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25 : 프리메이슨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1/12/08 11:19

http://blog.naver.com/miavenus/70126006255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25 : 프리메이슨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1/12/08

   

"18세기초 영국에 창설되고, 이후 세계에 퍼진 박애주의 단체로 단순히 메이슨(Mason)이라고도 한다. 비밀결사는 아니지만 입사식이 비공개이기 때문에 부외자에게는 전모가 파악되기 어렵다. 한편 세계시민적 박애, 자유, 평등의 실현을 지향하고, 정치적 전체주의, 배타주의, 광신을 물리쳤다. 회원은 서로 <형제>라고 부르며, 입사식에서도 성서에 서약하듯이 기본적으로는 그리스도교와 대립하지 않지만, 신을 <전세계의 지고의 건축사>라고 하듯이 이신론적(理神論的) 경향을 가진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631472

   

1717년에 영국에서 창설한 프리메이슨은 국유본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탄생한 오늘날의 시민단체이다. 1717년 이전까지 영국에서의 석공 조직은 존폐의 기로에 서 있을 정도로 위기였다. 허나, 이후 프리메이슨은 국유본의 후원하에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한다. 이는 영국과 스코틀랜드 병합을 강화하고 제국주의 토대를 안정화하려는 금융자본가와 영국 귀족의 이해, 동인도회사 = 국유본의 이해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1. 기원

   

"프리메이슨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설이 있는데, 솔로몬의 신전건설시대의 건축사 집단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도 있다. 이는 아마 입사식때 새로운 가입자가 체험하는 <히람전설>이라는 통과의례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프리메이슨의 전설에 의하면, 솔로몬의 신전건립의 동량 히람은 그 명성을 질투한 3명의 직인에게 습격당하여 마지막 사람에게 살해되었다. 3명의 암살자들은 히람의 사체를 흙에 묻고, 그 위에 아카시아의 작은 가지를 심었다. 히람의 직인들이 스승을 찾으러 나섰을 때, 이 아카시아가 표시가 되어서 사체를 발견했다. 입사식 때 새로운 가입자는 정규, 직각정규, 해머로 맞아서 히람의 3중의 죽음을 체험하고, 거기에서 <부패>를 거쳐서 아카시아 나무로서 재생한다는 상징극을 연기하였는데 이 연금술적 변용의 비의를 통해서 <히람 전설>과 일체화하는 것이다. 덧붙여서 히람의 <3중의 죽음>은 암살자인 3명의 직인이 각각 상징하는 물적세계, 심적세계, 영적세계로 된 세속적 세계에서 그가 죽음을 통해서 해방되고, 어둠(매장)을지나서 신적세계로 부활하기 위한 죽음이며, 따라서 오시리스나 예수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존재의 전면적 파멸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재생•변용을 고지한다>.

    

   

   

"히람 Hiram 

히) '히람' חירם, '히롬' חירום; '아히람'אחירם의 단축형 -"{나의}형제는 고귀하다"

1. 히람1세 - 두로의 왕(B.C. 986~935년)으로 다윗 및 솔로몬과 우호적인 동맹 관계에 있었다. 히람의 통치 기간에 두로는 페니카아(베니게) 연안에서 가장 유력한 도시로서 번성한 상업 중심지가 되었다. 히람은 광범위한 건축활동과 키프러스. 시칠리. 사르디니아 등과 같은 지중해의 섬들을 식민지화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또한 멜카르트(Melgart)와 아스다롯 신을 위한 새로운 신전들을 세우고, 멜카르트를 기념하는 새로운 순례 절기를 제정하였다.

   

구약에 의하면 히람의 이스라엘과의 첫 접촉은 예루살렘 정복 직후로 이때에 그는 다윗성의 건축을 위해 기능공들과 원자재를 공급하였다(삼하 5:11; 대상 14:1). 다윗에 대한 히람의 오랜 호의는 왕상 5:1에서 증명되고 있다.

   

이러한 우호적인 관계는 다윗을 계승한 솔로몬 시대에도 계속되었다. 히람은 성전 건축을 위해 각종 자재를 제공하였고, 그 대신에 솔로몬은 밀, 올리브 기름. 포도주 등을 공급하였다(왕상 5:11; 대하 2:10). 이러한 상업적인 동맹은 평화 조약에 의해 더욱 공고해졌으며(왕상 5:12). 페니키아의 공주와 솔로몬의 결혼으로 상징화되었던 것 같다(참조. 11:1). 20년 후에 솔로몬은 히람에게 갈릴리 지역의 성읍 20을 주었는데 이는 분명히 성전 건축을 위한 히람의 재정적 지원에 대한 답례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 내륙 지역에 대해 불만족하였고, 그 때문에 이곳의 이름을 가불 곧 '쓸모 없는 땅'이라고 불렀다(왕상 9:베~14). 그런데 이 성읍들은 빚을 갚을 때까지의 담보물이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왜냐하면 대하 8:2에서 솔로몬은 히람이 그에게 준 이 성읍들을 재건하고, 이스라엘 자손이 재정착하도록 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히람은 솔로몬과 연합하여 이스라엘의 항구에서 온게벨에 기지를 두고, 해상 무역을 활발히 하였다. 이때에 그가 페니키아의 숙련된 사공들을 보내어 항해와 선박 건조를 돕도록 했던 것 같다(왕상 9:26~28; 10:11,22).

   

히람의 죽음으로 그의 아들 바알에셀(Baal- eser)1세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역대하에서 그의 이름은 후람(1)으로 나오고 있다(예. 대하 2:3, 11~12; 8:2, 18; 9:10, 21).

   

2. 성전의 장식을 위해 솔로몬에 의해 고용된 두로의 금속 세공인이다(왕상 7:13~14, 40, 45).

   

출처: 아가페성경사전"

   

솔로몬 시대 히람은 둘이다. 하나는 페니키아 왕이며, 다른 하나는 프리메이슨 시조인 성전 건축가 히람인데, 둘 다 페니키아인이다. 성전 건축과 같은 중요한 일을 페니키아인과 공유한다는 것은 다양한 추정을 가능하게 할 정도로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이는 국유본 백문백답에서 이미 논한 사안이니 넘어가기로 한다.

   

페니키아와의 동맹은 솔로몬이 처음이 아니며, 다윗 왕 때부터의 동맹을 승계한 것이다. 또한, 솔로몬의 왕비 이사벨은 페니키아인이다. 페니키아인은 당대 최고의 조선술과 건축술을 자랑하고 있어 이집트 등 여러 나라에 레바논산 최고급 목재와 함께 기술을 수출했다.  

   

"그 외에 중세의 십자군 기사단, 특히 템플기사단을 기원으로 하는 설이나, 드루이드교의 거석숭배로 거슬러 올라가는 설, 16~17세기의 헤르메스주의 결사를 전신으로 생각하는 견해 등이 있는데, 모두 후에 도입된 것이다. "

   

예서, 히람 전설 등은 모두 1717년 이후 급조한 것이다. 템플기사단에 관해서는 이미 말씀드린 바 있다. 히람 전설도 근대에 와서 삼위일체를 흉내낸 사이비 전설, 가짜 전설이다. 이유는 석공 길드라는 본연의 목적을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즉, 1717년 이후 가입하는 회원들은 대부분 석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717년 이후 가입하는 회원들 대부분은 신비주의적 낭만주의나 정치적 출세를 위해 가입하였기에 프리메이슨 간부들이나 회원들이 입회식 같은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입회식 말고는 프리메이슨다운 일이란 영혼의 1그램도 없었기에^^! 해서, 아무 일도 없잖아? 속았구나, 하고 탈퇴하는 사람들도 많았던 것이다.

   

2. 어설픈 신화, 프리메이슨

   

하면, 왜 히람의 전설을 강조해야만 했을까. 프리메이슨이 석공 조직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당대에 처한 상황 때문이다.

   

1717년 이전까지 영국 석공 조직은 큰 위기에 처한다. 이유는 1660년대에 일어난 런던대화재 때문이다.

   

"당시 찰스 2세는 불길이 번지는 방향에 폭약을 놔 집을 파괴해 불길을 막도록 했다. 마침 동풍도 잦아져 나흘 만에 화재가 진화됐다. 곧 방화범이 밝혀졌다. 방화범은 프랑스 출신의 로버트 허버트였다. 그는 유죄 판결을 받아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 화재는 로마 대화재, 도쿄 대화재와 함께 3대 대화재로 꼽혔다. 런던 대화재는 세인트폴 대성당을 포함해 런던의 80%를 파괴했으며 10만명의 이재민을 발생시켰다. 그러나 사망자는 단 9명뿐이었다.

   

그런데 이 사고 이후 런던은 전화위복을 맞이했다. 1년 전 페스트로 5만명 이상 사망했지만 화재 후 쥐가 모두 타 죽으면서 전염병이 감소한 것이다. 또 이를 교훈 삼아 벽돌 건물을 지어야 하는 조례가 만들어졌고 화재 보험이 생겼다.

   

또 시민들의 빠른 재건 요구로 인해 19세기 런던은 구식과 신식 건물이 뒤섞인 상태로 남겨졌다. 그러나 이는 현대역사가 뒤섞인 매력적인 도시로 인식되는 결과를 낳았다.

   

한편 1989년 1월 토마스 패리너 후손 기업 런던 베이커에서 제과점에서 일하던 하녀의 실수로 화재가 발생했다며 320년 지나 사과했다.

   

1666년 1월 프랑스에 패한 영국은 프랑스에 좋지 않은 감정으로 프랑스인인 로버트 허버트를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었다. 그러나 사과 발표에도 진범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런던을 뒤바꿔놓은 대화재의 범인은 과연 누구일까."

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1101021132561001

   

1666년 9월 2일부터 7일까지 5일 동안 일어난 런던대화재는 도시의 대부분을 태웠다. 공공기설, 89개 교회, 민간 가옥 1만 3200호가 불탔다. 허나, 인명피해는 8명. 이후, 도시 재건축은 목조건물을 금지하고 연와조·석조로 바꾸었다. 오늘날 런던에 가면 만나는 대부분의 건축물이 이 시기 재건한 것이다.

   

문제는 만일 이 대화재가 음모라면, 누구의 음모냐는 것이다. 당시에는 가톨릭 음모였다는 소문이 난무했다. 허나, 사실일까. 인드라는 만일 음모가 있다면 찰스 2세를 반대했던 세력이 만든 소문으로 본다. 흑사병과 런던대화재로 인해 왕정복고파 가톨릭 찰스 2세의 인기가 추락했다. 이는 신교 세력과 금융 자본에 유리한 것이다. 즉, 금융 자본과 신교 세력이 꾸민 흉계인 게다. 찰스 2세의 득이라고는 페스트 박멸 효과인데, 런던대화재 이후 페스트가 사라진 면이 있지만, 그럼에도 당시 쥐가 들끓던 런던 슬럼가는 불에 거의 타지 않았다는 점을 볼 때, 찰스 2세 음모론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아무튼 런던대화재 이후로 런던 시가지가 재건축되는데, 유일하게 재건축을 하지 못하는 건축물이 있었다. 그것이 교회였다. 이유는 왜일까.

   

"도시를 재건해야 했지만 런던만의 석공으로는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영국 전역에서 숙련공들이 모여 위대한 건축가 크리스토퍼 렌 Christopher Wren경 휘하에 결집했습니다. 그러나 건축붐은 일었지만 교회를 짓는 일은 거의 중단되었고 이로 인해 프리메이슨 지부도 침체 되었습니다. 남아있던 지부들도 의식과 상징을 거의 잃어버렸습니다. 연례행사가 중단되었고 런던의 지부도 4 곳이나 버려졌습니다. 1700년이 되자 영국 전체에 지부라고는 6개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프리메이슨 반대 운동도 일어났습니다. 1698년 런던에 유인물이 배포된 사건이 대표적인데 Mr. Winter라는 인물이 서명한 이 유인물은 '신심 깊은 모든 이들에게 프리메이슨이라 불리는 이들의 해악과 악마적 관행을 경고'했습니다. 그리고 '이들 악마적인 부류는 비밀리에 만나 자신의 믿음 외에는 모든 것에 반대하겠다는 맹세를 한다. 이들은 신에 댛나 두려움을 잊게 만드는 반그리스도이다'라고 썼습니다.

   

   

크리스토퍼 렌 경의 초상화

   

<영국 과학자, 건축가. 윌트셔의 이스트 노일 출생, 런던 교외 험프튼 코트에서 사망. 목사의 아들로서 어릴 때부터 과학적 재능을 나타내고, 수학자 발명가로서도 알려졌으며, 1657년엔 옥스퍼드 대학교 천문학 교수가 된다. 1662년 펜브르그, 카렛지 예배당을 설계하고, 건축에 열중하여 셸든 기념강당(1664~1669)를 건설하는 한편,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의 개축의원이 된다. 1666년 런던 대화재 후 즉시 바로크적 런던 재건도시계획을 제안하여 1669년 건설 총감이 되고, 세인트 폴 대성당(1675~1710) 50여 교구성당, 그리니치병원(1696~1789), 햄튼코트 궁전신관(1689~1694)등 매우 많은 건조물을 건조하였다. 17세기 후반 영국을 대표하는 건축가로서 간결 웅위한 고전주의를 기조로 이탈리아, 프랑스의 바로크적 경향을 자유로이 수입함과 동시에 구조 시공면에 독자의 발명 재능을 표지하여 후세 건축가에게 영국건축의 규범을 제시함으로써 추앙 받았다.>

   

결국 프리메이슨의 미래를 위협하는 상황을 맞아 런던의 네 개 지부 회원들은 영국 내 모든 지부를 총괄하는 총지부를 만들기로 결정했습니다. 1717년 2월(보통의 백과사전에 기록된 프리메이슨의 결성일입니다) 네 지부가 모두 모였습니다. 성 베드로 성당 근처 구스 앤 그리디론Goose and Gridiron술집에서 모이던 지부1, 파커스 레인의 크라운Crown술집에서 모이던 지부2, 코번트 가든의 애플트리Apple Tree술집에서 모이던 지부3, 웨스트민스터 채널 로우Channel Row의 러머 앤 그레이프스Rummer and Grapes술집에서 모이던 지부4가 그들이었습다. 규모가 가장 큰 것은 회원 수가 70명 가량인 지부 4였습니다. 1717년 6월24일(이날은 프리메이슨의 수호성인 중 하나인 세례자 성 요한의 날이기도 합니다)에 구스 앤 그리디론에 다시 모인 이들은 지부 3의 회원인 엔서니 세이어Anthony Sayer를 총지부장으로 선출합니다. 이후로 1722년 존 몬태규John Montagu공작이 선출되고 278년동안 총지부장 지위는 귀족이나 왕족이 독점합니다."

http://blog.naver.com/miavenus/memo/70126004044

   

일부 프리메이슨 해설서에는 런던대화재로 교회 설계도가 모두 잿더미가 되었기 때문으로 말한다. 허나, 그따위 비밀스런 설계도, 열쇠, 성배, 코드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인드라는 지금껏 프리메이슨 석공이 아니면 교회 건축물을 만들 수 없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또한, 크리스토퍼 렌이 프리메이슨이었다는 이야기도 들어본 바가 없다. 결국 이유는 엉뚱한 데에 있었다.

   

석공 길드의 쇠퇴.

   

런던대화재로 석공 수요는 엄청났다. 해서, 전국의 석공을 다 불러모은 것이다. 문제는 전국 석공을 다 불러모아도 런던 재건 사업을 제대로 추진할 수 있겠느냐는 점이다. 결국 무작정 상경하여 놀고 있는 사람들 천지였으므로 이들을 재건축 사업에 투입했을 것이다. 예서, 문제가 발생하는 셈이다.

   

석공 일이란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다. 교회 하나 건축하는 것이 반백 년 보통 걸린다. 석공인은 자신들 가치를 위해 극소수의 석공인으로 유지하였으며. 하루 노동 시간을 제한한 것이다. 헌데, 만일 석공 일을 개나 소나 할 수 있다면?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바로 이 대목을 중시해야 한다. 런던 재건축이 대부분 목재가 아닌 석재로 이루어진 공사였다. 뿐만 아니라 런던 대화재 이후로 런던 이외의 지역에서도 목재가 아닌 석재 건축이 보편화되어가기 시작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엄청난 숫자의 석공이 필요했다. 해서, 석공 숫자를 늘여야 했는데, 석공 조합으로서는 난색을 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숫자를 늘이면 석공 기득권이 약화한다.  이에 석공이냐, 자유인이냐 하고 부담을 느낀 석공 중에는 말 그대로 프리랜서가 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석공조합에서 하나둘 석공들이 프리 선언하며 탈퇴하니 존폐 위기에 내몰린 것이다.

   

결국 석공 길드는 프리메이슨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석공의 기득권을 포기한 길드. 명색만 남은 석공 길드. 왜냐하면, 이제는 개나 소나 석공 일을 할 줄 알기에^^!

   

3. 길드에서 길드 사회주의로!

    

"단, 프리메이슨의 이름 그 자체가 <자유로운 석공(石工)>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중세 이후의 석공 길드에서 파생한 것이 거의 확실하며, 영국에서 1360년의 윈저 궁전 건조시에 왕명에 의해서 제후로부터 징용된 568명의 석공집단을 기원으로 하는 설이 유력하다. 원래 영국에서 석공은 오래전부터 교회나 국왕의 특권적 비호하에 있었으며, 여러 가지 세속적 의무가 면제되었다. 이 유력한 길드도 중세의 붕괴와 함께 대교회건축의 기회가 격감했기 때문에 본래의 직업적 석공 길드가 해체에 이르렀을 때, 대륙에서 도래한 장미십자단 같은 비밀결사가 재생의 이념을 접목한 것이 18세기 초의 프리메이슨 성립의 주된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어쨌든 "지상에 신의 집을 만드는" 교회건축가의 동직조합은 이 무렵 겨우 <보이지 않는 천상의 집>으로서의 정신의 건축물, 즉 프리메이슨의 구축으로의 탈피가 요구되었다."

   

길드는 중세의 산물이다. 11세기에 접어들면서 중세 유럽에는 중세 온난기가 찾아왔다. 그 이전까지 야만 상태에 머물렀던 중북부 유럽이 따뜻해지면서 북방 바이킹족이 모스크바, 영국은 물론 그린랜드(이 시기 그린랜드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와 북아메리카까지 항해할 정도로 활동 영역을 넓혔다. 해서, 그간 지중해 무역의 일부였던 이태리와 북해 무역의 바이킹족을 연결하는 로만틱 가도를 통해 육상 교역을 시작하는 원거리 상인들이 발생한다. 이들 원거리 상인들이 롬바르디아 상인이다. 또한, 원거리 상인들이 과거 로마 요새였던 데를 북해에 이르는 중간 거점으로 개발하니 요새에서 시장이 발생하고, 요새와 시장을 합치니 도시로 발전하는 것이다. 이 도시에서 수공업자들이 등장하니 한자 상인인 게다. 

   

왜 수공업자들이 상인이 되는가. 최초에는 대자본 상인 길드를 앞세워 롬바드리아(이태리 북부) 상인이 시장을 독식하였다. 물론 이는 교황의 권력을 배경으로 한다. 길드는 실제 목적이 거래의 이득을 취하는 것이지만, 명분상으로는 교회의 영광을 전도하는 것이었다. 

   

허나, 각 봉건 영주, 현지 상인, 현지 수공업자들이 상인길드의 독식에 반발하면서 이권 분배를 요구하여 롬바드 상인과 이들 세력이 타협점을 마련한다. 이때, 현지 상인, 현지 수공업자들이 롬바드 상인 길드를 본따 만든 것이 상인 길드요, 수공업자 길드이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현지 길드이다 보니 롬바드 길드와는 다른 길을 걸어간 셈이다. 

   

많은 이들이 오해하는데, 길드는 중세에 탄생한 것이므로 어디까지나 종교가 우선인 조직이었다. 다만, 이후 종교적인 취지가 퇴색하여 실리적인 면만 남은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수호 성인인 게다. 가톨릭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적이었지만, 자신들만의 특색을 살리기 위해 강조한 것이 수호 성인이다. 

   

해서, 같은 교인이라는 점에서 그들은 형제였던 것이다. 이것이 근대 이후에는 친구, 동지, 동무로 변모한 것이고~! 인터넷 시대에서는 이웃으로 통한다! 자주 교류하는 이웃 사촌이 부모형제나 남편아내, 애인보다 더 친하다^^?

   

"런던과 웨스트민스터에 있었던 4개의 로지(본래는 대건축 현장의 직인들의 <보청소옥>이라는 뜻)가 세이어의 음두로 <단결과 조화의 중심>인 하나의 대 로지로 대동단결한 것은 1717년 세례자 요한의 축일(6월 24일)이었다. 6년 후인 23년, 프로테스탄트 목사 앤더슨(James Anderson)에 의해서 <헌장>이 편찬되고, 프리메이슨 회원이 준수해야 할 도덕률인 <오래된 여러 의무>가 제정되었다. 덧붙여서 기본 단위의 로지를 상위의 대로지에 통합하는 조직 형태는 이후에도 변하지 않고, 현재도 세계 각국에 하나씩의 대 로지가 놓여져 하부의 지방적 로지를 통괄하고 있다. 로지의 내부 구성은, 당초는 사제, 직인, 스승의 3단계로 이루어지고, 각각이 멤버가 걷는 인식의 계제를 나타내고 있으며, 후에 <비밀의 스승>, <스콧치>, <장미십자기사> 등 다양한 위계가 도입되어서 위계제도가 건축학적으로 복잡화되어 가는데, 이는 발전 과정상, 외부로부터 다양한 고대 밀의나 비교(秘敎)사상이 도입된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길드는 도제 - 직인 - 장인(마이스터)로 구성한다. 장인은 그 직종에 있어서 최고의 기술자(마이스터)를 뜻하며 한두 명의 직인과 도제를 거느릴 수 있었고, 장인만이 길드에 가입할 수 있었으며, 제품을 시장에 판매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직인은 아직 장인 밑에서 기술을 연마하는 제자로서 자기 손으로 만든 제품을 길드에 제출하여 심사에 합격하면 장인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는데, 스승과 제자가 혈연지간이 아닌 경우 장인의 딸과 결혼하여 독립하는 직인이 많았다. 도제는 장인의 집에서 잡심부름을 7년 이상해야 직인으로서의 대우를 받았다.

   

처음에 중소 상인 길드 자격은 도시 안에 토지를 보유한 자에 한정되어 있었다. 이는 대자본 상인이 회원인 롬바드 길드를 견제할 목적하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나 롬바드 길드가 유럽 전 지역에 현지 지부를 세우면서 임차에서 소유로 바꾸는 전략을 취했다면 이 조항이 무력화했을 것이다. 다른 도전이 수공업자 길드였다. 판타지 소설에 등장하는 드워프처럼 초기 수공업자들은 맥주와 일 자체를 좋아하는 원시 공동체를 추구할 뿐, 도시 내에 토지가 없었다. 허나, 자신들이 만든 제품을 헐값에 사다가 시장에서 비싸게 내다 파는 상인들 행태에 분노를 느낀 수공업자들은 길드를 만들어서 상인 길드에 대항했던 것이다. 결국 상인들은 토지처럼 기술 역시 '자산'으로 인정한 것 같다. 이런 영향이 오늘날까지 남아 호주 같은 데로 이민갈 때, 호주 당국이 '자본'이 많거나 '기술'이 있는 이들을 우대하는 정책이 나온 것이다. 

   

국유본 태동 시기에는 영국 예를 보듯 길드란 자본주의 발전에 적대적인 봉건적 산물이었다. 허나, 국유본이 자유주의를 극단적으로 추구하는 과정에서 자유주의에 대한 회의와 반성을 낳았다. 이에 따라 독일 비스마르크의 사회보장 젇책이 탄생한 것이다. 헌데, 독일 비스마르크 사회보장 정책의 기초란 독일 길드 전통을 새롭게 응용한 것이다. 독일 비스마르크 사회보장 젇책은 국유본 내부에서 큰 논란을 낳아 페이비언 협회를 탄생하게 만든 배경이 되었다. 이후 이러한 관심은 이차대전 이후 길드 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로 발전한다.

   

"프리메이슨이 역사상 수행한 역할은 그다지 명확하지 않다. 영국에서 발생하자 그것은 곧바로 대륙으로 파급되어서, 30년대에는 특히 프랑스에서 세력을 확장했는데, 그 이신론적(理神論的) 경향은 곧바로 가톨릭 교회의 반발을 샀다. 38년 교황 클레멘스 12세는 프리메이슨에 가입하는 것을 <교회와 정당한 국가권력에 반하는 활동>으로 보고 파문선고의 교서를 발했다. 한편 프로테스탄트 목사의 입회자가 적지 않는 점에서 보아서, 프로테스탄트측의 평가는 그다지 부정적이 아니다. 가톨릭의 반발도 프리메이슨의 신조 그 자체라기 보다도 정치적 파급효과를 두려워한 것이다."

   

프리메이슨은 영국 내에서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통합에 도움을 주었다. 스코틀랜드 독립파에는 스튜어트 왕권파는 물론 신교 장로파 귀족도 있었기 때문이다. 가령 올리버 크롬웰은 스코틀랜드를 정복하면서 로슬린 성당을 마굿간으로 쓰기도 했다^^! 해서, 잉글랜드 신교 귀족에도 경계를 늦추지 않던 신교 장로파 귀족을 견제할 효과적인 수단이 프리메이슨이었던 것이다. 이 당시 프리메이슨으로 가입한 이들 대다수는 당대 권력에서 소외된 신학자 등의 지식인이거나 몰락 귀족들이었다. 국유본은 이들 프리메이슨 세력을 지원하여 장로파 귀족을 견제했던 것이다. 하여, 장로파 귀족들은 프리메이슨 장로파로 인해 스코틀랜드 독립파에서 중립화하였던 것이다. 왜? 프리메이슨 장로파는 민족 문제를 중시하는 편이 아닌 국제파이므로 명분상 앞서지 않겠나?

   

바로 이러한 프리메이슨의 국제파적 성격은 프리메이슨 혁명 수출로 이어졌다. 이는 이웃 나라인 프랑스로 향했던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당대 프랑스사를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엄청난 분량이므로 짧게 초간단 이야기한다.

   

프랑스에서는 필립 4세 이후부터 가톨릭 교회를 장악하려는 시도가 끊이지 않았다. 영국에서는 국교회로 성공하여 오늘날까지 국교회 수장이 영국 국왕이지만, 프랑스에서는 지속적으로 도전만 계속할 따름이었다. 

   

프랑수아 1세. 그는 르네상스형 개혁 군주였다.

   

http://ko.wikipedia.org/wiki/%ED%94%84%EB%9E%91%EC%88%98%EC%95%84_1%EC%84%B8_(%ED%94%84%EB%9E%91%EC%8A%A4)

   

그의 야심찬 계획은 유가에 맞선 법가 진시황제와 유사했다. 봉건 정치제도를 중앙집권 정치조직으로 바꾸기 위해 가톨릭 교회를 행정 조직화하려 했던 것이다. 허나, 이는 좌우 양쪽으로 반대파를 형성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우선 좌파에서는 위그노파가 등장했다. 루터 종교개혁은 프랑스에서도 화제였는데, 초기에는 루터 종교개혁에 대해 프랑수아 1세가 시토파 수도원 영향 때문인지 긍정적이고, 관용적이었다. 허나, 위그노파 중 일부가 로마 가톨릭은 물론 왕권으로부터도 독립하려는 과격파로 발전했던 것이다. 이는 가톨릭 교회를 국가 행정기구로 재편하는 데에 대한 반대가 배경으로 보인다. 다른 한편, 로마 가톨릭 권력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는 전통을 중시하는 가톨릭 동맹도 반대했던 것이다.

   

하여, 위그노와 프랑스 왕권과 로마 가톨릭 교회간의 대결은 이후 프랑스 왕권을 루이 체제와 오를레앙 체제로 분리시켜 부를 수 있을 만큼 분열로 나아간 것이다.

   

프랑스에서 오를레앙 공작이란, 한국으로 치면, 파리 - 서울, 오를레앙 - 경기(강화도)처럼 오를레앙이 프랑스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정학적 위치였기에 왕의 동생에게 내리는 작위였다. 허나, 바로 이런 이유로 오를레앙 공작이란 국왕을 한편으로 보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국왕을 견제하는 귀족 대표가 된 것이다. 

   

당대의 오를레앙 가문은 루이 15세, 16세에서 보듯 어린 왕이 집권한 시기에는 섭정을 했다. 그런 섭정 시기에 오를레앙 가문은 희대의 스코틀랜드 사기꾼, 경제학자 존 로를 영입한 것이다.  

   

"결투로 살인하고 암스테르담으로 도망쳐 은행경영에 대하여 공부하였다. 1710년 후 영국으로 돌아와 은행개혁안을 제출했으나 거부당했다. 그러나 그의 개혁안이 1716년 루이 15세로부터 받아들여져 프랑스 총은행(總銀行)과 서방회사(西方會社:루이지애나회사)의 설립 허가를 얻었다. 1717년 루이지애나회사를 서(西)인도회사로 발전시켜, 북아메리카 미시시피강(江) 유역의 광대한 프랑스령(領)의 개발을 기도하였다. 이와 같은 로의 재정체계는 프랑스에서 일대 붐을 일으켰다. 조폐권(造幣權)과 무역독점권을 둘러싸고 '로 체제'를 확립하였다. 1720년 재정총감(財政總監)이 되어 프랑스 재정의 중심인물이 되었으나, 지폐의 남발과 투기확대의 결과 경제공황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 때문에 사직하여 프랑스를 떠나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가난하게 죽었다." 

[출처] 존 로 [John Law ] | 네이버 백과사전

   

   

"국제유태자본과 북한의 화폐개혁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09/12/10

    

1. 국유본과 프리메이슨

2. 국유본론과 좌우파

3. 국유본과 북한의 화폐개혁

4. 국유본과 히스패닉, 그리고 북미연합

5. 국유본론의 경제전망과 계량적 근거들

6. 국유본 경제 동향에 의거한 호주달러 전망

7. 달러캐리 이후 닥칠 달러강세에 대한 대응책

8. 국유본과 이민주의 석유회사 인수

9. 국유본론의 주가전망과 인간지표

10. 두바이사태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

11. 사교육금지는 경제활성화에 기여하는가

12. 국유본과 이명박정부의 인구감소계획 엇박자를 어찌 보아야 하나?

13. 국유본의 한명숙 키우기 노림수는 무엇인가

14. 국유본론, 음모론, 엑스퀴지트콥스

15. 전략적 글쓰기에 관한 궁금증들

16. 노훼어, 혹은 검색력에 왕도는 있는가

17. 지식공부와 마음공부 병행하기"

http://blog.naver.com/miavenus/70075391693

   

오를레옹 가문이 존 로를 영입한 건, 위그노파나 다름없던 앙리 4세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프랑스왕 계보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6&dirId=613&docId=61764680&qb=7ZSE656R7IqkIOyZleqwgA==&enc=utf8&section=kin&rank=4&search_sort=0&spq=0&pid=gXsFkc5Y7tGsst6Pvl8ssc--211926&sid=OM3KqMYc104AADLGUR0AAAET

   

"위그노이자 나바라 국왕 시절부터 그를 보필한 쉴리 공작 막시밀리앙 드 베튄(Maximilien de Bethune, duc de Sully)을 전격적으로 재상으로 기용해 오랜 전쟁으로 파산 상태였던 프랑스의 재정을 크게 개선시켰을 뿐 아니라 전반적으로 프랑스 사회를 발전시켰다. 지나치게 과중했던 농민들의 세 부담을 줄이는 대신 귀족들의 세 부담을 늘리고, 위그노들이 대부분이었던 프랑스의 상공업자들이 다시 생활 터전으로 돌아가면서 직물 산업, 유리 공업 등이 다시 발전했다. 재무, 농업, 토지 관리에 있어서의 쉴리 공작의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고, 도로망, 삼림, 운하 건설과 캐나다 퀘백 주 개발 등이 그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앙리 4세의 유명한 말 "하느님께서 허락하신다면, 나는 왕국의 모든 국민들로 하여금 일요일이면 닭고기를 먹게 하겠다(Si Dieu me prête vie, je ferai qu'il n'y aura point de laboureur en mon royaume qui n'ait les moyens d'avoir le dimanche une poule dans son pot! )"는 현실이 되었다. 현대 프랑스에서 닭은 프랑스의 상징이기도 하다."

http://ko.wikipedia.org/wiki/%EC%95%99%EB%A6%AC_4%EC%84%B8

   

앙리 4세는 낭트 칙령을 발표하여 사실상의 종교 자유를 선언하는데, 이는 상당수가 위그노파였던 금융 자본에게 큰 환영을 받는다. 헌데, 루이 14세(짐이 곧 국가다, 라는 건 마리 앙투아네트의 먹을 것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어요,처럼 프랑스 혁명파들이 꾸민 흉계일 가능성이 크다. 즉, 루이 14세가 그런 말한 적이 없다는 것이 현재까지 유력하다.)가 낭트 칙령을 폐기하자 금융 자본이 프랑스를 떠나 프랑스 경제는 순간적으로 엄청난 위기에 빠졌다. 해서, 오를레앙 가문이 존 로를 영입한 것은, 루이 14세 정치와는 다르게 영국과 같은 정치를 하겠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오를레앙 가문 야심도 있었다.   

   

아무튼 루이와 오를레앙의 대결은 프랑스 혁명을 지나 이후 왕정복고 시대까지 이어진다. 예서, 이야기 핵심은 오를레앙이다.

   

프랑스혁명과 프리메이슨 관련에서 오를레앙 공작 행적을 문제삼기 때문이다. 가령 프랑스 식량을 매점매석해서 프랑스에서 식량 문제를 일으켰다는 혐의이다. 이는 타당성이 있는 편이다. 국유본이 알파오메가 전략에 따라 오늘날 이명박 정권을 고립시켜 국유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한국 쌀값, 고기값, 채소야채값이 안정화함에도 국유본이 쌀값 등을 이상급등을 시켜서 시민을 불안하게 하는 것과 유사한 전략이다.  

   

http://ko.wikipedia.org/wiki/%ED%94%84%EB%A6%AC%EB%A9%94%EC%9D%B4%EC%8A%A8

   

다만, 이러한 오를레앙 가문의 행적은, 단지 프리메이슨 차원에서만 볼 수 없다. 오를레앙 개인적 야심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프랑스 혁명은 프리메이슨 차원에서 보기에는 다양한 세력들이 연계하고 있기에, 더 나아가 루이 16세 등 프랑스 왕들조차도 프리메이슨 회원이었다는 이야기가 나돌기에 좀 더 섬세한 분석을 해야 하는 것이다.

   

아무튼 이런 대목은 이후 프랑스 혁명 문제를 다룰 때에 본격적으로 말할 것이다. 

   

"사실 자유, 평등, 박애의 신조는 프랑스 대혁명의 슬로건에 애용될 정도로 진보적이었기 때문에, 18세기의 계몽주의 사조와 결부되기 쉬웠다. 하지만 정치적 이데올로기는 명확하지 않아서, 후에 이탈리아 통일이나 프랑스 제3공화정하의 반가톨릭운동에 일정한 역할을 수행하고, 프랑스 혁명 전야에도 온건한 공화주의를 고취시킨 한편, 혁명 말기에는 오히려 자코뱅당에게 박해받아서 단두대로 보내진 회원도 적지 않다. 그러나 항설 레벨에서는 프리메이슨의 가면을 쓴 유대인의 세계혁명=세계공화국 건설이라는 음모설이 떠돌고, 그로 인한 공포가 가끔 프리메이슨 박해를 초래했다. 20세기에 들어온 후에도, 나치스 독일정권하에서 1933년 이후 모든 로지가 해체된 것 외에, 러시아 및 그 위성국, 기타 독재정권국에서는 현재도 활동이 금지되어 있다.

   

결국, 내셔널리즘이나 배타주의에 적시되기 쉬운 프리메이슨이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최량의 토양을 제공한 것은 미국이었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 중 G. 워싱턴을 비롯해 J. 먼로, T. 루스벨트, F.H.S. 트루먼 등 은 프리메이슨 회원이었다고 하며 또한 1달러 지폐 피라미드나 그 위에 떠있는 눈의 그림은 프리메이슨의 교의를 반영하고 있다고 한다.

