이다. 인드라는 이 문제를 깊이 숙고하고, 글을 올리기로 했다.

   

   

"1946년 스탈린 "북한, 중공군 후방기지로" 지령 … 분단, 돌이킬 수 없게 됐다

[중앙일보] 입력 2011.11.09 03:00 / 수정 2011.11.09 09:12

이정식 교수가 밝혀낸 해방정국 한반도

지난 2일 노환으로 타계한 한국과 동아시아 전문가 로버트 스칼라피노 전 UC버클리 교수를 평생의 은사로 기리며 못 잊는 이가 있다. 이정식(80) 미 펜실베이니아대 명예교수 겸 경희대 평화복지대학원 석좌교수가 그다. 경희대 특강을 위해 방한한 이 교수를 6일 만났을 때 그는 스칼라피노와의 공저 『한국공산주의운동사』를 출간하던 1973년을 떠올리며 감회에 젖기도 했다.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스칼라피노는 어떤 인물이었나요.

   

"UCLA 정치학과에서 학사·석사 과정을 마치고, 박사과정을 다른 대학에서 하려고 물색하고 있던 차에 스칼라피노 교수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본인이 동양의 각국 공산주의를 연구하려고 하는데 자신의 조수가 되어 달라는 것이었어요. 곧바로 UC버클리 박사과정에 등록해 그의 제자가 됐고, 그게 내가 한국현대사 연구에 입문한 계기가 됐으며, 스칼라피노와 『한국공산주의운동사』를 공저로 내는 결실도 보았습니다."

   

-카이로회담, 얄타회담, 포츠담회담 등은 들어봤는데 런던 외무장관회담은 처음 듣습니다.

   

"런던 외무장관회담은 2차 대전 승전국인 미국·영국·소련의 외무장관이 모여 전리품을 어떻게 나눌지 논의하는 자리였습니다. 코리아가 언급되지 않았다고 해 한국 전문가들은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어요. 교과서에도 물론 실려 있지 않고요. 대개 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3상회의가 한반도에 관한 모든 것을 결정한 것으로 알고 있지요. 그런데 그보다 3개월 전인 45년 9월 12일부터 10월 2일까지 런던에서 먼저 3상회의가 열렸고, 이 자리가 한반도의 장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어떤 점에서 결정적입니까.

   

"미국과 소련의 관계가 급격히 냉각되었기 때문입니다. 런던 외무장관회담 이전까지만 해도 미국과 소련은 2차 대전 때 연합군으로 함께한 협력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아직 미온(微溫) 상태였는데, 런던 외무장관회담이 열리며 냉동 상태로 급변한 것입니다. 사실상 미소 냉전의 시작이라 할 수 있어요."

   

-런던 외무장관회담의 쟁점은 무엇이었나요.

   

"소련은 전후 일본의 통치에 참여하길 원했으나 미국이 거절합니다. 일본 홋카이도(北海道)의 북반부를 원했던 소련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소련을 자극한 것은 아프리카대륙 북단 리비아의 트리폴리 지역에 관한 것입니다. 소련이 트리폴리 지역을 할양해줄 것을 요구하지만 이 또한 영국과 미국에 의해 거절당합니다. 런던 외무장관회담 기록을 보면 당시 소련 외무장관 몰로토프가 '러시아는 지중해에 상선(商船)들을 위한 항구를 가지길 원한다는 발언을 한 후 이틀 동안 이 점을 강하게 역설했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졸랐다'고 해야 더 옳은 표현일 겁니다. 소련은 입구가 좁은 흑해에서 벗어나 지중해에 해군기지를 갖기 원했습니다. 상선을 위한 항구라고 했지만 뻔한 얘기지요. 소련 해군이 전 세계로 세력을 뻗치는 기지를 얻으려고 했는데 영국과 미국이 이를 거부한 것입니다 ."

   

-그것이 소련의 한국정책과 어떤 연관이 있나요.

   

"런던 외무장관회담에서 소련의 몰로토프 장관이 미국·영국의 장관과 부동항(不凍港)을 얻기 위해 싸웠던 게 45년 9월 15~16일이었어요. 미국과 영국의 반대에 부딪힌 후 소련의 한반도 정책과 중국 정책이 완전히 180도 바뀌게 됩니다. 9월 20일 스탈린이 "북한에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하라"는 비밀지령을 내린 게 바로 그 직후이지요. 미국과의 보조를 맞추려는 정책을 포기한 겁니다. 스탈린의 중국정책도 완전히 바뀝니다."

   

-스탈린의 중국정책이 어떻게 바뀌었다는 뜻인지.

   

"나는 당시 중국의 만주, 즉 동북3성 지역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때 기억이 지금도 납니다. 45년부터 48년까지 만주에서는 우리가 팔로군이라고 불렀던 공산당과 장제스(蔣介石·장개석)의 국민당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어요. 중국 내전이지요. 그런데 45년 8월 무렵만 해도 스탈린은 장제스의 국민당과 연합하려고 했어요. 45년 8월 9일 소련군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 후 만주로 진군을 했는데, 스탈린은 당시 공산군이 국민당군을 이길 능력이 없다고 판단하고 내전 포기를 공산당에 지령합니다. 그러나 런던 외무장관회담에서 미국과의 협조관계가 대결관계로 바뀌게 된 45년 10월 스탈린의 중국정책이 완전히 바뀝니다. 스탈린은 팔로군 30만 명의 만주 진출을 명령했던 것입니다. 이후 만주에서는 소련의 지원을 받는 팔로군과 미국의 지원을 받는 국민당군의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었어요. 처음에는 국민당군이 열세였어요. 그러다가 국민당군이 새로운 병력을 투입해 팔로군을 밀어버렸습니다. 불리한 형세에 놓인 중국 공산군은 46년 5월 북한 지역으로 퇴각합니다."

   

-중국 내전이 북한으로 확산되었다는 겁니까.

   

"46년 5월부터 북한은 중국 공산군의 후방기지로 변한 겁니다. 스탈린의 지령에 의한 것이지요. 북한은 중국 내전의 연장지역이 되고 말았습니다. 6·25전쟁 때 만주가 미군이 넘어갈 수 없는 지역이었던 것처럼 46년 5월부터 48년까지 북한은 장제스의 국민당군이 범할 수 없는 일종의 성소(聖所)였습니다. 북한으로 들어간 팔로군은 소련군의 훈련을 받으며 재편됐고, 이후 국민당군을 물리칠 힘을 비축했습니다. 북한은 46년엔 팔로군의 대피소였다가 47년부터는 국민당군에 반격을 위한 기지로 변합니다. 북한을 팔로군의 후방기지로 제공한 스탈린의 조치로 인해 한반도의 분단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당시 미군은 이런 상황의 변화를 알았나요.

   

"남한 주둔 미군정보처가 팔로군의 북한 이동 상황을 포착하고 있었어요. 북한에서 남하한 피란민들의 이야기를 통해, 그리고 정보원들을 통해 북한 각지에 나타난 팔로군들, 그들이 받은 훈련 상황, 그리고 기차를 통한 팔로군들의 이동 상황 등이 미군 정보보고서에 기록돼 있습니다."

   

-45~48년 만주와 북한은 스탈린의 독무대였군요.

   

"그렇습니다. 스탈린은 공산진영의 황제였어요. 공산진영의 이익을 위해 필요에 따라 자기가 통치권을 가지고 있던 북한을 중공군의 승리를 위해 제공 내지는 사용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요. 이상한 일이 있다면 우리가 아직까지 당시 만주에서의 사태가 북한에 미쳤던 영향을 바로 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지요."

   

-우리 교과서에는 이승만의 '정읍 발언'(46년 6월 3일)을 분단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그에 대비해 김구의 통일협상을 위한 북한행(48년 4월)을 높게 평가하는 경향을 보이는데요.

   

"국제사적 시야에서 한국현대사를 재조명해야 합니다. 해방정국은 우리 교과서에는 잘 보이지 않는 손이 뒤흔들었습니다. 지금까지 잘 몰랐던 진실이 운명을 결정했습니다. 한반도 분단의 수수께끼는 소련의 세계정책의 변화를 통해 풀어낼 수 있습니다. 그 키를 쥔 인물이 스탈린입니다. 해방 직후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열린 런던 외무장관회담과 스탈린의 대북한 비밀지령, 그리고 북한의 중국 팔로군 후방기지화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이해해야 비로소 수수께끼가 풀립니다. 북한이 중국 공산화의 후방지역, 내지는 연장지역으로 변한 상황에서 한반도의 남과 북이 합해 통일을 이룬다는 꿈은 춘몽(春夢)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될 경우 스탈린은 만주를, 그리고 나아가서 중국을 국민당과 미국에 넘겨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 후학들에게 한마디 부탁합니다.

   

"남한에서 일어난 일들의 발생 이유를 남한의 테두리 속에서만 찾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무엇보다 강대국들 사이에서 일어난 일들의 영향을 알아야 합니다. 나라가 작으니까 한국 연구가 비례적으로 쉬울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반대입니다. 한국현대사를 제대로 연구하려면 한국 자료는 물론 중국·일본·러시아·미국 자료를 찾아봐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총체적인 그림을 그리기가 힘듭니다. 시야를 되도록 넓게 가져야 하고, 러시아·중국·미국에서 일어난 일에 관심을 두어야 하며, 특히 해방 후의 일들에 대해서는 북한에서 일어난 일에 주목해야 합니다."

"

배영대 기자

   

   

로버트 스칼라피노는 누구인가.

   

"캔자스 레벤워스 출생. 샌타바버라대학교와 하버드대학교를 졸업하고 1948년 하버드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해 하버드대학교 강사를 지냈고, 다음해부터 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조교수, 교수(1956), 정치학과장(1962~1965), 명예교수(1990)가 되었다. 캘리포니아대학교 동아시아 연구소 소장을 지낸 아시아 문제 전문가로 《김일성》 《한국공산주의운동사 Communism in Korea》 《대전 이전 일본의 민주주의와 정당활동 Democracy and the Party Movement in Prewar Japan》 《현대 일본 정당과 정치 Parties and Politics in contemporary Japan》 《중국의 사회주의 혁명 Modern China and Its Revolutionary Process》 등 한국을 비롯하여 아시아에 관한 저서를 많이 썼다. 극동아시아문제 전문학술지 《아시안 서베이 Asian Survey》 편집장을 역임하였다.  "

[출처] 로버트 스칼라피노 [Robert A. Scalapino ] | 네이버 백과사전

   

첫째, 그는 빌더버그 멤버이자 삼각위원회 정회원이다. 국유본 분파 중 뉴라이트파이다. 한국 제자로 이정식, 최규선, 한승주 등이 있는데, 한승주 역시 삼각위원회 회원이다.

   

역대 인촌기념강좌 강사 명단

http://www.inchonmemorial.co.kr/inchon_chair03.html

   

뉴라이트 모임인 인촌기념강좌 강사 명단을 보면 브레진스키, 스칼라피노 등 삼각위원회 회원들과 일본 정치인 등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해서, 스칼라피노가 주요한 시기마다 한국에 적극 관여한 것, 국유본 권력이 바뀐 해인 1973년에 한국공산주의연구를 책으로 펴낸 점, 1980년대 이후 북한 4차례 방문한 점 (89, 91, 92, 95년), 이번 스칼라피노 죽음과 이정식 특별 인터뷰가 결코 예사로운 것이 아니다. 이는 한반도 변화, 즉 한반도 통일로 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왜?

   

"

   

   

    

특별히 한국인에게 전하는 그의 동북아 미래 전망 10제를 옮겨본다.

   

 Q1. 한반도 통일은 실질적으로 가능한가?

 A. 북한의 붕괴나 전쟁이 발발하지 않는 이상 한반도 통일은 당분간 불가능해 보인다. 북한의 빈곤 정도로 보면 한국이 지불할 통일 비용은 어마어마할 것이다. 나아가 군의 지배를 받아온 북한 주민에게 남북통일은 심각한 정치적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 따라서 통일이 이루어지려면 반드시 북한 내부에서 대대적인 정치 경제적 변화가 선행되어야 한다.

   

 Q2. 일본의 군국주의는 부활할 것인가?

