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정벌 이슬람 총사령관 무사는 이슬람으로 개종한 유태인 출신이다 국유본론 2012

2012/10/30 11:52

http://blog.naver.com/miavenus/70150211916

   

   

   

스페인 정벌 이슬람 총사령관 무사는 이슬람으로 개종한 유태인 출신이다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2/10/30

   

5. 이슬람교 창시 무함마드는 쿰란공동체 유대교도였다

6. 우아미야 왕조는 이슬람 창시자 무함마드에 적대하던 가문이었다

7. 기독교 초대교회를 주도한 것은 시리아나 로마가 아니라 카르타고 교회였다

8. 스페인 정벌 이슬람 총사령관 무사는 이슬람으로 개종한 유태인 출신이다

9. 이슬람 스페인 정벌 때 적극 환영하던 유태인은 시리아 이주 유태인이 아니라 스페인에서 자생한 유태인, 즉 카르타고 유태인이다

        

 

     

      

 

   

5. 이슬람교 창시 무함마드는 유대교도였다 

   

이슬람교를 창시한 무함마드는 어린 시절 양친을 모두 잃은 고아였습니다. 해서, 상인인 숙부 슬하에서 자랐습니다. 무함마드가 12살 때 시리아에서 단성론이어서 기독교 이단 취급을 받던 네스토리우스파 사제를 만났는데, 사제는 무함마드가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라며 축복을 해주었습니다. 무함마드는 성인이 되자 숙부를 떠나 목동 양치기로 지냈습니다. 허나, 무함마드 아버지가 상인이었던 만큼 상인에 대한 갈망이 있었습니다. 해서, 카디자 상단 점원으로 일하게 되는데, 일도 잘 하고 품성도 좋고 잘 생겼기 때문에, 과부였던 카디자가 15살 차이가 나는 짐승돌 무함마드에 반합니다. 후일 무함마드가 자신 얼굴을 숨긴 것은 미남 교주 덕분에 이슬람이 흥했다고 조롱할 것이 뻔한 이교도들 비난을 피하기 위함인 것 같습니다. 짐승돌 숭배도 우상 숭배이긴 하기 때문이죠. 허나, 비잔틴 동방교회에서는 무함마드가 내세운 우상 숭배 배격론에 충격을 받아 그리스도 성화상 폐지 논란에 빠집니다. 오늘날로 치면, 무함마드가 내세운 것은 가수론입니다. 가수가 노래만 잘 부르면 가수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에 비잔틴 동방교회는 그래도 스타성이 있으려면 비주얼도 좋아야 하는데 입장인 것입니다.  40세 카디자는 과부여도 부자였기에 여기저기서 청혼이 들어왔지만 모두 거절한 뒤 아들 나이 격인 25세 무함마드와 결혼합니다. 무함마드 카디자 부부는 금슬이 좋아 2남 4녀를 두었습니다.

   

무함마드가 이대로 행복하게 살다 죽었다면 이슬람이란 종교가 탄생할 수 없었습니다. 무함마드가 대를 이를 아들 둘을 모두 잃습니다. 안 그래도 사색하길 즐겨하던 무함마드는 하늘이 내린 시련에 세속 일에는 끊고 방황하는 시간을 보냅니다. 카디자가 부자 상인이었기에 남편 사색을 전혀 방해하지 않고, 오히려 '힘내세요, 카디자가 있잖아요' 하고 격려합니다.

   

카디자는 아비오니교 신자였고, 사촌인 와라카는 구약성경 사본을 필사하는 수도사이면서 아비오니교 메카 종교지도자였습니다. 아비오니교 교리는 아리우스파와 유사하여 예수가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인데, 세례를 받을 때 하나님 아들이 되었으니 예수에겐 신성이 없다며 삼위일체설을 부정하는 데다 양성론과 채식주의도 반대했습니다.

   

아비오니교는 이스라엘 쿰란 공동체에서 시작하였습니다. 쿰란 공동체라면 재산 공유인 원시 공산주의 삶을 살면서 임박한 메시아를 기다리는 종교 공동체입니다. 5세기~6세기 비잔틴 제국은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해 기독교화를 진행하여 유대교 중심이 예루살렘에서 바빌론으로 바뀝니다. 이중 일부가 아라비아 반도로 이주하여 메카로 온 것입니다. 무함마드 당시 메카에는 약 300명 정도 신자가 있었다고 하는데, 자신들 경전이 따로 있었다고 하니 이 정도 규모라면 상당한 교파인 것입니다.

   

헌데, 이때 마침 유대교에서 탈무드가 등장한 것입니다. 유태인들이 기원 후 로마와 전쟁하여 대패합니다. 성전이 파괴됩니다. 전쟁에서 패하니 열심당이 망했고, 성전이 파괴되니 제사장 집단 사두개파가 몰락하고, 에세네파도 사라지고, 바리새인이 유대교를 장악합니다. 성전이 파괴되니 이제 토라(모세 5경)로만 신앙을 유지해야 하니 나시 가문 중심으로 랍비 유대교가 등장합니다. 예서, 랍비란 하나님 계시를 받은 예언자가 아니라 오늘날로 치면 성서학교 교사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가르치려면 학습서가 필요하겠습니다. 탈무드입니다. 바빌론 유수에서 돌아온 기원전 500년대부터 구술로 전해지던 탈무드를 정리하기 시작하는데, 600년대에 이르러 예루살렘 탈무드에 이은 팔레스틴 탈무드가 나옵니다.

   

무함마드 아내와 아내 사촌이 아비오니교인 데다가 구약 사본을 필사하고 시리아 등 원정무역을 할 능력이니 탈무드를 익히는 데에 아무런 장애가 없었을 것입니다. 진리를 갈구하며 독학하던 무함마드는 지식을 전승받습니다. 어쩌면, 메카 아비오니교 교단 차원에서 카디자가 총명하고 똘끼 있는 무함마드를 한눈에 알아보고 후계로 선택한 것이 아닐까요? 무함마드가 큰일을 할 영적 지도자라는 것을 굳게 믿었던 카디자는 무함마드가 나이 마흔에 이르러 동굴에서 계시 천사인 가브리엘을 만나 각성하자 1호 신자가 됩니다. 2호 신자는 카디자 사촌입니다.

   

유대교도 전도하고 다녔습니다. 유태인만 유대교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아랍인 중에도 유태인 신자가 꽤 있었습니다. 무함마드도 그중 한 명이었습니다. 해서, 자신이 새로운 예언자임을 인정받기 위해 메카로 온 유대교인들을 대접하고 예루살렘에 경배하고 안식일 등 율법을 지키려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허나, 유대교도는 바리새인인 것입니다. 게다가 무함마드는 에세네파 일부인 쿰란공동체 출신이니 유대교에서 이단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언행이 에세네파와 흡사하다는 주장이 지금까지도 전해오고 있으니까요. 바리새인은 계시적이고 신비주의적인 데에 비판적이고 율법적이고 현실주의적이었습니다.

   

무함마드는 자신이 메시아가 아니라 구약에 나오는 예언자일 뿐이라고 말해도 바리새인들이 콧방귀만 뀐 것입니다. 이에 무함마드는 바리새인 중심 유대교에서는 더 이상 길이 없다고 보고, 아브라함 서자 이스마엘처럼 길 없는 길을 택한 것입니다. 이후 무함마드는 기독교는 물론 유대교와도 분리하여 안식일을 하루 앞당겨 금요일로 율법을 정하는 등 아랍인 중심 이슬람으로 나아갑니다.

        

   

   

        

 

6. 우아미야 가문은 이슬람 창시자 무함마드에 적대하던 가문이었다

   

우아미야 가문은 무함마드와 같은 쿠라이쉬 부족인 집안입니다. 대상인 집안이었기에 이슬람 초기에는 전투를 할 정도로 무함마드를 반대하였습니다. 무함마드가 중소상인 등을 통해 세를 확대하자 이를 눈치 챈 아랍 종교 세력들이 무함마드는 물론 부족 전체를 몰살시킬까 두려웠던 것입니다. 허나, 무함마드가 세를 크게 불리니 조력자로 나선 것입니다.

   

무함마드와 아비오니교파가 영성권력에 열심이었다면, 우아미야 가문은 세속권력에 집착하였습니다.

   

우마이야 가문 무아위야는 무함마드 핏줄인 알리와 이슬람 황제격인 칼리프 자리를 놓고 대결을 합니다. 예서, 오늘날 수니파와 시아파가 발생했습니다. 알리가 사산왕조 페르시아 바빌론 지역에 기반하였다면, 우마이야 가문은 비잔틴 지역 시리아 다마스커스 총독이 됩니다. 이후 오늘날까지 이어져 이란인 중심 시아파 대 아랍인 중심 수니파 구도가 됩니다.

   

"680년에 무아위야의 아들 야지드 1세(Yazd Ⅰ, 680~683)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할리파가 되었다. 그의 아버지를 닮아 유능하고 재치 있는 통치자였으나, 그의 불행은 이라크 내에서 일어난 사태 때문에 시작되었다. 이라크 총독인 지야드와 그의 아들이며 후계자인 우바이둘라('Ubaydulāh)의 난폭한 통치 때문에 이라크 거주 아랍 인의 감정은 크게 악화되었다. 게다가 그들은 시리아의 우대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제4대 정통 할리파 알리의 둘째 아들 후세인에게 지지를 보냈다.

   

680년에 후세인과 그의 추종자들이 남부 이라크의 카르발라(Karbalā')에서 우마이야군과 충돌했으나 패하여 학살당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한 즉각적인 정치적 반응은 심각하지 않았으나, 시간의 흐름과 함께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였다. 즉, 할리파 위의 계승권을 주창한 후세인이 극적으로 죽게 되자, 그 죽음은 순교로 떠받들어졌다. 그 결과, 우마이야조에 대한 반대 세력은 알리의 자손을 구심점으로 내세워 그들만이 할리파 위의 정당한 계승자라고 주장하게 되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 ··· d%3D3270#

   

   

비잔틴 제국 유태인들은 이슬람이 레반트 지역을 지배하자 초기에는 아랍인을 해방자로 받아들였습니다.

   

"5세기 후엽에서부터 유스틴 황제(527-565년 C.E.)가 즉위하기까지 기독교는 교회내의 각기 다른 종파간의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 문제의 신학 논쟁이 계속되는 동안 팔레스틴 내의 유대인들은 그들의 지위가 어느 정도 증진되면서 곳곳에 많은 회당을 짓고 발전을 도모하였으나, 비잔틴의 군사력이 부활되면서 유대인은 보다 많은 박해를 받게 되었다.

   

유스틴 황제가 즉위하면서 유대인에 대한 즉각적인 박해가 시작되었다. 유대인의 권리와 재산 보호의 법적 근거를 제거해 버렸으며, 유대교에 대한 지위를 하락시켜 나갔다. 이 시기에 일어난 많은 신학적 논쟁과 더불어 정치적으로 팔레스틴에서는 사마리아인들의 반란(529 C.E.)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가장 중요한 혁신 조처 가운데 하나는 유대법을 국가법과 동등한 규정으로 적용시켜 나갔으며, 기독교 내의 각종 제도를 유대교의 그것들로부터 분리시켜 나갔다. 나아가 성경 해석에 있어서 유대교적인 전통과 관점으로부터 떠나 기독교적인 성경해석 방식에 의해 해석해 나갔다. 이를 위해 유대인의 성경 해석서인 미쉬나를 금서로 지정하기도 하였다. 미쉬나는 하늘의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지상의 인간의 작품이며, 유대 랍비들의 해석은 성경의 가치를 모두 부인하고 있는 까닭이다.

   

교황 그레고리 1세(Pope Gregory I,590-604)는 유대인을 기독교인과 맞서 하나님의 선택권을 놓고 싸우는 관계로 규정하고 있다. 그는 욥기를 해석하면서 유대인의 고집스러운 태도를 비판하였다. 기독교는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박은 일을 반복적으로 강조하면서 하나님의 선택이 유대교로부터 기독교로 옮겨오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유대인은 에서요, 이방인이었던 기독교인은 야곱이었다. 동시대의 교부들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기독교와 유대교의 궁극적인 차이를 주장하였다. 그는 이러한 신학적 입장에서 유대인들의 행동을 제약하였다. 유대인의 회당을 새로 짓는 일을 금하였으며, 법으로 기독교인이 되지 않은 유대인들을 차별하였다.

   

이러한 비잔틴 시대의 유대인들은 다른 어떤 제국의 통치 기간과 마찬가지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였다. 614년 페르시아가 팔레스틴의 변방에까지 이르자, 과거 바빌로니아에서 페르시아로부터 얻은 유대인의 구원과 같은 갑작스러운 구원을 기대하며 강력한 메시아적 흥분을 가라앉치지 못하였다. "페르시아가 팔레스틴에 이르렀을 때, 유다의 남은 자들은 페르시아와 연합하여 기독교인들과 맞서 싸웠다"(Sebeos,ch.24). 유대인들은 갈릴리로부터 가이사랴, 룻다를 거쳐 614년 5월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성을 정복하였다.

   

예루살렘을 정복한 페르시아는 기독교인을 추방하고 교회를 파괴하였다. 이 시기에 마르 사바(Mar Saba) 같은 수도원이 불타고 수 천명의 수도사들이 화형되기도 하였다. 예루살렘에 새로 시작된 유대인 공동체의 지도자는 느헤미아 벤 후시엘(Nehemiah ben Hushiel)과 에브라임 벤 요셉(Ephraim ben Yosep)이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희생제사를 재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페르시아의 친유대 정책은 3년이 채 못되어 617년 역전되어 친기독교, 반유대인 정책으로 돌아서면서 유대인의 지도자들은 처형되고 유대인의 지위는 예전처럼 돌아갔다.

   

622년 비잔틴의 황제 헤라클리우스(Heraclius)는 군대를 강화하여 페르시아 정벌에 나서 엑바타나 전투에서 승기를 잡고 페르시아의 영토를 되돌려 받았다.

   

629년 비잔틴의 황제가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기독교의 예루살렘을 복원시켰다. 그는 팔레스틴의 유대인들에게 어느정도의 관대한 조치를 취하였으나 얼마후 성직자들의 강요로 깨어지고 말았다. 성직자들은 황제의 위증죄에 대한 책임을 강요하게 되면서 결국 유대인을 예루살렘과 그 주변으로부터 추방하도록 명령하고 말았다.

   

교회는 유대인을 이집트와 주변 사막으로 추방하였으며, 이에 반대하고 나선 유대인들을 처형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박해와 더불어 유대인을 강제로 개종시키는 공적인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적어도 기독교 제국 내의 유대인들은 기독교의 신앙을 거부한 구약의 수호자이며,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자들이었다.

   

이러한 유대인과 기독교인 사이의 갈등은 640년 팔레스틴의 새주인으로 떠오른 아랍의 등장과 함께 종말을 고하고, 유대인들은 이제 수세기 동안 새로운 "악한 왕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 아랍의 등장과 함께 모슬렘과 기독교의 갈등이 시작되었으며, 같은 뿌리를 가진 세 종교와 민족의 갈등은 팔레스틴을 새로운 국면으로 치닫게 하였다. 가장 확실한 변화는 이제 더 이상 팔레스틴이 유대인의 삶의 중심지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http://blog.naver.com/miavenus/memo/70 ··· D7705369

   

   

무아위야는 시리아 정복 당시 유태인 노예를 전리품으로 획득합니다. 휘이씨 정리에 따르면, 그 유태인 노예가 스페인 정복을 진두지휘했던 무사 빈 누사이르 아버지였습니다.

   

http://blog.naver.com/byron1st/60113265688

   

이후는 휘이씨 정리에 인드라 의견을 첨가한 것입니다.

        

 

   

   

7. 기독교 초대교회를 주도한 것은 시리아나 로마가 아니라 카르타고 교회였다

   

무사 아버지는 무아위야에게 비잔틴 제국 콘스탄티노플 점령을 위해서는 양쪽에서 공격해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이에 무아위야가 의견을 받아들여 사령관을 무사 아버지로 하여 계획을 세웠지만, 알리와 내전을 치루느라 백지화합니다. 유태인이 사령관이 될 수는 없습니다. 무사 아버지는 이슬람으로 개종했던 것입니다.

   

무아위야에서 시작한 우마이야 왕조는 압둘 말리크와 아들 알 왈리드에 이르러 중앙집권적 절대왕권 체제를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헌데, 이런 일에는 개종한 유태인 출신이 적격인가 봅니다.

   

알 왈리드는 무사 빈 누사이르를 북아프리카 정벌 군사령관으로 중용합니다. 무사는 전임자와 달리 베르베르족을 강제 개종하지 않고 전통을 존중하였습니다.  

 

   

   

 

   

베르베르족은 아랍인이 아닌 무어인입니다. 헌데, 아랍인이나 무어인 모두 인종적으로는 흑인이 아닌 백인 계통인 코카소이드입니다. 다만, 무어인  언어를 보면 함족계입니다. 종족별로 약간씩 흑인과 혼혈한 정도 차이가 있습니다.  

    

   

 

베르베르족(오늘날 모로코, 리비아 지역 정착민)은 이슬람 역사에서 아랍인, 이란인, 터키인과 함께 중요한 종족입니다. 알리 부인도 베르베르족이었고, 아랍인과 베르베르인 갈등을 활용하여 파티마 왕조가 들어서기도 하니까요. 오늘날에는 축구선수 지단이 베르베르족인 거죠. 또한, 스페인 역사에서 베르베르족이 차지하는 위상은 엄청나기도 합니다.

      

     

헌데, 이들 베르베르족이 왜 거세게 반발하였을까요?

   

'고백록'으로 유명한 로마초대교회 교부 아우구스티누스(354.11.13 ~ 430.8.28)는 북아프리카 출신입니다. 아버지 파트리키우스는 이교도의 하급관리였고 어머니인 모니카는 열성적인 그리스도 신자였습니다. 카르타고로 유학해서 이후 교부가 되었다고 하는데요. 기독교면 시리아나 로마로 유학을 가야지, 하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허나, 당대 카르타고란 로마나 시리아를 압도하며 초기 기독교 역사를 주도하였습니다. 펄페튜아와 펠리시타스같은 유명한 순교자들이 있으며, 서방 기독교 신학 창시자인 터툴리안이 있습니다.

   

헌데, 카르타고 기독교 기원이 불투명합니다. 이는 승자가 기록하는 역사 관점에서 카르타고 역사에서 뭔가 숨기고 있는 대목이 있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인드라 추정은 카르타고인입니다. 포에니 전쟁 당시 카르타고에는 카르타고인 25만이 있었는데 20만이 죽고 5만이 살아남았다고 하는데, 그 후예입니다. 스페인 카르타고인과 지중해 소도시에 있던 카르타고인도 물론 살아남았구요. 어떤 분들은 아무 데나 카르타고를 붙이냐 하겠지만, 문명이란 하루 아침에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수메르가 망해도 그 문명이 중동 전체를 지배하였듯 카르타고가 망해도 최소한 수세기간 영향을 미치는 법입니다.

   

여기에 사도행전을 보면, 이스라엘과 시리아 지역인 인디옥이 중심이 아닙니까. 헌데, 이스라엘과 시리아가 아닌, 또한 로마도 아닌, 카르타고로 초대교회 주도권이 넘어갔다는 것은 주체가 달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독교가 로마제국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 중 하나는 신 앞에 황제나 노예나 동등하다 하여 하층을 대변했다는 것입니다. 로마 황제들이 속주들 귀족 가문과 정략결혼하면서 제국을 유지하였는데, 로마 황제들이 외가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해서, 온갖 지방종교들이 로마로 유입하였는데, 이중 기독교가, 특히 로마제국과 3차에 걸쳐서 맞짱을 뜬 카르타고 기독교가 가장 경쟁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정치 최고봉은 배갯머리 송사가 아니겠습니까. 로마제국 귀족 여성들이 기독교에 많은 관심이 있었다고 합니다. 형제 부탁을 무시해도 처남 부탁 무시하기 힘듭니다. 하여,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하는데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목사 아들, 니체가 기독교를 약자 종교요, 여자 종교라고 비판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뉘앙스를 뭐라고 해야 하나. 내시 종교다? 이렇게 하면 이해할 수 있을까요?

   

카르타고 기독교 특징은 사도행전에 나타난 대로 기독 신앙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때리면 저항하지 않고 묵묵히 처맞으며 순교를 영광스럽게 여겼습니다. 해서, 아우구스티누스 어머니가 초대교회 기독교가 지니는 숙명론적 매력에 흠뻑 빠졌던 것입니다. 젊은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젊을 때는 누구나가 자유의지론자이니까요. 허나, 지적 방황 끝에 다시 어머니 앞으로 돌아와 쓴 게 '고백록'인 것입니다.

   

숙명론과 자유의지론. 어느 하나가 옳은 것이 아닙니다. 잘 나가면 자유의지론자가 되고, 되는 일 하나 없이 뭘 해도 망하면 숙명론자가 됩니다. 기후가 따뜻하면 인류는 자유의지론으로 흘러가고, 추워지면 반대로 숙명론으로 갑니다.

   

이유는 인류가 인류애를 발휘하는 세 가지 종족 경향 때문입니다.

   

1%는 영웅적인 행위를 합니다. 이들은 어떤 시기이든 능력을 발휘합니다만, 단, 기질 탓에 평화 시대에 능력을 발휘하는 농부형 영웅이 있고, 위기 시대에 능력을 발휘하는 선장형 영웅이 있습니다. 해서, 나라를 세우거나, 종교를 창시할 때나 기업을 만들 때는 선장형이 맡고, 유지할 때는 농부형이 맡는 것입니다.

   

78%는 어느 시대이건 숙명론자들입니다. 인류애 실현하는 방법도 미워하기 뿐입니다. 질투입니다. 그것이 오랫동안 약자 생존 방식이었기 때문이죠. 역사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혁명적이고 개혁적인 군주나 박정희 대통령 같은 사람들이 쪽발이 귀족에게 모함을 받는 것 말입니다. 이것이 흔히 쪽발이 기득권 때문이라고 여기는데요. 아닙니다. 쪽발이 귀족이 78% 숙명론자들 질투 심리를 이용한 것입니다. 박정희는 잘 난 사람이다, 하지만 못난 구석도 있다. 예서, 못난 구석을 음모론적으로 집중 까면 숙명론자들은 내가 못 사는 건 박정희 때문이다, 라고 착각하기 마련인 것입니다. 허나, 이는 그간 국유본 뉴라이트에서 집중 세뇌한 결과이지, 사실은 아닙니다. 가령 뉴라이트는 십수 년 이상 이순신을 죽이고 원균을 살리고자 엄청나게 노력하지 않았습니까. 유홍준 같은 병쉰색희를 동원하여 한국사에 대못질을 하며 역사를 망치지 않았습니까? 허나, 최근 뉴라이트가 변화 조짐이 있습니다. 과거와 달리 반한적이 아니라 친한적인 경향이 있습니다. 이유는 불분명합니다. 데이비드 록펠러가 사망했기 때문일까요? 혹은 인드라 때문일까요^^?

   

문제는 21%입니다. 이들은 영웅도 아니고, 숙명론자도 아닌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고학력 고소득층으로 분류하는 중산층 사십대인 것입니다. 왜 사십대냐. 사회를 주도하는 실무 책임자입니다. 헌데, 경계가 애매합니다. 가령 기업에서 과장을 노동자로 볼 것인가, 경영진으로 볼 것인가 논란이 있지 않습니까? 과장을 중심으로 대리급에서 부장급이 21%인 것입니다. 농수산업, 자영업도 월수입 300만원에서 1000만원 영역에 있는 것입니다.

   

이들 21%가 중도좌파 민족주의자 박정희 대통령 같은 영웅을 이성적으로 요구하면 사회가 진보합니다. 반면 박정희 대통령 같은 영웅을 질투 감정을 선동해서 비난하면 사회는 퇴화합니다.

   

하면, 21%는 왜 시기마다 다른 입장이 되는 건가요? 간단하죠. 영웅은 일자리를 늘려야 합니다. 프랑스 혁명 당시 나폴레옹이 전쟁에서 이겨 국고를 채울 때는 환호했습니다. 허나, 나폴레옹이 전쟁에서 지니까 비난하였습니다.

   

박정희가 지금까지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국유본 황제가 빅터 로스차일드에서 데이비드 록펠러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허나, 지금 다시 박정희가 부활하는 것은 데이비드 록펠러에서 제이 록펠러 시대로 변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서, 국유본도 흐름을 일시적으로 제한할 수는 있지만, 대세를 막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국유본이 지금까지 흥했던 것은 그 흐름을 누구보다 먼저 알고 적극 대처했기 때문입니다.

     

   

      

  휘이씨 자료 

 

 

 

8. 스페인 정벌 이슬람 총사령관 무사는 이슬람으로 개종한 유태인 출신이다

   

다시 무사와 카르타고로 돌아옵니다.

   

"반달족은 로마보다는 카르타고 방식에 따라 통치하려 했다. 반달족의 힘이 해군력에 있었던 만큼 그들은 약 440년에서 480년까지 지중해 서안 지역을 지배했다. 그들은 북아프리카 내지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했는데, 북아프리카 항구들에 대한 이러한 통제방식은 북아프리카 역사를 통해 되풀이되었다. 해안선을 따라 지배하다 보니 다른 정복자들도 항구와 소수의 고립된 내지만을 공략하고 아프리카 내륙 안쪽에 사는 정착민의 문제에는 거의 관심을 쏟지 않았다. 반달족은 많은 재산을 약탈했고, 이러한 경제착취 정책은 북아프리카의 경제력 하락을 가속화시켰다. 이에 대해 베르베르인들도 점차 반항적이 되었다.

   

동로마제국이 비잔틴제국으로 불릴 즈음 북아프리카에는 반달족 대신에 다른 정복자가 들어섰다. 로마제국의 서쪽 지역이 게르만 민족에게 침략을 당하는 동안에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동부에서는 중무장한 페르시아 기병대가 국경을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us) 황제는 530년대에 이탈리아 반도와 로마를 재정복할 목적으로 해군력을 증강시키기 시작했다. 지중해 서안의 해군력 지배를 위해서는 먼저 반달족의 해군력을 제압해야 했다.

   

유스티니아누스 군대의 이탈리아에 대한 마지막 공격은 실패했지만, 북아프리카에 대한 첫 공격은 성공했다. 533년 유스티니아누스의 장군 벨리사리우스(Belisarius)가 반달족을 제압했다. 그 후 1세기 반 동안, 즉 700년 직후에 무슬림에 정복당하기 전까지 마그립의 반달족 통치 지역은 비잔틴 군대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 ··· d%3D2583#

   

반달족이 카르타고 방식대로 통치하려고 했는데 실패합니다. 반달족이 물질적인 데만 카르타고를 따라하고, 정신적인 면을 몰랐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베르베르족이 반발한 것입니다. 베르베르족은 무사가 오기 전까지 78%가 기독교로 개종할 정도였습니다. 이후 무사로 인해 베르베르족은 대부분 이슬람교로 개종합니다.

   

하면, 무사가 베르베르족을 설득한 전략이 무엇이었을까요?

   

명분을 주고, 실리를 취하는 것입니다.

   

대개 출생부터 귀족인 이들이란 명분을 중시하는 반면 졸부 귀족들은 실리를 택하는 편입니다.

   

무아위야는 무사 아버지가 전략을 제시했다 하여 무사 아버지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려 했습니다. 총사령관 자리는 전공에 따라 황제 자리도 넘볼 수 있는 자리인 것입니다. 이런 자리를 선뜻 주겠다고 한 것은 무아위야가 보통 인물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알 왈리드가 무사를 북아프리카 정벌 총사령관으로 임명한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무사가 알 왈리드에게 충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무사는 말년에 비극적인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만.

   

다시 말해, 이슬람 우마이야는 알 왈리드까지 졸부 실리 노선을 택해서 흥했던 것입니다. 허나, 그 이후 귀족 명분 노선을 택하니 망한 것입니다.

   

유태인 디아스포라 역사를 보면 흥미로운 것이 권력과 유태인이 협력할 때는 권력이 졸부 실리 노선을 택할 때입니다. 반대로 권력과 유태인이 반목할 때는 권력이 귀족 명분 노선을 택할 때인 것입니다.

   

무사는 명분을 주어 베르베르족 마음을 얻었습니다. 그 결과로 타리크 이븐 지야드를 얻습니다. 무사가 유비라면 타리크는 관우였던 것입니다.    

 

무사는 왜 북아프리카 정복에 그치지 않고 스페인 정벌에 나섰던 것일까요?

   

서고트왕국(비시고도) 마지막 왕 로데릭이 어느 날 어여쁜 아가씨가 강가에서 목욕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데려와 강간합니다. 강간이지만, 왕 은혜를 입었으니 영광이기도 합니다. 이 아가씨 아버지가 줄리안이란 귀족인데, 세우타 총독이었다고 합니다. 헌데, 그 딸이 왕궁 근처에서 목욕을 한다? 우연일 수도 있고, 설정일 수도 있겠습니다. 중요한 건, 로데릭이 줄리안 딸만 취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우연이든, 설정이든, 출세 기회를 놓친 줄리안 입장에서는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억울한 마음이나 힘이 없으니 무사에게 청원한 것이 스페인 정복 출발점인 겁니다.

   

헌데, 여기서 인드라는 무사가 치밀한 성격 소유자라고 보고 소설 상상력을 발휘합니다. 줄리안이 딸이 푸대접받는다고 무사한테 와서 토로할 정도면 무사와 줄리안 사이에 이전부터 교류가 있던지, 교류가 없더라도 무사 명망으로 줄리안이 접견을 요청했을 것입니다. 인드라는 전자라고 봅니다.

   

무사는 아버지 뜻을 실현하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더 나아가 자신이 만든 왕국을 꿈꾼 것 같습니다. 스페인 정벌은 무사 기획이지, 알 왈리드 칼리프 기획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스페인 정벌할 때 알 왈리드는 공이 크니 돌아오라고 하지만, 무사는 이를 무시하고 스페인 정복을 완료한 뒤에야 수도인 시리아 다마스커스로 돌아갑니다.

   

무사는 밀정을 풀어 스페인을 탐색하였고 지역 귀족들에게 선무공작을 했던 것입니다. 무사가 베르베르족을 설득하여 북아프리카를 장악한 전략인 것입니다. 불만사항을 접수하고 이를 명분으로 정벌하고 하층 지지를 이끌어낸다는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무사 진격로와 베르베르족 타리크 진격로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 차이란 무엇일까요? 명분이 필요한 곳에는 무사가 진격했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루시타니아 지역인 것입니다.

        

 

   

9. 이슬람 스페인 정벌 때 적극 환영하던 유태인은 시리아 이주 유태인이 아니라 스페인에서 자생한 유태인, 즉 카르타고 유태인이다 

   

스페인에 유태인이 많은 이유에 대해 인드라는 카르타고인이 개종한 결과다, 라고 말합니다. 허나, 정설이 아니지요. 정설이란 스페인에서 유태인이 많은 이유가 불분명하지만, 이슬람이 스페인 정벌하면서 중동 유태인이 많이 끌고 온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있습니다. 과거 인드라 이웃인 안박사님이 문제제기했던 대목이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 인드라가 다시 정리합니다.

   

첫째, 승자 기록인 역사가 왜 이탈리아 르네쌍스론을 강조할까요? 이슬람 문명이었던 스페인 역사를 지우거나 최소화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이슬람 왕국 수도였던 스페인 코르도바는 당대 인구 오십만 명을 자랑할 정도 도시였습니다. 잘 나가던 이태리 베네치아 도시 16세기 인구가 고작 이십 만이었습니다. 유럽 대도시가 이 정도이니 그 외 도시들이란 수 만 명 수준이고, 수천 명이면 큰 마을이었고, 수 백 명이면 요새였던 것입니다.

   

해서, 기독교 승자 기록 입장에서 이슬람 스페인 정벌에 스페인 내부에서 적극 호응했다 하면 문제가 있지 않겠습니까. 허나, 실제 역사 기록으로는 무사 정벌에 스페인 유태인들이 적극 호응하였으며, 루시타니아에서 반발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둘째, 무사가 유태인이니 숨은 유태인들을 스페인으로 초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실례도 있습니다. 무사가 사돈팔촌 집안사람들을 스페인으로 불러들인 정황이 있으니까요. 허나, 무사는 개종한 이슬람입니다. 기껏해야 집안사람들인 겁니다.

   

더군다나 유태인이 팔레스틴에서 거주하기 힘들다하지만, 바빌론이 있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유태인은 7세기에 바빌론에서 예루살렘 탈무드보다 방대한 바빌론 탈무드를 완성시킵니다. 가까운 곳을 두고 굳이 멀리 스페인까지 가는 이들이 있더라도 극소수라는 것입니다. 가더라도 비잔틴도 아니고, 이슬람도 아닌 카자르왕국이 있던 중앙아시아로 갈 것입니다.