각국에서의 활동사

프리메이슨의 성격이 변화한것은 프랑스에 그람토리암(Grand Orient, 대동사(大東社))이 1773년에 성립하고, 프랑스 혁명에 참가한 이후라고 한다. 영국 본국의 프리메이슨이 일반적으로 정치문제를 회합에서 화제로 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서, 그람토리암의 산하에 들어온 대륙계 프리메이슨은 오히려 적극적으로 사회개혁을 추진했다.사실,프랑스 혁명의 선언은 프리메이슨의 로지 내에서 기초되고, 기존의 권력을 폭력적으로 전복할 것을 지향한 계명결사도 독일의 로지 내에서 결성되었다. 또한 여성의 입회를 인정하는 등 민주적인 결사운영도 추진했다. 이 때문에 18세기 말에는 로빈슨(John Robison)이나 바루옐 (Barruel) 등이 프리메이슨을 음모집단이라는 논술을 펴고, 결국 1840년대에는 세계정복을 꿈꾸는 유대인의 비밀결사라는 <프리메이슨 유대인 음모설>을 낳았다.그 최대의 사례는 1905년에 세상에 나온 『시온 의정서』로, 이는 유대인 프리메이슨에 의한 세계정복의 초안이 제시된 위서(僞書)이다. 한편 초기의 나치스는 이 문서를 이용해서 반유대의식을 선동했다. 그러나 가장 정치적이었던 그람토리암에서조차 19세기에 들어오면 회원이 온건파로 이해하고 있으며, S. 볼리버 등과 결합한 라틴아메리카의 프리메이슨 등 을 제외하면 그 정치성격은 오히려 보수적 방향으로 바뀌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프리메이슨의 활동은 미국에서 현저했다. 미국에서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독립을 위해서 싸운워싱턴이나 B. 프랭클린, 또한 T. 제퍼슨 등 많은 지도자가 프리메이슨이었다. 한편 프랑스의 공화사상을 계승하는 합중국에서는 각 주가 독자적인 그랜드 로지를 만들고, 그 상위에 선 연합 그랜드 로지는 소유하지 않고 있다. 또한 영국식의 폐쇄적 틀에서 벗어나 공개적 결사로서 하고 있는 점이나, 새로운 의식의 설정을 인정하고 있는 점에도 특징이 있으며, 회원수400만 명을 넘는 아메리카계 메이슨을 형성하고 있다. 또한 흑인을 구성원으로 하는 니그로 프리메이슨(Negro Freemason)도 결성되어 있다.

   

한편, 라틴아메리카어에 유입된 그람토리암계의 프리메이슨은 그곳의 민족독립운동에 가담하여, 오늘날에도 정치적 영향력을 가진 거의 유일한 조직으로 되어 있다. 아시아로의 진출은 유럽열강의 식민지 경영과 함께 행하여지며, 인도, 중국으로는 영국계, 인도네시아, 자바에는 네덜란드계, 필리핀에는 아메리카계의 로지가 만들어졌다."

   

미국 독립, 프랑스 혁명, 아편전쟁, 페이비언협회, 일본 유신과 한반도 침략, 시온의정서와 같은 문제는 이후 인월리에서 보다 자세하게 다룰 것이다. 

   

정리한다.  

   

인드라가 현재까지 정리한 바로는, 국유본은 18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는 기간, 주요한 정치 도구로 프리메이슨을 활용하였다. 허나, 국유본의 새로운 주인으로 등극한 로스차일드는 기존 국유본 권력 힘을 약화시키고자 프리메이슨을 서서히 죽여갔다. 대표적인 예가 미국에서 반메이슨 운동이 일어났는데, 그 배후가 로스차일드이다.

   

오늘은 이 정도로 한다. 마지막으로 쪽발이 매국노 판사들이 왜 요즘 지랄을 하고, 국유본 언론이 쪽발이 매국노 판사 보도를 최우선으로 하는지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겠다. 

   

국유본은 영미처럼 한국도 국민참여재판을 추진하려고 한다. 이를 위해서 내놓는 방식이 바로 판사들의 정치적 발언을 강화시키는 것이다. 이것 모두 영미법대로 가려고 하는 국유본의 공작이다. 판사들더러 노숙자될래, 매국노가 되어 FTA 반대 발언할래? 강요해서 정치적 논란을 야기시키면, 이후 누가 판사 판결을 공정하게 보겠는가. 아무도 공정하게 보지 않을 것이다. 쪽발 매국노 무리에게는 무조건 무죄, 국유본과 맞싸우는 투사들에게는 무조건 유죄를 때릴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양상을 극단화시키면 국민 정서가 둘로 분열할 것이고, 예서, 그럼 판사들을 믿지 말고, 시민을 내세우자는 여론이 등장할 것이다. 해서, 자연스럽게 배심원제를 정착시키겠다는 것이다. 하면, 왜 국유본은 배심원제를 원하는가. 그것이 훨씬 비용을 절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애국심에 충만한 판사들이 여전히 다수다. 반면 우리하나파쇼법 연구회 쪽발매국 뉴라이트 FTA 반대 국유본 판사들은 소수다. 이들 국유본 판사만으로는 곤란하니 국유본이 배심원제를 강화시키려 하는 것이다. 로스쿨 제도도 국유본 역점 추진사업인 게다. 국유본은 궁극적으로 민족, 민중, 인류를 위해 일하는 의인을 만들어내는 국가 고시제도를 없애려하는 것이 목표인 게다. 

   

국민 여러분! 쪽발 매국노, 이완용만도 못한 국유본 판사들에게 한마디씩 합시다. 이 구족을 멸할 개씨발 색희들아. 니 쪽발이 애비 색희가 그렇게 가르치든? 이 사이코패스 개씨발색희들아.

   

하면, 이런 대목에서 여러분은 인드라가 왜 국유본 판사에게 감정적인가를 반문할 것이다. 국유본이 국유본 판사에게 힘을 실어줄 수 있는 것이지, 왜 그리 흥분하나~! 인드라여~? 하고 말이다. 이것이 인드라와 국유본의 게임인 게다.

   

국유본이여! 국유본이 원하는 만큼 놀아주겠다.

   

한반도 평화통일은 2012년에 가능한가? 쪽발 뽀그리 처형은 내년으로 미룰 셈인가?

   

국유본이여! 인드라에게 계획이 있다!

   

인드라를 지지하라!

   

혁명의 불꽃을 점화시키겠다.

   

조건은 쪽발놈현, 쪽발돼중, 쪽발뽀그리처럼, 영어 원어민 교육 찬성하는 개씨발색희들처럼, 한반도 평화와 통일, 경제발전과 사회복지에 방해가 되는 적들을 모두 쓸어버려라!

   

성전기사단, 로슬린 성당, 프리메이슨에 대한 세 가지 의문과 비판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1/12/06 02:02

http://blog.naver.com/miavenus/70125821082

   

   

   

   

매국노 쪽발이 뉴라이트 나꼼수 어준이는

대체 얼마나 처먹었길래

국유본 CIA 스탠퍼드 하수인으로 놀아나는 거냐?

정도껏 쳐먹어라, 씹색희야.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24 : 성전기사단, 로슬린 성당, 프리메이슨에 대한 세 가지 의문과 비판

국제유태자본론 : 인드라 월드리포트 11/12/06

   

   

   

1. 스코틀랜드 독립투쟁에 성전기사단 합류가 결정적이었다?

   

일단 배경으로 영화 '브레이브 하트'를 비디오로 한편 감상하시라~! 남의 나라 역사여서 정신이 없을 때, 영화 한 편을 보면 말끔하게 정리할 수 있으니까.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7162

   

여기서 잉글랜드 에드워드 1세가 1290년대 유태인 추방령을 내려 유태인 재산을 날로 먹은 바로 그 남자이다~! 이걸 보고 프랑스 라이벌 필립 4세 역시 유태인 추방령을 내려 유태인 재산을 착복한다~!

   

또 영화란 실제와 다른데, 영화에서는 주인공 왈레스(멜 깁슨)가 프랑스 왕비(소피 마르소)와 떡을 쳐서 잉글랜드 왕에게 복수한다, 뭐 이런 설정인데, 실은 에드워드 2세가 동성애자 성향이다 보니 외로움에 못 견딘 프랑스 왕비가 애인 만들어 떡을 쳤는데, 이걸 영화에서는 왈레스의 죽음이 너무 허무하니까 왈레스랑 엮어서 허구적으로 만든 것이다. 역사를 보면, 에드워드 3세는 성인이 되자 엄마의 애인을 내쫓고 스코틀랜드 정복에 적극적으로 나서니 영화 뻥이 좀 지나친 감이 있다 ㅎㅎㅎ

   

본론으로 가자. 성전기사단 음모론자들은 필립 4세의 박해를 피해서 1307년부터 성전기사단이 전유럽으로 퍼졌지만, 특히 스코틀랜드로 갔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무리가 없다. 허나, 로버트 브루스가 이끄는 스코틀랜드 독립투쟁에 성전기사단이 합류하여 승리에 기여했다?

   

이에 대한 정황이 없는 것이 아니다.

   

http://charger07.egloos.com/3749584 

   

첫째, 로버트 브루스는 1307년 이전에 잉글랜드 군에게 대패하여 섬으로 대피한다. 허나, 1307년 이후 다시 스코틀랜드에 복귀하여 군을 재정비한다.

   

둘째, 로버트 브루스는 1306년에 성당에서 경쟁자를 살해한다. 이로 인해 가톨릭에서 성무집행 정지를 받는다. 파문은 아니다.

   

셋째, 로버트 브루스는 배녹번의 결전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다.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7162

   

이 음모론 가설에 대한 인드라 비판은 다음과 같다.

   

첫째, 기사단이란 명예에 살고 명예에 죽는 집단이다. 필립 4세와 성전기사단장 자끄 드 몰레이의 불화도 필립 4세가 성전기사단의 자존심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했을 것이다. 필립 4세는 성요한 기사단과 성전기사단의 합병을 요구했다. 이유는 이 시기 예루살렘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았던 요인이 크다. 허나, 속내는 두 기사단을 합병시켜 자신의 휘하에 두려한 어설픈 책략 때문이다. 허나, 이러한 책략은 자끄 드 몰레이가 즉각 거부한 데서 실패한다. 하면, 자끄 드 몰레이가 왜 거부했나? 바로 여기서 메로빙거 가문을 그리워했기 때문이니 하는 음모론이 나오는 것이다. (프랑스인에게 메로빙거 왕조가 특별한데, 이유는 영토가 프랑스는 물론 독일, 스위스 등까지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광개토대왕의 아련한 추억이랄까^^!)

   

인드라 분석으로는 기사단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분석이다. 성전 기사단을 알기 위해서는 경쟁 기사단인 성요한 기사단과 튜튼 기사단 행보를 파악해야 한다.

   

http://ko.wikipedia.org/wiki/%EB%AA%B0%ED%83%80_%EA%B8%B0%EC%82%AC%EB%8B%A8

   

http://ko.wikipedia.org/wiki/%ED%8A%9C%ED%84%B4_%EA%B8%B0%EC%82%AC%EB%8B%A8

   

자끄 드 몰레이가 거부한 이유는 성기사단의 자존심인 게다. 성기사단은 성요한 기사단처럼 신에게만 복종하는 기사단이었으므로 왕의 수하로 간다는 것은 명분에 서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 통합에 관하여 성요한 기사단 반응이 특별히 없는 것으로 봐서 필립 4세의 요구란 성요한 기사단 밑으로 성전 기사단이 들어가란 이야기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해서, 자끄 드 몰레이가 화형을 당했다. 이때, 많은 이가 죽은 것은 아니다. 4명이 화형을 당했다고 한다. 하고, 전유럽적으로 100여명 가량이 죽었다고 한다. 전유럽에서 100여명 선이면 핵심 간부급 정도만 처벌한 것인 게다.

   

아무튼 기사단이 와해했다면, 개인적으로야 복수심이 있겠지만, 조직적이라면 반드시 재건 운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끄 드 몰레이 정신을 이어간다는 것은, 아무리 로버트 브루스가 성무집행 정지 상태여서 일시적으로 교황청과 대립관계일지라도 기껏해야 왕의 신분이므로 그 왕 밑으로 들어간다는 건 조직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성전기사단이 스코틀랜드 독립전쟁에서 조직적으로 참전하여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면, 이를 조건으로 로버트 브루스에게 기사단 재건에 필요한 독립적인 요구를 했어야 한다. 허나, 역사적 기록으로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다.

   

둘째, 로버트 브루스의 성무집행 정지가 이후 풀린다. 잉글랜드와의 전쟁에 집중하기 위해 스코틀랜드와 프랑스의 전통적인 동맹 관계를 복원시켰기 때문이다. 스코틀랜드와 프랑스는 1295년부터 300여년간 동맹관계였다. 로버트 브루스가 성전기사단과 관계를 맺었다면, 로버트 브루스가 프랑스 및 교황청과의 관계 복원에 나섰을 때, 성전 기사단에서 반발이 있었어야 했다. 없었다.

   

셋째, 배녹번 전투에서 승리한 요인은 결정적으로 로버트 브루스의 전략 때문이다.

   

성전 기사단이 개별적으로 합류한 것이 아니라 조직적으로 합류한 것이라면 독립적인 부대 형태여야 한다. 허나, 배녹번 전투 승리 요인은 무엇인가. 압도적인 잉글랜드 군에 맞써 싸운 브루스 전술은 게릴라 전술이었다. 치고 빠지기. 을지문덕 장군부터 시작해서 월맹군까지 전면전을 피하고 기습 공격 등을 위주로 했기에 거둔 승리였다. 하면, 성전 기사단 전투 특징이 무엇인가. 기도 한 번 외우고 '닥치고 공격'이 전투 수칙이 아니었던가.

   

정리하면,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에서 성전 기사단이 역할을 했다고 보지 않는다. 물론 성전 기사단 일부가 합류해서 전투를 했을 개연성이 높다. 허나, 이미 자신의 정체성을 버린 상황에서의 전투 참여였으리라 본다.

   

   

   

   

2. 로슬린 성당은 성전기사단 작품이다?

   

다빈치 코드 마지막 대목은 로슬린 성당이 차지한다. 해서, 다른 건 다 허구라고 해도 로슬린 성당 만큼은 신비롭지 않느냐 하고 프리메이슨 음모론자들이 반문할 것이다. 이에 대해 인드라는 싸늘하게 답한다.

   

뉴스 > TV리포트 2006-05-09 16:10

   

http://www.jjang0u.com/Articles/jBoardMain.html?db=109&id=6965&pflag=v

   

모오든 사이비들은 가라.

   

프리메이슨 음모론자들은 말한다. 11세기까지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이 대세였다가 12세기에 갑자기 유럽에 고딕 건축 양식 붐이 인다. 이는 전적으로 성전 기사단에 속한 석공 때문이다.

   

"로마네스크 건축의 특색은 11세기 초엽까지 목조였던 바실리카식 설계로 된 네이브(nave:本堂)의 천장을 석조궁륭(石造穹窿:vault)으로 바꾼 점에 있다. 목조천장도 라인란트 등지에 남아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특수한 예에 불과하다. 석조궁륭을 일반적으로 사용하게 된 이유는 신(神)의 집으로서 불연성(不燃性)의 항구적인 건물이 바람직하였을 뿐 아니라 석재공간으로서의 통일성이 생기고 또 음향적인 효과를 높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 석조궁륭은 절단면이 원칙적으로 반원 아치이며, 로마네스크 건축에서는 창문이나 입구기둥 사이의 들보 사이나 처마 밑부분에도 이 반원 아치를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로마네스크 건축을 반원 아치의 집합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와 같은 아치의 만곡부(彎曲部)는 똑같은 석재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부채꼴의 절석(切石)으로 조립되어 있기 때문에, 각 절석의 압력관계는 상하가 아니고 경사의 방향으로 작용한다. 그러므로 반원궁륭의 기부(基部)에서는 바깥쪽으로 비스듬히 횡압력(橫壓力)이 작용한다. 궁륭이나 아치는 로마시대에 이미 나타났으나, 이 시대에는 강력한 시멘트가 사용되었기 때문에 로마네스크 건축에서 보는 긴밀한 역학적 배려가 요구되지는 않았다. 로마네스크 건축가들의 가장 큰 과제는 아치의 집합체인 궁륭과 그 중량을 비스듬히 하거나 수직으로 받는 측벽(側壁)과의 관계를 어떻게 처리하는가에 있었다. 가장 단순한 방법은 측벽을 두껍게 만들어서 양 압력을 버티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벽이 견고하려면 채광을 희생시키고 창문을 작게 만들어야만 가능했다. 그래서 경사진 횡압력의 방향을 되도록이면 낮춤으로써 또는 궁륭의 중량을 측벽의 일정한 부분에 집중하게 하고 그 부분을 또 하나의 부벽(副壁)으로 외부에서 보강함으로써 건축의 안전도를 높여 창문도 크게 마련하는 방법을 고안하였다. 즉, 횡압력의 방향 낮추기는 첨두궁륭(尖頭穹窿)의 설계로, 또 중량의 한 지점 집중은 교차궁륭(交差穹窿)의 구축으로 실현되었다."

   

기간:1150~1500년. 중세 유럽에서 로마네스크 양식에 이어서 나타난 건축예술양식으로서, 이 시대의 실내장식은 화려하고 밝은 색조에다 여러가지 색을 사용하는 마무리가 유행되기 시작했다. 생활수준이 향상됨에 따라 가구의 종류는 증가하고 그 제작 기술도 발전하였다. 가구에서는 실용으로서의 양식의 시작이라고도 할 수 있다. 14~15세기 후기에 걸쳐 발달, 영국과 프랑스의 그것이 대표적인 것으로 되어 있다. 오크재가 주요 재료. 장식 요소로서는 수직선을 강조하여 전면에 호화로운 조각을 한 것이 특색. 모티프는 아칸더스ㆍ자단ㆍ소용돌이 등. 가구 디자인은 고딕 건축의 형식에 따라 수직을 강조한 육중한 형태와 풍부한 조각이 표면에 이용된 점이 특색이다. 등받이가 높은 의자,지붕이 있는 의자, 장의자, 침대 등은 어느 것이나 소유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이탈리아인이 고오트족(goth族)의 예술을 야만적이라고 모욕하여 부른데서 유래됨. 넓은 뜻으로는 고딕풍의 미술 전반을 가리키는 말임. 정면에서 보아 좌우에 높은 첨탑(尖塔)이 있고 입구의 아아치형은 위끝이 뾰족하며 벽이 적은 반면에 문이 많고 위로 뻗는 수직선이 많음. 대표적인 건물은 노트르담사원(Notre Dame); 프랑스, 케른(Keln)의 대사원; 독일, 미라노사원; 이태리.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90589

   

간단히 반박하겠다.

   

유럽에서 고딕 양식을 최초로 구상한 이는 베네틱트파의 쉬제르였다.

   

"2세기 초에 건축에 관심이 많았던 성직자들은 로마네스크 교회를 더 발전시키면 이런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성 디오니시오의 대수도원장 쉬제르(Abbot Suger)가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노르망디 지방의 실력 있는 장인들을 불러 모아 샤르트르(Chartres)에 공방을 차려 고딕건축의 닻을 올렸다. 이를 후원하는 파리 왕실의 재정적 제도적 행정적 지원을 이끌어냈다. 당시 샤르트르는 중세 플라톤주의의 본산으로 기독교 교리를 연구하는 산실이었다. 이런 종합적 기독교 운동을 통칭해서 샤르트르 스쿨이라 부른다."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4728

   

쉬제르가 건축공법을 따로 공부한 이가 아니다. 그럼에도 신학적 구상으로 고딕 양식을 초안 설계했던 것이다. 물론 그 초안을 바탕으로 건축 설계한 것은 석공들이었지만. 애니메이션으로 비유하면, 쉬제르가 시나리오를 쓰고 석공이 시나리오를 토대로 스토리보드를 작성하는 것이다. 예서, 스토리보드란 모뎀 장치인 게다. 아날로그 신호를 디지털로, 디지털 신호를 아날로그로 바꾸는 장치. 화가가 시를 떠올리며그림을 그린다고 할까. (에고~ 미안. 인드라가 애니메이션 시나리오 작가였기에 이런 비유를 써봤다~! 화가, 사진작가, 애니메이터들이 인드라 글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가 자신들의 작업에 영감을 많이 주기 때문이라고 했다. 학생 건축대상 받은 이도 그랬고, 아내인 애니메이터 나타샤도 그렇고, 반문화 잡지 같이 했던 사진작가도 그렇고. 하여간, 그림쟁이들이 글쟁이 인드라를 많이 좋아한다. 인드라 글만 읽으면 영감이 무럭무럭 떠오른다 했다.)

   

하면, 시토파 베르나르두스는 쉬제르에 동조했던가?

   

천만의 만만의 콩떡이다.

   

오히려 시토파 베르나르두스는 베네딕트파 고딕 양식에 격렬히 비판했다. 이유는 지나치게 화려하고 사치스럽다는 이유이다. 실제로 시토파는 베네딕트파에서 검소, 노동 윤리를 강조하여 분리한 분파였다.

   

그렇다면, 시토파 베르나르두스 건축 양식은 어떠한가.

   

"주로 로마네스크 시대에 융성하였다. 시토파수도회는 클뤼니파(派)나 베네딕투스(베네딕트)파의 화려한 활동에 반대하여 엄격하고 소박한 생활환경을 이상으로 삼았으며 그 건축에서도 장식성을 최소한도로 줄인 소박한 양식을 추구하였다. 높은 탑을 쌓는 대신 아케이드식(式)의 종추를 세웠으며, 내부공간도 좁고 전체의 구조도 단순하다. 그러나 소박하고 엄격한 포름과 벽화나 조각을 배제한 벽면의 돌의 배열 등은 부르고뉴 지방 특유의 형태미를 나타내었다. 이 양식은 클레르본의 수도원장이었던 베르나르투스(聖베르나르) 등의 지도로 전 유럽에 퍼져 중세기 중에 700개 가까운 수도원과 성당이 세워졌다. 베네딕투스파의 건축이 프랑스고딕 건축으로 발전한 데 비해, 시토파의 건축은 에스파냐이탈리아 고딕 건축의 기초가 되었다. 대표적인 건축물은 1147년 완성된 퐁트네수도원 성당으로, 회랑 ·집회실 ·침실 ·식당 등을 갖추고 횡단 반원통 볼트(궁륭)가 얹힌 라틴십자 플랜의 3랑식(廊式) 바실리카건축인데, 명층(明層)은 없고, 사각형의 제실(祭室)과 익랑(翼廊)에 4개의 교회가 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되고 전형적인 시토파건축이다.  "

[출처] 시토파건축 [派建築, Cistercian architecture ] | 네이버 백과사전

   

시토파 건축 양식이 이후 계속한 것이 아니다. 베르나르두스 생전에 주로 반영한 작품이 시토파 건축이었기 때문이다. 고딕 양식과 시토파 건축 양식, 아니, 정확히는 고딕 양식과 베르나르두스 양식 차이는 무엇인가.

   

고딕 양식은 바벨탑을 연상시킬 정도로 하늘 높이 치솟는 외양과 더불어 화려한 장식품과 스테인드글라스를 추구한다. 반면 베르나르두스는? 높은 탑을 쌓는 대신 아케이드식(式)의 종추를 세웠으며, 내부공간도 좁고 전체의 구조도 단순하다. 그러나 소박하고 엄격한 포름과 벽화나 조각을 배제한 벽면의 돌의 배열 등은 부르고뉴 지방 특유의 형태미를 나타내었다. (쉬발, 인드라가 아무 생각없이 유럽 배낭여행 두 달 가서 죽어라고 성당 건축물 구경한 것이 이토록 도움이 될 줄이야~!)

   

음모론자들은 말한다. 로슬린 성당은 일반 석공이 아니라 성전기사단 석공 출신들로만 구성해서 만든 것이라고 말이다. 또한, 성전 건축을 중시해서 교황마저도 성전기사단에 석공으로서 작품을 자유롭게 만들 특권을 부여했다고 강조하기까지 한다. 그런 석공들이 만든 것은 베르나르두스 식인 게다.

   

헌데, 베르나르두스 식과 베네딕트 고딕 식 중 로스린 성당은 과연 어느 쪽일까?

   

베르나르두스 식인가, 아니면 베네딕트 식인가.

   

베네딕트 식이었다. 전통적인 양식뿐만 아니라 중근동과 유럽 신화를 모두 모았다 할 정도로 화려하게 장식했기 때문이다. 누가 봐도 소박하다 할 수 없다. 

   

이것만으로도 성전기사단 로슬린성당 음모론이 얼마나 허접한 것인지를 알 것이다. 그외에는 사소한 것이니 나중에 기회가 오면 더 엄중하게 비판할 것이다. 

   

인드라가 보기에 로슬린 성당이란 국유본과 스코틀랜드 지역민 이해가 만난 관광상품에 지나지 않는다. 이따위 조작한 관광상품에 놀아난다는 것은 인간 품위를 떨어뜨리는 행위이므로 삼가해야 하겠지만, 어디 인간이 그런가. 유치한 것이 또한 인간이다. 명백히 허구인 드라마 촬영장소도 가는 판에 적당히 신비감 퍼붓는 관광상품을 놓칠 수가 있겠는가.

   

가서 보라~ 대신, 허접하게 감동하는 자신을 되돌아보라~! 니 인생이 혹 매국노 쪽발 노빠 인생이 아니었는지 반성하시라~!

   

   

   

3. 1717년 프리메이슨 규악을 기초한 제임스 앤더스는 유태인이다?

   

니 애비가 쪽발돼중, 쪽발놈현 쪽발이인 거냐? 인간답게 살아아 한다. 언제까지 개돼지 쪽발돼중, 쪽발놈현처럼 버러지 매국노 인생을 살 것이냐. 정신을 차려야 한다. 국유본 세뇌에서 벗어나야 한다. 니가 인간이면, 이제는 좀 깨달아야 한다.

   

그대는 결정해야 한다.

   

남은 삶을 쪽발돼중, 쪽발놈현처럼 매국노 인생을 살 것인가, 아니면 한반도 평화와 통일, 사회복지와 경제발전을 위한 인간다운 삶을 살 것인가.

   

쪽발 뉴라이트 판사 색희들 때문에 고민이라고? 잘 생각해보렴. 쪽발찌라시 한걸레 기자 색희가 밤마다 전국 룸살롱을 뒤적일 수 있겠니? 없지? 최종원 같이 허접한 색희가 성노동자 여성 끼고 씹질을 하건 말건 모른다 이 말씀이다. 유일하게 아는 경로란? 그래, 국정원이다, CIA이다. 여기서 정보 찔러주지 않으면 한걸레가 알아도 절대 보도하지 않아. 밑에서 기자가 글을 써도 쪽발 한걸레 편집국에서 짜를 것이야. 그럼에도 기사화했지? 왜? 국유본 지시이니까.

   

잘 들어. 서초동 앞 룸살롱에서 술처먹는 씨발 색희들이 검찰만 있다고 착각하지 말자. 여기에는 낮에는 민주주의다, 뭐다 하는 하나회 같은 개씨발색희들, 한국을 좀 먹는 이완용만도 못한 개씨발 우라질법 판사넘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 이런 작업은 이미 프랑스에서 한 바 있지. 국유본이 감시하는데, 국유본이 판사더러 너 노숙자 될래? 시키는 대로 할래? 하는데 안 할 수가 없겠지? 심경은 이해한다. 허나, 그래도 넌, 복 받은 색희들이고, 이 나라 엘리트이면 엘리트답게 해야 할 몫이 있는 게야. 최소한 침묵해야 하는 게야. 개씨발 국유본 판사색희들아, 지하에 계신 순국선열님들이 무섭지 않느냐. 삼대에 걸쳐 니넘들 집안에 재수가 없어서 대가 끊기고, 니놈들 몸에는 온갖 질병이 난무해서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게 될 것이다. 인드라가 저주하겠다. 이 개씨발 색희들아.

   

사람이면 사람답게 살아야지, 짐승만도 못하게 사는 쪽발노빠만도 못한 판사 개씨발넘들아.

   

1717년 영국 프리메이슨은 대통합을 한다. 하면, 왜 이 시기 대통합을 해야만 했을까?

   

칠천만 한국인의 철천지 원쑤인 매국노 쪽발 노빠처럼 프리메이슨 음모론이 허구이면 성경은 그보다 열 배는 더 허구 주장 따위를 하는 국유본 하수인이자 캐병쉰색희인 프리메이슨 음모론자들은 말한다.

   

드디어 스코틀랜드에서 입지를 다지고 세계를 향해 한걸음을 내딘 것이라고.

   

좆까라, 쪽발돼중처럼 삼대에 걸쳐 쪽바리왕 궁둥이에 키스하다가 뒈질 역겨운 인생아!

   

잉글랜드사랑 스코틀랜드사를 단 하루라도 읽은 이라면 이것이 얼마나 쪽바리스런 주장인 걸 알 것이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오랜 반목 끝에 1707년 양국 의회가 연합법에 의해 통합을 했다.  헌데, 이런 연합법이 통과한 배후는 누구인가. 명예혁명 이후인 게다. 명예혁명 이후 그간 스코틀랜드 독립투쟁의 후원자였던 네덜란드 상인들이 잉글랜드에 엄청난 투자를 한다. 또한, 영란은행이 등장하는데, 초대 은행장이 스코틀랜드인이다. 잉글랜드 왕도 스코트랜드 왕조인 스튜어트 왕조이니 만큼 연합법이 통과하지 않을 도리가 있겠는가. (예서, 잊지 마시라. 인터넷에서 국유본이 킹제임스 성경을 문제를 삼는 일이 있다. 인드라는 신교는 물론 구교와 무관하다. 유신론자라고 주장해도 아직까지 남들로부터 정신적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유물론자라는 낙인이 찍혀 있다. 헌데, 킹제임스 성경을 문제삼는 이들을 보니 국유본스럽다. 뭐냐면, 킹제임스가 성경에 한 역할은 거의 전무했다. 그저 승인했을 뿐이다. 킹제임스가 킹제임스 성경에 단 한자라도 개입하거나 한 것은 없다. 왜냐하면 킹제임스가 무식했기 때문이다. 단지, 허가했을 뿐이다. 그것이 킹제임스 성경이 프리메이슨 성경이라 하는 것이다. 웃기지도 않는다. 인드라는 신교도나 구교도가 아니다. 허나, 공감할 수 있을 것 같다. 왜냐? 인드라가 진보좌파할 때, 이런 경우를 수도 없이 겪었기 때문이다. 말도 안 되는 걸 대세론으로 밀어붙이는 경우를 허다하게 봤다. 국유본이 결심하면 당신들 두뇌도 개조할 수 있어.)

   

하여간, 문제는 무엇인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잇는 스튜어트 왕조 대가 끊긴 것이다.

   

"재커바이트의 반란은 1688년에서 1746년에 걸쳐 브리튼 제도에서 일어난 폭동이자 반란, 전쟁이었다. 반란은 제임스 2세의 복위를 목표로 하였으며, 그가 명예혁명에 의해 폐위되자 스튜어트 왕가 후계자의 복권을 시도했다. 재커바이트(영어 Jacobite)라는 이름은 제임스(영어 James)의 라틴식 이름인 야코부스(라틴어 Jacobus)에서 온 것이다. 여러 차례에 걸쳐 일어난 이 반란은 발생한 연도를 따 "15년의 재커바이트 반란"(1715년) "45년의 재커바이트 반란"(1745년)과 같이 불렸다.

   

개요

여러 차례에 걸쳐 일어난 재커바이트 반란의 동일한 목표는 스튜어트 왕가잉글랜드스코틀랜드의 왕좌에 앉히는 것이었다.(1707년 이후에는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의 왕좌를 목표로 했다.) 이들은 명예혁명을 통해 집권한 메리2세네덜란드 출신인 그녀의 남편 오렌지공 제임스의 통치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들은 하노버 왕가가 성공적으로 영국의 왕좌를 양위받은 1714년 격렬한 반란을 일으켰다. 최후의 재커바이트 반란은 1745년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를 옹립하여 일어났으며 1746년 컬로든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반란은 완전히 진압되었다."

   

재커바이드 반란에서 보듯, 영국을 안정화시키기 위해서 국유본은 특단의 정책을 취하지 않을 수 없던 것이다.

   

그것이 쪽발 놈현이요, 안철수/박시장 프로젝트인 게다.

   

여러분은 아직도 눈치를 채지 못하는가. 쪽발찌라시 한경오프엠이 아무리 매국노질을 한다고한들 지지율 5% 이상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반면, 친일 조중동이 쪽발 돼중, 쪽발 놈현에 대하듯 안철수에 대해 노이즈 마케팅을 한다면 안철수 지지율은 폭등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핵심은 스코틀랜드 독립운동 핵심이라 여기는 세력에 프락치를 심어서 잉글랜드 - 스코트랜드 통합에 보탬이 되는 것. 제임스 앤더슨? 장로교 목사였다~!

   

이것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해서, 국유본이 이차적으로 수행한 것이 미국 독립이었던 것이다.

왜 국유본은 다빈치 코드를 통해 성당기사단 음모론을 퍼트리나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1/12/03 06:28

http://blog.naver.com/miavenus/70125598335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23:왜 국유본은 다빈치 코드를 통해 성당기사단 음모론을 퍼트리나

국제유태자본 인드라 월드리포트 11/12/03

   

1. 소설 '다빈치 코드'는 사실인양 꾸민 가짜

   

국유본이 적극 유포시킨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유럽인 사천만 명이 봤다 한다. 댄 브라운 소설 전략은 단순했다. 움베르코 에코의 '푸코의 진자'에서 묘사한 방식을 그대로 베낀 것이다.  소설 내에서 가짜 음모론 조직을 만들고 그것이 실재하는 양 그럴 듯하게 만드는 것이다. 중요한 건, 78%의 인민은 생활이 바빠 쪽발찌라시 한경오프엠과 같은 국유본 언론에서 이를 마구 떠들면 그대로 믿는 편이라는 것이다. 국유본은 이런 소설 전략으로 인민을 더더욱 노예화하고 있는 것이다.

   

http://blog.naver.com/ydiana/80027039263

   

쪽발찌라시 한경오프엠이나 다빈치 코드 같은 국유본 미디어에 많이 노출되다 보면 쪽발 병쉰스럽게 되는 좀비 현상이 발생한다. 특히 쪽발매국노 전교조 국유본 교사한테 세뇌당한 캐병쉰 색희들이면 더더욱~! 국유본이 노리는 효과이다. 

   

하면, 다빈치 코드에 나타는 시온수도원이니 뭐니는 뭘까. 한마디로 말하면, 가짜다.

   

http://blog.daum.net/ktyhbg/7274633

   

가짜이지만, 소설이라는 명목으로 슬쩍 피해가는 방식이다. 해서, 인드라도 바로 이 방식을 적용해서 혹시나 있을 국유본 공격에 대비하여 국유본론은 이론이자 소설입니다, 라고 하는 것이다 ㅋㅋㅋ.

   

하면, 성당기사단 사건은 무엇인가.

   

   

   

2. 성당 기사단 탄생

   

그간 유럽은 로마제국 멸망 이후 중앙아시아로부터 밀려드는 유목 민족에 쫓겨 이렇다할 공세 한 번 한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십자군 전쟁으로 대반격을 가한 셈이다. 이때, 1차 십자군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것은, 중세 온난기로 인해 농업 생산량이 급격하게 늘어나서 이전보다 경제력이 나아졌으며, 그간 유럽이 당하기만 했다는 복수심이 강렬했고,  무엇보다 십자군을 오합지졸로 보았던 중동 이슬람의 방심이 한 몫했다. 허나, 이후로는 십자군이 변변한 승리 따내기도 하늘의 별따기 만큼 어려웠다.