 A. 일본에 군국주의가 부활할 조짐은 없다. 현재 일본의 대외정책은 안보 문제에 있어서 미국과 더욱 돈독한 관계를 원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최근 오키나와의 후텐마 미군기지 이전 문제에서 친미적 입장이 일본 내에서 많은 반발을 초래하고는 있지만 일본은 안보상 책임을 지거나 그 비용을 부담할 입장이 아니다. 이 문제는 중요한 과제로 계속 남을 것이다.

   

 Q3. 중국은 미국을 능가할 것인가?

 A. 현재의 추세가 계속되면 20~30년 후, 경제력에서 중국이 미국을 초월해 세계최고의 경제대국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극심한 빈부갈등, 해안지역 대도시와 낙후 내륙지역 간의 격차, 한 자녀 정책이 가져 올 고령화 문제 등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다. 중국의 정치적 영향력은 경제적 영향력을 따라가기 어려울 것이다.

   

 Q4. 사회주의를 고수하면서 중국이 세계 최대 경제대국이 될 수 있는가?

 A. 사회주의는 여러 형태로 존재한다. 중국은 민간 부문을 대대적으로 확대하는 데 성공했으나 정치적인 표현과 행동을 철저히 규제하고 있으며, 공산당 일당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독재주의가 다소 완화되고 개방주의, 국제주의, 중산층의 확대 및 교육기반의 확대 등을 추구하는 더 큰 문호 개방 요구에도 독재는 계속될 것이다.

   

 Q5. 미국, 일본, 중국 가운데 한국은 누구와 가장 가까워져야 하는가?

 A. 역사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준다. 한국은 모든 주변국과 비교적 균등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지리적으로 가장 먼 미국과 전략적 특수 관계도 지속하는 것이 국익에 가장 유리하다. 통일 후에도 한국은 상대적으로 작은 국가이므로 이러한 전략이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국익에 가장 바람직하다.

   

 Q6. 아시아는 유럽연합처럼 블록을 형성할 수 있는가?

 A. 아시아는 경제발전 수준으로 보나, 정치적 풍토로 보나 국가 간 격차가 너무 크기 때문에 당분간 EU같이 아시아 전체를 아우르는 조직을 이루는 것은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세안이나 상하이 협력기구 같은 지역주의적 성격을 가진 조직이 나오고 경제와 전략적 과제를 중심으로 한 양자간 합의체들도 나오고 있어 앞으로 아시아의 지역주의는 여러 형태로 발전할 것으로 보인다.

   

 Q7. 한국은 다문화 사회를 만드는데 올바른 길로 가고 있는가?

 A. 한국은 정치 경제 및 사회 발전을 이룩해 가는 과정에서 복합적인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 과정에서 서양 문화를 위시해 다른 여러 사회의 원칙과 관행을 도입하고 있다. 이 과정은 계속될 것이다. 반면 한국은 전통문화를 중시하고 있으니 이 상황은 결국 변할 것이다. 그러나 언제 어떻게 변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Q8. 한국은 진정한 강대국이 될 수 있는가?

  A.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분명 세계에서 중요한 지역에 위치한 나라 중 하나로 상당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나라 규모와 자원의 부족으로 남북통일을 이루더라도 한국은 세계 열강으로 등극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Q9. 북한은 붕괴할 것인가?

  A. 과거 많은 이들이 북한은 경제적 실패와 고립정책으로 붕괴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최근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건강 악화와 지도권 계승을 둘러싼 불확실성 등 몇가지 요인의 증가로 붕괴 가능성은 더욱 힘을 받았다. 그러나 북한의 위기 극복 능력은 생각했던 것보다 컸다. 북한의 붕괴를 구체적으로 예측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다만 가능성과 개연성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현재 북한의 붕괴는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군 세력과 민간 부문에서 조직된 정치 세력의 부재로 어디까지 가능성만 존재할 뿐이다.

   

 Q10. 아시아의 어느 나라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은가?

  A. 태평양전쟁 때부터 지난 70여년간 회의에 참석하거나 강연, 연구 목적으로 아시아를 60번정도 방문했다. 아시아에는 가보지 않은 나라가 없고 심지어 외딴 부탄과 고립된 북한에도 다녀왔다. 그러는 동안 아시아 각국의 지인들과 교우관계를 맺고 그 일을 항상 즐거워 했다. 나는 미국인이다. 그래서 미국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 그래도 나는 아시아에 계속 갈 수 있기를 바라며, 특히 한국 같은 멋진 나라에 다시 가기를 희망한다."

http://blog.daum.net/orrong/12752163

   

예서 보듯, 스칼라피노는 급격한 통일보다는 완만한 통일을 주장했다. 국유본 뉴라이트파 중에서도 노비네파에 약간 가까운 입장인 게다. 그런 스칼라피노의 사망은 스칼라피노 개인에게는 유감이 없지만, 한반도 평화와 통일, 경제 발전과 사회 복지를 위해서는 호재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한 시대가 가고 있는 것이다.

   

"스칼라피노는 빌더버그 회원이자 삼각위원회 회원인 동시에 한국전쟁에 관한 내전론을 주창하여 브루스 커밍스와 함께 한국 대학생들에게 잘 알려진 진보 성향으로 알려진 수정주의 학자이다. 또한 그는 현실 정치에 깊숙하게 개입하고 있다.

   

스칼라피노 美교수 방북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607042234471&code=100100

   

北 군부, 이례적으로 美 방북단 면담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2050748

   

"美허드슨 연구소의 로버트 두저릭은 31일 로버트 스칼라피노(버클리대 명예교수), 빅터 차(국가안보회의 아시아담당 보좌관), 닉 에버스탯 (미국기업연구소 연구원), 마커스 놀런드(국제경제연구소 연구원), 조너선 폴락(美해군대학 교수)등 쟁쟁한 한반도 전문가들의 논문 16편을 엄선, '한국: 동북아의 안보축'(Korea:Security Pivot in Northeast Asia)을 편찬해 냈다... 이들은 "한국전의 결과로 생긴 현재의 상태가 이 지역의 평화를 유지시키는 '전략적 구조(strategic architecture)'의 핵심이었기 때문에 한국은 동북아 안보의 관건"이라면서 "이러한 환경의 중요 요인은 주한 미군에 의해 보장되고, 주일 미군에 의해 강화되는 '팍스 아메리카(미국의 지배에 의한 평화)'에 있다"고 설명했다."

   

"한반도 통일돼도 미군 주둔해야"<美전문가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1371891

   

한국전의 결과로 생긴 현재의 상태가 이 지역의 평화를 유지시키는 전략적 구조(strategic architecture)의 핵심이라는 문구에 주의하라. 이 말이 무슨 말인가 하면, 한국전쟁 덕에 한반도에 미군을 주둔시킬 수 있는 명분을 획득했다는 의미다. 더 나아가 북한 정권의 존재로 말미암아 미군 주둔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게다. 그러나 근래 국제 환경이 국제유태자본이 더 이상 북한 정권을 용인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으므로 북한 정권 없는 미군 주둔이 필요하며, 이에 따라 십년 내 동북아에서 상상 이상의 사태가 등장할 가능성이 있다는 게다.

   

통일 이후에 북한에 미군이 주둔한다는 시나리오를 처음 말한 이는 고 윤한봉 선생이었다. 그 이야기는 내가 모임을 이끌고 광주에 내려갔을 때 직접 들은 이야기다. 선생의 말은, 미국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친중 통일국가이므로 안전장치로 미군 주둔을 원산쯤에 하면 미국이 통일을 허락할 것이라는 게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과연 이것이 윤한봉 독자적 견해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광주항쟁으로 미국으로 밀항한 이력이 있는 만큼 미국 쪽에서 흘러 다니는 소식을 전해준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일까. 이후 이와 같은 견해가 조용히 여기저기서 나와 정치권에서도 등장했다.

   

한미동맹 미래 공동협의 결과 보고서

http://weekly.hankooki.com/lpage/politic/200602/wk2006022213172137050.htm

   

이것만 봐도 김대중, 노무현이 국제유태자본이 시키는 대로 하는 '충직한 개'에 불과하였음을 잘 알게 되는 셈이다. 즉, 이전의 615이니, 햇볕이니 하는 것도 자신의 의지라기보다는 국제유태자본이 지시한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가령 햇볕은 미국의 포용정책에서 나온 것이다. 해서, 도널드 그레그가 햇볕정책을 만든 김대중 전 대통령과 1948년 미 국무성 정책기획 최고담당자로 대 소련 봉쇄정책의 기초를 놓았던 조지 케넌이 유사하다고 말한 것이다. 참고로 그는 전 주한 미국 대사이자 김대중 납치사건 당시 CIA 서울지부장으로 남북화해무드에 찬물을 끼얹고 박정희에게 물을 먹이고자 김대중 납치를 주도하였다고 내게 의심받는 인물이다. 김대중 납치 사건 배후는 국제유태자본이다?

http://blog.naver.com/miavenus/70031283893"

국제유태자본: 삼각위원회, 주한미군, 인도, 북핵

http://blog.naver.com/miavenus/70036365567"

 http://blog.naver.com/miavenus/70087754302

   

둘째, 스칼라피노는 동아시아 전문가이다. 특히 그를 유명하게 한 것은 <콜론 보고서>이다. 스칼라피노 등이 작성한 콜론보고서는 1959년 9월 미 의회에 제출한 보고서였다. 헌데, 국유본이 이 보고서를 번역해서 1960년 1월부터 5월까지 야당 잡지인 '사상계'라는 잡지에 기고한 것이다. 보고서 내용은 이승만 정권의 동요로 인한 불안한 정세를 우려하면서 정당 정치가 실패하면 언젠가 군사 지배가 등장할 것임을 경고한 것이다.

   

일은 실제로 일어났다. 과연 국유본이 예측해서 그대로 일어난 것일까? 아니면, 국유본이 먼저 시나리오를 던져준 뒤 일을 진행시킨 것일까^^! 인드라는 확신한다. 후자인 것을! 이것이 국유본 일처리 방식이다.

   

<콜론 보고서>를 접한 젊은 장교들이 당시 모두 우국충정에 들끓어서 너도 나도 정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나폴레옹부터 시작해서 나세르, 케말 파샤까지 (카스트로도 넣어줄까~^^?) 당시 청년 장교들은 이대로 주저 앉아 있으면 국제 사회(미국)가 우리를 우습게 볼 것이라고 여겼다는 것이다.

   

419 학생운동 배후에 국유본이 있었다. 미일안보조약과 엔블록권 강화를 위해서 한일수교가 필요했는데, 항일운동가 이승만 대통령이 어떤 경우에도 일본과 교섭은 없다고 완강히 거부했기 때문에 이승만을 제거해야 했다. 그렇다고 쪽발민주당을 내세울 수 없었다. 이유는 아직 해방한 지 얼마 안 되었기에 쪽발민주당 넘들이 윤보선을 비롯하여 죄다 쪽발이라는 것을 저학력 저소득층 기층민중인 국민이 더 잘 알았다. 지금이야 한국 역사 교과서 조작으로 고학력 고소득층 학생들이 모를 뿐이다.

   

교과서는 진실을 가르치는 게 아니야. 국유본 세뇌용이다. 그래서 국유본 하위기관, 전교조같은 넘들이 필요한 것이다. 조작질 전문이잖아, 전교조 색희들이 말이야. 초창기 의식있던 교사들을 죄다 퇴출시키고, 지금 남은 색희들은 정말 쓰레기 같은 색희들이다. 도저히 선생으로 볼 수 없는 색희들이 지금 교사질을 하고 있어. 무뇌아 넘들이지. 

   

해서, 국유본이 택한 대안은 박정희였다. 박정희는 친일 좌파였다. 아버지가 동학교도이고, 형은 좌파로 대구 폭동 때 죽었다. 박정희가 젊어서부터 따르던 형이 공산주의자였는데, 그 형은 집안 사람들 중 하나가, 특히 박정희가 레닌이나 나폴레옹이나 이성계 같은 인물이기를 기대한 것 같다. 형인 자신은 백이숙제처럼 살되, 동생에게는 담대한 길을 권한 것 같다. 해서, 박정희 자신도 여순반란 사건에 가담했다가 사형당할 뻔했는데, 국유본이 구출해주었다.