   

게다가 당대 유태인이 시리아를 비롯한 중동에서 스페인으로 이주했다는 실증 자료도 없습니다.

   

   

셋째, 무사가 총사령관이니 권력 때문에 순식간에 스페인에 유태인 씨를 퍼트릴 수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닙니다. 무사는 스페인을 정복한 후 엄청난 전리품과 함께 다마스커스로 돌아갔는데, 분위기가 냉담했습니다. 이유는 무사가 지지했던 황제인 알 왈리드가 병석에 있었던 반면, 차기를 노리던 황제 동생이 실권을 장악했기 때문입니다.

   

무사 공적이라면 대대적인 퍼레이드를 해주어야 합니다. 허나, 황제 동생이 무사에게 공적을 자신에게 돌려라라고 제안했는데, 무사는 거절하였습니다. 무사가 보기에 황제 동생 제안이란 사탕발림이었다고 본 것 같습니다. 무사 생각은 옳았습니다. 황제 동생은 황제감이 아니어서 그가 황제에 오르자 우마이야 왕조가 급격히 망하는 길로 가니까요.

   

알 왈리드 황제가 죽고 황제 동생이 황제에 오릅니다. 황제는 무사를 지위에서 박탈합니다. 무사는 울분에 사로잡혀 지냅니다. 예서, 황제가 그쳤을까요? 스페인 총독이던 무사 아들을 암살하고 무사를 조롱합니다. 710년에 시작한 스페인 원정, 불과 수 년 만에 무사 가문이 몰락한 것입니다.

   

또한, 무사가 유태인 확산을 노렸다면, 본심이 여전히 유대교였다면, 무사 아들을 기독교왕국 공주와 결혼시키지 않았을 것입니다. 무사 방식은 유대교에 따른 것이 아니라 점령지 총사령관 작전 지침에 따른 것입니다.

   

정리하면, 무사는 스페인 정벌 때 3개 세력에 의존했던 것입니다.

   

하나, 이슬람 아랍 세력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알 왈리드 황제 세력입니다. 허나, 이교도 출신 우대정책에 불만이 있던 차기 황제가 집권하자 끈 떨어진 실처럼 몰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617년 알 왈리드 동생 황제 시절, 반기독교 친유대 정책에서 친기독교 반유대 정책이 나온 배경이 무사 가문에 대한 적개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둘, 베르베르족입니다. 단 7,000명을 이끌고 타리크 스페인 정복 사령관은 스페인을 정복합니다. 이는 삼십만 명으로 칠백만 명 스페인을 정복한 서고트족보다 더 한 전과인 것입니다. 스페인 정복 이후에도 군사력을 베르베르족에게 의존하였습니다.

   

셋, 카르타고 유태인입니다. 정복 후 행정문제에 카르타고 유태인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행정관, 세금 징수관 등 주요 직책을 맡았습니다. 또한, 정복 과정에서 심하게 황폐화한 지역에는 카르타고 유태인을 집단으로 이주시키기도 했습니다.  

 

 

      

인드라는 정치를 하지 않겠으며,

책을 더 이상 쓰지 않으며,

언론에 기고하지도 인터뷰를 하지도 않을 것이며,

종교단체를 만들지도 않을 것입니다.

국유본론을 소명으로 여기고

지금처럼 살다

행복하게 가겠습니다

매일매일 행복하겠습니다

마.자.세.

한반도 평화와 통일, 경제 발전과 사회 복지를 위하여

친미친중 반일반북 쪽발정은 척살로 조국통일 쟁취하자

쪽발민주당 해체 쪽발석현 아웃

쪽발재벌 타도 골룸빡 처단

쪽발이에게 죽음을 쪽발왕에게 천벌을

쪽발타도해방투쟁 만세

   

   

사단칠정론이란 기초과학을 만들고서도 당대 실천적으로 이를 응용할 넘이 부재했다, 이순신 장군이 사단칠정론을 알고 있었다면 죽는 대신 중도좌파 민족주의자 박정희 대통령처럼 조선을 혁명하였을 것이다 국유본론 2012

2012/10/29 05:49

http://blog.naver.com/miavenus/70150125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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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발타도해방투쟁 만세

 

사단칠정론이란 기초과학을 만들고서도 당대 실천적으로 이를 응용할 넘이 부재했다, 이순신 장군이 사단칠정론을 알고 있었다면 죽는 대신 중도좌파 민족주의자 박정희 대통령처럼 조선을 혁명하였을 것이다 

국제유태자본론 : 인드라 월드리포트 12/10/29

   

4.

   

테오도시우스 1세가 삼위일체 기독교만을 국교로 선포한 후 '예수님이 신이면 신이 하나님과 예수님 둘이니 유일신 사상에 위배된다, 고로 예수님이 신이라고 백번 양보하더라도 덜 떨어진 신이 분명하다'라고 주장하는 아리우스파를 탄압하는 동시에 '예수는 메시아가 아니다, 사기꾼일 가능성이 크다'라고 주장하는 유대교를 대표하는 바리새파에게는 친절한 이중성을 보여주어 어떤 모습이 진실한 모습인지 어리둥절하게 만듭니다. 그런 테오도시우스 1세 또 다른 업적이 로마제국 둘로 쪼개기입니다.

    

 

이후 서로마교회에서는 '우리도 탁발수도승처럼 욕망을 학대하자!'는 실천적, 윤리적 문제에 몰두하는 동안 동로마교회에서는 '신들의 고향'답게 신학 본질에 대해 논쟁합니다. 대표적인 논쟁이 삼위일체 기독교를 받아들인 후 등장한 '단성론' VS '양성론'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신성만 있고 인성이 있더라도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병 신세라는 것이 단성론인 것입니다.

   

반면 양성론은 예수님에게는 신성만, 인성만 있지 않고 나눠지지도, 분리되지 않은 채 신성, 인성이 있다는 주장입니다.

   

인드라 식으로 말하면, 남자랑 여자랑 자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남자 씨냐, 여자 씨냐, 남자 여자 공동 창작이냐인 것입니다.

   

남자 것, 여자 것이라 하면 단성론이고, 남녀 공동 창작이면 양성론인 겁니다. 로마 카톨릭은 양성론을 인정하고, 단성론을 단죄했습니다. 반면, 이집트 콥트교회, 몽골제국, 아르메니아 교회 등은 단성론을 수용했습니다. 단성론은 당나라를 통해 통일신라까지 이어지는데요. 그런 통일신라에서 여왕이 여럿 탄생하니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까닭에 당나라에서 통일신라 여왕체제를 조롱하기 위해 보낸 선물이 아니냐는 시각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인드라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실천적 입장에서 그 아들이 남자 씨이기를 바라는 것이 오히려 여자 입장인 것입니다. 정확히는 엄마 입장인 것입니다. 엄마 씨가 노예 출신이더라도 첩일지라도 남자 가문, 남자 씨가 될 수 있다는 것이죠.  

 

아들에서 딸로 확장하면 선덕여왕이라도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반면, 엄마 씨가 되면 어찌 됩니까? 누구 씨인지도 모르는데 하면서 귀족 아들이라 하더라도 프랑스 인권선언에 참여한 바 있는 '토머스 제퍼슨'이 흑인 노예를 강간해서 낳은 흑인 딸처럼 노예 취급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종교는 예나 지금이나 여자 것입니다. 메시아들은 짐승돌처럼 죄다 남자입니다. 요즘 교회는 드라마이고, 교주는 작가이고, 연출자는 담임목사이고, 배우들은 전도사이지요. 해서, 단성론이 인기가 많았는가 하면 처음에는 좀 인기가 있다가 시들해졌다고 합니다.

   

아무리 종교가 여자의 것이라지만, 남자를 지배하는 것은 여자라지만, 그 남자 체면도 좀 살려주어야 인기 종교가 되나 봅니다.

   

예나 지금이나 여자는 약자를 배려할 줄 아는 남자를 좋아하고, 남자는 숨은 능력을 끌어낼 줄 아는 여자를 좋아합니다.

   

남자란 순수 욕망만 따지면, 아들보다 딸을 좋아합니다. 그 애증이 깊으면 로리타 현상으로 발전하는 겁니다. 동시에 남자란 마마보이이기도 합니다. 태어나길, 엄마와 다른 종족인 남자로 태어난 이유로 스트레스 받아 여자보다 일찍 뒈질 팔자가 남자가 아닙니까. 늘 자신을 칭찬해주길 바라는 엄마이면서 마누라를 닮되 현재 마누라가 아닌 청순했던(과거형입니다) 마누라를 닮은 딸 같은 여자야말로 남자 로망인 것입니다.

   

뭐, 반대로 이야기하면, 여자 로망도 짐작할 수 있겠지요?

   

해서, 구약 아브라함 이야기를 보면, 이집트에 가서 부인 사라더러 누이라고 표현하는 대목에서 신에게 선택받은 자가 사기를 치다니 하고 비난을 하곤 하는데요. 그거 중동 관습적 표현이라네요.

   

요즘 아내를 남들에게 귀하게 소개하고 싶을 때 어떤 표현 쓰나요? 제 갈비뼈입니다? 내 눈 속에 있는 사람입니다? 천사입니다?

   

누이입니다, 란 당시 아내를 귀하게 소개하던 풍습이랍니다. 귀족 간 근친혼이 비일비재했던 고대사회에서는 아내보다 누이란 표현이 더 격이 높았던 것이죠. 귀족에게 아내란 귀족이 아닐 수도 있지만, 누이란 귀족 자신과 동급인 귀족이니까요.

   

하면, 여기서 유대교란 양성론일까요? 단성론일까요? 단성론입니다. 헌데, 부계 중심이 아니라 모계 중심인 겁니다. 엄마가 유태인이면 자동 유태인인데, 아빠가 유태인이면 유대교를 믿지 않으면 유태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로 비교하면 어떨까요?

   

한국인 여자와 아프리칸 미국인 남자가 결혼하여 아이를 낳았습니다. 이 아이는 한국인일까요? 미국인일까요? 그도 저도 아니면 무엇일까요?

   

단성교회파 이집트 콤트 교회는 미국인이라고 교권 해석을 내리지 않겠습니까?

로마 카톨릭은 미국인인 동시에 한국인인 건가요? 동시에 한국인이려면 부모 양쪽 다 한국인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유대교는 한국인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하여간, 글이 길어졌는데, 신학동네 고민들 속에서 이슬람 종교가 탄생했던 것입니다.

   

이슬람은 공처가 마호메트이며, 아브라함 서자 이스마엘입니다. 카톨릭과 유대교 사이에서 그 장단점을 중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드라는 7세기 이슬람 탄생을 고대에서 중세로 넘어가는 세계사적 사건으로 봅니다.

한국에서는 어떤 고민을 할 수 있겠는지요?

   

이기론^^?

   

이기론이 동양에서 논의가 된 것이 송나라 때입니다. 주돈이 등이 성리학을 내세우던 시기인데요. 11세기입니다.

   

쉽게 가죠. 이는 남자요, 기는 여자입니다. 이일원론이나 기일원론은 단성론이요, 이기이원론은 양성론입니다. 퇴계는 이기이원론, 즉 로마 카톨릭 입장이었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한국에서는 안동지역과 같은 보수 고을에서 먼저 양반들이 나서서 서학을 받아들였고, 독학해서 신부 서임을 받은 나라가 된 겁니다.

   

자, 이 대목에서 끊습니다.

   

여러분, 사색당파 이야기하면서 한국은 실천적 사상보다 사단칠정론 같은 현학적 사상에 몰두하여 나라가 어지러웠다고 배웠나요? 인드라가 뿌리째 뽑아드리겠습니다. 인드라 주장은 이렇습니다.

   

사단칠정론이란 기초과학을 만들고서도 당대 실천적으로 이를 응용할 넘이 부재했다, 이순신 장군이 사단칠정론을 알고 있었다면 죽는 대신 중도좌파 민족주의자 박정희 대통령처럼 조선을 혁명했을 것이다.

   

이기이원론은 중앙집권 절대왕권에 유리한 사상입니다.

   

인드라가 중요한 이야기를 합니다.

   

퇴계사상이란 유학을 보다 실천적인 유학으로 바꾸고자 법가를 도입하여 변증법적으로 새롭게 한 유학인 것입니다.

   

이에 눈치 깐 기대승이 세상물정 모르는 탓에 퇴계더러 솔직하게 말해달라고 묻는데, 퇴계가 답하길, 너 지금처럼 하면 정여립처럼 역적이 된다? 는 것입니다. 어설프게 하면 역적이요, 잘 하면 충신이요, 더 나아가 새 왕조를 만드는 겁니다. 경험 부족, 기대승이 뭘 알겠습니까^^! 퇴계 깊은 뜻을. 

 

추신 : 

 

 http://blog.naver.com/miavenus/70027568124

   

   

국제유태자본론 : 15세기 포르투갈은 20세기 이스라엘이었다 국유본론 2012

2012/10/27 12:39

http://blog.naver.com/miavenus/70150010242

   

 

 

국제유태자본론 : 15세기 포르투갈은 20세기 이스라엘이었다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2/10/27

   

1. 세계 최초 아프리카를 일주한 페니키아인은 수메르에서 왔다   

2. 15세기 포르투갈은 20세기 이스라엘이었다

3. 카톨릭을 국교로 선포한 갈리시아 사람 테오도시우스 1세가 유태인에게 친절한 이유는?

 

   

1. 세계 최초 아프리카를 일주한 페니키아인은 수메르에서 왔다 

   

콜럼버스가 처음으로 아메리카를 간 것이 아니고, 해상 민족 페니키아가 먼저 갔다, 라는 주장은 이제 진부하기까지 합니다. 해상 민족 페니키아가 기원 전에 이미 아메리카를 갔다는 자료들이 인터넷에서 조금만 검색하면 찾아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드라 주장은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죠. 페니키아 기원은 수메르라고 하는 겁니다.

   

페니키아인은 초기에는 수메르어를 썼다가 페니키아어를 만들었습니다. 페니키아 알파벳은 중동 종교 언어였던 수메르어에다가 이집트와 교류한 경험으로 이집트어 장점을 종합해서 상인들이 쓰기 쉽게 만든 언어입니다. 기원 전 7세기 경에 그리스 상인에게 페니키아 알파벳을 전해주어 그리스 알파벳이 나왔다고 합니다.

   

종교 면에서도 가나안 지방신 바알을 믿었다고 합니다만, 그 바알과 동등하기까지 한 여신 숭배 풍습이 있었습니다. 구약 솔로몬왕 이야기에 나옵니다. 수메르에는 여러 신들이 있었는데, 대홍수 이전에는 번개와 폭풍우 신 엔릴이 최고신이었는데 대홍수 이후로 수메르에서는 신들 중에서 홍수 조절하는 달 신 난나를 최고신으로 믿는 경향이 점차 우세해진 것입니다.

   

헌데, 아카드족이 득세하는 시기에 중동에서는 홍수가 아니라 가뭄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연도가 기원전 2,000년에서 기원전 1,500년 추정이 되는데, 아브라함이 수메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가던 비슷한 시기입니다. 이때부터 바빌론 비옥한 땅이 하류부터 가뭄으로 염분 가득한 땅으로 변해 농사를 지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해서, 수메르인이 상류에서 하류로 이동하던 전성기와 달리 하류에서 다시 강 상류로 점차 북상하였는데요. 이 시기 이후부터 가뭄 조절 신인 태양신이 최고신으로 탄생합니다. 헌데, 최고신이 달신에서 태양신으로 변화하는 권력 교체기에서 이를 잘 설명하는 논리는 결혼인 것입니다. 부족을 정복할 때 남자 승계자를 죽인 뒤, 여자 승계자와 결혼하여 부족 지배권을 차지하는 결혼 말입니다. 그로 인해, 후일 세계로 퍼진 신화에서는 달 신이 본디 남자 신인데 여자 신으로 변합니다.

   

설정은 달 신 난나 아들이 태양신 우투이고 난나 딸이 금성신 이난나입니다. 예서, 탐무즈(두무지) 신화에서 보듯 이난나가 형제를 사랑한다고 나오는데, 이때 형제가 태양신 우투가 아니라 양치기 신 탐무즈(두무지)로 변화하고, 탐무즈(두무지)가 죽어 부활하니 태양신 마르둑인 것입니다. 이난나는 마르둑과 인연을 맺습니다.

   

금성신 이난나는 중동, 유럽, 인도 등으로 퍼져나가는 여신 원형으로 짝퉁 여신들로는 아프로디테, 비너스, 자유의 여신상 등이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도 이난나가 원형이 아닐까 싶습니다.

   

구약에서 아브라함 때던가 솔로몬 때던가 바알과 야훼가 혼용되어 인용하던 대목이 기억나는데요. 이 시기는 가나안신 바알과 수메르신 야훼가 권력투쟁을 하던 시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구약에선 야훼가 승리하는데요. 페니키아에선 바알이 승리한 셈인 거죠.

   

해서, 솔로몬왕이 야훼와 이난나를 같이 모신 건 야훼가 이난나 사랑을 얻어 바알을 이겨 가나안 유일신이 되었다는 상징이 아닐까 싶습니다.

   

탐무즈(두무지) 신화가 수메르 신화라고 하지만, 아카드족이 수메르를 정복하면서 수메르 신화를 변형시킨 것입니다.

   

수메르에서는 자원이 없어 일찍부터 무역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허나, 그 당시에는 배가 원정무역을 할 만큼 큰 배 제작술이 없었고, 유물도 나오지 않아 현재로서는 추정만 가능한 뿐입니다. 이집트가 기원전 2500년경에 레바논 지역과 무역한 것도 지중해가 작은 배로도 가능했기 때문이지, 배가 대서양이나 인도양을 항해하려면 큰 배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헌데, 모헨조다로 유적에 뼈가 새겨진 인장이 발견되었는데요. 원통형 인장하면 수메르가 원조이고 모헨조다로 연대가 수메르와 동시대인 기원전 3000년대여서 수메르와 모헨조다로가 그 당시에도 교류를 한 것이 아닌가 보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대홍수와 노아 방주가 수메르 신화에서 보듯 사실이면 유물이 아직 나타나자 않았을 뿐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가령 세계 최초 배가 한국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무려 팔천 년전, 기원전 육천 년경입니다. 믿지 못할 이야기인데, 사실이니 어쩌겠습니까.

   

"조기(早期) 신석기 시대인 8000여년 전 물고기 잡이에 활용한 목제 선박과 노가 한꺼번에 경북 울진군 죽변에서 발견됐다. 신석기시대 배와 노는 창녕 비봉리 유적에 이어 국내 두 번째 출토다. 제작 연대는 비봉리 유적과 비슷한 국내 최고(最古)로, 전 세계를 통틀어서도 현존하는 가장 이른 시기 배에 속한다.

   

   

 경북 울진군 죽변에서 발굴된 약 8000년 전 조기 신석기 시대에 사용된 판자형 나무배의 일부. 삼한문화재연구원은 낚시 도구들이 함께 나와 물고기 잡이 배로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된다며 땅 밑 180㎝에 묻혀 있었다고 27일 밝혔다.

울진 연합뉴스

매장문화재 전문조사 기관인 삼한문화재연구원은 울진군 의뢰로 2010년 5월 울진군 죽변면 죽변리 일원 도시계획도로 부지에 포함된 조기 신석기 유적 출토 유물을 최근 정리하고 보존처리하는 과정에서 목제 선박 조각과 노를 확인했다고 27일 밝혔다. 목제 선박 조각은 현존 길이 64에 너비 50, 두께 2.3로 편평한 판재 형태를 띠며 가장자리 쪽이 바깥으로 들려 올라갔다. 판재의 수종은 단단한 녹나무다. 목제 노는 잔존 길이 170×최대폭 18×두께 2.1로, 물에 잠기는 갈퀴 부분은 넓은 사다리꼴이며, 손잡이 부분은 단면 직사각형이다. 수종은 상수리나무다.

   

   

김구근 원장은 "이들 선박과 노는 현재 지표 약 180 아래의 제4문화층에서 출토됐다."면서 "심한 부식으로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워 흙덩이 상태로 떠서 옮겨와 보존처리하던 중 정확한 용도를 확인하게 됐다."고 말했다. 유적 내에서 비록 파손됐지만 결합식 낚시의 부품을 비롯한 각종 어로 관련 도구가 출토돼 이들 목선은 어로 행위에 사용한 것으로 짐작된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해서, 인드라는 수메르가 기원전 3,000년경에 큰 배를 만들지 못했더라도 기원전 1,500년에서 기원전 2,000년경에는 기존 배를 개량해서 원정항해가 가능한 배를 만들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집트 고왕국(기원전 2850년 ~ 기원전 2200년) 시절, 상선대를 만들어서 레바논 목재를 거래했다고 합니다. 헌데, 이집트가 페니키아인을 최초로 발견한 것이 기원전 1,500년경입니다. 즉, 그 이전까지 이집트가 레바논과 무역할 때는 페니키아인을 발견하지 못한 것입니다. 헌데, 어느 날 느닷없이 나타났다는 겁니다.

   

해서, 인드라는 수메르인이 육로를 통해서 페르시아만에서 가나안으로 이주한 것이 아니라 해로를 통해 가나안으로 이주했다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왜 육로가 아닌 해로입니까. 육로는 도적패들이 많습니다. 또한, 이집트에서 탈출한 유태인이 가나안에 이르는 과정에서 보듯 많은 부족 지역을 통과해야 하니 어려움이 한둘이 아닙니다.

   

반면, 해로는 도적패 등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해상에 배 제작술 미흡으로 그 당시에는 해적패가 없다시피했을 터이니까요. 또한, 육로로 민족이 대이동을 한다면, 인근 지역에서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소문이 퍼졌을 것입니다.

   

페니키아인이 이집트 왕명을 받들어 기원전 600년경에 홍해, 아프리카 동부해안을 경유하여 아프리카 희망봉에 도달해서 그곳에서 겨울을 나고 항해하여 아프리카 서부해안, 지중해를 거쳐 이집트로 돌아오는데, 2 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시대적 차이가 있고, 민족 대이동이이기에 수메르인이 그보다 더 오랜 기간에 여러 번에 걸쳐 선발대, 본대, 후발대로 보냈다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바다하면 태평양인데요. 폴리네시아인들 언어가 하와이나 피지나 비슷해서 말이 통한다고 합니다. 이는 본디 같은 족속이었다는 것이지요. 헌데, 이들 배란 원시적 카누가 전부입니다. 이들 이주하는 방식도 선발대를 보내서 살만한 섬을 발견하면, 본대, 후발대가 여러 번에 걸쳐서 다른 섬으로 이주하였던 것입니다. 폴리네시아인이 태평양에서도 가능했던 것을 수메르인이 인도양과 대서양에서 항해가 불가능했다고 볼 수는 없지 않을까요?

   

아울러 페니키아인이 이집트 왕명이라고 선뜻 아프리카 일주 원정에 나설 수 있겠습니까. 이집트왕은 몰라도 페니키아인에게만 아는 전례가 있다면 가능하지 않았겠습니까. 실제로 콜럼버스 이전에도 아메리카 항해가 비밀리에 있었기에 콜럼버스 항해가 가능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수메르인이 레바논으로 이주를 결심했다면 이유는 배나 성전 건축할 때 필요한 목재 때문입니다. 구약에도 나올 만큼 레바논 백향목이 최상품이었습니다.

   

페니키아인은 솔로몬에 성전 건축을 해주고, 이집트에 해군 함선을 제작해주고, 그리스에 알파벳을 전수해줍니다. 이런 수준 높은 문명이 갑작스레 출현한다는 건 매우 기이한 현상이 분명합니다. 허나, 수메르인이 바다를 통해 왔다면 가능한 것입니다. 페니키아인은 기원전 12세기에 이베리아 남단에 카디스란 도시를 건설하니까요. 그뿐 아니라 브리튼, 영국은 물론 아이슬랜드, 아메리카까지 탐험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아메리카 원주민이나 태평양 폴리네시아인 사이에서 포르투갈, 스페인 백인 원정대를 보고 전설을 떠올렸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수메르인, 페니키아인, 카르타고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해서, 그리스가 잘 나갈 때인 기원전 5세기 인물인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페니키아인이 페르시아만에서 왔다고 하는 주장이 그냥 나온 주장이 아닐 것입니다. 헤로도토스는 고향인 할리카르나소스를 떠나 흑해 지방, 스키티아,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더 나아가 이집트, 바빌로니아 방면까지 여행하며 각지 자료들을 수집해서 과거 사실을 실증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2. 15세기 포르투갈은 20세기 이스라엘이었다

   

유태인 콜럼버스는 제노바 출신입니다. 제노바는 리구리아주 주도이고, BC 7세기경부터 리구리아인 항구도시였습니다. 리구리아인은 켈트족, 게르만족 이전부터 유럽 선주민으로 살았는데요, 프랑스 남부에서 이탈리아 중부 에트루리아에 분포되어 있었습니다.

   

헌데, 리구리아인은 포에니 전쟁 때에는 로마가 아닌 카르타고 편을 들어 한니발 부대에 리구리아 경장보병들이 출전합니다. BC 117년경에는 로마제국에 복속되었습니다.

   

"콜럼버스는 1451년 8월과 10월 사이에 이탈리아 남서 해안의 항구 도시인 제노바에서 도미니코 콜럼버스와 수산나 디 폰타나로사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이 부부에게는 두 아들 바르톨로메오와 지아코모가 있었는데, 이들은 형을 도와 같이 탐험을 했다. 콜럼버스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고 다만 독실한 가톨릭 교도로 성장해 아버지의 직업인 양모 직공 일을 도왔다는 정도만 남아있다.

   

콜럼버스는 1476년 그의 나이 25세 때 탑승한 제노바의 상선이 프랑스와 포르투갈 해적선의 공격을 받아 수많은 인명 피해를 입고 침몰해 거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 이때 그는 바다에 떠있는 노를 잡고 수영을 해서 기적적으로 살아나 포르투갈의 리스본으로 갔다. 리스본은 대서양을 향해 열린 유럽의 거대 항구로서 전 유럽에서 건너온 선박들이 머무는 곳이기도 했다. 콜럼버스는 리스본에 이미 와 있던 동생 바르톨로메오와 함께 지도 제작을 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항구도시 리스본은 그의 꿈을 실현시키기에 매우 적절한 장소였다. 그곳에는 막 항해를 마치고 온 선장들과 미지의 땅에 대한 도전으로 가득한 사람들이 젊은 콜럼버스의 주위에서 싱싱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리스본에서 콜럼버스 형제는 뛰어난 지도 제작자로 명성을 날렸다. 항로와 육로를 정확하게 인식하게 된 이 시기는 이후 콜럼버스가 항해를 할 때 큰 힘이 되었다. 이러한 준비기간이 있었기에 대서양 횡단이 가능했던 것이다. 더불어 독학으로 에스파냐어를 공부했고, 독서를 통해 교양을 쌓았다. 그리고 당시 인기 있던 선박인 카라벨의 조종법을 익혔고 북대서양의 아일랜드와 아이슬란드를 항해하기 시작했다. 콜럼버스는 리스본에서 부유한 포르투갈의 관리이자 선장의 딸인 펠리파 페레스트렐로에 모니즈를 만났다. 그녀는 전통적인 귀족 집안의 젊고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콜럼버스는 리스본의 한 교회에서 그녀를 만나 1478년에 꿈의 결혼식을 올렸다. 이 결혼으로 인해 콜럼버스는 위험한 탐험의 길을 떠나지 않더라도 최소한 처가의 인맥으로 부유한 상인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거기에 멈추지 않았다. 항상 마음속에는 '검은 바다'로 불린 대서양이 파도치고 있었다. 그는 장인이 유품으로 남긴 항해 지도와 선장 일지, 지도 등을 장모로부터 물려받았다. 이 유산은 대서양의 바람과 해류에 관한 소중한 기록들로 그에게는 그 어떤 보물보다 귀중한 것이었다."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323

   

   

당대는 콜럼버스 집안처럼 겉으로는 가톨릭이지만 속으로는 유대교를 믿는 일이 흔했습니다.

   

"[토픽]葡 유태인집단,5세기만에 정체 드러내

| 기사입력 1994-09-09 09:06

(파리=聯合)申淇燮특파원=지난 5세기 동안 포르투갈정부의 종교적인 박해를 피하기 위해 유대교를 신봉하면서도 가톨릭교도임을 가장, 비밀리에 집단거주해온 약 2백명의 유태인들이 최근 정체를 드러냈다고.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紙의 보도에 따르면 포르투갈의 벨몬테라는 외진 마을에 모여사는 이들 유태인은 15세기말부터 시작된 리스본정부의 탄압에서 벗어나기 위해 약 5백년 동안 대대로 구전된 유대교를 믿으며 토요일에는 유대교안식일을 지키고 일요일에는 가톨릭미사에 참석하는가 하면 같은 집단의 남녀간에만 이뤄지는 결혼도 공개적으로는 성당에서 의식을 치른 후 별도로 유대교 의식을 갖는 등 철저하게 비밀을 유지해 왔다는 것.

   

이들은 그러나 지난 21년 유대교의 합법화조치 이후 최근 들어 포르투갈사회가 가톨릭 이외의 종교에 관대해지고 이스라엘의 지원 까지 받게 되자 용기를 얻어 마침내 가톨릭교도라는 가면을 벗고 유대교도임을 선언하고 나섰다는 것."

   

헌데, 포르투갈이란 나라가 어떤 나라이기에 부모가 직공 일을 하던 평민 출신 유태인 콜럼버스가 어떻게 포르투갈 귀족 딸과 결혼할 수 있을까요?

   

당시 인구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정확하지는 않으나, 15세기 포르투갈 인구는 대체로 백만 명이었다고 합니다. 이중 유태인 인구는 십만 명이었습니다. 무려 10%인 것입니다. 헌데, 스페인 유태인 추방령으로 스페인에서 이주한 유태인이 십만 명에 달해서 한때, 포르투갈 유태인 비율은 20%에 육박한 것입니다.

   

스페인 유태인 추방령 때 추방된 유태인 인구가 16만 명에서 80만 명 등 다양합니다만, 인드라는 당대 스페인 유태인 비율을 3% 정도, 약 삼십만 명 정도로 봅니다. 16만 명선이란 최소치 추정인 만큼 의심나는 건 모두 빼고 정했을 것이며, 80만 명선이란 포르투갈도 10% 선이니 스페인도 10% 선일 것이다, 라고 잡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해서, 인드라는 쉽게 생각합니다. 당대 스페인은 오늘날 미국이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유태인에게는 좋은 환경이었습니다. 헌데, 이런 미국에서 유태인 비율이 2.5% 정도입니다. 그 외 지역에서는 대부분 0.5%에서 1% 정도입니다.

   

헌데, 당대 포르투갈 유태인 비율이 10%다? 이 정도면 당대 포르투갈이 오늘날 이스라엘이다, 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것입니다.

   

하면, 포르투갈은 어떤 나라인가요?

   

포르투갈인은 인종적으로 거의 단일민족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보통 루시타니아인이라고 합니다.

   

루시타니아인 기원은 논란입니다. 언어로 보면, 인도유럽어족입니다. 허나, 게르만이나 켈트 이전 선사시대에 이미 이베리아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해서, 역사시대에 이주한 켈트인과 구별하여 선켈트인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헌데, 또 다른 주장은 이들이 북아프리카 경로를 통해 왔다고 합니다. 해서, 루시타니아인이 켈트족과 이베로족이 섞인 켈티베로족에 속한다고 보기도 합니다.

   

켈트족은 금발머리가 많다는 점에서 게르만과 비슷하면서도 빨강머리라 불리는 머리도 많고, 특히 연한 하늘색(또는 녹색) 눈이 특징입니다. 아일랜드인이 대표적입니다.

   

이베로족은 기원이 분명치 않습니다. 대체로 북아프리카와 이태리 남부 등지에서 볼 수 있는 인상 같습니다. 마피아 영화에 나오는 시칠리아인들 말입니다. 그래서인지 일부 인종주의자들은 시칠리아인들을 같은 백인으로 생각하지 않는 경향도 있는 것 같습니다.

   

헌데, 다른 켈티베로족이 로마인이나 켈트족이나 게르만족과 많이 섞여서 오늘날 스페인인에게서 자취를 찾기가 어려운 반면, 루시타니아인은 예전 그대로 모습을 지금까지 간직했다고 합니다. 다른 종족과 금혼을 할 정도로 정복민에게 비타협적이었다고 합니다. 해서, 거의 단일민족이나 다름없다고 합니다.

        

   

 

포르투갈에는 약 5% 정도 흑인이 있는데요. 특히 스포츠 분야에서 두드려져 나니 같은 선수가 있는 것이지요. 해서, 포르투갈 선수 피구를 보면 백인이냐, 흑인이냐 논란을 부르는 셈인 거죠. 백인입니다. 보통 이런 얼굴을 라틴형이라고 합니다만, 루시타니아인 전형적인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포르투갈 식민지였던 브라질은 더 심하구요.   