   

"보두앵 2세는 십자군 국가 에데사 백국의 백작(1100년-1118년) 이었고 1118년부터는 세 번째 예루살렘 왕국의 왕이 된 인물이다. 보두앵은 프랑스 레텔 백작 위그의 맏아들로 2명의 남동생과 2명의 여동생이 있었다. 아버지로부터 부르 성을 봉건영지로 받아 처음에는 부르의 보두앵으로 불렸다. 1096년 제1차 십자군이 발흥하자 사촌인 부용의 고드프루아볼로뉴의 보두앵과 함께 팔레스타인으로 갔다. 이들의 십자군 원정은 성공적이어서 예루살렘 점령에 성공하고 예루살렘 왕국을 세웠다. 1100년 볼로뉴의 보두앵이 보두앵 1세로 고드푸루아의 뒤를 이어 예루살렘 국왕이되자 보두앵 2세는 에데사 백국의 백작위를 받았다. 이듬해 그는 마라티아의 영주 가브리엘의 딸 모르피아와 결혼했다. 1104년 셀주크 투르크가 에데사 백국을 공격했는데 보두앵은 안티오키아 공국의 도움을 받았지만 하란 전투에서 패하여 셀주크의 포로가 되었다. 그 사이 보에몽의 조카인 탕크레드가 에데사 백국의 섭정이 되었다. 보두앵은 1108년 몸값을 치르고 풀려났지만 탕크레드는 에데사를 넘겨주길 거부했고 보두앵은 몇몇 이슬람 제후들과 연합하여 탕크레드와 싸워 결국 탕크레드를 축출했다. 그러나 1110년까지 유프라테스 강 동쪽의 영토 대부분은 모술의 이슬람 세력에게 빼앗겼다. 1118년 예루살렘의 보두앵 1세가 죽자 보두앵은 그의 뒤를 이어 예루살렘 왕국의 왕으로 가게 되었고 에데사는 조슬랭에게 넘어갔다. 그 무렵 팔레스타인에는 기독교인 순례자를 돕고 보호하기 위해 종교기사단이 생겨났는데 1113년 병원기사단, 1118년에는 성전 기사단이 창립되었다. 보두앵은 성전 기사단의 본부를 예루살렘의 솔로몬 성전 근처로 마련해 주었기 때문에 이 기사단의 이름이 성전 기사단이 되었다.

http://ko.wikipedia.org/wiki/%EB%B3%B4%EB%91%90%EC%95%B5_2%EC%84%B8_(%EC%98%88%EB%A3%A8%EC%82%B4%EB%A0%98)

   

1차 십자군 전쟁에서 주요한 역할을 했던 이들이 프랑스 귀족들임을 알 수 있다. 하고, 이들이 예루살렘 왕이 된 것이다. 허나, 예루살렘 왕국을 지켜내자니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이때, 등장한 것이 프랑스 귀족 위그 드 파생이다. 

   

"위그 드 파앵은 1070년 프랑스 샹파뉴 지방에 있는 세느강을 거느린 트루아에서 10~15km여 떨어져 있는 팽(Payn)에서 귀족으로 태어났다. 청년시절인 1096년 제1차 십자군에 고드프루아 드 부용(Godfrey of Bouillon) 군대에서 종군하다 1100년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 후 샹파뉴 백작의 봉신(封臣)이었던 그는 주군을 따라, 다시 1104년부터 1114년까지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떠났고, 거기서 살기도 하였다.

   

성전기사단 조직

그러다 1118년 유럽에서 중동으로 새롭게 열린 뚫린 해로(海路)를 통해 몰려드는 유럽 성지 순례자들이 항구도시 자파(Jaffa)에서 라믈라(Ramla)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이르는 산간지대를 통과할 때 떼강도의 습격을 당하는 일이 종종 발생하자 샹파뉴 백작의 지지로 "그들의 힘이 닿는 한 순례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특별한 배려로 도로와 가도를 안전하게 지킨다."라는 목표아래 위그 드 파앵과 8명의 기사들은 성전 기사단을 창설하였다. 이들은 곧바로 활동을 개시하여, 곧 명성이 예루살렘의 왕 보두앵 2세의 귀까지 들리게 되었다. 이에 호응하여 보두앵 2세성전기사단의 거처로서 왕궁 옆 건물을 주어 사용하게 했는데, 이 건물은 예전에 솔로몬 왕이 건립한 예루살렘 성전이 있던 예루살렘의 성전산(聖殿山) 위에 있었다. 옛 성전 터 위에 세워졌고, 십자군은 그 성전을 솔로몬의 성전이라고 불렀기에 여기에서 이 단체의 명칭인 '성전기사단'이 생겨났다. 또, 이들은 예루살렘 총대주교인 고르문트(Gormund)를 만나 수도자의 전통적인 서약인 청빈, 금욕, 순종 외에 순례자 보호 항목을 곁들여 서약을 하였다."

http://ko.wikipedia.org/wiki/%EC%9C%84%EA%B7%B8_%EB%93%9C_%ED%8C%8C%EC%95%B5

   

"그리스도와 솔로몬 성전의 가난한 기사들(라틴어: Pauperes commilitones Christi Templique Solomonici), 속칭 성전 기사단 또는 성전 수도회(프랑스어: Ordre du Temple 또는 Templiers)는 서방 교회 기사 수도회 가운데 가장 유명한 조직이다. 대략 중세의 두 세기 동안 존재하였으며, 1096년 제1차 십자군의 활약을 기초로 확보된 예루살렘으로의 성지 순례를 떠났던 많은 유럽인을 보호하기 위해서 설립되었다. 1129년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공식적으로 공인받게 되면서, 기사단은 유럽을 횡단하여 온 구호금을 통해 회원이 늘어나면서 세력이 빠르게 성장하였다. 성전 기사단원들은 그들만의 특징적인 복장인 붉은색 십자가가 표시된 하얀색 겉옷을 입었으며, 대부분 십자군 전쟁의 격전지에서 활동하였다. 기사단의 비(非) 전투원은 기독교 국가 전체에 걸쳐 큰 경제적 기반을 쌓아 올리는 데 일조하였다. 금융업에 필요한 많은 금융 기술을 새로 만들거나 개정하였고 유럽과 성지를 가로질러 많은 요새를 건설하였다. 성전 기사단의 성공은 십자군 운동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십자군이 결국 패배하여 성지를 도로 빼앗겼을 때, 성전 기사단을 위한 지원도 약해졌다. 성전 기사단의 비밀 입단식에 대한 루머가 만들어지면서 많은 사람들의 의심을 사게 되었으며, 기사단에 큰 빚을 진 프랑스의 필리프 4세교황 클레멘스 5세에게 압력을 넣기 시작했다. 1307년 프랑스 내 기사단원의 대부분이 체포당한 뒤, 거짓 자백을 받아내기 위한 고문을 받은 다음 화형에 처해졌다. 1312년 필리프 왕으로부터의 계속된 압력에 클레멘스 교황은 결국 굴복하여 기사단에 해산령을 내렸다. 유럽의 주요한 경제단체가 한순간에 사라지자 이후 많은 의견과 전설이 생겨났다."

http://ko.wikipedia.org/wiki/%EC%84%B1%EC%A0%84_%EA%B8%B0%EC%82%AC%EB%8B%A8 

   

보드앵 2세 입장에서 위그 드 파생이 이끄는 템플기사단이 등장한 것은 반가운 일인 게다. 더군다나 안면이 있는 귀족이니~!  

   

"600년 교황 그레고리오 1세의 명을 받아 아봇 프로브스가 예루살렘에 병에 걸렸거나 몸을 다친 성지 순례자들을 치료하기 위한 병원을 세웠다. 병원조직은 1005년 칼리프 알 하킴에 의해 병원과 부속 건물들이 파괴되었다. 1023년 이탈리아 아말피살레르노 출신의 상인들이 이집트 칼리프의 허가를 얻어 병원을 다시 세웠는데 그 병원은 세례자 요한의 묘지에 세워졌고 베네딕토회 수사들의 봉사로 성지 순례자들을 위해 구호 활동을 하였다. 이 구호단체는 십자군 원정 이후로 군사적인 색채가 더해졌다. 1099년 기독교 세력이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예루살렘 왕국이 세워지자 군사적인 기사단 조직으로 개편되었고, 무슬림들과의 전쟁을 통해 그 용맹성을 인정받고 성당 기사단과 함께 팔레스타인 지역의 중요한 기독교 종교기사단으로 발전하였다. 13세기 들어서 팔레스타인에서 이슬람의 세력이 강해지고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십자군 국가들이 붕괴되었다. 결국 1291년 마지막 기독교 세력의 근거지인 아크레가 무슬림들의 수중에 함락되자 기사단은 키프로스 왕국으로 피난했다. 성당기사단이나 튜튼 기사단 등 다른 가톨릭 종교 기사단이 유럽으로 후퇴한 반면 성 요한 기사단은 언제가는 다시 성지를 회복할 것을 결심하면서 성지 근처에 남기로 결정했다."

http://ko.wikipedia.org/wiki/%EB%AA%B0%ED%83%80_%EA%B8%B0%EC%82%AC%EB%8B%A8

   

성요한 기사단

http://cafe.naver.com/praetorians/51399

   

성요한(몰타)기사단, 튜튼기사단, 템플기사단은 서로 경쟁관계에 있었다. 해서, 기사단에서 이탈한 조직이 다른 기사단으로 합류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인드라 분석으로는, 성당 기사단 탄생에는 성요한 기사단이 영향을 주었으리라 본다. 보드앵 2세는 대의명분 때문에 성요한 기사단을 승인하였으나 속으로는 견제한 것이다. 기사단이 자기 휘하가 아니라면 불안하니까. 해서, 보드앵 2세, 샹파뉴 백작, 위그 드 파생 3인의 협의하에 성당기사단이 탄생한 것이다. 이처럼 뒤늦게 등장한 기사단이지만, 잘 아는 기사단인 만큼 보드앵2세가 기사단을 키워주기 위해 솔로몬 성전 터에 숙소를 마련해준 것이다.

   

문제는 성당기사단이 하는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를 음모론에서는 솔로몬 성전 터에서 성배 등 무엇인가를 열심히 찾고 있었다고 한다. 인드라는 개뻥이라 본다. 성요한 기사단이 정말 일을 많이 한 것 같다. 교회 공식 성기사단이니까. 반면, 성당기사단은 가톨릭 교회에서 정식으로 인정받지 않다 보니 아무래도 삼류 취급을 받은 것 같다.  

   

말하자면, 환타지 소설에 나오는 용병대를 생각하면 된다. 성요한 기사단은 특급 용병단이다. 반면, 성당기사단은 특별한 업적도 없고 정식 인가도 나지 않아 사실상 보드앵 2세 사설 용병대나 마찬가지인 게다.  이러니 당신이 순례자이거나 상인이라면 성당기사단에 의뢰를 하겠는가. 아니면, 성요한 기사단에 맡기겠는가.

   

당근, 성요한 기사단이다.

   

해서, 장사가 안 되어 머리를 쥐어뜯으며 솔로몬 성전터에서 오랜 기간 고심하던 위그 드 파앵이 발견한 것이 시토회 수도원이다.

   

"프랑스 동부의 황야 시토(Citeaux)에 베네딕도회 몰렘 수도원장 로베르(Robert de Molesme)가 원시 수도제에 대한 복귀를 염두에 두고 1098년에 창시한 혁신적인 수도회. 수도사 지원자가 감소해서 수도원의 세속화가 눈에 띠는 시세를 우려해서 창립자는 <베네딕도 회칙>의 엄격한 권장, 조의조식의 질박한 생활, 황지 개간작업 등에 의한 영성의 부흥을 지향했다. 로베르토 자신은 1년 후 베네딕도회로 되돌아 왔으나, 제3대 수도원장 하딩(Stephen Harding)시대(1109~33)에 규율과 조직의 면에서 기초가 굳혀지고, 특히 샨파니 귀족 베르나르와 그 일족 다수의 입회(1112) 이후 회세는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다. 1114년에 기초된 회칙 <카르타 카리타티스(Carta caritatis, 사랑의 헌장)>는 그리스도교적 애덕의 정신에 관철되고, 수도자의 이상을 올리는 동시에, 일반 신도에 대한 도덕적 지침도 되어서, 수도회 운영의 새로운 전거가 되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630056

   

시토회 수도원이 내건 명분은 '자발적 가난'이었다. 이러한 명분은 성당 기사단이 내건 취지와 상당 부분 일치하였다. 위그 드 파앵이 주목한 이는 베르나르두스이다.

   

 "1115년 클레르보에 하나의 자(子)수도원이 창설되었고 베르나르두스는 그곳의 대수도원장이 되었다. 그는 초대원장이 되어 개혁운동을 추진했고, 베네딕트 파로부터 완전히 독립했다. 개인적으로는 금욕의 실행에 전념했는데, 그것을 당시 샬롱의 주교인 유명한 샹포의 기욤이 때때로 질책했다. 베르나르두스는 오래지 않아 그의 수도사들의 영적 충고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충고자가 되었는데 그들은 충고를 받고 나서, 언제나 그곳을 감싸고 있는 듯한 엄숙함과 평화로운 영에 의해 감명을 받고 그곳을 떠나곤 하였다. 그의 설교들 또한 강력한 영향을 발휘하기 시작하였으며 이것은 예언자와 기적을 베푸는 사람으로서의 그의 명성에 의해 더욱 증가되었다. 새 수도회가 채택한 규정에 따라 클레르보는 다섯개의 주요 구(區)로 조직된 시트회 공동체의 한 구의 모(母)수도원이 되었다. 베르나르두스는 오래지 않아 전수도회에서 가장 영향력있고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

http://blog.naver.com/kalliope63/110032994274

   

베르나르두스는 오늘날로 보면 조용기 목사였다. 베르나르두스 강연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오죽하면, 지역 실력자들이 베르나르두스 강연을 들으면 기쁘기는 한데, 베르나르두스 영향을 받아 자식들이 수도사가 되면 어쩌나 고민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 시기는 중세 온난기 시대여서 점차 수도사들이 인기를 잃어갈 때인데 시토회에서는 오히려 수도사 급증이 일어난 것이다. 나중에는 강연 때마다 믿거나 말거나 치유하는 영능을 발휘하기도 했다는 게다. 뿐만 아니라 베르나르두스가 한 예언대로 이루어지는 일이 많자 그의 영향력이 급신장한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멀리 예루살렘에서도 위그 드 파앵이 베르나르두스 명성을 익히 들었을 것이다. 해서, 위그 드 파앵이 한 일이란? 열심히 온리유 충성 서약 편지를 쓰는 것이었다. 베르나르두스가 처음부터 승낙하지는 않은 듯싶다. 해서, 위그 드 파앵은 모든 일을 다 제쳐 두고 오직 베르나르두스 설득하는 데에만 매달린 것 같다. 그럴수록 위그 드 파앵이 내건 조건은 파격적이었을 것이다. 성당기사단이 정식 기사단이 되면, 시토회 수도원이 명하는 일이면 지옥 끝까지도 달려갈 것이다 등등.

   

"성전기사단의 규칙

라틴 규칙(La Régle du Temple)으로 알려진 성전기사단의 행동규칙은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와 위그 드 파앵에 의하여 제정 되었다. 72가지의 규칙은 복장과 소유한 말의 수를 규정하고 있다. 먼저 기사들은 식사 때 침묵해야 하고, 고기는 일주일에 세번 이상 먹을 수 없고, 가족일찌라도 여성과는 신체적 접촉이 금지 되었다. 또한 성전기사단의 각 지부장은 말 4마리, 사목, 서기는 각각 말 세마리, 하사관은 두마리, 방패와 창을 나르는 종자는 말 한 마리로 규정되어 있다.

   

   

위그 드 파앵과 함께 라틴 규칙을 제정한 베르나르

   

   

성전기사들은 세 계급으로 나뉘어 있다. 귀족 출신 기사, 평민 출신 하사관과 서기로 나뉘어 있었다. 기사들은 기사 가문 출신이어야 하며 흰 망토를 입는다. 기사들은 1~2명의 종자와 함께 중무장 기병으로 무장하고, 종자들은 기사가 아닌 일종의 비정규직원이었다. 기사 밑에 평민출신 하사관이 있는데 이들은 말 한 마리에 경기병 무장을 하고, 기사단의 재산을 관리하며 잡다한 업무를 처리했다. 사제는 성전기사단의 세 번째 계급을 구성하는데 서품을 받은 사제들로서 기사단의 영적(靈的)인 임무를 수행한다. 성전기사단 입단식은 무거운 책임과 엄숙한 의식으로 거행 되었다. 이 중 외부인의 참관을 금지한 규정이 있었는데 이로 인해, 후에 자크 드 몰레가 재판에서 비밀입단식에 대해 중세 법관들의 의심을 받기도 하였다. 새로 입단하는 단원들은 그들의 모든 재산과 소유물을 기사단에 바치고, 가난, 고행, 신앙심, 복종을 맹서해야 한다. 대개는 종신 입단 하지만 한시적으로 입단하는 기사도 있었다. 배우자의 허락을 받은면 기혼자도 입단이 허가 되었지만 흰색 망토는 착용할 수 없었다. 이런 라틴 규칙은 처음에는 72가지 규칙이 20여 년 후에는 120여개의 항목이 더 추가되었는데, 전장에서 어떻게 성전기사들이 행동해야 하는가에 대한 내용부터 들어간다. 숙영, 행군, 전투 등에 있어 성전기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기병 돌격을 가할 때 어떻게 해야 효율적인가, 장군의 지휘기를 어떻게 따르는가까지 다루게 되면서, 수백 개의 조항으로 확대되었다. 템플 기사단은 전투에 임하면 절대 후퇴하지 않는다는 규칙이 있는데, 심지어는 기사단의 깃발이 빼앗기는 일이 발생했을 때도 (중세식으로 볼때 부대가 괴멸한 경우를 말한다) 도주나 해산하는 것이 아니라 근처에 있는 다른 기사단으로 달려가서 합류하여 전투에 계속 임하며, 전장에서 모든 아군의 깃발이 내려졌을때만 후퇴가 용인되었다. 이정도는 근대 기병 교범에 버금가는 내용이므로, 이런 타협하지 않는 전투의지와 규율은 중세 기사단 운용의 모범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외에도 기사들은 흰 망토에 붉은 십자가가 그려진 겉옷을 입고, 하사관들은 검은 바지에 앞뒤에 붉은 십자가가 그려진 갈색이나 검정색 망토를 입어야 했고, 성전기사들이 즐겨입었던 흰 망토는 1129년 트로이 공의회에서 지정 되었고, 붉은색 십자가는 1147년 제2차 십자군에 참가하면서 제정되었다. 그리고 중세시대 파리에서 개최되는 프랑스 성전기사단 회의에는교황 에우제니오 3세와 프랑스 왕 루이 7세도 참석했다. 규칙에 따라 성전기사들은 항상 흰색 망토를 착용했고, 흰색 망토를 착용하지 않고는 마시거나 먹는 것도 금지 되었다. 망토의 붉은색 십자가는 순교를 상징하고, 전투에서 죽음은 천국을 약속 받는 영광으로 여겨졌다. 기사들은 성전기사단의 기가 쓰러지기 전에는 항복할 수 없었다. 모든 기가 쓰러진 뒤에는 전장을 떠날 수 있었다. 확고한 원칙, 용기와 탁월한 훈련의 명성, 그리고 중무장은 성전 기사들을 중세의 가장 두려운 전투력으로 명성을 갖고 있었다."

   

   

   

이때, 위그 드 파생이 솔로몬 성전터라는 점을 많이 이야기했을 것이다. 이유는 베르나르두스가 교리주의 성향이기 보다는 신비주의적 성향이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베르나르두스는 마음을 움직였다. 하여, 트루와 종교회의를 개최한다. 트루와는 위그 드 파생이 태어난 데서 가까운 지역이었다. 예서, 이미 유럽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갖춘 베르나르두스는 적극적으로 성당기사단을 옹호한다. 하여, 1129년에 성당기사단은 정식 기사단으로 탄생한다. 게다가 면책 특권까지 받았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육로로 상인과 순례자를 보호하면서 길을 가다 보면, 영지를 지나치기 마련이다. 이때, 영주가 통과세 같은 것을 부과하는 것이다. 이때, 성당기사단이 면책특권을 내세워 '무관세'를 주장하면? 영주는 들어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엄청난 특혜인 것이다. 성당기사단없이 프랑스에서 예루살렘까지 가는데 드는 비용이 100인데, 성당기사단과 함께 가면 비용이 10으로 줄어든다면? 여기에 성당기사단이 이익을 40만 챙겨도 순례자나 상인은 여전히 절반 가격으로 예루살렘을 다녀오는 격이니 대박인 셈이다.

   

   

   

3. 성당기사단이 재벌이었다?

   

성당기사단이 부를 많이 축적했다니까 어설픈 음모론자들은 여기에 무슨 특별한 비밀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고, 무작정 교회를 까기 위해 이를 악용하는 사례가 많다. 인드라는 구교도나 신교도가 아니지만, 이런 어설픈 기독교 비판에는 엄중한 편이다. 이따위 허접한 비판을 하려거든, 니 애비가 쪽발이인가부터 스스로 검증하라, 병쉰 색희야, 이 쪽발 노빠 같은 매국노 색희들아, ㅋㅋㅋ

   

부를 축적한 건 성당기사단 뿐만 아니었다. 성당기사단은 물론 성요한기사단, 튜튼기사단 모두 부를 축적했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하나. 알고 비판해도 늦지 않다.

   

첫째, 이 당시 수도원이나 기사단으로 가입하면, 초대 교회 전통에 따라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이는 다른 말로 말하자면, 자신의 전재산을 수도원이나 기사단에 기부하고 회원이 된 것이다.

   

둘째, 이 당시 수도원이나 기사단이 내세우는 규약들이 대체로 금욕적이니 초기에는 수도원이나 기사단은 부가 저절로 축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들여온 돈을 소비해야 하는데 소비를 최대한 억제하고 저축하니 부가 늘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에, 저축한 걸 고스란히 재투자한다면, 부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셋째, 허나, 모든 기사단이나 수도원이 초기부터 부가 축적한 것이 아니다. 가령 성요한기사단도 초기에는 재정난에 빠지기도 했다. 교황청에서 나오는 지원액이 거의 없기에 자급자족해야 했기 때문이다. 해서, 수도원이든, 기사단이든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 신앙 조직과 별개인 경제 조직을 두었다. 가령 기사단인 경우는 실제 전투요원이 반이라면 나머지 반은 이들 전투요원 지원을 맡았는데, 전투요원 지원이라는 건 경제 조직을 의미한다.

   

예서, 흥미로운 것은 시토회와 베르나르두스는 금욕적이면서도 경제적으로는 지닌 부를 활용하는 법에 긍정적이었다. 황무지 개척이 예다. 하여, 이들의 성공은 성당기사단에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해서, 성당기사단에서는 은행 업무까지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군사 조직으로서의 표면상의 모습에 가세하여 지녔던 기사단의 또 다른 모습은 금융기관으로서의 모습이었다. 본래 입회자들은 세속의 부귀영화를 모두 버리기 위해 개인의 사유재산을 수도회에 기증하였는데, 이 관습은 다른 수도회에서도 행해지고 있었다. 수도회의 활동 목적이 이교도와 싸우며 성지 순례자들을 호위하는 것이긴 하였지만 실제로 전선에서 싸우는 숫자는 회원의 절반에 지나지 않았다. 대부분의 회원들은 군사활동 그 자체보다는 그것을 지원하기 위한 병참과 경제적 기반의 구축에 매진하였다. 특히 눈여겨 볼 점은 성전 기사단이 순례자들의 예금증서를 작성하여 그들의 자산을 보관하는 서비스업을 실시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사업 모델의 구축하고 수많은 기부금을 모으면서 성전 기사단은 12세기에서 13세기에 걸쳐 막대한 자산을 소유하였으며, 그에 따라 유럽에서 중동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에 많은 토지를 보유하였다. 더불어 성당과 성채를 세우고 포도밭이나 농원을 만들었으며, 이윽고 기사단 소유의 함대까지 보유하여 최전성기에는 키프로스 섬 전체를 소유할 정도였다. 파리에 있던 성전 기사단의 지부는 프랑스 왕국의 비공식 재정경제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커졌으며, 이따금씩 프랑스 왕에게 재정적인 원조를 보태주었다."

   

얻어진 부를 즉각적인 소비를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이를 종잣돈으로 삼아 고스란히 재투자하는 것. 오늘날 유럽에서 자본주의가 만들어진 데에 관해 막스 베버 같은 기독교 윤리를 내세운 분석이나 아시아에서의 유교 윤리를 비교하는 것이 일리있는 것이 이 때문이다.

   

 4. 성당기사단의 쇠퇴

   

무엇보다 후원인이었던 베르나르두스의 죽음이다. 그는 말년에 신성력이 떨어진 자신을 매우 비관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죽음을 재촉한 것은 그가 기대한 대로 역사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성력 충만 베르나르두스의 죽음은 성당기사단에 적잖은 충격이었을 것이다. 허나, 베르나르두스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들어오는 수입이 더욱 늘어난다면 성당기사단 간부들은 무슨 생각을 할 것인가. 신성력보다는 돈의 힘 자체에 빠져들 것이다.

   

"성전 기사단은 1147년 제2차 십자군에 즈음하여 프랑스의 루이 7세를 도와 고군분투한 공로로 십자군 전쟁이 종료된 후 루이 7세로부터 파리 시 교회의 광대한 부지를 기증받았다. 이곳에 성전 기사단의 서구에서의 거점지가 세워지게 된다. 이 지부는 광대한 저택 주위에 높은 성채가 둘러싸인 형태를 하고 있었는데, 교황이나 다른 외국의 왕들이 프랑스를 방문할 때 임시 숙소 역할을 수행하거나 왕실의 보물이나 자금 보관 등까지 맡게 되었다. 1163년에는 교황 알렉산데르 3세가 선출되고 나서, 성전 기사단에 보답하는 형태로 회칙 Omne Datum Optium을 반포하여 수도회의 재산 보호와 주교로부터의 독립 등의 특권을 부여하였다.

   

성전 기사단의 기사단원들의 힘과 용맹스러움은 곧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1177년 몽기사르 전투에서 살라딘이 이끈 이슬람군을 상대로 승리한 소식은 곧 전 유럽에 널리 알려져, 이에 자극받은 프랑스의 필리프 2세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 모두 치열하게 싸웠으며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에서도 대(對)이슬람 전투에 종사하였다.

   

"성지의 상실

   

1187년하틴 전투.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빼앗기는 데 전환점이 되었다.

   

   

기사단이 경제적으로 부유해짐에 비례하여 중동의 정세는 1187년까지 악화일로를 가고 있었다. 당시 기사단의 총장 제라르 드 리드포르가 숙적 살라딘과의 수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패배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포로로 사로잡히는 치명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이는 적에게 투항할 바에는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는 기사도 정신에 먹칠을 한 셈이었다. 제라르는 나중에 풀려났지만, 다시 포로로 잡혀 참수당하였다.

1290년 아크레가 함락당하면서 유럽인들은 성지와 그 인근에 대한 발판을 잃고 말았다. 군사 활동이 없이는 존속할 필요가 없는 다른 기사단들이 자신들의 존망을 위해 새로운 목표를 찾아 떠난 가운데 특권과 재산을 지니고 있었던 성전 기사단에는 상대적으로 위기감이 없었지만, 이베리아 반도에서의 아랍인과의 소규모 전투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군사활동이 정지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성당기사단을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예루살렘 성지를 수호하는 것이다. 허나, 12세기 후반으로 갈수록 일이 어려웠다. 특히, 이슬람 진영에 알렉산더, 한니발, 카이사르, 징기스칸과 겨루어도 손색이 없는 영웅 살라딘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헌데, 성당기사단이 우연하게 운이 좋아 방심한 살라딘을 어쩌다 물리친 사건은 다시 한 번 성당기사단에게 신의 가호가 내리고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허나, 그 이후에는 행운보다는 불운의 연속이어서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기사단이 최후의 보루로 지켜내야 할 예루살렘 수성을 하지 못하니, 기사단 신뢰가 추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성당기사단의 재정 시스템은 문제가 없었다. 명분이 사라졌을 뿐이다. 이전까지는 신의 이름으로 성당기사단이 무엇을 하든 용인하는 분위기였다. 허나, 성당기사단이 참패하여 예루살렘에서 물러나니 성당기사단이 신의 분노를 샀다 하는 혐의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구약을 읽으면 나오는 사안이 아닌가. 다윗이든, 솔로몬이든, 늘 축복을 받는 것이 아닌 게다. 하고, 왕과 유태인이 축복받지 못하고 불운을 겪는 건, 왕이 신을 거역했기 때문인 게다. 그처럼 그간 기사단에게 면책특권을 주었던 만큼 기사단에 대한 비판이 점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예서, 공정왕, 혹은 미남왕 필립 4세가 등장한다.

   

http://blog.naver.com/rlagudtjq94/10041402754

   

필립 4세 왕이 엄청 무능하거나 한심한 왕으로 아는 음모론자들이 많다. 허나, 실제로는 매우 진취적인 프랑스 왕 중 하나였다. 집권 이후 프랑스를 끊임없이 개혁하고자 했다. 허나, 일을 치루자면 돈이 필요했다.

   

필립 4세는 키다리왕 에드워드 1세와 라이벌 의식이 있었던 듯싶다. 1290년, 유태상인에게 빚지고 있던 에드워드 1세가 롬바드 상인과 한자 상인들과 동맹하여 유태상인 추방령을 내려 부를 확보한다. 이에 힌트를 얻은 필립 4세는 똑같이 할 수는 없으니 내온 타켓이 성당기사단이었던 게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혐의야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었다.

   

재판 과정

http://blog.naver.com/donglm/50115395776

   

바포메트

http://blog.naver.com/jjangalla/60008563785

   

http://historia.tistory.com/2614

   

   

5. 자크 드 몰레이

   

http://blog.naver.com/jjangalla/60008563785

   

자크 드 몰레이가 중요한 이유는 그가 살아 있을 때보다 죽고난 이후이다. 자크 드 몰레이가 죽은 해에 필립 4세와 그 아이들, 교황이 함께 죽었다. 인드라는 일단 자크 드 몰레이가 죽은 시점을 인정하지만, 의혹이 있을 수 있다. 죽기 직전까지 간 자크 드 몰레이를 살려줄 필요가 무엇이 있을까. 잠잠하다가 7년 뒤에 다시 신문하고 처형했다는 것은, 저주를 퍼부었다는 것은 뭔가 후대의 조작이 있지 않나 싶은 것이다. 반전 드라마를 더 효과적으로 쓰고자 하는 무리수?

   

자크 드 몰레이가 이상야릇하게 죽었다는 소문이 전유럽에 퍼지는 까닭에 프리메이슨 등 음모론이 더욱 확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후대 어떤 세력이 자크 드 몰레이를 예수와 유사한 이미지를 만들어서 자신의 세 확장에 써먹을 수 있을 것이란 계산으로 역사를 조작했을 가능성을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22 : 엔릴, 인드라, 단군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1/12/02 03:54

http://blog.naver.com/miavenus/70125517503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22 : 엔릴, 인드라, 단군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1/12/02

   

오늘은 인드라 생일이니 인드라에 관해 말해볼까 한다.

   

"인드라(산스크리트어: इन्द्र, इंद्र, indra,Śakra, 팔리어: Sakka)는 인다라(因陀羅)로 음역되기도 하는 인도 신화의 천신이다. 힌두교에서는 천국 또는 수미산에 거처하며 신들의 왕으로서, 날씨전쟁을 관장한다고 믿는다. 불경에서는 제석천, 제석천왕, 제석천존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베다교, 힌두교, 자이나교, 불교에 등장한다.[편집] 도리천

이 부분의 본문은 도리천입니다.

제석천은 원래 인도 신화의 인드라신의 한자어이다. 도리천의 천주인 제석천은 전체 우주의 행정을 총괄한다고 한다. 제석천은 석가모니가 성불한 뒤에 그의 수호신이 되었다. 도리천은 불교에서 말하는 육욕천(六欲天) 중의 두 번째 하늘로, 수미산(須彌山)의 정상에 위치하고 있다. 수미산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사방의 봉우리에 천인(天人)들이 사는 각각 8개씩의 천성(天城)이 있으며, 중앙에는 제석천이 사는 선견성(善見城)이 있어 33천이라고 한다. 선견천이란 잘 보는 천이란 뜻이다. 석가모니어머니마야부인이 죽은 뒤 다시 태어난 곳이 바로 도리천이다. 수명은 1000세이고, 하루가 인간세상의 100년이라고 한다. 신라 선덕여왕이 자신이 죽으면 도리천에 묻어달라고 말했다.

<p style="LINE-HEIGHT: 2">[편집] 기원</p>

인드라는 미탄니의 신이었다.[1] 다른 인도-유럽 문화의 신들과 비교한다면 토르페룬과 같은 우뢰의 신, 또는 취하게 하는 음료의 신들과 견주어 질 것이다. 인드라라는 이름은 인도-이란 문명에서 두가지 모두를 뜻하는 의미로 쓰였다. 인드라의 이름 앞에는 브리트라(Vritra)를 물리친 자 또는 물길을 인도하는 자를 뜻하는 발라(Vala)와 같은 형용사가 붙는데, 이는 그리스 신화의 트립톨레모스디오니소스와 비견된다.

   

베다와 같은 힌두교의 경전들에서 인드라는 초기 인도-유럽의 종교에서 신들의 수장으로 그려지는 디에우스[2]의 지위를 갖는다(베다에서 디아우스 피타는 인드라의 아버지 신으로 그려진다. 이는 북유럽 신화토르오딘의 아들로 그려지는 것과 비교된다.).

   

리그베다

리그베다에서 인드라는 신들의 수장, 브리트라를 물리친 자, 소마를 마시는 자, 물길을 인도하는 자로 묘사된다. 리그베다에서 인드라는 가장 강한 자라는 뜻인 "사크라"로 불리기도 한다. 인드라의 무기는 벼락이며, 이것으로 아수라 중 가장 강한 브리트라를 죽였다. 인드라는 "아이라바타"라는 흰 코끼리를 타고 다닌다. 인드라의 아내는 인드라니이며 자식 신으로는 쿤티, 발리, 수르야 등이 있다."

   

   

   

1. 인드라 VS 브리트라

   

리그 베다에 의하면 인드라는 우주의 물을 모두 들이키고 산에 똬리를 틀고 있던 가뭄의 뱀인 브리트라를 죽였다.

   

 브리트라 = 龍王 ヴリトラ (Vritra)

   

데바 신들의 천적인 용. 데바 신들의 적이 었던 다이티야 족(거인 족)이 매일 매일 신들에게 죽어나가는 자식들을 대신해 신들을 무찌를 힘을 기도하게 되자, 불속에서 브리트라가 소환 되었다. 거의 데바 신들을 멸망 까지 이르게 하지만, 인드라의 등장으로 결국 퇴치 되었다.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6&dirId=613&docId=61392940&qb=7LKc6rCc7J2YIOuIiCDsnbjrk5zrnbw=&enc=utf8&section=kin&rank=1&search_sort=0&spq=0&pid=gWQ6FF5Y7vKssc3rd3Nssc--410681&sid=TtenlnKW104AABa-IOA

   

거인신, 용신, 뱀신을 물리친다? 예서, 뱀과의 대결은 중근동 신화에서 수메르 신화까지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닌릴(셈족의 이슈타르) 또는 닌후르사그(산의 귀부인)가 반려자이다. 수메르에서는 아누(하늘의 신)와 엔키(땅 또는 물의 신)에 버금가는 신으로, 하늘·바람·폭풍우 등을 지배하고 또한 인간의 운명도 다스린다. 후에 이 신은 우세한 입장이 되어 BC 2300년경에는 셈족(族)에 받아들여져 벨(왕)이라는 이름으로 숭배되었다. 신앙의 중심지는 니푸르시(市)로, 에 쿠르(산의 신전)에서 섬겨졌는데, 바빌로니아의 제1 왕조 무렵에 마르두크에 의해 그 지위가 대체되었다. 

[출처] 엔릴 [Enlil ] | 네이버 백과사전

   

수메르 신화에 따르면, 엔릴은 새(봉)였으며, 엔키는 뱀(용)이었다.  엔키가 장남이어서 처음에는 지구의 신이었는데 서자였기 때문에 나중에는 엔릴이 지구의 신이 되었다. 이후 엔키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만, 분한 마음에 틈만 나면 엔릴을 씹었다고 전해진다. 해서, 엔릴이 홍수를 일으켰을 때, 가장 반대한 이가 엔키였다. 아울러 이 이야기는 아브라함의 이삭과 이스마엘, 이스마엘과 이삭의 이야기와 흡사하다.

    

"2011년 11월 6일부터 8일까지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이드 알아드하(Eid al-Adha) 축제가 한창이다. 이드 알아드하는 하나님(알라/여호와)이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 대신 양을 희생시킨 날을 기념하는 축제일이다. 유대교와 기독교에서는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치려고 했다고 말하지만, 이슬람교에서는 아브라함이 아들 이스마엘을 바치려고 했다고 말한다. 이 주장의 근거는 무엇일까?

성경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세기 22:2)

이슬람교는 '독자'라는 말에 주목한다. 이삭이 태어났을 때는 이미 형 이스마엘이 있었기 때문에 이삭은 '독자'가 될 수 없다. 따라서 '독자'는 이스마엘일 수 밖에 없고, 아브라함이 번제를 드릴려고 했던 아들은 이삭이 아니라 이스마엘이라는 것이다. 물론 기독교에서는 창세기 21장에 하갈과 이스마엘을 광야로 쫓아내는 내용이 들어있기 때문에, 번제를 드릴 당시에는 아들 이삭 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삭은 '독자'가 맞다는 것이다.