   

교과서에서는 밑의 사람들이 구명을 해주었다는데, 죄목이 위중한데, 밑에서 구명운동한다고 풀려나나? 절대 아니다. 국유본이 박정희를 그때부터 주목한 것이다. 게다가 풀려난 박정희가 한국전쟁 중에도 조신하게 있어도 모자를 판에 틈만 나면 정권을 뒤집어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점이다. 누군가 뒤에서 밀어주지 않고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자신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516 혁명이 일어났는데, 이때, 혁명은 총 한 방 없이 끝나면 허무하니까, 살짝 총성 한 번 울리고 끝났다. 러시아 혁명이나 쿠바 혁명과 같았다. 혁명이 일어난다는 조짐이 곳곳에서 있었음에도 군 당국, 정부, 미국 CIA 어느 누구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딱 한 명이 이 혁명을 저지하려고 나선 이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김재규였다. 그런 김재규를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장에 임명한 것이 과연 박정희 의지였을까? 아니면, 국유본 의지였을까^^?

   

무엇보다 인드라가 중시하는 건, 이런 박정희를 누가 감시했겠는가이다. 현재 인드라 추정으로는 다음과 같다. 이승만 때는 유한양행 유일한이다. 유일한은 CIA 전신인 OSS 출신이다. 박정희 때는 김종필로 보인다. 중앙정보부를 만들었는데, 그간 국유본 관례상, 이런 직위를 아무에게나 맡기지 않는다. 전두환 때는 장세동으로 보이며, 노태우 때는 박철언에게 이 역할을 맡겼다가 박철언이 제 멋대로 행동하는 바람에 국유본 눈 바깥에 난 듯싶다. 김영삼 때는 권영해, 쪽발 돼중 때는 박지원, 쪽발 놈현 때는 문재인, 이명박 때는 정두언 이렇게 추정한다. 확정적인 것이 아니라 잠정적이다. 다른 인물이 감시자, 즉 국유본 간첩일 수 있으니 의견 개진 부탁드린다.

   

하여간 소련이든, 북한이든, 한국이든, 일본이든, 2인자를 키워서 2인자가 권력자를 감시하게 하는 것이 국유본 지배 방식이라는 점에서 이 점을 주의깊게 연구하는 분들이 많이 나왔으면 싶다.

   

스칼라피노는 516 혁명 직후에 또 등장한다. 혁명 직후 스칼라피노는 내한하여 군사 혁명 관계자들을 만난다.

   

http://blog.naver.com/kslnollo/80127536082

   

이 시기 박정희, 김종필을 비롯한 군사혁명가들은 시장경제가 아닌 계획경제, 다시 말해,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생각했다는 것이다. 즉, 이들이 말하는 진정한 반공이란, 이북 체제보다 더 잘 사는 체제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당시 이북이 남한보다 더 잘 살았으니까. 김일성은 군사혁명이 일어난 직후, 남한에 좌파 정권이 들어섰다고 판단하여 박정희 형 친구를 급히 남파하여 박정희와 접선하려고 했다. 당시 박정희와 공화당 핵심 인사들 상당수가 남로당 전력이 있는 좌파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하면, 박정희도 뉴라이트파가 아니냐고 오해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아니다. 빅터 로스차일드파이다. 이 시기, 국유본은 오직 빅터 로스차일드파만 있었을 뿐이다. 뉴라이트파는 1973년 국유본 권력이 빅터 로스차일드에서 데이비드 록펠러로 교체한 다음에 등장한 것이다. 해서, 이 시기까지 스칼라피노 역시 빅터 로스차일드파였던 것이다.

   

박정희는 빅터 로스차일드 계열이다. 해서, 혁명이 성공하자 세계에서 가장 먼저 승인한 정권이 이스라엘 중도좌파인 마파이 정당이다. 오늘날 이스라엘 노동당의 전신이 마파이당이다. 마파이당이 오랜 기간 독재를 했는데, 이 시기 이스라엘 정치를 조종한 이는 빅터 로스차일드이다. 왜?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를 만든 사람이 빅터 로스차일드이니까~!

   

셋째, 1973년에 스칼라피노와 이정식의 <한국공산주의운동사>가 나왔다. 이 책은 1987년 돌베개로 나왔다. 이 책은 서대숙의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 연구, 화다, 1985>와 함께 등장하여 한국에서 자생적인(?) 주사파가 나오게 만든 원인을 제공했다.

   

물론 번역서는 1980년대에 집중적으로 나왔지만, 스칼라피노와 같은 수정주의 학파 문서들을 번역한 일본 카피본들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한 문서들이 팜플릿 형태로 1970년대말부터 대학원을 중심으로 해서 대학가에 퍼지고 있었다.  

   

예서, 정통주의와 수정주의란 무엇이냐. 한국전쟁에 관한 견해다. 정통주의란 김일성 북침으로 벌어진 전쟁이 한국전쟁이다. 반면, 수정주의란 계급 갈등이 폭발하여 발생한 내전이 한국전쟁이다. 또한, 정통주의는 가짜 김일성을 내세운다. 반면, 수정주의는 진짜 김일성을 내세운다. 정통주의란 좌파와 우파 갈등을 내세운다. 수정주의는 매국 대 항일운동을 내세운다.

   

해서, 이 시기 자유 진보 성향인 이들은 대부분 수정주의를 지지하게 되었던 게다. 허나, 바로 이것이 국유본의 함정일 줄이야~!

   

정통주의를 만든 것도 국유본이고, 수정주의를 만든 것도 국유본이다. 만든 이유는 필요해서이다.

   

해서, 인드라가 초간단 정리하겠다.

   

김경천

   

   

김일성 진짜다. 보천보 전투도 허접했긴 하지만, 사실이다. 허나, 김일성은 여럿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다시 말해, 만주에서의 김일성 전설 모두가 다 김일성이 한 것이 아니다. 허나, 한 때, 김일성이 활약한 것도 사실이다. 어차피 이 시기 활동이란 열 배 뻥튀기는 기본이니까. 하고, 백마 탄 김일성 장군 전설은 김경천일 가능성이 크다. 김경천은 일본 육사 출신으로 만주로 망명가서 백마 타고 항일운동을 하다가 소련에 간첩으로 몰려 소련에서 1942년에 죽었다. 소련은 김경천의 대체물로 김일성을 선택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김일성은 가짜는 아니나 김일성 전설을 만든 여러 김일성 중 하나여서 김경천이 죽자 대안으로 나온 인물이다. 참고로 김일성 애비는 아편 팔던 쪽발이였다. 해서, 김일성 친지들 중에 상당수가 쪽발이다~! 박정희 아버지는 동학교도, 김일성 애비는 아편 팔아 떼돈을 벌다가 공산주의자에게 총맞아 뒈진 쪽발이~! 해서, 북한 초대 내각을 보면, 남한 주사파들이 보면 피를 토할 정도로 쪽발이들이 굉장히 많다. 

   

http://blog.naver.com/miavenus/memo/70123201442

   

뭐, 하긴 지금 주사파들이 어디 이념으로 하나. 이렇게 죽나, 저렇게 죽나, 출세 한 번 하고 죽자는 생각으로 하는 애들이다. 모르는 것 아니다. 설사 김일성이 쪽발이고, 북한 주민을 수백만 학살하더라도 주사파들은 김일성을 영원한 인류의 어버이로 생각할 것이다~! 휴~! 세뇌가 십 년만 넘으면 삶이 된다. 삼십 년 흐르면 진리가 된다 ㅠㅠㅠ

   

http://blog.naver.com/yukin48/50089192223

   

좌파냐, 우파냐. 매국이나 항일운동이냐. 이 구도는 빅터 로스차일드이냐, 데이비드 록펠러이냐 하는 것이다.

   

빅터 로스차일드 시기에는 좌우파를 주요 지표로 삼았다. 이때, 좌파는 좌파 민족주의요, 우파는 우파 자유주의였다. 해서, 중도좌파 민족주의 정권인 박정희 정권 주요 반대자들이 우파 자유주의자였다. 물론 우파 자유주의자 본질은 쪽발민주당이었다.

   

http://blog.naver.com/miavenus/70027609268

   

해서, 이 구도를 깨야 했다. 데이비드 록펠러는 왜 한국 정치를 중시하나? 이는 오늘날로 보면 안다. 왜 국유본은 변방이랄 수 있는 시리아, 예멘, 튀니지, 리비아 같은 나라에서 재스민 혁명을 일으키나. 변방에서 바람이 불면 이 바람을 이용해서 중심부에서 일을 원활히 할 수 있다. 마치 그리스에서 시끌시끌해서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것과 같다.

   

한국 정치를 움직이려면? 그중 하나가 이념적인 작업이었다. 당시 박정희 왈, 한국에는 혁명이 두 번 있었는데, 한 번은 동학혁명이요, 다른 하나는 516 혁명이라고 말할 정도로 민족주의를 강화시켰을 때이다.

   

이런 때에 스칼라피노의 <한국공산주의운동사> 출간은 박정희에게 위협이요, 김일성에게는 호재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 빅터 로스차일드가 한국전쟁을 위해 김일성을 줄기차게 밀어주다가 미일안보조약을 위해 박정희를 밀어주어서 김일성이 갈피를 못 잡고 헤매고 있을 때였다. 이럴 때, 새로 바뀐 국유본 주인이 이제는 다시 김일성이다, 하니 김일성이 만세를 부르고 싶지 않겠는가. 반대로 박정희는 1960년대의 김일성처럼 위기의식을 느끼고 한국판 주체체제인 유신체제로 달려갔던 것이다. 소련과의 비밀 협정 등 비동맹 외교 강화, 남북회담으로 우리민족끼리 대단결, 원자폭탄 개발 등등등.

   

더 이야기하는 것은 이후 백문백답에서 상술하기로 하고.

   

   

   

국제유태자본론 없이는 이 기자회견을 이해할 수 없다

   

   

딱 하나만 이야기하자.

   

   

   

전두환이 집권하는데, 굳이 광주항쟁이 필요했을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지금 시리아 등 중동 지도자들을 보라. 얼마든지 집권 가능하다. 문제는 국유본이었다. 국유본이 결정하면 무너진다. 봐주니까 안 무너진 것이다. 해서, 전두환이 굳이 광주항쟁을 일으킬 필요가 없었다. 유신체제를 계속 이어간다 해서 뭐랄 사람도 별로 없었다. 혹자는 시민들이 많이 반대했다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지식인 층과 기독교인 일부 등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왜 전두환은 광주항쟁을 일으켰을까. 아니, 질문을 똑바로 하자.

   

국유본은 왜 광주항쟁을 일으켰는가.

   

하나, 신자유주의 도입 때문이다. 박정희가 완강하게 신자유주의를 거부했다. 박정희의 5대 업적이 무엇인가. 1. 산별노조와 전임노조간부 임금 보장. 2. 사회주의 의료체계. 3. 친환경 그린벨트로 우리 강산 푸르게. 4. 교육 평준화. 5. 새마을운동.

   

이러한 업적은 삼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세계가 인정하는 업적이다. 오직 한국에서만 푸대접을 받지, 전 세계적으로 박정희는 성공한 지도자 중 하나이다. 이차대전 이후 식민지 국가 중에 선진국이 된 나라는 한국 하나 뿐이다. 이 역할을 지금 뉴라이트는 정주영으로 돌리려고 정몽준을 한반도 넘버원으로 만들었는데, 박정희이다. 정주영은 아무리 드라마 영웅시대 등으로 미화해도 박정희의 짝퉁이었다.

   

국유본은 박정희 업적을 모두 말살하기 위해서 한국 최초의 신자유주의 정권, 전두환 정권을 출범시킨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박정희 후계자가 아닌 박정희와 차별하는 정권이 들어서야 했다. 이를 위해서는 비상사태가 필요하고, 신헌법이 필요했다. 제 5공화국이다.

   

둘, 새로운 정치 구도를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전의 구도는 도농간 구도였다. 도시는 야당, 농촌은 여당이었다. 이 구도를 지역 구도로 바꾸어야 했다. 왜? 데이비드 록펠러와 뉴라이트는 근본주의 종교 갈등, 지역 갈등을 냉전구도를 극복할 효과적인 수단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해서, 한국에서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호남을 타격해서 지역 갈등을 만든 것이다.