   

이처럼 인드라가 루시타니아인을 자세히 언급한 것은, 이들이 오랜 역사와 언어, 다른 모습을 하고 있어서 이베리아 반도 내에서 스페인으로 통일하지 않고 지금까지 자주성을 유지해왔다는 것을 보여드리고 싶었던 것도 있지만, 페니키아인/카르타고인과의 관계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루시타니아인은 로마인, 켈트족, 프랑크족과 모두 맞섰습니다. 헌데, 예외적 존재가 카르타고인입니다.

   

페니키아인은 기원전 10~12세기경 스페인 남부에 카디스란 항구도시를 건설했을 뿐만 아니라 이베리아 반도 서안인 루시타니아 지역에도 페이토리아(Feitoria)를 곳곳에 설치했습니다. 페이토리아란 원정항해에 싣고 갈 물건들을 보관해두던 창고이자 요새 역할을 했던 장소입니다. 방어를 위해 병사가 지켰습니다. 이후 포르투갈이 페니키아 상인을 본받아 대항해시대에 식민지 곳곳에 페이토리아(Feitoria)를 설치하고 대포 등을 배치하는 등 적극 활용하였습니다.

   

또한, 카르타고인 한니발은 루시타니아인과 결혼동맹, 즉 정략결혼을 합니다. 해서, 한니발이 루시타니아인 보병을 이끌고 전쟁을 치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헌데, 루시타니아인이 다른 종족과 피를 섞는 것을 금할 만큼 정체성 확보를 해왔는데, 한니발 카르타고인에게 마음을 열었다는 것은, 페니키아인과의 오랜 교류와 어쩌면 셈족인 카르타고인과의 종족적 동질감을 느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2차 포에니전쟁이 로마 승리로 끝나고 한니발이 망합니다. 해서, 로마가 이베리아반도 패자가 되는데, 실제 영향력은 동부와 동남부였고, 루시타니아인이 사는 서부지역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해서, 기원전 155년 루시타니아 전쟁이 일어나는데 역시 로마군단 승리입니다. 로마는 루시타니아 지역을 속주로 편입합니다.    

   

3. 카톨릭을 국교로 선포한 갈리시아 사람 테오도시우스 1세가 유태인에게 친절한 이유는?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는 이베리아 반도를 타라코넨세, 루시타니아 및 베티카 등 3개의 주로 분리했습니다. 그후 로마는 216년, 타라코넨세를 분리하여 북부 지역을 갈리시아라 하여 4개 주로 개편했습니다.

        

   

 

갈리시아는 루시타니아 지역, 포르투갈 북쪽 지역입니다. 박주영이 뛰는 축구단이 있는 비고가 갈리시아 도시입니다.

   

갈리시아에서 사용되는 갈리시아어(Galego)는 에스파냐어보다는 포르투갈어과 가까운 언어입니다. 초기 갈리시아포르투갈어(Galego-Português)는 갈리시아어와 포르투갈어로 나뉘었으며, 이 두 개 언어는 갈리시아와 포르투갈에서 사용됩니다. 갈리시아에는 포르투갈인도 많이 삽니다.

   

헌데, 갈리시아는 카톨릭 역사에서 중요하다면 중요할 수 있는 지역입니다.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는 삼위일체설을 믿는 사람들만 카톨릭으로 인정하는 칙령을 발표한 황제인데, 테오도시우스 1세 고향이 이베리아 갈리시아 출신입니다.

   

"379년경 테오도시우스가 통치하던 동방 제국내에서 니케아 신경을 옹호하는 그리스도인들과 아리우스주의자를 비롯한 다른 종파 사이에 적대 관계가 고조되면서 복잡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테오도시우스 자신은 심한 병을 앓고 난 뒤 380년 세례를 받고 니케아 신경를 신봉했다. 그는 제국 내에서 신앙의 통일을 이루기 위해 열성적으로 노력했는데 380년 2월 28일 테오도시우스는 병에서 회복되자마자 교회 당국자들에게 아무런 자문도 구하지 않고 모든 시민들이 니케아 신경을 신봉해야 한다고 규정한 칙령을 발표했다. 이 때부터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설을 믿는 사람들만 보편적 기독교인(가톨릭)으로 인정되었다. 가톨릭이라는 호칭이 문서에 등장한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다.

이듬해 열린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주교 150명이 모여 아리우스파와 그 종파를 이단으로 확고히 했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 교구는 향후 로마 교구와 버금가는 명예와 위신을 가진다고 발표하였다. 이 무렵 아리우스파 기독교도들은 모든 도시에서 집회를 금지당했고 정통 가톨릭교회로 개종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385년부터 테오도시우스는 동물을 제물로 바치는 제사를 더욱 엄격히 금지하였고, 391년 로마와 이집트에서 일체의 비기독교 의식을 금지하고 이듬해에는 공적이든 사적이든 모든 형태의 이교 숭배를 제국의 전역에서 불법으로 규정했다."

http://ko.wikipedia.org/wiki/%ed%85%8c ··· 584%25b8

   

헌데, 당대 정치경제사회적 요인보다는 갑자기 병을 앓다가 회복한 뒤 종교지도자들과 아무런 상의없이 테오도시우스 1세는 카톨릭을 국교로 선포하고, 이교도와 아리우스파를 맹렬하게 탄압하였지만, 유태인에 대해서는 관대하였습니다. 유태 나시 직무를 인정하고 힘을 실어 주었으며, 회당을 보호하였습니다. 이는 다른 로마황제와는 달랐습니다.

   

예서, '나시'란 무엇일까요?

   

"70년 이전(2차 성전 시대)의 유대교는 크게 3개의 종파로 나뉜다.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가 바로 이것이다. 2차 성전의 멸망으로 인해 성전 중심의 사두개파는 정치 · 사회적 구심점을 잃었고, 쿰란 공동체로 일반적으로 동일시되는 에세네파는 유대 반란 중 로마에 의해 사라지게 된다. 그리하여 남은 것은 바리새파인데, 바리새파인들 중에서 라반 요하난 벤 자카이(Rabban Yohanan ben Zakkai)는 예루살렘이 베스파시아누스에 의해 포위되었을 때, 예루살렘 성을 빠져나와 베스파시아누스를 만나 야브네에 학교를 세우는 것을 허락받음으로써, 이 곳에서 랍비 유대교가 태동되었다. 라반 요하난 벤 자카이 이후 1세기 후반에 가말리엘 가문의 라반 가말리엘 2세가 지도자가 되면서 본격적인 나시 가문이 형성되었고, 이들은 로마가 인정하는 정치 · 사회적 지도자로 유대인을 대표하게 되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 ··· d%3D3270#

   

인드라가 지난 인월리에서 숱하게 주장한 바 있습니다. 카르타고 유태인들이 바리새파 유태인으로 개종했다고 말입니다. 나시 가문이란 당시 로마가 인정하는 유태인 대표 가문이었던 것입니다.

   

테오도시우스 1세 출신이 궁금해집니다. 테오도시우스 1세 집안이 할아버지 때부터 기독교 가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 이전은?

   

테오도시우스 1세 가문은 페니키아인, 카르타고인, 루시타니아인, 리구리아인, 유태인과 관계가 있을까요?

   

길어서 오늘은 여기까지 씁니다.

   

인드라는 정치를 하지 않겠으며,

책을 더 이상 쓰지 않으며,

언론에 기고하지도 인터뷰를 하지도 않을 것이며,

종교단체를 만들지도 않을 것입니다.

국유본론을 소명으로 여기고

지금처럼 살다

행복하게 가겠습니다

매일매일 행복하겠습니다

마.자.세.

한반도 평화와 통일, 경제 발전과 사회 복지를 위하여

친미친중 반일반북 쪽발정은 척살로 조국통일 쟁취하자

쪽발민주당 해체 쪽발석현 아웃

쪽발재벌 타도 골룸빡 처단

쪽발이에게 죽음을 쪽발왕에게 천벌을

쪽발타도해방투쟁 만세

   

   

국제유태자본론 : 서양사 초간단 정리 2 ; 카르타고 유태인 상인에서 베네치아 상인까지국유본론 2012

2012/10/25 15:30

http://blog.naver.com/miavenus/70149878387

   

   

 

국제유태자본론 : 서양사 초간단 정리 2 ; 카르타고 유태인 상인에서 베네치아 상인까지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2/10/25 

 

  

   

 

 

1. 카르타고 유태인 시조, 하밀카르 바르카스  

   

   

제 1차 포에니전쟁에서 카르타고가 패합니다. 하밀카르 바르카스(Hamilcar Barcas)는 전권대사로 나섰고, 전후에도 카르타고 용병 반란을 진압합니다. 허나, 바르카스는 포상은 커녕 자칫 역적으로 몰릴 위기에 처합니다. 임진왜란 때 선조와 이순신 관계와 같다고나 할까요?

   

카르타고 본토에 있던 카르타고 상인 귀족회의는 로마 요구를 어지간하면 다 받아주려는 입장이었던 반면, 본거지 시칠리아를 잃는 등 바르카스는 어린 아들을 신전에 대려가 로마에 대한 복수를 맹세할 정도로 호전적이었습니다.

   

전통적으로 카르타고인은 상인이지, 군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군사력을 용병에 전적으로 의존하였습니다. 해서, 카르타고 귀족들은 같은 카르타고인이지만, 카르타고인과 이질적인 바르카스에 두려움을 느낍니다.

   

기원전 230년경 카르타고 귀족사회 견제에 견디다 못한 바르카스는 카르타고를 떠나 이베리아 반도로 갑니다. 카르타고는 기원전 천 년 전부터 스페인 동남부에 광물을 캘 목적으로 그리스인과 경쟁하며 여러 식민 항구도시를 건설하며 서지중해를 지배해왔습니다.

   

이베리아 반도에 도착한 바르카스는 '새로운 카르타고', 카르타헤나 항구도시를 건설합니다. 바르카스에 이어 사위 하스드루발 대에 이르러서야 완성하여 바르카 가문이 근거지로 삼았습니다. 이곳에서 바르카스 아들이 사위 보호 속에서 크는데, 그가 바로 그 유명한 한니발 장군입니다.

   

유태인 심리학자 프로이트가 두 명을 존경했습니다. 한 명은 청교도 혁명가 크롬웰이고, 다른 한 명은 한니발입니다. 한 명은 카톨릭에 적대적이었고, 다른 한 명은 로마에 적대적이었습니다. 합치면? 로만 카톨릭이군요^^!

   

하밀카르 바르카스와 한니발 모두 로마군단에 패배하고 맙니다. 카르타고는 3차에 걸친 포에니 전쟁 결과 기원전 146년 카르타고에 풀 한 포기 안 남기고 몰살을 당했습니다. 허나, 지중해 곳곳에는 카르타고 상인 인맥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다 몰살당한 것이 아닙니다.

   

기원을 전후하여 지중해 전역에서 유태인이 자연 증가를 훨씬 넘어서는 열 배 넘는 인구 증가율을 기록했습니다. 이는 개종 이외에는 답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하면, 지중해 전역에서 놀라운 인구 증가율을 기록할 족속이 누가 있답니까. 그리스인이거나 카르타고인입니다. 그리스인은 이 시기 이집트 등에서 유태인과 상권을 두고 목숨 건 전투를 벌였습니다. 게다가 그리스인이 카톨릭이 아닌 유대교로 개종할 이유는 없습니다.

   

        

   

        

 

2. 서고트왕국과 유태상인

   

아틸라로 대표하는 투르크계 훈족이 유럽으로 진출합니다. 한때 훈족은 오늘날 오스트리아 빈이라 불린 지역을 공격할 정도로 위협적이었습니다. 용맹이 뛰어나니 로마 용병으로도 활약합니다.

   

훈족에게 박살난 게르만이 역사적인 게르만 대이동을 합니다. 게르만족이 서로마제국으로 넘어와 로마제국에 동맹을 요구하여 항구적인 터전을 마련하는데, 이중에 고딕 양식으로 자취를 남긴 고트족이 있습니다. 로마제국 말기에 서고트족이 서고트왕국을 세워 로마제국과 동맹을 맺은 덕분에 차기 로마 황제가 되는 일도 있을 정도로 강했습니다.

   

물론 게르만족 중에는 개별적으로 살 길을 도모하고자 하는 로마 용병도 있습니다. 오도아케르는 고트족에 패해 로마로 온 스키리족 출신인데, 자신도 로마제국과 동맹을 맺은 게르만족처럼 나라를 세울 수 있다 여겨 로마를 멸망시킵니다.

    

 

로마가 멸망한 후에도 게르만족은 이탈리아를 지배했습니다. 서고트족은 5세기에 프랑스 남부와 스페인에 서고트 왕국을 세웁니다. 이후 서고트족은 프랑크족에게 패해 스페인으로 집중합니다.

   

약 30만 명으로 추정되는 서고트족이 700만 명이 거주하던 이베리아 반도를 정복합니다. 해서, 산악지대를 방패삼아 방어에는 이골이 난 이베리아 반도 터줏대감인 바스크인 지역과 비잔틴 상인(그리스 상인)이 장악한 남단을 제외한 이베리아 반도 대부분을 장악합니다.

   

정복은 쉬우나 통치는 어려운 법입니다. 북방민족이 중국에 들어가서 중국화하듯 서고트족 역시 로마화합니다. 서고트족을 비롯한 게르만족은 중앙아시아 유목민족들처럼 대체로 천신 종교였답니다. 해서, 예수 신성을 부정한 아리우스파를 부족 종교와 유사하다고 보아 믿었습니다. 이러한 게르만족 경향은 이후 에크하르트 - 루터 - 칼뱅 - 위그노파 종교개혁 기반으로 이어집니다. 다만, 이들은 예수 신성을 긍정했지만, 오늘날 아리우스 신비주의 영향을 받은 유니테리안들은 예수 신성을 부정합니다.

   

반면, 스코틀랜드를 제외하고 켈트족 기반에서는 로마제국 이래로 카톨릭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이베리아 반도에서도 선이주민이자 다수 부족이었던 켈트족, 카톨릭이었습니다. 즉, 히스파노 로마노였습니다.

   

서고트족은 정복 초기에는 부족간 금혼령을 내려 혼혈을 피합니다. 허나, 서고트족이 사회 안정책으로 노예제에서 봉건제로 이행함에 따라 일부 히스파노 로마노 귀족을 신분 상승시키면서 초기 부족간 혼인 금지령이 풀려 급속하게 혼혈합니다. 서고트 남자와 히스파노 로마노 여자가 결혼했을 것이고, 문화란 모계 쪽으로 흐르니, 카톨릭으로 통일하게 된 것입니다.

   

카톨릭화한 서고트족은 카르타고 유대인에게 개종하든가 떠나든가 요구합니다. 헌데, 이때 요구들이란 카르타고 유태인들에게 부채를 탕감을 받거나 새롭게 정치 자금을 요구하는 관행이었던 것입니다. 이는 유태인 몸값 풍습도 원인이 있습니다. '비드온 슈바임'이라 합니다. 유태인은 다른 유태인이 노예이거나 노예가 될 위험에 처했다면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해서, 유태인은 이를 위한 공동기금을 만들었습니다. 유태인 공동체는 청소년 유태인에게 장래 사업을 위한 종자돈을 만들어주며, 자기 자신 가치를 금전적으로 환산할 수 있도록 자각시키는 것 같습니다. 이는 오늘날 청소년에게 경제 조기교육을 하자는 흐름으로 이어집니다.

   

요구가 있을 때마다 유태인들은 거부하기 보다 자신들 경제적 중요성을 역설하면서 몸값을 치루었던 것입니다. 서고트족이나 이베리안이 셈법을 잘 알지 못합니다. 반면 카르타고 유태인은 수천 년간 해온 가문 비법이 있었던 것입니다. 처음부터 큰 자본으로 시작한 이들은 극히 소수고, 대부분은 유태인 하층 기능공이었습니다. 구두 수선, 보석 세공, 유리 세공, 직물 제조, 재단사 등으로 시작한 유태인은 번 돈을 쓰기보다 최대한 절약해서 남은 돈을 가문 비법인 대출 사업으로 돌려 돈을 불렸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유태인은 빠르게 상권을 장악해서 부자 자유민 신분이 됩니다.

        

 

   

 

   

3. 이슬람 왕국과 유태상인

   

8세기 무렵, 서고트족 사이에 왕위 승계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이때, 북아프리카 아랍 용병을 불러들이는데, 아랍 용병들은 이베리아 반도에 들어서자마자 태도를 돌변합니다. 시리아, 레반트, 이집트 등지에서 친지들 불러서 총 6만 명으로 바스크, 카탈루냐, 나바라 정도 남기고 아라곤 왕국까지 포함해서 이베리아 반도를 정복합니다. 정복한 후에는 이슬람 본국과도 관계를 끊고 독립합니다.

   

이슬람 왕국은 상대적으로 관용 정책을 취합니다. 유태상인에게도 인두세 등 세금을 다른 부족에 비해 좀 더 많이 내라고 합니다. 허나, 당대 여타 다른 카톨릭 왕국과 비교하면 유태상인에게는 그야말로 껌값이었습니다.

   

이베리아 유태상인은 부를 축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유태인에게는 국가가 없었으므로 정치적 대립이 어떠하든 유태인은 유태인 인맥을 통해 장사를 했습니다. 영국, 북유럽과 지중해, 북아프리카 중계 무역만 해도 부자가 되는 것 시간 문제였습니다. 여기에 종교 문제가 사라지니 날개를 단 격입니다. 게다가 당시 이슬람 문화는 세계 최고 선진 문화였습니다. 카르타고 유태인은 아랍어에 능통했던 만큼 다른 기독교인과 비교할 바 없이 빠르게 문화를 흡수합니다.

   

이 시기 유태인은 국가 살림살이까지 맡는 궁정 유태인으로 출세합니다. 요즘 중동 국가와 유사합니다. 나라 안전보장은 사막부족에게 맡기고, 나라 경제는 월가 금융가에게 맡기고, 이슬람 왕과 귀족은 할렘에서 향락을 즐기면 되었던 것입니다.

   

   

4. 비잔틴제국과 그리스 상인

   

8세기 이전까지는 비잔틴 상인이라 부르는 그리스 상인이 지중해 인맥을 구축했습니다. 그리스에도 게르만족이 이동하고, 슬라브족이 그리스에 눌러 살다보니 그리스인 역시 이베리아 남단, 시칠리아, 지중해 섬 등으로 디아스포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 상인은 비잔틴 상인으로, 카르타고 상인은 유태인 상인으로 이름만 바꾼 채 기원전부터 지중해 무역 패권을 다투었던 것입니다.

   

허나, 여기에 새 강자가 등장합니다. 과거 카르타고 본거지 근방인 튀니지에 근거지를 둔 이슬람 세력이 8세기에 지중해를 장악합니다. 827년, 이슬람세력이 시칠리아를 정복합니다. 또한, 코르시카, 샤르데니아, 이탈리아 반도를 수시로 공략합니다. 846년에는 로마 베드로 성당이 불탈 정도였습니다.

   

예서, 당대 카톨릭이라면 이슬람왕국에서 궁정유태인으로 지내는 유태상인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5. 노르만족과 제노바, 베네치아 상업 도시 출현

 

11세기에 또 다른 강자가 등장합니다. 영국을 정복한 노르만족이 지중해로 진출합니다. 이들은 튀니지 이슬람 세력뿐만 아니라 비잔틴 상인세력까지 차례로 무너뜨립니다. 로마까지 곧장 가서 교황을 구출합니다.  

   

유태상인, 그리스상인, 이슬람, 노르만족 공통점은 항해술에 뛰어나다는 것입니다. 해서, 점차 유럽 기후도 온화해지고, 게르만족도 정착단계로 가자, 지중해 중심으로 무역이 활성화되고, 제노바, 베네치아 상업 도시가 기술을 전수받아 무역에 눈을 뜨기 시작합니다.

   

      

     

   

6. 아라곤왕국연합과 바르셀로나 유태상인

        

 

아라곤 왕국은 피레네산맥 남부 사라고사를 수도로 하는 왕국이었는데 이슬람 왕국에 정복당했습니다. 이후 아라곤 왕국은 국권을 회복하고 정략결혼을 통해 카탈루냐와 합쳐 아라곤왕국연합 시초를 이룹니다.

   

아라곤과 카탈루냐를 비교하면,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발전한 카탈루냐 국력이 월등하게 높았습니다.

   

한니발 가문인 바르카 가문은 오늘날 카탈루냐 바르셀로나라 불리는 도시를 기원전 3세기경에 건설하였습니다. 바르셀로나란 도시 이름은 바르카 가문 소유 도시라는 바르시노(Barcino)에서 유래합니다.

   

하면, 카탈루냐와 바르셀로나는 왜 부유했을까요?

소금 때문입니다.

   

카탈루냐 카르도나에는 품질이 좋은 암염이 있었습니다. 산 자체가 구약에 나오는 소금기둥처럼 소금 산인 겁니다. 카르도나 소금은 바르셀로나 항에서 지중해 전역으로 수출되었고, 이중 주거래 상인으로는 이후 베네치아 상인과 소금 전쟁을 하는 제노바 상인이 있었던 것입니다.

   

소금은 염인이라 하여 화폐수단 대용으로까지 쓸 만큼 무역 핵심 물품이었습니다. 당대 원정 무역 대표적 물품 두 가지만 들자면, 소금과 노예인 것입니다. 소금과 노예과 각지 특산품을 매매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서, 베네치아는 구약에 등장하는 레바논처럼 목재가 좋은 산지를 두고 있어서 목재가 추가되었던 것입니다.

   

바르셀로나를 포함한 카탈루냐 지역은 농수산물이 풍부하고, 특산물인 귀한 소금까지 있으니 부유하지 않을 까닭이 없습니다.

   

카탈루냐 바르셀로나에 유태인이 있었습니다.

   

샤를5세 프랑스왕은 아라곤왕 페드로 4세에게 지도 제작을 의뢰합니다. 당시 카탈루냐 지도제작술은 유럽 최고였기 때문입니다. 아라곤왕은 당대 최고 장인인 유태인 아브라함 크레스크에 지도 제작을 맡깁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카탈루냐 지도'입니다. 

 

   

   

14세기에 제작된 이 지도가 한국인에게 흥미로운 건, 아시아 동쪽 끝에 '카올리(Kao-li)'를 표기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쪽발을 지시하는 '지팡구(Zipangu)'를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당대 유태인 지식 수준이 매우 높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포르투갈 돈 주앙 왕실 천체학자인 유태인 아브라함 자쿠토(Abraham Zacuto)는 태양 고도를 측정하여 위도를 구할 수 있는 천측력(Almanach Perpetuum)을 히브리어로 출판했습니다. 동인도 항로를 개척한 바스코 다 가마가 아브라함 자쿠토에게 천문을 배웠다는 설이 있습니다. 또한, 아메리카를 발견한 컬럼버스 또한 아브라함 자쿠토가 만든 항해도를 썼다고 합니다.

   

참고로 제노바 사람 콜럼버스는 유태인이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유태인 콜럼버스 동상이 바르셀로나에 있습니다.

   

이처럼 카탈루냐 바르셀로나는 유태인 역사가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인드라가 수십 년간 좌파였기에 스페인 내전 배경에 오랜 기간 관심이 있었습니다. 아시는지요? 빅터 로스차일드가 중심이었던 케임브리지 대학 조직이 스페인 내전을 계기로 소련 간첩이 되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물론 진실은 모릅니다. 소련 공산당이 빅터 로스차일드 3대 남작이 간첩인지, 빅터 로스차일드 3대 남작이 소련 간첩인지. 허나, 인드라는 소련 공산당이 빅터 로스차일드 간첩이었다는 데에 무게를 둡니다. 해서, 오늘날 카탈루냐 독립운동도 국유본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이 인드라 분석입니다.

   

이처럼 유태인 활약이 뚜렷한 만큼 멸망도 극적입니다. 황영조 마라톤 금메달로 유명한 몬주익이란 유태인 산이라는 이름입니다. 헌데, 유태인 학살 시기에 학살을 많이 당해서 유태인 무덤으로도 불리는 것입니다.

        

 

6. 왜 카탈루냐공화국, 혹은 바르셀로나 공화국이 아니라 아라곤연합왕국인가

 

헌데, 왜 명함이 바르셀로나나 카탈루냐가 아니라 아라곤인가. 아라곤이나 카탈루냐, 바르셀로나 모두 프랑크 왕국 영향 하에서 백작령으로 출발해서 지위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아라곤 왕이 산초 3세 후손이기에 카탈루냐보다 지위가 높은 데다 명분이 있었습니다. 산초 3세는 북부 자잘한 왕국들을 군사력에 의하지 않고 정치력으로 통일하여 에스파냐를 건설하였습니다.

   

해서, 아라곤왕 공주와 바르셀로나 백작 라몬 베렝게르 4세 결혼임에도 국명이 아라곤이 되었습니다. 일부에서는 카탈루냐 백작이라고도 하는데, 딱히 틀린 표현이 아닙니다. 당대 바르셀로나 백작이 카탈루냐 지역을 장악했습니다. 하여간, 이들 결혼으로 알폰소 2세가 등장합니다.

   

향후 정략결혼을 통한 영토 확장은 에스파냐 역사에서 중요합니다.

   

1469년 아라곤 왕 페르난도와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과의 결혼으로 오늘날 스페인이 탄생하였고, 이후에는 합스부르크 왕조와 정략결혼을 하여 오스트리아와 스페인을 다스리는 카를로스 1세, 또는 카를 5세를 탄생시켰습니다. 게다가 불발이었지만, 정략결혼으로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합칠 수도 있었습니다.

   

아라곤연합왕국은 십자군 전쟁으로 인한 영향으로 군사력 증강과 정략결혼을 통한 정치력과 카탈루냐 경제력, 유태상인 영향력을 바탕으로 에스파냐 이슬람 세력을 물리쳐서 발렌시아를 정복한 이후 해상으로 진출하여 발레아레스 제도 마요르카, 나폴리와 시칠리아, 비잔틴까지 영향을 끼칩니다.

   

해서, 14세기 중엽 알폰소 5세 나폴리 정복 이후 카탈루냐 유태인 상인들은 영국에서 수단, 콘스탄티노플에 이르기까지 지중해를 한동안 카탈루냐 영지로 만듭니다. 

 

하면, 14세기에 카탈루냐 지중해 무역이 전성기였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 14세기에 접어들면 유태인 상인이 고위직에 진출합니다. 아라곤왕 페르난도 2세는 카스티야 왕녀 이사벨라와 결혼하여 스페인과 오스트리아를 통치하는 카를로스 1세를 탄생시키는 왕입니다. 또한 이베리아 반도 이슬람을 끝장내고 유태인 추방령을 내린 왕이기도 합니다. 헌데, 페르난도 2세 고조할머니가 유태인이었을 만큼 유태상인은 이미 스페인 왕가와 귀족사회에 뿌리를 내렸던 것입니다.

     

      

둘째, 아라곤연합왕국 왕권이 취약했습니다. 아라곤연합왕국은 통일국가라기보다는 연합국가였습니다. 각 연합 국가마다 사실상 군주격인 귀족이 따로 있고, 의회가 따로 있었습니다. 심지어 아라곤연합왕국 초기에는 왕이 귀족 특권을 인정한다는 서약을 하고 왕에 등극할 정도였습니다. 왕이 한마디로 귀족들 눈치를 보아야 했던 것입니다. 헌데, 이런 느슨한 연합이 성장기에는 야심가들을 포용할 수 있는 좋은 그릇이었습니다. 그런 만큼 아라곤연합왕국이 수틀리면 언제든 탈퇴할 수 있었습니다.

    

 

셋째, 14세기에 유럽은 백년 전쟁과 페스트에 시달립니다. 이는 육로 교역을 어렵게 하는 요인입니다. 이는 지중해 무역하는 이들에게는 반사이익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허나, 15세기 중엽 오스만투르크가 지중해를 장악하면서 아라곤연합왕국은 급속히 쇠퇴합니다.

   

   

7. 제노바 상인 VS 베네치아 상인

   

베네치아는 고트족 등 게르만족을 피해 정착한 이주민이 주축입니다. 베네치아는 비잔틴 세력이 약화하고 그에 따라 그리스 상인이 힘을 쓰지 못하자 8세기부터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사업을 하려면 길드를 조직하고 수호성인이 필요하였는데 828년 이집트에서 성 마르코 유해를 밀반입하여 명분을 만들어 지중해 무역을 통한 부의 축적으로 비잔틴제국은 물론 로마교황청과도 독립합니다.

   

베네치아는 13세기 4차 십자군 원정을 적극 지원하여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여 잔존 비잔틴 상인세력을 무력화시켜 동지중해 패권을 장악합니다. 이후 소금전쟁 등을 통해 제노바와 경쟁하나 14세기 중반에 이르러 제노바를 패퇴시키고 지중해 무역을 독점하고 15세기 중반 1453년 비잔틴 제국이 멸망하자 최전성기를 맞이합니다.

   

허나,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투르크가 지중해를 위협하고, 이는 프레베자 해전으로 절정에 다다릅니다. 프레베자 해전은 1538년 9월 28일 그리스의 북서부에 있는 프레베자 근해에서 교황 바오로 3세가 조직한 로마 가톨릭 동맹의 군대와 오스만 함대 간에 벌어진 전투입니다. 이 때 가톨릭 동맹은 교황령, 스페인, 제노바, 베네치아, 몰타 기사단 등 유럽 지중해 전력을 몽땅 투입한 것인데, 대패합니다.

   

오스만군은 10척을 침몰시키고 3척을 불에 태웠으며 36척을 나포하였고, 3,000명을 포로를 잡았습니다. 오스만 군은 한 척도 잃지 않았고, 단지 400명의 전사자와 800명의 부상자를 기록했을 뿐입니다. 오스만 군은 프레베자 승리와 1560년 드제르바 전에서 승리하여 1571년 레판토 해전 패배 때까지 지중해를 장악합니다.

   

14세기 중반에 베네치아에게 지중해 상권을 내주고 15세기에 들어서는 비잔틴 제국 멸망과 오스만투르크 위협이 가시화하니 제노바 상인은 다른 방도를 찾아야했습니다.

   

해서, 유태인 컬럼버스가 신대륙 탐험에 나섰다는 것입니다. 컬럼버스는 처음에 포르투갈을 찾아가 거절당하고 스페인에서 허가를 받아 아메리카로 향했습니다. 이때, 포르투갈이 왜 거부한 것입니까.

   

일반적으로는 포르투갈이 희망봉을 경유한 동인도 항해 경로 기득권에 집착하여 컬럼버스 제안을 거절하였다고 나옵니다.

   

"동 주앙 2세 때에는 페르낭 둘모가 다시 원정대를 조직해 줄 것을 왕에게 요청하자, 왕은 1486년에 왕령으로 그에게 장차 발견하게 될 섬이나 대륙의 세습 통치권을 미리 인정했다.

   

1487년에 실행된 것으로 추측되는 둘모의 이 여행은 콜럼버스의 항해보다 5년 전에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여, 신대륙의 발견에 있어 포르투갈이 선취권을 가졌음이 몇몇 사가(史家)들에 의해 입증된다. 자료의 불충분 때문에 일부 사가들은 서류가 없음은 카스티야 왕국과 라이벌 관계에 있었던 포르투갈 왕들의 비밀 정책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영국의 역사가 데이비스(A. Davies)는 그 원정이 실현되었음을 주장할 뿐만 아니라, 포르투갈의 지도를 통해서도 증명되고, 페르낭 둘모가 1487년에 아메리카의 해안에 상륙하여 그 곳을 답사했고, 포르투갈의 한 해도(海圖) 작성가의 배신으로 그 사실을 알게 된 콜럼버스가 1492년에 그의 항해를 위해 그 자료들을 이용했다고 밝혔다.

   

둘모의 여행이 실현되었든 안 되었든 간에 콜럼버스의 전기 작가들이 기록한 바를 보면, 콜럼버스 자신도 아메리카 대륙의 해안에 포르투갈의 항해자들이 여행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 항해자들 중에는 1484년 이전에 안토니오 레미라는 마데이라 인이 있었는데, 그는 서대서양 쪽에서 3개의 섬을 보았음을 보고했던 것도 밝혀져 그 섬들이 앤틸리스 제도인 것이 확실하다. 이 사실로 비추어 볼 때, 아메리카 대륙은 콜럼버스 이전에 포르투갈의 항해자들에 의해 이미 발견되었음을 알 수 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 ··· d%3D3272#

   

허나, 둘모 탐험이 밝혀짐에 따라 포르투갈 왕실 늦장 대응으로 정리되는 듯싶습니다.