꾸란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아들의 나이가 그와 함께 일할 나이에 이르렀을 때 그가 말하길 내 아들아 너를 제단에 올리라는 명령을 내가 꿈에서 보았노라 너의 생각이 어떤지 알고 싶구나 라고 하니 아들이 말하길 아버지 당신께서 명령받은 대로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인내하는 종으로부터 원하신다면 당신께서 저를 발견할 것입니다 하였더라 그 둘이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는 그로 하여금 그의 이마를 숙이도록 했을 때 하나님은 그를 불러 아브라함아 그대는 이미 그 꿈을 이행하였노라 하나님은 이렇듯 선을 행하는 자들에게 보상을 내리리라 실로 이것은 분명한 하나의 시험이었나니 하나님은 훌륭한 희생으로 그를 대신하였노라"(꾸란 37:102-107)

"하나님은 그에게 의로운 자 중에 있을 한 예언자 이삭의 소식을 주어"(꾸란 37:112)

아브라함이 아들 이스마엘을 바치라는 명령에 순종하자 그 후에 하나님이 이삭을 상으로 주었다는 것이다.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이삭은 야곱의 아버지다. 야곱은 이스라엘과 유대 민족의 선조로 여겨진다. 마찬가지로 이슬람교에서 이스마엘은 아랍 민족의 선조로 여겨진다.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예언자 무하마드는 이스마엘의 자손이다. 새로 종교를 창시한 입장에서 선조의 신성함은 중요한 문제였다. 무하마드는 계시를 받았을 것이다. '아브라함이 바친 '독자'는 이삭이 아니라 이스마엘이다. 너희는 이스마엘의 자손이며,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자손이다.' 창세기에서도 하갈과 이스마엘은 광야로 쫓겨났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먹여살리고 그들에게서 한 민족이 이루어질 것을 약속했다."

http://owlpark.egloos.com/10802939

엔릴은 지구의 신이자 기후의 신이었다. 기후의 신이었기에 홍수를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이다.

   

셈족의 한 갈래로 유목민이었던 아카드인이 눈부신 활동을 시작한 것은 BC 2350년경, 즉 사르곤 대왕 때부터이다. 그는 수메르인의 도시국가들을 정복하여 메소포타미아 최초의 통일국가를 건설하였다. 아카드 왕국이 수립되면서 바빌로니아(남부 메소포타미아)의 북반부를 아카드, 남반부를 수메르라고 부르게 되었다.

   

수도는 아가데였으나, 그 소재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사르곤 대왕은 56년간의 치세(治世) 동안 남쪽은 페르시아만에서 북쪽은 지중해에 이르는 대제국을 형성하였는데, 궁병대(弓兵隊)를 중심으로 한 강력한 군대와 중앙집권적 정치제도로 국가의 기초를 다졌다.

   

   

그의 두 아들 시대에는 변경지방의 반란으로 고통을 받았지만, 제4대 왕 나람신은 반란을 진압하고 사르곤시대의 제국을 회복하여 '아카드의 신(神), 사계(四界)의 왕'이라 일컬으며 신격화되었다. 그러나 뒤에는 국운이 점점 기울다가 BC 2150년경 이란고원에서 침입해온 구티인(人)에 의해 멸망하였다. 아카드인의 언어는 셈어의 동방군(東方群)에 속한다. 그들은 수메르인에게서 배운 설형문자(楔形文字)로 아카드어점토판에 써서 남겼으며, 수메르 문명을 셈화하여 후대에 전달하는 역할을 하였다. 예술면에서는 양식화수메르 예술에 사르곤기(期)라 불리는 새로운 면을 열어 많은 걸작을 남겼다. 특히 수사에서 발견된 나람신왕의 전승비(戰勝碑)와 니네베의 출토품으로서 사르곤왕을 나타낸 듯한 청동제 두부상(頭部像)은 유명하다. 

[출처] 아카드 [Akkad ] | 네이버 백과사전

   

헌데, 홍수시대 이후에 아카드 왕국이 엔릴을 대체하는 아다드를 내세운다.

   

람만이라고도 한다. 바람 ·폭풍 ·천둥 ·비 등을 관장하는 자연현상의 신으로, 태양신 샤마슈, 월신(月神) 등과 함께 널리 숭배되었다. 바람의 신 엔릴이 지상계(地上界)의 신이 되었을 때 그를 대신하여 뇌우(雷雨)의 지배권을 잡았다. 아다드는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성격을 지니는데, 즉 비바람으로 비옥(肥沃)을 초래하는 풍양신(豊穰神)으로서의 성격과, 폭풍우 ·천둥 ·홍수로 자연을 파괴하고 암흑과 죽음을 초래하는 신으로서의 성격도 갖고 있다. 또한 샤마슈와 함께 미래를 환기(喚起)하는 특권을 가진 탁선(託宣)의 신으로서도 숭배되었다. 천신(天神) 아누의 아들 또는 대지의 신 벨의 아들이라고 한다. 성수(聖獸)는 황소와 사자이고, 심벌은 사이프러스나무와 번갯불이다. 소의 등에 올라 앉아 한손에 번갯불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그 기원(起源)은 분명하지 않으나 근년에 북(北)시리아의 라스샴라에서 발굴된 점토판(粘土板) 문서로 아시아닉 어계(語系) 민족의 최고신임이 밝혀졌다. 

[출처] 아다드 [Adad ] | 네이버 백과사전

   

본래는 서방 셈족의 폭풍ㆍ번개의 신으로, 그 신명(神名)도 천둥소리를 의미하는 것에서 유래한다. 시리아지방에서는 하다드(Hadad)라고 불렸는데, 보통은 아카드어권의 신으로 본다. 문서에서는 발음에 상관없이 1M이라고 쓰여져 있는데, 표준적인 아카드어 호칭은 아다드다. 단, 아모리(아무르)계의 사람들간에는 아두(Addu)라고도 했다. 이 신명은 이미 파라시대(기원전 3천년기 중엽)의 신명표에 나타나 있기 때문에 이 신은 상당히 오래전부터 남부 메소포타미아에서도 알려져 있었다고 생각되는데, 특히 그 제의는 아카드시대(기원전 2334~기원전 2154년경) 이후의 북부 메소포타미아에 널리 나타났다. 또한 시리아, 팔레스타인에서는 바알과 동일시되는 경우도 있었다. 『길가메시 서사시』의 제11서판에 기록되어 있는 홍수전설에서는 아다드가 슈라트 및 하니슈 일대의 종신을 거느린 폭풍우의 신으로서 등장한다. 아내 여신은 샬라(Shala), 그 심벌은 수소, 번개 등이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630186

   

   

   

아다드와 엔릴과의 차이는 무엇인가. 수메르에서 엔릴은 새(봉)였다. 반면, 아카드에서 아다드는 황소이다.

   

수메르에서는 달의 신, 난나르(신) 형상이 황소였다. 인드라 분석으로는, 대홍수 이전에는 엔릴이 기후의 신이었으나, 대홍수 영향 때문인지 바빌론 남단 수메르 지역에서는 달의 신, 난나르(신)가 기후의 신이 맡던 역할을 맡았고, 바빌론 북단 아카드 지역에서는 아다드가 기후의 신 역할을 맡은 것 같다.

   

대홍수 이전 엔릴은 대홍수 이후 인기를 잃는다. 이런 이유로 조로아스터교는 엔릴 = 인드라를 악마로 간주한 것이 아닌가 볼 수 있다. 이후, 엔릴을 대체할 신으로 아다드와 난나르가 떠오른 것이다. 예서, 지킬과 하이드 성격의 신, 정신분열적인 신, 아다드와 난나르가 이중적인 면모로 등장한다.

 

아다드는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성격을 지니는데, 즉 비바람으로 비옥(肥沃)을 초래하는 풍양신(豊穰神)으로서의 성격과, 폭풍우 ·천둥 ·홍수로 자연을 파괴하고 암흑과 죽음을 초래하는 신으로서의 성격도 갖고 있다.

   

헌데, 이러한 이중적인 신의 모습이 조로아스터교에 영향을 주어 조로아스터교 핵심 교리인 빛과 어둠의 신이 탄생한 것이 아닌가 싶다.

   

하면, 왜 황소일까.

   

이는 수메르 점토판에서 찾을 수 있다. 기원 전 2,500년경 수메르 점토판에는 소에서 우유를 짜내는 등의 기록이 나온다.

   

보통 황소 숭배하면 농경민이 숭배한 것으로 나오고, 이집트 이시스신 등 이집트 신화에서 기원을 찾는데, 이건 명백한 왜곡이다.

   

   

이유는 신지학회 블라바츠키 영향 때문이다. 신지학회를 비롯한 신비주의자, 뉴에이지의 꿈이 무엇이었나. 셈족 중심의 역사를 바꾸고 싶었던 것이다. 성경에 의하면, 신은 셈족에게 특권을 주었다. 헌데, 유럽인은 셈족이 아니다.  야벳족이다. 해서, 유럽인들은 셈족과 다른 기원을 찾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그때, 등장한 것이 마담 블라바츠키. 레무리아의 후예를 자처하니 여기에 자극을 받아 툴레회가 내세운 것이 아리안족. 하여간 이 대목은 나중에 자세히 말할 기회가 오면 말하겠다. 중요한 건, 블라바츠키 이후로 신비주의자들은 수메르 이전의 역사를 찾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즉, 수메르가 처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고, 지금껏 뻥만 치고, 아무런 고고학적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하여간, 유럽 중심 신비주의자들은 황소 신화를 지중해 신화, 이집트 신화, 농경민 신화로 가두려고 한다. 허나, 황소 신화는 어디까지나 유목민 신화이다.

   

우유의 허와 실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8&dirId=8020607&docId=29955916&qb=7Jqw7JygIOycoOuqqeuvvA==&enc=utf8&section=kin&rank=1&search_sort=0&spq=0&pid=gWQixF5Y7aCssZybOGsssc--164917&sid=TtenlnKW104AABa-IOA

   

소는 다른 가축들에 비해 가장 늦게 가축화하였다. 그만큼 소를 기르기가 어려웠다. 어려운 이유는 소가 많이 먹는 대형 동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소를 가축화해도 다른 동물들처럼 많이 키울 수 없었다.

   

   

하면, 소는 잡아먹기 위해 키웠을까. 잡아먹을 수는 있었으나, 그러기에는 그간 키운 보람이 없었다. 그보다는 소젖을 짜내는 방법을 생각해낸 것이다. 왜? 유목민에게는 먹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면, 양젖도 있는데, 왜 소젖인가. 소젖은 영양분이 풍부했다. 배고플 때, 소젖만 먹어도 되었다.

   

반면, 농경 민족 사이에서는 소란 힘이 세니 경작용이었다. 농경민족에게는 상대적으로 먹을 것이 다양하니 굳이 소젖을 먹을 이유가 없었다. 해서, 농경민은 채식 위주여서 창자가 긴 편인 반면, 유목민은 육식 위주여서 창자가 짧은 편이라는 것이다. 이런 대목에서 북방계/남방계를 따지는 기준 중 하나일 수 있는 것이다. 북방계야 유목민이니 우유 먹는데 큰 탈이 없는 편이다. 반면, 남방계야 농경민이니 우유를 먹으면 탈이 날 확율이 크다.

   

대홍수 이전에는 새의 신, 엔릴이었지만, 대홍수 이후에는 황소의 신, 난나르였다는 건, 수메르에서도 수메르 문화에 동화한 유목민이 권력을 장악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해서, 달의 신, 난나르가 조수 간만의 차 때문에 부각한 신인 만큼 보름달과 초승달이 함께 쓰인 것인데, 후대로 갈수록 초승달인 이유는 황소 뿔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기원 전 이천년 이전 흐름이다.

   

이후, 바빌론에서 맹위를 떨친 민족이 후르리인이다.

   

미탄니(Mitanni)는 오늘날의 쿠르디스탄 지역을 지배하였던 고대 부족이다. 미탄니 제국은 후르리인이 세운 가장 강력한 국가였다. 어떤 학자들은 미탄니는 쿠르드 언어의 근원이라고 생각한다. 몇몇 쿠르드 학자는 그들 씨족중의 하나인 같은 지역에 사는 마티니가 미탄니의 이름을 보존한 것으로 믿는다. 미탄니의 최선의 기록은 시리아 나가르 시에서 발견된다.

[편집] 인도 아리안 초대국

   

미탄니 왕국.

미탄니의 약간의 이름 또는 용어는 인도-아리안 초대국을 나타내며 인도아리아인 엘리트는 인도아리아인의 팽창의 과정에 스스로를 후르족에 편승시켰다. 히타이트와 미탄니의 조약에서 신 미트라, 바루나, 인드라, 나사티야(아쉬빈스)가 축원되었다. 키쿨리의 말조련 문헌은 아이카(에카), 테라(쓰리), 판자(판차,5), 사타(삽타,7) 나(나바,9) 바르타나(둥근)등과 같은 기술적인 용어를 포함한다. 다른 문헌은 바브루(갈색), 파리타(팔리타, 회색) 그리고 핀카라(핑갈라, 빨간)등의 단어를 포함한다. 그들의 주요 축제는 여름(비슈바) 축제이며 그것은 고대 세계의 대부분의 문명에서 일반적이다. 미탄니 전사들은 마리야라 불렸고 산스크리트어로 전사라는 뜻이다.

산스크리트 어로 슈타르나는 좋은 태양이며, 바라타르나는 위대한 태양, 파르샤타타르는 토끼를 지닌 지배자, 사우슈타타르는 좋은 지배자, 아르타마마는 가장 옳으심, 투슈라타는 10개의 당근을 지니심이라는 뜻이며, 마티바자는 기도자라는 뜻이다.

   

"수도는 와수카니로, 위치는 분명하지 않다. 왕 슈타르나 ·샤우슈샤타르 등과 신(神) 인드라 ·바루나 등의 이름으로 보아, 지배계층은 인도유럽어족(語族)이었음을 알 수 있다. 말 ·전차(戰車)를 가진 군대로서 오리엔트 강국이 되어, 전성기(BC 17BC 15세기) 세력범위는 소아시아 남동부 ·북시리아 ·티그리스 동부 등을 지배하였다. 그러나 히타이트 세력이 강대해지자, 이집트에 접근하여 제18왕조 파라오들과 정략결혼으로 우호관계를 맺어 대항하였다.

   

BC 14세기 히타이트의 왕 수필룰리우마스의 침입으로 수도가 함락되고, 서반부(西半部)는 히타이트령(領)이 되었다. 나머지 왕국령(하니갈바트로 개칭)도 히타이트의 조공국이 되었다. BC 14세기 후반 분열 상태에 빠지고, BC 1300년 무렵 히타이트의 침입과 아시리아의 배반으로 멸망하였다. 아마르나 문서에는 이집트 제18왕조 아멘호테프 4세(아크나톤)와 주고 받은 서간(書簡) '미탄니 서간'과, 미탄니 왕 마티와자와 히타이트 대왕 수필룰리우마스의 조약문(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외교문서) 등이 남아 있다."  [출처] 미탄니 [Mitanni ] | 네이버 백과사전

   

기록에 따르면, 아리안족은 자신들을 후르리의 일족임을 자랑스럽게 말했다는 것이다.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6&dirId=60901&docId=48090857&qb=7JW867Kz7KGxIOyVhOumrOyViA==&enc=utf8&section=kin&rank=2&search_sort=0&spq=0&pid=gWQQUF5Y7ZwsstElgUhssc--000280&sid=TtenlnKW104AABa-IOA

   

성경을 해석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어느 한 쪽에서는 사해동포주의로 해석하지만, 다른 쪽에서는 엄밀한 구분을 요한다. 후자 입장에서 중요한 것이 아리안족이 셈족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혹은 셈족과의 혼혈이라는 것이다.

   

이를 전제하고, 후르리인이 바빌론을 장악한 것은 기원 전 이천년에서 기원전 천오백년 사이이다. 이때, 후르리인 역시도 신화를 대체해야 했다. 왜? 신화 교체 작업 없이는 왕권에 대한 정당성이 없기 때문이다. 

   

하여, 등장한 신이 인드라이다. 역시 천둥과 번개의 신, 기후의 신이다. 엔릴과 아다드, 난나르를 대체한 셈이다.   

   

   

   

   

   

   

2. 신들의 신, 인드라

   

아리안족이 카스피해에 면한 이란 북부 지대에서 인도를 침략한 초기 시대, 리그베다 시절(기원전 2000년에서 기원전 800년)에 인드라는 신들의 신이었다. 리그베다 찬가의 1/4을 차지할 정도이다. 허나, 아리안족이 인도 깊숙이 동쪽으로 영역을 확장해가던 우파니사드 시대 혹은 십육대국 시대(기원전 1000년에서 기원전 500년)에 이르러서는 브라만, 비수뉴, 시바 3대 신이 최고신이어서 인드라는 최고신 자리를 내놓는다.  

   

드라비다족을 노예화하기 위해 만든 카스트 제도가 후대에 갈수록 아리안족 내부에서도 서열화하여 단지 직분 차이에 불과했던 사제와 전사와 평민 직분이 신분 차이로 변모하여 사제 중심의 사회가 되었기에 전사의 신인 인드라 지위가 추락할 수밖에 없었다.

   

허나, 싯다르타 고타마 탄생 시기인 기원전 500년에서 400년 이후로는 다시 인드라가 부활을 한다. 이유는 싯다르타 고타마 신분이 왕자에서 볼 수 있듯 그 출신이 대부분 전사 출신인 아리안 왕족들이 사제 계급에 불만을 품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로마 가톨릭에 대항하는 유럽 왕가들이거나, 혹은 중국 춘추전국시대 제후국 군주들과 같은 신세였던 셈이다. 이때, 인드라는 제석천에서 보듯  새로운 종교를 보위하는 신으로 등장한다. 수미산 정상에서 살고 있다 한다.

   

   

   

   

   

   

http://book.naver.com/bookdb/text_view.nhn?bid=140153&dencrt=U7jFRiRYgOVHfrUm72YxSxm4e5n5CYBCaFRn5Ir04f8%253D&term=%BC%F6%B8%DE%B8%A3+%C0%CE%B5%E5%B6%F3&query=%EC%88%98%EB%A9%94%EB%A5%B4+%EC%9D%B8%EB%93%9C%EB%9D%BC

   

   

3. 천개의 눈, 인드라

   

인드라는 네 개의 팔과 천 개의 눈을 지녔다.

   

이때, 왜 천 개의 눈인 것일까.

   

우선 눈에 관해서 말한다.

   

보통 눈하면 전시안, 호루스의 눈을 기원으로 삼는다.

   

 http://blog.naver.com/tattoosoul?Redirect=Log&logNo=50123435858

   

   

이집트에서 이런 식으로 쓰인 건, 불완전한 십진법을 썼기 때문이다. 실제 계산에서는 이집트 계산법을 썼다.

   

http://ko.wikipedia.org/wiki/%EA%B3%A0%EB%8C%80_%EC%9D%B4%EC%A7%91%ED%8A%B8_%EA%B3%B1%EC%85%88%EB%B2%95

   

헌데, 여기서 흥미로운 건, 부족한 건 달의 신이 채워준다는 것이다. 이는 수메르 측량법을 이집트가 응용 변형한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허나, 이것이 달의 신, 난나의 원형이었을까? 인드라 추정으로는 삼각대만이 난나의 원형으로 본다. 왜? 삼각대란 카메라 삼각대에서 보듯 안정, 균형을 의미한다. 이처럼 조수 간만의 차에서 달과 태양과 지구가 직각 삼각형일 때, 혹은 이시스의 삼각형, 피타고라스의 삼각형일 때, 밀물 썰물 차가 가장 적다.

   

하고, 수메르족이 육십진법을 쓴 것도 작도법에 의한 것이 확실한 것 같다. A를 중심으로 원을 그린 뒤 그 원 둘레 아무 지점 B을 중심으로 A와 B를 반지름으로 하는 원을 그린다. 이때, A를 중심으로 한 원과 만나는 지점이 있는데, 이 지점을 중심으로 해서 그리는 것을 반복하면, 기존 원을 6등분할 수 있다. 하고, 원의 전체 각이 360도이니 육등분한 원호 각이 60도이다.

   

하면, 왜 육십진법인가. 오늘날에도 육십진법은 남아 있다. 가령 한 시간은 60분이지 않나. 일분은 60초이다~! 왜 각도와 시간 사용에서는 십진법이 아니라 육십진법을 사용하나?

   

한마디로 말한다. 계산하기 쉽기 때문이다. 1/3하면 무한 소수 0.3333333....이다. 허나, 육십진법을 사용하면? 2, 3, 4, 5, 6의 최소공배수가 60이므로 60진법을 수메르족이 사용한 것이다.

   

60 나누기 2는 30이다. 60 나누기 3은 20이다. 60/4는 15이다. 60/5는 12이다.  60/6=10이다. 소수점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수로 딱딱 떨어진다. 똑똑한 수메르인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10진법보다 60진법이 보다 완벽한 체계로 생각하지 않았을까~!

   

게다가 계절이란 12달이다. 농사에 필요한 달력은 음력이지 양력이 아니다. ㅠㅠㅠ"

http://blog.naver.com/miavenus/70124157169

   

해서, 눈이란 것은 천문이요, 측량인 게다. 바빌론이나 이집트나 홍수 조절이 큰 문제였다. 하여, 이 시기에는 하늘을 살펴 조수간만의 차나 세차 운동 같은 것을 발견하는 것이 신의 의지를 읽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범신론적 창조론

  • 10:90의 '푸루샤 숙타'(원시 찬가)는 범신론적이다. 원시의 인간 '푸루샤(Purusha)'는 천 개의 머리, 천 개의 , 천 개의 을 가졌으며 신들이 푸루샤를 희생시켜 제사를 지냈을 때 거기서 , , 산양, 등이 태어났고, 푸루샤의 마음에서는 달이, 눈에서는 태양이, 입에서 인드라아그니가, 숨결에서 바람이, 배꼽에서 공계(空界), 머리에서 천계(天界), 양 발에서 대지, 귀에서 방위(方位)가 생겼다고 한다. 이러한 찬가는 거인 해체 신화의 한 예이다."

    http://ko.wikipedia.org/wiki/%EC%B0%BD%EC%A1%B0%EB%A1%A0

        

    인도 범신론적 거인 해체 신화에서 마음에서 달, 눈에서 태양, 입에서 인드라가 나왔다 한다. 이는 인도 범신론적 신화가 수메르에서 기원을 두고 있으나 이집트 신화에 영향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마음에서 달은 수메르이다. 눈에서 태양은 이집트이다. 입에서 인드라가 나왔다, 여기서부터 인도인 게다. 

       

    인도를 침략한 아리안은 자신의 정체성을 인드라에 두었는데, 특히 입에 두었던 게다. 왜 입일까. 

       

    http://ko.wikipedia.org/wiki/%EC%95%84%EA%B7%B8%EB%8B%88

       

    인드라 분석으로는, 아그니는 불의 신이다. 인드라는 비의 신이다. 거인족은 용이요, 뱀이다.  보통 서양의 용은 불을 내뿜는다. 이는 용의 부정적인 면만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용이 불을 내뿜는다는 것은 가뭄을 의미한다. 반면, 용이 비를 내보낸다는 것은 풍요의 의미이다. 비가 오면 농사가 잘 되니까. 다만, 지나치게 오면, 대홍수가 나니 문제인 게다.

       

    헌데, 불과 비가 모두 입에서 나온다. 입이란 말이다. 거인족의 다른 부위에서는 부위마다 하나씩 대응하지만, 입만은 둘이다. 열변을 토하는 광경을 생각해보자. 열변인 만큼 주변을 뜨겁게 만든다. 다른 한 편, 침을 튀길 것이다. 이런 모습을 고대인이 보고 만든 상징이 아닐까. 여기서 더 이야기할 수 있지만, 굉장히 유치할 것 같아서 그만하겠다~!

       

    마하바라타에는 인드라가 가진 천개의 눈의 유래를 이렇게 설명한다. 인드라는 많은 여성을 유혹했었는데, 그가 유혹한 여자 중에는 현자 고타마의 아내 아할리아도 있었다. 이에 격분한 고타마는 신들의 왕인 그에게 여성의 성기를 닮은 천개의 무늬를 새겼다. 그래서 인드라는 그것들이 다행히도 눈으로 변할때까지는 사-요니(Sa-yoni:여성의 성기를 가진 존재)로서 세상에 알려졌다.

       

    하면 왜 천 개일까.

       

    인드라 분석으로는, 인도 공작과 연관이 있다.

       

       

    부계 사회로 이행한 후, 인간 사회에서는 짝짓기에서 미색을 자랑하는 역할을 암컷이 맡는다. 허나, 이것이 인간 사회 내내 일어난 일이었을까. 이런 의문에서 공작은 왜 자신의 날개를 활짝 펼치는가란 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다. 공작이 천 개의 눈을 뜨는 이유는 짝짓기 때문인데, 이 공작이 암컷이 아니라 수컷이며, 암컷을 유혹하기 위함인 게다.

       

    이는 공작과 인간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일까. 인드라 생각은 다르다. 공작 판단에 동의한다. 지혜는 모계를 통해 전승한다. 미모는 부계를 통해 나타난다. 자식이 잘 생기길 원한다면, 잘 생긴 남자를 얻어야 한다. 허나, 그 자식이 지혜롭기를 바란다면, 지혜로운 여자를 얻어야 한다.

       

    이런 까닭에 바람둥이 인드라 신화가 탄생한 것이 아니겠는가. 중동에서는 눈이란 천문을 헤아릴 줄 아는 지혜의 의미였다면, 인도에서는 눈이란 암컷을 유혹하는 제비 이미지였던 셈이다. 하여, 이 둘 의미가 융합하여 천 개의 눈이 탄생한 것이 아닌가 싶다.

       

    천수천안관세음보살(千手千眼觀世音菩薩) 또는 천비(千臂)천안관음이라고도 한다. '천'은 무량 ·원만의 뜻이고, '천수'는 자비의 광대함을, '천안'은 지혜의 원만 ·자재함을 나타낸다. 천 개의 손바닥 하나하나에 눈이 있어, 모든 사람의 괴로움을 그 눈으로 보고, 그 손으로 구제하고자 하는 염원을 상징한다. 《삼국유사》에는 분황사(芬皇寺)의 천수관음에게 빌어 눈먼 아이가 눈을 뜨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천수관음은 관음신앙의 유포와 함께 민간에 깊이 스며들었다. 

    [출처] 천수관음 [千手觀音 ] | 네이버 백과사전

       

    천수관음의 천 개의 눈은 인드라에게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닐까 싶다.

       

    천 개의 눈, 인드라에서 질 들뢰즈 <천개의 고원> 제목이 유래한 것이 아닌가 보고 있다.

       

       

    4. 제석천과 단군

       

    "도리천의 왕으로 불교의 수호신.

    범어로는 샤크로데반드라(S'akrodevandra)이며, 석제환인다라(釋提桓因陀羅)·석가제바인다라(釋迦提婆因陀羅)라고 쓰던 것을 줄여 제석천이라 하였다. 그가 머무르는 곳은 도리천(?利天)이다.

    불교의 세계관에 의하면 세계의 중앙에 수미산(須彌山)이 있는데 그 정상에 도리천이라는 하늘이 있다고 한다. 제석은 선견성(善見城)에 머무르면서 사천왕(四天王)과 주위의 32천왕(天王)을 통솔한다.

    그는 불법을 옹호하며, 불법에 귀의하는 사람들을 보호할 뿐 아니라, 아수라(阿修羅)의 군대를 정벌하기도 한다. 그의 무기는 그물인데, 이것을 인다라망(因陀羅網)이라고 하여 세간의 얽히고 설킨 인과에 비유한다. 원래 인도의 신격 가운데 인드라(Indra)가 불교의 변화를 보인 한 예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그 이름이 단군신화에도 나타난다. 즉, 단군의 할아버지를 묘사할 때 석제환인(釋提桓因)이라고 표기하였다. 그리고 자장(慈藏)이 당나라에 유학하였을 때 중국 청량산(淸凉山)을 참배하였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제석천왕이 석공(石工)을 데리고 와서 조성한 문수상(文殊像)이라는 기록이 있다.

    또, 선덕여왕이 죽기 전에 도리천에 묻어달라고 유언하였는데 뒤에 사천왕사(四天王寺)가 그 왕릉 밑에 건립되어 그 예언이 맞았다는 기사가 있다. 왜냐하면 사왕천(四王天)의 위가 도리천이기 때문에 여왕은 죽기 전에 묻힐 곳을 알았다는 것이다.

    우리 나라의 제석신앙은 '하늘'에 대한 외경 심리와 결부된다. 불교가 도입되기 이전 막연하게 숭배의 사상이 되었던 하늘에 제석천이 있다는 불교신앙이 도입되면서 그 민간신앙은 이론의 근거를 갖게 된다.

    따라서 고대 한국인들은 하늘의 주인과 제석천을 하나로 보았다. '한울님'에 관한 원초적 신앙은 유일 창조주를 부정하는 불교의 입장과 위배되었기 때문에 다만 민간신앙으로만 유포되었다. 제석천의 조상(彫像)은 석굴암의 석실에 조성되어 대범천(大梵天)과 나란히 모셔져 있다.

    고려시대에는 태조가 919년(태조 2)에 송악으로 도읍을 옮기고 법왕사(法王寺) 내제석원(內帝釋院) 등 10대사찰을 건립하였다. 925년에도 외제석원(外帝釋院)을 건립하였으며, 928년에도 제석원을 설치하였다. 1032년(덕종 1) 외제석원에서 왕이 재를 베풀었고, 1060년(문종 14) 정월에는 천제석도량을 문덕전(文德殿)에서 베풀었다.

    1085년(선종 2)에도 천제석도량을 문덕전에서 베풀었고, 1098년(숙종 3)에는 왕이 외제석원에 행차하여 재를 베풀었으며, 1099년 정월과 1101년 정월에 천제석도량을 문덕전에서 베풀었다.

    이를 통하여 고려에서는 매년 정월에 제석도량을 베푼 것을 알 수 있다. 1107년(예종 2) 정월과 1110년 정월에도 제석도량을 문덕전에서 베풀었고, 1114년 4월에는 예종이 외제석원에 행차하여 공양하였으며, 1130년(인종 8) 정월에는 제석도량을 중화전(重華殿)에서 베풀었다.

    1132년 2월에는 천제석도량을 명인전(明仁殿)에서 베풀었고 1148년(의종 2) 정월에는 제석도량을 문덕전에서 베풀었으며, 1176년(명종 6)에는 천제석도량을 명인전에서 베풀고, 1177년 3월에는 제석도량을 내전에서 베풀었으며, 1181년 3월에 제석도량을 명인전에서 베풀었다.

    1203년(신종 6) 정월에는 제석도량을 수문전(修文殿)에서 베풀었고 1214년(강종 4) 정월에도 제석도량을 수문전에서 베풀었으며, 같은 해 3월에는 제석재를 행하였다.

    1223년(고종 10)에 제석도량을 수문전에서 베풀었고, 1251년에는 천제석도량을 궐안에서 베풀었다. 이와 같이 고려시대에는 제석천에 대한 호국진병(護國鎭兵)의 신앙의식이 많이 행하여졌다.

    석굴암 석굴 제석천

    참고문헌

    「三國遺事」

    「高麗史」"

       

       

    일본 제국주의 식민학자들은, 제석천이란 용어를 통해 단군이란 한반도에 불교가 도입한 이후에야 만들어진 신화라고 본다. 허나, 이것은 정말로 한심해서 가설이라고 부르기도 창피한 것이다.

       

    가령 영국인이 최초로 역사에 나타난 것은,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 이후이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영국인이 영국에 거주하지 않았나? 있었다. 단지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았을 뿐이다. 

       

    삼국시대 왕국들이 불교를 국교로 한 이유는 토속 신앙을 대체하기 위함이다. 즉, 이전에는 단군 혹은 그 어떤 신으로 불렀던 것을, 불교 도입 이후에는 제석천으로 부른 것이다. 이를 두고서 제석천 이전에는 의미가 없다고 보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인가.

       

    그렇다 해서, 인드라가 치우황제로부터 시작하는 한단고기 일파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한단고기 일파 주장은 국유본 주장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즉, 한빠를 비판하는 한까들도 국유본 논리를 받은 쪽발 논리이지만, 한단고기 일파 주장 역시 국유본 논리를 받은 친일 논리라고 본다. 해서, 인드라는 한단고기에 등장하는 치우황제를 본디 중국에서 살다가 한족에게 자리를 내준 몽족에서 찾는다.

       

    "먀오족의 역사를 거슬러 내려가 보면, 약 4000년 전 중국의 역사 이전의 시대에 한족이 중국에 들어오기 전 중국의 중부와 남부에는 본래 먀오족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한족이 중국에 들어오면서 최초로 먀오족과 접촉하면서 제1차 전쟁을 하였는데 이것이 한족의 영주인 황제와 먀오족의 수장인 치우와의 탁록지전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러서는 초국이 형성하기도 했는데, 일부는 한족화(숙묘)하고 일부는 서남방으로 이주(생묘)하여 지금의 먀오족의 선민이 되었다. 이 당시 남쪽으로 옮겨간 먀오족 집단은 귀주성이나 사천성 남부의 산악 지대를 중심으로 터전을 잡거나 산간계곡, 산간 저분지에 거주하였다.

    수·당 시대에는 남북통일로 인해 중국 분열상태가 마치고 활발한 문화적 교류를 촉진함과 동시에 먀오족의 수도 늘어났으며 귀주를 중심으로 하여 운남 등지로 이주를 하였고 전국이 먀오족분포의 중심이 되었다.

       

    원·명·청의 3대는 중국봉건사회 발전의 전성기였으며 이 시기에 먀오족은 정치와 경제적 요소의 촉진 아래 이주가 극히 빈번해졌으며 점차 호남, 호북, 귀주, 운남, 광서, 하북, 섬서성 등의 분포 구조를 형성함과 동시에 동남아 각국으로 유입되로 국제적 민족이 되었다. 유구한 역사를 지닌 먀오족은 문자가 존재는 했지만 정확한 기원은 전설이나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로 추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먀오족과 한족과는 오랜 역사 동안 투쟁의 역사 속에서 서로의 문화에 영향을 주었으며 특히 한족문화 형성에 먀오족이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http://ko.wikipedia.org/wiki/%EB%A8%80%EC%98%A4%EC%A1%B1

       

    몽족이 중요한 이유가, 최초 벼농사, 최초 개 가축화와 같은 사건들 주역이 몽족, 혹은 먀오족이기 때문이다. 예서, 몽족과 소로리인, 혹은 한민족과의 연관성을 생각해보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5. 인드라 대 인드라

       

    인드라는 구십년대에 아이디 작명을 고민했다. 무엇을 할까 신경을 쓰다 보니 너무 피곤하여 잠을 잤다. 잠을 자는 와중에 꿈을 꾸었다. 꿈에 깨거든, 영어사전을 아무렇게나 펼쳐라. 그때 첫 명사형을 발견하면 그것을 아이디로 삼아라.

       

    이렇게 하여 얻은 아이디가 인드라이다. 인드라가 인드라 아이디를 쓰기 시작할 무렵에는 다들 인드라가 뭔지 몰랐다. 사실은 인드라도 인드라가 뭔지 몰랐다. 아이디를 삼고서야 이런 신이 있었네 했던 것이다.

       

    인드라가 구십년대 중반 쭉 쓰다가 한때 인드라 아이디를 쓰지 않았다. 드라고로 바꾸었다. 이유는 역시 꿈이다.

       

    알고 보니, 드라고는 아르헨티나 외무장관이었다. 꿈에서 말하기 전까지 인드라는 드라고에 대해 전혀 몰랐다.

       

    1902년 영국 ·독일 ·이탈리아 3국이 채무국인 베네수엘라에 대하여 공동무력간섭을 꾀하자, 아르헨티나의 외무장관 L.드라고(18591921)는 이 해 12월 29일 미국에 보낸 각서(覺書)에서 국가는 외국이 자국민에 지고 있는 계약상의 부채상환을 보증받기 위해 군사력을 사용할 권한을 갖고 있지 않으며, 그러한 군사력의 사용은 채무국에 대한 내정간섭이라고 주장하면서, 영 ·독 ·이 3국의 처사를 비난하였다. 이 드라고주의는 1907년 제2회 헤이그 세계평화회의에서 '계약상의 채무 회수를 위한 병력 사용의 제한에 관한 조약'으로 승인되었다. 

    [출처] 드라고주의 [主義, Drago doctrine ] | 네이버 백과사전

       

    인드라고는 인드라가 의식적으로 채택한 아이디다. 

       

    http://blog.yes24.com/blog/blogMain.aspx?blogid=aquamime&artSeqNo=3823803

       

    이유는, 인디고 아이들을 규정하는 특징들 대부분을 인드라가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러다가 다시 인드라로 되돌아온 것은, '인디고 아이들'이란 것이 상업적으로 뭔가 이득을 내기 위한 국유본 쇼가 아닌가 싶어서였다. 하고, 그런 우려는 지금까지 해소되지 않고 있다.