   

국유본은 이 방식을 여러 가지 목적으로 이미 동유럽 유태인에게 써먹은 바 있다. 동유럽 유태인을 고립시켜 오히려 유럽인들에게 탄압받게 만드는 방식이다.

   

처음부터는 곤란하니 차츰 차츰 구도를 만들어가서 마침내 오늘날 영호남 구도를 만들어낸 것이다. 인드라가 강조하는데, 1987년 이전에 영호남 갈등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국유본이 전혀 없는 걸 만들지는 않는다. 있는 것을 열 배 뻥튀기하는 게 국유본이니까. 국유본이 지난 역사를 연구해서 갈등 요인을 분석해서 뽑은 자료로 보니 활용 가능하다 여겨 나온 게 영호남 갈등인 게다. 헌데, 사실 조선 시대에는 영호남 갈등보다는 평안도/함경도 출신 갈등이 더 심했다. 홍경래 난만 봐도 알 수 있다. ㅠㅠㅠ 왜 한국전쟁 직후 남한에서 평안도/함경도 출신들이 득세한 줄 아는가? 그만큼 그들이 오랫동안 설움을 당해서 독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970년대 중후반 이후부터 국유본이 작업을 한 것인지 여기저기서 호남 안티를 마구 만들어내는 식으로 작업을 걸고, 광주항쟁으로 꽃을 피운 다음에 오늘날에는 오히려 쪽발민주당을 제외하고서는 호남/호남인 우대 정책을 써서 목적을 충실하게 달성한다고 할 수 있겠다. 국유본이 참 재미있는 게, 쪽발민주당에서는 오히려 호남인을 차별하게 만든다 ㅎㅎㅎ.

   

대표적인 예가 동교동계를 아예 묵사발을 낸 것이다.

   

아무튼 이번 광주 번개에서 다시 한 번 느꼈는데, 호남인들도 뭔가 이상하다라고 느끼는 분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워낙 강렬하게 세뇌 작용을 시켜서 어렵다고 보았는 데도 세뇌가 풀리는 분들이 생겨나는 걸 보면 국유본이 완벽하지는 않은 것 같다. 정말 이중 삼중으로 세뇌 결계를 펼쳐서 빠져 나갈 호남인이 별로 없다고 보았는데~!

   

하여간, 기존 유신 체제로 가는 건, 계속 도농 구도로 간다는 것이다. 이 구도는 사회주의 대 자유주의 구도이니 안 될 말이다. 신자유주의가 달리 신자유주의인가. 예서, 전두환이 무슨 신자유주의야, 라고 반문할 사람이 있겠다. 천재 경제학자라던 김재익이라고 아는가. 이 사람이 대표적인 신자유주의자다~! 또한, 두발 자유화, 교복 자유화. 전두환 때 일어난 일이다. 학원 자율화도 마찬가지이다. 동시에 전두환은  민족주의을 넘어서 국수주의로 가야 했다. 그것이 국풍 81이요, 한단고기이다. 그런 전두환인데, 독도 문제는 이승만, 박정희와 달리 쪽발 돼중이 따라했듯 침묵하는 정책을 펼쳤다^^!

   

아울러, 여기서 선거를 하면, 야당이 무조건 이긴다고 여기는 환상이 있다. 아니다. 선거는 국유본이 장악했다. 빅터 로스차일드가 계속 집권했다면, 박정희 다음으로는 쪽발 돼중이 집권할 예정이었다. 쪽발 돼중이 신민당에서 김영삼과 이철승을 물리친 건 99% 중앙정보부의 힘이다. 즉, 국유본의 힘이다. 당시 국유본 주문은 박정희와 쪽발 돼중으로 대선을 치루되, 승부는 1%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하라는 것이었다.

   

해서, 전두환 대 쪽발 돼중이든, 전두환 대 김영삼이든, 전두환이 누구와 상대하든, 전두환이 얼마든지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이는 1987년 대선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광주항쟁을 일으킨 건 지역 감정을 일으켜서 정치 구조를 바꾸기 위해서이다.

   

셋, 쪽발 돼중을 키우기 위함이다. 쪽발 돼중은 세 가지 이유로 유용했다. 1. 향후 지역 구도에서 쪽발 돼중이 역할을 해서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2. 광주항쟁으로 운동 진영에서 김영삼보다 도덕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우위에 설 수 있기에. 실제로 인드라가 1987년 마지막까지 도심에서 찌라시를 뿌리면서 노태우 당선 저지운동을 할 때 상급에서 지시내린 말이 뭐냐면, 김영삼이 당선되지 않아도 부산에서는 별 일이 없을 것이다, 허나, 쪽발 돼중이 당선 무산하면 광주 인민이 다시 일어날 것이다. 제 2의 광주항쟁이 일어날 것이다. 해서, 우리는 쪽발 돼중을 지지해야 한다.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허나, 노태우가 당선했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 니기미, 이때, 인드라는 중요인물도 아닌데, 잡혀가는 줄 알고, 집에서 피신해서 지방을 한동안 전전했잖아. 제기랄~! 3. 국유본이 원하는 대로 신자유주의를 시키는 대로 하기 위해. 실제로 역대 대통령 중 쪽발 돼중 만큼 국유본 지시사항을 충실하게 한 이가 없다.

   

역대 대통령과 북한 주석들은 모두 국유본이 임명했다. 헌데, 국유본이 지시한 대로 충실하게 한 대통령을 들라면, 인드라는 박정희, 쪽발 돼중, 이명박을 들겠다. 이들은 국유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아는 대통령이었다. 해서, 국유본 지시를 따라도 한국 국익에 이바지한 면도 없지 않다. 그래서인지 국립묘지에는 박정희, 쪽발 돼중이 있는데, 인드라 생각으로는 이명박도 반드시 국립묘지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이승만,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쪽발 놈현 이런 대통령들은, 국유본 지시를 충실하게 따랐지만,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즉, 무식한데, 부지런하기만 했던 대통령들이 아니었나 싶다. 이런 대통령을 국유본이 임명하면, 한국인도 같이 고생한다. 해서, 한국인들은 간절하게 기도해야 한다. 국유본이여! 허접한 넘들을 제발 대통령으로 뽑지 말아주세요. 이왕 뽑아도 박정희, 쪽발 돼중, 이명박 같은 대통령을 뽑아주세요!라고 해야 한다.

   

박정희, 쪽발 돼중, 이명박은 대통령이다. 존경할 분들이다. 반면 나머지 대통령들은 대통령이니까 존경해야 하지만, 가급적 교과서 같은 데서 인용하지 않았으면 싶다. 후손을 위해서라도 언급을 하지 않는 것이 국익을 위한 일인 것 같다.

   

   

자, 이제 결론으로 가자.

   

핵심은 무엇인가. 이제 변화하는 시대인 게다.

   

국유본은 늘 준비한다.

   

1950년 한국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1945년부터 준비한 것이 국유본이다.

   

그처럼 1980년 광주항쟁을 일으키기 위해 1973년부터 준비한 것이 국유본이다.

   

이제 또 삼십 년이 흘렀다. 2010년이다.

   

독일 통일과 같은 새로운 이야기가 나와야 한다.

   

김정일이나 김정은이 평양에서 평양시민을 향해 탱크로 수 천 명을 죽이는 쇼가 나와야 한다.

   

국유본은 능력이 있다. 왜 안 하나?

   

충분하게 시나리오를 제공하지 않아서다. 여러분들이 나서야 한다. 한시라도 빨리 한반도 평화통일과 경제발전, 사회복지를 위한다면 나서야 한다.

   

하고, 국유본은 지금 입질을 하는 중이다. 이제까지 정통주의/수정주의를 만든 것이 국유본이다. 관련 자료들을 국내 학자들이 모를까? 운동권이 모를까? 다 안다. 그럼에도 왜 침묵하나?

   

가령 어용관변 부동산업자 강만길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런 애들이 학교에서 지랄하고 있는데, 누가 감히 다른 이야기를 한다는 이야기인가. 안 그래도 교수되기가 하늘의 별따기인데? 강만길 같은 넘 앞에서 빤쓰 벗고 춤을 춰도 될까 말까 한 것이 요즘 학계 세상이다. 기득권이 한순간에 사라지지 않는다. 십 년은 간다. 그처럼 수정주의파들도 십 년은 간다. 정통주의파도 십 년은 갔다. 다만, 이제 막바지다. 북한 인권 문제만 나오면 수정주의파들 속으로 한숨을 푹푹 쉰다.

   

바로 이런 물꼬를 과감하게 트겠다는 것이 이정식과 뉴라이트인 것이다. 이미 젊은 층에서 호응하고 있다. 허나, 인드라는 이것만으로 부족하다.

   

2015년 이내에 통일이 되어야 한다.

   

국유본은 48시간 내에 김정일을 숙청할 수 있다.

필요한 것은 시나리오이다. 즉, 명분이다.

   

한국인이여!

통일을 원하는가!

그렇다면, 통일을 하자!

평화통일로 경제위기를 넘자!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9 : 아인슈타인의 72 법칙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1/11/09 03:10

http://blog.naver.com/miavenus/70123521675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9 : 아인슈타인의 72 법칙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1/11/09

   

1. 72 법칙

   

단리란 초기 원금을 고정하여 원금에 대해서만 이자를 계산하는 것이고, 복리란 단리와 달리 이자가 붙은 다음 회차에는 이자를 원금에 포함시켜 변동한 원금에 이자를 계산하는 방식이다. 그만큼 복리 계산이 복잡하기 그지 없는데, 회계하는 분들이 복리 이자 계산을 쉽게 하는 방법으로 72 법칙을 사용하곤 한다

   

72 법칙이란 무엇인가. 당신이 가진 원금을 복리 예금에 넣었을 때 이자가 불어 언제 두 배가 되는지를 쉽게 계산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대가 연이율 4% 복리 이자로 예금을 든다 하자. 하면, 당신 계좌가 원금의 두 배가 되는 때는 72 나누기 4 해서 18 년이다. 또한, 그대가 연이율 6%로 복리 이자로 예금을 들 때, 당신 계좌가 두 배가 되는 때는 72 나누기 6 해서 12 년이다.

   

신기하지 않은가? 그 복잡한 복리 이자 계산이 이토록 순식간에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이 말이다.

   

해서, 이 방식을 써서 지난 인월리에서 했던 바빌론 연습 문제를 다시 풀어보자.

   

기원 전 이천 년 전에 바빌론에서는 은을 대부할 때 평균 월 이자로 1/60 미나를 받았다. 하면, 총이자액이 원금 만큼 되는 때는 언제일까? 즉, 원금의 두 배가 되는 때는 언제일까? 이때는 단리였으므로 단리로 계산하자.

   

1 년은 12 달이니 연 이자로 하면 연이율 12/60 미나이다. 해서, 이자율이 20 %이니 백분율로 하면 100/20 해서 5 년이다. 풀면, 12/60 미나를 매년 다섯번을 내니까 60/60이 되어 원금과 총이자액이 같아지는 것이다.

   

하면, 이때, 연 20% 이자율로 복리를 하면 어떠한가.  72/20이니 3.6 년이다. 이자와 원금이 같아지는 시기가 무려 1.4 년이나 단축을 할 수 있는 것이다.

   

72 법칙은 이자 말고도 무궁무진하게 사용할 수 있다.

   

인플레이션을 감안하여 현재 자신이 가진 현금이 1 억이라고 할 때, 인플레 영향을 받아 자신의 돈이 딱 절반이 되는 때가 언제인가를 계산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인플레이션이 매년 7.2 %씩 진행한다면, 당신의 돈은 십년 뒤에 현금 가치가 1 억에서 오천만 원이 되는 셈이다. 만일 물가가 매년 3 %씩 진행한다면, 당신의 돈은 24 년 뒤에 현금 가치가 1 억에서 오천만 원이 되는 셈이다.

   

일인당 국민 소득을 계산할 수도 있다. 현재 이만 달러라 한다면, 사만 달러가 되는 해는 언제일까. 매년 6% GDP가 성장한다면, 12 년 뒤에 일인당 국민 소득, 혹은 일인당 GDP가 사만 달러가 되는 셈이다.