   

   

8. 유태인 추방령은 불가피했다

   

14세기에서 15세기 중엽까지 백년 전쟁과 흑사병으로 인해 지중해 무역이 활성화되어 유태인 상인을 비롯한 지중해 상인들이 큰 부를 획득한 반면, 에스파냐 내륙에서는 인구 감소와 경제 침체로 큰 고통을 받아야 했습니다. 해서, 에스파냐 곳곳에서 농민은 물론 도시민도 포함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이에 대한 아라곤연합왕국 처방은 유태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는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잘 나갈 때는 유태상인과 함께 해먹더니 CU 편의점이 문제가 발생하자 쪽발석현만 공격하는, 쪽발민주당, 골룸빡, 쪽발한걸레, 쪽발참여연대, 공정위 태도와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수 년 전부터 문제가 있어 편의점 점주가 항의데모할 때는 입 닥치던 자들이 인드라가 근래 이슈 파이팅하니 호들갑을 떠는 건 당대 스페인 성직자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불만은 세 가지 양상으로 나타납니다.

   

첫째, 종교 부문입니다. 중세 온난기는 950년부터 1250년까지입니다. 기후가 변화하니 14세기에 접어들어 농산물 수확이 좋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흑사병까지 겹치니 농산물 생산이 급감합니다. 이처럼 환경이 혹독해지면, 인류 사이에서는 자유의지론보다는 숙명론이 우세하게 됩니다.

   

자유의지론과 숙명론 사이에서 어느 것이 낫다 할 수 없습니다. 인간 대처 방식입니다.

   

숙명론은 내 꼬라지가 원래 이렇지 하는 생각으로 마음을 평온하게 할 수 있습니다. 누가 아무리 재주가 있더라도 부처님 손바닥, 예수님 앞 속죄양입니다. 이것이 평등사상 기초입니다. 이리 하면, 인간은 공동체를 이루어 없이 사도 원래 없이 살았기에 견딜 수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방글라데시 같은 나라 사람들이 행복한 것입니다. 공동체주의입니다.

   

반면 자유의지론은 내 꼬라지 태어나길 형편없지만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유사상 기초입니다. 다함께 못 살 때 나 홀로 잘 살면 마음이 편치가 않습니다. 허나, 중세 온난기처럼 기후가 온화하고 사회 발전이 가속화하면 새로운 발견과 발명으로 획득한 부가 미덕이 됩니다. 예서, 개인주의, 자유주의가 발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생존과 관련이 있습니다. 해서, 재테크도 보면, 활황일 때는 고위험 고수익을 노리고, 불황일 때는 안전 투자하지 않습니까.

   

해서, 자유와 평등은 대립 관계입니다. 이런 것 제대로 모르고, 진보이니 보수이니, 좌파이니 우파이니 하면 인드라한테 병쉰 취급 받습니다.

   

정리하면, 성직자로서는 유태인 책임 전가가 불가피하지만 최선인 것입니다. 숙명론적 관점에서 보면, 유태인이 부자가 되고, 카톨릭이 거지가 되면, 카톨릭이 망한 꼴이 아니겠습니까. 카톨릭이 부자가 되고, 유태인이 거지가 되어야 하는 겁니다.

   

   

둘째, 정치 부문입니다. 아라곤연합왕국은 스페인을 기반으로 합니다. 헌데, 1421년 아라곤 연합왕국 알폰소 5세는 나폴리 왕국에서 일어난 내분에 개입하며 1443년 나폴리 왕국을 합병하는 데 성공합니다. 이후, 알폰소 5세는 나폴리가 마음에 들어 수도로 하고 나폴리 궁전을 짓고 삽니다.

   

왕이 스페인을 잊고 이태리만 신경을 쓰니 귀족들이 반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귀족들로서는 농민 반란에 왕이 이태리만 잘 해주고 스페인을 푸대접하니 귀족들이라고 무슨 수가 있겠냐는 식으로 변명할 수 있었습니다.

   

   

셋, 경제 부문입니다. 인간은 눈앞에 벌어지는 일에 민감합니다. 본디 잘 사는 이들이 잘 사는 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허나, 자신처럼 하층이었는데, 어느 순간 상류층이 된 자들에 대해서는 민감합니다. 자신이 못 사는 건 숙명인 줄 알았는데, 동료나 친구, 친지가 출세를 합니다.

   

유태인은 어떤 시대이든 숙명론을 자유의지론으로 바꿀 수 있는 민족인 듯 보입니다. 아무리 악독한 환경에 유태인을 가두어도 유태인은 영화 '쇼생크 탈출'처럼 탈출하고야 마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유태인에 감탄하면서도 자기 자신을 바라보니 형편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무능합니다. 그 무능을 직시해야 발전이 옵니다만, 사람이란 어디 그렇습니까. 최소한 78%는 타인 탓을 하는 것이 마음이 편합니다.

   

이는 인류 보편적 행동양식입니다. 인류는 세 가지 방식으로 인류애를 실현합니다. 하나, 1% 정도는 영웅적인 행위로 인류를 구원합니다. 둘, 기브 앤 테이크. 21% 정도는 다른 이 행복을 책임질 수는 없어도 자기 한 몸 정도 책임질 수 있습니다. 셋, 고발 및 증오. 가장 손쉬운 인류애 실현 방식입니다. 그냥 누구 미워하면 됩니다. 이는 원시 시대에 공동체에서 다수파가 아니면 살아남기 힘들다는 오래된 기억에 따른 것입니다.

   

   

9. 1492년 스페인 유태인 추방령

   

1492년 1월 그라나다를 함락합니다.

1492년 3월 유태인 추방 칙령을 발표합니다.

1492년 8월 컬럼버스 배가 출항하고 10월 신대륙에 도달합니다.

   

   

알함브라(Alhambra) 칙령, 1492년 3월 31일

http://blog.naver.com/miavenus/memo/70149850287

   

유태인 추방史

1012 - 마인츠            1446 - 브란덴부르크     1541 - 프라하

1182 - 프랑스            1462 - 마인츠           1550 - 제노아

1276 - 북부 바이에른     1483 - 마인츠           1551 - 바이에른

1290 - 잉글랜드          1483 - 바르샤바         1557 - 프라하

1306 - 프랑스            1492 - 스페인           1569 - 교황령

1322 - 프랑스            1496 - 포르투갈         1649 - 함부르크

1394 - 프랑스            1496 - 나폴리           1669 - 비엔나

1420 - 리용              1498 - 뉘른베르크       1744 - 보헤미아

1421 - 오스트리아        1510 - 브란덴부르크            모라비아

1424 - 퀼른              1515 - 제노아                  프라하

1438 - 마인츠            1533 - 나폴리           1891 - 모스크바

1439 - 오거스부르크       1541 - 나폴리

   

   

1492년 스페인 유태인 추방령은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유럽에서 이전 이후로 유태인 추방령이 있었지만, 1492년 스페인 유태인 추방령이 가장 영향력이 있었다고 인드라는 평가합니다. 이 사건 배경을 놓고 여러 설이 분분합니다.

   

이에 대한 인드라 국유본론 입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 아라곤연합왕국 종교적 입장이 최우선이었다고 봅니다. 십자군 전쟁을 최후까지 벌여서 유럽에서 이슬람 세력을 몰아낸 것은 중세 최대 이슈인 것입니다. 이는 카톨릭 국가 중에서 아라곤연합왕국 지위를 한층 높이는 것입니다. 실리보다 명분이 우선이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실리적 이유로 유태인 추방령을 했던 다른 유태인 추방령 정책과 결정적인 차이인 것입니다.

   

당시 여왕의 보좌관과 세금 징수 총책임자로 고위직을 맡고 있던 유태인 아브라바넬과 아브라함 세니오는 천문학적 숫자인 3만 냥의 금화를 내면서 이를 막아보려 했지만 종교 재판소장 토르케마다의 반대로 무산됐습니다.

   

둘, 15세기말 아라곤연합왕국은 귀족, 도시민, 농민, 식민지 반발에 정신이 없던 때입니다. 이런 때에 그라나다 함락과 함께 유태인 추방령을 전한다면, 정치적으로 몇 가지 효과가 발생합니다. 아라곤연합왕국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란 효과입니다. 여기에 그간 유태인과 아라곤연합왕국이 붙어먹어서 신이 노했다는 민간신앙을 잠재울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아라곤연합왕국 자신감입니다. 지금까지 이베리아 반도에 무슬림이 있어서 유태인을 인정하였지만, 무슬림이 없으면 유태인도 없는 것입니다.

   

셋, 상당한 착각입니다만, 여왕은 유태인이 없어도 국가 경영이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해서, 1492년 3월 30일 스페인에 살고 있는 모든 유대인은 8월 전까지 나라를 떠나거나 기독교로 개종하라는 왕명이 떨어졌습니다.

   

30만 명에 달했던 유태인 추방령 결과는 어떻습니까.

   

스페인 경제가 한동안 마비상태였고, 이후 오랫동안 스페인 경제 회복이 어려웠습니다. 이후 세계사에서 스페인이 사라집니다. 황금알을 낳는 닭을 죽인 결과였습니다.

   

   

      

인드라는 정치를 하지 않겠으며,

책을 더 이상 쓰지 않으며,

언론에 기고하지도 인터뷰를 하지도 않을 것이며,

종교단체를 만들지도 않을 것입니다.

국유본론을 소명으로 여기고

지금처럼 살다

행복하게 가겠습니다

매일매일 행복하겠습니다

마.자.세.

한반도 평화와 통일, 경제 발전과 사회 복지를 위하여

친미친중 반일반북 쪽발정은 척살로 조국통일 쟁취하자

쪽발민주당 해체 쪽발석현 아웃

쪽발재벌 타도 골룸빡 처단

쪽발이에게 죽음을 쪽발왕에게 천벌을

쪽발타도해방투쟁 만세

   

   

국제유태자본론 : 서로마제국 멸망 이후 서양사 초간단 정리 1 : 롬바르디아 상인에서 메디치 가문까지 국유본론 2012

2012/10/23 07:00

http://blog.naver.com/miavenus/70149705549

   

   

   

국제유태자본론 : 서로마제국 멸망 이후 서양사 초간단 정리 1

롬바르디아 상인에서 메디치 가문까지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2/10/23 

 

 

인드라가 높임말을 쓸 때는 국유본과 대결보다는 이웃 소통용이라고 보시면 무방합니다. 아울러 인드라 특성이 있습니다. 어떤 문제를 다루려면 그 근원을 파헤쳐야 직성이 풀리는 것입니다. 이는 학자적 기질인데요. 가령 똑같이 '시간'을 생각한다 하더라도 성공적인 벤처기업인 이웃 분은 시간을 활용해서 돈을 버는 방법이 있는가 하는데, 인드라는 반대 방향으로 '시간'에 대한 근본적인 개념이 오늘날 이 시대에서 어떤 의미인가를 생각합니다.  

   

이 글도 록펠러 이야기를 하다 보니 유럽사, 서양사를 우선 거론하지 않고서는 다른 음모론자나 혹은 정설 교과서 서양사론자들에 익숙한 독자들과 인드라가 자칫 소통하기 힘들 수 있구나 하는 판단 때문입니다. 개념이 잡히지 않으면, 인드라 이야기 좀 읽다가 국유본이 깔아놓은 매트릭스 때문에 황당한 걸?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해서, 비록 인기가 없는 포스팅일지라도 개념을 잡는 것이기에 이해를 바랍니다. 게다가 흐름이 있는데요. 인드라 이웃도 유행을 타는데요. 요즘 인드라 이웃 중 주도하는 세력이 개념 이웃들이어서요^^!

   

개념 이웃들이란 당장에 연연하기보다 록펠러처럼 긴 안목으로 백 년 동안 먹고 살 사업을 구상하는 이들을 말합니다.  

 

덧글에 답글을 달아야 하는데,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인드라가 덧글에도 답글을 달려면 심사숙고를 해야 해서 심력을 많이 소모해야 합니다. 헌데, 본글에 집중해야 할 때는 덧글에 대한 답글을 쓰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나면 한꺼번에 덧글 답글을 쓰는데요. 인드라 능력 부족입니다. 다만, 읽고는 있다는 점을 간신히 말할 수 있겠습니다.   

   

   

1. 춥다

   

서로마가 멸망한 이후 중세 온난기(950년 ~ 1250년)가 오기 전까지 중북부 유럽은 인간이 살기에는 매우 추웠습니다. 게르만족들이 중앙아시아 민족에서 보듯 부족 형태로 원시적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카를 대제의 제국

   

 

 

2. 카를대제(샤를마뉴)와 롬바드리아 상인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갈리아 전쟁기에 잉글랜드처럼 세계사에 최초로 등장하는 나올 정도면 문명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 실체가 요새입니다. 유럽 주요 도시는 대부분 로마제국 요새에서 기원합니다. 맨체스터의 '스터(ster)'는 로마제국 요새를 의미하는 성곽(Castra)이란 라틴어에서 유래합니다. 그처럼 유럽 몇몇 지역들은 로마제국 식민지 정책 덕분에 문명을 경험하였습니다.

   

그중에는 네덜란드벨기에 접경지대가 있습니다. 카이사르가 정복했다면 쓸 데 없는 지역을 정복하지 않았을 것이고, 전략적 요충지를 공략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게르만족이 숱한 부족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부족 중심지를 정할 때, 이왕 만들어진 요새 중심지를 활용할 것입니다. 중심지이니 사람들이 몰려들 것이고 요새가 안전하니 시장이 형성되어 도시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유럽이 높은 위도에도 기후가 온화한 건 멕시코 만류 때문입니다. 헌데, 상대적으로 온화한 지역부터 중세 온난화 혜택을 미리 받았을 것입니다. 반면 대륙 내부는 여전히 매우 춥습니다.

   

카를대제가 로마 요새, 문명화, 대륙 내부에 비해 상대적으로 온화한 기후 덕분에 유럽을 장악합니다. 문명화하지 않은 게르만족을 물리치고 로마 교황으로부터 로마황제 칭호를 받습니다.

   

이 시기 카를대제 보호를 받는 동시에 교황청과 거래를 튼 이탈리아 북부 롬바드리아 상인이 활약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롬바드리아하면 뭐야 하실 분이 있겠죠^^? 한국인이 이태리 여행가면 반드시 들러 쇼핑한다는 밀란, 혹은 밀라노하면 이해가 되시나요? 밀란은 롬바르디아 주도이며, 대표적 상업도시입니다. (인드라도 밀란을 여행했답니다, 쇼핑 목적은 아닙니다만~!)

   

롬바드리아 상인은 영국 런던까지 가서 오늘날에도 금융권이 밀집한 런던 시티가에 흔적을 남겼습니다. 

 

정리하면, 이시기 왜 롬바드리아이니까. 그건 중동 이교도와 교황청, 카를대제 중북부유럽을 로만틱 가도(로마제국 때 건설한 로마 도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길목, 연결 통로, 허브였기 때문입니다. 이후 롬바드리아 상인은 십자군 원정으로 원정 무역을 통한 전성기를 누립니다.  

   

   

   

   

   

 

3. 오토 1세와 중세 온난기, 게르만족 재산 균등분할, 교회 권력, 상인길드, 선제후 

 

  

아헨은 쾰른 남서쪽 70km 지점에 있으며, 네덜란드·벨기에와의 국경에 접한 베스트팔렌 지역, 라인 지역입니다. 로마시대부터 쾰른에서 아헨을 거쳐 브뤼셀 파리를 잇는 로만틱 가도에 있던 지역이기도 합니다. 이곳에서 종종 신성로마제국 대관식이 벌어졌는데요. 오토 1세도 아헨에서 왕위에 오릅니다.

   

오토대제가 즉위했다는 건 그만큼 유럽 기후가 보다 더 따뜻해졌다는 것입니다. 

 

헌데, 오토대제는 왕이 되자마자 시련에 봉착합니다. 징기스칸은 아들들에게 정복 지역을 균등 분할을 했습니다. 그처럼 게르만족은 장자에게 재산을 몰아주기보다 유목민 전통에 따라 균등 분할을 했습니다.  해서, 카를대제는 아들들에게 제국을 분할해서 물려주었던 것입니다.

 

   

 

2차 베르됭 조약과 리베몽 조약에 의한 분할

 

   

 

각자 기반이 있으니 능력에 따라 형제들 사이에 분쟁이 있겠지요?  왕국 내에서조차 영지전을 불사하는 상황이라 오토대제는 자신 능력을 입증해야 했습니다.  

   

오토대제가 왕위에 오른 뒤 초기에는 형제들에게 대공과 변경백 자리를 주며 유화책을 취합니다. 허나, 이런 노력도 허사가 되어 곳곳에서 형제들 반란이 일어납니다. 이에 오토대제 방책은 종교였습니다. 교회와 동맹하여 명분을 획득하여 정권을 안정화시킵니다. 

   

또한, 네이버 두산백과사전 설명에 따르면, 유럽 인구는 1,000년까지 자연증가율이 정체되었습니다. 헌데, 중세 온난기에 접어들면서 인구는 폭발적으로 늘어났습니다. 1000년에 약 4200만 명이었던 유럽의 인구가 1150년까지 5000만 명으로 증가하였으며, 이후 50년 동안 그 수가 6200만 명에 이를 정도로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던 것입니다.

   

인구가 증가하니 도시도 증가했습니다. 1150년부터 1950년까지 중부 유럽에 건설된 새로운 도시의 숫자를 보여 주는 자료에 의하면, 1200년경에 50여 개의 도시가 건설되기 시작하면서 중부 유럽에서 새로 건설된 도시의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1250년경 이후에는 100여 개의 도시가 건설되었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1300년경에 절정에 도달하여 220여 개의 도시가 건설되었습니다.

   

짧은 기간에 군주 통치권력을 넘어서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도시가 늘어나고, 도시에 상인길드가 형성되고, 상인길드와 귀족이 결탁하니 귀족 권력이 강화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십자군 원정 때문에 원정상인이 중심인 상인길드 영향력은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베스트팔렌동맹, 라인동맹, 프로이센동맹 등이 발생합니다. 원정 상인길드는 상인 보호나 상거래에 국한하기 보다는 귀족과 결탁하여 도시 상권을 전체를 장악하는 방식입니다.  

   

명분 때문에 교회 권력이 필요했고, 실리 때문에 원정상인 자금을 확보한 귀족 권력이 필요했기에, 이 영향으로 신성로마제국은 황제를 선제후 제도로 선출하게 됩니다. 선제후란 투표권이 있는 제후를 의미하는데요. 보통 대주교 등 교회 세력 3명과 귀족 세력 3명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헌데, 여기서 대주교도 황제가 임명하거든요.  이것이 문제가 되어 교회 개혁, 서임권 분쟁, 카놋사의 굴욕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4. 카놋사의 굴욕, 황제와 교황 권위 추락, 십자군 원정 : 기벨린(황제파)와 겔프(교황파) 대결

   

   

왜 국유본은 다빈치 코드를 통해 성당기사단 음모론을 퍼트리나

http://blog.naver.com/miavenus/70125598335

 

 

카놋사의 굴욕으로 대표되는 그레고리우스 7세와 하인리히 4세 사이 서임권 투쟁은 종교 개혁에서 비롯하였습니다. 오토대제 이후 황제가 대주교를 임명할 권한을 행사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헌데, 프랑스 베네틱트 산하 부르고뉴 소재 클뤼니 수도원 종교 개혁이 민중 지지를 받아 전 유럽으로 퍼지면서 교황도 이 여론을 무시하고서는 교황 권력을 보장할 수 없기에 세속화한 교회를 개혁하고자 하였습니다. 하여, 르네상스 시대 데카메론과 같은 풍자 문학에서 보듯 정치권력과 교회 유착 관계가 당대에도 주요 비판 대상이다 보니 교황은 당대 한참 장사에 재미를 보던 밀라노 지역 대주교 임명 압력을 철회하라고 하인리히에게 요구합니다.

   

이에 하인리히가 교황 요구를 무시하였는데요. 이때, 여론은 교황이 유리했습니다. 눈치를 보던 제후들이 교황 편을 듭니다. 교황이 교회 개혁하겠다는 명분이 있으니까요. 속셈으로는 하인리히가 교황마저 무시하는 패권적 권력에 두려움을 느끼고 견제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에 하인리히가 맨발로 카놋사까지 가서 교황에게 항복 선언을 합니다.

   

헌데, 교황 권위가 회복되나, 카놋사의 굴욕으로 제후들 태도가 바뀝니다. 제후 대표격인 하인리히가 교황에게 당하니 제후 권력 역시 교회에 명분상 일부 지지를 받고 있던 터에 제후보다 교회가 우위를 선언한 카놋사의 굴욕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해서, 바뀐 여론을 명분으로 하인리히는 로마로 원정을 가서 교황을 교체합니다. 

 

이로 인하여 당대 교황 대 황제 투쟁이라는 영향을 고스란히 받을 수밖에 없던 롬바드리아 상인 중심지 밀란에서는 기벨린(황제파)와 겔프(교황파) 세력으로 분열하여 이후 근대까지 이어집니다. 300인위원회 같은 음모론 책자를 보면, 검은 귀족이니 국왕파, 교황파 운운하는 대목이 나오는데요. 연원이 롬바드리아 밀란에 있다는 것을 참고하세요^^!

   

또한, 이 사건은 교황 권위 추락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인드라가 강조했지요. 십자군 원정은 중세 온난화로 경제가 살아나고, 그로 인한 추락한 교황 권위 회복을 위한 전쟁이라고 말입니다. 황제가 위기로 추락한 위신을 되찾았듯, 교황 역시 황제로 인해 축출을 당하자 이태리에서는 교황 권력을 지키자는 흐름이 등장합니다.  

 

교회 개혁이란 경제가 살아나니 숙명론적 신본주의적 가치관에서 자유의지적 인본주의적 가치관이 점증하는 데서 나온 교회 응답이며, 경제 발전에 따른 빈부격차가 발생하니 교회가 이에 응답하는 과정에서 나온 결과인 것입니다. 

   

하여, 로마 교황청은 십자군 원정이란 승부수를 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5. 십자군 전쟁, 메디치가, 루이 14세와 프랑스 왕권 강화

 

"동로마제국 황제가 당대 셀주크투르크에게 대패했다. 직후 황제가 이슬람 세력으로부터의 보호 요청을 카톨릭 교회에 호소하자 카톨릭 교회가 기독교적 대의라는 명분하에 십자군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허나, 명분과 달리 실제로는 정치경제적인 배경이 있었다. 농업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증가하여 인구가 늘었다. 교황 권위를 유지하는 것은 물론 동로마까지 장악하여 명실상부하게 기독교 세계의 수장이 되려는 당대 교회의 야심이 있었다. 장자상속권 탓에 미지의 영토를 장악하려는 유럽 봉건귀족과 기사들의 토지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   

 

중세유럽은 세 가지 공동체가 공존했다. 하나, 종교적 공동체다. 교황과 수도승의 세상이다. 둘, 정치적 공동체다. 왕과 영주, 기사들의 세상이다. 셋, 경제적 공동체다. 교황과 왕, 영주는 장원을 통해 농노를 지배했다. 이 세 가지에서 공통적인 피지배층은 농노이며, 권력층은 교회 권력과 국가 권력, 그리고 지방귀족 권력으로 분리되어 중세유럽은 이 세 권력이 서로 대립, 갈등하는 시대였다. 해서, 상기한 설명은 이들 각각의 권력에 대한 동기부여를 하는 셈이다.

   

   

이것이 대체적인 십자군 전쟁 배경에 대한 정설 요약이다. 허나, 과연 이것 뿐일까.

    

 

첫째, 경제적 공동체에 관한 것이다. 대부분의 설명은 농업 생산력이 월등하게 높아져서 인구가 증가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허나, 여기에는 의문이 있는 게다. 왜 하필 이 시기에 농업 생산력이 늘어난 것일까. 이에 대한 가장 간명한 답변은 기후 변화이다. 유럽에서는 9세기~13세기까지 온화한 날씨가 계속돼 평균기온이 3~4도 정도 올라가 농경을 할 수 있는 지역이 늘어났다. 사람들의 영양상태도 좋아졌다. 키도 커졌다고 한다.

     

 

둘째, 정치적 공동체에 관한 이야기다. 기후 온난화 이전만 하더라도 중북부 유럽에는 사람이 살기에는 매우 불편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알래스카 같은 땅이었다고나 할까. 허나, 10세기에 이르면, 프랑크 왕국이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로 분열된다. 이뿐인가. 아니다. 덴마크, 폴란드 등 유럽 각 지역에서 독립왕국이 연달아 출현한다. 왜인가. 먹고 살만 하기 때문이다. 기후가 온화하니, 경작지가 늘고, 농업 생산성이 높아진다.

   

   

셋째, 종교적 공동체에 관한 논리다. 십자군전쟁 때문에 교회와 교황의 권위가 실추했다고 설명을 한다. 아니다. 교회와 교황의 권위는 십자군전쟁 이전부터 하락할 수밖에 없었다. 해서, 정확하게 말한다면, 이미 추락하는 교황의 권위를 지키기 위한 것이 십자군전쟁인 셈이다. 왜인가. 500년에서 700년 사이에 유럽에서는 큰 기후 재앙이 있었다고 한다. 특히 660년 유럽이 유난히 추웠다고 한다. 이런 시기에서는 당연 종교가 득세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이성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혹한의 추위를 견뎌낼 재간이 있겠는가. 해서, 이때는 숙명적 사고가 보탬이 된다. 인간이 견디기에는 참으로 가혹한 시련에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은 한시적으로 숙명적인 태도로부터 비롯된다. 외부의 어떠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는 내면을 유지할 수 있다. 반면 10세기부터 13세기에 이르는 시기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강조가 되던 시기이다. 구약에서 보라. 신의 선민이라는 유태인이 조금만 먹고 살만하면 신을 잊는 것을 말이다. 해서, 교회와 교황은 다급했다.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누가 신을 떠올리겠는가. 중세 온난화로 인해 인민 생활 여건이 나아지자 카톨릭 교회가 권력을 지속시키자니 전쟁을 택했던 것이다.

    

 

십자군 전쟁이 화폐 경제를 정착시켰다."

국제유태자본론 백문백답 5 : 자본주의

http://blog.naver.com/miavenus/70122850647

   

   

   

   

11세기에 접어들면서 중세 유럽에는 중세 온난기가 찾아왔습니다. 그 이전까지 야만 상태에 머물렀던 중북부 유럽이 따뜻해지면서 북방 바이킹족이 모스크바, 영국은 물론 그린랜드(이 시기 그린랜드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와 북아메리카까지 항해할 정도로 활동 영역을 넓혔습니다. 해서, 그간 지중해 무역의 일부였던 이태리와 북해 무역의 바이킹족을 연결하는 로만틱 가도를 통해 육상 교역을 시작하는 원거리 상인들이 발생하였습니다. 이들 원거리 상인들이 밀라노 상인, 롬바르디아 상인입니다.

   

헌데, 원거리 상인들이 로만틱 가도를 따라 과거 로마 요새였던 지역을 북해에 이르는 중간 거점으로 개발하니 요새에서 시장이 발생하고, 요새와 시장을 합치니 도시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등장한 것이 한자 상인입니다. 롬바드리아 상인에 대해 한자상인은 토착 현지 상인 이점을 내세워 이익 배당을 요구합니다.

   

이때, 교황권을 내세운 롬바르디아 상인에 맞서 한자상인이 내세울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황제권입니다. 허나, 황제권 실상이란 실제로 각 도시 상권과 결탁한 귀족권이었습니다. 귀족들이 제 못대로 황제권을 내세울 만큼 교황 권력만큼이나 황제 권력 또한 약화하였습니다.

   

교황과 황제 대결이 그 어느 편 승리로 끝나지 않자 롬바드리아 상인은 한자 상인과 같은 토착 상인에게 독점하던 이권을 나눠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에 따라 한자 상인 영향력이 급속도로 커지면서 십자군 원정을 기회로 롬바르디아 상인처럼 원정 상인으로 나서게 됩니다.

   

상인들은 길드를 만들었습니다. 헌데, 길드란 실제 목적이 거래의 이득을 취하는 것이지만, 명분상으로는 교회의 영광을 전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종교가 우선인 조직이었습니다. 장사란 전도를 위한 자체 경비 마련 수준이었던 것입니다. 헌데, 갈수록 세속화하여 실리적인 면만 남았을 뿐입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수공업자 길드가 두 가지 이유로 반발한 것입니다. 하나는 한자 상인 역시 롬바드리아 상인처럼 전도보다 이익에만 몰두한다는 명분적 종교적 비판입니다. 다른 하나는 도시 안에서 부유하게 살던 한자 상인에 비해 도시 바깥에 살던 수공업자는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실리적 경제적 비판인 것입니다.

   

해서, 15세기에 이르면, 도시를 장악했던 도시동맹체들이 사라집니다.

   

두 가지 요인입니다. 하나는 사회 경제 발전에 따라 정치권력도 집중도가 높아졌기 때문입니다. 이전에는 할 수 없었던 도시들을 통합 관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수공업자 길드가 상인길드를 만들어서 직거래를 하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아래에서 샌드위치로 당하니 도시동맹체가 당할 도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는 동시에 상인길드와 직거래할 수 있을 만큼 대자본을 보유한 대상인을 잉태한 것입니다. 소상인들이 숱하게 망하면 대상인이 탄생합니다.  이러한 이치는 대기업, 중앙은행, 정치권력 탄생도 마찬가지 이치인 것입니다. 오늘날 중산층을 파괴하면 부자와 빈민만을 양산시키는 이치와 같습니다. 

    

 

 

메디치 가문은 이탈리아의 중부지방 피렌체공화국, 당대 토스카나, 혹은 투스카니 공국 중산층 가문이었으나 은행업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하면서 유명해진 가문입니다. 이 지역은 로마 제국 초기에 로마세력과 융합하여 로마제국 중추가 된 에르투리아인 지역이기도 합니다. 또한, 메디치 가문은 동방 문물을 수입해와 번역하는 등 르네상스 주역이었습니다. 이후 나폴레옹이 스페인과 비밀협정을 통해 루이지애나를 받고 내준 지역이 바로 토스카나인 것입니다.

 

메디치 가문이 뜬 것이 우연이 아닙니다. 당대 이탈리아는 동방 무역 중심지였기에 경제 발전과 함께 빈부격차가 극심해졌습니다. 이에 메디치 가문이 나서서 평민 수공업자 이해를 챙겨주면서 상거래 이익을 낮추면서 박리다매 방식을 취하니 귀족과 결탁한 롬바르디아, 한자 상인 등이 붕괴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메디치 가문은 이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 은행 지점을 낼 뿐만 아니라 주식회사 형태도 만들기까지 했습니다.

   

귀족과 상인 반발로 추방을 당하는 등 시련 속에서 메디치 가문은 영향력을 강화시켜 교황을 배출해내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때부터 메디치 가문은 남자를 낳으면 교황에, 여자를 낳으면 유럽 왕비로 결혼 동맹을 꾀하는 전략을 취합니다. 헌데, 당대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역사적인 이유로 교황과 대립하였던 반면, 프랑스 왕은 십자군 원정 이후로 교황과 사이가 좋았습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메디치 가문 역시 프랑스 왕가에 왕비를 보내게 됩니다. 하여, 루이 14세에게는 메디치 가문 피가 흐른 것입니다.

   

350년간 영화를 누리던 메디치 가문에도 종말이 다가왔습니다. 1737년 메디치 가문 마지막 대공 잔 가스토네(Gian Gastone de' Medici)가 죽자 기다렸다는 듯이 친프랑스 메디치 가문에 감정이 많은 합스부르크 가문이 6,000 명 벙력으로 토스카나를 정복합니다. 결혼동맹으로 유명한 합스부르크 왕가는 메디치 가문 계승권이 있던 안나 마리아 루드비카를 며느리로 맞이하여 토스카나, 혹은 투스카니를 흡수합니다.

   

 합스부르크 왕가와 프랑스 왕가는 이태리에 왜 그리 집착했던 것일까요.

   

하나, 교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카를대제, 오토대제처럼 실력으로 유럽을 제패한 뒤 교황 인준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중국 춘추시대와 같습니다. 중국 춘추시대에서 주나라 왕실 권한이 쪼그라들어 제후 눈치를 봤지만,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반면 전국시대에는 제후들이 주나라 왕실을 아예 무시합니다. 그처럼 중국 제후나 서양 제후가 주나라와 교황을 챙긴 건 명분 때문입니다. 제후들과 일대일로 싸워 승리하면 좋겠지만 소모가 큽니다. 그보다는 대표 몇 넘만 쓰러트린 뒤 장로 중재와 교섭을 받아 황제가 되는 길이 지름길인 것입니다. 그 장로가 교황이나 주나라 왕실인 겁니다.

   

둘, 동방무역 거점입니다. 동방무역으로 들어온 귀한 물자를 취하는 것은 큰 이권이었습니다. 황제가 귀족들을 포섭하거나, 반대로 귀족이 황제 환심을 사기 위해 진상품이 필요한데, 진상품 대부분이 동방무역을 통해 들어옵니다. 더군다나 이태리 상인과 무역 독점권을 획득할 수 있다면 초대박인 것이지요.