       

    ADHD 환자가 특별한 인간이라고?

       

    아스퍼거 증후군 환자가 잘 나간다고?

       

    정말?

       

    신화는 없다. 인드라는 신화일 수 있다. 허나, 인드라가 ADHD이나 아스퍼거여서는 아닌 것 같다. 혹은 왼손잡이여서도 아닌 것 같다. 첫째 민은 아스퍼거 증세가 있고, 둘째 륜은 왼손잡이인데, 둘 다 평범하거든.

       

    인디고 아이들이란 국유본이 만든 뉴에이지 떡밥에 지나지 않는다. 정말 이런 미세한 영역까지 국유본이 지배하는지를 그때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다시 세상에 맡긴다.

       

    세상이 흘러가는 대로 인드라도 따라 흐른다.

    마음을 열고, 자세를 낮추고, 세상에 감사한다.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21 : 이란시위, 촛불시위, 월가시위 배후는 국유본이다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1/12/01 06:06

http://blog.naver.com/miavenus/70125436468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21 : 이란시위, 촛불시위, 월가시위 배후는 국유본이다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1/12/1

   

"버나드 레빈 (Bernard Levin) 은 아마 미국에서 잘 알려진 이름이 아닐 것이다.  퇴폐적인 팝 스타들이나 할리우드에서 최근에 발생한 가십거리와는 달리, 이러한 학자는 대중의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미국에서 로마 클럽의 통제 아래 연구하는 수많은 학자들 가운데 레빈은 이란, 필리핀, 남아프리카, 니카라과, 한국을 동요시키는 연구를 한다는 이유만으로도 특별한 주목을 받을 만하다.

   

이란 국왕의 몰락은 버나드 레빈과 리처드 포크 ( Richard Falk) 가 작성하고 로버트 앤더스 (Robert Anderson) 의 아스펜 연구소가 감독한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

   

레빈은 또한 <시대의 전망과 도덕 Time Perspective and Moral>이라는 논문의 저자이기도 하다.  국가와 그 지도자의 정신력을 떨어뜨리는 방법에 대해 설명한 이 책은 로마클럽에서 출판했다.  여기에 발췌한 일부가 있다.

   

"공포 전략에 의해 사기를 떨어뜨리는 주요 기술은 바로 이 전술에 있다.  대상이 된 사람의 시야를 흐리게 하여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게 만든다.  여기에 덧붙여 모순된 뉴스를 퍼뜨린다. 대상이 된 인간은 엄한 징계 처분과 제대로 인간 대우를 한다는 약속 사이에서 동요하여 흔히 상황을 파악하기 어렵게 된다.  그때 그 사람은 특정한 계획이 목표로 가고 있는지 빗나갔는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명확한  목표로 가지고 그에 따른 위험을 무릅쓸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일지라도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가혹한 내적 갈등에 빠져 온몸이 마비된다."(우리의 체념이 이런 것인가요?)

   

   

로마클럽의 청사진은 개인뿐만 아니라 국가들, 특히 각국의 정부 지도자들에게 유효하다.  미국 국민인 우리들은 "아, 여기는 미국인데 그럴 리가 없어" 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미국에서 지금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아마 다른 국가들보다도 더 심각한 상황에서 말이다.  전 대통령 리처드 닉슨 (Richard Nixon) 을 강제로 물러나게 한 수법이야말로 전형적인 레빈의 방법이다.  그가 사기가 떨어져서 혼란에 빠지는 일 없이 자신의 입장을 고수했다면 탄핵되었을 리가 없다.

   

레빈과 로마 클럽의 공동계획은 우리 모두의 의욕을 떨어뜨리고 마침내 자신들의 계획을 무의식적으로 따르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마치 양떼와 같은 존재가 된다.  국가를 '구원' 하겠다는 강력한 지도자가 갑자기 나타난다면 반드시 의심의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아야 한다.

   

영국 정보부에 의해 특히 파리 체재 중 몇 년 동안 훈련받았던 호메이니의 예를 생각해 보자.  그는 이란의 구세주처럼 별안간 등장했다.  보리스 옐친 (Boris Yeltsin) 도 남아프리카의 모반 수뇌 '케린스키' 데 클레르크 ( 'Kerensky' F. W. De Klerk) 전 대통령도 똑 같이 MI-6  훈련소 출신이다."[출처] 존콜먼의 300인위원회 중 발췌(버나드레빈과 물병자리프로젝트) (국제유태자본론 연구회) |작성자 응이

   

오늘날 이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 흥미롭지 않은가.

   

   

이란인이 서방에 반대하여 영국 대사관에 난입을 했다. 헌데, 서방 기자들이 이를 사전에 어떻게 알았는지 생생한 현장을 고스란히 사진으로 담아 전세계에 보낸다. 하고, 놀랍게도 서방 국유본 언론들이 앞다투어 이 사건을 톱기사로 보도한다.

   

이상하지 않은가. 보통 이런 사건이라면, 이란인은 현장에서 서방 기자들 카메라를 뺐는다든가 할 터인데~! 또, 서방 국유본 언론은 언론대로 보도하지 않거나, 보도해도 잘 보이지 않는 구석에 슬쩍 넣을 터인데, 대문짝만한 사진과 함께 보도한다^^!

   

하고, 연이어서 파키스탄에서는 오폭 시위를 벌이고, 미국에서는 월가 시위를 마감시키고, 영국에서 공공 부문 노동자 24시간 파업을 일으키고, 한국에서는^^?

   

자,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할까. 이란이 지랄해야 유가가 현재 유가를 지탱할 수 있다면? 또한, 중동에서의 새로운 전쟁을 위해서라면? 다시 말해, 제 2의 베트남 전쟁을 위해서라도 월맹 역할을 맡은 이란을 키울 필요가 있는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드러났다. 과거 이란 - 이라크 전쟁에서 군사력 면에서 당시 이라크가 압도적이었다. 그럼에도 이 전쟁을 팽팽한 대치 상태로 끌고 갈 수 있었던 것은, 국유본이 지속적인 이익을 낼 수 있었던 것은, 이란의 미국 대사관 난입 사건 때문이다. 배후에는 물론 국유본이 있었던 것이다. 이를 통해 이란은 중동에서 아랍인들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타비스톡은 2차 대전이 끝난 후 자금난에 허덕인다. 이때,  록펠러 재단이 타비스톡을 후원하여 타비스톡 인관관계연구소로 탈바꿈한다. 하면, 왜 로스차일드가 아니라 록펠러 재단인가.  로스차일드는 망했나. 아니다. 망한 척했다. 게다가 국유본이 2차 대전 이후 미국 역할을 부각시켜야 했으니 친영 이미지인 모건보다는 미국적인 이미지의 록펠러가 적격이었던 게다.

   

이 시기부터 존 콜먼이 말하는 악마의 연구소, 타비스톡이 등장하는 셈이다. 1945년 국유본은 CIA 전신인 OSS 창설을 제안했던 쿠르트 레빈(kurt lewin)을 미국에 파견한다.

   

"처음에는 형태심리학(게슈탈트 심리학)에 속하였으나, 미국으로 건너가서부터는 사회심리학 영역에서 독자적인 활약을 하였다. 베를린대학 심리학 연구실에 있을 무렵은 베르트하이머, W.쾰러, K.코프카 등 형태심리학파의 세 거물이 활약하고 있던 시대였다. 그는 그 가운데서 요구 ·의도 ·정서 ·행동 등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연구 영역을 개척하고, 젊은 연구자를 그 주위에 모아, 획기적인 연구 결과를 《Psychologische Forschung》에 발표하였다. 나치스의 대두로 미국에 건너가 코넬대학, 아이오와대학 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미국에서의 그의 관심은 차차 사회심리학 방면으로 옮아가서, 사회적 분위기, 집단의지 결정, 산업에서의 현장연구, 유대인 문제, 감수성 훈련 등 다방면에 걸쳐 연구하였다. 매사추세츠공과대학의 집단역학연구센터와 국민훈련연구소의 설립은 그 구체화의 일환이다. 그가 창시한 많은 개념은 지금은 심리학의 상식으로 되었다. 그의 주위에는 언제나 한 그룹의 연구진이 모이고 독특한 연구 분위기를 조성하여 집단효과를 발휘하였다. 독일의 '쿠와셀 스트리페', 미국의 '토폴로지 그룹'은 그 예이다.  "

[출처] 쿠르트 레빈 | 네이버 백과사전

   

군산복합체 대학으로 정평이 난 MIT에 그룹역학 연구센터가 등장한다. 쿠르트 레빈이 죽자 센터는 1948년 미시간 대학으로 옮겨 사회 연구 재단(institute for social research)이 된다. 이후 스탠퍼드 연구소까지 이어진다.

   

하면, 왜 국유본은 심리학자를 필요로 했나. 또한, CIA와 같은 정보 기관을 심리학자가 주도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국유본 정보 기관에서 심리학자를 중시하는 이유는 심리전 때문이다. 말하자면, '삼국지'인 게다. 정보기관에서 하는 일이 무엇일까. 보통은 도청 등 정보 수집으로만 알고 있다. 허나, 이는 정보기관이 하는 일 중 그 비중이 크지 않다고 한다.

   

78 : 22? 78%는 심리전에 투입하고, 나머지 22%만 정보 수집을 한다는 게다. 이는 왜일까. 정보란 써먹어야 가치가 있는 것이다. 써먹지 못하면 아무리 중요한 정보라도 별 가치가 없는 것이다. 기업으로 보면 정보 수집 - 관리 22%, 심리전 - 영업 78%인 셈이다.

   

1969년 한국 중앙정보부는 심리전을 위한 3대 도구로 라디오, 삐라, 확성기를 든 바 있다. 헌데, 사십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 놀랍지 않은가. 라디오와 삐라와 확성기는 여전히 유효한 수단인 동시에 IT 정보기술의 발달로 라디오에서 인터넷 방송으로, 삐라에서 동영상 휴대폰 앱으로, 확성기에서 이동식 앰프로 진화하고 있는 셈이다.

   

예서, 도구만 있다고 효과를 보장할 수 있나. 도구를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 없다면 오히려 역효과를 줄 수 있는 것이다. 해서, 심리학자가 필요한 것이다.

   

예서, 심리학자 중 특히 사회심리학자들을 우대했다. 왜인가. 세상 99%는, 혹은 99.9%는 국유본의 지배 대상이다. 이들은 여성, 어린이, 청소년, 노약자, 장애인, 노동자, 농민, 서민, 유색인종, 저학력층, 저소득층이다. 이들 집단 심리를 잘 파악하여 이용할 수 있다면 국유본이 영구적으로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것이다.

   

이들 99.9%들이 관심이 있는 것이 무엇인가. 어떤 맹신이 있는가. 어떤 유혹에 잘 빠지나? 이런 것들을 연구한 셈이다. 답은 여러분들이 더 잘 알 것이다. 살면서 익히 알고 있을 터이니까. 영화, 스포츠, 인터넷, 포르노, 음악, 만화, 소설, 드라마, 게임, 개그쇼, 버라이어티쇼, 리얼리티쇼, 마약, 담배, 술, 신상품, 성형수술 등등등. 여러분들 중 절대 다수는, 상기한 것이 사라진다면 무슨 재미로 사나 할 것이다.

   

해서, 국유본은 이들 부문을 지배한 뒤 활성화시키는 것이다. 이는 시온의정서에 잘 나와 있다.

   

잠깐!

   

인간이란 늘 쾌락에만 빠져 있는 것이 아니라고. 반성 비판하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인간을 존재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자 국유본은 반성 비판 부문에도 침투하기 시작했다.

   

99.9%는 유혹에 빠지면서도 그런 자신을 되돌아보는 비판 정신도 있는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해서, 바로 이들 부문도 장악해야만 하는 것이다. 하여, 우선 수천년간 인간 비판 정신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종교인 게다.

   

이슬람교, 기독교, 가톨릭, 유대교, 불교, 유교, 힌두교 등 기성 종교는 물론이요, 통일교 등 뉴에이지 신흥 종교도 지배해야 하는 것이다. 해서, 우선 교황, 호메이니, 유명한 목사, 랍비, 달라이 라마, 틱낫한, 쪽발이 땡중 등등의 우두머리들을 포섭한다.  기존 조직으로 끝없이 침투해서 영향력을 확장함과 동시에 한없이 신흥종교를 만들어낸다.

   

근대 이후, 종교를 대체하면서 종교와 영역을 분할한 것이 정치인 게다. 영국 국교회와 영국 왕을 내세운 영국 정치시스템이 대표적이다. 해서, 왕과 대통령과 의회, 그리고 사법을 장악해야 하는 것이다. 루즈벨트가 '국유본은 우리 편' 판사를 활용해서 정적들을 제거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인 게다. 

   

예서, 언론이 등장한다. 프랑스 혁명 때 언론이 역할을 했던 것이다. 무슨 역할?

   

1789년 10월, 파리 시민이 선동에 이끌려 베르사유 궁전으로 몰려갔다. 이때, 소식을 들은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들이 몰려온 이유가 빵이 없어서라는 이야기를 듣고 "빵이 없다면 그들에게 과자를 먹이도록 해요"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헌데, 이 말이 널리 전파한다. 나쁜 뉴스는 좋은 뉴스보다 스무배 빠르게 전파하니까. 헌데, 마리 앙투아네트가 정말 이 말을 했을까?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로 시집오기 전인 1760년대, 루소(17121778)의 참회록에 이 말이 등장한다. 어느 고귀한 공주가 농부들로부터 빵이 떨어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브리오시를 먹게 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녀가 알고 있는 빵 이름은 브리오시(Brioche)뿐이었고, 호의에서 나온 말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과자를 먹게 하지요"란 말은 앙투아네트보다 '어느 고귀한 공주'의 일화가 앞선 것이고, 또 앙투아네트가 이 말을 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럼에도 마리 앙투아네트 이야기가 프랑스 전역으로 퍼진 이유는 무엇이며, 오늘날까지 전 세계 인민이 마리 앙투아네트가 이런 말을 했다고 철썩같이 믿는 이유가 무엇인가. 언론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쪽발찌라시 한경오프엠을 비롯한 국유본 언론은 미친 듯이 선동하고 있는 셈이다.

   

   

노르웨이 테러 관련 오보 지나칠 정도로 심하다

http://blog.naver.com/miavenus/memo/70125382917

   

해서, 국유본은 전 세계 주요 통신사와 언론을 장악한 것이다. 하여, 쪽발찌라시 한경오프엠이건, 친일 조중동이건, 외신 만큼은 철저하게 국유본 지배를 받는다. 예서, 쪽발찌라시 한경오프엠을 무시하자. 이 색희들은 국유본 지시를 받아도 특정 노선에 불리하면 아예 뉴스를 내보내지 않는 편이니까. 이유는 기반이 매우 약해서 친일 조중동처럼 통크게 뉴스를 내보내면 다음 날 폐간하기 때문에^^! 반면, 친일 조중동은 국유본 지시를 받아도 기반이 튼튼하므로 종종 자신들의 이념을 배반하는 기사들을 내보내는 것이다. 가령 푸틴이나 베를루스코니 비판 기사 같은 것을 내보낸다. 뿐만 아니라 이란 영국 대사관 침입 기사나 김일성, 김정일 찬양 기사도 톱기사로 종종 내보낸다. 심지어 김정일 외유 기사를 톱기사로 일주일 내내 내보낼 때도 있다. 반면, 이명박 관련 기사는 이명박 비판할 때를 제외하고는 좀처럼 기사를 내보내지 않는다. 또한, 외신에서 중국 관련 기사는 90% 이상 비판 기사로 도배하는 반면, 일본 관련 기사는 쪽발찌라시가 더 심한 것 같기도 한데, 95% 이상 일본과 일왕 칭찬 기사이다. 가끔 매우 드물게 그렇지만도 않다는 식으로 비판 기사를 내보내지만, 이들이 쪽발찌라시 노선이며, 친일 노선임을 외신 기사만 쭉 살펴봐도 알 수 있다.

   

해서, 여러분은 아셔야 한다. 친일 조중동에서 주요하게 취급하는 외신이야말로 요즘 국유본 역점 사업이라는 것을 말이다^^!

   

헌데, 언론이란 길거리 선동을 위한 것이다. 깊이가 없다는 것이다. 이를 보완하는 이들이 있으니 학자였던 셈이다. 본디 신학자로 출발한 이들은 철학자, 과학자로 분화한 것이다. 언론이 선동이라면, 학계는 선전인 게다.

   

선동해도 5% 정도는, 혹은 넓게 잡아 22% 정도는, 특정한 선동에만 반응하기 때문이다. 해서, 보다 정교한 선동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선전 방식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것이 논리인 게다. 국유본은 이들 논리 시장을 장악했다. 전 세계 거의 대부분 학술재단은 결국 록펠러 재단, 카네기 재단 등에서 온다. 학술 연구를 위한 자금을 장악한다. 황우석을 통해 잘 알려진 네이처 등 연구 발표 언론을 장악한다. 출판사와 서점을 장악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음모론을 지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왜냐하면, 약 1% 정도는 이 모든 것에 반발심이 들 정도로 태생적으로 반골로 태어난 족속들이기 때문이다.

   

예서, 선전과 선동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교육을 장악해야 한다. 어린이 때부터 조기 교육으로 세뇌시키면 "뽀그리 만세~"나 '쪽발 돼중 만세", '쪽발왕 반자이"처럼 보다 인민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태생적으로 반골인 자들을 어린 시절부터 차츰차츰 제거하여 도태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중앙아시아의 김일성, 니야조프의 충격과 공포 일대기

http://chjun.wo.tc/80066999001

   

국유본은 김일성이나 니야조프를 통해 사회 실험을 감행하는 것이다. 인류가 얼마나 노예로 변모할 수 있는가. 니야조프의 뒤에는 국유본이 있었다.

   

하면, 요즘 타비스톡이 개발한 프로그램은 무엇일까.

   

스워밍 전술이다.

   

http://blog.jinbo.net/rudnf/248

   

http://en.wikipedia.org/wiki/Fred_Emery

   

스워밍이란 쉽게 말하면, 플래시 몹이며, 국유본 군사 작전을 민간에게 적용한 것이다. 전쟁 중에는 위성 신호를 전투 헬멧으로 받은 특공대가 시가지 전투를 효과적으로 이끈다. 이들 특공대가 시위대로 위장하여 투입한다면. 그것이 스워밍이다. 이런 전술이 국유본이 지시해서 나온 것임을 아는 이들은 별로 없다~!

   

참고로 월가를 점령하라, 에서 삼성전자 갤럭시가 위력을 발휘했다는 뉴스가 등장한다~!

   

http://blog.naver.com/miavenus/memo/70125074035

   

데모하고, 시위하는 당신 자신이 세뇌당했다는 것을 순순히 시인한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결정일 수 있다. 당신은 정신과 치료를 받을 용기를 가져야 한다. 하고, 그런 자신을 수용해야 한다.

   

허나, 회피하고, 쪽발놈현, 쪽발돼중 노선으로 간다면, 그렇게 하라. 그게 마음이 편하다면. 허나, 회피로 인해 발생한 독이 퍼져 이른 시일내에 뇌를 갉아먹어 좀비가 될 것이다.

   

그런 좀비 인생을 긍정한다면, 그것이 국유본이 진정 원하는 길이다. 현재 인류 대다수는 국유본이 원하는 대로 좀비가 되어가고 있다. 오늘도 좀비들은 매국노 데모질에 열심이고~!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20 : 타비스톡 1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1/11/29 06:15

http://blog.naver.com/miavenus/70125263225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20 : 타비스톡 1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1/11/29

   

1. 타비스톡

   

 http://www.tavinstitute.org/

   

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군은 심리전 전담기구인 타비스톡 연구소를 설치했다. 1921년 베드포드 공작이 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트라우마를 연구할 연구소 건물을 기증하자 그의 이름을 따서 타비스톡 연구소가 되었다. 예서, 베드포드 공작인데 왜 타비스톡인가. 베드포드 서브타이틀이 타비스톡 후작이기 때문이다. 하면, 왜 타비스톡 후작이란 서브타이틀이 생겼을까 싶어 자료를 찾아보니 해적 드레이크와 연관이 있었다. 드레이크 고향이 타비스톡이었는데, 그의 대부가 프랜시스 러셀, 베드포드 공작 장남(Francis Russell, 2nd Earl of Bedford)이었던 게다. 해서, 이 이후 타이틀이 달린 것 같다. 헌데, 대부 시스템이 영국에서 있었는지 이번에야 알았다. 영화에서 가끔 대부 나올 때 구교 지역에서만 있는 줄 알았는데 말이다. 대부(patron) 시스템은 로마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고 있다. 로마 시대에는 귀족이 평민 아이에 대해 후원자 관계를 맺었다. 평민은 대부 시스템을 통해 든든한 빽을 얻게 되고, 귀족은 세력을 얻는 셈이었다. 이것이 중세에 와서는 화가, 작가에 대한 귀족 후원으로 바뀐 셈인데, 해적한테까지 대부 관계가 성립할 줄은 몰랐다~! 아마도 드레이크가 영국 왕실로부터 작위를 받은 배후에 베드포드 공작 가문 입김이 있었던 듯싶다.

   

헌데, 연구소 측은 왜 베드포드라고 하지 않고 서브타이틀인 타비스톡으로 이름을 붙였을까. 연구소가 지향하는 바를 잘 의미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 싶다.

   

2. 윌프레드 비온

   

타비스톡 이론가로는 윌프레드 비온이 있다. 윌프레드 비온은 인도의 펀잡지방 무트라에서 인도인 어머니와 영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출생  유모에 의해 양육되었고 영국이 정복한 인도의 식민지배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다. 그러다가 8세에 영국에 건너와 영국 교육을 받는다. 그는 칼 융 처럼 자신의 어머니를 차갑고 무서운 여인으로 인식하였다. 비온은 클라인에게 분석을 받았고 1965년 영국 정신  분석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1968년 미국으로 이주하여 왕성한 임상활동을 하였으며 백혈병으로 사망하였다.

   

http://blog.naver.com/matsoe79/90123605009

   

http://blog.naver.com/bootsaba/60106374592

   

윌프레드 비온 책을 읽지 않았다. 해서, 부족하지만, 소개한 글들을 쭉 읽어보니, 동양적 사상을 지닌 사람, 대승불교 학승으로 묘사하는 것 같다.

   

http://blog.naver.com/bobburuzi/70110351774

   

윌프레드 비온 스승인 클라인과의 비교 글을 읽으니 조금 더 이해가 되는 듯싶다. 윌프레드 비온 중심으로 이해한 클라인은 동화 '피터팬과 선장 후크' 이야기를 학적으로 풀어쓴 이야기가 아니었나 싶다. '피터팬과 선장 후크' 이야기를 잘 풀어쓴 것이 발터 벤야민의 '꼽추 난쟁이' 이야기다.

   

http://blog.naver.com/yanan33/60145622086

   

발터 벤야민 꼽추 난쟁이 이야기란 자신은 피터팬처럼 살고 싶었지만 지난 사진들을 어쩌다 펼치면 후크 선장처럼 살아왔다는 것이다. 해서, 피터팬아, 피터팬아, 가끔은 후크 선장도 응원해주렴~! 하는 것이다. 이런 발터 벤야민 모습이란 프로이트이기 보다는 칼 융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해서, 이런 '피터팬과 후크 선장' 프로그램이 본디 타비스톡 프로그램이 아니었나 싶다.

   

3. 염소를 노려보는 사람들

   

허나,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는 법.

   

연구는 세 갈래로 분화한 것 같다. 이를 일단 인드라 식으로 추론해본다. 즉, 이들 주장들을 일일이 읽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세 가지 연구로 분화했을 것이다, 라고 추정하는 것이다.

   

하나, 클라인 그룹이다. 이들은 영국적, 유럽적 전통에 기반하여 치료를 했을 것이다. 즉, 제국주의 용병으로서 행한 부도덕한 짓거리에 대한 대한 양심의 가책을 누구나 어른이 되면 나쁜 짓을 하기 마련이지, 하면서 피터팬과 후크 선장의 공통점을 모험과 호기심에 두고 치료를 했을 것이라고 본다.

   

둘, 프로이트 그룹이다. 이들은 꿈에서조차 맞고, 강간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그 반대로 때리고, 강간하고, 죽이는 욕망에 기반하여 치료를 했을 것이다.  

   

"신화와 신비주의를 벗겨내기 위해 꿈은 해석되어야한다. 꿈은 신의 계시 따위가 아니라, 욕망-상징으로서 이해되어야한다. 꿈을 해석한다는 것이 곧 벤야민이 말하는 의식의 각성을 의미한다. 꿈은 현실에서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 욕망의 대리물이다. 그러므로 꿈은 유혹이고 우리를 잠에서 깨어나게 하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쾌락 원칙'이다. 벤야민이 말하는 각성은 이런 쾌락 원칙을 넘어가는 무엇이다. 이것을 벤야민은 "완성된 승화"라고 불렀던 것일까? "

http://wallflower.egloos.com/1671871

   

   

발터 벤야민을 1960년대말에 국유본 기획에 따라 부각시킨 아도르노의 관점이다. 발터 벤야민 꿈을 지 꼴리는 대로 출애굽기 유태인 집단무의식으로 치환한 뒤 계급투쟁적 해석을 억지로 갖다 붙인 것이라고나 할까.

   

사실 이런 관점이 국유본 입장에서 가장 돈 되는 해석인 게다. 이런 이유로 타비스톡에서 연구한 프로이트가 존경하는 인물 둘을 한니발과 크롬웰로 했나~!

   

셋, 윌프레드 비온 그룹이다. 윌프레드가 유아기보다 더 어린 단계인 생후 1년 이내를 다루었다는 건 언어적 치료보다 비언어적 치료를 중시했다고 본다.

   

예서, 떠오르는 것이 있으니 영화  '초(민망한) 능력자들'이다. 원작, 염소를 노려보는 사람들을 영화화했다.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70395

   

이 영화에서 벽 통과하다 부딪치는 장군을 클라인 그룹이라 한다면, 군 작전에 적극 복무한 케빈 스페이시를 프로이트 그룹이라 할 수 있고, 마지막으로 주인공 격인 이완 맥그리어와 조지 클루니를 윌프레드 비온 그룹이라고 할 수 있겠다.  

   

   

http://blog.naver.com/sjhu62/140064365594

   

4. 인드라 꿈 이야기

   

인드라가 주기적으로 꾼 꿈이 셋이 있다.

   

하나, 피터팬과 후크 선장 꿈이다. 어린 시절에 꾼 꿈이 아니다. 재수할 때부터 대학 1년 때까지 꾼 꿈이다. 똑같은 꿈을 자주 꾸었다. 아마도 이 시기 어른이 된다 = 타락한다는 게 몹시 싫었던 듯싶다.

   

둘, 프로이트 꿈이다. 대학 1년 때 생애 처음으로 운동권인 이유로 유치장 신세를 지면서부터 군대에 갔을 때까지다. 이때는 맨날 도망가고, 죽도록 맞고, 피흘리고, 고문을 당하고, 동료를 배신하고 이런 꿈만 꾸었다. 동시에 그와 비교해서 6 : 4 비율로 누군가를 성폭행하고, 잔인하게 죽이고, 고문을 하는 꿈을 꾸었다. 시집살이 지독하게 당한 며느리가 독한 시어머니가 된다든가. ㅠㅠㅠ

   

셋, 날개가 달린 천사 꿈이다.

   

http://blog.naver.com/miavenus/60012855575

   

인드라가 이 꿈을 조숙해서인지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꾼 것 같다. 그때부터 고 3때까지 늘 반복적으로 꾸다가 재수할 때부터 꿈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더 이상 꿈을 꿀 수가 없었다.

   

똑같은 꿈을 자주 꾼다는 건 정신 건강에 문제가 있다는 소리이다. 인드라가 태생적으로도 여러 가지로 약간 문제가 있었지만, 어린 시절에 문제가 발생하여 내면으로 침잠하다 보니 생각이 과잉이 되어 이런 꿈을 꾼 것 같다.

   

헌데, 이 꿈이 국제유태자본론을 전개한 이후 아주 드물지만 가끔 꾼다. 다만, 꿈 내용이 달라졌다.

   

이제 배영으로 날라다니지 않는다. 여전히 슈퍼맨이 아니지만, 적당한 속도로 날라다닌다. 헌데, 꿈이 두번째 꿈이랑 섞여 있다. 즉, 상대는 매우 강한 상대이다. 죽여도 죽여도 살아나는 괴물이다. 두려움이 조금도 없다. 머리도 매우 비상하다. 그 괴물에 대항할 방법이 없다. 식은 땀을 흘리다 꿈에서 깬다.

   

인드라는 꿈 분석을 좋아했다. 해서, 스스로 가설을 만들어내었다. 꿈이란 소설이라고. 인드라가 청소년 시기 때부터 소설이나 시나리오 같은 걸 끄적였으니까.

   

해서, 이런 가설을 토대로 돌팔이 임상에 나섰던 것이다. 약 500명 정도를 대상으로 했다. 90%가 여성이다 ㅠㅠㅠ. 작업을 걸 때, 뭐 특별히 할 말이 있겠냐. 손금 봐준다, 관상 봐준다 하는데, 사실 인드라가 손금도 못 보고, 관상도 못 보는데, 순전히 작업용 멘트로 한 것이다. 헌데, 매우 흥미롭게도 여성분들이 알면서 속아준다. ㅎㅎㅎ. 이러면서 손 한 번 잡아보고. 여기까지는 깝치는 짓거리이다. 예서, 인드라가 꿈 해몽 잘 한다, 속는 셈치고 한번 말해보시라, 하면 이야기를 하는 분들이 있는 것이다. 예서, 남성 상대로 하는 것보다는 여성 상대로 하는 게 훨씬 좋다. 서로 최소한의 신뢰라고나 할까 그런 것이 있다. 신이 만들어준 짝짓기 본능에 의존한 것이다. 반면, 남성 상대로는 짝짓기 본능보다 싸움 본능이 앞서기 때문에 쉽지가 않다. 물론 예외적으로 가능한 경우가 있다. 인드라가 멘토로 성립한 경우. 대학생일 때, 군대에서 상병과 병장일 때 많이 했다. 해서, 여성이 90%라는 것이다.

   

하면, 궁금할 것이다. 인드라 꿈 분석이 뭐냐. 총각이라면 써먹고 싶을 것이다. 과감하게 저작권 안 받고 공개하겠다. ㅋ 꿈이란 불안을 최소화하는 것이라고 가정했다. 최근 이런 인드라 가설을 뒷받침하는 실험이 있었다.

   

"수면 중 꿈을 꾸는 구간인 급속안구운동(REM: rapid eye movement) 수면이 아픈 기억을 누그러뜨리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 대학 심리학과의 엘스 반 데르 헬름(Els van der Helm) 연구원은 REM 수면에서는 뇌의 스트레스 시스템이 폐쇄된 상태에서 감정적 경험들이 처리되며 이를 통해 기억들의 아픈 부분들이 잘려나간다는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다고 말한 것으로 영국의 데일리 메일 인터넷판과 과학뉴스 포털 피조그 닷컴(Physorg.com)이 23일(현지시간) 보도했다. 그의 연구팀은 건강한 청년 35명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 한 그룹에겐 감정반응을 유발하는 150가지 영상을 아침에 보여주고 12시간이 지난 뒤인 저녁에 다시 보여주었다. 다른 그룹에겐 같은 영상을 저녁에 보여주고 자고난 다음날 아침 다시 보여주었다. 다만 이 두번째 그룹은 수면 중 자기공명영상(MRI)과 뇌파도(EEG)로 뇌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두번째 그룹은 자고난 뒤 아침에 다시 영상들을 보여주었을 때 전날 저녁 같은 영상을 보았을 때보다 감정반응의 강도가 현저히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이 그룹은 MRI 영상에서도 감정을 처리하는 뇌부위인 편도(扁桃)의 반응이 크게 줄어든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은 뇌파도에서도 REM 수면 중 특정 전기활동 패턴이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뇌의 스트레스 관련 신경전달물질이 감소하면서 전날 경험한 것에 대한 감정반응이 누그러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연구팀을 지도한 매슈 워커 신경과학교수는 REM 수면 중에는 스트레스와 관련된 신경전달물질인 노르에피네프린이 크게 감소한다고 밝히고 이처럼 안전한 상태에서 전날의 감정경험이 재처리되기 때문에 감정반응의 강도가 누그러져 아침에 잠이 깨면 그 감정을 더 잘 감당할 수 있게 된다고 설명했다. 수면은 크게 REM 수면과 비REM 수면으로 구성되며 둘 모두 건강을 유지하는 데 필요하다. 전체 수면 중 약20%를 차지하는 REM 수면은 꿈을 꾸는 구간으로 뇌는 활성화되고 근육은 마비상태가 된다. 비REM 수면 중에는 신체조직이 수리되고 세포가 재생되며 면역기능이 강화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연구결과는 '현대 생물학(Current Biology)' 최신호에 실렸다."

http://blog.naver.com/miavenus/memo/70125147649

   

인천소방님은 이에 대해 부정적으로 덧글을 달았는데, 인천소방님이 우려하는 대로 그 어떤 중립가치적인 과학적인 결과라도 국유본이 자금을 댄다면 순수하게 볼 수 없다는 것이겠다. 즉, 국유본 이익대로 과학적 결과를 남용할 것이란 우려일 것이다. 이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는 빅터 로스차일드이다. 아이큐 180에 이른다는 지극히 이성적인 인간, 빅터 로스차일드가 행한 인류 범죄적 결과, 이차대전과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 중동 전쟁만 보더라도 인간이란 존재에 회의적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 쓰임새가 악용하더라도 과학 자체를 죄악시해야만 하는가 하는 딜레마에 빠진다.

   

이런 점을 전제하고, 인간이 잠을 자는 건 육체적 휴식을 위한 것이고, 인간이 꿈을 꾸는 건 정신적 휴식을 위한 것이다, 라는 가설을 세울 수 있는 것이다. 헌데, 꿈을 꾼다는 건 옅은 잠을 자는 상태이다. 해서, 꿈을 꾸지 않는 깊은 잠이 육체적 휴식이라면, 꿈을 꾸는 옅은 잠이 정신적 휴식이다. 인드라는 이것이 인류의 발달사와 관련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가령 꿈으로 해소할 수 있다면, 이성적인 노력으로 변화할 수 있고, 치료할 수 있다고 본다. 가령 반복적으로 자주 꿈을 꾸는 증상이 예다. 반면, 같은 꿈이라도 어쩌다 꾸는 꿈, 단 한 번 꾸고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 꿈과 같은 문제를 해소하기는 더 어렵다. 마지막으로 꿈꾸지 않는 이라면 꿈 분석 따위는 소용이 없다고 본다.

   

인드라 가설로는, 사이코패스는 꿈을 꾸지 않는다. 잠만 잔다. 바로 그런 이유로 낮에 현실에서 꿈을 꾼다. 그것이 사이코패스 범죄로 나타난다고 본다. 나이가 들면 잠이 준다. 헌데, 이때 잠이 준다는 건 거의 꿈을 꾸지 않는 것이다. 육체적인 휴식만 취한다는 것이다. 인드라가 볼 때, 이른 나이에 지나치게 조숙해서 발생한 것이 사이코패스이고, 사이코패스 범죄라고 본다. 사이코패스를 환경적 문제라고 보면 안 된다. 태생적인 문제도 있다. 온정적인 접근이 만능이 아니다.

   

인드라도 한순간 사이코패스에 유혹되었다. 세상에서 인드라 같은 사람을 만나길 소망했는데, 한국에서 찾아보기 힘들다가 발견한 것이, 국유본이었다. 어쩌면, 저렇듯 인드라가 생각하는 것과 국유본이 비슷할까 이런 생각을 할 정도였다. 국유본은 정신분열증 환자이다. 편집증은 정신분열증의 일부인 게다.