   

또한, 매년 인구증가율이 1 %라고 했을 때, 오천만 명이 일 억 명이 되는 해는 언제인가. 72 년 후이다.

   

아이가 태어났다. 이 아이가 대학을 졸업할 무렵인 24 살 때 종잣돈을 주어 사업을 하든, 뭘 하든 독립을 시키고 싶다. 종잣돈으로 오천만  원을 모았을 때, 3 % 복리 예금으로 계산했을 때 24년 뒤에 얼마가 될까. 72 나누기 3은 24이니 24년 뒤에는 일억 원이다. 

   

2. 아인슈타인이 72 법칙을 발견했을까?

   

"Compound interest, it's the most powerful force on earth." 아인슈타인은 복리 법칙을 두고 "복리는 인간이 발명한 가장 위대한 발명이다. 지구상 가장 큰 힘이다." 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함과 동시에 팔 대 불가사의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건 록펠러도 말했다고도 하고 확실하지 않다.

   

아무튼 아인슈타인은 72 법칙에 대해 말했다. 이때, 72는 통밥으로 찍은 것일까? 과연 그런가?

   

"상수 e탄젠트 곡선의 기울기에서 유도되는 특정한 실수무리수이자 초월수이다. 스위스수학자 레온하르트 오일러의 이름을 따 오일러의 수로도 불리며, 로그 계산법을 도입한 스코틀랜드의 수학자 존 네이피어를 기려 네이피어 상수라고도 한다. 또한, e는 자연로그의 밑이기 때문에 자연상수라고도 불린다.[1] e는 π, 1, 0, i 등과 함께 수학의 중요한 상수로 취급된다.[2]

e는 다음의 식으로 표현되는 급수의 값이다.[3]

e는 무리수이기 때문에 십진법으로 표현할 수 없고 근사값만을 추정할 수 있다. 소수로 나타낸 e의 근사값은 대략 다음과 같다.

...

   

e가 계산된 최초의 기록은 1618년 존 네이피어에 의해 발간된 로그표이다. 그러나 네이피어는 로그 계산의 과정에서 나온 결과 값만을 간단히 다루었을 뿐 e를 상수로 취급하지는 않았다. 네이피어의 로그는 N = 107(1 10 7)L 과 동치이다. 이를 오일러가 정의하여 오늘날까지 사용하고 있는 로그함수 정의로 옮기면 네이피어의 로그는

인 로그함수 이다. 위의 로그에서 사용된 밑은 e의 역수인 1/e와 매우 가까운 근사값이다.[4][주해 1] 후일 윌리엄 오트리드가 네이피어의 로그표를 사용하여 로그 계산자를 만들었지만 그 역시 e를 특별한 상수로 취급하지는 않았다.[5] e가 특정한 상수임을 발견한 사람은 자코브 베르누이 이다. 그는 복리 이자의 계산이 다음과 같은 극한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6]

베르누이는 위의 식이 수렴한다는 것과 그것이 특정한 값이 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물론 그 값은 e 이다. 베르누이가 정리한 위의 급수를 처음으로 상수로서 표현한 사람은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이다. 라치프니츠는 1690년에서 1691년 사이에 크리스티안 하위헌스에게 쓴 편지에서 이 급수를 "b"로 표현하였다. 한편, 오일러는 1727년에서 1728년 사이에 이 상수를 e로 표현하여 사용하기 시작하였다.[7] e 라는 표기가 정식 출판물에 처음 등장한 것은 1736년 출판된 오일러의 《메카니카》이다. 그 이전에는 수학자 마다 여러 알파벳을 사용하여 이 상수를 표기하였으나 《메카니카》의 출판이후 e로 표기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8]"

http://ko.wikipedia.org/wiki/E_(%EC%88%98%ED%95%99%EC%83%81%EC%88%98)

   

   

상수 e는 복리 계산을 하다 나온 것인데, 인드라는 아인슈타인의 발견이라고 말하기 보다는 여러 수학자들의 발견이라고 하는 것이 합리적인 듯싶다. 이를 전제하고, 마지막에 구체적으로 72를 찍은 건 아인슈타인인 듯싶다.

   

3. 우주의 암흑물질과 경제의 암흑물질

   

"암흑물질은 물리학뿐만 아니라 경제학에도 등장하여 미국 경제의 비밀을 설명하기도 했다. 부시 행정부 이래로 미국경제는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무역적자와 재정적자에 허덕였다. 그 규모가 엄청나서 세계의 수많은 경제전문가들이 미국경제의 몰락과 뒤이은 세계 경제의 위기를 우려해 왔다. 하지만 그 반대로 미국 경제가 여전히 건재하다는 주장도 꽤 있었다.

   

후자의 입장 중에서 아주 흥미로운 경제이론이 바로 미국 경제의 암흑물질론이다. 미국 하버드 대학의 리카도 하우스만(Ricardo Hausman)과 페더리코 스투제니거(Federico Sturzenegger)는 2005년 <미국과 세계의 불균형: 암흑물질이 파국을 막을 수 있을까? (U.S. and global imbalances: can dark matter prevent a big bang? )>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의 결론을 요약해서 말하자면 경제통계에 잡히지 않는 뭔가가 미국의 엄청난 적자를 메워주고 있다는 것이다. 하우스만과 스투제니거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이 '무엇'을 암흑물질이라고 불렀다. 물리학의 암흑물질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이들이 지목한 암흑물질의 정체는 바로 미국의 해외투자였다. 미국의 지식이나 기술력 혹은 브랜드는 세계 최고수준이다. 미국이 해외에 직접 투자할 때 이로부터 유발되는 지식서비스가 일차적으로 암흑물질의 근원이다. 또한 미국 자산의 안전성이 담보하는 보험 서비스나 세계 기축 통화로서의 달러 발권력, 세계 최강국으로서의 지위 등도 암흑물질의 원천에 포함된다. 이 논문에 의하면 지난 2000년부터 2004년까지 미국의 누적 경상수지 적자는 2조 5천억 달러이다. 그러나 암흑물질을 집어넣고 다시 계산하면 같은 기간 2조8천억 달러를 더 수출한 효과가 있었다고 한다. "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770

   

인드라는 이 이론에 대해 대체로 다음과 같은 평가에 동의하는 편이다.

   

http://blog.naver.com/carboni/20024055235

   

다만, 여기에는 인드라가 보건대, 미시적인 지적만 있을 뿐, 거시적인 면에서의 통찰이 없다고 본다. 즉, 브래튼우즈 체제부터 신자유주의 체제까지 왜 미국은 무역 적자국을 떠맡고 있느냐이다. 여기에는 주류 경제학이 다루지 않는 이면의 경제학, 이면의 계산법이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싶다. 그것은 어쩌면 서구가 여전히 경제 우위인 한, 드러나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허나, 어느 순간, 현재 서방이 요구하는 대로 아시아가 내수 진작을 하여 세계 최대의 소비시장이 되는 날, 이면의 경제학, 이면의 계산법이 재등장하지 않을까 싶다. 세계 자본주의 발전. 그것은 중국과 인도라는 소비 시장을 아편 무역으로 통합시켰기에 가능한 프로젝트가 아니었을까. 이를 산업혁명으로 엉뚱한 데 원인을 돌리니 오늘날 혼란이 가중하는 것이 아닐까. 다시 말해, 근대 시기 국유본의 업적은 시장을 통합한 데 있지 않은가이다. 시장이 클수록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시스템이 가능하기에.

   

아무튼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론이 흥미롭다.

   

http://ko.wikipedia.org/wiki/%EC%95%94%ED%9D%91_%EB%AC%BC%EC%A7%88

   

http://ko.wikipedia.org/wiki/%EC%95%94%ED%9D%91_%EC%97%90%EB%84%88%EC%A7%80

   

각 링크마다 수치가 다르다. 일반 물질은 4~5%이다. 암흑물질은 22%~24%이다. 암흑에너지는 72%~74%이다.

   

아인슈타인과 엘리어트는 공통점이 있었다. 당대 다른 이들도 유사했지만, 이 시기에는 자연 법칙을 발견하는데 혈안이었다. 특히 아인슈타인은 나이를 먹고서는 수시로 카발라 경전에서 영감을 얻으려 했는지 우주 상수 같은 것에 유난스런 관심을 보여준 바 있다. 그러면서도 아인슈타인과 엘리어트는 자신이 설계한 이론으로 주식 투자하다 하나는 큰 손실을 입었고, 다른 하나는 만회할 길이 없어서 파산과 함께 자살했다. 돈 버는 머리와 똑똑한 머리는 분명 다른 듯싶다.

   

인드라가 중시하는 대목은 이것이다. 우리에게 78 : 22가 중요한가. 아니면, 72 : 5 : 22가 더 중요한가. 

   

사실 지도층이 22% 이내에서 5%를 구성한다는 것이 현실적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5%는 늘 다수파를 지향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으로 5%는 78% 속에 있는 듯 행동한다. 그런 대목에서 인드라 조직론을 생각할 수 있겠다. 인드라 조직론에 따르면, 적의 적은 동지이다^^!

   

http://blog.naver.com/miavenus/70119480865

   

하면, 1%는 22% 이내에 있어야 한다고 할 수 있는데, 만일 그렇다면 어떤 형태로 존재할 것인가?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8 : 대부업과 수학은 수메르에서부터 시작하였다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1/11/07 02:29

http://blog.naver.com/miavenus/70123317301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8 : 유태인 상술 78 : 22의 비밀 2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1/11/07

   

인드라가 이자를 이야기하니 국유본이 대부업을 타격했다~ㅋ 그나저나 한국산 냉동 굴 소식은 뭐냐? 인드라 스토킹하나^^! 이건 인터넷에서 전혀 언급한 적이 없는데~~!

   

5. 대부업과 수학은 수메르에서부터 시작하였다

   

언제부터 인간이 수를 사용하였는지는 구체적이지 않다. 다만, 신석기 시대 사냥을 한 뒤 손가락으로 세어볼 수 있는 정도에서 작대기 표시로 그 수를 기록한 것들이 세계 여기저기서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이집트에 이르러서야 숫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13&dirId=130103&docId=111641310&qb=6rOg64yAIOydtOynke2KuCDsiKvsnpA=&enc=utf8&section=kin&rank=1&search_sort=0&spq=0&pid=grj97F5Y7tNsscDO7E4ssc--521928&sid=Tra9CvKgtk4AABk2J6M

   

   

헌데, 이보다 더 진일보한 숫자 체계가 있었으니 바빌로니아 숫자, 혹은 수메르 숫자이다.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11&dirId=1113&docId=60189127&qb=67CU67mM66Gc64uI7JWEIOyIq+yekA==&enc=utf8&section=kin&rank=2&search_sort=0&spq=0&pid=grj%2Bdc5Y7udssv5ygrZssc--378563&sid=Tra9CvKgtk4AABk2J6M

   

   

바빌로니아 숫자 체계는 세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하나, 이집트 숫자처럼 처음에는 십진법이었으나 십진법과 육십진법을 병행하는 숫자체계를 만들었다.

   

둘, 이집트 숫자에는 2, 3, 4가 따로 없었다. 작대기 하나 더 긋는 식이 이집트 숫자였다. 반면, 바빌로니아 숫자는 2, 3, 4에 대응하는 숫자 모양을 만들었다.

   

셋, 0을 만들었다. 다만, 제한적으로 사용했다. 0이란 숫자가 다른 숫자 뒤에 와서는 안 되지만, 중간에는 배치시킬 수 있었다. 가령 208일 때 가운데 자리 0을 표시하는 걸 허용했다는 것이다.

   

하면, 당대 바빌로니아 수학 실력이 어느 정도였을까?

   

수메르 점토판에는 거래 내역과 영수증 등이 쏟아져 나올 만큼 당대 수메르 수학 실력은 오늘날에 견주어도 놀라운 수준이었다. 학교에서 수학 시험을 볼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가령 1 달란트는 60 미나이고, 1 미나는 60 쉐켈이다. 헌데 수학 시험 문제가 바빌로니아 평균 이자율인 월 이자율 1/60로 계산하였을 때, 1 미나가 64 미나가 되려면 얼마나 걸리느냐 같은 것이 시험 문제로 나왔다는 것이다.