   

추신 : 하이고! 오늘은 여기까지! 졸립네요.

 

      

인드라는 정치를 하지 않겠으며,

책을 더 이상 쓰지 않으며,

언론에 기고하지도 인터뷰를 하지도 않을 것이며,

종교단체를 만들지도 않을 것입니다.

국유본론을 소명으로 여기고

지금처럼 살다

행복하게 가겠습니다

매일매일 행복하겠습니다

마.자.세.

한반도 평화와 통일, 경제 발전과 사회 복지를 위하여

친미친중 반일반북 쪽발정은 척살로 조국통일 쟁취하자

쪽발민주당 해체 쪽발석현 아웃

쪽발재벌 타도 골룸빡 처단

쪽발이에게 죽음을 쪽발왕에게 천벌을

쪽발타도해방투쟁 만세

   

   

국제유태자본론 : 서양사는 동양사의 짝퉁이다 국유본론 2012

2012/10/22 10:06

http://blog.naver.com/miavenus/70149628740

   

   

   

 인드라

 중국

 시기

 특징

 유럽

 시기

 특징

 빨강

 하

 BC 2070년경 ~ BC1600년경

순시대에 제후가  우왕을 추대

 수메르

 BC 3300년경 ~ BC 146년

수메르 왕조부터 카르타고 멸망

 주황

 상(은)

 BC1600년 ~

 BC 1046년

 문헌과 고고학상으로는 중국 최초 왕조

그리스로마제국

 BC 1100년경(BC 146년 ~ 476년(1453년)

 그리스 멸망과 서로마/동로마멸망

 노랑

 주

 BC 1046년

 BC 771년

 세계 최초 봉건제 제국? 성주(낙양)으로 천도

 신성로마제국

 800년(982년) ~

1077년 

카를대제, 또는 오토1세부터 카놋사의 굴욕까지

 초록

 춘추시대

BC 770년 ~

 BC 403년

 진(晋)이 한(韓), 위(魏), 조(趙) 3국으로 분열

 종교개혁시대

 1077년~ 1806년

 나폴레옹 시대, 신성로마제국 멸망

 파랑

 전국시대

 BC 403년~

 BC 221년

 여불위

 로스차일드시대

 1815년 ~ 1945년

로스차일드 보호 속에 영국 제국주의 시대

 남색

 진

 BC 221년

 BC 206년

진시황 세계 최초 중앙집권 절대왕권 관료제 국가

 빅터

로스차일드

 1945년 ~ 1973년

 빌더버그 체제

 보라

 한

 BC 202년

 220년

 한 멸망 후 삼국시대 시작

 록펠러 시대

 1973년 ~

 1대 황제 데이비드 록펠러 2대 황제 제이 록펠러

   

   

   

국제유태자본론 : 서양사는 동양사의 짝퉁이다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2/10/22

   

1. 

무지개색을 실제로 수백 가지로 분류할 수 있지만, 최후의 연금술사 뉴튼이 무지개색을 빨주노초파남보라고 규정하였기에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국과 달리 미국에서는 남색을 제외한 여섯 가지 색, 멕시코 원주민인 마야 족은 흑, 백, 적, 황, 청의 다섯 가지 색이며, 아프리카에서는 두, 세 가지 색으로 밖에 보지 않는다.

   

일곱 시대는 저마다 소명을 받은 시대이므로 다른 시대보다 열등하거나 우월하지 않다. 오늘날 인류가 배우는 역사란 승자 기록에 지나지 않는다. 허나, 승자 기록이란 누구나 승자로 시작하였지만 패자로 끝나는 진실한 역사와 대립한다.

   

승자는 물론 패자마저도 진실한 눈으로 되돌아 볼 때, 인드라는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고 본다.

   

7은 한 시대의 완성이자, 근원으로 돌아가려는 새로운 시작이다.

   

   

2.

일부 단군주의자들이 하와 은 주역이 동이라고 하여 모두 한민족이 통치했다고 주장하나, 한나라 이전 동이와 한나라 이후 동이는 다른 개념이다. 치우천황 운운하는 식으로 한나라 이전 동이와 한민족 관련성은 국유본이 유포한 제국주의론이다. 한마디로 역사 날조다. 이에 대해 중국인이 일부 단군주의자가 중국 역사를 강탈하려 한다는 건 정당한 주장이다.

   

허나, 중국인과 한국인, 아시아인은 알아야 한다. 이는 한국인 음모가 아니라 중국이 동북공정을 내세워 고구려를 지방정권으로 만들려는 것도 국유본 음모이듯이 국유본 음모이다. 국유본은 한중일 정권 뿐만 아니라 쪽발정은 정권 등 세계 대부분 정권을 임명하고 있다. 만일 국유본이 임명하지 않았다면 방관할 만큼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한민족을 장차 아시아를 통일하여 중국 대륙 지배층으로 만들려는 국유본 음모이다. 이전까지 국유본이 근대화와 쪽발 중심 역사 날조로 쪽발을 아시아 주인으로 만들려고 했으나 쪽발 능력이 병쉰이어서 쪽발보다 능력이 검증된 한국인을 아시아 지배층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한국 최초 신자유주의 뉴라이트인 전두환 정권 때 동경대학 대학원 출신 허문도가 국유본이 조작한 쪽발 신화를 가공한 대체 역사로 재야사학계를 키운 것을 기원으로 한다. 한단고기가 출현한 쪽발시대로 연원을 올릴 수 있으나, 그 당시에 한단고기란 쪽발 신화를 위한 보조물에 지나지 않았다. 반면, 허문도는 한단고기를 쪽발 신화를 대체하는 한국 신화로 삼았다는 차이가 있다.  

   

현재는 물밑에서는 국유본 전략에 대해 큰 틀에서는 동의했으나 기득권 문제로 국유본 분파간 이견이 발생하여 쪽발과 한국인간 아시아 패권 장악을 위한 쟁투가 벌어지고 있다. 허나, 아시아 최종 승리자는 한국인이 될 것이다.

   

손정의는 쪽발을 한국 식민화하기 위해 국유본이 임명한 국유본 거물 중 한 명이다.

   

   

3.

3은 체제 안정에는 가장 강력한 유효 수단이다. 변증법 정반합처럼 갈등과 대립을 체제 안으로 끌어들인다. 해서, 3이 아닌 2가 된다면, 시스템 외부로 밀려난 세력이 시스템을 파괴하고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 수밖에 없다. 

 

국유본이 금용 세계은행 총재를 임명한 것은 장차 동아시아를 2에서 3으로 가는 기획이다. 중국을 예로 들면, 후진타오 공청단이 노비네파, 시진핑 상하이방이 뉴라이트이다, 골드만파가 없다. 인드라 전망으로 골드만파가 홍콩 광동 지역을 중심으로 시진핑 집권 시기에 잉태할 것으로 본다. 향후 중국은 신삼국시대를 맞이 할 것이다.

   

   

4.

세계 정치체제는 수메르에서 시작하여 진제국 진시황 법가에서 끝났다. 그 이후란 재탕이다. 

 

    

인드라는 정치를 하지 않겠으며,

책을 더 이상 쓰지 않으며,

언론에 기고하지도 인터뷰를 하지도 않을 것이며,

종교단체를 만들지도 않을 것입니다.

국유본론을 소명으로 여기고

지금처럼 살다

행복하게 가겠습니다

매일매일 행복하겠습니다

마.자.세.

한반도 평화와 통일, 경제 발전과 사회 복지를 위하여

친미친중 반일반북 쪽발정은 척살로 조국통일 쟁취하자

쪽발민주당 해체 쪽발석현 아웃

쪽발재벌 타도 골룸빡 처단

쪽발이에게 죽음을 쪽발왕에게 천벌을

쪽발타도해방투쟁 만세

   

   

국제유태자본 : 로스차일드, 미국 독립, 중앙은행 음모론, 루이지애나 매수금, 만들어진 영웅 앤드류 잭슨 국유본론 2012

2012/10/20 08:54

http://blog.naver.com/miavenus/70149490384

   

   

   

국제유태자본 : 로스차일드, 미국 독립, 중앙은행 음모론, 루이지애나 매수금, 만들어진 영웅 앤드류 잭슨

국제유태자본론 : 인드라 월드리포트 12/10/20 

 

1. 로스차일드가 미국 독립전쟁과 미국 중앙은행에 관련이 있다? 

   

인드라가 이 문제 역시 오 분안에 깨버립니다. 로스차일드 1세는 1790년대에 가서야 실전적 금융 공부하기 시작했고, 국제적 거래를 1800년대 초에야 심부름꾼 역 정도로 성사시킵니다. 로스차일드 2세인 네이선 로스차일드 역시 역시 이만 달러를 가지고 런던에 도착한 것이 1790년대 말입니다. 또한, 런던에 도착하자마자 시작한 것이 금융업이 아니라 의류업이었습니다. 1800년대를 넘어서야 은행을 설립하였습니다. 로스차일드 가문에게 날개를 달아준 사건은, 용병장사해서 유럽 최고 부자가 된 헤센 귀족이 나폴레옹 전쟁을 피해 망명을 간 사건입니다. 이때, 헤센 귀족이 로스차일드 1세를 믿고 재산관리인으로 임명한 것이 시작이었던 것입니다. 로스차일드 1세는 이 돈을 바탕으로 유럽 각지에 흩어진 자식들과 유기적인 망을 구축하여 돈을 불린 것입니다.

   

헌데, 미국 독립전쟁은? 그렇지요. 로스차일드 1세가 햇병아리일 때, 일어난 것입니다. 로스차일드 1세가 기획할 군번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해서, 그림자정부나 화폐전쟁 쓴 병쉰들 자동 아웃 되나요^^?

   

인드라는 이 당시 국유본 권력을 베어링 가문이 장악하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때, 장악 근거는 무엇입니까. 동인도회사 운영권인 것입니다. 베어링 가문은 당대 프리메이슨을 활용해서 로스차일드 이전 국유본을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는 1815년까지, 미영전쟁이 끝나는 때까지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2. 영란은행 역할에 대한 5분 토크

   

중앙은행 음모론이 많다보니 역사 이해없이 중앙은행이란 무조건 악이야, 이런 분들이 많습니다. 허나, 반대해도 알고 반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선 중앙은행이 민간은행이 맡는 게 말이 안 된다? 아니죠. 근대 은행이란 근래에 와서 공공화 국유화한 것이지, 시작이란 민간, 사유화에서 시작했습니다. 이후 민간 개인 몇몇이 감당하기에는 어렵다 해서 공공화한 것입니다. 중앙은행이란 민간은행이 진화한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지방은행, 민간은행이 돈을 마구 쩍어내니까 지방은행, 민간은행이 파산하고, 시장 자금이 보다 믿을 만한 곳으로 몰리니 중앙은행이 발생한 겁니다. 오늘날에도 미국 연준 국채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자금이 몰리잖아요? 이런 이치 모르겠나요?

   

중앙은행이란 영국에서 보듯 왕권 강화와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왕들 꿈이 뭔가요. 부국강병입니다. 해서, 군사력 키운답시고 상비군을 만들고, 기술 개발해서 빵빵하게 총도 만들고, 대포도 만들고, 배도 만들고 합니다. 헌데, 이 모든 건 돈이 필요하지요. 해서, 왕은 주거래은행에게 자금을 융통한 뒤 그에 걸맞는 이익을 주는 것입니다.

   

헌데, 왕에게 돈을 줘도 되는지 고민인 겁니다. 아니, 왕이 요구하는데, 그 특권을 마다한다? 말이 되느냐? 하지만, 실제로 그랬습니다. 네덜란드에서 메리와 함께 온 윌리엄왕은 이전 왕과 똑같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 고민이란 자금 마련입니다. 하다 못해, 백성이 뭔가 잘 하면 상금을 내려야 하는데, 그 상금이 없으면 어찌 하겠습니까. 왕이 왕 노릇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왕은 돈이 부족하면 국채를 발행했습니다. 당대 이자율이란 캘빈주의에 따라 5% 이내 이자율로 제한되었습니다. 헌데, 이건 최소 사양이구요. 신용에 따라 가산금리가 붙는 건 예나 지금이나 같은 것입니다. 가령 영국이나 프랑스 똑같이 미국 독립전쟁 때문에 자금 융통을 했는데, 영국은 가산금리가 붙지 않은 이자를 물고, 프랑스는 가산금리가 배나 붙은 이자를 써서 프랑스 예산 압박을 받아서 프랑스 혁명 도화선이 되었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인 것입니다.

   

헌데, 국채를 발행하면 뭐하나요? 사는 사람이 없으면? 주식하고 이 점에서 같다 할 수 있습니다. 인드라가 쪽발철수 주식을 팔려고 하는데, 아무도 사는 사람이 없는 겁니다. 샀다가는 쪽발 아닌 쪽박찰 수 있으니까요. 하면, 인드라는 쪽발철수 주식을 팔기 위해서 팔 가격을 계속 낮출 수밖에 없는 겁니다. 국채에서는 금리를 높여야 하는 것이지요. 즉, 채권값을 낮추는 겁니다. 채권 금리를 높이면 채권값이 낮아지니 현금으로 만질 돈이 줄어드는 겁니다.

   

윌리엄왕이 14%까지던가 올렸음에도 민간은행에서 콜하는 애들이 없었습니다. 이때, 민간은행 정체란 뭔가요? 여러분은 아셔야 합니다. 민간은행이라 해서 어감이 좋네 하지만 사실 대부분 귀족을 등에 업은 은행들이었습니다. 은행 업무란 게 정치권력을 끼고 있지 않으면 곤란하기 때문입니다. 로스차일드 1세던가가 당당하게 말하지 않습니까. 부자 비결은 정경유착이라고^^!

   

헌데, 국채를 사주겠다는 사람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 사람이 페터슨인 겁니다. 페터슨을 배후에서 움직인 인물로는 후일 영국 재무부장관을 하는 챨스 몬테규였다고 합니다. 조건은 오늘날 은행에서 아파트담보대출을 받으면 은행에서 하는 것과 크게 차이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은행에서 대출받을 때, 은행직원이 가장 관심이 있는 것이 무엇인가요. 신용상태죠? 그 다음에 물어보는 것이 뭔가요? 혹 다른 대출을 받은 것이 있느냐는 질문이죠? 혹 후순위 대출로 밀리면 돈 못 받잖아요? 해서, 은행 입장에서 돈 떼먹히지 않으려면 다른 대출 상황도 다 관리해야 하는 것이죠.  

   

여기서 일반적 수준을 넘어서는 과도한 요구가 있기는 합니다. 은행 직원이 대출 상담할 때 고객에게 끼워팔기를 강요하는 적이 많았지요. 이 대출을 받고자하면 신용카드를 마련해야 하고, 일정한 계좌 잔고가 있어야 하고... 어, 기업이면 화재보험 어디에 들고 있나요^^? 연금보험은요?

   

신용상태가 매우 좋으면, 일반적 수준을 넘어서는 요구를 들어줄 필요가 없습니다. 허나, 네덜란드에서 막 도착한 윌리엄왕은 신용상태가 좋지 않았습니다. 하고, 은행가들은 스페인 왕에게 지원했다가 망한 푸거 가문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해서, 윌리엄왕에게 자금 융통해주기 보다 중앙은행 반대하는 유력한 영국 귀족한테 자금 융통해주는 게 이익이었던 것입니다. 해서, 제퍼슨도 사금고나 마찬가지인 버지니아주가 관리하는 민간은행을 위해 중앙은행을 반대했고, 앤드류 잭슨도 재선 슬로건 때문에 중앙은행 반대한 것일 뿐입니다. 고작 실천이라고는 대통령이 되어 주거래은행을 사금고라 여기는 지방은행으로 바꾸었던 것인데, 이런 조치로 1837년 공황을 불러일으켰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일반적 설명이 그렇습니다. 다만, 국유본론 설명이 조금 다를 뿐입니다.

   

사설이 길었군요. 5분 넘었나요?

   

영국은 오래 전부터 조선처럼 안동 김씨 귀족 중심이고 왕이란 허수아비였습니다. 귀족이 왕을 허수아비로 만드는 건 두 가지만 꽉 잡으면 됩니다. 첫째는 중앙 상비군을 두지 않는 겁니다. 중앙 상비군이 없으면 귀족은 언제든 왕을 없앨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는 왕이 상비군을 두고 싶어도 예산 부족으로 쉽지 않다는 겁니다. 일시적으로 군대를 모을 수는 있어도 평시에 군대를 유지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해서, 왕 자금줄을 끊어 상비군을 최소화하는 것이 영국 귀족들이었던 것입니다.

   

헌데, 윌리엄왕이 자금 문제를 해소시킨다면 영국 귀족들로서는 재앙이 아니겠습니까. 재원만 해결해도 왕권을 엄청나게 강화할 수 있습니다.

   

영국 중앙은행이 비록 발권력을 독점하지 못한 반쪼가리일지라도 윌리엄왕에게는 반가운 영란은행이 출범하는 것입니다. 이자율이요? 6%였답니다. 당대 14%이니 6%이면 8%나 차이가 나니 손해죠? 허나, 손해인가요?

   

이는 손해일 수도, 이익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핵심은 단기가 아닌 장기인 것입니다. 영국 영란은행이 장기간 자금을 대출할 여력이 있다면 단 6%만 받아도 14% 이자받아 챙기는 은행보다 이익인 겁니다. 국왕 마케팅으로 인한 신용 강화는 유무형 이익을 낳기 마련이니까요.

   

해서, 아무나 하고 싶어도 중앙은행을 맡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돈 좀 벌겠다고 자금력이 부족한 아해들이 나섰다가는 쪽박찰 것이 분명한 게 중앙은행입니다. 감당할 수 있는 자만이 중앙은행을 맡아야 하는 겁니다. 특혜다, 독점이다 비판하기는 쉽습니다. 허나, 여전히 중앙은행 체제가 세계 모든 나라 체제라면 긍정적 이해가 필요하다 할 것입니다.

   

   

   

3. 흑인 강간범 제퍼슨에게 묻는다, 루이지애나 매수 자금은?

   

인터넷에서 보면, 재미있는 일이 꽤 있습니다. 가령 루이지애나 매매 사건이 있습니다. 헌데, 거래란 쌍방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까. 헌데, 인터넷 이론에서는 오직 루이지애나 매도 입장만 전하고 있습니다.

   

   

 네이버 백과사전을 볼까요?

   

"1803년 미국이 프랑스와 조약을 맺어 미시시피 강 서부 유역의 210만km²에 이르는 프랑스령 루이지애나 지역을 사들인 사건이다. 이 지역은 오늘날 전체 미국 영토의 23%에 해당하며, 아이오와(Iowa), 아칸소(Arkansas), 오클라호마(Oklahoma), 캔자스(Kansas), 콜로라도(Colorado), 사우스다코타(South Dakota), 텍사스(Texas), 뉴멕시코(New Mexico), 네브래스카(Nebraska), 노스다코타(North Dakota), 미주리(Missouri), 미네소타(Minnesota), 몬태나(Montana), 루이지애나(Louisiana), 와이오밍(Wyoming) 등 15개 주에 걸쳐 분포한다.

   

루이지애나는 원래 미시시피(Mississippi) 강 유역을 모두 포함하여, 북으로는 오대호(Great Lakes), 남으로는 맥시코만(Gulf of Mexico), 동서로는 애팔래치아(Appalachia) 산맥과 로키(Rocky) 산맥 사이의 넓은 지역을 가리키며, 오늘날 미국 남부 맥시코만 유역의 루이지애나 주는 프랑스령 루이지애나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1862년 프랑스의 탐험가인 라 살(la Salle, 1643~1687)이 이 지역을 탐험해 프랑스의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이 지역은 프랑스의 관할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러다 1763년 프랑스와 영국이 북아메리카를 무대로 벌인 프렌치 인디언 전쟁(French-Indian War)에서 프랑스가 패하면서 미시시피 강을 경계로 동쪽은 영국에, 서쪽은 스페인에 할양되었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동부 13개 주는 1776년 독립을 선언하였으며, 1783년에는 영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미시시피 강 동부 지역에 대한 주권을 인정받았다. 당시 미시시피 강은 내륙 개발과 교통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으므로, 신생 미국 정부는 1795년 스페인과 핀크니 조약(Pinckney's Treaty)을 체결하여 미시시피 강에서의 자유로운 항행과 그 하구에 위치한 뉴올리언스(New Orleans) 항구의 자유로운 이용 권리를 보장 받았다.

   

하지만 1800년 스페인은 프랑스와 산 일데폰소 비밀 조약(secret Treaty of San Ildefonso)을 체결해 미시시피 강 서부의 루이지애나 지역 지배권을 다시 프랑스에 넘겼다. 미국의 3대 대통령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1826)은 미시시피 강 교통과 물류의 중심이었던 뉴올리언스의 안정적인 이용을 보장받기 위해 프랑스와 교섭을 추진하였다. 그는 프랑스 주재 공사인 리빙스턴(Robert R. Livingston, 1746~1813)에게 훈령을 보내 뉴올리언스 지역을 매입하겠다는 뜻을 프랑스에 전했다. 그런데 당시 프랑스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나폴레옹(Napoléon Bonaparte, 1769~1821)은 영국이 캐나다에서 루이지애나를 침공해 올 경우 효과적으로 방위하기가 쉽지 않다는 판단 아래 국가 재정을 확충하고 신생국 미국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목적에서 오히려 프랑스령 루이지애나 전체 지역 매입을 미국에 제안하였다. 결국 리빙스턴과 특사로 파견된 먼로(James Monroe, 1758~1831)는 프랑스와 협상을 추진하여 1803년 4월 30일 프랑스와 루이지애나 지역 매입에 관한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으로 미국은 프랑스에 1,500만 달러 지불하였고 기존에 프랑스가 스페인으로부터 돌려받기로 한 모든 지역이 미국에 귀속되었다. 1,500만 달러 가운데 375만 달러는 프랑스 정부가 해당 지역 주민들에게 지불해야 할 채무를 미국 정부가 승계하는 형식으로 대체되었다.

   

조약 체결을 주도한 제퍼슨은 의회의 승인 과정에서 헌법과 연방정부의 권한 극소화라는 자신의 주장과 어긋난다는 점에서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 조약이 체결되어 미국은 당시 영토의 2배 이상 되는 면적을 새롭게 획득했으며, 서부 개척을 더욱 활발히 추진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또한 이 지역에서 프랑스가 물러나면서 신생국인 미국의 안정에도 도움이 되었다."

   

좋습니다. 나폴레옹 사정이야 중앙은행 만드느라고 애 많이 쓸 시기이니 일단 그렇다고 칩시다. 하면, 제퍼슨이 루이지애나를 매입할 자금은 어디에 있답니까? 

   

   

여러분이 루이지애나 땅이라니 오늘날 루이지애나주 정도로 보고 있을 수 있습니다. 아닙니다. 

 

   

 

   

 

제퍼슨이 사재를 털었나요? 죽을 때까지 흑인 노예나 강간하면서 돈을 쥐고 뒈졌을 노예아편농장주 제퍼슨이 사재를 털 일이 전혀 없습니다.  

   

   

하면, 미국 세수가 좋나요? 정반대였습니다. 인드라가 강조했지요. 국유본이 과거 카르타고 상인들 지혜를 존중해서 관리 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미국 독립을 강제했다고 말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아웃소싱인 겁니다. 해서, 미국은 독립 직후 난리가 났던 것입니다. 영국이 부담해야 할 자금을 미국 연방정부가 책임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헌데, 독립전쟁으로 각 주는 연방정부에 줄 세금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연방은 세금 부과해야 하니 관세를 높이고 위스키 술 같은 데에 세금을 물게 합니다. 인두세도 있군요. 이 모든 세금제도는 독립전쟁 이전보다 못했습니다.

   

이러자고 독립했나? 이에 대해 제퍼슨이 대통령 해먹기 위해서 말합니다. 독립전쟁 이전으로 돌아갑니다. 세금은 없습니다. 이리 말하니 대통령 안 시켜줄 수 없잖아요?

   

하면, 미국이 특별한 수입을 발견했나요? 없습니다. 오히려 루이지애나 구입처럼 예산을 쓸 것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에 제퍼슨이 했던 쥐랄이 뭡니까. 남부 수출이 잘 된다 싶은데, 영국이 해상권 장악하고 부족한 선원을 편법으로 모으자 수출입 금지 이런 정책한 것 아닙니까? 수출입 금지하면 관세 수입도 없지요. 무역 금지하니 시민 생활 어려워져서 시민에게 세금 달라고 하기 미안해지네요~!

   

이에 대해서 인터넷에는 일언반구도 없네요.

   

전임 대통령은 없는 세수를 마련하느라 빚을 많이 졌나 보네요. 허나, 토머스 제퍼슨은 청구서 하나 없을 만큼 깨끗했다고 합니다.

   

씨발, 과연 그런가요?

   

"헤임 샐로몬

 

1740년 폴란드의 리사(Lissa)에서 유대인 랍비의 아들로 태어났다. 폴란드 독립활동으로 인하여 폴란드를 탈출, 1772년 미국의 뉴욕으로 이주하여 금융업자로 성공했다. 이곳에서 비밀결사'자유의 아들(Sons of Liberty)'에 가입하였고 1776년 영국인에 의해 체포, 투옥되었다. 이때의 고초가 후에 일찍 사망하는 원인이 되었다. 이후 필라델피아로 이주하여 중개인과 상인으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또한 미국 내 프랑스 영사와 재정 대리인으로 활동하면서 미국과 프랑스의 관계 개선에 기여했다. 미국독립전쟁이 발발하자 재정 확충을 위하여 고군분투했다. 정부채권을 사들이고 어음을 보증해주는 등 개인적으로 미국 정부에 재정적 도움을 주었으며, 프랑스로부터 재정 지원을 얻는데도 힘썼다. 또한 토머스 제퍼슨(Tomas Jefferson), 제임스 매디슨(james Madison) 등과 같은 대륙회의 의원들에게 이자없이 자금을 빌려 주기도 했다. 그러나 정부에 빌려준 돈을 전혀 받지 못하고 그로 인해 말년을 가난하게 보내다 1785년 사망했다. 후에 정부를 상대로 자손들의 청구가 있었으나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는 필라델피아 최초로 유대교 예배당인 미크바 이스라엘을 설립했으며 비기독교인에 대한 차별을 해결하고자 노력했다. 1941년 시카고에 조지 워싱턴, 로버트 모리스, 샐로먼의 기념 동상이 세워졌다." 

 

그럼 그렇죠. 노예아편농장주 색희가 어딜 갑니까. 

 

인드라 의문을 풀어줄 분 있나요?  

 

아참, 루이지애나 구입 비용이 천오백만달러라고 하는데요. 원금만 그렇다는 겁니다. 이자는 별도죠. 

 

 

   

4. 앤드류 잭슨 우상화가 지겹네요

   

음모론 책자에서 앤드류 잭슨을 긍정적으로 묘사하니 쪽발놈현이다 하는 병쉰들이 인터넷에 기승하네요. 무식한 넘들이죠. 그것이 자신 주군 쪽발놈현을 엿먹이는 것임을 모르는 것이죠.

   

앤드류 잭슨이 어떤 사람이냐면요. 인디언 학살 때 성인 남성 인디언만 죽인 게 아닙니다. 전쟁에서 성인 남성 인디언만 죽였다면 납득할 수 있습니다. 허나, 앤드류 잭슨은 인디언 토벌할 때, 여자가 씨를 늘린다는 생각에 특히 어린 여자일수록 다 죽였다고 합니다. 여자, 아이, 늙은이할 것없이 다 죽이라고 병사들에게 지시하고 실행한 겁니다. 업적을 위해서 코베기를 반드시한 건 놀랄 일도 아니죠.

   

이래도 잘 한 것이 있으니 닥치고 앤드류 잭슨 하겠지요?

   

쪽발놈현 병쉰색희가 뉴라이트라도 어찌 쥐와 같은 급이겠냐는 게 무식한 쪽발놈현 병쉰색희들 자학 논리가 아니겠습니까. 논리라고는 눈물 한 방울 흘려놓고 양심을 팔아제끼는 색희들이 쪽발놈현 매국노빠잖아요.

   

하나 하나 검증해보지요.

   

   

   

5. 앤드류 잭슨하면 전쟁 영웅입니다. 헌데, 그 신화가 조작?

   

   

네이버 백과사전 설명입니다.

   

"1812년 6월 18일, 미국이 영국에 선전 포고를 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1812년 6월 18일 미국이 영국에 선전 포고를 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은 처음에는 미국이 영국에서 5,000km나 떨어져 있어 소수의 영국군이 캐나다에 주둔해 있을 뿐이었고 당시 캐나다는 인구 50만 명 미만이었지만 미국은 당시 인구 700만 명에 달했기 때문에 미국이 수적으로 우세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연방파의 본거지 뉴잉글랜드 지방은 전쟁에 협조하지 않았고 미국 군함은 1812년 영국 프리깃함과 싸움을 벌인 끝에 '게리에르'호를 상대로 '콘스티튜션'호가 거둔 승리를 비롯해 3번의 주목할 만한 승리를 거두었으나 이 전쟁에서 나머지 3번의 승리는 영국에 돌아갔다.

이리 호(湖), 온타리오 호, 섐플레인 호의 지배권을 차지하기 위한 여러 차례의 작은 접전이 벌어졌다. 미국은 디트로이트 탈환을 비롯, 몇 번의 작전에서는 성공을 거두었으나 1814년까지도 영국은 미시간 호에 접근하는 통로를 그대로 지배하고 있었으며 새로이 미시시피 강 북쪽 유역을 점령했다.

1814년 나폴레옹이 몰락해 나폴레옹 전쟁이 종결되자 영국은 본격적으로 정예 부대 6,000명을 메릴랜드에 상륙시켰다. 영국의 육해군은 체서피크 만(灣) 해안을 황폐화시켰고 블레이던즈버그 전투에서 승리한 뒤, 미국의 요크(토론토) 작전에 대해 앙갚음 하기 위해 워싱턴 D.C.의 공공건물들을 불태웠다.

1814년 9월 14일 밤에는 메릴랜드의 맥헨리 요새도 영국군에게 처함하게 파괴되었으나. 그 과정에서 워싱턴 변호사 출신 프랜시스 스콧 키가 현재의 미국 국가를 작곡하기도 했다. 미국의 선박들이 영국 상선을 방해하자 미국군의 사기는 높아졌지만 영국의 해상통제권을 교란시키지도, 미국 해안 봉쇄를 풀지도 못했다.

별 성과 없던 전쟁은 1814년 12월 24일 벨기에 겐트에서 맺어진 겐트 조약의 조인과 함께 종결되었다. 그러나 미영 전쟁 중 가장 치열한 전투는 뉴올리언스 전투로 통신사정이 나빠 겐트 조약이 맺어진 지 며칠 뒤에 발생했다. 이 전투에서 영국군은 2,037명의 전사자를 낸 대 비해 미국군은 단 21명의 전사자만 낸 값진 승리로 지휘관 앤드루 잭슨이 영웅으로 떠올랐다." 

 

헌데, 겐트 조약 체결 며칠 뒤(?)인 1815년 1월 8일에 그 유명한 뉴올리안스 전투가 벌어지는 겁니다. 한마디로 전쟁 끝나고 쥐랄한 것인데요. 당대 통신사정 운운합니다. ㅎㅎㅎ 

 

잘 생각해보세요. 겐트 조약이 12월 1일에 시작해서 24일에 끝났을 것 같나요? 아닙니다. 8월인가 시작했다고 합니다. 1814년은 나폴레옹전쟁이 끝나는 해입니다. 해서, 영국으로서는 여유가 있었습니다. 헌데, 다양한 이유를 붙여서  영국이 서둘러서 종전을 하려고 했다는 겁니다.

   

웃기지 않아요?  당대 영국군은 수도인 워싱턴 DC를 불태울 정도입니다. 백악관이 처음부터 하얀 색이 아니라 이때 불타는 바람에 그 꼴이 보기 싫어 하얀 색 페인트로 칠했다고 하지요.

   

영국군은 협정 조약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해상권은 영국군이 쥐고 있었구요. 시간은 영국군에게 있었어요. 헌데, 영국군이 무엇이 두려운지 서둘러 종전합니다. 조약 조건도 굉장히 웃겨요. 아무런 보상과 책임없이 전쟁 이전으로 돌린다는 것입니다.

   

짜고 고스톱이면 수준급이네요.

   

이는 마치 영국은 절대로 전투에서 이기면 안 되는 것이어야 하고, 미국 정권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의미인 겁니다. 행여 영국이 전쟁에서 승리하면 미국이 다시 식민지로 되돌아가고 싶다고 청원할 수 있는 겁니다. 실제로 뉴잉글랜드 지역은 이 문제로 미국 연방에서 탈퇴하고 영국과 화해하는 방안을 추진중이었습니다.