   

인드라가 요즘 나이 오십에 가까운데, 꿈도 곧잘 꾼다. 가늘고, 오래 살 수 있는 좋은 징조이다. 인드라 소망은 나이 칠십, 구십에도 꿈을 오래도록 꾸는 것이다. 청년 백세가 인드라 목표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일시적인 꿈을 꾼다. 역설적으로 건강한 것이다. 인드라 글을 읽고 잠을 잤는데, 꿈에서 인드라를 만나 섹스를 했더라, 이런 꿈은 좋은 꿈이다. ㅎㅎㅎ 헌데, 매일 인드라와 섹스하는 꿈을 꾸면 그건 좀 심각한 것이다 ㅋ

   

인드라 글을 읽으면 한편으로 흥미로우면서 다른 한편으로 무섭다. 이것이 일반적이다. 그렇지 않은가. 왜 흥미로운가. 세상에 이토록 현실적이면서 황홀한 이야기가 어디있다는 말인가. 대개는 현실적이거나 환타스틱하거나 둘 중 하나인데, 둘 다 만족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문제는 무섭다는 것이다. 무서움만 약화할 수 있다면, 다시 말해, 롯데월드 놀이기구처럼 안전이 보장한 무서움이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그 열망이 꿈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가령 인월리를 읽고 그날 꿈에 인드라가 악마로 나타난다. ㅎㅎㅎ. 다음 날, 혼자 생각한다. 인드라가 설마 악마겠어? 혹은 인월리를 읽고 인드라와 섹스한다. ㅋㅋㅋ. 그럼 그렇지, 인드라도 남자 색희잖아, 여자 밝히는. ㅎ 인월리를 읽고 인드라가 한나라당 국회의원이 된다. 그럼 그렇지. 그 색희가 그럴 줄 알았어. ㄲㄲㄲ. 혹은 인월리를 읽고 인드라가 쪽발민주당 대통령이 된다. 아이 씨발, 저 색희가 은근 저주할 때 알아봤다니까. 인월리를 읽고 검은 사제복을 입고 나타난다. 맞았어, 인드라는 틀림없이 일루미나티야~!

   

그후로 마음 편안하게 인월리를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나는 인월리에 세뇌되는 자가 아닌 게다. 난 꿈을 꾸었다. 하고, 꿈을 꾸지 않은 자여, 인월리에 뻑가지 마라??? 78 : 22~!?

   

여기까지 본론이고, 결론이다.

   

여러분이 꿈을 꾸면, 주인공만 자신이 아닌 게다. 꿈에 나타난 인물과 사물이 모두 당신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렇다. 내가 너였으면, 내가 이명박이었으면, 내가 이순신이었으면, 내가 박정희였으면, 내가 전봉준이었으면, 내가 프로메테우스였으면, 내가 호치민이었으면, 내가 예수였으면, 내가 부처였으면, 내가 마리아였으면 등등.

   

우리는 흔히 이런 말을 한다. 내가 너라면 oo한다. 그것이다. 인물만 그런 것이 아니다. 둥물과 사물에도 얼마든지 인간은 자신처럼 여길 수 있다. 이는 거울 뉴런인 게다.

   

 http://ko.wikipedia.org/wiki/%EA%B1%B0%EC%9A%B8_%EC%8B%A0%EA%B2%BD_%EC%84%B8%ED%8F%AC

   

예서, 당신은 작가이지만, 동시에 독자이기도 하다. 헌데, 자신이 만든 꿈 이야기에 뭔가 빠졌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 기상천외한 것이 끼어드는 것이다. 더구나 그로 인해 기상천외한 것이 주인공이 되어 꿈이 다시 바뀌는 것이다. 처음의 꿈이 잊혀지고, 뒤늦게 꾸는 꿈만 기억날 수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 말하면, 이제 꿈을 이야기하는 이들은 스스로 꾼 꿈에 대해서 인지하기 시작한다. 물론 인드라는 그, 그녀가 무엇을 인지했는지 모른다. 다만, 그녀, 그가 말하다 보니 스스로 알게 되는 것이다. 그, 그녀가 꿈에 대해서 불만인 것은, 뭔가 이질적인 것이 꿈에서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 그녀가 원하는 대로 꿈이 나타났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 꿈을 꾸어도 기억하지 못한다. 헌데, 그미가 이상한 꿈을 꾼 것이다. 그것이 불안한 것이다. 헌데, 인드라 꿈 풀이로 보면, 그 이상한 꿈 정체가 드러난다.

   

하나, 자신의 꿈이 부실했던 것이다. 이 정도 꾸면 행복할 것이라 여겼는데, 그 자신조차 삼류 저질 시나리오라고 비난할 만큼 허접한 꿈을 꾼 것이다. 이런 꿈은 자존심이 상한다. 지나치게 유치한 꿈이니까. 해서, 기억이 잘 나고, 기분이 안 좋은 게다.

   

둘, 자신의 꿈이 부실하지는 않지만, 불안한 꿈이다. 꿈을 꾼 정황을 모두 이해할 수 있다. 헌데, 적으로 설정한 상대가 수십년간 잊고 지냈던 그 넘이라면? 자, 이 꿈은 이렇다. 꿈이란 이런 저런 기억 창고에서 기억을 조합하는 것인데, 부분적으로 근래 기억에서 합당한 기억을 찾지 못한 꿈이 아직 지워지지 않는 수십년 전 기억창고까지 뒤진 끝에 건들이는 것이다.

   

셋, 자신이 전혀 생각지도 않은 자가 꿈에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완전 원하지 않는 스토리로 나가다가 꿈이 깬다? 하고, 그 꿈이 생생할 정도로 기억한다.

   

인드라가 볼 때, 이 세 가지는 이성적 산물이다. 이런 꿈을 꾼 만큼 경계하기 마련이지 않겠는가. 이는 깨었을 때 사고 폭을 넓혀주는 것이다. 이전까지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게 만드니까.

   

정리하자.

   

인드라는 꿈 문제에 관해서는 프로이트보다는  윌프레드 비온 입장이다.

   

5. 윌프레드 비온 비판

   

저서를 읽지 않아 선무당 격 비판일 가능성이 있다.

   

하나, 비언어적 영역에서의 심리 치료를 고려했다는 것은, 자신이 출생 배경을 생각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인도, 영국, 중동을 포괄하는, 종교적으로는 불교, 힌두교, 기독교, 조로아스터교 등을 하나로 하려는 무의식적인 의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해서, 바로 그 요인이 다문화적 상황에서 해결책으로 부각하는 장점일 수 있지만, 동시에 그런 만큼 단점인 게다.

   

둘, 0사상, 공사상이 대안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인드라가 이 문제에 관해 많이 고민한 바, 인류 최초의 상황으로 되돌리자, 근본적으로 가야 한다는 데에 비판 의식이 생겼다. 생명의 돌이든, 아담이든, 뭐든, 그것이 단지 무엇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근거로 空사상을 대안으로 삼는다는 것이 영 이상했다.

   

셋, 아가를 대하는 어머니의 태도가 모든 것을 내려놓는 무념무상의 태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아기와의 강한 유대감 속에서만 윌프레드 비온이 말한 기적과도 같은 어머니의 '독해'가 발생한다. 다시 말해, 자신을 잊고 아기에게 올인한 것이 어머니의 태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 반대로 아기를 내 몸에서 나온 신체 일부분, 즉, 자신의 팔다리로 인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6. 불가지론?

   

불가지론은 아니다. 하면, 무엇이냐. 이것이 늘 말썽이었다. 불가지론도 아닌데, 불가지론에 반대하는 그 무엇도 아닌.

   

불가지론이 아닌 입장은 셋이다.

   

하나, 완전한 이론이다.

   

둘, 완전하지는 않지만, 미래에는 완전하게 될 것이다.

   

셋, 완전하지 않고 미래에도 완전하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커서 완전함을 미래로 도피시킬 수도 없이 임기응변용 이론이다.

   

인드라 길은 둘째와 셋째 사이의 고민이다.

   

추신 : 2부로 가자. 술을 많이 먹었다. 미안하다.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19 : 칠레 아옌데 정권은 국유본의 하수인 정권이었다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1/11/28 04:19

http://blog.naver.com/miavenus/70125176419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19 : 칠레 아옌데 정권은 국유본의 하수인 정권이었다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1/11/28

   

1. 차코 전쟁과 태평양 전쟁

   

1936년에 아르헨티나 카를로스 사베드라 라마스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한다. 1973년 이전까지 노벨상은 로스차일드 권한이었다. 수상 이유는 차코 전쟁 종식에 기여했기 때문이다. 차코 전쟁이란 20세기 전반에 파라과이와 볼리비아 사이에서 치룬 전쟁이다. 남미에서 발생한 전쟁 중 규모가 제법 큰 전쟁이었다. 원인은 석유였다. 차코 지역에 유전이 발견이 되면서 국유본 내부에서 이해 관계가 엇갈려 전쟁을 치르게 된다. 1920년대 록펠러는 남동부 유전지대 100만ha에 걸친 스탠더드오일의 권리 취득으로 로스차일드를 능가했다. 해서, 로스차일드는 차코전쟁에서 파라과이를 지원하고, 록펠러는 볼리비아를 지원하여 대리 전쟁을 치뤘다. 결과는 로스차일드의 승리와 록펠러의 패배였다. 해서, 파라과이의 영토는 늘어났고, 볼리비아의 영토는 독립 당시의 3/5으로 줄어들었다.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시기에 록펠러가 로스차일드에게 대들 수는 없으니 그렇다고 그냥 물러나자니 밑의 사람들 체면이 있고 해서 업자가 공무원한테 고스톱을 쳐서 져준 격인 게다.  

   

헌데, 차코 전쟁이 남미에서의 영미 대리전 처음이 아니었다. 1873년 아타카마 지역 영유권을 놓고 칠레와 볼리비아 페루 연합군이 전쟁을 벌였다. 이때, 영국은 칠레를, 미국은 볼리비아/페루를 지원했는데 사실 이 시기 미국 해군력이란 별 게 아니었으므로 해군력이 월등한 칠레가 이겼다. 이를 태평양 전쟁이라 한다. 예서, 고려해야 할 점은, 당시 유럽인은 기후가 좋은 남미 남부인 칠레, 아르헨티나, 브라질, 파라과이, 우루구아이 같은 나라에 상대적으로 많이 살았다.

   

하면 전쟁 이유는 무엇인가. 초석 때문이었다. 초석은 당시 화약과 비료 생산에 필수적이었다. 다만, 1차 대전 이후 초석없는 화약 개발로 초석 산업은 쇠퇴했다.

   

이때, 남미 상황을 잠시 살펴 보자. 19세기에 이르러 스페인 국력이 쇠하여 해외 식민지를 더 이상 지배할 수 없자 남미 국가들이 연이어 독립했다. 허나, 경제적인 여력이 없다 보니 대다수 국가들이 대부분 백 년 이상 영국의 경제 지배, 정확히는 국유본의 금융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때, 이들 나라에서 영향력을 발휘한 이들은 누구인가. 스페인에서 추방당한 유태인 일부가 남미에 정착하였는데, 이들이 가톨릭 개종 유태인이었다. 처음에 이들은 자신이 유태인이라는 것을 숨겼다. 허나, 로스차일드가 세계를 장악하면서부터 오히려 유태인이라는 것이 출세의 표지임을 인지하고, 사돈의 팔촌까지 따져가면서 유태인임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러던 것이 이차대전 이후에는 아예 상류층의 표지가 되었다고나 할까.

   

아무튼 지배 방식은 간단했다. 칠레만 봐도 알 수 있다.

   

하나, 재정난에 시달리는 각국 정부는 채권을 발행한다.  

   

둘, 각국 채권값이 전쟁, 경제난, 천재지변 등으로 폭락한다.

   

셋, 국유본이 싼 값에 채권을 사들인 뒤 해당 국가의 광산을 헐값에 매입한다.

   

해서, 태평양 전쟁 결과, 1881년 대부분 초석 광산은 영국인 존 토머스 노스의 것이 되었다.

   

이처럼 구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칠레는 세계 구리 매장량의 38%를 차지한다. 그만큼 생산량도 세계 톱수준이다. 2009년 칠레 전체 수출액은 22억 2900만 달러. 이 가운데 광산물 비중이 6억 4000만 달러나 되고 그 중 절반 가량을 구리가 차지한다. 칠레 구리 국영회사는 2006년에 정부 재정 수입의 15%를 차지했다. 이런 나라에 국유본이 관심을 보이지 않을 수 없다.

   

2. 귀금속은 로스차일드, 석유는 록펠러

   

하면, 구체적으로 국유본 누가 큰 관심을 보이나. 전 세계 다이아몬드, 우라늄, 금, 은, 동, 철광산은 런던 금속거래소를 장악한 로스차일드 가문 지배하에 있었다.

   

 http://www.kokoent.com/sub06/sub06_04.asp

   

회사들이 여럿 있는데, 추적하면 다 로스차일드로 귀결한다~!

   

칠레 상황을 살펴 보자.

   

1904년 브레이든 회사가 엘테니엔테 구리 광산을 소유하고 있었다. 헌데, 1917년 케네콧사는 유태인 광산재벌 구겐하임 페밀리인 브레이든에게서 구리 광산을 사들인다. 하면, 케네콧사는 무슨 회사인가. 알래스카 광산 개발 때문에 구겐하임과 모건이 합작한 회사이다. 해서, 1920년에 보면, 브레이든 구리 회사와 안데스 구리 회사, 광물탐사회사가 있었는데, 브레이든 구리 회사는 모건-구겐하임 회사이고, 안데스 구리 회사와 광물탐사회사는 아나콘다 회사인데, 아나콘다는 록펠러 회사였다.

   

이처럼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칠레 광산은 로스차일드 지배를 받는 모건과 록펠러 양대 회사로 움직였다. 왜 로스차일드 지배를 받는가. 유통을 장악했으니까~!!! 가격 폭락시키면, 생산 회사 문닫는다^^! 하면, 그냥 하나의 기업으로 하지, 둘로 나누나? 이것이 국유본 특유의 지배 방식이다. 독점을 피해야 하니까. 왜 직접 지배를 하지 않나? 1차, 2차 대전을 거치면서 로스차일드 권력이 여전히 세계 최강이지만 관리할 지역이 광대하므로 아메리카 대륙에 대해서는 미국에 의한 대리 통치 방식을 썼기 때문이다. 가령 유라시아는 소련이, 아메리카는 미국이, 아시아는 중국과 일본이, 아프리카는 영국과 프랑스가 하는 제국주의 통치 방식이다.

   

3. 민족해방운동은 국유본의 치밀한 각본

   

이때, 1964년 칠레 기독민주당 에두아르두 프레이가 정권을 잡은 뒤 구리 생산/판매에 칠레 정부도 이권을 달라고 강력하게 요구한다. 이는 국유본에게 매우 중대한 도전이었다. 1930년대 공산좌파 급진주의 군사 정권이 들어섰을 때도 없던 일이었다.

   

하면, 이것은 우연인가. 아니다. 전 세계 민족해방운동은 국제유태자본이 유포한 것이다. 인드라가 강조한 대로 미국 독립은 국유본의 아웃 소싱 전략이다.

   

아웃 소싱이란 뭐냐. 사내 정규직 노동자를 자영업자로 만들어서 사실상 고정 비용화한 인건비 비용을 감축시키면서 효과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다. 이처럼 국유본이 식민지 국가를 독립 국가로 만든 뒤 식민 경영 비용을 절감하면서 그 이득을 그대로 취하는 전략이 아웃소싱 전략이다.

   

하면, 이에 바탕한 아웃소싱 전략이란 무엇이냐.

   

하나, 국유본은 경쟁 초기에는 독점 지위를 따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독점을 따낸다.

   

둘, 독점을 따낸 뒤에는 제반 여건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든 후에 독점을 풀고, 시장을 개방하되, 모든 세력과 연계를 한다.

   

셋, 최종적으로는 런던귀금속거래소, 국제결제은행과 같은 네트워크로서 시장을 지배한다.

   

1차로 미국 독립이 있었다. 2차로 세계 제국주의 시대를 1850년대에 결정했으며, 1870년대 이후 본격화했다. 이때, 일본 등은 늘 재정적자에 시달리면서 전쟁하고, 또 전쟁해야 했다. 그 일본 국채는 대부분 국유본이 소유하고~! 즉, 일본은 국유본 군함으로 침략 전쟁하고, 국유본 기계로 의류 등 제품을 생산하고, 국유본 금융으로 자금을 조달했던 것이다. 3차가 시온의정서가 등장한 이후 이스라엘 독립까지 시기이다. 사회주의 국가들 역시 국가 재정난 때문에 절대적으로 국유본에 의존해야 했다. 4차가 1960년대 이후 아프리카, 아시아, 남미 민족주의 시대였다. 해서, 이들 독립한 국가들은 재정 마련을 위해서 전쟁을 하거나 아니면 자신이 가진 자원을 팔아야 했다. 세계 최대 우라늄 광산을 보유한 북한이 영국에 회사를 상장하여 자금을 조달하는 것이 예다. 허나, 이것이 바로 국유본의 일타 삼피 전략인 게다. 이건, 머리 나쁜 뽀그리가  무력하게 당할 것이니 인드라가 한반도 통일이 될 때까지 비밀로 하겠다~!!!

   

해서, 겉보기에는 국유본에게 중대한 도전인 것 같지만, 국유본에게는 사실 계획한 시나리오였던 셈이다.

   

   

4. 아옌데 집권은 국유본 작품?

   

   

아옌데 집권 과정이 흥미롭다. 국유본이 선거에 개입해서 아옌데 집권을 저지할 수 있었다.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단지, 보수당 후보 둘을 연합시키면 결선투표제이기에 그만이었던 것이다. 헌데, 왜 국유본은 중립을 지켰을까. 선거 때 아옌데가 주된 이슈로 구리 광산을 국유화하겠다고 했음에도 말이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인 게다.

   

더 흥미로운 건, 아옌데 정권이 구리 국유화를 의회 표결에 붙였는데, 만장일치였다는 게다. 칠레 정당들이 모두 일치단결한다? ㅎㅎㅎ

   

5. 아옌데는 누구인가.

   

아옌데는 어머니가 유태인이다. 허나, 아옌데는 가톨릭 신자였는데, 집권 과정 중에는 가톨릭 교회와도 투쟁했다~! 아옌데는 정부 요직에 유태인들을 대거 기용했다. 이 시기 소련이 록펠러와 교역해서 돈 좀 벌 때인지 아옌데 정권에 5억 달러를 원조하기도 했다~! 역시 록펠러 덕분에 쿠바 쿠테타에 성공한 카스트로가 아옌데를 지원했다. 아옌데 경호원까지 보좌할 정도였단다.

   

집권까지는 국유본이 침묵 방조 오히려 지원하는 듯하더니 집권한 이후부터는 다양한 작전을 펼친다. 당근과 채찍을 구사하면서 얼을 빠지게 한다. 노조들이 들고 일어난다. 구리값이 폭락한다. 살인적인 인플레가 찾아온다. 시장에 상품이 자취를 감춘다.

   

국유화할 때 만장일치이더니 피노체트가 쿠데타할 때는 육해공 만장일치로 집권에 성공한다.

   

6. 넬슨 록펠러

   

"1930년대 중반 베네수엘라석유 개발 사업에 참여하게 되어 스페인어를 배우고 라틴아메리카 관련 업무를 담당했다. 이에 따라 그의 집안이 공화당과 관계를 맺었는데도 그는 민주당프랭클린 루스벨트 정권에서 국무부의 라틴아메리카 담당 차관보로 임명되었다. 해리 트루먼 정권에서는 국제개발 자문위원회에서 일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 시절에도 여러 부처에서 고위 공직자로 일하다가 1958년 뉴욕 주에서 주지사 선거에 공화당 소속으로 출마했다."

http://ko.wikipedia.org/wiki/%EB%84%AC%EC%8A%A8_%EB%A1%9D%ED%8E%A0%EB%9F%AC

   

예서 보듯 록펠러 가문이 남미에 얼마나 신경을 썼느냐 알 수 있는 것이다. 데이비드 록펠러 첫 직장 생활이 체이스맨해튼은행 쿠바 영업 담당이었듯 넬슨 록펠러는 베네수엘라 석유 개발이 시작이었던 게다. 아울러 넬슨 록펠러는 1950년대 미국 CIA 엠케이울트라(MKUltra) 사업과 관련이 있는 인물이다.

   

JP 모건이 죽었을 때, 지분을 조사하니 19%만 모건 몫이고, 나머지는 모두 로스차일드 지인들 몫이었다 했다. 그처럼 넬슨 록펠러더러 재산을 추궁하니 넬슨 록펠러 왈, 록펠러 자산은 로스차일드 대리인이 장악하고 있어서 구체적인 재산을 모른다고 답변했던 것이다.

   

이처럼 넬슨 록펠러가 활동한 1970년대까지는 로스차일드 시대였던 게다. 해서, 넬슨 록펠러는 원조 노비네파라고 할 수 있다. 1973년 국유본 권력이 데이비드 록펠러로 넘어갔을 때, 역설적으로 이에 가장 저항한 이가 넬슨 록펠러였으니 말이다.

   

공화당은 넬슨 록펠러, 노예민주당은 데이비드 록펠러. 이때, 넬슨 록펠러 롤모델은 빅터 로스차일드였다. 데이비드 록펠러에 비해 정치 활동을 더 선호했던 넬슨 록펠러였다.

   

넬슨 록펠러에 대한 혐의 중 하나는 닉슨을 무너뜨린 것이 넬슨 록펠러가 아니냐는 것이다. 닉슨이 재선하였을 때, 부통령으로 넬슨 록펠러를 지명하지 않았기에 이에 대한 보복으로 워터게이트를 일으킨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인드라 생각은 다르다. 부통령 지명하려면 1968년 선거 때부터 해도 되었다. 넬슨 록펠러는 언제나 2인자였으니까. 또한, 부통령 지명하지 않아서 닉슨을 실각시켰다면, 닉슨 재선 선거 때부터 훼방을 놓아야 했다. 허나, 닉슨은 미국 선거 역사상 압도적으로 재선에서 승리했다.  

   

워터게이트는 미국 공화당/노예민주당 체제를 이어가려는 국유본 기획이라고 본다. 이 시기 노예민주당이 존폐 위기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빅터 로스차일드는 영국처럼 노예민주당을 없애고, 노동당과 같은 제 3의 정당을 고려했던 반면, 데이비드 록펠러와 국유본 귀족들은 반대했던 것이다.

   

넬슨 록펠러가 복상사로 1979년에 박정희보다 이른 시기에 죽었다. 암살이 유력하다.

   

7. 헨리 키신저

   

이차대전 때 장군 운전병으로 운 좋게 출세하여 1950년대부터 CFR에서 활약했다. CFR에서 교육받은 대로 원자력 관련 논문을 발표하여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이때, 원자력하면 빅터 로스차일드이다. 아이큐 180을 자랑하는 빅터 로스차일드는 MI5에서 활약하면서 세계 톱수준 원자력 전문가로 성장했다. 하고, 빅터 로스차일드는 원자폭탄 관련 정보를 소련에 넘겼고, 후일 소련은 이를 간접적으로 시인했다.

   

빅터 로스차일드는 원자폭탄을 이용하면 미소 냉전체제를 안정화시킬 것으로 보았는데, 이를 실천한 이가 헨리 키신저였다.

   

흔히 헨리 키신저는 록펠러 사람이라고 한다. 과연 그런가.

   

http://en.wikipedia.org/wiki/Hollinger_International

   

http://en.wikipedia.org/wiki/Conrad_Black

   

홀링어 언론그룹과의 유착관계에서 보듯 헨리 키신저는 록펠러 사람이라기 보다는 록펠러와도 거리를 유지한 인물로 보인다.

   

다시 말해, 넬슨 록펠러가 말한 듯, 로스차일드 대리인 중 하나가 헨리 키신저였던 것은 아닐까.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로스차일드와 갈등을 빚던 국유본 귀족 대리인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헨리 키신저는 이후 삼각위원회에도 들어간다.

   

헨리 키신저가 닉슨 정부로 들어간 과정도 흥미롭다. 선거 때, 헨리 키신저가 일면식도 없는 닉슨에게 연락했다. 정보를 넘겨주는 대신 선거팀에 합류하겠소. 닉슨은 즉각 환영했다. 헌데, 우습게도 헨리 키신저는 닉슨 상대 노예민주당 후보에도 접근했다. 닉슨 선거 정보를 모두 알려주겠소. 노예민주당 후보도 환영했다. 결국 헨리 키신저 입장에서는 누가 당선되어도 좋았던 것이다.

   

헨리 키신저가 넬슨 록펠러의 사람이 아니라 넬슨 록펠러를 지배한 것이 헨리 키신저가 아니었을까. 그러다가 오늘날 노비네파를 대표하는 인물이 된 것이다.

   

8. 1976년 피노체트 정권에서 구리광산 국유화하다

   

헨리 키신저와 넬슨 록펠러가 국무부장관과 부통령으로 있던 시절인 1976년 피노체트 정권에서 록펠러 아나콘다 광산 지분이 국유화한다. 이 얼마나 흥미로운 사실인가.

   

하면, 나머지는? 원상 복귀!

   

아나콘다 국영 광산보다 더 생산량이 많은 에스콘디다 (Escondida) 광산은 누구 소유인가. BHP Billiton이다. 따지고 들어가면, 앵글로아메리카 회사와 연결이 되고, 로스차일드로 귀결되는데, 오늘날 보자면, 국유본 귀족 소유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이들 지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다이아몬드 제국' 주인 바뀐다

[중앙일보] 입력 2011.11.08 00:19 / 수정 2011.11.08 00:19

광산 재벌 오펜하이머 가문, 드비어스 지분 40% 앵글로아메리칸에 넘겨

어니스트 오펜하이머(左), 니컬러스 오펜하이머(右)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광산 재벌 오펜하이머 가문이 '다이아몬드 제국' 드비어스 경영에서 손뗀다. 그들의 투자회사인 'E 오펜하이머&선 인터내셔널'은 드비어스 지분 40%를 51억 달러(약 5조7100억원)에 글로벌 광산회사인 앵글로아메리칸에 넘기기로 했다고 6일(현지시간) 발표했다. 드비어스는 세계 다이아몬드 시장 30%를 차지하고 있다. 러시아의 광산회사인 알로와 함께 시장 점유율 공동 선두다.

   

제임스 티거 오펜하이머 가문 대변인은 월스트리트 저널(WSJ)과의 인터뷰에서 "한 시대가 막을 내렸다"며 "이번 결단은 역사적이면서 감회가 남다른 사건"이라고 말했다. 이어 "우리는 지분을 판 돈으로 아프리카 기업 5~10곳에 투자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독일 유대계인 오펜하이머 가문은 80여 년 동안 드비어스를 지배했다. 3대에 걸친 경영권 장악이었다. 애초 드비어스는 오펜하이머 가문에 의해 설립되지 않았다. 독일 유대계 금융자본인 로스차일드의 자금 지원을 받은 세실 로즈에 의해 1871년 세워졌다.

   

하지만 사내 갈등으로 경영권이 1927년 어니스트 오펜하이머에게 넘어갔다. 이후 드비어스는 비약적으로 성장해 한때 세계 다이아몬드 시장의 70%를 장악하기도 했다. 이를 유지하기 위해 오펜하이머 사람들은 아프리카 등 제3세계 독재자나 군벌과 검은 거래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데 앵글로아메리칸도 오펜하이머 가문과 밀접한 관계다. 어니스트 오펜하이머가 드비어스 경영권을 차지할 때 앵글로아메리칸을 동원했다. 그는 1917년 미국 투자은행이면서 로스차일드의 경쟁자인 JP모건의 투자를 받아 앵글로아메리칸을 세웠다. 이후 이 회사는 드비어스의 지분을 야금야금 사들여 결정적인 순간에 오펜하이머의 경영권 장악을 지원했다.

   

현재 드비어스의 회장 겸 최고경영자(CEO)는 어니스트 오펜하이머의 손자인 니컬러스 오펜하이머다. 니컬러스는 앵글로아메리칸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지만 직접 경영에 참여하고 있지는 않다. 결국 앵글로아메리칸은 거의 100년 만에 드비어스를 완전히 장악하게 된 셈이다. 지분이 무려 85%나 되기 때문이다.

   

WSJ에 따르면 앵글로아메리칸 쪽은 "중국과 인도 부유층이 금에 이어 다이아몬드에 눈을 떠 높은 수익이 기대된다"며 "아주 훌륭한 지분 인수"라고 자평했다."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6609527&cloc=olink|article|default 

   

오펜하이머 가문이 드비어스사를 앵글로아메리칸 회사로 넘긴다는 게다. 하면, 앵글로아메리칸 회사는? 오펜하이머가 드비어스를 인수하기 위해 모건과 합작한 회사이다^^!  

   

"일본 미쓰비시 상사가 10일 자원 메이저인 영국의 앵글로 아메리칸으로 부터 칠레의 동(銅) 광산 운영회사의 주식 24.5%를 53억9천만 달러(4천200억엔)에 취득했다고 닛케이가 보도했다.

   

이번 거래는 일본 기업의 해외 광산 취득중 최대 규모로 꼽힌다.

   

미쓰비시는 앵글로 아메리칸이 전액출자한 자회사로 칠레에 여러개 동광산과 제련소를 갖고 있는 '앵글로 아메리칸 수르(Sur)'의 주식을 사들인 것이다.

   

앵글로 아메리칸 수르가 소유하고 있는 로스브론세스 동광산은 현재 진행중인 확장공사가 종료되는 2012년에는 그 생산량이 연 50만t으로 세계 5위의 규모가 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미쓰비시로서는 동 생산량이 현재 연 14t에서 연 25t으로 증가하면서 일본 상사들 가운데 최대지위를 확고히 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앞서 스미토모(住友)상사가 스미토모금속광산과 공동으로 지난 5월 1천억엔에 칠레의 동광산권익의 45%를 취득하기로 합의했다.

   

마루베니(丸紅)는 2008년 2천억엔을 투자해 칠레의 한 자원회사가 갖고 있는 광산운영회사에 3할을 투자해 연내에 에스페란자 동광산에서 본격적인 생산이 시작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01&aid=0005365541

   

"영국에 본사를 둔 광산기업 앵글로아메리칸과 칠레의 국영 구리회사 코델코가 일전을 불사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앵글로아메리칸이 칠레의 자회사인 앵글로아메리칸 수르 SA(AAS) 지분 24.5%를 일본 미츠비시 상사에 매각하겠다고 하자 코델코가 반격에 나선 것이다. 코델코는 AAS의 지분 49%를 저가에 매수할 수 있는 권리를 행사하겠다고 선언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11일 두 회사의 법률 분쟁이 자원민족주의가 확대되는 시점에 세계 최대 구리 생산국에서 벌어지는 줄다리기라며 이같이 보도했다.

   

앵글로아메리칸은 10일 칠레 AAS의 지분 24.5%를 53억9000만 달러에 매각했다고 밝혔다. 이는 코델코가 1978년 맺은 옵션협정에 따라 동일 회사 지분 49%에 대해 지급하려고 한 금액보다 웃돈을 크게 얹은 금액이다.

   

엑슨 미너럴스 칠레는 지난 1978년 엠프레사 나시오날 데 미네리아에 옵션을 부여했으며 엠프레사는 이를 2008년 코델코에 양도했다.3년마다 행사할 수 있다.

   

매각소식이 전해지자 게라르도 조프레 코델코 이사회 의장은 이날 칠레 수도 산티아고에서 앵글로아메리카는 옵션협정이 대상으로 하고 있는 자산의 일부 혹은 전부를 우선매각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믿는데 이는 "이치에 닿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그는 이어 "코델코는 앵글로측이 보유한 51%의 지분을 파는 것은 전혀 반대하지 않는다면서도 코델코가 사려는 49%는 손을 대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디에고 에르난데스 최고경영자(CEO)는 상담차 방문했던 하와이에서 이날 산에티아고로 급거 귀국,법률 공방을 이끌고 있다.

   

AAS는 칠레에 노천광산인 로스 브론세스 구리광산과 엘 솔다도 구리광산, 차그레스 구리제련소를 보유하고 있으며, 두 회사가 거론하는 '자산'은 로스 브론세스 구리광산이다.

   

코델코가 지난 10월에 밝힌 자료에 따르면 AAS는 지난 해 45만t의 구리를 생산했다.

   

앵글로아메리칸측은 AAS가 지난해 13억 달러의 세금이자지급감가상각전 이익을 남겼다.

   

앵글로아메리칸은 로스 브론세스 광산의 생산량을 두배로 늘리기 위해 28억 달러를 쏟아부는 등 1980년 이후 65억 달러를 투자하고 1만 여명의 칠레인을 고용하고 있다.

   

애널리스트들은 앵글로측이 이 옵션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거나 코델코가 자금을 조달할 것으로 기대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코델코는 과거에도 두 차례 지분을 사들이려고 했으나 실패했으며, 옵션 행사시기인 내년 1월 옵션을 행사할 것이라고 밝혀놓았다.

   

앵글로아메리칸의 신시아 캐럴 CEO는 이번 분쟁을 외국인투자에 대한 칠레의 개방정도를 재는 시금석으로 간주해왔다. 그녀는 이날 산티아고에서 FT와 가진 인터뷰에서 "칠레 정부도 국제사회가 이번일을 면밀히 관찰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 것"이라면서 "우리는 주요한 외국인 투자자"라고 말했다.

   

앵글로아메리칸측은 이날 보도자료를 통해 이번 지분매각은 옵션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날 이전에 어떤 때라도 AAS의 지분을 매각할 수 있도록 한 옵션협정의 규정을 충분히 준수했다고 밝혔다.

   

그녀는 "서로 위협할 게 아니라 대화를 해야 한다"면서 "우리는 코델코측에 나머지 24.5%를 사라고 말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코델코측은 앵글로측에 밀려 적은 지분을 매입할 생각은 전혀 없다며 물러서지 않고 있다. 조프레 의장은 "코델코의 권리,나아가 칠레인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말했다."

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1111115031173728

미쓰비시는 일본 대표적인 뉴라이트 기업이다. 앵글로아메리카가 미쓰비시에 칠레 동광산을 넘긴다?

   

   

정준양 회장, 포스코패밀리 위기관리 강화해야

   

포스코 (353,000원

7000 -1.9%)가 일본 미쓰비시상사로부터 호주 철광석 개발 및 항만·철도 인프라 사업권의 지분 매입을 검토하고 있다고 로이터가 24일 포스코 관계자를 인용해 보도했다.

   

미쓰비시상사는 제휴회사인 호주 금속업체 머치슨메탈스의 잭힐스 지역 철광석 개발 및 오카지 지역 항만·철도 인프라 개발 사업권을 3억1500만 달러(약 3600억원)에 매입하기로 합의했다.

   

포스코 관계자는 포스코가 미쓰비시상사와 이같은 사업들에 대해 협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다양한 옵션을 고려할 것"이라며 ""여전히 시간이 있고 미쓰비시상사측과 협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포스코는 14% 미만의 머치슨메탈스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 

http://www.mt.co.kr/view/mtview.php?type=1&no=2011112413064157526&outlink=1

   

뉴라이트 포스코는 미쓰비시 지분을 인수하고?

   

최종판?

   

"JP모건이 지난달 31일 파산한 MF글로벌의 런던금속거래소(LME) 지분을 인수해 LME 최대 주주로 등극할 전망이다.

   

MF글로벌이 보유했던 LME 지분 전량을 JP모건이 매입하기로 합의했다고 로이터 통신이 MF글로벌의 영국 부문 자산 관리를 맡고 있는 KPMG를 인용해 23일(현지시간) 보도했다. KPMG는 JP모건이 경쟁 입찰을 통해 LME 지분을 인수하게 됐다고 설명했으며 매각 가격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통신은 복수의 관계자들을 인용해 MF글로벌이 보유했던 LME 지분 4.7%를 JP모건이 2500만파운드에 인수키로 했다고 전했다. 관계자들에 따르면 JP모건은 LME A주식 60만주를 2500만파운드에, B주식 2만5000주를 200만파운드에 인수할 것으로 알려졌다.

   

JP모건은 이미 LME 지분 6.2%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추가로 MF글로벌이 보유했던 지분을 매입하면 총 10.9%로 골드만삭스를 제치고 LME 최대 주주에 등극할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골드만삭스의 LME 지분율은 9.5%이다.

   

특히 LME가 현재 매각을 추진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번 JP모건 체이스의 LME 지분 인수는 주목을 끌고 있다. JP모건이 LME의 지분 4.7%를 인수한 금액을 감안하면 JP모건은 LME의 전체 지분 가치를 약 5억3000만파운드로 계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앞서 LME의 마틴 애보트 CEO는 LME 인수에 관심을 보인 곳이 10곳이 넘는다고 밝힌 바 있다. MF글로벌의 영국 자산 관리를 맡고 있는 한 관계자도 이번 MF글로벌의 LME 지분 매각이 대단한 관심을 끌었다고 설명했다.

   

한편 LME 주식 B주를 보유한 주주들은 LME에서 거래할 수 있는 권리를 보유하게 되며 LME의 다른 주주들에게 B주를 매각할 수도 있다. JP모건은 이미 LME B주도 보유하고 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277&aid=0002701969

   

   

이번 금융 위기는 뉴라이트가 진행했다고 했다. 해서, 그 결과로 국유본 지분 중 뉴라이트 지분 상승을 예상할 수 있다. 동시에 노비네파를 유지하겠지만, 내용적으로 달라지는 것이다.