   

함부라비 법전을 보면, 바빌론에서는 은 대부 이자율을 연리 20%, 보리 대부 이자율을 33%를 상한선으로 해서, 이를 명문화했다. 또한 그간 이자낸 액수가 원금과 같아지면, 대출을 다 갚았다고 여기는 전통이 있었다. 함부라비 법전에는 3년 후 보증인을 해방하였는데, 이는 보리 대부가 33%이기 때문이다. 또한 대부받은 상인이 도적을 만나거나 배가 침몰하거나 전쟁이 나거나 하면 대출을 갚지 않아도 되었다. 바빌론 지배자들은 가뭄, 전쟁 등 불가항력적 사태로 빚을 갚지 못하는 경우 일괄 탕감하는 방식을 써서 대출자들이 빚을 갚을 능력 이내에서만 대부업을 하도록 했다. 

    

해서, 수 천 년전이라고 해도 만일 여러분이 타임머신을 타고 수메르에 가서 장사한다 해도 성공할 보장이 전혀 없는 것이다.

   

헌데, 흥미롭지 않은가? 당대에 다른 문명에서는 채무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 오직 바빌론 지역에서만 대부업 기록이 있다. 대부업은 수메르부터 시작한 것이다.

   

최초에는 사원에서 행하는 구제 사업으로 시작했을 것이다. 사정이 어려운 인민에게 무이자로 대출을 해주고 시간을 두고 갚게 하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허나, 시간이 흐르면서 공공금융적 성격을 탈피하고, 사금융적 성격을 강화시켰을 것이다. 이는 동서고금 전 세계 어디서든 보이는 현상이다.

   

기원전 3000년부터 시작한 수메르 금융이 바빌론 전 지역으로 퍼지고, 무역 상인을 통해 그리스, 인도, 중국으로까지 널리 퍼진 것이다. 가령 이태리, 그리스에서는 기원전 750년 무렵에 대부업을 중동에서 수입했다.

   

그중 페니키아/카르타고 상인이 있었으니 이들이 스페인 무슬림 국가로 가서 수메르 셈법을 써서 어려운 수식도 간단히 계산하니 똑똑하다고 궁정 유태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6. 바빌로니아 숫자체계에서 인도 숫자체계로의 이행

   

http://kin.naver.com/knowhow/detail.nhn?d1id=10&dirId=10&docId=559776&qb=7Lm064uI7Iuc7Lm0&enc=utf8&section=kin&rank=2&search_sort=0&spq=0&pid=griCRc5Y7u4ssuwEUMGssc--480893&sid=TrZewG5Otk4AAGBUD2c

   

본디 순서는 이 항목이 먼저로 기획했지만, '이자' 문제 때문에 5번 항목을 상위로 올렸다~!

   

불교인들에게 불교 근본 원리를 물으면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삼법인 [ 三法印 ]

불교의 근본교리 가운데 하나로, 여기에서 법은 진리를 뜻하며 인(印)은 진리의 표적이라는 말. 삼법인은 세 가지 불변의 진리라는 말이다. 법인은 "모든 존재는 변하고 있다"는 제행무상(諸行無常)과 "모든 사물은 실체가 없다"는 제법무아(諸法無我)와 "열반의 세계만이 고통이 없는 진리의 세계이다"라는 열반적정(涅槃寂靜)의 세 가지 명제로 되어 있다. 이 가운데 열반적정은 "모든 것은 괴롭다"라는 「일체개고」(一切皆苦)로 대체되어 말해지기도 한다.  삼법인은 불교의 존재론적 기본입장과 인생관의 핵심을 아주 간명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모든 존재는 영구불변의 것이 아닌 바, 그 원인은 모든 사물이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고, 이러한 진리를 모르는 데에서 번뇌가 생기는 것이니, 진리를 깨달아 번뇌를 제거한 열반의 세계에 이르는 것이 인생에 있어 최고의 이상이라는 것이다.

   

불교 경전마다 차이를 보이는 것이 삼법인 중 일체개고와 열반적정 중 어느 명제를 넣느냐이다. 이때, 왜 일체개고와 열반적정이 차이일까.

   

부처가 보리수 나무에서 깨달은 건 연기법이었다. 

   

"

연기(緣起)란 "연(緣)해서 생겨나 있다" 혹은 "타와의 관계에서 생겨나 있다"는 현상계(現象界)의 존재 방법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 세상에 있어서의 존재는 반드시 그것이 생겨날 원인("인 · 因")과 조건("연 · 緣")하에서 연기의 법칙에 따라서 생겨난다는 것이다. "연기"라는 단어는 산스크리트어: प्रतीत्यसमुत्पाद Pratītyasamutpāda 프라티트야 삼무파다를 뜻에 따라 번역한 것으로 "인연생기(因緣生起: 인과 연에 의지하여 생겨나다, 인연따라 생겨나다)"의 준말이다.[1] 한역(漢譯) 경전에서는 "발랄저제야삼모파다(鉢剌底帝夜參牟播陀)"로 음차하여 표기한 경우도 있다.[1] "프라티트야(산스크리트어: Pratītya)"의 사전적인 의미는 "의존하다"이고 "삼무파다(Samutpāda)"의 사전적인 의미는 "생겨나다 · 발생하다"이다. "영어: dependent arising (의존하여 생겨남)"[2], "conditioned genesis (조건지워진 생성)", "dependent co-arising (의존된 상호발생)"[3][4] 또는 "interdependent arising (상호의존하여 생겨남)"[5] 등으로 번역된다. 연기에 대한 불교 교의를 연기설(緣起說)이라고 한다. 고타마 붓다십이인연(十二因緣) 또는 십이연기(十二緣起)의 연기설을 가르친 이래 불교 역사에는 여러 가지의 연기설이 출현하였다. 구사종(俱舍宗)의 업감연기(業感緣起), 유식종(唯識宗)의 아뢰야연기(阿賴耶緣起),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의 진여연기(眞如緣起) 또는 여래장연기(如來藏緣起), 화엄종(華嚴宗)의 법계연기(法界緣起), 진언종(眞言宗)의 육대연기(六大緣起) 등이 있다."

http://ko.wikipedia.org/wiki/%EC%97%B0%EA%B8%B0_(%EB%B6%88%EA%B5%90)

   

   

극단적인 유심론으로서 모든 것은 영화 매트릭스처럼 마음에서 일어난 미망에 의한 것이기에 이 미망에서 벗어나면 주인공 네오처럼 해탈한다는 것이다.

   

   

불교나 자이나교나 인도에서 변방인 마가다 지역에서 일어났다. 예서, 부처가 아리안인이 아니라 동이족이었다, 네팔인, 티벳인, 몽골인이었다 등등 논란이 많다. 일부에서는 환빠 조작으로 이야기하는데, 국유본이 요즘 기획하는 기획물 중 하나라고 보는 것이 인드라 입장이다. 환단고기도 뉴라이트 데이비드 록펠러 집권 이후 가톨릭, 불교와 함께 근본주의를 강화시키기 위한 문화 정책의 산물인 게다. 해서, 뉴라이트 전두환 정권 때부터 환단고기가 나왔고, 쪽발놈현 정권 때부터 유난히 환빠들이 극성을 부린 것이다. 대체로 환빠들은 애비가 신기남, 이미경, 정동영, 김희선, 유시민, 김근태처럼 쪽발이일 가능성이 높은 뉴라이트 쪽발노빠들이다. 아무튼 한줌도 안 되는 뉴라이트 쪽발노빠들을 한반도에서 축출하거나 교화시킨다면 그만큼 한반도 통일이 가까이 온다고 생각하면 된다. 아! 매국노 쪽발노빠들이여, 제발 정신차리고, 모든 재산을 국가에 헌납하고, 바르게 살아라. 니넘들이 대한민국에 폐를 끼친 것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지만, 그 정도라면 용서가 가능하다. 언제까지 무뇌아로 나라를 망치며 살아갈 셈인가. 부끄럽지도 않느냐. 참고로 뉴라이트 데이비드 록펠러는 민족 종교에 긍정적이다.

   

부처가 몽골인이다, 라는 주장을 논문으로 제출한 이가 소승불교, 혹은 상좌부 불교, 남방 불교 태국 학자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국유본이 왜 이런 주장을 키우는가 하면, 나찌와 불교 관련성을 떼어놓기 위함이 아닌가 싶다. 이렇게 해서 키운 달라이라마로 중국 공산당을 압박하고, 틱낫한 같은 승려를 동원해서 동남아시아에서 정권을 감시하기 위함으로 본다.

   

아무튼 불교가 등장한 배경에는 당대 브라만교와의 대결 구도였다는 점을 말씀드린 바 있다. 이천 년 뒤에 일어나는 로마 가톨릭과 신교도/국왕 대결인 게다. 이때, 불교를 지지한 층은 어떤 층들일까?

   

하나, 기층민중이다. 신분에 상관없이 차별하지 않고 출가가 가능하니 환영을 받았다.

   

둘, 왕가와 귀족들이다. 제국이 들어섰을 때까지는 사제 계급이 우위였지만, 제국에서 십육대국으로 분열하여 왕국끼리 전쟁을 벌이자 전사 계급인 크샤트리아가 떠올랐던 것이다. 크샤트리아들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왕이 되는 일이 잦았다. 헌데, 이들을 구속하는 이들이 있으니 사제 계급이었던 것이다. 해서, 새로운 지배계급은 새로운 종교를 찾게 되었던 것이다. 자이나교나 불교도 초기에는 브라만교의 사문으로 출발한 것이다. 다시 말해, 부처는 당대 종교개혁가였던 것이다.

   

셋, 자본가들이다. 불교는 농촌 사람보다 도시민에게 오히려 인기가 있었고, 특히 상인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상인들이란 대체로 세속화한 브라만교 승려 출신이거나 크샤트리아 출신이었다. 상인들은 사제 계급의 엄격한 교리로 인한 경제적 손실에 불만이었던 것이다. 허나, 교리가 있으니 참고 있을 수밖에 없다. 이에, 부처가 나타나 그것은 모두 미망에 불과한 것이라 하니 마음의 짐을 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헌데, 부처가 죽은 뒤 일백 년이 흐르자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부처는 불상을 만들지 말라고 했다. 우상 숭배를 배격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인드라가 마치 책을 내지 않겠다는 것처럼 경전으로 남기지 말라 하니 남은 것은 뭔가. 부처의 사리 뿐이다. 해서, 사리 숭배가 나타났고, 사리를 모신 불탑 숭배로 나타났던 것이다.

   

대승불교는 불탑 숭배자들이 중심인 것이다. 불탑 숭배자들은 출가 승려가 아니다. 이들은 부처가 무슨 말을 했는가에는 솔직하게 말하면 관심이 없었다. 다만, 부처에게 기도하면, 자기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소박하게 믿었을 뿐이다. 왜냐하면, 신 중에 가장 높은 신이기 때문이다. 이때, 이 주장을 가장 높이 떠받든 이들이 불탑 관리인들이다. 신자들이 많이 올수록 관리인들이 돈을 벌기 때문이다. 해서, 백 년이 흐르자 부처는 인격신으로 격상이 되었다. 다시 말해, 브라만교의 신 중 하나가 된 것이다.

   

예서, 상좌부들이라 할 수 있는 유랑승려 집단이 불탑 숭배자들더러 부처의 뜻을 왜곡시키는 자들이라 여기니, 이에 대해 불탑파를 변호할 논리가 필요했는데, 이들이 대승불교인 게다.

   

대승불교 핵심 이론이 무엇이냐.