   

하면, 국유본 입장에서 미국 독립시킨 의미가 없잖아요. 돈과 사람 많이 투자했는데 말이죠.

   

냄새가 나지 않나요?

   

미국 역사는 그 시초부터 철저한 조작이었던 것입니다.

미국인이 역사책에서 배우는 건 소설일 뿐입니다.

   

앤드류 잭슨? 그 넘도 노예 숫자가 최소한 300명입니다. 물론 수천 명 노예를 거느렸던 워싱턴과 제퍼슨보다는 1/10인 거죠. 아, 이래서 앤드류 잭슨과 쪽발놈현 공통점이 있는 건가요?

   

씨바르너무색희들아.

   

앤드류 잭슨이 아일랜드인이 아니라 스코틀랜드계 아일랜드인이고, 그 차이란 중앙아시아에 강제 이주당한 고려인을 중앙아시아인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중앙아시아에 있는 한국인은 중앙아시아인이 아니라 한국계 중앙아시아인인 거죠.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할 말이 많은데,

너무 피곤해서

글쓰기를 여기까지 해야겠습니다.

   

   

   

   

인드라는 정치를 하지 않겠으며,

책을 더 이상 쓰지 않으며,

언론에 기고하지도 인터뷰를 하지도 않을 것이며,

종교단체를 만들지도 않을 것입니다.

국유본론을 소명으로 여기고

지금처럼 살다

행복하게 가겠습니다

매일매일 행복하겠습니다

마.자.세.

한반도 평화와 통일, 경제 발전과 사회 복지를 위하여

친미친중 반일반북 쪽발정은 척살로 조국통일 쟁취하자

쪽발민주당 해체 쪽발석현 아웃

쪽발재벌 타도 골룸빡 처단

쪽발이에게 죽음을 쪽발왕에게 천벌을

쪽발타도해방투쟁 만세

   

   

   

   

역대 미국대통령 출생지 혈통 종교 학력 전직 프리메이슨 국제유태자본 분파 총정리 국유본론 2012

2012/10/19 01:25

http://blog.naver.com/miavenus/70149407215

   

   

   

역대 미국대통령 출생지 혈통 종교 학력 전직 프리메이슨 국제유태자본 분파 총정리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2/10/19 

   

   

   

대통령

  

임기 시작

임기 종료

소속 정당

부통령

1

조지 워싱턴

George Washington

1789년 4월 30일

1797년 3월 4일

무소속

존 애덤스

John Adams

1

  

  

  

  

  

  

  

2

2

존 애덤스

John Adams

1797년 3월 4일

1801년 3월 4일

연방당

토머스 제퍼슨

Thomas Jefferson

3

3

토머스 제퍼슨

Thomas Jefferson

1801년 3월 4일

1809년 3월 4일

민주공화당

에런 버

Aaron Burr

4

  

  

  

  

  

  

조지 클린턴

George Clinton

5

4

제임스 매디슨

James Madison

1809년 3월 4일

1817년 3월 4일

민주공화당

조지 클린턴

George Clinton[1]

6

  

  

  

  

  

  

부재

  

  

  

  

  

  

  

엘브리지 게리

Elbridge Gerry[1]

7

  

  

  

  

  

  

부재

  

5

제임스 먼로

James Monroe

1817년 3월 4일

1825년 3월 4일

민주공화당

다니엘 톰프킨스

Daniel Tompkins

8

  

  

  

  

  

  

  

9

6

존 퀸시 애덤스

John Quincy Adams

1825년 3월 4일

1829년 3월 4일

국가공화당

존 칼훈

John Calhoun

10

7

앤드루 잭슨

Andrew Jackson

1829년 3월 4일

1837년 3월 4일

민주당

존 칼훈

John Calhoun[2]

11

  

  

  

  

  

  

부재

  

  

  

  

  

  

  

마틴 밴 뷰런

Martin Van Buren

12

8

마틴 밴 뷰런

Martin Van Buren

1837년 3월 4일

1841년 3월 4일

민주당

리처드 존슨

Richard Johnson

13

9

윌리엄 헨리 해리슨

William Henry Harrison

1841년 3월 4일

1841년 4월 4일[1]

휘그당

존 타일러

John Tyler

14

10

존 타일러

John Tyler

1841년 4월 4일

1845년 3월 4일

휘그당

무소속

부재

  

11

제임스 K. 포크

James Knox Polk

1845년 3월 4일

1849년 3월 4일

민주당

조지 M. 댈러스

George M. Dallas

15

12

재커리 테일러

Zachary Taylor

1849년 3월 4일

1850년 7월 9일[1]

휘그당

밀러드 필모어

Millard Fillmore

16

13

밀러드 필모어

Millard Fillmore

1850년 7월 9일

1853년 3월 4일

휘그당

부재

  

14

프랭클린 피어스

Franklin Pierce

1853년 3월 4일

1857년 3월 4일

민주당

윌리엄 R. 킹

William R. King[1]

17

  

  

  

  

  

  

부재

  

15

제임스 뷰캐넌

James Buchanan

1857년 3월 4일

1861년 3월 4일

민주당

존 C. 브레킨리지

John C. Breckinridge

18

16

에이브러햄 링컨

Abraham Lincoln

1861년 3월 4일

1865년 4월 15일[3]

공화당

한니발 햄린

Hannibal Hamlin

19

  

  

  

  

  

  

앤드루 존슨

Andrew Johnson[4]

20

17

앤드루 존슨

Andrew Johnson

1865년 4월 15일

1869년 3월 4일

민주당[4]

부재

  

18

율리시스 그랜트

Ulysses Simpson Grant

1869년 3월 4일

1877년 3월 4일

공화당

쉴러 콜팩스

Schuyler Colfax

21

  

  

  

  

  

  

헨리 윌슨

Henry Wilson[1]

22

  

  

  

  

  

  

부재

  

19

러더퍼드 B. 헤이스

Rutherford Birchard Hayes

1877년 3월 4일

1881년 3월 4일

공화당

윌리엄 A. 휠러

William A. Wheeler

23

20

제임스 A. 가필드

James Abram Garfield

1881년 3월 4일

1881년 9월 19일[3]

공화당

체스터 A. 아서

Chester Alan Arthur

24

21

체스터 A. 아서

Chester Alan Arthur

1881년 9월 19일

1885년 3월 4일

공화당

부재

  

22

그로버 클리블랜드

Stephen Grover Cleveland

1885년 3월 4일

1889년 3월 4일

민주당

토머스 A. 헨드릭스

Thomas A. Hendricks[1]

25

  

  

  

  

  

  

부재

  

23

벤저민 해리슨

Benjamin Harrison

1889년 3월 4일

1893년 3월 4일

공화당

레비 P. 모턴

Levi P. Morton

26

24

그로버 클리블랜드

Stephen Grover Cleveland

1893년 3월 4일

1897년 3월 4일

민주당

애들라이 E. 스티븐슨

Adlai E. Stevenson

27

25

윌리엄 매킨리

William McKinley

1897년 3월 4일

1901년 9월 14일[3]

공화당

개럿 호바트

Garret Hobart[1]

28

  

  

  

  

  

  

부재

  

  

  

  

  

  

  

시어도어 루스벨트

Theodore Roosevelt

29

26

시어도어 루스벨트

Theodore Roosevelt

1901년 9월 14일

1909년 3월 4일

공화당

부재

  

  

  

  

  

  

  

찰스 W. 페어뱅크스

Charles W. Fairbanks

30

27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William Howard Taft

1909년 3월 4일

1913년 3월 4일

공화당

제임스 S. 셔먼

James S. Sherman[1]

31

  

  

  

  

  

  

부재

  

28

우드로 윌슨

Thomas Woodrow Wilson

1913년 3월 4일

1921년 3월 4일

민주당

토머스 R. 마셜

Thomas R. Marshall

32

  

  

  

  

  

  

  

33

29

워런 G. 하딩

Warren Gamaliel Harding

1921년 3월 4일

1923년 8월 2일[1]

공화당

캘빈 쿨리지

John Calvin Coolidge Jr.

34

30

캘빈 쿨리지

John Calvin Coolidge Jr.

1923년 8월 2일

1929년 3월 4일

공화당

부재

  

  

  

  

  

  

  

찰스 G. 도스

Charles G. Dawes

35

31

허버트 후버

Herbert Clark Hoover

1929년 3월 4일

1933년 3월 4일

공화당

찰스 커티스

Charles Curtis

36

32

프랭클린 D. 루스벨트

Franklin Delano Roosevelt

1933년 3월 4일

1945년 4월 12일[1]

민주당

존 N. 가너

John Nance Garner

37

  

  

  

  

  

  

  

38

  

  

  

  

  

  

헨리 A. 월리스

Henry A. Wallace

39

  

  

  

  

  

  

해리 S. 트루먼

Harry S. Truman

40

33

해리 S. 트루먼

Harry S. Truman

1945년 4월 12일

1953년 1월 20일

민주당

부재

  

  

  

  

  

  

  

앨번 W. 바클리

Alben Barkley

41

34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Dwight David Eisenhower

1953년 1월 20일

1961년 1월 20일

공화당

리처드 M. 닉슨

Richard Milhouse Nixon

42

  

  

  

  

  

  

  

43

35

존 F. 케네디

John Fitzgerald Kennedy

1961년 1월 20일

1963년 11월 22일

[3]

민주당

린든 B. 존슨

Lyndon Baines Johnson

44

36

린든 B. 존슨

Lyndon Baines Johnson

1963년 11월 22일

1969년 1월 20일

민주당

부재

  

  

  

  

  

  

  

휴버트 H. 험프리

Hubert Humphrey

45

37

리처드 M. 닉슨

Richard Milhouse Nixon

1969년 1월 20일

1974년 8월 9일[2]

공화당

스피로 T. 애그뉴

Spiro Agnew[2]

46

  

  

  

  

  

  

  

47

  

  

  

  

  

  

부재

  

  

  

  

  

  

  

제럴드 R. 포드

Gerald Rudolph Ford Jr.

  

38

제럴드 R. 포드

Gerald Rudolph Ford Jr.

1974년 8월 9일

1977년 1월 20일

공화당

부재

  

  

  

  

  

  

  

넬슨 A. 록펠러

Nelson Rockefeller

  

39

제임스 얼 (지미) 카터

James Earl Carter

1977년 1월 20일

1981년 1월 20일

민주당

월터 F. 먼데일

Walter Mondale

48

40

로널드 레이건

Ronald Wilson Reagan

1981년 1월 20일

1989년 1월 20일

공화당

조지 H. W. 부시

George Herbert Walker Bush

49

  

  

  

  

  

  

  

50

41

조지 H. W. 부시

George Herbert Walker Bush

1989년 1월 20일

1993년 1월 20일

공화당

제임스 D. 퀘일

Dan Quayle

51

42

빌 클린턴

William Jefferson Clinton

1993년 1월 20일

2001년 1월 20일

민주당

앨 B. 고어

Al Gore

52

  

  

  

  

  

  

  

53

43

조지 W. 부시

George Walker Bush

2001년 1월 20일

2009년 1월 20일

공화당

리처드 B. 체니

Dick Cheney

54

  

  

  

  

  

  

  

55

44

버락 오바마

Barack Hussein Obama

2009년 1월 20일

  

민주당

조 바이든

Joe Biden

56

   

   

인드라가 글을 쓰는 김에 매번 참조하는 것이 귀찮아서  

이번에 도표로 역대 미국 대통령들을 정리하였습니다. 

   

   

   

   

   

미국 대통령

출신 주

종교

학력/ 

전직 

프리메이슨/ 

국유본 조직

특기사항

조지 워싱턴

버지니아

성공회

독학

/측량사 군인

프리메이슨

노예아편농장주 한반도만한 땅 소유

존 애덤스

메사추세츠

유니테리안

Harvard University

/변호사

  

  

토머스 제퍼슨

버지니아

뉴튼교

College of William and Mary/변호사

프리메이슨을

지지하고 프랑스인권 관여했으나

프리메이슨 아님

흑인 강간뒤 딸 버린 노예아편농장주

웨일즈계

제임스 매디슨

버지니아

  

성공회

Rutgers Univ/

국무장관

   

  

  

제임스 먼로

버지니아

성공회

College of William and Mary/변호사

프리메이슨

  

존 퀸시 애덤스

메사추세츠

유니테리안

Harvard University

  

  

앤드류 잭슨

남 캐롤라이나

장로교

독학

/변호사 군인

프리메이슨

스코츠

북아일랜드

마틴 밴 뷰런

뉴욕

네덜란드개혁

독학

/변호사

  

최초 비영국계

네덜란드계 대통령

윌리엄 해리슨

버지니아

성공회

University of Philadelphia

/군인

  

임기중 감기로

사망

존 타일러

버지니아

성공회

College of William and Mary/법률가

  

  

제임스 포크

북 캐롤라이나

감리교

Univ. North Carolina/변호사

프리메이슨

  

재커리 테일러

버지니아

성공회

독학

/군인

  

임기중 콜레라로

사망

밀러드 필모어

뉴욕

유니테리안

독학

/변호사

  

  

프랭클린 피어스

뉴햄프셔

성공회

Bodoin College

/변호사

  

  

제임스 뷰캐넌

펜실베이니아

장로교

Kailrail-dixson college

/변호사

프리메이슨

유일한 독신

동성애자 추정

에이브러햄 링컨

켄터키

무신론

성경 공부

독학

/변호사

프리메이슨 참여 후 탈퇴하려해서 암살당했다는 설

프리메이슨 아님

    웨일즈계

       암살

앤드루 존슨

북 캐롤라이나

성경 공부

침례교 흥미

독학

/재단사

프리메이슨

유일하게 탄핵당함

율리시스 그랜트

오하이오

감리교

West Point U.S.Military Academy/군인

  

애주가

  

러더퍼드 헤이스

오하이오

감리교

Gambier Canyon University/변호사

  

  

 제임스 가필드

오하이오

사도교회

Williams College

/학교장

프리메이슨

뉴욕주 정치세력

노조원이 암살

 체스터 아서

버몬트

성공회

Union College

/변호사

  

뉴욕주 정치세력

집권 후 멀리함

클리브랜드

뉴저지

장로교

독학

/변호사

  

  

 밴저민 해리슨

오하이오

장로교

Univ. of Miami

/변호사

  

윌리엄 해리슨

손자

 윌리엄 매킨리

오하이오

감리교

Alleghany College

/변호사

프리메이슨

유태 뉴욕세력(?)

무정부주의자가

암살

 T 루즈벨트

뉴욕

네덜란드개혁

Harvard College

/변호사, 군인

프리메이슨

네덜란드계

유태인. 가쓰라 태프트 밀약 주도

테디 베어

 윌리엄 태프트

오하이오

유니테리안

Yale University

/판사

프리메이슨

대통령 임기 후

대법관

 우드로 윌슨

버지니아

장로교

Princeton University

/대학 총장, 주지사

  

이승만 스승

  

 위런 G 하딩

오하이오

침례교

Ohio State University

/언론인

프리메이슨

기차에서

쓰러져 사망

 캘빈 쿨리지

버몬트

회중교회

Amherst Colleg

/변호사

   

  

  

 허버트 후버

아이오와

퀘이커

Stanford University/광산기사

  

독일계

  

 F 루즈벨트

뉴욕

네덜란드개혁

이후 성공회

Harvard University, Columbia University/변호사

프리메이슨

T 루즈벨트

조카

네덜란드 유태인

뇌일혈 사망

 해리 S 트루먼

미주리

침례교

Kansas city Law school

/은행가, 공무원

프리메이슨 

  

  아이젠하워

텍사스

장로교

West Point US Military Academy/군인, 대학 총장

  

네덜란드계 더치후손 독일 스위스 미국 정착, 스웨덴계

유태인 소문있음

 존 F 케네디

메사추세츠

로마 가톨릭

Harvard University/작가,상원의원

  

아일랜드계 최초 카톨릭 대통령

암살

 린든 존슨

텍사스

사도교회

Univ. of Texas

/교사

   

  

  

 리차드 닉슨

캘리포니아

퀘이커

Duke University

/변호사

  

스코츠

북아일랜드계

애주가

 제럴드 포드

네브래스카

성공회

Univ. of Michigan/변호사

프리메이슨

뉴라이트

  

 지미 카터

조지아

남침례교

Annapolis US Naval Academy

/농장주

삼각위원회

뉴라이트

스코츠

북아일랜드계

 로널드 레이건

일리노이

사도교회

Eureka College

/배우,주지사

뉴라이트 

아일랜드계

 

아버지 부시

메사추세츠

성공회

Yale University

/사업가, CIA 국장

해골종단

노비네

네덜란드계

빌 클린턴

아칸소

침례교

Univ.of Arkansas transfer. Yale Univ.

/주지사

CGI

대통령일 땐

뉴라이트

아일랜드계

  

아들 부시

코네티컷

감리교

Yale University

/사업가, 주지사

해골종단

노비네파

네덜란드계

  

버락 오바마

하와이

연합그리스도

Columbia University/

변호사, 상원의원

CGI

골드만파

최초 흑인

대통령

   

   

   

1. 대통령을 가장 많이 배출한 미국 주는  버지니아주

   

주별로는 버지니아주가 8명, 오하이오주가 7명, 뉴욕주가 4명, 메사추세츠주가 4명, 남북캐롤라이나주가 3명, 버몬트주가 2명, 텍사스주가 2명, 합쳐 30명이고, 그외 하와이, 네브라스카, 코네티컷, 뉴햄프셔, 뉴저지, 아이오와, 아칸소, 조지아, 일리노이, 캘리포니아, 미주리, 켄터키, 펜실베이니아가 각각 1명 13명, 총 43명입니다.

   

남북전쟁 전까지 버지니아주가 미국을 장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들은 단지 지역만 같을 뿐만 아니라 노예제도를 통해 부유한 유산계급과 성공회라는 종교와 프리메이슨이라는 비밀조직, 윌리엄앤메리대학교 출신, 마지막으로 잉글랜드인이라는 강한 동질감으로 뭉쳐 있었습니다.

   

대표주자는 역시 제퍼슨입니다. 헌법제정회의 때 가장 쟁점이 되었던 것이 큰 주와 작은 주 배분 문제였는데, 하원은 인구비례로, 상원은 주별로 의원을 뽑기로 합의하였습니다. 이때, 버지니아 측은 자신들도 큰 주임에도 헌법 제정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내세운 쟁점이 연방주의냐 반연방주의냐 쟁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작은 주들이 연방주의에 부담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가령 버몬트주는 아예 분리 독립을 선언하였다가 나중에야 합류했을 정도입니다. 예서, 제퍼슨은 작은 주들을 챙겨주는 척하면서 노예문제 같은 실익을 몽땅 먹은 겁니다.

   

지금 보면 엉터리여서 실소가 나오지만, 제퍼슨류가 내세운 것이 노예는 재산이므로 인간이 아니라고 하면서도 노예를 제외하면 남부 인구가 적어서 인구비례에서 불리하니 투표할 때는 노예 숫자도 포함시켜라는 주장을 했는데, 수용되지요.

   

예서, 야당 역할을 하는 세력이 메사추세츠주와 뉴욕주입니다만, 척 봐도 알 수 있듯 역부족임을 알 수 있겠습니다.

   

   

   

2. 광역지역으로 구분해도 최다 미국 대통령 배출 지역은 미국 남부

   

여기서 좀 더 나아가 주별이 아니라 미국 지역별로 분류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미국 남부는 1억 1천만 명으로 전체 인구 1/3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연방정부의 규정에 따르면 컬럼비아 특별구·앨라배마·아칸소·델라웨어·플로리다·조지아·켄터키·루이지애나·메릴랜드·미시시피·노스캐롤라이나·오클라호마· 사우스캐롤라이나·테네시·텍사스·버지니아·웨스트버지니아 주들이 있는 미국 남동부를 미국 남부라고 합니다.  

   

예서, 아메리카남부맹방[ Confederate States of America , 南部盟邦 ] 에 참가하지 않은 켄터키, 오클라호마, 메릴랜드, 델라웨어, 웨스트버지니아, 컬럼비아 특별구(워싱턴 DC)를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의미에서 남부라고 묶기에는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가령, 지리적으로는 미국 남부이나 남부맹방에 가입했던 11개주를 의미하는 딕시(Dixie)가 아닌 남도 북도 아닌 경계를 이룬다는 의미인 보더사우스 (Border South)라 해서 켄터키, 미주리, 델라웨어, 메릴랜드를 묶고 있습니다. 예서, 링컨 대통령을 배출한 켄터키주나 미주리주를 정치적이나 역사적으로 오하이오주와 같은 중서부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나 봅니다. 웨스트버지니아주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드라는 특히 역사적 경험을 중시합니다. 이들은 버지니아주 대농장제도와 달리 독립 자영농민들이 주축이고, 이민자들 혈통도 유사하고, 정서가 오하이오 중서부와 상통하니까요. 링컨은 공화당 내에서 강경파 노예해방파보다 온건파 연방파였습니다.

   

   

해서, 버지니아주를 대표로 하는 과거 남부맹방 지역 대통령을 버지니아처럼표기하였습니다.  전체 43명 중 1/3에 약간 못 미치는 15명입니다.

   

   

   

하면, 남북전쟁 이후 대통령을 많이 배출한 오하이오주를 대표로 하는 미국 중서부는 어떨까요?

   

미국 중서부라 하면,  네브래스카 주노스다코타 주미네소타 주미시간 주미주리 주사우스다코타 주아이오와 주오하이오 주위스콘신 주,인디애나 주일리노이 주캔자스 주를 말합니다만, 이중에 네브래스카주 등을 중부라고 하여 따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허나,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의미에서 중서부라 하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는가 싶습니다.

   

언뜻 보기에 왜 이곳이 중서부냐, 중동부이지 할 수 있겠는데요. 미국 역사가 동부 해안에서 시작한 것을 고려해야 하는 것입니다. 동부 해안에서 보면, 이 지역이 중서부이고, 그 너머는 서부인 것입니다. 마치 서양 입장에서 아시아 지역을 중동, 근동, 극동 부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인드라가 역대 대통령들 도표를 만든 것이 남북전쟁 이전과 이후 정치구조가 확연하게 달라졌음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물론 그 이전에 이미 말씀드렸듯이 미국 정치구조가 바뀌기 전에 미국 경제구조가 남부 중심인 면화 등 농산물 수출 구조에서 북부 중심인 공산품 수출 구조로 전환되었음을 말씀드렸습니다.

   

해서, 남북전쟁 시기부터 이 지역 대통령이 많이 등장합니다. 이들 중서부 대통령을 오하이오주와 같은 색으로 표시하였습니다. 그랬더니 43명 중 1/4 정도인 11명입니다. 

 

   

이번에는 뉴잉글랜드 지역을 봅니다.

   

   

뉴잉글랜드 지역은 메사추세츠주, 코네티켓주, 로드아일랜드, 버몬트, 메인, 뉴햄프셔 6개주로 이루어졌습니다. 43명 중 8명이니 1/5에 약간 모자르는군요. 

   

   

다음은 미국 북동부입니다.

   

   

   

미국 북동부는 뉴잉글랜드 지역에  뉴욕주, 뉴저지주, 필라델피아주를 포함하고, 메릴랜드주와 델라웨어주를 포함할 때가 있습니다. 역사적인 경험을 중시한다면 미국 북동부를 메릴랜드주와 델라웨어주까지 포함시키는 것이 합리적일 것입니다.

   

북동부 지역으로 보면,  뉴잉글랜드 지역에 6명이 추가되니 14명이 됩니다. 오하이오 중서부보다 많고, 미국 남부보다 약간 적습니다. 43명 대통령 중 1/3에 약간 부족합니다.

   

헌데, 만일 북동부에서 뉴잉글랜드 지역만을 따로 떼어놓는다면 어찌 될까요? 

 

 

   

인드라는 이 지역을 뉴욕주를 대표로 하는 미국 뉴욕부라고 명명하겠습니다. 뉴욕처럼 뉴욕부를 색칠하니 총 6명입니다. 43명 중 6명이니 1/7에 모자릅니다.

   

해서, 인드라가 보기에는 뉴욕부가 미국 정치에서 캐스팅보드를 쥐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 자체로는 소수이지만, 강한 소수여서 미국 남부나 뉴잉글랜드, 중서부 쪽을 편들면 정치 판도가 기운다는 것입니다.

   

   

   

http://www.presidency.ucsb.edu/index.php

   

   

   

실제로 미국 대통령 선거를 보면, 뉴욕부를 얻는 자가 미국을 얻는 것처럼 보입니다. 해서, 인드라가 인월리 초기에 뉴욕 '태머니파'에 대해 집중적으로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서부라 할 수 있는 캘리포니아나 하와이는 참 작아보이지요? 그럼에도 대통령이 나올 수 있다는 건  허나, 그 전략이 로마제국 당시 황제 선출과 그다지 달라보이지는 않습니다만, 만큼 국유본이 치밀한 전략을 짜고 있다는 것입니다. 명분은 미국 대통령도 이젠 골고루 나올 때가 되었다는 것이죠. 그래야 제국 시민이 모두 평등하다고 느낄 것이 아니겠습니까. 해서, 언제가 될 지 모르나, 조만간 남미 출신 대통령과 아시아 출신 대통령이 나올 것입니다. 아니, 나와야 하는 것이입니다. 골고루 정신을 유지해야 미국 제국이 유지되니까요. 

 

헌데, 지역이 남부라고 남부 대통령이 남부를 무조건 옹호하지 않았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또 앤드류 잭슨입니다. 앤드류 잭슨은 사우스 캐롤라이나 출신입니다. 캐롤라이나 지역이란 영국 왕실이 영국 귀족들에게 미국에 땅을 왕창 줄 터이니 마음껏 해봐라 하고 준 땅입니다. 헌데, 성공은 카톨릭교 볼티모어가 메릴랜드에서 유럽식 영지를 구현했고, 펜은 펜실베이니아를 만들어 퀘이커교도는 물론 이상사회를 꿈꾸는 소수파 종교인들 보금자리가 되었습니다. 반면, 캐롤라이나는 지지부진했습니다. 8명의 귀족이 있었다는데, 지역적 차이가 있었습니다. 북부는 해안선이 막혀 유럽과 교역이 어려운 반면, 남부는 유럽과 교역 가능해서 활발했던 것입니다. 결국 여건이 다르니, 따로 놀 수밖에 없고, 인디언과 전투를 공동으로 해야 하는데, 별거에 들어가니 이혼에 이른 겁니다.   

 

해서, 노우스 캐롤라이나에 비해 여건이 좋았던 사우스 캐롤라이나를 통치하던 영국 귀족들은 이 시절부터 이미 독립을 꿈꾼 것입니다. 연합? 연대? 다 소용없다. 노우스 캐롤라이나 봐라! 짜증난다. 우리는 우리끼리 살면 된다. 해서, 사우스 캐롤라이나는 독립선언서 작성 때도 펜실베이니아와 함께 반대표를 던집니다. 이유는 펜실베이니아와 달랐습니다. 당시 분위기가 20~30%가 적극 싸우자는 것이고, 또 20%~30%가 과거처럼 영국과 잘 지내자는 것이면, 나머지는 모두 이기는 편이 내 편이라는 방관자였습니다. 방관자 대표는 뉴욕주였는데 투표에서 결석했지요. 여기서 펜실베이니아 입장은 평화파 종교인들이 다수고, 독일계 이민자들이 영국 왕실에 호의적이어서 싸우지 않겠다고 한 것인데요. 사우스 캐롤라이나 입장은 펜실베이니아와 달리 버몬트와 같았습니다. 버몬트는 영국군과 싸우되, 연방에는 관심이 없고, 홀로 독립하겠다는 입장이어서 실제로 독립했습니다. 그러다가 주변에서 뭇매를 맞으니 독립전쟁 이후 연방에 가입했던 것입니다. 사우스 캐롤라이나도 똑같은 입장이었습니다. 다른 주들이란 노스 캐롤라이나처럼 답담한 자들이니 나홀로 독립하는 길로 나가야 한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불만은 역설적으로 사우스 캐롤라이나 출신 앤드류 잭슨일 때 터져나왔습니다. 이유는 앤드류 잭슨이 재선을 하면서 부통령인 칼훈 사우스 캐롤라이나 출신 대신 뷰런 뉴욕주 출신을 부통령으로 삼은 것입니다. 이는 차기 대통령으로 칼훈 대신 뷰런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차기 대통령 꿈을 꾸던 칼훈으로서는 배신감을 느꼈던 것입니다. 사우스 캐롤라이나 출신이면 제퍼슨처럼 고향 사람을 챙겨야 하는데, 앤드류 잭슨은 고향 사람을 배신하고, 뉴욕주 사람을 후계자로 삼다니. 칼훈이 개인적 야심에 절망했다면,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의회는 앤드류 잭슨이 고향을 배신했다고 본 것입니다.  

 

해서, 사우스 캐롤라이나는 유명한 구라인 제퍼슨 반연방주의에 따라 미국은 각 주 연합체이니 각 주 독자성이 우선이요, 영혼이다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반면, 앤드류 잭슨은 놀랍게도 연방주의 논리를 펴서 주권은 각 주가 아니라 인민에게 있으니 연방을 무시하면 반란죄로 다스린다 하고 사우스 캐롤라이나에 군대를 보내 작살을 냅니다. 물론 그런다고 사우스 캐롤라이나가 정신차렸겠습니까. 후일 남북전쟁 때 가장 먼저 연방 탈퇴한 주가 사우스 캐롤라이나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미국 노예민주당에서는 제퍼슨주의와 잭슨주의로 나눠지는 것입니다. 제퍼슨주의는 반연방주의인데, 잭슨주의는 연방주의이거든요. 이런 이유로 당이 다르지만, 링컨은 잭슨을 높이 평가합니다. 연방주의 입장에서 말입니다. 

 

이처럼 출신 주가 남부임에도 노예민주당 대통령임에도 노예민주당 주류인 버지니아 제퍼슨류에 반대했던 것입니다. 해서, 인드라는 국유본이 이런 이유로 앤드류 잭슨을 대통령으로 임명한 것이다, 라고 봅니다. 1820년대에 접어들면 미국 농산물 수출이 엄청 나서 영국이 많이 의존하였습니다. 해서, 로스차일드 가문 입장에서 앤드류 잭슨이 적임자로 보았을 것입니다.  

 

로스차일드 가문이야 전쟁을 늘 궁리하지만, 다른 한편, 미국에서의 전쟁보다 앤드류 잭슨 시절에는 미국이 통합된 채로 자본주의 체제에 걸맞도록 규모를 늘려야 할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사우스 캐롤라이나 독립이 결코 사우스 캐롤라이나에 국한한 것이 아니라 다른 주에도 영향을 주기에 확실히 정리해야 했던 것입니다. 허나, 이러한 태도는 남북전쟁이 벌어지자 180도로 바뀌어 이왕 난 전쟁이라면 오래도록 하는 것이 좋다는 것으로 귀결합니다. 

 

앤드류 잭슨을 길게 말했지만, 다른 대통령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령, 뉴잉글랜드 대통령인데, 종교가 카톨릭이다? 성공회다? 미국 남부 대통령인데 종교가 장로교다??? 그 지역 주류세력 대표 정치인이 대통령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지역 소수파 대표가 대통령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요?  

 

위기라는 거죠. 대표적으로 암살당한 켄터키 출신 링컨과 부통령이었다가 대통령이 되어 역대 대통령 중 유일하게 탄핵당한 노스캐롤라이나 출신 앤드루 존슨 대통령입니다. 둘 다 지리적으로는 남부임에도 남부 배신 정책을 취했던 것입니다. 이들 집권 시기는 앤드류 잭슨과 달랐습니다. 국유본은 중국과 아편전쟁 등으로 집중하고 있습니다만, 홀로 중국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해서, 미국이 하루바삐 공업화 길로 나가 제국주의 길로 가서 영국과 함께 땅따먹기를 해야 했습니다. 하면, 미국이 분열해도 좋다는 생각으로 북부를 지원했던 것입니다. 국유본은 남부 농업을 챙길 여력이 없었던 것입니다. 다만, 지켜본 것이죠. 예서, 전쟁이 나니 미국 산업자본을 보다 확실히 키울 절호 기회로 보아 남북전쟁을 오래도록 질질 끈 것입니다. 남북전쟁이 발발하니 록펠러, 케네디 같은 산업자본가가 등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3.  종교와 프리메이슨이 미국 대선에 영향을 얼마나 주는가? 

 

일단 프리메이슨 음모론부터 박살을 내어야겠습니다. 인드라가 늘 강조하지만, 인터넷 프리메이슨론이란 한마디로 병쉰쥐랄입니다. 

 

인드라가 5분 안에 깰 수 있는 반증이 있습니다. 