   

오펜하이머 가문에서 록펠러의 JP모건으로 바뀐다. 이런 것은 액면 그대로 보아야 한다.

   

반면, 아시아 기업이 국유본 지분을 인수했다 같은 건 명의만 바꾼 것일 뿐이다. 중동 자본, 한중일 아시아 자본이 국유본 지분을 인수했다는 건, 국유본 대리인들이 차명계좌를 쓰고 있다 이렇게 보면 된다.

   

9. 국유본, 칠레 구리 광산에서 해법을 찾다?

   

석유 공급 과잉으로 1970년대 유가는 배럴당 1달러 간신히 넘는 지경으로 하락해 있었다. 이때, 3차 중동전쟁이 일어나면서 중동 석유자원국들이 원유 국유화를 선언한다. 이로 인해, 유가가 순식간에 4배나 뛰었다. 하고, 미국은 원유 결제를 달러로 했다.

   

생산과 유통 과정을 장악한 국유본이다. 중동 석유자원국들이 말을 안 들으면 언제든 칠레와 같은 타격을 가할 수 있음을 칠레가 보여주었다. 중동 석유자원국들이 석유 가격을 유지하려해도 국유본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석유 가격을 폭락시킬 수 있다. 그만큼 급등시킬 수 있다.

   

오늘날 이런 시도들은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가령 칠레 구리광산 노동자의 파업 소식이다.

   

"국제 구리 가격 상승 우려

세계 최대의 민간광산인 칠레 에스콘디다 구리광산 노동자들이 무기한 파업에 돌입해 국제 구리값 상승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http://economy.hankooki.com/lpage/worldecono/201107/e2011072518155469760.htm

   

파업/전쟁/국유화 소식은 이제 귀금속 가격 하락을 유도하는 것이 아니라 가격 상승 요인으로 변모했다. 이는 구리광산 파업에 국유본이 개입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정녕 파업을 무산시키고자 하면 가격 하락을 시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는 오늘날 각종 파업에도 기준을 세울 수 있다.

   

특정 파업에 대해 국유본 언론이 호들갑을 떨며 보도를 요란하게 하면, 국유본이 개입하되, 파업 승리를 요구하는 것이다. 반면, 파업했음에도 국유본 언론이 외면하면, 국유본이 개입했지만, 파업 실패를 예정하는 것이다.

   

오늘날, 국유본 언론은 어떠한가. 내일 무슨 무슨 데모가 있다고 미리 다 이야기한다. 결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마치 시위나 데모에 꼭 나와달라는 세뇌 과정인 게다.

   

해서, 내일은 시위와 데모에 관한 국유본 이야기를 할까 한다.

   

국유본이 광우병이나 FTA 반대 시위나 데모에 개입해서 얼마나 인간을 세뇌시키는가 하고 말이다.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18 : 빅터 로스차일드, 펜타곤 문서, 베트남, 케네디, 데이비드 록펠러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1/11/27 01:43

http://blog.naver.com/miavenus/70125101773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18 : 빅터 로스차일드, 펜타곤 문서, 케네디, 데이비드 록펠러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1/11/27

   

인드라 이야기는 전 세계에서 오직 인드라에게서만 들을 수 있다.

국유본과의 전쟁에서 운때가 맞지 않아 인드라 패배로 귀결하겠지만,

역사는 인드라를 반드시 기억할 것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백 년 뒤에 세상은 지금과 전혀 다른 세상일 것이다.

- 인드라 혁명 원년 2011년 11월 27일

   

히로세 다카시의 '제 1권력'이라고 있다.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었다. 책을 보내드릴 터이니 서평 부탁한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인드라는 이런 쪽발찌라시 한걸레 같은 책장사를 혐오한다. 그 출판사가 국유본 간첩 회사라고 단정짓지는 않겠다. 지금 인드라한테 많은 분들이 자신의 저서나 혹은 인드라가 읽어주었으면 하는 책들을 보내주셨는데, 어떤 건 인용하고, 어떤 건 인용하지 않고 있다. 허나, 인드라가 언젠가는 말할 것이다. 이런 조건 없는 책 선물은 받는다. 허나, 대가성이 있는 건 거부하겠다. 이를 전제하고, 다른 음모론 저자처럼 히로세 다카시도 국유본 첩자라고 인드라는 보고 있다. 잊지 마시라. 세상에 나온 음모론 책자는 대부분 국유본이 만든 것이라고. 짐 마스는? 그도 예외일까~! 뉴욕타임즈 칼럼니스트였거든~! 아무튼 관련 책을 읽어보았는데, 입문서로 괜찮은 편이다. 다만, 이 책은 의도를 지니고 있다. 이 책이 나올 80년대 중반은 빅터 로스차일드와 록펠러간의 아마겟돈 전쟁이 있었다. 이런 시기에 히로세 다카시가 로스차일드를 쑥 뺀 채 모건과 록펠러만 공격한 이유는 무엇일까~! 히로세 다카시, 이 씹색희는 로스차일드 간첩이었던 게다~ ㅋㅋㅋ 그러다가 빅터 로스차일드가 죽으니까 그제서야 자신의 오류를 인정한다는 쓸 데 없는 헛소리를 지껄이면서 붉은 방패란 책을 낸 게다. 하면, 왜 이때 쪽발이 색희들이 난리부르스였던 것일까. 쪽발이 색희들은 자신들을 오늘날 먹고 살게 해주신 분이 로스차일드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게다. 지금도 쪽발이 주류는 로스차일드 파이다. 즉, 노비네파이다. 해서, 노비네파 미쓰이 혹은 미쓰이스미모토 계열이 일본 중심이다. 지난 번 일본 전범 기업에서 왜 미쓰이가 빠진 것인지를 잘 생각해야 한다. 타격 대상은~! 그렇다. 뉴라이트파 미쯔비시인 게다. ㅋㅋㅋ. 일본이 흥한 건 오직 로스차일드 어르신이라고 생각했던 게다. 그런 로스차일드 가문이 록펠러 가문에게 밀리자 일본이 망하는 것 아니냐 싶어서 굉장히 불안해했던 것이다. 이때, 쪽바리 나라에서 졸라 음모론 책자들 많이 나왔다. 하고, 다른 음모론 책자와 달리 이 책 서평하는 언론사 잘 살펴야 한다. 인터넷에도 다른 음모론 책자는 멀리 하면서 이 책만 들입다 파는 병쉰색희들이 있는데, 이 병쉰색희들도 주의해서 보아야 한다. 하여간, 쪽발이 색희들, 특히 원자폭탄 반대 운동가 뭐 이런 쪽발이 색희들은 99% 이상 국유본 첩자라고 인드라는 보고 있다. 하고, 쪽바리 반전반핵 데모 따위에 참여하러 한국 병쉰색희들이 가는데, 이 색희들 국유본 간첩 교육받으러 간다고 인드라는 보고 있다 ㅎㅎㅎ.  하여간 이런 점을 감안하고, 쪽발이 색희 책을 읽을 필요가 있다. 단, 적의 책을 읽을 때는 긴장하고 읽어야 한다. 진실 78 : 거짓 22을 잘 섞어놓았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펜타곤 문서를 폭로한 대니얼 엘즈버그는 원조 골드만파~!

   

대니얼 엘즈버그하면 잘 모를 것이다. 허나, 워터게이트와 관련이 있는 인물이라고 하면 어엇? 할 것이다.

   

"시카고 출생. 하버드대학교를 졸업하고 케임브리지대학교에 유학, 게임이론을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랜드 연구소(RAND:Research and Development Corp.)·대통령 직속기관(Executive Office of the President)·국무성에서 정책연구를 하였다. 1965년부터 베트남 근무를 통하여 미국의 베트남정책에 비판적 자세가 되어 1971년 베트남전쟁 개입 과정에 관한 국방성의 비밀문서를 폭로함으로써 반전(反戰)을 여론에 호소하였다. 이후, 군축(軍縮)에 관한 연구에 종사하며, 평화운동에도 참가, 반핵(反核) 데모의 선두에 섰다가 체포되기도 하였다. 여러 평화단체로부터 상을 받았다. "

[출처] 대니얼 엘즈버그 [Daniel Ellsberg ] | 네이버 백과사전

   

http://en.wikipedia.org/wiki/Daniel_Ellsberg

   

이름에서 풍기듯 유태인 집안이되, 유대교에서 사이언스 종교로 바꾸어서 명색은 유태인이 아니다~! 본론으로 가자. 대니얼 엘즈버그가 폭로한 '펜타곤 문서'는 베트남 전쟁 이면을 폭로한 문서이다. 해서, 한국에서 베트남 전쟁에 대해 비밀을 말하기라도 하는 양 떠들어대는 기사들이나 글들 대부분은 사실 '펜타곤 문서'를 번역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단, 록펠러가 소련에 돈 대준 것 이런 이야기는 없다~! 엄청난 폭발력을 지녔기에 오늘날 뉴라이트 어산지 위키리크스와 비교를 곧잘 하는 것이다.  왜 엄청난 폭발력인가. 짜고 치는 고스톱이든, 아니든, 닉슨이 대니얼 엘즈버그가 다니던 정신과 병원을 도청하는 데서 워터게이트가 진행하였으니까.

   

하면, 대니얼 엘즈버그는 누구냐. 하버드 대학을 나오고 케임브리지 대학 유학했다. 1973년 이전까지 하버드 대학을 나왔다면, 친영국파라고 보면 된다. 여기에 로즈 장학생이면 무조건이다. 1973년 이전까지 미국은 영국의 식민지였으니까. 해서, 1973년 이전까지 미국 정치, 경제, 문화 모든 면에서 영국적인 것이 미국을 압도했다. 1973년에 빅터 로스차일드가 영국은 보통국가가 되었다라고 선언한 것을 잘 유념해야 한다. 국유본 귀족들이 대니얼 엘즈버그를 택한 건, 그가 유태인인 데다가 케임브리지 대학을 나왔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빅터 로스차일드잖아~! 잔인하게 복수하는 법이란 빅터 로스차일드와 같은 유태인, 같은 대학 출신이어야 효과가 만점이지 않겠는가. 아~ 이런 이야기는 대체 전 세계 인드라 말고 누구에게서 들을 수 있다는 말인가^^!

   

   

진도 나가자. 마이클 매클리어에 따르면, 대니얼 엘즈버그는 대학 때 헨리 키신저 제자였으며, FBI 국장 후버가 대니얼 엘즈버그 장인 친구였다. 랜드 연구소에서 근무했다. 헌데, 데니얼 엘즈버그가 골드만파 뉴욕타임즈에 문서를 전달하기 전에 먼저 전달한 이가 있으니 풀브라이트이다.

   

풀브라이트는 누구인가.

   

"미주리주(州) 출생. 농업재벌의 아들로 태어나 아칸소대학교를 거쳐 로즈장학생으로 영국 옥스포드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였다. 귀국 후 모교에서 법학교수로 재직하면서 19391941년 그 대학의 총장을 지냈다. 1942년 초선 하원의원으로 정계에 들어가자마자 국제연합 창설의 모태가 된 국제평화유지기구의 창설을 제안하였으며, 1945년 상원에 진출하여 1974년까지 상원의원을 지냈다. 1959년 이후 15년간 상원 외교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미국의 대외정책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또한 미국정부가 가지고 있는 잉여농산물을 외국에 공매한 돈을 그 국가와 미국의 문화교류, 특히 교육교환계획에 충당할 수 있도록 제안한 '풀브라이트법(法)에 의거, '풀브라이트장학금'을 확립함으로써 학자·학생의 국제교류를 위한 풀브라이트 교류계획의 창시자로서도 유명하다. 한국에는 1960년 그 지부가 설치되었다. 풀브라이트장학금을 받고 유학한 전세계의 지식인들은 1995년 현재 120여 개국 10여 만 명이며, 한국에도 1,000여 명에 이른다. "

<div class="autosourcing-stub-saved"> <div>[출처] 풀브라이트 [James William Fulbright ] | 네이버 백과사전</div></div>

   

빌 클린턴과 록펠러, 월마트의 공통점은? 아칸소^^!

   

풀브라이트는 남부 미주리주 농업 재벌 아들이다. 이는 노예민주당 정통파라는 이야기다. 종교가 성공회나 국교회이면 더더욱 정통파! 풀브라이트가 로즈장학생이다? 초선 의원으로 들어가자마자 국제연합 창설 모태가 된 국제평화유지기구 창설을 제안했다? 1945년에서 1974년까지 상원의원이다?

   

풀브라이트의 정체성은? 원조 골드만파로 분류할 수 있는 것이다. 즉, 빅터 로스차일드와 국유본 귀족이 함께 할 때는 다같이 빅터 로스차일드파, 혹은 빌더버그파였지만, 빅터 로스차일드와 국유본 귀족이 갈등을 빚자 빅터 로스차일드와 국유본 귀족 사이에서 중립적으로 변모한 것이다.

   

자, 이때, 왜 대니얼 엘즈버그는 골드만파 뉴욕타임즈 폭로 전에 풀브라이트에 먼저 사본을 보냈나.

   

간단하다. 국유본 귀족 의중을 물어보기 위함이었던 게다. 풀브라이트가 사본을 받고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것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 대니얼 엘즈버그의 쿠테타를 묵인한다는 것이다. 해서, 대니얼 엘즈버그는 쿠테타에 나서는 뉴라이트 전두환 장군의 심정으로 뉴욕타임즈 기자에게 원고를 보냈던 것이다. 

   

이제부터 빅터 로스차일드에 대한 쿠테타, 혹은 혁명을 시작한다!!!

   

하면, 빅터 로스차일드에 대한 국유본 귀족 쿠테타가 이번이 처음이었나? 아니다.

   

1964년이다. 1963년과 1964년은 1947년, 1973년만큼이나 중요한 해이다.

   

가령 빅터 로스차일드는 1963년까지 북한 김일성에게 군사력을 키우지 말 것을 지시했다. 419때 남침하지 못한 걸 아쉬워했다는 건 애비가 아편을 팔던 쪽발이인 김일성의 구라다. 허나, 1964년부터 빅터 로스차일드는 북한 김일성에게 군사력을 키워도 된다는 승인을 한다. 이후, 김일성은 미친 듯이 군사력을 키웠는데, 이것이 오늘날 북한 경제 패망의 결정적인 원인이다. 물론 요즘은 국유본이 다시 북한 경제를 키우고 있지만. 가령 2007년 영국에 북한 광산기업이 상장되어서 엄청난 돈을 북한이 벌었는데, 이 돈으로 지금 평양 정권이 평안도에 돈 엄청 쓰고 있는 것이다. 아는 사람만 알겠지만. 헌데, 광산하면 로스차일드이다. 세계 광산업계는 로스차일드가 쥐고 있는데, 최근 드비어스 예를 보듯, 차츰 록펠러가 진입하고 있다. 아무튼, 인드라는 이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평양 인민이라도 배불러야 중산층 수준의 민주주의 의식을 갖추고 뽀그리나 현대 성형예술의 총아, 정은이한테 대들어서 평양 탱크쇼를 보여줄 수 있으니까.

   

1964년에는 후르시초프가 실각하고, 통킹만 사건이 일어났다.

   

무엇보다 빅터 로스차일드가 1964년에 영국 정부로부터 간첩 혐의를 받고 심사를 받았다. 결과는 무죄였다. 허나, 이 사건 이후, 빅터 로스차일드는 영국 언론들로부터 잊혀질만하면 까였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빅터 로스차일드 케임브리지 친구들이 영국 정보부 등 주요 직책에 있다가 모두 소련으로 망명했다. 대표적인 인물은 조용한 전쟁이란 자서전까지 낸 킴 필비이다. 그럼에도 영국은 침묵했다. 왜? 로스차일드 가문이 만만한가? 로스차일드는 전후 이미지 복원을 위해 겉으로는 망한 척 꾸몄다. 이차 대전 때 히틀러 때문에 유럽에 투자한 돈을 다 잃었다. 또, 히틀러와의 전쟁에 가진 돈을 다 쏟아부어서 망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놓고서 오히려 빅터 로스차일드가 만든 것이 1954년 빌더버그였다. 겉으로 내세운 건 네덜란드 왕자였지만. ㅎㅎㅎ

   

헌데, 잘 참던 300인 위원회를 비롯한 국유본 귀족들이 왜 빅터 로스차일드에게 태클을 걸었나.

   

케네디 사건 때문이다. 1963년 11월 22일, 케네디가 암살을 당했다. 이것은 누가 한 일인가. 존 콜먼은 300인 위원회가 한 짓이라고 한다. 허나, 당대 MI5와 MI6을 장악한 이는 누구인가. 300인 위원회인가?

   

일단 MI5와 MI6을 알아야 한다. MI5는 미국 FBI이고, MI6은 CIA이다, 라고 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이때, 존 콜먼 주장대로 MI6이 케네디를 죽였다면, MI6 수장이 모를 리가 없다. 이때, MI6 수장이 누구인가. 딕 골드스미스 화이트이다.

   

"Sir Dick Goldsmith White, KCMG, KBE (20 December 1906 – 21 February 1993), was a British intelligence officer. He was Director-General (DG) of MI5 from 1953 to 1956, and Head of the Secret Intelligence Service (MI6) from 1956 to 1968.

   

White was born in Tonbridge, Kent and went to school at Bishop's Stortford College. He was athletic in his youth. He was described by Peter Wright as resembling David Niven: "the same perfect English manners, easy charm, and immaculate dress sense." He was, said Wright, "tall with lean, healthy features and a sharp eye".[1] Much as Wright liked White, he felt his move to MI6 was a mistake for both MI5 and MI6: "Just as his work [at MI5] was beginning, he was moved on a politician's whim to an organization he knew little about, and which was profoundly hostile to his arrival. He was never to be as successful there as he had been in MI5."[2] He was appointed Chief of the Secret Intelligence Service in 1956 in the wake of the "Crabb Affair", the exposure of which had damaged Soviet-British relations, and embarrassed MI6.[3]"

http://en.wikipedia.org/wiki/Dick_White

   

딕 골드스미스 화이트, 줄여서 딕 화이트는 빅터 로스차일드 사람이었다. 그런 까닭에 1953년부터 1956년까지 MI5에서 근무했다가 1956년부터 1968년까지 MI6을 책임진다. 이때, 딕 화이트를 유명하게 만든 사건이 무엇인가. 크랩 사건이다.

   

http://en.wikipedia.org/wiki/Lionel_Crabb

   

http://blog.dreamwiz.com/esprit72/5335250

   

크랩 사건이란 1956년 후르시초프가 영국에 왔을 때 기뢰 전문 첩보원 크랩이 사라진 사건이다. 공식적으로는 죽은 것으로 되어 있지만, 소련에서 기뢰 전문 교관으로 일하는 크랩이 등장한 바 있다. 헌데, 이 사건 담당자였던 MI5 딕 골드스미스 화이트가 영전해서 MI6 수장이 된 것이다~!

   

크랩 사건에서 보듯 빅터 로스차일드 황제는 자기 대에 신세계 질서를 보고야 말겠다는 집념을 보였다. 해서, 이 시기 유럽 좌파는 유럽 연방에 대찬성이었다. 빅터 로스차일드 보스가 공산주의자이니까^^!

   

허나, 국유본 귀족은 불안감을 느꼈던 것이다. 빅터 로스차일드 피에는 분명 엔키, 프로메테우스, 스파르타쿠스, 카이사르,  한니발,  한무제, 알렉산더, 나폴레옹, 징기스칸, 이순신, 패튼, 박정희, 호치민의 피가 흐를 것이다.

   

영웅의 탄생. 그것은 국유본 귀족에게 늘 끔찍한 기억이었다. 영웅이 탄생하면 그간 벌레만도 못했던 하층민이 갑자기 들고 일어나 국유본 귀족들을 압살한다. 막아야 하는 것이다. 카르타고가 쑥대밭이 되었다. 신세계 질서는 좋지만, 어디까지나 기득권을 보장하는 속도를 유지해야 한다.

   

허나, 빅터 로스차일드의 힘은 강했다. 당시 빅터 로스차일드에 관한 이야기가 여러 곳에서 나온다. 허나, 이는 모두 빅터 로스차일드가 조율한 작품인 게다. 빅터 로스차일드가 영국 정보부에서 일할 때를 묘사한 쑹훙빙 화폐전쟁과 같은 것을 보면, 공통점이 있다. 빅터 로스차일드는 조직에 힘겹게 대항하는 고독한 전사다. 즉, 골리앗과 맞서는 다윗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가령 빅토리아 여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바람둥이 에드워드 왕은 황태자 시절부터 유태인과 지나치게 친한 것 아니냐고 비판을 받았다. 예서, 유태인이란 뻔하다. 로스차일드이다. 이때, 에드워드 황태자 답변은 쿨했다. "뭐, 어때?" 빅토리아 여왕이 로스차일드 가문  영지를 방문했을 때다. 로스차일드 딸이 화원 관리에 만전을 기했는데, 빅토리아 여왕이 망쳤나 보다. 로스차일드 딸이 화를 내자 빅토리아 여왕이 여왕인 신분을 망각(?)하고 사과했다. ㅎㅎㅎ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저자가 옥스퍼드 대학 나온 수학자 넘인데, 혹 여기에 자존심에 상처를 받아 쓴 것이 아닐까 의심할 정도~!

   

정리하자. 로스차일드 가문 비법이 뭐냐. 절대로 자신이 강하다는 것을 내비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자신은 늘 언제나 위기 속에 놓인 양, 한 물 간 것인양 위장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모건과의 관계다. 음모론자들이 알다시피 모건 가문이란 로스차일드의 미국 지부에 다름 아니다. 허나, 이에 대해서 소위 안티 음모론자들은 당장 달려 든다. 처음에는 로스차일드의 하수인이었던 건 인정하지만, 이후 모건 가문은 이미 20세기 초에 로스차일드 가문을 압도했다고 말이다. 그 예로 드는 것이 1902년 영국 정부가 보어전쟁 때문에 국채를 발행해야 했는데, 이때 모건의 태도가 논란인 게다. 이 시기 모건은 영국 정부에 대해 로스차일드보다 더 높은 할인율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발끈한 로스차일드 가문이 모건 가문을 신디케이트에서 축출하려다 실패했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보면, 로스차일드가 드디어 끝났나 할 것이다.

   

과연 그럴까^^! 직후, 로스차일드 가문은 원탁회의를 개최하여 러일전쟁과 1907년 금융 공황에서의 모건 가문의 역할을 지시했다~! 모건이 과연 독자적으로 1907년 금융 공황을 처리할 수 있었을까~!

   

이는 기초적인 로스차일드 트릭이다. 대외적으로 로스차일드 가문이 약세인 양 처신하면 어떻게 되나? 영국 정부는 보호무역주의적 관점에서 미국 모건 가문보다 영국 로스차일드 가문에 더 편향적이게 되기 마련이다. 또한, 러시아 정부는 로스차일드에서 독립하였다고 보아 모건 가문과 좋게 지내려 애쓸 것이다. 이것이 물론 러시아 정부의 착각으로 나타나 러일전쟁 대패로 귀결하였지만.

   

이런 로스차일드 가문 약자 전략, 역분식회계 전략은 이차대전 홀로코스트에서 정점을 이루었는데, 왜 1960년대에 로스차일드 가문은 갑자기 호주 우라늄 광산 개발로 재기했다고 광고했을까. 그만큼 빅터 로스차일드가 위기에 내몰렸다는 것이다. 1964년, 로스차일드 3대 남작 이 큰 치욕을 겪는다. 위선의 대가, 로스차일드 가문도 더 이상 버티기 힘들 만큼 위기로 내몰리자 호주 우라늄 광산 개발로 나, 아직 안 죽었어, 하고 나온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약한 척, 착한 척, 고상한 척을 하던 로스차일드 가문이 '알고 보면 내가 세계 주인'이라고 나서자 위기는 본격화한 것이다.

   

빅터 로스차일드는 베트남 전쟁 지속을 결정했다.

   

예서, 록펠러 역할에 궁금할 분들이 많을 것이다. 록펠러가 관여한 사건이 더 많지 않은가 하고 말이다. 카스트로와 체게바라에 의한 쿠바 쿠데타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하고 말이다. 또한, 인드라가 강조한 박정희 516 혁명도 배후에는 록펠러가 더 개입한 것이 아니냐 할 것이다.

   

이에 대해 명확하게 말한다. 한국 전쟁에서 인력을 동원한 건 중국이지만, 김일성을 택하고, 김일성더러 전쟁 준비하라고 지시하고, 날짜까지 택일한 것은 소련 스탈린이다. 하고, 소련 스탈린은 빅터 로스차일드 지령에 순응했다. 그처럼 박정희 516 혁명이나 체게바라 쿠바 쿠데타에 직접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이가 록펠러일지라도 최종 결정은 빅터 로스차일드가 한 것이다.

   

1964년 후르시초프를 만나러 가는 록펠러 입장을 생각해보자.

   

아일랜드 계 조지프 케네디, 혹은 조셉 케네디를 키운 건 록펠러였다.

   

"편집] 은행장

매사추세츠 주 보스턴아일랜드계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가 아일랜드에서 미국으로 이민왔을 때는 매우 가난했지만 차츰 기반을 다져 나가면서 그의 부친 패트릭 조지프 케네디는 성공한 사업가가 되었고, 매사추세츠 주의회 의원으로 재직하기도 했다. 조지프 패트릭은 이러한 집안에서 비교적 유복하게 성장했지만 당시 미국 사회에서 아일랜드계 로마 가톨릭 교회 신자가 갖는 한계[1]를 느끼고 이를 깨고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자 하는 야망을 갖게 되었다. 1912년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했으며, 그 다음 해 빌린 돈으로 파산 직전인 지방 은행을 사들여 20대 중반의 나이에 은행장이 되었다. 조지프는 자신이 사들인 은행을 다시 살림으로써 금융계의 주목을 받았으며, 1914년 보스턴 시장 존 프랜시스 피츠제럴드의 딸인 로즈 피츠제럴드와 결혼함으로써 정계에도 인맥을 쌓고자 했다. 1915년 장남 조지프 패트릭(조 주니어)가 태어났으며, 1917년 후에 대통령이 되는 차남 존이 태어났다.

   

정치진출

1920년대에는 증권계에 종사하며 많은 재산을 모았고, 영화사업과 부동산 투자로 재산을 더욱 불렸다. 1920년대 말, 미국의 대표적인 부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이와 함께 민주당에 많은 정치자금을 대며 정계에서도 영향력을 확대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과도 인연을 맺어 그의 행정부에서 1934년 신설된 증권 거래 위원회 초대 회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했으며, 1938년 ~ 1940년에는 주 영국 대사로 재직했다. 아일랜드계가 미국의 주영 대사로 재직하게 된 것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교육

이러한 활발한 활동과 많은 재산으로 그 자신이 직접 선출직 정치인에 도전할 수도 있었지만, 주가 조작이나 금주법 시대의 주류 밀매 등 투명하지 못한 재산 형성 과정과 복잡한 사생활이 문제가 될 것을 우려하여 그 꿈을 접었으며, 대신 자신의 아들들에게 그 야망을 이루도록 했다. 그의 4명의 아들은 엄격한 교육을 받았고 서로 경쟁심을 유발시키며 꿈을 키우도록 했다. 그는 고립주의자로 미국이 외국의 전쟁에 개입하는 것에 부정적인 입장이었으나, 아들들이 정치적으로 성공하려면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하여 장남 조와 차남 존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도록 했다. 그러나 가장 기대했던 장남 조가 전사하여, 그의 기대는 차남 존에게 모아졌다. 존은 전쟁이 끝난 후 1946년 불과 29세의 나이에 연방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 그의 막대한 자금 지원을 받으며 당선되었고, 이후 계속하여 그의 지원을 받아 정치인으로 승승장구하여 마침내 1960년 대통령에 당선되게 된다. 3남인 로버트1950년대에 그의 알선으로 상원의 위원회에서 일할 수 있었고, 존이 대통령이 된 후 법무부 장관이 되었다.

   

죽음

아일랜드계로 아들이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데 큰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로 자신의 꿈을 아들이 대신 이루는 모습을 지켜보았으나, 1961년 말, 뇌경색을 일으킨 후 건강이 크게 악화되었다. 1963년 존이 암살되었을 때에는 거동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쇠약해진 상태였다. 이후 자신이 직접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했으나, 차남 로버트는 유력 정치인으로 성장했으며, 막내 에드워드도 상원의원으로 활발한 정치활동을 했다. 1968년 로버트가 대통령 출마 선언을 하며 그의 또다른 아들이 다시 대통령에 도전했으나, 로버트도 암살당했고 그 다음해인 1969년 81세로 세상을 떠났다."

http://ko.wikipedia.org/wiki/%EC%A1%B0%EC%A7%80%ED%94%84_P._%EC%BC%80%EB%84%A4%EB%94%94

   

1930년대. 미국 상류층에서 아일랜드인이란 유태인, 이태리인과 더불어 흑인과 다를 바 없는 천민이었다. 해서, 대표적인 친영파 모건 가문은 유태인 출입금지를 내걸었던 것이다. 예서, 의문을 표하는 이들이 있다. 모건은 로스차일드 덕분에 큰 가문인데 어째서 유태인 출입 금지였을까.

   

바로 이것을 명쾌하게 설명하는 것이 인드라의 국제유태자본론이다. 전 세계 음모론과 이론 중 이 대목을 확실히 책임지는 이론이 인드라 이론 말고 누가 있나?

   

모건이 천대한 것은 동유럽 유태인, 즉 카자르 유태인이었던 게다. 동유럽 유태인, 카자르 유태인은 로스차일드 가문은 물론 맑스도 나름 경멸했다. 생각해보라. 당대 루즈벨트가 네덜란드계 카르타고 유태인인데, 유태인 일반 출입 금지가  말이 되나?

   

간단 정리한다.

   

미국에서 연방준비은행이 출범하였을 때, 초대 이사진 중에 유태인 루즈벨트 가문이 있었다. 루즈벨트가 대통령으로 당선한 이후 당대 미국 증권거래를 규제하기 위해 SEC이 만들어졌는데, 이 SEC 초대 위원장이 누구일까. 케네디의 아버지,  록펠러 소유의 베들레헴스틸의 중역이었던 조셉 케네디였다~!

   

다시 말해, 케네디의 애비, 조셉 케네디는 아일랜드 이주민이 알 스미스를 열렬히 옹호하였을 때, 정반대편에 서서 루즈벨트를 사주하여 아일랜드인을 탄압한 록펠러를 지지했던 것이다. 이런 공적을 인정받아 조셉 케네디는 아일랜드인으로는 이례적으로 영국 대사로 간다. 이때, 영국 대사란 다른 나라 대사와는 다르다. 왜? 이 당시 미국은 영국 식민지였으니까.

   

예서, 에피소드란 모건 가문이 영국에 기증한 건물을 유태인보다 천한 아일랜드 출신 조셉 케네디가 써서 모건 가문이 격분했다는 뉴스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거짓이다. 상인이란 명분에 혹하지 않는다. 실리를 위해서는 온갖 굴욕도 참는 것이 상인의 본분이다. 헌데, 모건 가문이 자신이 기증한 건물을 조셉 케네디가 썼다 해서 격분했다고~! ㅎㅎㅎ 역선전이다. 하면, 왜 이런 역선전을? 이는 국유본 귀족들 자존심을 바탕으로 해서 당대 국유본 귀족들을 위한 떡밥이었던 게다. 왜? 귀족은 명예를 중시하니까~!

   

역설적으로 바로 이런 이유로 엘리자베스 여왕은 - 당시에는 여왕이 아니었다 - 조셉 케네디 역량을 바로 보았던 것이다. 향후 록펠러는 조셉 케네디 가문에서 대통령을 만들 속셈이군, 하고 본 것이다.

   

이처럼 케네디 역시 국유본이 만든 대통령이다. 여기에 그 어떤 환상을 품어서는 안 된다.

   

쪽발이 색희들이 쪽발 놈현 책임을 김진표, 정동영, 안희정, 문재인, 김두관, 유시민 등 그때그때마다 책임을 돌리는데, 단호히 배격해야 한다. 이 개쪽발이 색희들아. 천벌을 받을 것이다. 쪽발 놈현이 얼마나 대한민국을 망쳤는가. 하고, 지금도 얼마나 망치고 있는가. 이 개색희들아. 씹색희들아. 지금까지의 죄과를 뉘우치고자 한다면 자결하라. 이 개넘의 색희들아. 매국노들아. 니놈들이 유언으로 쪽발 놈현이 대한민국 매국노로 나라를 망쳐서 죄송하다는 유언장을 남기고 죽어야 지하에 계신 김구 선생을 비롯한 애국선열이 비로소 마음을 풀 것이다. 그전까지 쪽발 놈현 개색희들에 대한 저주는 계속될 것이다. 이 갈아마셔도 시원찮을 매국노 씹색희들아.

   

오늘은 여기까지.

   

쪽발 놈현이나 쪽발 돼중과 같은 쪽발이 색희들이 대한민국을 망치는 꼴을 담담하게 지켜보아야 할 것입니다. 감정적인 대응은 자제해야 합니다. 진정한 혁명은 이 개색희들이 자기 세상 만난 듯 활개를 칠 때야 비로소 시작할 것입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당합시다. 허나, 진실을 똑바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 추신 : 엘즈버그나 풀브라이트 원조 골드만파로 바꿉니다. 맥락을 보면 골드만파인데, 왜 노비네파냐고 갸우뚱할 분들이 있을 터인데, 맞습니다. 골드만파라고 쓰려고 했는데, 이상하게 글을 쓸 때는 노비네파라고 썼네요. 인월리 글은 초안이어서 오타도 좀 있고, 크고 작은 실수들이 있습니다. 퍼갈 때는 말없이 퍼가시되, 24시간 이후에 퍼가주세요. 교정을 보아야 해서요.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 록펠러는 왜 소련을 지원해서 베트남 전쟁을 지속시켰나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1/11/26 04:21

http://blog.naver.com/miavenus/70125031670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17 : 록펠러는 왜 소련을 지원해서 베트남 전쟁을 지속시켰나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1/11/26

   

   

오늘날 세계 혁명의 중심은, 한반도 서울 인드라에게 있다.

   

인드라, 반드시 혁명을 해내고야 말 것이다.

   

전 세계 인민들이여!

   

떨쳐 일어나 인드라와 함께 세계 혁명을 즐기자~!

   

   

1. 인드라, 액땜하다

   

인드라가 오늘 또 다시 액땜을 했다. 신, 혹은 수호천사에게 고마움을 드린다. 결정적인 순간마다 인드라를 지켜주는 것 같다. 하마터면, 사람을 치일 뻔했다. 아줌마가 술에 취했는데, 하필이면 인드라 차량 조수석 옆에 쓰러졌던 것이다. 조수석 쪽이 벽쪽이라 인드라가 이를 인지하지 못하고 차를 직진으로 1미터 가량 후진시키는데, 목격자들이 갑자기 차를 세우라는 것이다. 인드라는 차를 정지를 시킨 뒤 무슨 일이냐고 하니 취객이 쓰러져 있다고 했다. 놀란 인드라는 뛰쳐 나와 살펴보는데, 불행 중 다행으로 차량이 취객을 치인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서 목격자들에게 혹 차량이 취객을 건들이지 않았느냐 하니 그건 아니라고 한다. 다만, 차 진행 방향을 보니 후진했다 핸들을 꺽은 뒤 전진할 때 취객을 칠까봐 정지시킨 것이라고 했다. 목격자는 여성 두 분이셨는데, 정말 고마웠다. 잔다르크요, 나이팅게일이 아니겠는가. 남의 일인데도 적극 나서주셨다. 증인이 필요하다 여기면 연락하라면서 연락처까지 남겨주셨다.  아줌마를 깨워서 일으키니 아줌마가 술에 취해서 왜 날 깨우냐, 너 누구냐 욕설을 한다. 해서, 마침 인근에 경찰이 있어서 경찰을 불렀는데, 이 경찰, 아니, 짭새 색희가 문제였다. 손이 안 아프냐는 식으로 유도 신문을 해서 아줌마가 손이 아프다는 발언을 이끌어낸다. 아줌마 손에 바퀴 자국이 있다나~! 이  짭새 색희, 무진장 웃기는 넘이다. 하여간 이런 짓거리해서 국물 좀 얻어먹으려고 하는 수작 같이 보였다. 보호자 전화해서 오라고 한다. 구급차도 오라고 했다. 헌데, 상황은 묘하게 흘러갔다. 구급차가 왔다. 구급차 대원이 보더니 이 정도면 뭐, 하더니 저희 그냥 갑니다, 하고 간다. 더 웃긴 건 아줌마다. 아줌마가 자기는 그만 집으로 가겠단다. 짭새가 가지 말라고 한다. 아줌마랑 짭새가 싸운다. 이 넘의 나라는, 이 넘의 정치는, 이 넘의 경찰은, 넌 누구냐, 씨발아, 하면서 왜 집에 가겠다는데 못 가게 하는 게야, 개색희야, 이러고 싸운다. 짭새가 말한다. 아줌마가 차에 깔렸잖아? 그러니까 아줌마가 내가? 나 차에 안 깔렸어? 짭새는 아줌마 다쳤다고 하고, 아줌마는 안 다쳤으니 집에 가겠다고 하고. 아줌마는 인드라더러 인드라에게 폐 끼치고 싶지 않아요. 우리 왜 이렇게 집에 못 가고 이래야 되나요? 그러는데, 짭새는 아줌마 술 취했어, 이 말만 반복하고. 해서, 인드라가 그럼 보호자가 올 때까지 기다립시다, 이렇게 이야기했다. 그러다가 아줌마 남편이 왔다.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니 남편도 대략 사정을 짐작한다. 그래도 모르는 일이다. 이만 원 가량을 택시비로 찔러준 뒤 연락처를 받았다. 다른 경찰이 왔다. 제대로 된 경찰들이다. 사정 이야기를 듣고 아줌마에게 묻는다. 차에 치이셨나요? 아줌마 말한다. 아니요? 네. 아줌마는 남편과 함께 택시를 타러 간다. 경찰이 말한다. 저희들이 왔고 현장 확인을 했기 때문에 인드라님은 이후 혹시라도 있을 뺑소니 혐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십분 뒤, 마지막으로 신고 접수한 보험사 직원이 왔다. 사정을 다 들은 뒤 보험사 직원 이야기는 이렇다. 아무리 술에 취했더라도 바퀴에 손이 깔리면 비명이든, 무엇이든 지르게 되어 있다. 더군다나 인드라 차량은 엄청 무거운 SUV 차량이다. 다만, 사정이 이렇더라도 나이롱뽕 신고 접수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렇더라도 안심하시라. 보험사에 맡기면 된다.