   

"불교의 2대 유파의 하나로, 소승불교에 대립한다. 석가가 주창한 활기찬 초기불교도 200년, 300년이 지나는 중에 그 명쾌한 가르침은 아비다르마(abhidhar-ma, 법의 연구)의 발달과 함께 철학화되고, 번잡화되어서 청신한 종교로서의 생명을 잃고, 그 신앙도 고갈화되었으며 기원 전후경부터 주로 재속신자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불교부흥운동이 전개 되었다. 그 운동에는 그들의 기세에 찬동하고, 구불교에 만족치 않고 그곳을 뛰쳐나온 출가자들의 참여도 간과 할 수 없는데 그들중에는 그 운동의 이론적 지도자가 된 자도 있었을 것이며, 대승경전의 제작에 관해서 중요한 시사를 준 자도 있었다고 생각된다. 또한 이들은 인도 각지에 산재하는 불탑(스투파)을 중심으로 모이고, 불타를 찬양하고 불타에 대한 열렬한 신앙을 가졌다. 그들은 불타의 전생의 호칭인 <보살>을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보고, 또한 이 운동에 만진하는 자를 남녀 노소를 불문하고 <보살>이라고 하였으며 재래의 출가자 중심의 교단인 <승가(僧伽)>에 대해서, <보살 가나>라고도 하였는데 그들은 결국 자신의 사상을 표명하는 수단으로서 새로운 경전을 계속 만들어냈고 『반야경』, 『법화경』, 『화엄경』, 『아미타경』 등이 그 경전군이다. 이들 경전중에서 그들은 자신의 새로운 불교운동을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지향하는 큰 탈 것>이라는 의미를 담아서 <대승>이라고 하고, 종래의 구불교를 <한정된 출가자만의 작은 탈 것>이라는 의미로 <소승>이라고 멸시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이 경전의 사행시에서도 수지(受持)ㆍ독송ㆍ해설하고, 이를 필사(筆寫)사경하면 많은 공덕이 있다>는 구불전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경전숭배>를 강력하게 밝히고 있다. 대승불교의 기본적 이념은 <자비>로 뒷받침된 <공(空)>—이론적으로는 모든 것은 그 자체의 고유한 실체를 가지지 않는 <무자성(無自性)>인 것이며, 따라서 실천적으로는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마음으로 행동하는 <무집착>이어라—의 입장에 있다고 하며 불에 절대적으로 귀의하고 자기 중에 불이 될 수 있는 가능성(불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체현할 것을 그들은 지향했다. 그를 위해서는 <반야의 지혜>와 <방편의 자비>를 겸비할 것을 지향하고, 특히 타인에 대한 선행(이타행(利他行))을 제일의 안목으로 생각했다.

이와 같은 대승불교운동은 후에 용수, 무착, 세친 등에 의해서 그 사상이 조직ㆍ체계화되어 5세기경부터 밀교가 성행하고, 이어서 7세기경부터 힌두교가 세력을 회복했다. 그리고 1203년 벵골 불교의 중심이었던 비크라마시라사(寺)가 이슬람의 군대에 의해 파괴 되어서 중앙 인도에서 불교는 그 모습을 감추게 되었고 태어난 고향인 인도를 쫓겨나게 된 대승불교이지만, 국경을 넘어서 티벳으로 전파되었으며 중앙아시아를 거쳐서 중국, 한국, 일본에 전해져 각 지역에서 화려한 꽃을 피웠다. 우리나라에는 고구려 문자왕(文咨王, 491~518) 때 용수(龍樹)의 중관론(中觀論) 등 삼론(三論)을 비롯, 천태ㆍ열반 등의 교법이 들어와 대승불교에 대한 연구 및 교화가 활발하였다. 또한 길장(吉藏, 549~623)은 삼론을 바탕으로 삼론종(三論宗)을 개종하는 등 우리나라에서의 대승불교는 마침내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되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628940

   

이타행, 보살행이다. 이는 기존의 두타행과는 차이가 있다 하겠다. 예서, 이타행과 보살행은 조로아스터교에서 영향을 받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공 사상이다. 부처는 공 사상에 대한 특별한 언급이 없다. 다만, 후대 불제자들이 공사상이 부처의 연기법과 통한다고 주장할 따름이다. 이는 공 사상이 부처 사후에 성립하였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인도에 바빌로니아 숫자 체계가 들어온 것은 부처 생존 시기 이후라는 것이다. 하면, 인도에 언제 유래했을까. 가장 유력한 가설은 알렉산더 침공 시기인 기원전 327년부터 325년이다. 이 시기, 알렉산더는 그리스, 페르시아 문명을 인도에 전수했다는 것이다. 하면, 그 이전에도 상인들끼리 교류가 있었을 터인데, 왜 그 이전에는 인도에서 수용할 수 없었을까. 의외로 이 문제는 간단하다. 숫자 체계란 비록 상인들이 상용하는 것이긴 해도 사제의 몫이었다. 해서, 이민족의 숫자 체계를 수용한다는 것은, 이민족 종교를 받아들이는 것과 같으므로 신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허나, 이는 침략을 당하면 사정이 달라지는 것이다. 

   

페니키아/카르타고인이 왜 유대교로 개종했나? 전쟁에서 패했기 때문이다. 자신을 지켜주어야할 신이 자신을 지켜주지 못한다면 믿을 이유가 있나? 없다. 그처럼 인도가 알렉산더 침공으로 혼란을 겪자 기존 인도 신앙에 대한 반성이 등장한 것이다. 

   

이러면, 나오는 대책이란 무엇인가. 하나, 알렉산더가 저토록 힘센 이유는 무엇인가. 찾아보니, 바빌로니아 숫자 체계를 쓰고 있다. 이것이 효율적이더라? 둘, 바빌로니아 숫자체계처럼 선진 시스템이 인도에도 있을 것이다. 무엇이 있나? 어? 불교? 고다마 싯다르다 이야기???

   

알렉산더가 물러난 뒤 인도를 정복한 왕조는 마우리아 왕조이다.

   

"마우리아 왕조는 찬드라 굽타 마우리아에 의해 기원전 322년 창시되었다. 그는 난다 왕조를 전복하고 중서 인도를 가로질러서 팽창하였는데, 알렉산더 대왕마케도니아 왕국군과 페르시아 군대가 서쪽으로 후퇴하여 지방 권력이 와해되자 이를 기회로 영토를 확장하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은 직후 마우리아 왕조의 창건자 찬드라 굽타는 남부의 타밀 지방을 제외한 인도 대륙 전역의 영토 대부분을 차지했다. 기원전 316년까지 마우리아 왕조는 북서 인도를 완전히 점령하여 알렉산더가 남긴 총독령을 격파하고 정복하였다. 제국이 최대 판도일 때, 북쪽으로 히말라야 산맥의 자연 경계를 따라 뻗어 나갔고, 동쪽으로 현재의 아삼 주까지 뻗어나갔다. 서쪽으로는 제국은 현재의 파키스탄을 너머서 현재의 아프가니스탄의 상당한 부분에 도달하였는데, 이는 현재의 헤라트칸다하르 지방을 포함한다.

[편집] 아소카 치세

불교를 선양한 찬드라 굽타의 손자 아소카 왕(기원전 265년경 ~ 기원전 238년 또는 기원전 273경 ~ 기원전 232년)의 치적은 칙령들을 정교하게 돌에 새겨 그가 전국에 세웠던 비문을 통해 많이 알려졌다. 이 비문은 판독이 가능한 인도의 고문서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그가 왕위에 오른 지 9년째 되던 해 인도의 남동부, 현재의 오리사 해안의 칼링가 지방을 정복했는데, 그 전쟁의 참상을 반성하고 불교를 신봉하게 되었으며, 그후로는 무력에 의한 정복을 중지하였다. 그리고 모든 인간이 지켜야 할 윤리인 다르마(dharma: 法)에 의한 정치를 이상(理想)으로 삼고 이를 실현하는 데 진력하였다. 부모·어른에의 순종, 살생을 삼가는 등의 윤리를 백성들에게 장려하고, 지방관이나 신설된 관리에게 명령하여 백성들이 윤리를 철저히 지키도록 하였다. 또 도로·관개(灌漑) 등의 공공사업을 전개하는 등 많은 치적을 남겼다. 당시 인도에는 그에게 대항하는 세력이 없었고, 북서 국경의 그리스 세력도 그들 내분 때문에 다른 지방을 침략할 힘이 없었다. 이와 같은 정세에서 제반 생활양식이 다른 광대한 영토를 현실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는 그가 취한 정책이 매우 현명했던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그 이면에는 원시불교의 영향이 있었다. 또한 그의 정치이념은 인근 제국이나 민족에게 전파되어 그의 사절(使節)이 이집트마케도니아 왕국에 이르렀다.

[편집] 멸망

아소카 왕이 죽은 후 제국은 외침, 남부 제후들의 이반 및 왕위계승을 둘러싼 암투 등으로 위축되었다. 마지막 왕인 브리하드라타는 기원전 185년 브라만 출신 최고사령관 푸시아미트라에게 살해되었다. 그뒤 푸시아미트라는 슝가 왕국을 세우고 약 1세기 동안 중인도를 통치했다."

   

인도에서 불교하면 아소카 왕이다. 하면, 왜 아소카 왕은 불교도가 되었을까. 진심이 우선일 것이다. 허나, 배경도 있다. 아소카 왕도 브라만교 특권층이다. 해서, 인도 제국을 건설하는 데에는 난관이 있었던 것이다.

   

불교를 적극 지지한 아소카 황제나 기독교를 받아들인 콘스탄티누스 황제나 공통 분모는 제국 경영이다. 지방 신을 믿기에는 제국 경영이 어려웠다. 반면, 불교나 기독교는 신분 차별없이 왕 앞에서 평등하다. 왕즉불, 왕즉신이니까. 하여, 왕권 강화, 제국 강화에 보탬이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공유 논쟁'이다.

   

http://blog.naver.com/hwaq708/90019861510

   

부처 가르침을 경이라 하고, 부처 실천 규범을 율이라 하고, 부처 말씀 해석을 논이라 한다. 원시 불교에서는 경과 율이 우선이었다. 헌데, 후대로 가면서 논이 우선이기 시작했다. 논에서 시작해서 경과 율이 정해졌다.

   

허나, 인드라는 허접한 애들처럼 이것이 부처 가르침을 위배하는 것이라 보지 않는다. 위배한다는 것 자체가 부처 가르침에서 벗어난 것이다. 왜? 부처는 연기법이니까. 부처 연기법으로 보면, 그 모든 것을 연결하고 있으니까.

   

인드라 입장에서 '공유 논쟁'이란 후대가 만든 쇼라고 본다. 공유 논쟁의 유식파 입장은 무엇인가. 유식파 최대 화두는 윤회와 연기법을 연결시키는 것이었다. 뭔 말이냐. 부처 연기법은 실체, 즉 브라만적 개념, 아트만을 부정한다. 무아론이다. 반면, 윤회는 아트만을 전제한다. 아트만, 변화하지 않는 개인 영혼이다. 문제는? 윤회는 브라만교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브라만교가 드라비다인의 저항을 무마시키고자 드라비다인 발명품인 윤회설을 수용한 것이다. 해서, 불교를 지지하는 기층민중에게 이 딜레마를 설명해야 했던 것이다. 유식파들 최대 과제는 인식론적 고민이었던 것이다.

   

유식파나 중관파나 모두 대승불교이다. 단지, 당대 시대적 화두가 달랐을 뿐이다. 유식파는 인식론적 고민을 풀어내어야 했다. 해서, 발명한 것이 '알리야식'이다.

   

"불교에서 분류하는 인식의 일곱번째 "말라 식(識, 式)"은 인간 인식에 있어, 구분하고 분별하는 판별식이라고 합니다. 대부분의 경전에서 "거짓 나"를 강조할 때 가짜의 나가 분별하고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에 함부로 분별하고 판단하여 업(業)을 짓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덟번째 인식인 "알리야 식, 장식(藏識 감출 장)"인 잠재되어 있는 내면을 깨워 깨달음을 증득 하여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 까지가 현재까지 나온 불교의 가장 앞선 선지식입니다. 요렇게 밖에는 더 이상 설명을 해 주지 않았고 여지껏 새로이 나온 법문을 보아도 이 부분에서의 더 이상은 설명이 없습니다."

 http://blog.daum.net/mentalsoul/468

   

한마디로 헤겔 변증법과 판단 중지의 교묘한 결합인 게다. 왜 판단 중지인가. 부처가 행한 길을 부처도 아닌데 억지로 받아들이면 내공이 딸려 폭발하니 주의가 필요하다는 게다. 왜 헤겔 변증법인가. 실체가 아닌 아트만이지만, 절대정신으로의 회귀를 거듭하면 실체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인민의 윤회설도 다치지 않고, 부처의 무아론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유식파가 불교를 간신히 지킨 셈이다. 하면, 이는 이론적인 영역 뿐일까. 그렇지 않다. 브라만교와 불교는 상호 교류하며 서로의 장점을 취하려 노력했다. 브라만교는 불교의 무자성론을 어떻하든 흡수해야 했다. 반면, 불교는 브라만교의 관혼상제 예식을 흡수해야 했다.