   

   

   

상기한 인물들이 이차대전 전 대통령 중에 일반적적으로 프리메이슨 대통령이라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이중에서 연방은행에 비판적이었던 토머스 제퍼슨은 프리메이슨/일루미나티에 호의적이었을 뿐, 프리메이슨이나 일루미나티가 아니니 제외하더라도 앤드류 잭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음모론 책자를 봐도 앤드류 잭슨이 로스차일드 음모와 프리메이슨/일루미나티 음모에 맞서 중앙은행에 반대투쟁했다고 나오니까요.  

 

헌데, 어쩌나요^^! 앤드류 잭슨이 프리메이슨이거든요~! 

 

그냥 심중이 아니냐구요? 인터넷 이론이 부실하다구요?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확실한 프리메이슨이 앤드류 잭슨입니다. 왜냐하면, 앤드류 잭슨에 대항하던 정적들이 만든 당이 반메이슨당이기 때문입니다. 반메이슨당이란 프리메이슨을 배격하겠다는 것입니다. 헌데, 반메이슨당을 만든 이들은 중앙은행 설립에 긍정적인데, 앤드류 잭슨은 중앙은행에 부정적이니 음모론과는 정반대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인터넷과 이리유카바 최 같은 병쉰이 유포하는 음모론은 다 국유본에서 유포시킨 가짜라는 겁니다. 물론 그들 주장 전부가 가짜는 아닙니다. 78%가 가짜고, 22%만이 진실을 담고 있으니 그 22%를 찾아내야 하는 것이 맹목적으로 보면 곤란하다는 겁니다. 그러다가는 쪽발놈현빠들처럼 무식한 무뇌아 병쉰색희가 됩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이 단락을 오 분 안에 읽었나요? 오 분으로 프리메이슨 음모론이 박살나는 것을 눈으로 보셨나요^^? 

 

이를 전제하고, 미국 식민지 건설과 미국 독립에 프리메이슨이 혁혁한 공을 세운 것이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정착하려면 다 죽으니까 미국에 가지 않으려했습니다. 이때, 영국 당국 지시를 받은 프리메이슨 버지니아 회사가 꾀를 내어 사실상 노예계약을 맺어 부랑자, 노숙자, 창녀, 범죄자 등을 모아 제임스타운으로 보냅니다. 이들이 미국 식민지 건설 선봉에 서는데요. 이들을 미국 시작으로 하기에는 워낙 부끄러우니까 미국이 이를 숨기고 대신 메이플라워호 청교도를 내세우는 겁니다.   

 

또한, 보스턴 차사건이 유명하잖아요. 이것 역시 프리메이슨 작품입니다. 벤자민 프랭클린이 간여했다고 하는데요. 다수 프리메이슨들이 보스턴 차사건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예서, 인터넷 프리메이슨 음모론처럼 프리메이슨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겁니다. 프리메이슨은 랏지를 마치 유태인 회당처럼 사용합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면, 각 랏지 독자성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각 랏지가 연합하는 데에는 반대하지 않습니다. 지난 프랑스 혁명 당시 프랑스 대동방랏지가 유럽 랏지를 통합시켰던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허나, 상부에서 하부로 지시를 내려서 랏지들을 통합시킬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하면, 미국에서 많은 랏지가 있었는데, 이 모든 랏지가 미국 독립운동에 참가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일부는 미국 독립운동을 반대하기도 했습니다. 미국 독립선언서 만들 때보면, 13개주 중에 고작 9개주만 찬성해서 미국 독립선언서가 채택됩니다. 이는 각 주 대표들 중에는 프리메이슨들이 꽤 많았는데, 그들 사이에서 의견이 통일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음모론을 탈색시키면 프리메이슨이 오늘날 시민단체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청교도들이 선교를 위해 정치를 활용하는데, 이때 프리메이슨이 큰 역할을 합니다. 이는 독실한 청교도이자 프리메이슨이었던 스코틀랜드인 로빈슨이 일루미나티를 고발하면서 잘 알려졌습니다. 

 

적어도 유럽에서 종교전쟁을 한 경험, 종교탄압을 받은 경험이 있는 이라면 프리메이슨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 조직인지를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해서, 워싱턴 등 독립운동 주도하던 이들이 자신이 프리메이슨임을 알리며 당당하고 공개적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이구요. 워싱턴 DC 같은 도시 설계할 때 당연 프리메이슨적인 건축설계를 했을 것입니다. 미국 화폐에도 프리메이슨 흔적이 있구요. 이는 후일 프리메이슨인 프랭클린 루즈벨트 작품이구요. 

 

여기까지는 사실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외에는 인드라가 보기에 의심스럽다는 것입니다.  

   

  

1820년대 프리메이슨이 미국을 지배한다는 폭로와 앤드류 잭슨에 대항하는 반메이슨당 활약으로 1850년대부터 프리메이슨은 잠수합니다. 하고, 프리메이슨이 다시 활약하는 시기는 1871년 파리콤뮨으로 파리 노동자들이 작살이 나서 맑스가 지도했던 인터내셔널이 어항 속의 붕어색희마냥 입만 뻥끗하는데 뭔 소리를 하는지 모를 정도로 망가지자 다시 프리메이슨이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그간 맑스와 유대인단체가 노동운동을 통해 프리메이슨을 자본가 조직이라고 비난해서 숨죽이고 있었었는데, 맑스와 유대인단체가 뻑가니 프리메이슨이 다시 살아난 겁니다. 해서,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자유의 여신상을 보내게 되는 겁니다.  

 

자세한 건 지난 인월리 백문백답에서 썼으니까 궁금한 분들은 인드라 블로그에서 '프리메이슨'으로 검색하길 바랍니다.  

 

하고, 인드라가 인터넷에서 나오는 프리메이슨 대통령들에 대해 대체적으로 수긍하는데, 트루먼 프리메이슨에는 과연 그런가 하고 의문을 지니고 있습니다. 

 

트루먼이 프리메이슨이라면 트루먼과 맥아더가 적대적인데, 맥아더 역시 프리메이슨이라면서요. 이 적대를 프리메이슨 음모론을 뭐라 설명할 것인가 궁금합니다. 물론 인드라 국유본론으로 하면 설명이 가능하긴 하지만요^^!  

 

또, 트루먼과 정적이 헨리 윌리스라는 유태인입니다. 헨리 윌리스는 친소 친공 노선 부통령이었는데, 부통령 자리를 반소 반공 트루먼에게 빼앗겨 단단히 화가 났던 것입니다. 이때, 트루먼 부통령 선발은 루즈벨트 손을 떠나 국유본 상부에서 결정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에 열받은 헨리 윌리스는 차기 대선에 나섭니다. 이때, 흥미로운 것이 헨리 윌리스가 자신이 프리메이슨이다, 라고 공개하는 파격적인 선거운동을 했는데, 트루먼에게 대패하고 맙니다.  

 

이런 점들 때문에 알고 보면, 프리메이슨이 트루먼 당선시키려고 짜고 고스톱한 것이고, 헨리 윌리스는 대선을 통해 트로츠키 영향력이 강한 미국 진보당을 망가지게 했고, 마지막으로 노동운동을 프리메이슨 음모로 몰아붙여서 노동운동을 억제하고자 한 것이었다 하면 아귀가 맞아떨어지긴 합니다. 하여, 오히려 사정이 이렇기에 트루먼이 프리메이슨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전까지는 인드라가 트루먼이 프리메이슨이라는 것을 유보하겠습니다.  

 

   

4. 국제유태자본 분파 대통령이 얼마 없네요? 

 

그렇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분파들이 모두 근래에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인맥들은 오래되었습니다. 허나, 그들이 분파 형성하는 것은 비교적 최근이라는 것입니다. 

 

가장 오래된 분파는 뉴라이트파입니다. 1973년부터 시작했습니다. 다음으로 형성된 분파가 노비네파입니다. 노비네파는 아버지 부시가 재선에 성공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재선에 실패하자 과거 로스차일드에서 전향한 키신저, 넬슨 록펠러를 따르던 이들, 빅터 로스차일드와 데이비드 록펠러에서 데이비드 록펠러 손을 들어주었으나 경제적 실익만을 살피는 이들, 로스차일드 지지세력 등이 뭉치기 시작하면서 클린턴 집권 시기에 만들어져서 아들 부시 때에 네오콘부시로 본격활약했던 것입니다. 골드만파는 부시 집권 때에 형성된 것입니다. 가장 최신이지요. 클린턴이 대통령일 때는 골드만파가 아니었습니다. 골드만파 시점은 CGI를 만든 시점이고, 아들 부시 집권 이후입니다. 해서, 최초 골드만파 대통령은 클린턴이 아니라 오바마 대통령인 겁니다.  

 

    

5.  뉴튼교, 유니테리안, 네덜란드개혁교회, 연합그리스도교회 등이 뭔가요? 

 

뉴튼교란 인드라가 만들어본 것입니다. 토머스 제퍼슨이 믿는 종교를 보통 자연신교, 이신교라고 합니다. 헌데, 이 신관을 잘 표현한 사람이 뉴튼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뉴튼식 신관이란 시계수리공인 신이 최초에 충격을 주었을 뿐, 그 이후로 우주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비유하면, 신이 큐대로 당구공을 빡세게 쳤는데요. 신에게 무한한 에너지를 전달받은 그 당구공이 우주라는 겁니다. 그 당구공은 당구대를 무한하게 도는데요. 이미 신은 무한 에너지를 당구공에게 주었기에 더 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면, 유니테리안이란 뭔가요? 이 역시 인드라 블로그에서 유니테리안하면 자세한 설명을 해놓았긴 한데요. 간단 정리하면, 최고신 하나님만 믿고 예수가 하나님 아들이라는 걸 부정합니다. 해서, 단성교라고 부르기도 하더군요. 종교 논쟁 자체에 인드라가 개입할 생각이 없구요. 아무튼 소수종파임에도 대통령을 많이 배출했죠? 이유는 유니테리안이 전 세계 종교 중에 유대교 신자보다 더 엘리트적이고, 학구적이라고 합니다. 대졸자가 신자 비율 중 가장 높은 종교가 유니테리안이라고 합니다. 인드라가 시대정신 동영상이나 외계인종교, 유에프오 인터넷 이론 등을 유니테리안에서 만들었을 것이다, 유니테리안이 국유본 종교담당 기구가 아닌가 의심하잖아요.  

 

하여간 평생 정적이었던 뉴튼교 토머스 제퍼슨과 유니테리안 존 애덤스가 같은 날 죽었는데요. 둘이 모든 사안을 두고 대립을 했는데, 유일하게 의견 접근이 되었던 것이 종교 부문이라고 합니다. 뉴튼교와 유니테리안 사이에는 벽이 그다지 없다니 유니테리안 종교를 짐작할 수 있겠지요? 

 

하면, 네덜란드 개혁교회는 뭔가요? 루터 신조를 받아들이고 칼뱅교 교리를 중심으로 삼아 교회를 개혁하겠다는 것이 다른 청교도와 같은데, 딱 하나 다른 것이 네덜란드 개혁교회가 네덜란드 국교가 되었다는 겁니다. 해서, 다른 건 다 같은데, 단지 네덜란드 사람들이 믿는 기독교가 네덜란드 개혁교회인 것입니다.  

 

미국 네덜란드 개혁교회는 네덜란드 암스텔담 노회로 시작하였는데, 미국 교회가 커지니까 독립하여 미국개혁교회가 됩니다. 이때, 네덜란드 개혁교회는 엄마 교회가 되어서요, 제휴 관계를 맺습니다.  

 

초기 네덜란드인은 다른 이민자들과 사정이 달랐습니다. 다른 종족들은 이상을 추구하거나, 경제적으로 가난해서라거나, 정치적 탄압을 피하기 위해 미국으로 이주한 것입니다. 헌데, 초기 네덜란드인만은 돈을 벌기 위해, 무역을 하기 위해, 유럽식 중세 장원을 만들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온 이들입니다. 

 

해서, 네덜란드인들은 뉴욕주를 중심으로 유럽식 장원을 만들었는데 결국 실패합니다. 허나, 시도를 했던 가문들이 살아남아 루즈벨트 가문처럼 뉴욕주 영지를 다스리는 부자가 됩니다. 이들은 주로 뉴욕주에 살았고, 일부는 뉴저지나 펜실베이니아에서 거주하게 됩니다. 

 

또한, 네덜란드 본국에서 종교 논쟁이 발생합니다. 국교인 네덜란드 개혁교회에 맞서 네덜란드 개혁교회가 가짜 교회다, 라며 분리한 뒤 분리파가 미국으로 옵니다. 이 분리파는 뉴욕주에 머물기 보다 펜실베이니아를 비롯하여 오하이오주 등 미국 각지로 흩어졌는데요. 이 분리파가 미국 네덜란드 개혁교회도 물고 늘어지니까 네덜란드 개혁교회가 점차 힘을 잃어갑니다. 

 

  추신 : 더 써야 하는데, 밤새워서 쓰느라고 너무 힘듭니다. 약간 남은 분량은 다른 포스팅을 하기보다 이어서 내일 쓰겠습니다.

   

인드라는 정치를 하지 않겠으며,

책을 더 이상 쓰지 않으며,

언론에 기고하지도 인터뷰를 하지도 않을 것이며,

종교단체를 만들지도 않을 것입니다.

국유본론을 소명으로 여기고

지금처럼 살다

행복하게 가겠습니다

매일매일 행복하겠습니다

마.자.세.

한반도 평화와 통일, 경제 발전과 사회 복지를 위하여

친미친중 반일반북 쪽발정은 척살로 조국통일 쟁취하자

쪽발민주당 해체 쪽발석현 아웃

쪽발재벌 타도 골룸빡 처단

쪽발이에게 죽음을 쪽발왕에게 천벌을

쪽발타도해방투쟁 만세

   

   

인드라의 중앙은행 음모론 비판 : 국제유태자본은 록펠러 4세를 중심으로 혁명할 때다 국유본론 2012

2012/10/18 07:20

http://blog.naver.com/miavenus/70149342030

   

   

인드라의 중앙은행 음모론 비판 : 국제유태자본은 록펠러 4세를 중심으로 혁명할 때다 

국제유태자본 : 인드라 월드리포트 12/10/18

   

그간 인드라가 중앙은행 음모론에 대해 무식하다고 비판했습니다. 헌데, 본 이야기가 아니라 곁다리로 지나가는 이야기처럼 하다 보니 이해가 어렵다는 분들을 위해 따로 쓰게 되었습니다.

   

일단 재미있는 음모론적인 이야기를 해볼까요?    

   

1694년 잉글랜드은행장이 된 인물이 페터슨이란 스코틀랜드인입니다. 영국 중앙은행장이라니 엄청난 특권 자리가 아닙니까. 헌데, 페터슨이란 인물이 얼마 안 되어서 갑자기 그만둡니다. 하고, 몇 년 뒤에 페터슨은 파나마로 가서 다리엔이란 식민지를 건설하는데, 엄청 고생해서 처자식도 잃을 정도로 식민지 사업이 실패하고 맙니다. 그럼에도 무슨 일인지 페터슨 은행은 살아남았다고 합니다. 생각해보세요. 대체 페터슨은 귀족적인 일자리와 안정적인 수입을 외면하고 먼 파나마까지 가서 고생을 사서 했을까요^^?

   

일반적 설명은 페터슨이 잉글랜드은행보다 더 큰 수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착각했다는 것입니다. 이 설명에 의하면, 잉글랜드은행장 일자리가 파나마 다리엔 식민지 총독 일자리보다 수입 면에서 못하다는 겁니다.

   

반면 인드라 설명은 간단합니다. 고대 수메르서부터 은행장과 성직자가 밀접한 관련이듯이 근대 이후 은행장 역시 마찬가지였다는 점입니다. 이자놀이를 한다는 종교적 비판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보통 이상의 신앙심이 없으면 버티기 어려웠다는 점입니다. 해서, 록펠러에게 융자해준 은행가가 주말 주일학교 교장이라는 것이 특이한 사례가 아니라 일반적인 사례였던 것입니다.

   

해서, 페터슨이 잉글랜드은행장을 맡았다면, 그 직위를 감당할 신앙심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하고, 그 신앙심을 감당할만한 종교가 당대에는 이자놀이에 대해 관용적인 칼뱅 교리에 입각한 스코틀랜드 장로교가 있었는데요. 페터슨이 일반적인 스코틀랜드 장로교인이었다면, 과연 잉글랜드 은행장을 감당할 수 있을지 회의적입니다. 반면, 독실한 청교도인이면서 프리메이슨이라면 다르지요.

   

해서, 인드라는 페터슨을 윌리엄 3세와 함께 네덜란드에서 이주해온 유대자본의 얼굴마담이었고, 프리메이슨이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국유본 간첩 유대인 체게바라가 국유본 지시를 받아 볼리비아로 떠났듯이, 스코틀랜드 프리메이슨 페터슨은 국유본 지시를 받고 파나마로 떠난 것입니다. 실제로 이 시기 프리메이슨은 독실한 청교도들이 대부분이어서 선교하러 전 세계로 흩어졌습니다. 다만, 페터슨이 프리메이슨이다, 라는 직접적인 증거를 입수하지 못했으니 인드라 주장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여기까지 인드라 역시 음모론 떡밥을 뿌렸으니 중앙은행 음모론 비판을 본격적으로 해보지요.

   

최초 중앙은행을 영국 잉글랜드은행이라 합니다. 헌데, 1694년 잉글랜드은행이 중앙은행일까요? 만일 그렇다면 최초 중앙은행은 교황과 계약을 맺은 메디치 가문 은행, 또는 그 이전인 롬바르디아 이태리 상인이라고 해야 옳겠지요. 다시 말해, 1694년 잉글랜드은행은 오늘날 말하는 중앙은행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하면, 1694년 잉글랜드은행과 오늘날 잉글랜드은행 차이는 무엇일까요? 1694년 잉글랜드은행은 발권 독점이 아니었고, 오늘날 잉글랜드은행은 발권 독점입니다. 해서, 인드라는 이해하기 쉽게 1694년 잉글랜드은행 및 메디치가문 은행을 '주거래은행'으로, 1844년 필은행조례 이후 잉글랜드은행을 '중앙은행'으로 구분합니다.

   

메디치 가문 은행은 교황의 주거래은행이었을 뿐입니다. 그처럼 잉글랜드은행 역시 영국 왕실의 주거래은행이었던 것입니다.

   

하면, 발권이란 뭘까요?

   

      

   

http://rokiroki.tistory.com/1761

   

다른 글 대략 읽어보니 무식한 쪽발놈현경제학파 삘이 나서 나라를 망칠 넘인 것 같은데, 이 글만은 읽어줄만 했습니다.

   

인드라는 다른 식으로 설명합니다.

   

은행통장입니다. 여러분이 은행에 돈을 예금하면 은행은 여러분에게 뭘 주나요? 은행통장을 줍니다^^! 헌데, 은행통장을 거래할 필요가 발생합니다. 작은 거래라면 현금 거래가 되는데, 규모가 크다면 상거래에서 일일이 은행에 들려 현금을 찾아서 거래하기에는 많은 불편이 따릅니다. 해서, 은행을 통하지 않고 상인과 상인이 직접 은행통장을 거래하는데, 이것이 수표인 거죠. 수표 기원은 서양에서 귀족들이 돈 필요할 때 지급 명령서였다고 합니다. 환락가에서 술 마시고 주거래은행 앞으로 지급명령서를 써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간 것이 어음인 것입니다. 수표는 즉시 지불이지만, 어음은 지금 당장 돈이 없으니 기한을 정하는 것입니다. 가령 귀족이 술을 먹은 뒤 외상하면서 한 달 뒤에 갚겠다는 지급명령서입니다.

   

하면, 당대 국유본은 무려 백 년 이상 발권을 왜 독점하지 않았을까요?

   

   

첫째, 당대 국유본은 발권을 독점할만한 실력이 안 되었습니다

   

은행 기원은 메디치나 푸거에서 보듯 종교정치권력 채무 변제 때문이었습니다. 교황이나 추기경 정도가 되면 돈 씀씀이가 장난이 아닐 것입니다. 헌데, 전당포 수준 베니스 상인 샤일록이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하겠다고 나서도 이내 개털이 되었을 것입니다.

   

루터 면죄부 비판으로 유명한, 스페인왕에게 올인했던 푸거가 망한 것을 유념하면 될 것입니다.

   

국유본은 당대 신용을 모두 감당할만한 금과 은 등을 보유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일국 재정을 감당하는 것도 간당간당했습니다.

   

둘째, 당대 국유본은 윌리엄3세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정도에 불과했지, 영국 귀족을 장악한 건 아니었습니다.

   

설사 당대 국유본이 발권 독점이 가능한 금과 은을 보유할 지라도 발권으로 이득이 발생하는데 귀족들이 그냥 두고 보고 있겠습니까. 오늘날 어음폐지가 대세임에도 삼성, 포스코 등 현금 보유 능력이 있는 일부 대기업에서만 어음 폐지가 이루어지는 양상과 같습니다.

   

셋째, 로스차일드 가문 등장과 아편전쟁입니다.

   

19세기 초반 영국에서 공황이 발생합니다만, 이전 공황과 달랐습니다. 이전 공황이 대부분 농업 공황이었다면, 19세기부터 일어난 공황은 이전보다 주기적이면서도 특히 금융공황을 수반한 복합공황이었습니다.

   

인드라는 이를 로스차일드 가문이 나폴레옹전쟁 이후 국유본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경제 전쟁이라고 간주합니다. 19세기 초반 국유본 권력은 베어링 가문이 쥐고 있었습니다.

   

로스차일드 가문에게는 유럽을 살만한 금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로스차일드는 용병 장사로 유럽 최고부자였던 독일 헤센가문이 번 돈을 활용하는 유럽 재산관리인이었습니다.

   

헌데, 로스차일드 가문이 공황을 일으키면 자본주의 시스템에 균열이 옵니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대량 자본, 대량 생산, 대량 소비가 가능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는 대량 생산/대량 소비를 말하지만, 원시적 축적, 쉽게 말하면, 사업할 때 필요한 초기 막대한 자금이 가장 중요합니다. 가령 삼성 반도체사업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십여 년 적자에도 버틸 수 있는 자금력이 중요했던 것입니다.

   

공황이 오면, 대출이 줄어드니 변두리격인 지방은행들이 망합니다. 오늘날로 보자면, 저축은행이지요. 공황이 오면, 판매가 줄어드니 자금력이 딸리는 중소기업들이 망합니다. 하면, 이들 저축은행들과 중소기업들은 어찌되나요? 거대은행과 거대기업에 흡수됩니다.

   

하면, 로스차일드 가문은 왜 주기적으로 공황을 일으켰나요? 국채를 헐값에 매입했다 제 값 받고 파는 이치입니다. 경제 권력을 보다 집중할 수 있습니다.

   

허나, 이는 필요조건이었지, 충분조건이 아니었습니다.

   

1840년대는 아편전쟁이 일어난 시대입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금본위제부터 이야기해야 합니다.

   

영국은 금본위제를 18세기에 사실상 시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영국이 금본위제를 공식적으로 확립한 때는 1819년입니다. 이유는 무엇일까요. 대중국 무역 때문입니다.

   

아메리카에서 획득한 은이 유럽으로 들어와 유럽에서 가격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이를 스페인 국왕이 전쟁하는데 쓰자 은이 유럽 전역으로 퍼집니다. 그 은을 영국이 빨대를 대어 쭉쭉 빨아들여서 대중국 무역에 쓴 것입니다. 헌데, 은이 다 떨어집니다. 해서, 영국이 금본위제를 실시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아편전쟁 전에 왜 금본위제를 말하는지 눈치를 채었나요?

   

영국이 금본위제를 실시할 수 있었던 건 아편 기반 금본위제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석유 기반 달러 기축통화제와 같은 것입니다.

   

헌데, 아편무역 기반이 무너지는 겁니다. 1820년대부터 청나라 황제가 개혁을 부르짖으며 아편은 없다고 나서니 큰일이 난 겁니다.

   

아편이 있고서야 산업혁명이 있는 겁니다. 맑스가 화폐론에서 상품론으로 결정적으로 전향한 이유가 인드라는 아편으로 보고 있기까지 합니다^^!

   

해서, 중앙은행 발권 독점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비상사태인 겁니다.

   

이전까지 지방은행이 발권하다 망해도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 발권 독점을 반대하는 자유은행주의자들 주장대로 에너지 불변의 법칙처럼 한쪽에서 손실이 발생하더라도 다른 쪽에서는 이익이 발생하므로 총합에서는 같기 때문입니다. 자유은행주의자들은 자본 흐름을 생태계로 이해하여 이 균형을 깨면 생태계를 파괴하는 것처럼 큰 일이 생기듯 미증유의 사태가 일어날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헌데, 1840년대는 달랐습니다.

   

비유하면, 이렇습니다. 자식들 사이에 재산 싸움이 있습니다. 누가 이기든, 재산이 보전될 것이라면 부모는 방관자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 부모는 자유은행주의자가 될 것입니다. 발권은 자유인 겁니다. 허나, 자식들 중 누군가가 외부세력을 끌어들여서 이기고자 합니다. 헌데, 그 외부세력이 보통이 아니어서 그간 모아둔 재산을 말아먹을 것 같습니다. 이때도 부모가 방관하나요? 자식들 재산 싸움에 개입해야지요. 다시 말해, 부모는 통화주의자가 되어 발권 독점을 해야 합니다.

   

해서, 1844년에 필은행조례가 만들어졌고, 수정을 거쳐 1884년 은행법이 등장합니다. 이 은행법은 이후 전 세계 모범이 되었습니다.

   

헌데, 필은행조례로 발권력을 잉글랜드은행이 독점한 이후는 문제가 없었을까요? 아니죠. 문제가 있으니까 수정을 거듭했던 것입니다. 또한, 1884년 은행법 이후에도 문제가 발생했던 것입니다.

   

문제가 무엇입니까. 이는 맑스가 자본론에서 잘 설명했던 것입니다.

   

잉글랜드은행에는 국채와 금이 잔뜩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지방은행이 지급준비금이 없어서 돈을 지불하지 못하듯 잉글랜드은행이 태환 정지를 하였는가.

   

해외로 빠져나가는 금이 있습니다. 하면, 잉글랜드은행에는 어음이 들어와서 어음을 폐기시켜야 합니다. 어음이란 금 지급명령서이니 금이 줄어든 만큼 어음도 줄어들어야 합니다. 헌데, 공황 국면이면 잉글랜드은행에 어음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어음을 발행한 기업이 사업에 실패하여 은행에 납부할 자금을 마련하지 못해 부도나고, 이를 주관한 은행에서 손실 처리가 납니다. 이때, 은행은 중앙은행 지급보증으로 어음 발행한 것이니, 은행의 은행, 중앙은행인 잉글랜드은행으로 들어와야 할 어음이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발권 독점을 주도했던 통화주의자 설명이라면, 지급 보증한 신용만큼 보유한 채권과 금으로 처리해야 합니다. 쉽게 말해, 부도난 사업자가 사재를 털어서 협력업체에게 주기로 한 돈 다 주고 노동자 월급을 다 주면 되는 겁니다.

   

헌데, 그러면 잉글랜드은행 위신이 뭐가 됩니까. 잉글랜드 체면이 뭐가 됩니까. 신용으로 움직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잉글랜드은행 위신이 추락한다는 건 뱅크런인 겁니다. 이 사태를 막아야했던 것입니다.

   

헌데, 잉글랜드은행이 당장 파산 날 정도로 형편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인드라와 맑스의 차이입니다.

   

맑스는 자본주의 시스템을 무계획적, 즉 자연발생적으로 보아 자본주의 시스템이 종말로 치닫게 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허나, 인드라는 수십 년 맑스 종말론을 숭배하다가 깨달은 바가 있었던 것입니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맑스가 말한 자연발생적 무계획적 체제가 아니라 로스차일드 가문 등 국유본이 정교하게 만든 인위적 계획적 시스템이라는 것입니다.

   

로스차일드 가문에 이어 록펠러 가문 역시 왜 주기적으로 자본주의 시스템에 균열을 내는 것인가요?

   

첫째, 공황 국면에서 국유본은 오히려 정치경제 권력을 집중하고 자본 집중할 수 있습니다. 해서, 19세기 로스차일드 가문이 공황으로 영국 은행시스템을 뒤흔들 듯 20세기와 21세기 록펠러 가문은 공황으로 미국 은행시스템을 흔드는 것입니다.

   

둘째, 국유본 목표는 영국이라는 일국, 미국이라는 일국에 국한하지 않습니다. 영국을 위해서 국유본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미국을 위해서 국유본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국유본을 위해서 영국과 미국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오늘날 미국은 국유본 목표를 위해서 해체되어야 할 존재입니다. 해서, 국유본이 각종 서적이나 인터넷 음모론을 통해서 미국 망한다 따위 음모론을 유포시키는 것입니다.

   

셋째, 국유본 목표는 지구적 지배입니다. 지구적 지배를 위해서는 미국 연준마저도 지방은행, 저축은행, 새마을금고로 취급할 정도로 전진해야 합니다. IMF SDR로 과감하게 전진해야겠습니다.

   

상기한 발권 독점에서 인드라가 강조했듯, 보다 많은 지급준비금을 준비해야 실력을 갖추어야 하고, 각국 국가권력은 물론이요, 야당, 종교, 언론, 시민단체, 기업을 장악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네이선 로스차일드와 같은 천재적 인물과 아편전쟁과 같은 위기상황이 필요합니다.

   

현존하는 국유본 권력은 현실에 안주해 있습니다. 이는 필연적인 것입니다. 모험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국유본 귀족 중에 어느 누가 잉글랜드은행장 자리를 박차고 파나마 같은 오지에서 죽을 고생을 하고 싶겠습니까.

   

허나, 국유본 힘은 죽을 고생을 하며 발전해왔던 것입니다. 만일 현재 자리에 만족한다면 국유본 영향력은 급속히 축소될 것입니다.

   

국유본 영향력을 쌓아온 기간이 사십년이면, 그 영향력이 붕괴하는 데에는 1/10, 단 사 년이면 충분합니다.

   

오늘날 국유본 수장은 제이 록펠러, 록펠러 4세입니다. 허나, 확실한 황제이려면 록펠러 4세에게 곳간 열쇠를 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록펠러 재단 운영권입니다.

   

현 시점에서 골드만파 제이 록펠러에게 록펠러 재단 운영권을 주어도 되는 시점인지는 인드라가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허나, 긴가민가할 때, 국유본은 제이 록펠러에게 실질적인 권한을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데이비드 록펠러는 제이 록펠러에게 황제 자리를 양위하고 물러나야 합니다.

   

이미 올해부터 물러난 것일 수 있습니다. 매년 발표되는 빌더버그 명단 유출이 올해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데이비드 록펠러가 이미 사망했을 수도 있습니다. 허나, 데이비드 록펠러 가신들이 권력 누수를 우려하여 진시황제의 죽음을 알리지 않던 진나라 내시들처럼 록펠러 4세 세력과 충돌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 무엇이든.........................

   

인드라가 천운을 보건대, 데이비드 록펠러와 제이 록펠러의 충돌이든, 이조차 록펠러 가문이 권력 승계를 위한 짜고 고스톱이든, 록펠러 가문이 최소한 50년간 절대 권력을 누릴 것입니다.

   

다시 말해, 데이비드 록펠러와 제이 록펠러 싸움으로 제 3자가 득을 볼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록펠러 4세 권력은 더욱 강화될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인드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시대는 영웅을 부릅니다. 개인이 아무리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시대가 아니면 개인이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영웅이 되지 못합니다.

   

향후 50년간 국유본과 록펠러 가문, 하고,국유본 하위 분파인 노비네파, 뉴라이트파, 골드만파는 현재 권력보다 더 많은 권력을 향유할 것입니다.

   

노비네 - 로스차일드 빌더버그 네오콘부시 JP모건 이스라엘 노동당(마파이당)

뉴라이트 - 데이비드 록펠러 삼각위원회 뉴라이트 모건스탠리 이스라엘 리쿠르당

골드만 - 제이 록펠러 CGI 클린턴 골드만삭스 이스라엘 카디마당

   

이웃 분들이 인월리를 보다 많은 분들이 읽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책으로도 나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보다 많은 분들이 진실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허나, 인드라 생각은 다릅니다.

   

인드라 블로그에는 국유본, 오바마, CIA, 중국과 이스라엘 등 각국 지도부, 청와대, 새누리당, 쪽발민주당, 진보당, 국정원, 언론, 시민단체, 기업, 종교단체 등 볼 사람들은 다 보고 있습니다. 쪽발정일 사망 직전에는 북한에서도 인드라 블로그에 접속했더군요. 쪽발정은도 보고 있습니다.