   

돈이 문제가 아니다. 인드라가 고의가 아니지만 사람을 칠 뻔했다. 다행인 게다. 목격자 분들이 아니었으면, 인드라가 그 여성을 치일 뻔한 것이다. 하늘이 도왔다. 인드라가 살면서 몇 번이나 이런 구원을 받는 것 같다. 정말 죽을 각오로 자살 시도를 했는데 살아나거나, 정치적으로 매장당할 뻔한 때에도 살아남았다. 인드라가 잘 나서가 아니다. 못 난 인드라를 신이든, 수호천사든 하던 역할 계속하라고 하는 것 같다. 이번 시련은 인드라가 며칠간 인월리를 쓰지 않는 게으름을 묻는 듯하여 인월리를 쓰고자 한다. 사실 인드라가 인월리 안 쓰는 날이 편하다. 푹 쉬고, 푹 잔다. 허나, 인월리 쓰는 날은 하루에 3~4시간 밖에 못 잔다. 마음을 늘 행복하게 하려고 노력하긴 하지만, 때로는 매우 힘들다. 왜 인드라가 이런 고생을 사서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인드라한테 안 좋은 사건이 일어나는 것 같아서 참 그렇다. 열심히 사는 수밖에 없다.

   

인드라가 국유본론을 쓰는 것이 신의 뜻이다, 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인드라가 솔직하게 말하는데, 인드라가 국유본론을 쓰는 게 인드라 개인으로서는 엄청난 손실이다. 여러분들이 오해할 것 같은데, 인드라가 국유본론을 쓰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훨씬 경제적으로 이득이었을 것으로 확신한다. 인드라가 국유본론을 쓰면서부터 인드라 인생이 참 힘들다. 용한 점쟁이 왈, 인드라가 글을 쓰지 않으면 부자가 될 것이라고 했다. 허나, 글을 쓰면 쓸수록 부가 축나고 생명이 깍인다 했다. 인드라 소망은, 록펠러보다 딱 한 살 더 오래 사는 것이다.

   

2. 후르시초프는 왜 록펠러와 만나야 했던 것일까

   

부동산업자이자 고액 강연료로 악명이 높은 국유본 첩자, 노엄 촘스키는 국유본 좌익 일당과 함께 왜 올리버 스톤의 JFK를 공격해야만 했을까. 노엄 촘스키, 교수를 한 이력이 불투명한 만큼 국방부 프로젝트를 따낸 것 자체가 미스테리인 게다. 인드라가 보기에, 국유본 앵무새 시스템 하위 기계라고 본다. 하면, 노엄 촘스키라는 국유본 기계가 왜 JFK를 공격하라는 지시를 받은 것일까.

   

올리버 스톤 JFK는 케네디 음모론으로 유명한 짐 마스 저작을 원작으로 했기 때문이다. 하면, 짐 마스가 대체 무엇을 주장하길래 국유본 수첩왕자, 노엄 촘스키가 발끈했을까? 

   

 짐 마스의 다크 플랜을 잠깐 살펴 보자.

   

"1961년, 삼각위원회의 창립자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미국이 동유럽을 경제적으로 원조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대외관계>>에 기고했다. 데이비드 록펠러는 1964년에 모스크바를 방문, 그런 거래에 대해 찬성한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그해 9월 12일자 <<시카고 트리뷴>>에 따르면 "체이스맨해튼은행 사장인 데이비드 록펠러는 존슨 대통령을 만나 러시아 지도자 니키다 후루시초프와 면담한 내용을 보고했다. 두시 간에 걸친 만남에서 후루시초프는 '미국과 러시아의 교역을 늘려야 한다'면서 미국이 러시아에 대한 장기차관을 연장해 주길 바란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록펠러는 전했다."

   

   

   

http://blog.naver.com/zerocando/120129960858

   

그간 음모론이 간과한 이 당시 소련 상황을 잠시 살펴보자.

   

   

http://www.necrosant.net/zbxe/17969

   

당대 소련 후르시초프 고민은 무엇이었나.

   

하나, 국유본론에서는 소련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지닌 이를 서기장이 아니라 외무장관으로 본다.

   

이유는 국유본, 혹은 빅터 로스차일드와의 연락 관계 때문이다. 유태인 리트비노프, 몰로토프, 그로미코, 세바르나제 등. 이들 임기가 서기장 임기보다  더 길다.  이런 문제는,  전 세계에서 오직 인드라만 주장하는 것이니 여러분들이 심사숙고해야 한다. 특히, 인드라가 리트비노프에 중점을 두어 인월리를 전개했던 것이 특징인 게다. 스탈린에 이은 후루시초프 고민이 무엇이었나. 스탈린이나 후르시초프나 빅터 로스차일드에 충성하였으므로. 빅터 로스차일드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따르는 것이 후르시초프 권력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해서, 나온 것이 '평화공존론'이었다.

   

당대 빅터 로스차일드는, 로스차일드 가문 정보기관을 활성화시켜 이스라엘 모사드를 만들었고, 자신의 캠브리지 친구들을 모두 모스크바에 보내 KGB를 장악했으며, 영국의 식민지 미국 CIA에는 자신의 심복들을 파견했으며, 무엇보다 그 자신 빅터 로스차일드는 MI5에서 무소불위의 영향력을 발휘했고, 전후에는 MI6까지 자신의 영향력을 확산시켰다.

   

이때, 빅터 로스차일드의 세계 체제는 어떠한가. 최고위층에는 빅터 로스차일드 황제가 있다. 하고, 300인 그룹이 있었다. 허나, 로스차일드 가문은  300인 위원회를 약화시키기 위해 지속적으로 위원회 확대를 꾀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로마 정치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황제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로마 원로원 의원 숫자를 늘렸던 것이다. 로마 원로원 의원 숫자를 늘리면 그 의원들은 대체로 개혁 황제를 지지할 것이 아니겠는가. 오늘날 이는 공무원과 깊은 관련이 있다. 대통령이 등장하면 늘 이야기하는 것이 관료를 줄이겠다, 공무원 수를 줄이겠다는 것이다. 허나, 왜 늘어날까. 이는 관료를 장악하기 위해 대통령이 관료 숫자를 오히려 늘리기 때문이다. 그 아무리 부패 문제를 들어서 관료를 퇴장시키기에는 관료가 지닌 정보가 만만치 않으니 새로운 관료를 뽑아 견제하려는 것이다.

   

아무튼, 최고위층에는 빅터 로스차일드가 있고, 원탁회의가 있었다. 하고, 300인 위원회가 있었는데, 동인도회사에서 유래한 300인 위원회를 약화시키기 위해 로스차일드 가문은 영국 왕립국제문제연구소와 CFR을 1919년 파리평화회의 이후 만든 것이다. 잊지 마시라. 쪽수를 늘린다는 것은 권력 약화이다.

   

한국 국회의원이 문제가 많다 하여 국회의원 수를 현행보다 줄이자는 것은 그 어떤 명분에도 수구반동적이다. 반면, 국회의원 수를 늘이자는 것은 그 어떤 명분에도 희망이다. 해서, 인드라는 현행 국회의원 수를 299명에서 777명으로 늘이자고 제안한 바 있다.

   

하여간, 흥미롭게도 후르시초프는 1964년 록펠러 방문 이후 실각한다.

   

둘, 소련 경제는 소련 체제 해체로 갈 정도로 위기였다.

   

바쿠 유전 지역 로스차일드 기업에서 알바를 한 탓에 늘 국유본 간첩 혐의를 받았던 스탈린은 농업과 경공업을 도외시하고 중공업 우선 정책을 썼다. 이는 누가 봐도 전쟁 준비였다. 반면, 후르시초프는 우크라이나에서 농업 생산의 어려움을 생생하게 겪었던 것이다. 해서, 후르시초프는 농업 생산을 누구보다 중시했다. 허나, 이는 모택동도 동시에 느꼈던 대목이었다. 둘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외부 지원이 끊겼다는 것이다.

   

러시아 혁명 이후 록펠러 회사는 독점적으로 소련과 교역을 했다. 미국과 소련의 교역을 통해 소련 경제는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허나, 이런 정책이 스탈린 사후 끊긴 것이다. 해서, 등장한 것이 후르시초프의 평화공존론이었던 게다. 소련 체제 유지를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이 서방 자본이었기에. 즉, 로스차일드 자본이었기에.

   

그래도 얼마나 어렵나를 잘 느끼지 못할 것이다. 이때, 등장한 이가 독일 에르하르트 재무장관이다. 에르하르트는 빅터 로스차일드의 케인즈 학파와 달리 하이에크 자유주의 학파 경제 정책을 실시하여 독일 경제 부흥을 낳게 한 장본인이었다. 이때, 에르하르트 자유주의 정책에 반해 노조와 정치권이 일제히 총파업으로 맞섰지만, 에르하르트는 이겨내었다. 예서, 에르하르트가 세상을 바꿀 수 있으리라는 것은 순진한 생각. 그 뒷 배경을 짐작할 수 있는데, 이는 빅터 로스차일드에 대항한 최초의 국유본 귀족 반역 사례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케네디도 독일 방문한 직후 에르하르트 감세 정책에 감동했던 것이다.

   

하면, 에르하르트는 어떤 반역 정책을 내놓았나. 당대 소련 경제가 어렵다는 것을 간파한 에르하르트는 국유본에게 담대하게 제안했다. 서독이 소련 경제를 책임지겠으니 대신 독일 통일을 시켜달라고 제안한 것이다. 모두가 순진하다고 웃었다. 허나, 모두가 황당하다고 웃은 것이 아니다. 1961년, 브레진스키가 빌더버그에서  미국이 동유럽을 지원해야 한다고 했으니까.

   

셋, 후루시초프, 국유본 이익을 위해 물러나다

   

국유본은 국유본 이익을 위해서 연합군이던 소련을 적국으로 만들어야 했다. 소련을 적국으로 만들기 위한 방편 중 하나가 스탈린을 히틀러와 동격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 작업을 위해 국유본은 그간 국유본과 열심히 협력하던 스탈린을 제거하고 후르시초프를 옹립한 것이다. 해서, 후르시초프의 평화공존론까지 끌어낸 이후로 국유본은 냉정하게 후르시초프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던 것이다. 사냥개는 또 다른 사냥개를 위한 제물이므로.

   

무엇보다 당대 국유본 사업 핵심은 베트남 전쟁이었다. 이때, 권력 구도는 최고위급으로 빅터 로스차일드와 300인 위원회가 있었고, 하위 한편으로는 CFR과  모건, 록펠러, 케네디가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후르시초프, 모택동이 있었던 것이다. 후르시초프가 공산권 혁명사령부라면, 모택동은 아시아 혁명사령부인 게다.

   

헌데, 중소분쟁이 발생했다. 이념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핵심은 간단하다. 1958년 소련이 약속한 중국 원조 계획을 소련이 이행하지 않아서다. 도와주겠다고 한 넘이 침묵하면 아쉽잖아. 처음에는 중국이 조용히 소련에 항의했는데, 소련이 지속적으로 병쉰 색희들아, 나도 돈 없어, 제발, 재촉하지 마, 라고 싸인을 보내자 중국이 그럼 우리끼리 한다? 라고 소련에 대항한 것이 중소분쟁인 게다.

   

국유본은 이 문제를 풀어주어야 베트남 전쟁을 지속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했다. 일, 중소분쟁의 원인, 후르시초프를 죽여라. 이, 후르시초프가 막판에 미친 척하고 에르하르트 주장을 받아들일 수 있다. 미연에 방지하자. 삼,  중국을 새로운 변수로 받아들여 새로운 전쟁은 중동전쟁으로 집중한다.

   

3. 고 딘 디엠은 과연 부패했나?

   

베트남 전쟁을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죄다 고 딘 디엠이 부패정권이라고 나온다. 과연 그럴까. 의심이 든다. 고 딘 디엠은 어떤 인물인가.

   

http://ko.wikipedia.org/wiki/%EC%9D%91%EC%98%A4%EB%94%98%EC%A7%80%EC%97%A0

   

 고 딘 디엠을 한마디로 평가하면, 이승만과 유사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이전 왕조의 충신이었으면서도 바오다이와는 불화하였다. 바로 이 차이가 고 딘 디엠이 바오다이보다 훨씬 외교적 능력이 뛰어났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고 딘 디엠은 독실한 가톨릭 신도였다. 일설에는 신부가 되려고 할 정도여서 독신으로 지냈다는 것이다. 헌데, 이런 고 딘 디엠을 택한 이는 누구일까. 국유본이다. 미국이다. 그런 미국이 왜 고 딘 디엠을 내쳤을까.

   

결과적인 이야기일 수 있다. 당대 월남군이 당장 월맹군을 격파할 정도의 실력이었다. 고 딘 디엠은 솔로일 만큼 청렴했다. 전쟁이 조기 종료할 위험이 컸다. 고 딘 디엠 정권을 무너뜨려야 베트남 전쟁이 지속할 수 있었다. 

   

냉정하게 말해, 호치민과 고 딘 디엠 차이는 없다. 다만, 시대가 호치민을 선택한 것일 뿐.

   

4. 호치민은 과연 자주적인 인물인가?

   

대개의 베트남 전쟁을 이야기하는 이들은 북베트남을 목숨을 바쳐 지켜야할 민족주의 정권으로, 남베트남을 부패와 사대로 쩌들은 정권으로 말한다. 이것이 사실인가?

   

호치민과 고 딘 디엠 모두 지배층 인물로 태어났다. 허나, 차이가 있다면, 호치민은 공산당을 연줄로 잡았다는 차이이다. 호치민이 국제 사회에 모습을 드러낸 해는 1919년 파리강화회의였다. 이 때, 호치민은 국유본 관심 대상이 된다.

   

이후, 호치민은 충직한 모스크바 시녀였다. 모스크바에서 지령한대로 당을 꾸렸기 때문이다. 허나, 인도차이나 전쟁 때에 이르러 모스크바 발언권이 약화하는데, 이때 호치민을 지원한 세력이 다름 아닌 미국이었다. 호치민은 미국 OSS의 협조하에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프랑스를 이길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호치민이 남북 분단 협정에 조인하는데, 전쟁에서 승리한 호치민이 왜 굴욕적인 조약을 받아들였나 할 것인데, 이유는 간단하다. 국유본이 분단을 원했기에.

   

인드라는 호치민을 좋아한다. 그의 유교적 이력을 존중한다. 또한, 그의 유언을 존중한다. 그는, 그가 원한 대로 근대 러 레이였다.

   

허나, 호치민 영웅화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특히, 남한 주사파의 호치민 찬양에는 건대 항쟁으로 구속한 인민으로 말한다면 정신과적 치료가 필요하다고 강조하는 바이다.

   

국유본은 베트남 전쟁 중 기상천외한 작전을 펼쳤다.

   

한국전쟁 때 압록강 이북 중국 진지를 파괴할 수 없다는 지령은 약과다.

   

국유본은 베트남 전쟁 때 월맹군에게 수시로 미군 작전을 알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특정한 지역을 아예 폭격을 금지했었고, 북베트남군이 공세를 펼칠 수 있도록 미군 뿐만 아니라 연합군에게 각종 금제를 가했다.

   

이것뿐일까?

   

미국에서의 반전 운동이 또한 이 뻔한 전쟁 변수를 변동시켰다. 여기에 찌질이 노엄 촘스키가 있는 것이다. 흥행을 위하여~!

   

인드라는 강조하겠다.

   

미군은 1975년에 월남에서 철수했다. 이때, 소련 태도가 무엇인지 아는가? 굉장히 아쉬워했다는 것이다. 통일하지 않은 것이 낫다는 것이 기본적인 소련 태도였다. 왜? 전쟁을 지속해야 그만큼 소련에 국유본 물자가 지원하니 소련 정권이 안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시기 소련 정권이 역대 최고로 안정화한 시기였다. 베트남 전쟁 이후 소련 정권은 정권 유지에 혈안이 되었다.

   

5. 호치민의 토지 개혁 실패는 국유본을 당황시켰다

   

일반적으로 농민을 위한 토지 개혁 정책은 농민의 환영을 받기 마련이다. 허나, 호치민의 토지 개혁 정책은 오히려 농민의 반발을 일으켜서 농민 혁명을 일으켰다.

   

이 대목에서 아시아 토지 정책이 유럽 토지 정책보다 앞서 있는 정책인지를 강조해야 한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서구 일변도, 국유본 일방적인 지식만을 토대로 베트남 전쟁을 이해하고 있다. 여러분은 스스로 단 한 번이라도 세뇌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늘 서양은 진리이고, 동양은 미신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과연 그런가? 국유본 침략에 시달렸던 인도에서는 자본주의자와 공산주의자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호치민은 모스크바가 지령한 대로 토지 개혁을 단행했다. 허나, 농민 반란에 직먼했다. 왜인가.

   

이는 러 레이 왕조로 소급한다. 한무제 이래로 월남은 중국에 대항하는 농민 반란이 끊이질 않았다. 이때, 15세기 러 레이가 등장한다. 15세기 러 레이는 베트남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전투에서는 늘 패하나 끝내 전쟁에서는 이긴다. 이후 러 레이는 당대 주류 종교인 불교보다 유교를 바탕으로 한 국가를 내세우지만, 유교가 지배 종교로 작동하지는 않는다.

   

이때, 러 레이 왕조가 베트남 남부를 발견한 것이다. 이 시기, 베트남 남부를 보니 공전이 없었던 게다. 예서, 공전이란 무엇인가. 오늘날 사회보장책이라 할 수 있는 정책이다. 마을 소유인 이 공전에서 난 수익으로 각종 사회보장책을 실시하는 것이었다.

   

헌데, 베트남 남쪽에서 공전이 없다? 왜? 이 시기에 베트남 남쪽은 노동력 절대 부족이었다. 해서, 이 시기 베트남인들은 지주를 맘대로 선택할 지경이었다. 그뿐이랴. 땅을 소유하면 세금을 내야 하고, 군대에 가야 했다. 반면, 소작농이면 면제였다. 해서, 아무도 땅을 소유하지 않으려 했다.

   

헌데, 북 베트남에서 교과서에서 시키는 대로 지주는 무조건 반동이라는 도식으로 토지 개혁하니 결과는 어떠한가.

   

북 베트남에는 경주 최씨 부자처럼 착한 지주들이 많았다. 무엇보다 조만식 선생처럼 호치민 정권이 항프랑스, 항일 지주까지 반동으로 내모니 북 베트남에서 반란이 발생했다. 오늘날 역사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숨긴다. 왜? 국유본이니까. 친일 조중동이나 쪽발 한경오프엠이나 한통속이니까.

   

호치민의 토지 개혁은 베트남 실정을 고려햐지 않아 대실패였다. 반면, 고 딘 디엠의 토지 개혁은 현실을 반영한 토지 개혁이었다.

   

바로 여기서 문제인 게다. 베트남 전쟁은 지속해야 한다. 허나, 호치민 정권이 위태롭다. 반면, 고 딘 디엠 정권은 토지 개혁에서 승기를 잡았다. 남베트남 정권의 일방적 승리는 결코 국유본이 원한 그림이 아니다.

   

6. 베트남과 한국의 미래는 한월공화국

   

베트남인과 한국인은 안다. 우리가 지금껏 억압을 당해온 역사가 누구 때문인지를. 우리는 충분히 저항적이었다. 대 중국과 관련하여 역사에서 월남과 한반도인 이외에 중국 역사를 뒤흔들 역사를 지닌 족속은 몽골밖에 없다.

   

허나, 우리는 반도의 역사. 부존 자원도 별로 없다. 소련이 인도차이나에 관심을 둔 건 순전히 국유본 때문이듯, 이 지역에서 그 어떤 세력 확대를 원하지 않았다.

   

동시에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지정학적 지위를 정확히 알고 먼저 이야기하는 것도 그들이라고.

   

그들은 언제나 먼저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세상과 소통한다.

   

그때, 그들을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는 것은 자유이되, 그 자유의 대가는 혹독한 듯싶다.

   

인드라는 강조한다.

   

국유본이 말하는 것을 진정 심사숙고하라.

   

하고, 인드라 이야기를 정말 진지하게 들어라.

   

국유본과 인드라는 세상의 진리에 대해서 투쟁하고 있다.

   

여러분이 이 투쟁에서 낙오한다면, 길은 없다.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16 : 300인위원회 존 콜먼은 빅터 로스차일드의 이중간첩 충신? 국유본론 백문백답

2011/11/22 05:10

http://blog.naver.com/miavenus/70124702259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16 : 300인위원회 존 콜먼은 빅터 로스차일드의 이중간첩 충신?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1/11/22

   

"Vietnam created a rift within the organization."

http://en.wikipedia.org/wiki/Council_on_Foreign_Relations

   

세상에서 가장 음모론이 유행하는 나라가 미국이다. 그 미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음모론이 케네디 음모론이다. 해서, JFK라는 영화까지 나왔다. 해서, 인드라는 케네디 음모론을 통해 존 콜먼과 300인 위원회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물론 인드라 이야기는 '길없는 길'이다. 전 세계에서 인드라처럼 이야기하는 이는 오직 인드라 뿐이니 잘 듣기를 바란다. 인드라의 개인 목표 중 하나가 전 세계 최고 국유본 전문가인데, 이 목표를 현재 95% 정도 달성했다~! 그런 이유로 국유본이 인드라를 눈여겨보니 참고하시길!

   

케네디가 암살당하는 이유로 여러 가지 이유를 제기할 수 있으나, 인드라는 다섯 가지로 정리한다.

   

하나. 쿠바 사태에서 케네디가 우유부단했기에 덜레스 CIA와의 갈등. 둘, 케네디 X화일을 엄청 보유했던 FBI 후버와의 갈등. 셋, 연방준비은행에서 재무부로 화폐 발행을 바꾸려해서 금융자본가와의 갈등. 넷, 이태리 갱과의 갈등. 다섯, 베트남 전쟁을 철회하려 했기에 발생한 군산복합체와의 갈등.

   

예서, 인드라가 주목하는 바는 다섯 번째 요인이다. 베트남 전쟁이다. 인드라가 볼 때, 여타 다른 문제들은 케네디가 행하기에 실현불가능하거나 국내적인 문제이거나 케네디 개인적인 문제였다. 오직 문제가 되는 것이 있다면, 베트남 전쟁이다.

   

왜인가. 우선 연방준비은행 문제는 그야말로 환타스틱이다. 이 문제는 대통령 손에 달린 문제가 아니다. 나중에 구체적으로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하고, 다른 요인들은 모두 각 기관장이 개입한 지엽적인 문제들이거나 이태리 갱과의 문제이다. 오직 베트남 전쟁 문제만이 케네디가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으며, 모든 세력들이 관심을 지닐 문제였다.

   

우선, 이태리 갱과의 불화는 지난 인월리 백문백답에서 언급하였으니 생략하겠다.

   

FBI 후버와의 갈등. 후버는 국유본 루즈벨트 때 입지를 확고히 하여 루즈벨트, 트루먼, 아이젠하워 삼대에 걸쳐 장기 집권한 자다. 이차 대전을 빌미로 도청 등 각종 불법적인 일을 묵인을 받아 정보를 축적했다. 트로츠키 암살이 스탈린이 보낸 자객 작품이라고 보는데, 인드라는 달리 생각한다. 후버의 작품이다. 이차 대전 전에 아메리카라는 안방 단속, 스탈린을 위한 선물,  전후 적색분자 관리 일타 삼피였다. 그런 까닭에 후버는 매카시를 지원했다. 매카시는 국유본이 한국 전쟁을 기획하고, 십 년 뒤에는 베트남 전쟁을 기획했다고 폭로한 바 있는데, 그의 말이 사실로 드러났다. 또한, 매카시는 소련 간첩 혐의 인사들을 폭로해서 매카시즘이란 용어를 탄생시킬 만큼 반공주의자였는데, 이 덕분에 진보좌파였던 인드라도 매카시를 색안경 끼고 보았는데, 베노나 프로젝트로 매카시 이야기가 사실이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후버나 매카시나 촘스키처럼 당대 국유본 지시 사항을 충실하게 이행한 인물일 따름인 게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후버가 가령 소장금이 술만 마시면 테이블에 올라서 홀딱 누드쇼를 한다더라 같은 케네디 X파일을 듬뿍 가지고 있었을 터. 마릴린 먼로와 틈만 나면 떡을 쳤던 케네디가 부담스러워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겠다. 허나, 그 아무리 권력이 있다 하더라도 후버 정도 짬밥이 케네디에 대항한다는 것은 소설. 근대 이후 한국 5대 매국노 중 하나인 김재규가 내 뒤에는 CIA가 있다, 라고 한 것처럼 배경이 없이는 어려운 법.

   

CIA 덜레스와의 갈등.

   

"1953년 강력한 반공정책을 표방한 대통령 드와이트 데이비드 아이젠하워(Dwight David Eisenhower)에 의해 임명된 국장 앨런 W. 덜레스(Allen W. Dulles)의 활약으로 그 조직이 확대되기 시작하여 30여 년 동안에 능력·자금·조직면에서 세계 최대의 정보기관으로 발전했다. 1953년 이란의 모사테크 총리 축출, 1954년 과테말라의 좌익정부 전복 등은 당시의 CIA의 주요 활동으로 꼽힌다. 1960년대까지 전세계를 무대로 활발한 비밀첩보활동을 전개해왔으나 1960년대 후반부터 언론과 의회의 공격대상이 되면서 활동이 위축되었고,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예산과 인원이 대폭 축소되었다. 특히 19731974년에 있었던 워터게이트 사건 CIA 전직 요원이 연루된 것이 밝혀짐에 따라 그 위상이 크게 실추되었다." [출처] CIA [Central Intelligence Agency ] | 네이버 백과사전

   

앨런 덜레스는 1953년에 취임하여 CIA 기초를 닦은 뒤 카스트로 암살 미수로 궁지에 몰려 1961년에 사임했다. 헌데, 쿠바 문제로 인해 케네디와 사이가 안 좋았다? 아니다. 당시 쿠바 위기 때 주요 정책 결정자 7인은 친구 사이나 다름 없었다. 케네디, 맥나마라 국방장관, 앨런 덜레스 CIA 국장, 맥 조지 안보담당관 등이 화기애애하게 당시 사안을 결정한 것이다. 그럼에도 문제가 발생하자 누군가 희생양이 필요했었을 뿐이다. 국유본론에서는 쿠바 쿠테타 자체가 국유본의 일타 삼피 정책으로 기획한 뉴욕타임즈 정치 공작으로 간주한다. 이때, 카스트로와 국유본 사이를 연락한 자가 아르헨티나 국유본 간첩 유태인, 체게바라이다. 해서, 일부 의심할 가능성을 배제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카스트로 암살 미수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중요한 건, CIA의 흥망성쇠가 국유본 권력 교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남은 것은, 베트남 전쟁이다. 이 문제는 지난 인월리에서 말한 바 있다.

   

   

하나, 존 콜먼, 그는 누구인가

   

"1935년 영국에서 태어난 영국인으로, 영국 첩보기관 장교 출신이다. 영국 왕실과 영국 첩보기관이 '300인 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암흑 세계의 권력자로서 영국 국민과 전세계 국가들에게 최악의 적임을 알고 1969년 미국으로 이주하여 귀하했다. 1970년부터 30 년간 암흑 세계 세력자들의 정체와 진상을 밝히기 위한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역사 인문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대영 박물관에서 5년간 조사 연구에 몰두했으며, 저서로는 <300인 위원회> 외에도 격월간이 <뉴스 레터>, <월드 인 리뷰> 를 발행하면서 세미나와 방송에도 출연하고 있다. "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42561

   

인드라는 전두환 정권 때 감옥에도 다녀오는 등 수십 년간 진보좌파였다. 그런 이유로 음모론에 비판적이었다. 이유는, 대개 음모론이 극우적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유태인 음모론만 들으면 짜증이 날 정도로 인드라는 정통으로 진보좌파 공부를 한 사람이다. 음모론이란 물타기라고 생각했다. 허나, 속으로는 여러 모로 의문이 가고 그랬는데, 해소할 수가 없었다.  그저 인드라가 못 나서 남 탓하는 것이겠거니 했던 게다. 인간이 아직 덜 되어서 그렇다 여겼다. 투쟁으로 부르주아적 의문을 극복하자, 라는 단무지적 실천을 떠올렸던 것이 인드라였던 게다. ㅠㅠㅠ 심지어 나 같은 족속은 주사파도 아닌데 한반도 혁명이 일어나서 북한군이 쳐들어오면 가장 먼저 숙청당할 족속이라고 스스로 자학하면서 그래도 이 혁명을 완수해야 한다는 식의 어처구니 없는 생각을 하기까지 했다. 이는 국유본의 치밀한 세뇌 프로그램을 받다 보면 발생하는 것이다. 이것은 한국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전 세계에 유포한 국유본 프로그램이므로 세뇌에서 빠져나오기가 상당히 어렵다고 할 수 있다.

   

헌데, 쪽발 놈현 탄핵부터 이명박 정부 탄생까지 도저히 이전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있는 일들이 나타나니 인드라는 굉장히 혼란스러웠는데, 이때 존 콜먼의 '300인 위원회'를 만났던 것이다. 어느 정도 해갈을 할 수 있었다. 허나, 아쉬웠다. 부족했다. 뭔가 말하다 만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해서, 존 콜먼 저서를 비판적으로 접근했던 것이다.

   

존 콜먼은 말한다.   "1922년 독일 정부의 요인인 발터 라테나우는 '300인 위원회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말을 내뱉자마자 그들의 명령으로 암살되었다."

   

하면, 존 콜먼은 왜 암살당하지 않는가. 이유는 세 가지다. 하나는 존 콜먼의 300인 위원회란 날조한 조직일 따름이다. 둘, 300인 위원회가 실재하나 존 콜먼 이야기를 신경쓰지 않을 만큼 강하다. 셋, 300인 위원회가 존 콜먼 하나 다루지 못할 정도로 세력이 약화하였다.

   

1. 날조했을 가능성. 일부는 구체적이어서 신빙성이 있다. 허나, 인드라가 늘 강조하듯 진실 78 : 거짓 22이다. 특히, 영국 여왕과 영국 귀족과 관련한 대목들이 설득 가능성이 떨어진다. 음모론에도 족보가 있다.

   

가령 검은 귀족.

   

http://ko.wikipedia.org/wiki/%EA%B2%80%EC%9D%80_%EA%B7%80%EC%A1%B1

   

이것은 오늘날 카자르 유태인의 원조 격인 '가나안의 저주', 유스터스 멀린스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멀린스는 이탈리아인(베네치아,피렌체,제노바)을 가나안의 자손으로 보고 검은 유태인, 즉, 가짜 유태인이 세계를 지배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예서, 프리메이슨도 나오고, 일루미나티도 나오고~! 문제는 백파/흑파가 있었는데, 검은 머리에만 착안하여 흑파를 검은 귀족으로 바꾸어서 영국 여왕/영국 귀족으로 나아가니 무리한 논리인 게다. 가령 영국 여왕이란 교황파에 대항한 국왕파 대표 세력인데? 성공회 수장이잖아~! 해서, 백파면 몰라도 흑파???

   

수메르인이 검은 머리로 불리니 인드라 주장 역시 유스터스 멀린스 주장과 맥락이 유사하게 보일 수 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인드라는 스페인 궁정 유태인을 강조하는 반면, 멀린스는 이탈리안 유태인을 강조한다는 차이일 뿐이다. 허나, 내용 면에서, 인드라는 유스터스 멀린스에 전혀 공감하지 할 수 없다. 오히려 유스터스 멀린스가 국유본 간첩이 아닐까 생각할 정도이다. 멀린스와 인드라의 근본 차이는 무엇인가. 멀린스는 검은 머리를 강조하면서 가짜 유태인설 원조인 반면, 인드라는 유태인 근본이 수메르인에서 온 것이 아니냐는 입장인 게다. 심지어 인드라는 추정 단계이지만, 모세 이전의 역사는, 욥기까지 포함해서 수메르 신화에서 온 것이 아니냐 이렇게 보기까지 한다.

   

예서, 인드라와 존 콜먼 차이가 나타나는 것이다. 인드라는 기독교에 자유롭다. 지금까지 무신론자로 살다가 최근 유신론자가 되었기는 해도 여전히 자유롭다. 반면 존 콜먼은 기독교 세력에 의존해야 한다. 해서, 영국 여왕, 영국 귀족, 검은 귀족과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다시 말해, 존 콜먼이 미국으로 망명한 뒤, 미국 음모론이 허무맹랑한 것이 많다고 지적했지만, 그럼에도 음모론 시장이 있기에 이들 주장을 전면 부정하면 입지가 좁아지기에 타협한 산물이 아니냐 싶은 것이다.

   

2. 300인 위원회가 존 콜먼 이야기를 쌩깠다? 서방 세계가 얼마나 고소 고발에 투철한 나라인가. 동양인 생각과 다른 사고 패턴이다. 어설픈 이야기하면 당장 태클 날라오는 게 서양이다. 헌데, 1992년에 출간하고, 1997년에 수정판이 나왔는데, 조용하다? 일부는 헛소리일 수 있지만, 근거가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당장 비틀즈에서 작정하고 달려들면, 존 콜먼이 300인 위원회 수익으로 거둔 돈 이상으로 손실을 볼 수 있다. 혹자는 말할 것이다. 존 콜먼이 300인 워원회 위협으로 생계에 큰 타격을 받고 있다고 말이다. 바로 그런 이유로 비틀즈만 가지고서 소송 걸어도 되는데, 왜 안 거나~! 둘 중 하나인 게다. 존 콜먼이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논란이 되면 될수록 비틀즈가 불리한 면이 있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소송 걸고 싶은데 위에서 하지 말라고 하는 경우이다. 아마존 순위 6,000위를 꾸준히 유지할 만큼 스테디샐러인데, 조용하다면 존 콜먼 이야기에 진실이 많거나, 외압이 있어서 소송을 못 하는 것이다.

   

3. 세력이 약화하였다. 가장 설득력이 있다. 책 출간이 하필이면 소련 붕괴 직후인 1992년이다. 수정판도 1997년이다. 언론에서 공개적으로 빌더버그 까면 빌더버그가 이전에 비해 별 볼 일이 없는 조직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처럼 그간 입만 열면 테러하는 300인 위원회인데, 존 콜먼이 함부로 이야기해도 별 탈 없이 존 콜먼이 생활할 정도이면, 300인 위원회 세력이 많이 약화하였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정리하면, 존 콜먼이 요즘 주장하는 핵심 주장은, 미국 중산층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로마클럽 안건 때문에 300인 위원회가 미국 제조업을 죽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어느 정치 세력에게 가장 적합한가. 골드만파 오바마이다. 오바마는 미국 제조업을 키우겠다고 늘 이야기하지 않은가?

   

오늘 술을 많이 먹어서 여기까지. 2부 다음에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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