   

이러는 와중에 알렉산더가 침공하고, 마우리아 왕조가 들어서고, 그 이후에는 다른 왕조가 들어선다. 왕조가 바뀔 때마다 불교의 부침이 컸다. 이에 브라만교는 한층 더 자세를 낮춘다. 이때, 발생한 흐름이 박티 요가이다.

   

"박티 요가(भक्ति योग, Bhakti Yoga)는 "신에 대한 충실한 헌신"을 불러일으키는 영적인 수행을 가리킨다. 이러한 신에 대한 헌신을 힌두교 용어로 박티(Bhakti)라 한다. 힌두교 전통에 따르면, 박티 요가에는 9가지 형식이 있다. 힌두교 전통에 따르면, 박티 요가는 자유 또는 해탈(모크샤)로 가는 네 가지 길 중에서 가장 쉬운 길인 것으로 여겨진다. 다른 세 가지 길은 카르마 요가 · 라자 요가 · 즈나나 요가이다. 힌두교의 시대 구분에 따를 때 지금의 시대가 속한 칼리 유가의 시대에서, 특히 박티 요가가 효과적인 길인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박티를 계발하는 박티 요가의 길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경전으로는 《바가바타 푸라나》와 《바가바드 기타》가 중요하다.[1] 박티 운동(Bhakti movements)은 박티 요가를 주요 수행법으로 하는 힌두교 운동을 가리킨다. 힌두교 종파들 중 박티 운동에 속한 주요 종파는 시바파(Shaivism· 비슈누파(Vaishnavism· 샤크티파(Shaktism)이다.[2]"

   

박티를 한마디로 설명하면, 자신이 자유의지대로 살았다는 것이 착각이 아닌가 반성하고, 오직 신에 대한 충실한 헌신을 목표로 고행을 하는 것이다.

   

이는 브라만교가 힌두교로 바뀌는 종교개혁이었다. 마치 가톨릭에서 예수교 역할을 한 것이 박티운동인 것이다. 박티운동은 기원전 1세기에 인도에서 유행했다.

   

하여, 불교가 이에 대응한 것이 중관파 입장이며, 중관파 입장의 주된 사상이 공사상인 게다.

   

하면, 왜 공사상인가. 유식파도 공사상이지만, 이는 기층민중과의 대화가 초점이었다. 윤회설과 연기법 무아론을 함께 설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인신론적이다.

   

반면, 박티운동이 융성하던 이 시기 불교는 절대절명의 위기로 내몰렸던 것이다. 다시 말해, 불교가 그간 인도에서 존재할 수 있었던 정체성을 송두리 채 빼앗기는 것이었다.

   

왜? 브라만교와 불교의 차이는 무엇인가. 브라만교는 영혼 불멸을 전제하여 범아일여 사상인 게다. 범과 아 모두 실체를 인정한 셈이다. 반면 불교는 부정했다. 특히 불교가 문제삼은 것은, 아요, 아트만이었다. 이 문제를 브라만교가 해결한다? 불교의 위기였던 게다.

   

해서, 등장한 것이 공 사상이라 본다.

   

부처는 공 사상에 대해 별다르게 언급한 바 없다. 다만, 연기법, 무아론에서 유사한 이야기를 했을 뿐이다. 이를 후대 불제자들은 연기법과 무아론과 공사상이 연결된다고 레닌이 주장하듯 맑스와 레닌이 통한다고 말한 것이다. 이후 스탈린이 맑스레닌주의로 통일시키지만.

   

결국, 공 사상은 당대 인도 불교의 위기를 말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브라만교에서 힌두교로 발전하는 주류 흐름에 맞서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존재론적 발버둥이었던 셈이다.

   

허나, 바로 이런 발버둥에서 역설적으로 0이 탄생했던 것이다. 0이야말로, 공사상이야말로 브라만교든, 힌두교든, 조로아스터교든 흉내낼 수 없는 불교만의 진리가 아니겠는가?

   

마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고 하는 성철 스님 말씀이 떠오른다.

   

허나, 바로 이런 까닭에 불교 논리는 헤체적 논리와 닮아 있다. 자신에게 유리한 것은 차이화시키고, 불리한 것은 무기한 연기하는 것이다. 이를 동시에 말하니 이것도 연기법인가~!!! 그 연기법에 근거한 것이 만일 오늘날 데이비드 록펠러 국유본 권력이라면! ㅋㅋㅋ

   

7. 78 : 22 법칙, 0의 원리부터 무너진다

   

0이란 숫자는 신기한 숫자이다.

   

"원전 700년 무렵 수메르키시에서 제작된 계산 기록에서 0은 두개의 줄로 표기한 쇄기문자로 표현되고 있다.[5] 기원전 300년 무렵 바빌로니아의 수학자들은 계산의 편의를 위해서 0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6] 876년 인도에서 만들어진 비문에 0을 나타내는 숫자가 최초로 등장하였다. 인도에서는 0의 개념을 훨씬 이전부터 계산에 사용하고 있었다.[2] 한편 고대 그리스에서는 0을 숫자로 도입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그들은 "어떻게 없는 것을 나타낼 수 있단 말인가?"하고 반문하였다.[7][주해 1]"

http://ko.wikipedia.org/wiki/0

   

"많은 사람들이 나눗셈을 할 때 0으로 나눌 수 없다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0으로 나눌 수 없는 이유는 모든 선생님이 가르쳐 주었을 텐데, 여전히 0으로 나누는 것이 왜 안 된다는 건지 모르겠다는 말을 많이 한다. 다른 수학 문제에 비하면 0으로 나누는 것을 도무지 모르겠다는 사람의 수는 그래도 적은 편이지만, 그래도 끊임없이 제기되는 문제인 것만은 분명하다. 한번 0으로 나눌 수 없는 이유를 짚어보자."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184

   

3 곱하기 0은 0. 여러분은 말할 것이다. 당연하잖아? 허나, 인드라는 아니다. 어릴 때, 이 문제 때문에 정말 고민했다. 왜? 0인가? 왜 0과 곱하는 모든 것은 0이 되는가. 인드라는 예나 지금이나 그랬다. 철학이나 수학이 제시하는 명제는 반드시 현실에 실재한다고 생각했다. 해서, 3 곱하기 0 문제를 골똘히 생각했는데, 정말 풀리지가 않았다. 대체 이 0이라는 넘은 뭐하는 넘이냐 ㅠㅠㅠ

   

사칙연산.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929

   

세상에서 확실한 진리가 있을까. 사칙연산과 같은 수학이 진리일까. 아니다. 사칙연산에서 덧셈보다 곱셈을 우선하는 건 어디까지나 경험적인 약속이지, 필연적 결과물이 아니다. 사칙연산에서 보듯 수학에서조차 경험 법칙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런 전제에서 사칙연산으로 0을 생각해보자.

   

인드라가 신기해하는 것은, 0의 곱셈과 나눗셈이다. 왜 0과 만나는 곱셈 상대자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속성을 잃는 것일까. 또한, 0만은 왜 나눗셈이 곤란한 것일까.

   

인드라는 미적분을 떠올리며 곱셈/나눗셈이란 차원의 문제로 가정했다. 0차원은 점이고, 1차원은 선이고, 2차원은 면적이고, 3차원은 공간이고, 4차원은 시간이다.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을 더 하거나 빼면 존재하는 것이다.

허나,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을 곱하거나 나누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흥미롭다.

   

다시 말해, 덧셈과 뺄셈에서는 차원 이동이 일어나지 않는다.

반면, 곱셈과 나눗셈에서는 차원 이동이다.

   

이거 뭔가?

   

곱하면 오직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고, 나누면 세상의 모든 것이 되는 존재.

   

너, 누구냐!

   

나다.

   

8. 78 대 22는 독신 법칙, 피보나치 수열은 생명 법칙?

   

78 : 22 법칙에서 랍비 이야기가 나온다. 78 : 22는 78% 만큼 성공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다. 헌데, 랍비에게는 78%의 78%인 60%만 인정한다는 게다. 이를 기존 가설에서는 인간이 하는 바른 판단의 최고 한계는 78% 라고 하는데, 유태인들이 랍비에게 기대하는 조언의 정확도는 78% * 78% = 60% 정도라고 한다는 것이다.

   

왜 이렇게 계산할까. 인드라 랍비는 말한다. 솔로몬 송사와 같다. 솔로몬 송사를 보면, 아이가 저마다 자기 아이라고 주장하는 여인네 송사가 나온다. 이때, 솔로몬은 아이를 둘로 나눠 가져가라고 판결한다. 기괴한 판결인 게다. 이처럼 랍비에게까지 왔다면, 해결이 쉽지 않은 문제인 게다. 어려운 판결이 아니라면, 이미 그 이전에 당사자간 합의가 있었을 것이다. 해서, 78%의 78%인 게다.

   

하면, 이때 78%을 곱하면, 왜 피보나치 수열일까. 이는 솔로몬 판결이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생명 현상이라고 말이다. 피보나치 수열을 가장 잘 설명하는 것이 토끼 이야기인 것처럼 말이다. 반면, 78 : 22는 어떠한가. 솔로적인 설명이다. 또한 동태적이기 보다는 정태적인 설명이다.

   

해서, 이익이, 이자율이 22%라는 것은 생명의 절반만을 의미하는 것이다,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하여, 이것이 피보나치 수열로 되돌림을 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

   

혹, 이것이 브래튼우즈 금본위 체제도, 신자유주의 석유기반 체제도, 후기 신자유주의 SDR기반 체제 이후의 길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인가.

   

인드라가 만일 이 일을 해낸다면, 세상은 개벽이다.

   

9. 조로아스터교?

   

"이슬람교의 대두와 아랍 제국의 확장으로 사산 왕조가 무너지자 조로아스터교도 입지가 흔들리게 되었다. 이슬람교에서는 한때 유대교와 기독교를 향해 관용을 베푼 것처럼 조로아스터교에 대해서도 관용을 베풀었다. 그러나 이후 100년 사이에 대대적인 박해로 인해 조로아스터교도 중 상당수가 고향을 떠났고, 오늘날은 인도와 이란의 일부 지역에만 소수가 남아있다. 특히 인도의 조로아스터교도인 '파르시'('페르시아인'이라는 뜻)는 18-19세기부터 상공업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현재는 인도 경제계를 주도하는 세력으로 대두했지만, 그 숫자는 점차 줄어드는 추세다."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4289 

   

"란에 있던 조로아스터교도의 일부가 8세기에 신흥 이슬람교도에 쫓겨 현재의 인도 구자라트주(州) 해안지방에 이주하였다. 그 중심지는 수라트시(市) 남쪽 교외의 나우살리시(市)로, 이곳에는 당시의 사원이 아직도 남아 있다. 17세기에 이르러 수라트시에 동인도회사(東印度會社)의 상관(商館)이 설치되자 많은 파르시들은 상업 또는 무역업에 종사하게 되었고, 18세기에 영국 동인도회사의 상관이 뭄바이(봄베이)로 옮기게 되자 그들의 대다수도 뭄바이로 옮겨 살게 되었다. 19세기에 이르러 그들은 뭄바이를 중심으로 상공업을 크게 일으켜 뭄바이는 인도에서 상공업의 중심지가 되었고, 면방적업(綿紡績業) 등도 일으켜 인도 민족자본의 대표적인 존재가 되었다. 이들은 이지적이고 진취적으로 알려져 유럽의 근대 과학기술을 습득하고 많은 근대적 공업을 일으켜 인도 경제계에 커다란 세력을 지니고 있다. 현재 인도 최대의 재벌로 꼽히는 타타재벌도 그들의 것이다. 뭄바이를 중심으로 살고 있는 이들의 인구는 약 15만에 이른다."

[출처] 파르시 | 네이버 백과사전

   

카르타고/페니키아 유태인 입장에서 조로아스터 교인이란 형제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일까. 엄청 키워준 듯싶다. 다만, 최근에는 데이비드 록펠러 권력이어서 물 먹을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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