   

어떤 영국 사회주의자는 자신의 기획을 보다 많은 사람들, 특히 권력에 있는 사람들이 안다면, 세상이 바뀔 것이다고 생각했답니다. 헌데, 그 이야기를 들은 영국 외교관이 당신 견해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해서, 당신 견해가 실현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웃분들이 상상하는 이상으로 국유본은 박정희보다 더 섬세합니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습니다.

   

가령 인드라가 국유본이라면 인드라를 어떻게 처리할까요? 없애나요? 하책입니다. 상책은 무엇인가요? 인드라 옆에 사람을 붙입니다. 그 사람은 인드라가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또한, 인드라가 자신의 견해를 더 발전시킬 수 있도록 아낌없이 조언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인드라가 큰 뜻을 품고 세상에 나오도록, 정당을 설립하든가, 종교단체를 만들든가, 출판사나 언론사를 운영하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왜 국유본은 이토록 인드라를 키울까요? 식객이죠. 식객 아나요? 중국 전국시대에 군자들은 조금이라도 재주가 있다 여기면 식객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평소에는 노자의 말처럼 쓸 데가 없는 것이 식객입니다. 허나, 위기상황일 때 식객이 한 건이라도 해결할 수 있다면 족한 것입니다.

   

다만, 오해하지 말길 바랍니다. 인드라는 국유본으로부터 아직 연락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몇 년 전에는 인드라 블로그 검색을 아예 원천 차단하더니 병쉰 미네르바가 말 그대로 병신이 된 연후에 국유본이 인드라를 주목하여 포털에서 검색 상위에 인드라 글을 배치시키는 정도입니다. 물론 국유본이 인드라를 가끔 불편해하면 바이러스를 왕창 보내거나 특정 글을 차단시키거나 인드라 블로그에 혼란을 야기시키고는 합니다만, 대세는 아닙니다.

   

이미 운명적으로 인드라에게 올 사람들은 다 옵니다. 우연하게 인드라 블로그를 방문해도 인연이 아니면 지나가기 마련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친구나 친척 가족에게 말하고 추천해도 깨닫는 분들이 있고, 경멸하거나 무시할 분들이 있습니다. 확률적으로 최소한 78%는 이웃분 이야기에 피식 웃을 것입니다.

   

인드라가 천운을 보건대, 국유본 권력, 록펠러 권력이 영원하지 않습니다. 인드라가 보건대, 빠르면 2050년대부터 위기가 올 수 있습니다. 2060년대, 2070년대에 이르면 국유본 권력, 록펠러 권력이 본격적으로 위협받을 것으로 봅니다.

   

국유본 권력, 록펠러 권력 이후에 어떤 권력이 올 것인지는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국유본 권력, 록펠러 권력보다 더 강력한 권력이 오거나, 아니면 아예 지구가 망하든가 알 수 없습니다.

   

그 시대가 도래하면, 많은 사람들이 인월리를 인용하며 인드라를 찬양할 것이라 봅니다. 다만, 인드라 사후가 될 것입니다만.

   

그 시대가 오면 행동하는 것이 옳습니다. 허나, 지금 행동한다는 건, 국유본의 어릿광대가 되는 것일 뿐입니다.

   

가령 제이 록펠러는 사이버방위사령부를 만들었습니다. 인드라 같은 인터넷 전사가 인터넷에서 미국 비판하고, 로스차일드/록펠러 비판하고, 빌더버그/삼각위원회 비판하고, 국유본 비판하는데 그치지 아니 하고, 길거리에 나서서 '월가를 점령하라' 같은 시위를 조직하기를 바라는 것 같습니다.

   

허나, 인드라는 정중하게 사절합니다.

   

단지, 인드라는 인드라 블로그를 통해 국유본 틈새를 노려 한반도 평화통일과 경제발전, 사회복지를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방법은 간단하죠. 국유본이 한반도를 위해 윈윈해주면 국유본 칭찬도 하고 나름 홍보도 합니다. 허나, 국유본 하는 일이 한반도를 저해하면 히스테리 환자처럼 쥐랄할 것입니다.

   

이에 대해 국유본은 게임이론으로 면밀히 검토해서 손익을 분명히 결정한 후 인드라와 잘 타협할 것으로 봅니다.

   

해서, 인드라 글쓰기는 분석적 글쓰기가 아니라 실천적 글쓰기입니다.

   

   

"1694년 W.페터슨의 제안에 따라 설립된 최초의 주식회사 형태의 은행으로, 프랑스와의 전쟁비용 조달에 바쁜 윌리엄 3세의 재정난 해소를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이에 따라 자본금 120만 파운드를 그대로 정부에 대출하는 대가로 그와 동액까지의 은행권 발행의 권한을 차지하였다. 당시에는 다른 사적 금융업자 중에도 은행권을 발행하는 데가 있었으므로 독점적인 발권은행(發券銀行)은 아니었으나, 주식제도에 의해 경영규모가 컸고 또 안정되어 있었던 점이라든가, 국왕의 재정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점 등으로 인해 18세기에 들어와 점차 중앙은행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해나갔다.

   

   

1833년 잉글랜드 은행권이 법화(法貨)로 지정되고 다른 발권은행은 점차 정리되었는데, 다만 스코틀랜드와 북아일랜드에는 독자적인 발권은행이 남아 있지만, 이들 은행권도 잉글랜드 은행권과 함께 유통되었다. 더욱이 1844년 잉글랜드 은행조례(필은행조례)에 의하여 새로운 발권은행의 설립이 금지되기에 이르러 잉글랜드 은행이 발행하는 은행권이 압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 ··· 00000151

   

   

   

   

"1844년 7월19일 영국 의회가 '은행허가법(Bank Charter Act)'을 통과시켰다. 골자는 지방은행권 발행 제한. 잉글랜드은행에 돈을 찍는 권한을 몰아줬다. 잉글랜드은행 조직도 발권부와 통상적인 업무를 담당하는 은행부로 분리시켰다. 입법 제안자인 로버트 필 총리의 이름을 따 '필 은행법'으로도 불리는 이 법은 전세계로 퍼졌다. 

 

법의 도입 배경은 지방은행의 지폐 남발. 1716년 브리스톨에서 첫 선을 보인 이래 1821년 609개로 불어난 지방은행이 산업혁명의 자금줄 역할을 수행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공황에는 속수무책이라는 반성에서다. 자금수요가 줄어든 1809년부터 1830년까지 파산한 지방은행만 331개. 은행이 흔들리는 통에 공황이 더욱 깊어지자 이 법이 나왔다.

   

분명한 점은 법안의 수정과정을 거치며 중앙은행으로서 잉글랜드은행의 지위가 확립되고 1884년 은행법은 전세계 중앙은행의 모델로 자리잡았다는 사실이다. 법 제정 162년이 지나도록 중앙은행의 발권독점을 대체할 금융 시스템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

 http://economy.hankooki.com/lpage/opin ··· 3820.htm

 

인드라는 정치를 하지 않겠으며,

책을 더 이상 쓰지 않으며,

언론에 기고하지도 인터뷰를 하지도 않을 것이며,

종교단체를 만들지도 않을 것입니다.

국유본론을 소명으로 여기고

지금처럼 살다

행복하게 가겠습니다

매일매일 행복하겠습니다

마.자.세.

한반도 평화와 통일, 경제 발전과 사회 복지를 위하여

친미친중 반일반북 쪽발정은 척살로 조국통일 쟁취하자

쪽발민주당 해체 쪽발석현 아웃

쪽발재벌 타도 골룸빡 처단

쪽발이에게 죽음을 쪽발왕에게 천벌을

쪽발타도해방투쟁 만세

   

   

   

쪽발석현 쪽발재벌 편의점을 국민 편의점으로 바꿉시다 CU 쪽발이에게 빼앗긴 골목상권을 시민과 자영업자에게 되돌려주는 독립운동합시다 국유본론 2012

2012/10/11 15:24

http://blog.naver.com/miavenus/70148863295

   

   

   

   

   

   

손가락에 클릭하면 쪽발석현 쪽발재벌 타도와 조국통일이 앞당겨집니다.

   

   

   

쪽발석현 쪽발재벌 편의점을 국민 편의점으로 바꿉시다

CU 쪽발이에게 빼앗긴 골목상권을 시민과 자영업자에게 되돌려주는 독립운동합시다

국제유태자본 인드라 월드리포트 12/10/11

   

지난 몇 년간 전국 구멍가게가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하고, 그 자리에 편의점이 차지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영업 시장이 포화상태임에도 편의점들이 앞다투어 여기저기 생겨났습니다. 퇴직 후 자영업을 준비하던 이들에게는 편의점이 눈에 뜨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보기에 장사가 잘 되는 듯하니 큰 돈 만지지 못하더라도 생활비를 벌 수 있겠다 여겨 시작한 이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허나, 그들이 지금 남몰래 눈물짓고 있습니다.

   

쪽발이 장악한 정치권은 대형할인마트 공격하면서 서민을 위한다는데 정작 서민이 없는 현실인 겁니다.

   

   

인드라가 편의점 문제를 제기한 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 번개에 나오셨던 이웃분이 가맹점 본사 횡포에 무력하게 당한다고 인드라에게 대책을 호소해주셨습니다. 또 다른 이웃분이 번개에 나왔는데, 그분이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나, 생활이 어려워 편의점을 알바에게 맡기고, 점주가 다른 직장에서 알바하는 충격적인 모습을 접했기 때문입니다. 편의점 점주가 생활이 어려워 가게를 알바에게 맡기고, 점주가 다른 직장에서 알바하다니 편의점하면 돈 벌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사석에서 듣고는 했는데, 생활비 마련도 어렵다니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둘, 쪽발병쉰색희들이 근래 대형할인마트를 미친 듯이 공격하는 배경이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쪽발이들이 시민을 위해서 일하지 않습니다. 뭔가 돈 좀 만질 수 있으니까 쪽발병쉰색희들이 공격하는 겁니다.

   

셋, 재래시장도 살고, 자영업자도 살고, 대형할인마트도 살고, 대한민국이 사는 유통시장 대안을 고민하기 때문입니다.

   

   

우선 첫번째 문제부터 봅시다.

   

   

하나, 편의점 점주는 편의점 본사 노예다

   

그 실태가 여기 있습니다. 소문으로만 나돌던 편의점 노예계약이 여기 있습니다.

   

"편의점 본사 甲 등쌀에 가맹업주 乙 등골 휜다

   

16면

| 기사입력 2012-10-08 20:11

[세계일보]경기 안양에서 편의점을 운영하던 이모(61)씨는 최근 장사를 접었다. 매출이익의 35%라는 높은 수수료와 아르바이트 직원들에게 시급을 주고 나면 남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이씨는 "정년퇴직 후 큰 기술 없어도 할 수 있는 편의점은 제2의 인생을 설계할 수 있는 사업 아이템이었다"며 "하지만 본사는 가맹점주까지 소비자로 생각하고 영업했다. 지난 2년간 돈도 못 벌고 본사의 배만 불려줬다"고 허탈해했다. 이처럼 주요 편의점의 높은 수수료에 가맹점주들의 등골이 휘는 것으로 나타났다.

   

8일 지식경제부의 국정감사 자료를 보면 미니스톱, 세븐일레븐, CU(옛 훼미리마트)는 지난해 매월 매출이익의 35%를 본사가 수수료로 챙겼다. 바이더웨이의 수수료율은 30%였고 GS25는 1635%였다. 이는 백화점들이 입점 업체로부터 받는 수수료와 비슷한 수준이다.

   

6대 편의점 가운데 가장 낮은 곳은 씨스페이스로 15%였다. 업체마다 가맹점 정책에 다소 차이가 있지만, 이상은 가맹점주가 매장을 임차해 운영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순수 가맹점'에 적용되는 기준이다.

   

위탁가맹점의 경우 바이더웨이, 세븐일레븐, 씨스페이스, CU는 수수료율이 60%였다.

   

미니스톱은 50%, GS25는 6070%였다. 한 편의점 가맹점주는 "편의점 본사는 프로그램 사용료, 간판 유지·보수비, 입금 지연에 따른 패널티 비용 등 각종 사유를 붙여 가맹점주의 주머니를 노리지만, 가맹점주는 계약기간 내에 계약을 해지할 경우 부담하게 될 수천만원의 위약금 때문에 손해를 감수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치킨점이나 제과점은 수수료 시스템이 업체별로 달랐다. 특히 본사는 광고비와 판촉비 부담을 가맹점주들에게 떠넘긴 것으로 나타났다.

   

2010년 기준으로 BBQ는 월매출의 3.5%를 상표 사용료 등으로 받고 광고비의 50%를 가맹점주가 부담하게 했다. 월매출의 5% 이상을 판촉비로 내게 했고 실내장식 비용은 공사 견적에 따라 징수했다.

   

교촌치킨은 상표 사용료를 원·부자재 대금에 포함해 받았고 광고비나 판촉비는 사례별로 따로 산정했다. 파리바게뜨는 2010년에 판촉료와 카드수수료(OK캐시백, BC카드, KB카드 등)의 50%를 점주가 내게 했고 제빵기사의 등급에 따라 용역료를 매달 241만296만원 징수했다.

   

뚜레쥬르는 광고료와 판촉료 절반을 점주에게 부담시켰고 제조기사 용역비를 매달 180만222만원 내게 했다. 5년마다 받는 환경개선비용은 일반형 1억2870만1억4080만원, 카페형 1억6750만1억8200만원이었다.

   

지경부가 파악한 수치는 가맹사업거래 정보공개서를 토대로 한 것이다. 업체마다 표기 방식이 다르고 일부는 기준을 명확하게 하지 않아 예비 가맹점주가 수수료 수준을 정확하게 파악하거나 경쟁업체 간 차이를 비교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김기환 기자 kkh@segye.com "

   

   

이중에 업계 1위인 CU를 볼까요? CU는 과거 페밀리마트였는데, 페밀리마트는 쪽발브랜드를 빌려온 것인데, 근래 알 수 없는 이유(?)로 브랜드를 바꾸었습니다. 인드라 때문일까요? 편의점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한 것이 인드라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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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투데이 김종훈 기자 = 국내 편의점 업계 1위인 BGF리테일(회장 홍석조)의 브랜드 CU(옛 보광훼미리마트)가 위탁

가맹점들로부터 매출이익의 최고 60%, 순수가맹점은 매출이익의 35%나 되는 고율의 수수료를 챙겨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1일 부좌현(민주당) 의원이 관련업계로 부터 제출 받은 자료를 조사 분석한 결과 CU는 가맹점들로부터 매출이익의 최고 60%를 수수료로 명분으로 챙겼다. 순수 가맹점이란 가맹점주가 매장을 임대해 운영하는 것이고 위탁가맹점은 본사가 임차료 등을 대신 부담하고 점주가 운영을 하도록 하는 구조의 유통시스템을 말한다.

   

CU는 BGF리테일의 편의점 브랜드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처남인 홍석조 회장이 운영하고 있다.

   

가맹점 점주들은 이같이 본사로부터 수익의 대부분을 흡수당하기 때문에 수익성이 매우 낮은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점주들의 월 평균 수익은 위탁가맹점이 220만원, 순수가맹점이 380만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업계 선두인 CU는 지난해 매출액이 3조1000억원이고 순이익 1000억원에 이르렀다. 점포수는 7400개에 달한다. 이 회사의 수익금을 따지면 천문학 숫자가 나온다.

   

이는 회사가 점주의 매출 이익 35~60%를 수수료로 가져가기 때문이다. 밤샘 영업 등 노동 강도에 비하면 수입수준이 매우 빈약하다.

   

   

   

   

이와 관련해 익명을 요구한 CU 가맹점주는 "실제 수입 중에서 수수료를 제외하고 아르바이트 인건비, 전기세, 세금 등을 공제하면 실제 수입은 절반도 안된다"고 토로했다.

   

그는 "편의점 사업을 계획중인 예비사업자는 본사의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서는 안된다"고 조언했다.

   

지난 2002년 업계의 매출은 2조원대에 불과했으나 최근 10년 간 8조원대로 성장해 편의점 업계 가맹 본사가 매출 4배, 순이익 20배의 성장세를 이룬 반면 점주들의 수입은 10년전과 유사해 최저생계비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에 대해 부 의원은 "동반성장이 화두인 만큼 서민이 운영하는 점포에서 막대한 이익을 올리는 재벌 편의점 업계의 수수료는 파격적으로 낮춰야 한다"고 말했다.

   

또 "공정위에서 편의점과 관련된 모범거래기준 정립과 관련규정을 마련해 이 같은 기형적 수익배분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김종훈 기자 fun@asiatoday.co.kr>"

   

   

   

고리사채업자가 따로 없습니다. 월 35%, 월 60%를 뽑아간다니 중세시대 귀족이 소작을 착취하던 생각이 절로 듭니다. 폭동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 이상한 일일 정도입니다. 그만큼 세뇌된 것일까요? 언론이 침묵하다가 최근에야 슬쩍 언급하는 정도입니다.하긴 쪽발석현 중앙일보 사주는 쪽발놈현 정권 때 유엔사무총장 후보까지 오른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업계 1위 보광그룹 일족이니 어련하시겠습니까. 아참! 쪽발석현이 왜 쪽발석현이냐구요? 쪽발석현 애비되는 색희가 쪽발진기입니다. 그것 아세요? 우리나라 주요 재벌 처가 상당수가 쪽발가문 출신이라는 것!

   

   

   

"사진만 보면 허창수는 십미터 몽준, 뉴또라이 골룸빡과 뉴라이트 안철수, 뉴라이트짱 정몽준에게 버림받고 짝퉁으로 위로받고 싶었나, 단일화는 친노삼성 문재인되나? 골룸빡이 노비네파 허창수 만나자고 제안했다, 허창수는 전경련 회장이자 정몽준과 함께 아시아를 대표하는 축구 라이벌 

2012/09/17 20:40 수정 삭제

작성자: 인드라(miavenus)

http://blog.naver.com/miavenus/memo/70147203681

박원순 시장·허창수 회장, 장애인시설 배식 봉사활동

| 기사입력 2012-09-17 20:28

[세계일보]허창수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과 박원순 서울시장이 17일 서울 노원구 하계동 지적장애인 생활시설 '동천의 집'을 함께 방문해 점심 배식 봉사활동을 했다.

   

   

허창수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오른쪽에서 첫번째)과 박원순 서울시장(〃 두번째)이 17일 서울 노원구 하계동의 지적장애인 생활시설 '동천의 집'에서 점심 배식 봉사를 하고 있다.

남제현 기자

박 시장이 허 회장을 만난 것은 작년 10월 말 취임 후 처음이다. 이들은 직업훈련 중인 장애인들을 만나 덕담을 나누고 따뜻한 추석을 보낼 수 있도록 성금 2000만원을 전달했다.

   

이날 만남은 지난 7월 박 시장이 "차 한잔 하자"고 먼저 제안하자 전경련 측에서 쪽방촌을 함께 방문하는 봉사활동을 하자고 화답해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허 회장은 "경기 침체로 모두가 어려울 때일수록 소외계층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최현태 기자  

   

문재인 간담회에 초대받지 못한 전경련

| 기사입력 2012-09-17 18:03

'일자리 창출' 간담회에 상의·경총·양대 노총 등만 초청

   

전경련 `재벌개혁' 반대 때문?..문후보측 "따로 만날 생각 있다"

   

(서울=연합뉴스) 이동경 기자 =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가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후보의 '일자리 창출' 간담회에 초대받지 못했다.

   

문 후보는 대선 후보로 확정된 후 첫 정책 행보로 17일 구로디지털단지의 한 업체를 방문해 '일자리가 먼저입니다'라는 주제로 간담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는 손경식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 회장, 김영배 한국경영자총협회 상임 부회장 등 경제단체 수장들과 양대 노총 직능별 위원장, 구직자 등이 초청을 받아 참석했다.

   

그러나 재계를 대표하는 전경련이 앉을 자리는 없었다.

   

문 후보측에서 초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 후보는 이날 간담회에서 "경제 민주화와 복지를 관통하는 것은 결국 일자리"라면서 중소기업에 대한 지원 강화,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등 일자리 확충의 대책을 제시했다.

   

기업 규모나 고용 인원을 고려하면 일자리 창출의 주역은 대기업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전경련을 초청하지 않은 것은 지주회사 규제 강화와 출자총액제한제도 부활 등 문 후보가 주장하는 '재벌'의 체질 개선에 반대하는 전경련의 태도때문일 것이라는 해석이 재계 주변에서 나오고 있다.

   

문 후보는 지난 6월8일 모교인 경희대에서 개최한 '광장토크'에서 "전경련이 경제민주화 헌법 조항의 삭제를 주장하고 있다"면서 "경제 권력이 커졌다고 헌법까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데 유리하게 고치자는 것은 대단히 오만한 발상"이라고 강도 높게 비난했다.

   

이에 앞서 같은달 4일 전경련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이 정책 토론회에서 '경제민주화 관련 헌법 조항을 삭제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는 보도가 나와 논란이 일기도 했다. 당시 전경련은 이같은 보도가 오보라고 해명했다.

   

문 후보측 윤관석 대변인은 이번 간담회와 관련, "기업인 모임인 경총이 참석하기 때문에 전경련을 초청하지 않았다"며 "전경련은 앞으로 경제민주화 정책 관련 행보 때 따로 만날 생각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강도 높은 재벌 개혁을 주창하는 문 후보와 전경련의 향후 만남에서 경제 민주화와 관련된 공통분모가 도출될지도 관심거리다.

   

한편 허창수 전경련 회장은 이날 문 후보가 간담회를 하는 비슷한 시간대에 박원순 서울시장과 함께 하계동의 지적장애인 생활시설을 방문해 성금을 건네고 배식활동을 했다.

   

허 회장은 문 후보의 경남고 4년 선배다.

   

hopema@yna.co.kr"

   

   

두번째, 대형할인마트는 재벌이고, 편의점은 서민이다?

   

아닙니다. 대형할인마트도 재벌이고, 편의점도 재벌입니다. 동시에 대형할인마트 입점한 점주도 시민이요, 편의점 입점한 점주도 시민일 뿐입니다.

   

   

많은 분들이 오해하고 있습니다. 대형할인마트는 재벌이고, 편의점은 중소기업이라고 말입니다. 아닙니다. 업계 1위 CU(페밀리마트)서부터 GS, 세븐일레븐까지 모두 재벌입니다.

   

   

게다가 골룸빡과 만난 허창수는 전경련 회장입니다. CU 대변인 골룸빡과 허창수가 만났으니 편의점 업계 1, 2위 만남인가요?

   

여기까지 이해하더라도 대형할인마트 공격이 재래시장을 살린다면 감안할 수 있는 것 아니냐 할 수 있습니다.

즉, 편의점 업계가 이익을 취하더라도 재래시장 살리기 취지로 넘어갈 수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허나, 바로 이것이 편의점 업계, 즉, 쪽발석현의 간교한 계산이었던 것입니다.

   

하면, 대형할인마트가 과연 재래시장을 살리는 길인가요?

   

   

"대형마트 문닫아도 재래시장 안살아나, 정부 용역조사 결과 나와, 인드라가 강조했지? 중소골목상인들 생각은 대형마트가 문제가 아니야 오히려 공존공생을 생각하지 세븐일레븐같은 쪽발마트가 골목구멍가게장악할 때는 아가리묵념하던 넘들이 마트압박하면 협찬나오냐? 영국유학비벌어? 씹새들아?

2012/09/12 17:47 수정 삭제

작성자: 인드라(miavenus)

http://blog.naver.com/miavenus/memo/70146797236

   

"대형마트 문 닫아도 재래시장 안 살아나"

| 기사입력 2012-09-12 16:58

   

<앵커> 지방자치단체들이 대형마트의 휴일 영업을 규제했지만 재래시장 매출이 살아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정부의 용역 조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대형유통업체의 문을 닫아 재래시장을 살려내겠다는 유통산업발전법의 당초 취지를 무색하게 만드는 결과여서 파장이 예상됩니다. 김서연 기자가 보도합니다.

   

<기자> 영등포의 한 재래시장.

   

지난 4월부터 대형유통업체들이 휴일에 문을 닫도록 하는 내용의 유통산업발전법 시행령이 발효됐지만 정작 상인들의 표정은 밝지 않습니다.

   

대형마트가 문을 닫으면 소비자들이 발걸음을 재래시장으로 돌릴 것으로 기대했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터뷰> 영등포전통시장 상인A

   

(휴일에 대형마트 닫으면 장사 잘 되나?) (고개 저으며) 안돼요. (대형마트 닫아도) 전통시장은 안돼."

   

<인터뷰> 영등포전통시장 상인B

   

"대형마트 가는 사람은 대형마트 가고 재래시장 가는 사람은 재래시장 가는 거지. 대형마트 닫았다고 해서 좋아지질 않거든. 나부터도 내일 대형마트 닫는다고 하면 오늘 사거나 그 다음날에 사지."

   

실제로 정부가 최근 AC닐슨에 의뢰해 대형유통사들에 대한 영업 규제가 재래시장에 끼친 영향을 분석한 결과 대형유통업체들이 문을 닫은 날에도 재래시장 매출은 거의 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브릿지> "이렇게 잠시만 재래시장을 방문해 상인들의 목소리를 들어봐도 그동안의 규제가 실효성이 없었다는 점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국회는 대형유통업체의 의무 휴업일수를 월 4회로 늘리는 등 더욱 강도 높은 규제책을 담은 유통산업발전법 개정안을 또한번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지난 5월 이후 현재 국회에 발의된 유통법 개정안은 총 14건으로 이들 법안은 오는 18일과 19일 전체회의와 법안심사소위원회를 거쳐 이르면 이달안에 적용됩니다.

   

재래시장 활성화를 위해 소비자 편의와 중소협력사들의 수익성, 고용 창출 효과를 포기했다는 비난에 직면했던 유통산업발전법.

   

정작 재래시장을 살리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중간 결과가 나오면서 국회에는 "누구를 위한 입법인지 되돌아봐야한다"는 요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한국경제TV 김서연입니다.

   

   

김서연기자 sykim@wowtv.co.kr" 

   

   

대형할인마트 휴일영업 제한해도 재래시장 살아나지 않습니다. 하면, 대형할인마트 휴일에 문닫으면 누가 좀 이익보나요? 편의점입니다. 더 흥미롭고 확실한 것은 대형할인마트 심야영업 금지입니다. 심야에 영업하는 곳은 재래시장도 없고, 동네 마트도 없습니다. 오직 편의점 뿐입니다.

   

대형할인마트 영업 제한은 과연 시민을 위한 것인가요? 편의점을 위한 것인가요?

   

과연 삼성에 협찬받는 등 협찬인생 골룸빡이 무엇을 위해 대형할인마트를 이유없이 월권 행사하며 탄압하고 있는 것일까요? 누구에게 지시를 받아서 말이죠. 골룸빡과 쪽발석현, 보광그룹, 휘닉스 등과는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요?

   

이를 위해 인드라가 몇 가지 실험을 하였습니다. 그중 하나가 인드라 블로그에서 편의점 문제를 지적하면서 슬쩍 외국계 대형할인점을 운운한 것입니다. 인드라가 그런 발언을 해서일까요^^? 갑자기 쪽발브랜드 페밀리마트가 CU로 바뀌고, 골룸빡이 타켓을 국내 대형할인점에서 외국 대형할인점으로 바꾸더군요.

   

인드라가 그런 발언을 한 건, 대형할인마트 공격한 주포를 파악하기 위해서입니다^!^ 골룸빡과 쪽발석현이 먹이를 주자 냉큼 물더군요~!

   

   

   

셋, 상생 유통시장을 만듭시다

   

재래시장을 살린 대안이 있습니까?

   

인드라는 다음과 같이 제안합니다.

   

   

하나, 대형할인마트에서는 카드 사용을 의무화합니다. 현금 매매를 원칙적으로 금지합니다. 본디 대형할인마트는 카드가 대부분입니다. 현금을 사용하는 이들은 외국 관광객과 카드 사용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하면, 대형할인마트를 이용하되, 카드 사용이 싫은 이들에게는 의무적으로 현금카드를 사용하게 합니다. 외국 관광객에 한해서는 비자나 기타 입증할 수 있는 자료를 제시하면 현금 거래를 허용하는 것입니다.

   

카드 사용을 의무화하면 국가 세수가 그만큼 늘어날 것입니다. 대형할인마트 매출이 상당하니 보탬이 클 것입니다.

   

둘, 편의점에서는 이전대로 카드 사용과 현금 사용을 합니다.

   

셋, 재래시장에서는 카드 및 헌금카드를 원칙적으로 금지합니다. 오직 현금 거래만을 허용합니다. 어차피 재래시장 상인은 극소수를 제외하고선 영세상인입니다. 영세상인이라 함은 대부분 면세 대상입니다. 재래시장 살리기란 대의명분이 있는 만큼 국가와 시민사회가 합의한다면 이 정책을 얼마든지 시행가능합니다.

   

카드 사용을 금지시키면 국가 세수가 그만큼 줄어들 것입니다. 허나, 대형할인마트 매출과 비교하면 종합적으로 국가 세수는 유지되거나 오히려 늘어날 것입니다.

   

   

편의점 점주를 위한 방안이 있습니까?

   

하나, 고리사채보다 더 심한 현행 수수료를 1/10로 줄입니다. 15%에서 35%인 현행 수수료를 당대 은행이자보다 약간 높은 수준인 5% 이내에서 통일합니다. 위탁가맹점 수수료는 순수가맹점 수수료 두 배를 넘지 않아야 합니다. 

   

둘, 최대 매출이익 30%에서 10% 줄어든 부분 중 절반은 가격 할인 및 동네 재래시장 및 동네 번영회 기금으로 내놓습니다. 가령 35%에서 5%로 수수료를 줄이면 30% 자금이 있습니다. 이 자금에서 절반이 15%입니다. 15%에서 10%는 편의점 가격 할인을 해서 소비자를 기쁘게 하고, 소비자 물가를 끌어내리는데 일조합니다. 또한, 나머지 5%를 동네 시장 번영회 기금을 마련하여 동네 경제 살리기와 서민 공동체를 만들어 쪽발재벌과 쪽발민주당에 맞서 힘을 기릅니다. 하고, 남은 15%는 편의점 점주에게 이익을 돌립니다. 당연히 자신이 받아야 할 몫을 이제까지 받지 못했으니 받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셋, 국가는 편의점 업계를 세무조사하고, 관련 자료를 모아 적법한 지를 세밀히 따지고, 시민을 소작농처럼 노예처럼 부린 편의점 사주 행위가 국민 행복권 위배 등 위헌 요소가 없는지를 정밀 심사하여 그간 과하게 벌어들인 수익금에 대해 징벌 성격인 세금을 매겨 토하도록 합니다. 또한, 그간 편의점 점주들이 뭉쳐서 수익금 반환소송을 걸어서 반환받아야 합니다. 업계 1,2위 정도는 그룹 해체될 정도로 강하게 정책을 시행해야 합니다. 쪽발석현, 보광그룹 등 관련자 재산을 모두 몰수하고, 관련자 전원에게 법정 최고 징역형으로 일벌백계합니다. 쪽발석현에게 뇌물을 받은 언론인, 정치인이 있다면 모두 사형시켜야 합니다.

   

   

   

쪽발석현 쪽발재벌 편의점을 국민 편의점으로 바꿉시다

CU 쪽발이에게 빼앗긴 골목상권을 시민과 자영업자에게 되돌려주는 독립운동합시다

   

편의점 문제는 시작입니다.

   

인드라는 정치를 하지 않겠으며,

책을 더 이상 쓰지 않으며,

언론에 기고하지도 인터뷰를 하지도 않을 것이며,

종교단체를 만들지도 않을 것입니다.

국유본론을 소명으로 여기고

지금처럼 살다

행복하게 가겠습니다

매일매일 행복하겠습니다

마.자.세.

   

   

한반도 평화와 통일, 경제 발전과 사회 복지를 위하여

친미친중 반일반북 쪽발정은 척살로 조국통일 쟁취하자

쪽발민주당 해체 쪽발석현 아웃

쪽발재벌 타도 골룸빡 처단 

쪽발이에게 죽음을 쪽발왕에게 천벌을

쪽발타도해방투쟁 만세

   

   

   

   

 * 편의점으로 네이버에서 검색하면 블로그 카테고리가 나오지 않습니다. 쪽발언론이 갑자기 롯데를 부각시킨 것은 인드라가 편의점을 이슈화하고 편의점 뉴스가 등장하니 쪽발석현이 쪽발언론을 총동원하여 물타기한 것이다,라고 추정합니다.

   

대형할인마트 공격을 노비네파 신동빈이 지시했겠습니까^^? 그럼 자뻑인데요~! 허나, 이마트나 홈플러스 공격이라면 가능하죠. 해서, 쪽발석현이 주도했다 이렇게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범삼성계열이다, 여기나요? 자세한 내막을 보면, 현대중공업/현대차와 현대그룹간 싸움 같은 것이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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